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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54화 (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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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작은 해전

3월 초 외륜선 4척이 해중국 부두를 떠났다. 오랜만에 조선에 가기 위해서였다. 부두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손을 흔들어 배웅해주었다.

미카가 만 입구 높은 산에 올라 배가 안 보일 때까지 서 있는 것을 본 이민호는 가슴이 아팠다. 미카가 조선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민호는 미카에게 해중국과 고산국의 일을 다 떠맡기고 떠났고, 그래서 더 미안함 감정을 느꼈다.

간수군들 중에 지원자를 받아 해중국과 고산국에 각각 열 명씩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배에 나눠 태웠다. 집에 돌아가게 된 간수군과 사공들은 다들 기뻐했으나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관두겠다는 사람이 많아 이민호는 걱정이 많았다. 건국 초에 인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이렇게 심각한 인력부족 사태에 부닥칠 줄은 예상 못했다.

소문과 달리 고산국에 입조를 요구하는 명나라 사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류큐 왕국의 사신단도 아직 명나라로 출발하지 않은 것 같았다. 뱃길이 엇갈릴 경우에 대비해 류큐 배들이 해중국이나 고산국을 방문하면 최대한 잘 대접하라고 미카와 남은 사람들에게 지시해놓았다.

요즘은 신라방 상인들이 수시로 고산국 선착장에 드나들며 필요한 물품을 하역했다. 만약 원주민들이 더 많이 몰려와서 식량이 모자라면 그들이 사오기로 했으므로 이민호는 안심하고 출발할 수 있었다. 이민호에게 외상거래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외륜선 네 척은 출항 직후 동쪽, 류큐 왕국 방향으로 항로를 잡았다. 나하를 들렀다가 남풍을 타고 빠르게 전라좌수영으로 가기로 했다.

이민호의 배에 실린 것은 황금 26만 냥과 그보다 많은 은, 아직 팔지 않은 홍삼 500근, 그리고 땅콩 종자 열 섬과 볶은 땅콩 열 섬이었다. 화물이 적어 무게중심이 높아져서 선저에 고산국 북쪽 산에서 채취한 유황을 가득 실었다.

얼마 전에 사람들에게 땅콩을 나눠줬더니 죄다 설사하고 난리가 났다. 적당히 먹어야 하는데 땅콩에 묘한 중독성이 있어 손이 자꾸 가다 보니 한도를 넘어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자주 나눠주면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다 그런 거였다.

신라방 상인들과 거래한 이후 이민호에게 정신적 여유가 생겨 궁성에서 치킨을 튀겨 먹었다. 그러나 간장이나 향신료가 부족해 양념치킨이나 기타 여러 가지를 해먹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미카와 하녀들이 치킨을 아주 잘 먹어 지켜보는 이민호가 흐뭇해질 정도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육식을 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새고기는 먹는다고 했다. 사실 다이묘나 사무라이들은 개고기도 먹었다. 다만 농사에 쓸 소를 먹지 못하게 한 것뿐이다.

“왜선입니다! 조총수 둘과 궁병 둘! 격군 열! 군선, 소선입니다!”

해중국에서 출발하고 하루 지난 아침에 일이 터졌다. 사공의 외침에 놀란 이민호가 선수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저 멀리서 외돛을 단 작은 배가 빠르게 동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류큐 왕국의 수도 나하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 작게 떠있는 섬은 슈리성이 있는 우치나 섬이 맞았다. 외륜선 바로 북쪽에도 많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는데 이민호가 슈리성에 있을 때 대신이 보여준 류큐 왕국의 지도에서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게라마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생각할 게 많은 이민호 입장에서 이런 작은 섬들 이름 따위는 당연히 한 시간도 안 돼서 잊혀졌다.

“추격해! 저건 척후선이니 근처에 더 큰 왜선들이 있을 거다. 다들 전투 준비!”

커다란 외륜선 네 척이 작은 고바야를 쫓았다. 고바야에 탄 왜인들은 생각만큼 속도가 나오지 않자 짐을 바다에 던지고 죽어라 노를 저어 도망갔다. 판옥선과 달리 순풍을 받는 상황에서도 외륜선이 고바야보다 빠른 탓에 거리는 점점 좁혀들었다.

“저놈들이 왜 저기 있지?”

“유구국이 점령된 건 아닐까요, 도련님?”

