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6화 (6/9)

Chapter. o6

2월 둘째 주가 되었고, 연인들의 날이라는 발렌타인데이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하영택은 한녹영의 납치 미수로 긴급 체포되어 구속 기소되었고, 빠르게 재판이 진행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선고 결과는 기사로 나오지 않았다. 혹시 과잉 판결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나올지도 몰라 강준일 측에서 기사화를 막은 것 같았다. 그의 판결 선고 날 잠시 짬이 나 박상호와 둘이 몰래 법정에 가서 지켜봤는데, 15년형이 선고되자마자 울부짖으며 소란을 떠는 모습이 꽤나 볼만했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면 안 되는데,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후련해서 큰일이었다.

“여기가 이제 우리 사무실이란 말이지?”

정지해가 사무실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집기도 다 들여왔고, 사업자 신고도 했고, 명함도 새로 파서 돌리는 중이고, 간판도 달아서 박상호의 기획사는 얼추 형태는 갖추었다.

“어. 이만하면 근사하지? 가진 돈 다 털어 넣어 빈털터리가 되긴 했지만 너무 초라하게 시작하긴 싫어서.”

“녹영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금방 회사 커질 텐데.”

정지해가 으쓱해하는 박상호를 보며 웃었다. 한녹영도 흐뭇한 눈으로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직 직원이라곤 대표인 박상호를 포함 정지해와 장한수 셋뿐이고, 소속배우는 제로지만 널찍한 사무실에 책상이며 컴퓨터며 필요한 집기들이 다 들어와 있으니 그럴 듯 했다.

“계약은 했어?”

장한수가 물었다.

“아직. 간판도 안 걸고 할 순 없어서, 이제 해야지. 계약 완료하면 이제 난 소속 배우가 둘이나 있는 기획사 대표다.”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기획사 이름은 박상호가 고심 끝에 아스타로 지었다. 아시아의 스타가 될 한녹영이 있는 기획사라는 의미라나. 그 말을 들은 정지해와 장한수가 바닥을 구르며 이예 세스타라고 하지 그랬느냐고 비웃었다.

‘세스타라고 하면 왠지 벌레 퇴치 회사가 연상되잖아.’

낄낄대는 장한수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정지해는 여자라 차마 때리진 못하고 째려보면서 한 말에 한녹영도 결국 웃음이 터졌다. 아스타든 세스타든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로드 한 명 더 뽑았고, 중고로 밴도 한 대 뽑았다. 한수 네 연락처 줬으니 너한테 전화 올 거다. 그리고 새로 뽑은 로드는 흑돼지 청년 담당이야.”

흥분한 기색으로 사무실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던 장한경이 “네?” 하고 돌아 보았다.

“우리랑 계약한다며?”

“네. 해야죠. 할 겁니다.”

“그럼 당연히 로드랑 차량은 지원해줘야지. 코디도 곧 뽑아서 붙여줄게. 지혜가 괜찮은 후배들로 알아본대.”

정지해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박상호는 매니저에 차량, 코디까지 붙여준다는 말에 감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장한경을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차량은 당분간 렌트한 미니밴이다. 밴을 두 대나 살 형편은 안 되고, 구매한 밴은 녹영이 거야.”

“다, 당연하죠. 저 사실 아무 것도 기대 안 했거든요. 그냥 사무실이 생긴다는 것만 해도 좋은데, 고맙습니다. 매니저님. 아니 대표님.”

장한경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냥 매니저라고 해. 네 로드는 내일부터 출근이라 다음 스케줄부터는 함께 다닐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매니저랑 차량 지원 공짜 아니다. 너 도망자 출연료 중에 일부 내가 먹을 거거든. 자, 그럼 이제 계약서 쓰자. 이거 서류니까 꼼꼼하게 읽어보고 사인해.”

지나가는 꼬맹이들 삥 뜯는 건달처럼 말한 박상호가 장한경을 향해 미리 만들어둔 계약 서류를 내밀었다.

“이만큼 떼어가도 저한테 지원해주는 매니저랑 코디 월급도 안 나오잖아요.”

박상호가 제시한 비율은 3.5:6.5였다. 계약기간은 3년. 보통 신인과 계약할 때 최저 비율로 40퍼센트를 잡는 것이 업계 관행인데, 35퍼센트면 나쁘지 않은 계약 조건이었다. 필요한 지원은 다 해주고, 품위 유지비도 회사에서 부담하며, 연예인이 거부하는 일은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었다. 한녹영은 처음 한울과 계약할 때 5:5로 했다. 그걸 생각하면 정말 괜찮은 조건이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다음 드라마부터는 몸값이 오를 거잖아. 투자란 본래 미래를 보고 하는 거지. 3년 후에 재계약할 땐 네 인지도가 더 올라있을 테니 그땐 네가 가져가는 비율이 더 많을 거야.”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한경이 곧바로 서류에 사인했다. 막 더 꼼꼼하게 읽어보고 사인하라는 조언을 할 참이었던 박상호가 “전 매니저님 믿습니다.” 하는 말에 머쓱해했다. 그때 전화 한 통을 받은 장한수가 “바깥에 밴 왔대!” 하고 말했다. 정지해와 장한경이 궁금하다며 장한수와 함께 우르르 몰려나갔다. 한녹영은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대표실로 박상호와 함께 들어갔다.

“이건 네 서류.”

한녹영이 서류를 펼쳤다. 박상호가 한녹영에게 제시한 비율은 2:8이었다. 보통 한녹영 정도의 스타와의 계약엔 3:7의 비율을 제시하는데, 그걸 감안하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형? 이건 너무 파격적이잖아.”

“뭐가 파격이야. 너 정도 스타를 데려오면서 계약금도 못 주는데. 마음 같아선 광고주들한테서 소송 들어온 위약금이라도 해결해주고 싶은데 미안하다. 대신 너와의 계약은 도망자 건너뛰고 다음 건부터 유효한 걸로 했다.”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 왜 미안해하는지 모르겠다. 박상호가 제 이미지를 훼손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내 마음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다시 기획사 차릴 생각이나 했겠냐. 너 같은 스타를 잡은 덕분에 다른 신생보다 훨씬 빨리 자리 잡을 텐데 뭐. 도망자 끝나고 CF 왕창왕창 찍어서 나 떼돈 벌게 해주라. 그리고 넌 아무래도 나한테 특별해서 특별대우 해주고 싶어.”

한녹영이 박상호를 향해 웃으며 만년필을 집었다.

“걱정하지 마. 도망자 끝나면 내 몸값 지금의 최소 2배로 뛸 거니까. 형은 정말 봉 잡은 거라니까? 월급쟁이 매니저보다 훨 나을 걸?”

지금은 1년 계약에 최대 3억 오천을 받지만, 도망자를 찍은 후에는 얼마를 받게 될지 모른다. 프로젝트 B를 찍은 후 몸값이 6개월 단발에 5억, 1년 계약에 9억으로 껑충 뛰었으니 도망자 이후에는 6개월 단발에 3억 정도는 받지 않을까?

“어. 믿어. 아주 확실하게 믿고 있어. 도망자 촬영하는 모습 지켜보고 있으면 기대감으로 몸이 막 떨린다니까.”

“나 도망자 정해진 출연료 말고도 러닝개런티 따로 받잖아. 그건 회사에 투자하는 걸로 할게. 주주 만들어줘.”

“그걸로 위약금부터 갚아야지.”

박상호가 조심스레 말했다. 강준일의 변호사가 아주 유능한 탓에 한녹영이 물어야 하는 위약금은 세 회사 총합 15억 정도로 나왔다. 회사들에서 요구한 금액은 50억대였는데, 코웃음 친 한녹영의 변호사가 싸우고 싸워서 얻어낸 결과였다.

한녹영은 우선 통장에 있는 돈으로 60퍼센트 정도 해결하고 나머지는 추후 출연료를 받으면 갚기로 합의했다. 돈이야 또 벌면 되는 거고, 도망자 이후 제 위상이 어떻게 될지 대충 알고 있는 터라 한녹영 본인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데 박상호가 안절부절 난리였다. 혹시 위약금을 갚지 못해 재차 청구 소송 들어오고, 그게 기사화 되어서 시끄러워지면 어쩌나 싶은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길바닥에 나앉을까봐 걱정돼?”

“설마 길바닥에 나앉을까. 그냥 그것도 다 빚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빚은 빨리 갚고 봐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라.”

“금방 해결할 수 있어. 그리고 나 지금보다 더 떠서 CF가 쇄도하면 제일 먼저 나한테 위약금 소송 청구한 회사들 경쟁사 CF부터 찍을 거야.”

한울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회사들이라 소송이 들어올 걸 예상했으면서도 기분은 상했다. 특히 가구 회사는 모델을 즉시 주민성으로 바꾸었는데, 제 사진이 걸려있던 곳에 주민성 얼굴이 떡하니 있는 걸 볼 때마다 좀 짜증난다. 꽁한 마음을 드러내며 말하자 박상호가 박장대소했다.

“어. 꼭 그러자. 만약 너한테 광고 의뢰 안 오면 찾아가서라도 찍게 해달라고 할게.”

피식 웃은 한녹영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제 박상호는 단순한 매니저가 아니고, 제가 소속된 기획사의 대표라고 생각하니 어째 기분이 묘했다. 박상호 또한 기분이 이상한 건 마찬가지인지 한녹영의 사인이 있는 서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며 “네가 진짜 내 배우가 되다니.” 하고 중얼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벅찬 음성이었다.

“우리도 나가서 차량이나 보자.”

박상호가 지나치게 감상적인 되는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진 한녹영이 일어섰다. 막 대표실을 나서려는데 전화가 왔다. 액정을 보니 한만식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한녹영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김영숙뿐만 아니라 한만식까지. 대체 바뀐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이래서야 번거롭게 번호를 바꾼 의미가 없잖아, 하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용건인지 궁금했다. 김영숙의 외도 때문에 한동안 술독에 빠져 사느라 절 음해하는 일은 등한시하더니 슬슬 정신이 들었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ㅡ 녹영아! 아버지, 아버지 좀 살려다오!

한만식이 대뜸 구원 요정을 했다.

“무슨 소리에요? 누가 칼 들고 쫓아오기라도 해요?”

한녹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박상호가 입모양으로 “누구야?” 하기에 “아버지” 라고 했더니 곧장 미간을 짜푸렸다.

ㅡ 내가 사기죄로 고소당했다! 돈 안 갚으면 구속이래! 늙은 아비가 말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겠느냐? 네가 돈 좀 갚아다오. 응? 돈만 갚아주면 내 다시는 너한테 손 안 벌리마.

아아. 무슨 일인가 했네. 그저께인가 박상호한테 한만식의 채권자 대표라면서 연락이 왔었다. 한녹영의 기획사를 차린다고 해서 돈을 빌려줬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에 박상호는 ‘제가 한녹영의 새 기획사 대표입니다. 이미 저와 계약을 맺었는데 무슨 소리입니까?’ 라고 대답했다. 더불어 ‘한녹영씨한테 한만식씨의 돈을 갚아줄 의무는 없습니다. 갚아줄 마음도 없습니다.’ 라고 못 박았다. 이후 채권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큰 소란을 떨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다. 그래서 한만식이 조만간 어떤 행동을 취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또 빌라를 찾아와 소란을 떨거나, 그도 아니면 박상호에게 연락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죄를 지었으면 스스로 갚으세요. 저한테 손 벌리지 마시고. 패륜아한테 뭘 바라시는 건데요?”

ㅡ 나 네 새엄마랑 헤어질 참이다. 그년이 널 그렇게 모질게 구박했는지 정말 몰랐다. 내 앞에서는 항상 널 친아들보다 더 사랑하며 키웠다고 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어.

이젠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까지. 사진을 보고 마음이 돌아선 건지, 아니면 돈 앞에서 급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헛웃음만 나왔다.

“아버지 덕분에 저 이미지 추락해서 메인 모델로 있는 광고 회사들로부터 손해 배상 소송 들어왔거든요? 통장에 있는 돈 다 털어도 위약금 다 못 갚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사기 친 돈을 어떻게 갚아줘요?”

ㅡ 넌 또 벌면 되잖냐! 금방 벌잖아. 지금 찍는 드라마 출연료도 있고. 한 번만 봐다오. 진짜 이 아버지를 버릴 참이냐?!

“저한테 아버지가 어딨다고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저한테는 아버지 없어요. 가족이라곤 돌아가신 어머니뿐이에요.”

ㅡ 너 진짜 이럴 거냐?!!

“네.”

ㅡ 제 어미랑 똑같이 독한 놈! 네 어미란 년도 바람피우고 돌아다녀서 상대가 누구냐고 두들겨 패면서 물어도 한 마디도 안 하더니, 그 독기가 고스란히 너한테로 갔구나!

“어머닌 바람피운 적 없어요. 할머니처럼 무당노릇을 했을 뿐이죠.”

ㅡ 뭐?

“아버지는 모르셨겠지만 어머니는 액받이 무당이었어요. 외출하고 돌아오시면 늘 지쳤던 건 남자와 씹질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액을 대신 받아주는 무당 노릇을 했던 탓이라고요.”

ㅡ 무, 무슨 소리냐! 네 어미는 그런 말 단 한마디도 안 했다.

“말 했으면요? 어머니가 사실을 애기했으면 그땐 왜 돈을 안 가져오느냐고 때리셨겠죠.”

ㅡ 당연하지! 보통 무당도 아닌 액받이 무당이다! 네 외할머니 때문에 내가 그쪽 시세를 좀 아는데, 액받이 무당과 저주를 해주는 무당들 돈이 제일 세다더라. 그년이 그 돈을 벌어서 난 안 주고 혼자만 썼구만!

한녹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갱생의 여지라곤 없는 남자다. 제 아버지 한만식은.

“교도소 들어가셔서 반성이나 열심히 하세요. 형 살다 나와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둥 하는 소릴 하며 연락하실 생각일랑 하지도 마시고요.”

ㅡ 녹영······

한녹영이 전화를 끊었다. 연이어 다시 벨이 울렸지만 아예 무진동, 무음으로 바꾼 후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네 어머니······ 그런 일을 하셨던 분이셨어?”

“응.”

“외할머니만 무당이었다며?”

“외할머니가 무당이었다고 했지. 외할머니만 무당이었다고 한 적은 없어. 내 외가 쪽이 대대로 무당 집안이야. 신내림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대. 어머니는 그 중에서도 하필이면 가장 팔자가 사나운 액받이 무당을 해야 하는 분이었고.”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남의 불행이나 아픔 같은 걸 대신 짊어져야 하는 거라 꽤 힘들고 고통스럽다던데.”

“응. 그래서 요절하셨어.”

어머니는 늘 한없이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돌아와 한녹영을 끌어안곤 ‘널 위한 거다. 널 위해서 어미가 운명을 받아들였다.’ 하고 중얼거리셨다.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저 지친 어머니가 안쓰러웠고, 그런 어머니께 손찌검을 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어머니는 아들인 한녹영의 끝이 비참해질 거라는 걸 예상하시고, 액받이 무당으로서의 삶을 살다 돌아가신 걸까. 그래서 보장받은 복록을 다바쳐 아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려고 말이다.

박상호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한녹영은 흐려진 그의 낯을 보며 웃었다. 그리곤 저는 괜찮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툭 친 후 바깥으로 나왔다.

“중고지만 새 것 같이 깨끗해.”

장한수가 어서 와서 보라며 손짓했다. 그의 말대로 새것이라 해도 믿을 만큼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무려 2014년도에 생산된 거야. 친척 중에 중고차 매매업을 하는 분이 계셔서 그분을 통해 무조건 최신형, 무조건 무사고 차량, 무조건 깨끗하고 좋은 차로 구해달라고 부탁했지.”

박상호가 턱을 들며 거만을 떨었다.

“네네. 알았으니까요. 우리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하지 않아요?”

정지해 말에 시간을 확인해 본 박상호의 얼굴에 조급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다.

“어. 출발해야겠다. 늦겠어. 나 사무실 문 잠그고 나올 테니까 먼저들 타고 있어.”

직원이라고 해봐야 지금 있는 사람들이 다라 전부 촬영장으로 몰려가면 사무실이 비게 된다. 서둘러 사무실 문을 꼼꼼하게 잠그고 돌아온 박상호가 탑승하자마자 밴이 출발했다.

“한녹영 너 매니저가 차린 기획사 들어갔다며?”

촬영장에 도착해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 한녹영의 곁으로 송정빈이 다가와 물었다.

“네. 오늘 매니저 형이랑 매니지먼트 계약 맺었어요.”

“드문 일도 아니다만, 차라리 1인 기획사를 하지 그랬냐?”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전 그냥 소속 배우가 편해요.”

“그건 그렇지. 개업식 안 하냐? 커팅식 해야지.”

“거창하게 무슨 개업식에 커팅식이예요? 안 해요.”

“네가 대표냐? 왜 네가 안 한다고 못 박아?”

