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5화 (5/9)

Chapter.  05

“녹영아?! 이것 좀 봐!”

우선 먹자. 먹어야 기운이 나고, 기운이 있어야 머리를 팍팍 굴려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다는 박상호의 주장아래 다 같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던 와중이었다. 밥 먹을 때만이라도 기사를 검색해보지 말자며 휴대전화 금지령을 내렸던 박상호가 화장실에 간다고 가더니 잠시 후 태블릿을 들고 달려왔다. 전화가 불이나 꺼둔 상태라 태블릿으로 인터넷을 찾아본 것이다.

다급한 그의 음성에 막 씹어 넘긴 밥이 턱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녹영이 가슴을 두들기자 정지해가 서둘러 물을 건네주었다. 그녀를 향해 고맙다는 의미로 웃은 한녹영이 물을 마셨다.

“기사 검색해보지 말자더니! 오빠 때문에 녹영이 밥 먹다 체하겠다!”

정지해가 눈을 흘겼다.

“자꾸 마음이 초조해져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 봐.”

박상호가 태블릿을 불쑥 내밀었다. 또 다른 기사가 터졌나. 숨을 크게 들이쉬며 애써 담담한 마음으로 태블릿을 받아든 한녹영의 눈이 갈수록 커졌다. 기획사의 횡포, 라는 기사였는데 간혹 기획사에서 소속 배우가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앙심을 품고 스캔들을 만들어 이미지를 훼손시켜 아예 매장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하기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십년 전 액션 전문 배우로 큰 인기를 누렸던 배우 박철우가 바로 그 예로, 조폭 회사로 유명한 기획사에서 박철우가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보복성 스캔들을 터뜨려 전도유망했던 배우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박철우의 매니저 폭행설이 바로 그것인데, 훗날 기획사와 매니저의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억울함과 분함을 이기지 못한 박철우가 투신자살을 시도해 하반신 불구가 된 이후라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우리는 기획사의 횡포로 아까운 배우 한 명을 잃은 것이다. 최근 전속계약이 만료되자마자 깨끗했던 배우의 이미지에 흠집을 입히는 스캔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에서 왠지 박철우의 일이 떠오른다고 하면 본 기자가 지나친 걸까. 여론에 휩쓸려 무작정 비난의 화살을 던지다 또 한 명의 배우를 안타깝게 잃기 전에 우선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녹영은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최근 전속 계약이 만료된 배우란 분명 절 말하는 거다.

“형 이거······.”

“네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분명 네 얘기야. 댓글도 봐봐.”

다시 고개를 숙인 한녹영이 댓글도 읽었다.

ㅡ 한녹영 말하는 거지?

ㅡ 내 생각에도 한녹영이다.

ㅡ 기획사에서 보복성 스캔들 터뜨린 건가.

ㅡ 어쩐지 이상하더라. 마치 여론몰이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터지다니 누가 봐도 조작성이잖아.

ㅡ 한녹영 불쌍. 기획사 한울이었나? 지켜보겠어.

ㅡ난 옛날부터 한울 마음에 안 들었어. 뒷말이 많은 회사.

ㅡ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 악플 달던 사람들 80퍼 이상은 알바일 거라는 데 십 원 건다.

ㅡ 녹영 오빠, 힘내요. 난 오빠 믿어요.

ㅡ 한녹영의 초콜릿 미소. 내 인생의 활력소.

한녹영은 우호적인 댓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물론 옹호 댓글 사이사이 한녹영을 비난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아까처럼 심하진 않았다. 한참이나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시선을 들자 박상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오빠, 이상해. 기사가 많이 줄었어. 분명 되게 많았는데 삭제된 것 같아.”

박상호의 말에 수저를 내려놓고 저만치 밀어둔 휴대전화를 가져와 여기저기 검색 신공을 펼쳤던 정지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 진짜네. 형, 녹영이 기사 엄청 줄었어!”

허둥지둥 포털 검색을 해본 장한수도 깜짝 놀라며 시선을 들었다.

“그치? 줄었지? 화장실에 앉아서 몰래 검색해보는데 희한하게 줄어든 느낌이 들더라고. 난 또 내 착각인가 했는데. 어? 또 줄었다.”

실시간으로 기사가 하나씩 삭제되고 있었다. 특히 마치 한녹영이 희대의 악질이라도 되는 냥 써 갈겼던 가장 악의적인 기사들이 속속 사라지는 중이었다. 전화를 걸어 음해다, 고소하겠다, 별별 소리를 다 하고 협박에 애원을 해도 콧등으로 웃어넘기더니 어째서 자의로 기사를 내린 거지?

한녹영과 박상호, 정지해와 장한수 그리고 장한경까지. 다섯 명은 마치 얼간이들의 모임에 참석한 멤버들처럼 서로의 얼굴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기사들이 속속 사라지고 있는 거야?”

정지해의 물음에 박상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꼭 누가 손써준 것처럼 사라지네? 어쨌든 다행이야. 진짜 찾아가서 똥이라도 싸주고 싶을 만큼 악의적으로 막 써 갈긴 기사들이 사라져서. 나쁜 기레기놈들! 분명 한울에서 돈 받았을 거야. 내가 다 고소하고 만다!”

밥 앞에 두고 냄새나게 웬 똥 타령이야, 하고 수선을 피우는 정지해를 향해 흐흐 웃은 박상호가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반 정도는 내려간 기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앞이 막막했고, 걱정 때문에 좋아하는 고기가 잘 안 넘어갔는데 이젠 좀 숨이 쉬어졌다. 오죽하면 휴대전화 금지령 내려놓고 혼자 몰래 화장실에 숨어 태블릿으로 기사 검색을 해봤겠는가. 보지 말자고 하면서도 또 어떤 기사가 터졌나 내심 걱정되고 심란해 자꾸 찾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가장 공격적이고 악의적인 기사들이 사라졌으니 일단 한시름 덜었다. 이제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하면 될 거야. 일단 괜찮은 언론사 몇 개 골라서 인터뷰 하자. 사진이랑 박지한 건에 대해서 해명 기사 내면 될 거야. 아니면 기자회견을 하던가. 네 가족 문제는······ 참 한수 네 친구한테서는 별 연락 없냐?”

사흘 전에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뭔가 근사한 건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장한수가 휴대전화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상호 오빠, 내가 사실 블로그에서 좀 핫하거든. 이른바 파워블로거라 이거지. 뷰티에 관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유명해.”

정지해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응? 뭔 소리야?”

“내 블로그에 뷰티 팁이나 피부 타입별 추천템, 얼굴형에 따른 메이크업법, 계절에 따른 피부 관리법 같은 걸 올려서 좀 유명하단 말이야. 내 블로그에

녹영이 코디인 걸 밝히고 억울한 사정을 쓰면 어떨까 해서. 사표 던지고 오면서 생각한 방법인데, 그럼 녹영이 코디라서 편든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고, 괜히 돕는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피해주면 어쩌나 망설였거든. 근데 가장 악의적인 기사들 삭제되는 중이고, 기획사 횡포에 대한 기사도 떴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오빠 생각은 어때? 난 반박 기사 내기 전에 내 블로그로 녹영이 억울한 사정 먼저 내보내는 것도 괜찮다고 보는데. 뭐라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봐야 하잖아.”

정지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박상호가 솔깃했다. 그는 엄지로 턱을 꾹꾹 밀듯이 문지르며 “흠, 흐음······.” 하고 앓는 듯한 신음성을 내더니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지만 여론이 좀 돌아서는 모양새이니까······ 한 번 시도해보자. 이럴 때 확 뒤집어야 하니까.”

“알았어. 그럼 내가 당장 우리 녹영이 억울하게 내몰린 거 싹 다 정리해서 올릴게. 내가 오늘 천재 작가 빙의한다.”

“사인 위조한 것도 슬쩍 흘려버려. 그거 때문에 일찍 전속계약 해지한 거라고. 재계약 안 한다고 하니까 녹영이를 막 굴렸던 것도 쓰고.”

“알았어. 걱정하지 마. 낱낱이 밝힐 테니까.”

정지해는 독립투사라도 된 듯 결연한 표정으로 앉아 제 블로그에 한녹영이 기획사에서 당한 일들을 적당히 오버해서 쓰기 시작했다. 내가 이러고 있을 순 없지, 하고 말한 박상호도 일어나 휴대전화를 켜더니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꽉 막혀있던 물길이 한 번 트이니까 일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 들어 왠지 희망적이었다.

한녹영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제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심장 부근이 뜨거워지며 눈자위가 시큰해졌다. 예전에는 오로지 장현재에게만 미쳐 사느라 제 주변에 이렇게 다정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몰랐다. 몰랐기에 무시했고, 내키는 대로 성질을 부렸으며,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듯 거만을 떨었다. 그 결과는 나락에 떨어져 홀로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이었고.

스캔들이 터지기 시작했을 때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 너무 무섭고 두려웠는데 이젠 아니었다. 혼자였던 예전과 달리 지금 제 곁에는 저를 위해 나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제 일처럼 분해하며 일을 바로잡으려고 발 벗고 나서주는 이들이. 그래서 쓸쓸하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절망적인 기분도 더 이상은 없었다. 일의 전개가 뜻과는 달리 나쁘게 진행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싸워줄 동료가 있으니까.

두 번째 삶은······ 그런대로 괜찮게 살고 있는 중인 모양이었다.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악연들이 남아있어 지금 이렇게 난관에 부딪쳤지만 괜찮다. 박상호, 장한수, 장한경, 정지해가 있고 그리고 저를 위해 달려와 준 사람도······ 있고. 강준일을 떠올리자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심장이 뜨거워졌다.

‘휴일에도 일할 만큼 바쁜 것 같던데.’

마지막까지 절 놀렸지만 사실 얼굴에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큰 회사의 대표는 휴일도 휴일이 아니구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가족들끼리 모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눠야 할 명절 연휴에 일이라니. 바쁜 시간 쪼개서 급히 달려와 줬는데, 역시 커피라도 한 잔 대접했어야 했어. 아무 대접도 못한 채 그냥 보낸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내 손으로 커피를 내려 본 적이 있어야지. 전에 헬스장에서도 결국 강준일이 커피를 내리게 만들지 않았나.

‘지금이라도 상호 형한테 커피 내리는 법 좀 배워둘까?’

그래봤자 강준일의 솜씨에는 한참 못 미칠 테지만 배워둬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한 번쯤은 제 손으로 내린 커피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강준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어 홀로 수줍어하며 슬쩍 웃었을 때 박상호가 어리둥절하게 다가왔다.

“녹영아. 박지한 한울과 계약했단다.”

잘익은 자두처럼 발갛게 물들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본래 색으로 돌아왔다.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박지한이 한울과? 한울에서 박지한의 스타성을 보고 계약을 맺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하나다.

“나 물 먹이려고 일부러 박지한과 계약한 거구나.”

박지한을 이용해 제가 강제로 역을 빼앗아가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는 식으로 언론플레이 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어쩐지 박지한의 급에 비해 일을 너무 크게 다룬다 싶었다.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배역이 다른 배우에게 넘어가는 일은 비일비재한데다 박지한이 화제성 있는 배우도 아니라서 그가 암만 억울함을 토로해봤자 크게 다뤄줄 리가 없는데 이상했었다. 김동우 파티건과 제 부모 일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박지한과 계약까지 맺었다니······.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터뜨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미지를 훼손해 반드시 절 매장시키고 말겠다는 음험한 악의가 느껴져 오싹했다. 부모 죽인 원수한테도 이렇게까진 안 하겠다.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장현재에게 실망을 넘어 그가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속이 얼음처럼 찬 사람이라는 건 이제 알지만······.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렇겠지. 곧 박지한과 한울의 관계가 기사화될 거라더라······ 너 홍 기자 알지?”

“대화일보?”

“어, 방금 통화했는데 LK에서 기사 막아주고 있다던데?”

“어? 정말이야?”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박상호 역시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비난하는 기사 삭제되고 있다고 했잖아. 그거 LK에서 한 일이래. 기사 올린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직접 기사 내리라고 압박하거나 아니면 포털 쪽에 연락해서 너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는 속속 삭제하는 모양이야. 지금 LK 홍보팀이 여기저기 힘 있는 언론사에 연락해서 반박 기사, 너 옹호하는 기사 실어달라고 한다는데? 보도 자료는 LK에서 준비하겠다면서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악의적인 기사를 실은 곳들이 대부분 삼류가십지이고 의도적으로 여론몰이를 하는 것이 느껴져서 지켜보는 중이었다더라. LK에서 보도자료 오면 보충해서 바로 기사 낼 거래. 그러니까 너무 절망하지 말라더라.”

“아까 박철우 선배 기사 실린 것도?”

“어. 그것도 LK에서 한 일인 것 같아. 일단 그런 식으로 운을 뗀 후에 본격적으로 반박 옹호 기사 내는 것이 LK 스타일이라더라. 홍 기자가 LK에서 도망자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 같다며 제작발표회  기대된대. 그때 웃는 얼굴로 보자고 하더라. 진짜 한시름 덜었다. LK에서 나서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난 진짜 말만 매니저고, 너한테 나만 믿으라고 큰소리만 쳤지 아무 힘도 못 되어 줬는데. 힘이 없으니 기자들이며 포털이며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아서 좀 절망적이었거든. 나 진짜 강 대표한테 엎드려 큰 절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형이 이럴 때 큰 힘을 못 써줘서 미안하다, 녹영아.”

박상호가 끝내 훌쩍였다. 하여간 마음 약하긴. 한녹영은 “형이 뭐가 미안해. 형의 존재 자체가 내겐 힘이 돼.” 하고 낯간지러운 말로 위로한 후 그가 감격해 “녹영아!” 하고 덤벼들려고 하자 서둘러 침실로 피신했다.

LK에서 나서주고 있다고? 아까 서둘러 갔던 일이 회사 일 때문이 아니었구나. 아랫입술을 깨물며 머뭇머뭇했던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켠 후 강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왜?

성가시고 귀찮은 전화라도 받은 듯한 말투에 절로 입이 튀어나왔다.

“좀 다정하게 받 주면 안 됩니까?”

투정을 부리는 듯 말하자 강준일이 웃었다.

ㅡ 한녹영씨가 못 봐서 그렇지 나 지금 엄청 다정한 얼굴로 전화 받는 중이야. 태어나서 가장 다정한 얼굴일 걸?

“그럼 뭐해요? 말투에서 성가심이 느껴지는데.”

ㅡ 우리 사이에 아직 풀어야 할 오해가 많군. 태어나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성가심으로 오해하다니 말이야. 식사는 했나?

“네. 상호 형이 밥을 먹어야 기운이 난다면서 억지로 먹였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먹다 말았지만.

ㅡ 다행이군. 네 매니저가 널 생각하는 마음이 특별한 것 같아.

“네. 진짜 친형처럼 고마운 사람이에요. 그리고 대표님한테도 고, 고맙고요.”

ㅡ 뭐가?

“방금 들었어요. LK에서 내 기사 막아주고 있다고요. 아까 그거 때문에 급하게 나가셨던 거죠?”

ㅡ 그런 셈이지. 한녹영씨는 우리 LK가 처음으로 투자한 드라마의 중요 배역을 맡은 소중한 배우니까. 드라마를 흥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이상 배우 이미지가 나빠지면 안 되잖아. 무려 22배의 이익이 날 드라마인데.

“······.”

단순히 드라마 때문에 도와줬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못마땅하게 입매를 삐죽였을 때였다.

ㅡ 라고 언론사에 얘기했지. 사심을 얘기했다가 지금보다 더 큰 스캔들을 만들 순 없잖아.

“대표님 사심은 뭔데요?”

ㅡ 내 사심은······ 그냥 한녹영씨가 소중해. 소중해졌어.

마치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듯 그윽한 음성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녹영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그······ 방심한 순간에 훅 치고 들어오는 것 좀 안 하면 안 돼요?”

ㅡ 왜?

“심장에 무리와요.”

강준일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ㅡ 전엔 머리가 어지럽다더니 드디어 심장이 반응하기 시작한 모양이야? 나한텐 좋은 일인 걸.

그의 웃음소리가 참 시원하게 들려서 한녹영은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댄 채 그의 웃음이 잦아들길 조용히 기다렸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인연이 묘하게 얽혀 이젠 조금이라도 더 목소리를 가까이 듣고 싶어 귀를 바짝 세우고 있는 제 모습이 어색했다.

“전에 대표님한테 다정함을 요구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다정한 강준일은 정말로 심장에 안 좋았다.

ㅡ 벌써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떡하나. 난 이제 시작인데. 강해져서 단단히 각오하고 있으라고.

“······.”

왠지 겁난다. 한녹영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ㅡ 그리고 한녹영씨가 요구하지 않았어도 난 다정해졌을 거야.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는 마음을 따라가는 법이잖아.

태도가 마음을 따라간다.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태도는 마음을 따른다. 현재 장현재의 태도가 생각났고, 달려와 위로해준 강준일의 태도 역시 떠올랐다. 우는 저를 달래주던 강준일의 태도는 분명 몹시도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러니 마음도······ 그렇다는 거겠지?

“참 이상해요.”

ㅡ 뭐가?

“대표님과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싫어서 눈만 마주쳐도 인상을 찌푸렸던 사이였잖아요.”

ㅡ 흠, 한녹영씨 날 싫어했었군?

“대표님도 마찬가지잖아요.”

ㅡ 난 한녹영씨를 싫어한 적 없어. 장현재의 인형이었던 한녹영씨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그게 그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냥 한녹영과 장현재의 인형으로 살았던 한녹영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제가 생각해도 장현재의 인형으로 살았던 저는 참 재수 없었으니까.

ㅡ 그런데 한녹영씨는 그냥 내가 싫었나봐?

강준일의 음성이 낮아졌다. 그 음성에서 서운함이 느껴져 당황했다. 한녹영이 허둥지둥 변명을 시작했다.

“싫었던 것이 아니라······ 솔직히 얼음처럼 냉하게 구는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메조도 아닌데. 그리고 지금은 시, 싫어하지 않으니까요. 어, 어쨌든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ㅡ고맙긴. 다 사심이 있어서 한 일인데.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지. 이럴 때 잘 보여서 점수 따둘 생각이야.

“점수 따셨고요. 사심이 있어서 한 행동이라고 해도 고마워요. 진짜로요.”

ㅡ 그럼 고맙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해주지 그래?

“어떤 말이요?”

ㅡ 대표님, 연애해요. 이런 말?

웃음기가 맺힌 말에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표님 아직 저한테 본격적으로 덤벼들지 않았잖아요.”

ㅡ 본격적으로 덤벼들면 오케이 할 건가?

“대표님 하시는 거 봐서요.”

새침한 대꾸에 강준일이 이번에도 시원하게 웃었다. 이상도 하지. 왜 웃음소리에서 자꾸만 청량감이 느껴질까. 꼭 이온음료를 시원스레 들이켠 기분이 들었다. 심장에서 톡톡 하고 탄산이 터지는 듯한 느낌에 주먹을 쥐락펴락하고 있는데 강준일이 뜻밖의 말을 해왔다.

ㅡ 변호사 보낼 거야. 한녹영씨에 대해 심한 악플 단 네티즌들 골라서 고소해버려.

“고소까지요?”

ㅡ 한울에서 돈 받은 자들이야. 설사 돈을 받지 않았더라도 익명에 숨어 타인을 악의적으로 비방한 사람이라면 처벌받아 마땅해.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참을 필요는 없다고 봐. 언론에 오르내리기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거절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하지만······.”

ㅡ 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거지? 내 독설을 간단히 받아치던 까칠한 한녹영씨가? 얌전하고 소심한 한녹영씨는 매력 없는데. 우리 아직 본격적인 연애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매력이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알았어요. 고소할게요. 하지만 대표님한테 매력 어필하려고 고소한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네티즌 고소라니. 아무리 그들이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네티즌들을 고소했다가 가뜩이나 추락 중인 이미지가 더 안 좋아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잠깐 들어 망설였는데 생각해보니 참을 이유가 없었다. 이전에 제가 몰락했던 까닭은 순전히 제 잘못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이번에는 제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주눅들 이유도, 무서워 숨을 까닭도 없다.

