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9화 (9/9)

Side. 02

도망자의 마지막 회는 42.3퍼센트를 기록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역대 드라마 시청률 10위권 안에 드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드라마 판권도 아시아권뿐만 아니라 미주와 유럽 등 무려 35개국에 팔았으며 세트장은 이미 관광 명소가 되었다. OST도 각종 차트를 휩쓸었다. 언론은 연일 도망자에 대한 극찬을 쏟아냈다. 도망자로 인한 관광 효과, 상품 광고 효과, 국가 이미지 상승까지······ 웰메이드 드라마 한 편으로 인한 경제적 파급 효과는 무려 1조원 이상이 될 거라는 분석도 나왔다.

PPL로 들어간 상품 역시 불티나게 팔렸으며, 여주인공을 맡은 나희연뿐만 아니라 한녹영의 패션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 처음에는 제 옷을 입었지만, 나중엔 협찬이 너무 많이 들어와 그 중에서 골라 입었는데, 그 옷들 모두 완판이 되었다고 한다. 패션소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털에 한녹영 패션 내지는 차도영 패션이라고 치면 어느 브랜드 옷이다, 이미 완판이다는 글이 주루룩 떴다.

당연히 막방 전전날로 잡혔던 종방연은 축제의 장이었다. 아니 그렇게 들었다. 종방연이 있었던 날 한녹영은 중국에서 CF를 촬영 중이었다. 도망자를 함께 촬영하며 정이 많이 들었는데, 의미 있는 종방연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

“피곤하지?”

한녹영이 하품을 하자 박상호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한녹영은 “응.” 하고 대답 하며 다시 한 번 하품했다. 중국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없었다. 일주일 머무는 동안 CF 3편 촬영에 도망자 판권을 사간 방송국 쇼 프로그램에도 참석했고, 팬 사인회도 했다. 그야말로 숨 돌릴 틈 없이 지나간 일주일이었다. 거기다 이동시간은 왜 그리도 긴지. 대륙의 위엄을 뼈저리게 느낀 일주일이었다. 몸이 너무 녹초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 강준일의 품에 푹 안겨 잤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좀만 참아. 선글라스 끼고.”

박상호의 말에 한녹영이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곤 파김치처럼 축 늘어뜨리고 있던 몸에 힘을 주었다. 귀국 일정에 대한 말이 퍼져나가 공항에 아침부터 팬들과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조용히 나갔다가 조용히 들어올 생각이었는데 글렀다.

바깥으로 나오니 환호성이 쏟아졌다. 플래시도 여기저기서 마구 터졌다. 한녹영은 애써 웃으며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소식을 접하고 미리 대기시켜둔 경호원들이 일제히 다가와 한녹영 주변을 에워싸곤 팬들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한녹영씨, 이쪽을 봐주십시오.”

“한녹영씨!”

여기저기서 한녹영의 이름을 불렀다. 한녹영이 이쪽 저쪽 순서대로 봐주며 포즈를 취했다. 곧바로 한녹영의 공항 패션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뜰 거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중국 일정은 어땠습니까?”

“인기를 체감하셨습니까? 국빈 대접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요.”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인터뷰는 사절입니다.”

박상호가 앞으로 나서서 기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인파에 둘러싸여 공항을 나와 간신히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탔다. 경호원들은 한녹영을 대기 중인 차에 태우자마자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러자 곧장 차가 출발했다. 인파에서 벗어나 한숨 돌렸다는 생각에 긴 숨을 내뱉고 있던 한녹영이 당황해 “내 매니저가······.” 라고 다급하게 말하며 창밖을 내다봤을 때였다. 누군가 한녹영의 손목을 잡더니 휙 끌어당겨 안았다. 갑작스런 일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익숙한 체향에 마음이 느슨해졌다.

강준일이었다. 한녹영이 강준일의 목으로 팔을 감았다. 그의 품에 안겨 체향을 듬뿍 들이켜자 한국에 돌아온 실감이 들었다.

“중국은 어땠어?”

질문을 던지며 강준일이 한녹영을 놓으려 하자 한녹영이 “조금만 더.” 하고 칭얼대며 그의 품에 더더욱 꼭 안겼다. 가볍게 웃은 강준일이 다시 한녹영을 꽉 안고 등을 문질렀다. 그제야 떨어진 한녹영이 슬쩍 앞을 보았다. 운전기사가······ 한성준이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네. 속으로 안도한 한녹영이 쪽, 하고 재빠르게 강준일에게 입을 맞추었다.

“충전 완료. 이제 살 것 같다. 중국은 너무 힘들었어요. 적어도 열흘 이상 걸리는 일정을 일주일 안에 다 몰아넣었더니 숨 쉴 틈도 없었어요.”

가능한 떨어져 있는 기간을 줄이고 싶어 스스로 무리한 거라 누구에게 투정도 못한 채 묵묵히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어리광을 부리듯 말하는 한녹영의

뺨을 쓰다듬으며 강준일이 혀를 찼다.

“마른 것 같은데.”

역시 강준일이다. 딱 보기만 해도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 바로 척 알아맞히니 말이다. 피곤한 몸에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이 입에 좀 안 맞았던 데다 첫날 먹은 음식이 잘못됐는지 배탈이 나서 이삼일 고생한 탓에 살이 조금, 아주 조금 빠졌다.

“아주 쬐끔 빠졌어요.”

“절대 살 빠져서 오지 말라니까.”

출국날 아침에 ‘한 눈 팔지 말 것. 살 빠지지 말 것. 일정 연장 불가.’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두 번째 조건을 못 지켰다. 안쓰러움이 가득한 강준일을 향해 애교스럽게 웃은 한녹영이 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나 보고 싶었어요?”

“당연한 말을. 네가 보고 싶어서 짓무른 눈가가 안 보여?”

“어디요?”

짓누른 눈가를 찾아본답시고 얼굴을 바짝 들이댔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한 한성준이 “여기 사람 있습니다. 저 운전하는 인형 아닙니다.” 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민망하게 웃은 한녹영이 몸을 뒤로 뺐다. 강준일이 못마땅하게 한성준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눈동자가 ‘저 눈치 없는 자식.’ 하고 말하는 듯 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상호 형도 알아요?”

“네. 압니다. 제가 한녹영씨 탑승 전 매니저님과 통화해서 대표님이 마중 나가실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녹영씨 매니저는 원래 준비한 차량을 타고 이동 중일 겁니다.”

강준일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한성준이 했다.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양반은 못 되는 박상호였다.

“응. 나야.”

한녹영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ㅡ 강 대표님이랑 같이 있지?

“응. 왜 말 안 했어? 나 깜짝 놀랐잖아.”

ㅡ 깜짝 놀라라고 말 안 했다. 오늘은 이대로 집으로 가서 푹 쉬어. 내일 보자. 일주일간 수고 많았다.

“응. 형도.”

전화를 끊고 강준일의 어깨로 머리를 툭 기대었다. 강준일이 팔로 한녹영의 어깨를 감쌌다.

“어서와, 녹영아.”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강준일의 말에 한녹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곤 응석을 부리듯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응. 나 다녀왔어요.”

누군가에게 다녀왔다는 인사를 할 수 있다니 너무 좋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다급하게 서로의 옷을 벗기며 침대로 향했고, 일주일이 아니라 일 년 만에 만난 연인들처럼 성급하게 몸을 나누었다. 몇 번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트며, 서로의 몸이며 완전히 정액으로 지저분해질 때까지 하고 또 하고, 싸고 또 쌌다. 손가락 한 개도 까닥할 기력이 없을 때까지 몸을 겹치곤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

분명 씻은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뻐근한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따뜻한 욕조 물에 한참 몸을 담그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었다. 눈을 뜨니 침대 위였다. 눈동자만 살짝 옆으로 굴려보니 강준일이 제 옆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동자 굴리는 소리 다 들려.”

크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한녹영이 깬 것을 알아챈 강준일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꼼짝도 안 했는데.”

“난 어깨에도 눈이 달려있거든.”

“그게 뭐예요?”

한녹영이 어이없다는 투로 웃었다. 그리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옷까지 입고 있는 상태였다. 보나마나 강준일이 입혀준 거겠지. 속옷까지 입고 있는 것이 느껴져 좀 민망했다. 침대에서 욕조로 이동할 때도 안아서 옮겨줬는데. 씻겨줘, 안아서 옮겨줘, 속옷까지 입혀줘. 호강도 이런 호강이 없다. 이런 말 좀 유치하지만 동화나라 왕자님이 된 기분이랄까.

동화나라 왕자님이라니. 한녹영 왜 너 점점 유치해지냐. 한녹영이 속으로 혼자 마구 웃었다. 연애는 유치해야 제 맛이라더니, 정말 점점 유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나 연애를 제대로 하는 중인 건가? 혼자 실실대자 강준일이 의아하게 보았다. 한녹영이 멋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나 얼마나 잤어요?”

“지금이 9시 반이니 1시간쯤.”

노트북을 끄고 옆으로 치워둔 강준일이 한녹영을 돌아보았다.

“배고프지 않나?”

“완전 배고파요.”

아침점심 다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은 걸렀으니 당연히 배고프다. 점심 무렵만 해도 입맛이 통 없었는데 강준일과 함께 있는 탓인지, 아니면 격렬한 운동을 한 탓인지 입맛이 돌아 지금 심정으로는 무쇠도 씹어 먹을 수 있을 듯했다.

“지금 시간에 외식은 무리고······ 간단히 해먹을까.”

“그게 좋겠어요. 냉장고에 뭐 해먹을 거 있어요?”

외식할 시간이 된다고 해도 싫었다. 룸이 있는 곳을 찾는 것도 건거롭고, 나른한 몸으로 외출 준비를 하는 것도 성가셨다. 그냥 집에서 편안하게 있는 것이 더 좋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각종 밑반찬이며 과일 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집안일을 해주시는 분이 주에 2-3회 정도 오는데 성격이 꼼꼼해 청소며 정리며 아주 잘해놓고 가신다. 무엇보다 계약서를 쓸 때 비밀유지조항이 있어서 이 빌라 내에서 본 건 절대 외부로 유출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 어쩌다 마주쳐도 안심이 되었다. 연예인들도 사람을 고용할 때 계약서에 비밀유지 조항을 넣는다던데, 재벌들도 마찬가지인가 보았다.

깨끗하게 씻어둔 청포도가 보여 우선 그걸 꺼내 한 알씩 입안에 넣으며 “뭘 해먹을까요?” 하고 물었다. 사실 요리는 강준일이 하고 저는 옆에서 훼방이나 놓지만 마치 제가 오늘의 요리사라도 되는 냥 묻자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파스타를 할까?”

느끼한 음식 말고, 얼큰하고 한국적인 요리가 먹고 싶은데.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한녹영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민하는 사이 강준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잠시만 하고 침실로 들어간 강준일이 “통화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하고 말했다.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실장 계속 얘기해.”

상대가 한성준인 모양이었다. 회사에 일이라도 생겼나.

“김치찌개 먹고 싶네.”

김치통을 보니 불현 듯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진다. 한녹영이 곧바로 통을 꺼냈다. 당당하게 꺼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연했다.

상호 형한테 물어봐야겠다. 한녹영은 곧장 휴대전화를 가져와 박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어, 나야. 왜?

“형, 김치찌개 어떻게 만들어?”

ㅡ 뭐? 뜬금없이 김치찌개는 왜?

“이제 밥 먹으려고.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

ㅡ 강 대표한테 만들어달라고 해. 요리까지 잘한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 하더니만.