“상호 형도 별로 생각 없다고 했어요. 그냥 조용히 시작할 거라고요. 아마 조만간 한가한 날 잡아서 우리끼리 고사나 지내고 말 거에요. 아, 한경이도 나랑 한솥밥 먹어요.”

정지해에게 한녹영보다 앞서 메이크업을 받은 장한경은 세트장 근처에서 무술 감독에게 오늘 촬영에 대한 지도를 받는 중이었다. 송정빈이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은 너랑 한솥밥 먹을 것 같았어. 네 매니저랑 너 따르는 거 보면 꼬리만 없다 뿐이지, 주인 따르는 개라니까.”

“사람한테 개라뇨.”

비유가 좀 심하다면서 면박을 주긴 했지만 사실 한녹영 눈에도 가끔 장한경이 커다란 개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장한경은 한녹영과 박상호를 수렁에서 건져준 은인처럼 여겼다. 그냥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도와준 건데, 장한경이 충성이라도 바칠 듯 따르는 모습을 볼 때면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부담스럽기도 하달까. 그런 한편 꼬리라도 흔들 기세인 장한경이 귀엽기도 했다. 한녹영이 고개를 숙이자 머리를 만지고 있던 정지해가 “움직이면 안 돼.” 하고 말했다.

“두 분 여기 계셨네요.”

나희연이 다가왔다. 오늘의 촬영을 위해 품에 꽃다발을 가득 안은 채였다.

“연적끼리 희연씨 흉 좀 보고 있었지.”

“어머. 나 흉볼 일이 뭐 있다고요?”

“왜 없어. 많지. 드라마 상 연인은 난데, 나보다 한녹영 이 자식을 더 달큰한 눈으로 보잖아.”

“그야 한녹영씨가 더 매력적이니까 그렇죠. 근데 한녹영씨 스폰설은 그치질 않고 계속 나오네요.”

나희연이 한녹영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또 어디서 찌라시가 도는 모양이었다. 한울에서 터뜨린 스캔들 중 다른 두 건에 대해서는 이제 별 말이 없는데, 스폰 설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틀 전 악플 단 네티즌들을 2차로 한차례 더 고소한 데다 하영택의 납치 사건 보도로 한녹영을 향한 동정론이 더 확산되었는데도 스폰서 설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대놓고 기사가 뜨진 않지만 카터라로 돌아다니고, 찌라시가 뜨고, 게시판이나 댓글 같은 데서 수근대는 수준이었다. 한 번 생긴 의혹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씁쓸했다.

“어쩌겠어요. 아마 제가 연예계를 은퇴한 후에도 스폰 설은 남아있을 걸요. 예전에 한창 잘나갔던 한녹영이라는 배우 있잖아, 스폰 받아서 떴대, 하면서요. 이제 반쯤 체념했어요. 상대도 매번 바뀌던데 이번에는 저 스폰해준 재벌이 누구래요?”

“이번에는 재벌 아니에요. 정치권 누구라는데요.”

나희연이 힘내라는 듯 웃으며 말했고, 송정빈이 한녹영의 어깨를 툭 쳤다. 한녹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정치인이랑 절 엮기 시작한 건가.

“2년 반이나 된 나한테도 여전히 성추행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는데, 넌 오죽하겠냐. 암만 진실을 얘기해줘도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우린 드라마나 열심히 찍자. 대박 터뜨려야지. 저쪽 달콤한 그대 팀은 홍보에 아주 난리더라. 주연 맡은 신인, 주민성인가? 이제 예능에도 여기저기 내보내는 것 같던데. 너 납치설 보도되고 주가 확 떨어지더니 주민성이 예능에 나와서 반응이 괜찮으니까 다시 좀 오르더라. 어쨌든 라이벌 드라마 주연이라 신경 써서 봤는데, 예능에서 아주 펄펄 날더라. 입담도 있고, 재치도 있어서 인기 끌 것 같아.”

상대 드라마 주연이 자꾸 시선 끌면 곤란한데, 하고 송정빈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인스타그램도 되게 활발하게 하면서 팬들이랑 소통하던데요. 반응 나쁘지 않아요.”

나희연도 한 마디 거들었다.

“주민성이란 신인 배우가 허물어져 가는 한울을 버티고 있는 중인 거지. 녹영이 일로 빵꾸나면 주민성으로 때우는 식이랄까.”

송정빈의 비유가 참으로 적절했다. 한녹영을 음해한 일로 기사가 터져서 주가가 흔들 할 때면 즉각 주민성을 앞에 내세워 땜빵을 하는 식이었다. 나희연이 “그럴싸한 비유인데요?” 하고 칭찬하자 송정빈이 “기본이지.” 하며 잘난 척을 해댔다.

“근데 정말 한울은 무서운 회사네요. 재계약 안 했다고 온갖 음해설을 퍼트리더니 납치시도까지······. 저 한녹영씨 일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매번 경악한다니까요. 제 주변 동료들도 다 고개를 내젓는 중이에요. 보다보다 그런 회사는 첨 본다고요. 다들 한녹영씨 응원하고 있어요.”

나희연이 말했다. 한녹영은 납치 사건이 보도된 날 촬영장에 왔을 때 사람들 반응을 떠올리곤 짧게 웃었다. 밴에서 내리자마자 절 에워싸고 각자 한 마디씩 했는데 걱정하는 말에 압사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이후로 위기의식을 느낀 건지 어쩐 건지 촬영장 주변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경호원들보다 먼저 나서서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신분 확인을 하곤 했다. 경호원이 처음 나타났을 땐 유난이다, 며 뒷말을 하던 사람들도 없어졌고.

“그러니까. 조폭 회사보다 더한 것 같아.”

송정빈이 대꾸했을 때 AD가 “배우 분들 스탠바이 해주세요!” 하고 외쳤다. 송정빈과 나희연이 “머리 마무리하고 와.” 하곤 멀어졌다.

“다 됐다.”

한녹영의 머리 손질이 끝났다. 정지해는 앞으로 걸어 나와 한녹영을 세운 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녹영이 넌 스타일이 좋다니까. 꾸며주는 보람이 있어. 그 주민성인가 하는 신인보다 훨 나아.”

나희연과 송정빈이 주민성이 괜찮다는 식으로 얘기하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던 모양이었다. 정지해는 개인적으로는 주민성에게 아무 감정도 없지만, 일단 그가 한울 소속이고 징현재의 비밀병기 같은 느낌이라 싫었다. 한녹영이 콧방귀를 흥 하고 날리는 정지해를 향해 웃어주었다.

“나 촬영하고 올게.”

“어. 잘 해.”

한녹영은 손을 흔드는 정지해를 뒤로 한 채 세트장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김형우에 의해 누명을 쓴 성동주가 체포되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이후 성동주는 이송 중 도망쳐 도망자 신세가 되고 정민아와 차도영 등 조력자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진실을 캐고 누명을 벗으며 원수를 갚게 된다. 이런 내용이 15회에 걸쳐 긴박하게 이어진다. 물론 지금은 12회로 예정되어 있지만 말이다. 3회 연장하게 되는데도 드라마는 늘어짐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큐 사인이 들어왔고 한녹영은 차도영이 되었다. 경찰서 내부에서 후줄근한 차림으로 자장면을 후루룩대는 동료들을 앞에 둔 채 홀로 우아하게 초밥 세트를 먹던 중 검찰이 들이닥쳤다.

「성동주씨. 당신을 강지태 살인 혐의로 체포합니다.」

먹던 초밥을 내팽개친 차도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강지태 살인 혐의라니.

숨어있던 강지태를 격투 끝에 잡아왔는데, 김형우가 손을 써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살인? 성동주는 결단코 본분을 망각하고 살인할 사람이 아니었다. 누명이다.

먹던 자장면을 내팽개친 차철호가 검찰들을 향해 무슨 짓이냐며 덤벼들었다. 다른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체포되어 가는 성동주를 보며 울분을 삼키듯 아래턱에 꾹 힘을 주는 차도영이 클로즈업되는 걸로 오늘의 첫 씬 촬영이 끝났다.

타이트하게 이어진 촬영이 끝난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한녹영은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인사한 후 기다시피 밴에 올라탔다. 2시간 전에 먼저 촬영이 끝난 장한경은 밴 구석에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꽤 곤한 얼굴이었다. 한녹영 또한 시트를 뒤로 확 젖힌 후 누워 눈을 감았다.

“피곤하지? 좀 자고 있어. 집에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응.”

대답하자마자 눈을 감았고 곧 얕은 잠에 들었다. 장한경이 내리는 것도, 정지해가 내리는 소리도 들었지만 눈은 뜨지 못했다. 그 상태로 좀 더 가니 빌라에 도착한 듯 박상호가 한녹영을 흔들어 깨웠다. 그제야 한녹영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부스스 눈을 떴다. 비척비척 내린 한녹영이 빌라 안으로 사라지자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던 경호원 차량도 돌아갔다. 요즘은 매일 촬영장, 집, 촬영장, 집만을 반복중이라 딱히 위험한 일이 없을 텐데도 강준일은 경호원을 철수시키지 않았다.

“형 잘 자.”

“어. 너도 잘 자라.”

꽤나 피곤했던 듯 박상호가 유령처럼 제 방으로 걸어갔다. 늘어지게 하품하는 걸 보니 씻지 않고 그냥 잘 모양이었다. 고개를 흔든 한녹영이 휘청대며 욕실로 향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씻지 않고 잘 순 없었다. 그래서 대충 샤워를 하고, 얼굴은 꼼꼼하게 씻어낸 뒤 크림을 듬뿍 바른 후 침대에 들었다. 시계를 보니 11시 55분이었다. 한녹영은 습관처럼 강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샌 매일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 그와 통화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ㅡ 이제 들어온 건가?

준일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좀 전에요. 이제 씻고 침대에 누웠어요. 조부님 건강은 좀 어때요?”

노로 바이러스로 인해 입원했던 강준일의 조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다. 증세가 쉬이 나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세 때문인가.

ㅡ 좀 나아지셨어. 본인은 퇴원하고 싶어 하시지만 할머님과 어머니의 불같은 반대로 여전히 입원 중이시지. 아까 들렀더니 아이처럼 삐쳐계시더군. 가뜩이나 병원 싫어하시는 양반인데, 답답해서 힘드신 것 같아.

“빨리 나으셔야 할 텐데요.”

ㅡ 조부님보다 내가 더 큰일이야.

강준일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베개에 머리를 푹 파묻고 있던 한녹영이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왜요? 어디 아파요?”

질문하는 목소리에 걱정이 실렸다.

ㅡ 누가 보고 싶어서.

난 또. 건강이라도 해친 줄 알았네.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한녹영이 아예 일어나 앉았다.

“그 누가 누군데요?”

ㅡ 비밀이야.

“좀 말해주면 안 돼요?”

ㅡ 안 돼. 난 아직 신비롭고 싶거든. 처음부터 너무 많이 보여주면 재미없잖아. 매력이 떨어져.

“괜찮아요. 대표님 충분히 매력 넘치시니까 그 비밀 좀 말해주세요.”

ㅡ 안 돼.

단호하게 잘라내는 말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한녹영이 흥하고 콧방귀를 꼈다.

“알았어요. 그럼 계속 신비로우세요. 전 이만 잘래요.”

잘 자라고, 하는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친 후 다시 누웠는데 이상하게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분명 5분 전까지만 해도 너무 피곤해서 강준일과 통화 도중 졸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을 정도인데 말이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해봐도 저만치 달아난 잠은 도통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한참이나 뒤척뒤척하던 한녹영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15분이었다.

여기서 강준일 빌라까지 15분이면 가니까 왕복 30분. 정말 얼굴만 잠깐 보고 돌아오면 대충 1시 전까진 돌아올 수 있겠지? 내일 8시에 동대문에서 촬영이 있으니 7시에는 출발해야 하고······. 그럼 최대 5시간 반 수면. 촬영 일정이 정말 빡빡할 땐 하루에 2-3시간씩 쪽잠을 자기도 하니 5시간 반 정도면 수면 시간치곤 괜찮은 편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한녹영이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보고 싶다는 말을 해가지고 사람 잠도 못 자게 하는 거야. 그 누가가 저라고 꼬집어 말해주진 않았지만, 비밀이라며 의뭉스럽게 넘어갔지만, 보고 싶다는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다.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한녹영이 결국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얼굴 못 본지 일주일이다. 하영택에게 납치당했던 날 강준일과 첫 섹스를 한 이후 간신히 매일 목소리만 들어왔다. 한녹영도 촬영일정이 빈 시간 없이 빡빡했고, 강준일도 회사일과 조부님일로 바빴던 것이다.

“아, 진짜. 왜 자려던 사람 가슴에 바람을 넣어!”

진짜 못 말리는 사람이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건만. 한녹영은 짜증나는 일을 당한 사람처럼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머플러를 눈밑까지 둘둘 감고, 눈에 잘 뜨이지 않도록 검정색 패딩을 걸친 한녹영이 유령처럼 조용하게 빌라를 빠져나왔다. 혹시 몰라 제 차가 아닌 박상호의 차를 쓰기로 했다. 그가 키를 늘 현관 신발장에 걸어두어 다행이었다.

새벽이라 조용한 길을 내달려 강준일의 빌라에 들어선 후 전에 받은 카드 키를 이용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현관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직후였다. 한녹영은 굳게 닫힌 현관을 난감한 눈으로 바라보다 강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안 잤나?

“문 좀 열어줘요.”

ㅡ 뭐?

“문 좀······.”

곧장 문이 열렸다. 강준일은 흡사 강도질이라도 하러 온 사람마냥 온통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녹영을 황당하다는 듯 보았다. 머플러를 끌어내린 한녹영이 머쓱하게 웃었다.

“대표님이 저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절대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건 아니고요, 웅얼웅얼 덧붙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뻗어 한녹영의 허리를 감싼 강준일이 곧장 입술을 겹쳐왔다. 혀가 엉켰다. 한녹영은 고개를 약간 틀어 키스가 수월하도록 얼굴의 각도를 잡았다. 목구멍으로 나직하게 웃은 강준일이 혀로 한녹영의 치열을 훑었다. 그의 혀가 목구멍 안쪽까지 들어온다 싶더니 이내 강한 힘으로 혀가 빨리기 시작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지며 가느다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한녹영은 강준일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야 입술을 뗐다. 그리곤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한녹영의 입술을 혀로 느릿하게 핥았다. 가쁜 숨을 헐떡이는 한녹영의 뺨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었다.

“이번 드라마 끝나면 한동안 쉬었으면 좋겠어.”

한녹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강준일이 말했다.

“왜요?”

“한녹영씨가 바빠서 함께 보낼 시간이 너무 없잖아. 우리 지금 한창 불타올라야 하는 시기인데 권태기 부부마냥 관계가 심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한숨을 섞어 말하는 강준일의 얼굴은 애인이 바빠 놀 시간이 없다고 투정부리는 철부지 남자 같았다. 한녹영이 눈매를 반달처럼 휘었다.

“곧바로 다른 드라마 들어가진 않을 거예요.”

CF나 그밖에 드라마 홍보를 위한 활동, 인터뷰 등은 할 테지만 곧장 다른 드라마 촬영에 들어갈 예정은 없었다. 차후 들어오는 대본을 하나씩 살펴보고 신중하게 다음 드라마를 선택할 예정이고, 영화 준비도 해야 하니까.

“다음 휴일은 일주일 후던가?”

변동이 있을 수도 있지만 현재 스케줄 상 2월 21일이 비어 있었다. 그러니까 20일 밤에 강준일과 만날 예정이었다. 지, 진한 밤도 보내고.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짧게 웃은 강준일이 한녹영의 뺨을 쓰다듬었다.

“꼭 제대 날짜 받아둔 병장 같은 기분이군. 하루하루가 피 말라.”

“혹시 달력에 가위표해가며 기다리는 건 아니죠?”

군대에 있었을 때의 기억이 나 그렇게 말하자 강준일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눈매를 휘었다.

“내일부터 그래볼까. 20일에 빨갛게 하트표도 그려 넣고.”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한녹영이 진저리를 치자 강준일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인 건 알겠지만, 왠지 묘하게 현실성도 있어 달력에 가위표를 치는 강준일을 상상해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정말 잠깐 얼굴만 보려고 들른 거예요.”

강준일이 미련이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머물다 가라고 질척대고 싶지만 휴대전화로 전송받은 스케줄표가 이미 머릿속에 각인된 후라 그럴 수 없었다. 한녹영의 스케줄 표는 촬영 촬영 촬영의 연속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쉴틈이 없었다. 연애 경험이 적진 않아 지금껏 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저보다 바쁜 상대는 한녹영이 처음이었다. 첫 섹스 후 무려 2주가량 금욕이라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애달아 죽겠다. 아예 품안의 몸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면 모를까, 온몸이 녹진녹진 녹을만큼 좋다는 걸 알고 있는 탓에 더더욱 갈증이 났다. 정말 한녹영은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거의 밀당의 고수급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강준일이 물었다.

