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11. 기축옥사 =========================================================================
한성 서소문의 저택에 이민호가 도착한 날 저녁에 내수사 전수가 찾아왔다. 말을 안 해도 어떻게 알고 바로 찾아오는지 이민호는 참 신기하게 여겼다.
이민호는 전수를 안채에 딸린 창고로 안내했다. 금과 은이 담겼을 법한 튼튼한 궤짝과 중국 비단보다 화려한 광택을 자랑하는 비단이 창고에 가득 쌓여 있어 전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이민호는 전수와 함께 맨 안쪽으로 들어갔다.
“상행에서 이득을 많이 보지 못해 올해 상반기에는 황소 한 마리만 바치겠습니다.”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해 이번에는 무역이 잘 안 됐나 보군. 그나마 손해를 안 봤다면 다행일세. 자넨 젊으니 다음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네. 풀 죽지 말고 앞으로도 힘내게.”
“예. 고맙습니다. 전수 영감만 믿습니다.”
무역이 실패했다고 판단했어도 전수는 이민호를 밀어주었다. 전수와 이민호는 이미 같은 배를 탄 셈이었다.
이민호가 비단 장막을 걷어내자 누런 황소가 몸을 드러냈다. 너무 놀란 전수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금 함량이 9할 9푼이며 나머지 1푼은 은과 다른 금속을 섞었습니다.”
이민호가 순금 황소를 묶은 비단 고삐를 건네자 전수가 이해를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황금 10만 냥을 녹여 만든 황소입니다.”
“허허!”
“고가 정책을 유지하느라 홍삼 500근은 아직 팔지 않고 제가 갖고 있습니다. 장강 이북에는 절대 넘기지 말라고 했으니 역관 가문들의 반발은 없을 것입니다.”
“허허허허! 정말인가? 우하하하하!”
전수는 아예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에 팔았기에 이렇게 많이 남았나?”
“근 당 천은(天銀) 천 냥에 팔았습니다. 500근이니 50만 냥인데 그것을 황금으로 바꿔 일본에서 은으로 교환하니 또 두 배로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익금 절반인 황금 10만 냥을 이번에 바칠 수 있게 됐습니다.”
“자네 정말 대단해! 이게 백미로 따지면 최소한 백만 섬이란 말이지?”
정확한 설명은 아니고 순서도 바뀌었지만 이번 상행을 요약하면 대충 이 정도였다. 홍삼 판매대금은 사실 절반도 되지 않고 그 이상의 이득을 금과 은을 교환하는 재정거래로 얻었다.
전수는 저녁 식사를 권하는 이민호를 뿌리치고 3.75톤이 넘는 황소를 수레에 싣고 황급히 도성으로 돌아갔다. 이민호가 계복과 집안 종들을 시켜 수레를 호위했다.
전수에게는 얼른 이 황소를 궁궐로 가져가 임금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밖에 없을 것이다. 전수를 배웅한 이민호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저 황소는 절대로 녹여서 못 쓴다. 왕실에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뜻이지.”
엄청나게 많은 금이라도 일단 황소나 다른 것으로 주조해서 바치면 왕실에서 함부로 쓸 수가 없다. 금력을 쥐어줬는데 임금이 매일 창고에 들러서 감상하는 용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무역하러 나서기 전에 이민호가 내수사 전수를 만나 왕실이 부유해지면 관료들을 다루기 쉬워지고, 왕권이 자연스럽게 강화된다는 식으로 설득했었다. 그러나 황금으로 만든 황소를 녹여서 정치자금이나 관료들 급료로 쓰라고 나눠줄 배짱이 과연 지금 임금에게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재산을 가지는 것과, 그 재산을 사용해 권력을 강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올해 말에 왕실 몫으로 떼어줄 황금으로는 봉황을 만들기로 했다. 일반적인 사람 심리라면 같은 것 두 개를 갖고 있으면 하나를 녹여서 쓸 수 있기에 그런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 왕실에 황금이 계속 쌓이더라도 쓰지 못하게 만들 요량이었다.
이민호는 신권정치도, 왕권정치도 원하지 않았다. 신권과 왕권 양쪽이 팽팽히 균형을 갖춰야 이민호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온다고 믿었다.