“대표님 지금 통화 중이야. 그리고 어떻게 맨날 얻어만 먹어. 나도 한 번 뭐라도 해주고 싶단 말야.”

빼꼼 고개를 내밀어 봤는데, 아무래도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이틈에 김치찌개를 만들어 쨘 하고 내놓으면 감동받을 것 같았다. ‘녹영이 네가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았어?’ 하고 놀랄 얼굴을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실실 맺혔다.

한녹영의 말에 박상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ㅡ 그냥 내가 올라가서 만들어줄······ 수는 없겠고, 만들어서 갖다 줄게. 네가 가지러 내려오든가. 녹영아, 진심으로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냥 내가 해줄게.

박상호는 위에 올라오는 걸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스위트 홈~ 이라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진심으로 날 생각해서? 무슨 의미야?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빈정상하는 말인데?

“하는 방법이나 알려줘.”

그깟 김치찌개, 뭐가 어렵다고. 전에 박상호가 만드는 모습을 얼핏 봤는데 되게 간단해 보였다.

ㅡ 그냥 내가 해준다니까.

“형이 만들어준 걸로 어떻게 생색을 내? 내가 직접 만들어야 의미가 있는 거지. 전에 보니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이던데, 빨리 방법이나 말해줘. 대표님 통화하는 동안 후딱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

한녹영의 재촉에 박상호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ㅡ 요리를 만만하게 보지 마라.

박상호는 엄중한 경고와 함께 레시피를 말해주었다. 한녹영은 그가 말한 대로 김치를 잘 썰어 냄비에 담았다. 김치 국물로 간을 하라 그랬지? 얼마나 넣어야 하나. 고민하다 듬뿍 넣었다. 일단 불을 켠 후 냉장고를 보니 돼지고기가 있었다.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지, 하며 고기도 넣었다.

화력이 좋아 곧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국물을 떠 맛을 봤는데······ 짜다. 한녹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왜 짜지? 아까 국물을 너무 많이 넣었나. 물을 더 부을까? 하지만 이미 물이 물이 흥건해서 더 넣었다간 찌개가 아니라 국이 될 것 같았다. 고민하던 한녹영이 설탕을 넣었다. 좀 많이. 그러자 이번엔 찌개가 달큰해졌다. 큰일 났다. 찌개가 짜고 달았다. 이걸 어째야 하나. 박상호에게 SOS를 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뭐 하는 거야?”

등 뒤에서 강준일이 물었다. 그는 어느새 한녹영의 바로 뒤까지 걸어와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며 어깨 너머로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형 통화하는 동안 찌개를 만들려고 했는데요.맛이······ 이상해져버렸어요.”

한녹영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아요, 하고 잘난 척하며 감동할 강준일이 보고 싶었는데 다 망쳤다. 요리가 결코 쉽지 않다는 박상호의 말을 들었어야 했나.

강준일은 어디, 하고 말하더니 국물을 떠 맛을 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녹영아, 난 그냥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맛없다는 뜻이죠?”

“너도 먹어봤으면 알 텐데.”

“빈말로라도 맛있다고 해주면 안 되나.”

“내가 또 빈말은 못하는 성격이라.”

제가 먹어봐도 달고 짜고 또 돼지고기를 너무 많이 넣어 기름기가 둥둥 떠있는 이상한 맛이지만, 강준일이 솔직하게 맛없다고 하자 기분이 상해 입매를 삐죽거렸다.

“버려야겠다.”

“음식 버리면 죄 받아.”

레인지의 불을 끈 강준일이 냄비 채 들어 식탁 위로 옮겼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간 한녹영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먹으려고요?”

“버릴 생각이었어? 애인님께서 날 위해 직접 만들어준 첫 음식인데 버릴 수야 있나.”

“배탈 나면 어쩌려고요?”

“설마 죽기야 하겠어. 이상한 맛이지만, 사랑의 힘으로 먹어보지.”

스스로도 미식가라 칭할 정도로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 순전히 제가 직접 만든 첫 음식이라는 이유로 먹어준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언제 부루퉁해있었냐는 듯 웃은 한녹영이 밥솥을 열었다. 오늘 해두고 간 듯 건드리지도 않은 잡곡밥이 꽤 먹음직해 보였다.

“나 오늘 밥솥 CF 들어왔는데 한 번 볼래요?”

주걱을 든 한녹영이 강준일을 향해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그리곤 연기 톤으로 “여보, 밥 다 됐어.” 하고 외친 후 “까다로운 애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밥맛.” 하고 카피를 읊었다. 원래 카피는 까다로운 부인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밥맛인데, 살짝 바꾼 것이다. 콘티대로 밥솥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하얗게 올라오는 김의 냄새를 맡는 시늉까지 하자 강준일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가까이 다가와 확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해왔다.

“이 매력덩어리를 어쩌면 좋지.”

“평생 예뻐해 주면 되죠. 한눈만 팔아봐요, 그땐 나 죽고 형 죽는 거예요.”

한녹영이 으름장을 놓았다.

“나와는 생각이 다르군. 네가 날 두고 한 눈 팔면 난 그 새끼를 죽여 버리고 널 평생 누구도 접근 못하는 곳에 가둬둘 건데.”

“난 평생 형만 볼 거니까 다행이다, 그쵸. 형은 살인자 안 되어서 좋고, 난 죄수처럼 갇히지 않아도 되어서 좋고. 배고프다. 빨리 밥 먹어요.”

장난은 접고 그릇에 밥을 퍼 식탁에 나란히 놓았다. 그 사이 강준일이 밑반찬을 꺼냈다. 굳이 넓은 식탁의 비어있는 자리를 내버려두고 나란히 앉아 밥을 먹자니 신혼부부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강준일은 아주머니가 해두고 간 맛난 밑반찬을 두고 주로 한녹영의 김치찌개로 밥을 먹었다.

“먹다 보니 괜찮죠? 그쵸? 먹을 만하죠?”

“그건 아니고, 애정의 힘으로 먹는 거지.”

하여간 빈말 따윈 못한다니까! 한녹영의 눈매가 다시 가늘어졌다. 손을 뻗어 눈가를 꾹꾹 밀어주며 “주름살 생겨.” 라고 말한 강준일이 이번엔 오리처럼 튀어나오는 한녹영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오디션 준비는 잘 되어 가?”

프로젝트 B 오디션 날짜가 5월 2일로 잡혔다. 프로젝트 B 제작팀에서 각 기획사마다 연락을 돌렸고, 당연히 아스타에도 연락이 왔다. 한녹영은 곧바로 오디션에 지원했다. 지원한 역은 현장 요원인 유진성 역이었다.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팀내 중심 역할을 하는 캐릭터였다. 전에는 팀내 브레인인 이수현을 연기했고, 당연히 이번에도 이수현에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오디션에 지원하려고 생각하니 ‘이번엔 다른 역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현도 매력적인 캐릭터였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 더 연기해 이전보다 더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지만, 다른 역도 해보고 싶었다. 메인 주인공 급인 캐릭터들 모두가 매력적이라 어떤 역을 해도 괜찮긴 했다.

혼자 고민하고, 박상호와도 의논해본 끝에 최종적으로 유진성을 선택했다.

“지원하자마자 중국에 다녀와야 해서 다른 배우들에 비해 연습이 부족할 것 같아 걱정이에요.”

다른 배우들은 제가 중국에 다녀온 동안 역을 따내기 위해 부단한 연습을 했을 텐데. 연습량에서 밀릴 것 같아 걱정이 컸다.

“잘 해낼 거야. 걱정하지 마.”

한녹영이 다정한 말을 건네는 강준일을 향해 웃었다.

“내일부터 연습실에 틀어박히려고요.”

오디션 전까지 집중 연습을 하려고 스케줄을 몽땅 비워뒀다.

“기존 배우들 중에서 캐스팅 못하면 일반인 오디션을 한다던데 진짜에요?”

그런 소문이 돌았다. 우선 기존 배우들을 상대로 오디션을 진행한 후 감독과 원작자 마음에 차는 배우가 없으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공개 오디션을 진행할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지원한 배우들의 자존심까지 걸린 오디션이라나. 꽤 많이 지원한 걸로 아는데 전부 탈락해봐라. 무슨 망신인가.

“이종진 감독과 이강택 작가가 죽이 잘 맞더군. 두 사람 모두의 마음에 흡족한 배우가 없으면 일반인 대상 공개 오디션을 강행할 모양이야. 물론 나도 승인했고.”

“그런 건 투자자 권한으로 좀 막아주면 안 되나.”

한녹영이 투덜거렸다.

“자신 없어? 그럼 지금이라도 투자자의 권한으로 녹영이 너를 영화에······.”

당연히 거절할 줄 알면서도 짐짓 영화에 꽂아줄 수도 있다는 뉘앙스로 말하자 예상대로 한녹영이 강하게 만류했다. 한녹영은 펄쩍 뛰다시피 하며 손을 내젓더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 있어요. 당연히 있죠. 있고말고요.”

이번엔 무조건 실력으로 배역 따낸다!

“믿어.”

슬그머니 웃은 강준일이 짧지만 진한 어조로 말했다. 믿어, 하는 단순한 한마디가 힘이 된다.

“형도 오디션에 와요?”

“갈 생각이야. 백퍼센트 우리 자금으로만 제작하는 영화니까······ 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고, 사적으로는 녹영이 널 응원하려고.”

“형은 날 너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요. 오디션 정도야 혼자 얼마든지 해낼 수 있지만, 굳이 응원해주러 오고 싶다니 말리진 않을게요.”

새침하게 말했지만 속으론 좋았다. 강준일이 제게는 응급약이니 그의 얼굴을 보면 긴장감이 사라질 테니 말이다. 더불어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본래보다 큰 파워를 낼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

‘감이 좋네.’

아까까지만 해도 연습량이 부족해서 어쩌지, 하고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마음이 밝아져 좋은 예감마저 들었다. 한녹영은 흡족한 얼굴로 식사를 마쳤다.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서서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마친 후 침실로 향했다. 금방 밥을 먹어 배가 부른 상태라 바로 눕는 것이 좋지 않지만 배부르니 졸음이 몰려온 것이다.

“아까 한 실장님한테 전화 온 거 보니까 나 만나러 오느라 오후 일 땡땡이쳐서 바쁜 거죠?”

“그런 거 아니야, 라고 하고 싶지만 정확히 봤어.”

꾸물꾸물 누운 한녹영이 강준일의 손을 잡있다.

“나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어줘요.”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어. 어서 자.”

한녹영의 옆에 누운 강준일이 어깨를 내주었다. 한녹영은 다시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호흡할 때마다 밀려오는 익숙한 체향이 너무 좋다. 흐응, 하고 만족스런 숨소리를 낸 한녹영이 곧 잠들었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숨소리가 일정해진 이후에도 한참 곁에 더 머물렀다. 그러다 겨드랑이 쪽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고 있던 한녹영이 몸을 틀어 똑바로 눕자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한녹영, 사랑해.”

“으응, 나도 사랑해요.”

잠결에도 사랑한다는 말에 사랑한다고 대꾸해준다. 짧게 웃은 강준일이 애인을 마중하러 가느라 미뤄둔 일을 위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녹영아, 아이스커피 마셔라.”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온 박상호가 말했다.

“어. 고마워.”

그제야 한녹영이 거울을 보며 연기 연습 하던 걸 멈추고 박상호에게로 다가갔다. 박상호가 얼음을 잔뜩 넣어 시원하게 만든 아이스커피를 내밀었다. 그걸 받은 한녹영이 의자에 앉으며 후우, 하고 짧게 숨을 내뱉었다. 박상호도 한녹영의 옆에 앉았다.

