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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63화 (1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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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확장

궁궐 축조와 더불어 고산국의 국가 건설이 점점 가속화됐다. 농지 개발은 지금도 외곽에서 진행 중이며 농수로와 도로가 닦이고 마을 단위로 행정체계 설치가 이루어졌다. 고산국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면 기존 원주민의 사회체계가 그대로 존속해 신구 체계가 충돌할 일도 없었다.

원래 소유하던 땅을 내놓고 새로 개간한 땅을 불하받은 원주민들은 새로운 농법을 전수받았다. 경작할 농지 면적이 줄어들었어도 생산량이 몇 배나 되어 원주민들은 고산국에 소출 절반을 바치고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공납으로 따로 걷는 것이 없었고 부역에 나가면 품삯을 주는 탓에 오히려 원주민들이 더 원했다.

이민호는 바닷가 마을에 염전을 만들어 원주민들이 그 동안 명나라에서 수입했던 소금을 자급자족하게 했다. 물론 산출량의 절반은 고산국 창고로 향했지만 예전보다, 그리고 다른 일반 농민들보다 훨씬 풍족하게 살게 되었다. 평지 원주민들이 산지 원주민들에게 소금, 건어물, 곡식을 주고 고기와 가죽, 약재를 받는 교류가 더욱 활성화됐다. 원주민 축제는 더 화려해지고 술도 더 많이 담가 마셨다.

이민호가 가끔 생각날 때마다 마을 단위로 곡식 종자나 면포를 선물로 주고 나서 잊어먹은 것처럼 거의 내버려뒀지만 효과는 컸다. 짧은 시간에 대만 북부의 원주민 중에서 이미 복속했던 케타갈란과 아타얄을 제외하고도 바사이, 쿨론, 사이시얏, 타오카스, 카발란 부족이 차례로 귀부해왔다. 이민호는 이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농지 개간이 필요할 때마다 품삯을 주고 고용하는 방식으로 느슨한 지배를 계속했다.

그 외에 대만 중부나 남부 원주민 부족들과도 교역과 종자 지원 등의 방법으로 교류를 이어나갔다. 고산국이 무력을 동원해 영토 확장을 할 기미가 전혀 없자 원주민 부족들은 고산국과 해중국을 새로운 이웃 중에서도 우호적인 큰 부족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사실 고산국에는 주변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할 인력도, 시간도, 의사도 없었다. 그래서 거꾸로 더욱 쉽게 원주민 부족들에게 받아들여졌는데, 그 과정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대만 섬 중부 서쪽 평지에 사는 몇몇 부족 사람들이 궁궐로 대표단을 보냈다.

“왕 아닌 왕이시여! 민수무강하소서.”

“고산국의↗ 궁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여러 부족의 대표들이여.↘”

옥좌에 앉은 이민호가 어느 유명한 게임에 등장한 세종대왕의 대사를 따라 읊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나 심각한 사태임을 깨닫고 얼굴이 굳어졌다.

“이번에 파폴라 사람들이 저희 바부자 부족 마을들을 약탈하고 젊은 남자 20명을 납치해 갔습니다. 복수를 해주십시오.”

“파폴라 지역을 거쳐 고산국으로 교역을 하러 가던 우리 호아냐 부족 사람들이 약탈당했습니다. 짐을 모두 빼앗기고 죽거나 다친 사람도 많습니다.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목이 잘려 그 머리가 나무꼬챙이에 꽂혔습니다.”

“그러나 파폴라는 사나운 자들이라서 저희들이 막을 수도 없습니다. 부디 국왕께서 응징해주십시오.”

여러 부족의 대표자들이 고산국에 파폴라 부족에 대한 응징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무력 사용을 자제해왔던 이민호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처럼 평화롭게, 자연스럽게 원주민 부족들이 고산국에 복속하는 것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족들의 요청을 거절하면 고산국의 권위가 깎일 우려가 컸다.

“간악한 파폴라는 고산국과 국왕의 위엄을 대놓고 무시합니다. 조만간 고산국을 정복해 노략질하고 여자들을 빠짐없이 죽이고 남자들을 모조리 범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남자를 범하다니, 그것 참 무섭군요.”

“파폴라가 모계사회라서 그렇습니다.”

“아하! 오해했습니다.”