슬며시 옆으로 다가온 혜영이 손수건으로 이민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민호가 혜영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도련님은 내수사에서 사람이 오기만 하면 땀을 비오듯 흘리시는군요.”
“그럴 만하지. 전수가 올 때마다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기분이야. 들어가자. 시원하게 목욕이나 해야겠어.”
“준비할게요.”
이민호가 혜영의 허리를 안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시립하고 있던 종들이 양쪽에서 대문을 닫았다.
“여진족 애들에 대한 교육은 잘 돼가?”
“조선말은 금방 익혔어요. 원래부터 조선말을 아는 애들이 몇 있어서 더 쉽게 배워요. 하지만 사회생활은 실생활을 통해 직접 부딪쳐봐야 제대로 배울 거여요.”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이 이번에 섬으로 데려가야겠어.”
“아직 어린 애들이니 잘 보살펴주세요.”
여진족 포로 아이들이 대부분 10대 초반에서 중반이니 혜영이나 이민호와 거의 비슷한 또래였다. 그러나 둘 다 워낙 조숙해서 한 세대 차이는 나는 것처럼 느꼈다.
이민호는 황금 30만 냥 이상에 해당하는 금과 은, 기타 상품을 갖고 있었다. 조선에 있는 사창과 비단공장, 양식장 등을 제외한 순수 해외 재산만 그 정도였다. 고산국에서 이모작 쌀을 1차로 수확할 때가 지났으니 소작료를 받으면 재산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황소를 바친 이후 이민호가 하는 일에 전수가 간섭하고 지시하는 일이 사라졌다. 다만 이따금 아쉬운 목소리로 부탁을 해올 뿐이었다.
내수사 전수가 화약을 만들 유황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이민호가 즉시 삼천 근을 군기시로 보냈다. 군기시에서는 각 지방 관아에 나눠주었다. 이것은 고산국에서 채굴해 배밑판에 실어온 유황이었다. 방답의 창고에 아직 유황 7천 근이 남았다.
가는 게 있으면 돌아오는 게 있는 법이었다. 이민호가 고산국과 해중국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면서 간수군 천 명을 채우겠다고 전수에게 말하자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바로 임금의 윤허가 떨어졌다.
이민호는 계복을 보내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간수군 후보 2천 명을 모집해 훈련에 들어갔다. 이들 중 최종적으로 930명을 선발할 예정이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지역에 거주하면서 가슴 속에 우국충정이 들끓는, 사실은 역모를 고변해 공신으로 책봉되고 싶은 선비들이 역모가 우려된다고 상소를 보냈으나 언제나처럼 싹 무시됐다.
하지가 지나면서 전국 100여 곳의 농가에서 감자가 대량으로 수확됐다. 감자 농사가 풍작을 이뤄 시험 재배에 참가한 농가 딱 한 집 덕택에 그 고을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단번에 사라져버렸다. 한 농가당 감자 생산량이 재배 면적에 비해 상상 외로 많았다.
배를 곯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농업사회인 조선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발전의 지표였고, 왕도정치의 이상이었다. 양반, 관료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태평성대의 확실한 증거에 당황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무척 흥분했다. 명나라에는 아직 감자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가 없어서 충격이 더 컸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감자 재배를 모든 고을과 농가에 확산시키고 농가마다 의무적으로 황무지를 약간이라도 개간해 그곳에 감자를 심도록 했다. 같은 고을 또는 옆 고을에서 감자가 소문이 나서 새 품종 도입에 보수적인 농민들도 씨감자를 얻어와 재배에 들어갔다. 이때 이민호가 씨감자와 더불어 땅콩과 고추 등 여러 가지 종자를 슬쩍 끼워 넣었다.
부식 소비가 늘면 주식 소비가 줄어들게 된다. 감자로 인해 쌀 소비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면서 추수를 몇 달 앞두고 벌써부터 쌀 가격이 대폭락했다. 앞으로 쌀 가격이 더 내려갈 것으로 예상됐다.
단기적으로 사창 사업에 큰 타격이 오겠지만 오래지 않아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으로 이민호는 예상했다. 감자는 쌀의 대체재일 뿐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주식은 어디까지나 쌀이었고 식습관은 금방 바뀌지 않는다.
