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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2화 (21/1,000)

00072  13. 화약 한 통에 처녀 50명  =========================================================================

그 날 저녁 객사에 머문 칙사는 횡포도 부리지 않고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이민호가 예국의 수장인 참판 자격으로 주최한 만찬 때도 칙사는 술을 많이 마시고도 만찬이 끝날 때까지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다음 날 오전 칙사는 공물의 종류와 양, 그리고 회사품의 종류와 양을 이민호와 함께 논의하며 정했다. 제후국이 바치는 조공에 비해 명나라 황실에서 내리는 회사품의 가치가 큰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금액으로 따지면 거의 열 배에 달해 뻔뻔한 장사를 자주 했던 이민호도 많이 놀랐다.

“구리와 유황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구리는 동전, 유황은 화약을 만들 때 필수적인 재료이기에 항상 부족합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우방인 고산국에 구리와 유황이 난다니 대명의 신하로서 정말 든든합니다.”

“그래도 비단을 이렇게 많이 하사해주신다니 정말 성은이 망극합니다.”

“고산국이 1년 1공이라 하나 구리와 유황을 가져오시면 얼마든지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조정에 상주를 청하겠습니다.”

만성적인 부족을 겪는 구리는 명나라에서 언제든 환영하는 자원이었다. 명나라 영역 내에서 산출량이 적은 유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민호 입장에서는 큰 가치가 없는 구리와 유황을 주고 비싼 비단을 많이 받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로써 일본은 명나라에 팔 물건이 은 한 품목 빼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이민호는 모든 사고를 일본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집중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염초와 일본 노예를 바꾸는 무역, 그리고 금과 은을 바꾸는 재정거래 빼고는 일본에서 흥미를 잃었다. 이민호는 염초와 노예 교역을 차단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문제는 이와미 은광을 비롯해 1540년대부터 개발을 시작한 일본의 은광 몇 곳이었다. 특히 이와미 은광은 모리 가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절반씩 지분을 갖고 은을 생산 중이었고, 여기서 난 은이 임진왜란을 준비하고 진행할 때 주요 군자금으로 쓰였다.

조선에서 개발한 은 채광기술인 회취법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일본은 세계에 은을 공급하는 몇 안 되는 생산국으로 떠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일본의 은광을 무너뜨려 채굴을 못하게 하고 싶었으나, 지금 그런 일을 했다가는 괜히 전쟁의 빌미를 줄까 두려웠다.

“감사합니다.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됐는데 천조와 조사 덕택에 기반을 빠르게 닦을 수 있겠습니다.”

“다음에 대명 수군이 해적을 토벌할 때가 생기면 고산국 수군이 잘 도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팽호도를 토벌할 때 복건 순무 대인이 훌륭한 지휘를 하신 덕택에 우리가 그 많은 해적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명나라 수군이 함께 한다면 저희도 든든하겠습니다.”

역시나 칙사는 고산국의 수군 전력을 탐냈다. 해적이 발호할 때는 물론이고 포르투갈이나 나중에 네덜란드가 문제를 일으킬 때도 명나라가 고산국 수군을 동원할 것 같았다. 이는 이민호가 원하는 바였다.

이민호는 복건 순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그날 명나라 수군이 동원한 함선과 병력이 별 것 아니라지만 만약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해전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황실에 바칠 조공품 외에 사신단이 공식적으로 행하는 사행무역도 공무역에 속하니 미리 규모를 정했다. 그리고 사신이나 역관이 개인적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사무역도 공무역의 일종이라 규모를 미리 정했다. 입조하기 전에 칙사와 합의해서 작성할 서류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허허! 회사품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참판께서는 사행무역이나 사무역에도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나라를 세운지 얼마 안 돼 백성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물품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천조의 상품에 욕심이 나는 것은 당연할 것 같습니다. 칙사께서는 혜량해주시길 앙망합니다.”

“허허! 그러시다면야.”

이민호는 칙사에게 선물 공세를 펼쳤다. 사행무역의 규모를 늘려달라는 뇌물이었다. 칙사는 이민호가 바친 선물 중에서 약간만 챙기고 고산국에 많이 양보해주었다. 입조와 공물에 대한 논의를 마치자 칙사가 이민호에게 물었다.

