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7
“반응 장난 아니다! 시청자 게시판이며, 도망자 기사 댓글이며, 트위터며 재미있다고 난리도 아니야.”
촬영을 위해 파주로 가는 밴 안에서 박상호가 흥분을 이기지 못해 잔뜩 들뜬 어조로 말했다. 그의 코가 벌름벌름했다. 옆에서 정지해도 스마트폰에 시선을 박은 채 “진짜 반응 최고야. 재밌다, 긴장감 최고다, 다음 회가 기대된다 등등. 난리도 아니다. 나 어제 새벽에 결제해서 봤는데 진짜 재밌더라. 손에 막 땀을 쥐면서 봤다니까.” 하고 거들었다. 한참 첫 방송이 나갈 무렵에 도망자 팀은 촬영에 열중해 있었던 터라 한녹영도 녹초가 되어 돌아온 새벽에 결제해서 봤다. 쓰나미처럼 밀려온 엄청난 졸음이 한순간 싹 가셨을 정도로 드라마의 몰입도는 정말 최고였다.
‘전에 박지한 선배가 차도영을 연기했을 때보다 더 나았어.’
하녹영이 속으로 홀로 잘난 척을 해댔다. 하지만 주관적인 판단인지는 몰라도 진짜 전보다 나았다. 그때도 극찬을 받은 웰메이드 드라마였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한 1.5배 정도는 더 잘 빠진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완성도며 몰입도며,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완벽했다고 평가하면 점수가 너무 후한가.
“녹영이 네 연기력에 대한 칭찬도 엄청 많아.”
정지해가 엄지를 척 들어보였다. 한녹영이 응, 하고 대답하며 웃었다. 시간이 날 매마다 게시판이며 댓글이며 찾아보고 있는데 드라마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한녹영의 연기에 대한 칭찬이 제일 많았다.
‘한녹영이 이 정도였나?’ ‘비에 젖은 라인보고 심장 튀어나올 뻔.’ ‘돈 많은 한량 같은 형사 역할에도 잘 어울리네요.’ ‘한 가지 연기밖에 못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봤다, 한녹영.’ ‘한녹영 연기 끝장.’ ‘박지한이 밀려난 이유가 있었어.’
볼수록 흡족한 평가들뿐이었다. 이제 진짜 배우가 되어 가는지 외모보다 연기에 대한 칭찬이 더 뿌듯했다.
“첫 방 시청률이 27.5%면 진짜 대단한 거야. 신인 작가에 녹영이 널 빼면 엄청 대단한 스타도 거의 없는데 말이야.”
박지한 대신 제가 들어간 데다 LK 투자, 어쨌든 스캔들이 확 터지며 제 이름이 쉼없이 언론에 오르내린 탓에 첫방에 이전보다 시청자들을 더 끌어온 것이다. 예전에는 십 퍼센트 초반 시청률로 시작해 마지막 회 시청률이 30퍼센트 초반이었다. 뒤로 갈수록 더 재밌어지는데다 달콤한 그대가 기대와는 달리 망작이라 시청자들 대부분이 도망자로 넘어온 탓에 거의 2.5배가량 시청률이 뛰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려 25.7퍼센트로 시작했으니 시청률이 얼마나 수직상승할지 상상만으로도 좋아 심장이 막 날뛰는 기분이었다.
“뒤로 갈수록 시청률이 더 뛸 텐데, 막 40퍼센트 이렇게 나오면 어쩌지?”
한녹영의 말에 정지해가 피식 웃었다.
“남자가 소심하게 한 50퍼센트는 나와 줘야지! 어머, 이쪽 뺨에 살짝 뾰루지 올라오려고 한다. 잠깐만.”
한번으로는 부족해 한 번 더 돌려보느라 거의 잠을 못 잤더니 피부 상태가 영 안 좋았다. 밴에 탔을 때부터 한차례 잔소리를 퍼부었던 정지해가 발긋하게 올라오는 기미를 보이는 뾰루지를 발견하고 서둘러 가방에서 연고처럼 생긴 크림을 꺼냈다.
“초강력 재생크림인데, 요걸 트러블 부위에 듬뿍 올려주면 어지간하면 가라앉아. 이제 막 올라오려는 거라 요걸로 응급처지하면 해결되겠다.”
손가락에 크림을 듬뿍 짜서 한녹영의 뺨에 처덕처덕할 만큼 발랐다. 됐다, 하고 손을 떼는 그녀를 향해 한녹영이 고마워, 하고 웃었다.
“진짜 감이 좋다. 분위기가 진짜 심상치 않아. 50퍼센트는 오버일지 몰라도 40퍼센트 전후는 것 나올 것 같아. 내가 그간의 경험치 다 걸고 예언한다. 녹영아, 이제 됐다. 아직도 너 오해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건 말건 드라마 끝날 때쯤엔 넌 엄청난 빅스타가 되어있을 거다.”
박상호가 울음이라도 쏟을 듯한 얼굴로 한녹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무 오버하지는 말자. 괜히 설레발쳤다가 일이 잘못되면 어떡해? 또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고. 난 끝날 때까지 긴장 늦추지 않을래.”
속으로는 너무 좋고 혼자 막 잘난 척 하며 ‘50퍼센트? 60퍼센트도 가능하지 뭐! 역대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 시청률 기록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좋은 만큼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간 끊임 없이 일이 생겼지 않나. 마음을 놓을라치면 일이 터지고 이젠 됐겠지, 하고 생각하면 스캔들이 터졌다. 더군다나 지금은 저와 강준일의 스캔들이라는 대형폭탄을 가슴에 껴안고 있는 상황이라 너무 일찍 폭죽을 터뜨리며 신나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곁으로는.
“그래, 그래. 스타라면 겸손할 줄도 알아야지.”
아무래도 한동안 저렇게 실실 웃으며 다닐 것 같네. 무슨 말을 해도 박상호는 그저 좋아 죽으려고 했다. 주연인 송정빈보다 한녹영에 대한 기사가 더 많이 나오는 상황인데다 대부분이 연기력에 대한 칭찬이니 참으려 해도 웃음이 참아지지 않았다.
파주에 도착하자 스태프들도 좋아서 죽었다. 촬영장 안이 완전 들떠 여기저기서 히죽대는 웃음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김석형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가득이었고, 성공적으로 끝난 첫방 다음 날이라 촬영장에 찾아온 김현영 작가도 입을 귀에 걸고 있었다.
“한녹영씨! 시, 시청률 보셨어요? 기사 봤어요?!”
송정빈, 김석형과 함께 얘기 중이던 김현영이 한녹영을 발견하고 손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아이처럼 팔짝팔짝 뛸 듯 좋아하는 모습에 슬쩍 웃은 한녹영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네. 봤죠.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는데, 첫방 시청률이 잘 나와서 좋아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부 한녹영씨 덕분이에요.”
“제가 뭘요.”
“이 나쁜 자식! 감히 주인공인 나보다 지분을 훨씬 많이 차지하다니!!”
송정빈이 한녹영의 목에 팔을 감고 조이는 시늉을 하자 김현영이 “꺅! 녹영씨 다치면 어쩌려고요?!” 하며 송정빈의 등을 퍽퍽 쳤다.
“지분을 나보다 훨씬 많이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작가님 마음까지 홀라당 훔쳐갔네? 작가님, 나 서운해요. 이 자식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인데, 주인공을 소중히 해야죠!”
“죄송해요. 사심이 나와 버려서요.”
김현영이 솔직한 말로 사과하자 송정빈이 충격 받은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아시다시피 제게 치명적인 매력이 있잖아요. 일명 녹영파탈이라고 할까요?”
한녹영의 농담에 주변이 웃음바다로 변했다.
“한녹영씨 진짜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농담을 다하고. 첫 회 시청률 잘 빠진 덕분에 기분 좋게 오늘 촬영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방심은 금물인 거 다들 아시죠? 다음 주면 저쪽 드라마 첫 방 탑니다. 첫방이라 호기심에라도 보게 되어 있고, 잘 빠졌으면 시청자들 뺏길 수도 있으니 더 긴장해서 더더 열심히 합시다. 시청률 50퍼센트 찍어봅시다. 까짓 거.”
김석형이 큰소리로 말하며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다들 신나서 촬영 준비를 시작했고, 한녹영도 차도영으로 변신할 준비를 시작했다. 메이크업을 먼저 한 후 헤어와 의상까지 갖춰 입고 나왔을 때 장한경의 미니밴이 도착했다. 좀 늦은 편이었다. 서둘러 미니밴에서 구르듯이 내린 장한경이 “죄송합니다!” 하고 외치며 한녹영을 향해 달려왔다. 오는 동안 밴 안에서 했는지 어느 정도 메이크업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경이 너 지각이야!”
아직 촬영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가장 신인인 주제에 가장 늦게 도착했으니 야단을 들어 마땅했다. 박상호의 잔소리에 장한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드라마 계속 돌려 보고 돌려 보고 하느라 그만 늦잠 자서 늦었습니다.”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전에 제작발표회때 기사 난 것을 보고도 설레어하고 신기해하며 어쩔 줄 모르더니 이번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오히려 더 했겠지.
“오늘은 딱 한 번만 보고 자.”
박상호의 말에 장한경이 “어떻게 한 번만 봐요? 한 세 번은 보려고 작정했는데요.” 하며 울상을 지었다. 피식 웃은 박상호가 이 귀여운 놈, 하듯 이마를 튕겼을 때 그에게 맡겨둔 한녹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녹영보다 앞서 액정을 확인한 박상호가 “네 계모 아들인데?” 하고 휴대전화를 넘겨주었다. 한녹영이 의아해하며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제 이름을 이용하고 다니면서도 정작 저는 싫어해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온 적은 없었는데 웬일이지?
“넌 촬영준비 마저 하고.”
박상호가 장한경을 데리고 멀어졌다. 그나저나 나 대체 번호 왜 바꾼 거니. 계모 아들마저 제 번호를 알고 있으니. 한숨을 푹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왜?”
ㅡ 형, 오랜만이야. 그간 잘 지냈지?
형이라 부르는 박재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형이라고 부르기 너무 싫은데, 아쉬운 것이 있어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여실히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용건이나 말해.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챙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잖아.”
ㅡ 왜 그렇게 냉정하게 말해? 어쨌든 서류상 형제인데. 아버지······ 체포되셨어. 곧 재판 열리는데 아무래도 형 살아야할 것 같대.
한만식에 관한 소식이라면 알고 있다. 몇 번이나 제발 구해달라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연락이 왔지만 싹 무시했고, 결국 한만식은 사기죄로 조사받다가 검찰에 송치되었고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 소식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들을 말 없다.”
ㅡ 자, 잠깐만! 엄마, 엄마에 대한 소식이야.
한녹영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박재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김영숙에 관한 소식? 그녀 쪽으로는 신경을 끊어 한만식을 고소할 거라고 소리친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잠잠한 것 같긴 한데, 찾아오지도 전화도, 그리고 언론에 호소도 않은 채 없는 듯 조용했다.
“뭔데?”
ㅡ 내가 엄마 정신병원에 집어넣었어.
“뭐?”
ㅡ 사진 봤어. 더럽게 나보다 어린 새끼랑 아랫도리를 잘도 맞췄더라. 그게 미친 거지, 제정신이야? 그래서 강제로 입원시켜 버렸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도 안 되어 재혼할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남자한테 환장했다는 걸. 저기, 그래서 말인데. 가진 돈 다 털어서 병원비 내고 나니 주머니가 좀 궁해서······ 형이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이제 네 용돈 정도는 스스로 벌어서 살 나이잖아. 언제까지 나한테 빌붙어 살래? 여자들 건드리고 다니다 고소당하지 말고 똑바로 살아.”
나직하게 말한 한녹영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박재준의 번호도 차단했다. 세트장으로 걸어가는데 웃음이 피식피식 자꾸만 나왔다. 그리도 소중하게 여기던 아들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하다니. 우리 아들, 내 아들, 내 왕자님, 내 보물 해가며 박재준에게 애걸복걸하던 김영숙의 모습이 떠오르자 헛웃음만 나왔다.
“무슨 전화야?”
박재준의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던 박상호가 물어왔다.
“새엄마 해결됐다는 전화. 박재준이 정신병원에 처넣었대.”
“뭐? 이걸 인과응보라고 해야 하나. 와아, 아들 한 번 쓰레기로 잘 키웠다.”
박상호가 기막혀하며 고개를 흔들었을 때 AD가 “촬영 들어갑니다! 배우 분들 스탠바이 해주세요!” 하고 외쳤다.
그 주 주말 한녹영은 오전 촬영을 마치고 김춘영과 함께 올림픽 공원으로 향했다. 미국에 보낼 화보는 올림픽 공원의 외톨이 나무 근처에서 작업하기로 한 것이다. 3월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날씨는 한겨울만큼 ㅂ매서웠지만, 햇살만은 딱 봄이었다. 햇살이 자연광이 되어 얼굴을 살려줘 야외촬영하기에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다만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이 문제지만. 오늘은 자연미를 추구한다며 머리를 젤로 고정하지 못하도록 한 탓에 머리카락이 사방팔방 날려 표정과 포즈 잡기가 만만치 않아 고전분투 중인 한녹영의 마음 따위 관심 없는 김춘영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최고야! 아주 좋아! 자연스러워!” 하고 외치기 바빴다.
의상을 체인지하기 위해 잠시 주어진 휴식시간에 물을 마시고 있는 한녹영의 곁으로 다가온 김춘영이 말했다.
“녹영씨, 드라마 반응 최고던데?”
“네. 다행히도 1, 2회 다 반응이 좋았어요.”
2회 시청률은 30.9가 나왔다. 첫 방 이후 쏟아진 극찬에 너도나도 “그렇게 재밌나? 나도 한 번 볼까?” 하는 심리로 10시가 되자마자 TV앞에 딱 앉아 도망자를 시청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2회도 극찬이 쏟아졌다. 첫방보다 더 재미있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나 한녹영씨가 연기 그렇게 잘하는지 몰랐잖아.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섹시나 야성미로 컨셉을 잡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 한녹영씨 라인이 괜찮잖아. 아주 예뻐.”
“사실 여기 오기 전에 헬스장 들러서 공갈 근육을 좀 만들었어요.”
시간이 많지 않아 트레이너와 함께 40분 정도 급 근육 펌핑을 시도하긴 했는데,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회의적이었다. 근데 약간 효과가 있긴 했나보다.
“녹영씨야 워낙 카메라의 사랑을 받아서 딱 찍고 나면 실물보다 사진에서의 라인이 더 잘 나오니까. 아무튼 요번에는 야성미로 가보고, 이 다음 컨셉은 섹시랑 청순으로 잡자고.”
김춘영이 한녹영과 정지해에게 컨셉을 말해주며 의상과 메이크업의 방향을 지정해주었다. 신중하게 들은 정지해가 메이크업 수정을 시작했다. 막 의상을 체인지하고 나왔을 때 커피를 잔뜩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은수가 보였다.
“은수씨가 웬일이야?”
“녹영씨랑 작가님 촬영하는데 제가 안 와 볼 수가 있나요. 녹영씨, 커피 마셔. 커피 한 잔씩들 하세요.”
이은수가 한녹영과 정지해, 박상호, 그리고 김춘영과 그의 어시스턴트 두 명에게 커피를 나눠주었다.
“고마워요, 누나. 잘 마실게요.”
“녹영씨가 밥 산 데 대한 답례야. 소박하지만. 그나저나 나 그 날 녹영씨 납치될 뻔 했다는 기사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녹영씨 납치하려 한 그 새끼는 어떻게 됐어?”
“형 확정돼서 들어갔어요.”
“잘 됐네. 당연히 그래야지. 나쁜 새끼, 나 진짜 한울 다시 보이더라. 그런 저질 회사인지 몰랐어. 녹영씨 한울에서 나오길 잘했어. 그런 데서 나오느라 후폭풍이 어마어마해서 안쓰럽긴 하지만.”
한녹영이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아이스라 지금 날씨에 좀 추운 감은 있지만, 자꾸 목이 타고 텁텁해 한 번에 쭉 들이켜기에 좋았다.
“근데 녹영씨, 나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이은수가 돌연 목소리를 낮춰 은밀한 비밀 얘기를 전하듯 말했다.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데요?”
혹시 저와 강준일의 얘기인가 싶어 한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요샌 정말 안 만나는데. 발렌타인데이 이후 고작 한 번 만났다. 그것도 그의 빌라에서 고작 30분가량이었고, 가발을 쓰고 갔던 터라 아무도 눈치 못 챘을 텐데? 혹 가발을 쓰고도 들킬까 싶어 얼마나 좌우 뒤를 세심하게 살폈는지 모른다. 장현제가 잠잠해서 더 불안했다. 차라리 그가 어떤 액션이라도 취하면 나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폭풍전야 같아 더더욱 행동에 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애가 죄도 아닌데 왜 고작 30분 얼굴 보러 가면서 떨어야 하는지, 화가 나면서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함이 심장 안에서 너울쳐서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묻자 이은수가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었다.
“도망자 출연 남자 배우들 중에 과거에 몹쓸 일을 당한 사람이 있대.”
손끝이 살짝 떨렸다. 한녹영이 당황해서 눈을 크게 깜박이다 아차, 하며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몹쓸 일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태연하게 묻곤 있지만, 가슴이 파르르 했다. 몹쓸 일이라는 표현에 장한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은수의 표정으로 보아 저와 강준일의 일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인데 설마······.
“그게······ 동성 성폭행이라던데······.”
장한경 얘기가 맞구나. 목이 타는 것 같아 급히 아이스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에이, 설마요. 헛소문이겠죠. 근데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어요? 혹시 누구라는 말은 없고요?”
“나도 헛소문이겠거니 생각은 하지만 이 바닥이 워낙 루머인가 싶으면 사실이고, 사실인가 싶으면 루머인 경우가 많아서. 아직은 말이 크게 번지진 않았고, 가십 기자들 몇명 사이에서만 말이 도나봐. 연애잡지 기자인 친구한테서 주워들은 얘기야. 아직까진 대체로 헛소문 취급하며 알아볼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더라고. 그렇잖아. 여자도 아닌 남자가 같은 남자에게 몹쓸 짓을 당했는데 배우 할 마음이 들겠어? 얼굴이며 이름이며 전국에 다 알려지는 직업인데. 누가 알아보고 말이라도 퍼뜨려봐. 그 날로 인생 종치는 거잖아.”
“그렇죠. 헛소문 맞네요.”
“내 생각도 그런데······ 정말 만분의 일 확률로 사실이면······ 그냥 이대로 묻혔으면 좋겠어.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기까지 속이 말이 아니었을 텐데. 전에 성폭행 피해자들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보기 안쓰럽더라. 몸도 몸이지만 정신이 짓밟혀서 재활이 쉽지 않거든. 성폭행은 살인에 맞먹는 죄라고 봐. 특히 성범죄는 재범 확률이 높으니까 형을 찔끔찔끔 때릴 것이 아니라 좆을 확 잘라버려야 한다니까. 어머, 녹영씨 앞에서 내가 너무 험한 말을 썼네.”
검지와 중지로 가위질하는 흉내를 내며 눈을 부라렸던 이은수가 뒤늦게 멋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누나 의외로 터프하시네요.”
“내가 좀 그래. 아무튼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이기고 어쩌면 기장 피해야할 직업인 배우를 선택한 걸 텐데, 의지와 노력이 대단하잖아. 만약 사실이라면 그 의지와 노력을 존중해주고 싶네.”
“그러게요.”