대신 천일염전 덕택에 소금과 간장이 흔해지면서 새로운 작물들을 이용한 반찬 여러 가지가 개발됐다. 앞으로 아이들의 체격이 이전 세대에 비해 몰라보게 커질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감자를 처음 조선에 도입한 과정은 사실과 달리 많이 윤색됐다. 7년 전인 임오년(1582년)에 진하사로 북경에 갔던 정탁이 조선에 표류한 포르투갈인 마리이라는 사람을 명나라에 쇄환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남만인들의 표류현장을 조사하던 자들이 이상한 식물 뿌리를 발견하고 이것을 이응화에게 보냈는데, 그의 아들인 이민호가 이 감자 한 알을 갖고 각고의 노력 끝에 대량 재배에 성공했다는 식이었다.
사창과 소금에 이어 이번에는 이앙법 확산과 감자 재배 등 그 동안 쌓아온 이민호 부자의 공적을 조정 대신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신들이 이민호 부자에게 벼슬을 내리라고 연명으로 임금에게 주청했다. 이익금 배당을 받은 후 이민호에게 벼슬을 주려고 기회를 살피던 왕실에서는 남의 손으로 코를 풀게 되었다.
이앙법과 감자 생산으로 인해 소작료를 올려 받을 생각에 들뜬 시골 양반들이 어서 이민호에게 관직을 내려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조만간 농지에서 쫓겨날 운명에 처한 소작농들마저 아무 것도 모르고 이민호를 찬양하기 바빴다. 이런 분위기 덕택에 무역의 대성공으로 황금 10만 냥을 이익금으로 챙긴 왕실은 힘들이지 않고 이민호 부자에게 벼슬을 내릴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민호는 다시 품계가 오르고 벼슬도 실직으로 받았다. 벼슬을 사양한 부친은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 품계만 받았다고 한다. 교지를 전한 선전관이 돌아가고 이민호는 서소문 저택을 방문한 내수사 전수를 다시 만났다.
“이 첨지는 우리 조선의 보배요. 앞으로도 열심히 일하여 주상전하를 기쁘게 해주시오. 그런데 이 땅콩은 왜 이리 맛있소?”
“윤당합지요. 그건 사탕을 겉에 바른 꿀땅콩이라 합니다. 가시는 길에 좀 싸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 집에 오는 게 정말 좋소. 좋은 일만 생기고, 좋은 음식을 먹게 되니 말이오.”
이민호는 비록 한직이지만 정3품 당상관 첨지중추부사의 고신을 받았다. 그것도 임금이 특별히 직접 작성해서 하사한 친필교지였다. 이민호는 선조 임금이 미려한 한석봉 필체로 쓴 문서인 어필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모두 합해 27자였다.
“교지(敎旨). 이민호 위(爲)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자(者). 만력 17년 5월 초6일.”
“하하! 이 첨지 입이 찢어지겠소. 한 번만 더 읽으면 100번째요.”
첨지중추부사는 아무 일도 안 하는 관아의 이름뿐인 직책이었다. 그래도 실직을 가진 당상관이 되자 내수사 전수도 더 이상 반말을 하지 않았다. 하는 일이 없는 관아다 보니 이민호도 가끔 가고 싶을 때나 잠깐 들르고 상사들의 혹독한 신참학례도 없었다. 동아시아의 바다를 빨빨거리며 싸돌아다니는 이민호에게 이보다 더 좋은 부서가 없었다.
그러나 이 관직의 약칭이 첨지라서 그렇게 불릴 때마다 이민호는 영 기분이 안 좋았다. 계복이 첨지 영감이라고 이민호를 불렀을 때는 발작을 일으킬 뻔했다. 이민호에게 첨지라는 호칭은 턱에 염소수염이 달린 꼬장꼬장한 늙은이라는 인상이 너무 강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뽑힌 간수군 2000명 중에서 걸러지고 남은 930명은 치열하게 훈련 중이었다. 기존의 간수군 100명 중에서 30명이나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930명을 뽑게 됐다. 그러나 그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떠들어준 덕택에 신병은 아주 쉽게 모았다.
수영 근처에 만든 훈련장에서 기존 간수군들이 조교 역할을 맡아 신병들을 훈련시켰다. 수사들과 지역 양반들에게 기름칠하느라 은이 꽤 많이 들어갔다. 수사들은 수영 소속 군관들을 동원해 간수군 훈련병들에게 기마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였고, 양반들은 역모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