계복도 꽤나 안타까워했다. 계복은 시장에서 만났던 행상 아가씨와 뭔가 이루어질 듯하다가 말았는데, 그래서 더 류큐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민호는 사쓰마군이 류큐를 정복할 시기는 아직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알기로 사쓰마는 분명 임진왜란 직후에 류큐를 거의 전투도 없이 정복했다.

19세기 말 일본이 류큐 왕국을 완전히 흡수해버린 류큐 처분을 내릴 때는 500명의 군인과 경찰이 나하에 가서 류큐 왕국을 접수했다고 들었다. 힘의 우위가 명백히 드러난 뒤에는 많은 병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사쓰마가 류큐를 정복했다 치고, 어째서 왜선이 우치나 섬의 서쪽 바다에 있냐는 말이야.”

“설마 해중국을 공격하러 가는 걸까요?”

“어쨌든 무조건 잡아야겠다.”

외륜선과 고바야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동시에 멀리 우치나 섬에 점점 접근했다. 어느새 해안에 가까운 어선에서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손가락질하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어선 한 척은 슈리성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북쪽에 왜선들이 나타났습니다! 왜 대선 네 척! 군기를 확인합니다. 흰 바탕에 동그란 원, 안에 열 십 자. 아래쪽에 검은 선 여럿. 시마즈 가문 본가의 문장입니다!”

돛대에 오른 사공이 북쪽 섬들 사이에서 나타난 왜선들을 발견했다. 외륜선에 탄 사공들은 일본 전국시대 무장 가문들 전체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큐슈에 할거하는 여러 가문의 문장은 익히고 있었다.

이민호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다른 외륜선에서는 이민호가 탄 배와 함께 행동할 테니 따로 전령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사공! 적선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반드시 풍상에 자리 잡아라. 저놈들은 역풍에서 움직임이 시원찮다.”

선미루에서 다른 사공이 땀을 뻘뻘 흘리며 키를 돌렸다. 남풍이 불고 있어 외륜선들은 왜선들 위치의 남쪽에 일렬로 자리를 잡고 전투를 준비했다. 왜선 입장에서는 역풍 상황이니 왜선에서 노를 젓더라도 외륜선이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이민호는 바람을 전투에 적극 이용하기로 했다. 나머지 외륜선 세 척은 이민호가 탄 배를 따라 똑같이 움직였다.

왜선 중에서 대선으로 분류되는 세키부네에는 판옥선처럼 상자 같은 모양의 상부 구조물이 있었다. 그러나 판옥선과 같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바람이 불어 상부 구조물 아래를 가린 천이 펄럭이더니 그 안에서 노를 젓는 왜인들이 이민호의 시야에 노출됐다.

사방이 나무 벽으로 막힌 상자 모양의 상부 구조물을 갖춘 판옥선과 달리 세키부네는 갑판 위 여러 곳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한 층을 올린 것뿐이었다. 상갑판을 받치는 기둥 수십 개 외에 사방을 천으로 가리든 대나무로 발을 치든, 혹은 판옥선처럼 나무판자로 벽을 세우든 상관없었다. 상갑판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비슷해 보일지라도 판옥선은 화포장과 격군들이 일하는 아래층의 방어를 우선하고, 세키부네는 높은 전투위치를 잡으려는 목적으로 건조된 배였다.

세키부네 네 척의 상갑판에 일본 병사들이 나와서 일부는 조총을 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 뒤에는 갑옷을 입고 기다란 창을 든 왜병들이 외륜선으로 건너올 채비를 갖췄다.

“거리를 유지하라! 역풍에 유의하라!”

“첨정 나리! 왜 소선이 접근합니다!”

"아직 쏘지 마!"

처음과 달리 풍뎅이 투구를 쓴 왜장이 작은 왜선에 새로 타고 있었다. 가부토라 불리는 투구만 봐서는 어느 정도 직급인지 알기 어려웠지만 대충 전령이나 하급의 사무라이로 봐서 무리가 없었다.

아주 잘해야 100여 명의 아시가루를 지휘하는 사무라이인 아시가루 다이쇼, 아니면 아시가루들 중에서 군 경력이 많다는 이유로 뽑힌 소대장 정도의 아시가루 코가시라 정도로 추측됐다. 아시가루가 보통 병졸이라 평가받지만 주군 가문에서 봉토를 받아 복무하는 것은 사무라이와 다름없었다. 다만 봉록으로 받는 농지가 사무라이보다 적을 뿐이었다.

