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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88화 (37/1,000)

00088  15.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사람들  =========================================================================

황제의 조칙에 의해 이민호가 고민호라는 이름으로 고산국의 국왕으로 책봉됐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예조를 통해 감합부가 나오고 명나라 남부의 항구 세 곳이 고산국에 개방됐다. 또한 명나라 관리가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수시로 고산국에 연락을 해왔다.

이민호가 느끼기에 황제가 태정을 하는 바람에 외교 절차가 막히거나 연기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황제는 공식적인 행정체계를 무시했지만 조칙을 통해 관리와 환관들을 움직임으로써 외교뿐만 아니라 여전히 정치와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가 태정을 하니 관리의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명나라 관리들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외국은 물론 일반 백성들이나 상인들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이야기였다.

“태정이 고작 이런 거였나?”

이민호는 만력제가 태정을 하는 바람에 명나라가 망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30년 동안 정치와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황제는 환관들은 물론 조칙을 통해 관리들을 잘만 부리면서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역사책에서 서술한 것은 전체 역사를 너무 단순화시킨 도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권과 신권간의 장기적인 대립이 명나라 후기의 국세를 약화시켰다고 본다 하더라도 태정은 그 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난 작은 현상일 뿐이었다.

물론 역사학자들이 태정이라는 황제의 특이한 행태를 들어 명나라 멸망의 핑계를 대긴 좋았다. 임진왜란이 남긴 결과물 중에서도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한 도자기나 포로 문제를 침소봉대해 일본에게 임진왜란의 목적이 도자기전쟁이니 노예전쟁이니 하는 본말이 전도된 주장을 하는 인간들도 현대 한국에 있었다.

장거정 사후에 만력제가 망가졌다고 흔히 말하는데 장거정은 1582년에 죽었고 태정을 시작한 것은 1589년이었다. 이렇게 20대 황제에게 무척이나 길었을 7년이라는 시간차를 무시하고 장거정과 태정을 연결시키는 것도 무리였다. 20대에게 7년이란 병장 만기 제대를 네 번이나 할 수 있는 기나긴 세월이었다.

황제가 공주를 보내면서 먼저 이민호와 연결하길 원했으니 황제가 이민호를 이용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민호도 황제를 잘 이용해먹기로 했다. 관리들은 몰라도 환관들은 공주가 고산국에 온 것을 알고 있으니 앞으로 뭔가 큰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나중에 명나라가 멸망할 때 공주의 핏줄을 이용해 이민호가 명나라 황실의 정통성을 이어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유럽 같으면 공주의 남편 자격으로 왕좌의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동양의 왕권은 유럽과 달리 사적 소유권의 개념에서 꽤나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갔던 통신사는 돌아왔소? 여기 고구마 좀 드시오.”

“지난 정월 28일에 통신사 일행 전원이 동래부에 도착했습니다. 왜승 현소 등이 회례사로 우리 사신들을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종사관 허성과 군관 부장 성천지가 동래부 옥에 수감됐다고 합니다.”

대방이 이민호가 하는 것처럼 껍질을 까면서 고구마를 맛 봤다. 먹다가 가끔 목이 막혀 물을 마시기도 했다. 고구마가 부유한 대방의 입맛에도 맞는 것 같아 이민호는 다행으로 여겼다.

“전적 허성은 정여립과 주고받은 편지 때문이겠고, 성 판관은 왜 잡혀 들어갔지요?”

“전 전주판관 성천지는 정여립이 본인 집에서 무기를 만들 계획을 세웠을 때 야장(冶匠)을 보내 도와줬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성 판관은 살아남기 어렵겠군요.”

2년이 지난 지금도 기축옥사, 정여립 역모사건의 여파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아 이민호가 약간 놀랐다. 전적 허성은 의금부에 끌려갔으나 무죄가 증명돼 곧 풀려났다. 허성은 허균의 형, 허난설헌의 오빠였다.

“조정의 논의는 어떤가요?”

“상사 황윤길은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으로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관백이 용렬한 사람이라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때 황윤길은 당시 정권을 잃은 서인이라 일부러 조정을 시끄럽게 한다고 동인에서 무시하는 바람에 조정이 판단을 잘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세자를 세우는 건저 문제로 정철과 윤두수가 파직된 것은 윤 3월 14일의 일이었고 황윤길과 김성일이 조정회의에서 보고할 때는 아직 서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이미 그 이전부터 함경도에 집중돼 있던 무관들을 남해안의 수령이나 장수로 열심히 뽑아 보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제수된 것은 바로 그 해 2월이었다.

