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04화 (53/1,000)

00104  16. 임진왜란 개전  =========================================================================

병력을 내려서 좌초시킨 배 바깥에 말뚝을 박고 임시로 석축을 급히 쌓았다. 나머지 배 두 척을 반대편 연도 선착장으로 보내고, 제1전선이 좌초된 곳에 임시 선소를 만들어 배를 수리했다. 기상이 악화되면 큰 파도가 칠 수 있는 동쪽 해변이라 방파제 겸 선소를 쌓는 것이 가장 급했다.

며칠 후에 고산국에서 티크목 판재를 가져왔고, 조선 기술자들도 여러 명이 와서 배를 제대로 고쳤다. 암초에 부딪쳤던 제3선은 쉽게 수리가 끝났으나 제1전선은 물에 젖은 판재를 모두 바꾸느라 수리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비싸고 단단한 티크목이 해양생물에 의해 깨질 줄은 이민호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현대 대한해협에서 가끔 여객선이나 어선이 고래와 부딪치는 사건이 발생할 때 철선도 여지없이 깨져 침수되거나 기관고장을 일으킨 사례가 꽤 있었다.

“고래를 죽입시다. 고래는 나의 원수.”

“예? 주인님은 가끔 이상한 말씀을 하세요.”

“응? 아니야. 어때? 바닷가에서 손잡고 걸으니 기분 좋지?”

“네에!”

수하들에게 일을 시켜놓고 이민호는 민희, 민영과 데이트를 즐겼다. 아직 물이 차가워서 바닷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지는 못했다.

다른 여진족들과 달리 시전부락이 두만강 하구에 있어서 둘이 바다를 모르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멀리서 바다를 바라보곤 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백사장을 걸어본다고 했다. 사실 이와미 은광을 치러 갈 때도 백사장에 내렸었는데 둘에게는 오늘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봐. 모래에 잠긴 발을 파도가 쓸고 지나가면 기분이 참 묘해.”

“꺄아! 간지러워! 정말이네요.”

민희와 민영이 여진족 출신이라 발에 대한 터부가 별로 없었다. 명나라에서 여자의 발은 거의 여성 성기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고 조선에서는 천민 여자나 맨발로 다닌다는 인식이 있었다. 민희의 발은 작고 예뻤고, 민영의 발은 체구만큼 큼직했으나 이 또한 건강미가 넘쳤다.

“도련님! 일 시켜놓고 도련님만 그렇게 노시면 수하들 사기 떨어집니다. 대장이 솔선수범하셔야죠!”

티크목 판재를 어깨에 지고 나르던 계복이 볼멘소리를 했다. 데이트를 방해 받은 이민호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나는 주변 정찰하는 거야. 꼬우면 니가 대장해!”

“그래요! 꼽습니다. 그럼 제가 대장 할까요?”

“그래. 대장 해! 나는 좌수영에 가봐야겠다. 연도에서 직할군 지휘 잘하도록 해.”

공도 정책 때문에 무인도나 다름없는 연도에서, 그것도 선착장 반대쪽인 이곳에서 일만 하려니 무척 지겨웠다. 이민호는 일을 계복에게 다 떠맡기고 민희, 민영은 물론 시위병들도 함께 연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앗! 도련님! 치사합니다.”

“너희들 연도에서 벗어나면 절대 안 된다? 너희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외국인, 그것도 외국군이니까 체류가 허가된 이곳에만 있어야 해.”

계복에게 배 수리를 맡겨놓고 이민호는 방답에서 외륜선을 타고 전라좌수영으로 향했다. 얼마 전에 뽑은 시위 호위병 열 명도 함께 움직였다.

어찌 된 셈인지 민희와 민영은 근접 경호를 맡은 시위병 열 명 모두를 여자로만 뽑았다. 전쟁터뿐만 아니라 궁궐 안에서도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단다. 외곽 경호를 맡은 일반 호위병은 정원 100명 중에서 현재 40명을 채웠는데 대부분이 남자들이었다.

시위 열 명 중에서 여진족이 5명, 조선인과 일본인 2명씩, 명나라 여자 한 명이었다. 다들 조선말로 대화가 통하니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통역을 시켜도 될 것 같았다. 시위들은 기본적인 체격과 체력이 좋았고, 무술과 사격술은 요즘도 계속 배우고 있었다. 민희와 민영을 빼곤 남장을 하고 다녔다.

“우와! 사람 많다.”