그 사무라이가 가고시마 지방 사투리로 소리를 질러 알아듣기 꽤나 어려웠다. 사쓰마 사나이답게 목청은 더럽게 컸다.

“이곳 류큐는 일본 땅이다! 외국의 황당선은 즉시 전투태세를 풀고 일본국의 관군에게 순순히 임검을 받아라!”

“류큐가 사쓰마 땅이 아니라 일본 땅이야? 정말? 명나라 조정이나 일본 관백에게 그렇게 말해도 돼?”

이민호는 류큐가 사쓰마에 복속됐다는 사실이 명나라나 일본 조정에 알려지는 것을 사쓰마에서 절대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쓰마는 류큐 왕국을 배후 조종해 명나라와 교역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류큐를 붙잡아두려고 했다. 그러니 일본 조정에 알려지면 관백 도요토미나 나중에 쇼군 같은 더 강한 자들이 숟가락을 얹으려 할 테니 당연히 사쓰마에게 손해였다.

“그, 그건. 어험! 사쓰마도 어쨌든 일본 아닌가? 어서 무장을 해제하고 임검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네깟 놈들이 관군에게 대들 생각을 하다니 정말 무엄하구나!”

“웃기지 마라! 류큐 왕국은 해중국의 동맹국이다! 사쓰마의 군선은 류큐에서 당장 물러나라! 너희들이 류큐를 정복하느라 얼마나 많은 죄 없는 백성들을 해쳤느냐? 그리고 류큐의 국왕전하는 어떻게 되셨느냐? 너희들이 한 짓에 따라 백배 천배 보복하겠다!”

“응? 우린 슈리성을 공격해 정복하지 않았다. 그런 작은 섬나라를 쓸데없이 뭐하러 정복해? 다만 방금 그대가 말한 해중국이라는 곳을 조사하러 가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 무사를 무참히 살해한 자를 징치하기 위해서다. 그대는 해중국 인물인가? 살인범의 정체를 알고 있나?”

어? 이민호과 계복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감탄사였다. 사쓰마는 아직 류큐를 정복하지 않았다는 사무라이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당연히 류큐를 정복하고 그 다음으로 보물이 많다고 류큐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난 해중국을 노리는 줄로 알았다.

이민호는 몹시 당황했지만 대답은 해야 했다.

“그렇다! 바로 내가 사쓰마 사무라이 두 명과 병사 열두 명을 죽인 해중국 사신이다!”

“그럼 오라를 받아라! 주군에게서 너를 체포해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제 와서 출가해 부처님을 모신다 해도 용서 받기엔 이미 늦었다!”

“뭔 소리야?”

문화 차이 때문인지 이민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잠시 조금 썰렁한 기운이 양쪽 사이에 흘렀다. 이민호는 휘하 외륜선들에게 지시해 전투를 하기로 결심했는데 사쓰마 전령은 돌아가지 않고 제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호는 조총 두 정, 목궁 2장을 가진 작은 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민호가 예상한 대로, 사쓰마 군선들이 출동한 것에는 살인범을 체포하는 것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역시 전령의 입을 통해서 목적의 일부분이 드러났다. 그리고 전령선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됐다.

“극악무도한 살인범 주제에 얼른 도망가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네가 도망가야 추격을 해서 해중국에 갈 수 있으니, 너는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왜 도망가? 여기서 싸우자! 너희 대장에게 당장 여기서 싸우자고 전해라!”

“무엇이라? 건방진 놈! 그 배에도 보물이 실려 있을 테니 일단 빼앗고 보겠다. 살인죄에 대한 징벌은 그 다음이다.”

“해적 놈들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이민호가 비웃자 배를 돌려 돌아가려던 전령 무사가 발끈했다.

“나는 사무라이다! 주군에게서 공식적인 명령을 받고 무도한 해중국을 정벌하러 나선 사무라이야! 개인적 이득을 위해 노략질하는 해적 따위가 아니다!”

“똑같은데 뭐. 무사 두 명을 죽인 것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보물을 노리고 해중국을 공격하려는 거잖아? 좋다. 너는 고지식한 무사이니 해적에서 빼주마. 너는 해적이 아니고 네 주군이 해적이라고 해줄게.”

“주군 시마즈 돈에 대한 모욕이다! 당장 저 놈을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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