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8화 (8/9)

Side.  01

누명을 벗고 원수를 갚은 후 복직한 성동주와 정민아의 결혼식이 성당에서 열렸다. 차도영은 한창 결혼식이 진행 중인 성당 입구에 서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정민아를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한 채 마음에 품고 있던 여인을 보내야 하는 마음이 쓸쓸했다. 한겨울 밤바람처럼 추웠다. 그런 한편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가 행복하면 됐다.

속으로 조용히 정민아의 행복을 빌어준 차도영이 돌아섰다.

“오케이!!!”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지켜본 김석형이 어느 때보다 커다랗게 오케이를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한녹영이 하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웨딩 복장을 한 채 성당 안에서 나오는 중인 송정빈과 나희연, 김상원과 장한경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선배님과 나희연씨도요. 한경이 너도 고생 많았다.”

좀 전의 씬으로 도망자의 촬영이 모두 끝났다. 방송은 아직 특별편 1편을 포함해 총 6번이 남았지만 촬영은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전에는 3회 연장해서 15회로 마무리 지었는데, 이전보다 시청률이 더 높게 나온 탓인지 그동안의 줄거리 등을 담은 특별편 1편이 따로 편성되었다.

“너도 고생 많았다. 이번에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즐거웠고, 다음에 또 같이 작업하자.”

김상원이 인자한 얼굴로 한녹영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다가갔다.

“오늘로 끝이라니 후련하면서도 되게 서운하다. 오랜만에 촬영장 공기 맡으면서 좋았는데.”

송정빈이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선배 바로 다음 작품 들어가신다면서요.”

“어. 한 일주일 쉬고 바로 사극 들어간다. 50부작이야. 고작 일주일 쉬고 50부작 사극 들어갈 생각하니 캄캄하지만. 나희연씨도 영화하기로 했다며?”

앞이 캄캄하다고 말하는 송정빈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말로만 엄살을 떨뿐 다시 연기할 수 있게 된 지금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간간히 연극 무대에 오르며 쉬는 동안 촬영장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네. 민소진 감독님 스릴러 영화에 캐스팅 됐어요.”

민소진은 스릴러 분야의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 감독이다. 한녹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모두 잘 되었네요.”

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으며 주연 배우들의 몸값 및 지명도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바로 다음 작품이 정해진 송정빈과 나희연만 봐도 알지 않나. 한녹영의 말에 송정빈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우리 중 제일 잘 나가는 놈이 무슨 소리야? 요즘 너한테 쏟아지는 CF와 출연 제의가 장난 아니라며?”

약간의 질투가 섞인 송정빈의 말에 한녹영은 멋쩍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드라마 방영이 5회를 넘어가면서 한녹영에게 쏟아진 관심이 상상 이상이었다. 시청률이 높아질수록 차도영을 연기한 한녹영의 인기도 높아졌다. 게시판 지분의 50퍼센트 이상을 한녹영이 차지했고, 드라마가 방영된 직후에 포털에 쏟아지는 기사의 대부분도 한녹영의 차지였다. 물론 전부 극찬이었다.

‘완벽한 외모, 완벽한 연기, 이제부터 한녹영의 시대.’

‘도망자 완승. 달콤한 그대 완패.’

‘한녹영 애달픈 짝사랑으로 여심 녹이다.’

‘연기 변신 성공으로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진 한녹영의 다음 선택은?’

‘가지고 싶은 남자, 한녹영. 그의 최콜릿 미소.’

연기에 대한 호평도 쏟아지고, 출연 제의도 밀려오고, CF 제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음 영화는 이미 정해둔 거나 마찬가지이고, 물론 캐스팅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지금까지는 도망자 촬영에 집중하고 싶어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CF도 이제부터 찬찬히 살펴보고 결정할 예정이었다. 한울 계약 막바지 무렵에 찍은 CF가 많아서 그때처럼 마구 찍어대고 싶진 않았다. 과한 이미지 소비도 배우에겐 좋지 않다.

“네. 제가 요즘 좀 핫하네요.”

한녹영이 눈매를 반달처럼 휘며 웃었다. 잘난 척하는 태도에 송정빈이 입매를 실룩였다.

“얄미운 놈. 내가 주연인데! 날 살려준 은인이니 참는다. 네놈이 내 이름 언급 안 해줬으면 아직 방송 복귀는 꿈도 못 꾸고 있었을 텐데. 고맙다. 이건 진심이야.”

“별 말씀을요. 가끔 질척대고, 잘난 척 심하고, 수다러워서 괜히 추천했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요 놈 봐라, 라고 하듯 송정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함께 연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선배한테 많이 배웠어요. 고맙습니다, 정빈 선배.”

촬영하는 동안 김상원과 송정빈으로부터 배운 점이 많았다. 연기지도도 많이 받았고, 뒤로 갈수록 연기가 점점 더 자연스러워져 나중엔 제가 진짜 차도영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들 때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선배 배우들의 충고가 컸다. 전에는 콧등으로 들어 넘겼던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따르니 연기가 쭉쭉 늘었다. 그만큼 욕심도 늘어서 좀 더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역을 해보고 싶어졌다. 진심이 가득한 한 녹영의 말에 실처럼 가늘어졌던 송정빈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풀렸다.

“옴므파탈 같은 자식. 사람을 쥐락펴락하네.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을까 했는데, 그렇게 예쁘게 고맙다고 하니 마음이 풀리잖아.”

“선배 때문에 저 요즘 새 별명 불은 거 알죠!”

“알지. 녹영파탈.”

촬영현장을 찾아온 연예방송 팀과의 인터뷰 도중 송정빈이 한녹영을 향해 ‘녹영씨야 워낙 매력적이죠. 반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니까요. 옴므파탈같달까? 그래서 전 요즘 한녹영씨를 녹영파탈이라고 부릅니다.’ 라고 했던 것이다. 이후로 게시판이며 SNS에 ‘녹영파탈이 딱이다.’ ‘녹영파탈, 입에 딱 붙네.’ 등등의 글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나쁜 의미로 붙인 단어는 아니라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민망했다. 한녹영이 눈을 흘기자 송정빈이 흐흐, 하고 음흉하게 웃었다.

“요샌 녹영파탈스럽다는 신조어도 생겼다더라.”

“저도 알아요. 진짜 쥐구멍에 숨고 싶다고요.”

치명적이다, 라는 뜻으로 녹영파탈스럽다는 말을 쓴단다. 정지해가 그 말을 전해줬는데,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진짜 땅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지해는 ‘그만큼 요즘 네가 대세라는 얘기야.’ 라며 위로했는데, 그렇다 해도 민망한 건 민망한 거였다.

“이 정도를 갖고 쥐구멍에 숨고 싶다니. 넌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겠어. 아,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서 샤워한 후 달콤한 그대나 시청해야지.”

송정빈이 뻐근한 목을 꺾으며 말했다. 한녹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드라마가 아니고요?”

“우리 드라마야 당연히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시간이 없으면 쪼개서라도 보고 모니터링했지. 대체 얼마나 말아먹은 건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라고.”

실실 웃는 얼굴이 악마 같았다. 듣고 있던 나희연이 어깨로 송정빈의 어깨를 툭 치며 “못됐어요!” 하고 말했다. 그리곤 다음 스케줄이 있는지 “종방연때 봐요.” 하고 말한 후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드라마의 성공으로 나희연도 지명도가 확 늘어 각종 인터뷰며 CF며 바빴다.

“말아먹은 남의 드라마는 뭐 하러 봐요. 시간낭비나 되죠.”

달콤한 그대는 예전과 똑같이, 아니 예전보다 더 죽을 쒔다. 도망자가 승승장구하는 만큼 달콤한 그대의 시청률은 바닥을 쳤다. 신은주라는 이름 하나만 믿고 편성을 내줬던 방송국에서 조기종영을 권유했다는 말을 들었다. 전에는 그래도 16부작의 끝까지 방송은 했는데 말이다.

“망한 드라마를 봐두는 것도 공부가 되는 법이야. 건방진 신인이 연기를 얼마나 못하는지도 보고 싶고. 로봇 연기냐, 저게 해외 유학파 연기냐 등등. 악평이 난리도 아니라던데? 처음에는 그래도 나름 진지하게 연기하는 게 보였는데, 뒤로 갈수록 건성건성 아주 무성의한 태도로 촬영한다더라. 망한 드라마에 열성을 다할 피요는 없다는 건지. 기사 뜨는 것만 봐도 알잖아. 날마다 혹평이야. 신인뿐만 아니라 작가며 감독이며 스태프들까지 다 열의를 잃어서 총체적난국인가봐.”

한녹영도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내용도 엉망에 뒤로 갈수록 쪽대본에······ 한마디로 망조가 든 드라마였다. 거기다 신은주 작가가 뒷돈 받고 주민성을 주연으로 꽂았다는 얘기가 나오며 그나마 참고 보던 시청자들까지 채널을 돌렸다.

가끔 기사를 보는데 처음에는 오랜만에 괜찮은 신인이

나왔다며 주민성을 보듬어주던 언론들이 이젠 태도를 완전히 바꿔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면 혹평 기사를 올리기 바빴다. 기사에 달린 악플들은 또 어찌나 많고 냉혹한지. 미국으로 꺼져라, 그게 연기냐, 차라리 개를 데려다 주연으로 시켜라 등등.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한녹영이 보기에도 낯이 화끈해졌을 정도였다. 주민성 쪽에서는 악플러들을 고소한다 만다 하는 모양인데, 울타리가 되었던 장현재가 없어진 탓에 한울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성격이 워낙 그지라 한울 직원들이 주민성이라면 다 이를 간대. 매니저 김태섭만 아부하기 바쁘다더라.’

정지해가 전해준 소식이 떠올랐다.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달콤한 그대는 현재도 계속 촬영 중인데, 아무래도 조기종영으로 끝날 것 같았다. 신은주 작가의 경력에 아주 치명타가 된 작품이었다.

“박지한 선배가 안 됐네요. 주민성 종노릇까지 하며 얻은 배역인데.”

“참, 지한이놈은 한울에서 나오는 모양이더라.”

“네? 계약해지한대요?”

장현재뿐만 아니라 최대주주였던 주애리까지 구속된 이후 한울 상태가 엉망이라는 얘기 또한 들었다. 주주들이 내세운 대표가 한울을 맡게 되었는데 연예 사업을 모르는 사람이라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예인 관리도 엉망이 되었고. 이참에 계약해지하고 다른 데로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연예인들도 꽤 많단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의 약점을 잡고 있던 장현재가 없는  시기를 노리는 것이 이해되었다. 한울에 남아있었던 연예인들 대부분이 장현재에게 약점을 잡혔던 때문이니까.

“애초부터 3개월 단발이었나 봐. 딱 너 노리고 지한이 놈 데려가서 배역 하나 던져주고 쫑낼 생각이었던 거지. 자식, 너 타겟으로 잡아서 언플하다 걸린 이후로 이 바닥에서도 찍힌 것 같던데. 한울에 가서 주민성 같은 놈한테 종처럼 부려지기나 하고.”

주민성이 까마득한 선배인 박지한을 코끝으로 부린다는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건 장현재가 구속되고 주민성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이후에도 여전했다. 한녹영이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꽤 참네. 되게 욱하는 성격이라고 하더니만. 무슨 사달을 내도 낼 것 같았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 같진 않은데.’

박지한의 주머니에 명함을 꽂아두고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장한수의 친구인 정의의 편 용팔이에게서 주민성 뒷조사 의뢰가 왔다는 연락이 왔었다. 그에게 혹 주민성이란 신인 배우의 뒷조사 의뢰가 오면 연락 달라고 부탁해둔 것이다.

“나도 그만 가봐야겠다. 종방연때 보자.”

송정빈이 한녹영의 어깨를 툭 친 후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곤 밴을 타고 떠났다. 한녹영도 떠나기 전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감독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감독님 일은 아직 남으셨으니 끝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남은 건 편집인데, 숨 막히게 달려온 덕분으로 촬영이 일찍 끝나 편집할 시간이 는 만큼 남은 6회도 아주 기대되었다.

“한녹영씨도 고생 많았어요. 내 예상보다 몇 배는 더 잘해줘서 고맙고요. 다음에 또 기회가 닿으면 함께 일해 봅시다. 한녹영씨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김석형이 손을 내밀었다. 한녹영이 김석형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그리곤 대기 중인 밴으로 향했다.

“일단 사무실로 가자. 넌 어서 CF 결정해야지. 한경이 너도 다음 작품 들어왔다.”

“지, 진짜로요?”

장한경이 눈을 크게 뜨며 좋아했다. 장한경은 한녹영에게 문자를 보낸 다음 날 말짱해 보이는 얼굴로 나타났다. 휴식시간이면 휴대전화를 꼭 쥐고 계속 들여보다보며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현재와 주에리의 스캔들이 워낙 크게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데다 한녹영의 협박이 먹혀 주민성 쪽에서 더 이상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은 탓에 신분세탁설이 완전 묻혔다. 더 이상 어디에서도 장한경을 언급하지 않자 지금은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 강아지처럼 한녹영과 박상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응. 6월부터 촬영 들어가는 송지현 작가의 평일 저녁 일일드라야. 조연급이긴 한데······ 나쁘진 않을 것 같더라. 일단 시놉이랑 5화까지 대본 왔으니 한 번 살펴봐.”

“네. 그렇게 할게요.”

장한경도이 신나 죽으려고 했다. 신인치고는 연기가 안정되어 있어 장한경도 도망자를 통해 이름을 꽤 알린 축에 속했다. 김석형도 장한경을 좋게 봐 다음 혹은 다다음 작품에 부를 가능성이 있다. 한녹영은 포털에 송지현 작가의 이름을 쳐보고 있는 장한경을 향해 웃었다.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도와줬던 탓에 절 생명의 은인인 냥 보며 잘 따르는 장한경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묵은 빚을 훌훌 털어버린 지금은 그냥 귀여웠다.

“그나저나 우리 녹영이 이번 연말 대상은 떼놓은 당상이다. 그치?”

박상호가 설레발을 쳤다. 습관처럼 찌라시나 게시글 등에서 저와 강준일의 이름을 찾고 있던 한녹영이 시선을 들었다. 제 스폰서 설이 묻힌 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는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씩 찾아보는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연기에 대한 칭찬과 도망자로 반해서 입덕하겠다는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다행이야, 정말로. 때맞춰 강준일이 섹스 스캔들을 크게 터뜨려준 덕분이기도 하고, 회를 거듭할수록 도망자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지속한 덕분이기도 했다. 더 이상 뒤를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도 없어서 화장실에서 뒤 안 닦고 나온 것처럼 찜찜하던 마음이 싹 가신 상태였다.

“뭘 벌써 대상 타령이야. 그리고 대상은 보통 하반기에 히트 친 드라마의 주인공이 받잖아.”

“이번엔 무조건 너라니까. 보통은 그렇지만 하반기에 도망자를 넘어서는 시청률이 나을 것 같아?”

10회까지 방송된 도망자는 평균 시청률 39.3퍼센트를 기록 중이다. 차도영이 성동주를 도와주려다 죽을 뻔한 장면이 나왔던 8회의 시청률은 무려 41.7퍼센트였다. 앞으로 배신자의 정체가 밝혀질 장면도 남아있고, 뒤로 갈수록 통쾌한 복수전이 펼쳐질 예정이라 시청률이 얼마나 더 나올지 알 수 없다. 방송국이랑 제작사에서는 최대 47퍼센트까지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힘들 것 같긴 해. 도망자 시청률이 워낙 좋아서.”

기억을 돌이켜봐도 올해 도망자를 넘어서는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는 없었다. 올해가 다 뭔가. 향후 몇 년간은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애써 무심한 척 대답하는 한녹영의 입꼬리가 실실 떨리고 있었다.

“내가 장담한다. 올해 대상은 무조건 너야!”

박상호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도망자 팀에서 대상이 나온다고 해도 꼭 나일 거란 법은 없잖아. 정빈 선배일 수도 있고.”

일단 겸손한 척 해보는 한녹영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고 있었다. 그걸 본 박상호가 “너도 내심 너라고 생각하는 거지?” 하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왔다. 한녹영은 말없이 웃었다. 사실 좀······ 기대하곤 있다. 유난히도 상복이 없었는데 차도영으로 대상을 거머쥘 수 있으려나, 하고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이번 연말 대상은 네가 유력하다고 점치고 있더라. 네가 씬스틸러잖냐. 네가 나오는 장면에서 유난히 순간 시청률이 치솟는대. 그러니까 올해는 무조건 너다.”

박상호가 흥분한 어조로 장담했다. 그의 예언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박상호뿐만 아니라 다들 제가 대상감이라고 점치고 있다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대상이라니.

“어, 맞아. 내 주변에서 9회에 네가 우는 장면에서 같이 울었다는 사람 많아. 무슨 남자가 울면서도 저렇게 예쁘냐면서.”

정지해가 끼어들었다. 남자인 내가 예뻐서 울었다는 거야. 우는 장면이 슬퍼서 울었다는 거야. 애매모호한 말에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회사에 도착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들이 “한녹영씨, 마지막 촬영 축하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왔다. 한녹영은 그들을 향해 웃어준 후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

“형 한 달 새에 성공했어. 이젠 정말 어엿한 대표님이네.”

박상호는 그 사이 직원 세 명을 더 고용했다. 장한수와 정지해만 있을 땐 지인들을 불러 모아 시작한 구멍가게 사장님 느낌이었는데, 이젠 어엿한 기획사의 대표처럼 보였다.

