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6화 (25/1,000)

00076   14. 입조  =========================================================================

14. 입조

대형 외륜선 세 척을 이끈 이민호가 항저우에 도착한 것은 경인년(1590년) 10월 하순이었다. 항저우는 폭이 100리가 넘는 넓은 전당강 하구 안쪽으로 한참 들어간 곳에 위치한 강상 항구였다. 강 하구 바깥 남쪽 바닷가에 닝보, 즉 영파가 있고 북쪽 바닷가에 나중에 상하이가 건설된다.

외륜선들이 전당강 하구를 오르는 사이 이민호는 하선을 위해 바삐 움직였다. 이민호는 고산국이 항저우에서 멀지 않음에도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머나먼 남쪽 바다 섬나라에서 온 척하라고 승선자들에게 지시해두었다.

아미족 원주민들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띠에 꽂은 기다란 깃털 장식을 다듬었다. 호위를 맡은 직할군은 총구에 번쩍번쩍 빛나는 예식용 총검을 꽂고 복장을 최종 점검했다. 그 사이 가짜 국왕과 왕비가 입을 조복에 다림질이 덜 됐다고 시녀들이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그러나 거대한 도시가 시야에 들어오자 모든 행동이 일순간에 멈춰버렸다.

“우와! 엄청나게 번화한 도시입니다, 도련님.”

“나도 이렇게 큰 도시는 처음 본다. 오래 돼서 안정감이 있구나.”

계복은 물론 이민호도 처음 와보는 항저우였다. 승선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촌닭처럼 거대한 항구를 넋이 빠진 채 구경했다. 그때 명나라 관리가 작은 배를 몰고 접근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산국 사절단이 맞습니까? 저는 안내를 맡은 예부 주사 황입니다.”

“맞습니다! 고산국 국왕 전하께서 친히 입조하겠습니다. 황 주사 대인께서 안내를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바쁘실 텐데 어찌 국왕께서 직접...... 어쨌든 아주 좋습니다. 저쪽 부두를 비워놨으니 정박하십시오.”

첫 입조라 피차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야 했다. 그래도 국왕이 직접 입조하는 경우는 드물고 잘해야 첫 입조 때 세자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미래를 위해 파격을 선택했다.

중국어를 어설프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계복이 통사로 위장하고 이민호는 고산국 대신의 복장을 갖춰 입었다. 여진족 청년들이 호위병 역할을 맡았다. 이민호는 수하들과 함께 미리 배에서 내려 대오를 갖춘 다음 고산국 국왕의 하선을 기다렸다.

- 부우우~ 둥! 둥! 둥!

취타대가 나발을 불고 북을 울리자 고산국 국왕이 뱃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 건너 먼 나라 국왕의 입조를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널빤지에 빨간 비단천이 펼쳐진 다음 국왕이 한 발을 걸치는 순간 명나라 관리의 수행원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황도에 입조하는 고산국 국왕전하의 행차시오. 물러나시오~”

면류관을 쓰고 조선국 국왕의 대례복을 살짝 간소화시킨 치렁치렁한 곤복을 입은 면복 차림의 국왕이 잔교를 걸어 부두에 안착했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한 국왕 옆에는 새까만 피부의 통통한 여성이 화려한 치적의를 입고 서 있었다. 왕비는 머리 위에 커다란 금발의 가채를 얹었다.

브루나이 제국과 통상을 하던 류큐 왕국 상선이 이민호의 요청으로 호주 원주민을 몇 명 구해왔고, 이민호는 그 중에 적당한 여자를 하나 골라 왕비로 분장시켰다. 노예로 팔려왔다가 고산국에서 아주 잘 먹이니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협조한 왕비는 여자치고는 덩치가 좀 있었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지역 원주민 기준으로 왕비는 대단한 미인 축에 들었다.

“고산국 국왕 전하 부처의 입조를 환영합니다. 남평관에 객사가 마련되어 있으니 드시지요.”

선착성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부 주사와 명나라 관리들이 공손하게 국왕 부부를 안내했다. 국왕이 직접 입조한다고 듣긴 했으나 그래도 설마 직접 오고 왕비까지 함께 올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국왕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명나라 책봉사가 가서 국왕으로 임명해주는 형식이 보통의 조공관계였기 때문이다. 환관 정화의 원정 때 브루나이 국왕이 입조한 적이 있었으나 그곳은 북경으로 수도를 이전한 뒤의 남경이었다.

