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7화 (16/1,000)

00067  12. 확장  =========================================================================

돌아오는 길에 이민호는 기뻤다. 노예와 일본인들을 200명 넘게 데리고 온 것보다는 수하 두 명에게 의학과 과학 공부를 시킨 것이 더 큰 일이었다. 육분의 같은 항해 도구도 유용하게 쓸 생각이었다. 일단 배를 더 만들고 무력을 증강시킬 일이 남았다.

이민호는 앞으로 대만에 정착할 사람들의 인종별 구성 비율을 따져봤다. 정치인이 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식생활 때문이었다. 대만 땅 어디서든 김치와 된장찌개를 먹으려면 조선인 비율이 5할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앙법으로 인한 광작과 임진왜란으로 인해 생기는 유민을 다 흡수해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대만 섬의 적정 인구를 5백만으로 잡으면 자그마치 250만을 데려와야 하는데 소빙기가 닥치는 17세기 후반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 많은 인구가 이주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임진왜란과 이앙법의 모순을 이용해 100만 명을 이주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잘 먹이고 의료지원이 된다면 30년 정도에 두 배로 늘이는 것은 문제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원주민이 2할인 백만, 일본인과 중국인이 각각 1할씩, 그 외에 말레이계와 기타 인종을 합해 1할로 잡았다.

대만 중부 해안 서쪽 50km 거리에 팽호도를 비롯한 섬들이 있었다. 이곳 팽호군도에는 오래 전부터 해적들이 자리 잡고 대만해협을 지나는 배를 노략질했다. 역대 중국 정부들이 가끔 토벌하기도 했으나 몇 년 지나면 다시 생기곤 해서 영원한 해적의 낙원이었다.

팽호군도는 해적질하기에 위치도 좋고 태풍을 피하기도 참 좋은데 섬에 물이 부족하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해적들이 종종 대만에 물을 길러 왔다가 해적으로서의 본능을 참지 못하고 원주민들을 상대로 종종 참사를 일으키곤 했다.

이민호가 마카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팽호도에서 나오는 해적선과 마주쳤으나 그때는 지나가는 어선인 줄 알았다. 그 배는 외륜선 두 척을 잠시 살피더니 서쪽으로 지나가서 이민호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섬에서 조업하는 어선이겠거니 했고, 또 다른 배들을 마주쳤을 때도 마찬가지로 무심히 넘어갔다.

그러나 고산국 궁궐에 도착해 보니 매일 같이 대만 남쪽에서 원주민들이 사신을 파견해 해적을 막아달라고 청원해왔다. 대만 남부 원주민들까지 복속시킬 좋은 기회라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해적선들이 외륜선을 지나친 것은 배가 너무 커서 공격하기 부담스러웠거나, 대포를 실은 남만 상선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 해적과 팽호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과장이 심해서 해적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 조그마한 섬에 배가 천 척, 인원이 만 명이라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만 명? 만 명이면 이 대만 섬 전체를 정복하고도 남았겠다. 해적이 그렇게 많으면 뭐하러 조그마한 섬에 틀어박혀 있었겠어?”

이민호가 믿지 않으니 더 이상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정보가 부족해 불안감이 남아 있었지만 정벌 준비는 차근차근 돼 갔다. 지금은 파종과 추수 사이의 농한기라서 조선에서 건너온 백성들에게 급료를 주고 몇 십 명 고용하기도 했다.

조선 남자들은 대부분 군 경력이 있거나 군인의 친족이라서 훈련은 금방 통과했다. 혹시나 명나라 수군을 만날 것에 대비해 남도 수군절도사(南道 水軍節度使)라는 직인도 새겼다.

“해적들을 포로로 잡지 않는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모조리 죽여라! 다만 해적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있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해주기로 한다. 해적의 가족은 여자와 아이들만 포로로 잡는다.”

대형 외륜선 다섯 척에 간수군 800명과 직할군 200명을 나눠 태우고 출항하면서 이민호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 전투가 끝나면 간수군 절반을 조선으로 보내주고 그때부터는 매달 교대로 근무하기로 해서 간수군들의 사기는 무척 높았다.

간수군들이 대만 섬에서 입을 여름 전투복을 만들었으나 간수군들에게 평이 좋지 못했다. 전투가 있을 것에 대비해 덥더라도 두터운 군복을 선호한 탓이다. 그래서 배를 타고 전투할 때는 기존의 두꺼운 전투복을 입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옷의 두께와 긴팔과 반팔이라는 차이만 다르고 디자인 자체는 비슷해서 어색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간수군을 운용하면서 조선에서 하도 말이 많아 장기적으로는 대만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교체할 예정이었다. 대만에서 농사짓는 조선인들이 군에 지원하는 것을 보고 충분한 가능성을 찾았다.