“참 대단하다. 강 대표 말이야. 애인이 배우라고 연습실을 만들어주질 않나. 네가 수영선수였으면 지하에 땅 파서 수영장도 만들어줬을 것 같다.”

방 두 개를 허물어서 하나로 만든 연습실은 매우 컸다. 한울에 있을 때, 한울 소속 모든 배우들이 이용했던 연습실보다 더 크니 말 다 한 셈이다. 거기다 한쪽 벽면에 전면 유리를 부착해 표정이나 동작 등을 체크할 수 있게 했고, 카메라를 달아 녹화도 가능하게 해두었다. 방음 또한 완벽해 이 안에서 암만 악을 써도 바깥에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았다. 한성준이 강준일을 향해 ‘한녹영씨가 좋아하는 걸 보니 돈지랄한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 하고 약간 빈정대는 듯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울컥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같이 살고 싶다는 이유로 이 비싼 빌라를 사버리질 않나, 연습실을 만들어주질 않나. 박상호 말대로 제가 수영선수였다면 지하에 수영장도 만들어줬을 거다. 자살을 선택했을 때만 해도 결국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사랑받지 못한 박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세상 사람들 전부의 복을 제가 끌어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음이 느껴졌다. 전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 희생으로 절 강준일에게 이끌어준 덕분이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 같아.”

한녹영의 긍정에 박상호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무실 위층 오늘 계약한다. 밴도 한 대 더 뽑았고.”

현재 아스타 사무실은 여의도 M빌딩 3층에 입주해있는데, 오늘 4층 계약을 완료했다. 이제 3층과 4층, 두 개 층을 쓰는 제법 큰 회사가 된 셈이었다. 물론 다른 거대 기획사들처럼 아예 건물 하나를 통으로 쓰자면 시일이 좀 걸릴 테지만, 갓 시작한 신생 회사가 땅값 비싼 여의도 건물에 무려 두 개층을 사용한다는 건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 전부 한녹영이 기꺼이 투자해준 덕분이었다.

도망자로 받은 러닝개런티가 현재까지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출연료의 몇 배인데, 앞으로도 돈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일 테니 도망자 한 편으로 한녹영은 돈방석에 앉은 셈이다. 현재까지 순수익만 150억 이상이었다. 심지어 CF 출연료까지 막방 이후 9억으로 뛰어 현재 몸값 높은 연예인 순위 10권내에 진입했다. 한국에서도 확실히 톱톱스타로 입지 굳혔지, 한류스타 되었지. 한녹영을 보는 박상호의 눈에 꿀이 떨어졌다.

“잘했어. 그리고 사무실이 커졌으니까 소속 배우들 수도 늘리는 게 어때?”

“누구 생각하는 사람 있어?”

“정빈 선배 소속사 없잖아. 형이 잘 꼬셔봐.”

송정빈은 몇 해 전 꽃뱀 사건으로 소속사에서 버림받아 현재 프리였다. 요즘 송정빈의 인지도가 예전 그의 전성기 때보다 나을 정도라 전속 계약을 맺는다면 회사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박상호가 회사를 차렸다는 말을 했을 때만 해도 큰 관심은 없어 보였지만, 분명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꽤 받았을 텐데 아직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기회는 있었다. 어쩌면 워낙 대접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오고 싶은데 먼저 ‘계약하자.’ 하고 말하기 자존심상해 이쪽에서 러브콜을 보내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볼까. 네가 투자해서 여유자금도 꽤 있으니 송정빈 정도 되는 스타가 한 명 들어와도 충분히 커버할 것 같거든. 계약금도 두둑하게 줄 수 있고. 흠······ 진짜 본격적으로 생각해봐야겠네.”

기획사의 파워는 곧 소속 배우들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제 정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톱A급 스타가 된 한녹영 덕분에 방송국에서도 외주제작사에서도, 물론

광고업체들에서도, 어디에서도 아스타를 무시하지 못하지만 송정빈까지 데려올 수 있다면 더 든든해질 것 같았다.

송정빈에게 제시할 수 있는 계약조건들 한 번 작성해보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박상호가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 그리고 네 명의로 일단 세 군데 단체에 기부금 보냈다.”

“익명으로 하라니까.”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족들을 쳐내며 ‘가족들에게 줄 돈으로 차라리 기부나 하겠다.’고 생각했던 걸 이제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긴데다 제가 좋은 일을 하면 돌아가신 어머니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서 기부금을 정말 투명하게 운영하는 괜찮은 단체를 찾아서 1억씩 익명으로 기부해달라고 했는데 박상호가 제 부탁대로 하지 않고 이름을 밝힌 모양이었다.

“좋은 일은 널리 퍼뜨려야 하는 법이야.”

“그래도.”

“언론에서 도망자가 얼마를 벌었고, 그로 인해 너는 또 얼마 이상을 벌었다는 등의 오지랖 기사를 마구 내는 중이잖아. 이럴 때 이익의 일부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야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이미지에 도움 되려고 기부하는 것도 아닌데 뭐.”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한다. 그게 바로 냉철한 사업가의 마인드인 거지.”

아무리 봐도 냉철한 사업가와는 거리가 먼 박상호의 말에 한녹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박상호가 머쓱해했다. 다 마신 컵을 내려놓고 다시 연습하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한녹영의 것이었는데, 액정을 보니 김춘영이었다.

“작가님. 안녕하셨어요.”

한녹영이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ㅡ 녹영씨, 지금 바쁘지 않으면 빨리 인터넷 기사 봐봐.

김춘영이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ㅡ 내가 찍은 자기 사진 있잖아! 미국에 보낸 거. 그거 얼마 전에 발매되었는데 미국에서 반응이 폭발적이래. 딱 3장 들어갔는데, 아시안뷰티가 누구냐면서 출판사 쪽으로 문의가 엄청 오나봐. 오늘 연락이 왔기에 내가 바로 아는 기자한테 소스 던져줬지. 기자가 바로 기사 올렸다니까 봐봐.

전화를 끊자 박상호가 “누구야? 무슨 작가?” 하고 물어왔다. 한녹영이 “김춘영 작가.” 하고 말한 후 포털에 제 이름을 쳐보았다.

‘아시안뷰티, 코리안뷰티, 한녹영.’ 이라는 제목이 보여 클리했더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헐리웃 배우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난민들을 돕기 위해 참여한 화보집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배우 한녹영이 실렸다. 한녹영은 쟁쟁한 배우들을 젖히고 아시아뷰티, 코리안뷰티라 불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한녹영이 기사를 보여주자 박상호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거 김춘영 작가가 미국에 보냈다는 그거 말하는 거지?”

“응. 나한테는 미국에서 함께 작업했던 작가가 아시안 모델을 몇 컷 싣고 싶어 한다고만 했는데, 이게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 화보집이었나보네.”

모델료는 없을 거야, 라고 하기에 미국의 유명 배우들 화보집에 실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회라 기꺼이 ‘네. 모델료 안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자선 화보집이라 모델료가 없을 거라고 한 모양이었다. 미리 말해줄 것이지. 김춘영 작가도 참 엉뚱한 구석이 있다.

“사진도 실렸다. 누구 배우인지 참 잘났다.”

기사에 화보집에 실린 한녹영의 사진도 있었다. 옆모습인데,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자꾸만 얼굴을 건드려서 눈을 감은 채 머리가락을 쓸어 올리는 모습을 순간 포착한 사진이었다. 김춘영은 그 사건을 보고 약간 음울해 보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면서 흑백 처리해 미국에 보내는 사진들 중에 끼워 넣었는데, 그쪽에서도 이 사진을 셀렉한 모양이었다. 다른 한 장은 정면을 보며 살짝 웃는 모습이 요염해 보인다며 셀렉한 것이고, 나머지 한 장은 햇살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고 청순해 보인다며 셀렉한 것이었다. 같이 보낸 사진들도 많지만 ‘이 세 장이 유력해.’ 하고 보낸 것들이 전부 화보집에 실렸다.

박상호가 입이 찢어질 듯 좋아하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또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도 김춘영이었다.

ㅡ 봤어?!

“네. 봤어요. 이거 자선화보집이라고 왜 말씀 안 하셨어요?”

ㅡ 그게 뭐가 중요해? 그보다 미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화보집을 한국에서도 발행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네? 미국 세 배우들 사진 분량을 줄이고, 녹영씨 사진 분량을 늘여서 말이야. 물론 이익은 전부 기부야.

“저야 당연히 좋죠. 잠시만요. 옆에 매니저 형 있으니 물어볼게요. 형, 작가님한테 화보 한국에서도 발행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왔대. 화보집에 내 사진 분량 늘리고. 이익은 전부 기부.”

“당연히 해야지. 무조건 한다고 해!”

박상호가 벌떡 몸까지 일으키며 외쳤다. 가린다고 가렸는데 소리가 들렸나보다. 김춘영이 웃었다.

ㅡ 매니저님 성량 한 번 좋으시네. 오케이, 그럼 바로 작업 들어간다. 안 그래도 그 날 촬영한 사진들 중에 아까운 컷이 너무 많았거든. 그것들 중에 뭘 셀렉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이네. 나중에 또 연락할게.

마음이 급한지 김춘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인사를 하려고 준비 중이던 한녹영이 머쓱하게 목을 문질렀다. 그 사이 박상호는 그의 전화로 포털을 찾아보며 희희낙락 중이었다.

“녹영아, 너 이러다 진짜 세계적인 스타 되겠다. 나중에 헐리웃에서 막 러브콜 오는 거 아냐? 안 되겠다. 너 당장 영어회화 시작해라.”

“형은 그 설레발이 문제야.”

한녹영의 말에 박상호가 눈을 부릅떴다.

“설레발이라니! 요새 미국으로 진출하는 한국 배우들 비율이 늘어나고 있잖아. 너도 그 중 한 명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내가 당장 괜찮은 과외 교사로 붙여줄 테니까 회화도 시작하자.”

정말 미국에서 러브콜이 올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배워둬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 “응. 배워두지 뭐.” 하고 대답했다. 박상호는 “당장 과외 선생 수배해야지.” 하고 의욕에 들떠 연습실을 나갔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잠시 내려둔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다시 연습에 집중했다.

한녹영은 지금 퇴근한다는 강준일의 전화를 받고서야 이른 아침부터 틀어박혀 있던 연습실에서 나왔다. 거실을 가로지르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사무실에 다녀온다던 박상호였다.

“올라가려고?”

“응. 대표님 이제 퇴근하신대.”

둘만 있을 때는 강준일을 형이라고 부르지만,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형.’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쑥스럽다. 그래서 박상호나 한성준 등의 앞에서 강준일을 지칭할 때는 여전히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중이었다.

“그러냐. 그럼 올라가서 잘 쉬어라.”

박상호가 시큰둥하게 손을 흔들었다. 처음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삿짐센터 직원들에 의해 보쌈 당하듯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지나치게 넓은 집에 적응이 안 되었다. 한녹영이 전에 살던 빌라도 넓었지만 여긴 거의 1.5배는 됨직했다. 거실이 얼마 넓은지 축구를 해도 될 정도였다. 거기다 데뷔 이후로는 늘 한집에 살았던 한녹영이 냉큼 애인의 집으로 가버리자 혼자 남아 쓸쓸했는데, 이젠 적응이 되어 괜찮다.

“응. 형도 잘 쉬어.”

마음이 급한 한녹영이 부랴부랴 현관을 나서려는데 박상호가 “맞다.” 하는 말로 한녹영을 붙잡았다.

“왜? 할 말 남았어?”

