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01화 (50/1,000)

00101  16. 임진왜란 개전  =========================================================================

다음날 15일에 벌어진 동래성 전투에서 동래성을 지키던 조선군도 왜군의 압도적인 군세를 막지 못했다. 침략군의 선봉을 맡은 1군 고니시군은 모리 가문의 문서에 따르면 18100명, 프루이스의 일본사에는 16700명으로 기록됐다.

3천 명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에 울산 병영성에서 달려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동래 바닷가에 위치한 경상좌수영성을 버리고 온 경상좌수사 박홍이 군사들을 이끌고 성에 들어왔다. 그러나 왜군의 군세에 놀란 병사와 수사는 성 밖 소산역에 진을 치고 동래성을 후원하겠다는 구실로 성을 빠져 나간 다음 퇴각해버렸다.

동래성에서는 군사들과 주민들이 동래부사 송상현을 주장으로 조방장 홍윤관, 중위장 겸 양산군수 조영규, 좌위장 겸 울산군수 이언성의 지휘 아래 끝까지 싸웠다. 여기서 조방장, 중위장, 좌위장은 동래성이 아닌 경상좌병영의 직책이었다.

경상좌수영 소속의 일개 수군첨사진에 불과한 부산진과 달리 동래성은 경상좌병사와 경상좌수사, 경상좌조방장, 기타 다른 지역 수령들까지 병력을 이끌고 들어가 지키기로 된 성곽, 즉 주진이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원래 수성장에 머물러야 하나 경상좌병사 이각이 성을 나감으로써 임시로 동래성의 주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방장 홍윤관이나 다른 수령들이 무관 직책으로만 따지면 동래부사보다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양산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으로 들어간 사이 밀양부사 박진이 양산군의 임시 장수인 양산가장으로서 밀양부 군사들을 이끌고 양산에 주둔하며 황산잔도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동래성의 방어 작전과 병력 증원 계획은 전쟁 전에 세밀하게 잘 짠 셈인데, 병사와 수사가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고 나니 병력 부족으로 동래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왜군에 의해 해자로 끌려나와 참수 당한 다음 해자에 내던져져 파묻혔다. 끝까지 저항하는 성은 주민들까지 남김없이 처형한다는 일본식 전쟁문화가 조선에도 적용된 셈이었다.

이민호가 이끄는 천자 전선 세 척은 멀리서 동래성이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동쪽으로 항해했다. 계복이 안타까워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이민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도련님! 지금이라도 도와주면 안 됩니까?”

“왜선이 부산포에 천 척, 대마도에 천 척이 있다. 동래성을 공격한 왜군이 2만이며 매일 같이 만 단위로 증강되고 있다. 진짜 싸우고 싶어?”

“아닙니다. 에휴!”

“나중에 수군하고 같이 싸우면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을 하러 가니까 불만이 있더라도 좀 참아.”

배는 이민호가 가늠하기로 대충 시속 20km 정도로 달리고 있었다. 중형 외륜선보다 3할 정도 빠르고 판옥선의 두 배 이상 속도였다.

터보 샤프트 엔진을 두 개나 달고 난 뒤에도 배에 공간이 엄청나게 많이 남았다. 덕택에 연료통을 크게 만들고 식수통도 여유 있게 실을 수 있었다. 아궁이가 없어지고 엔진의 폐열을 이용해 요리를 하게 된 것도 큰 변화였다.

선장실에서 이민호는 계복, 고민희, 고민영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 식사는 이 시대 기준으로 아주 좋은 편이었고 특히 배를 타고 있을 때는 매 끼니 과일을 반드시 먹어야 했다.

“아으~ 시어. 너무 시다. 혼자서 하나 다 먹는 것은 너무한 것 같다.”

오늘 저녁 과일은 하필 석류였다. 이민호는 빨간 석류알을 씹을 때마다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결국 다 먹었다. 무조건 한 끼에 과일 하나씩 먹으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민호였기 때문이다.

민희와 민영은 처음 먹어보는 새콤달콤한 과일이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석류는 조선에서도 나지만 남부지방에서만 자라기에 수원에서 주로 살았던 둘은 석류를 먹을 기회가 없었다.

“어째서 이 중요한 시기에 왜놈들의 광산을 무너뜨리러 가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어련히 알아서 계획을 세우셨겠지요. 저는 도련님만 믿습니다.”

“작은 전투가 아닌 큰 전쟁에서는 적의 전쟁수행 능력을 줄이는 것이 중요해. 적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보급선을 끊는 것과 비슷한 거야.”