“그리고 저한테 까칠한 매력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고소로 결심을 굳힌 한녹영이 까칠하게 덧붙였다.  까칠하지 않다고 매력이 떨어지니 어쩌니 하면 곤란하다고.

ㅡ 글쎄. 아직은 다른 매력은 잘 모르겠는 걸.

놀리는 거다. 명백히 놀리는 투였다. 그런데도 다른 매력은 모르겠다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근데 왜 자꾸 연애하쟤요.”

ㅡ 아직 본격적으로 연애하자고 한 적은 없는데. 이제 곧 덤벼들 거라고 했지.

“그, 그게 그거죠.”

강준일이 가볍게 웃었다.

ㅡ 아쉽지만 통화는 이제 그만 끝내야겠군. 비서실장이 놀지 말고 일하라며 노려보는 중이야. 휴일인데 회사일도 아닌 걸로 일 시켜서 화났거든.

“한 실장님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나중에 일 다 해결되면 제가 음······ 밥 산다고요.”

ㅡ 한 실장한테는 그냥 사인이나 한 장 해주면 돼. 그보다 나한테는 뭘 해줄 건가?

“네?”

ㅡ 나도 휴일에 나와서 일하는 중인데. 오랜만에 느긋해서 오후에 한녹영씨와 데이트를 하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져서 속상해. 매우.

“전 오늘 대표님이랑 데이트할 계획이 없었는데요.”

ㅡ 그야 내가 아직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았으니까. 오늘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덤벼들 예정이었거든. 우리의 데이트는 한녹영씨 일이 마무리된 이후로 마루자고.

“데이트 신청을 받은 적이 없어 오케이할지 말지는 미정이지만, 일이 마무리 되면 일단 신청은 한 번 해보세요.”

ㅡ 한녹영씨, 일이 잠잠해지면 우리 데이트 할까?

일이 마무리되면 일단 신청이나 한 번 해보라고 한 건데, 또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온다. 데이트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간질거려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은 한녹영이 말했다.

“그, 그러죠 뭐.”

튕기듯 머뭇머뭇 대답하자 강준일이 웃었다.

ㅡ 한녹영씨 일은 곧 해결될 거야. 너무 조바심치지 말고 하나씩 해결해.

“네. 그렇게 할 거예요.”

ㅡ 좋아. 기특해.

한녹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마지막에 했던 말 한 번만 더 해주세요. 이상하게 대표님께 그 말을 들으면 기운이 나거든요.”

정말 이상하게도 강준일에게 기특하다는 칭찬을 들으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그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잘 해내 더더욱 칭찬받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 말이다.

ㅡ 기특해.

“끊을게요.”

ㅡ 전화는 언제든 열어두지. 우리 이제 특별한 용건이 없어도 전화 정도는 해도 되는 사이 아닌가?

“그, 그 정도 사이는 된 것 같아요. 진짜 끊을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드레스룸으로 향한 후 전신 거울을 봤는데, 역시나 얼굴이 붉었다. 요샌 왜 툭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예전엔 제게 홍조 병이 있는지 몰랐는데, 강준일과 묘하게 얽히고 난 이후로 걸핏하면 붉어져서 큰일이었다. 장현재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동안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었다. 한녹영은 난생 처음 겪는 증상이 당혹스럽고 난처했다. 그리고 심장이 간질간질한 이 느낌은 뭔지. 강준일의 말에 기운이 나고,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콩당대는데 이건 또 무슨 현상인지.

‘대표님, 연애해요. 이런 말?’

연애라 강준일과의 연애라니······. 데이트라니. 그가 싫진 않다. 이제 예전처럼 어렵지도 않고, 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연애라니······. 전에도 한 번 생각해본 적 있지만 여전히 강준일과 연애하는 제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되었다. 우스운 건 상상은 잘 안되는데 머릿속으로 ‘대표님과 연애?’ 하고 생각하면 심장부터 서서히 달아오르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피부가 간질거리고, 몸이 배배 꼬이는 기분도 들었다.

“너 뭐 하냐? 왜 혼자 가울보고 히죽대면서 몸을 비비 꼬고 있어?”

한녹영이 한참 나오지 않자 설마 또 틀어박혀 우나, 하고 걱정스레 들어와 본 박상호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좀 전 한녹영의 모습은 봄날 머리에 꽃 단채 다니는 정신 나간 여자 같았다.

“응? 몸을 꼬긴 누가······ 강준일 대표님이랑 통화했는데 변호사 보내줄 테니 악플 단 네티즌들 고소하래. 한울에서 돈 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녹영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뭐?! 악플 달라고 돈까지 줬대? 나 참 하다하다 별······. 진짜 바닥을 보여주는구나. 그래 고소하자. 가장 악의적인 악플 단 네티즌들, 네 사진 합성해서 조롱한 사람들 싸그리 고소해버리자.”

“응. 그러자. 아주 본때를 보여주자.”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로 나왔다.

“블로그에 다 올렸다. 괜히 더 부정적인 결과 나올까봐 가슴이 막 두근거려. 긴장돼.”

입술이 다 바짝 말랐다. 혀로 연신 입술을 훔치던 정지해가 안 되겠는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와 마셨다.

“부정적인 결과가 나와도 괜찮아. 날 생각하는 누나 마음만 있으면 돼.”

수줍게 말하며 웃자 정지해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웃지 마. 누나 마음 설렌다.”

그녀의 농담에 한녹영이 웃으며 응했다.

“그럼 누나 나한테 시집올래?”

“안 돼. 사내연애 금지야.”

도끼눈을 뜬 박상호가 정지해를 향해 “특히 지해 너, 녹영이한테 침 흘리지 마.” 하고 엄포를 놓았을 때 친구와의 긴 통화를 끝낸 장한수가 거실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이 상기된 상태였다.

“녹영아, 네 가족들······ 참 할 말 없다. 남동생이라는 놈은 여자들 추행이나 하는 놈이고, 여동생이란 년은 머리 텅텅 비어서 연예인 시켜준다면 그냥 엎어지고 보는 모양이더라. 그리고 아버지란 사람은 도박에 주먹질에······ 네 이름 팔아서 여기저기서 돈도 꽤 끌어다 쓴 모양이고. 새어머니란 여자는 바람까지 났다더라. 심지어 한두 놈이 아니라던데? 불륜 전문으로 이 꼴 저 꼴 많이 본 놈 입에서 더러워 죽을 뻔 했다는 말이 다 나왔을 정도야. 새엄마 상대 남자가 다 젊은 놈들이었대. 나 참. 아들 뻘인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랑 그런 짓을 하고 싶을까. 네 식구 중 누구도 일하는 사람은 없는데 돈은 재벌마냥 펑펑 쓰고 다닌다더라. 그게 다 누구 돈이겠어?! 녹영이가 쉽게 돈 버는 줄 아나! 암튼 사진이랑 이것저것 모아뒀으니 조만간 만나서 준대.”

기사가 삭제되고 희망이 보이면서 밝게 살아나기 시작했던 분위기가 장한수의 말로 인해 무거워졌다. 박상호야 한녹영의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그냥 혀만 끌끌차고 말았는데, 정지해와 장한수, 장한경은 처음 듣는 얘기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녹영의 친모가 어릴 적 돌아가시고 계모 손에 자랐다는 얘기는 데뷔 때부터 밝힌 거라 알고 있는데, 세세한 사실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한녹영이 가족들 뒷조사 의롸를 했을 때 ‘가족사가 원만하진 않나 보다.’ 라는 짐작 정도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콩가루여서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한녹영은 저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보듯 하는 세 사람을 향해 웃었다.

“새어머니한테 남자가 하나도 아닌 여럿이 있다는 사실은 좀 놀라운데 나머지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야.”

“난 네가 가족들 뒷조사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 좀 그랬거든. 아무리 가족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도 뒷조사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근데 네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어, 잠깐만.”

안쓰럽게 말을 이어가던 장한수의 휴대전화가 크게 울렸다. “아까 다 못한 얘기가 있나?” 하고 전화를 받은 장한수가 “뭐?!” 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곤 바쁘게 전화를 끊더니 당황한 눈으로 한녹영을 보았다.

“지금 네 부모 여기로 향하고 있다는데?”

“지금?”

“응. 갑자기 둘이서 다정한 척 집을 나서서 어딘가로 향하기에 우선 따라붙었는데 목적지가 여기인 것 같다네. 벌써 거의 다 온 모양이야. 새끼, 아까 얘기 좀 해주지.”

장한수는 어쩌지 하고 허둥지둥 했다. 덩달아 어쩌지, 하고 당황하던 박상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왜 당황해?”

“어? 그러네. 내가 자금 왜 당황하고 있지? 왠지 도망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장한수가 머쓱해하며 대답했고, 박상호가 그런 그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관리실에서 온 인터폰인데 바깥에서 한녹영의 부모가 찾아와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좀 내려와 봐야할 것 같다는데?”

내려가 보니 한녹영의 아버지 한만식과 새어머니 김영숙이 경호원처럼 보이는 떡대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한울과 손을 잡고 한녹영을 패륜아처럼 몰아간 일로 한녹영이 비참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는 두 사람의 얼굴이 참으로 기세등등했다.

“당신들 뭐야?! 뭔데 못 들어가게 막아?!”

“부모가 자식 집에 들어가겠다는데 너희들이 뭔데 막고 지랄이야! 내 아들 나오라고 해!”

“비켜, 이 새끼들아!”

한만식과 김영숙은 삿대질과 욕설까지 해가며 떡대들에게 비키라고 하는 중이었고, 떡대들은 무표정하게 “못 들어가십니다.”는 말만 반복하며 버텼다.

“경호원들 같은데? 관리실에서 경호원들 세워둔 겁니까?”

한녹영이 관리실에서 나와 바깥 동향을 기웃대는 중인 관리인을 향해 물었다.

“한녹영씨가 부른 사람들 아닙니까? 아침 무렵에 갑자기 나타나서 누구냐고 물었더니 경호원이라고 하던데요? 그러면서 기자들이나 이상한 사람들이 접근하려고 하면 저렇게 막더라고요.”

“너희들 들어올 때부터 있었어?”

박상호가 정지해와 장한수, 그리고 장한경을 향해 물었다.

“응. 신분 확인하고 들여보내주던데?”

정지해가 대답했다. 장한경이 “저도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기자들이 잠잠하더라. 우르르 몰려와서 호출벨을 눌러대는 둥 소란을 떨었어야 정상인데 말이다. 덕분에 조용했는데, 대체 누가······ 머릿속으로 이름 하나가 스쳤다. 강준일이었다. 저를 위해 말없이 경호원을 배치해줄만 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혹시 강 대표님인가?”

박상호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런 것 같아.”

역시, 하고 박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도 강 대표님 같지? 언제 경호원까지 배치해두신 거래. 고맙게. 사람이 어쩌면 이리도 세심하지. 이 빚을 어떻게 갚냐. 녹영아, 너 진짜 연기 잘해서 도망자 대박나게 해라.

“응. 걱정하지 마. 인생 연기를 할 거니까.”

조용히 대답한 한녹영이 주먹을 꾹 쥐었다. 강준일 이 남자 정말 안 되겠다. 왜 자꾸 감동주고 난리야. 가뜩이나 가슴이 뻐근한데, 이러다 심장이 녹아 없어지게.

언제부터 그의 존재가 제 안에서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잠깐 얘기 좀 할게요.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크게 심호흡을 한 한녹영이 가까이 다가가서 얘기하자 그제야 경호원들이 고개를 꾸벅 하더니 한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여차하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듯 위압적인 표정을 자은 채 한만식과 김영숙을 주시했다. 박상호는 따라 나온 정지해와 장한수, 장한경을 향해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후 한녹영의 옆에 바짝 붙어섰다.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개 마냥.

“부모가 자식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되겠니?”

김영숙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승기를 잡은 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자식을 나락으로 밀어 넣은 사람들을 부모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인터뷰는 잘 봤어요. 근데 참 이상하죠. 난 새어머니한테 자식 대접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친자식보다 더 보살피며 키웠다고 인터뷰를 하셨더라고요.”

“마, 마음으로는 널 친자식 이상으로 생각했다.”

한녹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한겨울에 벌거벗겨 내보내고, 본인들은 고기 먹으면서 난 찬밥주고 그랬구나. 친자식으로 생각해서 욕하고 때리고, 걸핏하면 굶겼고요?”

비웃음이 가득한 말에 김영숙의 낯이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했다. 한만식이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김영숙을 보호하듯 섰다.

“싸가지 없는 새끼가 길러준 어미한테 하는 소리 좀 보소. 일전에도 말했지만 삼십 억만 내놔. 그럼 인터뷰 취소하고 사실 넌 좋은 아들이라고 말해줄 테니까. 아니면 계속 언론에 호소할 거다. 지금 잡힌 인터뷰만 해도 다섯 건이 넘어. TV인터뷰도 잡혔고. 지저분하게 굴지 말고 그냥 돈 주고 깔끔하게 끝내자. 질질 끌어봤자 너만 손해야. 이미지에 흠집 나고 패륜아로 찍혀서 다신 연예활동 못하고 싶으냐?”

“전에도 말했지만 더 이상은 돈 못해줘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아버지가 진 사채 빚 내 앞으로 다 떠넘기고 새어머니랑 새어머니 자식들만 챙겨 야반도주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 내 걱정 조금은 했어요? 내가 사채업자들한테 걸려 무슨 꼴을 당할지 걱정은 되던가요?”

“당연히 걱정했지. 자식인데 걱정 안했을 리가 있느냐?”

달랠 셈인지 한만식의 얼굴에 비굴한 웃음이 떠올랐다.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이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물은 건지. 아버지란 사람에게 자식인 저를 향한 애정은 조금도 없었다.

“아, 그래서 나 데뷔하고 좀 뜨니까 바로 찾아와서 사업자금 대달라고 했구나. 지금껏 수십억을 가져가고도 모자라 이젠 더 이상 돈 못 대준다고 하니 언론에다 내가 패륜아니 뭐니 하며 날 후레자식으로 매도했고요? 자식이라 걱정해서?”

“네가 이렇게 싸가지가 없고 이기적이니 내가 널 버리고 간 거다! 사채 빚 1억에 널 떠넘기고 갔던 일을 벌써 몇 년째 우려먹는 거야?! 자식이 되어서 아버지 빛을 대신 갚아주고 아버질 부양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긴 말 필요 없고 삼십 억 내놓을 테냐? 아니면 계속 인터뷰할까?”

거의 협박하는 투였다. 아니 그냥 협박이었다. 한녹영은 길거리 깡패마냥 자식을 협박하는 한만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싸늘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이미지는 훼손됐으니까요.”

절대 타협은 없었다. 특히 자식을 협박하는 아버지와는. 절대 단 한푼도 내놓을 수 없다는 한녹영의 눈빛을 읽은 한만식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싸가지 없는 새끼! 후레자식 같으니! 우리가 네놈이 잘 나가도록 두고 볼 것 같으냐?! 그래! 나도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한만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녹영은 숨넘어갈 기세로 소리를 질러대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한만식을 무심하게 쳐다보다 남편 옆에서 표독한 표정으로 서 있는 김영숙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새어머니 젊은 애인들은 잘 있어요? 한두 명이 아니라던데.”

김영숙 곁으로 다가간 한녹영이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김영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무, 무슨······!!!”

“아버지한테 새엄마 남자들에 대해 얘기하면 참 좋아하실거예요. 그쵸? 사진이라도 보여주면 더더욱 즐거워하실 테고요. 우리 셋이서 같이 새엄마가 남자랑 엉켜있는 사진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은데. 어떡할까요? 지금 당장 공개할까요? 아니면 오늘은 일단 아버지 끌고 가실래요? 동네 시끄러워서 못 살겠어요.”

탈색된 것 마냥 하얗게 질려 한녹영을 노려보던 김영숙이 아비를 버린 후레자식이라며 악을 쓰는 한만식의 팔을 잡고 “그만 가요.” 라며 끌었다. 한만식은 “왜 그래? 나 아직 저 새끼한테 할 말이 많은데?!” 하고 버티다 김영숙이 강경하게 “그만 가자니까요!“ 하니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뭐라고 했는데 저 여자가 하얗게 질려서 네 아버질 끌고 가냐?”

마치 주인에게 코가 꿴 늙은 노새처럼 끌려가는 한만식의 등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박상호가 물었다.

“아버지한테 새엄마 남자들에 대해 말해버린다고 했어. 형, 한수 형 친구한테 사진 받으면 익명으로 아버지한테 발송해버려.”

아버지는 어머니한테는 그리도 모질어놓고 새어머니란 여자한테는 푹 빠져 우습게도 한평생 바람이라곤 모르고 살았다. 재혼 이후에는 이 세상에 여자라곤 새어머니밖에 없는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그녀 말만 들었고, 친자식인 한녹영보다 여자의 자식들에게 더 애정을 쏟았다. 도박이며 주먹질은 하고 다녔어도 여자는 김영숙 하나였다. 그런데 철썩같이 믿고 있던 여자가 바람이 났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떨까. 아마 미치고 환장하겠지. 부모자식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사람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다고 했던가?

‘난 그 천륜, 냉정하게 끊어 보이겠어.’

제게 가족은 돌아가신 어머니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 생각이었다. 저런 가족은 없는 편이 더 나으니까. 싸늘한 한녹영의 말에 박상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아주 미치고 환장할 만 한 사진으로 크게 확대해서 보내주마. 이제 들어가자.”

돌아서는데 우물쭈물하며 슬쩍 눈치를 보는 장한경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할 말이 있는데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흑돼지 청년. 할 말 있어?”

“매니저님! 이름 불러달라니까요.”

장한경이 부루퉁하게 대꾸했고, 박상호는 그런 장한경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스물여섯이나 먹어놓고 순진하다니까. 놀리는 재미가 있어 자꾸 흑돼지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르고 장한경은 “제 이름은 장한경입니다. 장한경.” 하고 제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그래, 한경아. 할 말 있어?”

장한경이 웃고 있는 한녹영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저 방금 전 녹영 선배랑 부모님 모습 제가 동영상으로 찍었거든요. 이거 유튜브에 올리면 어떨까 해서······. 아까 코디님 블로그 얘기 듣고 생각나서 급하게 찍어봤는데, 괜찮을까요?”

“유튜브? 어디 봐봐.”

위로 올라가며 장한경이 찍은 영상을 봤는데 한녹영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냥 동네주민이 우연히 목격하고 찍은 것처럼 보였다. 거리감이며 찍은 각도며 아주 완벽하게 우연히 지나친 주민 1이 찍은 영상이었다.

거기다 한녹영을 향해 소리 지르고 욕을 해대는 한만식의 벌건 얼굴과 새된 목소리가 잘 찍혀 있어 옆에서 다 보고 겪은 일인데도 순간 “뭐 이런 새끼가. 이런 것도 아비라고.” 하는 욕이 나올 뻔 했다. 박상호가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며 장한경의 등을 퍽퍽 쳤다. 한녹영의 불운한 과거가 드러나는 것이 좀 그렇긴 한데 영상이 퍼지면 동정론이 일어나 아직 남아있는 비난여론이 완전히 뒤집힐 가능성이 컸다. 물 들어올 때 배 띄우라고 LK의 도움으로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이때 막장 부모 영상이 올라간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거다.

SNS며 유튜브며 기자들이며······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 더럽혀진 한녹영의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한 번 이런 식으로 낙인찍히면 백퍼센트 원래대로 돌이키긴 힘들지만, 가능한 한 끌어올려야 한다. 악의적인 음모에 희생되어 망가지기엔 아까웠다. 이제 정말 시작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몇 년 동안 매니저 노릇을 하며 든 정보다 지난 두 달 동안 든 정이 더 깊어 이제 한녹영이 배우로서, 동생으로서 정말 소중해진 탓에 상처받아 아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아까 드레스룸에서 봤던 모습 같은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뭐든 이용해서든 훌훌 털고 일어나 톱 배우로 우뚝 서는 모습이 보고 싶다.