“이제 시작이지 뭐. 도망자가 히트 친 덕분에 너야 말할 것도 없고, 한경이 놈도 출발이 수조로워. 다음 드라마는 송지현 작가 조연으로 들어가면 될 것 같고. 넌 CF 첫 스타트를 뭘로 찍을지 이제 정하자. 정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제의가 쇄도하고 있다니까. 그리고 놀라지 말라.”

“······?”

비밀 얘기라도 하듯 음성을 낮춘 박상호의 입매가 실룩실룩 떨리고 있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기색으로 흐흐흐, 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1년 계약에 몸값이 8억으로 뛰었다.”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물론 내가 7억 이상을 부르긴 했지. 지금의 네 인기로 보면 최소 7억 이상은 받아야하거든. 너 이제 시청률 40퍼센트가 넘은 대박 드라마의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보다 더 인기 많은 배우인데 당연히 그 정도는 받아야지. 그랬더니 제안 들어온 광고 회사들에서 제시한 최저 금액이 7억 오천이야.”

제 몸값이 이제 7-8억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고 예상하고 있었다 해도 좋았다. 한녹영의 입가에도 환한 웃음이 맺혔다.

“어디어디서 들어왔어?”

“냉장고, 자동차, 보험 등등 일일이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 아, 가구와 의류도 있어.”

서류철을 뒤져 광고 제안서를 두 장 찾아낸 박상호가 한녹영을 향해 내밀었다. 한녹영이 브랜드 이름을 보고 웃었다. 절 고소해 위약금을 받아간 회사들과 경쟁 관계에 있는 회사들이었다. 그들 역시 스캔들 소동으로 한녹영이 3년이나 모델로 있었던 회사들로부터 소송당한 걸 알고 기회가 이때다 싶어 CF 모델로 한녹영을 섭외하려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출연료 중간 정산이 들어와서 나머지 소송 금액도 다 갚았겠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으니 전에 결심한 대로 경쟁 업체 광고 모델 해야지.

“한다고 해.”

“그렇지 않아도 네가 무조건 한다고 할 것 같아서 이미 반승낙은 해둔 상태야.”

박상호가 실실 웃었다.

“가구와 의류는 무조건 할 거야. 다른 데보다 모델료를 싸게 불러도 한다고 해.”

“제시한 모델료는 둘 다 6개월 단발에 4억 5천, 1년에 8억이야. 1년으로 할 거지?”

“응.”

“그래. 그리고 출연 섭외도 엄청 쏟아지고 있어. 네 앞으로 온 드라마랑 영화들이야.”

박상호가 두툼한 종이 뭉치들을 꺼내 한녹영을 향해 밀었다. 도망자 촬영이 끝나기 전까진 무엇도 하지 않겠다는 한녹영의 선언에 초조해하며 쌓아두었던 대본과 시나리오들이었다. 한녹영은 보지도 않고 도로 밀었다.

“영화는 생각하고 있는 거 있어.”

“뭔데?”

“프로젝트 B.”

“프로젝트······ 아, LK에서 이번에 제작한다는 한국형 첩보 영화 말하는 거지? 이종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고 듣긴 했는데, 거기서는 캐스팅 제안 안 왔어.”

“주요 배역은 전부 오디션으로 결정할 거래. 나 오디션 참가하려고.”

“그 영화는 올 하반기에 크랭크인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까지 쭉 쉬려고?”

네가 굳이 고집을 부리겠다면 할 수 없지만 그때까지 쭉 쉬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박상호가 한녹영을 빤히 보았다. 하기 싫다는 걸 억지로 시킬 순 없지만, 인기가 한창 뜨거운 시기에 너무 오래 쉬는 건 회사 입장에서도, 한녹영 본인 입장에서도 좋지 않았다.

“오디션은 아마 곧 열릴 거야. 공개인지 비공개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준일이 귀띔해줬는데 배우 오디션을 5-6월 사이에 볼 거라고 했다. 5월 초가 가장 유력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준비하고 있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이다.

전에는 늦가을에 캐스팅되었는데, 제가 과거로 돌아오며 바뀐 여러 사실들처럼 영화도 제작시기가 좀 당겨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시나리오나 감독이 바뀐 건 아니라 똑같이 대흥행하리라 믿는다.

“너 이제 톱톱톱 A급 스타야. 굳이 오디션 쫓아다니면서 배역 안 따도 돼. 콧대 세워도 모자랄 판에. 소문에 강 대표가 직접 컨택해서 영화 제작하자고 했을 정도로 시나리오가 괜찮다고 하긴 하던데. 천만은 깔고 들어가는 거라고 하긴 하던데.”

“하고 싶은 역을 맡고 싶어서 보는 오디션에 콧대는 무슨. 올해 내로 드라마 한 편 더 들어갈지 말지는 좀 쉬면서 결정할래.”

괜찮은 배역이 들어오면 하고 싶지만, 우선 한동안은 좀 쉬고 싶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강준일과 놀고 싶었다. 얼굴도 실컷 보고, 입맞춤도 실컷 하고, 섹스도······ 질릴 만큼 하고.

“그래. 당장 결정하진 않아도 돼. CF나 몇 편 찍으면서 좀 쉬어.”

아주 조금만, 박상호가 한녹영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응. 드라마는······ 일단 형이 먼저 살펴보고 이걸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다는 대본이 있으면 그때 말해줘.”

박상호의 안목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그가 1차 선발해준 것들을 살펴보면 될 것 같았다.

“그래. 알았다. 인터뷰는 어쩔래? 인터뷰 요청도 엄청 쇄도하고 있는데, 잡지 화보 촬영도 마찬가지이고.”

“그것도 형이 좀 추려서 얘기해주면 내가 보고 최종 결정할게.”

“응. 그러던가.”

“그리고 나 오늘 외박한다.”

“그래. 넌 오늘 외박······ 어? 외박?”

무심코 한녹영의 말을 따라했던 박상호가 뒤늦게 당황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디서, 라고 묻진 않았다. 당연히 강준일의 빌라일 테니까. 그간 많이 참긴 했다.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 고작 30-40분 정도 얼굴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으니까. 스폰서 설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 마음 편히 파김치가 된 한녹영을 실어갔다가 실어오는 역할을 했는데,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데리러 올라가면 강준일이 절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노려봤는지 모른다.

‘눈빛이 얼음장이었지.’

얼음같은 눈길에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 들곤 했다. 한녹영 또한 강준일의 빌라에 들렀다 돌아가는 길이면 차 안에서 얼마나 시무룩해있었는지. 세상 다 잃은 사람 같았다. 연애하는 것들이란! 46살에 미혼인 박상호가 속으로 투덜댔다.

“응. 외박!”

한녹영이 신나서 외쳤다. 눈빛이 아주 반짝반짝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외박해라. 마음껏 해. 보고 싶은 임 질릴 만큼 보고 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응? 실컷 보고 오라는데 뭘?”

“질릴 리가 없잖아. 내일 봐, 형. 어쩌면 모레 볼 수도 있고.”

한녹영은 썩은 밤을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상호를 향해 새침하게 인사한 후 대표실을 나왔다.

“한수 형, 나 집에 가야 해. 데려다줘.”

정지해와 노닥거리고 있던 장한수가 냉큼 일어섰다. 정지해도 몸을 일으켰다.

“나도 퇴근해도 되는 거지?”

“어. 누나도 그간 고생 많았어. 나 한동안 여유 있으니까 며칠 쉬어.”

“대표는 나고, 지해 월급도 내가 주는데 네가 왜 맘대로 쉬라 마라야?”

대표실에서 나온 박상호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대표 권한으로 말하는데, 지해 너 며칠 쉬어. 한수 너도. 둘 다 고생 많았다. 보너스도 좀 넣어줄게.”

으스대며 한 말에 정지해와 장한수가 환호성을 질렀다.

“난 오늘 당장 짐 싸서 제주도나 좀 다녀와야겠어.”

정지해가 말했다. 얼마 전부터 제주도 제주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더니 기어이 다녀올 모양이었다.

“난 이틀간 잠만 잘 거야.”

이번에는 장한수였다. 한녹영의 스케줄대로 휴일 없이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따라다녔던 두 사람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했다. 도망자 막방 즈음 제작사 쪽에서 포상휴가를 보내줄 것 같은데, 그때 면세에서 두 사람에게 선물을 한 개씩 사 안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형. 푹 쉬고 며칠 있다 봐.”

“그래. 녹영이 너도 고생 많았다.”

“어. 들어가서 푹 쉬어라.”

한녹영을 빌라 앞에 내려준 밴이 떠났다. 한녹영은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와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리곤 갈아입을 옷도 백팩에 챙겨 넣었다. 패, 팬티 챙겨야지. 몇 장 챙기지? 한 장이면 될까? 속옷이 가득 들어있는 서랍장을 내려다보며 목을 긁적거리다 모자란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는 심정으로 다섯 장을 집어 가방 안에 넣었다. 박상호가 봤다면 외박이 아니라 여행이냐, 하고 구박했겠지만 혹시 몰라 여유있게 넣었다. 그리곤 키를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절로 콧노래가 흥얼흥얼 나왔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막 차에 올라타려는데 주차장을 둘러보러 나온 관리인과 마주쳤다. 유난히도 기분 좋아 보이는 한녹영의 표정을 보고 관리인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한녹영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촬영이 끝났거든요.”

“아, 그래요? 저도 요즘 한녹영씨 나오는 드라마 진짜 잘 보고 있습니다. 너무 재밌던데요. 제 주변도 전부 흥미진진하다고 난리고요. 제가 한녹영씨 사는 빌라 관리인으로 일한다고 하니까 사인 좀 받아다달라고 어찌나 부탁들을 하는지 몰라요. 부담 드리려는 건 아니고, 혹시 시간이 나시면 사인 몇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관리인이 머쓱해하며 사인을 부탁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주차장을 둘러보려다 마주친 것이 아니라 노리고 있었나 보았다.

“그럼요. 기꺼이 해드려야죠. 제가 지금은 외출해야 하니 며칠 내로 사인해서 가져다드릴게요. 몇 장이 필요하십니까?”

1년도 넘게 빌라 관리인을 하면서도 사인을 부탁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런 데서 확 뜬 게 느껴진다면 웃길까.

“다섯 장······ 아니 열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처음에는 다섯 장을 부르려다 슬그머니 열 장을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네. 열 장 해드릴게요. 그럼 전 외출해야 해서······.”

“네네.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관리인이 기분 좋게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한녹영은 차에 올라타 곧장 강준일의 빌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카드도 있겠다, 비밀번호도 알겠다, 걸리는 것 없이 그의 빌라에 입성하고 보니 5시 반이었다.

‘12일만인가?’

12일 전 밤에 잠깐 들러서 딱 30분 얼굴 보고 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오늘 날짜에 새빨간 하트표를 그려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강준일에게 빌라에 도착했으니 어서 오라고 연락해야지. 부랴부랴 휴대전화를 꺼냈는데 문득 장난기가 불쑥 올라왔다. 한녹영이 씩 웃으며 강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촬영은 끝냈겠고, 어디야?

“대표님 죄송해서 어쩌죠?”

ㅡ 오늘 약속 취소라는 얘기면 아예 입 밖에 꺼내지도 마.

약속취소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웃음기로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면 안 되는데. 워낙 예리한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웃었다간 곧장 들통이었다. 한녹영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곧장 연기에 들어갔다.

“죄송한데 약속은 취소에요. 급한 스케줄이 잡혀서요. 약속은 내일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

대사를 친다고 생각하며 했더니 다행히 깊이 실망한 듯한 목소리가 잘 나와주었다.

ㅡ 한녹영씨, 진짜 날 말려죽일 생각인 건가?

“저도 너무너무 실망이지만, 정말 급한 스케줄이라. 죄송해요. 대신 제가 선물 하나 보내뒀어요.”

ㅡ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어.

“보시면 만족하실 선물일 거에요. 스케줄 끝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망하고 돌아왔는데 제가 딱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놀라고 좋아할까.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선물은 나예요, 하며 서프라이즈 해야지. 기왕이면······ 침대에서 나체로 기다릴까? 어차피 저녁이고 뭐고 건너뛰고 곧바로 침대로 끌고 갈 것 같은데······. 음흉한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혼자 있어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민망해하며 우선 신발을 숨기곤 욕실로 이동했다.

뒤쪽까지 꼼꼼하게 씻어낸 후 몸을 말끔히 닦고 알몸으로 성큼성큼 나왔다. 그리곤 침대 위로 올라갔다. 호텔 침구처럼 각을 딱 잡아 정리해둔 침대에선 은은하게 강준일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한녹영은 주인 냄새를 맡는 강아지처럼 침구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냄새를 맡자 그리움이 더 깊어진다.

‘냄새 맡으니까 더 보고 싶어지잖아. 장난치지 말고 나 알몸으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오라고 할 걸 그랬나?’

괜히 서프라이즈 한답시고 오늘 약속 취소라고 해서 강준일이 늦게 귀가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바닥에 허물처럼 벗어둔 옷더미에서 휴대전화를 가져와 만지작대며 ‘지금이라도 장난이라고 할까? 그냥 원래 계획대로 서프라이즈를 해줄까?’ 고민하던 한녹영이 스륵 잠들고 말았다.

전화를 끊은 강준일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 맺혀 있었다. 강준일은 곧장 몸을 일으켜 대표실을 나왔다. 비서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강준일을 보고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난 퇴근합니다.”

간단히 통보한 후 빠르게 걷는 강준일의 뒤를 한성준이 곧장 따라붙었다. 벌써 며칠 전부터 이날은 이른 퇴근을 할 테니 그리 알라고 몇 번이나 말했던 탓에 선불 맞은 멧돼지마냥 성급하게 나가는 상사를 막을 마음은 없었다. 막았다간 당장 모가지가 잘릴 지도 모를 일이고.

“한녹영씨 촬영이 드디어 끝난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더군.”

급한 스케줄이 잡혔다며 시무룩하게 전해왔지만 거짓말인 거 다 안다. 한녹영의 스케줄 정도는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 절 골려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할 테고, 지금쯤 빌라에서 혼자 희희낙락하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거다.

“보고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해봐. 빠르게.”

주차장에 내려가기 전까지 빠르게 보고하라는 의미였다. 안경을 추어올린 한성준이 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하영택이 싸움을 일으켜 독방에 갇혔다는 소식입니다. 대표님 지시대로 함께 들어간 하영택 똘마니들에게 돈 푼 결과입니다.”

강준일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영택과 함께 한녹영 납치에 가담한 똘마니들을 살살 꼬드겨 하영택을 괴롭히면 조기 출소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미끼를 던졌다. 당연히 의리라곤 쥐뿔도 없는 자들은 강준일이 던진 미끼를 덥석 잡아 물었다. 아, 물론 약속한 대로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영택 똘마니들과 저 사이에 지켜야 할 의리 같은 건 없으니 말이다.

독방에서 나오면 또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어 싸움을 일으킬 테고, 결과는 다시 독방행.

“교도관에게 뇌물 먹여. 독방에 최대한 오래 있을 수 있도록.”

“이미 실행했습니다. 대표님 뒤끝이야 제가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지시가 있기 전에 앞서 하는 유능한 비서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듯 으스대는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다른 하나는?”

“장현재 대표의 비밀 파일들 찾아냈습니다. 정치권 유력인사들이 꽤 많더군요. 정말 그렇게들 살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더러운 걸 봤다는 듯 한성준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이든 정치인들과 젊은 여배우들의 정사 장면이 보기 좋았을 리는 없겠지.

“모두 없애버려.”

주애리가 검찰에 보낸 증거들이 확실해 장현재에 대해선 강준일이 따로 손 쓸 필요도 없었다. 다만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고위층 인사들 약점을 이용해 형량을 줄이려 하거나 조기출소 등을 계획할 것을 대비해 그의 비밀 파일을 찾도록 지시했는데, 드디어 찾아낸 모양이었다.

주애리와의 동영상을 넘겨준 점에 대해선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가진 걸 이용해 보다 빨리 세상의 빛을 보도록 할 마음은 없었다. 죄를 지은 만큼의 대가는 치러야지.

“네. 대표님.”

한녹영의 아버지 일도 손을 써 최대 형량과 조기 출소 못하도록 해두었고, 새엄마란 여자는 친아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힌 상태이고······. 새엄마의 아들이란 놈도 꼴을 보아하니 조만간 성추행이나 성폭행 중 하나로 교도소 행일 것 같고. 한녹영의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된 것이 만족스러웠다.

“나 내일 휴가다. 알지?”

“네. 이미 보름 전부터 매일매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은 탓에 이제 질린다는 듯 한성준이 말했다. 픽 웃은 강준일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지금부터 내일까지 한녹영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감이 가시질 않았다. 이거야 원. 첫사랑에 빠진 십대도 아니고.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차봤지만 이미 마음은 먼저 빌라에 가있는 상태였다.

강준일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빌라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차를 하자마자 마음이 급해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냥 서둘러 집안에 들어서니 인기척이 없이 잠잠했다.

“······?”

분명 장난 같았는데. 진짜였나? 그러고 보니 현관에도 신발이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침실로 들어선 강준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예상대로 한녹영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한녹영은 아이처럼 입까지 벌린 채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기다리다 잠든 것 같은데, 얼굴에 피로함이 가득했다. 어제도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촬영했고, 간신히 몇 시간의 수면을 취한 후 오후 늦게까지 촬영한 걸로 아는데 피곤한 건 당연했다.