한녹영이 조용하게 대꾸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정말 가장 피해야 할 직업이었을 배우를 선택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새삼 장한경이 대단해 보였다. 아무리 배우가 꿈이었다고 해도, 이름과 얼굴을 바꿨다고 해도 완벽하지 않은 이상 알아보고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용기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예전의 저처럼 누군가 장한경의 치부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잊고 살려고 발버둥을 쳐왔을 텐데, 그가 과거를 떠올리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첫 회를 몇 번이나 돌려보며 신기해했다던 장한경의 얼굴이 떠오르며 마음이 안 좋았다. 강아지처럼 절 따르는 장한경이 한녹영도 제법 귀여웠던 것이다.
대체 누가 은근히 말을 흘리고 있는 거지? 장 한경의 학창 시절의 누군가인가? 그리고 대체 제게 장한경의 뒤를 파보라는 식의 말을 한 사람은 누구야? 왜 생각이 안 나는 거지. 분명 장한경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으니 뒤를 파보라고 했을 텐데.
제 머리는 정작 잊어도 되는 것들은 바늘 끝처럼 날카롭고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은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한녹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통해 사진을 다 체크한 김춘영이 다가왔다.
“무슨 대화를 그리도 다정하게 나눠?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촬영 들어 가자고. 녹영씨 밤에 또 드라마 녹화 가야 한다고 했지?”
“네. 9시부터 밤 촬영 있어요.”
“진짜 바쁘네. 드라마 촬영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쉴 수 있도록 서두르자고.”
“네.”
한녹영이 커피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
“이제 슬슬 내가 가진 주식들 다 정리해서 준일이 놈한테 넘겨야겠다.”
식사 중이던 강준일이 조부 강정석의 느닷없는 선언에 시선을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함께 밥을 먹던 주애리의 얼굴이 표독해졌다. 그녀는 3월 말까지 금족령을 받은 강정석 회장의 문안을 핑계로 이삼일에 한 번씩 본가에 들렀다. 그러다 사흘 전 강준일의 모친과 조모가 일본으로 온천 유람을 다시 가시자 ‘손부인 제가 조부님을 챙겨야죠.’ 하며 매일 찾아왔다.
주애리와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와서 말동무나 하거라.’는 조부의 엄명에 어쩔 수 없이 들러 불편한 식사를 하던 와중에 느닷없이 나온 말에 강준일 본인도 당혹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LK는 네 거다, 내 자리를 물려받을 놈은 너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자랐고 스스로도 당연히 그룹 총회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조부가 워낙 정정해 몇 년 후쯤으로 시기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 할아버님 그게 무슨······ 아, 아직 정정하신데 왜 벌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주애리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픽 웃은 강준일이 강정석을 보았다.
“전 몇 년 후로 계산하고 있었는데요.”
“지금이야 멀쩡하다만 내 갑자기 심한 흉통을 느끼고 쓰러졌을 때 진작 주식 정리를 하지 않았던 일이 후회됐다. 제대로 정리도 해놓지 않고 내가 갑자기 죽고 나면 남은 놈들끼리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싸울 것이 아니냐. 유언장도 슬슬 작성해서 갈 날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유언장을 미리 써두면 죽을 날 받아둔 것 같아 기분이 영 별로라며 여태 유언장을 써두지 않았던 강정석이었다. 수술이 잘 돼 건강이 거의 회복 단계지만, 심장발작을 겪으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슬슬 주변 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음을 느낀 것 같았다.
“큰일 겪으시면서 심적으로 많이 약해지셨나 봐요. 그러지 마세요. 할아버님 아직 너무 정정하셔요.”
“노구다. 마음이야 청춘이지만 몸이 늙어 느닷없이 저 세상에 불려갈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지 않아도 설사병으로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줄 건 주고, 갚을 건 갚아서 홀가분하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삼일 내로 변호사 불러 유언장 작성할 거다. 내 지분 웬만큼 떼어주마. 다 주긴 싫다. 내 손에도 쥐고 있어야 너희들이 날 박대 안 하지.”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박대한다고 당하고만 계실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박대라니요. 누가 감히 할아버님을 박대할 수 있어요? 그보다 후계 문제는 신중하셔요.”
“무슨 소리냐? 아직도 장손인 한일이를 두고 준일이한테 내 뒤를 잇게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게냐? 내 오래 전부터 내 후계자는 준일이 놈뿐이라고 말했을 텐데!”
주애리를 향한 음성이 서릿발 같았다. 굳이 주애리를 옆에 앉혀두고 슬슬 후계 정리를 할 거라곤 말한 까닭은 이제 그만 그녀의 미련을 끊어내기 위함이었다. 주애리 외에도 강준일을 밀어내고 강정석의 뒤를 차지하려는 혈육은 많았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욕심이 크고 미련이 질긴 사람이 바로 주애리였다. 강한일은 기가 센 주애리에게 휘둘려 강준일을 미워하는 것뿐이고.
예전에는 강준일의 나이가 어려서, 아직 경영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해서 등등의 이유로 ‘후계자는 강준일이다.’ 라고 공언했을 뿐 힘을 충분히 실어주지 않았는데, 이젠 여유부릴 필요가 없었다. 경영 능력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보여주었고, 나이도 찰만큼 찬데다 무엇보다 강정석 본인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슬슬 준비를 해야 할 때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멀쩡하게 살아나긴 했지만 저승사자를 본 듯 긴박했던 흉통의 순간에 제일 후회했던 점이 바로 ‘내가 이대로 가면 준일이가 힘들 텐데.’ 하는 거였다.
“네. 할아버님. 그야 알죠. 할아버님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니까요. 우리 그이가 비록 장손이지만, 더 능력 있는 도련님께 그룹을 맡기려하는 심중이야 잘 알지요. 그런데······ 요즘 도련님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시기가 좋지 않은 듯 해 신중하시라고 한 겁니다.”
“소문이라니?”
“요즘 증권가 찌라시에 자꾸 도련님 이름이 오르내리거든요. 도련님이 요즘 시끄러운 남자 배우의 스폰서가 확실하다는 식으로요.”
“스폰서? 그것도 남자 놈의?”
“네. 저도 처음엔 무시했는데 갈수록 소문이 구체화되고, 또 증거도 있다는 말이 나와서 걱정되네요. 재벌과 연예인의 연애야 요즘 같은 시대에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만, 남자잖아요. 가뜩이나 도련님은 그 나이 되도록 아직 미혼이라 여러 흉한 소문이 따라다니고 있는데, 저질스런 루머라니. 외부에 퍼지면 우리 LK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지 않겠어요? 이런 때에 도련님께 할아버님 자리를 물려준다고 하면 주가가 흔들릴 거예요.”
강준일이 매우 조심스럽게 말하는 척 하는 주애리를 가만히 보았다.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강준일의 입가에 실소가 걸렸다. 강정석의 말에 마음이 어지간히도 급해지긴 했나 보다. 저와 한녹영의 얘기를 꺼내는 걸 보니.
아직 강정석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치명적인 증거를 잡진 못했을 텐데. 더군다나 요즘은 강준일조차 한녹영의 얼굴을 보기 힘든 마당이니 주애리와 장현재 쪽에 빌미를 제공하고 싶어도 못하는 입장이었다. 젠장, 보고 싶어 미치겠군. 얼굴 본지가 또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으니. 일주일 전에 긴머리 가발을 쓰고 불쑥 찾아오긴 했는데, 고작 30분을 머물다 돌아갔다. 해서 강준일은 최근 계속 한녹영이 고픈 상태였다. 연예인, 그것도 스타 연예인과의 연애는 할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저야 이미 백기를 들고 배를 보인 채 납작 누운 상태라 돌이킬 수 없지만 주변에 권하고 싶진 않았다. 원거리 연애면 체념이나 하지, 이건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 없으니.
촬영 종료 이후에 마음껏 만나려면 주애리와 장현재 문제를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강준일이 차갑게 생각했을 때, 주애리가 말했다.
“얼마 전에 도련님이 드라마에 투자하셨잖아요. LK 엔터의 드라마 진출이라며 떠들썩했던 걸 기억하시죠? 도련님과 말이 나는 배우가 바로 그 드라마에 출연 중이에요. 아마 스폰서 관계라 배우를 도와주려고 돈을 투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더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냐?”
주애리의 말을 들은 강정석이 강준일을 향해 물었다.
“그 투자는 22배의 이익이 날 거라고 해서 한 겁니다.”
“누가 22배의 이익을 보장한다고 한 게야? 밑에 놈이냐.”
역시 사업가라 22배의 이익이란 말에 강정석이 혹했다. 강준일이 그런 조부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매번 딴따라 장사니 뭐니 해도 강준일을 계속 LK 엔터에
내버려두는 이유는 문화 컨텐츠 사업이 꽤 많이 남는 흑자 장사이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형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배우가 22배의 이익을 보장했죠.”
주애리가 ‘그것 보세요.’ 라고 하듯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정말 배우 나부랭이 말에 현혹되어 투자를 한 게야? 배우라니 얼굴은 반반할 테고, 혹 미모에 현혹된 거냐?”
“그런 건 아닙니다.”
제 취향의 얼굴인 건 맞지만 말이다. 강정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아끼는 손자가 배우 따위의 얼굴에 눈이 멀어 사업을 쉽게 생각한 건가 싶어 못마땅한 마음이 좀 들었다. 절 닮아 워낙 냉철하고 확실한 놈이긴 하지만, 본래 사내가 미색에 눈이 멀면 순식간에 어리석게 변하는 법이다.
“배우 나부랭이 따위가 뭔데 22배니 뭐니 하며 사람을 홀려? 넌 그딴 말에 냉큼 넘어갔고?”
“장해숙 여사의 손자입니다.”
“누구?”
“장해숙 여사요.”
장해숙은 한녹영의 외조모 이름이다. 처음에는 장해숙이 누구야, 라고 하듯 눈매를 좁혔던 강정석이 이내 그가 자주 찾았던 무당의 이름인 걸 기억해내곤 반갑게 웃었다. 매번 장 보살, 장 보살 하다 보니 이름과 장 보살을 곧바로 연결 짓지 못했던 것이다.
“장 보살의 손자가 배우가 됐어? 그래, 신기 있는 딴따라들이 많다고는 들었지. 그러고 보니 장 보살한테 손자가 있었어. 요절한 딸이 남긴 혈육이 말이야. 무슨 드라마라고 했느냐? 어디 지금 당장 보자.”
강정석이 식사를 하다 말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 다급함마저 서려 있었다. 다소 성급한 반응에 강준일이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렸을 때 주애리가 말했다.
“어머, 할아버님. 식사는 마저 하시고······.”
“됐다. 충분히 먹었다. 매일 집에 갇혀 있는 사람이 밥은 많이 먹어서 뭐하누. 소화나 안 되지. 이따 과일이나 한쪽 먹든가.”
강정석이 거실로 향하자 주애리가 주방 아주머니를 향해 상을 치우고 과일과 차를 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종종 걸음으로 거실로 따라 나왔다. 그 사이 강준일은 리모컨으로 TV를 켠 후 도망자를 찾아 결제했다. 곧 드라마가 시작되었고, 첫 장면부터 한녹영이 나왔다.
‘비에 젖은 라인이 죽여주게 섹시했지.’
강준일도 드라마를 봤다. 그것도 본방으로. 물에 젖어 옷이 몸에 찰싹 붙은 탓에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그게 어찌나 섹시하던지 옆에 있었으면 반드시 덮쳤을 거다. 시청자 입장으로 TV속 애인을 바라보기만 하자니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었다. 정말 그가 간절했는데 안타깝게도 제 곁에는 섹시한 한녹영 대신 한성준이 있었다.
‘대표님과 제가 왜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봐야합니까?’ 하고 투덜댔던 한성준은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자 완전히 몰입해서 봤다. TV에서 단 한순도 시선을 떼지
않았을 정도였다. 다음 회 예고편까지 꼼꼼하게 챙겨보고 난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일어난 한성준이 한 말은 ‘최고 시청률 40퍼센트 가능하겠습니다.’ 였다.
“저기 저 얄쌍하니 계집아이처럼 생긴 아이가 장보살 손자냐?”
강정석이 정확하게 한녹영을 짚어냈다.
“네. 이름이 한녹영입니다.”
“저 아이가 장 보살 손자였다고?”
조부의 말투에서 한녹영을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강준일이 의아하게 물었다.
“한녹영씨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일전에 병원 옥상에서 봤다. 사내 녀석 같지 않게 곱상한 얼굴이 낮익어 어디서 본 얼굴인가 했더니만 장 보살 손자였군. 그래, 너와 저 아이를 두고 요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네. 할아버님. 증권가 찌라시에 끊이지 않고 도련님이 한녹영의 스폰서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근거 없는 찌라시도 많다지만 소멸되지 않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지 않을까요?”
주애리가 냉큼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 조급함이 가득했다. 강정석이 본인 소유의 지분을 강준일에게 양도해버리면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어진다. 어떡해서든 막아야 했다. 막지 못하면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 그래도 아직은 좀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강정석이 느닷없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노인네, 심장발작 한 번 하더니 마음이 급속도로 약해진 모양이야. 차라리 그대로 죽어버리길 바랐는데. 제대로 된 유언장도 없는 상태에서 강정석이 죽어버리면 상속 1순위는 장손인 남편 강한일이 되니 말이다. 그래서 수술실 밖에서 속으로 ‘죽어버려. 죽어버려.’ 하고 애타게 기도했는데 저렇게 말짱하게 살아나왔다. 주애리가 속으로 몰래 혀를 찼다.
“너는 준일이와 저 아이 사이에 뭔가 있다고 보느냐?”
“진실이야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다만 전 이런 흉한 소문이 돌고 있으니 신중하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때 주방에서 차와 과일이 나왔다. 강준일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로 차를 마셨다. 강정석의 시선이 주애리에게서 강준일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태연한 손자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주애리를 향해 말했다.
“손부는 그만 가보거라.”
“네?”
“그만 가보래도.”
“하지만 할아버님······.”
더 불벼락이 떨어져야 하는데. 아니면 더 충격 받은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강정석의 반응이 생각과는 달라 불안했다.
“흉한 찌라시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 따로 알아보마. 증권가 찌라시 중에는 영 헛소문도 많거든.”
“지금 도련님께 여쭤보는 편이 제일 확실하지 않을까요?”
“준일이가 아니라고 하면 믿을 테냐?”
장깐 생각에 잠겼던 주애리가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강준일에게 하는 ‘한녹영과의 스폰서 설이 사실인가요?’ 하고 묻는다한들 강준일이 솔직하게 ‘네. 사실입니다.’ 라고 할 리 없었다. 역시 증거가 필요해. 아주 확실한. 그래야 조부님이 강준일을 버릴 텐데. 버리고 싶지 않아도 버릴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야 한다. 장현재는 뭐하는 거야. 안 되겠다. 독촉해야지. 그가 내켜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하게 만들어야지. 속으로 계략을 짜는 주애리의 얼굴은 차분했다. 그녀는 강정석을 향해 “내일 또 올게요. 할아버님.” 하고 애교 있는 인사를 한 후 바깥으로 나갔다.
“참말이냐?”
주애리의 모습이 현관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강정석이 물었다.
“네. 사실입니다.”
강준일이 솔직하게 시인했다. 조부에게 거짓말할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거짓말이 통할 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강준일은 한녹영과의 사이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은 일이 죄악도 아닌데.
“스폰서라고?”
“돈을 주고 몸을 사는 관계는 아닙니다. 연인이죠.”
“저 아이랑 연애를 한다는 게냐?”
강정석이 때마침 클로즈업된 한녹영의 얼굴을 가리켰다.
“네.”
“허······.”
담담하고 단호한 강준일의 대답에 강정석이 허, 하고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는 사내지만 사랑한다는 둥, 헤어질 수 없다는 둥, 어떤 말도 않고 그저 평온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중인 손자를 물끄러미 보다 소파 뒤로 몸을 푹 기댔다. 강준일이 가끔 사내놈들과도 노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깟 놀이쯤이야 하고 무시했다. 솔직히 재벌입네, 상류층입네, 하는 것들 중 성적으로 문란하고 지저분하게 노는 이들이 많았다. 바깥에 싸질러놓은 자식이 수십인 노물도 있고, 아직 아랫도리에 풀도 돋아나지 않은 어린 것을 밝히는 변태도 많았다. 그러니 남자든 여자든 일대일로 만나 깔끔하게 즐기다 헤어지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연애란 말이지. 그것도 손자 놈의 얼굴을 보니 진지하다. 저건 진심인 놈의 얼굴이었다.
“허 참. 장 보살의 손자라니······.”
“······.”
“허 참. 장 보살 손자라. 한 번 데려와 봐라. 내 장 보살에게 빚진 것이 있으니 네 문제를 떠나서 얼굴은 한 번 봐야겠다.”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 잠잠해지면 한 번 데려오겠습니다. 데려오면 한녹영씨 앞에서 큰절 한 번 하시고 절 기꺼이 주겠다고 하십시오.”
태평한 손자의 말에 강정석이 얼굴을 구겼다. 아까운 손자를 꼬여낸 딴따라 놈에게 이놈저놈 해가며 불호령을 쳐도 모자랄 판에 큰절을 하라고? 누굴 기꺼이 줘?
“미색에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닌 게로구나.”
“빚을 갚으셔야지요?”
“무슨 빚?!”
“장 보살님께 지은 빚 말입니다. 아니죠. 정확하게는 한녹영씨 어머니께 지은 빚이라고 해야 하겠군요.”
강준일의 말에 강정석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한녹영씨가 익숙한 옥가락지를 가지고 있더군요.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옥가라지였습니다. 희미한 기억을 돌이켜보니 이십 년 전 제가 한창 아팠을 때 절 구해준 분의 손에서 옥가락지를 본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다른 기억은 없는데, 열로 뜨거운 제 몸을 쓰다듬던 시원한 손의 감촉과 그 손에 끼워져 있던 가락지만은 흐릿하게나마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
“한녹영씨 외조모가 무당이었던 건 알고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샅샅이 조사해보라고 했더니 뜻밖의 결과가 나오더군요. 바로 어제 결과를 받아들고 한순간 멍했습니다.”
바로 한녹영의 어머니 역시 무당이라는 결과였다. 정식으로 신당을 차린 것도 아니었고, 무당 활동을 한 것도 아니어서 이전 조사에서는 한녹영의 모친 역시 무당이었다는 사실이 빠졌던 것 같았다. 실제로 한녹영의 모친이 무당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바로 수가 너무나 적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라는 액받이 무당이었으니까. 한녹영의 모친 이름 옆에 쓰인 액받이 무당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한순간 정신이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심하게 아팠던 절 살렸던 이가 바로 액받이 무당이었지만, 누군지 알길이 없었는데 어제야 비로소 알았다.
한녹영의 모친이었다. 한녹영의 외조모와 조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확실했다.
“······.”
강정석이 말없이 강준일을 바라보았다.
“늘 장 보살에게 빚을 졌다, 빚을 졌다고 하시기에 무슨 빚이기에 저리도 집착하시나 했더니 제 목숨 빚이었군요.”
제 목숨 빚이라면 조부가 못 갚아 안달 낸 이유가 이해되었다. 조부 강정석은 셈이 분명한 사람이라 손해 보는 것도, 남에게 빚지는 것도 싫어했다. 받을 건 악착같이 받아야 했고, 갚을 것 또한 악착같이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시다.
“네 놈에겐 가능한 말 안 하려 했다만, 손수 알아냈다니 별 수 없구나. 그래, 장 보살 딸이 액박이 무당이었는데, 그녀가 널 살렸다. 네 목숨이 경각에 달해있는데 어느 놈도 살리지 못해 절망하고 있던 차에 장 보살이 액받이 무당 얘기를 하며 한 번 맡겨보겠냐고 하더구나. 장 보살 능력은 믿고 있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맡겼더니 나라에서 제일 뛰어난 의사라는 놈들도 못 고쳤던 널 살려냈다.”