“이거 올리면 네 과거가 다 드러날 텐데, 괜찮지? 좋은 일을 아니지만 동정론이 일어나면서 너한테 패륜아니 후레자식이니 하며 욕했던 사람들 입 싹 닫게 만들 수 있을 거야. 분위기 완전히 반전시키려면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지.”

혹시라도 한겨울에 벌거벗은 채 쫓겨났네, 맞았네, 어쩌네 하고 말하는 모습이 영상에 찍힌 까닭에 한녹영이 싫다고 할까봐 조심스레 물었다.

“동정론은 싫지만 패륜아보다는 불쌍한 게 낫겠지.”

어린 시절이 불우했던 건 사실이니 동정 받아도 할 수 없지만 억울하게 패륜아가 될 순 없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올려. 얼른 올려. 근데 어떻게 녹화 뜰 생각을 다했냐? 흑돼지 청년! 볼수록 마음에 든다. 우리랑 계약하자.”

“그냥 퍼뜩 동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면 녹영 선배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실을 모르면서 그냥 기사 인터뷰만 보고 녹영 선배 욕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다른 걸로는 제가 도움드릴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근데 계약이라니 그게 무슨?”

박상호의 칭찬에 쑥스러워하던 장한경이 뒤늦게 계약이란 단어를 언급하며 어리둥절하게 물어왔다.

“내가 기획사를 차리려고 하거든. 톱스타 매니저가 내 소박한 꿈이었는데, 이제 톱스타를 데리고 있는 기획사 대표로 꿈을 바꾸려고. 간판 배우는 당연히 우리 녹영이. 흑돼지 청년도 우리 회사와 계약할래?”

“진짭니까? 진짜 저와 계약해주는 겁니까? 그리고 제 이름은 장한경이라니까요.”

“그래, 한경아. 그리 감동한 눈으로 볼 건 없고. 이제 막 회사 차리겠다고 결심한 거라 사무실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 그러니 당장 계약은 못 해. 그리고 도망자 방영되면 한경이 네 인지도도 올라서 계약하자는 회사 나올 거고. 잘 생각해보고 다른 회사에 가도 괜찮아. 네 앞날을 생각하면 큰 회사에 가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고.”

다른 회사에 가도 배신감 느끼지 않을 거니 얼마든지 편안하게 생각하라고 하자 장한경이 펄쩍 뛰었다.

“녹영 선배랑 매니저님이 있는 곳을 두고 다른 회사를 왜 가요? 저 그렇게 의리 없는 놈 아니에요.”

“우리 회사는 완전 신생이라 환경이 열악해 힘들 수도 있어.”

“괜찮아요. 훨씬 힘든 상황에서도 버텨왔고, 또 녹영 선배 도움으로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다른 회사라니요. 만약 제가 다른 회사에 간다고 하면 누나가 제 등짝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때릴 걸요? 누나가 녹영 선배 많이 팬인데······ 아, 대본리딩 날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 날 일어났더니 누나가 얼마나 흥분하면서 얘기했는지 몰라요. 녹영 선배 실물이 정말 예뻤다고요. 밤인데 선배 뒤에서 막 광이 났다고 하던데요.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이제 보니 장한경 은근 수다스럽다. 한녹영은 새처럼 재잘재잘 잘도 떠드는 장한경을 향해 피식 웃었다.

“누나랑 단 둘이라고 했었지?”

“네. 제가 9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는 제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고요. 유복자로 태어나서 어머니가 바깥일을 하셔야했기 때문에 저랑 열 살 차이나는 누나가 거의 키워주다시피 했어요. 저한테는 누나가 엄마고, 아버지고, 형제거든요. 누나한테도 전 아들이자 동생이고요. 그래서 고등학교 다니며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 누나가 많이 마음 아파했어요. 전 누나 보면서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누나 때문에 일부러 더 씩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저 없으면 우리 누나 못 살거든요. 저 사람 노릇 하는 것까지 봐야한다며 아직 시집도 안 간 사람이에요.”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겠네?”

자식처럼 키운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에게 황산을 던질 만큼.

“아마도요. 사실 우리 누나, 학창 시절 저한테 나쁜 짓 한 애들한테 칼 들고 찾아간 적도······ 있어요.”

장한경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누나가 이런 사람이에요, 라고 자랑이라도 하듯 하지만 눈빛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한녹영은 귓불을 잡아당기고 있는 장한경을 잠시 가만히 보았다.

자식 같은 아니 장한경의 누나에게 진짜 자식이었을 장한경을 제 치졸한 마음으로 죽였으니 얼마나 원통했을까. 황산을 들고 찾아왔던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번 삶에선 장한경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서 황산 테러를 당하지 않을 테니 다행이고, 무엇보다 저렇게 순진하고 착한 장한경의 가장 숨기고 싶은 비밀을 낱낱이 파헤쳐 세상에 드러내 그에게 상처주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아무리 시기심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의 뒷조사를 해 치부를 드러낼 생각을 다 했······. 막 현관으로 들어서던 한녹영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생각을 못했는데 제게 ‘장한경의 뒤를 캐보면 근사한 약점을 쥘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식으로 언질해준 사람이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분명히 언질을 받고 약점, 이라는 말에 솔깃해 뒷조사를 시작했었다. 어떻게든 장한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때라 유혹의 말에 쉽게 넘어갔었는데······ 근데 그게 누구였더라? 왜 생각이 안나지? 뒷조사 전문이라며 심부름센터까지 소개시켜준 사람이었는데. 기억을 떠올리려고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학창 시절에 무슨 일을 겪었는데 누나가 칼까지 들었어?”

장한수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움찔한 한녹영보다 박상호가 빨랐다. 따돌림을 당했다는 말을 전에 들은 박상호가 장한수의 등을 퍽쳤다.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회사 이름이나 생각해봐! 녹영이 일 잠잠해지면 바로 사무실 자리 알아볼 거니까.”

“대표는 부담스럽다며 뺄 때는 언제고?”

“내가 원래 행동력 하나는 죽이잖아. 결심하고 나면 즉시 실행, 몰라?”

“오빠 이름 따서 상호 에이전시 어때?”

정지해가 말했고, 장한수가 손을 내저으며 흙을 집어삼킨 듯한 얼굴로 반대했다.

“촌스러워. 차라리 녹영이 이름 따서 영 에이전시라고 하는게 낫겠다.”

“그게 뭐야. 영 에이전시가 몇 배는 더 촌스러워.”

“상호 에이전시가 훨씬 더 촌스럽거든?”

정지해와 장한수가 서로의 이름이 더 촌스럽다며 갑론을박을 벌이는 동안 녹영은 소파에 앉았다.

“넌 뭐 생각나는 이름 없어?”

한녹영의 옆으로 앉은 박상호가 물어왔다. 한녹영은 음,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박상호가 회사를 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름까진 정해놓진 않아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흘렸다. 아침나절만 해도 불행과 절망 그 자체였는데 어느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우스웠던 것이다.

“왜 웃어? 뭐 재밌는 이름이라도 생각났어?”

“그게 아니라 회사 이름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 우스워서.”

“응? 그게 왜 우스워?”

“우리 여기 왜 모였어?”

“그야 네 스캔들 때문에······ 그러게. 아까까지만 해도 다들 우중충하게 한숨만 푹푹 내쉬던 상황이었는데 어느새 분위기가 이렇게 밝아졌냐. 회사 이름 생각할 여유까지 생기고.”

“그러게 말이야.”

회사명 문제로 툭닥거리고 있던 정지해와 장한수도 피식거리며 웃었다.

“여유가 생겼으니 다행이지 뭐. 여론이 우리한테 유리한 쪽으로 돌아설 것 같으니······ 한수랑 나 월급 받을 수 있겠네.”

“어, 걱정하지 마. 누나. 월급 많이 줄 테니까.”

한녹영이 웃으며 장담했다.

그 날 저녁부터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대형 언론사 중 한 군데서 특집 기사로 기획사의 횡포를 다루며 불공정 계약과 재계약 거부시 행해지는 보복에 대해 실은 것이다. 때를 맞춰 다른 언론사에서 ‘박지한, 한녹영 전 계약사인 한울과 계약?’ ‘박지한, 한녹영 대신 한울과 한솥밥.’ 이라는 기사가 연이어 떴다. 사람들은 하필이면 이 시기에 한울과 계약한 박지한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정지해가 블로그에 쓴 글이 여기저기 빠르게 퍼져나가며 기획사가 재계약을 하지 않은 한녹영을 의도적으로 매장시키려고 악의적인 스캔들을 터뜨렸다는 설이 힘을 얻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유튜브에 올린 영상 또한 여론이 한녹영에게 우호적으로 돌아서는데 큰 역할을 했다. 패륜아, 후레자식이라며 한녹영을 욕했던 사람들이 이젠 한녹영의 부모를 욕했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할 수 있느냐, 자식이 돈으로밖에 안 보이냐며 한만식과 김영숙을 비난했다.

연예인에게 빨대 꽂고 사는 거머리 가족들을 특집으로 다루고 싶으니 인터뷰를 해달라는 청도 여러 건 들어왔지만 한녹영이 거절했다. 굳이 구질구질하게 인터뷰까지 해가며 제 개인사를 밝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연예인과 연예인 가족이 돈 문제로 인터뷰를 해가며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두어 번 본 적이 있는데, 어느 쪽이 피해자이고 어느 쪽이 가해자인가를 떠나서 사실 그리 보기 좋은 모습들은 아니었다.

한만식과 김영숙은 여전히 삼류 가십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해대며 ‘영상은 조작이다. 우리는 아들인 한녹영을 버린 적이 없다.’며 호소해댔지만, 한녹영이 침묵으로 맞대응하자 악을 쓰는 그들의 모습만 더 추해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한녹영의 편은 아니라 여전히 비난하는 네티즌들도 많았다. 그들은 인터넷 상에 뜬 한녹영의 사진을 언급하며 ‘한녹영이 재벌들 빨아주고 뜬 건 사실 아니냐.’며 비아냥댔고, 그 사진은 조작이다, 사진 속 남자는 한녹영이 아니다, 설사 한녹영이라 하더라도 기획사에서 억지로 보낸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한울 쪽에서도 가만히 당하진 않았다. 재벌가 파티에서 한녹영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실은 기사가 연이어 터져 나왔고, 한녹영의 뒤에 거물 스폰서가 있다는 카더라도 은근히 퍼졌다. 각종 게시판과 SNS에 알바로 보이는 조작성 글들도 꾸준히 보였다. 여전히 사진을 합성해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들도 제법 많았다. 여론이 한녹영 쪽으로 유리하게 흐를수록 비난과 조롱하는 글의 강도가 세져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첫 날만큼 상처가 크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설 연휴가 끝났고, 첫 촬영일이 되었다. 한녹영은 첫 촬영을 위해 남양주로 향하며 휴대전화로 아침 방송에 뜬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어휴, 말도 마세요. 그 계모라는 여자가 얼마나 악독하게 녹영이를 구박했는지 몰라요. 애를 굶기고, 때리고, 추운 날에 내쫓기도 했다니까요. 내가 몇 번이나 녹영이를 우리 집에 데려와서 밥을 먹였어요. 어릴 때도 애가 이목구비가 또렷하니 참 예뻤는데 어느 날 떡하니 TV에 나온 걸 보고 얼마나 반가웠게요.’

칼칼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는 여자는 어릴 적 한녹영이 살았던 동네의 슈퍼 주인이었다. 연휴 내내 한녹영이 포털을 뜨겁게 달구자 부랴부랴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찾아가 주민들 인터뷰를 따내 내보낸 것 같았다. 슈퍼 주인 아주머니의 인터뷰에 이어 또 다른 동네 주민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친부와 계모가 자식인 한녹영을 말도 못하게 구박했다는 내용이었다.

- 용팔이 자식이 그러는데, 네 부모님 사는 동네에서 네 부모 욕을 엄청 해댄다더라. 평소에도 동네에서 평판이 별로 안 좋았나봐. 네 아버지가 걸핏하면 술 먹고 소리 질러, 쌈 벌여, 자식들은 싸가지도 없고······ 그런 와중에 일이 터져서 분위기가 엄청 험악한가봐. 부모님 사는 집에 몰려가서 돌이랑 계란 같은 걸 던지기도 한대. 거머리니 뭐니 하는 낙서도 엄청 되어있고.

용팔은 한녹영이 가족의 뒷조사를 의뢰한 장한수의 친구이다. 본명은 정용필인데 별명이 용팔이라고 장한수가 말해주었다.

“오늘 만난댔지?”

“응. 너 촬영하는 동안 후딱 가서 만나고 올게. 너한테 하는 짓 보고 더 열 받아서 악착같이 쓸어 모은 것들이 좀 되나봐. 내가 그랬잖아. 용팔이는 정의의 편이라고.”

만화 대사 같은 말에 웃음이 나왔다. 한녹영은 아직 좀 남은 영상을 꺼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의뢰비는 용팔 형님이 말한 것보다 더 준다고 해. 이따 상호 형이 계좌로 보내줄 거야.”

박상호가 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의만큼 돈에도 환장하는 놈이라 더 얹어준다고 하면 엄청 좋아할 거다.”

그 사이 차가 촬영장에 도착했다. 한녹영은 박상호가 아침 일찍 렌트해온 미니밴에서 내렸다. 옷이며 메이크업 도구며 짐도 많은데다 4명이서 함께 움직이기엔 승용차가 작아 한동안 렌트한 미니밴을 타고 다니기로 했다. 우선 사무실부터 얻은 후에 중고로 밴을 하나 살 예정이고.

촬영장은 분주했다. 오늘 촬영에 투입되는 배우들도 대부분 도착한 상태였다. 감독과 얘기 중인 송정빈도 보였다. 그들 옆에는 김현영도 있었다. 한녹영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세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촬영 준비 중이던 배우들이 한녹영을 보고 수군대는 것이 느껴졌다. 제 잘못이든 아니든 스캔들이 터진 탓에 어느 정도는 뒷말이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한녹영은 대놓고 제 앞에서 욕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안녕하세요.”

한녹영이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김현영이 한녹영을 보고 울먹였다.

“한녹영씨, 괜찮으세요?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안 받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녀는 세상에 얼굴 반쪽 된 거 봐, 하고 속상해 죽으려고 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스캔들이 터진 첫날 몇 시간은 정말 괴로웠지만 강준일이 오고, 여론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며 마음이 놓여 제법 잘 지냈다. 박상호가 세 끼니뿐만 아니라 끼니 사이에 간식까지 강제로 먹여 마치 사육당하는 기분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게으르게 지낸 덕분에 아침에 무게를 재니 살이 좀 쪘던데, 얼굴이 반쪽이라고 하니 민망했다.

“전 괜찮습니다. 작가님 덕분에 그나마 사태파악을 빨리 해서 대응도 빨리 할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고맙기는요. 한녹영씨가 저랑 드라마를 위해 해준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요. 저도 계속 기사랑 게시판, SNS 주시했는데 일이 잘 해결되는 쪽으로 흐르는 것 같던데요. 한녹영씨 옹호하는 기사도 많이 떴고요. 비난하던 네티즌들도 옹호하는 쪽으로 돌아섰고요.”

“네. 간간히 절 비난하는 기사가 뜨긴 하지만 무시해도 될 수준이에요. 무엇보다 촬영일 전에 해결이 안 되면 드라마에 피해를 끼칠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는데 이 정도나마 진정되어서 다행이고요.”

“피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고 박지한씨 일은 우리 쪽 잘못도 있어서······ 박지한씨로 인해 한녹영씨 비난하는 기사 뜰 때마다 진짜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실망했어요, 하며 김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절대 제 드라마에 박지한을 쓸 일은 없을 거다. 이쪽에서 실수한 것도 있어서 다음 작품에는 꼭 박지한을 쓸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말이다.

“너 연휴 내내 되게 핫하더라.”

송정빈이 다가왔다. 한녹영은 가벼운 농담부터 건네는 그를 향해 웃었다.

“네. 제 이름이 계속 실시간검색어 1위에 있더라고요.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선배.”

한녹영도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생각보다 씩씩하네.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쨌든 웃으며 촬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박지한은 한울이랑 계약했다며?”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회사에 들어간 건 다행이지만, 이 바닥에선 흔한 일가지고 그렇게 널 비난 해대다니 나 기사보고 어이없어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언제 웃었냐는 듯 박지한의 일을 언급하는 송정빈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 서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서서 절 비난하는 조건으로 들어갔을 텐데요.”

“누가 봐도 그런 모양새지. 아니면 한울에서 박지한이를 왜 데려갔겠어. 전화해서 따졌더니 오히려 제 놈이 더 짜증내더라. 지금 입장이 엿 같다고 말이야. 한동안 너한테 까여서 불쌍한 놈으로 피해자 코스프레 하며 여기저기 나갈 계획이었는데, 한울이랑 관계가 기사화되면서 입장이 반대가 되어 지금 꽤 시달리고 있나봐. 고소하지 뭐. 새끼, 얌전히 있었으면 다음 드라마 때 내가 적당한 역으로 꽂아주려고 했는데.”

“선배가 왜 화를 내요? 당한 건 난데요.”

붉으락푸르락 역정을 내는 모습이 꼭 송정빈이 스캔들의 당사자가 된 냥 분해 보였다.

“내 회심의 복귀작이 망가질 뻔 했잖아! 내가 도망자로 화려하게 복귀전 치르려고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 중인데. 그리고 예전에 내가 당했을 때 생각나면서 연휴 내내 엄청 화가 나더라고. 알만 한 사람들은 다 네가 억울하게 당한 거 알 테지만, 그래도 조작된 스캔들 믿고 널 비난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다. 내가 그랬거든.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는데도 돈 주고 합의한 거라는 둥, 돈으로 거짓 진술 시킨 거라는 둥 수군대더라. 나 참. 스캔들 때문에 이미지 망가져서 위약금 물어주느라 수중에 돈 한 푼 없었구만. 참 넌 괜찮아? 광고주들은 모델이 스캔들에 휘말리는 거 좋아하지 않잖아.”

“몇 군데 있긴 해요. 계약 해지하고 위약금 물어주려고요.”

세 군데 정도 있었다. 하나는 의류 업체, 하나는 시계브랜드 콘스탄틴, 나머지 하나가 가구인데, 콘스탄틴을 제외한 의류와 가구는 벌써 3년째 한녹영을 모델로 쓰고 있었다. 작년 봄 재계약을 할 때만 해도 한녹영씨 덕분에 브랜드 이지가 좋아졌다, 매출이 늘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더니만, 일이 터지자 이미지에 흠집이 난 모델은 좀 곤란하다며 잽싸게 계약 해지 통보와 함께 그로 인해 입게 된 브랜드 손상과 매출 하락으로 인한 위약금 소송을 하겠다고 전해왔다.

강준일이 보내준 변호사와 상담해보니 의류와 가구 업체 둘 모두 계약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이고, 그간 매출 상승에 기여한 기여도 등을 고려해 볼 때 한녹영이 물어야 할 위약금이 크진 않을 거라고 해 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사실 두 업체 모두 한울과 오랜 관계를 맺은 곳이고, 역대 모델들 모두가 한울 출신이라 만약 제가 모델로 있는 업체서 소송이 들어온다면 저 두 곳이 가장 먼저일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한울의 입김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콘스탄틴이야 신생이라 갑자기 논란의 중심이 된 한녹영이 부담스러워 아무 문제없는 모델로 갈아 타고 싶어 하는 거야 당연했다.

정말 다행이게도 강준일 도움으로 재빨리 분위기가 반전되어 한녹영이 피해자라는 여론이 더 우세한 터라 다른 광고주들로부터는 계약해지 통보가 오지 않았다. 물론 몇 군데서 유감이라는 심기 불편한 연락이 오긴 했지만 아직은 지켜보는 중인 것 같았다.

