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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66화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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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들이 발목에 맨 차꼬를 풀고 씻긴 다음 새 옷을 사서 입혔다. 그 사이 선교사가 본업인 포르투갈 의사가 검진을 하고 간단한 진료를 해주었다. 노예의 발목에 난 상처를 소독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이민호가 두아르테에게 물었다.

“동 두아르테! 혹시 포르투갈 의사를 고용할 수 없겠습니까? 해중국에서 장기 근무하고 일 년 단위로 교대하는 식이면 좋겠습니다. 봉급은 충분히 보장하겠습니다.”

“으음. 상선에 배치된 의사 말고는 마카오 통틀어서 의사가 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저 분은 소명을 받은 분이기에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저 의사에게 젊은이들을 맡겨 의술을 배우게 하지 그러십니까? 유명한 이탈리아 대학에서 이발사-외과의사 과정을 수료한 분입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중세에 내과의와 달리 피 뽑고 붕대 감는 외과의들은 기술자로 취급돼 사회적 신분이 낮았다. 대학에서 아예 외과를 두지 않았다가 나중에 만든 것이 이발사-외과의사 겸업 단기과정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나쁘지 않아 근세 유럽에 많은 외과의를 배출한 계기가 되었다.

의사도 제자를 받아들이겠다고 허락했다. 외과의는 단기 과정을 통해서도, 또는 직공처럼 도제 제도를 통해서도 양성됐으니 이것만을 두고 돌팔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민호는 성 바울 성당과 성 도미니크 성당, 그리고 자비의 성채에 거액을 기부하고 여진족 청년 두 명을 6개월 동안 맡기기로 했다.

여진족 청년들이 조선과 국경을 접한 시전부락 출신이라 의원이 하는 일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주술사 비슷하게 여기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었다. 이민호는 둘을 위해 집을 구해주고 생활비로 쓸 스페인 은화를 많이 넘겨주었다.

“너희들이 할 일은 세 가지다. 여기서 의술을 배우고 남만어를 익혀라. 마카오에서 일이 돌아가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중에 나에게 알려다오. 뱃사람들이 거칠어서 너희들을 무시할지 모르지만 가급적 싸움은 하지 마라. 그래도 시비를 걸면 말 타는 솜씨 한 번 보여주고 몽골 사람이라고 사기 쳐. 그럼 다 도망갈 거야. 알았지?”

청년이라기에는 아직 어린 소년들인데도 여진족답게 마술은 타고 났다. 달리는 말 두 마리의 잔등에 한 발씩 얹고 진행 방향과 반대로 서서 단검 다섯 개로 저글링하는 것을 보고 이민호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이런 애들에게 의학 공부를 시킨다는 것이 어쩐지 인력낭비 같았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주인님 밑에서는 항상 공부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말 좀 타고 다니면서 재미있어지나 했더니 또 공부를 시킵니까?”

“어? 공부 시켜서 미안.”

저 나이에 가만히 앉혀두고 공부 시키면 다들 싫어하는 것은 한국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친 이민호도 당연히 알았다. 게다가 하필 두 명은 승마술로 몽골인들에 버금간다는 여진족이었다.

“그런데 주인님은 왜 하필 저를 뽑았습니까? 제 아버지가 당신에게 죽는 모습을 제가 직접 봤다고 했잖습니까! 주인님이 제게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신다면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전쟁에서 정상적인 교전 행위인데 뭘? 나를 죽이고 싶으면 반대쪽에 붙어서 전쟁터에서 만나 당당히 죽여. 그럴 실력은 돼?”

“쳇! 실력은 됩니다.”