“매니저는? 밑에서 기다리고 있나?”

한녹영이 멈칫했다.

“저 혼자 왔는데요.”

“뭐? 새벽에 혼자 다니다 또 일 당하고 싶어?”

강준일의 눈매가 굳었다. 한녹영이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 일 없었어요. 운전하며 계속 뒤를 살펴봤는데 따라오는 사람도 없었고요. 얼굴도 다 가렸고, 혹시 몰라 상호 형 차 몰고 왔어요. 화내지 마요. 또 한동안 못 볼 텐데, 대표님 마지막 얼굴을 화난 표정으로 기억하고 싶진 않거든요.”

그의 손목을 살짝 잡으며 애교를 섞어 말하자 굳어있던 표정이 못말리겠다는 듯 풀어졌다.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정말로요. 그리고 우리 집 주변에 파파라치 있을지도 몰라요. 스폰 설은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는데, 대표님이 떡하니 이 시간에 절 데려다주는 장면이 찍히기라도 해봐요. 큰일 나는 거라고요.”

“난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어요. 내가!”

“혼자는 못 보내.”

강준일의 표정이 단호했다. 한녹영이 끝까지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버럭 화를 낼 기세였다. 한녹영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괜찮은데. 정말 주의하면서 왔는데.

“그럼 상호 형한테 전화할게요.”

강준일이 화내는 모습을 보느니, 박상호한테 잔소리 좀 듣지 뭐. 강준일이 그 정도에서 양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녹영은 곧장 박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상호는 한숨 한 번 푹 내쉬더니 “곧 갈게.” 하고 말했다. 잘 자고 있던 사람을 깨운 탓에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만 갈게요.”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본 한녹영이 아쉬움을 삼키며 말했다.

“건강 해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촬영해.”

“제가 정 보고 싶으면 지난번처럼 몰래 회사 탈출해서 보러 와도 막진 않을 게요.”

한녹영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문지른 강준일이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한성준 그 자식이 눈 퍼렇게 뜨고 감시하는 중이라 힘들지만, 노력은 해보지.”

이번에는 전화가 울렸다. 빨리 내려오라는 독촉이었다. 한녹영은 미련을 떨치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박상호가 한심한 얼굴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녹영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해 형. 가뜩이 나 피곤할 텐데.”

“나보다 네가 더 피곤할 텐데 이 시간에 여길 오고 싶디? 어서 타.”

한녹영이 조수석에 올라타며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보고 싶다고 하잖아.”

“응? 뭐라고?”

“대표님이 보고 싶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어서.”

조용조용 변명을 중얼대는 한녹영의 얼굴을 빤히 보던 박상호가 “너?” 하고 뭘 말하려다 “아니다.” 하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힐끔 박상호를 쳐다봤던 한녹영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차가 강준일의 빌라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일주일 남았나. 발렌타인데이도 함께 못 보내겠네. 정말 달력에 가위표라도 쳐볼까? 하루가 지날 때마다 가위표를 하나씩 치면 기다림의 시간이 좀 짧게 느껴지려나?

다음 순간 한녹영이 홀로 픽 웃었다. 나 참. 사랑에 빠진 소녀도 아니고 무슨 어이없는 생각을 한 건지.

“그렇게도 좋냐?”

박상호가 끝내 물었다. 귓불까지 벌게져서 혼자 히죽히죽 웃질 않나, 보고 싶다는 이유로 녹초가 된 몸으로 이 새벽에 달려가질 않았나, 아주 사랑에 빠진 청년 그 자체였다.

“무슨 소리야?”

“강 대표가 그렇게도 좋으냐고 물었어. 너 지금 영락없이 사랑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청년 그 자체거든. 보기 나쁘진 않다만 조심해라. 촬영하다 강 대표 생각하며 머리에 꽃 단 처녀처럼 히죽 웃지 말고.”

“사, 사랑은 무슨. 강 대표 사랑한다고는 안 했거든! 그냥 사귀는 사이인 것 같다는 정도지. 앞서가지 좀 마.”

사랑은 무슨. 아직 연애하자는 말도 못 들었는데. 애인님, 하는 말을 들은 것도 같지만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은 못 들었다. 혼자 구시렁대던 한녹영이 피식 웃으며 운전 중인 박상호를 향해 “사랑은 무슨!” 하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박상호가 혼자 열 내는 한녹영을 흡사 미친 놈 보듯 보았다.

사랑은 무슨. 의지가 되고, 생각하면 힘이 나고, 보고 싶고, 섹스가 죽을 만큼 좋았다고 해서 다 사랑인가?

사랑인······ 가? 갑자기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 침묵하는 한녹영을 힐끔 본 박상호가 ‘또 갑자기 웬 분위기야?’ 하고 속으로 몰래 혀를 찼다.

“강준일 대표님께서 도시락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점심은 다 같이 도시락 먹도록 하죠!”

스태프중 한 명이 외쳤다. 동대문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오후 씬을 위해 인천 외곽의 컨테이너 창고로 넘어온 한녹영도 도시락을 받아 대충 앉았다. 오후는 차도영이 숨어있는 성동주를 만나러 온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갓 만들자마자 배달한 건지 도시락은 아직 따뜻한 편이었다. 나무젓가락을 뜯어 막 식사를 시작했을 때 송정빈이 도시락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레 한녹영과 박상호의 사이에 껴 앉았다.

“녹영이 너 오늘은 강준일 대표랑 스폰서 설 났더라.”

사레가 걸려서 매운 기침을 하자 박상호가 화들짝 일어나 등을 두들겨주었다. 당황했냐, 하고 송정빈이 미안한 얼굴로 물을 집어주었다. 한녹영이 물을 마셨다.

“무슨 소리에요?”

“오늘의 찌라시 내용은 강준일 대표가 네 스폰서라는 거더라고. 어제는 정치권의 누구. 오늘은 강준일 대표. 아마 LK에서 우리한테 투자하고, 강준일 대표가 유난히도 관심을 보이는 것 같으니 일단 찔러보자는 심정으로 써 갈긴 것 같은데······ 내일은 누가 되려나.”

한녹영이 숨을 크게 삼켰다. 다행히 송정빈은 강준일이 스폰서 상대라는 찌라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다 정재계 유력인사는 전부 한 번씩 제 스폰서 상대가 되겠어요. 전 아무래도 옴므파탈인가봐요. 일명 녹영파탈이랄까요.”

투정조로 말한 한녹영이 박상호를 할끔 보았다. 강준일 이름이 나오자 잠시 굳었던 그는 애써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한녹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괜찮아 안심해.’ 라고 하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정재계 유력인사는 다 후리고 다니는 녹영파탈. 지금껏 네 스폰서라고 언급된 사람들을 줄 새우면 여기서 적어도 서울까지는 가겠어.”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보다 오늘 비 오진 않겠죠.”

점심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꾸물꾸물해지고 있었다. 한녹영의 말에 송정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르겠네. 하늘을 보니 올 것 같기도 한데. 아까 감독님한테 물어보니 비와도 촬영은 할 거래. 안 그래도 날씨가 이래서 김현영 작가와 의논해보니 도망자 신세가 된 성동주와 그의 은밀한 조력자가 된 차도영이 만나는 비장한 씬이라 비오면 오히려 분위기가 더 살지 않겠느냐고 하더래. 굳이 살수차를 동원할 필요까진 없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비가 내리면 땡큐라는 거겠지.”

“빗속 촬영은 힘들어서 별로인데, 드라마를 위해서라면 비가 오는 편이 낫겠네요.”

“그러게. 첫 촬영 때 추워 죽을 뻔 했는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이 한몸 희생해야지 뭐. 그런 의미에서 비오길 기도해야겠다.”

그때 삼삼오오 모여서 점심 도시락을 먹던 중인 스태프 중 한 명이 “어? 강정석 회장님 건강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인데.” 하고 말했다. 강정석 회장이라면 강준일의 조부님이다.

“왜? 뭐 떴어?”

김석형이 물었다. 한녹영도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강준일에 관련된 일이라 절로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내내 입원 중이었나 본데, 아침에 갑자기 심장발작 같은 증상이 일어났나 본데요? 지금 수술 중이래요.”

“형, 나 휴대전화 좀.”

한녹영도 급히 박상호에게 맡겨두었던 휴대전화를 받아 기사를 찾아보았다. 급성심근경색 진단을 받아 관상동맥조영술에 들어갔다는 기사가 보였다. 심장 관련 국내 최고 의료진들이 투입되었고, 무리 없이 회복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지만 걱정되는 마음에 계속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이 여자······.”

‘강정석 회장의 심근경색, 병원에 모이는 LK가 사람들’이라는 기사에 침통한 표정으로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남녀 사진이 있었는데, 암만 봐도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한녹영은 휴대전화에 거의 얼굴을 박다시피 한 채로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왜 그래? 누구 보고 그러는 거야?”

화들짝 놀란 한녹영의 얼굴을 의아하게 보던 송정빈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리곤 한녹영의 휴대전화 액정을 들여다보더니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일이랑 주애리 부부잖아.”

“아는 사람들이에요? 특히 이 여자.”

왠지 입술이 바싹 말랐다. 한녹영이 혀로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LK가 사람이잖아. 남자는 강정석 회장의 장손이고, 여자는 LK 미술관 관장이자 강한일의 처. 그러니까 강정석 회장의 첫째 손주 며느리가 되는 거지.”

“주애리 관장이라면 강정석 회장의 첫째 손주 며느리가 맞아. 고인이 된 강정석 회장의 첫째 아들의 며느리니까. 서열로 따지자면 주애리의 남편인 강한일이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데, 강정석 회장이 유난히도 강준일 대표를 아껴서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강준일 대표에게 넘길 거라는 의견이 대세야. 실제로 강 회장도 본인의 뒤는 강준일이 이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그래서 강한일 주애리 부부가 강준일 대표를 미워한다는 소문은 유명해. 강준일 대신 남편인 강한일을 후계자로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걸?”

박상호가 송정빈의 말을 이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박상호의 말을 듣던 한녹영이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 여자가 정말 LK가 사람이란 말이야?

“그렇다니까. 강한일과의 결혼 초만 해도 친정아버지가 사선 의원을 했던 정치권 거물이었지. 이후에 비리에 휘말리면서 권력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여기저기 선이 닿아있을 거야.”

“이 여자가 강준일 대표를 미워한다고?”

“그렇다니까. 왜 안 그렇겠냐. 남편인 강한일은 찬밥 취급하면서 강준일 대표는 애지중지하고 있으니까. 강정석 회장의 편애는 진짜 유명해. 손자가 오직 강준일 한 사람뿐인 것처럼 구니까. 공식석상에도 대부분 강준일 대표를 대동하고. 오래 전에 강준일 대표가 크게 아팠던 적이 있는데, 그때 강 대표를 고쳐주는 의사한테는 계열사 한 개를 떼어주겠다고 공언한 적도 있었대. 그게 벌써 20년도 전의 일인데, 아직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니까.”

“호오, 그래요? 강 대표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걸 보면 누군가 고쳐준 모양인데, 누구랍니까? 정말 계열사를 떼어준 것 같진 않고,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렀을 것 같은데.”

송정빈이 박상호의 말에 관심을 표했다. 박상호가 눈을 반짝 빛내는 송정빈을 향해 웃었다.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정빈씨.”

박상호와 송정빈이 대화를 나누건 말건 한녹영의 모든 신경은 온통 사진 속 여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이 여자 분명 그 여자다. 여의도 라미르 주차장에서 장현재와 함께 있던. 여자를 대하는 태도와 표정 등을 보고 ‘저 여자가 현재 형 스폰서인가 보네.’ 하고 생각했던 것이 따올랐다. 이젠 입술만이 아니라 혀 안쪽까지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장현재의 스폰서인 이 여자가 강준일 대표를 미워한다고? 당연히 남편의 것이 되었어야 할 후계자 자리가 강준일 대표한테로 넘어가서? 남편에게 그룹 전체의 후계자 자리를 넘겨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거라고?

‘날 노린 것이 아니었나?’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며 불쑥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와 강준일과의 섹스 영상은 절 노린 것이 아니었고, 강준일을 겨냥한 스캔들이었나 하는 생각이었다. 강준일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안쓰러운 눈을 한 채 절 찾아왔던 건가? 그 눈에 담겨있던 온기의 의미는 미안함이었던 건가. 가뜩이나 불행해졌는데, 그로 인해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서?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애초에 제가 그딴 영상을 찍지 않았더라면 그도 저도 불행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병원에 누워있던 절 찾아왔을 때 강준일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했다. 제가 아니라 강준일이 목표였다는 사실만은. 그리고 여전히 이 여자는 강준일을 노리고 있을 거다.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아나며 현기증이 와락 찾아온 듯 한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한녹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위에 올려둔 도시락이 흙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녹영아?”

“어이, 한녹영. 왜 그래?”

박상호와 송정빈이 당황한 눈으로 한녹영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한녹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흙바닥에 굴러 떨어져 엉망이 된 제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표정을 구겼다.

“미안.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뭔 생각을 했는데? 도시락 남은 게 있는지 모르겠다.”

박상호가 제 도시락을 옆으로 밀어둔 후 흙범벅이 된 한녹영의 도시락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녹영도 허둥지둥 도우려고 하자 박상호가 저지했다.

“내가 할 테니까 넌 남은 도시락 있는지 가봐.”

“아니야. 밥맛없어. 그만 먹어도 돼.”

속이 울렁거렸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남은 촬영을 버티지. 얼마나 먹었다고 그만 먹어도 된대? 너 두 젓가락도 안 먹었어.”

“이따 한 3-4시쯤 두유랑 과일이나 좀 먹으면 돼. 진짜 입맛이 없어. 지금 먹으면 체할 것 같아.”

한녹영의 건강관리를 위해 박상호가 거의 매일 두유랑 과일을 챙긴다. 그도 늦잠을 자거나 하는 둥 바쁜 날에는 깜박하기도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챙긴 걸 봤다.

“그럴래? 그럼 이따 잠깐 쉴 때 과일이라도 먹어.”

체할 것 같다고 하자 더는 권하지 않는다. 한녹영은 박상호와 송정빈을 향해 “식사마저 해.” 하고 말한 후 그들을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고 난 후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손바닥을 내려다봤는데 땀이 축축하게 맺혀 있었다.

“날 노린 게 아니었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영상은······ 강준일을 노린 거였다. 답안지를 미리 훔쳐본 것처럼 머릿속이 명확해졌다. 드라마와 영화의 연이은 실패 후 언론이 저를 두들겨 패듯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일종의 덫이었던 것 같다. 언론의 몰매를 맞아 심정적으로 비참해지고 자존감이 떨어진 절 이용해 강준일을 잡으려한 덫. 그리 좋은 머리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앞뒤 유추는 가능했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널 위해서야.’ 라고 했던 장현재의 그 말 또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망치고 인기가 하락한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폰서인 여자를 위해서 절 강준일의 침대로 떠밀어 넣은 것이다. 언론을 이용해 절 두들겨 패가면서. 결국 최종 선택은 욕망에 눈이 먼 제가 했지만, 그때의 전 정말로 믿었다. 널 위해서, 우릴 위해서······ 라는 장현재의 말을. 그래서 수치심도 잊은 채 그런 짓을 했던 거다. 강준일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을지도 모르는 일을······. 제가 한 짓으로 인해 강준일이 받을 피해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땐 오로지 저와 장현재만이 중요했으니까.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목 안쪽이 화끈해졌다. 발악하듯 소리를 질러버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날 이용해서 강준일 대표를 망치려는 것도 모르고 장현재의 말을 따랐다니, 난 정말 어디까지 어리석었던 걸까. 제가 과거로 돌아온 탓에 이미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는데도 마치 지금 강준일을 망친 듯 죄책감이 들었다. 가슴이 쓰라렸다.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만지작댔다. 강준일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만이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유일한 진정제였다. 사실은 당장 달려가 얼굴을 보고 싶지만, 그도 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응급수단으로 목소리라도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전화를 걸어도 될까. 조부님 일로 정신없을 텐데. 한참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벨이 딱 다섯 번 울릴 때까지만 기다리고, 그때까지도 받지 않으면 얼른 끊어버리자.

ㅡ 이 시간에 웬일이지?

강준일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그의 음성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기사 봤어요. 걱정돼서요.”

ㅡ 수술은 잘 끝났어. 지금 중환자실로 옮겼고, 의식이 돌아오시면 일반 병실로 이동하실 거야. 주치의 말이 닷새 정도면 퇴원하실 수 있다는군.

“다행이네요.”

ㅡ 노로바이러스가 조부님을 살린 셈이지. 병원에 계셨던 덕분에 처치가 빨랐으니까. 이번엔 조부님 고집에 넘어가지 않고 쭉 입원하시게 했던 것이 신의 한수였어.

“목소리가 많이 피곤하게 들려요.”

ㅡ 새벽에 전화 받고 좀 놀랐거든. 그나저나 그렇게 말하는 한녹영씨 목소리야말로 어딘지 모르게 지친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나?

