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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8화 (27/1,000)

00078   14. 입조  =========================================================================

“조선의 홍 역관이란 분은 기루에 팔려온 남경 류 시랑의 딸에게 해어화채(解語花債)로 황금 3천 냥을 주어 풀어주고 부모의 장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나라의 큰일을 해결해서 공신이 되었지요.”

“어? 알아듣네. 홍 역관이 누군지 몰라도 여자를 따먹지도 않을 거면서 황금 3천 냥을 줬다면 호구가 분명해.”

명나라 소녀가 조선말을 알아듣고 능숙한 발음으로 대답까지 하자 계복이 얼떨결에 대꾸했다. 이민호도 살짝 놀랐다. 그러나 이민호는 조선이 아닌 고산국 사신으로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명나라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조선말을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했다.

“홍 역관의 일은 어찌 아느냐?”

“갑신년에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것은 홍 역관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제 값어치도 그보다 못지않으니 대인께서 제 몸을 사시지요. 부끄럽지만 아직 처녀랍니다.”

조선 왕통이 잘못 기록된 대명회전을 바로잡아줄 것을 200년 동안 명나라에 요청한 종계변무는 1584년 갑신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성공했다. 조선에서 그토록 애타게 요청해도 명나라에서 들어주지 않았는데 일개 역관인 홍순언의 선행 덕택에 큰일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사실 그 동안 종계변무를 빌미로 명나라가 조선을 쥐고 흔든 것이었다.

그 전 명종 대에 역관 홍순언이 북경에 왔다가 기루에 팔려온 류 씨라는 아가씨에게 황금 2천 냥과 인삼을 주어 자유롭게 해준 일이 있었다. 류 씨는 나중에 예부시랑 석성의 후처로 들어갔다가 남편을 설득해 종계변무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 명군을 파병할 때도 석성이 병부상서로서 조선을 도와줬다.

“네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일본 처녀들은 화약 한 통에 50명씩 구할 수 있다.”

“저를 단순한 노동력이나 남자들의 정욕을 풀어주는 창기로 보지 마십시오. 저는 상인의 딸로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명나라의 방언 네 가지와 조선어, 몽골어, 여진어, 일본어, 섬라어, 여송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상행 경험이 많아 실제 거래도 잘합니다.”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소녀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어학능력만으로도 대단한 재녀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상업도시 항저우답게 구경꾼들 중에 상인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황금 3천 냥이라는 높은 가격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아가씨가 승부수를 띄웠다.

“조선의 사개송도치부법으로 장부를 기재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산술도 잘하지요.”

사개송도치부법은 개성상인들이 사용한 복식부기였다. 이탈리아 도시국가 상인들이 만든 복식부기와 비슷한 형식이면서 시기는 200년이나 앞섰다고 한다. 전설에 가까운 소문을 듣고 있던 상인들이 일제히 소녀를 사겠다고 나섰다.

“이봐! 그런 인재라면 내가 사겠다. 황금 5천 냥을 주지.”

“6천 냥! 아니, 남들이 제시한 가격보다 무조건 한 냥 더!”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다가오는 상인들을 소녀를 모시는 하인들이 가로막았다. 가격이 점점 올라가 어느덧 황금 일만 냥을 넘어섰으나 소녀가 피식 웃었다.

“당신들은 싫어요!”

“왜?”

“거울을 보세요. 못 생겼잖아요!”

“이것도 거래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러나 이민호는 여전히 한 발 물러나 있었다. 분명히 소녀의 재능이 욕심나기는 한데, 그렇다 해도 딱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탓이었다. 몸 파는 소녀가 다시 나섰다.

“대인께서 꺼리는 것은 알겠지만 잠시 조선말로 하겠습니다. 만약 저를 사지 않으신다면 고산국이 사실은 조선의 꼭두각시 나라라고 소문을 내겠습니다.”

“윽! 안 돼!”

이민호 입에서 바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금 명나라에 고산국의 정체를 공개하면 곤란했다. 조선에서야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명나라에서는 전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민호는 얼른 명나라에서 책봉 받은 다음 조선에도 입조해서 관계를 설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선과 고산국이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명나라에 보여줘야 했다.

