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61화 (10/1,000)

00061   11. 기축옥사  =========================================================================

그러나 하필 정여립 때문에 이민호가 계속 곤란해졌다. 정여립에 대한 사림의 비난과 대동계라는 사병 조직에 대한 우려가 이민호의 사병 조직인 간수군으로 확산되고 이민호도 논란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이민호는 거의 매일 입궐하여 조정 대신들을 만나 설득했다. 금두꺼비가 수시로 왔다 갔다 하고 서소문에서 출발한 수레가 도성 고관대작들의 저택으로 향했다.

원래 이민호를 비판하던 대신들 중에서 며칠 전부터 태도가 갑자기 홱 바뀐 사람들이 몇 있었다. 금두꺼비의 위력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왕실의 입김을 받아 의견을 바꾼 것처럼 보였다.

특히 남병사로 있다가 졸병을 참살한 죄로 동지중추부사로 전임해 이름만 걸고 있던 신립이 명목상 같은 부서 하급자인 이민호를 많이 도와주었다. 신립과 선조 임금은 사돈이 되었다. 신성군과 신 씨 부인은 같이 1578년 생인데 1590년에 딸을 낳았다.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 덕택에 시간이 갈수록 이민호가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몇몇 대신들이 주도해 주인 없는 영토를 개척해보자는 쪽으로 조금씩 여론이 쏠린 것이다. 우의정 정언신이 그 선두에 섰다.

“문명(文名)을 떨치시는 정 수찬께서 어리석은 소생의 초청에 이렇게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가 요즘 화제에 떠오른 이 첨지 영감이시구려. 반갑소.”

이민호는 원래 정여립을 비판하면서 역모에 얽히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대동계로 인해 정여립과 더불어 이민호에 대한 비판이 심해지자 이민호는 아예 전주부에 가서 정여립을 불러서 만났다.

맛의 고장 전주에서 식사를 하는데도 이민호는 워낙 긴장해서 음식에서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인사말과 서로를 탐색하는 분위기가 꽤 오래 지속됐다. 그러나 논란의 중심에 선 정여립을 조용히 있게 만들어야 이민호도 살아남을 것 같아 먼저 승부수를 띄웠다.

“정 수찬께서 독특한 사상체계를 설파하고 계신다는 소문을 멀리서 가끔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즘 동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당하고 계시지요?”

“내 생각이 독특한 것은 맞는데, 그것이 조금 지나치다 보니 조만간 역모사건에 휘말릴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고변을 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상대 당파에서 역적모의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못 찾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실 역모사건은 증거를 조작하려면 얼마든지 조작해낼 수 있지요.”

“수찬께서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나 천하공물(天下公物)사상보다는 율곡에 대한 공격으로 인심을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활동을 하시니, 조금 걱정스러워서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주상전하를 위해 한 일이니 어쩌겠습니까? 제가 책임을 떠맡아야겠지요.”

정여립은 율곡 이이의 문하로서 서인으로 정치를 시작했다가 경연 자리에서 임금의 의중을 읽고 율곡을 비판했다. 집권당인 동인으로 전향하기 위해 스승을 비판했다는 욕을 먹는 사람이 정여립이었다.

이로 인해 인심을 잃고 왕의 신임도 잃은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낙향한 문사들이 다 그렇듯 시골에서 제자들을 키우고 있었다.

“제가 남쪽 바다 섬을 개척 중이라는 소문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곳이 정 수찬의 사상을 펼칠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감!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이 나라를 도망치듯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역모죄로 참수를 당하더라도 말입니다.”

“남쪽 섬은 조선의 땅이면서 아니기도 합니다. 대명과 조선에 이중신속을 할 예정이라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첨지 영감이 잘 해보세요.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양반사대부들이 다 그렇듯이 살 길을 알려주는데도 정여립은 고집불통이었다.

