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15.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사람들 =========================================================================
“그리고 부역에 나와서 일하는 것도 힘든데 양식까지 지고 오라고 하면 섭섭할 것 같습니다.”
“원래 다들 그렇게 해오던 일일세.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야 한다면 그 전에 세금을 더 걷어야 하지 않겠나? 그건 백성들도 바라지 않을 걸세.”
그러나 김수는 일하는 백성과 세금을 낼 백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구별하지 않았다. 김수의 논리에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양반, 지주들도 원래 부역에 나와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니 이민호가 이 자리에서 따지기는 어려웠다.
국가가 제공하는 국방 서비스로 인한 혜택은 서민이 아닌 부자가 더 많이 받는 것으로 계산되어야 하므로 국방을 위한 부역에 소모되는 추가 비용은 부자와 지주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부자나 지주, 양반들은 부역에서 다 빠져 나가고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었고, 부역을 하기 위해 식량까지 짊어지고 와야 했다. 오래된 관행의 모순을 당장 이 자리에서 지적한다면 말싸움만 길어질 것 같아 이민호는 언쟁을 포기했다.
“예. 그래서 다들 든든히 먹고 힘내라고 양식을 좀 가져왔습니다.”
이민호가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먹이라고 감영에 바칠 양곡과 간장, 건어물, 고기 등의 목록을 적은 종이를 김수에게 건넸다. 몇 십만 명을 여섯 달 동안 먹일 수 있는 양이라 김수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구 짓도 통 크게 하면 가끔 멋져 보일 때가 있는데, 바로 이때였다. 사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전쟁 초반부터 왜군의 점령지가 될 김해의 쌀을 이 기회에 처분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걸 다 주겠다고? 정말 고맙네. 자네 손이 큰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양이 엄청나게 많구먼. 축성 공사를 하는 곳마다 넉넉히 나눠줄 수 있을 것 같군 그래. 하지만 고기를 너무 많이 먹이면 탈이 나지 않을까?”
“매 끼니마다 나눠서 꾸준히 먹여야 합니다. 어쨌든 전쟁이 나면 군인이 되어 싸울 사람들은 저들 백성이며, 군량을 날라줄 사람들도 바로 저들입니다. 전투에서 군대의 사기가 중요하듯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백성들의 사기를 올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일세. 내가 자네에게 한 수 배우는구먼.”
“순사 영감께서는 잘하고 계십니다. 다만 백성들의 어려움을 조금 더 돌봐주십시오.”
“내가 할 일을 알려줘서 고맙네, 이 첨지!”
이민호가 이 기회에 마음껏 잘난 척을 했고, 감사 김수는 꾹 참고 이민호를 칭찬해줬다. 이민호가 낸 물자가 만만치 않은 양이라 나이 든 선비가 많이 봐준 셈이었다.
이때부터 공사현장마다 소가 끄는 수레가 도착해 쌀과 각종 반찬, 고기를 실어 날랐다. 다음에 부역에 나올 때는 양식을 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백성들이 더 기뻐했다. 거리가 멀면 양식 값보다 운반비용이 더 많이 드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쌀 대신 면포를 가져와도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서는 쌀값이 폭등하니 이래저래 손해만 보던 사람들이 한 시름 놓았다.
백성들이 먹을 식량 외에 군자금이라 해서 쌀과 면포를 감영과 병영, 두 수영에 실어 날랐다. 김수는 이민호에게 받은 것과 사용처를 빠짐없이 기록해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이런 깐깐한 선비에게 뇌물을 잘못 줬다가는 역효과가 날지 몰라 이민호는 김수에게 홍삼 한 뿌리만 건넸다. 마침 집안에 환자가 있었는지 김수가 그것만은 잠자코 받아들였다.
김수가 장계를 올리고 나서 이민호는 은근히 벼슬이 오르길 기다렸다. 품계가 오르든 내리든 상관없지만 어떻게든 이 첨지에서 어서 벗어나길 원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도 워낙 바빠 이민호 개인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그래도 경상도 백성들이 미운 감사 대신 이 첨지의 공덕을 칭찬해줘서 이민호가 위안을 얻었다.