4월에는 김응남을 정사로 한 성절사가 평소보다 일찍 북경으로 출발하면서 통신사의 판단, 사신으로 온 왜승 현소의 정명가도 발언 등을 모아 명나라 예부에 자문을 보냈다. 겉으로는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실제로는 일본이 조선과 명나라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명나라에 정식으로 통보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황제가 칙서를 내려 김응남을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때마침 류큐에도 왜군이 명나라를 공격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퍼져 명나라에 보고했고, 명나라에서도 직접 다수의 첩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명나라도 일본에 경각심을 갖고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대방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잘 모르겠지만 학봉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도 조정에서는 뭔가 바삐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왜적이 침입할 것을 알고 혼란스러워 할까봐 두려운 거지요. 조정에서는 김성일의 말을 옳다고 하면서도 경상도와 전라도에 군비를 갖추게 할 것이오. 앞으로 일 년 동안 성곽이나 군기를 수리할 일이 많을 테니 사업할 때 참고하시오.”

“예. 쇠못이나 도구를 미리 만들어 놓겠습니다. 이 고구마라는 음식이 맛이 좋습니다. 남도의 과일입니까?”

대방이 아무리 뛰어난 상인이라 해도 미래의 사업 판단 문제에서는 이민호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이민호가 항상 옳았기에 대방은 이번에도 의심 없이 따랐다.

“감자하고 비슷하지만 성질은 정반대입니다. 배에 고구마 몇 백 섬을 실어줄 테니 이것으로 돈 벌 생각은 하지 마시고 경기 이남의 농가에 두루 나눠주시오. 따뜻한 땅에서는 감자보다 좋은 것이라 말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내 이름을 대시오. 그런데 신임 좌수사를 만나보셨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련님 말씀이라면 백성들이 확실히 믿을 것입니다. 전라좌수사는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사간원에서 아직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신임 이 수사 순신은 제수받자 마자 즉시 수영에 달려와서 5관 5포의 군기 검열부터 마쳤습니다. 공사가 확실한 분이라 뇌물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민호는 대방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리고 심각한 어조로 대방에게 경고했다.

“참수 당하기 싫으면 그분께 뇌물은 절대 주지 마시오. 그 대신 신임 좌수사가 수영에 협조해달라는 것은 최대한 해주시오. 그게 바로 내 뜻이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새로 오신 수사 영감이 상단에 따로 요구한 것은 지금까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전라좌수사에 원래 원균이 제수됐으나 2월 4일에 사간원에서 청해 파직됐다. 실록에 나온 이유는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였다.

2월 6일에 병조에서 군사들에게 화약무기로 훈련시킬 것을 청했고, 선조 임금은 아뢴 대로 하라고 답변했다. 2월 8일 신임 전라좌수사 유극량이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군관이나 무뢰배들과 너, 나 하는 사이라 호령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체차, 즉 해임됐다.

2월 13일 이경록이 나주목사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제수되고 전라감사 이광은 전쟁 준비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며 자헌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2월 16일 사간원이 관작의 남용이 심하다고 이순신을 해임할 것을 권했으나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는 이유를 들어 선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8일 사간원이 다시 들고 일어나 나주목사 이경록은 체차되었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선조 임금이 끝까지 지켜주었다.

약간 나중 일이지만 4월 4일에 송상현이 동래부사로 제수되었다. 현직 동래부사인 고경명이 매일 술만 마시고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사헌부에서 탄핵했기 때문에 체직된 탓이다.

“고지식한 분이라서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나도 모르겠소. 아버님께 생각이 있으신 모양이니 하시자는 대로 대방이 밀어주시오.”

“예. 좌수영을 지원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절충장군 영감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해동상단에 속한 중형 외륜선은 쌀과 고구마를 가득 싣고 돌아갔다. 고구마 재배법을 언문과 한자로 쓴 종이도 수천 장을 받아갔다. 고구마 도입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전쟁 기간 중에 고구마가 많은 사람들을 구해줄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전쟁은 앞으로 일 년 남았다. 통신사가 돌아오기 전부터 조선 조정에서도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성곽을 수리하면서 백성들에게 부역이 가중되자 원망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민호는 상반기에 선박 건조에 주력했다. 군선과 장거리 무역선을 겸하는 대형 외륜선을 열 척으로 늘리고 중형 외륜선은 스무 척으로 늘렸다. 보자기라 불리는 남해안 어민들을 사공으로 많이 고용했다. 이들은 군정으로 파악되는 일반 백성 어민이 아니라 남해안과 서해안의 섬과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해양 유목민에 가까웠다. 어떤 선비의 기록에는 말이 달라서 못 알아듣는다는 기록도 있었다.

마카오에 간 이민호는 갈레온 두 척을 신규로 건조해줄 것을 주문하고 따로 중고 갈레온 네 척을 구입했다. 두 척은 두아르테가 마닐라와 말래카에 가서 한 척씩 사와야 했다. 중고 갈레온 구입비는 두아르테의 수수료까지 더해 척당 1만 에스쿠도가 들었다.

금화 1만 개는 금 무게로 환산한 현대 가치로 하면 10억 원도 안 되지만 이 시대 구매력으로 따지면 대단한 거금이었다. 이민호는 금화 함량을 측정하고 무게를 재서 은으로 환산한 다음 포르투갈 상인들이 좋아하는 옥 도자기로 결제했다.

============================ 작품 후기 ============================

쓴 게 남아서 오전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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