다른 부족 젊은 남자들을 납치했다더니 노예로 쓰는 것이 아니라 성노예로 쓰는 모양이었다. 만약 계복이 옆에 있었다면 파폴라 부족에게 항복하자고 했을지도 몰랐다. 고산국은 건국 초기라 이민호가 그렇게 신경을 썼어도 아직은 여전히 남초 지역이었다.

역시 모든 원주민들이 고분고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주민들이 그 동안 아무 일 없이 고산국과 평화롭게 교류한 것이 사실은 더 이상할 정도였다. 수천 년 동안 침략자들을 막아왔던 대만 원주민들은 고산국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대했다.

어쨌든 다른 부족들이 합심해서 서부 해안 파폴라 부족을 징치하길 원하자, 이민호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하기로 했다. 무력으로 원주민 부족을 억압한 적은 없지만 대만 섬에서 종주권을 쥐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한 번은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원주민들의 일은 가급적 원주민들끼리 협의해서 처리하길 바랐소. 그러니 이번에 고산국에서 혼자 정벌하는 것은 불가하오.”

“저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파폴라 부족에게 피해를 입은 부족들이 같은 날 모여서 고산국과 함께 파폴라를 정벌합시다.”

“워낙 무서운 놈들이라 겁먹은 전사들이 도망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대들에게 전투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오. 아니, 그대들이 우리 고산국에 요청했으므로 전투는 오로지 고산국의 힘만으로 진행할 것이오.”

“만세, 만세, 만만세!”

어전에서 다른 말은 다 중국어로 했으면서 만세는 한국어 발음이었다. 조선말이 대만 섬 전역에서 사용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민호는 이 기회에 원주민들에게 확실한 힘의 우위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전라좌수영과 해중국 사이에 정기 운항하는 객선을 통해 연락을 보내자 며칠 후, 외륜선 다섯 척에 훈련을 마친 간수군 병력이 가득 타고 해중국에 입항했다. 배에서 내린 간수군 신병들은 늦가을에도 춥지 않은 이곳 날씨에 어리둥절했다.

고산국에 막 도착한 간수군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선에서는 정여립의 역모로 인한 기축옥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100여 명 가까운 친족과 지인들이 의금부에 잡혀 들어가 형장을 받거나 유배를 떠났다고 한다.

이민호는 그런 아수라장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분간 조선에 갈 생각이 싹 사라졌다. 괜히 조선에 갔다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느니 아예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나았다.

이민호는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출신 간수군들이 충분히 훈련을 한 것은 인정했지만 현지 적응이란 또 다른 문제였다. 이곳 대만의 지리와 식생을 익히고 지도를 보는 법을 가르쳤다. 며칠 훈련하는 중에 우비 제작이 완성돼 모든 간수군에게 우비가 지급됐다.

복장을 통해 원주민 부족들을 구분하는 연습도 시켰다. 파폴라족은 평상시에 남녀 모두 흰색 치마를 입고 머리에 헤어밴드 비슷한 띠를 두르고 생활했다. 남녀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새긴 것도 공통적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치마, 여자는 발목을 가리는 긴 치마를 입어 거꾸로 됐다며 계복이 몹시 분노했다. 남자들 중에 농민은 두루마기 비슷한 옷을 입었으나 전사들은 웃통을 까고 가슴받이 갑옷을 목에 둘러 입은 것으로 차별을 두었다.

“파폴라 부족에 속한 대부분 마을들은 고산국 국왕의 보호 아래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말썽을 일으킨 자들은 국왕의 은혜를 모르는 일부 무지몽매한 자들로서 산적이나 다름없는 자들입니다.”

간수군들의 적응 훈련이 진행되는 사이 파폴라에서도 고산국 궁궐에 사절단을 보내 알현을 신청했다. 궁성 앞 평지에 간수군 천여 명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훈련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온 대표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그대들은 이번 정벌에서 관망하겠다는 뜻이오?”

“국왕께서 원하신다면 병력을 파병해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부디 흉적들을 용서치 마소서.”

“병력을 보낼 필요는 없소. 패잔병들이 그대들 마을 영역에 들어서면 잡아오시오. 그러면 상을 베풀겠소.”