“참판께서는 혹시 해중국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입조를 요구하러 조사가 찾아가려 했는데 며칠 동안 바다에서 헤매다가 결국 못 찾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민호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벼룩에게도 낯짝이 있어서 ‘제가 해중국의 예국 참판이기도 합니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섬 북쪽에 해중국이 있는데 포구로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육로로는 고산국 궁궐에서 북동쪽으로 말을 타고 하루거리에 있습니다. 가끔 토산물을 교역해서 서로 잘 압니다.”

“해중국에서 홍삼과 해삼을 교역한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참판께서도 아시다시피 홍삼과 해삼은 천하의 보물이지 않습니까? 조정 대신들이 그 나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해중국에 소식을 대신 전해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조사가 직접 가서 입조를 정식으로 허락해야 입조를 할 수 있겠지요? 다음에 오실 조사께서는 아예 고산국으로 오셨다가 해중국으로 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작은 나라들끼리 서로 친분이 있는 편입니다.”

이민호가 고산국 예국 참판으로서 명나라 사신들을 맞이해 일을 처리한 다음 사신들보다 먼저 해중국으로 달려가 해중국 예국 참판 신분으로 다시 명나라 사신들을 맞이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혼자 다 하려니 이렇게 힘들었다.

“해중국에 가는 칙사가 괜히 고산국에 폐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국의 사신이 고산국을 통해 해중국에 가신다면 저희 해중국, 아니 고산국의 영광이니 기쁘게 사신들을 안내하겠습니다.”

이민호가 말하다가 또 헷갈렸다. 앞으로도 자주 헷갈릴 것 같아 걱정이었다. 해중국은 교역 중심, 고산국은 산업 중심으로 육성하려 했는데 묘하게 고산국이 먼저 명나라와 통교를 맺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중국이 먼저 명나라에 책봉시켜달라고 사신을 보내 요구할 수도 없었다. 두 나라 모두와 관련된 이민호가 직접 나서기도 어려웠다.

조사는 바로 그 날 낮에 돌아갔다. 이민호는 갖가지 모양의 옷을 입은 원주민들을 이끌고 부두에서 칙사를 영송했다. 일부러 남자들은 상의를 벗게 하기도 했다. 이민호는 칙사의 눈에 이곳 백성들이 바다 남쪽 야만인으로 보이길 원했다.

그 동안 애타게 기다린 소식이긴 하나 갑작스러운 입조 조칙을 받고 놀란 이민호는 부랴부랴 허둥지둥 움직였다. 이제 고산국이 확고한 기반을 갖추고 명나라 항구나 북경에서 편하게 장사할 날이 머지않았다. 조선 사신단이 조공할 때마다 말 수백 필에 물건을 잔뜩 싣고 돌아온다고 들었는데 고산국은 배로 가니 그 몇 배나 실어올 수 있었다.

때마침 류큐 사람들이 멀리 남쪽 섬라와 브루나이로 무역을 갔다가 큰 악어 한 마리와 극락조 두 마리를 구해왔다. 악어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주둥이가 가늘고 긴 가비알이었다. 가비알은 엘리게이터나 크로커다일과는 과 자체가 다른 악어라 무척 특이하게 생겼다. 이민호가 잘 구했다고 칭찬하며 류큐 사람들에게 수고비를 두둑하게 챙겨주었다.

극락조는 원래 종류가 많은데 뉴기니에는 식인종들이 무서워서 못 들어가고 수마트라 섬 근처에서 두 마리를 구했다고 한다. 둘 다 수컷으로 깃털이 화려한 편이었지만 한 쪽은 꼬리가 짧았다.

원래 새 같은 공물은 한 쌍을 잡아 진상해야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꼬리가 긴 놈을 수컷, 작은 놈을 암컷이라고 사기를 치기로 했다.

그런데 10월 하순에 대운하의 시작점인 절강성 항저우에 도착하기로 했으니 앞으로 몇 달이나 여유가 있었다. 절강성은 대만에서 바로 북쪽이라 금방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괜히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다 말았다.