예부 주사의 입 주변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이민호에게도 다 보였다. 명나라 관리들에게 고산국이 촌스러운 나라라는 인식이 콱 박혀버렸다. 그러나 사실은 명나라에 만만하게 보이도록 이민호가 의도한 것이었다.

명나라에서 골머리를 앓던 팽호군도의 해적들을 단숨에 해치웠으니 명 조정에서 고산국의 능력을 어느 정도 경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력만 강하고 멍청하다는 소문이 나면 이용해먹으려 드는 것이 위정자들의 속성이었다.

중국 역사상 이이제이를 시도하다가 송나라 때 거꾸로 금과 몽골에게 두 번 연속 당해버린 경우가 있어 지금은 조심하겠지만, 정치인 특유의, 그리고 중화주의 특유의 자기만 잘 났다는 인식은 근본적인 한계였다. 이민호는 명나라에게 만만하게 보이면서 반대로 많은 것을 뽑아먹겠다고 작정했다. 기다리면 언젠가 기회가 오기 마련이었다.

“이봐, 국왕!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가끔 손을 흔들어주고 그래.”

“예, 대신님.”

그 사이에 고산국의 허수아비 국왕으로 내정된 필리핀 사람의 조선말이 많이 늘었다. 원래 이름은 타갈로그어로 닭 벼슬이란 뜻의 타파이, 이슬람식 이름은 무하메드라는 암기력만 좋은 평범한 노인이었다. 마닐라에서 브루나이 제국이 에스파냐에게 밀려났지만 종교적 영향력은 여전해서 마닐라를 비롯한 루손섬 지역에 이슬람 전통이 아직 많아 남아있는 시대였다.

가짜 국왕의 기억력이 너무 뛰어난 것이 신기해 이민호가 물어보니 이 노인은 자기가 이슬람 경전 꾸란을 통째로 다 암송하는 하피즈라고 자랑했다. 이 노인에게 사서오경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꾸란을 외우다 보니 암송하는 능력이 극도로 발달한 것 같았다.

항저우에 오기 전에 명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고산국 국왕의 한자 이름을 고봉명(高奉明)으로 적었다. 국왕 이름부터가 명나라를 모신다는 뜻이니 사대주의의 극치인 이름이었다. 고 씨는 사신단이 출발하기 전에 조사가 다시 왔을 때 명나라 황제로부터 사사받은 성씨였다.

“왕비는 좀 더 자연스럽게 웃어. 활짝 미소.”

“웃는다. 호호.”

가짜 왕비는 조선말을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몇 가지 약속된 신호에 따라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왕비는 고산국 왕비 생활에 아주 만족한 듯했다.

다만 국왕 고봉명이 왕비와의 잠자리를 피해서 스스로 미인이라 자부하는 왕비가 의아하게 여길 뿐이었다. 폴리네시아 기준으로 비쩍 마른 노인 주제에 통통한 중년 부인을 아내로 맞이했으면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지만, 가짜 국왕은 호주 원주민이 식인 풍습을 갖고 있다고 여겨 겁에 질린 탓이었다. 왕비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면 이민호도 조금 겁먹긴 했다.

국왕 부부와 사신 행렬 다음으로 대만 중부 산지에 거주하는 아미족 원주민들의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이들은 짧은 원피스에 화려한 깃털로 장식한 머리띠, 색색이 장식한 정강이받이가 특징인 전통복장으로 춤을 췄다. 아미족은 대만 고산족들 중에서도 특히 피부가 하얗고 체격이 가냘픈 편이라,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춤을 추자 구경꾼들 중에서 중년 부인들보다는 처녀들이 더 좋아했다.

부두에 모인 명나라 사람들은 마치 원숭이 구경하듯이 고산국 국왕 부처의 행차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용이다! 길쭉한 주둥이와 비늘, 다리가 네 개야!”

“그냥 큰 악어 아냐?”

“악어가 저렇게 클 리가 없잖아! 악어와는 기품이 달라.”

“아! 악어하고 생긴 게 많이 다르다. 진짜 용일지도 몰라.”