“언제나 하해와 같은 국왕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민호는 이들의 말이 과연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잘 대접해서 내보냈다. 파폴라 전체 부족원이 5만에 가깝다고 했으니 원시 부족들이 그렇듯 최대한 일만 병력을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4퍼센트인 2천 정도로 추산했다. 일부 마을이 빠진다면 그 수는 더 줄어들 것이다.

드디어 정벌하러 가는 날이었다. 수수와 기장을 이미 수확해 허허벌판인 바닷가 마을에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바부자 부족을 비롯해 파폴라족에게 수백 년 동안 시달린 주변의 부족들인 타오카스, 파지, 호아냐 부족이 전사 3천여 명을 파폴라족 접경지역에 집결시켰다.

멀리 2천에 달하는 파폴라족 전사 집단을 앞두고 중앙에 간수군들이 대와 오를 맞춰 좌우로 길게 늘어섰다. 양 끝단에 기마군이 서고, 그 뒤로는 협력 부족들의 전사들이 늘어섰다.

“저런 무기로도 수천 년 간 중국을 막아왔다니, 대단합니다.”

“꼭 싸움만으로 물리친 것은 아니니까.”

“저놈들 2천 명 다 나온 것 맞죠? 위험한 곳에서 멀찍이 떨어지세요.”

“알았다. 어서 가라.”

계복은 기병을 지휘하기로 하고 말을 몰고 달려 보병 대열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태양이 중천에 떠서 이제 전투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원주민들의 창과 칼, 활은 지극히 조잡한 편이었다. 그러나 전사들이 등나무 줄기로 만든 방어도구들을 착용해 눈길을 끌었다. 맨몸에 아랫도리만 천으로 두른 채 투구와 견갑, 방패로 앞을 가리지 화살 공격에 대한 대비는 어느 정도 될 것 같았다.

등나무 줄기를 몇 겹으로 겹쳐 만든 투구는 현대 육군의 방탄모와 흡사하게 생겼는데 가벼운 무게치고는 창과 칼, 화살에 대한 방호력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척계광이 이끈 남병이 괜히 등나무 방패를 쓴 것이 아니었다. 아타얄족은 수렵부족답게 요대에 작은 주머니 여러 개를 달고 잡낭을 등에 지고 있어서 마치 현대 군용 엑스반도와 배낭 같은 모양이었다.

몇몇 부족은 축제 때나 입을 화려한 복장을 하고 전쟁터에 나왔다. 축제가 전쟁을 상징하기도 하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간수군들이 입은 전투복도 빨간색과 파란색 두 종류라서 벌판에 늘어서니 단풍이 든 듯 울긋불긋했다.

이민호는 여진족과 간수군으로 구성된 기마병 200명, 간수군 총병 800명, 조선인과 왜인 소작농으로 구성된 치중병 500명을 모아 모두 1700명을 동원했다. 고산국에 간수군 100명을 남겨두고 왔고, 치중병들과 100여 명의 간수군들은 보급수레와 함께 이곳 북쪽 바부자족의 영역에 있었다.

“끼오오오오~”

파폴라족이 총병 대열을 향해 몰려들었다. 간수군들은 5열 종대로 옆으로 길게 퍼져 있었다.

대열 100미터 전방에 이르기까지 이민호는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원주민의 활이 탄성이 약해 50미터 안쪽으로 들어와야 상처를 낼 정도였으니 아직 시간은 있었다.

“끼오오오오~”

“뒤에도 적이다! 포위당했다!”

파폴라족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는지 양면 포위 전술을 구사했다. 정벌에 협력하기로 했던 부족의 전사라는 것들이 겁에 질려 좌우로 우르르 빠져 나갔다. 파폴라족 전사들이 양쪽에서 돌격해오는 중간에 고산국에서 동원한 간수군과 기병만 남았다.

그런데 전방에 2천, 후방에 2천이 나타났다. 이민호가 예상한 숫자보다 두 배나 되었다. 궁궐에 찾아와서 싸움에 끼지 않겠다던 마을도 대부분 참가한 것으로 봐야 했다.

“3, 4, 5열 뒤로 돌아! 전후방을 향해, 쏴!”

- 타타타타탕!

맨 앞에서 달려오던 용감한 파폴라족 전사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쓰러졌다. 그러나 재장전을 해야 하는 총기의 약점을 안다고 자부하는 전사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넘어 간수군들의 대열을 향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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