“변호사 소개해줘? 나 때 담당해준 변호사가 꽤 실력 있거든. 덕분에 집 한 채는 건졌다. 완전히 탈탈 털리는 줄 알았는데.”

송정빈이 애써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때 정말 괴로웠는데, 버텼더니 오늘 같은 좋은 날이 와서 한녹영에게도 제 경험을 바탕으로 위로해주려 했는데 생각보다 얼굴이 밝아 얼떨떨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녹영 곁에 힘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변호사 있어요. 악플 단 네티즌들 고소하려고 소개받은 분인데, 위약금 소송까지 같이 해결해주신대요.”

“네티즌 고소하려고?”

“네. 여론몰이하면서 악의적으로 날 비난하던 사람들 한울에서 돈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소하려고요.”

한녹영의 말에 송정빈이 황당해하며 입을 벌렸다.

“댓글 알바들까지 풀었대? 대단하다, 한울. 지들이 국정원이야 뭐야. 너 거기 철천지 원한이라도 졌나? 한울 배우들이 유난히 소속사에 대한 충성심이 커서 어지간하면 다른 데로 안 간다고 하던데, 특히 네가 제일 유난해서 절대 다른 회사로는 옮기지 않을 거라는 소릴 들었거든. 그런 네가 재계약을 하지 않은 정도면 원한을 지긴 졌나본데. 뭐냐?”

“원한은 무슨. 회사랑 무슨 원한을 져요? 그냥 맞지 않아서 재계약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원한이야? 응?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 있어?”

호기심에 불이 들어온 송정빈이 이유를 말해달라며 질척거렸다. 한녹영이 한숨을 내쉬며 그런 송정빈을 밀어냈다.

“우리 사이 아무 사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준비나 해요.”

“우리가 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연예계 선후배 사이이고, 앞으로 드라마 찍으며 동고동락할 사이이며, 드라마 상에서 연적이 될 사이인데.”

“세 가지 이유 중 어느 하나도 와 닿지 않는데요.”

“까칠하게 굴지 말고 응?”

그러고 보니 이 선배 원래 좀 질척대는 성격이었지. 잘난 척도 잘하고 호기심은 못 참는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는 걸 오래 못 본 탓에 잊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주인공 역에 추천했나, 속으로 살짝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리허설 준비 해주십시오.”

AD가 외쳤다.

도망자 첫 씬은 차도영과 주인공 성동주가 마약밀매범이 숨어있다는 제보를 받고 폐공장을 찾아왔다가 일당들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싸움을 벌이는 씬이라 자칫하다간 부상을 입을 수 있어 본 촬영 전 리허설을 통해 충분히 합을 맞춰야봐야 한다. 더욱이 빗속에서 싸움을 벌여야 해 만약 NG가 난다면 비용이며 시간이며 손해가 막심해 본 촬영 때 실수가 없도록 반복해서 리허설을 했다.

“한녹영씨 액션 촬영은 처음이지?”

네 번째 리허설을 끝냈을 때였다. 무술 감독이 잠시 휴식 중인 한녹영에게 다가왔다. 리허설이지만 본 촬영과 똑같아야 해서 실수하지 않도록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었던 탓인지 쉬이 지쳐 숨을 헐떡이며 물을 마시던 중이었던 한녹영이 대답했다.

“네. 처음이에요.”

“그럴 것 같아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하네?”

한녹영이 지시한 대로 잘 따라주자 무술 감독이 만족해하며 웃었다.

“고맙습니다.”

“검도는 따로 배운 적 있나?”

“도망자 캐스팅되고 난 이후에 도장에 등록했거든요. 스케줄이 빡빡해서 자주 나가진 못했지만 기본 동작은 익혀뒀어요. 그리고 정 감독님 운영하시는 액션스쿨에도 두어 번 나갔었고요. 저도 액션 씬 촬영은 처음이라 많이 걱정했는데, 두어 번뿐이지만 배워둔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액션 씬은 자칫하면 사고라 정 감독이 꽤 엄하게 지도해줬는데, 확실히 두어 번뿐이지만 원리는 배워둔 탓인지 도움이 되었다.

“정 감독님? 정두언 감독?”

“네.”

무술 감독이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처음인데 해본 것처럼 하더라니. 액션 씬이 많은 드라마라 초보인 한녹영씨가 소화하기 괜찮을까 했는데, 아무 걱정 안 해도 되겠어. 그건 그렇고 정 선배는 잘 계시지? 못 본지 좀 되었는데.”

“잘 계세요. 앞으로 틈틈이 가서 배울 생각이거든요. 다음에 뵈면 감독님 안부 전해드릴게요.”

“그래주면 고맙고. 그럼 한 번 더 맞춰보자고. 아, 한녹영씨. 아까보니 주먹이 날아오기 전에 몸이 먼저 뒤로 빠지는 경향이 있더라고. 미세한 차이라도 카메라를 통해 보면 크게 보이거든. 그러니까 그것만 좀 주의하면 되겠어.”

“네. 신경 쓰겠습니다.”

물을 마저 마신 한녹영이 리허설을 위해 쉬고 있다 속속 모여드는 배우들에게로 다가갔다. 추위에 손이 얼어 핫팩으로 녹이고 온 송정빈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서려있었다.

“오랜만에 액션 씬 촬영하려니 만만치 않네. 넌 괜찮냐?”

“전 액션 촬영이 처음이라 긴장돼서 죽겠어요.”

“그런 것치고는 실수 없이 잘 하던데?”

“실수 안 하려고 몸에 엄청 힘주고 있는 중이거든요. 합이 조금이라도 안 맞을까봐 자꾸 신경 쓰여요.”

한녹영의 말에 스턴트 배우 중 한 명이 웃었다. 마약범 일당 중 한명으로 주로 한녹영과 붙는 씬이 많은 배우였다.

“그러다 몸살 납니다. 편안하게 해요, 편안하게. 우리가 다 맞춰줄 거니까.”

“네, 최대한 힘 빼고 해볼게요.”

스턴트 배우가 한녹영의 어깨를 툭 치더니 제자리로 가서 자세를 잡았다. 감독이 큐 사인을 보냈고, 마지막 리허설이 시작됐다. 스턴트 배우가 한녹영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한녹영은 무술 감독의 조언을 떠올리곤 네 번째 리허설 때보다 약 2초가량 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뒤로 두어 걸음 비틀대며 물러섰고, 주변에 굴러다니는 막대를 집어 공격 자세를 취했다. 막대를 검 마냥 휘둘러 가며 스턴트 배우들을 공격하자 역시 전문가들답게 몸을 날려가며 정말 싸움이 붙은 것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좋습니다! 본 촬영에서도 이 만큼만 합시다.”

모니터를 통해 마지막 리허설 장면을 체크한 김석형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는 만족한 얼굴이었다. 한녹영은 메이크업을 위해 차량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정지해가 한녹영의 손에 핫팩부터 쥐어주었다.

“오늘 날씨 짱 추운데, 고작 이거 입고 괜찮겠어? 거기다 물까지 맞아야 하잖아.”

오늘 한녹영의 촬영 의상은 청바지에 웨스턴부츠, 상의는 니트 위에 가죽 재킷이었다. 멋부림을 좋아하는 차도영의 캐릭터에 맞게 가져온 의상인데 1월 말의 맹추위를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다 물까지 맞아야 하니 벌써부터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느낌이지만 할 수 없다.

“NG 안 내고 한 번에 끝내야지 뭐.”

“그래. 잘 해. 히터 빵빵하게 틀어놓고, 담요랑 핫팩 잔뜩 들고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어, 한 방에 끝내고 올게.”

“응. 넌 잘할 거야. 아까 리허설 보니까 감이 좋더라.”

한녹영이 칭찬하는 정지해를 향해 잠시 웃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박상호도 “내 감도 좋아. 너무 긴장해서 실수만 하지 마.” 하고 한녹영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끝낸 후 옷을 갈아입고 미니밴에서 내리자 벌써 준비를 끝낸 다른 배우들이 보였다. 송정빈은 외모 따윈 관심 없는 열혈 형사이고, 스턴트들 역시 딱히 메이크업을 할 필요가 없어서 준비가 간단했던 것이다.

“한녹영, 혼자만 튀기 있어? 가뜩이나 얼굴로 내가 밀리는데 그렇게 차려입으니 완전 묻힐까봐 걱정이다.”

송정빈의 농에 한녹영이 짧게 웃었다.

“전 추워 죽겠습니다.”

“그래 보이긴 한다. 한 번에 끝내자. 오늘 춥다.”

몸을 움츠린 송정빈이 팔짝팔짝 뛰며 코를 훌쩍였다.

“네. 살수차 크기 보니 무서워서 절대 두 번은 못할 것 같으니 단 한 번에 끝내요.”

NG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석형이 “살수차 한 번 부르는데 돈 많이 듭니다. 우리 제작비 빠듯한 거 아시죠? NG없이 갑시다.” 라고 말하더니 자리에 앉아 큐 사인을 보냈다.

「굳이 휴일에 이런 음침한 폐공장으로 날 불러내야겠어? 내가 간만에 비번인 날 꽃다운 아가씨들 대신 우중충한 네 얼굴을 봐야겠냐?」

클럽을 가려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풀 세팅을 마친 차도영이 절 불러낸 성동주를 향해 짜증스레 말했다. 휴일에까지 나쁜놈들 잡는다고 쫓아다녀봤자 돈이 나오길 해, 누가 알아주길 해, 몸이나 축날 뿐인데 사명감에 사로잡혀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성동주가 한심했다.

「넌 경찰이라는 놈이 그 꼴이 뭐냐? 네가 압구정 날라리라도 되냐?」

성동주는 경찰이라는 놈이 모델마냥 멋을 잔뜩 부린 차림으로 나타난 차도영이 못마땅해 인상을 찌푸렸다. 지가 제비야 뭐야.

「내 꼴이 어때서? 너야말로 꼴이 그게 뭐냐? 네가 형사냐? 거지냐?」

때가 묻은 데다 무릎이 툭 튀어나온 청바지를 입고 그 위에는 후줄근한 점퍼라니. 차도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옷이야 아무려면 어때. 형사가 범인만 잘 잡으면 되지.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여기서 강지태를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거든.」

강지태는 마약밀매사범으로 성동주가 쫓는 마약왕 김형우의 오른팔이었던 자다. 김형우는 한국 최대 마약 거래 조직의 우두머리로 성동주의 원수이기도 했다. 하나뿐인 가족이던 누나가 김형우에게 납치되어 마약과다투여로 죽어버린 이후 경찰이 된 성동주의 일생일대 목표가 바로 제 손으로 김형우를 체포해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성동주가 막 경찰이 되었을 때만 해도 고작 조직의 중간책에 불과했던 김형우는 이제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거물이 되어 있었다.

「진짜 강지태야?」

성동주의 가족사를 알고 있는 차도영의 낯빛이 변했다. 아까의 건들건들하던 눈빛 또한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제보자 말로는 강지태라는데 확인해 봐야지. 요즘 강지태가 조직의 돈을 빼돌린 일이 들통 나 김형우의 눈밖에 났다고 하더라고.」

차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강지태가 요즘 잠수타 은둔 상태인 건 차도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거야 나도 알지. 근데 믿을 만한 제보야?」

「80퍼 이상은 사실이라 본다.」

80퍼센트 이상이라. 그럼 정말로 강지태가 저 음침한 공장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인데······.

「이 새끼야! 강지태가 저 혼자 숨어 있다가 나 잡아가쇼 하고 손 내밀리 없잖아. 분명 똘마니들이랑 같이 있을 텐데 이런 자리에 날 불러?!」

강지태는 그를 따르는 똘마니 대여섯이랑 같이 잠수를 탔다. 그러니 저 안에 강지태가 있다면 그들 역시 함께 있을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라는 뜻. 경찰이 들이닥쳐 체포할게, 한다고 네, 하며 쌍수 들고 환영할 종자들이 아니니 싸움은 필수였다.

「어이, 성동주. 너랑 나 친한 사이 아니거든? 잠깐 착각한 모양인데 너랑 나 되게 살벌한 사이거든?」

「누가 나랑 너랑 친하댔냐? 안 친하니까 불렀지. 친한 놈을 여기에 왜 불러.」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던 차도영이 이내 환하게 웃으며 「인정.」 하고 말했다. 친한 사이였다면 이런 위험한 자리에 절대 못 부르지. 암 그렇고말고.

조심스럽게 공장 근처로 진압하던 와중 성동주가 플라스틱 조각을 밟으며 파삭 소리가 났다. 그러자 안에서 「무슨 소리 안 났어? 나가봐?」 하는 말이 들려왔다. 강지태 똘마니의 목소리였다. 「고양이겠지. 아니면 들개거나.」 하고 중얼대며 심드렁하게 나왔던 똘마니1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짭새 떴다!!」

똘마니1이 소리 지르자 안에서 강지태와 나머지 똘마니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차도영이 아씨,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쪽수가 많다. 대여섯 명인줄 알았는데 총 9명이었다.

「공들여 세팅한 머리인데, 망가지겠네.」

차도영이 젤로 잘 빗어 넘긴 머리에 손가락을 넣어 흩트렸다. 그리곤 가죽재킷을 벗어 뒤로 던진 후ㅈ말했다.

「성동주. 나 여섯, 너 셋이다.」

「무슨 소리야? 나 다섯, 너 넷.」

성동주가 숫자를 정정해주었다.

「양심도 없는 새끼. 휴일에 불러냈으면 스트레스 정도는 다 풀고 가게 해줘야 할 거 아냐.」

「나 넷, 너 다섯. 대신 강지태는 내 거다.」

「콜!」

다섯 명이라. 누구부터 시작할까. 차도영이 황당해죽겠다는 듯 껄렁대며 이쪽을 보고 있는 똘마니 중 한 명을 향해 달려가 가슴 정중앙을 퍽 걷어찼을 때 시커멓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금세 젖었다. 머리카락이며 니트가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쯧. 혀를 찼을 때 똘마니2가 차도영에게 주먹을 날렸고, 차도영이 뒤로 비틀대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한 대 얻어맞은 후 피식 웃은 차도영이 주변에 굴러다니던 길쭉한 막대를 집었다. 그리곤 그걸 검처럼 휘두르며 똘마니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한참의 난투극 후 마지막 똘마니의 정강이를 막대로 쳐 풀썩 쓰러뜨린 차도영이 비에 푹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씩 웃었다. 때를 같이해 강지태를 제압한 성동주가 흡사 미친놈 보듯 차도영을 보며 말했다.

「아주 걸레를 만들어놨네. 미친놈. 가만 보면 너도 제정신은 아니야. 제정신이면 그 얼굴에, 그 학벌에,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자 주제에 말단 형사로

들어오진 않았을 테지. 넌 재미로 경찰하지?」

「경찰은 꼭 투철한 사명감이 있어야 하나. 재미로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늘 적당적당이냐? 적당히 범죄자들 봐주기도 하면서?」

성동주가 빈정댔고, 차도영은 코웃음을 쳤다.

「잔챙이들만 주구장창 잡아봤자 뭐하냐. 법에도 인정은 있다, 몰라? 큰놈만 안 봐주면 돼.」

큰놈들은 절대 봐줄 생각 없거든. 차도영이 싸늘하게 입끝을 올렸다.

“컷!!”

김석형이 벌떡 일어나며 컷을 외쳤다. 동시에 살수차가 꺼졌고, 정지해가 담요를 들고 구르듯이 달려왔다. 한녹영은 온몸에 담요를 뒤집어쓴 채 일단 김석형에게로 다가가 모니터를 보았다. 송정빈도 몸에 담요를 두른 채 다가와 신중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김석형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다시 찍어야 한다. 한녹영은 얼굴에 흐르는 물기를 연신 닦아내며 긴장감에 차 모니터를 확인했다. 막상 본 촬영에 들어가니 리허설 때보다 더 힘들었다. 물 때문에 바닥도 미끄러웠고, 추위에 입이 얼어 대사를 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리허설 때보다 몸이 좀 둔했던 것 같은데, 대사를 씹었으면 어쩌지.’

걱정하며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모니터를 끝까지 확인한 김석형이 돌연 씩 웃었다.

“한녹영씨. 비에 젖은 라인이 겁나 섹시한데요.”

“그러게. 얼굴 하얀 놈이 추워서 입술이 빨갛게 변해 있으니 겁나 섹시하더라. 하마터면 덮칠 뻔 했어.”

송정빈도 씩 웃으며 김석형의 말을 거들었다.

“연기는······ 괜찮습니까? 액션이 좀 어설퍼 보였을까요?”

제 눈에는 괜찮았는데, 스스로의 연기라 점수를 후하게 줘 괜찮아 보인 건가 싶어 긴장한 채 물었더니 김석형이 엄지를 척 들어보였다.

“리허설 때보다 더 좋았습니다. 비 때문에 움직임이 더 힘들었을 텐데 기대 이상이던데요. 표정도 아주 좋았고요. 건들거리고 사명감 따위 없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악을 미워하는 차도영의 내면이 잘 표현된 것 같습니다.”

김석형의 칭찬이 이어졌다.

“맞아요. 한녹영씨 차도영을 잘 이해하신 것 같아요.”

김현영도 웃으며 거들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한녹영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다행이고요. 사실 되게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긴장을 왜 해요? 이렇게 잘해낼 거면서. 자, 그럼 각자 늦은 점심 해결하고 잠깐 쉬었다가 다음 촬영장으로 이동합시다. 한녹영씨랑 송정빈씨는 어서 옷 갈아입으시고요. 감기 걸리면 큰일 납니다.”

송정빈이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미니밴으로 향하던 한녹영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한녹영, 너 진짜 연기 많이 늘었다. 리딩 때도 느꼈지만, 지난 드라마 때보다 몇 배는 나은데? 연기야 욕먹지 않을 만큼 적당히 했던 것 같은데, 오늘 나 좀 오싹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거 아닐까요? 농담이고요. 저 진짜 연습 많이 했거든요. 차도영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서요.”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틈이 날 때마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결과가 나와준 것 같아 뿌듯하다.

“훌륭해. 아주 멋지고 섹시하더라. 아무래도 이번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내가 너한테 밀릴 것 같단 말이야. 감이 불길해.”

칭찬인지 질투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으며 한녹영의 뒷머리를 문지르던 송정빈이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듯한 소리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강준일이 보였다. 한녹영도 아까의 송정빈처럼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강준일 무섭도록 싸늘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가 한녹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더니 다가왔다.

“두 분이 몹시 친한 모양입니다.”

그때까지도 한녹영의 어깨에 팔을 감고 있던 송정빈이 부랴부랴 떨어졌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강준일의 눈빛을 보는 순간 바로 한녹영에게서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쩐 일이세요?”

한녹영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첫 촬영을 위해 빌라를 떠나기 직전 강준일과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온다는 말이 없었다. 그저 ‘저 오늘 첫 촬영이에요.’

라고 하자 ‘잘 해.’ 라는 격려의 말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깜짝 방문이 싫진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쪽에 훨씬 더 가깝다. 스캔들이 터졌던 날 아침에 봤던 이후 첫 만남이었다. 간간히 통화는 했지만 외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경호원들 덕분에 빌라 가까이 오진 못해도 기자들이 멀찍이서 대기하던 중이라 강준일이 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며칠 만에 보는 그가 반가운 한편 왠지 쑥스러운 기분도 들었다.

‘한녹영씨. 일이 잠잠해지면 우리 데이트 할까?’

왜 하필이면 저 말이 떠오르는 걸까. 가끔 통화하면서 근황만 전했을 뿐이라 이후로는 데이트에 대해 말을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괜히 혼자 어색한 마음이 들며 안절부절못하겠다는 상태가 되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고 난리야.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한녹영이 자꾸만 빨리 뛰는 심장의 박동을 가라앉히리고 주먹을 쥐락펴락 하는 사이. 다시 한번 녹화 영상을 확인 중이던 김석형이 스태프 중 한 명의 언질에 부랴부랴 이쪽으로 달려왔다.