“장 대표, 장현재 말이야. 2심에서도 1심과 똑같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더라.”

장현재는 1심에서 7년을 선고받고 항소했는데, 2심에서도 같은 판결을 받은 모양이었다. 주애리 또한 비자금 조성 등으로 징역 2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법정에서 울부짖던 모습을 봤는데, 권력가의 딸로 태어나 평생 우아하게 살아왔을 여자에게 교도소 생활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불쌍하다가도 그녀가 강준일을 망치려했던 것을 떠올리면 마음이 독해졌다. 그깟 후계자 자리가 뭐라고 가족을 철저히 망치려 한 건지. 그렇다고 강정석 회장이 장손인 강한일을 맨몸으로 내쫓으려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미 보통 사람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부를 지니고 있으면서 더 가지려고 욕심을 내다 추락한 거라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 별로 관심 없어서 궁금하지도 않아.”

이제 장현재에겐 조금의 관심도 없다. 그가 항소를 하든 형을 살든, 어떻든 이미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애정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예 장현재에 대한 일체의 생각을 끊어버렸다. 한녹영에게 장현재는 그냥 먼 곳에 사는 A씨나 마찬가지였다.

“난 그래도 궁금한 마음이 있어서 자꾸 찾아보게 되네. 장현재는 지 사촌형인 하영택과 나란히 실형 살 테고, 주민성은 교도소에서 자살 시도했다는 기사 봤는데 사람 팔자 참 알 수가 없구나 싶더라. 최소한 남을 짓밟지는 말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도 들고.”

“응.”

맞는 말이다. 선인처럼 바르고 정확하게 살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남을 짓밟지는 말아야 한다. 그걸 지난 삶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올라가봐.

박상호가 어여 가라며 손짓했다.

“어. 내일 봐, 형.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한녹영이 다시 급해져서 부랴부랴 나와 위층으로 향했다. 그리곤 곧장 욕실로 들어섰다. 유진성은 현장 요원이라 액션이 많아 연습실에서 나름 액션 연습까지 했더니 온몸이 땀이었던 것이다.

막 샤워를 끝낸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현관이 열리며 강준일이 안으로 들어섰다. 한녹영은 곧장 강준일에게로 달려가 목에 팔을 걸고 매달리다시피 안겼다.

“어서 와요, 형.”

짧게 웃은 강준일이 한녹영을 끌어안고 귓가에 “다녀왔어.” 하고 속삭이더니 입을 맞춰왔다. 혀가 들어오는 딥키스였다. 두 사람은 현관에서 한참 키스를 하고서야 떨어졌다.

“어서 오라는 말이 이렇게 설레는 말인지 미처 몰랐어.”

강준일이 팔로 한녹영의 어깨를 감았다. 한녹영은 팔을 강준일의 허리로 둘렀다. 그리곤 거실로 향하던 중 강준일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한 말에 한녹영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내가 어서 오라고 인사하니 설레었어요?”

“몹시. 하마터면 현관에서 정사를 치를 뻔 했어.”

“그럼 앞으로 그럴 마음이 있으면 침대에서 형을 마중해야겠다. 침대 위에서 어서 와요, 하면 형이 날 덮칠 거잖아요.”

“기왕이면 알몸으로 부탁하지. 그럼 야수로 빙의해서 아주 열정적이고 터프하게 덮쳐줄게.”

강준일은 한녹영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 못해 한 술 더 떴다. 역시 말로는 못당한다니까.

“옷 갈아입고 나오지.”

“같이 갈래요.”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강준일의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가 스툴에 앉아 옷을 갈아입는 그를 지켜보았다.

“저녁은 해물탕이래요.”

아침에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 일하러 오신 아주머니와 마주쳤는데 ‘저녁은 해물탕으로 준비해두고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나쁘지 않군.”

“네. 맛있을 것 같아요.”

“오늘은 별 일 없었나? 하루 종일 연습실에 있었어?”

“네. 종일 연습실에서 오디션 연습했어요. 참, 아까 김춘영 작가한테 전화가 왔는데 내 사진이 실린 화보가 미국에서 아주 반응이 좋대요. 겨우 세 컷이 들어갔을 뿐인 데도요.”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하듯 으스대며 말했는데 강준일은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알아.”

“벌써 알고 있었어요?”

“너에 관한 기사는 다 따로 체크 중이니까. 특이사항이 있으면 따로 보고가 올라오거든.”

“직원들 시켜서 내 스토킹하지 말고요.”

한녹영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가만 보면 정말 제 기사는 다 꿰고 있었다.

“그건 곤란한데. 네 스토킹이 내 취미생활이니까. 그나저나 기사 보면서 내 마음은 몹시 슬펐어.”

“왜요?”

“이제 나의 녹영이가 세계인의 한녹영이 되는 건가 싶어서 말이야. 스타를 애인으로 두고 있자니 매일이 불안해.”

한숨을 푹 쉬며 하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스툴에서 일어난 한녹영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강준일의 가슴에 살포시 안겼다. 나의 녹영이, 라는 표현에 가슴이 살랑거렸다. 맞다. 저는 강준일의 한녹영이었다. 그리고 강준일은 한녹영의 강준일이고.

“내가 정말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도 형만을 사랑할 거에요.”

정말 세계적인 스타가 될지, 헐리웃에서의 러브콜은 김칫국이 될지 모르지만 단 한 가지, 죽는 날까지 강준일을 사랑할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나도 사랑해.”

가볍게 입을 맞춘 강준일이 “식사할까?” 하고 말했다. 부엌으로 가니 식탁에 정갈하게 상이 차려져 있었다. 탕을 데우고 밥을 푸기만 하면 되었다. 레인지의 불을 켜자 곧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으면 근사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맛있다.”

해물탕은 적당히 매우면서 시원해 딱 한녹영의 입맛이었다. 그래서 고봉으로 담은 밥을 다 먹었더니 너무 배불러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한녹영이 볼록 튀어나온 배를 문지르며 연신 숨을 헐떡이자 짧게 웃은 강준일이 산책을 제안했다.

“밤 날씨도 꽤 좋아졌는데, 잠깐 주변 산책이나 할까?”

아직 일교차가 있긴 하지만 막 움츠린 채 종종 걸음으로 걸어야 할 정도의 추위는 물러간 상태였다. 약간 선선하다 싶은 날씨라고 할까. 딱 걷기 좋은 날씨이긴 했다.

“괜찮을까요?”

나가고 싶긴 한데, 걱정도 들었다.

“밤인데다 멀리 가지 않고 동네만 거닐다 오면 돼.”

“모자 쓰고 나올게요.”

한녹영은 곧장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스냅백을 찾아 썼다. 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쓰자 가까이 다가와서 얼굴을 빤히 보지 않는 이상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안해서 상의를 후드로 갈아입고, 후드에 달린 모자까지 스냅백 위로 썼다. 그 상태로 거실로 나오자 인기척에 돌아본 강준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강도 패션인가?”

한녹영이 눈썹을 실룩실룩 움직였다. 하필이면  마스크가 까만색이라 나오기 전 거울을 보고 ‘어두운 데서 보면 강도로 오해받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강도 패션이 아니라 스타의 비밀 데이트 패션이거든요. 빨리 나가요.”

한녹영은 웃느라 바쁜 강준일의 팔을 붙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곤 골목을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외출할 땐 대체로 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부자 동네라 그런지 골목은 인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느긋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형이랑 같이 걷는 거 처음이네요.”

바쁘기도 했지만, 몇 번이나 함께 기사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사이라 얼굴을 드러내놓고 한가하게 다니는 일이 불편했다. 스폰서 설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제가 연예인으로 사는 이상 언젠가 다시 불거져 나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느긋한 산책이 다 뭔가. 가벼운 데이트도 힘들었다. 바깥에서 뭘 먹으려 해도 룸이 있는 곳을 가야 마음이 편했다. 영화나 뮤지컬, 연극 감상 등 문화생활도 아직 함께 한 적 없었다. 강준일도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지만 저만큼 대중들에게 친숙한 얼굴은 아니라 상대가 제가 아니었음 이렇게 강도들 마냥 어둠을 틈 타 다니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군.”

“데이트다운 데이트도 못해보고, 형 애인이 내가 아니었으면 사람들 신경 안 쓰고 산책도 했을 테고, 식사도 아무데나 들어가서 할 수 있있을 거고, 영화나 연극도 마음 편히 함께 보러 갔을 텐데······ 미안해요.”

시무룩하게 말하자 짧게 웃은 강준일이 한녹영의 코를 가볍게 비틀었다.

“내가 유치한 말 좀 할까?”

“······.”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들 다 포기해도 상관없을 만큼 사랑해. 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형은 어쩌면 이렇게 예쁜 말만 해요?”

“내가 팔방미인이라 못하는 것이 없긴 하지.”

거만한 말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밤 조깅을 나온 건지 가벼운 차림의 여자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뛰다가 나란히 걷고 있는 강준일과 한녹영을 보고 흠칫했다. 가로등이 있다 해도 어둑한 골목에 건장한 남자와 얼굴을 온통 가린 남자가 있으니 겁이 난 모양이었다. 뛰어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너무 가렸나 싶어 마스크를 살짝 내렸을 때 이번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다정한 포즈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녹영이 다시 마스크를 올렸다.

두 사람은 어깨를 딱 붙인 채 재잘대며 걷는 중이었다. 남자의 손을 꼭 잡은 여자의 얼굴이 아주 행복해 보였다. 한녹영은 고개를 틀어 커플의 등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

걸음까지 멈추고 저만치 멀어진 커플을 보고 있자 강준일이 의아하게 물어왔다.

“저 커플이요. 부러워서요.”

“뭐가?”

“저렇게 당당하게 손잡고 다니는 모습이요.”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한 강준일이 한녹영의 손을 잡았다. 주변을 빠르게 훑어본 후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한녹영이 슬그머니 강준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걸었다.

“저 가발 아직 가지고 있는데, 조만간 날 잡아서 완벽하게 여장 한 번 해볼까요? 치마 입고, 가발 쓰고, 화장 진하게 하면 밝은 대낮에도 아무도 못 알아볼 것 같지 않아요?”

정지해의 가발은 이삿짐 속에 잘 들어있었다. 버릴까, 돌려줄까, 처분을 잠깐 고민했는데 혹시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서랍장 안에 잘 넣어두었다.

“완벽한 여장을 한 네 모습이 보고 싶긴 하군.”

분명 예쁠 테니까. 강준일의 눈에는 한녹영이 거적을 걸치고 봉두난발을 해도 예뻐 보일 터였다.

“기대해요. 형이 방심하고 있는 그 순간! 내가 완벽한 여장을 하고 데이트 신청을 할 테니까요.”

“왜 하필이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이지?”

“그래야 놀랄 거 아니에요. 촬영 끝난 날 회심의 서프라이즈도 실패했는데, 이번엔 성공률 백퍼센트에 도전해봅니다.”

정말 방심한 순간에 완벽한 여장 모습으로 나타나서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컨셉은 초섹시 미녀가 좋겠다. 눈화장 진하게 넣고, 립스틱도 새빨간 색으로 하고. 그리곤 대낮 데이트를 즐기다가 밤에 당당하게 호텔로 들어가면 짜릿할 것 같았다.

“꼭 스타킹을 신도록 해.”

강준일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요?”

“야수처럼 거칠게 스타킹을 찢은 후에 섹스하려고. 기왕이면 속옷은 입지 않고 스타킹만 신은 채이면 더 야해 보일 것 같은데.”