여진족 청년이 틱틱거리기는 했지만 의사 공부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말끝마다 꼬박꼬박 주인님이라는 말을 붙이는 주제에 이민호를 배신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제 돌아갈 때였다. 수하들에게 짐을 챙기고 노예들을 이끌게 해서 외륜선으로 보냈다. 노예시장에서 나와 선착장으로 가려던 길에서 한참 동안 망설이던 두아르테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동 리께서 노예를 인간적으로 다루실 것 같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저는 상인이라 별로 시킬 일도 없고, 비좁은 사무실과 집에 데리고 있기는 더 이상 곤란해서 그렇습니다.”

“불쌍한 노예들이 있습니까? 동 두아르테의 체면을 봐서 제가 사드리지요.”

“노예들은 아니고 마닐라에서 살다가 에스파냐 총독에게 추방당한 일본인들입니다. 마카오에서는 명나라 관리의 눈에 띄면 참살당할 수 있기 때문에 숨겨놓았습니다. 저는 일본인 해적들이 싫지 일본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 두아르테의 부탁이고 고산국, 아니 해중국에 땅이 많이 남으니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그들을 소작농으로 정착시킬 테니 안심하십시오.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일본 전국시대에 기리시탄이라 불리며 여러 영지에서 박해받은 천주교 신자들이 일본 땅에서 쫓겨나 수천 명 단위로 마닐라에 정착했다. 그러나 마닐라를 장악한 에스파냐 총독이 생각날 때마다 발작적으로 쫓아내곤 했다.

일본인들은 동남아 여러 지역에 분산됐는데 마카오에 흘러들어온 이들은 그 집단 중 일부였다. 그 전에 16세기 중반 주인선 무역을 하던 일본 상인들, 왜구의 후손, 전국시대에 전쟁에 패해 낭인으로 신분이 추락한 사무라이들이 동남아 이곳저곳에 정착촌을 형성해 생활하고 있었다. 샴 왕국의 수도 아유타야와 북베트남의 통킹에도 시대에 따라 1~2천 명씩 살았다.

“이곳에 70명 정도 있고 다른 지역에도 연락할 수 있습니다. 최대 3천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위치만 알려주시면 배를 보내 그들도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하지만 해중국에 성당을 세우더라도 신부가 한 분도 없습니다.”

“오오! 선교사들에게 연락해서 해중국에 신부를 파견해달라고 하겠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대만을 날로 먹었다. 기존 해중국에서 농사를 짓는 일본인들 말고 고산국 영역에 일본인 마을을 만들 계획이었다. 이를 토대로 일본과 교역을 통할 계획을 세운 이민호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그런데 신심이 깊은 두아르테가 불쌍한 자들이라고 칭한 이들은 또 있었다. 이민호가 일본인 기독교인들을 쉽게 받아들이자 두아르테도 이제 그를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두아르테는 노예시장에서도 가장 구석으로 이민호를 데려갔다.

“인류는 언제나 전쟁을 했지만 바로 그 전쟁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봅니다. 동 리께서 데리고 다니는 아이들은 체격이 아주 좋더군요. 저들처럼 잘 먹여주시리라 믿고 이들을 부탁합니다.”

“좀 봅시다. 어? 금발이군요.”

10대 중후반 애들이 지친 표정으로 오두막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대략 80명인데 대부분 여자인 것 같고 남자애도 몇몇이 있었다. 그런데 피부색은 물론 머리색도 꽤나 컬러풀했다.

동 두아르테가 프랑스에서 넘어온 포르투갈 귀족 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황인종보다는 금발머리를 한 아이들을 좀 더 측은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서유럽과 남유럽 아이들의 금발은 나이가 들면서 진한 색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오스만의 갈라티아 노예들입니다. 아나톨리아 고지대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오스만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면서 포로들이 대량으로 아랍 노예시장에 풀려나온 것 같습니다.”

켈트족 후손이라 그런지 빨간 머리가 꽤 많이 눈에 띠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남아서 아직 어린 줄을 알았지, 유전자가 원래 그런지 발육은 다들 좋았다.

