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12. 확장 =========================================================================
동인도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은 1510년에 인도 남서부 고아에 도달하고, 1511년에 만자국이라고 실록에 기록된 말래카를 점령한 뒤에 중국 남부에 도달했다. 향신료를 비롯한 중개무역의 중심지는 말래카, 가톨릭 전도의 중심지는 고아였다.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이 리스본에서 출발해 마카오에 도착할 때까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저 두 곳이었다. 리스본까지 가지 않더라도 마카오의 배들이 고아와 말래카를 정기적으로 왕래했다.
“손해를 안 본 것 같아 다행입니다. 조만간 제가 말래카까지 가서 팔기 전에 동 두아르테가 많이 파셔야 합니다.”
“하하! 무섭습니다. 그런데 이곳까지 어떻게 오시게 됐습니까?”
대화 중에도 두아르테의 눈이 수하들이 지고 있는 나무궤짝을 훑어보고 있었다. 안에 담긴 물건이 금이나 은처럼 무겁지 않다는 것을 파악한 두아르테가 활짝 웃었다. 이민호가 두아르테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옥 도자기를 팔러 왔습니다.”
“오오! 환영합니다! 옥 도자기를 사려고 황금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민호는 두아르테의 안내를 따라 상회의 응접실에 들어가 상석에 앉았다. 다른 곳에서 옥 도자기를 만들 수 없으니 당분간은 독점적인 판매자 우위의 시장이었다.
소문을 듣고 주변에서 상인들이 몰려왔다. 명나라 상인들이 옥 도자기의 견본을 잠깐 살피더니 돌아갔고, 명나라 관리는 외국인끼리의 상거래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며 물러났다. 19세기 후반이 되기 전에는 마카오가 아직 포르투갈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이 이렇게 이민호 눈앞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이민호가 포르투갈 상인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와서 명나라 관리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
판매는 무척 잘 되었다. 두아르테가 일부를 사고, 다른 상인들이 살 때는 통역을 도와주었다. 거래 금액이 너무 커서 계복이 몇몇 수하들과 함께 판매대금으로 받은 금과 은 궤짝을 수시로 외륜선에 옮겨야 할 정도였다.
수원에서 해체해 고산국에 들여온 방직기를 돌려 짠 비단도 대량으로 팔았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20세기 초까지 비단은 여전히 수공업 제품으로 남았으니 가격 경쟁력이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품질도 좋았다. 명나라에서 생사를 수입해 좀 더 정밀하게 화학적 처리를 해서 광택이 아주 약간 더 좋았고, 그래서 이민호가 파는 비단은 고급품으로 취급됐다.
사치품 시장에서는 상대적 우위가 중요했다. 경쟁 제품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품질이 좋으면 훨씬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중국 비단을 일본에 팔아 이익을 얻어왔는데 이건은 유럽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품질과 가격에 따라 일본에서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품질에 따른 분류와 가격체제가 포르투갈 상인들 사이에서 훨씬 세분화돼 있었던 덕에 이민호는 비단 장사를 아주 잘할 수 있었다. 이민호는 앞으로 비단은 마카오에서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동 두아르테. 오늘 판매를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홍차 드실 때 이 찻잔을 쓰십시오.”
“세상에! 수고료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합니다. 저도 이 물건을 가져가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요. 더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마카오에 처음 오셨을 테니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두아르테는 기본적인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민호를 통해 큰 이득을 얻는 사람이니 예의를 차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당연한 것을 하지 않는 염치없는 자들도 세상에는 많았다. 물론 착하게만 보이던 사람들이 기회를 봐서 이민호의 배를 약탈할 가능성을 이민호는 항상 열어두었다.
“그럼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항해 도구를 사러 왔습니다. 육분의와 나침반, 시계, 컴퍼스, 노트 측기를 사고 그 사용법을 교육받고 싶습니다. 세계지도도 최신판이 있다면 사고 싶군요.”