속옷을 입지 않은 채 스타킹만 신으라니. 그리고 스타킹을 찢어서 뭐? 강준일의 말을 머릿속에서 실사로 상상해보니 괜히 아랫도리가 간질거리며 야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형 취향이 무서울 때가 있어요.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할까요.”

한녹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강준일이 웃었다.

“그래서 싫어?”

“그래도 사랑하니 문제죠. 밤공기 좋다.”

요세 미세먼지니 뭐니 해서 환기도 마음대로 못 시킬 만큼 공기가 탁하다는데, 마침 오늘 밤은 공기가 좋았다. 코로 들이켜는 바람에 신선한 내음이 가득 실려 있었다.

“오랜만에 공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가끔 이렇게 밤 산책을 나와도 좋을 것 같아.”

“응. 가끔 이렇게 나와요.”

한녹영이 동의했다. 막상 나와 보니 밤이고 골목이라 사람이 별로 없고 한가해 괜찮았다. 손잡고 걸으니 데이트 하는 기분도 들고.

“스타의 비밀 데이트 패션을 하고 말이지.”

“마스크도 다양한 색깔로 나오던데, 다음번에는 빨간색을 써볼까요?”

“공포영화가 될 것 같은데.”

“그럼 보라색?”

“노란색은 어때?”

강준일이 노랑을 권유해왔다. 한녹영이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노랑색 싫어해요. 흰색은 너무 무난할까요?”

“파랑색.”

“그냥 깔별로 다 사놓고 날마다 다른 색으로 착용하는 편이 낫겠어요.”

마스크 색깔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한녹영의 목소리가 밝았다. 중요한 얘기도 아니다. 그냥 쓸데없는 고민이고 얘기일 뿐인데도 즐거웠다. 비록 얼굴을 온통 가린 채 남들의 눈을 피해서 하는 산책이지만 강준일과 함께라 행복했다.

두 사람은 40분 정도 걷다가 집으로 돌아와 함께 씻었다. 그리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결제해서 보고 11시가 되자 잠자리에 들었다. 별 거 없는 소소한 일상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

오디션 날 아침 한녹영의 선행에 관한 기사가 떴다. 배우 한녹영이 희귀병어린이 환자들과 소년소녀 가장, 스포츠 꿈나무들, 그리고 야생동물 보호 단체 등에 기부한 사실들이 기사를 통해 공개되었다. 거기다 곧 한국에서도 발매되는 헐리웃 배우들과의 화보집 수익 또한 일절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기부할 거라는 기사도 떠서 기부 천사라는 닉네임이 또 하나 생겼다. 이 또한 민망한 닉네임이긴 마찬가지지만 녹영파탈보다는 나았다.

“오디션 결과는 바로 나온다더라. 떨리냐?”

박상호의 말에 한녹영이 웃었다.

“떨고 있는 사람은 형 같은데?”

“어?”

“오디션 보러 가는 사람은 나야. 형이 왜 떨어?”

박상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사선을 내려 제 손을 본 박상호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땀이 맺혀 있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게. 내가 왜 떠냐? 근데 떨린다. 청심환 한 알 먹어야할까 봐. 한수야! 근처 약국에 가서 청심환 한 알, 아니 두 알만 사와라.”

“난 괜찮아. 안 먹어도 돼.”

“지금은 괜찮아도 막상 오디션 장에 들어가면 떨릴 수도 있어.”

“내가 초짜냐. 떨게.”

“초짜든 아니든 평가 받는 입장에 선다고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들면서 떨릴 수 있다니까? 그냥 얌전히 먹어둬.”

박상호가 “한 개야? 두 개야?” 하며 서 있는 장한수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오케이, 하고 고개를 끄덕인 장한수가 옆에 있던 막내 매니저에게 “들었지? 청심환 두 알.” 하고 지시를 내렸다. 로드 신세에서 벗어나 드디어 밑으로 막내를 두게 된 장한수는 요즘 신나 죽었다. 막내 매니저가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너더러 사오라고 했잖아.”

“막내는 뒀다 뭐하려고? 형, 아니 사장님아. 우리 이건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나 더 이상 로드도 막내도 아니다. 승진시켜줬으면 그에 걸맞은 대우도 해줘라. 응?”

당당한 요구에 박상호가 피식 웃었다.

“알았다. 알았어.”

그리고 한녹영을 향해 물었다.

“한 30분 있다가 출발하면 되나?”

“응.”

오디션은 10시부터였고, 지금은 9시였다. 오디션 장이 그리 멀지 않아 여러 요건을 계산해 봐도 30분이면 충분했다. 한녹영은 오디션에 가기 전 메이크업도 받을 겸, 새로 계약한 위층도 볼 겸 일찍 사무실에 나왔다. 3층은 직원들 전용 공간이고 새로 계약한 4층은 연습실, 휴게실, 의상실 등으로 꾸밀 예정이었다. 2-3일 내로 리모델링 공사가 들어간다.

“녹영이 네 기사 계속 뜬다. 댓글들도 반응 되게 좋아. 너 부모님 일로 아주 살짝 남아있던 고약한 이미지 이번에 다 털 것 같아.”

정지해가 말했다. 한녹영이 멋쩍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기부에 관한 일로 인터뷰 요청도 들어왔는데, 쑥스러워서 거절했다.

“형, 진짜 다음부터는 익명으로 하자.”

쏟아지는 칭찬이나 찬사가 부담스러웠다.

“익명으로도 하고, 실명으로도 하고 그럼 되지. 그나저나 너 또 당분간 바쁠 거야. 패션쇼에도 참석해야 하고, CF 촬영도 해야 해. 인터뷰도 몇 건 잡혀있고. 오디션 준비한다고 해서 다 미뤄둔 거니까 내일부터 또 바쁘자.”

“내일은 안 돼.”

“왜!”

“어머니 뵈러 갔다 오려고 해.”

내일이 마침 휴일이라 강준일도 쉴 수 있어 함께 다녀오려고 한다. 어설픈 이유만 대봐라, 하고 벼르고 있던 박상호가 단번에 기가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라니,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럼 모레부터 스케줄 다시 조정해둘게. 그나저나 너 혼자 가는 건 아니겠지?”

“응. 같이 가려고.”

사람들 앞이라 두루뭉술하게 물은 걸 바로 알아들은 한녹영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빨간 날이라 어디든 사람들 많을 텐데, 조심하고.”

“응.”

그때 막내 매니저가 청심환을 사서 돌아왔다. 박상호는 그 중 한 개는 직접 먹고, 나머지 한 개는 한녹영에게 건넸다. 별로 안 떨린다는데도 그는 “먹어둬!” 하며 강요했다. 이따 반드시 떨릴 거라면서 말이다. 이따는 더더욱 안 떨릴 텐테. 제 응급약인 강준일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먹어둬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 먹은 후 일어섰다. 이제 그만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오디션 장에 도착해서 함께 온 정지해와 장한수, 그리고 막내 매니저와 막내 코디는 둔 채 박상호와 둘이 위로 올라갔다. 오디션 시작은 10시부터이고, 지금은 9시 45분인데, 거의 대부분의 배우들이 도착한 상태로 보였다.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로 들어가자 오디션에 지원한 배우들이 한녹영을 보고 술렁였다. 설마 한녹영 정도 되는 배우가 오디션에 지원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비어있는 의자가 보여 그쪽으로 가려는데 아는 얼굴들도 꽤 보였다. 예전에 함께 드라마를 한 적이 있는 배우들과 프로젝트 B를 함께 했던 배우들이었다. 한녹영은 안면이 있는 배우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 후 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찬찬히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LK 투자, 감독 이종진, 무조건 천만은 넘는다는 업계의 평가 등으로 이미 ‘캐스팅만 되면 대박이다.’ 라는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탓인지 알짜배기 배우들은 대체로 다 온 듯 했다. 물론 반드시 캐스팅되어 뜨고 말거라는 투지를 보이는 신인들도 제법 되었다. 그럭저럭 얼굴은 알려졌지만 지명도는 별로 없는 배우들은 벌써부터 침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한녹영씨 무슨 역에 지원했습니까?”

누군가 물었다. 안면이 없는 걸 보니 신인 중 한 명인가 보았다. 한녹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유진성 역에 지원했습니다.”

유진성 역에 지원한 배우들이 곳곳에서 탄식했다. “요즘 한녹영 연기력 장난 아니던데, 이번에도 미끄러지겠네.” “근데 지원한 역이 아니라 다른 역으로 캐스팅 될 수도 있다고 들었거든.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봐.“ “한녹영까지 올 줄이야.” “이번 영화 대박이라는 소문이 진짜 사실인가 보네.” 등등 하며 쑥덕댔다.

“그럼 나와 라이벌인가?”

구석에서 슥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배우 김이진이었다. 한녹영이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한녹영입니다.”

올해 서른이 된 김이진은 데뷔 8년차로 주로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배우였다. 재작년 말에 개봉한 영화가 천만을 넘겨 천만 배우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는 중인, 요즘 충무로 지명도 1위인 배우이기도 했다. 물론 예전에 프로젝트 B에서 유전성 역을 맡았다.

“알지, 한녹영. 도망자는 잘 봤다. 연기 괜찮더라.”

“고맙습니다.”

“조명발인가 했는데 실물이 화면이랑 똑같네. 드라마 초기보다 몸은 더 좋아진 것 같고. 키도 생각보다 크고. 액션도 제법 하던데, 따로 배웠어?”

“네. 일주일에 한 번씩 액션스쿨에 다니면서 지도받고 있습니다.”

도망자를 찍으면서 무술감독한테 세세한 지도를 받은 탓인지 오랜만에 액션스쿨에 갔는데도 움직임이 좋다는 칭찬을 받았다. 자신감이 상승해 이젠 어떤 액션도 두렵지 않은 기분이었다.

“나 긴장해야겠구나. 후배에게 역 빼앗기지 않으려면.”

김이진이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입매와는 달리 눈동자에는 견제의 빛이 들어 있었다. 이놈 만만치 않겠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이 보였다.

“제가 감히 선배님과 대결이 되겠습니까? 그냥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한녹영이 어설프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이 선배가 라이벌이었지. 그걸 자각한 순간 덤덤했던 마음이 무너지며 떨리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긴장하면 대사 제대로 못 칠 텐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을 때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진행요원이 오디션 시작을 알렸다. 한녹영의 번호는 23번이라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형, 큰일 났다. 나 떨리기 시작했어.”

한녹영이 박상호를 향해 긴장된 눈빛으로 말했다.

“안 떨린다더니.”

“라이벌 중에 김이진 선배가 있다는 걸 안 순간 떨리기 시작했어.”

“김이진이면 막강하긴 하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너 한녹영이야! 요즘 대세! 누가 뭐래도 톱스타 한녹영. 아시아권만 아니라 미국도 홀려버린 녹영파탈!”

“그 단어는 쓰지 말랬지?”

한녹영이 녹영파탈이라는 단어에 과민반응을 보이자 박상호가 흐흐, 하며 악동처럼 웃었다.

“녹영파탈. 입에 딱 붙는데 넌 왜 그렇게 질색하냐?”

“민망하잖아. 쑥스럽고. 어쩌다 정빈 선배 앞에서 녹영파탈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와서.”

그나마 인터넷 신조어 유행이 빨라서 다행이었다. 아직은 녹영파탈스럽다는 표현이 유행을 타는 중이지만 곧 사라질 것으로 본다.

“물 좀 마셔. 입술 말랐다.”

박상호가 가방에서 물을 꺼내 주었다. 고마워, 하고 웃은 한녹영이 물을 마셨다. 녹영파탈 때문에 발끈하느라 긴장이 약간 풀리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심장이 두근대는 중이었다.