수영 아래의 여러 포구에 경상도를 떠나온 피난선들이 가득하고, 성하마을은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 전라좌수영에서는 동문 밖 해운대 쪽과 서문 밖에 천막촌을 세워 임시로 피난민들을 수용했다. 해운대는 현대의 오동도인데 섬까지 연결하는 방파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섬에 정자가 있어서 술 마시며 놀기 좋은 곳이었다.

해동상단에서는 피난민들의 의식주를 도와주는 구호활동을 시작했다. 이민호가 미리 알려준 대로 식수와 화장실 문제에 특히 신경을 써서 전염병 발생을 막았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전라좌수영을 대리해서 방답과 흥양의 둔전에서 농사지을 사람들을 가구 단위로 보내 임시로 정착시키고 있었다.

해동상단 직원들이 은근히 고산국으로 이민 가라고 피난민들에게 권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다들 전란이 금방 끝나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해동상단 대방에게 보낼 편지를 써서 분점주에게 주었다. 4월 말의 탄금대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해동상단도 완전히 전시 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원 사창에서 발행하는 신문이 일간으로 바뀌면서 매일 전쟁 소식이 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기밀을 유출할 수 없어 신문에서 아군이나 왜군의 움직임에 대한 보도는 자제하고 피난지에서 생존에 유용한 상식 위주로 지면이 채워졌다. 고구마와 옥수수 종자가 전국에 퍼지고 산기슭마다 피난할 것에 대비해 미리 화전이 일궈졌다.

“경상감사 김 상국(相國) 수가 16일에 도내의 모든 군사를 징발하는 영을 내렸습니다. 대구에 경상도 병력 수만 명이 집결했으나 경장이 내려오지 않고 왜군이 시시각각 접근해 오는 바람에 모두 흩어졌다고 합니다.”

“대구에 수만 명이나 모여요?”

“예, 도련님. 경상도 순변사 이일이 지휘하기로 한 병력입니다. 지금 경상좌도 13읍 병력은 울산 병영성에, 우도 14읍 병력은 창원 병영성에 집결했을 겁니다.”

경상도 육군 정병은 1만 이하에 불과한데 그것도 대부분 경군(京軍)이었다. 전시에 경상도를 지키는 병력이 아니라 한성으로 집결해야 하는 중앙군 병력이라는 뜻이다. 경상도의 진짜 육군 병력은 따로 있었다. 이들은 평소에 한성에 상번하며 훈련을 받던 육군 정병이 아니기 때문에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 소리를 들으면서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이 진짜 주력 경상도군이었다.

이 시대에는 수군과 육군 정병, 봉수군 등을 제하고 각 고을의 장정들을 4운(運)으로 편제해서 각각 고을 수령, 병마절도사, 순변사, 방어사 등에게 나눠 보내는 식으로 육군 병력을 운용했다. 평시와 달리 전시에는 이런 식으로 불어난 병력을 운영하게 되어 있는 것이 남도 제승방략이었다.

참고로 류성룡이 지은 <서애집 9권> 명나라 총병 유정에게 보내는 글에서, ‘대개 전라도의 여러 가지 군정(軍丁)을 호수로 계산하면 83,685명이고, 충청도에 40,530명이고, 경상도에 94,056명인데 이것은 평상시 정원입니다.’라고 했다. 실록 기사의 경상도 수군 2만에 수군 보인 6만을 합한 8만을 빼면, 기병과 보병에 그 보인까지 다 합해서 육군은 1만 4천에 불과했다. 그러니 보인을 뺀 육군은 5천이 절대 안 되며 대부분 경군 소속이었다. 결국 임진왜란 때 경상도 방어에 실제 동원된 육군은 위에 언급된 평상시 정원 9만 4천 명 이외의 병력이었다.

선조실록 26년 9월 3일자 기사에 ‘평소 영남에 소속된 군병이 수군 2만여 명을 제외하고도 잡색(雜色) 군사가 4만 명이나 됩니다. 난리가 난 이후 본도의 감사를 통하여 들으니, 조량병(助糧兵), 운량병(運糧兵), 기병, 보병으로 초발(抄發)되어 방어에 임하고 있는 자가 22만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다. 잡색 군사란 여러 가지 잡다한 병종을 뜻하는데 관아나 성곽을 지키는 병력 말고도 역참에서 일하는 군사, 봉수군이 수적으로는 더 많았다.