“수하들, 아니 동료들이라도 구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남쪽 섬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특히 인재가 부족한 것을 넘어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이곳에서 같은 핏줄끼리 싸우지 마시고 새 세상을 만들어 보십시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만 이 첨지 영감께서 제 벗들을 구해주신다면 고맙지요. 신분이 천한 사람들 중에도 인재가 많습니다.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떠나겠다는 사람들을 전라좌수영의 해동상단 분점으로 보내주십시오. 어쨌든 지금은 동서 붕당의 충돌이 극에 달해서 어떻게든 사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 칼끝에 제가 설지 정 수찬이 설지 모릅니다.”

“첨지 영감께서는 저에 대한 역모 고변이 언제쯤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이민호는 정여립이 자기 정체를 꿰뚫고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민호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신동으로 소문났기에 정여립은 순수하게 물어본 것뿐이었다.

“아마 상대 당파에서 준비가 끝나는 9월 말에 고변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이곳 전라도가 아닌 황해감사가 앞장설 것입니다.”

“황해도에는 아는 사람도 몇 명 없는데 황해도에서 봉기가 일어난다고요? 그것 참 신기하군요. 하하! 알겠습니다. 저를 죽이겠다니 어쩔 수 없지요. 조만간 사람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들을 잘 부탁합니다. 아니, 잘 써주시지요.”

이민호는 지금 가진 것을 계속 지키고 싶어서 이렇게 나선 것은 아니었다. 정여립처럼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이민호도 재산 따위는 언제든 던져버릴 수 있었다. 주위 사람만 빼서 대만으로 도망가도 됐다.

이민호에게 있어서 정여립이 불운한 혁명가인지 아니면 역적에 불과한지 따지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민호가 개입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이 바뀌어,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민호 최대 장점이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모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에 빠지는 것은 막고 싶었다. 혜영과 혜진 자매처럼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원망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민호가 알기로 기축옥사는 정여립을 핑계로 동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서인 측의 정치공작이었다.

“생각보다 국문의 범위가 커질 겁니다. 관련자의 관련자의 친척들까지 줄줄이 얽히면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증거가 될 만한 서류는 모두 소각하십시오. 그저 편지로 정 수찬께 인사만 전한 선비들도 그 편지가 인해 역모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습니다.”

“예. 그건 제가 더 잘 알지요. 그러나 알면서도 규모를 너무 적게 잡은 감이 있었군요. 제 일을 기화로 저와 아무런 관련 없는 동인들이 몰락하고 피해를 입게 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역모 고변은 조만간 있겠지만 피해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합시다. 함부로 다른 지역의 선비들에게 인사 편지를 보내지 마시고, 9월 이전에 반드시 주변을 정리해주십시오.”

“맞는 말씀입니다. 영감의 소중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부디 좋은 나라를 세워 주십시오. 저는 이만 죽을 대비를 하러 가겠습니다.”

정여립은 그렇게 떠나갔다. 영감이라는 호칭을 몇 번이나 들은 이민호는 보리차를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랬다.

이 날 이후 이민호가 불충한 정여립을 불러 따끔하게 호통을 쳤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러나 반대로 역적모의를 위해 수괴 두 사람이 만났다는 소문도 따라붙었다.

여론은 내수사 전수에게 맡기고 7월 중순에 이민호는 외륜선 두 척을 타고 바다로 나왔다. 여진족 노예 50명과 고르고 고른 전마 80필을 배 두 척에 나눠 태웠다.

훈련 중인 간수군은 단 한 명도 소집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간수군을 해산시키고 원주민들을 고용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이민호도 사람인지라 이번 일로 화가 좀 많이 났다.

좌수영에서 출발하기 전에 혜영이 울고, 부친이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은 이민호가 다시 조선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배에 타고 싶으면 타라고 함으로써 조선을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였다.

이민호는 스스로 왕에 오른 것도 아니고, 새로 개척한 영토는 언제든 조선 조정에 바치거나 포기하면 되니 큰 상관은 없다고 봤다. 출발 전에 내수사 전수에게도 상황이 안 좋아지면 대만 땅을 포기하자는 뜻을 전했다. 조선 영토로 삼는 것도 어렵다면 아예 버리자는 뜻이었다.