“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몇 번이나 누가 제 목숨을 살린 거냐고 물었는데, 조부는 그때마다 ‘넌 알 것 없다.’ 라고 단호하게 잘랐다. 생명의 은인에게 인사조차 않는 개자식으로 만들 셈이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걸 내어주기로 했으니 넌 신경 쓸 것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에게선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조모님도, 부모님도 무당의 정체를 몰랐던 것이다. 어느 날 조부가 죽어가던 저를 은밀히 어딘가로 데려갔고, 살려서 데려와 기뻤다고만 하셨다.
“네 상태가 괜찮아졌을 때 공언한 대로 계열사 하나를 내주려 했다. 실제 경영이야 무리일 테니, 원하는 계열사의 주식을 양도하려 했는데 거절하더구나. 전생의 업을 갚기 위해 액받이 무당이 된 거라 돈으로 대가를 받을 순 없다면서 말이다. 쌓은 업을 해소할 수 있도록 절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내 가장 귀한 손자의 목숨을 살린 이를 어찌 그냥 보내겠느냐. 돈이 아니어도 좋으니 뭐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 했더니 그럼 빚으로 남겨두자며, 훗날 빚을 받을 날이 올 거라고 했다. 그때가 되면 아마 내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게 될 거라고 하기에 무슨 의미인가 했더니만, 이제 알겠구나. 네 놈을 말하는 거였어! 허 참. 장 보살 핏줄이 용하긴 용하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제 자식이 내 손자를 훔쳐갈 걸 예언했다니.”
강정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허 참, 허참, 하는 말을 연신 반복하며 복잡한 눈길로 강준일을 보았다. 이거야 원. 꼼짝없이 귀한 손자를 사내놈에게 내어주게 생기질 않았나. 시치미 뚝 떼고 목숨 빚 따윈 없었던 일로 치자니 마음이 영 개운치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손자 놈 눈빛을 보니 장 보살 손자에게 푹 빠진 것이 보였다.
“왜 너한테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그것도 장 보살 딸의 부탁이었다. 인연이 닿아 자연스레 빚을 받아갈 날이 온다면 모를까, 절대 억지로 갚으려 하지 말라고 하더구나. 만약 빚을 갚는답시고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면 업이 해소되지 않고 다시 쌓인다면서 말이다. 그건 오히려 그녀를 망치는 일이라고 했다. 네 놈이 알면 바로 달려가 어떤 식으로든 빚을 갚으려 할 테니 내 약속대로 침묵했던 거다. 네 놈을 두 눈 뜨고 뺏길 줄 알았으면 진작 털어놓는 건데 그랬다. 이십 년 동안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어 갑갑했거늘. 내 죽기 전에는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싶어 조바심을 쳤는데, 허 참······.”
“너무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20년 전에 죽었을 지도 모르는 목숨 살려준 분의 아들이 아닙니까. 당연히 제 남은 삶은 그 사람 겁니다. 그러니 데려오면 절 기꺼이 주겠다고 하시라니까요.”
한성준이 가져온 조사 결과를 받아든 순간에는 덤프트럭에 부딪친 듯한 충격이 느껴졌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부터 이렇게 될 인연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 운명이니 인연이 하는 것에 연연한 적 없는데 한녹영이 상대가 되자 운명, 이란 단어가 주는 깊고도 진한 여운이 마음에 쏙 들었다. 정해진 운명, 얼마나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말인가. 제가 이런 감성을 갖게 되다니.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어림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먼저 널 내어주겠다고 할 것 같으냐! 엎드려 빌며 달라고 하면 모를까. 칼만 안 들었지 순 강도가 아니야. 어쩐지 내 옥상에서 그 놈을 봤을 때 불길하더라니.”
한녹영을 보물을 강탈해 간 강도 취급하는 조부의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에잉, 하고 혀를 찬 강정석이 말을 이었다.
“한일이 처가 너와 장 보살 손자 사이를 물고 늘어질 것 같던데. 한일이 놈이야 욕심만 가득한 맹물이지만,그 아이는 달라. 속에 독사를 숨기고 있으니 아차 하면 물린다.”
강정석이 주애리를 신랄하게 평가했다. 사적으로는 손자 며느리라 마냥 예뻐해야 마땅하지만,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속으로는 차디찬 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인은 얼음처럼 찬 내면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이 나이쯤 되면 어떤 사람의 실체 정도는 절로 파악이 되는 법이다.
“곧 해결할 생각입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강준일이 방긋 웃었다. 웃는 입매와는 달리 눈빛은 싸늘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강정석이 포크로 노랗게 잘 익은 멜론을 쿡 찍었다.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라. 어쨌든 집안 식구 아니냐.”
“노력은 해보죠. ”
노력만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애리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자마자 장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길 기다리는 얼굴에 짜증과 신경질이 가득했다.
미친 노인네. 노망난 노인네. 장손을 두고 왜 강준일이야? 당연히 LK의 모든 걸 물려받아야 하는 장손인 강한일은 겨우 화학이나 하나 떼어줬으면서. 그녀가 강한일과 결혼한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LK가의 장손이기 때문이었다.
ㅡ 납니다.
한참 후 장현재가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내가 전화를 걸면 무조건 3번 이내에 받으라고 했잖아!”
짜증이 절로 터져 나왔다.
ㅡ 샤워 중이었습니다만. 욕실에 전화기를 들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리고 무조건이라니요. 내가 여사님 개새끼도 아닌데.
주애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장현재의 목소리에서 불온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전에는 제 발바닥이라도 핥을 듯 비위를 맞춰주더니 얼마 전부터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애완 개가 들개로 변한 느낌이었다.
“개새끼 맛잖아. 2년간 내가 걸어둔 목줄에 매인. 한녹영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주애리가 비틀린 어조로 말했다. 이런 것들은 한 번씩 밟아서 현실을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ㅡ 힘들 거라고 했지 않습니까?
“주식 필요 없어? 영상만 떠주면 곧바로 주식 양도 각서에 사인한다니까.”
일단 시급한 것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에 주애리가 장현재를 살살 구슬렸다. 사이가 틀어졌다곤 해도 장현재에게 아직까진 한녹영을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게 한녹영이 한울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신속하게 일을 진행했어야 하는 건데. 설마 강준일이 한녹영을 거절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제가 알아본 바로 한녹영의 외모는 강준일의 취향이었다. 지금껏 그가 만나온 사람들을
종합해본 결과 확실했다. 실제로 두 사람이 붙어먹고 있질 않나. 근데 왜 전엔 거절했던 거야. 결국은 붙어먹을 거면······ 설마. 설마 내가 배후에 있는 걸 알고? 주애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거다. 얼마나 조심하며 남자들을 만나고 있는데.
ㅡ 강준일 대표를 끌어내릴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죠.
“방법이 있었으면 내가 왜 장 대표한테 매달리겠어!”
강준일은 약점이 별로 없는 남자였다. 결혼 후 강준일의 약점을 틀어쥐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약점이라고 해봐야 남자를 더 좋아한다는 성 취향뿐인데, 더 변태적인 성생활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아 ‘강준일이 남자를 더 좋아한다더라.’는 루머 정도는 약점이 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을 아주 뒤집어놓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섹스 스캔들이라도 터진다면 또 모를까. 그래서 한녹영을 발견하고, 한녹영이 장현재의 얌전한 인형이라는 걸 알았을 때 쾌재를 불렀다.
ㅡ 경호원이 붙어있는 한녹영을 내가 무슨 수로 불러냅니까? 그리고 강준일 대표는 또 어떻게요?
“둘이 붙어먹고 있잖아! 협박을 하든, 애원을 하든, 뭘 해서든 한녹영을 불러내! 한녹영을 빌미로 부르면 강준일은 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두 사람한테 약 먹이면 되잖아. 아주 센 걸로 말이야. 장 대표가 직접 구할 수 없다면, 약 정도는 내가 구해서 보내주겠어.”
ㅡ 못합니다.
“못해? 못한다고 한 거야?! 감히 내게?!! 그간 상냥하게 대해줬더니 너와 내가 같은 레벨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넌 내 목줄에 묶인 개새끼일 뿐이야! 아랫도리 좀 잘 놀린다고 예뻐해 줬더니 분수도 모르고 짖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상 떠와. 무조건 내일까지야. 아니면 주식 대신 넌 감방에 가게 될거야. 네 구린 뒤 내 손에 다 쥐어져있거든. 영상을 떠오든가, 아니면 내가 쥔 네 비리들을 몽땅 검찰에 보내버릴 테니 알아서 해!!”
일방적으로 소리를 내지른 주애리가 전화를 옆으로 툭 던졌다. 그리곤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기댔다.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건방진 새끼. 감히 누구한테 기어올라? 지금껏 만난 남자 중 그짓하는 기술만은 최고인데다 한녹영 일로 필요해 살살 비위를 맞춰줬더니 감히 맞먹으려 들어? 그렇지 않아도 슬슬 다른 남자로 갈아타려던 참이었다.
“넌 어차피 교도소 행이야. 장현재 파일 당장 검찰에 보내버려!”
주애리가 차갑게 말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비서가 곧장 네, 하고 대답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
영상을 뜨든 말든 저와 2년가까이 불어먹은 놈을 그냥 얌전히 내버려둘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더군다나 장현재 같은 놈은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 해도 뒤로는 배신할 반골이라 만약을 위해 확실하게 밟아둘 필요가 있었다. 훗날 저와의 관계를 이용해먹으려고 들면 곤란하니까. 그녀가 지금껏 여러 남자들을 몰래 만나오면서도 단 한 번도 지저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까닭은 언제나 깔끔한 뒷정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
“녹영아. 나 다크서클이 목까지 내려오지 않았냐?”
3월 13일, 일요일 오후에 도망자팀 주연 배우들 연예방송 인터뷰가 잡혔다. 달콤한 그대 첫방을 앞두고 시청자들이 많이 빠져나갈 것을 우려한 방송사 측에서 부랴부랴 요청을 해온 것이다. 밤낮없이 시간을 쪼개가며 촬영에 매진하던 중이라 시간 빼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드라마 홍보 차 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송정빈, 나희연과 함께 방송국에 왔다. 주연이라 가장 씬이 많은 송정빈을 피곤함에 얼굴이 푹 꺼져 거의 너구리였다. 메이크업으로 최대한 가린다고 가린 건데도 이 정도였다.
“내일은 오전에 형 촬영분 없다면서요. 오늘밤에 수면 보충 좀 해요.”
“어. 오늘 집에 가서 기절할 거야. 무조건 잘 거야. 누가 나 깨우면 물어뜯어 버리려고.”
송정빈이 잔뜩 별렀다. 나희연이 작게 웃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도 잠 좀 푹 잤으면 좋겠어요. 요샌 거의 쪽잠이라 피부가 푸석푸석 말도 못해요.”
나희연이 까칠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속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잖아. 시청률이 잘 나와 줬으니까.”
“첫 주는 예상보다 훨씬 잘 나와 줬지만 이번 주 되어봐야 확실해질 것 같아요. 저쪽이 의외로 대박이면 우리 시청률 쭉쭉 빠질 테니까요.”
“그렇긴 한데······ 내가 들은 말이 있는데······ 저쪽은 그닥인가봐. 스태프들 분위기가 별로 안 좋다네.”
송정빈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말했다. 나희연의 눈이 커졌다.
“진짜예요? 신은주 작가님이면 그래도 늘 평타는 쳤잖아요?”
늘 어느 정도 재미는 보장했고, 팬도 많은 작가라 방송국에서 신은주라면 일단 환영하고 봤다. 늘 PPL이 줄을 섰고, 배우들도 앞다투어 출연하길 원했다. 그래서 나희연은 사실 한녹영이 달콤한 그대 주연 자리를 차고 도망자 차도영으로 들어왔다고 했을 때 환영하면서도 내심 의아했었다. 혹시 판단력이 떨어지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지금이야 늘 비슷비슷한 역할에서 탈피해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던 배우로서의 욕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랬지. 못해도 평타. 늘 어지간한 재미는 보장하는 작가였는데, 이번엔 날림인가 보더라고. 신 작가야 1,2회가 제일 재밌으니 이번에도 1,2회 대본은 괜찮았는데 뒤로 갈수록······.”
송정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부러 뒷말을 삼켜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 같았다. 어머어머, 하는 소리를 연이어 낸 나희연이 슬쩍 웃었다.
“그럼 우리 드라마가 더 돋보이겠네요?”
“그렇지! 나도 걱정돼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들은 소식이니까 정확할거야.”
악당처럼 비열하게 입끝을 올리는 송정빈을 보며 한녹영도 웃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예전처럼 대본이 뒤로 갈수록 별로인가 보다. 제가 찍었던 그대로라면 달콤한 그대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갑자기 기운이 막 나는데요? 이런 말 하면 제가 너무 못돼보이나요?”
“응. 엄청 못돼 보여.”
“나 컨셉이 청순 미인인데 큰일 났다.”
큰일 났다고 말하는 나희연의 얼굴에는 여전히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은 송정빈의 시선이 한녹영에게로 왔다.
“근데 넌 어째 그다지 기쁜 얼굴이 아니다?”
“엄청 기쁜데요? 피곤해서 그렇죠.”
“단순히 피곤한 표정만은 아닌데? 뭔 근심이라도 있냐?”
“아니요. 근심 같은 거 없어요.”
한녹영이 애써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사실은 어제 오후 김춘영과의 작업 도중 찾아온 이은수로부터 들은 말 때문에 내내 마음이 묵직한 상태였다. 박상호에게 미리 언질을 줘야 하나. 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작정하고 장한경 문제를 터뜨리려고 한다면 미리 언질을 줘 대비하도록 하는 편이 나을 텐데,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형, 장한경이 사실 고등학교 때 성폭행을 당했대, 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치부를 또 한 번 제멋대로 까발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서 어쩌면 좋을지 막막한 상태였다.
“단순히 피곤한 얼굴인가? 이 얘기를 들으면 안색이 안 밝아질 수 없을 걸? 저쪽 주연 맡은 신인, 연기력도 그냥 그렇다더라고. 한울 쪽에서 신 작가랑 감독 약점 잡고 밀어 넣은 낙하산이라는데 지가 미국 극단에 있다온 엘리트라고 거들먹대기만 하고 막상 연기는 별로라더라. 특히 감정 표현이 잘 안 된대. 한울이 너 대신 키울 스타로 막 밀어주고 있는 모양인데, 가까이서 지켜본 지인 말이 어림도 없다더라.”
기분 좋지? 막 기운이 나지? 그러니까 어서 이런 고급 정보를 가져온 날 칭찬해라, 는 눈빛이 쏟아져왔다. 한녹영이 부담스럽게 저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중인 송정빈의 얼굴을 밀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지한이 형! 빨리 안 오고 뭐 해?!!”
신경질이 가득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익숙한 음성에 돌아보니 역시 주민성이었다. 주민성 뒤로 손에 짐을 잔뜩 든 박지한과 코디들이 보였다. 그중 신정아도 보였다.
이 방송국에서 녹화가 있는지 제일 앞에서 거들먹대며 걸어오던 주민성이 한녹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주민성은 한녹영을 마치 평가하듯 훑어보곤 별 거 아니네, 라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뭐야? 저 자식? 선배들을 보고 인사도 안 하고.”
송정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생에서는 따로 마주친 적 없지만, 이전에는 장현재를 사이를 두고 라이벌이었던 터라 주민성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한녹영은 ‘여전하네.’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하긴 저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그나저나 박지한이 의외였다. 지금의 박지한은 배우가 아니라 꼭 주민성의 매니저처럼 보였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주민성의 스태프들 중 한 명이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았다. 송정빈 또한 이쪽을 보고 주춤대는 박지한을 향해 눈살을 찌푸려보였다.
“이름이 주민성 맞죠? 선배들을 보고 인사할 줄도 몰라요?”
뜻밖에도 주민성의 태도를 제일 먼저 꼬집은 사람은 나희연이었다. 짜증스런 표정으로 씹, 하고 작게 중얼거린 주민성이 마지못해 고개를 꾸벅하며 “주민성입니다.” 하고 말하더니 “녹화가 있어서요.” 하며 휙 가버렸다.
“지한이 형! 빨리 와!! 나 녹화 늦었거든! 아, 맞다. 형도 같이 출연하는 거였지. 내 꼽사리로 끼어들어온 거라서 잊고 있었네.”
들으란 듯 한 말에 박지한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어 수치심을 참아내더니 이내 성큼성큼 걸어 다가왔다.
“그렇게 볼 거 없습니다. 민성이 매니저가 오늘 개인사정으로 나오지 않아 잠깐 도와주는 중이니까요. 어차피 같은 스케줄이기도 하고요. 도망자 쪽은 아주 잘 나가던데요. 넌 내 자리 뺏어가더니 시청률 대박 터져서 좋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변명을 중얼댄 박지한의 시선이 핸녹영을 향해 왔다.
“선배는 한울과 계약해서 절 욕하느라 바쁘더니 배역 얻어서 좋습니까? 요즘 간간히 예능에도 나오시던데요. 반응이 별로라 그렇지. 악플 관리하느라 바쁘시겠어요.”
박지한의 역을 뺏어왔다고 욕하던 사람들이 이젠 박지한을 욕하고 있었다. 박지한이 분한 얼굴로 한녹영을 노려보았다. 한녹영은 그런 박지한을 향해 웃어준 후 신정아에게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 터라 반갑기도 했고 인사나 하자 싶었던 것이다.
“나 참. 갓 데뷔한 까마득한 후배 딱갈이나 하고 꼴좋다. 좀 참았으면 나 다음 드라마 들어갈 때 같이 데려가려고 했는데, 네 복을 네가 찬 거다.”
“끼워 넣기를 해주시려고 했다고요?”
“그래! 나 도망자로 다시 뜬다. 예전 위치로 돌아가면 너 하나쯤 끼워넣기 하는 건 일도 아니야.”
“잘난 척 마십시오. 고작 1,2회 시청률 잘 나온 걸로 마치 수목 드라마 평정한 것처럼 굴지 말란 말입니다. 이번 주부터 우리 드라마 방송되면 입장이 뒤바뀔지도 모르거든요.”
“내가 보기엔 뒤집기 힘들 것 같은데. 너네 소문 안 좋더라. 대본이 엉망이라던데?”
은근슬쩍 찌르자 박지한의 얼굴이 굳었다. 쉬쉬하고 있던 사실이 어쩌다 외부에 퍼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도망자 팀에 말이다. 하지만 박지한은 헛소리 하지 말라는 태도로 거만하게 턱을 들었다.
“두고 보면 알겠죠. 폭탄 끌어안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계속 잘난 척 하며 희희낙락 하십시오.”
“무슨 소리야? 폭탄이라니?”
송정빈의 의아한 물음에 박지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차 실수했다는 얼굴이었다. 다급해져서 서둘러 주민성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어가는 박지한의 등을 보는 송정빈의 눈매가 딱딱했다.
송정빈이 박지한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한녹영은 신정아와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잘 지냈느냐는 의례적인 인사가 오갔다.
“지해 너 따라갔다는 말은 들었어. 며칠 전에 잠깐 통화했는데, 잘 지내는 같더라. 이젠 너랑 마음 잘 맞아서 일하기도 편하고 월급도 한울에 있을 때보다 많이 받는다고 자랑하더라. 기집애 약 오르게.”