그러나 곧 임진왜란이 시작되니 이민호가 조선 땅에서 활약하려면 이들을 계속 고용해 당분간 간수군이라는 편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간수군들을 개인적으로 꾸준히 대만으로 유입시킬 계획이었다.

새로 고용된 간수군 천 명 중에서 지금까지 50명 정도가 관두고 일부는 조선으로 돌아갔다. 간수군에 입대하겠다는 대기자들이 많아 충원은 즉시 이루어졌다. 그리고 퇴직한 간수군 중에서 30명 정도가 고산국에 정착했고, 그 중에 20명 가량이 직할군에 들어왔다.

17세기 초반 네덜란드가 팽호군도를 점거하고 있을 때 복건 순무 남거익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선 2천 척이 몰려와 군도를 물샐 틈 없이 포위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강력하다고 알려진 범선에 탄 네덜란드인들이 질릴 수밖에 없는 숫자였다. 결국 네덜란드 사람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협상을 통해 팽호도 대신 대만에 정착한 것이 원래 역사였다.

이민호는 명나라 수군에게 들키지 않도록 자정 무렵에 출항해 아침 일찍 팽호군도로 접근했다. 이민호는 해적 본거지에 대한 기습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어부들은 물론 해적들도 물때에 맞춰 사는 사람들이라 섬에서 즉시 대응해왔다.

섬에서 하나 둘 나오던 해적선이 어느새 백여 척이 넘어섰다. 해적들이 어느 정도 전투 준비를 마쳤다고 판단했는지 한꺼번에 외륜선을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새파란 바다가 크고 작은 해적선들로 가득 메워졌다.

“도련님! 정말 많습니다.”

“그래. 진짜 개떼처럼 많다. 명나라라서 그런지 군선이든 해적선이든 단위가 다르구나.”

해적들은 큰 배가 30척, 작은 배가 80척 정도였다. 갈레온과 비슷하게 생긴 아주 큰 배도 한 척 있었는데 해적 두목선으로 생각됐다.

“도련님! 해적선 일부에 대포가 탑재됐습니다.”

“그래. 나도 봤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

명나라 사선급의 큰 배에는 80명 가까이 타고 작은 배는 열 명 정도라 총 인원은 3천 명이 약간 넘었다. 그러나 원주민과 싸운 육전과 달리 해적들은 비록 수는 적다 해도 대포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서양 범선들을 약탈하겠다고 맞붙어 싸운 것이 명나라 해적선들이었다. 해적들에게 대포가 없었다면 갈레온이나 나우 상대로 싸움을 걸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걸 써야겠는데?”

“써야죠. 아끼면 똥 됩니다.”

계복과 함께 선수루에 오른 이민호가 외륜선에 탑재된 유일한 대포를 만지작거렸다. 보통 때는 기계식 연발 쇠뇌인 연노를 설치하던 곳인데 연노를 제거하고 오늘은 그와 비슷하게 생긴 대포를 설치했다. 다른 외륜선에는 연노밖에 없었다.

개인이 화약을 사용했다가 경을 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민호는 항상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민간에서 화약을 만들지 못하게 관에서 감시하면서도 호랑이 사냥꾼이 승자총통을 들고 다니기도 하는 곳이 조선이었다.

이민호의 개인 호위였다가 간수군 대정을 거쳐 어느덧 선장(船將)이 된 이민호의 집안 종들이 다른 외륜선들을 잘 지휘했다. 외륜선 다섯 척이 횡대로 펼쳐져 해적선 100여 척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

이민호가 지휘하는 좌선에는 주로 집안 종들과 여진족 아이들이 탔고, 나머지는 조선에서 건너온 이민자들 중에서 급료를 주고 뽑아 태웠다. 배 운행은 해동상단에서 오래 일해 온 사공들이 맡았다. 처음으로 배 한 척을 믿을 만한 사람들로만 채웠다.

- 뻐엉! 콰직!

굉음과 함께 해적선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날아오더니 외륜선 선수루 아래 갑판에 맞아 구멍이 뚫렸다. 아마 선장실 근처인 것 같았다. 갈레온처럼 선장실을 키가 있는 선미루 쪽에 설치할 것을 잘못했다. 그러나 외륜선은 선미 쪽이 바퀴 돌아가는 소리로 너무 시끄럽다는 문제가 있었다.

해적선에서 포탄 몇 발이 더 날아왔다. 대부분은 바다에 빠져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그쳤지만 몇몇은 외륜선 전면을 직격했다. 간수군들이 많이 놀라 허둥거렸다. 그러나 아직 거리가 멀어 소총으로 반격할 수가 없었다.