이민호는 이들에게 엘프족이라는 이름을 붙여 왕궁 후원과 왕실 전용 텃밭의 관리를 맡길 생각이었다. 여자들치고는 다들 체격이 커서 가냘픈 엘프의 체형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동유럽 노예가 이곳에 등장할 리 없으니 이민호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레판토 해전을 통해 잘 알려졌듯이 오스만 투르크에서 남자 노예들은 갤리선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 노를 젓고 여자애들은 멀리 팔려간다고 했다. 갈라티아 노예들은 이곳에서 창기로도 팔리기 어려운 백인이라 그런지 값이 형편없었다. 취향이 독특해 색목인 여자를 구할 바에야 말이 조금은 통하는 위구르나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에서 구하는 게 나았다.

노예상이 달라는 대로 비단 몇 필을 주고 애들을 모두 사서 계복을 시켜 외륜선에 태웠다. 여자 좋아하는 계복도 혐오감이 든다면서 금발머리 여자애들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이민호는 두아르테와 함께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곳 직원인 듯한 중국인 남자가 두 사람에게 차를 대접했다. 이민호에게는 녹차보다는 우유를 살짝 부은 홍차가 입에 훨씬 잘 맞았다.

“요즘 이란이나 인도 소식 좀 전해주십시오.”

“국제정세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의 압바스 1세는 영민한 군주로서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무굴제국의 악바르는 인도 북부를 통일하고 펀자브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대단한 정복군주입니다. 아마 내년부터는 남쪽으로 확장할 계획 같아 고아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 상인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대화하는 중에 환갑이 다 된 노인 수도사가 두아르테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두아르테가 심부름 보낸 중국인 사환의 등에서 힘겹게 내린 수도사가 무릎을 두드렸다.

“프로이스 선교사님! 오랜만에 낮에 나오셨습니다. 선교사님이 흡혈귀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낮에도 자주 나오세요.”

“동 두아르테! 반갑소. 요즘 책을 쓰느라 바빠서 말이오.”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를 쓴 사람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교황청의 전위부대로서 가장 위험한 일을 맡아 가장 먼 곳까지 와서 일했다. 이들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마카오에 기반을 두고 명나라와 일본, 동남아 여러 국가에 파견돼 포교 및 외교활동을 하며 마카오에서는 주로 비단 무역에 종사했다. 그리고 17세기 전반에는 네덜란드의 침공에 맞서 마카오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기도 했다.

두아르테가 일단 포르투갈어로 설명하고 나서 이민호가 정식으로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이야기를 듣던 수도사의 주름진 얼굴에 환희가 피어나며 연신 성호를 그었다.

“마카오 북동쪽에 포르모사라는 큰 섬이 있습니다. 마닐라에서 추방된 일본인 신자 3천 명을 농민으로 수용해 정착시키려고 하는데 교회당을 세워도 신부가 없으니 지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오! 머나먼 아시아에서 하느님의 역사가 스스로 이루어집니다.”

천주교 성당 하나 지어주고 일본인 3천 명의 충성심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이민호 입장에서는 많이 남는 장사였다. 물론 욕심을 내서 대성당을 짓는다면 아무리 부자인 이민호라도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마카오에 있는 성 바울 성당 정도는 가뿐히 지어줄 재력이 이민호에게 있었다.

또한 고산국이 천주교에 호의적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구 유입이나 통상 문제에서 여러 가지 유리한 점을 취할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물론 일본이 조만간 종교탄압을 할 테니 일본에 들키면 곤란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일본에 갈 때는 다른 나라 이름을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부탁드릴 게 또 있습니다. 의사인 선교사 분에게 제 수하 두 명을 맡겼는데 다른 선교사님이 그들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쳐주도록 해주시겠습니까?”

“동 리께서 성당에 거액을 기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개월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우리 선교사들이 각각 한 과목씩 맡아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젊은 나이에 앉아서 공부만 하게 생겼다고 불평하던 녀석이 과학까지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마카오에 여진족 학생 두 명을 위한 대학이 세워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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