박상호가 신생이라 규모는 작아도 직원들 월급은 업계 최고로 보장한다며 정지해와 장한수의 월급을 한울에 있을 때보다 많이 책정했다. 물론 신입 매니저와 코디도 다른 데에 비해선 높게 부른 편이었다.
“누나는 일하기 어때?”
“신인이라 좀 편할까 했더니 힘들어. 너보다 더 까칠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넌 완전 신인 때는 괜찮았는데. 부잣집 아들이라 그런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아. 지적받는 거 못 참고, 마음에 안드는 사람은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고,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잘나가는 것도 눈뜨고 못 보고, 제 밑이라 생각되면 막 손끝으로 부리려 들고······ 그러면서 장 대표 앞에서는 또 얼마나 내숭을 떠는지 몰라. 독립하든지 해야지. 더럽고 치사해서 못 참겠어. 나 그만 가야겠다. 또 봐, 녹영아.”
신정아는 마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냥 한녹영을 항해 속사포처럼 신세한탄을 늘어놓더니 저만치 간 박지한의 뒤를 부랴부랴 따랐다. 표정에 가득한 울분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곧 독립할 것 같았다.
“주민성 코디와 아는 사이였어?”
가까이 다가온 송정빈이 물었다.
“네. 주민성 오기 전까진 제 스타일리스트였던 누나거든요. 주민성 스태프 하느라 힘든 모양이네요.”
“그렇겠네. 주민성 그 놈 성질이 보통은 넘는 것 같던데. 신인 주제에 선배들 보고 인사도 안 하고, 거기다 너 아래위로 훑어보는 눈길이 참 가관이더라. 지한이 부리는 태도만 봐도 각이 딱 나오잖아. 그리고 박지한 그 새끼, 신인 딱갈이 하려고 한울 들어간 건지 원. 고소하면서도 안쓰럽고 마음이 좀 그러네.”
송정빈은 심정이 복잡한 표정이었다. 행실은 얄밉지만 어쨌든 오래 알아온 정이 있어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그런 마음이었다.
“전 선배랑 달라서 안쓰러운 마음은 없네요.”
제가 천하의 도둑인 냥 언플했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쓰렸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감정이 이젠 최악으로 바뀌어 주민성에게 손끝으로 부려지던 모습을 봐도 ‘자업자득이네.’ 하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심보 한 번 고약하다고 욕해도 할 수 없었다. 싫은 건 싫은 거니까.
“네 입장에서는 당연하지. 근데 참, 지한이 놈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무슨 소리인데요?”
“우리가 폭탄을 끌어안고 있다던데?”
“네?”
“네 찌라시 얘기인가? 근데 네 루머야 벌써 한 달도 넘은 애기니 그건 아닐 텐데. 네가 정말 강 대표로부터 스폰받는 사이라면 또 모를까.”
“선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한녹영이 펄쩍 뛰었다. 웃어넘겨도 될 일이지만, 요샌 저와 강준일에 대한 말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저도 모르게 과한 반응을 하게 된다. 박상호를 시켜 혹시 사진이 뜨지 않는지 포털이나 게시판 SNS 등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을 만큼 한녹영의 신경은 예민했다.
“헛소문인 거 잘 아니까 펄쩍 뛸 필요 없어. 그나저나 뭔 소린지. 무슨 폭탄이라는 거야?”
송정빈이 도통 짐작되는 일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고, 한녹영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폭탄? 박지한이 말한 폭탄이 설마 장한경은 아니겠지? 어제 이은수로부터 얘기를 들은 이후 내내 신경을 쓰고 있었던 탓인지 곧바로 ‘장한경?’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녹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아닐 거다. 무엇 보다 박지한이 장한경의 과거를 어떻게 알겠는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다고. 고작 오디션 장에서 한 번 마주친 것이 다인데.
“두 분 안 와요?”
나희연이 빨리 오라며 재촉했다. 주차를 한 후 세 배우가 먹을 커피를 사오느라 늦은 박상호가 아직 로비에 있는 세 사람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차피 같이 갔다가 또 같이 돌아와야 하니 한 차로 움직이자, 매니저도 한 명만 따라가자고 합의한 후 가위바위보로 누가 갈지 정했는데 덜컹 걸려버린 박상호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여기 있는 겁니까? 이거 생방이야!”
“지금 들어가.”
주민성과 박지한 때문에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진 세 배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생방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배우들은 달려야 했다. 어서 촬영장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이다. 막 밴에 올라타 두고 갔던 휴대전화를 꺼내본 한녹영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한녹영씨가 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강준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애 같긴.”
툴툴대는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응? 뭐라고?”
“가는 길에 대사나 맞춰보자.”고 말한 후 주섬주섬 대본을 꺼냈던 송정빈이 한녹영을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한녹영도 서둘러 대본을 꺼냈다. 심장이 간질간질해졌다. 내가 많이 보고 싶은 것 같은데······ 오늘쯤 조심스레 한 번 들러볼까? 사실 한녹영도 강준일이 너무 고픈 상태긴 했다.
그 날 밤 한녹영은 가발을 쓰고 강준일의 빌라로 향했다. 정지해에겐 실수로 가발을 망가뜨렸다고 거짓말을 한 후 대신 선물이라며 명품 가방을 사서 안겼더니 그녀는 ‘우리 사이에 그깟 가발 좀 망친 걸로 선물은 무슨’ 이라고 하면서도 입이 찢어질 만큼 좋아했다. 거짓말한 것이 양심에 좀 찔리지만, 덕분에 아주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강준일의 집을 드나들 수 있어 좋았다. 그래봤자 바빠서 오늘로 겨우 두 번째 오는 거지만. 제가 고프다는 문자에 마음이 달아올라 달려오긴 했는데 여유 시간이 많진 않았다. 고작 1시간이나 머물 수 있을까? 내일 아침 일찍 촬영장에 가야 해 박상호가 ‘그냥 다음에 만나지 그래?’ 하고 은근히 말렸지만, 한 번 그리움에 불이 켜지자 참을 수가 없었다. 빨리 한가해져서 강준일과 마음껏 놀고 싶다. 빨리 장현재와 주애리를 해결해서 두려움 없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오는 마음에 그리움과 기쁨 말고 두려움과 공포 같은 탁한 감정이 섞이는 기분은 정말 더러우니까.
어쨌든 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아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고 조심스레 왔는데.
“뭐라고요? 누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요?”
한녹영이 눈을 크게 뜨며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방금 강 대표가 뭐라고 한 거야? 누가 날 보고파한다고?
“내 조부님.”
“대, 대표님 할아버지가 왜 날 보고 싶어 하시는 건데요?”
“형수님이 우리 사이에 대해 찔렀거든. 그랬더니 조부님이 한녹영씨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
결국 강정석 회장에게 말한 건가. 장현재가 사진을 주애리에게 넘긴 건가. 이제 사진이 언론이 뜨는 일만 남았나? 한녹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불안함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짧은 시간 동안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쓰, 쓰러지신 않으셨어요? 강정석 회장님 또 쓰러지셨다는 기사는 못 본 것 같은데.”
“말짱하셔.”
“진짜요?”
“그렇다니까.”
혹시 절 안도시키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정말 강정석 회장이 멀쩡한 것 같았다.
“다행이다.”
말짱하시다니 일단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혹시 장 대표가 대표님 형수한테 사진 넘긴 거예요?”
역시 그런 건가? 말 잘 들으면 폐기하는 쪽으로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니.
“그건 아니고, 할아버님이 본인 소유의 지분을 나한테 넘길 거라고 선언하시니 마음이 급해져 불쑥 말을 내뱉은 것 같아.”
“회장님이 대표님께 지분 주신대요?”
강준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한녹영씨 앞으로 더 주의해야해. 형수 마음이 급해졌으니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요즘은 촬영장이랑 집만 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데요, 뭐.”
그리고 늘 스태프들과 함께이고, 경호원도 있다. 혼자 움직일 일이라고 해봐야 오늘처럼 가발을 쓰고 강준일의 집에 오는 것밖엔 없다. 박상호의 차를 이용 하는데다, 얼굴을 최대한 가린 채라 뒤에서 보면 영락없이 모델처럼 늘씬한 여자였다. 그런데 이제 이마저도 주의해야 하나? 마음이 무거웠다. 언제쯤이면 홀가분하게 강준일을 만날 수 있을까?
“장현재가 부른다고 해서 쪼르르 달려가지 말고.”
쪼르르, 란 표현이 어이없었다. 물론 예전에야 장현재가 언제 어디서든 부르기만 하면 말 잘 듣는 개처럼 쪼르르 달려갔지만 이젠 아니지 않나. 한녹영이 눈을 흘겼다.
“내가 개예요? 부른다고 쪼르르 가게.”
빙그레 웃은 강준일이 샐쭉해진 한녹영의 볼을 어루만졌다.
“어떤 말로 한녹영씨를 현혹할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무슨 말을 하건, 혹시 우리 사이를 폭로한다며 협박해도 절대 혼자서는 움직이지 마.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날 위한답시고 홀로 장현재에게 맞서는 일이 오히려 날 더 곤란하게 한다는 걸 명심해.”
말투는 부드럽지만 눈빛은 단호했다.
“약속할게요.”
“약속을 어기고 혼자 무모한 행동을 했다간 그 날로 바로······.”
“바로 뭐요?”
한녹영이 턱을 들었다. 바로 뭐? 바로 이별이라고? 전에 끝내자는 말로 제 속을 태웠던 걸 떠올리며 ‘이번에도 그랬단 봐라.’ 하고 속으로 단단히 별렀다. 입매를 꽉 다물고 여차하면 물어뜯을 준비 중인 한녹영을 향해 짧게 웃은 강준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거실엔 둘 뿐이라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마치 누군가 엿들으면 곤란하다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한녹영씨 좃을 꽉 묶어서 사정 못하게 한 후 싸지 않고 1시간 동안 박아버릴 거야.”
엄청난 소리를 하는 강준일의 얼굴은 무심 그 자체였다. 언뜻 수도사처럼 담백해 보일 정도였다. 곧장 몸을 뒤로 뺀 한녹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입김이 닿았던 귓불이 간질간질했다. 한녹영은 손으로 귀를 감싸며 당황한 눈으로 강준일을 보았다.
“무, 무슨 소리를······.”
“난 한다면 하는 남자인 걸 알 테고, 사정의 괴로움을 절절하게 느끼며 내 밑에서 1시간 동안 몸부림치고 싶다면 약속을 어겨보든가.”
저건 진심이다. 진짜 진심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 알굴이 악당 같았다. 지금도 가뜩이나 안 싸고 오래 박는데 뭐 1시간? 인간이 싸지 않고 1시간 동안 박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강준일은 정말 한다면 하는 남자라 발기를 지속시키는 약을 먹어서라도 기어이 1시간 내내 싸지 않고 박을 테니까.
“전 약속을 매우 잘 지키는 사람이라서요. 장 대표한테 연락이 오면 당장 대표님한테 전할게요. 요즘 장 대표가 너무 잠잠한 것 같아서 사실 저도 불안해하던 참이거든요.”
상상만으로도 창백해진 한녹영이 결연하게 말했다.
“좋아. 기특해.”
약속을 꼭 지키고 말겠다는 표정에 기특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강준일의 얼굴에 약간의 아쉬움이 스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근데 대표님 조부님이 저한테 막 돈다발을 던지거나 하시진 않겠죠?”
“무슨 소리야?”
강준일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회장님이 대표님을 매우 아끼신다면서요. 오래 전에 대표님이 몹시 아팠을 때, 병을 고쳐주는 의사에겐 계열사 한 개를 떼어준다고 공언하셨을 정도로 유난히 편애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손자가 남자와 사귄다는데 그냥 두고 보실 것 같지 않아서요.”
분명 반대할 텐데. 불호령도 떨어질 테고. 헤어져, 한다고 냉큼 네, 하며 떨어질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걱정이 되긴 했다. 위엄이 장난 아닐 테고, 또 LK 그룹 창업주 정도 되는 분이 본격적으로 저와 강준일을 갈라놓으려 한다면 견뎌낼 수 있을까? 강정석 회장에겐 돈도, 권력도 넘쳐날 만큼 있었다. 그리고 한녹영은 높은 사람이 보기에 얼마든지 마음대로 인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한낱 조무래기로 보일 테고.
자존심 상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한녹영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좀 더 큰스타가 되어야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걸 지키자면 힘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아직 제겐 누군가를 지킬 만큼 큰 힘이 있는 같지 않으니 만약 강정석 회장께서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님들처럼 불호령을 치며 당장 강준일 곁에서 꺼지라고 한다면······.
그냥 드러눕지 뭐. 한녹영이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절대 한녹영씨한테 돈다발을 던지실 일은 없어. 걱정되는 모양이지?”
“당연하죠. 벌써부터 떨려요.”
한녹영이 제 심장에 손바닥을 얹었다. 심장이 쿵쿵쿵 커다랗게 뛰고 있었다. 그리곤 이것 봐요, 라고 하듯 강준일의 손을 가져다 제 가슴 위에 놓았다. 손으로 전해지는 한녹영의 심장박동에 강준일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별 일 없을 테니 마음 편히 가져.”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그보다 어디가 아프셨던 거예요? 듣자 하니 20여 년 전이라고 하던데?”
20년 전이면 제가 8살 때. 어머니를 잃었을 무렵이다. 그리고 강준일은 16살 무렵 정도겠다. 지금 눈앞의 강준일은 쇠처럼 단단해 보여 아팠던 시절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단단했을 것 같은데.
“아직도 계열사 얘기가 떠도는 줄은 몰랐군. 뭐 워낙 유명한 얘기긴 하니까.”
짧게 웃은 강준일이 말을 시작했다.
“내가 16살 무렵이었을 거야. 어느 날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지. 병원을 수없이 다녀도, 수많은 검사를 해도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고. 열이 펄펄 끓었는데, 해열제를 아무리 써도 가라앉질 않았다고 하더군. 먹질 못하니 점점 말라갔고,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고 해. 그 무렵 일은 잘 기억이 안 나가든. 그저 몹시 아팠던 기억만 있지. 증세가 나아지기는커녕 자꾸만 심해지니 답답해진 조부께서 양의든 한의사든 설사 돌팔이든, 누구든 나를 낫게만 해주면 계열사 한 개를 떼어주겠다고 공언하셨던 거고.”
“그렇게 심하게 아팠던 거예요? 누, 누가 대표님을 고쳐준 건데요?”
누군지 알면 큰절이라도 해야겠다. 그때 누군가 강준일을 살려준 탓에 지금 이렇게 제 곁에 있는 거니까.
“한녹영씨가 미래를 봤다는 말에 내가 믿는다고 했던 말 기억하나?”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이니 신기니 하는 건 전혀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제 말을 수월하게 받아들여 놀랐다.
“네. 조부님 때문에 무속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무속신앙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지.”
찬찬히 기억을 돌이켜 본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주 예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새삼스레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 혹시?
“굿해서 나으신 거예요?”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한녹영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굿은 아니고, 아니지. 일종의 굿일 수도 있겠군. 좀 더 나중에 하려 했지만,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녹영씨한테 할 말이 있어.”
“뭐, 뭔데요?”
강준일의 표정이 진지해져서 더럭 겁이 났다. 신경줄이 바짝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녹영이 긴장한 채 물었다. 강준일이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는 듯 부드럽게 웃더니 말했다.
“날 살려준 분은 액받이 무당이셨어.”
액받이······ 무당? 왠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꽉 조여드는 듯도 했다. 등줄기로 소름이 올라왔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한녹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액받이······ 무당이요?”
고개를 끄덕인 강준일이 말을 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눈을 뜨니 몸 상태가 한결 가볍더군. 이후 빠르게 회복되었고. 훗날 조부님께 얘기를 들었지. 액받이 무당을 수소문해서 내 병을 대신 가져가게 했다고 말이야. 내 생명을 살려주신 분이라 개인적으로 만나 뵙고 감사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날 살린 무당이 누구인지 조부님이 입을 꽉 다문 채 말씀해주시지 않더군. 무당이 가장 원하는 걸 대가로 주었으니 난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할아버님 일도 있고, 내 개인적으로도 도움을 받았던 터라 미래를 내다봤다는 말을 수월하게 믿었던 거야.”
20년 전, 마지막 액받이 굿을 하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온몸에 열꽃이 피어 있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전신이 뜨거워 품에 안기기 무서울 정도였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잡는 순간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담근 기분이 들었다. 울먹이는 한녹영을 향해 어머니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라고 하셨다. ‘이걸로 무당 팔자는 끝이다. 드디어 전생의 업을 다 갚았다.’ 라고 말이다. 그로부터 딱 한 달 후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강준일이 아팠고, 액받이 무당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니 기분이 묘했다. 왠지 목덜미가 섬뜩하기도 했다.
‘설마······?’
한녹영이 강준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액받이굿 상대가 강준일이었나? 어머니가······ 강 대표를 살리셨던 건가? 외조모와 강준일 조부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했다. 전혀 근거 없는 가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당이 가장 원하는 걸 대가로 줬다니?
어머니는 액받이 무당 일을 하면서 뭔가를 대가로 받아온 적이 없었다. 늘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빈손으로 돌아오셨고,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열흘까지 자리보전하고 누워서 죽을 듯이 앓으셨다. 당장 숨이 넘어가는 건 아닐까, 더럭 걱정이 들 만큼 고통스럽게. 그 무렵 어렸던 한녹영은 어머니 옆에 가만히 붙어 있다가 한 번씩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곤 했었다. 어머니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어머니 코밑에 손을 댔는데 더 이상 바람이 나오지 않았다. 한녹영은 차갑게 식어가는 어머니의 품에 한참이나 안겨 있다가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을 때 외조모의 집으로 달려갔었다. 비가 왔었고, 맨발로 추적추적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으며 철벅철벅 뛰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한녹영씨 생각이 맞아.”
한녹영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강준일이 말했다. 한녹영의 동공이 크게 확장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어, 어머니가?”
“그래. 스캔들이 터졌던 날 한녹영씨가 쥐고 있던 옥가락지를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 왠지 낯익었거든. 그래서 미안하지만 한녹영씨 모친에 대해 좀 알아봤더니 액받이 무당이었다는 결과가 나오더군.”
옥가락지를 보고······. 한녹영이 입을 벌린 바보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강준일을 응시했다. 순간 깨달음이 왔다. 가락지 때문에, 어머니 때문에 날 찾아왔었나? 어머니의 가락지를 끼고 나간 적이 한 번 있었다. 프로젝트 B의 첫 무대인사 날이었는데 그 날이 마침 어머니 기일이었다. 납골당에 찾아갈 시간이 없었던 터라 반지라도 종일 들고 다니자 싶어 끼고 있다가 MC의 그게 뭐냐는 질문에 ‘어머니 유품입니다.’ 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강준일도 왔었다. 그걸 봤던 건가? 그래서 이번처럼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 제 뒤를 파봤던 건가.
그리도 따뜻한 눈으로 날 찾아왔던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었나? 주애리 때문인가 하고 조심스레 짐작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이유라면 책임감 때문일 테고, 주애리가 이유라면 미안함 때문일 테지. 어쩌면 그 둘 모두 때문일 수도 있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한녹영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임감이든 죄책감이든 무슨 상관이랴. 이유가 뭐든 강준일이 눈에 온기를 담고 저를 찾아왔었고, 그로 인해 제가 회귀 후 강준일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만약 강준일이 저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회귀 이후에도 그에게 말을 걸 엄두조차 못 냈을 거다. 여전히 제 마음에 강준일은 냉정하고 지독히 차가운 남자로만 남아있었을 테니 말이다. 저와 강준일의 인연이 이쪽으로 흐르게 된 건 전부 회귀 전 강준일이 병실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강준일이 제게 왔고, 어머니의 희생으로 과거로 돌아와 예전과는 다른 인연이 시작되었다.