강준일은 한녹영의 음성에 실린 미약한 떨림을 예민하게 캐치해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예리한 사람이다. 이 남자에겐 도무지 뭘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잔뜩 지친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한녹영이 몸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최대한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나마 전화라 얼굴이 안 보여 다행이었다.

“촬영이 힘들어서 그런가 봐요. 휴식 시간 끝나서 저 촬영장에 돌아가 봐야해요.”

ㅡ 건강 챙겨가면서 하도록 해.

“대표님도요.”

막 전화를 끊었을 때 박상호가 밴의 문을 열며 “혹시 속이 안 좋으면 소화제 사다줄까?” 하고 물어왔다. 아무래도 한녹영의 상태가 신경 쓰여 식사를 끝내자마자 온 모양이었다.

“아니야. 이제 좀 나아졌어.”

“30분 있다가 촬영 들어간다는데, 지금 두유 마실래?”

“그럴까?”

“어. 두유로라도 속을 좀 채워.”

밴 안으로 들어온 박상호가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두유와 바나나 한 개를 찾아 건네주었다. 그걸 건네받은 한녹영이 두유부터 먹기 시작했다. 좀 괜찮아졌나 싶은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

“뭐? 어딜 가자고?”

ユ날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한녹영은 허기진다며 부엌으로 향하는 박상호의 등을 향해 “장현재한테 가자.” 라고 말했다. 냉장고 손잡이를 잡은 박상호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한녹영을 돌아보았다.

“장현재 대표한테 가자고 했어. 이 시간이면 집에 있을 테니까, 장 대표 아파트로 가.”

“네가 장 대표 아파트에는 왜 가? 뭣 땜에?!”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한녹영이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않자 미간을 찌푸린 박상호가 냉장고 문을 쾅 닫은 채 거친 걸음으로 다가왔다.

“형 잠들고 나면 혼자 몰래 가려고 했는데······.”

“야!”

박상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태도로 빽 소리를 내질렀다. 이름을 부를 여유도 없어서 마치 지나가는 꼬마아이 부르듯 야,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한녹영이 기죽은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하는 거잖아. 안에는 나 혼자 들어갈 거지만, 아파트까지 같이 가.”

혼자 움직였다는 걸 나중에 강준일이 알게 되면 불같이 성을 낼 테니까. 그게 무서워서 혼자 몰래 움직이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전엔 혐오감을 드러내며 독설을 툭툭 내뱉는 강준일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요샌 그의 화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기분이었다.

“대체 왜 가겠다는 건데? 이유나 알고 움직이자.”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래. 지금 가자.”

입매를 꾹 다물고 있는 한녹영의 얼굴에 고집이 가득했다. 싫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기어이 갈 모양새라 한숨을 푹 내쉰 박상호가 “그래. 가자, 가.” 하며 키를 챙겼다.

도로 주차장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박상호의 차를 타고 장현재의 아파트로 이동했다. 이동도중 한녹영이 장현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녹영아. 웬일이야?

뜻밖의 전화에 장현재는 당혹스러워 했다. 한녹영이 차갑게 말했다.

“할 말 있어. 지금 집이지? 가는 중인데.”

ㅡ 할 말이 뭔데? 그래, 지금 집이니까 와라.

한녹영이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약 십 분 후쯤 장현재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형은 여기서 기다려.”

“싫어. 나도 같이 올라갈 거야.”

“······.”

“대신 실내는 안 들어가고 현관 바깥에서 기다릴게. 그래야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뛰어 들어갈 수 있을 거 아냐.”

“장 대표가 내 앞에서 칼 들고 설치기라도 할까봐? 알았어. 같이 올라가.”

박상호의 걱정에 짧게 웃은 한녹영이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함께 위로 올라갔고, 초인종을 누르자 곧 문이 열리며 장현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녹영의 뒤에 서 있는 박상호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 왔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상호 형은 여기서 기다릴 거야.”

돌덩이처럼 딱딱한 어조로 말한 한녹영이 박상호를 향해 눈짓을 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장현재가 한녹영을 뒤따랐다.

“할 말이 뭐기에 이 시간에 네가 날 다 찾아왔어? 녹영이 네가 내 아파트에 있는 모습 정말 오랜만에 본다.”

한녹영이 왠지 감격이라는 듯 웃는 장현재를 물끄러미 보았다. 장현재가 한녹영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할 말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그 여자 때문이었지. 주애리라는 강준일 대표의 사촌 형수.”

장현재가 주춤했다. 눈썹이 미묘하게 말려 올라가는 것이 한녹영의 눈에 잡혔다. 당황했을 때 나오는 장현재의 버릇 중 하나였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줘야지. 앞뒤 다 잘라먹고 대뜸 몸통만 던지면 내가 어떻게 이해하지?”

“나한테 강준일 대표 유혹하라고 했던 이유, 주애리라는 그 여자 때문이었지? 내가 강대표 유혹하는데 성공하면 영상 뜨라고 할 생각이었던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나와 주애리라는 여자가 무슨 생관······.”

“형 스폰서잖아.”

“뭐?”

장현재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한녹영이 두 사람의 관계를 정확하게 짚어내자 놀란 모습이었다.

“봤어. 두 사람 같이 있는 모습. 그 여자를 위해서 강준일 대표를 망치는데 날 이용하려고 한 거 아니었어?!”

“너부터 말해봐. 대체 언제부터 강 대표와 눈이 맞았던 거야? 느닷없이 날 배신하고 떠난 배경에 강준일이 있었던 거지? 너와 강준일이니. 정말 상상도 못했던 조합이라 한동안 머리가 다 얼얼했다. 믿고 있던 너한테 호되게 얻어맞았어. 네가 영악하게 머리 굴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익을 위해 사람을 갈아탈 수 있는 냉혹한 면이 있다는 사실 또한 처음 알았고.”

비위라도 맞출 셈이었는지 내내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장현재의 얼굴이 순간 매몰차게 변했다. 한녹영은 싸늘해진 장현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 대한 실망감을 넘어······ 마음이 처참했다. 대체 난 무엇을 보고 저 남자를 사랑했던 걸까. 무엇에 집착했던 걸까. 이젠 그 이유조차 모르겠다. 마치 환상을 쫓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내가 형을 떠난 것과 강준일 대표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내가 믿을 만 한 소리를 해. 네 뒤에 강 대표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뻔히 아는데 아직도 거짓말을 할 셈이야? 투자 건부터 네 스캔들에 적극 해결해준 것까지······ 나보다 그가 부자고 힘이 있어서 날 버리고 떠난 거야? 그래서 날 배신한 거야?”

한녹영이 떠난 이유가 강준일 때문이라고 홀로 확정지은 말투였다.

“배신은 형이 먼저 했어.”

“느닷없이 재계약하지 않고 날 떠나겠다고 선언한 사람은 너였어.”

“배신한 거 맞잖아. 그래도 난 끝까지 한울에 최선을 다했어. 책임을 다한 후에 떠났어. 그런데 형이 내게 한 짓을 봐. 그딴 파티에 날 보내서 몰래 사진을 찍었잖아! 아버지와 박지한까지 이용해 날 파멸시키려고 했잖아!”

“망가뜨려서라도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을 뿐이야. 예전처럼 오로지 나만 봤던 널 되찾고 싶어서.”

“그게 날 망치려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내가 만약 그 파티에서 일이라도 당했으면······ 아, 확실한 약점이 생겼다고 오히려 형은 좋아했으려나?”

한녹영이 빈정거렸다. 장현재의 눈빛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허무한 웃음이 나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한녹영이 조금쯤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네가 그딴 재벌가 버러지들에게 무슨 일을 당할 정도로 약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기껏 내놓은 변명에 웃음만 나왔다.

“내가 형을 떠난 진짜 이유가 궁금해?”

“그래. 강준일이 아닌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면. 내가 널 먼저 배신했다는 둥 하는 헛소리는 말고.”

“내 외가 쪽이 무당 집안인 건 알지? 대대로 신내림 받은 사람들이 많았거든. 어느 날 내게도 신기가 생겼는지 미래가 보이더라. 강준일 대표와 내 섹스 스캔들이 터졌고, 사고를 당해 내 얼굴이 망가졌어. 내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 거지. 그런 날 형이 버렸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장현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황당무계한 거짓말까지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무슨 말로 날 버렸는지도 말해줄까? 넌 이제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 라고 했어. 늘 내가 제일 특별하다고 한 그 입으로.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황당해? 그럼 나와 강준일 대표의 섹스 영상이 필요했던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봐. 내게 강준일 대표를 유혹하라고 한 이유가 그 여자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봐!!”

날 이용해서 강준일을 망치려 했던 것이 아니라고!! 감정이 격앙됐다. 한녹영이 어금니를 깨물며 장현재를 노려보았다.

비명을 내지르는 것처럼 외친 말이 바깥으로 흘러나갔는지 현관에 귀를 바짝 대고 있던 박상호가 “녹영아?! 괜찮아!!” 하고 문을 쾅쾅 두들기며 크게 물어왔다. 한녹영이 “괜찮아.” 하고 대답한 후 장현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후 말했다.

“형이 내게 한 말은 다 거짓말이었잖아. 어느 하나 진실이라고는 없잖아.”

“네가 내게 특별하고 한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어. 너만은 절대 날 떠나지 않을 거라 믿었기에 약점 같은 건 만들어두지 않았고. 주애리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널 강준일에게 보내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것도 우릴 위해서였어. 그 여자가 대가로 그녀가 가진 주식 전부를 걸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한울은 내 회사지만 내 회사가 아니기도 해. 그놈의 주주들이 작당해서 날 밀어내려고 하면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는 걸 알잖아.”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그게 어떻게 우릴 위해서야. 형 혼자를 위해서지. 형을 위한 일이 곧 날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 마. 나 바보 아니니까. 물론 그렇게 믿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내가 완전히 망가져서 정말 더 이상의 가치도 없어지면 언제든 냉정하게 버릴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지 않아? 늘 내가 가장 특별하다고 했지만 사실 형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형 자신이잖아. 형에게 내가 짐이 된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버릴 거잖아. 아니야?”

장현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정곡을 정확하게 찔려 이번에는 늘 하던 것처럼 달콤한 거짓말도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한녹영이 한쪽 입끝을 올리며 비웃듯이 웃었다.

“내가 형 부탁대로 강준일 대표를 유혹하는데 성공해서, 역시나 형의 부탁대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영상을 찍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형은 그여자한테 주식 받고 우린 연인이 되어서 행복했을까? 천만에. 영상이 유포되어 난 돌이킬 수 없이 추락했겠지.”

“그럴 일은······. 영상이 유포되는 일은······.”

장현재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더 이상 거짓말이 안 나왔다.

“영상이 유포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아니. 만약 내가 형 부탁으로 영상을 찍었다면 그건 분명 세상에 유포되었을 거야.”

실제로 제가 찍었던 영상은 보란 듯이 터졌다. 황산 테러 이후 터져 절 노린 거라고 오해했던 거고.

“······.”

장현재는 말이 없었다.

“형 같이 영리한 사람이 이후의 일을 계산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을 텐데. 형 앞에 주어진 이익에 눈이 멀어 이후 내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안 해본 거지? 아니면 형을 위해 내가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나. 그러면서 우릴 위한 일이었다고? 형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사람이야. 본인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냉혈한! 실제로 형 좋을 대로 사람들을 이용하면서 그 자리에 오른 거잖아.”

신랄한 평가에 장현재가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한녹영은 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가는 걸 보며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장현재를 눈앞에 둔 지금 한녹영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다. 장현재가 그런 한녹영을 응시했다. 한녹영의 말에 여자가 떠올랐다. 그깟 배우 한 명쯤 매장되어도 상관없잖아, 하고 말하던 여자를 보며 혐오감을 느꼈다. 권력가의 딸로 태어나 평생 고고하게 살아온 여자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사람을 이용하고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의 우월의식과 이기적인 마음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필요에 의해 만나왔는데, 한녹영이 보는 저 또한 여자와 같았다.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이용하고 짓밟으며 출세의 길을 걸어온 냉혈한. 문득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한녹영을 한낱 배우 취급하며 짓밟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혐오감을 느꼈으면서 문득 돌아보니 저 또한 여자와 같았다.

주식에 눈이 멀어 영상을 찍은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도 모르는 새 한녹영이 저를 위해 어느 정도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제 이익이 곧 한녹영의 이익이라 생각했던 오만을 직격으로 찔리자 수치를 들킨 기분이었다. 수천 명의 대중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듯 했다.

“날 이용해서 강준일 대표를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하지 마. 형 같은 사람이 망쳐도 되는 사람 아니니까.”

“나 같은 사람이라··· 날 떠난 이유가 강준일 때문이 아니라고 하더니 너 강준일을······.”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이 시원하게 나왔다. 입으로 먼저 내뱉어놓고 한발 늦게 ‘아, 나 강 대표를 사랑 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한녹영은 충격 받은 사람처럼 창백해진 장현재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 강준일 대표를 사랑해.’ 하고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버린 저를 홀로 찾아와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준 그 순간부터. 세상이 다 얼음처럼 차가울 때 강준일의 눈빛만이 홀로 따뜻했다. 그 나름대로의 죄책감이든, 동정이든, 다른 이유가 있든,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의 눈에 담긴 온기만이 중요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로도 잊히지 않고 가슴에 내내 남아있었을 만큼.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부터였을 거야. 그때 이미 마음을 뺏겼던 거야.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라서 사랑해. 그 사람은 내가 망가져도, 쓸모가 없어져도 끝까지 날 따뜻하게 바라봐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형과는 달리 사람을 가치로 평가하지 않거든. 형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지 않거든. 속까지 제대로 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날 이용해서 그 사람 망치려는 생각 같은 건 꿈에도 하지 마.”

“나와는 달리······라.”

한녹영을 빤히 보며 장현재가 이를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왜일까. 저와는 달리, 라는 그 표현이 꽤 아프게 들렸다. 따뜻하다고? 매몰차게 누구든 짓밟을 수 있는 냉혹함으로 가득한 그 남자가? 강준일의 얼음 같은 내면이 한녹영에겐 안 보이는 건가. 이미 눈이 멀어버린 건가. 이제 한녹영의 눈동자에 담긴 사람은 제가 아니라 강준일이었다. 그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한녹영이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오늘 장현재를 찾아온 건 절 이용해서 강준일을 망치려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 따지기 위함도 있지만, 경고를 하기 위함도 있었다. 제게 아주 큰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서 강준일을 지키고 싶었다.

새끼를 지키는 어미 개 마냥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는 한녹영을 비참한 심정으로 보고 있던 장현재가 고개를 기울였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 한녹영은 처음 본다. 그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속까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제가 아는 한녹영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제 손에서 빛나던

한녹영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제 앞에서 당당하게 선 채 절 비난하는 한녹영은 이제 강준일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사람은 나인가? 내가 내 손으로 한녹영을 떠나게 만든 건가?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제가 뭘 해도 한녹영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찾기엔 너무 멀리 가버렸음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이제 제가 아닌 강준일의 사람이 되어버린 한녹영을 아린 눈으로 보던 장현재가 내뱉듯이 말했다.

“이미 늦었어.”

“무슨 소리야?”

의아하게 묻는 한녹영을 뒤로 한 채 침실에 들어갔다 나온 장현재의 손에 사진이 들려있었다. 장현재는 그걸 한녹영을 향해 날리듯 던졌다. 사진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덜덜 떨면서 사진을 주운 한녹영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제 어깨를 감싸서 오리 고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강준일의 얼굴이 선명했다. 기절한 절 안아 차에 태우는 모습 또한 있었다. 납치당했던 날로 추정되는 사진이었다. 제 얼굴도 강준일의 얼굴도 선명해서 사진이 유출된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선 큰 이슈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한녹영의 스폰서가 강준일이라는 설에 확인도장을 쾅쾅 찍어주는 격이 될 거다. 심장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이, 이거 뭐야! 내 뒤에 사람 붙였어?!!”

“전에도 종종 거래했던 파파라치한테서 샀다. 연예인들의 비리나 비밀 같은 걸 캐서 소속사에 팔아먹는 거머리 같은 자식이지. 내가 터뜨린 스캔들로 너한테 관심을 갖게 되어 뒤를 쫓아다니다 찍은 사진들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 중이야. 주애리에게 넘길까. 어쩔까.”

“······.”

한녹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내가 널 이용하려들지 않아도 넌 이미 강준일의 약점이 되었어. 주애리는 그걸 놓치지 않을 테고. 내가 이 사진을 주애리에게 넘겨주면 그녀는 곧장 강정석 회장에게 달려가겠지. 강 회장의 편애는 유명하지만 글쎄다. 과연 그리도 편애하는 손자가 연예인, 그것도 남자 연예인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 강 회장이 무슨 수를 쓰기 전에 충격 받아 돌아가실지도 모르겠군. 심장이 안 좋은 모양이던데. 이걸 언론사에 보내면 어떨까? 너한테 스폰서가 있다는 루머만은 끈질기게 살아있는 것 같던데, 너와 강 대표의 묘한 사진이 공개되면 참 재밌을 거야. 그렇지?”