우선 1-2시간이라도 더 자게 둔 후 저녁을 함께 먹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볼까, 하고 생각하던 강준일의 눈에 한녹영의 벗은 어깨가 들어왔다. 의아하게 바라보다 혹시나 하며 이불을 들췄더니 알몸이 보였다. 선물을 보냈다고 하더니, 이게 바로 한녹영이 말한 선물인가 보았다. 강준일이 잔득하게 웃었다. 이런 매력덩어리를 봤나. 정말 한순간도 방심하지 못하게 한다. 알몸으로 제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래놓고 아이처럼 잠들어 푹 숙면 중인 점이 또 귀여워 심장이 떨렸다.

강준일은 한녹영을 깨우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입맞춤을 한 후 씻었다. 그리곤 한녹영처럼 알몸으로 나와 침대에 오른 후 곧장 한녹영의 성기를 붙잡았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것이 문지를 때마다 조금씩 단단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딱딱해졌다. 한녹영이 으응, 하고 가느다랗게 신음성을 흘렸다. 이불을 옆으로 휙 치워버린 강준일이 한녹영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곤 엉덩이를 들어 올리곤 둔부 양쪽을 잡아 옆으로 확 벌렸다. 구멍이 확 벌어지며 안쪽의 붉은 속살이 슬쩍 비쳤다.

“뭐, 뭐······ 대표님?! 어, 언제 왔······ 아으······.”

그제야 잠에서 깬 한녹영이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한 이십 분쯤 전에 왔지.”

느긋하게 대답하는 강준일의 손가락이 활짝 열린 구멍 사이로 들어왔다. 점막을 헤치며 안으로 파고들어오는 굵직한 손가락의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한녹영이 팔다리에 힘을 준 채 단단히 버텼다.

“자는 사람한테 무, 무슨 짓을······.”

숙면을 취하던 중 갑자기 뒤가 벌려지는 느낌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이러려고 옷을 홀딱 벗은 채 알몸으로 기다리긴 했지만 자는 사람을 덮치다니. 원망조의 말에 강준일이 한녹영의 어깨를 핥으며 웃었다.

“무슨 짓이긴. 한녹영씨가 준 선물을 만끽하는 중이지.”

한녹영의 엉덩이를 더 높이 치켜 올린 강준일의 손가락이 안으로 더 깊이 들어왔다. 마디 끝까지 넣은 것 같았다. 강준일은 신음성을 흘리는 한녹영의 허벅지를 단단히 쥔 채 손가락으로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뒤로 한껏 빠진 손가락이 다시 푹 꽂혀 들어올 때마다 한녹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 서프라이즈 하려고······.”

애초 계획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잔뜩 실망해서 들어올 강준일의 깜짝 놀라는 얼굴을 본 후에 ‘놀랐죠. 사실 내가 선물이었어요!’ 하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 후에 감동한 얼굴을 보며 섹스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잠드는 바람에 다 망쳤다.

“충분히 놀랐어. 내 침대에 한녹영씨가 나체로 잠들어있어서 기습공격을 받은 기분이었지.”

“혹시 알고 있었어요? 내가 서프라이즈 하려고 한 걸?”

“절반 정도는.”

“절반이요?”

“전화했을 때 내 빌라에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런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한녹영씨, 자꾸 날 반하게 해서 어쩔 셈이지?”

한녹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깜짝 놀라는 얼굴은 못 봤지만, 진한 웃음기가 맺힌 강준일의 목소리가 제 선물에 충분히 만족한 것처럼 들려 좋았다. 결과가 좋으면 됐지 뭐.

“어, 어쩌긴요. 평생 제 포로로 만들어야······ 으응, ······죠.”

바깥으로 완전히 빠졌다가 부피를 더해 들어온 손가락 두 개가 점막을 문질렀다. 손의 지문 부분으로 예민해진 점막을 거칠게 문지를 때마다 진저리가 쳐졌다.

잠에서 깨기 전부터 발기한 상태였던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안을 찔러대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춰 춤을 추듯 끄덕댔다. 한녹영이 흐으, 하고 신음했다. 자꾸만 달아오르는 제 몸이 참을 수 없이 음란하게 느껴졌다. 안을 문질러대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점막이 연동운동을 하는 것이 적나라했다.

“아, 아으으······.”

세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안을 푹 찔렀다. 한녹영은 무너질 것 같은 팔에 힘을 주며 눈물이 맺힌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제 안을 찔러대고 있는 강준일의 중심 또한 완전히 발기한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표면 위로 굵게 도드라져 올라온 핏줄을 보자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 울퉁불퉁한 핏줄이 점막에 문대질 때의 감각이 떠오른 것이다. 한녹영이 숨을 크게 삼키며 애원했다.

“대, 대표님······ 이, 이제 그만······.”

“넣어달라고? 한녹영씨의 구멍이 내 손가락을 끊어먹을 듯이 조여대고 있어서 나도 더 이상 참기 힘들군.”

뒤로 길게 뺀 손가락을 빠르게 찔러 넣어 안을 크게 휘저은 강준일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한녹영의 내벽이 제멋대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손가락을 콱콱 조이는 중이었다. 그게 한녹영 본인에게도 느껴졌다. 하얀 도자기에 붉은 물감을 툭툭 뿌린 것처럼 한녹영의 몸이 달아올랐다. 손가락을 빼낸 강준일이 한녹영의 견갑골을 깨물었다. 그가 상체를 숙이자 허벅지 안쪽으로 발기한 성기가 닿았다. 뜨겁고 묵직한 감촉에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구멍 안쪽이 움찔움찔 경련을 시작했다.

강준일은 가늘게 떨리고 있는 한녹영의 양쪽 골반을 단단히 잡고 귀두를 벌름대고 있는 구멍에 맞춘 후 그대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충분히 풀어주긴 했지만 손가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성기가 안을 빠듯하게 채우며 들어오자 압박감에 뇌가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멍이 한계까지 늘어났다. 한녹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준일은 본능적으로 긴장한 한녹영의 등을 느릿하게 핥으며 잠시 내장 안에 중심을 파묻은 채 기다렸다. 그러자 숨을 돌린 한녹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안 움직여요?”

안에만 머물러 있는 성기가 애달아 자꾸만 허벅지가 움찔움찔 했다. 점막 또한 파르르 떨렸다.

“움직였으면 좋겠나?”

짓궂은 물음에 눈매가 샐쭉해졌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렸다가 “네.” 하고 자그맣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짧게 웃은 강준일이 몸을 뒤로 빼더니 이내 다시 거칠게 박아 넣었다. 그의 성기가 뒤로 빠졌다가 안으로 거세게 밀려들어올 때마다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퍽퍽 소리가 났다.

“하, 하으으······.”

강준일은 신음성을 흘리는 한녹영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연신 강한 힘으로 안을 쳐올렸다. 뜨겁게 발기한 것이 내장 안을 쑤셔댈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굵직하게 도드라진 핏줄 탓인지 안을 헤집는 강준일의 성기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꿈틀대며 제 내장을 먹어치우는 기분이었다. 굵은 뱀이 안에서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아, 흐으읏······ 아흣······.”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래로 피가 몰렸다. 단단해진 성기가 당장이라도 사정하고 싶어 난리였다. 이제 곧 사정하겠다 싶은 순간 강준일이 한녹영의 성기를 잡았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귀두 끝을 막아 사정을 방해했다. 사정감이 막히자 한녹영이 허리를 비틀었다.

“대표님. 놔, 놔줘요.”

애원이 헐떡대는 숨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아직은 안 돼. 벌이야, 한녹영씨.”

벌? 무슨 벌? 그 순간 뭔가가 번뜩했다. 한 달도 더 전에 장현재와 주애리로 인해 겁먹어 잠시나마 헤어질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한 벌인 모양이었다. 이 뒤끝 긴 남자! 한녹영이 몸을 비틀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강준일은 당장이라도 싸고 싶어 꿈틀대는 한녹영의 성기를 틀어막은 채 연신 안을 퍽퍽 쳐댔다. 묵직한 고환이 입구에 철벅철벅 부딪칠 정도로 깊은 삽입을 반복하며 안을 잔뜩 헤집었다.

“하, 하으······ 조, 좋아······ 싸, 싸고 싶어······.”

쾌감과 사정감이 동시에 뇌를 찔러대는 기분이었다. 한녹영의 팔이 꺾였다. 한녹영은 이마를 시트에 문대며 신음과 애원을 반복했다.

“싸고 싶어요. 놔, 놔줘요.”

한녹영이 안을 잔뜩 조였다. 있는 힘을 다해 강준일의 성기를 압박하자 그의 입에서도 굵직한 신음이 쏟아졌다. 한녹영의 귀두를 틀어막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그 틈을 타 한녹영이 사정했다. 미끌거리는 정액이 쏟아지듯 나와 강준일의 손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손에 뿌옇게 뿌려진 제 정액을 보는 한녹영의 눈매가 쾌감으로 흐렸다. 사정은 했지만 쾌감은 여전했다. 내장을 찢어발길 듯 거칠게 들어와 쾅쾅 찧어대는 움직임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한녹영의 입이 벌어졌다. 버티고 있던 힘이 다 빠지며 상체가 풀썩 무너져 내렸다. 얼굴은 시트에 박은 채 엉덩이만 높이 지켜든 자세가 되자 수치심이 밀려왔다. 강준일은 안에 성기를 깊이 집어넣은 채로 한녹영의 몸을 위로 더 높이 들었다. 그리곤 구멍의 움직임을 보고 싶다는 듯 느리게 집어넣었다가 아주 느리게 잡아 뺐다. 강준일의 성기가 푹 꽂혀 들어올 때면 구멍이 오므라들었고, 뒤로 확 빼고 나면 크게 벌어졌다가 다시 수축했다. 완전히 밀착해 넣은 성기를 뒤로 확 잡아 뺄 때마다 안쪽의 붉은 속살까지 함께 밀려나가는 감각이 들었다. 금방 사정한 중심이 다시 일어섰다.

“하으으읏, 하으으······ 아앗······.”

얼굴로 열이 올라 숨이 막혔다. 한녹영이 팔에 힘을 주어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안을 퍽 쳐올리는 힘에 밀려 도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느렸던 강준일의 움직임이 다시 빨라졌다. 빠른 속도감으로 안을 퍽퍽 박아댔다. 귀두가 안쪽 깊은 곳을 쿡쿡 찔러댈 때마다 점막이 화끈화끈해졌다.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찌르르했다. 한녹영이 시트를 움켜쥐었을 때 느슨하게 빠졌던 성기가 도로 빠르게 들어가 깊이 푹 박혔다. 조금의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깊이 밀착해 넣었다. 곧 안이 뜨뜻해지며 정액이 내장으로 왈칵왈칵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강준일의 정액이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한녹영도 두 번째 사정을 시작했다.

“흐으응······ 배고픈데······.”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벌써 몇 시간째 이어지는 정사에 심한 허기짐이 느껴졌다. 배고프다고 투덜대자 분명 ‘그럼 식사를 하도록 할까? 한녹영씨를 굶길 순 없으니.’ 라고 했다. 그래서 알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아랫도리를 덜렁 내놓은 채 부엌으로 향한 후 냉장고 문을 열었다.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나 하고 상체를 약간 숙여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그대로 허리를 잡혀 곧장 삽입을 당했다.

“상체를 숙인 한녹영씨 구멍에 맺혀 있는 내 정액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야했거든.”

그러면서 한다는 변명이 이거다. 한녹영이 못마땅하게 끙, 하고 숨을 삼켰다.

“가운이라도 걸치겠다고 했더니 흐응······ 못하게 막았잖아요.”

아무리 둘뿐인 실내라고 해도 알몸으로 다니는 건 민망했다. 더군다나 몸이 깨끗하지도 않았다. 반복된 사정으로 허벅지며 복부에 허옇게 말라붙은 정액 투성이었고, 몸 안쪽에도 강준일이 싸놓은 정액이 넘치도록 있었다. 가뜩이나 걸을 때마다 벌름 열린 구멍 틈새로 조금씩 비집어 나오는 느낌이 너무 이상해 둔부에 힘을 바짝 준 채 걸어야 했는데······.

“약속하지 않았나. 촬영이 끝나면 밥도 알몸으로 먹자고 말이야.”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는 뻔뻔한 말투였다. 강준일은 뭐라 항의하려는 한녹영의 몸속으로 잔뜩 성이 난 성기를 크게 푹 넣었다. 그리곤 안에서 크게 휘저었다. 한녹영이 크게 신음했다. 몸이 절로 떨렸다. 쾌감으로 눈앞이 번쩍거렸다. 허공을 허우적대던 한녹영의 손이 간신히 냉장고 옆 벽을 짚었다. 기다렸다는 듯 한녹영의 엉덩이를 뒤로 잡아 뺀 강준일이 거친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 으으으······ 아읏······.”

한녹영이 손톱을 세워 벽지를 긁으며 신음했다. 귀두가 자극점을 빠르게 자극해댔다. 깊이 찔러 들어온 성기는 한녹영의 점막을 뭉근하게 문댔다가 이내 속도를 빨리해 망치질을 하듯 콱꽉 내리찧기도 했다. 음모가 입구에 닿아 까슬거렸다. 고환이 회음을 철벅거리며 때렸다. 한손을 가슴 앞으로 뻗은 강준일이 도드라지게 올라온 한녹영의 유두를 비틀었다.

“하으으읏······ 좋, 좋아······ 좋아요······.”

안을 찧어대는 감각이 좋았다. 자지러지는 쾌감이 연달아 찾아왔다. 한녹영이 도리질을 치며 연신 좋다고 중얼거렸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유두를 꼬집고 비틀며 안을 헤집었다. 찐득하게 달라붙은 점막이 성기를 콱콱 조이는 감각이 최고였다.

이미 여러 번 사정을 했는데도 강준일의 성기는 처음인 냥 바짝 발기해 있었다. 크기며 부피가 첫 삽입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드라진 핏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덩굴처럼 올라온 핏줄이 점막에 비벼질 때마다 한녹영이 도리질을 쳤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점막은 꿈틀대며 강준일의 성기에 달라붙었다. 찐득하게 조이며 연동운동을 하자 강준일이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안을 쳐대는 그의 움직임이 크고 빨라졌다. 성급한 움직임에 따라 점막이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가 바깥으로 밀려나오길 반복했다.

한녹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마어마하게 밀려오는 쾌감을 참아내려고 깨물어댄 입술이 찢어졌는지 통증이 따끔했다. 고개를 숙인 강준일이 한녹영의 목덜미를 빨았다. 가끔 이를 박아 넣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안을 휘젓는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

“아흐으읏!!”

다리가 후들거렸다. 거대한 성기가 퍽퍽 파고들어와 안을 찧어댈 때마다 전율이 일었다. 목이 아플 만큼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바깥으로 크게 빠진 성기가 가파르게 안을 파고들 때마다 밀착된 틈을 비집고 정액이 흘렀다. 한녹영은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진득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조, 좋아······ 하으읏!!”

크게 파고든 성기가 몸 안에서 한차례 크게 꿈틀대더니 이내 정액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해 한녹영도 사정했다. 튀어나온 정액이 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사정의 여운에 떨던 한녹영의 눈에 벽으로 튄 제 정액이 들어왔다.

“벽지에 얼룩이 남을 것 같군.”

벽지 색상이 밝아 백퍼센트 얼룩이 남을 것 같았다. 한녹영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게 누가 이런데서 덮치래요?”

강준일이 한녹영의 몸속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점막을 긁으며 뒤로 빠지는 성기의 느낌이 적나라해서 저도 모르게 흐응, 하고 가느다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굵직하게 박혀 있던 것이 빠지자 순간 빠끔하게 열렸던 구멍이 도로 수축했다. 한녹영은 제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의 느낌에 진저리를 치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곤 뻐근한 허리를 두들기며 원망스럽게 강준일을 쳐다보았다.

“부엌에 들어서서 저 얼룩을 볼 때마다 날 받아들이느라 파르르 떨리던 한녹영씨의 몸이 생각날 것 같은데.”

“그······ 수, 수건이나 티슈나······ 하여간 아무 거나 가져다줘요. 마르기 전에 닦아내야죠.”

“그냥 둬.”

“네?! 이걸 어떻게 그냥 둬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펄쩍 뛰며 직접 수건이나 뭐 닦을 걸 찾아 부엌을 나서려는데, 강준일이 뒤에 바짝 붙어 한녹영을 끌어안았다. 등에 묵직한 것이 닿았다. 설마 또?

“그보다 한 번만 더 하지.”

한녹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한 번만 더가 또 한 번만 더가 되었다. 끈덕지게 달라붙은 강준일을 겨우 만류한 후 씻고 나오니 거의 자정이었다.

“대표님 몇 시에 왔어요?”

“한녹영씨 전화 받자마자 출발했으니 5시 반쯤이겠군.”

배고파 죽겠다는 한녹영의 성화에 냉장고에서 볶음밥 재료를 꺼내 다듬고 있던 강준일이 그건 왜 묻느냐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5시 반쯤 왔다고? 그럼 6시부터 섹스를 시작했다 치면······ 와아. 거의 6시간 가까이 뒹군 셈이다.

“무슨 계산중이야?”