이민호는 성을 개축하는 공사 현장마다 사람들을 보내 일하던 도공들을 빼내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가마마다 찾아다니며 도공들을 설득했다. 땅과 집을 주고 군역과 부역, 공납이 없다는 말에 도공들이 솔깃해서,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는 가족들과 다시 상의해 마음을 돌리곤 했다.
그 동안 소금과 감자, 사창 등으로 이민호가 백성들을 위해주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이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실력이 형편없어 겨우 막사발이나 일본에 팔 투박한 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기와집을 사주는 등 과도하게 은혜를 베푼 사실을 알기에 도공들은 이민호를 믿고 따랐다.
이민호가 노력한 효과가 슬슬 드러나 도공들이 고산국으로 꽤 많이 이주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산국에 입국한 도공들은 미카와 최 선생이 나서서 잘 안착시켰고,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꾸준히 보살펴주었다.
유럽에서 관심을 가진 동양의 사치품이 비단과 도자기, 차인데 중국과의 무역 적자가 지속되면서 조만간 유럽에서도 자체 개발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민호는 그 전에 최대한 뽑아먹을 작정이었다.
이후로도 도공들의 이주는 꾸준히 계속됐다. 관요 소속이 아닌 민요를 운영하던 도공들이라 거주하던 고을 관아에 소유한 농지가 없음을 증명하고 쉽게 고산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이때는 조선이 인구에 여유가 있던 시기, 혹은 인구가 많아 인구압이 발생한 시기라 국외로 유출되는 인구에 대한 통제가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사실 감자와 고구마가 재배된 이후로 조선의 인구 부양 능력은 이전보다 몇 배로 늘어난 상태였으나 양반, 관료들은 아직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역사상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중국의 인구가 폭증했는데 이것은 정치 안정이나 기타 등등 요인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고구마가 유입된 다음 점차 전국에 퍼져 널리 재배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도 있었다.
도공과 달리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철장이나 대장장이들에 대한 통제가 대폭 강화됐다. 그래도 수영 등 관영 야장에 소속된 대장장이가 아니라면 쉽게 고산국으로 갈 수 있었다. 이민호도 전쟁을 앞둔 조선의 사정을 봐줘야 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대장장이들을 대거 이주시키지 못했다.
고산국에 도공들 숫자가 많아지자 가마를 더 많이 만들 필요가 생겼다. 호위병들을 딸려 도공들을 각지에 보내 고령토가 나오는 곳을 찾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령토 광산을 몇 군데 발견했고, 가마와 마을이 만들어졌다.
이민호는 장기적으로 경덕진의 호리병박가마를 모방해 대형의 이중 가마를 만들 계획으로 도공들과 상의해 일단 작은 가마를 만들었다. 그 사이 다른 도공들이 도자기 생산에 들어갔고, 주변 작은 노천탄광에서 석탄을 쉽게 캘 수 있어 이것을 땔감으로 썼다. 그 동안 번 게 있고 앞으로 더 많이 벌 생각에 이민호는 도자기 사업에 자금과 인력을 무제한으로 투입했다.
야장과 대장장이들은 주로 궁궐 인근의 대장간에 배치돼 생산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들이 생산하는 철의 품질에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역청탄을 발견하기 전까지 코크스를 원료로 하는 용광로를 만들기 힘들었고, 철의 품질을 더 이상 끌어올리기 어려웠다. 산악지대를 뒤져서 양질의 탄광을 개발해야 하는데 이민호는 원주민들을 자극하기 싫어서 당장 탄광개발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 늦추기도 어려워 조만간 탐사와 개발을 할 예정이었다.
일반 도공들 중에서는 이주 희망자만 뽑아 보낸데 반해 옥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들에 한해서는 약간 무리를 해서 남김없이 고산국으로 이주시켰다. 가족을 조선에 남겨두려는 도공들이 있어 처음에는 한 달에 열흘씩 휴가를 주는 식으로 일을 시켰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도공들의 모든 가족이 고산국으로 넘어왔다. 조선에서 전쟁 준비로 바빠 다들 부역과 공납으로 심하게 시달린 탓이었다.
도공 가족들의 이주 결정에는 고산국에 조선과 달리 양반이나 관리, 아전들의 횡포가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만약 고산국에 특권층이 있다면, 바로 이들 기술자와 장인들이었고 그 다음이 군인이었다. 장인과 군인들도 기본적으로 농지를 분배받았기에 소작을 주고 일 년 내내 놀더라도 농민들의 수입 절반이 생겼다.
