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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83화 (32/1,000)

00083   14. 입조  =========================================================================

외륜선을 타고 너무 일찍 도착했더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황제가 참가하지는 않겠지만 사신단이 새해 첫날의 조회에 참가하는 정조사(正朝使) 명목으로 오는 바람에 새해를 북경에서 맞아야 했고, 그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야 했다. 가끔 악어와 극락조를 구경하러 오는 고관대작들을 온실로 안내하거나, 명명이 준비한 목록을 참고해 태감들에게 두루두루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시간을 죽였다.

사행무역을 하는 책시는 이미 항저우에서 열렸고 준비한 상품이 이미 다 팔렸기 때문에 사행무역의 일부인 수입에만 집중했다. 이민호는 생사를 대량 구입해 천진으로 보냈다. 배에 실을 공간이 꽉 찰 때까지 생사를 사들일 작정이었고, 아직 절반 정도만 찼다. 욕심이 난 이민호가 신라방 상인을 통해 생사를 고산국으로 옮길 배를 구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왕명명이 나섰다.

“대인. 이제 충분해요. 생사는 그만 사세요.”

“왜? 생사로 비단을 짜서 팔면 열 배 이상 남아.”

비단 방직기를 보유한 이민호에게 생사는 가장 중요한 원료였다. 고산국에도 뽕나무 밭을 조성하고 잠실을 세우긴 했지만 인구가 너무 적은 곳이라 양잠업의 효율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생사는 명나라에서 사는 편이 나았다.

“생사는 복건이나 광동에서 사는 게 조금 더 싸요. 그러니 감합무역 규모가 결정되면 필요한 만큼을 북경이 아니라 더 가까운 남쪽 항구에서 싸게 사세요.”

“그래?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행동하시기 전에 저한테 물어보시라고 말 했어요, 안했어요?”

“말했지. 미안.”

이민호는 지금까지 대부분 일을 혼자서 처리하던 습관이 남아 아직도 남을 부리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다. 농업은 혜진과 혜영, 어업은 부친에게 맡기더라도 상공업은 쭉 혼자서 해왔다.

“그럼 이제부터 저에게 맡기세요. 그리고 고급 비단도 약간 사세요. 대인이 만드는 비단이 명나라 것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척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각종 경서를 여러 질 사는 게 좋아요. 고산국은 아직 야만국이지만 대명의 문물을 존중한다는 뜻이니까요.”

“내가 비단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고산국이나 해중국 이름을 달고 팔리는 비단은 품질이 조금 다르니까요.”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음. 그게 미묘해요. 세밀함에서는 훨씬 낫고 광택도 더 좋은데 무늬만은 확실히 미적 감각이 떨어진다고나 할까요?”

촌스럽다는 뜻이었다. 남자인 이민호가 다른 비단을 참조해 문양을 새겼으니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민호는 명명에게 더 고급 비단을 만들 개선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그리고 비단과 생사 사는 일은 명명에게 다 맡겼다. 신라방 장 점주에게는 약재와 의학서, 경서 등 책을 구하는 일을 맡겼다.

이민호는 예부에 들러서 국왕 책봉 절차를 협의하려 했으나 연말이라 관리들이 다들 바빠서 며칠 미뤘다. 설날이 가까워지자 명나라 하급 관리들이 옥하관에 와서 공물의 종류와 수량만 다시 확인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연말까지 아무런 일정이 없어서 근처 극장을 빌려 원주민 공연을 몇 차례 개최했다. 공연 전에 황궁에서 환관을 통해 연락이 와서 악어와 극락조는 출연하지 못했다.

조선 출신인 직할군들을 몇 명씩 무리지어 시내에 외출을 내보내면서 통사, 마부 등 조선 사신 일행과 절대 마주치지 않도록 당부했다. 조선에서야 고산국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명나라에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북경에서 두 나라 사람들이 조선말로 떠들어대면서 공개적으로 어울려 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대충 일을 다 마치고 다시 심심해진 이민호는 온실 연못에서 악어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으로 시간을 죽였다. 비록 온실 안이라지만 열대 지방에 살던 가비알 악어가 추운 곳에 와서 고생이 많았다.