임진년에 조선 침공에 동원된 왜군 병력이 17만 정도라고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왜군보다 경상도 병력이 더 많아진다. 그러나 실제 전투 병력만 따지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왜군에서도 잡병은 병력에 포함되겠지만 기타 하인이나 수부들은 명백한 민간인이므로 병력에서 제외됐다. 이들까지 다 합하면 전쟁에 동원돼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이  최소 30만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급을 상인들에게 맡겨버린 당시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문화 덕택에 실제 병력을 덜 동원할 수 있었고, 상인과 노예까지 합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어쨌든 대구에 분명히 경상도 병력 수만 명, 최소 2만 명이 모였다. 그러나 한성에서 내려올 장수보다 왜군의 진격이 빨라서 전투도 못 해보고 흩어지고 말았다.

인구가 줄어든 병자호란 당시 쌍령전투에서 경상좌병사와 경상우병사 휘하에 있던 병력이 4만이었으나 이들은 선봉에 불과했다. 경상감사가 따로 본대를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 등에서 교차 확인된 숫자이므로 의심할 필요는 없다. 조선은 문치주의에 찌질하기 때문에 기록만큼 병력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제가 미리 경고했는데 말입니다.”

“조정에서도 급히 경장을 뽑아서 내려 보냈겠지만 왜군의 진격이 더 빨랐습니다. 한성에서 말을 타고 밤새도록 달리더라도 대구는 부산에서 너무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경상도의 중심에 위치한 대구를 놔두고 안동이나 상주에 병력을 집결시킬 수는 없었겠지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허! 참.”

이민호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역시나 미리 가르쳐줘도 소용이 없었고, 어떻게 보면 방법이 없기도 했다. 한성에서 파견하는 경장(京將)을 대구에 미리 보냈거나 경상도 방어사 또는 조방장에게 대구에 집결한 병력 지휘를 시켰어야 했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왜군의 침공 경로가 이민호를 통해 미리 알려지는 바람에 왜군에게 붙잡히거나 학살당한 경상도 백성이 극히 적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용궁현감 우복룡이 용궁현과 예천군에서 징발한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울산 좌병영으로 가는 도중 하양군의 기병을 공격한 일로 인해 말이 많습니다.”

“적을 앞두고 아군끼리 싸우다니요!”

“누구는 하양군 기병이 반란을 일으킨 도적이라 하고, 누구는 우복룡이 점심 먹는데 하양군 기병들이 말 타고 지나가면서 먼지를 피워서 화를 냈다고 합니다. 경상감영에서도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백께서 며칠째 도련님을 찾고 계십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우복룡이 잘못했다 하고, 이원익은 우복룡이 잘했다고 칭찬했다. 류성룡과 이원익은 같은 동인, 그 중에서도 남인이었고 친분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의견이 갈렸다.

“그래요? 어쨌든 분점주는 피난민들에게 잘 이야기해서 고산국으로 보내는 일에 집중해주시오. 물론 지금은 쉽지 않겠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예. 도련님.”

이민호가 상단 사무실에서 나왔다. 소포는 여전히 피난민들로 북적거렸고 수없이 많은 배들이 들락거렸다.

경상도 각 지역 사창에 있던 양곡을 전라도로 옮기는 일은 전쟁 전에 이미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서 외륜선은 물론 어선들까지 총동원돼 섬이나 산에 고립된 경상도 피난민들을 배에 태워 좌수영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민호가 수영에 들어가 보니 군사들이 평소보다 두 배 이상으로 소집돼 성 안이 사람들로 바글바글 미어 터졌다. 교대해야 할 잉번(仍番)과 분번(奔番)이 모두 모이고 전시에 추가로 입대하는 병력인 분부군까지 700명이나 긴급 소집된 탓이었다. 다른 진포들도 병력을 최대한 소집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민호는 전라좌수영의 동헌에 출두했다. 바삐 일하는 아전, 진무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작은 문을 통해 내헌으로 들어갔다. 고을 수령 또는 장수가 사는 집이 내헌이었다.

“통지, 어서 오게. 자네 그 동안 어디 갔었나?”

“저도 좀 바빴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도병방, 병방진무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보낼 공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한성이나 전라우수영, 전라병영으로 보낼 공문은 파발이 아닌 조운 또는 상업에 이용되는 외륜선을 통해 보냈다. 전쟁이 나면서 중형 외륜선 대부분이 전라좌수군에 편입됐으나 소형 외륜선들은 여전히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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