어느 날 경상우수영의 공방에서 밀려난 칠기장들이 고산국으로 이민을 왔다. 생각지도 못한 장인들의 집단 이민과 알현 신청에 놀란 이민호가 직접 이들을 어전으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칠장과 나전장, 소목장으로 각기 분업해서 작품을 만드는 방식이라서 관이나 부호 같은 후원자가 없으면 제작 자체가 어려워 결국 이민호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칠기장들이 견본으로 내놓은 작품이 평소에 보던 것과 조금 달라서 이민호가 물었다.
“훌륭하오. 아주 멋지긴 한데, 원래 박패만 쓰는 것이 조선의 나전칠기가 아니오?”
고려와 조선에서는 전복의 안쪽 껍질 진주층을 이용했고 명나라와 일본에서는 야광패를 두껍게 썬 후패를 주로 사용했다. 조선 칠기장들은 수백 년 동안 박패 한 가지만 사용해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의 칠기가 유럽에 주로 판매됐으니 국제적 기준으로 후패를 사용한 칠기도 나쁘지 않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저희들은 필요할 때마다 과감히 후패나 다른 재료를 써가면서 새로운 칠기를 만들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경박한 것을 만든다고 미움을 받아 수영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해하오.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재료를 써서 다양하게 만들어보시오. 장인들이 따로 농사일을 할 필요 없도록 마을 하나에서 나오는 세곡을 칠기장들이 받아서 쓰도록 해주겠소. 박패와 후패, 옻 같은 재료는 따로 구해주겠소.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그저 좋은 작품만 만들어주면 앞으로도 후히 대접하겠소.”
“감사합니다, 첨지 영감!”
조선에서 온 이민자들은 이민호를 함부로 왕이라 부르기를 주저했다. 그들 입장에서 고산국은 조선 변방의 개척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조선과의 관계가 옅어지고 일가친척들과도 관계가 멀어지면서 고산국을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바쁜 와중에도 이민호는 시간을 내어 의용공주 주상아와 함께 보냈다. 이민호는 공주와 함께 서양식으로 지은 별궁 2층 테라스에 나와서 석양을 배경으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
조선에 나가 있는 동안만 아니라면 이민호가 거의 매일 같이 공주와 저녁을 보냈기에, 공주는 생각지 못했던 과분한 대우를 받아 무척 기뻐했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다른 이들의 축복도 없이 마치 도둑 결혼하듯이 작은 나라에 왔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이민호가 훨씬 잘해주어 요즘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신혼 재미를 만끽하는 공주와 달리 시녀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며칠째 밥 못 얻어먹은 시어미 인상을 풀지 않아 참다못한 이민호가 물었다.
“다들 인상 펴고 살아. 불만 있으면 인상 찡그리며 돌아다니지 말고 나한테 직접 이야기 해.”
“전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래, 그래. 해 봐.”
“이곳 별궁에 색목인 궁녀를 배치한 것은 저희 의용공주 전하를 무시하는 처사이옵니다.”
“아닌데. 이게 웬 인종 차별이야?”
“저희와 생긴 게 너무 달라 혐오스럽습니다. 공주님도 저들을 보고 가끔 흠칫흠칫 놀라십니다. 특히 저 궁녀는 입술이 뒤집어져서 복이 없게 생겼으니 내쫓으소서!”
“입술이 뒤집혀서 복이 없어?”
어이없어 잠시 듣고만 있던 이민호가 주변을 살폈다. 예전부터 이민호와 가끔 장난을 치던 갈라티아 궁녀가 찻주전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 궁녀의 입술이 두툼해서 안젤리나 졸리를 약간 닮았는데 시녀는 그 궁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파티마! 이리 와.”
“네! 전하.”
이민호가 그 동안 잘 먹고 후원에서 뛰어노느라 건강미 넘치는 궁녀의 허리를 잡았다. 짧은 메이드복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엉덩이를 당기자 적발의 궁녀가 익숙한 몸짓으로 이민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찰싹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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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까지 앞으로 2편 남았습니다.
치고받고 싸워야 이야기 진행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