악어는 황궁에 공물로 바쳐진 다음 겨울에는 온실 저수조에서 지내고, 여름에는 궁궐 후원 연못에 풀어놓기로 했다고 명나라 관리가 알려주었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 조만간 박제가 될 불쌍한 가비알 악어에게 물고기를 많이 먹였다.

역시나 심심해진 왕명명이 따라다니면서 구경했다. 이민호나 명명이나 북경 시내 구경은 이미 다 마쳤다. 북경 바깥의 만리장성은 못 봤지만 추워서 더 이상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다.

“왜 이렇게 큰 동물을 힘들게 가져와서 공물로 바쳐요? 용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지만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용이 아니면 어때. 황제가 20척이나 되는 큰 악어에게 먹이를 주면 위엄이 높아진다고 다들 생각할 거야. 황제가 이 악어를 신경 쓰지 않더라도 악어가 황궁에 있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크기에 비해 순하고 귀엽잖아?”

한 마리라도 더 먹겠다고 이민호 발치에 와서 애교를 부리는 악어가 묘하게 귀여웠다.

“만약 악어가 황제를 물면 어떡하죠? 주둥이가 작아 황제를 삼키지는 못하겠지만 사람 팔 하나 정도는 뗄 수 있겠어요.”

“그럼 뭐, 전쟁이 나겠지.”

“고산국이 명나라 군대를 막을 수 있어요?”

“당연히 못 막지.”

“위험한 공물이군요.”

장난기가 동한 왕명명이 악어의 위아래 턱을 두 손으로 잡고 주둥이를 쫙 벌렸다. 악어가 아프다고 버둥거렸지만 명명의 손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악어의 주둥이가 너무 가늘어 부러질 것 같아 이민호가 얼른 나서서 말렸다.

“그만 해! 우리 불쌍한 악순이 괴롭히지 마!”

“암놈이었어요? 호호!”

이민호는 악어가 오래 살길 바랐다. 이렇게 명명과 시시덕거리는데 온실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가운데 비단 옷을 입은 뚱뚱한 사람을 양 옆에서 환관들이 부축하고 있었다. 나이는 40대를 넘은 것 같은데 목살이 축축 쳐지고 너무 뚱뚱해서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자바 헛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민호가 누구인지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윽!”

이민호는 옆구리에서 강한 통증을 느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순간 왕명명이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천하의 주인이시며 만백성의 어버이이신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너는 어찌 절을 하지 않느냐?”

뚱뚱한 남자 옆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던 환관이 커다란 목소리로 이민호를 꾸짖었다. 왕명명도 벌벌 떨며 이민호에게 다급하게 눈짓했다. 이민호가 아무리 외국 사신이라 하나 황제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가 대역죄로 처벌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렸다. 온실에 들어온 20여 명의 환관들 사이에서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비단옷 입은 남자를 발견하고 무릎을 꿇었다.

“고산국 예국 참판 이민호가 대명 황제폐하께 문후 드립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어떻게 내가 황제인 줄 알았지?”

“뭇 사람들 사이에 계셔도 영롱한 빛이 나서 존엄한 분이 오신 줄 알았습니다.”

“아부를 잘하는군. 저 소녀가 하는 짓을 보니 백성들이 요즘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알겠어. 몹시 불쾌하군. 용안을 모르더라도 최소한 수염이 난 사람에게 절을 해야 할 것 아냐?”

“소녀를 죽여주시옵소서!”

왕명명이 틀렸고 이민호가 바로 봤다. 만력제는 1563년 9월생이니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다.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왕명명이었는데 당황하다 보니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정사는 돌보지 않으면서 여행을 자주 다닌다는 만력제가 옥하관 온실을 방문했다. 황제가 온실로 직행한 것으로 보아 역시나 관심사는 악어와 극락조인 것 같았다. 온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에 놀라 물에 들어간 악순이가 서서히 움직여 헤엄을 쳤다.