“대표님. 어쩐 일이십니까!”

“대망의 첫 촬영일이 아닙니까? 촬영장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해서 잠깐 들렀습니다. 듣자 하니 아직 점심 전이라고 하던데요.”

3시가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누구도 점심은 먹지 않은 상태였다.

“네. 리허설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점심을 놓쳤습니다. 이제 먹고 다음 촬영장으로 출발해야죠.”

“혹시 따로 식당을 예약해두셨거나 도시락을 먹는 것이 아니라면 제가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을 예약해뒀습니다. 배우분과 스태프분들 모두 거기서 식사를 하고 다음 촬영장으로 가시죠?”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강 대표님이 식당을 예약해두셨다니까 다 같이 가서 식사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합시다!”

김석형이 큰 소리로 외치자 뒷정리 중이던 스태프들이 가장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다들 적당히 김밥이나 빵으로 끼니를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식당을 예약해뒀다니 봉 잡은 기분이 든 것이다.

“송정빈씨도 옷 갈아입고 식당으로 가시죠. 주 메뉴가 만두전골인데 오늘 같은 날 잘 어울릴 겁니다.”

강준일이 적당히 예의를 차린 말투로 말했다.

“생각만 해도 군침 넘어가네요. 그럼 녹영아, 식당에서 보자.”

송정빈이 서둘러 제 차량으로 갔다. 그는 걸어가며 연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추운 날 물에 홀딱 짖은 상태라 뼛속까지 시렸다. 그건 한녹영도 만찬가지였다. 파랗게 얼어붙은 뺨을 보며 강준일이 쯧 혀를 찼다.

“옷부터 갈아입는 편이 좋겠어.”

“그,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요.”

입이 얼어서 이젠 말도 잘 안 나온다. 한녹영은 얼른 제 미니밴에 올라탄 후 옷을 벗었다. 손은 얼었지, 옷은 달라붙었지, 거기다 마음은 급하지. 그래서 옷이 잘 안 벗어진다. 혼자 막 짜증까지 내가며 힘겹게 옷을 벗은 후 준비해둔 수건으로 몸을 닦아냈다. 그리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밴에서 내려 강준일에게 다가가는데 정지해가 뒤에서 “녹영아, 머리 말려야지!” 하고 허둥지둥 말했다. 한녹영이 멈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급해서 머리카락 말리는 건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젖은 머리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강준일이 웃으며 다가왔다.

“뭐가 그리 급해?”

“대표님 기다리시니까······ 안 바쁘세요?”

“한녹영씨 머리 말리는 시간 정도는 기다릴 여유가 있으니 다녀와. 그러다 감기 걸리겠군.”

그제야 한녹영은 도로 밴에 올라탔다. 함께 탄 정지해가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뭐가 그렇게 급했어?” 하고 눈을 흘겼다.

“그러게 말이야. 머리카락이 젖은 건 까맣게 잊고 있었어.”

“아직 얼굴이 파랗게 얼었어. 손도 그렇고. 잠깐이라도 핫팩 쥐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한녹영이 핫팩을 양손에 쥐었다.

“누나, 서둘러줘.”

바깥에서 강준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도무지 차분해지지 않는다. 에휴, 하고 혀를 찬 정지해의 손길이 덩달아 다급해졌다.

“근데 상호 형은 어디 갔어?”

마음만 급해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다 이제야 박상호의 부재를 눈치 챈 한녹영이 의아하게 물었다. 장한수는 친구를 만난 후 다음 촬영장소로 바로 오겠다고 했고, 박상호는 어딜 갔기에 보이지 않는 거지? 한녹영이 촬영 중이면 늘 진지하게 지켜보던 사람인데?

“어라? 강 대표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양반은 못 되는지 한녹영이 박상호의 부재에 의문을 표하자마자 바깥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촬영이 궁금해 잠깐 들렀습니다.”

“녹영이는 어디에? 밴에 있습니까?”

곧 박상호가 밴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이거 보고 열 받아서 하영택이랑 좀 싸우고 왔어.”

박상호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시선을 내리니 한울에서 내보낸 기사가 보였다.

‘불화로 인해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는 항간의 설에 대해선 오해임을 밝힙니다. 한녹영씨와 우리 한울은 서로 원만한 합의 하에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으며, 최근 불거진 한녹영씨의 스캔들을 우리 한울에서 터뜨렸다는 식의 루머에 대해선 강경 대응할 것을······.’

마치 한울은 아무 잘못이 없으며 한녹영의 스캔들에 한울이 관련되어있다는 의혹은 전부 루머일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녹영은 분해서 씩씩대는 박상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회사에서 일부러 터뜨린 거라고 인정할 거라 생각했어? 이렇게 발뺌할 거라고 예상했잖아.”

“그래도 분하잖아. 하영택 이 새끼 오히려 큰소리치더라. 자기들 자꾸 음해하면 고소한다나. 나 참 어쩜 그리도 뻔뻔하지 몰라. 어이없는 건 한울을 편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회사에서 내놓은 말에 또 홀라당 넘어가 한녹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았다. 한녹영은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정지해의 블로그를 보고 여기 저기 퍼다 나르며 한녹영을 편드는 사람도 많았지만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눈을 흘긴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미운털을 콱 박은 사람들에겐 무슨 말도 통하지 않는다.

“더 열 받는 건 뭔지 알아?”

“뭔데?”

박상호가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탁 내뱉었다.

“신은주 작가 신작 제박발표회도 우리랑 같은 날로 잡았더라. 심지어 같은 시간대야.”

“그게 진짜야?!”

이번엔 한녹영의 목소리도 커졌다.

“어. 어떻게든 재를 뿌리고 말겠다는 의도가 빤하잖아. LK투자에 대한 기사 뜨자마자 주민성 확 띄워서 덮더니, 같은 날 제작발표회라니. 나 참. 누가 봐도 노린 거잖아. 일부러 제작발표회 빨리 잡았는데 따라하다니 악질이야. 거기다 그쪽이 일주일 빨리 방영되잖아. 시청자들 다 끌어갈까봐 걱정된다. 1, 2회가 잘 빠지면 뒤편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웬만하면 채널 안 돌리거든. 그리고 신은주 작가는 늘 1, 2회가 제일 재밌고.”

“괜찮아. 걱정하지 마. 우리가 달콤한 그대 시청자들 다 끌어오게 되어 있어.”

한녹영이 큰소리를 쳤다.

“네 말대로 되면 좋겠다만. 너 이번에 진짜 잘 돼야 해. 정말 다행이고 또 고맙게도 여론이 우리한테로 돌아서는 중이지만, 어쨌든 진흙탕 싸움은 승자도 흙탕물이 튀게 되어있어. 흙탕물이 좀 튀어도

상관없으려면 네가 거물 배우가 되는 수밖에 없고.”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머리카락이 적당히 마르자 “이제 됐어.” 하고 말한 한녹영이 부랴부랴 밴에서 내렸다. 완전하진 않지만 웬만큼 뽀송뽀송해진 한녹영을 보고 강준일이 꽤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님. 제가 한녹영씨 잠깐 빌려가야겠습니다만.”

“네?”

한녹영의 뒤를 따라 밴에서 내린 박상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보내죠. 식당에 가서 식사하십시오. 한녹영씨는 제가 직접 다음 촬영지로 데려다주겠습니다.”

박상호가 뭐라 대답할 사이도 없이 한녹영의 손을 잡은 강준일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는 한녹영을 조수석에 태운 후 운전석에 앉았다. 거의 납치당하는 수준이었다.

“직접 운전하고 오셨어요?”

얼결에 조수석에 탄 한녹영이 운전대를 잡는 강준일을 향해 물었다.

“깜짝 데이트를 할 건데 혹을 달고 올 순 없잖아.”

“네? 깜짝 뭐요?”

방금 뭐라고 한 거야?

“깜짝 데이트라고 했어. 데이트하자고 미리 예고했는데, 왜 처음 듣는 사람처럼 놀라는 거지?”

물론 강준일이 데이트하자고 했었고, 제가 그러자고 대답했고, 아까 강준일의 얼굴을 보자마자 데이트를 떠올렸지만······ 설마 정말로 데이트하자고 왔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이 마무리되면 하자고······.”

“데이트하자고 했던 말은 기억하고 있나보군.”

“당연하죠. 제가 바보인가요. 그런 것도 기억 못하게. 근데 진짜 오늘 데이트하러 오신 거예요? 저 6시까지는 두 번째 촬영장소로 가야해요.”

6시에 여주인공 정민아와 차도영, 성동주의 첫 만남 씬을 찍기 위해 파주 세트장으로 가야 한다. 이동시간을 고려해 4시 반에는 출발해야 하니 여유시간이 고작해야 1시간 반뿐인 것이다.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해본 한녹영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예고라도 좀 하고 오지. 그랬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든가. 아니면 오늘은 여유가 별로 없으니 다음에 정식으로 데이트하자고 하든가 했을 텐데. 고작해야 1시간 반이라니. 따지고 보면 저와 강준일의 정식 첫 데이트가 아닌가.

“혹시 나한테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싫은 거예요?”

생각할수록 심통이 난다. 한녹영이 부루퉁하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나 오늘 촬영이라 여유시간 별로 없는 거 알잖아요. 근데 데이트하자고 오셨다니 말만 데이트고 나한테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싫어서 일부러 이런 날을 택해서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강준일은 차를 세우며 까칠하게 가시를 세우고 있는 한녹영을 향해 웃었다.

“그 말은 꼭 나와 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서 서운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 그렇게 들렸다면······.”

“들렸다면?”

정색했던 한녹영이 슬쩍 뺨을 붉히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제대로 들으신 게 맞네요. 근데 나 혼자만 첫 데이트는 길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짧게 웃은 강준일이 손을 뻗어 한녹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 같은 동작이라 속으로 ‘내가 개야.’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쓰다듬는 손길이 따뜻해 밀어낼 마음은 안 들었다.

“아침에 잠깐 통화했더니 한녹영씨가 몹시 보고 싶어져서 충동적으로 온 거야. 그러니 얼굴 좀 보여주지 그래?”

보고 싶어져서 왔다니······. 약간 달아오른 수준이었던 얼굴이 삽시간에 확 붉어졌다. 양 뺨에서 뜨거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붉어진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고집스레 창밖만 응시하던 한녹영이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도 충동적으로 뭔가를 하기도 하나 봐요.”

“난 뭐 사람 아닌가. 일이 지루할 때도 있고, 충동적으로 뭔가를 할 때도 있어. 이렇게 보고 싶은 사람을 보러 달려오기도 하고. 보이지? 한 실장

난리난 거?

강준일이 주머니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휴대전화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녹영은 액정에 선명하게 찍힌 ‘한성준’이라는 이름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대표님이 모범을 보여야죠. 이런 식으로 도망치면 어떡해요?”

타박은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절 보려고 일까지 팽개친 채 왔다니 기분 나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나도 내 행동에 놀라는 중이야. 십대도 아닌데 보고 싶다는 이유로 여기까지 달려오다니. 하지만 애초에 내 계획대로라면 연휴 내내 한녹영씨와 데이트를 즐기다 연휴 마지막 날에 정식으로 프로프즈해서 오늘 아침에 내 침대에서 함께 눈을 떴어야 하거든. 물론 아주 황홀하고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후여야겠지. 그런데 충만한 마음으로 눈을 뜨기는커녕 기자들 등살에 얼굴조차 못 본 채 연휴를 흘려보냈으니 갑자기 화가 나더라고.”

느긋하게 이어진 말을 가만히 듣던 한녹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저 구체적이고 제멋대로인 계획은.

“전 대표님 계획에 동의한 적 없는데요? 누구 마음대로 황홀하고 뜨거운 하룻밤이에요?”

“난 뭔가를 할 때 무조건 성공을 전제에 두고 행하는 사람이거든.”

자신감을 넘어 오만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이럴 때 보면 대표님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아요?”

“내 앞에서 대놓고 재수 없다고 말한 사람 한녹영씨가 차음이야.”

“그래서 저한테 반하셨어요?”

“그런 모양이야. 얼굴만 취향인줄 알았는데 밤송이처럼 뾰족거리는 성격까지 딱 내 타입이라서.”

비슷한 대화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 김현영을 만났던 날이었던 것 같다. 강준일이 절 데려다준다고 했던 날. 그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대표님, 정말 저랑 연애할 생각이 있는 거예요?”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엔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확인 차 물어보았다. 차에서 내리려던 강준일이 도로 몸을 틀며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왜? 지금 내 말과 행동이 전부 장난 같아? 난 그리 한가한 사람이 못 된다고 말했을 텐데.”

“장난 같진 않은데······ 솔직히 왠지 현실 같지 않은 느낌은 있어요. 제가 대표님과 연애라니······ 비현실적이잖아요.”

“비현실적일 까닭이 어디 있어. 내가 괴물도 아닌데. 처음에는 장현재의 인형인 한녹영씨가 재수 없었고, 그 다음에는 홀로서기를 하는 모습이 기특했고, 그러다보니 좋아졌고, 좋아져서 함께 있고 싶고, 자고 싶어졌어. 한녹영씨는 어때? 한녹영씨도 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잖아.”

“그렇죠. 처음에는 되게 냉하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의지가 되고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해지기도 하고, 가끔씩 보고 싶고······.”

몸음 틀어 운전대에 기대다시피 한 자세로 한녹영을 응시하던 강준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뭐야, 꼭 사랑고백 같은 저 말은.

“그거 고백인가?”

“고백 아니거든요. 그냥 대표님에 대한 생각이 이만큼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는 거거든요.”

고백은 무슨. 얼굴이 벌게진 한녹영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어딘지도 모르고 차가 한참 서있기에 목적지인가 보다 하고 내렸는데 보니 식당 앞이었다. 예약해뒀다는 만두전골 집은 아니고 황토 유황오리 전문이라고 되어 있었다.

“들어가지. 전화로 예약해뒀으니 지금쯤 준비가 되었을 거야.”

뒤따라 내린 강준일이 한녹영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룸으로 안내해주었는데, 세팅이 완료된 상태였다. 곧 뜨거운 진흙덩어리 같은 것이 들어왔다. 주인이 테이블 위에서 망치로 딱딱해진 진흙을 깨뜨리자 안에서 노랗게 잘 익은 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맛있게 드십시오.”

주인이 룸을 나가자 강준일이 집게로 다리를 뜯어 한녹영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먹어봐. 맛이 나쁘진 않을 거야.”

진흙 갑옷을 입고 몇 시간 동안 구운 오리는 딱 봐도 보들보들하니 맛나 보였다. 배 안에 각종 약재를 넣어 먹는 순간 보약이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만두 먹는데 혼자 오리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한녹영이 젓가락을 들며 멋쩍게 중얼댔다.

“내게 특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메뉴가 같을 순 없지.”

“대표님 이제 보니 느끼한 말도 곧잘 하시네요.”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애하다 보면 알게 될 테지만, 이래봬도 내가 못하는 것이 없는 남자야. 한녹영씨는 봉 잡은 거라고.”

“이렇게 적극적인 분 인줄도 몰랐고요.”

“결정한 일에 머뭇거릴 필요는 없잖아. 망설임은 결정전에 한 것으로 충분해.”

“그, 그야 그렇죠.”

“그리고 난 워낙 양파 같은 남자라 아직 한녹영씨가 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을 거야. 그러니 사귀다보면 한 꺼풀씩 벗기는 재미가 있을 텐데, 그 재미를 놓칠 텐가?”

“아니요. 그럴 리가요.”

무심코 대답해놓고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놓았다. 망설임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지나치게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민망해진 한녹영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기를 뜯어 입안에 넣었다. 보들보들할 거란 예상 그대로 고기는 젓가락을 대자마자 스르르 풀리듯 떨어졌고, 입안에 넣자 스륵 녹듯이 부드럽게 씹혔다.

순간적으로 대답해놓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기를 먹는 한녹영을 보며 강준일이 소리 없이 웃었다. 고기가 마음에 드는지 웃는 얼굴로 조금씩 야무지게 먹는 모습이 귀여웠다. 여전히 많이 마른 편이라 좀 더 살이 찌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한녹영의 입으로 음식 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흐뭇하다.

“한울에서는 연락이 없나?”

강준일도 드디어 식사를 시작하며 물었다. 말한 대로 충동적으로 도피하듯 온 탓에 그 역시 아직 점심 전이었던 것이다.

“해명기사 낸 건 봤어요. 상호 형이 열 받아서 전화해 따졌더니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나오더라며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더라고요.”

“하영택이란 그자는 곧 기소될 거야.”

“네?”

“그자가 사인 위조해서 출연 계약한 웹 드라마 제작사에서 사문서 위조로 고소할 예정이거든.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그간 한울 소속 직원들 폭행 및 협박 금전을 갈취한 경우도 적지 않더군. 그들 중 현재 한울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찾아 설득 중이니 함께 고소가 들어갈 거야.”

하영택이 옛날 근성을 못 버려 직원들을 괴롭혔다는 사실은 한녹영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상호도 하영택이라면 이를 갈았던 것이고.

“웹 드라마 문제는 회사에서 해결한 걸로 아는데요?”

어떤 식으로 해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현재가 나서서 잡음이 없도록 조용히 처리한 것으로 안다.

“웹 드라마 최대 투자자였던 유통사를 움직였지. 그 드라마는 C 유통사에서 홍보 목적으로 만들려고 한 거야. 그래서 제작비용의 절반 이상을 대기로 했고. 유통사에서 제작사에 압박을 넣었고, 제작사 쪽에선 일개 기획사보다는 최대 광고주의 말을 듣는 편이 유리하니 하영택을 고소하기로 한 거지. 기소되고, 언론이 그 사실에 대해 보도하면 아직 남아있는 비난 여론 따위 좀 더 줄어들겠지.”

그리고 유통사를 움직인 사람은 강준일일 테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강준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감동했나? 키스라도 한 번 해주든가.”

“다, 다음에요.”

한녹영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진짜 해줄 생각이었나?”

진심이 섞여있긴 해도 반쯤은 장난 식으로 한 말인데? 그리고 ‘우리가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요.’ 하는 새침한 대꾸가 돌아올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의 대답에 강준일이 눈썹을 휘어 올렸다.

“지금 마늘 냄새 나요. 그러니까 다, 다음에······. 이제 고마움을 밥으로 살만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이 정도면 관계가 조금 발전했다고 봐도 되니까. 이제 통화 정도는 대단한 용건이 없어도 하는 사이니까. 그리고 데이트도 시작한 사이니까. 그저 밥을 같이 먹는 것뿐이지만 강준일이 깜짝 데이트라고 했으니 데이트지 뭐. 근데 우리라는 말이 왜 이렇게 기분 좋냐. 괜히 마음을 막 들뜨게 한다.

멋쩍어하며 괜히 죄 없는 고기만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대자 짧게 웃은 강준일이 물을 밀어주었다. 왠지 갈증 난 얼굴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군. 한녹영은 언제나 제 예상이 비껴가는 모습을 보이니 짜꾸만 끌리는 모양이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차라 한녹영은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닥한 후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한녹영씨 말대로 이제는 고마운 마음 정도는 몸으로 진하게 갚아도 되는 사이지. 우리가.”

강준일의 입가에 웃음이 맺혀 있었다.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은근슬쩍 앞서나가진 마시고요.”

몸으로 갚아준다는 말은 한마디도 한 적 없거든요. 이런 의미로 말하며 눈을 흘겼다. 그냥 몸도 아니고 뭐? 진하게? 새치름한 눈빛에 강준일이 아쉽게 되었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네 부모는 여전히 언론사들을 찔러대는 모양이던데. 아무리 네가 피해자라고 해도 부모가 자꾸 방송에 나오고, 널 비난하고, 진실을 호도하면 네가 불리해져. 좋은 일이라도 반복되면 지치는데, 하물며 집안싸움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부모님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 사실 문제 일으킬까봐 가족들 뒷조사를 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뒷조사까지, 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싶어 슬쩍 눈치를 살폈는데 강준일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뭘 좀 잡았나?”