“하긴 요즘 전쟁은 군사가 아닌 돈으로 하는 거지요. 위대한 영웅이 나타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나이로서 안타깝습니다.”

“정말 안타깝다, 이놈아!”

요즘 전쟁은 낭만이 없어졌다고 투덜대는 계복의 뒤통수를 이민호가 후려쳤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낭만을 찾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할 자금이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였다.

전선 세 척은 밤새도록 달려서 오전에 일본 혼슈의 북서쪽 해안에 도착했다. 나가사키에서 겐타로가 추천해준 왜인 어부의 안내에 따라 북동쪽으로 계속 항해해서 결국 이와미 은광이 있는 오에타카야마, 대강고산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그리고 정오에 태양이 남중할 때를 기다려 경도를 측정했다. 밤에는 위도를 측정할 예정이었다.

위도는 북극성과 수평선이 이루는 각도로, 경도는 태양이 남중할 때의 시간 차이로 파악할 수 있었다. 런던 그리니치 자오선이 경도 0, 즉 세계의 본초자오선으로 결정되는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다. 이민호는 그리니치와 한성, 수원, 전라좌수영과 고산국 궁궐을 두고 고민하다가 그리니치를 본초자오선으로 결정했다. 현대 서울의 위도와 경도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편하게 가기로 한 것이다.

한성의 경도는 126도 58분 40초로 기억했다. 15도에 한 시간, 경도 15분에 1분이니 어느 위치에서 태양이 남중할 때의 시간 차이를 알면 경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측량을 계속해야 나중에 이용할 수 있기에 마카오에서 항해학을 배운 항해사들에게 계속 경도 측량과 지도 작성을 시켰다.

아직 정확한 지도가 없으니 조금 답답하긴 했으나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이면 24시간 시계로 경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중에 편해지려면 당분간 고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자 전선 세 척은 늦은 밤에 해안으로 접근했다.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된 은을 반출하는 니마(人万) 포구가 아닌 그 남쪽 마지(馬路)라는 지역의 백사장이 상륙 지점이었다. 겐타로가 넘겨준 지도에는 이곳 백사장에서 남동쪽으로 딱 10리 위치에 이와미 은광이 표시돼 있었다.

“작전대로 3선은 나머지 배들을 지키고 1, 2선 해병은 상륙!”

계복이 지시하자 전선 두 척에서 일제히 단정을 내렸다. 이민호도 단정에 탄 다음 노를 저어 백사장에 상륙했다. 직할군 해병 200명이 소총을 앞으로 겨눈 채 조심스레 산길로 올라갔다. 비포장이지만 도로는 그런대로 잘 닦여 있었다.

은광이 가까워지면서 계복이 10여 명을 데리고 척후로 나섰다. 사실상 적의 기습에 대비한 첨병 역할이었다.

그러나 관백 직속 다이칸(代官)이 은광을 관리하게 된 다음부터 적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게 됐는지 매복 같은 것은 없었다. 검문소 같은 곳에서 왜군 경비병 두 명만 엎어져 있었다. 밤새 꾸벅꾸벅 졸던 경비병들을 계복이 해치우고 지나간 것이었다.

앞서 나갔던 계복이 이민호에게 돌아왔다. 보름이 갓 지나서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도련님. 은광을 발견했고 그 서쪽 계곡 쪽에 작은 일본식 성곽이 있습니다. 지도에 나온 야마부키 성(山吹城)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북동쪽 은광마을 진입로 쪽이 아니라 그 서쪽 계곡에 성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은광과의 거리는 겨우 2, 3마장에 불과했으니 방어용 성곽이 아닌 병력 주둔지에 불과한 것 같았다. 겐타로가 보내준 성의 그림도 정문을 제외하고는 단순한 사각형 모양이었다.

숲 그림자를 밟으며 성에 접근하니 위에 야구라가 달린 오테문 형식의 성문이 활짝 열려있고 성문 좌우에 창을 든 경비병이 한 명씩 서 있었다. 성문 양 옆에 화톳불을 밝히고 있어 경비병들의 표정까지 환히 드러났다. 문 위쪽 구조물인 야구라에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경비병이 두 명이니까 둘이 동시에 쏴.”

“예! 주인님!”

이민호가 지시하자 민희와 민영이 군기가 바짝 들어 활을 준비했다. 이민호가 보기에 여진족이 승마술은 기가 막히지만 활솜씨가 마음에 안 든 탓에 민희와 민영에게 연습 좀 많이 하라고 구박한 적이 있었다.

