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2화 (31/1,000)

00082   14. 입조  =========================================================================

오후에 외륜선에서 내린 사신단은 일찌감치 통주 관청에서 묵었다. 다른 나라 사신들은 민간인의 집을 빌리거나 여관에서 숙박한다고 들었는데 예부 주사가 이민호 앞에서 설설 기어서 쉽게 객사를 빌릴 수 있었다. 자금성까지는 50리 거리였으니 이제 딱 하룻길만 남았다.

뱃길 한 달, 육로 여정 하루라서 지금까지 아주 편하게 온 셈이었다. 조선 사신들은 요동 땅 역참 중간 중간에 풍찬노숙하는 경우가 있다고도 들었다. 그러나 대운하를 통해서 온 고산국 사신단은 객사를 통째로 빌리거나 관아 건물에서 편하게 지내고 배에서 잔 것은 고산국에서 출발한 첫날 딱 하루밖에 없었다. 예부에서 많이 배려해준 덕택이었다.

하지만 여행 일정이 길어지면 지치기 마련이었고 이민호는 그 동안 끔찍하게 지겨웠다. 북경에 가까워질수록 추워서 더 길게 느껴졌다. 왕명명이 여송과 안남, 섬라에 상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 지역 정보를 듣는 것으로 하루 대부분을 소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호닌과 굴마훈 품에서 지냈다.

“오로로로로~”

“끼야호오오~”

다음 날 아침에 북경으로 출발했다. 긴 사행 행렬 주변을 여진족 친위군 20여 명이 말을 타고 마치 눈밭에 강아지 뛰어다니는 것처럼 신나게 싸돌아다녔다. 석가산을 지나 동악묘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명나라에서 동원해준 말 200필과 마부, 짐꾼들이 가세하니 행렬이 끝이 없이 이어졌다. 국왕 부처는 화려하게 꾸민 수레에 탔고, 그 뒤를 악어가 실린 수레가 따랐다.

이민호는 오랜만에 말을 타니 기분이 좋았다. 두꺼운 솜옷을 잔뜩 껴입고 호닌, 굴마훈과 함께 말 타고 나잡아봐라~ 놀이를 했다.

“토끼 잡아라~”

“꺄아~ 곰이 쫓아와!”

비슷한 말을 탔는데도 이민호는 여진족 처녀 굴마훈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호닌이 던진 올가미에 묶였다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져 죽거나 크게 다칠 뻔했다. 어느새 말머리를 돌린 굴마훈이 낙마하기 직전의 이민호를 허공에서 잡아채 구해주었다.

사람 봐가면서 장난을 쳐야 하는데 함경도나 평안도 출신이 아닌 이민호가 같이 놀기에는 너무 위험한 장난이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로 놀란 호닌이 급히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사죄해서 이민호가 오히려 호닌을 달래야 했다. 큰 충격을 받은 호닌을 굴마훈이 달래도록 하자 명명이 다가왔다.

“재미있어요?”

“재미있지, 그럼. 오! 명명이 못하는 게 있었네?”

“흥! 그깟 말 나도 잘 탈 수 있다고요.”

타라고 내준 말을 고삐 잡고 끌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안장을 두들기며 앞에 타라고 하니 명명이 냉큼 이민호 앞에 올라탔다. 이민호도 여진족에 비해 떨어질 뿐 승마실력은 좋은 편이라 명명을 태우고도 문제없이 달렸다.

“대인, 손 위치가......”

“응? 명명이 말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잡아주는 거야. 아! 미안. 너무 평평해서 허리인 줄 알았네.”

명명에게 손등을 꼬집혔다. 그러나 함께 말을 타면서 신체접촉이 자연스레 늘어나 많이 친해졌다. 말에서 내릴 때 공주님 안기로 내려줬더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좋아했다.

아무리 부친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왔다지만 아직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의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민호가 받아들여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불안한 위치에서 필사적으로 능력을 발휘해 이민호의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오려는 명명이 안쓰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명명은 내 여자야. 황금 3천 냥을 지불했잖아.”