“네. 쓸만한 게 몇 개 있대요. 제 로드 매니저 형이 뒷조사한 내용 받으러 갔어요.”

“다행이군. 가족들 일까지 내가 관여하긴 좀 그래서 오늘 의향을 물어본 후에 처리하려고 했거든. 아무리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 같은 가족들이라 해도 한녹영씨 핏줄을 함부로 손댈 순 없으니까.”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 라는 표현에서 약간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시선을 들었는데 강준일은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한녹영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제가 어리석었던 거죠.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해서 진짜 가족이 되는 건 아닌데, 바보처럼 굴었어요. 그래도 설마 설마 하는 심정이 있었나 봐요.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절 후레자식 취급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아버지와 새어머니 모습 보면서 좀 충격 받았거든요.”

장현재에게도 마찬가지다. 설마 여기까지 할까 생각했던 선을 가볍게 뛰어넘은 그를 보며 실망했고, 또 충격 받았다. 기대를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나 보았다.

“힘들었겠어.”

위로하는 말이 따뜻했다.

“사람 보는 눈이 참 없었던 것 같아요.”

가족들, 장현재. 모두 제게 보는 눈이 없어 저를 사랑하지 않는 존재들에게 매달렸다. 한녹영이 씁쓸하게 웃었고, 강준일이 그런 한녹영을 안쓰럽게 지켜봤다.

“많이 외로웠겠고.”

그래서 더더욱 장현재에게 집착하며 그의 착실한 인형 노릇을 했던 건가. 외롭고 힘들어서? 거만하고 못되게 구는 한편 장현재에게 사랑받고 싶어 매달렸던 한녹영 내면의 구멍을 비로소 들여다본 기분에 마음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강준일이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찼다. 예전 한녹영이 제게 접근했을 때 장현재의 인형이라는 이유로 싸늘하게 대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일찍 한녹영이라는 존재를 감싸 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늦은 후회가 들었다.

물론 설사 제가 그때 한녹영을 감싸 안았다한들 지금과 같은 마음이 되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과거를 고칠 순 없으니 그저 앞으로 더 이상 한녹영이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감싸줄 밖에. 강준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녹영을 보았다. 쓰게 웃는 한녹영을 보는데 왠지 그를 향한 마음이 한 치 정도 깊어진 기분이 들었다.

싫었고, 기특했고, 자고 싶어졌고, 소중해졌고, 이젠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지키고 싶어졌다. 한 사람을 두고 감정이 극에서 극으로 변한 것도 처음이고, 감정이 점점 깊어지는 것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것도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그저 취향의 얼굴을 가진 남의 인형이었던 사람이 제게 이토록 소중해질 줄이야. 다음에는 제게 또 어떤 감정을 안겨줄 건지 기대되는 마음도 든다. 강준일이 한녹영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한녹영씨한테 보는 눈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야.”

“네?”

“날 봤잖아. 앞으로도 날 제대로 보면 외로움 같은 건 느낄 겨를이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거거든. 내 생각으로 가득 차서 외로움 따윈 느낄 겨를이 없을 테니 기대해.”

“그러지 마세요.”

강준일의 눈동자에 가득한 온기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녹영이 돌연 푹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뭘?”

“심장이 무리 온다니까요. 이러다 제 심장 다 녹아 없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대표님이 다정하게 대해줄 때마다 아직은 많이 어색해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어딘가로 막 숨고 싶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강준일이 완벽하게 다정해지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본 적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구나.

“아무래도 한녹영씨는 면역력부터 키울 필요가 있겠어.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께서 이렇게 면역력이 없어서야.”

강준일이 혀를 끌끌 찼다. 팬들의 사랑이야 넘치도록 받았지만, 팬들과 강준일이 같을 순 없었다. 팬들과는 연애할 일이 없지 않나.

“식사부터 마저 하시고요, 노력해볼게요.”

한녹영이 날개 부분을 집게로 북 뜯어 강준일의 접시에 놓아주었다가 음, 하고 눈치를 슥 보고는 도로 큰 쟁반에 놓았다. 그리곤 대신 가슴살 부위를 집어 강준일의 접시에 놓았다. 날개 부위는 안 되지. 닭날개를 주면 바람피운다는 말도 있지 않나. 이건 닭이 아닌 오리이지만.

날개를 줬다가 도로 뺏어간 한녹영의 행동이 뭘 뜻하는 건지 알아챈 강준일이 입끝을 올리며 슬쩍 웃었다.

여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두 사람은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를 끝낸 후 식당 쪽에서 내어준 과일까지 먹고 나오니 딱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마침 박상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출발할 거야. 파주 세트장에서 봐.”

혹시 촬영 시간에 늦을까봐 체크하려고 전화를 걸어온 것 같았다. 박상호와 정지해도 이제 출발했고, 촬영팀 스태프들도 막 출발했단다.

“저 촬영장에 데려다주고 서울에 올라가면 늦은 저녁일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일 2배로 일하면 돼.”

“가뜩이나 일이 많아서 매일 바빠 보이시던데.”

“물론 바쁘지만 한동안 더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한녹영씨와 놀 시간을 만들려면.”

“응원할게요. 열심히 하세요.”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하라고 대꾸할 거라 생각했나.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한녹영을 보며 ‘역시 한녹영씨야.’ 하고 중얼거린 강준일이 짧게 웃었다. 한녹영은 멋쩍은 얼굴로 정면을 보며 앉았다. 저와 놀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놀 시간을 만들기 위해 바쁘게 일해야 한다면 해야지. 별 수 없었다.

“스케줄 비는 날은 없나?”

“2월 4일에 오전 촬영만 있어요.”

머릿속으로 가만히 스케줄을 체크해본 한녹영이 말했다.

“3일이 제작발표회지?”

“네. 신은주 작가님 신작 제작발표회도 우리와 같은 날 한대요.”

이미 들어 일고 있는 사실인지 강준일은 별반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핸들을 돌리며 강준일이 말했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어느 한쪽으로 더 몰리고, 덜 몰리고 하진 않을 거야. 다른 부 기자들까지 동원해서 양쪽 모두에 보내겠지. 당연히 한울과의 불화설과 이번 일에 대한 질문이 쏟아질 테니 마음이 단단히 먹도록 해.”

“저도 예상하고 있어요. 드라마 제작발표회에 개인적인 일로 질문이 쏟아질 일이 우려되어서 따로 기자회견을 할까 생각했는데, 제작사에서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일부러 노이즈 마케팅도 하는데, 뭐 어떠냐고 하면서요.”

아까 첫 번째 리허설 이후 잠깐 쉬는 동안 감독과 김현영 작가에게 가 조심스레 운을 떼어 봤더니 저런 답변이 돌아왔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송정빈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 네 덕분에 시청률 대박 나겠다며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나희연과 그 밖의 다른 중요 배우들에게도 따로 양해를 구하겠지만 분위기가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군. 그럼 제작발표회 잘 해내고 다음 날 나와의 정식 데이트 어때?”

“그······ 좋아요.”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라 강준일도 큰 부담이 없을 테니까. 여전히 제가 연예계의 핫이슈라 기자들 눈을 피해 강준일을 만나려면 거의 007 작전을 펼쳐야겠지만 왠지 가슴이 뛰었다. 가뜩이나 스폰으로 떴다는 둥 하는 루머가 판을 치는데, 더군다나 파파라치 수준의 기자들이 은근히 제 뒤를 쫓는 것 같던데, 이런 때 강준일과 사적으로 만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라도 했다간 그야말로 곤란해진다.

그야말로 한녹영 스폰설에 도장을 꽝 찍는 계기가 될 거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두근두근했다. 설레었다.

강준일은 한녹영을 촬영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내려준 후 떠났다. 아무래도 강준일이 세트장까지 데려다주는 모양새가 이상해보일 것 같아 파주로 향하던 중 박상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지점을 정해둔 탓에 강준일의 차에서 내리니 바로 대기 중인 미니밴이 보였다.

“뭐하고 온 거야?!”

차에 타자마자 박상호가 캐묻듯이 물었다. 정지해의 눈에도 호기심이 가득했다. 왜 안 그렇겠나. 느닷없이 나타난 강준일이 한녹영만 납치하듯 데리고 갔으니 말이다. 사실대로 깜짝 데이트······ 라고 할 순 없으니.

“웹 드라마 있잖아. 대표님이 웹 드라마 최대 광고주였던 유통사를 움직였나봐. 웹 드라마 제작사에서 사문서 위조로 하영택 고소할 거래. 그리고 하영택으로부터 괴롭힘 당하다 회사 관둔 사람들도 지금 설득 중인 모양이더라.”

“진짜야?!”

“응. 대표님이 그러시더라.”

“웹 드라마 쪽은 장 대표가 돈이든 뭐든 써서 해결했을 텐데, 아무리 장현재라도 강준일 대표한테는 안 되는구나. 그걸 공론화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찍 계약해지한 거지만 이런 마당에 약속이 무슨 소용 있겠냐. 그러니까 고소해해도 되는 거겠지?”

박상호가 입을 헤벌쭉 벌린 채 물었고, 정지해가 “어, 오빠, 맘껏 고소해해. 나도 지금 되게 고소해.” 하고 대답했다.

“하영택은 강준일 대표가 해결해줬고, 너희 가족 역시 곧 해결될 거고, 박지한 역시 역으로 뭇매 맞는 모양이고, 악플 단 네티즌들 고소하면 돈 받았다는 사실 밝혀질 거고······ 하나씩 정리가 되는구나.”

“그러네.”

“제작발표회 준비만 잘 하면 되겠다. 내가 기자들하고 연락해서 예상 질문지 다 뽑아뒀어. 거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테니 오늘밤부터 머리 맞대고 최상의 답변 생각해보자. 괜히 삐끗했다간 꼬투리 잡아서 또 막 씹어댈 기자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응.”

그 사이 세트장에 도착했다. 여기에 차도영과 성동주가 근무하는 경찰서 내부 세트장과 여주인공 정민아의 플라워 카페가 있다. 차에서 내 미리 와 대기하고 있던 장한수가 보였다. 장한수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겨드랑이 밑에 끼고 있다가 한녹영을 보곤 씩 웃었다.

“왔네.”

김상원이 한녹영의 등을 툭 쳤다. 한녹영은 서둘러 뒤돌아 그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첫 씬은 아주 완벽하게 끝냈다며? 김 감독 칭찬이 대단하더라.”

“완벽하게는 좀 오버인 것 같고요, 폐 안 끼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 때문에 시끄럽잖아요. 제작발표회 때도 좀 소란스러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선생님.”

“죄송은 무슨. 이참에 걸리적거리는 거 다 털고 가면 좋지. 난 처음에 네 기사 접하고 또 이런 음해성 스캔들로 아까운 배우 한 명 잃은 건 아닐까 했는데, 잃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훌훌 털고 일어나 연기에 집중하면 돼.”

“네. 선생님. 연기로는 드라마에 폐 끼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됐어. 연기하다 막하는 부분 있으면 나한테 오고. 난 NG 안나고 촬영이 빨리빨리 진행되면 그걸로 족해, 알지? 나 촬영 지연되는 걸 제일 싫어하는 거.”

한녹영이 네, 하며 웃었다. 김상원이 또 한 번 한녹영의 어깨를 두들기더니 김석형에게로 갔다. 전에 제가 거만했을 땐 ‘너 같은 놈은 배우 할 자격도 없다.’ 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아까운 배우’라고 불러주니 기분이 묘해졌다. 울컥하는 심정도 들었다.

이번엔 잘 해낼 수 있어. 절대 무너지지 않아.

주먹을 꾹 쥔 한녹영이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로 다가갔다.

☆☆★☆☆

한녹영과의 짧은 데이트를 즐기고 돌아오니 시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한성준이었다. 강준일은 단단히 벼른 채 저를 기다리고 있는 한성준을 지나쳐 성큼성큼 책상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일할 준비를 시작했다. 충동적으로 뛰쳐나가 즐기고 온 만큼 일을 해야 한다. 본래 유희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즐겁게 대가를 치를 생각인 강준일과는 달리 한성준의 표정은 삐딱했다.

“즐거우셨습니까?”

묻는 목소리가 까칠했다. 가시를 잔뜩 곤두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즐거웠지.”

“덕분에 저는 즐겁지 않습니다만. 야근 확정이군요.”

“한녹영씨 외가 쪽 아니, 한녹영씨 어머니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오후 내내 농땡이를 친 상사 덕분에 야근이 확정되어 얼굴 가득 짜증을 드러내고 있던 한성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지금 제게 예비 애인의 뒷조사를 의뢰한 겁니까?”

“그 예비 자는 빼고. 모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해와. 하나도 남김없이 샅샅이.”

이상한 명령이었다. 한녹영의 외가에 대해서라면 이미 예전에 조사해 올린 바가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다시 조사하라니, 그것도 모친을 콕 찍어 영혼까지 털어오라는 듯한 명령을 내리니 의아한 마음이 든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한성준이 물었다. 강준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옥가락지. 한녹영이 손에 꽉 쥐고 있던 옥가락지를 본 날부터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지만 어디서 봤는지 도통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해하던 중 오늘 불현듯 떠오르며 한녹영이 몹시 보고 싶어져 충동적으로 그를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기억이 희미해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있어. 그러니까 조사 시작해.”

“네. 알겠습니다.”

한성준이 고개를 숙였다.

☆☆★☆☆

차를 타고 발라를 빠져나오자마자 기자들이 앞을 막으며 연신 플래시를 터트렸다. 강준일이 보내준 경호원들이 한녹영의 차를 에워싸듯 다가오며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보려고 애쓰는 기자들을 막아냈다. 한녹영이 탄 차량은 경호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골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고 날 뻔 했네.”

어디서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건지, 주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기자 한 명이 차 앞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칠 뻔 했던 장한수가 이제야 긴장을

풀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차피 따라올 텐데 뭐. 경찰서에도 진을 치고 있을 테고. 분명 막 밀고들어올 테니 녹영이 잘 커버해야 해.”

박상호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빌라 앞에 있던 경호원들 중 한 명을 납치해올 걸 그랬나, 하고 중얼대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한녹영은 지금 경찰서로 가는 중이었다. 악플과 악의적인 게시글을 쓰고 퍼트린 네티즌들 중 가장 악질이라고 생각되는 열다섯 명을 1차로 고소했고, 경찰이 그들의 신분을 파악해 경찰서로 소환해 현재 조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래서 기자들이 난리였다.

“걱정하지 마. 기자들이 녹영이 머리털 한 올 건드리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장한수가 저만 믿으라며 큰소리를 텅텅 쳤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잔뜩 모여 대기 중인 기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한녹영의 차량을 보고 일제히 몰려들었다. 한녹영이 차에서 내리자 빌라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다행히 경찰들이 나와 경호하듯 방어막을 쳐준 탓에 기자들에게 오래 시달리지 않고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돈 준다고 해서 그만······.”

“형사 아저씨, 저 알바로 한 거거든요, 돈이 필요해서요.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씨.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럽니까?! 그냥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들 합성 좀 한 것 가지고.”

조사를 받으러 온 악플러들은 10대에서 4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십대로 보이는 학생도 있었고, 주부, 직장인등 직업도 다양해보였다. 제발 한 번만 봐달라며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도 큰소리 뻥뻥 치는 남자도 있었다.

하지만 연령과 직업을 떠나 얼굴만은 전부 참으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어디에서도 저를 향해 남창이니, 돼지니, 파렴치한이니, 후레자식이니 해가며 온갖 비난과 쌍욕을 해댄 악플러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울의 하영택으로부터 돈을 받고 의도적으로 악플을 달았다는 겁니까?!”

경찰이 큰소리를 내자 고소당한 악플러들이 “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댓글 하나 달 때마다 오천 원, 글 하나 올릴 때마다 만원 씩 준다는데 어떻게 안할 수가 있겠어요? 거기다 독하게 쓰면 쓸수록 돈을 더 준다고 했고요. 그냥 앉아서 키보드만 두들키면 되는 완전 꿀알바였다니까요.”

20대 초중반?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님지가 자기는 그저 돈에 눈이 멀어 그랬다면서 열변을 토했다. 주변의 악플러들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팬카페도 의도적으로 가입해서 여론몰이했고요? 이것도 인정합니까?!”

“네. 팬카페에도 가입하라고 해서······.”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 심한 욕과 비난을 해대다니 그게 사람으로서 할 짓입니까?”

“죄송합니다.”

“돈에 눈이 멀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형사님.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용서를 왜 나한테 빕니까? 그리고 이중영씨는 왜 그랬습니까? 이거 이중영씨가 한 짓이죠? 잘 빨아드립니다? 뭘 빨아줘? 나 참. 보니 이중영씨는 돈 받은 내역도 없던데, 왜 그랬어요?!”

어이없다는 경찰의 물음에 남자가 “전 그냥 다들 하니까 나도 재미로 해본 겁니다.” 라고 말했다. 그 순간 한녹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재미로 한 거라니. 돈 받고 비난한 사람들보다 더 악질이라고 해야 하나.

“나 참. 죄의식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네.”

박상호가 혀를 찼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어쩐 건지 뒤를 힐끔 돌아보고 한녹영이 온 것을 본 40대 주부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녹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박상호가 재빨리 앞을 막아섰다.

“뭡니까?!”

“한녹영씨, 죄송합니다. 한 번만 선처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어요. 내 딸이 한녹영씨 팬이에요. 제가 돈 받고 악플단 걸 알면 제 얼굴 보려고도 안 할 겁니다. 네? 한 번만 봐주세요.”

여자가 눈물을 쏟아내며 애원했다. 아예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딸이 팬인데 엄마란 사람이 돈 받고 그딴 글을 써 갈긴 겁니까?!”

박상호가 짜증을 내며 버럭 소리 질렀다. 그때 출입문 앞에서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기자들이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와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방송 카메라도 함께였다. 리포터가 경찰에게 “이 사람들이 한녹영씨에게 악플을 단 네티즌들입니까?” 하고 물었고, 다른 리포터는 한녹영에게 미이크를 대며 “한녹영씨 심정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악플러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기자들에 놀라 허둥지둥 얼굴을 숨기느라 바빴다.

“현재 조사 중인 악플러들 중 14명이 한울 기획사에서 돈을 받고 한 일이라고 진술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네. 진술도 있고 한울 기획사 관계자로부터 입금된 거래 내역도 확보한 상태입니다.”

경찰이 방송 카메라를 보며 또박또박 연기 톤으로 말했다. 말투는 어색했지만, 말투가 문제가 아니었다. 기자들이 웅성대며 휴대전화와 테블릿에 뭔가를 바쁘게 적어나기기 시작했다. 그간 카더라로 돌아다녔던 ‘한울 기획사가 의도적으로 한녹영을 음해했다.’는 설이 사실로 밝혀진 순간이니 당연히 움직임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는 합의나 고소 취하 생각이 없습니다. 저도 사람입니다. 상처받습니다. 공인이라서, 연예인이라서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겠지만 이번 일은 그 수위를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고소 취하나 합의에 대한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고, 한녹영이 대답했다. 박상호가 손목을 툭툭 쳤다. 이만 제작발표회장으로 가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녹은 경찰들에게 인사를 한 후 경찰서를 나왔다. 그리곤 곧장 제작발표회장으로 향했다.

도망자 제작발표회는 김석형의 모교인 K대학교 대강당을 빌려 하기로 했다. 달콤한 그대는 화려하게 호텔 대연회장을 빌려서 하는 모양이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최후에 웃는 자는 결국 도망자가 될 테니 말이다.

서둘러 K대학교로 향하자 대강당 근처에 가득 몰려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제작발표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대학생들과 팬들, 그리고 단순히 연예인이 온다니 구경 온 사람들이었다. 팬들이 한녹영을 향해 “오빠! 믿어요! 힘내요!” 하고 외쳤다. 그저 단순히 연예인 실물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최근 이슈가 된 스캔들을 떠올리고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녹영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우선 대기실로 직행했다. 방송국처럼 개인 대기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안으로 들어가니 주조연 배우들이 모두 보였다. 장한경도 있었다. 김상원 앞에서 완전히 쫄아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던 장한경이 벌떡 일어나 한녹영을 향해 다가왔다. 한녹영이 장한경을 향해 웃었다.