“훗! 저를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셨으니 이제 계산하시겠습니까, 고객님? 보셨다시피 제 가치는 그 이상이지만 대인께는 특별히 3천 냥만 받겠습니다.”

“이봐! 나를 협박하지 마. 어차피 그런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널리 알려질 것이다. 강요당해 너를 사지 않겠다.”

“죄송해요. 대인께서 저를 사지 않더라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게 이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그렇다면 좋다. 하지만 황금 3천 냥이 무게가 얼만데 그런 것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좀 깎아줘. 아니면 나중에 주마.”

“황금 3천 냥의 무게야 당연히 3천 냥이죠. 외상이나 할인은 절대 안 됩니다만 일단 계약금으로 오백 냥만 주시면 객사로 따라가 드리죠. 황금 오백 냥 정도는 대인 옆에 선 수신호위가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민호가 고개를 홱 돌려서 보니 계복이 얼굴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계복이 너 정말 갖고 있냐?”

“쳇! 이따 돌려주셔야 합니다.”

계복이 관복 앞섬에 손을 넣어 옆에 단추를 풀었다. 전투복 가슴 부위에 넣는 방탄판을 꺼내더니 그것을 소녀에게 건넸다.

방탄판은 황금 오백 냥으로 만든 것이었고 겉이 비단 천으로 싸여있었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조총은 물론 이민호가 만든 소총탄에도 관통되지 않을 정도의 두께였다.

“그 무거운 것을 잘도 옷에 넣고 다니는구나.”

“딱히 숨길 곳이 없으니 몸에 지니고 다녀야죠.”

이민호가 계복에게 새경 외에도 큰돈을 벌 때마다 수시로 나눠줬으므로 계복이 황금 오백 냥 이상을 소유했으리라고 예상은 했다. 그러나 그것을 전부 들고 다닐 줄은 몰랐다.

“계복이 너 참 불쌍하구나. 어서 장가가고 집을 사서 비밀금고를 만들어 그곳에 보관해라.”

그런데 오백 냥이나 되는 무거운 것을 가뿐히 드는 저 가냘픈 소녀의 힘도 놀라웠다.

“이봐! 우리가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는데 왜 이래?”

“이것도 장사라면 동등한 기회를 줘야지.”

명나라 상인들이 이민호와 대화하는 소녀에게 몰려와 항의했다. 그러나 이민호를 수행하는 명나라 관병들이 창날을 들이대며 나서자 소동은 즉시 가라앉았다. 항저우 상인들이 힘깨나 쓰는 호위 두셋은 데리고 다니지만 감히 관병에게 대항할 용기는 없었다.

“외국 사신에게 더 이상 접근하면 불미스런 일을 시도한다고 간주해 참수하겠다.”

무예 실력이 없는 관병이라도 함부로 대했다간 역모죄에 몰릴 소지가 있었다. 상인들이 소녀를 힐끗거리며 물러섰다.

이민호는 편한 마음으로 서호에 유람 갔다가 엉뚱하게 인재 한 명을 구해왔다. 객사로 돌아와 응접실에서 조선말로 소녀와 대화를 나눴다.

“이름이 뭐야?”

“왕명명입니다. 명명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멍멍?”

“중국어 발음이 아주 좋습니다. 불편하시면 조선 발음으로 명명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멍멍이 좋다. 앞으로 네 이름은 멍멍이다.”

“개 이름 부르듯이 하지 말아주십시오.”

대화를 하다 보니 명명이 의도적으로 이민호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많은 황금을 제시한 상인에게 가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해적섬 팽호도에 잡혀 있던 복주 상인 왕 씨의 딸이란 말이야? 나를 따라다닌 예부 관리나 관병 때문에 이렇게 접근했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내게 오는 거라면서 돈은 왜 받아?”

“제가 워낙 유능한 인재라서 부친이 꼼꼼히 계산한 결과 황금 3천 냥을 받아야 손해를 안 볼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객사에 들어오면서 명명이 거느리고 있던 하인들을 돌려보냈는데 황금 오백 냥, 아니 방탄판은 여전히 명명이 갖고 있었다. 황금을 아버지에게 보낼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민호가 금괴를 내줘서 방탄판은 다시 계복의 옷 안으로 사라졌다.