이민호는 이번 일로 조선 왕실은 물론 양반사대부들에게도 많이 실망했다. 다음에 다시 어느 곳에 가서 기반을 닦는다면 조선인들을 아예 빼고 시작하리라 결심할 정도였다. 그 동안 후의를 입은 류큐 국왕이라면 이민호를 밀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국적과 관련 없는 세계인이라 해도, 조선과 무역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무역에서 조선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홍삼과 백자 같은 특산품이 있었다. 조선을 아예 포기할 수 없으니 더 노력해보기로 했다.

외륜선 두 척은 정여립과 약속한 대로 방답진 남쪽의 무인도인 연도에서 대동계 사람들을 가족 단위로 태웠다. 이민호는 그들이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이거나 무사들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은 평범한 농민들에 불과했다. 겨우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활 쏘고 무예를 닦는다는 이유로 역모의 무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사람들치고는 다들 순박하게 생겼다.

이민호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동래 왜관에서 팔았던 이도다완의 판매대금을 수금하고 백자와 비단을 팔았다. 남아있는 금을 은으로 교환한 다음 구리를 싣고 남서쪽으로 항해했다. 이제는 이민호가 나가사키에 들를 때마다 은이 한동안 씨가 마를 정도가 됐다.

류큐에서 잠시 노닥거린 다음 해중국을 들렀다가 고산국에 배를 정박시켰다. 뱃멀미로 고생한 여진족 청소년 남녀 50명은 땅에 내리자마자 말을 타고 벌판으로 달려갔다. 드넓은 대지는 추수가 아닌 수확을 마친 다음 가을 농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말이 달릴 곳은 많았다.

황제 모시듯 이민호를 대하는 신라방 상인과 함께 고산국의 해관에서 차를 나눴다. 나가사키에서 다완 대금을 포함한 황금 30만 냥이 순수 은 함량을 감안해 왜은 480만 냥으로 바뀌고, 이것이 신라방 상인들에 의해 다시 70만 냥 약간 넘는 금으로 교환됐다. 이민호의 해외 금융 및 상품자산만 해도 황금으로 환산해 100만 냥이 넘어섰다.

“다음에는 황금 100만 냥 넘게 준비해야겠습니다. 이 대인께서 재산 불리는 속도가 실로 경이롭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가져올지 모르지만 금과 은 교환은 황금 100만 냥으로 고정합시다. 그 외에는 상품 매입할 금만 가져오세요.”

“예. 어쩌면 이 대인 덕에 명나라의 은값이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거래가 금은 교환비율에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됐군요. 대명 황실에서 개입할지도 모르니 앞으로 주의해야겠소.”

황금 100만 냥이면 37.5톤이었다. 마닐라 갈레온이 매년 1회 태평양을 횡단할 때마다 100톤이 넘는 은을 운송한다지만 같은 은으로 환산하면 이민호가 가진 금이 더 큰 액수였다.

신라방 상인들은 운남성과 복건성의 오지에서 차나무를 구해 산 채로 대만까지 수송해오는 어려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차나무는 현재 산중턱에 심어서 원주민들을 동원해 세심하게 관리하는 중이었다. 이민호는 신라방 상인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니까 포도아 상선들이 해중국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다닌다고요?”

“예, 이 대인. 그들은 해중국에서 만든 옥 도자기라는 귀물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옥으로 빚은 자기를 그토록 좋아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먼 나라의 취향이니 어쩌겠습니까? 다만 이 대인의 허락을 받지 못해 해중국의 위치는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잘 했소. 그런데 장 점주는 옥 도자기를 본 적이 없소? 전에 분명히 장 점주에게 보여줬는데 말이오.”

“기억이 안 납니다. 제가 해중국 물건이라면 한 번씩은 다 봤을 텐데 옥 도자기만큼은 본 적이 없습니다. 명나라 도공들도 그게 뭔지 궁금해 합니다. 예? 예에에?”

이민호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리키자 신라방 상인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찻잔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에는 실망해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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