“경찰서 다녀오는 길이냐?”

송정빈이 휴대전화를 흔들며 물었다. 벌써 기사가 난 모양이었다.

“네, 바로 오는 길입니다.”

“악플러들이 한울에서 돈 받고 한 일이라고 말했다면서?”

“열다섯 명 고소했는데 그중 열넷이 알바로 한 거라고 하던데요.”

“나머지 한명은?”

“재미로 했대요.”

담담한 한녹영의 말에 송정빈이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사람 죽여놓고 재미로 그랬다고 할 놈이네.”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시작 전까지 십 분 남았죠? 전 메이크업 수정 좀 할게요.”

집에서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까지 전부 체크한 후 나왔지만 기자들과 사람들 사이에 치이느라 좀 망가진 상태였다. 정지해가 한녹영을 빈 의자에 앉히고 수정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싹 지워진 입술도 신짝 윤기가 돌도록 립글로스를 발라주었고, 헤어도 다시 정돈했다.

“누나. 한경이 메이크업도 좀 손봐줘.”

스스로 한 것 같지는 않고, 미용실 한다는 누나가 해준 듯 헤어며 메이크업이며 잘 된 편이지만, 그래도 한 번 손 볼 필요는 있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녹영 선배.”

“메이크업은 내가 수정해주는데 왜 녹영이한테 고맙대?”

정지해가 눈을 흘기자 장한경이 머쓱하게 머리를 문질렀다.

“고마워요. 누나.”

“자자, 이제 무대에 올라갈 시간입니다.”

김석형 감독이 흥분해서 말했다. 한녹영과 배우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켜 김석형 감독과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다. MC로 섭외된 개그맨이 감독과 작가, 그리고 배우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각자 맡은 배역에 대한 소개를 마친 후 기자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한녹영씨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요즘 연일 한녹영씨에 대한 문제로 연예계가 아주 뜨겁습니다. 전 소속사인 한울과의 불화로 인한 조작성 스캔들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실제 좀 전 한녹영씨가 고소한 네티즌들이 한울에서 돈을 받고 악플을 달았다고 밝혔고요. 가족사는 개인적인 문제이니 그렇다 쳐도······ 모 재벌 3세의 파티에서 찍힌 사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녹영씨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본 기자는 한녹영씨가 맞는다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만.”

보통 주연배우들에게 먼저 질문이 가는데 이번엔 예상대로 한녹영에 관한 질문이 가장 먼저 나왔다. MC가 마이크를 한녹영에게 건네주었다. 한녹영은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곤 대답 전 숨부터 크게 삼켰다.

“우선 드라마 제작발표회장에서 제 개인적인 일이 더 논의가 되는 것 같아 사죄말씀 드립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사진 속 인물은 제가 맞습니다.”

한바탕 술렁임이 일었다. 옆에 서 있던 송정빈이 한녹영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인정하면 어떡해?” 하고 속삭여왔다. 한녹영이 그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자의로 간 것이 아닙니다. 전 회사에서 스케줄이 변동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간 곳이 바로 그 문제의 파티장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계약에 묶여있던 상태라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파티인지 안 이후에 곧장 나왔고요. 호텔 쪽에 확인해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파티장에 머문 시간은 고작 30분도 안 됩니다. 제가 그 파티에 가서 얻은 먹은 거라곤 고작 위스키 한 잔이 다입니다.”

“한울에서 한녹영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파티장에 보냈다는 루머도 있던데요.”

또 다른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대한 진실은 한울만이 알겠죠.”

한녹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파티에 참석한 것이 사진에 찍힌 그 날뿐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미 이전에도 여러 번 참석해 이익을 얻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아까의 그 기자였다. 끈질기게 한녹영을 물고 늘어지겠다는 심보가 보였다.

“기자님은 항간에 떠도는 말처럼 제가 스폰으로 떴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으신 겁니까?”

대놓고 묻자 당황한 듯 보였던 기자가 이내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네. 한녹영씨가 무명시절 없이 바로 뜬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보통 그런 경우 스폰을 의심하죠.”

“기자님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전 스폰으로 뜬 것이 아니라 얼굴로 뜬 겁니다. 제 얼굴 보세요. 저 예쁘잖아요.”

한녹영이 자신만만하게 얼굴을 들었다. 내 얼굴을 보라는 듯, 당당한 말에 기자들이 웃음을 흘렸다. 무대에 선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기자의 집요한 질문에 긴장하고 있다가 피식거렸다. MC 역시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다가 잽싸게 끼어들더니 “한녹영씨 외모야 말할 것도 없죠. 사실 전 처음에 한녹영씨가 여성인 줄 알고 찾아가 프러포즈할 뻔 했습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어 또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리고 있던 한녹영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기자님도 아실 텐데요. 제가 화장품 CF로 확 떴다는 사실을요. 여자보다 예쁜 남자라는 말이 바로 그 CF 때문에 나왔고요. 그리고 그 화장품 CF는 광고주 쪽에서 먼저 컨택이 온 겁니다. 뮤비에서 악마 분장을 하고 나온 제가 예뻐서 광고에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 보였다면서요. 남자가 여성 화장품 광고라니, 기막힌 역발상이라고 자화자찬했던 광고주의 말을 아직 기억합니다. 이 역시 확인이 가능할 겁니다.”

지금은 남자 아이돌 그룹으로 모델이 교체되었지만 광고주의 직접 컨택으로 한녹영이 모델이 된 건 사실이었다. 화장품 CF를 촬영했던 감독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 한녹영을 보곤 단숨에 반해 감탄했었다.

“박지현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래 차도영은 박지한씨로 거의 확정 상태였다고 아는데요.”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김현영 작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옆에 있던 나희연이 김현영에게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작가인 제가 하겠습니다. 박지한씨가 차도영 역의 물망에 오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차도영은 한녹영씨한테 더 어울릴 거라 생각해 최종 결정한 겁니다. 애초에 제가 한녹영씨를 염두에 두고 차도영이란 캐릭터를 설정했으니까요. 드라마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차도영이 곧 한녹영씨입니다. 그런데 한녹영씨가 박지한씨로부터 강제로 역을 강탈해왔다는 둥, 로비를 통해 역을 얻어냈다는 둥 하는 루머는 사실무근입니다! 로비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한녹영씨한테 신은주 선배님 드라마 주연 제의도 간 것으로 아는데, 뭐하러 로비까지 해가며 누가 봐도 밀리는 제 드라마에 그것도 주조연급으로 들어오려고 했겠어요?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숫제 싸우자는 투였다. 김현영이 자꾸만 한녹영을 공격했던 기자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씩씩 내뱉었다. 으슥한 밤 돌맹이로 기자의 뒤통수를 내리치고 싶다는 듯 눈빛이 형형했다. 신인이라 그런지 얌전하게 “김현영입니다.” 하고 간신히 이름만 밝혔던 작가가 버럭 화를 낼 줄은 몰랐던 건지 기자가 당황한 것이 보였다.

한녹영이 김현영을 보았다. 기자를 노려보며 흥흥대고 있던 김현영이 한녹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수줍게 배시시 웃었다. 한녹영 역시 그녀를 향해 슬쩍 미소지어 주었다.

“차도영은 결국 사랑하는 여자인 나희연씨에게 고백 한 번 못해보고 홀로 가슴앓이를 하는 역이라고 하셨는데요. 한녹영씨가 드라마에서 차인 건 처음이 아닙니까?”

기자 한 명이 잽싸게 질문을 던졌다. 드디어 드라마에 관한 질문이 들어와 다행이었다.

“차였다는 표현은 부적절한데요. 애초에 고백조차 못하니까요. 그러니까 드라마 상에서 제 연애는 여전히 성공률 백 퍼센트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상에서는 불패 신화를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성공률이 어느 정도 됩니까?”

기자가 떠보듯 물었다.

“참패입니다.”

한녹영이 한숨을 푹 쉬며 절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네? 그게 무슨?”

“전 아직 연애 경험이 없거든요. 이 나이까지 연애 한 번 못한 모태솔로라 외롭습니다.”

“우리 녹영이 외로웠구나. 형하고 사귈래?”

송정빈이 농담을 던졌고, 대강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정빈 선배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와아, 나 지금 까인 거야? 안 되겠다. 나희연씨한테 위로받아야지.”

송정빈이 나희연을 향해 윙크를 날렸고, 나희연이 새침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거절할게요. 전 꿩 대신 닭은 싫거든요.”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희연씨, 우리 드라마에서 뜨겁게 사랑할 사이잖아. 잊었어요?”

“큐 사인 들어오면 그땐 다정하게 봐드릴게요.”

“동시에 후배 두 명에게 차이다니. 이거 내가 드라마 계를 너무 오래 떠나있었나 봅니다.”

송정빈은 자연스레 흐름을 제 쪽으로 끌고 갔다. 그의 엄살에 웃음을 흘린 기자들이 송정빈에게 질문을 던졌다.

“불행한 사건 이후 한동안 방송계를 떠났다가 오랜만의 컴백인데 심정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드라마에 좋은 역으로 컴백할 수 있게 되어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후에도 드라마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첫 액션 도전인데 어떠냐, 배우들과의 사이는 원만하냐, 출연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냐, 등등 예상했던 질문들이 이어졌고, 한녹영과 배우들은 미리 준비해둔 대로 무난한 답변을 했다. 장한경에게도 질문이 갔다. 바짝 얼어있던 장한경은 기자의 질문에 허둥지둥 하며 마이크를 건내받다가 떨어뜨리는 실수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제작발표회는 처음이라 긴장해서······ 차철호입니다. 아니 장한경입니다. 근데 질문이 뭐였죠?”

신인다운 풋풋한 태도에 장한경에게 질문한 기자가 웃었다. 다른 기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목각인형처럼 서 있어서 별로 주목을 못 받았는데, 오히려 좀 전의 실수가 전화위복이 된 듯했다. 아마 장한경에 관한 기사가 서너 개는 뜰 것 같았다.

다른 기자가 손을 들고 김석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LK가 도망자의 가장 큰 투자자이지 않습니까? 사실 모두 의아해하고 있을 겁니다. 왜 하필이면 첫 투자 대상으로 도망자를 선택했을까 하고요?”

“탄탄한 대본과 감독인 제 역량, 그리고 여기 계신 배우 분들의 완벽한 연기력을 믿고 투자한 겁니다. 방송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연출, 각본, 연기 어느 하나 떨어지는 구석이 없는 명품드라마가 될 거라고 자신합니다.”

“신은주 작가의 신작인 달콤한 그대와 같은 시간대에 편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한 부담감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우리 드라마의 시청률이 더 잘나올 거라 믿습니다.”

김석형이 오만하게 보일 만큼 당당하게 대답했다.

제작발표화가 끝난 후 배우들은 각자의 차량을 타고 파주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첫 방영일까지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방송 전에 가능한 한 씬이라도 더 찍어두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방송 시간에 쫓겨 허덕이며 촬영하는 일이 없어진다.

“어라? 박지한이 달콤한 그대에 출연하네?”

이동 중 휴대전화로 좀 전 제작발표회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던 박상호가 기막혀 죽겠다는 투로 말했다. 목베개를 두른 채 뒤로 푹 기대고 있던 한녹영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진짜야?”

제가 과거로 돌아오며 변한 일들이 많긴 하지만, 박지한이 달콤한 그대에 캐스팅되었다니 놀라웠다. 어이없어 하며 기사를 찾아보니 진짜다.

‘배우 한녹영에게 도망자의 차도영 역을 뺏겼다고 주장한 박지한 달콤한 그대에 캐스팅.’

‘한녹영 대신 한울과 한솥밥을 먹게 된 박지한 달콤한 그대 제작발표회장에 모습 드러내·······.’

‘박지한 한녹영과 관련된 루머에는 침묵······.’

등등의 기사들이 보였다.

“나 참. 널 그렇게 매도하더니 낯짝 뻔뻔한 것 좀 봐. 웃고 있다.”

“그럼 제작발표회장에 나와서 울어?”

한녹영이 열 내는 박상호를 향해 피식 웃어보였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손 흔드는 사진을 보니 한녹영도 열이 뻗쳤지만 ‘어차피 망할 드라마인데.’ 하며 위안했다.

“미안한 기색이라도 보여야 한다는 거지. 큰 역은 아닌 모양이지만, 어쨌든 원하는 대로 배역을 얻긴 했네.”

박지한이 캐스팅 된 역은 달콤한 그대의 주인공 선배 역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역이라 원래라면 박지한에 관한 단독 기사가 날 일이 없었을 텐데, 한녹영과 관련된 일로 단독 기사가 꽤 여러 건 올라와 있었다. 한녹영이 입매를 비틀었다. 어쨌든 박지한이라는 이름을 사람들 뇌리에 콱콱 새기는 계기는 되었겠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크겠지만 연예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내친 김에 한녹영이 달콤한 그대 제작발표회에 관한 기사를 더 찾아보았다. 다른 배우는 예전 제가 달콤한 그대의 주연을 맡았을 때와 같고, 주민성과 박지한만이 달랐다.

‘로맨틱 코미디의 최강자 신은주 작가의 달콤한 그대 주연으로 신예 주민성 발탁.’

‘주민성, 여심 흔들까?’

‘도망자에 대해선 최대한 말을 아끼며 선의의 경쟁을 할 거라고······.’

‘신은주 작가 후배 김현영 작가에 대해 능력 있는 후배라고 칭찬.’

대체로 기사가 좋았다. 도망자에 대해서도 기사가 속속 올라오는 중이었다. 포털에 한녹영이라고 제 이름을 치자 제작발표회장에서 했던 인터뷰뿐만 아니라 고소한 악플러들에 대한 기사가 우르르 떴다.

‘한녹영 악플러들 고소하다.’

‘한녹영에게 고소당한 악플러들 한울로부터 돈 받고 악플과 비난 글 올렸다고 진술.’

‘한녹영 전 기획사 한울, 돈으로 네티즌들 고용해 의도적으로 한녹영 음해.’

‘실체가 드러난 한녹영 음해설.’

‘경찰 곧 한울 관계자 소환해 조사 예정.’

‘한녹영 사진 속 남자는 본인이라 인정.’

‘한녹영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 속 남자는 본인이 맞지만, 기획사의 강요로 참석했을 뿐이라고 주장.’

아까 한녹영을 물고 늘어졌던 기자가 썼을 법한 제목도 보였지만 대체적으로는 한녹영에게 우호적으로 쓴 기사들이 많았다.

‘한녹영 본인이 예쁜 얼굴로 떴다고 말해 한바탕 웃음.’

예쁜 얼굴로 떴다고 한 말을 기사화한 기자도 있었다. 아까는 거리낄 것이 조금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는데 이제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민망해진 한녹영이 머뭇거리다 기사를 클릭했다.

한녹영이 예쁘긴 하지, 좆나 꼴리는 얼굴, 녹영이 옆선 섹시 예술, 난 남자지만 한녹영 꼴린다, 녹영이 오빠 예뻐요, 남자가 예뻐서 뭐해, 등등 속으로 떨면서 댓글을 봤는데 생각보다는 우호적인 내용이 많았다.

“넌 뭘 보고 웃고 있어?”

한녹영의 미니밴에 함께 탄 장한경이 홀로 웃고 있는 걸 본 박상호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장한경은 휴대전화를 내리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제작발표회장에서 찍힌 제 사진이랑 기사 보니까 좀 신기해서요. 녹영 선배 마음 안 좋으실 텐데 눈치 없이 죄송합니다.”

신기한 마음에 몰래몰래 포털에 제 이름을 쳐보고 히죽히죽 웃었던 장한경이 입술을 깨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가 죄송해. 계속 찾아봐. 괜찮아. 언제까지 내 일로 눈치 볼 필요 없어. 그리고 신기해하는 마음 이해해. 나도 신인 때 그랬거든.”

포털에 이름을 치니 제 사진과 기사가 뜨는 걸 보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저에 관해 새로 뜬 기사가 있는지 찾아보곤 했으니까.

“기분이 되게 묘해요.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요.”

“사진 잘 나왔네.”

단독 사진은 한 장도 없지만 장한경을 중심에 두고 찍은 사진이 두어 장 있어서 봤더니 잘 나왔다. 약간 어색해하는 표정이 풋풋해 보여 좋았다. 칭찬에 머쓱해하던 장한경이 주민성 기사를 보고 말했다.

“주민성이라는 이 친구는 나랑 동갑이네요.”

“동갑이고, 둘 다 신인인데 그쪽은 나오자마자 주연이고, 넌 아니라서 좀 그렇지?”

박상호가 떠보듯 묻자 장한경이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전 주연 욕심 크게 없어요. 꾸준히 연기만 할 수 있으면 돼요.”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사실 장한경은 엄청난 톱스타가 되어 큰 주목을 받는 배우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연기만 할 수 있으면 족했다.

“그래.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는 것도 좋을 거야. 한 몇 년 후에 주민성이라는 이 친구와 네 입장이 바뀌어있을지 어떻게 알아?”

박상호가 꾸준히 단계를 밟고 올라가다보면 언젠가는 너도 톱스타가 되어 있을 거라며 장한경의 어깨를 두들겼다.

“맞아. 상호 형 말대로 언젠가는 톱스타가 될 거야. 물론 내가 더 톱스타가 될 테지만.”

장한경에게 희망을 주는 한편 그래도 ‘내가 더 잘났어.’ 라듯 말하자 박상호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지해도 마찬가지였다.

“참, 팬카페 운영자한테 연락해서 유난히 분탕질 친 사람들 한울에서 돈 받은 사람들이니 강퇴시키라고 전했다. 일부러 분탕질치려고 가입한 사람들이라고 하니 운영자가 입에 거품을 물더라.”

박상호의 말이었다. 한녹영이 그를 보았다.

“그래?”

“너 요새 팬카페 안 들어가 봤지?”

한녹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팬카페에서 절 비난하니 다른 데서 비난하는 글을 봤을 때보다 몇 배는 아픈 느낌이라 첫 날 이후로 아예 접속 자체를 안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이 돈을 받고 한 일이란 사실을 아는데도 왠지 접속이 두려웠다.

“요샌 너 비난하는 글 올라오면 팬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분탕질은 다른데 가서 하라고 난리야.”

“가장 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저희 누나일 거예요.”

장한경이 머쓱하게 말했다.

“뭐? 진짜야?”

박상호가 물었다.

“네. 요즘 누나 전투력 만렙이거든요. 틈만 나면 팬카페에 접속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녹영 선배 헐뜯는 글이 올라오면 완전 쌈꾼으로 빙의해서 전투적으로 댓글 달더라고요. 나중에 나한테 안티 생겨도 저렇게 해줄까 싶을 정도로 열성적이에요. 누나가 녹영 선배한테 힘내라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누나뿐만 아니라 팬들은 무조건 녹영 선배 믿는다고요.”

한녹영이 울컥한 눈으로 장한경을 보며 “내가 몹시 고마워하더라고 전해줘.” 라고 말했다. 장한경 누나까지 알게 모르게 절 도와주고 있었다니 정말 기분이 말도 못하게 이상했다. 전에는 증오하며 황산을 던졌는데, 이젠 고마워하며 절 위해 싸워주고 있다니 정말······.

나 정말 이번 삶은 제대로 살고 있구나. 목구멍 안쪽이 뜨거워졌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리자 박상호가 그런 한녹영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등을 두들겨 주었다.

한녹영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세트장에 도착했다. 스태프들 대부분이 제작발표회장에 오지 않고 파주에서 활영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세트장은 당장 촬영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준비가 된 상태였다. 한녹영이 밴에서 내리자 한 5분 정도 먼저 도착한 상태였던 김석형이 “한녹영씨, 서둘러 촬영 준비 해주세요!” 하고 말했다. 한녹영은 서둘러 메이크업과 머리를 매만진 후 옷을 갈아입었다.