눈동자를 굴리며 뭘 한참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놀란 표정으로 감탄 중인 한녹영을 향해 강준일이 물었다.

“대표님이랑 저요, 거의 6시간 가까이 뒹군 거 알아요? 전에 다섯 번이나 싸놓고 부족했다고 하셨을 때 정력 한 번 대단하다, 완전 상짐승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상대로였구나, 하고 감탄 중이었죠.”

상짐승이란 표현에 강준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끝까지 어울려준 한녹영씨 체력도 만만치 않은데? 그래서 아주 기특해 죽겠어.”

기특하다는 말에 한녹영이 눈을 흘겼다.

“후들거리는 다리 안 보이세요?”

강준일의 눈길이 제 셔츠 한 장만 입은 채라 미끈하게 드러나 있는 한녹영의 다리로 내려왔다. 체모가 적은 편인 한녹영은 남자인데도 다리에 털이 없어 마치 제모 한 것 마냥 매끈했다. 그런데 음모만은 무성한 편이라 그 괴리가 참으로 자극적이었다.

“더하면 저 죽어요.”

짙어지는 눈빛을 통해 음흉해지는 속내를 읽어낸 한녹영이 정색하며 말했다. 진짜 더했다간 섹스 중 실신해서 병원에 실려 가게 생겼다. 다리는 후들후들, 구멍은 지끈지끈. 몸 깊은 곳은 굵직한 것이 하도 문댄 탓에 얼얼했다. 거기다 진한 섹스 후의 여운인지 뭔지 온몸이 나른해서 꼭 미열이 있는 사람 마냥 몽롱한 기분마저 있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졸음만큼 허기짐도 컸다. 배에서 아까부터 먹을 걸 내놓으라며 꾸르륵 난리였다. 한녹영이 프라이팬을 꺼내 손질한 재료를 몽땅 넣고 볶기 시작한 강준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근데 볶음밥도 할 줄 알아요?”

커피를 직접 가는 걸 봤을 때도 신기했는데, 요리라니······. 놀라웠다. 재벌 3세로 태어났으니 늘 주변에 시중 들어주는 사람들이 즐비했을 텐데? 시중 들어 주는 사람이 전혀 없어 거의 모든 걸 혼자 해야 했던 한녹영이 할 수 있는 요리라곤 라면이 전부였다.

“간단한 요리는 할 줄 알지. 볶음밥이나 스파게티, 스테이크 정도. 스무 살부터 혼자 나와 살다보니 간단한 건 손수 하게 되었지.”

“요리라곤 평생 손수 해보지 않았을 것 같아 보였는데.”

강준일이 진심으로 놀라워하는 한녹영을 향해 짧게 웃었다.

“내가 반전의 매력이 있는 남자거든.”

잘난 척하는 강준일을 향해 입매를 삐죽인 한녹영이 가늘게 숨을 내뱉으며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등에 얼굴을 묻었다. 한녹영이 매달려 불편할 텐데도 강준일은 위험하니 저리가라든가, 불편하니 좀 떨어지라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녹영은 마음껏 그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 막 샤워를 한 탓에 그에게선 은은한 샤워젤 향기가 나고 있었다. 강아지처럼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고, 고양이처럼 부비작대기도 하고, 등을 혀로 핥아보기도 하자 강준일이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리광인가?”

어리광이라는 표현에 움찔하긴 했지만 곧 새침하게 말했다.

“네. 어리광이에요. 대표님과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이렇게 느긋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건 회귀 이후 처음이었다. 과거의 묵은 빚을 다 털어내기 전에는 뭔지 모르게 쫓기는 것처럼 초조한 기분이 늘 있었고, 묵은 먼지를 탈탈 털어낸 후에는 촬영에 쫓기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젠 촬영도 끝났고,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힐 일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직전까지 뒹굴거리다 함께 밥을 먹으려고 준비하는 이 시간이 지극히 만족스럽고 좋았다.

아니다. 정정이다. 회귀 이전에도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데뷔 전에도 그랬고, 데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기를 얻으며 또래에 비해 월등히 많은 돈을 벌었지만 늘 허전했고, 뭔가가 부족해 허덕이곤 했다. 한 순간도 여유를 느낀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제게 부족했던 건 애정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제가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했어도 강준일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넘쳤던 탓인지 초조함이나 허기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움은 넘쳤지만.

“하아, 좋다.”

등에 이마를 문대며 좋다, 하고 연신 속삭이는 한녹영의 말에 웃은 강준일이 말했다.

“내일 휴가 냈으니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어.”

“정말이에요?”

이렇게 바짝 불어 강준일을 마음껏 느끼는 것도 아침까지이겠구나, 내일은 평일이니 출근해야겠지, 하는 생각에 좀 아쉬웠는데 휴가라니 한녹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이고, 이제 그만 떨어지지 그래? 질척대는 남자는 매력 없어.”

볶음밥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한녹영이 순순히 떨어졌다.

“매력이 좀 떨어져도 괜찮아요. 어차피 대표님은 제 건데요, 뭐.”

콧방귀를 끼듯 말하자 피식 웃은 강준일이 접시에 볶음밥을 나눠 담았다.

“이건 제가 나를게요.”

한녹영이 냉큼 접시 두개를 한 손에 한 개씩 들고 식탁으로 날랐다. 그 사이 강준일은 냉장고에서 곁들여 먹을 반찬을 꺼냈다. 피클과 김치였다.

“설마 피클이랑 김치도 손수 담그신 건 아니죠?”

“그 정도로 요리에 열정적이진 않아서. 피클은 일주일에 세 번씩 오는 아주머니 솜씨일 거고, 김치는 조모님 솜씨야. 다른 건 몰라도 장과 김치는 남에게 온전히 맡길 수 없다고 하시며 매년 장과 김치 담그는 일을 감독하거든. 맛이 괜찮을 거야. 먹어봐.”

강준일이 김치를 권했다. 한녹영이 김치를 한 조각 집어 먹어보았다. 과하게 짜지 않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맛있어요.”

이번엔 강준일표 볶음밥도 숟가락 가득 떠서 입안에 넣어 우물우물 씹었다. 양파와 새우 계란만 들어갔는데도 맛있다. 중국집에서 시켜먹는 볶음밥보다 몇 배는 나았다.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볶음밥도 진짜 맛있는데요. 솔직히 맛은 기대 안 했는데 상상 이상이에요.”

“다행이군. 많이 먹도록 해.”

“네. 잘 먹겠습니다.”

예의바르게 인사한 한녹영이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간을 심심하게 한 탓에 질리지 않고 잘 넘어갔다. 좀 느끼하다 싶으면 피클이나 김치 한 조각을 먹어주면 환상의 궁합이 따로 없었다. 워낙 배가 고팠던 탓에 허겁지겁 먹자 강준일이 “천천히 먹어.” 하고 말하며 물을 건네주었다. 마침 목이 막혔던 터라 물을 시원하게 마신 한녹영이 접시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볶음밥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배부르다. 저 과식했어요.”

처음에 접시를 봤을 때만 해도 저걸 어떻게 다 먹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미 충분히 과식 상태지만 더 먹으라면 더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잘 먹으니 좋군. 살은 좀 찐 것 같던데.”

“네. 촬영 일정이 빠듯하긴 했지만 잘 먹었더니 첫 촬영 시작했을 때 보다 4kg 정도 쪘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진 탓인지 박상호가 해주는 음식을 남기지 않고 잘 먹었더니 살이 쪘다. 그래도 좀 마른 편이지만 카메라에 비친 모습이 딱 좋았다. 여기서 더 찌면 카메라 상으로 군살이 붙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박상호가 ‘녹영아, 너 이제 지금 몸무게 유지하면서 운동으로 근육 만들면 되겠다. 지금 딱 좋아.’ 라고 해서 다음 주부터는 다시 트레이너와 함께 운동할 예정이었다. 검도 도장과 액션스쿨도 주에 1번씩은 나가려고 계획 중이고. 근육이 별로 없이 깡마른 몸이라 한녹영 스스로도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계속 운동하면서 근육으로 탄탄한 몸을 만들 작정이었다.

“다행이야. 내 입장에서는 좀 더 쪄도 좋겠지만.”

여전히 강준일의 눈에는 한녹영이 지나치게 말라보여 좀 더 욕심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생각해 볼 때 지금 정도를 유지하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더 찌는 건 안 되고요, 쉬었던 운동 다시 시작해서 근육 만들려고 해요.”

“그건 찬성이야. 함께 운동가면 좋을 것 같군.”

“시간이 맞으면요. 근데 대표님은 너무 일찍 운동 가시는 것 같아요.”

전에 얘기를 들어보니 평일엔 주로 5-6시 사이에 운동을 간다고 했었다. 그 시간은 한녹영에겐 대체로 한새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야 맞추면 되는 거고, 꼭 평일이 아니더라도 주말이나 가끔 쉬는 날 함께 가면 좋을 것 같단 뜻이야.”

그 정도면 뭐. 한녹영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함께 헬스장에 가서 가볍게 러닝머신을 뛰고 나와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한 후 집에 돌아오면 좋을 것 같았다.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여 과연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녹영씨, 지금 너무 자극적이야.”

의자 위로 한쪽 다리를 접어 올린 탓에 은밀한 부위가 은근슬쩍 드러나 보여 매우 자극적이었다.  가늘어진 강준일의 눈매에서 위기를 느낀 한녹영이 재빨리 다리를 내리고 셔츠를 한껏 끌어내렸다.

“역시 속옷은 입는 편이 좋겠어요.”

언제 또 강준일의 야수 본능에 불이 들어와 덥석 허리를 잡힌 채로 삽입 당하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힘들다, 이젠 정말 못한다, 앓는 소리를 해도 막상 삽입 당해서 굵은 좆이 제 안을 휘저어주면 몸이 또 제멋대로 달아올라 헐떡대며 어울리게 되니 아예 처음부터 차단하는 편이 나았다.

몸을 일으킨 한녹영이 침실로 향했다. 그리곤 가져온 가방을 뒤적거려 속옷을 꺼냈다. 뭘 입을까. 가져온 속옷은 무늬도 다양했다. 기본 흰 삼각, 호피, 스트라이프, 블랙, 마지막 하나는 형광 핑크였다. 짧은 고민 끝에 결정한 건 기본 흰 삼각이었다.

“몇 장이나 챙겨온 거야?”

뒤따라온 강준일이 말했다. 흰 삼각 말고 나머지 팬티는 급하게 가방 안에 쑤셔 넣는 한녹영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었다.

“혹시 몰라서 넉넉하게 챙겼어요.”

“혹시 모르다니?”

“속, 속옷을 여러 번 갈아입어야 할지도 모르고······. 또 하루 외박할 작정으로 오긴 했지만 하루 정도는 더 머무를 수도 있는 거고······.”

팬티를 입고 있다가 욕정에 불이 붙으면 팬티를 버리게 되는 건 당연하니 그를 대비해 몇 장 챙겼고, 혹시 하루가 이틀이 될지도 모르니 또 몇 장 더. 그래서 총 다섯 장이 된 것이다.

알몸으로 뒹굴다 함께 샤워까지 해놓고 고작 속옷 정도로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강준일은 우물쭈물하며 속옷을 입는 한녹영을 끌어당겨 안은 후 짧게 입맞춤을 했다.

“이렇게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 내 사람이 되었으니 난 정말 행운아인 것 같아.”

한녹영이 새치름하게 웃었다.

“네. 대표님은 행운아 맞아요. 그리고 저도 행운아고요.”

강준일을 제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내일 저녁에 조부님을 뵈러 가지 않겠어?”

강정석 회장이 한녹영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 벌써 거의 한달 전이다. 그 동안에는 여유 있는 시간을 내기 힘들어 미뤄왔는데 더 이상 거절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더불어 한녹영 또한 강정석 회장을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다.

“네. 그렇게 해요.”

한녹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떨려?”

“네. 내일 청심환이라도 한 알 먹고 갈까 봐요.”

“걱정할 것 없다니까. 조부님은 절대 돈다발 못 던져. 조부님과 한녹영씨 사이에서 오히려 갑은 한녹영씨니까 마음껏 당당해도 돼.”

강준일은 몇 번이나 전혀 기죽을 필요 없다고, 오히려 한녹영이 더 당당한 입장이라고 말했지만 걱정되었고, 다소 무섭기도 했다.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 한녹영이 강준일을 향해 웃었다.

“네. 당당하게 대표님은 내 거니까 뺏어갈 생각하지 말라고 할게요.”

강준일이 웃었다.

“그래, 지금처럼만 하면 돼.”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저도 모르게 하품이 터져 나왔다. 순간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벌렸다가 뒤늦게 부랴부랴 손으로 가렸다.

“졸린가?”

“솔직히 좀······ 많이 졸려요.”

피로에 식곤증까지 겹친 건지 너무 노곤하고 졸렸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질 지경이었다.

“그럼 잘까?”

한녹영의 손을 잡은 강준일이 침대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침대 위로 올라 나란히 누웠다.

“기분이 이상해요.”

“뭐가?”

“누군가와 나란히 누워 잠든 적이 없었거든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늘 혼자 잠들었고, 혼자 깼다. 지방이나 해외로 로케를 갔을 때도 한녹영은 독방을 사용해 누구가와 함께 잠든 적이 없었다. 그 탓에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숨소리가 낯설면서도 뭐랄까,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이한 감동 같은 감정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든달까, 든든하다고 할까.

“나와 나란히 누운 것이 처음은 아닐 텐데?”

“그야 그렇죠. 그치만 첫 섹스 땐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들어서 대표님과 나란히 누워 잔 것 같지가 않아요.”

“그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한 침대에 누운 건 오늘로 네 번째야.”

“네?”

네 번째라니······ 어어, 설마?

“두 번이나 정신을 잃은 상태로 내 침대에서 잠들었던 일을 잊은 건가?”

“잊진 않았는데요, 제 옆에서 주무셨어요?”

“그럼 내 침대를 두고 어디서 잤어야 하지?”

“방 많잖아요. 절 다른 방에 눕히셨어야죠.”

보통은 그러지 않나? 처음 강준일의 빌라에서 깼을 때는 손님방인가 했는데, 후에 그의 침실인 걸 알고 좀 놀랐었다. 그래도 그때만 해도 별 사이가 아니었던 탓에 ‘대표님이 다른 방에서 주무셨겠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옆에서 잤다고?

“그럴까 했는데, 왠지 내 침대에 눕히고 싶더군.”

“왜요?”

“그때부터 흑심이 있었나부지.”

무덤덤한 대꾸에 웃음이 나왔다. 한녹영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강준일이 자연스레 팔을 뻗었다. 한녹영은 몸을 움직여 강준일 옆으로 더 바짝 다가 누우며 그의 어깨를 뱄다.

“은근 깍쟁이인 거 아시죠? 그렇게 전부터 흑심을 품고 있어놓고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시다니.”

“한녹영씨는 언제부터 내가 좋았나?”

한녹영 대답을 망설였다. 뭐라고 해야 하지. 회귀 이전, 그가 제 병실을 찾아온 순간부터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은데 설명하자니 길고 복잡하다.

눈을 감자 참았던 졸음이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렸다. 정말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 한녹영은 졸음에 몸을 내맡긴 채 웅얼거렸다.

“······ 때부터요.”

잠에 취한 불분명한 목소리라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강준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부터였다는 거야? 한녹영씨!”

한녹영은 거의 잠든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강준일이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느꼈는지 히죽 웃으며 “따라해요.” 하고 옹알이를 하듯 중얼거렸다. 다행히 이번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분명 사랑해요, 라고 말하려 했을 테니까. 강준일은 잠든 한녹영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도 사랑해, 한녹영씨.” 하고 속삭였다. 잠결에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녹영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맺혔다.

느긋한 늦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마음과는 달리 일찌감치 번쩍 눈이 떠졌다. 한녹영은 곧장 고개를 틀어 옆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강준일이 제 옆에 누워 자고 있음을 확인하고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잠든 강준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 잠든 모습은 여러 번 보여줬는데 말이다.

‘실컷 봐둬야지.’

언제 또 이런 날이 올지 모르니까. 같이 잔다고 해도 오늘처럼 제가 먼저 눈을 뜰 확률은 낮았다. 그러니 볼 수 있을 때 실컷 봐두자.

상체를 반쯤 일으킨 후 팔을 세워 턱을 괴었다. 그리곤 똑바로 누운 채 잠들어 있는 강준일의 얼굴을 마치 명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잠든 얼굴은 자칫하면 못생겨 보일 수 있는데 강준일은 아니었다. 뭐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나, 싶을 만큼 잘생겼다.

“배우를 했으면 연예계를 평정했을 거야.”

연예인이 아니라 경영인이라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이 사람을 수많은 팬들과 공유해야 할 뻔하지 않았나.

봐도 봐도 잘생겼고, 보면 볼수록 좋아지고, 바라볼수록 가슴이 뭉클해져서 참 큰일이었다. 한참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만져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잠깐 망설였던 한녹영이 강준일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진한 묵을 묻힌 붓으로 정성스레 터치한 듯한 눈썹도 살짝 매만져보고, 오뚝한 콧날도 슬쩍 건드려보고, 섹시한 입술선도 손가락으로 덧그려보았다. 눈을 반달처럼 휘며 인중을 만져보려 할 때 강준일에게 손목을 잡혔다.

“자는 사람 건드리면 벌을 받아.”