이민호는 두아르테가 소개한 잡화점에 함께 들어갔다. 진열대에 필요한 것들이 늘어서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항해도구들도 있어 살 것은 많았다. 아랍의 항해술에 중국의 나침반을 합해 가능해진 대양항해의 과실을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따먹고 있는 시대였다.
육분의는 천체의 고도를 측정해 위도를 파악하고 산의 고도, 두 지점 사이의 수평각을 측정할 때 이용되는 도구다. 잡화점에서 파는 육분의는 생각보다 훨씬 정밀해서 도 단위가 아니라 그 60분의 1인 분 단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였다. 대신 부피와 무게가 꽤 나갔다.
“측정오차가 보통은 1분이나 0.5분인데 10초에 달하는 정밀한 육분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위도를 파악해 항해해야 할 정도로 대양을 항해하시려고요?”
“동아시아의 바다도 육분의를 활용해야 할 만큼 넓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하! 강력한 외륜선을 여러 척 갖고 계시니 해중국의 동 리께서는 못 가시는 곳이 없겠지요.”
이민호는 임진왜란 전까지 건조할 상선과 대만 근해에서 사용할 함선을 합해 모두 20척을 예상하고, 배마다 항해도구 3세트씩 구매했다. 60세트를 한꺼번에 사가자 잡화점 진열대가 휑하니 비어버렸다.
세계지도는 1630년대에 작성된 것만 해도 꽤나 정확한 편이지만 아직 이 시기의 동아시아 쪽 지도는 엉망이었다. 다만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유럽은 정확한 편이라 종류별로 한 장씩만 구입했다.
“시계나 자명종은 없습니까?”
“그게, 선교사들이 명나라의 고관대작들에게 선물로 바치느라 물건이 항상 부족합니다.”
잡화점 상인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상업과 종교가 강력하게 결합된 마카오에서 이익보다 선교가 앞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음에 올 때 살 테니 서너 개만 부탁합시다. 선금을 드리겠습니다.”
“약속하기 어렵겠습니다. 선교사님이 달라고 하면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자주 오겠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개신교의 교세가 확장되고 이에 대한 반발로 1534년에 예수회가 결성됐다. 예수회는 특이하게 신학과 자연과학을 결합해 과학문명을 선교에 이용하고, 현지의 관습을 인정하면서 선교를 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고능력을 가졌다.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자명종과 천문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처음 포교하는 곳에서 가장 강력한 포교 수단이 되었다.
13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개발되어 14세기에 도시의 종탑에 설치된 시계와 자명종은 동양에는 15세기에 처음 들어왔다. 자명종은 나중에 청나라와 일본에서 복제하고 조선에서도 두 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였다. 이민호는 자명종의 구조를 파악한 다음 대량 복제해서 동아시아의 귀족이나 특권층들에게 팔아먹을 생각이었다. 또한 항해할 때 경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시계나 자명종은 필수적이었다.
이민호와 두아르테는 잡화점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야채들을 유심히 살피던 이민호가 물었다.
“혹시 고구마가 들어왔습니까? 달짝지근한 감자 말입니다.”
“아! 조금 길쭉한 뿌리 식물 말씀입니까? 바다 건너 에스파냐 식민지인 필리핀에서 재배되고 있지만 마카오에는 보시다시피 땅이 좁아서 아무 것도 재배하지 못합니다.”
“고구마를 구해주십시오.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마카오와 마닐라 사이에 정기편이 있습니다. 다음에 또 마카오에 오신다면 그때까지 얼마든지 준비해드리지요.”
원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오래 된 앙숙이었는데 1580년 펠리페 2세가 두 나라의 국왕이 되면서 유럽 본국이든 해외에서든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은 없어졌다. 그러나 두 나라는 행정과 조세 등에서 독립적이었고 엄격히 분리된 면이 있었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아시아에서는 오직 마카오에서만 포르투갈 사람들이 독립국 행세를 하면서, 에스파냐 사람들도 불쾌감을 느껴 지금은 서로를 무시하고 있었다. 당시 마카오는 포르투갈 동인도회사에서 분리된 자치도시였고 마닐라는 왕실 직할령이라는 차이도 있었다.