“······.”

“이 사진들을 주애리에게 주든, 언론사에 바로 공개하든 너도 강 대표도 지금처럼 웃진 못할 텐데. 강 대표는 어쩌면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날 테고, 넌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지가 실추될 거고, 그럼 서로가 서로를 망치는 건가. 넌 강 대표를, 강 대표는 너를. 강 대표를 사랑한다라. 사랑하게 된 강준일을 네 손으로 망가뜨리게 될 지도 모르는 기분이 어때?”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장현재의 얼굴이 참으로 비열해보였다. 한녹영은 거칠어지는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싸늘하게 장현재를 노려보았다.

“뭘 원하는 건데?”

“우선은 둘이 사랑 놀음을 하는 꼴을 봐주기 싫으니 강 대표와 헤어져. 강 대표와 만나는 모습이 내눈에 뜨이면 이 사진은 주에리나 언론사 둘 중 한 곳에 가게 될 거야. 난 그 동안 이 사진들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생각해봐야겠어.”

“비열해. 형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매번 실망했지만, 비열한 면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이젠 형이 아니라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 대체 형의 뭘 보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건지 모르겠어.”

장현재에 대한 실망을 넘어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아무리 눈이 멀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남자에게 집착해 인간 이하의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까. 대체 뭐에 씌었던 거기에. 정말 보는 눈이 너무 없었고, 말도 못하게 어리석었다. 잘못된 길을 갔으니 비참해진 건 당연했다.

이제라도 눈을 떠 장현재가 아닌 강준일을 보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데······. 이젠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과거가 거대한 넝쿨이 되어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한녹영이 눈에 혐오를 가득 담은 채 장현재를 보았고, 장현재는 입안 가득 차오르는 씁쓸함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넌 강준일 못 만나. 찌라시나 루머를 듣고 제대로 한 번 캐봐야겠다고 생각하는 파파라치가 한 명뿐일 것 같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대충 얻어걸리기만 해도 특종일 텐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까?”

“없는 스캔들을 조작해서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간 건 형이잖아!”

김동우의 파티 건으로 제게 스폰서로 떴다는 오명만 붙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거다. 한녹영이 장현재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내가 널 함정에 빠뜨리지 않았어도 너와 강준일의 끝은 불행했을 거야. 주애리가 두 사람의 해피한 결말을 두고 보진 않았을 테니까. 그보다 대답이나 해. 어쩔래?”

“녹영아 괜찮아? 장 대표와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 아까 막 큰소리도 내고 그러던데, 해코지 당한 건 아니지? 안색은 또 왜 이래?”

하얗게 질려서 나오는 한녹영을 보고 박상호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괜찮아. 집으로 돌아가자.”

간신히 대답하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다. 재빨리 한녹영을 부축한 박상호가 싸늘한 눈으로 장현재의 현관을 노려보았다.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기에 애가 귀신 본 사람처럼 허옇게 질려서 나와? 혀를 찬 박상호가 한녹영을 부축해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무슨 얘기······ 한 거야?”

집으로 돌아가 조심스레 물었는데, 한녹영은 멍하니 창밖만 응시할 뿐 대답이 없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박상호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것이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고 우울한 한녹영의 얼굴을 흘끔흘끔 하던 박상호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장현재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지만 한녹영이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녹영아?”

“형,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는 한녹영의 대답에 박상호가 그래, 하고 대답하며 운전에 열중했다. 한녹영은 집으로 돌아온 이후 말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침대로 몸을 날렸다.

‘사랑하게 된 강준일을 네 손으로 망가뜨리게 될 지도 모르는 기분이 어때?’

장현재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울렸다. 귀를 틀어막은 한녹영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강준일로 인해 제가 망가질 거라는 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저로 인해 그가 망가질 것이 두려웠다.

예전에 영상을 만들어 그를 망쳤던 것처럼 이번에도 의도치 않게 강준일을 망치게 될까봐 소름끼칠 만큼 무서웠다. 그를 사랑하는 만큼 두려움이 컸다. 두려움이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처럼 제 심장에서 불쑥불쑥 커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밤이었다. 촬영을 끝낸 한녹영이 빌라 앞에서 내리는데 플래시가 터졌다. 순식간에 눈앞이 번쩍 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한 발 앞서 도착한 경호원들이 사진을 찍자마자 돌아서서 뛰기 시작하는 남자의 뒤를 날렵하게 쫓았다.

“뭐야? 기자인가?”

박상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녹영은 경호원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기자······ 일까?”

“근데 기자면 기껏 네가 밴에서 내라는 사진이나 찍고 도망가진 않았을 텐데. 기삿거리가 안 되니까. 어쩌면 열성팬일 수도 있고.”

“열성팬일까? 아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이상한 사람? 이상한 사람 누구?”

주애리가 보낸 사람이라던가. 혹은 장현재가 말한 파파라치.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주애리나 장현재가 보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대놓고 사진을 찍은 후 도망가진 않았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잠시 후 경호원이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을 잡아 데려왔다. 우람하고 매서운 표정의 경호원에게 겁을 먹은 듯 소년은 거의 울먹이며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형을 좋아해서 그냥 사진 한 장 찍고 싶었어요. 사진은 지, 지우셔도 돼요.”

소년이 카메라를 내밀었다. 찾아보니 갑작스레 터진 플래시에 좀 놀란 표정이긴 해도 우스꽝스럽거나 이상하진 않았다. 흔히 말하는 굴욕 샷이 아니어서 이 소년이 악의적인 마음으로 인터넷에 올린대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박상호가 한녹영을 보았고 한녹영은 굳이 사진을 지울 필요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굳이 삭제하진 않을 테니까 앞으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요. 어두운데서 갑자기 플래시가 터지면 놀라니까요.”

박상호가 차분하게 타일렀다.

“네. 죄송합니다. 녹영이 형, 저 진짜 팬이에요. 형은 진짜 제 주변 여자들보다 훨씬 예뻐요. 형에 관한 스캔들 전 하나도 안 믿었고요, 형이 LK 대표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찌라시도 안 믿어요. 찌라시 사실 아니죠?”

자칭 팬이라는 소년의 물음에 한녹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박상호가 재빨리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당연하죠. 학생인 것 같은데, 맞나?”

“네. 중3입니다.”

“그래요. 학생, 한녹영은 절대 스폰서로 뜨지 않았어요. 그건 다 전 기획사의 음해라는 거 믿는다면서요?”

“네. 믿어요!! 저 화장품 CF때부터 형 좋아했거든요.”

“떠도는 소문들, 찌라시들, 전부 전 기획사의 의도적인 음해이고 말도 안 되는 루머일 뿐이니까 조금도 믿지 말아요. 알았죠?”

“네!!”

소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상호가 굳어있는 한녹영의 옆구리를 찌르며 “너도 한 마디 해.” 하고 속삭였다. 한녹영이 우물쭈물 서 있는 소년을 향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해줘서 고마워요. 공부 열심히 해요.”

학생인 팬을 만나면 늘 하는 고정 멘트를 해주자 여드름이 돋아난 소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고맙습니다. 형, 사랑해요!”

엄지와 검지를 교차해 미니 하트를 만들어 보인 소년이 뒤돌아서서 우다다 달려갔다.

“경호원분들은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한수 너도 그만 돌아가고.”

박상호의 말에 경호원들이 고개를 까닥한 후 돌아갔다. 장한수 또한 다시 밴에 올라타며 “내일 8시까지 오면 되지?” 하고 말하더니 이내 가버렸다. 한녹영은 박상호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아까 걔 보니까 징그러우면서 귀엽더라. 여드름 숭숭 솟은 얼굴로 너 좋아한다고 하는데 ‘저 자식 혹시 네 사진 보면서 딸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어 징그럽다가 혼자 수줍어하며 달려가는 거 보니까 귀엽기도 한······ 무슨 생각해?”

“응? 아무 것도 아니야.”

“아까부터 얼굴이 허옇잖아. 갑자기 사진 찍혀서 그렇게 놀란 거야?”

“응. 좀.”

“사진 찍히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휴대전화에 카메라가 달린 이후로 사람들 있는 곳에 가면 수없이 사진 찍히는 것이 일인데 뭐.”

“응. 그렇지.”

건성건성한 대답에 박상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답은 하는데 생각은 딴 데 가 있는 걸 느낀 것이다. 박상호는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냥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녹영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장 대표와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암만 생각해도 원인은 장현재와의 대화였다. 그의 아파트에 다녀온 이후에 툭 하면 넋을 놓고, 작은 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특히 카메라에 민감해졌으니까. 은근슬쩍 물어봐도 말만 돌릴 뿐 대답을 안 해주니 속내를 알 수가 있나. 장현재라도 찾아가봐야 하나. 박상호의 걱정이 날로 커졌다.

“난 그만 들어가서 잘게.”

“그래. 잘 자라.”

터덜터덜 침실로 걸어가는 힘없이 축 처진 한녹영의 어깨를 보며 박상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강준일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봄날 꽃 처녀처럼 해죽해죽 웃고 다니기 바쁘더니, 병든 닭 마냥 영 맥아리가 없는 것이 암만 봐도 심상치 않았다.

강준일을 찾아가봐야 하나. 누굴 찾아가야 하나. 박상호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서서 제 방을 향해 걸었다.

“너랑 강 대표 찌라시는 오늘도 올라왔네?”

송정빈이 말했다. 이제껏 한녹영이 재벌가 누구와 스폰서 관계라더라, 정치권 누구랑 스폰서 관계라더라 하는 찌라시는 하루 이틀 반짝 올라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강준일과의 스폰서 설은 오늘로 나흘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장현재가 던진 파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채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강 대표님이 우리 드라마 최대 투자자니까 그렇겠죠. 도망자 팀을 위해서 식당도 자주 예약해주시고, 도시락도 보내주시고, 오늘은 밥차도 보내셨잖아요.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써주시다니 정말 너무 고맙지 뭐에요? 사실 나 대본리딩날 강대표님 보고 반할 뻔 했잖아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나희연이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반했으면 한 번 유혹해보든가.”

“그러고 싶은데 회사에서 연애 금지 걸었어요. 이제 좀 뜨기 시작했는데 연애 스캔들로 망치지 말라면서요. 아무튼 내 말의 요지는 강 대표님이 도망자 팀에 너무나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강 대표님과의 스폰서 설은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가는 것 같지 않아요?”

나희연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제기했다. 강준일이 보내준 밥차에서 음식을 조금씩 퍼와 억지로 먹고 있던 한녹영이 나희연을 향해 웃으며 “제 생각도 그래요.” 하고 동의했다.

“근데 오늘 뜬 찌라시는 좀 구체적이긴 하다. 너 스캔들 터진 날 아침 일찍, 네 빌라로 들어가는 강준일 대표를 목격했다는 얘기도 있더라.”

막나물 반찬을 집으려던 한녹영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강한 펀치로 심장을 얻어맞은 것처럼 한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한녹영은 재빨리 팔을 내려 덜덜 떨리고 있는 손끝을 숨겼다.

‘한녹영, 네가 결국 강준일을 망칠 거다.’

장현재의 말이 마치 저주 같았다. 심장을 좀먹는 벌레 같기도 했다. 괜찮다. 강준일이 지켜줄 거다. 그는 강한 사람이니 다 알아서 해줄 거다, 애써 위안해봐도 거친 파도에 힘없이 떠밀리는 조각배처럼 일렁이는 마음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가 찍은 섹스 스캔들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일도 떠올랐다. 이제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자꾸만 한녹영의 발목을 붙들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고 패닉에 빠지지 말아야지. 미리 겁먹고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한녹영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근데 녹영씨는 그거 먹고 되겠어요? 좀 팍팍 먹어요. 남자면서 나보다 먹는 양이 적어.”

나희연이 눈을 흘겼을 만큼 접시에 퍼온 음식의 양은 적었다. 새모이만큼이었다. 이것도 그나마 먹어야 버틴다는 생각에 억지로나마 먹으려고 퍼온 것이지, 마음 같아선 그냥 굶고 싶었다. 입안이 깔깔하고 도통 입맛이 없었다. 요 며칠은 살찌우려고 먹던 양의 절반도 채 못 먹는 수준이라 박상호의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잠을 잘 자지 못해 피부가 엉망이라 카메라에 초췌하게 비칠 것이 걱정이었다. 아직 김석형 감독으로부터 별 말은 없는데, 아까 정지해가 메이크업을 해주며 혀를 찼다.

“입맛이 없어서요.”

“그러고 보니 안색도 안 좋은데, 어디 아파요?”

“아니요. 아프긴요.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전 먼저 일어날게요. 밴에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요.”

결국 한녹영은 새모이만큼 퍼온 음식마저 남긴 채 일어섰다. 컨디션이 바닥이었다.

“그래. 잠시라도 좀 쉬어라. 안색이 말이 아니다.”

걱정하는 송정빈을 향해 웃으며 밴으로 가는데 모여서 식사 중이던 스태프 한 명이 “오늘 발렌타인데이인데 여자 친구 얼굴은 구경도 못하겠다.” 하고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스태프가 “그래도 밥차에 디저트 류도 잔뜩 있잖아.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라 그걸 의식한 건지 초콜릿이며, 케이크며, 다양하게 실어왔더라. 그거라도 대신 먹고 기운 내.” 라고 위로했다.

날짜 가는 줄도 몰랐는데, 오늘이 발렌타인데이구나. 어쩐지 어젯밤 통화에서 강준일이 ‘내일이 특별한 날처럼 느껴지다니 우스워. 만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냥 넘길 순 없어 선물을 보낼 테니 다 같이 함께 먹도록 해.’ 라고 했구나. 무슨 소리인지 몰라 대충 대꾸한 후 넘겼는데, 흔히 말하는 연인들의 날이라 특별하게 생각된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유난히도 디저트 류가 많았던 밥차를 보낸 것이고.

굳이 챙기지 않았어도 지금 상태론 몰랐을 테고, 설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인지하고 있었대도 전혀 서운해 하지 않았을 텐데. 티 나지 않게 은근히 챙긴 그의 행동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저보다 훨씬 큰 데다 나이도 8살이나 많은 남자가 귀엽게 느껴지다니 어이없지만, 귀엽다. 더불어 이렇게 의외의 면을 자꾸 보이니 또 자꾸 반하게 되는 거다. 마음이 자꾸 그에게로 흘러가서 큰일이었다. 한녹영은 장현재의 집을 다녀온 이후 처음으로 활짝 웃으며 강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내 마음은 받았나?

강준일이 다짜고짜 말했다.

“대표님 마음 도망자 팀이 열심히 나눠먹고 있어요.”

ㅡ 한녹영씨도 물론 먹었겠지?

한녹영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초콜릿 한 개를 까서 입안에 넣었다. 혀로 달콤함이 사르륵 퍼졌다. 밥차 아주머니가 디저트 류로는 시선도 안주는 손에 기어이 초콜릿 한 개를 쥐어준 까닭이 있었다. 강준일의 사주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네. 초콜릿 한 개 먹었어요.”

ㅡ 어땠어?

“쓰던데요. 대표님 마음이 쓴가 봐요?”

ㅡ 흠. 뇌가 녹아버릴 만큼 단 걸로만 준비하라고 했는데. 지시에 혼선이 있었던 모양이군. 한 실장을 족쳐야겠어.

한녹영이웃음을 흘렸다.

“사실은 아주 달아요. 괜히 엄한 사람 잡지 마세요.”

ㅡ 아주 달다면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진 것 같군. 다음 달 이 날짜에는 한녹영씨의 마음을 받을 수 있겠지?

강준일이 은근히 화이트데이 답례를 강요했다.

ㅡ 기대할 거야.

정정이다.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강요했다.

“무슨 무슨 데이 같은 건 다 상업적인 판매 전략에 불과한데, 대표님이 그런데 휘말리실 줄은 몰랐어요.”

그깟 이벤트 데이따위, 하고 시니컬하게 넘길 것 같은 사람이 오히려 더 적극적이라 우스웠다.

ㅡ 원래 연애는 유치해야 제 맛이거든.

강준일의 말투가 당당했다.

ㅡ 그래서 대답은?

“신맛이 아주 강한 레몬사탕으로 주문해둘게요.”

ㅡ 흠. 아주 자극적이겠어. 나한테 한녹영씨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인 사람이긴 하지.

“조부님은 어떠세요?”

짧게 웃은 한녹영이 강준일의 조부 건강을 체크했다. 재계의 거물이라 수술 이후 회복 상황에 대한 기사가 매일 뜨지만, 가족에게 듣는 정보가 가장 정확할 터.

ㅡ 오늘 저녁에는 퇴원하실 거야. 장염도 심장도 많이 좋아지셨거든. 병원에서는 이틀 더 계셨으면 하는 모양이지만, 조부님이 버럭 성질을 내셔서 퇴원 확정이야.