“놀란 모양이군.”
한참 말이 없자 강준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금······ 전혀 짐작조차 못했어요. 엄마가 대표님을 살리셨을 줄은······.”
뭐라고 해야 하지.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꿈틀대며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모르는 사이 아주 오래 전부터 강준일과의 인연의 끈이 닿아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가슴 뭉클했다. 그리고 끈이 닿아있는지도 모르고 먼 길을 돌아 돌아 이제야 강준일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후회도 들었다. 왜 진작 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그리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던 걸까?
“알아보니 날 살려주신 후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던데······.”
“혹시 미안하다고 할 생각이었다면 그러지 마세요. 엄마는 대표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니까요.”
이미 이전에 여러 차례 액받이 굿을 하며 다른 사람의 불행과 액운을 대신 짊어지며 몸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인가. 액받이 무당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 수가 극히 적어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며, 백이면 백 요절한다고 되어 있었다. 액받이 무당이 되고 싶어서 되는 사람은 없고, 전부 전생의 업으로 인한 타고난 팔자라고 했다. 무당 노릇을 하든, 하지 않든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간다고. 그러니 어머니의 죽음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고, 어머니께 죄송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한녹영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업을 풀고 후생의 복록을 보장 받았는데 어머니가 그걸 희생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제대로 살았더라면 어머니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았을 텐데.
‘엄마.’
한녹영이 속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울컥울컥 피를 토하는 것처럼 뜨거운 심정으로 절절하게 불러보았다.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서 다행이고,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서 죄송했다. 남겨둔 아들이 얼마나 걱정되셨을까.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던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머니께 고마워. 날 살려서 이렇게 한녹영씨와 만나게 해줬으니까.”
“······.”
한녹영이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이 울컥 쏟아질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웃은 강준일이 그런 한녹영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조부님 만날 일은 걱정할 것 없어. 돈다발을 던지는 대신 한녹영씨 발밑에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라니까.그러니까 당당하게 조부님께 날 달라고 청하라고.”
강준일의 말에 장인어른을 찾아가 ‘딸을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예비 사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가에 눈물을 매단 한녹영이 짧게 웃었다.
“그럼 가져라, 하며 주실까요? 회장님이 준다고 하면 대표님은 이제 내 사람이 되는 거죠?”
“조부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난 이미 한녹영씨 사람이야.”
가슴이 뭉클해졌다. 태양을 품은 듯 한없이 따뜻한 기분이 전신을 감쌌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의 덩어리를 삼키듯 어금니를 꾹 깨문 한녹영이 강준일의 목으로 팔을 감았다. 강준일이 그런 한녹영을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았다. 쿵쿵쿵. 큰소리로 박동하는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한녹영이 강준일의 품으로 더욱더 밀착하듯 안겼다.
이 사람이 좋다. 사랑한다. 남은 평생 강준일의 곁에서 행복하고 싶었다. 어머니께 이번에는 이렇듯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보답은 제가 행복하게 사는 것뿐일 테니까. 그러니 행복하자. 제대로 살자. 마음껏 사랑하고 넘치도록 사랑받자. 사랑······ 한다고 말하자. 가슴에 충만하게 차오른 감정을 고백하자. 모든 일이 다 해결되어 몸과 마음이 후련해지면 그땐 고백하자. 이 남자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는 그 날을 바로 고백하는 날로 정하자.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강준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쉬운 표정으로 한녹영을 놓은 강준일이 전화기를 집었다.
“한 실장이 이 시간엔 무슨 일이야?”
상대는 한성준인가 보았다. 강준일은 눈살을 찌푸린 못마땅한 얼굴로 통화했다.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해 함께 있는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좋은 시간을 깬 한성준의 전화가 반갑진 않았던 것이다.
“알았어. 알아봐.”
짧은 통화를 마친 강준일이 휴대전화를 소파 빈 자리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무슨 일이예요? 회사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요?”
“안 좋은 일이 생긴 쪽은 한녹영씨 드라마인 것 같은데.”
“네? 그게 무슨······?”
“묘한 소문이 흐르는 모양이야.”
“무, 무슨 소문이요?”
불안함이 요동쳤다. 한녹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에 관한 소문은 아니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무, 무슨 소문인데요? 혹시 도망자 출연 배우들 중에 과거 못쓸 짓을 당한 배우가 있다는 소문이에요?”
강준일이 눈썹을 올렸다.
“알고 있었나?”
맞나 보다. 한녹영이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어제······ 화보 촬영하러 갔다가 패션 잡지 에디터 누나한테 들었어요. 가십 기자들 사이에 묘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 설마 기사화되거나 하진 않겠죠? 그럼 안 되는데.”
기사화된다면 더 이상 돌이킬 방법이 없어진다. 제 스캔들이야 강준일과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웬만큼은 해결한 상태라지만 장한경에 관한 스캔들이 터진다면 수습할 방도가 없었다. 그 일이 불러올 파장을 한녹영은 잘 알고 있었다. 장한경의 모든 신상이 공개되었고, 언론은 단순히 흥밋거리로 그를 샅샅이 파헤쳤다. 마치 성폭행을 당한 모든 원인이 장한경에게 있는 냥 몰고 갔다. 우스운 건 가해자의 신상은 어디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녹영은 여전히 장한경 사건의 가해자를 몰랐다. 전에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예전 제게 중요했던 건 그저 장한경의 파멸뿐이었으니까. 해서 그 일은 피해자만 존재하고, 피해자만 돌을 맞고, 결국 피해자가 자살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한녹영씨는 뭔가 알고 있는 건가?”
불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에서 수상함을 눈치 챈 강준일이 물었다. 한녹영이 시선을 들었다.
“소문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알아요. 기사화는 막아주시면 안 될까요?”
“한녹영씨한테 중요한 사람인가?”
“절 잘 따라서······ 동생 같아요. 상호 형 기획사 배우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부탁할게요.”
한녹영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강준일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막아보겠지만 찌라시나 트위터 등을 통해 은밀하게 퍼지는 루머까지 막을 순 없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식 기사화만 막아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제게 장한경에 대해 귀띔해준 사람이 누구인지만 기억해내면 소문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도 알 수 있을 텐데.
“참 다사다난하군.”
“네?”
“도망자 말이야. 드라마 제작 단계부터 촬영 중인 지금까지, 일이 쉼없이 터지는 느낌이거든.”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에 도망자는 별 문제없이 평온하게 제작 되어 대박을 터트렸다. 지금 도망자가 끊임없이 사고를 겪는 이유는 전부 저 때문이었다. 제가 과거로 돌아와 정해진 일을 비틀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느껴졌다. 도망자도, 장한경도, 그리고 저도······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길 원한다. 이번에는 제게 소중해진 사람들 중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준일이 저로 인해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도 싫고, 장한경이 다치는 것도 싫었다.
“정말 엄청난 대박이 터지려고 그러나 보죠.”
“그럼 곤란한데.”
“왜요?”
대박 터지는 일이 왜 곤란하다는 거야? 강준일은 돈 많이 벌어서 좋고, 저는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톱스타가 될 테니 좋은데. 의아해 하는 한녹영의 뺨을 건드리며 강준일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한녹영씨가 고파서 쓰러질 지경인데 대박이 나면 더 바빠질 게 아냐.”
“조금만 참아요.”
한녹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살짝 웃었다.
“허벅지 찔러가며 참고 있는 중이야. 빠르면 3월 말, 늦어도 4월초에는 촬영이 마무리될 테니까.”
“아······.”
“아?”
강준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녹영의 입에서 아, 하는 신음성이 흘러나오자 불길함이 확 들었다.
“연장······ 될 것 같은데······ 3회 정도요······.”
강준일이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누구 마음대로 연장이야? 최대 투자자의 권한으로 반대할 거야. 무조건 반대야!”
농담이나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들렸다. 강준일이 반대하면 연장 제작은 힘들 텐데. 한녹영은 결연하게 이를 가는 강준일을 향해 다가가 입술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도망자 끝나고, 또 장현재와 대표님 형수 일 해결해서 아무 부담 없이 만날 수 있게 되면 우리 하루 종일 벌거벗은 채 침대에서 뒹굴까요? 밥도 침대에서 먹어요. 벌거벗은 채로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실컷 뒹굴다 서로의 정액이 찐득해진 채 밥을 먹고, 그러다 또 눈이 맞아 뒹굴거리며 하루를 보내요.’ 하고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이자 강준일의 얼굴이 풀어졌다.
“감당할 수 있겠어?”
“상호 형이 공진단 얘기하던데, 먹어볼까 해요. 체력 유지하는데 좋대요.”
대단한 비밀얘기라도 하듯 한녹영이 자그맣게 속삭였고, 강준일이 그런 한녹영의 뒤통수를 눌러 진한 입맞춤을 하며 웃었다.
“한녹영씨 날 조련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토끼도 맹수를 조련할 수 있거든요.”
방법은 간단하다. 맹수가 토끼를 사랑하게 만들면 된다. 잘난 척을 하는 한녹영을 보는 강준일의 얼굴이 느슨했다.
“입에 아주 단 사탕을 물려줬으니 참아보도록 하지.”
그때 한녹영의 휴대전화가 달콤한 분위기를 깨는 꽹과리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만 돌아오라는 박상호의 재촉 전화였다. 먼저 자라고 했는데 또 안자고 눈 벌겋게 뜬 채 현관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녹영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리곤 휴대전화를 원수라도 되는 냥 노려보는 중인 강준일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고 가라면 안 되겠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가득하지만 아무래도 날이 밝으면 가발을 쓰고 있다하더라도 들킬 가능성이 컸다.
“나중에요. 일 다 해결되면 그때요.”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강준일의 빌라를 나오는 한녹영의 얼굴빛이 흐렸다. 꼭 떼쓰는 아이를 떼어놓고 가는 엄마의 심정이 이럴까. 발걸음이 잘 안 떨어졌다. 그놈의 스캔들. 비열한 장현재. 악독한 주애리. 두고 보자. 대대손손 빌어먹으라고 저주할 거다. 한녹영은 이를 으득으득 갈며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운전대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빨리 마음 편히 만나서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다.”
주애리나 장현재가 두 눈 벌겋게 뜬 채 저와 강준일을 감시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고작 30분 머무는 것도 마음이 불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빨리 마음 편하게 강준일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의 집에서 느긋하게 머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조만간 그런 날이 오겠지? 지금은 어차피 스케줄도 바쁘니까. 그리고 완전히 헤어지는 것보다는 아슬아슬하게라도 만나는 편이 나으니까. 애써 정으로 툭툭 쳐낸 돌처럼 날카로워진 마음을 다독인 한녹영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뭐? 무슨 소리야? 한경이가 아픈 것 같다니?”
다음 날 송도에서의 촬영을 끝내고 파주로 넘어가던 중 장한경의 로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동 중에라도 좀 자려고 늘어져 있던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박상호는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하더니 “알았다.” 하며 전화를 끊었다.
“한경이가 아프대?”
한녹영이 물었다. 박상호가 감지 않아 기름기가 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그런 모양이야. 아침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애가 갑자기 시름시름하더니 간신히 촬영 끝냈다더라. NG 별로 없는 녀석이 오늘은 NG도 꽤 많이 낸 모양이야. 감기인가 싶어 약이랑 죽 사다주고 퇴근하는 길이라는데, 지금은 자는 것 같다니 이따 전화나 한 번 넣어봐야겠다. 한경이 내일은 스케줄이 없으니, 감기면 약 먹고 내일까지 푹 쉬면 되려나. 스케줄이 고되어서 병난 건가. 자식, 은근 약골이네. 고작 이 정도로 골골대고.”
툴툴대는 박상호의 음성에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그러게. 하고 무성의하게 대답한 후 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녹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촬영장에 이상한 소리가 돌진 않았대?”
“이상한 소리? 무슨 소리?”
박상호가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끔벅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제 추측이 틀린 모양이었다. 한녹영이 “아니야. 그냥, 또 나랑 대표님 소문이 돌았나 해서.”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너랑 강 대표는 슬슬 잠잠해지는 것 같더라. 내가 계속 체크 중인데, 상대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있어 다행이지.”
“뭐가 다행이야, 오빠! 루머가 아예 사라져야 다행이지!”
한녹영과 강준일의 사이를 모르는 정지혜가 그게 뭐 다행이냐며 박상호에게 타박을 주었다. 한녹영의 눈치를 슬 살핀 박상호가 “베스트는 완전히 사라지는 거지만 그게 쉽겠냐.” 하고 정지해의 말을 받아쳤다.
“근데 참, 이상한 소리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운전에 열중하고 있던 장한수가 신호에 걸려 잠깐 차를 세운 틈을 타 뒤로 몸을 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가?”
박상호가 물었다.
“한경이 성형했어?”
“뭔 헛소리야? 왜? 한경이 성형했대? 이제 첫 드라마 찍은 신인한테 벌써 성형설이 붙은 거야? 나 참, 네티즌들 빠르다. 하긴 녹영이도 신인 때 성형설이 돌긴 했지. 살 빠지기 전 사진 올려서 지금이랑 비교해가며 성형이 확실하다며 핏대 세운 네티즌들 있었어. 한울이 발 빠르게 관리해서 이후에 그런 말 쏙 들어갔지만.”
기억난다는 듯 정지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한경이도 비슷한 경우겠지 뭐. 살빼서 용 된 연예인들 많잖아.”
“그렇긴 한데······ 성형뿐만 아니라 이름도 바꿨다면서 신분세탁 한 거냐는 글을 봤거든.”
“어? 이름까지?”
“응. 원래 이름은 장한경이 아니라던데. 도망자가 뜨니까 만만한 타겟 잡아서 씹으려는 의도 같아서 무시해버렸는데, 이상한 소리라고 하니 문득 생각나서 말해본 거야. 신경 쓰지 마.”
실컷 파문을 일으킨 장한수는 홀가분한 얼굴로 도로 몸을 틀더니 다시 운전에 열중했다. 한녹영은 굳은 표정으로 장한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신분세탁? 나 참. 한경이가 범죄자야? 이젠 별 걸 다 건드리네. 성형이야 이젠 기본 옵션이나 마찬가지인데. 근데 한 번 확인은 해보야겠다.”
미리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것과는 다르니까. 박상호가 중얼거렸다.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성형설. 이름을 바꾼 신분세탁. 모두 전에 제가 했던 일들이었다. 성형설과 개명으로 슬슬 건드리다 강간에 관한 일을 확 터트린 것이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이전 삶에서의 저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다.
멀미가 날 것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박상호와 정지해가 걱정스레 “괜찮아?” 하고 물어왔다.
한녹영은 간신히 “응. 나 눈 좀 감고 있을게.” 하고 말한 후 몸을 뒤로 기대었다. 박상호가 담요를 덮어주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차가 섰다. 파주 세트장에 도착한 것이다. 숨을 들이켜며 내렸는데 어쩐지 촬영장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한녹영은 곧장 송정빈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하네요.”
왔냐, 하고 인사부터 한 송정빈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박지한이 했던 말 기억하지?”
“무슨······ 아, 우리가 뭐 폭탄을 끌어안고 있다고 했던 그 말이요?”
“어. 저쪽 달콤한 그대 팀에서 그 말이 확실하다는 식의 말이 돌고 있나봐. 폭탄이 터지면 우리 드라마는 끝장이라고. 최 AD가 그말을 듣고 와서 흥분해서 말하니까 카메라팀 스태프 하나가 장한경 얘기를 꺼내더라고.”
“한경이가 왜 튀어나와요?”
장한경 이름이 튀어나온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우선 모르는 척 팔짝 뛰며 물었다.
“한경이가 고딩때 따 당했다고 얘기했었잖아. 누군가 게시판에 장한경이 성형했고, 이름도 바꿨다는 식의 글을 올렸다더라고. 그래서 왕따 당한 것 때문에 성형하고 개명한 것이 아니냐, 저쪽에서 말하는 폭탄이란 장한경의 왕따설이 아니냐, 이런 말이 오가는 중이지. 학창 시절 왕따 당한 일이 뭐 그리 대단한 폭탄이라고. 왕따시킨 놈이 폭탄이면 모를까.”
“한경이도 그 얘기 들은 거예요?”
“응. 스태프들 얘기 듣고 애가 하얗게 질려서 NG도 여러 번 냈다더라. 나름대로는 충격이 컸겠지. 괜히 저 때문에 드라마에 피해주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될 테고. 중퇴했을 정도로 꽤 심하게 따돌림을 당한 것 같은데, 그걸 애써 잊고 살다 새삼 떠올랐을 테니 마음이 괴롭기도 할 테고······ 여러모로 충격 받은 게 이해된다. 그 와중에 펑크 안 내고 어쨌든 끝까지 촬영하고 돌아간 거 보면 의지 하나는 대단한 녀석인 것 같아. 널 잘 따르니 전화라도 해줘.”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말에 혹시 했는데, 역시 들었구나. 한녹영이 한숨을 삼켰다.
“네. 그럴 생각이에요.”
“뭔 놈의 드라마가 루머가 끊이질 않냐. 네 루머가 끝나가나 싶으니 이젠 생 신인인 장한경의 루머가 슬슬 고개를 들이미니······.”
“루머의 가장 큰 지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 죄송합니다.”
한녹영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송정빈이 웃었다.
“게시판 지분이나 어떻게 해봐. 나보다 네 얘기가 더 많아서 나 질투나. 내가 주연이거든!”
“제 연기력이 일취월장해서 선배를 넘어섰으니 어쩌겠어요.”
잘난 척을 해대는 한녹영을 보는 송정빈의 표정이 썩은 생선을 씹은 듯했다. 그를 뒤로 한 채 감독에게로 걸어가는 한녹영의 표정이 언제 거만했냐는 듯 흐려지고 있었다.
“너도 같이 가려고?”
촬영이 끝난 후 한녹영을 빌라에 내려주고 장한경의 집에 가겠다는 박상호의 말에 한녹영이 저도 가겠다고 했다.
“응. 걱정돼서. 누나 말이 아까부터 방안에서 꼼짝도 않는다며?”
“밥도 안 먹고 노크해도 대답도 없단다. 게시판에 떴다는 신분세탁설 때문에 충격을 심하게 받은 모양이야. 이 자식 내 전화도 안 받고. 근데 넌 안 피곤하겠어? 내일도 일찍부터 촬영 잡혀 있잖아.”
“괜찮아. 기껏해야 1-2시간일 텐데 뭐.”
“그래, 그럼. 한수야, 한경이 집으로 바로 가자.”
“어.”
정지해를 내려주고 한녹영의 빌라로 향하던 장한수가 차를 돌렸다. 장한경의 집에 도착하니 11시 반이었다. 남의 집을 방문하기엔 매우 늦은 시간이라 잠깐 들르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르니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문이 벌컥 열렸다.
“어서 오세요. 매니저님. 한녹영씨도요.”
장한경 누나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장한경이 방안에 틀어박혀 대꾸도 않자 답답하기도 하고, 무슨 일인지 걱정도 되어 일이 손에 안 잡혔던 것이다. 마치 학창시절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경이는 아직도 방안에 있는 겁니까?”
“네. 꼼짝도 안 해요. 대꾸도 없고요. 매니저님이 한 번 불러보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박상호가 장한경의 방문 앞으로 가 문을 두들겼다.
“한경아, 장한경! 어이, 흑돼지 청년! 대표 왔으니 문 좀 열지?”