- 핏! 피빗!

조선에서는 신궁이라는 소리는 절대 못 듣겠지만 민희와 민영은 활을 잘 쏘는 편이었다. 경비병 두 명이 목에 박힌 화살을 움켜쥐면서 쓰러졌다.

그 직후 계복이 수하 열 명을 데리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경비병 둘은 이미 죽어 있었고, 계복이 문 안으로 들어가 적의 동정을 살폈다. 잠시 후 계복이 수신호를 보내 이민호와 수하들이 정문을 통과했다.

제1문을 통과한 다음 제2문의 위치가 진행 방향 직각으로 위치해 방어에 유리한 마스가타 고구치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제2문은 야구라가 달려있지 않고, 경비병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넌 뭐야?”

“아! 지나가는 길에 그냥 들렀어.”

“적이다!”

- 타탕!

제2문에 들어서던 계복이 적에게 들켜버렸다. 안쪽에서 큰소리가 나고, 계복과 첨병들이 소총을 문 안쪽으로 겨누더니 연속 발사했다. 그러나 제2문 안쪽에서 몰려나오는 왜군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민호가 얼른 지시했다.

“각 대정들 지휘 하에 일 대씩 진입해!”

직할군 해병들이 25명 단위로 야마부키 성의 제2문 안쪽으로 차례로 들어갔다. 성문과 제2문에 들어설 때까지만 방어에 신경 쓴 모양인지 내부 구조는 아주 단순했다.

그리고 직접 들어와 보니 왜군 병력도 얼마 없었다. 대략 40명 정도가 쓰러진 다음 더 이상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마지막에 고함을 지르며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벌집이 된 사무라이가 이곳 은광의 최고 관리자 다이칸(代官)이었던 것 같았다. 아직 다이칸쇼(代官所)가 야마부키 성과 따로 설치되지 않은 시대였다.

겐타로의 보고로는 이곳 야마부키 성에 100명쯤 있다고 했는데 밤에는 다들 퇴근하고 절반 이하만 남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은광 입구 마을에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안 잡아먹을 테니 그냥 나가!”

그러나 겁에 질린 하인과 하녀들은 발이 얼어붙어 있었다. 야마부키 성에서 일하는 하인, 하녀들을 억지로 밖으로 내몰고 계복을 중심으로 수색작전에 돌입했다. 성이 워낙 좁아서 수색 결과가 곧 드러났다.

“도련님! 지하 창고에 은 궤짝이 잔뜩 있습니다.”

“얼마나 되는데?”

“천관 정도 됩니다.”

한 관이 3.75kg이니 100냥이었다. 천관은 10만 냥이다. 이와미 은광이 최대의 산출량을 보인 것이 17세기 초반이었고, 그때 막부에 진상한 양이 1년에 4~5천관이었다. 매년 40~50만 냥이라는 뜻이고 15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와미 은광 하나만으로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 운운한 것은 과장이 틀림없었다.

“얼마 안 되네. 우리가 200명이니까 다섯 관씩 나눠서 들고 가자.”

“도련님! 은광을 무너뜨리려고 여기 온 거잖아요?”

“아차!”

“도련님은 금은보화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시네요. 다들 그렇겠지만요. 그리고 도로 중간까지는 수레에 싣고 가는 게 낫겠습니다.”

“계복이 너는 이런 엄청난 보화를 눈앞에 두고도 참 침착하구나.”

“제 것이 아니거든요.”

은이 담긴 궤짝들을 수레 몇 대에 나눠싣고 직할군 해병들이 밀고 당겼다. 그런 식으로 은광 입구 마을에 도착했다. 총소리를 듣고 마을에서 뛰쳐나온 왜군들이 직할군 해병들을 발견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길에서 가까워서 좋군.”

그러나 길옆에 은광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은광 갱도 입구를 향해 도로가 난 형식이었다. 뜻밖에 이와미 은광에서는 밤에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산출량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도요토미가 돈이 궁한지 은광은 2교대 근무로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야마부키 성에 경비병들이 어쩐지 적다 싶더니 절반은 이곳에 있었다. 은광 경비병들과 전투를 하는 사이 마을에서 도망갔던 경비병들이 다시 몰려왔다. 경비병들이 칼과 창으로 공격해왔으나 해병들의 총이 항상 더 빨랐다. 전설의 검법을 익힌 무사는 이곳에 없는 모양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병들은 다 죽거나 도망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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