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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84화 (33/1,000)

00084   14. 입조  =========================================================================

“조선으로부터 도움을 받든 말든 상관없다. 짐은 조선국에 자문을 보내 앞으로는 고산국이 조선국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하게 만들도록 하겠다. 새로운 나라가 이주에 세워지는 것은 상관없으나, 대명의 앞바다에 조선의 속국이 생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산국이 앞으로도 조선에서 백성을 받아들이거나 무역 이익을 나누든 말든 상관없다만, 고산국은 조선국의 속국이 절대 아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의 있느냐?”

“윤당하십니다.”

이민호가 원하는 바이긴 하지만 황제도 조선과 고산국의 관계를 확실히 차단하고 싶어 했다. 어떤 나라든 적은 물론 전통적인 우방이 강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자문은 칙서와 달리 대등한 제후끼리 공문서를 주고받거나 문의하고 답할 때의 문서이다. 황제가 직접 자문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예부나 요동도사 등 조선 국경 인근에 위치한 관아에 시켜서, 또는 그 관아의 이름을 빌려 조선 국왕과 공문서를 주고받았다.

“두 번째는, 과연 고산국의 존재가 대명에 이익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역대 제황들이 넓지도 좁지도 않은 그 땅을 개척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마침 짐의 제위 기간에 그대가 개국을 했으니 황제로서 짐이 뭔가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다.”

만력제가 30년 동안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했지 전쟁에도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만력제는 임진왜란은 물론 같은 해에 일어난 보바이의 난, 1597년에 일어난 양응룡의 난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진압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등 주변국에 칙서를 보내고 흠차대신과 흠차무관을 직접 선임해 파견한 것은 환관이 아닌 만력제 본인이었다. 대신들이 100번 넘게 내는 사직서는 절대로 수리해주지 않았지만 늙어죽으면 즉각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팽호도의 해적을 토벌한 것처럼 분명히 대명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폐하. 붉은 머리의 남만인들이 혹여나 남쪽 땅을 어지럽힌다면 대명의 수군을 도와 선봉이 되어 막겠습니다.”

“그게 대명의 이익인 것은 맞고, 국왕이 그런 충성스런 마음이라면 대명에 딱히 손해 날 것이 있으리라 보지는 않는다. 작은 규모로 밀무역하는 것은 어차피 바닷가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이니 눈 감아줘도 상관없다. 그러나 미래는 모르는 법. 지금 국왕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더라도 국왕의 후손들도 대대로 대명에 충성하리라는 보장이 없구나.”

“만약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대명에 해가 된다면 언제든 폐하의 위엄으로 대군을 일으켜 작은 섬나라를 휩쓸어버리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국에서 걱정하실 일은 아니라고 사료되옵니다, 폐하!”

“작은 섬이라면 모든 해안을 튼튼히 방어할 수 있어 문제지만, 사방에 상륙할 수 있는 큰 섬이라면 오히려 안심이다. 그래서 국왕 그대가 이주에 처음 배를 내려 나라를 세울 때부터 그냥 지켜보기로 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는 이민호가 세운 고산국을 개국 초부터 관심을 두고 오래도록 관찰했다는 뜻이었다. 온실이라 춥지도 않은데 이민호의 팔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조선 국왕이나 명나라 황제나 후세에게 무능하다는 소리 들으면서도 정보 하나는 확실히 잡고 있었다. 과연 정보는 권력이었다.

“그런데 저 계집은 누구냐?”

“복건 상인 왕 씨의 딸로서 제 일을 도와주고 있사옵니다.”

“국왕이 아직 성혼은 안 했다니까 후궁이나 귀인이겠구나.”

왕명명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왕명명은 감정에 휘둘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야기하는 여자는 절대 아니었다.

“황공하오나 소녀는 이 참판의 첩이 아닙니다, 폐하. 첩보다 낮은 천하디 천한 신분이오니 소녀는 이 자리에 없는 듯 여겨주소서.”

“그래? 그렇다면 좋다. 고산국 국왕은 들으시오.”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황제가 머리를 긁으며 잠시 고민했다.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습관이었다.