하지만 방안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한녹영은 박상호의 뒤에 서서 답답한 눈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한녹영씨, 주스 좀 드세요. 대접할 만한 것이 딱히 없네요. 매니저님도요.”
장한경 누나가 오렌지 주스 두 잔을 내왔다. 고맙습니다, 하고 희미하게 웃으며 잔을 받아든 한녹영의 눈에 벽에 걸린 사진이 보였다.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저 사진은······.”
한녹영의 시선 끝을 따라간 장한경 누나의 표정이 단번에 싸늘해졌다. 그녀는 표독하게 사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 저 사진은······ 한경이가 얘기했다고 하던데, 아시죠? 고등학교 때 안 좋은 일 겪은 거요.”
“네. 들었습니다. 왕따······를 당했다고.”
“네. 저 새끼가 한경이 괴롭힌 새끼에요. 죄송해요, 이런 거친 표현 써서. 그렇지만 저 새끼한테는 고운 말이 안 나와서요. 내가 너무 분해서 저 새끼 죽이려고
칼 들고 찾아갔었거든요. 칼로 배 쑤셔서 죽이려다 실패한 후에도 미친년처럼 계속 찾아갔었어요. 한경이는 정신을 못 차리지, 지켜보는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그 놈 죽이고 나도 죽자 싶었거든요. 찾아가서 저 새끼 집 앞에서 이름 부르며 내 동생 가······ 괴롭힌 새끼라고 욕도 했고요. 그런데 그 새끼가 나한테 죽을까봐 겁났는지 아니면 동네에 망신살이 뻗쳐 부끄러웠는지 유학을 갔더라고요. 합의금이라고 고작 이천 던져주고요. 사람을 거의 죽이다시피 해놓고 이천이라니······ 학교에서도 좋은 일도 아니니 합의해서 묻고 가자는 식으로 말하고, 경찰도 마찬가지였고요. 부잣집 새끼였거든요. 내가 왜 그랬냐고 미친년처럼 달려들면서 물었더니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한경이가 만만해보여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부모 없이 누나랑 단둘이 사니까 나쁜 짓 해도 될 것처럼 보였나 봐요. 그 말이 어찌나 가슴에 사무치던지.”
“······.”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돌아오면 그때 죽여 버려야지, 죽이지 못하면 그 새끼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세상에 알리기라도 해야지, 수십년이 흘러도 얼굴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저렇게 걸어둔 거예요. 한경이한테 괴로운 일이 될 테지만,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쳐서 털고 일어나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사진 보기만 해도 발작하더니 이젠 아침마다 저 사진보며 마음을 다잡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이제 그만 뗄까 싶기도 해요. 언제까지 저 새끼에 대한 원한과 분노로 살 순 없으니까요. 한경이도 이제 다 딛고 일어선 것 같은데, 언젠가 꼭 갚아주고 싶다는 내 마음이 한경이한텐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내가 복수한답시고 저 자식한테 몹쓸 짓을 했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오히려 한경이한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셈이 될 테니까요. 그냥 인과응보라는 것이 꼭 있어서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벌 받았으면 좋겠네요.”
씁쓸하고도 서글프게 웃은 장한경 누나가 “이참에 떼야겠다. 잊을 때가 되긴 했죠. 한경이가 배우로 새출발 했으니 잊어봐야겠어요.” 하며 사진을 뗐다. 한녹영은 그녀의 손에서 구겨지는 사진에 끝까지 시선을 고정했다. 단독 사진은 아니고 여러 명이서 함께 찍은 사진에서 장한경을 괴롭혔다는 남자의 얼굴 부분만 확대해 걸어둔 사진처럼 보였다. 한녹영은 얻어맞은 사람처럼 황망하게 사진을 보았다. 충격이 너울처럼 머리를 치고 지나는 기분이 들었다.
‘주민성.’
사진의 주인공 이름이 곧장 떠올랐다. 주민성이었다. 지금과 얼굴이 전혀 다르지만, 지금 얼굴에서는 예전 얼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확실히 주민성이 맞았다.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전 삶에서 성형 전의 주민성 얼굴을 본 적이 있으니까. 성형 전 얼굴은 평범하다고 해야 하나, 흔한 얼굴이어서 연예인하려고 얼굴을 싹 바꿔버렸나, 이래서야 부모도 못 알아보겠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우연히 과거 사진을 봤을 때 주민성이 심하다 싶을 만큼 하얗게 질려 미친 듯이 사진을 치웠던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이름이······ 뭐였습니까?”
“주형호였죠. 저 새끼 때문에 한경이는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바꿔야했어요. 사실 예전 일이 드러날까 봐 연기는 반대했는데, 어릴 때부터 꿈이 배우였고 또 본인이 연기하면서 조금씩 털고 일어나는 것 같아 결국엔 응원해줄 수밖에 없었죠. 조마조마하긴 해요. 이젠 드라마에도 나오고, 얼굴이 전국적으로 알려졌으니 누가 한경이 알아보고 예전 일 터뜨릴까봐서요.”
장한경이 살기 위해 이름과 얼굴을 바꾼 것처럼 주민성 또한 과거를 덮으려고 성형을 하고, 개명을 한 모양이었다. 사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변신이었다. 한녹영 또한 진짜 우연히 주민성의 예전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저 사진을 봤어도 그저 ‘저렇게 생긴 놈이 장한경을 강간했구나.’ 하고 넘겼을 거다. 실제 장한경은 기사로 뜬 주민성 사진을 보고도 몰라봤다.
가만, 그럼 전에 제게 장한경에 대해 귀띔해준 이가 주민성이었나? 주민성이 직접 말해줬다면 기억하고 있었을 텐데.
“안 나오네요.”
암만 두들기고 애원하고, 협박해도 장한경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지친 박상호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섰다.
“매니저님이랑 한녹영씨까지 오셨는데, 저 녀석이!!”
장한경 누나의 얼굴이 앙칼지게 변했다. 더 이상 투정은 봐주지 않겠다는 듯 강경한 태도였다. 주민성에게 칼을 들고 찾아갔고, 제게 황산을 던졌고, 주민성의 사진을 벽에 떡하니 붙여둔 걸 볼 때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것 같았다. 저런 성격의 누나가 키워서 장한경이 바르고 의지 강한 남자로 자란 모양이다.
박상호가 문을 부술 기세인 그녀를 서둘러 만류했다.
“그냥 두세요. 아파서 사람 상대하기 싫은 모양이죠. 다행히 내일은 스케줄이 없으니까 그냥 혼자 푹 쉬도록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물어볼 것도 있고, 상태도 확인할 겸 겸사겸사 왔는데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겠습니다.”
저런 상태인 장한경에게 ‘너 개명했냐? 성형도 했고?’ 하는 질문을 던질 순 없었다.
“한경이가 방안에서 나오면 매니저님께 연락하라고 할게요.”
“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장한경의 누나가 빌라 앞까지 따라 나와 안녕히 가시라며 인사했다. 한녹영 또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밴에 올라탔다.
“뭔 일인데 너라면 강아지마냥 달려와 반기던 놈이 네 이름을 댔는데도 꼼짝도 않는지 모르겠다.”
박상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아 걱정이 컸다.
“형, 주민성 매니저 누구인지 알아?”
“그거라면 내가 알아.”
장한수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김태섭이라고, 하영택 그 개새끼 졸졸 쫓아다니던 놈 있잖아. 그놈의 주민성 메인 매니저로 들어갔어.”
김태섭? 한녹영이 찬찬히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1년 정도 전에 한울에 들어와 하영택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형님, 형님’ 하고 애교를 부리던 자였다. 하영택이 장현재 말에 죽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김태섭은 하영택의 말에 죽는 시늉이라도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하영택이 주민성 매니저로 김태섭을 꽂았고, 고작 로드 1년 만에 한울에서 미는 거물 신인의 메인 매니저가 되어 거들먹댔었다.
‘상호 형님, 웬 신인 하나한테 뻑가서 한녹영씨 버리고 갔다면서요? 형님이 한녹영씨보다 낫다, 연기력이 최고다, 한녹영씨는 그 신인한테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뭐 이딴 식으로 얘기하고 다닌다던데······ 그냥 두고 볼 겁니까? 내가 알아보니 상호 형님이 맡은 신인······ 뒤가 좀 구린 것 같던데.’
피식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절 자극해 장한경의 뒷조사를 하도록 만든 사람은 김태섭이었다. 왜 그게 이제껏 생각나지 않았을까.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섭을 조종한 사람은 당연히 주민성이었을 테지. 주민성 새끼, 장한경이 연예인이 된 걸 알고 혹시 제 과거가 드러나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에 절 이용해 장한경을 망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둠 속에 숨어있으면서 저를 표면에 내세워서 말이다.
장한경도 해치우고, 일의 전말이 드러나면 눈엣가시 같았던 한녹영이 화살받이가 될 테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겠지. 본인밖에 생각 안하는 이기적인 성격에 남을 이용하는 것까지······ 장현재와 너무나 똑같다. 둘이 찰떡궁합이었다.
이번 삶에선 내가 빠져줬으니 둘이서 쿵짝하며 잘 살면 될 텐데, 왜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그나저나 한울은 무슨 악의 소굴도 아닌데, 대표부터 소속 배우까지 왜 다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 악의 소굴이 맞나. 저도 한울에 있을 땐 주민성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한숨을 푹 내쉰 한녹영이 눈을 감았다. 일단 누가 배후인지 알아냈으니 한시름 덜었다. 기사가 대대적으로 터지기 전에 주민성을 찾아가 더 이상 장한경에 대한 루머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막아야지. 그런 후에 이번엔 장한경이 아닌 주민성의 뒷조사를 해볼까?
휴대전화가 울렸다. 눈을 뜬 한녹영이 반갑게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늦은 시간의 전화라 상대가 강준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발신인은 강준일이 아니었다. 액정에 장현재 이름이 떠 있었다.한참 전화기를 노려보던 한녹영이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그에게 약점을 잡힌 상태라 무시할 순 없었다.
“왜?”
ㅡ 지금 좀 만나자.
“자정도 넘었어. 난 내일 아침 일찍 또 스케줄이 있고.”
ㅡ 오는 편이 좋을 텐데. 네가 나한테 개길 입장이 아니라는 거, 잊었어?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협박하는 말투에 속이 쓰려왔지만 한편으로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제, 오늘 새벽인가. 아무튼 주애리가 바짝 약이 올랐으니 더더욱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지 않았나.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됐으니 어떤 식으로든 담판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알았어, 지금 갈게.”
망설임 없이 대답한 한녹영이 전화를 끊었다.
“뭐야? 누군데 지금 간대?”
궁금한 눈으로 보고 있던 박상호가 득달같이 물어왔다.
“장 대표.”
“뭐?! 장 대표가 또 널 왜 보자는 거야?! 그리고 넌 또 왜 간다고 한 거고? 그것도 이 시간에? 그냥 무시해.”
“무시할 수가 없어.”
“왜?!”
한녹영이 장한수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박상호에게 “나와 강 대표 사진을 가지고 있어.” 라고 속삭였다. 박상호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그걸 왜 이제 말해?!” 하고 타박하더니 시무룩한 한녹영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었다.
말도 못하고 혼자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왜 갑자기 가발을 쓰고 다니나 했더니만, 단순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한참이나 네 마음 다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두들겼던 박상호가 안면을 싹 바꾸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혼자 가는 건 안 돼.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장 대표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같이 가자.”
내가 지켜줄게. 나만 믿어. 이런 표정의 박상호를 보며 한녹영이 짧게 웃었다. 장현재가 맘먹고 달려들면 한방에 나가떨어질 것 같은 박상호라 전연 의지가 되지 않으니 마음만 받을 생각이었다.
“아니야. 형은 집에 있어. 같이 갈 사람 있어.”
초인종을 눌렀더니 마치 대기하고 있었던 듯 곧바로 문이 열렸다. 한녹영은 움찔하며 뒤로 반 보 정도 물러섰다. 장현재가 모자를 푹 눌러쓴 한녹영을 보고
“들어와.” 하며 옆으로 비켜섰을 때 어둠 속에서 강준일이 슥 모습을 드러냈다. 장현재는 한녹영의 뒤에 서 있는 강준일을 보고 눈썹만 휘어 올렸을 뿐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혼자 오라는 말을 안 했던가.”
장현재가 말했다. 하지만 별로 분노한 기색 없이 맥없는 말투였다.
“안 했어. 설사 했다고 하더라도 절대 혼자 오진 않았을 거야. 대표님과 약속했거든.”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지켜보기 싫다는 듯 강준일이 성큼 앞으로 나서 몸으로 장현재의 시야에서 한녹영을 가려버렸다.
“한녹영씨는 차에서 기다리도록.”
강준일이 눈짓하자 함께 온 경호원들이 한녹영을 호위하듯 감싼 채 내려갔다. 강준일은 자연스레 실내로 들어섰다. 그리곤 구둣발로 성큼성큼 걸어 거실을 가로지른 후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손님 대접이 영 엉망이군. 물도 한 잔 안 내줄 셈인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에게, 그것도 남의 집을 구둣발로 들어온 사람에게 내어줄 물은 없습니다만.”
장현재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강준일이 픽 웃었다.
“내가 한녹영씨와 함께 온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는군.”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녹영이 혼자 왔다고 하더라도 강 대표님을 곧 불렀을 겁니다. 드디어 주애리로부터 최종 오더가 내려왔거든요.”
강준일의 맞은편으로 앉는 장현재의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마치 며칠 잠을 못 잔 사람의 얼굴 같았다. 강준일이 눈썹을 휘어 올렸다.
“형수가 약이라도 써서 나와 한녹영의 영상을 뜨라고 하던가?”
정곡을 찔린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장현재의 표정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벼랑에라도 몰린 사람처럼 당장 영상을 떠서 보내라고 소리치더군요.”
영상을 떠오든지, 아니면 교도소 행이라며 협박하던 주애리의 말이 떠오르자 머리가 뜨거워졌다. 뭐? 목줄에 매인 개? 싸늘한 주애리의 말에 머리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작 절 그런 취급한 여자가 내민 미끼에 홀려 한녹영을 망치려 했었다. 가뜩이나 주애리와의 관계를 알게 된 한녹영이 찾아왔던 날 이후 엉망진창이었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더러운 년. 잡년. 성노예처럼 봉사하게 해놓고 뒤로 내 비리를 캐 증거로 남겨뒀어? 날 파멸시키려고?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거라 허를 찔린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니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역시 주애리와 전 놀랍도록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둘 다 필요할 땐 이용하다 쓸모가 없어지면 매몰차게 버리는 사람들이니까.
“벼랑에 몰리긴 했지. 조부님께서 내게 LK를 물려주실 준비를 시작하셨으니까.”
“그렇군요. 뭐 그럴 거라 예상했습니다. 벼랑에 내몰리지 않았으면 늘 여유로운 척 하던 여자가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날 협박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협박이라는 단어에 강준일이 웃었다.
“형수가 쥐고 있는 장 대표 비리로 협박을 가한 모양이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내게 약이라도 먹일 건가?”
강준일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리를 포갰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에 배알이 꼴렸다. 장현재는 속내를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강준일을 마주했다. 저 남자의 어디가 다정하고, 어디가 따뜻하다는 건지.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제게서 한녹영을 빼앗아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녹영은 제대로 눈이 멀었다. 다음 순간 장현재가 허탈하게 웃었다.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손으로 녹영이를 떠나게 만든 거였지.’
한녹영을 제 몸에 딸린 부속품처럼 생각해 좋을 대로 이용하고, 정말 자아가 없는 인형을 대하듯 했기 때문에 지치고 실망해 떠난 것이다. 달콤한 사랑을 흔들며 애를 태우면서도 정작 한녹영이 진짜 원했던 애정은 주지 않았다. 당장 모든 걸 다 퍼부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녹영은 무슨 일이 생겨도, 세상이 무너져도 제 곁에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제게 한녹영은 ‘당연한’ 존재였다. 당연히 절 평생 사랑할 거라 믿었고, 당연히 저를 위해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한다고 믿었다. 큰 사고를 당하지 않는 한 당연히 제 몸에 달려있는 팔다리처럼 여겼다. 참으로 오만했다.
한녹영이 미래를 봤다며 했던 말에 황당함이 밀려온 한편 뜨끔했다. 만약 한녹영이 말한 대로의 상황이 왔다면 저는 미련 없이 그를 버렸을 지도 몰랐다. 분명 망가진 인형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냉혹한 판단 하에 버렸을 거다. 그리곤 돌아서서 후회했겠지. 망가져서 버린 그 인형이 제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뒤늦게 깨닫고 말이다. 한녹영이 지금까지 중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제 안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는 몰랐다. 눈동자 가득 신뢰를 가득 안고 저만을 보던 한녹영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미처 몰랐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한녹영은 저를 보던 사랑스런 눈으로 강준일을 보고 있었다. 저를 향했던 신뢰 또한 강준일에게 바치는 중이었다. 강준일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쓰라졌는지 모른다. 녹슨 칼이 심장을 찌른 기분이었다.
‘녹영이의 모든 것이 내 것이었는데. 신뢰도, 애정도, 전부.’
하지만 이제 모든 건 강준일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나.’
그를 발견해 제 손으로 이만큼 키워왔다는 생각에 자만했다. 저만이 한녹영을 더 큰 스타로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품에서 벗어난 지금 한녹영이 더 빛나 보이는 건 왜인지. 오히려 제 품에 갇혀 인형으로 살 때보다 지금이 훨씬 생기 있어 보이고 반짝였다.
‘그런 깊은 연기를 할 수 있는지도 몰랐고.’
도망자 1,2회를 여러 번 돌려보며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장현재였다. 달콤한 그대 주연 자리를 차버리고 도망자의 차도영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비웃었나. 경험이 얕아 보는 눈이 없다며 한녹영의 선택을 폄하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차도영을 연기하는 한녹영은 완벽했다. 한층 더 성장한 것이 눈에 보였고, 고집을 부려 선택한 드라마는 완성도 높은 웰메이드였다. 비록 정석이 아닌 방법으로 한울을 키워오긴 했지만 이 바닥에서 구른 것이 몇 년인가. 장현재가 보기에 드라마가 끝날 때쯤의 한녹영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스타가 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절대 될 리 없다는 드라마를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말이다.
“대답 안 할 텐가?”
생각에 잠겨있는 장현재에게 강준일이 대답을 강요했다. 장현재가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제가 떠나보낸 보석을 알아보고 냉큼 주워간 강준일을 물끄러미 보았다.
“전 대표님이 싫습니다.”
“그거 잘 됐군. 나도 장 대표가 너무 싫거든. 오물을 앞에 둔 듯 기분이 더러워. 그러니까 피차 싫은 사람들끼리 오래 마주앉지 말고 짧게 끝내자고.”
동의하는 바다. 장현재가 손에 쥐고 있던 USB를 테이블 위에 툭 던지듯 놓았다.
“이게 뭐지?”
“내가 쥐고 있던 주애리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죠.”
저와 주애리의 섹스 영상이 담긴 USB였다. 장현재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언젠가 주애리가 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영상을 떠두면 언젠가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그녀와의 두 번째 섹스 때 은밀히 찍어두었다. 고위층 인사의 약점은 언제나 유용하게 써먹을 일이 생기곤 하니까. 즉 주애리와 저는 결국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겉으로는 웃으며 몸을 맞대면서 속으로는 서로를 물어뜯을 생각만 하고 있던 독사들인 것이다.
‘넌 어차피 교도소행이야. 장현재 파일 당장 검찰에 보내버려!’