그게 무슨, 이라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날렵하게 몸을 일으킨 강준일이 한녹영의 몸을 덮치듯 누른 후 입술을 겹쳐왔다. 그리곤 곧장 입술을 벌리고 혀를 집어넣어 입안을 샅샅이 훑었다. 엉킨 혀가 강준일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부터 거친 숨이 목구멍을 비집고 홀러나오기 시작했다. 한녹영은 가슴을 크게 들썩거리며 강준일의 목으로 팔을 감았다. 그리곤 적극적으로 키스에 임했다. 한참 후 입술이 떨어지자 강준일과 한녹영 사이에 타액이 실처럼 이어졌다. 한녹영이 얼굴을 붉히며 제 입술을 핥았다.

“난 잠은 키스로 깨워주는 편이 좋아. 다음부터는 잠자는 야수를 깨우는 미녀처럼 짙은 키스로 날 깨워달라고.”

마무리 키스를 하듯 한녹영의 입술 위에 쪽 소리 나는 입맞춤을 한 강준일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까 키스를 하느라 몸이 겹쳐졌을 때 제 허벅지에 닿은 강준일의 중심 감촉이 묵직했던 것이 떠올랐다.

“야수를 깨우는 미녀의 키스 대신 음란한 아침은 어때요? 난 동화보다 야동이 더 좋거든요.”

“뭐······.”

당황한 걸까. 강준일의 눈썹이 위로 말려간 순간 이번엔 한녹영이 표범처럼 날렵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강준일의 가슴을 눌러 눕힌 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그제야 그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한녹영은 새침한 표정으로 몸을 들어 올린 후 팬티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곤 강준일의 속옷도 벗겼다. 어제 그렇게나 썼는데도 성능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그의 성기가 툭 튀어나왔다. 버섯처럼 벌어진 귀두가 꽤나 위협적이었다.

숨을 삼킨 한녹영이 곧장 제 구멍 입구를 강준일의 귀두 끝에 맞추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빡빡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삽입은 너무나 손쉽게 이루어졌다. 어제 이른 저녁 무력부터 거의 자정까지 짐승처럼 해댄 탓인지 뒤가 곧장 벌어지며 강준일의 성기를 수월하게 삼켰다.

“하앗······.”

한녹영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일직선으로 꽂혀든 강준일의 성기가 몸속 깊은 곳을 찌른 것이다. 한녹영은 연신 탄성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엉덩이를 빠르게 들썩거렸다. 앞뒤로 살짝살짝 애태우는 것처럼 움직이기도 하고, 위아래로 크게 들썩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안을 찔러대는 성기의 감촉에 미칠 것만 같았다. 성기 표면에 달라붙은 점막이 힘을 주어 확확 조일 때마다 쾌감으로 흐려지는 강준일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진한 만족감을 주었다. 그의 어깨에 양손을 놓은 한녹영이 더더욱 힘차게 움직였다.

잔뜩 발기했던 한녹영의 성기에서 정액이 주륵 쏟아져 강준일의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사정하느라 움직임이 주춤해지자 직접 한녹영의 골반을 잡은 강준일이 위아래로 몸을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지 몸을 일으켜 한녹영을 눕혔다. 한녹영의 다리가 크게 벌어졌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다리를 더 넓게 벌린 후 녹진하게 풀려있는 내벽 안을 강한 힘으로 파고들었다 빼길 반복했다.

한참이나 더 콱콱 넣으며 피스톤질을 했던 강준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절정이 찾아온 듯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동시에 안이 뜨겁게 젖어들었다. 내장 안으로 퍼지는 지릿한 느낌에 한녹영이 파르르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주인의 늦잠을 방해하는 고양이의 털처럼 간질거렸다. 햇살을 피해 이리저리 뒤척이던 한녹영이 부스스 눈을 떴다. 이른 아침 일찍 깼을 때와는 달리 머리가 멍했다. 몇 시나 된 거지? 반만 뜬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다 간신히 벽시계를 발견했다. 지금 시간은 11시 10분이었다.

아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가 6시 무렵이었고, 아침 섹스를 두 판 즐긴 후 샤워하고 나와 ‘커피를 내려올게.’ 라고 한 강준일을 기다리다 저도 모르게 또 잠든 모양이었다. 머리가 멍해서 쉽사리 정신이 맑아지지 않아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곧장 얼굴을 붉혔다.

‘옷도 안 입고 잔 거야?’

욕실에서 알몸으로 나왔다가 이불이 너무 포근해 보여 옷도 입지 않고 곧장 침대로 뛰어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햇살이 환한 대낮에 온몸을 적나라하게 내놓고 있자니 민망해서 목덜미를 문지르며 서둘러 속옷부터 입었다. 그리곤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강준일의 셔츠를 걸친 후 바깥으로 나갔다. 강준일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휴가라면서요.”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간 한녹영이 소파 뒤에서 강준일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커피를 내려 들어갔더니 음란한 애인님께서 잠드셨더군. 깨길 기다리는 동안 잠깐 딴짓 중이었지.”

당장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닌지 강준일은 미련 없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곤 몸을 일으켰다.

“커피?”

“네. 주세요.”

소파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자 곧 갓 내린 커피가 도착했다. 한녹영은 먼저 향을 음미한 후 커피를 마셨다.

“한녹영씨 자는 동안 조부님께 전화를 넣었더니 가능하면 점심에 오라고 하시더군.”

“점심에요?”

지금이 거의 점심인데?

“늦잠 잔 누구 덕분에 시간이 촉박해지긴 했지만, 오늘 어머니와 조모님이 모임을 가셔서 마침 집이 비는 모양이야. 우선 조부님부터 뵙고 조모님과 부모님은 천천히 뵙는 편이 낫지 않겠어?”

“대표님 조모님과 부, 부모님도 만나 뵈어야 해요?”

한녹영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조부님만 해도 벅찬데, 삼단 공격을 받은 듯 한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당황해서 동공이 흔들리는 한녹영의 뺨을 쓸며 강준일이 웃었다.

“한녹영씨 나와 헤어질 생각이야?”

“그럴 리가요!”

대답이 곧장 나왔다. 강한 어조로 대답한 후 절대 헤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듯 도리질까지 쳤다.

“나도 녹영씨와 헤어질 생각 없어. 앞으로 평생. 그러니 평생 날 데리고 살려면 조모님과 부모님께도 인사는 드려야지. 물론 지금은 말고. 왜 그래?”

대답은 않고 한녹영이 넋을 놓고 있자 의아함을 느낀 강준일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한녹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호, 호칭이요.”

“호칭?”

“방금 성을 떼고 불러주셨잖아요.”

이런 사이가 된 이후로도 늘 한녹영씨, 하고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으로 불렀는데 말이다. 아아, 하고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웃으며 장난스럽게 한녹영을 불렀다.

“녹영씨?”

“성만 빼도 왠지 가까워진 기분이 들면서 엄청 쑤, 쑥스럽네요.”

한녹영이 뺨을 긁었다. 동화보다 야동이 좋다며 먼저 올라타 스스로 성기를 몸 안에 집어넣기까지 했던 대범함은 어디다 던져두고, 호칭에서 성을 뺀 것만으로 저리도 쑥스러워하는지. 강준일이 한녹영을 끌어안으려 하자 한녹영이 “대표님 커피, 커피!” 하고 소리쳤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손에서 잔을 빼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다시 끌어안았다.

“아침엔 내 좆을 삼킬 땐 요부 같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어하다니 팔색조의 매력에 정신을 못 차리겠어.”

“제가 좀 치명적이죠?”

“녹영파탈스럽다고?”

으스댔던 것도 잠시. 웃음이 가득한 강준일의 말에 민망함이 확 왔다. 설마 강준일까지 그 표현을 알고 있을 줄이야.

“대표님도 알아요?”

“나야 늘 녹영씨 일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니까. 녹영파탈스럽다니, 누가 만든 신조어인지 몰라도 아주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

“녹영파탈스럽다는 표현은 네티즌들이 만든 거지만, 녹영파탈이란 단어는 제가 만들었어요.”

“녹영씨가?”

강준일이 눈썹을 휘었다. 한녹영이 쑥스러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제 스폰서 설이 돌고 있을 때 송정빈과 얘기를 나누다 녹영파탈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는데, 송정빈이 그 표현이 재미있다며 자주 쓰다 못해 방송에서까지 언급한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이다.

“어쩌다 보니 녹영파탈이란 말이 뛰어나왔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유행이 될 줄은 몰랐어요.”

“녹영파탈, 이제 그만 우리 외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난 외출 준비 완료이니 녹영씨만 하면 돼.”

외출 준비를 서두를 것을 재촉하는 강준일의 음성에 장난기가 그득했다.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외출 준비야 할 거지만, 녹영파탈이라는 말은 하지 마요! 진짜 민망해 죽겠거든요!”

얼굴을 홍시처럼 붉힌 채 버럭버럭하는 한녹영의 등을 눈으로 쫓으며 강준일이 느긋하게 웃었다.

침실로 돌아온 한녹영은 강준일의 셔츠를 벗고 제 옷을 입었다. 씻고 바로 자느라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정돈한 후 강준일의 드레스룸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다 곤혹스럽게 혀를 찼다. 이 차림으로 어른을 만나러 가도 되나? 강준일의 집에 오느라 편안하게 입고 온 한녹영의 옷은 흰 바지와 꽃무늬 남방이었다. 암만 봐도 어른을 뵈러 가기에 무리인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속옷만 챙겼지, 정작 겉옷은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집이 가까우니 잠깐 들러서 정장으로 갈아입는 편이 나을까? 혼자 고만하던 한녹영이 거실로 나왔다.

“내 옷차림이 이런데 정장을 입고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몸을 일으킨 강준일이 한녹영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잔꽃무늬가 자잘하게 프린트되어 있는 남방이 화려하긴 하지만, 한녹영에게 잘 어울렸다. 피부가 깨끗하고, 몸의 비율이 좋아서 한녹영은 뭐든 어울렸다.

“내 눈에는 예쁜데.”

한녹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표님 눈에는 뭔들 안 예쁠까요. 제가 망나니처럼 머리를 풀어헤쳐도 예쁘게 볼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한녹영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 조부님이 어떻게 보실지, 지금 제겐 그게 더 중요하다고요. 내 빌라에 들러서 갈아입고 갈까요? 첫인상이 중요한데, 이래서야 회장님한테 점수 깎이겠어요.”

“조부님 눈치 볼 필요는 없대도.”

“대표님 할아버지시고, 제 외할머니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을 처음 뵈러 가는 자리에 날라리처럼 입고 같 순 없어요. 제 빌라에 들렀다가 가요.”

역시 어른을 뵙는 자리엔 정장이지. 제가 또 수트 발도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한녹영은 강준일을 재촉해 그의 빌라를 나온 후 먼저 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곤 드레스룸에서 제일 깔끔하고 무난해 보이는 걸로 골라 재빨리 갈아입었다. 굳이 정장일 필요는 없다고 했던 강준일도 수트 차림이 나쁘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은 삼성동에 있는 강준일의 본가로 향했다. 일반 가정집의 대문인지, 아니면 관저 같은 공공기간의 대문인지 헷갈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대문 앞에 차를 새우고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경비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뛰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조부님은 계십니까?”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강준일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고, 한녹영도 그의 뒤를 따랐다. 경비원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해 보이는 얼굴로 수인사를 나누긴 했는데, 사실 속은 두근두근 난리였다.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을 때보다 더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쥐락펴락하는 손바닥 안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패션쇼 무대에도 서봤고, 생방 인터뷰도 여러 번 해봤고, 이런저런 파티장이며, 여러 시상식에도 자주 다녔지만 이런 떨림은 처음이었다. 나름 담대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대, 대표님······ 자, 잠깐만요.”

강준일이 현관 손잡이를 잡은 순간 한녹영이 재빨리

브레이크를 걸었다. 뒤돌아 새하얗게 질린 한녹영의 안색을 확인한 강준일이 혀를 찼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왜 이렇게 긴장한 거야?”

“무려 회장님에다 대표님 조부님을 만나 뵈러 가는 거잖아요. 저 너무 긴장돼요. 손바닥 좀 보세요.”

한녹영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고개를 흔든 강준일이 손바닥도 꼼꼼히 닦아주었다.

“손 잡아줄까?”

“제가 앤가요?”

애인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무섭다고 손씩이나 잡아달라고 하게. 새침하게 거절해놓고 곧바로 후회했다. 잡아달라고 할 걸. 그럼 마구 뛰는 심장이 좀 가라앉을 것 같은데.

그런 한녹영이의 마음을 눈치 챈 건지 짧게 웃은 강준일이 말없이 손을 불쑥 잡았다. 그리곤 시선이 마주치자 무슨 일 있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현관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일하는 분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세 분이 현관에서 마중을 준비 중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모습에 움찔한 사이 세 분 중 한 분이 강정석에게 강준일과 한녹영이 도착했음을 고했다.

한녹영이 소파에 앉았다. 강준일의 손을 꼭 잡은 채 정자세로 앉아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강정석이 바깥으로 나왔다.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어? 어르신?”

병원 옥상에서 봤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노인 아니 강정석 회장은 여전히 꽉 잡고 있는 채인 강준일과 한녹영의 손을 보고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그제야 한녹영이 머쓱해하며 손을 놓았다. 아는 얼굴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긴장감이 한결 덜했다. 그때 그 분이 강정석 회장이셨구나. 전혀 몰랐다. 사실 예전부터 뉴스나 경제 기사 같은 걸 잘 안 보기도 했고, 명예회장 직으로 물러난 후에는 언론에 노출될 일이 거의 없어 강정석의 얼굴을 몰랐던 것이다.

“사내놈들끼리 볼썽사납게 실내에서 손을 왜 잡고 있누!”

그는 못마땅하게 에잉, 하고 혀를 차더니 한녹영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회장님을 뵙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긴장했거든요. 그래서 대표님이 손을 잡아주신 겁니다.”

강정석이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녹영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앉았다.

“장 보살은 잘 지내고 계신가?”

강정석이 제일 먼저 한녹영의 외조모 안부부터 챙겼다. 한녹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하고도 연락이 안 되세요. 어머니 돌아가신 후 종적을 감주셨거든요.”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강정석의 얼굴에 미안함이 서렸다. 남의 불행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액받이 무당의 팔자라곤 하나 손자인 강준일은 살고, 그녀는 죽었으니 인간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절대 은혜를 갚는답시고 뭔가를 하려하지 마십시오.’ 라는 신신당부 탓에 오랜 세월 모른 척 눈감고 살아온 것에 대한 죄책감도 들었다.

강정석이 한녹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병원 옥상에서 봤을 때 참 낮익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걸 알고 보니 확실히 알겠다. 장 보살과 장 보살 딸인 모친의 얼굴을 많이 닮았다. 무당의 업을 타고나 팔자가 사나워 그렇지 두 여인 모두 요즘 TV에 많이 나오는 연예인들 정도는 가볍게 눌러버릴 만큼 대단한 미인들이었다. 사내놈치고 매우 곱상한 저 한녹영이란 아이의 얼굴만 봐도 알지 않나. 한녹영의 모친은 더한 미인이었다.

“독한 사람이구먼. 하나뿐인 손자와의 연까지 딱 끊어버리다니.”

한녹영이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 생존해계시고,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만나 뵙고 싶긴 하다.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외조모께 제 배 아파 낳은 딸이 더 소중한 건 당연했으니까.

“화장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정중한 태도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강정석이 일어났다.

“식사하면서 얘기하자.”

강정석이 먼저 부엌으로 향했고, 한녹영과 강준일이 뒤따랐다. 8인 식탁 정도로 보이는 커다란 식탁 위에 음식이 가득이었다. 한정식 집에 온 듯 어마어마한 양에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강정석이 제일 상석에 앉았고 한녹영과 강준일이 강정석의 오른편으로 나란히 앉았다. 넓은 자리 두고 굳이 나란히 앉는 두 놈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강정석이 에잉,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한일이 놈이 제 처가로 이혼서류를 보낸 모양이더라.”

강한일이라면 주애리의 남편 이름인 것 같은데, 제  기억이 맞는다면 확실했다. 주애리와 장현재의 섹스 스캔들은 그야말로 쓰나미처럼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두 사람의 이름은 거의 이주 간 실시간 검색어 1, 2위를 차지했다. 섹스 스캔들이 터진 다음 날 장현재가 횡령, 뇌물 수수, 협박 등의 혐의로 검찰에 체포되었는데 그의 범죄를 고발하고 증거를 넘긴 사람이 바로 주애리였다는 기사가 뜬 것이다. 기자들은 내연 관계였던 두 사람이 시비 끝에 감정이 틀어져 주애리가 장현재를 고발했고, 이에 분노한 장현재가 섹스 영상을 터뜨렸는 식의 기사를 연일 올렸다. 이후 주애리도 비자금 조성 혐의로 체포되었고 사람들은 추잡한 불륜의 끝이라며 욕하면서도 후련해했다.

일이 터진지 한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두 사람의 일은 왠만큼 진정되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다가 함께 몰락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이혼 결심이 늦었네요.”

영상이 터지자마자 할 줄 알았는데. 냉정한 강준일의 말에 강정석이 혀를 찼다. 영상이 터지자 성난 멧돼지처럼 날뛰던 사촌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참 어리석은 양반. 철썩같이 믿고 있던 여자의 실체를 이제야 알다니. 덕분에 집안망신이 되어 LK의 이름도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지금은 주가도 안정되었고, 가족들 모두 주애리의 실체를 알게 되어 알게 모르게 그녀 쪽으로 붙었던 사람들이 은근슬쩍 강준일에게 선을 대려고 하는 중이었다.