“다행······ 이네요. 그래도 한동안 조심하셔야 하죠? 심장 쪽이라 놀라거나 하시면 안 되겠죠?”

태연한 척 묻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ㅡ 그야 그렇지. 과한 운동 금지, 과한 스트레스 금지, 한동안 회사 일도 금지 당하셨어.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난 후에도 회사 일에 간섭하길 좋아하시는 분이신데 꽤나 답답하실 거야. 조부님께는 일이 곧 취미거든.

역시 그렇구나. 연세도 있으신 분이 심장 수술을 하셨으니 최대한 조심해야겠지. 적어도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만이라도.

“저기······ 저랑 대표님에 관한 찌라시 계속 뜨는 거 보셨어요?”

ㅡ 응. 누군가 의도적으로 흘리는 것 같던데. 알아보라고 지시해뒀으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대표님이 제 빌라 들락거린다는 목격담도 올라왔대요.”

ㅡ 어차피 찌라시로 묻힐 얘기들이니까 무시해버려.

사실은 제 뒤를 쫓아다니던 파파라치가 대표님과 제 사진도 찍었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저기 대표님······ 우리 잠시만 거리를 두면 어떨까요?”

한녹영이 머뭇머뭇 말했다.

ㅡ 무슨 소리야?

강준일의 음성이 약간 낮아졌다. 평소보다 아주 약간 낮아진 건데도 냉기를 들이켠 듯 심장이 와락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한녹영이 숨을 크게 삼키며 조심조심 말을 이었다.

“지금은 조심해야 하는 시기잖아요. 찌라시가 자꾸 뜨는 걸 보면 누군가 대표님과 절 겨냥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까 아주 잠시만 거리를 두고 안 만나면 어떨까 해서요.”

ㅡ 우리 사이가 거리를 둬도 될 만큼 가까워진 건 아니라고 보는데.

강준일의 음성이 좀 더 낮아졌다. 확실히 냉해진 목소리였다. 한녹영이 애써 가벼운 투로 말했다.

“에이, 전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보는데요. 서로의 은밀한 부위까지 공유한 사이에 그런 말 하면 저 섭섭해요.”

아직 단 한 번뿐이긴 했지만.

ㅡ 하룻밤 상대와도 은밀한 부위는 공유하지.

맞는 말이라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

ㅡ 이유가 뭐야? 찌라시 때문에 걱정되어 하는 말이라면 염려하지 않아도 돼. 한녹영씨 눈에 내가 그 정도 문제도 처리 못할 사람으로 보이나?

사실대로 말해버릴까. 얘기하면 강준일이 다 알아서 해결해주지 않을까? 강한 유혹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장현재의 경고도 떠올랐다. 강준일에게 사진에 대해 말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즉시 주애리나 언론사 둘 중 한 군데에 사진을 보내버릴 거라고 했던. 섹스 영상이 퍼졌던 그때만큼 파장이 크진 않겠지만, 분명 대한민국이 한동안 떠들썩할 테고······ 드라마에도 피해가 갈 거다. 만약 저와 강준일의 스캔들로 인해 강정석 회장의 건강에 또 한 번 적신호가 켜진다면······ 아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강 회장님이 돌아가신다면······. 한녹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의 가정이 현실이 된다면 저와 강준일 사이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았다. 저로 인해 강준일뿐만 아니라 그의 신변에 해가 되는 것도, 그와 헤어져 남남이 되는 것도 싫었다.

잠깐 시간을 둔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한동안 눈가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ㅡ 이봐, 한녹영씨. 뭘 숨기고 있는지 똑바로 말해.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한녹영의 음성에서 수상함을 느낀 강준일이 물었다.

“그, 그런 거 없어요. 숨기긴 뭘 숨겨요? 그냥 찌라시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래요. 대표님이 알아서 하실 테지만, 언제나 변수는 존재하잖아요. 만약 이게 수면 위로 떠오르면 전 이제 회복불가예요. 치명타가 될 거라고요. 드라마 방영 한 달 정도 남았는데, 드라마에도 피해를 줄 거고요. 그러니까 한동안만요. 제 스폰서 설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이 제 상대라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 만요. 그러니까 우선 20일에 만나기로 한 것부터 취소해요.”

ㅡ 스폰서 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 어쩔 거지? 그렇게 되면 나와 끝낼 건가? 잠잠해지면 다시 만난다 쳐. 이후에 다시 터지면 그땐 또 어쩔 거지? 다시 거리를 두는 것으로 눈속임을 할 텐가?

“그러면 안 되는 걸까요?”

강준일이 헛웃음을 지었다. 한녹영의 대답이 아주 어이없다는 투였다.

ㅡ 그렇게 할 바에 뭐 하러 만나지. 차라리 아주 끝내는 편이 깔끔하지 않겠어? 한녹영씨한테 나는 편의에 따라 만났다가 멀어졌다가 해도 되는 존재인 모양이야?

“······.”

절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바로 안 나왔다. 또 한 번 장현재의 저주 같은 말이 떠오르며 저도 모르게 순간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동시에 심장이 아파졌다. 강준일과의 이별을 떠올림과 동시에 가슴이 찢겨 나가는 듯 어마어마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래서 곧장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떨쳤지만, 이미 강준일이 한녹영의 생각을 읽고 난 후였다.

ㅡ 끝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한녹영씨한테 나는 그리 쉽고 가벼운 사람이었나? 내게 한녹영씨는 어렵고 무거운 존재였는데. 좋아. 그렇게 하지. 질질 끌며 시간 낭비할 필요가 뭐 있어. 이대로 접자고. 그동안 즐거웠어, 한녹영씨.

“대, 대표······.”

잡을 새도 없이 전화가 툭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전화를 해야······ 허둥지둥 재발신을 누르려던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저로 인해 강준일의 조부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저로 인해 강준일이 가진 것을 잃으면 어쩌나. 그가 가진 것들 중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저로 인해 잃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더불어 제가 찍은 영상으로 인해 세상이 떠들썩해졌던 일도 떠올랐다. 만약 제가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강준일은 저로 인해 무엇을 얼마나 잃어야 했을까. 상상조차 무서웠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때보다 파장은 적다 해도 같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면? 저와 강준일의 사이가 최악이든, 혹은 최상이든 상관없이 저는 강준일에게 피해를 주고, 그의 발목을 잡는 약점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건가.

한녹영이 두 팔로 머리를 감싼 후 고개를 푹 숙였다. 혼자만의 기억에 발목 잡히는 일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거면 기억조차 다 남겨두고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으면서 순간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강준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도 없고, 무책임하게 굴다 일이 터져 그에게 피해가 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만도 없고, 그와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싫고······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고, 한숨만 습관처럼 흘러나왔다.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도 못했는데······. 이대로 끝내긴 싫은데······. 다시 한 번 장현재를 찾아가볼까. 그의 발밑에 무릎이라도 꿇고 제발 절 더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애원해볼까? 하지만 주애리는? 설사 장현재가 마음을 돌려 절 내버려둔다 해도 주애리라는 여자는 또 어째. 마음에 돌덩이가 하나씩하나씩 얹어졌다. 그래서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녹영아? 여기 있어?”

박상호가 밴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장한수 정지해와 함께 한녹영과는 떨어져서 식사 중이다 한녹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찾으러 온 것 같았다.

“아, 형······. 식사는 했어?”

그제야 고개를 든 한녹영이 물었다.

“어. 방금 먹었다. 강 대표님이 진짜 신경 많이 써주시네. 덕분에 이번 촬영은 푸짐하게 끝내겠어. 식당에, 도시락에, 밥차에······. 혹시 너 굶으면서 촬영할까봐 신경 쓰이는 모양이야.”

“응. 포동포동하게 살찌울 거라고······.”

포동포동하게 살찌워 계속 잡아먹을 거라고 했던 강준일의 말이 떠올라 웃었던 한녹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지금 돌아보니 그와 나누었던 모든 말들이 즐거웠다. 가벼운 농담도, 한 번씩 던지는 심장 저릿한 말도 하나하나 돌이킬수록 다 즐거웠다.

“왜 그래?”

어둑해진 한녹영의 얼굴을 보고 박상호가 물었다.

“응? 아니야. 형, 나 이번 드라마까지만 찍고 은퇴해버릴까.”

만나고 싶은 사람조차 마음껏 만나지 못해 마음 졸여야 하는 직업이라니.

“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은퇴라니! 이제 시작인데, 대체 뭔일이기에 네 입에서 은퇴란 소리가 나와?!”

박상호는 당연히 펄쩍 뛰었다. 이거 정말 큰일이다. 이제껏 중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건가. 걱정하는 마음이 들며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한울에서 악의적으로 터뜨린 스캔들 상황 속에서도 은퇴의 은자도 꺼내지 않았던 한녹영이 아닌가.

“그냥 해본 소리야.”

한녹영은 파랗게 질린 박상호의 안색을 보고 이내 아무 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은 후 밴에서 내렸다. 그냥 순간 괴로워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봤다. 은퇴라니 말도 안 되지. 이제 겨우 배우로서 눈을 뜨고 연기에 재미를 붙여가는 중인데.

“20분 후에 촬영 들어갑니다. 배우 분들 준비해주세요!”

거의 대부분이 식사를 끝낸 상태임을 확인한 AD가 외쳤고, 밥을 먹고 난 후 잠시 앉아서 수다를 떨며 소화를 시키던 사람들이 일어나며 오후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컷!!”

김석형이 컷을 외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멍하니 있다 대사를 놓친 한녹영이 서둘러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한녹영씨, 오늘 컨디션 별로입니까?”

한녹영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김석형의 음성에서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있는 인내심이 느껴졌다. 벌써 7번째 NG였다. 대사를 씹거나, 좀 전처럼 아예 대사를 치지도 않거나, 표정이 안 나오거나, 대사를 치는 목소리에서 삑사리가 나거나······ 다양한 이유로 같은 장면에서 계속 NG가 나오니 슬슬 스태프들 얼굴에도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한녹영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스태프들을 향해서도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했다. 이렇게 몸을 낮춰 연신 사과하니 대놓고 뭐라 하진 못하고 있지만 저로 인해 자꾸만 촬영이 지체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죄스럽고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한녹영의 얼굴을 잠시 보다 푹 한숨을 내쉰 김석형이 말했다.

“컨디션이 엉망인 것 같으니까 딱 30분만 쉬었다가 갑시다. 가서 메이크업 수정도 하시고, 뭐라도 좀 먹으면서 컨디션 회복도 하시고, 아무튼 휴식 이후에는 NG없이 바로 오케이 날 수 있도록 합시다. 네?”

“네. 죄송합니다, 감독님.”

한녹영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자꾸 NG가 나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박상호가 부랴부랴 달려와 한녹영의 몸 위로 담요를 둘러주었다.

“왜 자꾸 NG야? 컨디션이 진짜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니고?”

밴으로 향하며 박상호가 물었다.

“그냥 몸이 좀 무거워서 그래. 특별히 아픈 데는 없고.”

“요 며칠 계속 기분이 저조한 것 같던데?”

“응. 좀 그러네.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져야 하고. 형, 나 뭐 마실 것 좀 없을까?”

“이럴 때는 단 게 좋은데. 밥차에 초콜릿 많이 남았을 텐데. 가져다줄까? 초콜릿이랑 뜨거운 커피랑 같이 먹어봐.”

한녹영을 밴에 남겨둔 박상호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빕차로 달려가 초콜릿을 한 움큼 쥐고 돌아왔다. 그런 후 아침에 집에서 가져온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한녹영에게 내밀었다. 한녹영은 우선 초콜릿부터 한 개 까 입안에 넣었다. 혀 위로 달콤함이 사르르 퍼진다.

‘내 마음은 받았나?’

강준일의 말이 떠올랐다. 한녹영이 속으로 대답했다. 네, 확실히 받았어요. 녹을 만큼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꼭 강준일이었다. 다정해져서 초콜릿처럼 달콤하지만, 속에는 예전 제게 독설을 퍼붓던 냉랭한 면이 있는 강준일 그 자체였다. 전에 뭐라고 했더라? 태도는 마음을 따라간다고 했나?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차가운 것이 분명하네. 한녹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 즐거웠어, 한녹영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단박에 끝내자는 말이 나와? 그래놓고는 뭐? 무겁고 어려운 존재? 어디가? 하나도 안 무겁고, 하나도 안 어려웠으니 단박에 ‘즐거웠으니 안녕.’ 이런 말이 나왔지. 아, 물론 직접적으로 안녕이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전투력이 상승했다. 한없이 가라앉았던 기분이 삐이익 소리를 내며 끓는 주전자처럼 달아올랐다. 한녹영은 초콜릿을 연이어 까먹은 후 먹기 좋게 식은 커피도 물처럼 꿀꺽꿀꺽 삼켰다.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우울하게 어깨를 축 내리고 있다가 초콜릿 한 개 까먹곤 갑자기 전투력 만렙이 되어 의지를 불태우는 한녹영을 보며 박상호가 ‘녹영이 저거 혹시 조울증인가?’ 하고 걱정하는 것도 몰랐다.

“누나, 나 메이크업 수정 좀.”

박상호가 한 주먹 가득 집어온 초콜릿을 앉은 자리에서 다 까먹은 한녹영이 정지해를 돌아보았다.

“응. 그래.”

정지해가 한녹영의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을 때 스태프가 밴으로 찾아와 “한녹영씨 준비 됐어요?” 하고 물었다. 서둘러 내린 박상호가 스태프를 향해

“녹영이 지금 메이크업 수정 중이니 끝나면 바로 나올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

“상호 오빠, 요새 앞머리가 유난히 휑한 것 같지 않아? 부분 가발이라도 하나 선물해야 할까봐.”

웃음기를 머금은 정지해의 말에 한녹영이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정지해가 “눈 뜨면 안 돼!!” 하고 큰소리를 내며 한녹영의 팔을 가볍게 쳤다. 한녹영이 다시 재빨리 눈을 감았다. 가발! 정지해의 말에 퍼뜩 좋은 생각이 났다.

“누나. 나 부탁이 있는데, 혹시 가발 구할 수 있어? 긴 머리 가발.”

한녹영이 두근대는 마음으로 물었다.

“구할 수야 있지. 나한테도 몇 개 있고. 근데 가발은 뭐하려고?”

“이유는 묻지 말고 오늘 중으로 좀 구해주면 안 될까?”

한녹영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했던 정지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따 저녁 촬영은 서울로 이동해서 하니까 너 촬영하는 동안 잠깐 집에 갔다 올게.”

“고마워, 누나.”

“끝났다. 이번엔 NG내지 말고 잘 해. 아까 지켜보는데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하더라.”

“응. 이번엔 NG 안 내.”

메이크업이 끝나자 한녹영이 밴에서 내려 서둘러 세트장으로 향했다.

“정말 괜찮겠어?”

먼저 와서 대기 중이던 송정빈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네. 이제 괜찮을 것 같아요. 자꾸 NG내서 죄송했어요, 선배.”

“죄송하긴. 유난히 안 되는 날도 있는 거지. 괜찮을 것 같다니 다행이네. 이번엔 한 번에 오케이 하자.”

한층 밝아진 한녹영의 표정에 고개를 끄덕인 송정빈이 위치를 잡았다. 곧 큐 사인이 떨어졌고, 이번에 한녹영은 단번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아까는 왜 그렇게 애를 태웠어요?”

만족한 김석형의 목소리가 밝았다.

“다음 씬 들어가기 전에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요.”

“뭡니까?”

왠지 조심스러워 보이는 김석형의 기색에 송정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까 방송국 편성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 드라마 방영 날짜를 2주 당기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지금 하는 드라마 종영 후 4부작 특별작을 방영키로 했는데, 촬영 중인 특별작 주연 배우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제작에 차질이 생겼나 봐요. 촬영이 거의 마무리된 상황에서 주연 배우를 바꿀 수도 없고 다른 걸 급하게 밀어 넣느니 우리 걸 좀 일찍 시작하면 어떻겠냐고 하는데, 두 배우 분 생각은 어떤지?”

한녹영과 송정빈의 의향을 묻는 김석형의 얼굴에는 ‘무리가 되더라도 당겨 방영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대놓고 서려있었다. 한녹영과 송정빈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방영 날짜를 2주 당기게 되면 달콤한 그대보다 오히려 일주일 일찍 방송을 시작하게 되는 거다. 달콤한 그대보다 늦게 시작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조금 부담이었는데, 같이도 아니고 오히려 일주일 일찍이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찬성이죠. 거절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송정빈이 적극 찬성했다. 김석형이 한녹영을 보았다.한녹영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촬영 일정이 지금보다 더 타이트해질 텐데요?”

아······. 그 생각을 못했다. 지금도 여유 있는 촬영은 아닌데, 더 타이트해진다면······.

“감수해야죠 뭐. 달콤한 그대보다 일찍 시작하는 김에 시청자들 우리 쪽으로 다 끌어와서 저쪽엔 1퍼센트도 주지 말죠. 역대 최악의 시청률이라는 굴욕을 안겨주는 겁니다! 우리는 역대 최고 시청률 찍고요.”