“흥! 그깟 3천 냥, 지금 당장 돌려드리고 떠나도 돼요? 원하신다면 아버지 목숨 값도 바로 갚아드릴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명명은 그깟 3천 냥이라는 소리를 해도 됐다. 재산도 많지만, 사행무역품을 사서 되파는 것만으로도 그 능력을 충분히 입증해 냈다. 무역을 명명에게 맡기고 이민호는 다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럼 앞으로 일 년에 한 냥씩 갚아. 그 다음에는 자유롭게 나를 떠나도 돼.”

“이자도 안 되잖아요. 대인께서는 경제 감각이 형편없어요. 역시 내가 옆에서 도와드려야 한다니까요.”

겨우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 명명이 이민호 품에 뛰어들어 펑펑 울었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 약간 불쾌해서 그렇지 이민호도 이런 인재를 놓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앞으로 3천 년 동안 밤낮으로 부려먹겠다는 뜻이야.”

“밤에도요?”

“물론이지.”

얼떨결에 한 말인데 그것도 좋을 것 같았다. 처음에 몸값이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심야 서비스가 포함된 가격이었다. 이때부터 명명이 이민호에게 매우 고분고분해졌으나 가끔 틱틱거리는 말투는 여전했다.

그 날 오후 북경에 도착했다. 명나라 관병들이 앞뒤에서 호위하고 수많은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신단이 시가행진을 벌였다. 아미족 원주민 남자들이 추운데도 웃통을 벗고 남방의 풍물을 선보여 구경꾼들에게서 감탄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항저우에서와 달리 북경에서는 악어를 진짜 용으로 믿는 사람이 많았다. 사실 좀 웃기게 생긴 주둥이는 나무궤짝으로 살짝 가려서 사람들은 거대한 몸통과 꼬리만 볼 수 있었다.

극락조는 자금성 안에 있는 청동제 봉황상과 비슷하게 생긴 덕에 진짜 봉황 대우를 받았다. 용과 학이 교미해서 나온 게 봉황이라는데, 중국인들은 봉황이 나면 태평성대가 온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만력제가 태정을 하는데도 명나라에 태평성대가 찾아왔다. 감자로 인해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진 조선에서 선비들이 태평성대가 온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한 것과 같이 북경에서도 지식인들이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가짜 봉황인 극락조가 불로초인 줄 아는지 기름에 튀겨 먹겠다고 훔치려는 자들이 많았다. 명나라 관병들이 대거 투입돼 경비를 섰다. 약으로 쓰겠다고 황금 몇 만 냥을 제시하는 부호, 고관대작들도 있었지만 이미 공물 목록에 들어있다고 하자 포기하고 물러섰다.

사실 말로야 불치병에 걸려 고생하시는 부모에게 봉양하겠다고 했어도 실제로는 정력제로 쓰겠다는 의도가 눈에 보였다. 생긴 게 특이하거나 보기 드문 동식물이 있으면 일단 먹고 보려는 사람들이 많은 덕에 명나라의 의학과 요리가 발달한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여긴...... 옥하관은 보통 조선 사신들이 쓰지 않습니까?”

“옥하관은 조선의 건물이 아니라 대명 황제폐하의 소유물입니다. 사양하지 마십시오.”

조선에서 출발한 동지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예부에서 호의를 베풀었다. 평소 조선 사신단이 이용하던 남관인 옥하관을 고산국 사신단에 배정한 것이다. 이민호는 나중에 조선에서 혼날까봐 사양했으나 이미 정해진 것을 바꿀 수 없었다. 조선 사신들은 옥화관보다 조금 작은 객사인 동관에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4년 전에 조선 사신단이 실수로 옥하관 내의 건물인 동조에 불을 내서 11실의 건물이 몽땅 불에 타서 무너져버렸고, 결국 재건하지 못했다. 예부에서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고, 그 보복으로 몇 년 동안 조선 사신들이 옥하관 건물 안에서 등불을 켜지 못하게 했다.