“이혼 결심이니 뭐니 할 정신이나 있었겠느냐. 제 놈 안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겼는데. 어쨌든 한 집안 식구이니 살살 하라고 했더니만, 아주 세상이 떠들썩하게 일을 벌였어. 그냥 비자금 장부나 검찰에 조용히 넘겼으면 좀 좋아. 네 놈 때문이지?”

강정석이 조용히 식사 중인 한녹영을 딱 꼬집었다. 갑작스런 시선에 하마터면 사레에 걸려 기침이 나올 뻔 했다. 한녹영의 가슴이 들썩대자 강준일이 조용히 물을 밀어주었다. 한녹영은 강준일을 향해 살짝 웃은 후 물을 마셨다.

“엄한 한녹영씨는 왜······.”

강정석이 한녹영의 편을 들려는 강준일을 따끔하게 보았다. 에잉, 팔불출 같은 놈. 칼끝처럼 날카롭기만 하던 손자 놈에게 저런 면이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사업적 감각이야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어 다행이지만.

“엄하긴! 하도 떠들썩하게 일을 벌여 네 놈 답지 않기에 무슨 사정인가 알아봤더니 저 놈 이름이 떡하니 나오더라. 저 놈 연예인 생명 지켜주려고 일을 그리도 요란하게 벌인 것이 아니냐! 어디 장 보살 손자 네가 말해보아라.”

“대표님 저 주십시오.”

무심코 말해놓고 뒤늦게 아차,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목덜미부터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한녹영의 실수에 강준일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고, 강정석은 길가다 얻어맞은 사람처럼 황당해하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맹랑한 놈이로세. 남의 귀한 손자를 강탈해가겠다는 심보 한 번 고약하구나. 네 어머니가 준일이 놈을 살렸다니 거리낄 것이 없다 싶은 거냐?”

“어머니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대표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귀한 손자가 행복하길 바라시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저 주십시오.”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긴 하지만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한녹영이 결연하게 말했고, 강정석은 그런 한녹영을 잠시 보더니 이내 식사를 마저 했다.

“드라마가 잘 나간다고?”

그리곤 또 곧장 사업 얘기를 시작했다. 뭐야? 벌써 대화 주제가 다른 데로 넘어간 거야? 어리둥절해하는 한녹영을 향해 강준일이 부드럽게 웃었다.

“네. 이미 중국위성방송 및 리메이크권 등을 포함해 중국과 계약 체결했습니다. 일본, 대만, 홍콩, 태국 등과도 현재 협의 중이며 드라마에 들어간 LK계열사 광고로 인한 수익도 기대해볼 만합니다. 북미나 유럽 쪽으로의 수출도 고려중입니다. 그 외 VOD나 iptv, 케이블 등으로 인한 판매수익 등을 따져볼 때 10화까지 방송된 현재까지 수익이 천억 규모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22배의 수익이라고 했던가?”

“더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 동영상 플랫폼인 아이이치에 제공한 6회까지의 누적뷰만 8억뷰를 달성했다고 하니까요. 최대 삼천오백 억에서 사천억 사이의 수익을 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중국에 팔아넘겼는데 반응이 아주 뜨겁다는 얘기는 한녹영도 알고 있었다. 판권료는 회당 29만 달러로 역대 최고 금액이었다. 중국에서는 25만 달러를 불렀다는데,  LK엔터의 협상 능력이 아주 좋았던 것이다. 덕분에 이전 삶에서보다 훨씬 높은 값에 팔렸다.

전에 찍었던 드라마들도 중국에 팔렸던 덕분에 중화권에도 이름과 얼굴을 알리긴 했지만 도망자로 한녹영은 명실상부한 한류스타가 되었다. 그래서 아마 조만간 중국에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박상호는 중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또 뽑아야겠다며 벌써부터 난리였다.

“나쁘지 않구나.”

강정석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준일이 그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드라마 괜찮더구나. 볼만 했다.”

강정석 눈길이 다시 한녹영을 향했다. 하지만 도망자를 칭찬하는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부루퉁했다. 드라마를 시청한 것을 인정하려니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제가 출연해서가 아니라 정말 잘 빠진 드라마라고 자부합니다.”

“네 놈도 연기를 그럭저럭 하더구나.”

그럭저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말에 담긴 뉘앙스가 딱 칭찬이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던가.”

“네?”

“딱딱하게 회장님이라고 하지 말고 할아버님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잘 몰라 멍해 있다가 강준일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한녹영이 강정석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할아버님.”

“넉살도 좋다. 할아버님 소리를 단번에 하는 걸 보니. 준일이 놈은 눈물빠지게 아깝지만, 빚은 갚아야 하는 거니 둘 사이를 찢어놓진 않겠다. 다 큰 손자 놈 연애 사업에까지 관여해 시시콜콜 훈수 두는 것도 우습고.”

준일이 놈이 말을 들을 놈도 아니고.

“네! 고맙습니다. 대표님은 제가 진짜 행복하게 해줄게요.”

한녹영의 말에 강정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놈 참. 외모는 똑 닮았는데 성격은 장 보살과 정반대로구나. 장 보살은 싸늘하고 엄해서 웃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는데 말이다. 사람이 참 서릿발 같았지. 불필요한 말은 하지도 않았고.”

한녹영의 기억 속 외조모도 강정석의 말과 같았다.

“혹 장 보살과 연락이 닿거든 내가 안부를 몹시 궁금해 하더라고 전해라.”

“할머니를 뵙게 되면 말씀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절 찾진 않으실 것 같아요. 떠날 때 저와의 인연을 단호하게 끊어내고 가셨으니까요.”

“장 보살은 연락두절이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란 놈은 감옥에 있고······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인 처지던데 준일이 놈을 차지했으니 그리 사나운 팔자는 아닐 게다. 이놈이 겉으로는 냉해보여도 한 번 정을 주면 무섭거든. 날 닮아서 사업적 안목도 있고, 냉철하고, 배포도 커. 이 놈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관상을 보려고 장 보살에게 데려갔더니 옛날에 태어났으면 왕이 될 상이라고 했다.”

강정석이 강준일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근데 가만히 듣고 있자니 강준일에 대한 자랑인지, 본인 자랑인지 헷갈렸다. 날 닮아서 잘 생겼고, 날 닮아서 배포도 크고, 날 닮아서 정도 깊고······ 좋은 점은 전부 본인을 닮았다고 하니 처음에는 신중하게 듣다가 나중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또 들를게요. 할아버님.”

식사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또 한참 자랑을 듣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던가.”

무뚝뚝하게 대꾸한 강정석이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녹영은 닫힌 문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후 강준일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녹영씨, 정말 못 말리겠더군. 그 타이밍에 날 달라고 할 줄은 몰랐어.”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준일이 웃으며 말했다. 한녹영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대표님 때문이잖아요. 전에 회장님을 뵈면 대표님 달라고 요구하라고 했던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돌더니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나온 거라고요. 그리고 제가 엉뚱하지만 그 타이밍에 대표님 달라고 해서 허락받았으니 된 거 아니에요?”

결과가 좋으니 장땡이지 뭐. 강정석에게 말한 대로 저만이 강준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에 한 말이지만, 강정석이 예상과는 달리 한녹영을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어머니 때문일 거다. 손자인 강준일을 살린 무당의 아들이라서.

이번에도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받은 도움이 대체 얼마인지. 어린 시절 혼자 두고 간 어머니를 원망했던 철없는 아들이 뭐 그리 예쁘다고 돌아가신 이후까지 끝없는 희생을 하신 건지. 어머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올라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같이 살까?”

“대표님, 조만간 우리 엄마 보러 같이 안 가실래요?”

강준일과 한녹영이 동시에 말했다. 하지만 서로의 말은 확실하게 들었다. 한녹영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같이 살자고 하신 거예요?”

“내가 사는 빌라 아래층이 마침 매물로 나왔더군. 그래서 구입해뒀으니 지금 사는 빌라 팔고 이사 오는 게 어때? 한녹영씨 입장이 있으니 따로 집은 있어야 할 거야.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아래층에 사는 걸로 하고, 실상은 같이 사는 거지. 조부님 허락도 받은 김에 살림 합쳐 버리자고.”

맙소사. 벌써 빌라를 사버렸다니. 재벌의 행동력이란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강준일의 빌라는 한녹영이 무리하게 빚을 져 산 현재의 빌라보다 더 비싸다. 수십 억이나 하는 걸 단번에 턱 사버리다니······

“사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같이 살자고 해요?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그야말로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다.

“한녹영씨도 나도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니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시간이 될 때라도 가능한 함께 있고 싶어. 곧 중국도 왔다갔다 해야 할 테고, 우리가 제작하는 영화에도 출연하고 싶다며. 그럼 또 바빠져서 얼굴 보기 힘들어질 텐데 따로 살며 애달지 말고 밤 시간이라도 함께 하는 게 어때?”

스타의 애인 노릇을 해보니 만만치 않았다. 이건 뭐 얼굴 볼 틈이 없으니. 멀쩡한 애인을 지척에 두고 TV로 얼굴을 보며 그리움을 달래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작품 들어갈 때마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텐데, 바쁜 와중에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볼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아래층이 매물로 나온 걸 알게 되었다. 강준일은 지체 없이 구매했고, 열흘 정도 후면 리모델링도 끝난다.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혹한 제안이긴 했다. 한녹영도 그간 매일 촬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며 ‘내 빌라가 아닌 대표님 집으로 가고 싶다.’ 하고 수없이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벌써 같이 살아도 될까? 물론 평생 헤어질 마음이 없으니 언젠가는 자연스레 동거를 시작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벌써 동거는 너무 빠르지 않나? 흔들리는 한녹영의 눈빛을 읽어낸 강준일이 비스듬하게 웃었다.

“녹영아, 같이 살자.”

반나절 사이에 호칭이 또 한 번 간결해졌다. 녹영씨에서 녹영아, 가 되어버린 한녹영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웃고 있는 강준일을 향해 외쳤다.

“그, 그건 반칙이죠! 갑자기 훅 들어오면 어떡해요?”

사람 심장 벌렁거리게. 다정하게 웃으며 녹영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이 다 저릿했다. 깃털로 살살 긁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한녹영이 홀로 투덜댔다. 하여간 방심한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재주는 발군이라니까. 설마 고작 반나절 사이에 호칭이 한 단계 더 간결해질 거라곤 생각도 못한 탓에 당혹스러웠다. 녹영아, 라니······. 어째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간질거리고, 더 못 견디겠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대답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홀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한녹영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준일이 대답을 강요했다. 한녹영이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강준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늘 자신만만했던 강준일의 눈빛이 긴장감으로 살짝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좋아요. 같이 살아요, 대표님.”

한녹영이 웃으며 말했다. 마침 차가 신호에 걸리자 강준일이 몸을 틀어 한녹영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소리가 났다.

“조만간 녹영이 네 어머니를 뵈러 가자.”

“네. 같이 가요. 어머니께 대표님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어머니 덕분으로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 너무 행복하다고 꼭 말해주고 싶으니까. 강준일이 “그래. 꼭 가자.”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강준일과 함께 나와 빌라로 돌아오니 이제 갓 깬 박상호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는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배를 긁다가 한녹영을 보고 아는 척을 해왔다.

“이제 왔냐?”

“형, 이 빌라 팔자. 댕장 부동산에 내놔.”

“뭐? 뭘 팔아?”

이건 또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아직 대출금도 다 못 갚은 빌라를 왜 팔아? 출연료 나머지 정산이랑 약속받은 러닝개런티를 지급받으면 당장 나머지 대출금 다 갚아서 온전히 본인 소유로 할 수 있는데?

“빌라 팔자고.”

아직 잠에서 덜 깨 제 말을 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강 대표랑 잘 놀다 들어와서 뜬금없이 뭔 소리야? 빌라 대출금을 갚겠다는 말이면 또 몰라. 이제 곧 한 번에 갚을 수 있잖아.”

“대표님 사는 빌라 아래층으로 이사 가자. 대표님이 매물로 나온 거 구입해서 현재 리모델링 중이래. 열흘 정도면 끝난다니까. 이사 가자.”

박상호가 눈을 깜박였다. 강준일이 사는 빌라 아래층으로 이사 가자고? 고작 15분 거리에 사는 것으로도 부족해 이젠 아예 아래위층으로 살며 마음껏 밀회를 즐기겠다는 심산이군. 강준일의 속셈이 곧바로 읽혔다. 그걸 위해 그 비싼 빌라를 턱하니 구입했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박상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다시 생각해 보니 이사가 번거롭긴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일수도 있었다. 괜히 한녹영이 강준일의 빌라를 들락거리다 빌미거리를 주느니 아예 한 빌라에 사는 편이 낫겠다. 한녹영과 강준일의 스캔들이 아예 묻혀버려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교도소에 있지만 평생 거기서 살진 않을 테니 출소한 한만식이 찾아와 예전처럼 소란을 피우는 것도 방지할 겸, 이사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그러자. 이따 부동산에 집 내놓을게.”

생각을 굳힌 박상호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빌라는 깨끗하게 쓴데다 한녹영이 살았던 집이라는 프리미엄도 있어서 손해보고 팔 것 같진 않았다.

“고마워, 형. 난 좀 잘게.”

한녹영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제 침실로 향했다.

“녹영이 너 이따 3시에 광고 미팅 있어! 알지?”

무조건 하기로 한 가구 회사 CF 미팅이 오늘 오후로 급하게 잡혔다. 가구 회사 입장에서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끄는 지금 서둘러 광고를 찍고 방송 앞뒤 시간대로 CF를 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야 효과가 더 극대화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광고 시간이 더 늘겠지만, 방송국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신입 드라마 국장과 김석형의 오랜 인연으로 수목 미니시리즈라는 황금 시간대 편성을 얻어낸 거라 김석형이 국장에게 굽실거렸지만, 이젠 입장이 완전히 바뀌어 국장이 김석형에게 굽실대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PPL도 별로 없고 광고도 거의 붙지 않았는데, 이젠 넘쳐나는 요청에 방송국 측에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어. 알아. 11시까지만 잘게. 이따 깨워줘.”

지난밤에도 또 열심히 몸을 겹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집요하게 저를 탐하는 강준일에게 짐승이라고 눈을 흘기면서도 끝까지 어울린 걸 보면 저도 지, 짐승인가 보았다. 한녹영이 홀로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었다. 빡빡한 스케줄로 체력이 많이 고갈되었을 텐데 절 욕심내는 강준일에게 거의 끝까지 맞장구쳐 준 걸 보면······ 공진단 효과가 있었나?

어쨌든 덕분에 잠이 부족해 강준일은 미팅이 오후니 그의 침대에서 느긋하게 자고 가라고 했지만 빨리 집을 내놓고 이사 준비를 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 출근하는 그와 함께 집을 나선 것이다. 한순간이나마 머뭇거린 것이 무색하게 하루라도 빨리 같이 살고 싶어서 조바심이 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강준일의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거다. 동거. 대표님이랑 같이 산다.’

한녹영은 콧노래를 흥얼대며 침대에 주섬주섬 누웠다. 고작 이틀 강준일과 함께 보냈을 뿐인데 마치 2년은 함께 있다가 혼자가 된 것처럼 옆이 허전했다. 한녹영은 베개를 끌어와 다리 사이에 끼웠다. 그리곤 팬이 보내준 쿠션은 품에 안은 후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처음에는 홀로 누운 침대가 허전해 잠시 뒤척거렸지만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떠보니 10시 반이었다. 얼추 일어날 시간이긴 했지만 애초 예정보다 30분이나 일찍 강제 기상하게 된 것이 분해 한숨을 푹 내쉬며 휴대전화를 집으려는 순간 전화가 뚝 끊어졌다.

‘누구야?’

짜증을 내며 액정을 보니 송정빈이었다. 한녹영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정빈 선배가 웬일이지? 연락처를 주고 받긴 했어도 아직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매일이라 해도 좋을 만큼 얼굴을 봤으니까.

그냥 안부전화인가? 어쨌든 선배의 전화를 감히 무시할 순 없어서 통화 버튼을 누른 후 늘어지게 하품했다.

ㅡ 녹영이냐?!

“네, 선배. 자느라 전화를 바로 못 받았어요. 무슨 일이세요?”

ㅡ 얼른 잠깨서 인터넷 켜봐!!

송정빈의 목소리가 급박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딱 알겠다. 아, 또 무슨 일 터졌구나. 한녹영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별반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제 저에 관한 스캔들은 터질 일이 없으니까.

“무슨 일인데요?”

거실로 나오니 박상호 또한 태블릿에 얼굴을 박고 뭔가를 열심히 정독 중이었다. 그는 한녹영이 나오는 소리에 시선을 들더니 이리 와보라는 듯 손짓했다. 한녹영이 박상호에게로 다가가 상체를 숙인 후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신인 배우 주민성의 충격적인 과거.’

주민성에 관한 기사였다.

ㅡ 주민성에 관한 기사 떴다. 알고 보니 주민성 그 자식 얼굴 전면 개조 공사에 개명까지 했더만.

“선배 저 지금 기사 찾아보고 있어요. 나중에 통화해요.”

ㅡ 어. 끊자.