전화가 끊어진 줄 알았는지 표독한 목소리로 중얼대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통해 그녀가 절 어떻게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영상을 떠오면 주식을 양도할 것처럼 굴어놓고 뒤로는 절 감방에 처넣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거다. 그녀 멋대로 제 앞날을 정해둔 것이다. 하긴, 욕심 많은 여자가 손에 들어온 한울을 순순히 내놓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참에 독니를 드러내고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어보자고.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지?”
강준일의 눈썹이 휘어졌다.
“나보다는 강준일 대표님이 더 유용하게 쓸 것 같아서, 라고 하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이걸 쓰면 형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장현재가 픽 실소했다. 아직도 당신 형수란 여자의 실체를 모릅니까, 라는 눈빛으로.
“이번 한 번은 그렇겠죠. 하지만 그 여자가 날 내버려두겠습니까? 대표님과 녹영이의 영상을 뜨든 못 뜨든 내 미래는 주애리란 여자에 의해 정해져 있더군요.”
강준일은 장현재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애리는 장현재를 철저하게 버릴 계획을 세워뒀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전에 주애리와 아랫도리를 맞췄던 남자들 모두 끝이 좋지 못했다. 주애리는 그녀와 어울렸던 남자들을 망쳐 혹여 그녀와의 관계를 이용하지 못해도록 만들었다.
“이건 날 잡아먹으려는 여자를 향한 복수이기도 합니다. 얕잡아보던 개한테도 뒤꿈치를 물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장현재의 표정이 쓸쓸해졌다. 애초에 그런 여자와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욕심이 불러온 화였다. 제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녹영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듯 하니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미 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인데다 마음이 영영 떠나 싸늘해진 마당에 이 정도 일을 해주었다고 해서 감격할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어땠을까. 생각보다 더 한녹영의 존재가 소중했다는 사실을. 그가 언제든 제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좀 더 소중히 했다면, 아껴주었다면 절 떠나 다른 남자의 사람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을까.
이런저런 가정을 해봤자 이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설사 한녹영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다. 성공을 위해 누구든 이용하고 짓밟았던 삶이었으니까.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스스로를 몰랐는데 추악한 제 내면을 다른 누구도 아닌 한녹영에게 찔리자 꽤 아팠다.
“대표님과 있는 녹영이는······ 꽤 편해 보이더군요.”
제 곁에 있을 때의 한녹영은 늘 뭔가가 부족해 허기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날카롭고 초조해했으며 예민했다. 하지만 강준일과 함께 있는 한녹영은 달랐다. 충만해보였고,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받고 있는 사람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가 한녹영의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난 장 대표가 싫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감사하고 있지.”
“······?”
“한녹영을 떠나보낸 것 말이야. 덕분에 내가 보물을 주웠거든.”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태도로 강준일이 몸을 일으켰다.
“이건 잘 쓰지. 이미 장 대표와 형수의 비리는 손에 충분히 쥐고 있지만 피날레를 뭘로 장식하면 좋을지 고민이었는데, 덕분에 살았어.”
주애리 쪽에서 커버를 치고 있던 탓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이미 장현재의 비리 증거를 다 모아두었다. 더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주애리를 단번에 끝낼 증거를 잡기 위해서였다. 주애리가 남편인 강한일이 사장으로 있는 LK화학의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 내역이 얼마 전 강준일의 손에 들어왔다. 다만 아직까지 터뜨리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이유는 똑같이 해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제 섹스 스캔들을 만들어 망신을 주려 하니 저도 똑같이 섹스 스캔들로 갚아주고 싶었다고 할까. 다만 워낙 조심스러운 여자라 영상 뜨기가 쉽지 않았는데 장현재 덕분에 손에 넣었다. 그러니 아주 잘 써줄 생각이었다.
“아주 화려하고 치명적인 피날레가 되겠군요.”
“하지만 장 대표가 이걸 줬다고 한녹영씨한테 애기할 거라는 기대는 않는 편이 좋아.”
“알고 있습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한녹영씨 말이 장 대표가 우리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던데?”
수소문 해 장현재에게 사진을 판 파파라치를 잡아내 필름을 뺏었고, 두 번 다시는 파파라치 노릇을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장현재에게 넘어간 사진까지 손 쓸 방도가 없어 지켜보던 중이었다. 혹시 장현재가 사진들을 언론사에 넘기진 않을까 예의주시했는데,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네.”
“그걸 어째서 터뜨리지 않았지? 형수가 원하는 만큼의 엄청난 파장은 일으키지 못하겠지만, 약간의 데미지는 줄 수 있었을 텐데.”
“강준일 대표님 말씀대로 대표님께는 약간의 데미지겠지만, 녹영이한테는 다를 테니까요. 설사 내가 일부러 터뜨린 조작이라고 해도 연이어 비슷한 스캔들이 터지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으니 스폰서 설이 사실이라는 루머가 힘을 얻겠죠. 이 바닥은 그런 곳입니다. 거짓도 반복되면 사실이 되는 곳이죠.”
“······.”
“그리고 그저 한 번쯤은, 적어도 한 번쯤은 녹영이에게 좋은 남자이고 싶었나보죠.”
장현재가 남 일처럼 얘기했다. 파파라치에게서 사진을 사왔을 땐 분명 그걸로 반전을 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을 했다. 하지만 절 찾아와 강준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한녹영을 본 순간 ‘끝이다.’ 라는 생각이 들며 허무해졌다. 치부를 들켜 수치스러웠고, 조금의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가슴이 아팠다. 한녹영에게 전 이제 정말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절망한 것이다. 망쳐서라도 데려오겠다는 마음 이면에는 어쩌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존재했는데, 희망 따윈 없었다. 사진을 빌미로 강준일과 헤어질 것을 종용한 이유는 치졸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제게서 한녹영을 훔쳐간 강준일에 대한 치졸한 시기심과 질투 말이다.
물론 끝까지 망쳐버리겠다는 악독한 마음으로 사진들을 확 공개해버릴까 하는 유혹에 빠진 적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저를 혐오스럽게 보던 한녹영의 눈빛과 쓸모없어지면 바로 버릴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며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말로만 소중하다, 특별하다고 했을 뿐 행동으로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적어도 한 번쯤은,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주고 싶어서 사진을 폐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녹영이 봤다던 미래에서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의 나는 적어도 널 끝까지 망치진 않는다고 말이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사진은 다 폐기했으니 유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유출이 된다면 내 쪽이 아니라파파라치 쪽일 테죠.”
“그쪽은 이미 정리했지.”
역시. 장현재가 픽 웃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전 이만 쉬고 싶으니 그만 가보십시오. 영상을 쓸 거면 서둘러야 할 겁니다. 주애리에게 영상 뜨기가 실패했고, 대표님한테 누구의 부탁을 받고 영상을 뜨려 했는지 실토했다고 말할 거니까요. 그 여자가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 정도는 들어야겠습니다.”
분명 악에 받쳐 쌍욕을 해대겠지. 남의 인생을 멋대로 바닥에 처박을 준비를 해둔 여자를 똑같이 망쳐줄 생각에 비릿한 웃음이 나왔다.
“그러지. 나도 더 이상 시간 끌 마음은 없으니까. 교도소 갈 준비는 해두는 편이 좋아. 영상에 대한 대가로 사식은 넉넉하게 넣어주지.”
“녹영이와 잠깐 얘기를 할 순 없겠습니까?”
장현재가 한참을 머뭇대다 말했다. 강준일이 픽 비웃음을 머금었다. 될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건가.
“내 대답쯤은 장 대표도 예상하고 있을 텐데.”
“녹영이의 의향이 중요한 거 아닙니까?”
“마찬가지야. 한녹영씨가 장 대표와 얘기하고 싶어 하겠나? 얼굴을 마주는 것조차 싫을 텐데. 이제 한녹영씨한테 장 대표는 누군가 길거리에 토해놓은 오물만큼이나 혐오스러운 존재야.”
적나라한 표현에 장현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비웃은 강준일이 아파트를 나갔다. 누군가 토해놓은 오물이라.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씁쓸했다. 어느 샌가 제가 한녹영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한때는 한녹영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던 제가. 피식 자조의 웃음이 나왔다. 하긴 만나서 할 얘기도 없었다. 그저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 번 봐두고 싶었을 뿐. 이젠 TV로나 볼 수 있는 얼굴이니까. 품속의 보석이 이젠 잡을 수 없는 먼 곳의 별이 되어 버렸다.
장현재는 지친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푹 묻었다. 여기까지인가. 교도소행은 확정이었다. 찾아가 빈다고 해서 여자가 봐줄 리도 없었다. 침을 뱉으며 비웃기나 할 테지. 뭘 위해서 남을 짓밟고 이용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결국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버림받았고, 저와 똑같이 독사 같은 여자를 만나 가장 높은 곳은 밟아보지도 못한 채 추락하게 되다니. 허망할 뿐이었다.
눈을 감자 한녹영이 보였다. 저를 향한 신뢰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형, 나랑 연애하자.’ 하고 말하던 한녹영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허공을 움켜쥔 장현재가 눈을 뜨며 씁쓸하게 웃었다.
소중한 걸 모르고 당연시 했고, 이용했고, 절 떠났다는 이유로 망쳐서라도 데려오고 싶어 집착했다. 제가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보니 후회할 자격조차 없었다. 전 완벽하게 잃고 나서야 후회하는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강준일을 기다리고 있던 한녹영은 자동차 문이 벌컥 열리자 움찔 하며 돌아보았다.
“뭐래요?! 무슨 얘기 했어요?! 사진들은 어떻게 할 거래요?! 오늘 난 왜 보자고 한 거래요?”
질문이 쏟아지듯 나왔다. 눈을 크게 뜬 채 숨도 쉬지 않고 질문을 해대는 한녹영을 향해 짧게 웃은 강준일이 차에 올라탔다.
“숨은 쉬어가면서 묻지 그래?”
그제야 한녹영이 참았던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벌갰던 얼굴이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강준일이 기특하다는 듯 한녹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녹영씨를 협박해 날 불러내고 약으로 영상을 뜨려고 했다는군. 형수의 최종 오더가 떨어졌다는군.”
한녹영의 눈매가 표독해졌다. 꽉 쥐고 있는 주먹 위로 핏줄이 올라왔다. 강준일이 미리 경고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설마 정말일 줄이야. 실망할 마음도 남아있지 않은데 실망했다.
“정말······ 어떻게······.”
말도 안 나왔다. 한녹영은 몇 마디 하려다 결국 삼킨 후 거칠어진 숨만 반복해서 내뱉었다. 강준일이 그런 한녹영의 손을 잡아 진정될 때까지 다독여주었다.
“한녹영씨 혼자 왔으면 분명 약을 먹인 후 날 부르도록 했을 거야. 내 말 듣길 잘했지 않나?”
강준일이 대놓고 장현재를 까내렸다. 장현재에게 말한 대로 한녹영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네. 정말로요.”
혼자 오지 않길 잘했다. 정말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보다 더 최악인 인간이었다. 장현재는.
“이젠 더 이상은 그런 짓 못할 거야. 이제 한녹영씨 여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내 빌라를 들락거려도 돼. 물론 긴 머리 가발을 쓴 모습도 끝내주게 어울렸지만. 치마까지 입었으면 더 완벽해서 여자와 바람피우는 기분이 들었을 거야.”
다리도 예쁜데 치마를 한 번 입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하고 은근히 속삭이는 강준일의 가슴을 밀어낸 한녹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진! 사진 받았어요?”
오늘 일의 보복성으로 터뜨리면 안 되는데!
“받았고, 폐기했어.”
“이번 사진은 폐기했다 하더라도 또 뒤에 사람을 붙일 테고, 저랑 대표님 망치려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이번에는 강준일에게 백기를 들었다고 해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현재 신뢰가 바닥 나 한녹영은 장현재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설사 그가 제게 ‘떡은 쌀로 만든다.’ 고 해도 말이다. 장현재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한녹영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강준일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한때 한녹영이 충성했던 옛 남자가 이젠 그의 안에서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더군다나 스스로 한녹영의 안에서 쓰레기가 되어갔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일이면, 아니군. 오늘이면 다 해결돼.”
“진짜로요?”
“한녹영씨, 나 못 믿나?”
강준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니요. 대표님은 믿어요!”
한녹영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당연히 강준일은 믿는다. 하지만 믿는 한편 불안감은 존재했다. 정말 오늘이면 장현재와 주애리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그럼 됐어. 오늘이면 정말로 다 해결돼.”
“어떻게요?”
“곧 알게 된다니까?”
미리 좀 말해주면 안 되나. 한녹영이 눈에 궁금증을 가득 담은 채 “어떻게 해결되는데요?” 하고 반복해서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 같았다. 곧 알게 돼. 강준일은 비밀을 숨긴 악동처럼 웃을 뿐 자세한 설명을 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부루퉁해지는 한녹영을 보면서도 강준일은 웃기만 했다.
“출발하지.”
시간이 많이 늦었다. 어느새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한녹영이 작게 하품을 했다.
“피곤한 모양이군. 조금이래도 내게 기대서 자도록 해. 한녹영씨 빌라 앞에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한녹영이 강준일의 어깨에 기대었다.
“정말 곧 다 해결돼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대표님 만나도 되는 거죠? 혹시 내가 대표님을 망치는 원인이 될까봐 무서웠는데······.”
같은 일이 또 반복될까봐. 혼자만 안고 있는 기억으로 인한 두려움이 지긋지긋하면서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데 곧 해결된다고? 정말로? 강준일이 확언했으니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장현재와 주애리가 해결되면 남은 문제는 주민성뿐인가? 주민성이 장한경을 망치지 않도록 막기만 하면, 이전 생에서부터 끌어온 모든 악연과 문제는 해결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정말 홀가분하게 연기하면서, 마음껏 강준일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젠 정말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젠 제발 그러길 원한다. 간절하게 염원하며 한녹영이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전화기에서 불이 났다. 한녹영의 전화도, 박상호의 전화도 쉼 없이 울리는 중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뭔 난리냐?”
스케줄 가야 하는 시간이 임박해서 부랴부랴 세트장으로 향하는 박상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가뜩이나 장한경 문제와 ‘장현재가 사진을 갖고 있다.’ 는 한녹영의 말로 인해 고민하느라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동이 터오기도 전에 스캔들이 터져 전화통이 난리였다. 한녹영과 강준일의 이름이 검색어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한녹영의 스폰서가 강준일이라는 게시글이 레이스를 뛰는 경주마마냥 미친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게시글을 클릭해보면 ‘얼마 전부터 찌라시로 돌아다니던 한녹영과 LK엔터 강준일 대표의 스폰서 관계가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박상호가 끊임없이 관련 글을 찾아보며 초조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거 장현재 아냐? 장현재 그 자식이 터뜨린 것 같은데?”
이제는 이름 뒤에 대표라는 직함도 붙여주기 싫었다. 박상호는 장현재의 이름 뒤에 새끼니, 자식이니, 놈이니 붙여대며 마구 욕을 해댔다. 정지해와 장한수도 연신 한숨을 내쉬기 바빴는데, 정작 당사자인 한녹영만은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 없이 담담했다. 평소와는 다른 태도에 박상호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전에는 강준일의 강자만 튀어나와도 발작하는 것처럼 걱정하더니.
“넌 아무렇지도 않냐? 이거 네 일이야? 왜 이렇게 유유자적해?"
걱정이야 된다. 속이 끓었지만 곧 해결될 거라고 했던 강준일의 말을 믿으니 겉으로나마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거다. 한녹영이 박상호를 향해 웃었다.
“곧 진정될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대표님이 해결해주신 댔거든. 그러니까 형도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진득하니 기다려봐.”
“강준일 대표가?”
“응. 오늘 중으로 해결될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믿어! 난 대표님 밑으니까 기다려보려고.”
확신에 찬 한녹영의 말에 박상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강준일 대표가 그렇게 말했다면 믿어도 되겠지. 그 역시 루머의 당사자니까. 그래도 일말의 불안함은 남아있어 초조해하는 동안 세트장에 도착했다. 밴에서 내리니 촬영장이 온통 어수선해서 난리였다. 스태프들도 배우들도 촬영할 생각은 않고 삼삼오오 모여 휴대전화나 태블릿 등을 들여다보며 웅성웅성 수군수군하고 있었다.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이 더 커졌나. 장현재가 가지고 있다던 사진이라도 뜬 건가. 역시 어제 어떻게든 한녹영을 따라붙어 장현재의 집으로 갔어야 했는데. 가서 협박하든 애원하든 드러눕든, 정 안 되면 강도짓이라도 해서 사진을 없애버렸어야 했다. 강준일과 같이 간다는 말에 보내놓고 혼자 불안했다. 돌아와서 사진은 폐기되었다고 말했지만 불신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는데 역시 장현재가 거짓말을 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변명하지? 순식간에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입술도 바싹 말랐다. 버석버석 마른 목구멍으로 억지로 침을 삼킨 박상호가 먼저 내린 후 한녹영을 향해 “녹영아 마음 단단히 먹어.” 하고 말했다. 한녹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밴에서 내렸다. 그리곤 촬영장 분위기를 보고 주춤했다.
“어이, 한녹영!!”
송정빈이 돈 떼어먹고 달아난 계주라도 만난 냥 커다랗게 이름을 외쳐 부르며 구르듯이 달려왔다. 한녹영과 박상호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강준일이 해결하기 전에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큰 건이 터졌나 싶었다. 믿으니까 기다린다고 말하며 애써 평정을 유지했던 한녹영의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왜, 왜요?”
한녹영이 간신히 대답했다.
“이, 이거······!! 이거!!”
말을 더듬댄 송정빈이 그냥 눈으로 확인하라는 듯 휴대전화를 불쑥 내밀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한녹영이 그의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영상이었다. 재생 버튼을 클릭한 순간 두 남녀가 알몸으로 뱀처럼 엉켜 정사를 벌이는 장면이 보였다.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아 영상 속 인물의 얼굴이 리얼하게 보였는데, 두 사람 모두 한녹영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
한녹영이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확인하듯 송정빈을 보았다. 송정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안다는 듯.
“이, 이거 장 대표랑 주애리 관장이잖아?”
한녹영 옆에서 얼굴을 들이밀어 함께 영상을 본 박상호의 입에서 경악에 찬 말이 새어나왔다.
“지금 이 영상이 카톡에서 카톡으로 전달되며 엄청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네요. 나 아침에 너랑 강 대표 실시간검색어 1위 차지한 거 보고 놀랐는데, 이거 보고는 뒤집어질 뻔 했다. 검색어가 장현재 대표와 주애리 관장으로 빠르게 바뀌는 중이야.”
박상호가 부랴부랴 휴대전화를 꺼내 포털을 찾아봤다. 세트장으로 오는 도중까지만 해도 한녹영과 강준일이 부동의 1위였는데, 지금은 순위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1위가 장현재와 주애리의 야동, 2위가 장현재, 3위가 주애리, 4위가 LK, 5위가 한울 등등이었다. 1위부터 10위까지 장현재와 주애리 관련 검색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한녹영과 강준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상호가 어리둥절하게 시선을 틀고 한녹영을 바라보았다.
“강 대표가 해결해준다고 했댔지?”
“응.”
“이, 이건가?”
한녹영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99퍼센트 확신한다. 강준일 쪽에서 터뜨린 거였다.
“장현재 대표 스폰서가 주애리였어?”
박상호가 경악에 차서 말했다. 장현재 대표를 정부로 둘 정도면 재력이 상당할 거란 예상은 했지만 주애리라니. 강준일의 형수라니······.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당혹스럽다고 해야 할지. 그를 스폰해주는 여자가 존재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왠지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어떻게 LK의 주애리일 수가 있는 거지?