동조가 사라진 자리에 작은 유리 온실이 들어서 있었다. 온실 안에 자그마한 연못도 마련되었다. 이민호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 온실과 연못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기한 동물을 공물로 바친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웠는데 계절을 깜빡하는 실수를 깨달은 이민호는 북경에 오는 동안 걱정을 많이 했다. 기껏 운반한 악어가 며칠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황실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처할 충분한 경험과 능력, 그리고 지식과 경제력이 있었다. 황궁에서 일하는 동물원 관리들까지 특별히 옥하관에 파견돼 악어와 극락조 사육을 담당하기로 했다.

“항저우에서 보낸 파발에게서 공물 목록을 받은 즉시 용과 봉황, 아니 악어와 극락조를 수용할 시설을 만들어 이렇게 준비가 끝났습니다. 더운 곳에서 살던 짐승들이지만 참판 대인의 우려와 달리 얼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공납한 다음 황궁에는 더 좋은 시설이 준비되어 있겠지요?”

공물을 일단 바치고 나면 그 후에는 이민호의 손을 완전히 떠난다. 황제가 극락조를 튀겨 먹든 악어를 잡아 손가방을 만들든 이민호와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그 사이 정이 든 악어가 불쌍해서 다시 물었다.

“물론입니다. 세계 모든 동식물을 수용해 기를 수 있는 완벽한 시설이 황궁 후원에 갖춰져 있습니다. 국초에는 인도 서쪽 흑인들이 사는 대륙에서 구한 기린도 한 동안 키웠고, 섬라에서 보낸 흰 코끼리도 키웠었지요.”

정화의 원정 기간 기록 중에 아프리카 기린의 목에 감은 줄을 사람이 쥐고 서 있는 그림이 있었다. 관리는 동남아 각국에서 진상한 동물을 황궁 후원에서 잘 키운다고 했다.

황실에서는 가비알 악어와 극락조 한 쌍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사실 극락조는 수놈 두 마리였지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백성들이 오해함으로써 생길 정치적 이익이었다. 만력제는 정치에 관련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권력을 놓으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예부 관리들과 환관 몇 명이 돌아가고 나서 사신단의 숙소를 배정했다. 옥하관은 네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첫 번째 커다란 건물은 예부 관리나 손님을 맞을 곳으로 정하고, 구석에는 말을 풀어놓고 부속 건물에는 공물을 보관했다.

임시로 마부를 겸한 사공들과 직할군 일부가 이곳을 숙소로 정하고 말과 짐을 지켰다. 어차피 명나라 관병들이 옥하관 주위를 빙 둘러싸서 지키고 있으니 바깥에서 도둑이 들어올 일은 없었다. 온실 옆 작은 건물에는 황궁 후원 관리들이 거주했다.

안쪽 두 번째 건물은 국왕 부처와 시녀, 아미족 원주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세 번째 건물에 이민호 일행과 여진족 친위군이, 가장 안쪽에 신라방 상인들과 하인, 직할군들이 방을 배정받았다. 대문과 중문은 평소에 잠가놓고 동쪽의 쪽문으로 다녔다.

다음 날부터 북경에서 사신단의 공식 일정이 시작됐다. 새벽 일찍 자금성으로 가서 동장안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정문인 오문(午門)을 통해 황궁에 들어가 황제가 계실 북쪽을 향해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고개를 숙이는 예를 거행했다. 끝나고 광록시에서 술과 음식을 대접받았다. 이민호에게 나온 술은 계복이 대신 마셨다.

이런 일은 신하들 선에서 끝냈고 체면을 차려야 하는 국왕은 늦잠 자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아침 먹으려고 옥하관에 돌아와 보니 통통한 왕비가 빼빼 마른 국왕에게 애교를 떨고 있었다.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꼴불견이었지만 지난밤에 역사가 이뤄진 모양이었다.

다들 입맛이 없다고 아침을 걸렀다. 사신단에 젊은이가 대부분이라 기혼자는 1할에 미치지 못했다. 이민호는 처녀 총각들 단체 미팅을 시켜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날 오전에 예부에 가서 예부 우시랑과 인사를 나누고 사신들에게 일괄적으로 하사하는 선물을 수령했다. 개인 비용으로 쓰라고 황제가 사신 개개인에게 하사하는 명주 몇 필, 면포 몇 필, 이런 사소한 종류들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