“당신 아버지 목숨 값은 얼만데?”

“가친께서는 당신의 목숨 값을 황금 2만 냥으로 계산했습니다. 연세가 있으셔서 매년 천 냥씩 깎고 계시지요. 제 몸값이 올해 들어 2만 3천 6백 냥으로 올랐으니 3천 냥을 받고 나머지 6백 냥은 대인께 깎아드린 셈입니다.”

“돈 계산이 철저하구나. 그럼 아까 다른 상인들이 2만 4천 냥 이상을 불렀으면 그쪽으로 갔겠네?”

소녀가 잠시 움찔하면서 신용을 깎아먹었다.

“상인은 신용이 으뜸이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팽호도에서 해적에게 잡혀있던 포로들을 대인께서는 왜 아무 대가 없이 명나라 수군에 넘겨주셨습니까? 그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몸값을 따로 받은 다음 풀어줬다면 황금 10만 냥은 쉽게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인께서는 상인으로서의 자질이 무척 떨어져서 걱정입니다. 앞으로는 어떤 행동을 하던 제게 먼저 물어보고 하십시오.”

“끙! 일단 같이 일을 해보고, 나중에 적당한 자리를 주마.”

“상업에 관련된 일을 제게 지금 다 넘기셔도 되지만 아직 신뢰가 쌓이지 않았으니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상업 대리인이 아니라 시어머니를 고용한 기분이었다.

“몇 살이지?”

“흐응~ 방에 황금과 백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요. 어제 황금 30만 냥과 백은 50만 냥쯤 벌어들인 모양이죠?”

금괴에서 황금 특유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명명은 그녀 가문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이민호는 명명은 물론 그녀의 가문도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황금 31만 냥에 은 52만 냥은 맞는데, 몇 살이냐고? 말 돌리지 마.”

“숙녀 나이를 묻는 게 아니에요. 일단 열아홉 살이고, 십년 동안 계속 열아홉일 거여요. 대인께서는 언제 관례를 올리셨나요?”

여자 나이는 원래 고무줄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3년 전에 생원이 되면서 관례를 올렸다.”

“관례 후 3년이라면 올해 열아홉이시군요. 그런데 아직도 성혼을 하지 않으셨다고요? 더 늦기 전에 성혼부터 하셔야겠습니다. 남자는 주기적으로 정을 배출하지 않으면 병이 납니다.”

“응? 응.”

그런 이유로 병이 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민호는 일단 긍정했다. 상인 소녀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대인이 곁에 두신 여진족 시녀 겸 호위 둘이 아직도 처녀입니다. 어서 둘의 몸을 취해서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세요. 대인의 안위를 위해서입니다.”

“그런가? 생각해보마.”

“저도요. 이왕이면 오늘 도장 콱 찍어주세요.”

“너는 됐고.”

상인 소녀가 다가오기에 이민호가 손가락을 들고 이마를 밀어 제지했다. 먼저 들이대는 여자가 좋을 리도 없었고, 스스로 고용주라는 인식이 강한 이민호는 자기 보호 하에 들어온 여자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자금성에서 조회는 어떻게 진행되는 거야?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지.”

“예? 모르셨어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상인 소녀를 이민호는 그저 어리둥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가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조회를 열겠어요?”

“뭐? 황제가 없다니 무슨 소리야? 우리는 조공도 하고 국왕 책봉을 받으러 왔단 말이야. 황제가 어디 친정(親征)이라도 떠났어? 전쟁 중이라는 소문은 못 들었는데.”

“자금성에 황제가 있긴 하지만 조회에 나오지 않은 지 벌써 2년째여요. 지금 황제는 정치에 관련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황제가 없으면 또 어때요? 대신이나 대학사, 아니면 태감들하고 이야기하면 되죠.”

“맙소사! 기껏 왕하고 왕비를 만들어왔는데 헛짓꺼리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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