“그거야 당연한 얘기고요. 1회부터 시청한 시청자라면 마지막 회까지 우리 드라마에 절대 충성하게 만들 자신 있습니다.”

“그럼 뭘 망설입니까? 방송국에 무조건 오케이하시고, 촬영일정 재조정하죠. 잠 좀 덜 자고, 고작 하루 이틀 있는 휴일 다 반납하면 되죠 뭐. 아무 문제없습니다.”

“역시 송정빈씨는 진정한 배우십니다.”

한녹영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김석형와 송정빈을 향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달콤한 그대보다 1주 빨리 방영하는 건 좋은데······ 휴일이 날아갔구나.

“녹영아, 이거. 네가 부탁한 거.”

그 날 밤 촬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 정지해가 쇼핑백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고마워, 누나.”

“어디에 쓸 건지는 얘기 안 해줄 거야?”

“비밀.”

한녹영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하자 정지해가 얄밉다는 듯 입매를 삐죽였다. 그때 마침 밴이 그녀의 집 앞에 섰다. 정지해는 “뭣 때문에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비싼 거다. 꼭 돌려줘.” 하고 내렸다.

“뭘 빌렸는데?”

박상호가 궁금해 하며 물었지만 한녹영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한수 형, 오늘도 고생했어. 내일 봐.”

“어, 너도 고생 많았다. 오늘은 유난히 힘들었지? 상호 형, 내일은 11시까지 오면 되나?”

방영일을 2주 당기는 일에 다른 배우들도 거의 다 합의해서 휴일은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씬이 많은 주조연 배우들 일정이 지금보다 더 빡빡해져 사실상 오늘이 그나마 늦잠을 잘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촬영 일정을 새로 짜야 하고, 세트장이 아닌 장소에서의 촬영은 협찬을 받거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일정 또한 새로 조정해야 하니 정우 직원들도 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허둥지둥 난리였다.

한녹영이야 도망자 외에는 김춘영과의 사진 촬영 일정밖에 없어서 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스케줄이 있는 배우들 매니저들 또한 스케줄 조정으로 인해 골치를 썩여야 했다. 그래도 다들 기꺼이 합의해서 잡음은 없었다.

“어. 오는 길에 지해랑 한경이 태워서 와. 내일은 종일 같이 촬영하니까 한 차로 움직이자.”

박상호가 대답했다. 촬영 스케줄이 다를 때는 따로 움직이지만 내일은 종일 같이 촬영하는 스케줄이라 굳이 두 대로 움직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장한수가 “그러지 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밴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온 한녹영이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리곤 쇼핑백에서 기발을 꺼냈다. 왜 가발 생각을 못했을까.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여장을 한 후 찾아가면 제 행적을 감시하고 있을 눈들을 피할 수 있을 텐데. 강준일을 만나러 가고 싶은데 장현재의 말 때문에 두려워하던 차에 정지해가 가발, 이라고 하자 번쩍 눈을 뜬 심봉사의 기분을 느꼈다.

한녹영은 거울 앞에 서서 긴 머리 가발을 쓰고 그 위에 스냅백을 푹 눌러썼다. 목에 머플러까지 두르니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여자였다.

“기왕이면 치마도 구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완벽하게 변장하게. 한녹영이 거울 속 제 모습을 빤히 보다 자아도취에 걸린 사람마냥 뿌듯하게 웃었다. 워낙 본판이 예쁘니 여장을 해도 나쁘지 않네. 파파라치든 누구든 절대 못 알아볼 거야. 이러다 들키면 ‘한녹영 변태 의혹?’ 뭐 이런 기사가 뜰 테지만,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 남자 배우가 여장을 하고 집을 나설 거라고 말이야.

만족해서 침실을 나가자 부엌에서 물을 마시던 박상호가 느닷없이 한녹영의 침실 쪽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누구십니까?!!”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녹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야.”

“뭐, 뭐야? 녹영이 너였어? 아씨, 깜짝이야. 웬 여자인가 했네. 근데 꼴이 그게 뭐야? 아까 지해가 말한 물건이 가발이었어?”

“응. 멀리서 보면 난줄 모르겠지?”

한녹영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를 제일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박상호조차 뒷모습을 보고 순간 여자로 착각했을 정도면 됐다.

“어. 그야 그렇긴 한데······ 그 꼴을 하고 어딜 가려고?”

“대표님한테.”

“강 대표?”

“어. 나랑 대표님 찌라시가 며칠째 계속 나오고 있잖아. 파파라치가 붙었을 텐데, 괜히 내 모습으로 갔다가 사진 찍혀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아서. 이러면 모를 거잖아.”

“나 참. 그런 꼴을 해서라도 만나러 가고 싶냐. 좀 참으면 될 걸. 근거 없는 루머라 끽해야 일주일 나오다 곧 다른 사람이 상대라는 찌라시로 넘어갈 텐데.”

박상호가 못 말린다는 듯 혀를 찼다. 파파라치뿐이라면 박상호의 말이 맞지만, 한녹영과 강준일의 경우는 달랐다. 파파라치들보다 훨씬 집요하고 무서운 장현재와 그리고 주애리라는 여자가 있으니까. 그저 멀리서 한 번 본 것에 불과하지만 한녹영은 주애리의 성격을 짐작할 것 같았다. 주식을 무기로 장현재를 휘둘러 결국은 저와 강준일과의 영상을 찍게 만든 여자가 아닌가. 그리고 그걸 눈하나 깜짝 안 하고 세상에 터뜨렸다. 아주 보란 듯이.

“응. 이런 꼴을 해서라도 만나러 가고 싶어.”

“그래. 갔다 와라. 그 꼴을 했는데, 나랑 같이 나가면 오히려 주목을 끌테니 혼자 조심히 갔다 와. 내 차 쓰고.”

“응. 그럴 생각이야.”

장현재라면 박상호의 차종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제 차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안전할 거다. 한녹영은 한숨을 푹 내쉬는 박상호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박상호의 차를 타고 빌라를 빠져나왔다.

강준일의 빌라에 도착해 최대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가 사는 층에 내려 현관 초인종을 눌렀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눌러봐도 마찬가지였다. 11시가 넘은 지금까지 귀가 전인 것 같았다.

“아, 휴대전화.”

전화를 하려고 주머니를 뒤졌던 한녹영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여장을 했다는 사실에 들 떠 휴대전화를 놓고 온 것이다. 목덜미를 긁적이며 망설이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정 전에는 돌아오겠지, 하며 등을 벽에 기댄 채 엘리베이터를 뚫어져라 보다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고개를 크게 꾸벅하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하게 닦인 구두가 보였다. 움찔 하며 시선을 들어보니 황당하다는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중인 강준일이 보였다.

“한녹영씨가 여긴 웬일이지? 그 꼴은 또 뭐고.”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일단 문부터 열어주세요. 설마 집안에도 안 들이고 바로 내쫓을 셈은 아니겠죠?”

“우린 이미 끝난 사이 아닌가? 그럼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 한녹영씨를 내 집으로 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대놓고 문전박대하겠다는 소리와 같았다. 한녹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거지? 냉한 눈빛과 싸늘한 말투는 예전 절 혐오하고 싫어하던 시절의 강준일의 그것이었다. 깨진 유리를 밟은 것처럼 마음이 파삭거렸다. 강준일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가 제게 차갑건 말건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다르다. 온기와 다정함으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차갑게 변해 저를 보는 이 순간이 아팠다. 심장이 다 얼어붙는 것만 같다.

주먹을 꾹 쥔 한녹영이 턱을 들고 최대한 싸늘하게 강준일을 노려보았다.

“끝난 사이는 무슨. 애초에 시작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요.”

“무슨 의미지?”

“한 번 잤다고 우리가 연인 사이라도 되는 줄 아셨어요? 아까 대표님이 그랬잖아요. 은밀한 부위는 하룻밤 상대와도 공유한다고. 달랑 한 번 자놓고, 이후에 뭐 사귀자거나 한 것도 아니면서 끝난 사이는 무슨. 섹스 파트너라고 하기도 뭐한 사이였네. 지금 생각해보니.”

흥. 한녹영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강준일은 삐친 아이처럼 잔뜩 토라진 표정의 한녹영을 보고 홀로 작게 웃었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한 채 한녹영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물었다.

“섹스 파트너라고 하기도 뭐한 사이에 왜 찾아온 거지?”

“우린 이젠 끝난 사이니, 뭐 애초에 시작한 적도 없지만, 아무튼 다음 달 화이트데이에 만나거나 연락할 일도 없을 거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오늘 아까 대표님이 보내주신 밥차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왔어요. 뭐해요? 안 받고.”

“······?”

무슨 소리냐는 듯 강준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녹영이 입술을 핥았다. 긴장감과 민망함. 여러 감정으로 심정이 복잡했다. 가슴이 쿵쿵쿵 거인의 발걸음처럼 뛰고 있었다.

“내 별명 뭔지 몰라요? 허니, 캔디, 초콜릿 같은 남자. 달콤함의 대명사 한녹영. 내가 곧 사탕이잖아요. 안 받아요?”

강준일은 말이 없었다. 그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얼굴로 한녹영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뭐라고 말 좀 하죠? 사람 민망해죽겠는데.”

최대한 태연한 척, 최대한 뻔뻔하게 말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여전히 말이 없는 강준일의 모습에 ‘대표님은 진짜 끝냈나 보네. 무슨 마음이 이렇게 빨리 식어.’ 하고 절망해 고개를 푹 숙인 순간이었다.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린 강준일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한녹영을 끌어안았다.

“정말 못 말리겠군. 아까 한녹영씨한테 너무 서운해서 앞으로 육일 간은 모른 척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진짜 끝낼 마음은 없었던 거예요?”

강준일의 품에 끌어안긴 채로 한녹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전혀.”

“난 정말 끝내려는 건줄 알았어요. 아까 절 쳐다보는 대표님 눈빛이 너무 싸늘해서······.”

심장이 파르르 떨렸을 정도로 무서웠다. 정말 끝인가 해서 더럭 겁도 났었고.

“아깐 정말 서운하고 화가 났거든.”

“그래서 육일이나 날 모른 척 하려고 결심했던 거고요?”

“물론. 한녹영씨, 전에 말했잖아. 나 뒤끝 긴 남자야. 한 번 삐치면 오래 가.”

한녹영이 자그맣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끝인가 했는데, 두 번 다시 못 만나는 건가 해서 무서웠는데. 제가 그를 망치는 것도 싫지만, 영원히 못보는 건 더 싫었다. 안도감이 들자 이젠 벌컥 성이 났다. 한녹영이 강준일의 가슴을 밀어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곤 못마땅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암만 뒤끝이 긴 성격이라고 해도 그렇지. 남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난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서 여장까지 해가며 왔는데 차갑게 대하기나 하고. 뭐예요, 진짜! 못됐어.”

웃으며 한녹영의 손을 잡은 강준일이 현관 비밀번호를 해제하고 실내로 들어섰다.

“왜 여자 가발을 쓰고 온 거야? 난 웬 미친 여자가 내 집 앞에서 자고 있는 건가 했어.”

“파파라치가 붙었을 지도 몰라서요. 사실 얼마 전에 현재 형, 장현재 대표를 만났거든요.”

강준일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한녹영은 그의 손을 꽉 쥐며 얼른 말을 이었다.

“장 대표가 우리 사진을 가지고 있었어요. 오리 고기 식당 앞에서 찍은 것도 있고, 하영택한테 납치당했던 날 대표님이 나 안고 차에 싣는 모습도 찍혀 있었고요. 파파라치가 찍은 건데, 장 대표한테 사진 팔았대요.”

“그래서 겁먹고 잠시 거리를 두자고 한 건가?”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둘 사이를 캐려는 파파라치들이 더 있을 거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장 대표가 사진을 언론사나 주애리씨한테 보내겠다고 해서.”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와 강준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애리? 내 사촌 형수를 말하는 거야?”

“네. 전에······ 내가 대표님한테 접근한 일이요. 그거······ 대표님 사촌 형수가 부탁한 거래요. 난 거기까지는 몰랐어요. 현재 형이 강 대표님 유혹에 성공하면 더 뜰 수 있다고 해서······.”

한녹영이 숨을 삼켜가며 머뭇머뭇 말했다. 주애리가 장현재에게 부탁했고, 저는 그런 장현재의 지시로 강준일에게 접근하려 했다는 말이 쉽사리 나오진 않았다.

“알고 있었어.”

“네. 알고 있었······ 네?”

“형수와 장 대표 사이도 알고 있었고, 장 대표가 널 내게 접근시키려 한 진짜 목적도 알고 있었어. 형수만 내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거든. 나도 날 적대시하는 사람들의 주변 정도는 늘 감시하고 있지.”

주애리와 강한일에게 조부의 뒤를 내어줄 마음은 없으니까. 조부인 강정석을 꼭 빼닮았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강준일은 욕심이 많은 편이고, 제 것을 남에게 뺏기는 걸 싫어했다.

“알고 있었······.”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다리가 후들후들 했다. 한녹영이 휘청거리자 강준일이 재빨리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주저앉지 않도록 했다.

“살이 또 빠진 것 같은데. 이래서야 언제 포동포동해질지 모르겠군.”

살이 또 좀 빠지긴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1kg남짓이었다. 박상호는 당연히 몰랐고, 정지해조차 얼굴이 초췌하다고 했을 뿐 ‘또 살 빠졌어?’ 하고 물어 오진 않았다.

“살 빠진 건 어떻게 알았어요?”

“만져보면 알아. 손에 잡히는 한녹영씨 몸이 더 가늘어졌으니까.”

손이 저울이라도 되나. 만져보는 걸로 알게. 별 말도 아닌데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올라와서 슬쩍 얼굴을 붉혔다가 고개를 부르르 흔들었다.

“아니 내 살 문제보다······ 진짜 알고 있었어요? 주애리랑 장현재 대표뿐만 아니라 현재 형이 날 대표님한테 접근시킨 이유도 정말로요?”

“그렇다니까.”

“대표님 사촌 형수가 우리 사이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지. 내 약점을 틀어쥘 기회를 잡았다고 쾌재를 부르고 있을 텐데.”

“그럼 우리 찌라시도······.”

“그건 아닐 거야. 찌라시에 겁먹고 우리가 헤어지기라도 하면 그 여자에겐 오히려 손해니까. 실제로 한녹영씨는 겁먹고 날 버릴 생각부터 했잖아.”

웃으며 하는 말에 가시가 있었다. 눈빛에도 못마땅함이 남아있었다.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버릴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잠시······ 시간을 두자고 했을 뿐이죠.”

“그게 그거 아닌가?”

“다르거든요! 그리고 겁먹을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었고요.”

“그 충분한 이유가 뭔지 나도 좀 알고 싶군.”

“대표님 조부님 건강이 안 좋으니까 우리 일 그분께 들어가면 곤란해질 것 같기도 했고요.”

강준일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한 거냐는 듯 피식 웃었다.

“맨손으로 시작해 지금의 LK를 이룬 분이야. 어지간한 일로는 충격 안 받으시지. 조부님을 쓰러트릴 수 있는 소식은 LK의 부도설뿐일 걸.”

본인 입으로 일이 본처라고 하실 정도로 평생을 일에 파묻혀 살아오신 분이니까.

“또······.”

“또 뭐?”

고개를 숙인 한녹영이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술에 취한 강준일을 덮쳐 영상을 뜬 일을 얘기해도 될지 망설임이 들었다. 가능하면 숨기고 싶었던 일이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특히 강준일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최악의 인간이었던 때의 일만은.

하지만 정말로 당분간 거리를 두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단순히 스캔들이 무서워서라는 말로는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설득이 안 되어 화가 난 강준일이 끝내자고 한 거다. 그리고 주애리라는 여자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말해줘야 강준일이 한층 더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을까? 결심을 굳힌 한녹영이 결연한 얼굴로 강준일을 보았다.

“저와 대표님이 어떤 상황에서 자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말해줄 마음이 들었나? 그 얘기에 대해선 언급조차 싫어하는 것 같더니?”

“대표님이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제가 덮쳤어요. 그리고 그걸 영상으로 남겨 장대표에게 줬어요. 그 영상이 세상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요.”

강준일은 말이 없었다.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한녹영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제게 실망한 것 같아 차마 더 이상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술 마시지 말라고 했던 건가?”

“네. 끝까지 얘기 안 하고 싶었는데.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그런 영상이 있다면 나도 보고 싶긴 하군. 정신을 잃은 날 덮치는 한녹영씨라니. 화끈해.”

“지금 농담이 나와요?”

한녹영이 원망스레 강준일을 흘겼다. 짧게 웃은 강준일이 시무룩한 한녹영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기죽은 한녹영씨는 매력 없어. 그리고 한녹영씨가 그런 미래를 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진 거잖아. 난 한녹영씨에게 신기가 있어 수치스러운 미래를 본 일이 우리에겐 행운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전 대표님 형수님도 무섭고, 장현재 대표의 집착도 무서워요.”