“쳇! 마치 판옥선을 상대하는 왜선에 탄 기분이다.”

“이런 상황이니 외륜선에서 대포를 사용하겠다고 조정에 허락을 받으십시오.”

“들어줄까 모르겠지만 간수군들이 이 꼴을 봤으니 잘하면 되겠다. 계속 전진! 사거리가 되면 쏴!”

- 타타타탕! 타탕!

해적선들과 6백 미터 정도 접근하자 선수루에 오른 간수군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외륜선의 선수루가 높아서 단일 갑판인 사선에 탄 해적들은 완전히 노출된 곳에서 총탄에 마구 맞아 쓰러졌다. 사선이나 다른 해적선들은 갑판 주위에 여장이나 패판을 두르지도 않았고, 따로 방패를 달지도 않아 장애물이 전혀 없이 쏘는 대로 맞았다.

작은 배에는 조총을 가진 자가 한두 명밖에 없었다. 큰 배에 조총수들이 집중적으로 많이 탔으나 가까이 오기도 전에 간수군들이 먼저 쏘아 쓸어버렸다. 해적선들은 끊임없이 꾸역꾸역 몰려왔고, 총격전은 계속됐다.

- 핑! 따악!

이민호의 귓가를 스치며 지나간 총알이 돛대에 맞았다.

“무지막지하게 몰려옵니다.”

“계복이 너도 계속 쏴!”

쏴도 쏴도 끝이 없어 어느새 외륜선이 해적선들에 둘러싸였다. 해적들이 갈고리를 던져 배에 오르려 했다. 해적들은 폭이 두꺼운 칼로 갑판 여장을 콱콱 찍으며 기어 올라왔다. 간수군들이 총검으로 찌르고 사공이 몽둥이로 후려쳐서 해적들을 바다로 떨어뜨렸다.

“가까운 해적선에 수류탄 던져!”

안전손잡이를 누르고 안전클립을 벗긴 다음 안전핀을 뽑아서 던지는 현대식 수류탄이 해적선으로 날아갔다. 여기저기서 펑펑 하는 폭음이 바다 전체를 울렸다.

외륜선에 접근한 해적선에서도 외륜선 갑판에 불더미를 집어 던졌다. 한 편으로는 전투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배에 붙은 불을 꺼야 해서 다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위기에 몰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포를 쏘기로 했다. 목표는 사선들과 달리 갈레온을 모방해 커다란 선수루와 선미루를 가진 해적 두목선이었다. 그러나 모방 정도가 아니라 서양인들이 만든 배를 샀거나 노획해서 쓰고 있는 지도 몰랐다.

다른 배에 탄 간수군들에게 변명할 때는 연노를 쐈는데 우연히 해적선의 화약통에 맞아 흘린 화약이 불길에 닿아 폭발한 것으로 거짓말하기로 했다. 물론 여기서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 쾅! 쿠앙!

거리가 가까워 쏘는 즉시 맞았다. 해적선 선수루가 직격당해 조총을 쏘던 해적 20여 명이 파편과 폭발압력에 의해 한꺼번에 날아갔다. 두목을 잃었는지 아우성을 치는 해적들을 향해 선미루에서 소총을 연달아 발사해 다 쓸어버렸다.

주퇴복좌기가 뒤로 밀리는 순간 계복이 갈고리를 걸어 누런 포탄 탄피를 뽑아냈다. 계복이 걸레 달린 밀대로 포구를 청소한 다음 포탄을 장전했다. 이 배에서 대포를 쏠 수 있는 사람은 이민호와 계복 둘 뿐이었다.

- 콰앙!

이번에는 해적 두목선의 선미루에 명중했다. 조총을 쏘는 자들과 대포에 화약을 넣던 자들, 그리고 키를 잡고 돌리던 자가 한꺼번에 파편에 휩쓸렸다.

해적 두목선은 배를 조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쓰러져 물살에 따라 흘러갔다. 그러나 두목이 어떻게 되든 말든 해적선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해적선은 숫자가 20배가 넘었지만 부서진 자기들 배에 얽히고 서로 막혀 전진해오는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덕택에 다섯 척에 불과한 외륜선에서 그나마 간신히 상대할 수 있었다.

해전은 몇 시간째 계속 이어졌다. 이민호도 팔에서 힘이 빠져 제대로 소총을 쏠 수가 없었다. 이민호가 가진 총탄 100발 중에서 어느새 20발도 남지 않았다.

정말 더럽게 안 맞았다. 흔들리는 바다에서 총을 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실탄이 떨어진 자들이 대정을 불렀고, 대정이 오마다 실탄을 나눠주었다. 전투는 그렇게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은 조금 더 수정해서 오전 중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