“후궁들이 아들만 낳는 약을 먹었는지 짐에게 쓸모없는 아들만 주렁주렁 달렸고 공주는 하나밖에 없소. 짐이 간교한 스승에게 속아 금지옥엽을 어떤 늙은 장수에게 시집보냈는데 며칠 못 지내고 황궁으로 돌아왔소. 지금은 늙은 사위가 이미 죽었으니 엄연히 과부가 되었소. 국왕은 대명의 수도에 왔으니 짐의 고민을 덜어주는 뜻에서 그 불쌍한 과부를 데려가주시오. 국왕은 짐의 부마라 하나 의무를 지우지는 않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민호는 그게 무슨 소린가 하다가 명명이 옆구리를 꼬집는 바람에 얼른 부복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만력제의 장녀이며 후궁 정각황귀비 정 씨의 소생 의용공주 주상아라는 이름의 공주가 있는데 청상과부가 되었으니 이민호가 데려가라는 뜻이었다.

의용공주 주상아는 어릴 때 그 유명한 장군 척계광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그러나 척계광이 정적들에게 핍박을 받자 공주는 황궁으로 돌아와 거하고 척계광은 2년 전에 죽었다고 했다. 공주의 현재 나이는 10대 후반이었고, 성혼 당시 너무 어려 환갑이 다 된 척계광이 건드리지 않아 처녀지신이라 하는데 이민호가 정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 참고로 척계광은 1528년생이고 1582년 장거정이 죽은 다음 정적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1583년 계진총병에서 광동총병으로 좌천됐다가 끝내 파직되어 1588년 1월에 죽었다. 만력제는 1563년생이었으니 장거정이 생존하고 있던 1582년 이전에 공주가 척계광에게 시집갔다고 보면, 황제가 스무 살 이전에 얻은 어린 공주가 이미 시집 간 셈이 된다. 만력제의 장남 태창제 주상락은 1582년생이다.

그러나 척계광과 만력제의 관계는 위키백과 만력제 항목에만 나와 있고 자료가 부족해 확인할 수 없으나 장녀 주상아는 1582년 당시 아무리 많아도 10세를 넘기지 않았다. 척계광 쪽의 자료에는 공주 주상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어떤 영화에서는 내용 자체가 창작이지만 가정제의 딸인 공주가 척계광의 연인으로 등장한다. 보통 척계광에게 부인 왕 씨와 첩 셋이 있었고 대단한 공처가라고 알려져 있었다.

위키백과 만력제 항목을 믿기 어렵지만 필자가 보기에 상아라는 이름도 예쁘고 스토리도 괜찮은 것 같아 만력제가 청상과부 공주를 주인공에게 떠맡기는 것으로 설정한다. )

“여기까지는 공식적인 부마 간택 절차였다. 고산국왕 그대가 앞으로 영토를 더 넓히든 말든 상관없다. 공주를 정식 부인으로 삼아달라고 요구하지도 않겠다. 그러나 이주라고 불리던 그 섬만큼은 반드시 상아의 아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토멸 당하고 싶지 않거든 열심히 힘을 써서 후계를 만들어 후계로 세울 것을 명하노라.”

“휴우~”

“왜? 국왕은 공주가 싫으냐?”

남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선조 임금이나 내수사 전수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이런 식으로 또 끌려 다니게 된다면 앞으로도 무척 고달플 것 같았다. 이민호는 만사가 귀찮아져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저는 독립 국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아직 성혼도 하지 않아 후계를 생각한 바가 없으나 군주가 스스로 후계를 결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독립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하의 뜻을 따를 바에는 차라리 고산국을 황상폐하께 바치고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새로이 시작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냥 가져가십시오.”

“하하하! 나라 하나를 짐에게 들어 바치겠다고? 통이 크구나.”

만력제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다. 사내가 이 정도 기개가 있어야지. 국왕에게 딸을 보내면서도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나. 네 뜻대로 하여라. 허나 명색이 미망인이니 정식 혼사를 올릴 수도 없어서 안타깝다. 그래도 애비로서 지참금은 조금 마련해주겠다. 사위! 내 딸을 울리면 혼날 줄 알게.”