“김이진님 대기해 주십시오.”

진행요원이 대기실 문을 열더니 김이진을 불렀다. 그의 번호가 한녹영보다 앞인 모양이었다. 김이진은 “먼저 하고 간다. 너도 잘해라.” 하고 말하며 한녹영의 어깨를 툭 쳤다.

“네. 선배님, 고맙습니다. 선배님도 잘 하십시오.”

벌떡 일어나며 말한 한녹영이 도로 의자에 앉으며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김이진이 제 앞이라니 더 미치겠다. 연기가 비교되진 않을까, 김이진의 연기를 보고 반한 이종진이 덜컥 유진성 역에 캐스팅해버리진 않을까,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괜찮을 거라니까.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너 연기 진짜 많이 늘었어. 이젠 누구도 너한테 얼굴로 떴다는 말 못할 거다.”

십 초 간격으로 후우, 하고 숲을 내뱉자 박상호가 자못 진지해져서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한녹영이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진짜야?”

“응. 전에도 못하는 연기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얼굴이 더 눈에 들어왔다면, 지금은 조화를 이룬 것처럼 보여. 도망자 마지막 촬영할 때 나 울 뻔했다. 네 연기에 감동 먹어서.”

“형은 진짜 날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응. 나 진짜 널 사랑해. 이젠 네가 진짜 내 동생 같고, 가끔은 아들 같고 그렇다.”

“고마워, 형. 형이 날 이렇게 아껴주는 걸 보니 이번엔 나 제대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치?”

“당연히 제대로 잘 살고 있지. 앞으로도 잘 살아서 엄청나게 승능장구 할 거고. 나 널 세계적인 배우로 키울 야심에 가득 차 있으니 김이진 정도에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가서 배역 따오는 거다!”

박상호가 한녹영의 등을 찰싹 쳤다. 쫙 소리가 났을 정도로 세게. 아파, 하고 원망스레 쳐다보자 히죽 웃는데, 그 모습을 보니 화 낼 마음도 안 들었다. 그렇게 박상호와 잡담을 나누는 동안 시간이 쑥쑥 흘러 한녹영의 차례가 되었다.

“한녹영님, 대기해 주십시오.”

진행요원이 한녹영을 데리러 왔다.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잘 하고 와라.”

박상호가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진행요원을 따라 대기실을 나왔다. 막 오디션이 열리고 있는 스튜디오 잎에 도착하자 한녹영 앞 순서였던 배우가 침울한 얼굴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실수라도 한 건가. 그는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 사라졌다.

“들어가십시오.”

진행요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심사위원들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종진 감독, 작가로 보이는 덥수룩한 수염의 남자, 그리고 강준일이었다. 강준일이 한녹영을 향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보내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긴장감이 사륵 녹아내렸다. 언제 떨었냐는 듯 편안해진 한녹영이 중앙에 서서 심사위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녹영입니다.”

“그래요, 한녹영씨. 유진성 역에 지원했죠?”

이종진이 말했다.

“네.”

“어디 한 번 봅시다.”

한녹영이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전에 이수현 역은 협박으로 따낸 거라 이번이 진정으로 제 배우로서의 역량을 체크해볼 수 있는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한녹영은 강준일을 보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후 준비해온 연기를 선보였다.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가 그런 한녹영을 찍었다.

“됐어요. 잠시 기다려 봐요.”

이종진이 신중한 얼굴로 작가, 강준일과 뭔가를 의논했다. 이종진과 작가가 주로 말하는 쪽이었고 강준일은 간간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녹화된 영상도 모니터로 바로 확인하며 뭔가를 한참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한녹영은 애써 차분한 얼굴로 기다렸다.

“솔직히 말할게요. 유진성 역에는 김이진씨를 캐스팅하려고 합니다.”

잠시 후 이종진이 말했다. 김이진 선배에게 밀렸구나. 예전처럼 이번에도 유진성은 김이진 선배가 하는구나. 실망감이 탁 들었다. 잘하고 싶었는데. 이번엔

진짜 제 실력으로 꼭 배역 따내고 싶었는데. 아직 실력이 모자란 건가. 강준일 앞에서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마음이 처참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오지 말라고 하는 건데.

한녹영이 애써 웃었다. 오디션에 떨어졌다고 해서 지나치게 낙담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한녹영이 몸을 틀었을 때 이종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잠깐, 성질 급하시네.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가야죠.”

“······무슨?”

“유진성 역에는 우리가 볼 때 김이진 씨가 딱입니다. 한녹영씨는 유진성 역에 지원했지만······ 이수현 어때요?”

“네. 네?”

한녹영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이수현? 이종진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와 깜짝 놀라버렸다.

“여기 계신 작가님과 의논을 해봤는데, 한녹영씨 이미지에는 이수현 역이 유진성보다 몇 배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연기도 좋고, 마스크야 말할 것도 없고요. 사실 내가 도망자를 열심히 봤거든. 보면서 한녹영씨가 이수현 역을 맡아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뜻밖에도 유진성 역에 지원을 했더란 말이지.”

“아······.”

“오늘 직접 보니 역시 예감대로 한녹영씨는 이수현에 더 적합해 보이네. 어때요? 이수현 역은 흥미 없어요? 4차원의 매력을 가진 천재 에이전트인데, 작가님과 머리 맞대고 캐릭터들을 더 매력 있게 수정하는 중이라 오디션용으로 보낸 시나리오보다 훨씬 괜찮을 역일 텐데. 흥미······ 없어요?”

당연히 오케이 할 거란 전제 하에 묻는 말이었다.

“흐, 흥미 있습니다. 이수현과 유진성 사이에서 고민하다 유진성으로 지원한 겁니다.”

만약 제가 과거에 한 번 이수현을 연기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고민도 않고 이수현에 지원했을 거다. 그런데 왠지 제가 또 이수현을 지원하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배우로서 다양한 역에 도전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 끝에 유진성을 선택한 거였다.

펄쩍 뛰다시피 하며 대답하는 한녹영을 보며 이종진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도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한녹영이 강준일을 보았다.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한녹영이 비로소 저도 모르게 약간 굳었던 표정을 풀고 자연스레 웃었다.

“어우, 왜 다들 한녹영씨 미소를 보고 열광하는지 알겠네. 작가님, 우리 연구 중이던 이수현 캐릭터를 이렇게 변경하면 어때요? 평소엔 쿨내 풀풀 풍기다 한 번씩 저렇게 웃는 걸로.”

“나쁘지 않겠네요. 외모가 너무 돋보이는 스타일이라 전에는 매력 없어 보였는데, 직접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겠는데요.”

작가의 말에 이종진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그럼 한녹영씨는 이수현으로 가는 겁니다. 나중에 따로 기획사로 연락 갈 겁니다. 잘해봅시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종진이 손을 내밀었다. 한녹영은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악수를 했다. 작가와도 악수를 나눈 후 강준일과는 눈을 맞추며 잠깐 웃었다. 그리곤 바깥으로 나왔다. 대기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박상호가 약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녹영을 보고 부랴부랴 다가왔다.

‘미역국 먹었나?’

표정을 보니 안좋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려가자.”

일단 한녹영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부터 했다. 승냥이 떼처럼 한녹영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결과를 알려주기 싫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박상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끄러졌어?”

“유진성 역에는 미끄러졌어.”

“너무 실망하지······ 음? 유진성 역에는?”

말의 뉘앙스가 좀 이상해서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하게 묻자 한녹영이 그제야 활짝 웃었다.

“유진성 역에는 김이진 선배가 더 어울린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미끄러졌나 했는데 나더러 이수현은 관심 없느냐고 묻잖아.”

“그, 그래서?”

“당연히 관심 있다고 했지.”

“이 자식 괜히 사람 간 졸이게 만들고 말이야! 표정이 멍해서 영락없이 미역국 먹은 줄 알았잖아. 잘 됐다. 너 애초에 이수현도 좋다고 했잖아.”

“응. 유진성 역에는 김이진 선배가 더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진짜 눈앞이 캄캄했거든. 난 아직 멀었나 보다, 실력으로 그만한 영화의 배역을 따낼 정도는 아닌가 보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이수현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너무 좋아서 그 자리서 소리칠 뻔 했어.”

“내가 그랬잖아. 너 요새 연기 진짜 많이 늘었다고. 오디션 끝나면 기사 나갈 텐데, 네가 지원했다가 탈락했다는 기사 뜰까봐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게. 한녹영 연기 거품인가, 이딴 제목으로 논란이 일까봐. 한시름 덜었다. 어서 가자. 지해랑 한수도 목 빼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차에서 내려 이제나 저제나 하는 심정으로 서성이는 중인 장한수와 정지해가 보였다. 배우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내려오자 결과가 궁금해 차 안에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됐어?!”

장한수가 달려오며 물었다. 박상호가 브이 자를 그려보이자 합격의 표시로 알아들은 정지해와 장한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녹영도 환하게 웃었다. 됐다, 이수현을 따냈다. 실력으로. 누가 꽂아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제 실력으로 이수현에 캐스팅 되었다는 사실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진짜 아까는 순식간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어요.”

그 날 저녁 강준일이 퇴근하길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녹영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품에 쏙 안기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강준일이 웃으며 한녹영의 몸을 끌어안았다.

“감히 누가 이 강준일의 애인을 떨어뜨려?”

그의 장난스런 허세에 웃음이 나왔다.

“아까 보니까 이종진 감독님과 작가님한테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것 같던데요?”

“네가 절대 관여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으니 그랬지.”

“진짜 아무 관여도 안 한 거 맞죠? 혹시 나 몰래 감독님이나 작가님 압박했으면 나 진짜 화낼 거에요. 나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에요.”

“난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라니까.”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직원들 시켜 나 스토킹하는 거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던데요.”

이번에는 강준일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이번 캐스팅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어. 심사위원석에 앉을 때도 난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을 테니, 캐스팅에 관한 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하라고 했고. 유진성 역에 떨어진 건 안타깝지만, 이수현 역에 캐스팅 된 건 축하해. 다짐하는데 백퍼센트 녹영이 네 실력으로 따낸 거야.”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고, 다짐도 받았고, 약속도 한 탓에 절 속이고 강준일이 캐스팅에 관여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약간의 의심은 있어 다시 한 번 확인해본 건데 다행이다. 이번의 이수현은······ 온전히 내 실력으로 따낸 거구나. 그게 너무 좋아 오디션이 끝나고 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 기분이 좋았다.

“배역을 따낸 것이 그렇게 좋아? 아주 구름을 밟고 있는 표정인데?”

“당연히 좋죠. 너무 좋아요. 무엇보다 실력으로 따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워요.”

“이 얘기를 해주면 까무러치려나?”

강준일이 팔짝 뛰다시피 좋아하는 한녹영을 보고 슬 운을 뗐다. 한녹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얘기인데요.”

“너 돌아간 후에 이종진 감독과 이강택 작가가 그러더라. 생각보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이야. 캐릭터 상 유진성은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쪽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 하에 김이진 쪽으로 밀어준 거라고.”

“진짜죠?”

한녹영의 확인에 강준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까무러칠 정도로 좋다.

“크랭크인은 언제부터 들어가요?”

“오늘 오디션으로 주요 배역은 거의 캐스팅되었지만 아직 남은 배역도 많아서 세부적으로 논의 중이야. 나머지 배역도 오디션으로 결정하자는 이강택 작가와 기존 배우들 중에서 캐스팅하자는 이종진 감독의 의견이 나뉘었거든. 그래도 8월을 넘길 것 같진 않군.”