“LK뿐만 아니라 한울 주가도 요동치겠다. 진심 대박이다. 모자이크 처리도 안 된 섹스 영상이 실시간으로 마구 퍼지고 있으니 두 사람 다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진 거잖아. 이건 정말 빼박이라 어떻게도 수습이 안 될 것 같은데? 한동안 대한민국이 들썩들썩할 거야. 내가 지금껏 본 그 어떤 스캔들보다 파장이 클 거야. 나 참······ 근데 둘 다 꽤 밝히네. 주애리는 40대인 걸로 아는데 몸매가 20대 여자로 봐도 될 정도이고, 보다 보면 장 대표 거시기도 나오는데 제법 묵직해 보이더라.
처음에는 혀를 끌끌 찼던 송정빈이 결국엔 히죽 웃으며 말을 끝냈다. 한녹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영상 보랴, 받은 영상 아는 사람들에게
전송하랴, 분주함이 말도 못했다. 김석형 또한 영상을 보고 혀를 차며 AD와 함께 장현재와 주애리를 욕하느라 난리였다. 누구도 한녹영과 강준일에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언급조차 하는 이가 없었다. 한녹영이 살짝 웃었다. 유명 인사들의 섹스 스캔들, 그것도 노모자이크 섹스 스캔들이 일으킨 파장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안다. 실제 직접 겪지 않았나. 이번엔 저와 강준일 대신 장현재와 주애리의 스캔들이 터졌지만, 어느 정도의 파장이 올지 짐작이 되었다.
알려달라고 매달리다시피 했는데 의뭉스럽게 웃기만 하더니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그랬나 보았다.
“녹영아. 포털, SNS, 블로그, 각종 게시판 어디에서도 너와 강대표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 전부 주애리와 장현재 얘기뿐이야.”
박상호가 잔뜩 들떠서 말했다. 그는 액정에 얼굴을 집어넣을 듯 밀착한 채 포털을 샅샅이 뒤져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지극히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삼 년 묵은 변비를 해결한 사람의 얼굴처럼 시원해 보였다.
“이제 한경이 일만 해결하면 되겠다. 한경이 이 자식은 아직도 방안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는 모양이더라. 이따 밤에 한 번 더 들러봐야겠어.”
“형, 이따 오후에 나 3시간 정도 시간이 비지?”
“그렇긴 한데, 왜?”
“그럼 주민성이 나 비는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 좀 알아봐줄 수 있을까?”
“주민성? 주민성은 왜?”
박상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네가 주민성이랑 할 얘기가 뭔데?”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박상호의 미간이 구겨졌다. 한녹영은 박상호를 보며 머뭇거렸다. 장한경의 사적인 일을 제가 함부로 애기해도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한 꼼짝도 않겠다는 고집 가득한 표정을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해도 될 문제인지 몰라서 망설였는데······ 예전에 한경이 괴롭혔던 동급생이 주민성인 것 같아.”
“뭐?! 말도 안 돼. 나도 한경이 집에서 사진 봤잖아.”
얼굴 전혀 다른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박상호가 손을 내저었다.
“확실해. 내가 우연히 주민성 옛날 사진을 봤거든. 그래서 어젯밤 한경이 집에 걸려있던 사진 보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네가 주민성의 예전 사진을 어떻게 봤는데?”
“그······ 장 대표한테 있었어.”
장현재 핑계를 대자 박상호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뭔가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만 그럼 한경이 성형이니 개명이니 해가며 신분세탁 어쩌고 한 거 주민성이 흘린 거 아냐?”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봐.”
“이제 갓 데뷔한 어린놈이 못된 것부터 배워가지고. 알았어! 내가 한울에 있었던 때의 인맥 총동원해서 주민성 스케줄 알아둘게.”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드디어 정신을 차린 김석형이 촬영 시작하자며 배우들을 불러모았다. 한녹영은 곧 촬영에 들어갔고, 오후가 되어 잠시 비는 시간이 되자 박상호와 함께 주민성이 달콤한 그대 촬영 중이라는 남양주로 향했다.
달콤한 그대 촬영팀은 느닷없이 나타난 한녹영을 보고 깜짝 놀라 웅성대기 시작했다. 한녹영이 그들을 향해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한녹영을 밴 앞에 세워둔 박상호가 촬영팀에게 다가가 잠깐 주민성과 얘기할 수 있느냐고 의견을 타진했다.
“한녹영 선배가 무슨 일로 날 찾는 건데요?”
마침 휴식시간이었는지 몸에 담요와 두꺼운 패딩을 두른 채 앉아있던 주민성이 고개만 위로 들어 물었다. 그때 박지한이 커피를 들고 주민성에게로 다가왔다. 박지한은 박상호를 보고 움찔하더니 뒤돌아 한녹영을 확인하곤 입술을 깨물었다.
“형! 커피가 미지근하잖아!”
“미안하다. 다시 타다줄까?”
“됐어! 선배나 마셔요. 난 한녹영 선배를 만나야 하니까. 무슨 얘기기에 여기까지 날 찾아왔는지 궁금하네.”
그제야 주민성이 몸을 일으켜 한녹영에게로 다가왔다. 한녹영은 박상호에게 “형은 잠깐 저쪽에 있어.” 하고 말한 후 주민성만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주민성이 건들대며 말했다. 얼굴 마주한 채 얘기도 나누기 싫지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니 일단 들어는 본다는 태도였다.
“너지? 장한경 얘기 은근슬쩍 흘리며 간보고 있는 새끼가.”
“새끼? 지금 나한테 새끼라고 한 겁니까?! 그리고 장한경 얘기는 또 뭡니까?”
새끼라는 표현에 주민성이 발끈했다. 기껏 찾아와서 왜 다짜고짜 시비야, 딱 이런 얼굴이었다. 기선제압이라도 할 참인가. 가뜩이나 마음에 둔 장현재와 웬 년의 섹스 스캔들이 터져서 기분이 바닥을 기고 있는 마당인데 한녹영이 찾아와 시비를 거니 너 잘 걸렸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응. 너한테 새끼라고 했고, 시치미 떼지 마. 이 양아치 새끼야. 네가 한경이 얘기 은근슬쩍 흘리면서 간보고 있는 거 다 알거든. 물론 직접 하진 않았겠지. 누군가 시켜서 했겠지. 매니저야?”
본인은 노출하지 않으려고 전엔 저를 시켜서 장한경을 망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서 매니저인가 했는데 주민성이 가소롭다는 듯 입끝을 올리며 비죽 웃었다. 매니저가 아니면······ 박지한이 불쑥 떠올랐다. 방송국 로비에서 그가 한 말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가능성이 컸다.
“박지한 선배야?”
박지한인가 보군. 주민성의 미간이 슬쩍 굳어지는 걸 보니 분명했다.
“난 네가 고등학교 때 장한경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주형호씨.”
개명 전 이름을 대자 주민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렀다. 시비 걸 테면 걸어라 얼마든지 받아 쳐주마. 나 오늘 전투력 만렙이다, 이런 표정이었다가 삽시간에 창백해지는 모습이 볼 만 했다.
“한경이 건드리지 마. 묵혀둔 일이 터지면 한경이만 끝장날 것 같아? 천만에 너도 끝장 나. 내가 한경이한테 몹쓸 짓 한 새끼가 너라고 밝힐 거거든. 네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아주 과장해서 아니지 아예 소설로 써서 뿌릴 거야. 너도 내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알겠지? 너 하나 망치는 것쯤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깔짝대지 말고 조용히 닥치고 살아.”
“그, 그런 협박이······.”
“너한테 통할 것 같으냐고? 당연히 통하지. 너네집 부자라며? 네 실체를 세상이 다 알도록 터뜨리면 네 아버지 재력으로 해결될까? 이번에도 얼굴 전면공사하고 또 개명해서 해외로 도망쳐봐. 하지만 내가 또 널 알아내서 세상에 공개할 거야.”
“그 새끼가 뭔데 한녹영 당신이 지랄이야?”
애써 강한 척 대들곤 있지만 이미 겁먹은 기색이 보였다. 약자는 짓밟고 강자에게 꼬리 내리는 전형적인 양아치가 분명했다.
“선배한테는 고운 말을 써야지. 이 양아치 새끼야. 한경이가 나한테 뭐냐고? 내 소중한 동생이다!”
과거로 돌아오며 장한경도 장한경 누나도 살아났다. 제가 변해 장한경의 과거를 폭로하지 않을 테니 제 스스로 그들 남매를 불행 속으로 밀어 넣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로 인해 장한경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들 남매의 끝이 어때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이번에는 내 잘못 아니니까.’ 하며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지켜보기만 한다면 또 강간당했다는 기사가 뜰 테고, 장한경은 자살할 테고, 장한경 누나는 이번엔 주민성에게 황산을 던진 후 불행한 선택을 하겠지. 그걸 뻔히 알면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악연이 인연으로 바뀌어 장한경은 이제 한녹영에게 소중한 후배이자 잘 따르는 동생 같은 존재가 되었다. 소중해진 존재를 지키는 건 당연하다.
한녹영이 주먹을 꾹 쥐었다. 전에는 누군가를 지킨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그저 늘 애정이 부족해 장현재에게 매달리기 급급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제게는 홀로 집착하는 상대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상대가 있고, 절 위해 애써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녹영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강해질 생각이었다. 저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건 전부 강준일 덕분이었다. 그가 제 뒤에 있다는 걸 알기에 누구도 겁나지 않는다. 세상과 다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빨리 보고 싶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 얼른 이 양아치 해결한 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 걸어야지. 한녹영이 그리움을 꾹꾹 삼키며 말했다.
“내 말 명심해. 한경이 일이 조금이라도 새어나오는 순간, 너 역시 파멸이야.”
한녹영은 분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고 있는 주민성을 뒤로 한 채 걸었다.
“지한이 형! 물 갖고 와!!!”
주민성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박지한이 생수를 들고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다 한녹영 앞에서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한 거야?”
“선배는 배우입니까? 주민성 똘마니입니까?”
박지한의 얼굴이 구겨졌다.
“너 이새끼, 지금 뭐라고······.”
“주민성이 우리 드라마 막내에 대해 뭐라고 언질을 줬죠?”
“무슨 헛소리야?”
“주민성이 아니라면 주민성 매니저인 김태섭인가 하는 그 자식이 언질을 줬겠죠. 그래서 폭탄이니 뭐니 한 거 아닙니까? 그거 터뜨릴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경고하러 왔습니다. 선배도 명심해요. 장한경 건드렸다간 선배도 가만 안 둘 겁니다.”
“네가 뭔데 나한테 협박질이야?!!”
“주민성 심부름이나 하려고 한울이랑 계약해서 날 씹어댄 겁니까? 배우라는 이름이 아깝네요.”
“애초에 네가 내 배역을 뺏어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드라마 시청률이 치솟고, 네가 승승장구 할 때마다 내 배알이 얼마나 꼴리는지 알아?”
박지한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래서 주민성이라는 풋내기한테 빌붙어 또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겁니까? 정신 차리세요. 어쨌든 선배의 기회를 내가 차지한 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후의 기회를 차버린 건 선배입니다. 김현영 작가님도, 정빈 선배도 다음 작품 때 선배와 함께 할 계획이 있었으니까요. 전 선배가 싫지만, 선배가 조용히 있었다면 미안해서라도 저 역시 기회를 줬을 거고요.”
한녹영은 얼음처럼 서 있는 박지한에게 고개를 까닥했다. 그리곤 막 걸음을 내딛으려다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선배 성격에 참 많이 참고 있네요. 무시당하는 거 잘 못 참는 성격이라고 들었는데요. 혹시 참다 참다 주민성을 더 못 견디겠어서 그간의 울분을 갚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 장한경 대신 주민성 뒤나 한 번 파보든가요. 얼굴 전면공사에 개명까지 했다던데. 주민성이야말로 완벽하게 신분세탁을 했거든요. 저딴 핏덩이한테 종놈 취급당하면서 분하지도 않아요? 나한텐 배역 뺏긴 것만으로도 그렇게 파르르 떨더니만. 제가 잘 아는 뒷조사 전문가 연락처에요. 생각 있으면 연락해보시던가요.”
일부러 사용한 종놈이란 표현에 박지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머리가 있다면 무슨 말인지 의도를 파악하겠지. 미리 받아둔 장한수 친구의 명함을 박지한의 주머니에 쑥 넣은 한녹영이 뒤돌아서서 걸었다. 내내 궁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박상호가 “얘기 잘 끝냈어?” 하고 물어왔다.
“응. 잘 끝냈어. 한경이 건드리지 말라고 했고.”
“말 듣디?”
“대표님 이름 좀 써먹었지. 내 말 안 들으면 강준일 대표한테 고자질해서 혼내줄 거라고. 형한테 달랑 둘 있는 배우 중 한 명인데 벌써부터 싹이 밟히면 안 되잖아. 아스타에 내 돈도 투자할 건데.”
박상호가 피식 웃었다.
“그래, 고맙다. 강 대표가 참 여러모로 쓸모 있네.”
“그럼, 누구 애인인데.”
한녹영이 자랑스레 말하자 박상호가 흙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녹영은 머쓱해져서 밴에 올라탔다.
“한경이한테 신분세탁이니 뭐니 하는 소리 싹 묻혔다고 말해줘. 그렇게만 말해도 털고 나올 거야. 의지가 강한 놈이니까.”
그런 일을 겪고도 배우의 꿈을 꿨을 만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자살을 선택해야 할 만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니 이 정도는 충분히 털 거라고 생각한다.고개를 끄덕인 박상호가 곧장 장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자 메시지를 남겼다. 한녹영도 장한경에게 「내일 촬영장에서 웃는 얼굴로 보자. 스캔들 없는 배우가 어딨냐? 난 더한 스캔들을 겪고도
일어났으니 너도 털고 나와.」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답변이 없어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휴대전화 주머니에 넣었는데 한참 후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 보니 장한경이었다.
「내일 봐요. 녹영 선배. 선배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 열심히 촬영 할게요.」
한녹영은 장한경의 답문을 보며 자그맣게 웃었다. 이제 정말 예전 삶으로부터 끌려와 제 발목을 죄고 있던 족쇄가 모두 사라진 기분이 들어 후련했다.
파주 세트장으로 돌아오니 앞 촬영이 다소 지연되어 약간의 여유가 더 있었다. 한녹영이 사람들과 좀 떨어진 거리로 가서 강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전화가 늦었어, 한녹영씨. 영상을 터뜨린 직후부터 휴대전화만 쳐다보고 있느라 목이 기린처럼 길어졌다고.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죄송해요. 마음에 걸렸던 일 하나를 해결하느라 그랬어요.”
강준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과거로부터 따라온 묵은 빚을 다 청산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고 싶어 장한경의 일부터 해결한 것이다.
ㅡ 흠. 내게 기사를 막아달라고 했던 사람에 관한 일인가?
역시 예리한 강준일은 한녹영이 뭘 해결했다는 건지 단박에 알아냈다.
“네. 나름대로 해결했고, 이제 정말 후련해요. 마음의 빚도 내려놓았고, 장현재와 주애리의 일도 해결되었으니까요.”
이제 진짜 끝났다. 정말로 끝났어. 이전 삶에서부터 따라붙었던 지긋지긋한 악연에 정말로 종지부를 찍은 느낌이었다. 묵은 먼지를 탈탈 털어낸 기분이라고 하면 오버일까. 하지만 정말 먼지를 탈탈 털어내 시원해진 기분이었다. 묵은 빚을 다 청산해서 아주 홀가분했다.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크고 묵직한 한숨을 내쉬자 강준일이 웃음을 흘렸다.
ㅡ 웬 한숨이야?
“이제 정말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말 끝난 거 맞죠?”
ㅡ 물론이지. 본인들 일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텐데 우리를 건드릴 여력 따윈 없어. 어떻게든 덮어보려 할 테지만 이젠 무슨 짓을 해도 수습불가거든.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 영상이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발뺌을 하겠어. 그리고 이걸 덮을 만큼 큰 사건이 당장 벌어질 것 같진 않군.
맞는 말이었다. 제법 큰 기획사 대표와 거대 재벌 LK가의 손자며느리의 섹스 스캔들을 덮을만한 큰일은 드물 것이다. 단순히 연예계뿐만 아니라 재계까지 들썩일 정도로 큰 사건이니까.
“영상은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ㅡ 의지와 노력으로.
태평한 대꾸에 웃음이 나왔다. 한녹영이 그게 뭐냐며 웃었다.
ㅡ 정말 의지와 노력으로 구한 거라고. 한녹영씨 말 듣고 똑같이 해주고 싶었거든. 섹스 스캔들에는 섹스 스캔들로.
“대표님 진짜 뒤끝 쩔고 고약한 면이 있는 거 아시죠?”
ㅡ 그래서 싫은가?
싫을 리가 있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면도 좋았다. 아무래도 전 사랑에 빠지면 밸이 없어지는 성격인지, 강준일의 모든 면이 다 좋게 보이기만 했다.
“아니요. 사랑해요.”
훨씬 전부터 이 말이 꼭 하고 싶었다. 마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모든 짐과 먼지들을 탈탈 털어버린 탓에 기분이 가벼워 사랑한다는 고백이 날개처럼 팔랑대며 흘러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사랑한다는 말이 나온 탓에 당황한 건지 강준일은 잠시 말이 없었다.
ㅡ ······한녹영씨는 정말 내가 방심하지 못하게 하는군. 방심하고 있다가 제대로 못 들었으니 다시 한 번 말해주지 않겠어?
강준일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분명 제대로 들어놓고 이러는 거다. 한녹영의 눈매가 새치름해졌다.
“안 돼요. 인생은 녹화가 아니라서 재방송이 없거든요.”
ㅡ 한녹영씨, 이렇게 날 애태울 텐가?
“네. 이런 게 바로 연애의 묘미거든요. 그래야 대표님이 절 더 목말라하죠. 저 촬영 들어가야 해요.”
ㅡ 연애는 한 번도 못 해봤다더니 이제 보니 숨은 고수였군.
“제가 밀당에 좀 능력이 있어서요.”
ㅡ 이봐, 한녹영씨.
“네?”
ㅡ 사랑해.
“······.”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당황하고 말았다. 얼굴이 붉어져서 멍해있는 사이 웃음을 흘린 강준일이 ‘촬영 잘 해.’ 하고 말한 후 먼저 전화를 끊었다.
“뭐야. 오늘은 나만 고백하려고 했는데, 정말 방심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라니까.”
아까 강준일이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한녹영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사랑해.’
귓가에 쏟아지던 사랑해, 란 말이 발렌타인데이에 먹은 초콜릿만큼이나 달콤했다. 기분이 사륵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사랑해. 누군가에게 사랑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너무 오래만이라 사랑해란 말이 주는 충만함을 잊고 있고 있었다. 가슴이 벅찬 심정으로 가득 차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인가? 물론 팬들에게선 자주 듣고 있지만.
“녹영아! 빨리 안 오고 뭐 해?!”
박상호가 재촉했다.
“지금 가!”
바람은 싸늘하지만 볕은 유난히도 좋은 날이었다. 마치 제 인생에 한줄기 빛으로 찾아든 강준일 같은 날씨였다.
한녹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젠 정말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 촬영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시야가 반짝이고 있는 착각을 느끼며 한녹영이 힘차게 걸었다. 마치 신발에 깃털을 단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가해지면 대표님 손잡고 엄마를 보러갈까. 가서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대표님도 소개해주고. 엄마 덕분에 이번 삶은 행복하니 더 이상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해줘야지.’
어머니의 희생으로 다시 시작한 이번 삶은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한녹영이 희망찬 미래를 나타내듯 환하게 웃으며 내달리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웃으며 힘차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