서둘러 전화를 끊은 한녹영이 박상호의 손에서 태블릿을 뺏다시피 가져왔다. 그리곤 기사를 클릭하고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은주 작가의 달콤한 그대 주연으로 활약 중인 신인 배우 주민성의 충격적인 과거가 드러났다. 본 기자의 조사 결과 미국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 배우라는 이미지로 출발한 주민성이 과거 동급생들을 성추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사를 빠르게 읽어 내린 한녹영이 시선을 들었다. 얼마 전 용팔이에게 주민성에 관한 뒷조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박지한에게 자료를 보내기 전 먼저 제게 보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한 후 받아본 결과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멀쩡하게 정상인으로 살다 느닷없이 미쳐서 장한경을 강간했을 것 같진 않았다. 주민성의 인성이나 성격으로 보아 이전에도 동급생들을 꽤 괴롭혔을 것 같았는데, 예상대로였다. 강간은 장한경이 처음이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만만해 보이는 동급생을 찍어 성기를 빨게 하거나, 유사 성행위를 하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휘둘렀다고 되어 있었다. 참다못한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돈으로 해결한 후 전학해서 또 같은 짓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머리가 굵어지고 성욕도 커지니 펠라나 유사 성행위 같은 걸로는 만족이 되지 않자 장한경을 강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한녹영의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약까지 하는 것 같다는 내용이 덧붙여 있었다. 동급생 성추행에 마약이라니. 주민성은 생각보다 더 쓰레기였다.

한녹영은 용팔이에게 장한경에 대한 부분을 빼고 박지한에게 보내라고 부탁했고, 정의의 편인 용팔은 기꺼이 한녹영의 말을 들어주었다. 물론 정의보다 좋아하는 돈 또한 두둑하게 찔러주었지만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인데, 바로 터뜨리지 않고 잠잠해서 ‘박지한 선배가 개과천선이라도 한 건가? 선배가 끝까지 주민성의 과거를 함구하고 있으면 내가 직접 손을 써야 하나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차였는데 오늘 떡하니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예전에 저를 앞세워 장한경을 자살로 몰고 간 것처럼 이번엔 제가 박지한을 앞세워 주민성에게 타격을 주고 싶었다. 그냥 주민성의 정체를 끝까지 숨길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주민성의 과거가 드러나면 장한경이 또 한동안 괴로울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하영택과 장현재 등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주민성 같은 부류는 절대 반성하는 법이 없다는 거였다. 한녹영의 협박에 잠시 조용할 뿐 방심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뒤통수를 치게 되어 있었다. 안전하려면 아예 뿌리는 뽑아야 한다는 걸 하영택과 장현재로부터 배웠다.

“나 참 중학생 때부터 동급생한테 제 놈 더러운 성기를 빨게 했단다. 완전히 미친 놈 아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발랑 가져가지고······. 이 새끼는 배우 인생 쫑이야. 배우 인생만 쫑이겠어? 사회적으로도 매장이야. 한경이 왕따 시켰다더니 꼴좋다.”

박상호가 코웃음을 쳤다. 박상호는 철썩같이 왕따 당했다고만 믿고 있었다. 이럴 땐 그의 단순함이 참 고맙다.

“응. 꼴좋네.”

“밥이나 먹자. 밥 먹고 일찍 나가서 사무실 들렀다가 미팅하러 가면 되겠다.”

박상호가 후련하게 몸을 일으키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는 불과 30분 만에 뚝딱뚝딱 음식을 차려냈다. 김치찌개와 콩나물 무침, 계란말이, 김치와 장아찌 등이었다.

“아, 사무실 가기 전에 부동산에도 들러야겠다.”

“응. 그러지 뭐. 그리고 집에 사인지 있지?”

“찾아보면 있을 거야. 왜?”

“관리인 아저씨가 사인 좀 해달라고 부탁해서.”

“웬일이래. 1년을 봐왔어도 사인의 사, 자도 꺼내지 않던 양반이.”

박상호도 놀라워했다. 한녹영이 김치찌개에서 두부를 건져먹으며 웃었다.

“그만큼 내가 떴다는 뜻인 거지.”

“네가 뜬 거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보통 신생 기획사는 기를 못 펴기 마련인데, 네 덕분에 난 어딜 가든 어깨 쫙 펴고 다닌다. 너 찾는 전화로 사무실 전화기가 쉴 틈이 없다니까.”

박상호가 아주 뿌듯한 얼굴로 흐흐, 하고 웃었다. 과한 칭찬에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해 누나 제주도 갔는데 나 메이크업은 누가 해줘?”

“경아가 해줄 거야.”

경아는 새로 들어온 코디로 현재 장한경의 담당이었다. 정지해의 후배라는데 한울에 들어오기 전에는 아이돌 가수팀 스테프로 있었다고 들었다. 정지해가 특별히 뽑아온 만큼 실력이 괜찮았다.

“응. 알았어.”

한녹영이 밥을 크게 푹 퍼서 먹었다. 요새는 밥투정 안하고 뭐든 잘 먹는 한녹영이 기특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던 박상호가 말했다.

“네 스태프 충원해야지. 지해 혼자로는 힘들잖아. 그리고 네 메인매니저도 뽑을 생각이고.”

한녹영이 고개를 들었다. 메인매니저라니?

“형은.”

“나도 당연히 너 따라다닐 생각이야. 근데 회사가 커지고 일이 많아지면 너 따라다닐 수 없는 날도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너 정도 스타면 매니저가 3명은 붙어야지. 강 대표 덕분에 경호원은 따로 안 뽑아도 될 것 같고.”

“난 형이랑 같이 다니는 게 좋은데.”

데뷔한 순간부터 박상호와 함께 다녔다. 그래서 그에게 기획사 대표를 하라며 등을 떠밀면서도 그가 제 옆에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다. 한 회사의 대표면 일이 많을 테니 예전처럼 제 뒤만 졸졸 쫓아다닐 수 없을 텐데, 그걸 왜 생각 못했지. 벌써부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시무룩해진 한녹영을 보며 박상호가 웃었다.

“뭘 벌써 그런 표정이야. 늙은 형님 마음 뭉클해지게. 아직은 내가 지금까지와 똑같이 바짝 붙어 다니면서 너 케어할 거야. 네가 내 회사 간판이니까. 내 말은 나중을 대비해서 한 명 더 뽑는다는 거지.”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수 형 메인매니저로 하고, 로드를 새로 뽑아.”

“그게 낫겠다. 한수도 너랑 같이 일한지 2년이 훌쩍 넘었으니 제 밑으로 막내 한 명 둘 짬이긴 하지. 오늘까지 쉬라고 했으니 내일 나오면 얘기해줘야겠다. 자식 엄청 좋아할 거야.”

한녹영이 피식 웃으며 식사를 마쳤다. 박상호가 찾아준 사인지에 사인을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왔다. 관리실에 들러 사인지를 건네주자 관리인이 “고맙습니다, 한녹영씨.” 하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해왔다. 곧 이사 갈지도 모른다고 하자 서운해 하는 모습도 보였다.

“녹영아!”

박상호가 재촉하듯 한녹영을 불렀다. 그제야 한녹영은 관리인에게서 벗어나 박상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좌석에 올라타자마자 송정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중에 통화하자는 말로 끊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ㅡ 기사는 다 봤냐?

송정빈이 다짜고짜 물었다.

“네. 과거에 몹쓸 짓 꽤나 하고 다녔던데요.”

ㅡ 그거 지한이 놈이 터뜨린 거라더라.

“진짜요?”

다 알면서 시침을 뚝 뗐다.

ㅡ 어. 지한이 자식이 기자 한 명한테 찔렀대. 저쪽 팀 완전 난리난 모양이더라. 아무리 망한 드라마라고 해도 그렇지 한창 방영 도중에 주연 배우의 추문이 떴으니 나 참. 조기종영은 확정인데, 과연 주민성으로 끝까지 찍을 수 있을지 의문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ㅡ 그 자식 약도 한 모양이던데. 그것도 지한이 놈이 경찰에 찌른 것 같아.

“그래요?”

이번에도 한녹영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녹영의 반응에 만족한 송정빈이 신나서 말했다.

ㅡ 어. 주민성 마약 소지 및 복용으로 조사 들어간다고 속보 떴더라. 뉴스 한 번 봐. 조사받으러 가는 모습 나올 거야.

“알았어요.”

ㅡ 우린 종방연 때 보자.

“네.”

전화를 끊은 후 주민성 뉴스 영상을 찾아봤는데, 송정빈 말대로 주민성이 매니저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서로 조사받으러 가는 장면이 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서로 몰려온 사람들이 주민성에게 오물을 투척했다. 경호원들이 최대한 막아봤지만 사방에서 던지는 모든 오물을 다 막을 순 없어 계란이며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들이 주민성의 얼굴과 몸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분한 건지, 수치스러운 건지 꽉 쥐고 있는 주민성의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한녹영은 무심한 눈길로 영상을 끝까지 보았다. 동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일지 않았다.

“주민성 놈이 마약 복용도 한거야?”

운전 중이라 영상은 못 보고 소리만 들은 박상호가 물어왔다.

“응. 복용 및 소지죄로 조사 받으러 간 모양이야.”

“나 참, 세상 무서운 걸 모르는 놈이네.”

“그러게 말이야. 세상이 다 자기 뜻대로 될 줄 알았던 모양이지. 세상이 주민성에 대해 다 알게 되었으니 주민성에게 당한 사람들에게 조금쯤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렇겠지. 피해자는 고통 받는데 가해자는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을 받을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나마 죄가 드러나고 있으니 조금쯤은 후련하지 않을까 싶다.”

“응. 그랬으면 좋겠다.”

한녹영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사무실에 도착해 주차한 후 안으로 들어가자 다 같이 모여 뉴스를 시청 중인 직원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 장한경과 그의 코디 경아도 있었다.

“녹영 선배!”

장한경이 제일 먼저 한녹영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한녹영이 강아지처럼 달려 오는 그를 향해 웃었다.

“네 눈에 난 안 보이냐?”

박상호가 툴툴대자 장한경이 멋쩍게 웃었다.

“형의 그 덩치가 안 보일 리 있겠어. 단지 내가 더 반가운 거겠지.”

한녹영의 말에 박상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럴 때보면 네가 제일 얄미워. 한녹영은 한녹영이구나 싶고. 하긴 한녹영이 어디 가겠냐. 한녹영은 한녹영이지. 근데 일들은 안하고 다 같이 모여서 뭐하고 있었어?”

“주민성에 관한 뉴스 보고 있었어요. 사실 예능에 나오는 거 보고 쫌 반했었는데, 너무 실망이에요.”

“맞아. 나도 좀 좋게 보고 있었는데 갈수록 행보가 실망이다 싶어 접었거든. 근데 진작 접길 잘했지. 완전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였잖아. 이런 놈은 이번 참에 아예 매장을 시켜야 해. 그런 짓 해놓고 연예인 하겠다고 뻔뻔히 데뷔까지 하다니.”

“찔리는 것이 있으니까 얼굴 완전히 뜯어고치고, 개명까지 한 거잖아요. 예전 사진 봤는데 이건 뭐 성형 수준이 아니던데요. 완전히 새로 태어난 수준이에요. 피해자들은 숨죽이며 살았을 텐데 가해자가 저렇게 뻔뻔하게 잘 살고 있었다니 말이 안 되지 않아요?!”

“지금 인터넷이 난리야. 쓰레기다. 양아치다. 저딴 놈은 거시기를 잘라야 한다. 집이 부자라던데 돈 써서 나오기만 해봐라, 등등. 본명 뜨니까 벌써 네티즌 수사대 조사 들어가서 주민성 부모 얼굴부터 직업까지 쫙 뜨고 있어. 주민성이 조사받으러간 경찰서 민원실이랑 인터넷 게시판, 신문고 등에도 강력 처벌해야 한다는 청원이 줄을 잇고 있는 모양이더라. 이 정도면 암만 주민성 집안이 빵빵해도 무혐의 못 받아.”

경아와 직원들이 주민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없었다. 한녹영은 장한경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시선을 느낀 건지 장한경이 한녹영을 돌아보았고, 눈길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다. 그리곤 사무실 구석으로 향하며 한녹영을 향해 조심스레 손짓했다. 한녹영이 장한경에게 다가갔다.

“선배가 주민성 사진보고 되게 놀라더라고 누나가 말해줬는데, 혹시 알고 있었어요?”

“주민성 예전 사진을 우연히 본 적이 있거든. 내가 한울에 있었을 때에.”

역시, 하며 장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나에 대한 얘기가 올라오다 순식간에 사라진 것도 선배가 한 일이에요?”

한녹영의 동공이 커졌다. 장한경이 짐작하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표정 변화를 본 장한경이 “역시 선배가 한 일이 맞네요.” 하며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아무리 큰 스캔들이 터졌다고 해도 나에 대한 말이 아예 싹 사라진 것도 좀 이상했고요, 선배가 주형호 새끼 사진보고 많이 놀라더라는 누나 말도 마음에 걸렸고요, 매니저님이 녹영 선배가 주민성 찾아갔었다는 얘기를 해주시기도 했고요. 선배가 주민성 해결했으니 맘 놔라는 말 듣고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요. 오늘 기사 뜬 거 보고 이해했어요.”

한녹영이 박상호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박상호의 입단속을 시키는 걸 깜박했다.

“혹시 내가 월권해서 네 일에 간섭했다고 생각해 서운한 건······.”

장한경이 서둘러 한녹영의 말을 잘랐다.

“아니요! 절대요!”

“그럼 다행이고.”

“고마워요, 선배. 아니 녹영이 혀, 형.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형이 허락도 해줬는데, 이상하게 쑥스러워서 형이란 호칭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근데 이젠 정말 형이라고 부를래요. 그리고 진짜 고마워요. 형이 나 생각해서 한 일이란 거 다 알고요, 주민성이 저렇게 돼서 좋아요. 다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씩 울화가 치밀었는데, 이제 적어도 지금까지처럼 뻔뻔하게 세상에 얼굴 내놓고 살지 못할 거 아니에요. 혹시 주형호랑 마주치면 누나가 몹쓸 짓 할까봐 걱정이었는데, 이젠 그 점도 안심되고요. 내가 데뷔하기 전이었으면 아마 누나가 칼 들고 주민성 쫓아갔을 텐데, 이젠 내 배우 인생 생각해서라도 누나도 분한 마음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내 일로 인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처벌을 받을 테니 누나한테 위로도 될 거고, 저도 기분 나쁘지 않네요.”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을 당한 터라 저에게 한 짓으로 인해 벌을 받는 건 싫었다. 그럼 저도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처음 일을 당했을 땐 어떡해서든 처벌받게 하고 싶었지만, 이젠 제게도 제 인생이 있으니까. 꿈에도 그리던 배우가 되었는데 과거에 발목 잡히긴 싫었다. 그렇다고 그 자식이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싫었는데 이렇게나마 추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니 좋다.

“진짜 고마워요. 형.”

얼굴이 완벽하게 변해 사진을 보고도 몰라봤는데, 한녹영 덕분에 주형호 아니 주민성의 과거가 드러나서 너무 고마웠다. 배우가 될 수 있도록 기회도 줬고, 제 분함도 갚아주었고. 장한경에게 한녹영은 정말 고맙고 또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한녹영은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눈으로 절 보는 장한경을 향해 “위로가 되었다니 다행이다. 이젠 넌 네 인생 열심히 살면 돼.” 하고 말해준 후 돌아섰다. 뒤에서 장한경이 “네! 녹영이 형! 저 정말 열심히 살게요!” 하고 외쳤다.

“저 녀석 뭐래는 거야?”

박상호가 의아하게 물어왔다. 한녹영이 글쎄, 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 이제 메이크업해야 하지 않아?”

오늘은 단순한 미팅일 뿐이지만 어쨌든 광고 담당자를 만나러 가는데 지나치게 내추럴한 모습으로 갈 순 없었다.

“어. 시작해야지. 경아야! 녹영이 메이크업!”

박상호가  큰 소리로 부르자 여전히 주민성을 욕하고 있던 경아가 “네. 지금 가요!” 하고 말한 후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다가왔다.

가구 CF에 관한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미팅을 가니 이미 컨셉이 나와 있었고, 콘티를 보니 괜찮아서 바로 승낙한 후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리고 사흘 후 곧바로 광고 촬영에 들어갔다. 우선 방송용 CF를 촬영했고, 오늘은 입간판이랑 포스트를 위한 사진 촬영을 하러 스튜디오로 가는 중이었다.

“너 깐 B가구, 주민성 사진 다 내렸다.”

지나는 길에 한녹영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한 B가구 회사 대리점이 보여 봤더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득 붙어있던 주민성 사진이 싹 치워진 상태였다. 고약한 심보가 올라오며 ‘흥, 날 까더니 꼴좋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주민성한테도 손배 소송 한대?”

“어. 이미 청구 들어갔고, 한울에서도 전속 계약 위반으로 소송한다더라. 장현재가 없으니 주민성을 지켜줄 울타리가 사라진 거잖아. 당연히 한울에서도 소송 들어가야지.”