“마카오에 일본인 사무라이들이 소수 산다고 들었는데 없군요.”
“그 천하고 무례한 놈들 말입니까? 전에는 용병으로 고용돼 몇 십 명 있었는데 역겹고 배신 잘하는 놈들과 싸우다가 지금은 필리핀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인들이 중국인들과 싸운 다음 거주지를 옮긴 모양이라고 이민호는 알아들었다.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못하면서 안 듣는 자리에서는 이렇게 욕을 해댔다.
인도나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과 달리 동아시아, 특히 명나라와 일본 근처에서는 유럽 범선들이 함부로 해적질을 하지 못했다. 명나라가 무역을 당근으로, 수군 군선을 채찍으로 삼아 함부로 해적질하다가는 토벌당하거나 무역이 금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에 몇 만 단위로 전쟁에 동원되고 조총을 대량으로 쓴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일본도 강대국 대접을 받았다. 주변 해역을 돌아다니는 상선들의 무장 수준도 높아서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마카오에 노예시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노예시장에 안내해달라고요?”
“혹시 조선 사람이 노예로 팔려왔으면 사고 싶습니다.”
“동 리 같은 고결한 분이 노예를 사시겠다니, 전혀 뜻밖입니다.”
“아! 제가 조선 출신이라 동포를 구하려는 겁니다.”
두아르테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노예는 쉽게 입에 올릴 주제가 아니었다.
“역시 훌륭하신 분이군요. 그런데 아마 지금은 조선인 노예가 없을 겁니다. 일본 해적들이 마카오를 방문한 지 꽤 오래 지났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출신 노예라도 구입하시겠습니까?”
“혹시 기술자나 회계사, 아니면 항해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고아나 말래카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는 그런 고급 노예가 거의 안 나옵니다. 항해사라면 자유인들밖에 없어 직접 고용해야 하는데 지금은 어려울 겁니다. 40년 전에 왕이라는 해적 두목에게 고용된 항해사들이 몇 있었습니다만, 그들이 죽은 다음부터는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동양인의 배에 고용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민호는 가정 왜구와 해적 두목 왕직을 떠올렸다. 중국인 해적들이 사용하는 배에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고용됐었고, 이들이 다네가시마에 조총을 전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핀투라는 사람이 쓴 모험기에는 그가 일본에 최초로 조총을 팔았다고 주장했으나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노예 시장에 도착했으니 이민호는 노예를 많이 사고 싶었다. 건국 초기에 싼 값으로 무력과 경제력을 늘리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는 전쟁하는 곳이 드물어 노예 공급이 부족하다고 했다. 브루나이 제국이나 술루 지역의 해적들에게 납치당해서 팔려왔을 말레이계 노예 50명을 구입했다. 고향에 돌아가도 이미 초토화됐을 테니 노예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이민호를 따라왔다. 이들은 바닷가 마을 출신이라 잠수에 능해 전복과 해삼 양식장에서 일을 시킬 생각이었다.
10대 중후반의 흑인 남자노예들도 20명쯤 샀다. 지금은 못 먹어서 비쩍 말랐지만 이민호는 육체적으로 우월한 흑형의 유전자가 어디 가지는 않을 것으로 믿었다. 이민호는 선탠 빼고 못하는 게 없다는 흑인을 어디에 써먹을까 고민했다. 사실 흑인 유전자가 황인종과 백인종을 합한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보니 신체적으로 우수한 개체가 눈에 많이 뜨일 뿐이었다. 피그미족도 흑인이다.
“가격이 의외로 낮군요.”
“유럽에 비해서는 비싼 편입니다.”
포르투갈이 주도하던 유럽 노예시장에서 노예 가격은 15세기에 말 값의 30분의 1이었다가 16세기에 들어서 6~8분의 1로 올랐다. 말 값의 3분의 1 선을 유지했던 조선 노비 가격의 절반 이하에서 심하면 10분의 1이었다. 노비든 노예든 소나 말에 비해 힘이 부족하면서도 관리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가격이 높게 형성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