집착. 저를 향한 장현재의 행동은 집착이라는 단어로밖에 표현이 안 된다. 저도 한때 장현재에게 집착했지만, 단 한 번도 그의 몰락을 바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장현재는······ 갖지 못하면 파괴하겠다는 식의 음험한 악의가 느껴져 혐오스럽고 두려웠다. 저와 강준일의 사진을 틀어쥐고 어떻게든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하는 장현재는······ 병자 같았다.

“그러니까 아까 전화로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보세요. 나도 모르게 장현재나 주애리한테 이용당해서 또 다시 대표님을 망치게 될까봐 무섭단 말이에요. 나로 인해 대표님이 가진 것 중 단 한 가지라도 잃는 건 싫어요.”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다시피 하며 말한 한녹영의 제안을 강준일이 곧장 거절했다.

“내가 가진 것들 중 잃을까봐 가장 두려운 건 한녹영씨야. 그러니까 그건 안 돼. 한녹영씨 촬영 스케줄 때문에 가뜩이나 볼 수 없는데 그마저 포기한 채 한동안 거리를 두자니. 내가 정말로 한녹영씨 만날 수 있는 날에 새빨간 하트를 그려놓은 후 날마다 가위표를 치길 원해? 사실 지금도 탁상달력 20일 날짜에 하트를 그려 넣기 직전이라고.”

“아······.”

제가 가장 소중하다는 표현에 감격해 얼굴을 붉혔던 것도 잠시. 20일이라는 말에 잠깐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난처하게 변한 한녹영의 표정을 보고 준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왠지 불길한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한녹영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선을 피했다.

“그 날은 저기······ 촬영이 잡혔어요. 그 날뿐만 아니라 한동안 지금보다 더 타이트하게 촬영하게 될 것 같아요. 도망자 방영 전에 4부작 특집으로 잡혔던 드라마 제작에 차질이 생겼대요. 그래서 방영을 2주 당기기로 했거든요.”

“한녹영씨. 차라리 날 말려죽이지 그래.”

진심으로 침통해진 얼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강준일은 속된 말로 나라 잃은 표정이었다. 절망감마저 서린 얼굴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장현재와 주애리로 인해 심각해진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래. 이렇게 좋은 사람과 한동안 거리를 둬야 한다니 말도 안 돼.’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난 며칠간의 고민이 무색해지며 아무렴 어때,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이러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시름시름 앓다시피 고민하고 또 걱정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이 세상에 저와 강준일 둘만 있다는 착각 속에 있고 싶었다. 몸을 일으킨 한녹영이 다리를 벌려 강준일의 허벅지 위로 걸터앉았다. 골반을 그의 샅 쪽으로 바짝 당겨 앉으니 서로의 중심이 은근히 닿았다. 벌써 그의 중심은 불룩하게 솟아올라 지끈지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강준일이 한녹영의 엉덩이를 잡고 사타구니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서로의 중심이 더 밀착되었고, 한층 더 불룩해지며 앞섶을 들어 올리는 강준일의 것이 생생하게 느껴져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한녹영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강준일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강준일이 몸을 들자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한껏 발기해 핏줄까지 울룩불룩 올라온 성기가 불쑥 튀어나왔다. 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엄청난 크기였다. 저것이 제 몸속을 휘저었을 때의 느낌이 떠오르자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커서 부담스러웠지만 제 몸을 가득 채는 느낌이 조, 좋기도 했다.

꿀꺽 하는 소리에 씩 웃은 강준일 또한 한녹영의 바지를 벗겼다. 티셔츠를 위로 밀어 올리자 새하얀 피부에 과실처럼 매달린 유두가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여 한녹영의 유두를 입안에 삼킨 후 가득 빨아 당겼다. 한녹영의 가슴에서 뽑아낼  듯 강한 힘으로 빨다가 이를 세워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한녹영의 목구멍에서 가느다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허벅지 위에 놓인 엉덩이가 들썩들썩 했다. 강준일은 제 타액으로 미끈해진 유두가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씹고, 빨며 마음껏 희롱했다.

“하, 하아······ 대, 대표님······.”

위로 들어 올린 티셔츠가 얼굴 앞을 가리고 있어 호흡이 가빴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처럼 숨이 모자란 기분이 들었다.

“팔 위로 들어.”

한녹영이 두 팔을 위로 번쩍 들었다. 옷을 벗겨주려고 하자 한녹영의 등이 타원을 그리며 휘었는데, 낭창한 허리가 돋보이며 음심을 자극했다. 강준일이 잠시 제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린 채 걸터앉은 한녹영을 내려다보았다. 피부가 유난히도 하얀 탓인지 한녹영은 유두가 핑크색에 가까웠다. 그런데 성기만 피부 중 제일 짙은 색을 띄고 있어 참을 수 없이 야했다.

“그렇게 빤히 보면······ 미, 민망한데요.”

“한녹영씨의 여기만 색이 짙어 참을 수 없이 야해.”

강준일이 발기한 한녹영의 성기를 잘고 문질렀다. 한녹영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나른한 신음성을 흘렸다. 그는 쿠퍼액이 나오기 시작해 미끈거리는 하녹영의 귀두를 만지작대며 쾌감에 휘어지는 한녹영의 몸을 감상하듯 보았다.

“흐, 흐으으······.”

한녹영의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그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슬쩍 만져본 구멍 또한 움찔움찔 하는 중이었다. 마치 뭔가를 기대하듯 벌름대는 구멍에 강준일이 웃었고, 한녹영이 얼굴을 붉히며 신음성을 흘렸다.

“한녹영씨 구멍이 엄청 벌름대고 있는데? 이대로 넣어도 되겠어.”

손가락이 주름을 헤집으며 안으로 푹 들어왔다. 강준일은 안을 헤집어가며 손가락을 하나씩 더 집어넣어 구멍을 늘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세 개가 된 손가락이 점막을 문대며 강한 자극을 주었다. 세 개의 손가락이 안에서 비벼지고, 안을 푹푹 찔러대자 쾌감을 느낀 한녹영의 몸이 뒤로 자꾸만 휘었다. 몸이 들썩댔고, 그럴 때마다 타액에 젖은 채 부어있는 유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미치겠군. 강준일이 조급하게 혀를 핥았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엉덩이 들어봐.”

한녹영이 나른한 눈으로 강준일의 중심을 내려다보며 몸을 위로 들었다. 그 사이 강준일이 울퉁불퉁하게 발기한 성기를 한녹영의 구멍 입구에 맞추었다. 그리곤 한녹영의 골반을 잡고 그대로 아래로 확 끌어내렸다. 굵직한 성기가 직격으로 푹 꽂혀들었다. 한녹영이 비명 같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허리를 잡은 채 몸을 들썩이게 도와주다 이내 쯧 혀를 차더니 그대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한녹영을 소파 위에 누인 채로 거친 피스톤 질을 시작했다.

“하, 하으으······.”

한녹영이 눈꺼풀까지 파르르 떨어가며 신음했다. 다리 한쪽은 바닥으로, 나머지 한쪽은 소파 등받이 위로 올려졌다. 난잡하게 벌어진 다리에 수치심이 확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을 푹푹 찧어대는 감각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수치심 대신 강한 쾌감이 뱃속을 찔러댔다.

허공을 허우적대던 한녹영의 팔이 강준일의 목에 감겼다. 바닥으로 떨어졌던 다리는 들어 강준일의 허리로 감았다.

“하, 하아앗······ 대, 대표님······.”

나른한 신음성과 함께 한녹영이 강준일을 불렀다. 부름에 답하듯 강준일이 강한 힘으로 중심을 더 깊이 푹 찔렀다. 아찔하고도 강한 자극이 점막에 전해졌다. 한녹영의 점막이 강준일의 중심을 빠듯하게 압박하며 안으로 끌어당겼다. 좆에 달라붙은 점막의 강한 조임에 강준일의 입에서도 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녹일 듯이 달라붙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점막의 움직임에 황홀함을 느끼며 중심을 더 깊이 푹푹 넣었다.

“아, 아읏······.”

몸을 가를 듯이 푹 찔러 넣자 한녹영이 자지러졌다. 강준일은 성기를 한녹영의 몸속으로 더 깊이 넣었다. 고환까지 안으로 딸려 들어갈 듯 깊은 결합이 이어졌다. 한녹영의 하얀 몸이 붉게 물들었다. 발끝까지 파들파들 떨렸다. 안을 퍽퍽 쳐올리는 힘에 몸이 자꾸만 밀려 머리가 소파 끝에 닿았다. 정수리가 딱딱한 팔걸이 부분에 부딪치자 강준일이 그 사이로 손을 넣어 한녹영의 머리에 최대한 자극이 덜 가도록 해주었다.

“너, 너무 깊어요······. 대, 대표님······.”

지나치게 깊은 결합에 애원이 흘러나왔다. 뱃속이 전기 자극을 받고 있는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거대한 흉기로 내장을 헤집어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만······ 그만 빼줘······ 빼줘요······.”

지지는 것처럼 아찔한 쾌감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강준일이 한녹영의 눈물을 핥으며 웃었다.

“이렇게 강한 힘으로 조여 빨아 당기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야?”

“으, 으으······.”

뒤로 한껏 뺀 중심을 퍽 하고 넣어 안을 강하게 휘젓자 한녹영이 하는 진저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몸속을 오래도록 탐했다. 부드럽고 촉촉한 점막의 감촉은 박아댈수록 황홀했고, 오래 넣고 있으면 있을수록 자극적이었다.

“그, 그만 안에 싸, 싸요.”

한녹영이 울면서 애원했다. 이미 벌써 한 번 사정을 했고, 사정을 하자마자 곧장 발기한 성기에서 또 다시 정액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강준일은 제 몸속을 헤집기만 할뿐 도통 사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자극이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디다 싸줄까?”

깊이 넣은 성기를 뭉근하게 문대며 강준일이 은근한 음성으로 속삭여왔다. 만족스런 대답을 주기 전에는 절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겠다는 듯.

“아, 안에. 자, 잔뜩······.”

굵직한 귀두가 또 한 번 몸속 깊은 곳을 쿡 찌르자 흐으, 하고 울음 같은 신음성을 낸 한녹영이 두 다리로 강준일의 허리를 감았다. 단단히 감아 안으로 끌어당기듯 하며 단단히 조이자 나른한 숨을 내뱉은 강준일이 드디어 사정을 시작했다. 안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한녹영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빠듯하게 늘어났던 구멍이 줄어들며 틈새로 정액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씻고 나오자 소파 밑에 떨어져 있는 가발이 보였다. 맞다, 가발! 그제야 가발의 존재를 기억해 낸 한녹영이 허둥지둥 달려갔다. 혹시 정액이 묻었으면 어쩌나, 가발을 빨아서 줘야 하나, 빨아서 준다고 해도 정지해가 가발을 쓰기라도 하면 볼 때마다 민망할 텐데 차라리 새로 사줘야 하나, 순식간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머리카락이 약간 헝클어졌을 뿐 우려한 상황은 없었다. 다행이다. 한녹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건 누구 거지?”

뒤에서 한녹영을 끌어안은 강준일이 물었다. 한녹영의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온 그의 손이 당연한 듯 유두를 지분대자 눈살을 찌푸리며 품에서 벗어났다. 이러다 또 욕정에 불이라도 들어오면 큰일이다. 세 번이나 하느라 어느새 2시 반이었다. 내일, 아니 오늘은 평소보다 약간 여유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이젠 그만 돌아가 잠을 청해야 한다.

“대표님, 거기 딱 서 계시고요. 이건 제 코디 누나 거예요.”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말 것을 경고하는 한녹영의 눈매가 경계심으로 가늘어졌다.

“그런 눈으로 보니 내가 꼭 짐승이 된 것 같잖아.”

“솔직히 섹스 할 때의 대표님은 짐승 그 자체였거든요.”

한녹영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짐승도 상짐승이었지. 강준일이 슬쩍 웃었다.

“짐승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고개를 흔든 한녹영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곤 가발도 썼다. 어색해보이지 않도록 꼼꼼하게 눌러쓰곤 헝클어진 아랫부분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는 걸 묘한 눈길로 보던 강준일이 말했다.

“피부가 하얗고 예뻐서 그런지, 긴 가발도 어울리는군. 앞으로도 그걸 쓰고 만나면 될 것 같은데.”

“설마 제가 여장을 하고 다닐 거라곤 쉽사리 예상하지 못할 것 같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그렇고, 신인 때 종종 나갔던 예능에서조차 여장을 한 적이 없으니까. 예능에서 PD가 여장 제안을 한 적은 있지만 한녹영이 강하게 거부했다. 가뜩이나 여자 화장품 CF를 찍으며 여자보다 예쁜 남자로 엄청 떴는데, 아예 여장 전문 배우로 이미지가 굳어질까봐 싫었던 것이다.

“조금만 참아. 곧 해결할 테니까.”

한녹영의 뒤에 제가 있음을 대놓고 드러낸 순간부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주애리는 제게 약점이 생긴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테니 당하기 전에 역공하려 했는데, 설마 파파라치와 장현재 따위가 제 발목을 잡을 뻔하다니.

그나저나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제게 한녹영을 보내 영상을 뜨게 만들었단 말이지. 이후의 일은 말하지 않았지만 잔뜩 겁을 먹은 채 두려워하는 한녹영을 보니 영상이 불러온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되었다. 사실 한녹영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읽지 않아도 재벌 3세와 남자 연예인의 섹스 영상이 불러올 파장의 크기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지고, LK의 주가가 날뛰겠지.  한녹영도 완전히 매장될 테고. 신기가 있어 모든 상황을 봤다면 당연히 겁을 집어먹을 만 했다.

다 이해하지만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을 내려 저와의 거리를 두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 한녹영에겐 서운했다. 난 삐치면 정말 오래 간다고. 각오해, 한녹영씨.

“꼬리가 길면 잡혀요.”

“그래서 끝까지 거리는 두자는 쪽으로 고집을 부리려고?”

강준일의 표정이 또 다시 싸늘해졌다. 한녹영은 입술을 핥으며  그에게로 다가가 살포시 안겼다.

“헤어지는 건 싫어요. 내가 대표님을 망치는 것보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더 싫어요.”

“그러니까······.”

“정말 보고 싶어지면 가발 쓰고 찾아올게요. 어차피 스케줄이 바빠져서 한동안은 만날 수 없으니까 그동안 대표님이 장 대표와 주애리 해결해주세요. 네?”

턱에 입을 맞추며 애교를 부리자 싸늘하게 굳어있던 강준일의 표정이 풀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한녹영씨를 어떻게 이기겠어. 장현재와 형수가 그렇게 두렵다면 그래, 한녹영씨 원대로 한동안 조심하지. 도망자 촬영이 끝나기 전까진 해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고마워요, 대표님.”

수줍게 속삭이는 한녹영의 허리를 끌어안은 강준일이 가벼운 입맞춤을 해왔다.

“하지만 한순간이나마 나와 완전히 끝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는 점에선 여전히 서운해. 행여 또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간 정말 삐쳐버릴 거니 각오해.”

“그런 생각 안 해요. 절대로요.”

절벽 위에 매달린 줄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불안한 만남이 평생 이어진다 해도 헤어지진 않을 거다. 그와 헤어지는 상상을 한 순간 심장에서 느껴진 통증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 아픔은 정말 처음일 정도였다. 그러니까 헤어지지 않을 거다. 절대로 이별만은 싫었다.

“좋아.”

그제야 강준일이 만족한듯 웃었다.

“이만 갈게요. 여장하고 와서 아무도 날 못 알아볼 테니 혼자가도 되죠? 대표님이 데려다주거나 상호 형이 데리러오면 난 줄 짐작할 텐데.”

강준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녹영씨가 우리의 스캔들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니 어쩔 수 없지.”

“내가 망가지는 것도 싫지만, 나로 인해 대표님이 망가지는 건 더 싫으니까 좀 참아요. 지금도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지 알아요?”

제 스캔들이 터졌을 때보다 더 무서운데. 얇은 얼음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언제 얼음이 깨져 몸이 아득한 호수 밑으로 푹 꺼져 들어갈지 몰라 아찔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많이 참고 있어. 내가 인내심이 깊은 남자인 것에 대해 감사하라고. 나보다 더 바쁜 애인이라니.”

바쁘게 현관으로 향하던 한녹영이 멈칫했다. 그리곤 커다랗게 뜬 눈으로 강준일을 돌아보았다.

“우리······ 사귀는 건가요? 내가 대표님 애인이에요?”

“그러고 보니 아까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무슨 끝이냐고 했던가?”

뒤끝 긴 남자가 한녹영이 했던 말을 꼬투리 잡았다. 입매를 꾹 다문 채 눈치를 보는 한녹영의 뺨을 쓸어내리며 강준일이 웃었다.

“한녹영씨. 우리 사귈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