8월이라······.

“한창 더울 때 촬영하겠네요.”

여름부터 겨울초입까지는 또 바쁘겠다. 해외 로케도 몇 차례 있고, 지방 촬영도 많았다.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서운해. 영화 촬영에 돌입하면 또 네 얼굴 보기 힘들어질 테니까.”

“지금 많이 봐두면 되죠.”

한녹영이 애교를 부리듯 말하며 강준일의 입에 쪽 입맞춤을 했다. 그리곤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탄탄한 엉덩이를 만지작댔다. 몸을 맞대고 있던 탓에 앞섶이 불룩해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한녹영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침대로 갈까요?”

“오늘은 밥부터 먹을 생각이었는데.”

말로는 빼는 강준일의 손은 이미 한녹영의 하의 안으로 들어와 골 사이의 구멍을 문지르는 중이었다. 하아, 하고 나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한녹영이 강준일을 새침하게 흘겼다.

“말과 행동이 다른데요.”

“생각만 했다는 거지. 몸은 머리보다 정직한 거 몰라? 식사와 한녹영이라면, 당연히 한녹영이 먼저지.”

서로의 몸을 만지작대며 침실로 이동해 성급하게 옷을 벗어던졌다. 침실로 이동하는 동안 자극당한 입구가 움찔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한녹영이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몸 안을 파고드는 강준일의 손가락 또한 평소보다 성급했다. 그는 안으로 깊이 찔러넣은 손가락을 벌려 틈새를 만들더니 그 안으로 젤을 듬뿍 짜넣었다. 차가운 감촉에 몸이 떨렸다. 손가락을 깨문 한녹영이 흐응, 하고 가느다란 신음성을 흘렸다.

“혀, 혀엉······ 빨리.”

아직 뒤가 충분히 풀어진 건 아니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급했다. 한녹영의 재촉에 강준일의 얼굴 또한 다급해졌다.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한꺼번에 쑤셔 넣고 안을 휘저었다.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으로 점막을 긁어대다 한녹영이 다시 한 번 “빨리, 빨리 넣어줘요.” 하고 재촉하자 밭은 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빼냈다.

“아직 조임이 다 풀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냥 넣어줘요. 빨리요.”

충분히 풀어주지 않으면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엉덩이를 들어 발기한 성기를 강준일의 복부에 비비며 쾌감에 젖은 눈으로 유혹했다. 강준일의 눈동자가 단숨에 탁해졌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단번에 잔뜩 성이 난 제 중심을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 충분히 풀리지 않은 내벽이 강준일의 성기를 밀어낼 듯 단단히 조여들었다. 강준일은 꽉 맞물린 살덩이를 조금씩 열어젖히며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곧 성기가 한녹영의 몸속에 완전히 파묻혔다.

“오늘은 좀 힘들지도 몰라.”

한녹영이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 움직여줘요.”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점막의 수축과 이완을 유도하자 강준일이 뿌듯하게 웃었다.

“우리 녹영이 야하기도 하지.”

그는 뾰족하게 솟은 한녹영의 유두를 잘근잘근 깨물더니 곧 하반신을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한 힘으로 퍽 들어왔다가 빠르게 뒤로 빠졌다. 그리곤 또 다시 빠르고 강하게 안을 쾅쾅 쳐올렸다. 한녹영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쾌감이 번개처럼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 하아앗······ 조, 좋아······ 흐으응.”

신음성이 목구멍을 가르며 연신 흘러나왔다. 안을 찔러대는 감촉에 오금이 저려왔다. 한녹영은 파들거라는 다리를 들어 강준일의 허리에 감았다. 그러자 안을 쳐대는 동작이 더 급박해졌다. 굵은 좆이 끊임없이 안을 들락거렸다. 미끄덩대는 살이 마찰되며 자끈지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한녹영이 먼저 사정했고, 곧 강준일 또한 한녹영의 몸속에 성기를 깊이 파묻은 채 사정했다.

두 차례 더 몸을 겹친 후 늦은 저녁을 먹고 잠시 노닥거리다 침대에 누웠다. 한녹영은 엄마 품을 찾는 아기고양이처럼 강준일의 품을 파고들었다.

“내일 엄마 보러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물론이지. 어머니를 양평에 모셨다고 했던가?”

“네. 외할머니가 그곳에 모셨어요.”

어머니의 장려를 치르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화장도, 납골당에 모신 것도 전부 외할머니가 했다. 아마 아버지는 지금도 어머니가 어디에 계신지 모를 거다.

한녹영은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갔던 납골당 위치와 이름을 공책에 잘 적어두었다. 행여 잊어버리기라도 할까봐 매년 새 공책에 꼭 옮겨 적었다. 납골당이 있는 곳이 양평 외곽이라 어린아이 혼자 가기는 무리라 몇 번이나 한만식에게 ‘어머니께 데려다 달라.’ 라고 요청했지만 싹 무시당했다. 한만식은 ‘죽은 어미 따위를 찾아가서 뭐 하게?!’ 하고 소리를 지르며 한녹영을 때리곤 했다. 그래서 한녹영이 어머니를 찾아뵌 건 홀로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15살 때였다. 알바를 한 돈으로 버스를 타고 또 타고 도착한 납골당에서 어머니의 유골함을 보며 한참 울었다. 이후 가능하면 해마다 한 번씩 찾아뵈었는데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하소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엄마. 나 행복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어.’ 하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늘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찾아갔던 아들이 얼마나 안쓰러우셨을까.

“내일은 한껏 꾸며서 아주 예쁜 모습으로 찾아갈래요.”

치장한 겉모습만 봐도 어머니가 ‘내 아들 드디어 행복하구나.’ 하시도록.

“그래. 그렇게 해.”

“형은 뭐 입을 거예요?”

“난 정장. 네 어머니를 처음 뵙는 자리이니 예의를 차려야지.”

“난 형이 청바지 입은 모습이 좋던데.”

“내일은 너보다 어머니께 잘 보여야 하는 날이니까 안 돼.”

어머니한테 잘 보여야 한다니 참아야지 뭐. 한녹영이 하품을 했다. 졸렸다. “나 잘래요.” 하고 웅얼대던 한녹영이 곧 잠들었다.

휴일이라 그런지 어머니가 계신 추모공원에는 사람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한녹영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상태로 강준일의 차에서 내렸다. 고인이 된 가족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한녹영을 알아보고 마치 로또 대박이라도 맞은 냥 들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우르르 몰려와 사인을 요구하거나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하진 않았다. 어머니를 만나러 온 길에 소란을 떨고 싶진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하, 한녹영씨. 안녕하세요. 팬이에요. 여기는 무슨 일로······ 혹시 어머니 뵈러 오셨어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가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네. 제 친어머니께서 여기 계십니다.”

그녀는 아, 하고 말하더니 “잘 뵙고 가세요.” 하고 인사하곤 서둘러 멀어졌다. 힐끔 한녹영의 옆에 서 있는 강준일을 보긴 했는데 정장을 딱 차려입고 선글라스까지 낀 채라 ‘경호원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녹영의 입매가 실룩 움직였다.

“아까 그 아가씨요. 형을 보고 경호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런 것 같더군.”

강준일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애인 잘못 만나서 대표님이 경호원 취급이나 받고, 어떡해요?”

“대단한 애인을 모시고 있으니 감수할 수밖에. 경호 비용은 침대에서 받을 거야.”

강준일이 귓가에 속삭였다. 하여간 밝히긴. 한녹영이 입매를 삐죽이며 말했다.

“어제 미리 지급한 걸로는 안 돼요?”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내 몸값을 너무 후려치면 곤란해. 이래봬도 내가 무척 비싼 몸이라.”

“그럼 선불 정도로······.”

슬쩍슬쩍 웃으며 강준일과 장난을 이어가던 한녹영이 막 계단을 내려오는 중인 여자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새하얀 머리를 쪽진 채 개량 한복 차림으로 차분하게 걷는 여자는······ 낯익있다.

“할머니.”

이미 못 뵌지 20년이 되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심한 세월이 야속하게 흘러 노인이 된 외조모는 여전히 고왔다. 그녀 또한 한녹영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20년만에 만나는 손자를 앞에 둔 장해숙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했다. 반가움도, 미움도, 그리움도,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한녹영이 장해숙을 향해 다가갔다.

“할머니.”

“네 어미를 보러 왔느냐?”

“예. 살아······ 계셨네요.”

“그래. 모진 목숨 이어가고 있다. 자넨 강 회장 손자로구먼.”

장해숙이 곧장 강준일을 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벗은 강준일이 성큼 장해숙 앞으로 다가와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누군가를 향해 이토록 정중하게 몸을 숙여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준일입니다.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따님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고맙고, 죄송합니다.”

“내게 고맙고 죄송할 까닭이 뭐 있나. 다 죽은 내 딸의 타고난 팔자 탓인 걸. 자네 조부는 잘 계신가?”

강준일이 희미하게 웃었다. 장해숙은 딱 조부가 말한 그대로였다. 젊었을 적 미모를 짐작케 하는 외모는 한녹영과 많이 닮아있었지만 성격은 정반대였다. 대쪽같고, 서릿발 같다. 한창 잘 나갈 때의 그녀 앞에서 감히 누구도 큰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하더니, 과연 그럴 법 했다.

“네. 강건하십니다. 조부님께서 장 보살님 소식을 많이 궁금해 하십니다.”

“늙어 신발도 다 떨어진 무당의 소식을 무엇 때문에 궁금해 하신단 말인가. 난 잘 지내고 있더라는 말만 전하게.”

장해숙이 아련한 표정으로 서서 제 얼굴을 빤히 보는 한녹영을 항해 시선을 주었다.

“할머니.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한녹영이 물었다.

“보다시피 잘 살았다.”

“어디서 지내셨는데요?”

“그건 알 것 없다. 오늘 이처럼 우연히 만나지긴 했으나 내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너와의 인연은 끝이라고.”

“그 말씀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장해숙이 조용히 읊조린 말을 들은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방금 뭐라고······ 분명 이번엔, 이라고 했다.

“잠깐 얘기나 하자.”

쯧 혀를 찬 장해숙이 앞장서서 걸었다. 한녹영이 강준일을 돌아보았다.

“차에서 기다릴 테니 외조모님과 얘기를 나누고 오도록 해.”

한녹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급하게 장해숙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한참 걷다 가지가 우거진 나무 아래에 놓인 벤치에 앉더니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5월에 들어서자 낮 날씨가 한여름만큼이나 더워져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났다.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뜻입니까? 분명히 이번 생은······ 이라고······.”

“네 어미가 네 아비란 작자를 데려와 결혼 하겠다고 했을 때 난 반대했다. 네 어미 미모에 반해 그때야 죽고 못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네 어미와 맞지 않는 자였다. 상극도 그런 상극이 따로 없었지. 타고난 무당 팔자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네 어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내 반대를 무시하고 결혼을 강행하더구나. 그놈의 사랑이 뭔지. 눈이 멀었던 거지.”

장해숙은 느닷없이 한녹영의 모친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그때까지도 서 있던 한녹영이 장해숙의 곁으로 나란히 앉았다.

“결혼 이듬해 네가 태어났고, 네 어미는 그토록 거부하던 운명을 받아들였다. 팔자대로 살아도 힘든 삶, 팔자대로 살지 않아도 힘든 삶이라면 고약한 운명에 반기라도 들겠다며 모진 고통을 꾸역꾸역 참아내던 못난 것이 느닷없이 날 찾아와 ‘어머니, 나 무당 할게요.’ 하더구나. 그때만 해도 영문을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네가 태어나고 네 운명을 읽은 네 어미가 널 위해서 무당 팔자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을 말이다. 어릴 때 어미 잃고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해 홀로 외롭게 살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할 박복한 팔자를 타고난 것이 전부 네 어미가 무당 팔자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며 울더구나.”