6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악어가 쇠창살 안에 갇혀 꿈틀거리고 있었다. 양자강 하구에도 양쯔강 악어라는 이름의 작은 악어들이 소수 살고 있었으나 이는 엘리게이터과이고, 공물로 준비한 것은 보르네오에서 잡아 온 가비알로서 가늘고 길쭉한 주둥이가 특징이었다. 그 외에도 생김새가 양쯔강 악어와 꽤 많이 달라서 구경꾼들 중에서 이 악어를 용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련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이곳 양자강에도 악어가 사는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몰랐다.”

이민호와 계복은 양자강에 악어가 산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주 옛날 삼황오제 시절에 살았더라도 지금은 멸종한 줄 잘못 알고 있었다. 하마터면 악어를 가져온 것이 헛수고로 돌아갈 뻔했으나 크기와 생김새에 차이가 크므로 그냥 밀고 가기로 했다.

당시 동양이 다 그렇듯 같은 강이라도 지역마다 이름이 달랐다. 장강이 대표적인 이름이고 양자강은 양저우 이하 하류 일부에 국한된 명칭이었다. 같은 한강을 송파강, 마포강, 서강 등으로 부른 것과 같았다.

악어에 이어 수레에 실린 커다란 새장이 구경꾼들 앞을 지나자 더 큰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명나라에 조공할 때 흔히 가져온 극락조였으나 고산국에서 가져온 것은 그것들보다 훨씬 큰 종이었다. 용과 비슷한 악어를 본 다음이라 구경꾼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와아! 저건 봉과 황인가? 꼬리가 엄청나게 길고 화려해.”

“새는 역시 수놈이 더 화려하군.”

“기름에 튀기면 어떤 맛이 날까?”

야만인 나라에서 황제가 다스리는 문명국에 진상하는 대표적인 조공품이 야생 동물이었다. 이민호에게 의뢰를 받은 류큐 왕국에서 극락조 두 마리를 구하느라 고생 좀 했다.

그런데 이 극락조들이 둘 다 수놈 주제에 정답게 붙어 앉아서 부리로 서로의 깃털을 다듬어주고 있었다. 같은 새장에 넣어도 서로 싸우지 않아 내버려뒀더니 수놈들끼리 정분이 나버렸다.

국왕과 사신 행렬이 남평관이라는 객사에 도착했다. 외국 사신단이 입항할 때 항상 그랬듯이 구경꾼들은 좋은 구경을 아주 잘했다. 이민호는 고산국의 특이한 풍물이 사람들 입소문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가길 기대했다.

객사 응접실에서 예부에서 나온 관리가 실무 책임자인 이민호와 만났다. 고산국에 믿을 만한 실무자가 없으니 이런 일도 이민호가 일일이 나서서 다 처리해야 했다.

“고산국의 조공품 목록을 확인해 사본을 만들어 먼저 제도로 보내겠습니다. 반드시 받고 싶은 회사품이 있으면 지금 미리 말씀해주십시오. 최대한 준비해 놓겠습니다.”

“저희야 천조에서 하사해주시는 대로 받겠지만, 저번에 조사께도 말씀드렸다시피 생사를 많이 주시면 좋겠습니다. 백성들이 열심히 물레를 돌려서 비단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 꿈이거든요.”

“예. 특별히 생사를 많이 준비하라고 강조하겠습니다.”

길게 이어지는 조공목록을 확인하던 관리가 눈을 크게 떴다.

“고산국에 유황과 구리, 은이 풍부하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많이 가져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왜구 탓에 해금령을 내렸다가도 오래지 않아 거두길 반복한 것은 일본에서 나는 유황과 구리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고산국 덕택에 앞으로 일본과의 조공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려도 될 것 같습니다.”

“누런 돌과 빨간 쇠가 뭐 그리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상인들이 비싸게 사서 이번에 조공품으로 많이 가져왔습니다. 입조를 명하는 칙사도 구리를 많이 요청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상인들이 사는 것보다 더 쳐줄 터이니 유황과 구리를 캐는 대로 전량 항저우로 가져오도록 하십시오. 흐음. 구리에 은 함유량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본 구리에 은이 많이 포함됐다고 들었는데 고산국 구리에는 은이 거의 없습니다.”

“안타까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명에서 구리는 항상 부족하니 섭섭지 않게 계산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유황과 구리만 무역하면 운송비로 인해 손해를 보실 것 같으니 그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특별히 감합무역 허가장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조정에 상주할 테니 걱정 말고 추진하십시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