그때부터 궁궐 연못에서 악어를 키웠다. 길이가 6미터나 돼서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러나 가비알 악어는 주둥이가 가늘고 길어서 주로 물고기를 잡아먹는 순한 종류였다.

“고놈 참 귀엽네.”

이민호가 물고기를 주면서 악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악어가 더 달라고 이민호에게 머리를 들이밀면서 애교를 부렸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해룡이 나타나 왕에게 하늘의 신물을 주었다는 소문을 내고 돌아다녔다.

친위군이라 명명된 여진족 기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언덕을 넘어 오랜만에 해중국에 들렀다. 해중국은 교역, 고산국은 산업 중심으로 육성하려 했는데 갑자기 고산국만 커버렸다.

그래도 일본과 류큐에 갈 때는 해중국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으므로 아직 가능성은 있었다. 그리고 해삼과 전복 양식이 성공한다면 해중국의 앞날도 밝았다.

“정지! 아! 국왕 전하, 어서 오십시오!”

고개 정상에 이름만 국경경비소를 뜻하는 관(關), 실제로는 역참에서 민병대원들이 근무 중이었다. 민병대라면 무보수에 장비도 자비 부담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개척 초기라서 일정액을 받고 마을 청년들이 교대로 근무하는 식으로 조직됐다.

“별 일 없지?”

“이 서방네 황구가 강아지 여섯 마리를 낳았습니다. 아! 언세가 미치코하고 연애를 시작했답니다.”

“하하하! 그 어머니 성질로 봐서 언세 그 놈 큰일 났군.”

초기에 정착해 더 안정돼서 그런지 청년들이 조금씩 활발해졌다. 저들을 외륜선에 태워 아시아의 바다를 누빌 날이 멀지 않을 것 같아 이민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들은 사병이나 용병에 불과한 간수군이 아닌 국군이 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 전하.”

“수고가 많으십니다, 영사.”

성문 아래에서 말을 내리고 해중국 대신과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과시용보다는 방어에 중점을 둔 성이라 화려함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고 실용적인 구조로 지어졌다.

“첨지 영감께서 수고가 더 많으시지요.”

“해중국이 많이 정리된 것 같습니다. 이게 모두 변 주부의 덕입니다.”

이민호는 영의정 대신 세운 영중추부사 노인과 덕담을 나눴다. 해중국과 조선의 두 가지 관직 체계 때문에 처음에는 많이 헷갈렸으나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쉽게 넘어갔다. 사실 이중 관직이 의미가 있는 사람은 해중국과 고산국 통틀어 이민호 한 사람밖에 없었다.

먼저 정착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주민 비율이 적어서 그런지 행정 및 자치조직이 고산국보다 먼저 생겼고, 잘 돌아갔다. 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소수 원주민들끼리 처음에는 문화차이로 인한 오해가 많았으나 점점 말이 통해가면서 서로 잘 어울리게 되었다. 지금 논밭에서는 세 인종이 어울려 함께 일했다.

해중국에는 좋은 항구 말고도 약재실험실이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들려서 고산지역 원주민들이 채집한 약재를 분류하거나 시험하고 신약을 합성했다. 페니실린을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하긴 했는데, 양이 너무 적거나 기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폐기하고 말았다.

이민호는 화학과 생화학에 약한 편이라 고등학교 때 화학을 배웠던 기억에 의지해 합성물질 몇 가지만 겨우 만들어냈다. 버드나무에서 살리실산을 추출해 아세틸살리실산을 합성하고 거름종이로 결정을 거른 다음 증류수로 씻어 말렸다. 진통제 아스피린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작용이 우려돼 약사나 의사가 없는 세상에서 함부로 쓰기 어려웠다.

그래서 역시 고등학교 화학책에 나온 아세트아미노펜을 합성해 약 500밀리그램에 밀가루와 이뇨 작용을 하는 약초를 섞어 사탕 크기로 만들었다. 이로써 술과 함께 먹지 않는다면 거의 부작용이 없는 소염 진통제가 개발됐다. 이름은 타이레놀이 아닌 ‘덜 아프게 하는 약’으로 정했다.

============================ 작품 후기 ============================

챕터를 끝내려면 한 편 더 남았는데 고칠 것이 많아 내일 다음 챕터와 함께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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