주민성은 미국에 있던 시절 알던 친구의 부탁으로

마약을 소지하고 있었을 뿐이라며 우겼지만, 검사 결과 복용 사실 또한 확인되었다. 아직 판결 전이지만 최대 5년까지 형량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현재 온 국민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판결을 주시하는 중이라 암만 뇌물을 쓴다 해도 가벼운 형량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거기다 엄청난 손해보상 소송까지. 주민성의 첫 CF인 자동차 회사부터 가구 회사, 그리고 한울과 달콤한 그대 제작사 쪽에서도 손해 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라던데 그 규모가 무려 200억대였다. 특히 자동차 회사에서 이를 갈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주민성의 집안이 아무리 부자여도 그거 다 물어주고 나면 파산 경이겠다.

달콤한 그대는 조기종영이 확정되었고, 주민성으로 계속 갈 수 없어 피치 못하게 주연 배우를 바꾸어 촬영 중이었다. 그런데도 연일 시청자게시판에 주민성에 관한 욕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자업자득이지 뭐. 싸늘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한녹영의 입매로 미소가 번졌다.

“저에요.”

ㅡ 스튜디오 촬영가는 중인가?

한녹영의 스케줄을 꿰고 있는 강준일의 물음에 웃음이 나왔다.

“네. 한 20분 있으면 도착할 거예요.”

ㅡ 오늘은 스튜디오 촬영만 하면 끝이지?

“네. 늦어도 5시 전에는 끝날 거예요.”

시간을 가늠해 보니 아무리 늦어도 5시에는 끝날 것 같았다. 컨디션이 안 좋아 사진이 안 나온다면 지연되겠지만 오늘 한녹영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ㅡ 그럼 같이 저녁 먹지.

“네.”

밴 안에 정지해도 있고, 장한수도 있으며, 새로 뽑은 로드 매니저도 있어서 최대한 간단히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입가에 가득 맺힌 웃음을 본 박상호가

고개를 흔들더니 자그맣게 속삭여왔다.

“매일 보면서 그렇게 좋냐?”

한녹영은 당연하지, 하고 역시 자그맣게 대답한 후 아침에 박상호가 ‘나쁘지 않은 기획안이 왔는데 한 번 봐봐.’ 하고 던져준 봉투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시놉시스와 2회까지의 대본이었다. 제목을 보니 뭔지 알겠다. 하반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시청률을 내는 드라마인데 썩 끌리진 않았다. 한녹영이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야?”

“응. 안 내켜.”

“네가 안 내킨다면 할 수 없고. 한경이는 어제 송지현 작가 드라마 출연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래? 잘 됐네.”

“어. 출연료도 올랐어.”

흐뭇해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소속 배우가 성장해가는 모습은 봐도 봐도 흐뭇하다. 그런 박상호의 표정을 읽은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전에는 장한경을 기특해하는 박상호의 얼굴이 그렇게 보기 싫더니 지금은 아니었다. 한녹영의 마음 또한 박상호와 같았다. 왠지 어린 동생이 자박자박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도착했다. 내리자.”

차가 오늘 촬영을 진행하기로 한 스튜디오 앞에 섰다. 한녹영이 내렸다.

퍽 소리와 함께 점막을 찢어발길 듯 들어온 성기가 몸 속 깊이 푹 박혔다. 동시에 뜨끈한 것이 안에 뿌려졌다. 누워서 다리를 한껏 벌린 자세로 강준일을 받아들이고 있던 한녹영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맞대고 있는 가슴이 땀에 젖어 미끌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달아오른 체온 탓에 더웠다. 신음성을 질러댄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바싹 마른 입술이 수분을 요구하고 있었다.

“목말라요.”

바싹 마른 드라이플라워가 된 기분이었다. 한녹영의 투정에 짧게 웃은 강준일이 몸을 뺐다. 사정 후 크기가 줄어들었어도 어지간한 남자의 발기 사이즈 정도는 되는 굵은 것이 빠지자 몸이 움찔 했다.

“잠깐 기다려.”

강준일은 그 상태로 바깥으로 나가더니 생수를 들고 돌아왔다. 나른해져 축 늘어져 있던 한녹영이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물을 마시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강준일이 의아하게 보았다.

“왜 한숨이야?”

“매번 유혹에 간단히 넘어가버리니 대표님한테 짐승이라고 욕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늘도 이른 퇴근을 한 강준일은 먼저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한녹영의 손을 잡고 곧장 침실로 직행했다. 한녹영은 말로만 ‘저녁 먹자면서요.’ 하고 투정을 부렸을 뿐 ‘이쪽이 더 급해서.’ 하는 강준일에게 적극적으로 응했던 것이다.

“난 네가 짐승이라서 좋은데.”

제 욕망에 맞춰주려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땀에 젖은 한녹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하는 말에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대표님 때문에 진짜 엄청 밝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거든요.”

한녹영이 투정조로 말했다. 정말 요즘의 저는 밝히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이건 다 대표님 때문이에요, 하듯 새치름하게 보자 강준일이 웃었다.

“더 밝혀도 좋아.”

“여기서 더 밝혀다간 병원에 실려 가게 생겼어요.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 진짜 너무 밝히는 것 같지 않아요?”

변강쇠들도 아닌데 매일 섹스는 좀 심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녹영이 네가 그간 날 외롭게 내버려둔 탓이야.”

“제 탓이라고요? 대표님 성욕이 센 탓은 아니고요?”

“담백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밝히는 편은 아니었는데 녹영이 너와 함께라면 일주일 내내 뒹굴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그러다 저 죽어요.”

으스스 겁먹은 얼굴로 앓는 소리를 하자 강준일이 가볍게 웃었다.

“씻고 저녁 먹자. 욕조에 물 받아두고 올 테니 잠깐 기다려.”

한녹영은 욕실로 향하는 강준일의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가 꼭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마르다니 물 가져다줘, 몸을 씻기 전 욕조에 물 받아줘······. 마음이 행복해서 노래가 절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침대에서 내려오다 다리가 휘청 꺾였다. 쿵, 무릎이 바닥을 찧는 소리에 강준일이 달려 나왔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한 한녹영을 보고 놀라 다가왔다.

“다리가 꺾여서······.”

한녹영이 머쓱하게 웃었다. 거의 매일 섹스한 후유증인 것 같았다. 사실 오늘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할 때부터 허리가 나른하고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니. 앞으로는 좀 조절하면서 해야 할 것 같았다.

쯧 혀를 찬 강준일이 한녹영을 번쩍 안았다. 공주님 안기를 당하자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이 자세 너무 민망해요.”

남자인데 번쩍 들렸다는 사실도 민망하고, 정액이 묻어 번들대는 제 중심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자세인 것도 민망했다. 한녹영이 한 손으로 제 중심을 슬쩍 가리자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이미 다 봤는데 이제와 가려서 뭐 해.”

보기만 했다 뿐인가. 만지고, 빨고, 비비고, 오만 짓을 다 했다.

“그래도요, 민망한 건 민망한 거거든요!”

발끈해서 소리를 지른 것도 잠시.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그자 절로 좋다,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녹영을 먼저 욕조에 넣은 강준일도 안으로 들어왔다. 한녹영의 뒤로 들어와 다리를 벌려 그 사이에 한녹영이 들어오도록 했다. 한녹영은 나른한 숨을 내쉬며 강준일의 가슴에 등을 푹 기대었다.

“우리 섹스 횟수를 좀 조절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매일 이렇게 하다간 진이 빠져서 걷지도 못하겠어요.”

“내일부터는 좀 조절하지. 날 한 달이나 굶긴 탓에 해도 해도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좀 과하게 덤벼든 감은 있거든.”

“한동안은 심하게 바쁘지 않을 거니까 대표님 크게 굶길 일 없을 거에요.”

그때 강준일이 못마땅한 점이 있는 사람처럼 한녹영의 어깨에 이를 박았다. 순간 따끔했다.

“언제까지 대표님이라고 부를 거야?”

아······ 호칭이 마음에 안 든 거구나. 강준일의 가슴에 푹 기대고 있던 몸을 살짝 세운 한녹영이 욕조 안을 내려다보았다. 제 하얀 다리와 강준일의 갈색 다리가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 왠지 야했다.

“호칭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언제까지 부하 직원 마냥 대표님, 할 수는 없다고 생각은 했다. 관계가 달라졌으니 호칭도 달라져야 하는 건 당연한데.

“근데?”

“계속 대표님이라고 불러와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주, 준일씨?”

으악, 준일씨라니. 생각만 해도 어색하다. 홀로 속으로 강준일을 향해 ‘준일씨.’ 하고 불러본 한녹영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색해. 이상해. 준일씨는 아닌 것 같아. 여전히 거리감도 느껴지고.

“자기라고 불러도 좋고.”

자기? 귓불을 핥으며 한 말에 한녹영이 자그맣게 웃었다. 자기야, 라니 너무 간질거라는 호칭이잖아.

“형이라고 부를까요?”

역시 형이라고 부르는 편이 제일 무난할 것 같았다.

“난 형제하고는 섹스 안 하는데.”

마음에 안 드나보다.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건 암만 봐도 자기야, 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 하는 강준일의 수가 분명했다.

“그럼 그냥 하던 대로 대표님이라고 부를게요. 전 역시 대표님이라고 하는 편이 제일 편하고 좋거든요.”

“형으로 하지.”

마지못해 대답하는 목소리에 한녹영이 소리죽여 웃었다. 역시 자기야, 라는 호칭이 듣고 싶었던 수작이 맞았구나!

“네. 준일이 혀, 형. 나중에 내키면 자기야, 라고 불러줄게요.”

새침하게 말한 한녹영이 강준일의 가슴으로 도로 등을 기대었다.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내킬까?”

“음. 한 십 년쯤 후에도 지금과 똑같이 날 사랑해주고 있으면요.”

“십 년 후에는 지금과 같지 않을 텐데.”

뭐?! 그럼 십 년 후에는 지금보다 덜 사랑하고 있을 거란 소리야? 발끈해서 몸을 떼려는 한녹영의 허리를 잡아 얽매듯 안은 강준일이 속삭였다.

“지금보다 더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난 또. 한녹영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렸다.

“저, 저도요.”

나른한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마음이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저 조만간 중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중국 쪽에서 CF 요청이 들어왔거든요. 간 김에 몇 편 찍고 오려고요.”

회를 거듭할수록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중국에서 CF 러브콜이 쇄도했다. 드라마 출연 요청도 간간히 들어왔지만 그건 무조건 거절했고, CF는 괜찮은 걸로 골라 3편정도 찍고 올 생각이었다. 박상호도 한녹영의 생각과 같아서 조만간 중국 쪽과 협의해 일주일가량 다녀올 예정이다. 짐작했다는 듯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에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으니 조만간 다녀올 거라 예상했지. 녹영아, 내일 이사 들어오는 건 어때?”

강준일이 말한 리모델링 끝나려면 아직 며칠 남았다. 한녹영이 몸을 일으켜 반대로 앉았다. 즉 마주보는 자세가 된 것이다.

“내일이요? 아직 리모델링 안 끝난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사 업체와의 계약도 며칠 후로 잡아뒀다. 박상호는 지금 사는 빌라 매매 계약이나 되거든 이사 갈 것이지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것도 아니고, 야반도주하는 것도 아닌데 뭘 이렇게 서두르는 거냐고 툴툴댔지만 한녹영의 뜻에 따라 부랴부랴 이사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빌라는 아직 나가지 않았지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제가 있는 동안 집을 보러 오는 것이 부담스러워 이사 나가고 난 후에 빈집을 보여주기로 했다.

“마음이 급해서 자꾸 재촉했더니 오늘 끝났다고 연락이 왔더군. 낮에 한성준이 확인해봤는데 아주 깔끔하게 끝낸 상태라 당장 이사들어와도 무리가 없겠다고 했거든. 사실 네가 거주하게 될 집은 여기니까 별로 상관없긴 하지만.”

“아래층도 여기랑 크기가 같죠?”

“같은 사이즈지.”

“넓은 집에서 상호 형 혼자 지내려면 외롭겠네요.”

“남자라면 혼자 지낼 줄도 알아야지.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내일 아침 사람들 보내서 짐 실어오도록 하지.”

역시 재벌의 행동력은 놀라웠다. 내일 제 스케줄이 없는 날이라 이삿날로 잡아도 무리가 없긴 한데······. 자다 날벼락을 맞을 박상호가 걱정이었다. 얼마나 황당해할까. 기껏 계약한 업체와 계약 취소도 해야 할 테고. 그의 당황하는 표정을 상상해보니 웃음이 나왔다.

“네 짐 중 꼭 챙겨야 할 것이 있다면 말해. 곧장 여기로 나르도록 할 테니까.”

“당장 꼭 챙겨야 하는 건 옷밖에 없는데······ 일단 아래층에 가져다두면 제가 조금씩 날라도 돼요.”

“침실 드레스룸 절반 비워뒀으니 네 옷들 넣도록 하고.”

“정말로요? 언제요?”

“오늘 오전에 사람 시켜서 비워뒀어. 안 들어가 봤나?”

고개를 끄덕인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6시쯤 도착했지만 겉옷을 대충 소파에 던져둔 후 물을 마시는 사이 강준일이 도착했고, 곧장 침대로 끌려간 터라 드레스룸을 살필 새가 없었다.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가운을 걸친 상태로 드레스룸으로 가보니 과연 평소보다 비어 휑했다. 그의 옷도 많은 편이라 무척 큰 드레스룸이 거의 꽉 차있다시피 했는데 말이다. 저를 위해 비어있는 공간을 보니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 한다. 이제 정말 같이 사는구나, 하는 현실감이 확 와 닿았다고 할까.

“너무 많이 비운 거 아니에요? 나머지 옷은 어떻게 했어요?”

“비어있던 방 중 하나를 세컨 드레스룸으로 만들었어. 너도 당장 입을 옷은 여기에 두고, 나머지는 세컨 룸에 두면 돼.”

“네. 그렇게 할게요.”

“아래층 리모델링하면서 방 하나를 네 연기 연습실로 만들어뒀으니 연기 연습 할 때는 아래로 내려가고.”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정말 내 전용 연습실을 만들어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뭐 하러 리모델링 공사를 굳이 했겠어. 방음에 특히 신경 쓰라고 했으니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도 괜찮아. 단, 나와 함께 있을 때는 아래층 내려가는 일 금지야.”

강준일이 부드럽게 웃으며 한녹영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아래층에 한녹영 전용 연습실을 만들어라, 는 지시를 내리자 한성준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돈이 참으로 썩어나십시다.’ 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넘쳐나는 돈 애인을 위해서 쓰겠다는데 뭐 어떤가.

“연습은 아무데서나 해도 되는데.”

“하지만 연습실이 있다면 더 좋지 않나?”

“솔직히 그렇긴 해요.”

한녹영의 대답에 강준일이 짧게 웃었다.

“그럼 식사할까? 곧 도시락 배달 올 시간이야.”

“네?”

그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초인종이 울렸다. 한녹영을 방안에 세워둔 강준일이 현관으로 향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도시락 배달 왔습니다, 대표님!” 하는 한성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퇴근 시간 이후 도시락 심부름을 하게 되어 잔뜩 골이 난 음성이었다. 한성준이 골을 내거나 말거나 강준일은 “내일 보지.” 하며 실내로 들이지도 않고 쫓아냈다.

한녹영이 거실로 나오자 양손에 도시락 가방을 한 개씩 들고 있는 강준일이 보였다. 그는 곧장 부엌으로 향하더니 식탁 위에 도시락을 풀었다. 스테이크 도시락이었다.

“라미르에서 포장해오도록 했으니 오는 동안 식었다 해도 그럭저럭 먹을 만 할 거야.”

“라미르에서 도시락 포장도 해줘요?”

“특별히 부탁했지. 전에 네가 라미르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서 말이야.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함께 한 첫 식사라 기억에 남기도 했고.”

“직접 가서 먹으면 되잖아요.”

거긴 룸이 있어서 괜찮은데. 강준일이 접시를 가져와 도시락 용기 안의 스테이크를 옮겨주었다.

“그럴까 했는데 아래쪽 허기를 먼저 채우고 싶었거든. 그래서 한 실장에게 이 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가져오도록 지시해뒀지. 지금이면 딱 샤워까지 끝냈을 시간이니까.”

한녹영의 입이 벌어졌다. 뭐 이런 치밀한 남자가 다 있지. 어이없어 하는 한녹영을 향해 웃은 강준일이 “썰어줄까?” 하고 말해왔다.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먹기 좋은 크기로 스테이크를 썰고 접시를 가까이 밀어주었다. 포크로 잘 썰린 스테이크 한 조각을 쿡 찍어 먹어보니 맛있다. 당연히 레스토랑에 직접 가서 먹는 맛은 안 나지만, 약간 식은 상태인데도 질김 없이 잘 씹혔다.

“라미르에서요, 대표님이 그랬잖아요.”

“또 대표님!”

습관처럼 무심코 대표님이라고 부르자 강준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녹영이 민망하게 웃으며 재빨리 호칭을 정정했다.

“혀, 형이 그랬잖아요.”

“무슨 말을 했는데?”

“연인은 보고만 있어도 아까울 만큼 소중한 존재니까 절대 못되게 안 굴고 예쁘고 다정한 말만 할 거라고요.”

이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강준일이 웃었다.

“기억나는군. 근데 그 말이 왜?”

“솔직히 저 말 들었을 때 대표······ 아니 형 애인 될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형의 애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부럽다,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형의 애인이 된 지금······.”

“지금?”

“행복해요.”

정말로 행복하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수줍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자그맣게 말하는 한녹영을 내내 웃는 얼굴로 보던 강준일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식탁 너머로 몸을 뻗어 한녹영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곤 말했다.

“나도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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