“정말 크구나. 이것은 용이냐, 악어냐? 듣자 하니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더구나.”

“황상께서 부르시는 대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이민호가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조선에서 내수사 전수와 양반들을 상대하다 보니 이 정도 아부는 기본이었다.

그런데 이민호는 황제 입에서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황제가 던져주는 물고기를 악순이가 덥석 삼키는 것을 보고 살짝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 역시 책에 나온 대로 가비알 악어는 물고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앞으로 이 악어에게 후원의 온실 연못에 거처를 정해주고 이름은 남해 해룡이라 칭하도록 해라. 관리인 외에는 황족만 볼 수 있게 하렷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앉으려는 자세를 취하자 환관이 얼른 무릎 꿇고 엎드렸다. 황제가 환관의 등허리에 앉았다.

이민호가 슬쩍 곁눈질로 황제를 살폈다. 황제는 아직 20대 중후반인데 지독한 비만도, 아편 중독자도 아니었다. 등이 약간 굽은 것 같았으나 아직 꼽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휜 것도 아니었다.

“이주에 새 나라를 세웠다지?”

“그러하옵니다, 폐하! 고산국왕 고봉명은 평소 대명의 문물을 숭앙하던 자로서 여송 땅에서 서반아 야만인들의 침략을 받아......”

“허수아비 국왕 이야기는 집어 치워. 짐은 실질적인 군주인 그대 이민호와 이야기하는 거다. 고산국왕은 이만 일어나도 좋다.”

이민호는 숨이 턱 막혔다. 황제가 객사를 방문한 것도 특별한 일인데 황제는 이민호와 고산국의 실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사실 일개 상인의 딸인 왕명명이 알아챌 정도였으니 동창 등 수많은 정보기관을 움직이는 황제가 모른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딱히 관심이 없다면 몰라도, 알려고 들면 이민호와 고산국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 이민호도 고산국의 실체를 명나라가 언젠가는 눈치 챌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렇게 빨리 알아낼 줄은 몰랐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미 다 들통 났으니 이민호는 사양하지 않고 일어선 다음 읍을 해서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왕명명은 계속 부복해야 했다. 왕명명은 명나라 신민인 동시에 고산국 백성이라는 이중국적자가 된 셈이었다.

“고산국왕은 앞으로도 조선과의 관계를 이렇게 계속 유지할 건가? 조선이 대명의 전통적인 우방이긴 하지만 짐은 복건 땅 바로 앞에 조선의 땅이 생기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워.”

사실 그것이 가장 예민한 문제였다. 이민호는 황제의 의중을 판단해 가장 흡족할 만한 대답을 만들어냈다.

“고산국에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은 절반도 안 되옵니다. 조선 국왕이 건국 초에 인력을 천여 명 지원해주고 그 외에 땅이 없어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보내주고 있으나 세곡 약간과 상업의 이익을 분배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고산국 땅을 공개적으로 조선 영토로 편입하라는 일부 배신들의 주청은 대명과의 충돌을 우려해 오히려 거부하는 줄로 아옵니다. 지금은 황상폐하의 혜안에 고산국의 정체가 탄로 나 칙사를 보내 꾸짖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아뢰옵니다.”

“흐음. 여러 모로 애매하군.”

이민호도 이런 애매한 관계가 싫었다. 그러나 사람을 부리다 보면 비밀을 지킬 수가 없고, 상행부터 건국까지 혼자서 모든 것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일부러 모든 것을 애매한 관계로 설정해 들키더라도 변명이 가능하도록 했다.

고산국은 조선 사람들이 세웠으나 조선인들만의 국가는 아니었다. 또한 조선 국왕의 땅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이렇게 이민호든 조선 국왕이든 명나라 황제의 추상같은 호령으로부터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두었으나, 오해할 여지 또한 많다는 문제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쓰다 보니 늘어지는군요. ㅋ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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