황제는 한바탕 일진광풍을 일으킨 다음 온실에서 나갔다. 그 사이 환관들에 의해 사방이 차단돼 있었는지 직할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친위군은 중문이 닫혀 있어 밖에 누가 왔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만약 이민호가 황제의 명령에 의해 환관들에게 주살 당했다고 해도 병사들은 아무 것도 몰랐거나 안다 해도 막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현대 무기에 준하는 강력한 소총을 쥐어줘도 호위 대상과 떨어져 있었으니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물론 명나라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수만 명을 동원해 이민호는 물론 수행원들까지 몰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자가 이런 상황에서 이민호를 공격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번 일은 이민호가 호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소한 호닌과 굴마훈만 옆에 있었어도 이처럼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객사가 안전하다고 멋대로 돌아다닌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이민호는 반성했다.

“과부를 데려가 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명나라 백성도 아닌데 강제로 떠맡기다니, 너무하잖아.”

황제가 돌아간 뒤에야 이민호가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왕명명이 그런 이민호를 위로해주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받아들이세요. 비록 명색은 미망인이라지만 실은 처녀라잖아요? 소문을 들어보니 공주는 현숙하고 대단한 미인이래요.”

“미인?”

이민호의 화났던 표정이 확 풀렸다.

“사내들은 그저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군요.”

“황제폐하의 칙명도 있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지.”

이민호는 호닌과 굴마훈을 불렀다. 둘은 이민호의 표정을 읽고 뭔가 큰 사건이 생겼음을 알았으나 묻지 않았다. 이민호가 둘에게 특명을 내렸다.

“앞으로 항상 나하고 붙어있어라. 내가 비켜달라고 명을 내려도 무시하고 계속 나를 지켜라. 내가 뒷간에 가더라도, 처첩과 밤일을 하는 중에도 항상 붙어서 나를 지켜다오.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인님.”

부친과 계복, 그리고 혜영에게만 준 리볼버 권총을 호닌과 굴마훈에게 하나씩 내주었다. 둘은 이미 소총을 다뤄봤기에 권총은 사격자세와 탄창을 돌려 총알 교환하는 것만 가르쳐도 충분했다. 옥하관 안에서 실사격 훈련은 못해도 다른 훈련은 충분히 시킬 수 있었다.

밤에 이민호가 침실에서 안마를 빙자해 굴마훈의 하얗게 빛나는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당직 직할군이 밖에서 불렀다.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민호가 투덜거리며 대문에 나가보니 웬 환관이 비단 천으로 전신을 덮은 여자를 업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시녀인 듯한 여자 네 명도 짐을 잔뜩 싸들고 따라왔다. 환관은 딱 두 마디만 남기고 황급히 돌아가 버렸다.

“부마께 공주 마마를 인계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이민호가 뒷목을 잡다가 어쩔 수 없이 공주와 시녀들을 데리고 침실로 돌아갔다. 아무리 과부라지만 그래도 공준데 사주단자가 오가고 그런 절차가 하나도 없이 약식으로, 속전속결로 처리됐다.

이민호가 공주를 탁자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화장한 얼굴로는 도저히 실물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과연 황실의 공주인지 외모를 빼고도 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서 확실히 귀티가 났다.

“의용공주시라 들었습니다. 저는 고산국 예국 참판 이민호입니다.”

“상아라고 불러주세요. 국왕전하께서는 젊은 나이에도 무척 훌륭하신 분이라 들었어요. 비록 제가 정략결혼에 팔려가는 신세이지만 국왕전하를 주인으로 제 삶의 끝까지 모시고 싶어요.”

“예. 저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공주를 버리지 않겠소. 하지만 결혼은 당사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법, 미안하지만 비의 자리를 기대하지는 마시오.”

“황궁에 돌아오면서 이미 욕심은 버렸어요. 그저 전하의 여러 첩실들 중의 하나로만 기억해주세요.”

장거정이 사망한 직후의 혼란스런 정치 상황에 따라 원치 않는 이혼녀, 과부가 되면서 공주의 기가 많이 죽은 것 같았다. 지참금은 텐진에 정박 중인 외륜선으로 보낸다고 했다. 이민호는 그게 얼마인지 묻지도 않았다.

============================ 작품 후기 ============================

입조편 아직 안 끝났습니다. ㅜ.ㅠ

오늘 연재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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