내가 내 아기를 망쳤어요, 하고 서럽게 울던 딸년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보고 미래를 읽어낸 어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순 없으니 저를 다 바쳐 아이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

그때부터 딸은 그토록 거부하던 액받이 무당으로서의 삶을 겸허히 받아들여 남을 위해 희생하며 업을 하나씩 해소하기 시작했다. 전부 제 아이인 한녹영을 위해서였다. 아이가 운명대로 불행한 삶을 살다 죽었을 때 보장받은 복록을 바치는 대가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 위해서 말이다.

마지막 업풀이 상대로 강정석 회장의 손자를 선택한 건 딸이었다. 몸이 다 망가져 마지막 한 번의 액받이 굿만 가능한 상태일 때 강정석 회장의 손자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딸이 ‘제가 그 아이를 살릴게요.’ 라고 했다. 마지막 액받이 굿 상대가 누군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마지막 한 번을 행하고 나면 딸이 곧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딸을 강정석에게 보냈고, 시체 같은 몰골로 돌아온 딸의 얼굴은 밝았다.

‘어머니. 제가 마지막으로 살린 아이가 우리 녹영이의 배필이 될 지도 모르겠어요. 강정석 회장의 손자에게서 우리 녹영이에게로 이어진 인연의 끈을 봤어요. 희미하고 약해서 이번 생에선 힘들겠지만 어쩌면 두 번째 생에선 배필이 될 지도 모르겠어요. 어머니, 우리 녹영이가 환하게 웃고 있있어요.’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에 가슴이 쓰렸다. 제 아들에게 두 번재 기회를 주려면 절대 액받이 굿을 행한 대가를 받아선 안 된다. 업이 아주 깔끔하게 해소되어야 후생의 복록을 온전하게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강정석 회장에게 절대 아무 것도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고, 딸의 장래를 치른 후 장해숙 또한 몸을  감추었다.

액받이 무당으로 살아야 하는 딸의 팔자도 서러웠고, 어미가 거부했던 운명 탓에 박복한 팔자를 타고난 손자도 불쌍했다. 그래도 제 배 아파 낳은 딸이 더 아픈 손가락이라 어미의 희생으로 기회를 얻게 될 손자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제 딸은 후생 또한 고통스러울 텐데, 손자는 어찌 되었든 죽음으로 타고난 팔자를 다 해소하고 어미의 희생으로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어 잘 살 것이 아닌가. 밉고, 안쓰럽고, 원망스럽고, 사랑스러운······ 복잡한 감정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손자와의 인연을 모질게 끊은 장해숙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딸을 위해 치성을 드리며 지금껏 살았다.

가능하면 타고난 팔자가 어떻게든 바뀌길 빌고 또 빌었으나 운명은 예정대로 굴러갔다. 제 모든 복록을 바친 탓에 후생 또한 고통스러울 딸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얼마 전에야 비로소 ‘어머니, 전 이제 비로소 마음 놓고 떠납니다.’ 하는 인사를 남긴 후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모진 것. 독한 것. 어리석은 것. 제 자식 행복한 걸 보고 만족해서 웃는 얼굴을 보고 장해숙은 딸을 욕했지만, 모든 어미의 마음이 다 같음을 왜 모를까. 자식의 행복, 그것만이 어미의 바람인 것을.

“표정을 보니 죽은 네가 왜 지금 살아있는지 아는 모양이구나.”

“네. 어머니가······.”

한녹영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울컥하는 심정이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그래. 내 못난 딸년이 아들인 널 위해 기꺼이 희생한 거다. 네 운명을 일찌감치 점치고 널 살리려고 무당의 팔자를 받아들여 모질게 살다 간 거다. 네 어미의 희생 위에 생긴 삶이니 잘 살아라.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혹여 잘못된 길을 갈 일이 생기거든 네 어미의 희생을 생각해라. 그리하면 결코 잘못된 선택을 할 일은 없을 테니까.”

“네. 잘 살게요. 정말 행복······ 할게요.”

기어이 울먹이는 말이 흘러나왔다. 뜨거운 눈물이 맺힌 손자의 음성을 들은 장해숙이 심란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강 회장이 그래도 약속은 지킨 모양이구나. 금쪽같이 여기던 손자를 네게 내준 것을 보면.”

“어머니가 대표님을 살려주셔서······ 저한테 모질게 못하세요. 할아버님이라 불러도 좋다고도 하셨고요.”

장해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강정석 회장이 제발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기에 ‘먼 훗날 인연이 닿으면 화장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받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그 정도는 괜찮겠죠, 라고 했었다. 워낙 신의 있는 사람이라 딸이 본대로 그의 손자와 제 손자가 인연이 된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걱정되는 점이 있었는데, 역시 약속을 잘 지킨 모양이었다.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 지지리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의 LK를 이룬 것이다. 저를 찾아온 수많은 재벌들, 정치인들 중에서 가장 나은 사람이라 한창 사업을 확장할 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고. 그는 음심을 품은 채 저를 보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강정석의 관심은 오로지 일,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LK를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키울 손자 강준일뿐이었다.

“네 어미의 가락지는 잘 가지고 있느냐?”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요.”

“이제 그만 없애버려라. 내가 내림굿을 받았을 때 네 외증조모로부터 받은 것이고, 네 어미가 무당 팔자를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물려준 것이다만 너에겐 자식이 없을 테니 그걸 물려줄 일도 없지 않겠느냐. 사나운 무당 팔자 후손에게 무려주지 않아도 되니 그건 좋구나.”

그 반지는 외가에서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는 사람에게 물려주는 가보 같은 것이었나 보다.

“어머니의 유품이니 제가 죽을 때까진 간직할래요.”

하지만 가락지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건 한녹영에겐 상관없었다. 그건 그저 제게 남은 유일한 어머니의 흔적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든가.”

“할머니, 또 뵐 순 없어요?”

대답을 알면서도 또 한 번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말했지 않느냐. 너와의 인연은 끝이라고.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느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잘 살면 된다.”

장해숙은 울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손자를 뒤로 한 채 걸었다. 마음이 애잔했다. 그래도 혈육이랍시고 절 그리워한 기색이 엿보이는 손자의 눈동자가 가슴에 남았지만, 손자를 보면 불쌍한 제 딸년이 생각나니 안 된다. 딸년은 ‘왜 내 아이를 미워하세요.’ 하고 원망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잠시 걷다 보니 강정석의 손자가 보였다.

“가보게.”

“가시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되었네. 녹영이나 잘 살펴줘.”

외롭게 만들어서 내 딸년 눈에서 눈물 빼지 말고. 속으로 중얼댄 장해숙이 휑하니 돌아서서 걸었다. 조선에 태어났으면 충분히 왕을 하고도 남았을 만큼 타고난 사주팔자가 다 좋은 남자라 한평생 손자 맘 고생시킬 일은 없을 것이다.

‘보고 있느냐. 무심한 딸년아. 네 아들은 이제 평생 행복할 거다.’

딸년이 환하게 방긋 웃는 것만 같았다. 한숨을 탁 내쉰 장해숙이 홀로 걸었다. 강준일은 멀어지는 장해숙의 등을 향해 다시 한 번 크게 허리를 숙인 후 아까 두 사람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걸었다. 한녹영은 나무 아래 벤치에 오도카니 앉아 어깨를 들썩이는 중이었다. 우는 건가. 안쓰러운 마음으로 다가가니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든다. 눈자위가 발갛긴 하지만 아직 운 건 아닌 것 같았다. 울음을 꾹 참고 있는 기특한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가셨어요.”

“응. 봤어.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더니 거절하시더군.”

그랬으리라. 한녹영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얼굴 봐서 좋네요.”

생사 여부라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계신 걸 알았으니 되었다.

“어디서 살고 계시는지 알아봐줄까? 오늘 여기서 뵈었으니 종적을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요. 괜찮아요. 할머니가 원하시지 않는 일을 굳이 하고 싶지 않거든요.”

이미 할머니에게 전 죄인이었다. 제게는 어머니지만 할머니에게는 딸인 분을 희생시켰으니 말이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럼 이제 우리 엄마 보러가요.”

크게 심호흡을 한 한녹영이 애써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우울한 표정을 지을 순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강준일과 함께 나란히 걸어 어머니의 유골함이 놓인 곳으로 가니 바닥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좀 전 할머니가 두고 가신 꽃다발인 것 같았다. 한녹영 또한 품에 안고 온 꽃다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엄마, 나 왔어. 엄마의 못난 아들 왔어. 엄마, 미안해. 제대로 못 살아서 엄마가 결국 약속받은 복록을 희생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이젠 잘 살게.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엄마의 바람일 테니까.’

어머니께 제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 예쁘죠?”

사진 속 수줍게 웃고 있는 어머니는 세상 누구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외조모와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머니시군. 많이 닮았어. 대단한 미인이시고.”

“그쵸? 울 엄마보다 예쁜 사람을 아직 못 봤다니까요.”

한녹영이 으스대는 것처럼 말하며 강준일의 어깨로 고개를 살짝 기댔다.

“엄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엄마 덕분에 이 사람을 얻었어.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나 진짜 행복할게.”

한녹영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강준일이 눈을 감더니 한참 후에야 떴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어머니께 말을 전한 것 같았다. 한녹영은 한참이나 사진 속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다가 강준일을 향해 “그만 가요.” 하고 속삭였다. 그리곤 차분한 얼굴로 나와 차로 향했다.

“아까 엄마한테 뭐라고 했어요?”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녹영이 물었다.

“비밀이야.”

단호한 말에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요? 왜 비밀인데요?”

“어머니와 나만의 약속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약속인데요?”

“비밀이라는 말뜻 모르나? 말할 수 없다는 뜻이잖아.”

“제가 설마 비밀의 뜻도 모를까요. 근데 궁금하잖아요. 엄마랑 무슨 약속 했는데요? 음······ 날 평생 사랑할 거라고 했어요? 엄청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한 거죠?”

샐쭉해진 입매에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강준일은 차를 출발시키며 반짝이는 눈매로 절 보는 한녹영을 향해 웃었다. 이럴 땐 꼭 어린애 같다니까. 애같은 면도, 가끔은 요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다 사랑스러워 미치겠다.

“알면서 왜 물어?”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요? 형 이제 큰일 났다. 울 엄마랑 약속한 거라 반드시 꼭 지켜야 하는데 어쩔래요?”

기어이 대답을 얻어낸 한녹영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어쩌긴 뭘 어째. 약속대로 하면 되는 거지.”

“나도 엄마랑 약속했어요. 형이랑 평생 사랑하면서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 거라고요.”

강준일이 잠깐 차를 세웠다. 그리곤 어머니를 보고 온 탓인지 약간 흥분한 기색인 한녹영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한녹영에게 말한 대로 그의 어머니께 약속했다. 평생 사랑하며, 절대 눈물 흘리는 일 없게 할 거라고 말이다. 제 목숨을 살려준 것도 모자라 귀한 아들을 제게 보내주어 고맙다고도 했다.

“사랑해, 녹영아. 평생 행복하자.”

강준일이 따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녹영이 환하게 웃었다.

“사랑해요, 형. 평생 행복해요.”

평생 사랑하고 행복할 것을 약속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 5월의 진한 햇살이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인자한 미소 같은 햇살이었다.

책완결 2권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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