뒤이어 도착한 송정빈과 나희연도 서둘러 촬영 준비를 끝냈다. 오늘 촬영은 플라워카페를 하는 플로리스트 정민아에게 반한 차도영이 꽃을 산다는 핑계로 카페에 들렀다가 성동주와 정민아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상처받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차철호가 첫 등장한다.

배우들 준비가 끝나자 곧 촬영에 들어갔다. 오늘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차도영이 카페 안으로 들어서려다 멈칫하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차도영이 꽃을 다듬는 정민아 앞에 앉아 웃고 있는 성동주를 발견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어색함이 남아있지만, 그 어색함 속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묘한 기류가 있었다. 분명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 그걸 예민하게 캐치해낸 차도영의 눈빛이 서서히 식었다. 차도영에게는 늘 사이에 벽을 두고 얘기했던 정민아였다. 그런데 성동주를 향한 얼굴에는 그 어떤 벽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성동주는 다르다는 건가?’

차도영의 주먹이 서서히 쥐어졌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동공이 흔들렸다. 늘 웃음을 잃지 않던 얼굴이 깨진 거울 같아졌다.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때 마침 지나가다 차도영을 발견한 차철호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도영 선배!」

차철호의 목소리에 성동주와 정민아가 입구를 돌아보았다. 차도영이 다시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컷! 한녹영씨 표정 좋았어! 다시 한 번 갑시다!”

김석형은 멀리서 잡기도 하고, 타이트하게 잡기도 하며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었다. 한녹영은 여러 번 반복되는 촬영에도 NG 한 번 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송정빈 또한 마찬가지였고, 장한경도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자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차분하게 연기했다. 네 사람 중 가장 NG를 많이 낸 사람은 나희연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또 대사를 씹어서 NG를 낸 나희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나희연씨, 차분하게 합시다.”

김석형이 다독이는 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5분만 쉬어요. 저 잠깐 마인드컨트롤 좀 하고 올게요.”

나희연이 대본을 들고 세트장을 나갔다.

“아마 화장실에서 자학하고 있을 거야.”

송정빈이 말했다. 한녹영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유명해. 대사 씹거나 NG 많이 낼 때마다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자학하기로. 썅년, 모자란 년 하면서 스스로를 향해 막 욕한대.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 NG없이 단번에 오케이 받아낸다더라고. 넌 NG 많이 나는 날 기분 전환하는 방법 있냐? 난 유난히도 연기가 안 되는 날에는 한바탕 소리 지르고 나면 괜찮아지더라고.”

“전 아직 심각하게 연기가 안 된 적은 없었어요.”

NG야 당연히 냈고, 대사도 자주 씹었지만 ‘오늘 진짜 연기 안 된다.’고 생각된 적은 없었다. 예전 달콤한 그대의 주연을 맡았을 때 후반부로 갈수록 시청률 뚝뚝 떨어져, 대본은 개판에, 감독과 다른 배우들마저 열의를 잃어 한녹영 또한 건성건성 연기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때 개판이었던 대본이 지금이라고 확 좋아졌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주민성 주연의 달콤한 그대는 어떨지.

“너 방금 그 말 되게 재수 없게 들렸다.”

송정빈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재수 없다는 듯 한녹영을 보았고, 한녹영은 멋쩍게 웃었다.

“초짜 너는 아직 그런 적 없을 테고. 생각보다 안정되게 연기 잘 하더라.”

송정빈이 장한경을 돌아보았다.

“응. 괜찮았어.”

한녹영도 인정했다. 박상호도 인정했고, 김현영도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니 사람이 달라지더라, 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대본리딩 할 때도 느꼈지만, 연기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한녹영이 보기에도 장한경은 누구나 인정하는 연기파 배우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 그때 마음을 다잡은 나희연이 돌아오며 “준비 됐어요. 감독님.” 하고 다부진 눈매로 말했다.

“자자, 다시 갑시다!”

김석형이 외쳤다.

경찰서 내부 세트장에서의 씬 까지 촬영한 후 정지해와 장한경을 데려다준 후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 반이었다. 녹초가 되어 밴에 거의 실려 오는 동안 잠깐 뻗어 잔 탓에 빌라에 도착하니 그럭저럭 버틸 만 한 상태였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안마 의자에 앉아 거의 녹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상호가 보였다. 그 역시 꽤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내일 오전 촬영 대본을 펼쳤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한녹영의 휴대전화였다. 액정을 보니 번호만 떠 있고 이름은 없어서 의아해하며 받았다.

“한녹영입니다.”

ㅡ 너지?!! 네가 한 짓이지?!!

김영숙이었다. 번호를 어떻게 알아낸 건지 김영숙이 악에 차 소리를 질러댔다.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 쯧 혀를 찬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서론본론 다 잘라먹고 다짜고짜 무슨 말이에요? 알아듣게 말해요.”

ㅡ 네 놈이 네 애비한테 사진 보낸 거잖아!

“사진? 아아. 새엄마가 젊은 놈들이랑 뒤엉켜있는 추접한 사진이요? 혹시 아버지가 새엄마 얼굴 못 알아볼까봐 아주 크게 확대해서 보내드렸는데, 잘 감상 하셨대요?”

불륜 전문이라더니 장한수의 친구는 사진을 아주 예술적으로 찍었다. 젊은 놈 아래에 깔려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인내심이 우주 최강인 남자가 봤어도 눈이 확 돌아버릴 만한 사진이었다. 그리고 한녹영의 아버지 한만식은 인내심이 별로 없는 성격이고,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질투심도 꽤 심했다. 어머니가 액받이 무당 노릇을 위해 외출했다가 좀 늦게 돌아온 날이면 ‘이 시간까지 언놈이랑 뒹굴다 온 거야?!! 딴놈이랑 얼마나 씹질을 해댔길래 녹초가 되어 왔어?!’ 하고 동네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고, 손찌검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께 본인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돈 때문이었을까? 남의 불행과 고통을 대신 받아내는 일을 했으면서 돈 한푼 받지 않은 걸로 아는데, 만약 아버지가 어머니의 일을 알았더라면 득달같이 따라와 돈을 뜯어내려 했을 테니까.

외조모와는 달리 과거의 업을 갚기 위한 거라 돈으로 대가를 받아선 안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ㅡ 이 쌍놈의 새끼!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네 애비한테 그딴 사진을 보내! 내가 네 애비한테 머리채 잡혀서 개처럼 끌려 다니며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알아?! 내가 네 애비 고소할 거야!

김영숙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에 박상호가 안마를 하다말고 달려왔다. 그리곤 한녹영을 향해 “등기 잘 받았나 보네.” 하고 말했다.

“그런 모양이야.”

부인의 불륜 사진을 등기로 받아본 한만식은 예상대로 눈이 돌아 김영숙을 모질게 팬 모양었다. 김영숙이 “내가 개처럼 쳐맞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아?!” 하고 악을 썼다.

“두 분 문제는 두 분이 알아서 하세요.”

더 이상 김영숙의 악쓰는 소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한녹영은 전화를 뚝 끊어버린 후 액정에 뜬 번호는 차단했다. 번호를 바꾼 건지, 누구 전화를 빌려서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또 한 번 같은 번호로 전화가 올 가능성이 있으니 차단이 답이었다.

“진짜 고소라도 할 기세인데. 솔직히 네 새어머니 성질도 보통은 아니잖아. 근데 네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둘이 싸우느라 한동안 내 문제로 여기저기 찔러대진 못할 테니 다행이지 뭐. 화해하기 전에 아버진 사기죄로 집어넣으면 돼.”

장한수의 친구가 조사해온 것 중에 한만식이 한녹영의 친부임을 내세워 기획사를 차린다며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온 내용이 있었다. 기획사는 무슨. 한녹영이 돈을 주지 않자 급한 마음에 거짓으로 사업계획서랍시고 만들어 돈을 꾼 모양인데, 갚지 않으면 사기였다. 한만식이 사기죄로 구속되면 불륜으로 최악의 사이가 된 김영숙과도 자연스레 결별할 것 같으니 가족 문제는 웬만큼 해결될 것 같았다.

물론 아버지가 구속되면 아들이 되어 대신 돈을 갚아주지 않는다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모질다며 손가락잘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 어느 정도 잡음이야 있겠지만 이미 청정구역처럼 깨끗했던 제 이미지에 금이 간 상태다. 괜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돈을 갚아줬다가 다시 두고두고 호구 잡힐 순 없었다. 한만식에겐 절대 ‘이번이 마지막이야.’ 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난 그만 들어가서 잘게.”

“그래, 얼른 들어가서 자라. 내일 오전에도 촬영 있잖아.”

“응. 형도 잘 자.”

“녹영아.”

“응?”

박상호가 불러서 돌아보니 입술을 핥으며 머뭇대는 모습을 보인다. 한녹영이 웃으며 “왜?” 하고 부른 이유를 재촉했다.

“부모와의 인연을 끊으려니 마음이 안 좋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평생 호구 잡혀서 살 순 없잖아. 네 부모가 정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널 설득해서 그냥저냥 돈 주고 맘 편히 살자 라고 했을 텐데,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들이잖아. 그냥 뒀다간 분명 나중에 너한테 더 큰 화를 끼칠 사람들이니까 마음 모질게 먹어. 독해질 거라면서.”

한녹영이 눈을 깜박였다. 왜 저런 말을 하나 했더니 제 표정이 안 좋아서 지레 짐작으로 ‘혹시 아버지를 사기죄로 감방에 넣으려니 괴로운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속이 시원하진 않다. 후련해서 미칠 것 같은 심정은 아니었다. 씁쓸한 마음이 있지만, 기분이 가라앉은 건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이었다. 문득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에.

“응. 나도 알아. 맘 독하게 먹고 있어. 잘 자 형.”

한녹영은 ‘사실은 엄마 때문에 그래.’ 라는 말 대신 저렇게 말한 후 침실로 들어섰다. 그리곤 침대에 앉아 협탁 위에 둔 가락지를 들어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새삼 어머니가 그리워지며 마음이 어지러워지자 마치 본능처럼 강준일이 떠올랐다. 냉랭한 것 같으면서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울림을 가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은데. 하지만 시간

이 너무 늦었다.

그래서 휴대전화를 든 채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움찔하며 액정을 내려다본 한녹영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강준일이었다.

“한녹영입니다.”

ㅡ 촬영은 잘 끝냈나?

“네. 좀 전에 들어왔어요. 대표님은 집인가요?”

ㅡ 나도 조금 전에 들어와서 이제 막 씻은 후 한녹영씨에게 전화하는 중이지. 기사 보니 오늘 제작발표하는 잘 끝낸 것 같던데.

“좀 곤란한 질문을 집요하게 했던 기자가 한 명 있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하게 잘 끝냈어요. 그런데 퇴근이 많이 늦으셨네요?”

ㅡ 오늘 술 상무 노릇 좀 했지. 회사에서 오랫동안 공들인 시나리오가 있는데, 작가가 좀처럼 내주지 않으려고 해서 말이야.

“네? LK에서 제작한다는데 거절하는 작가가 있어요?”

LK 제작이라면 최고의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각 분야 최고 스태프들만 섭외해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기로 유명하다. 제발 시나리오 한 번만 봐달라며 애걸복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대표가 직접 술 접대를 할 정도로 콧대 높은 시나리오 작가가······ 있다. 있어! 한녹영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 콧대 높은 시나리오 작가가 누구인지 떠올랐고, 동시에 그 작가가 내놓은 작품이 생각난 것이다.

‘프로젝트 B’

한국형 첩보 영화로 한국에 비밀 에이전트 단체가 있다는 가정 하에, 비밀 에이전트들이 한국을 비밀 실험 대상국으로 선택한 악의 단체에 맞서 싸우다 결국엔 승리한다는. 주로 헐리웃 영화에서 많이 보던 헐리웃식 스토리를 한국 정서에 맞게 쓴 시나리오였다. 3년을 꼬박 바쳐 시나리오를 완성한 작가가 처음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간 제작사는 LK가 아니었다. 세 군데의 제작자에서 여기가 헐리웃이냐, 이딴 건 한국 영화에 맞지 않는다, 너무 식상한 스토리다,는 식으로 혹평을 받은 후 상처받은 작가는 시나리오를 영영 묻어버리려 했고, 뒤늦게 시나리오를 접한 강준일이 직접 나서서 작가를 설득해 제작에 들어간 것이다. 감독은 헐리웃의 유명한 감독인 L · 앨버트와의 합작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이종진이었고, 스태프들 또한 최고로 꾸렸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이종진 감독이 당장 오케이 사인을 보냈을 정도로 탄탄하고 흥미진진한 스토리였던 것이다. 물론 이후 감독과의 상의하에 시나리오를 수정했지만, 악평을 한 세 군데 제작사들의 의견과는 달리 이종진의 스태프들 전부가 ‘이건 된다.’ 라고 했다고 들었다.

후에 영화 관계자들 모두가 초미의 관심을 보내며 대박의 조짐이 보인다고 했던 영화에서 한녹영이 맡은 역할은 본부에서 지시를 내리는 천재 에이전트 이수현 역이었다. 비록 영상을 빌미로 협박해 얻어낸 역이지만,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이어서 다시 한 번 도전해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녹영이 입술을 축였다. 전에는 다시 확 떠서 인기와 장현재의 마음을 얻을 욕심이 더 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배우로서의 욕심이 끓는 물처럼 바글바글 일어났다.

하고 싶다. 내가 그 역을 맡고 싶다. 차도영을 욕심냈을 때처럼 이수현을 향한 마음이 절절해졌다. 다시 한 번 그 역을 맡아서 그때보다 몇 배는 더 잘해내고 싶었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캐릭터를 잘 녹여냈다는 평도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족했다.

ㅡ 있더군. 다른 제작사들로부터 악평을 받으며 마음을 많이 다친 모양이야. 가져가서 다 뜯어고치려는 건 아니냐, 가격 후려치기를 하려는 건 아니냐, 내 작품을 망치려는 거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좀처럼 내놓지 않으려고 하더라고. 애먹었어.

“설득······ 했어요?”

당연히 설득했을 테지만, 설득한 이후 영화의 완성까지 보고 와놓고도 왠지 떨려서 조심스레 물었다.

ㅡ 95퍼센트쯤.

설득에 성공했다는 얘기다.

ㅡ 오늘은 작가가 술에 취해 뻗는 바람에 계약서에 사인을 못했지만 내일 한성준 보낼 거야.

“제작 일정 잡히면······.”

한녹영이 말을 머뭇거렸다. 다시 한 번 그 역을 맡고 싶은데, 왠지 말이 안 떨어진다. 영상을 빌미로 영화에 꽂아달라고 협박했던 일이 떠오른 탓인지 괜히 청탁으로 비칠까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에는 온전히 제 실력으로 따내고 싶지만······.

ㅡ 캐스팅은 아마 오디션을 통해 결정될 거야.

한녹영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마치 제 마음을 읽은 듯 하는 말에 깜짝 놀란 것이다.

“네?”

ㅡ 머뭇거림에서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는 한녹영씨의 마음이 읽히던데, 내가 잘못 읽은 건가?

“아니요. 정확하게 읽어내셨어요. 영화에 캐스팅되고 싶은데, 대표님한테 말하면 왠지 청탁처럼 들릴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거든요.”

ㅡ 난 공과 사는 분명히 하는 사람이야. 한녹영씨가 아무리 내 애인이라고 해도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을 영화에 꽂아주진 않아.

“아직 대표님 애인 아니거든요.”

한녹영이 강준일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ㅡ 지금이야 그렇지만, 영화가 제작될 시기에는 내 애인일 텐데. 아닌가?

“그야······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요.”

어쨌든 부정은 하지 않자 강준일이 웃었다. 한녹영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있는 뺨을 긁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왠지 마음이 한들거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 거의 매일 강준일과 통화를 하는데, 매번 이런 식이었다. 도통 침착할 수가 없다고 할까. 지글지글 타는 자갈돌 위를 걸어가고 있는 냥 괜히 팔딱팔딱 뛰고 싶은 기분이 들곤 한다.

ㅡ 예비 애인씨, 연기 연습 많이 해두라고. 이번 영화 대박이야. 내가 장담하지. 시나리오를 본 한성준이 천만을 예상했거든. 감독은 이종진이 유력한데, 감독과의 시너지를 고려하면 천오백까지도 가능하다는 평이야.

1900만인데요.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하는 극찬이 쏟아졌다. 액션, 유머, 감동까지 세 박자가 완벽해 네티즌 별점 평점이 무려 9.2였고, 입소문에 입소문을 타며 연일 만석이었다.

“저 요즘 연기 많이 늘었어요. 오늘도 감독님한테 칭찬 받았으니까요. 나중에 드라마 보시면 놀라실 걸요? 그러니까 오디션하면 당당하게 참가해서 꼭 역 얻어낼 겁니다.”

이번엔 로비나 협박이 아닌 순전히 제 실력으로 그 역을 따내고 싶었다.

ㅡ 기대하지. 그리고 난 캐스팅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을 거야.

“약속하셨어요. 나중에 혹시 캐스팅에 대표님 입김이 조금이라도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헤어질 거예요.”

한녹영이 엄포를 놓자 강준일이 큰 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ㅡ 한녹영씨 아직은 내 애인이 아닐 텐데. 예비 애인이지.

아까 제가 아직 애인 아니라고 했던 말에 꽁해있다가 복수하는 것이 분명했다. 은근 뒤끝 쩐다니까. 뭐, 본인 입으로도 뒤끝 길다고 인정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오디션이 진행될 쯤에는 예비, 자가 빠져 있을 텐데요.”

ㅡ 난 내일 당장이라도 예비 자를 빼고 싶은데.

“그, 그 얘기는 내일 만나서 해요.”

ㅡ 오전 촬영이 11시쯤 끝난다고 했던가?

“네. 더 지연될 수도 있지만 한 씬뿐이라 12시를 넘기진 않을 거예요. 혹시 더 늦어지게 되면 연락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은 한녹영이 침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곤 발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버둥거렸다.

정식 데이트라니······. 세상에 태어나 데이트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왜 이렇게 마음이 설레는지 모를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처음인가.”

장현재와도 데이트를 한 적이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진짜 데이트라고 볼 수 없었다. 저는 구걸했고, 장현재는 구걸에 응해준 것뿐이니까. 그럼 내일이 생애 첫 진짜 데이트. 그래봤자 특별한 것도 없이 기자들 눈길이 닿지 않는 실내에서 식사를 하고, 간단히 와인을 마실 뿐일 테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자꾸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

“아주 입이 찢어지시겠습니다.”

부엌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강준일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한성준이 식탁 의자에 앉아 한심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 자식이 왜 여기에 있어?

“너 안 갔냐?”

한성준이 한숨을 푹 쉬며 일어섰다.

“한녹영씨 부모에 관한 조사 내용이 파일로 왔다고 보고했더니, 씻고 나와서 듣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졸린 것도 참고 기다렸더니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두른 겁내 섹시한 자태로 나와 실실 웃으며 한녹영씨한테 전화를 걸더군요. 남의 인형이니 뭐니 하며 깔 때는 언제고 통화하는 목소리가 아주 녹아내리더군요. 참 혼자 보긴 아까운 장면이었습니다. 잠시 녹화해뒀다가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써먹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후환이 두려워 참았습니다.”

안경을 추어올리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욕실 쪽으로 가 가운을 걸치고 돌아온 강준일이 한성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점잖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후환을 두려워해야지. 나 뒤끝 길다. 한녹영은 이제 남의 인형이 아니고, 사람 마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고, 애초부터 얼굴은 내 취향이었어. 완벽하게. 그리고 애인이랑 통화하는 남자 처음 보나. 애인과 통화할 때는 누구든 얼굴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법이야.”

“아직은 애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비 애인일 뿐이죠. 손이나 한 번 잡아봤습니까?”

한성준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묘하게 비웃는 어조로 물었다. 강준일의 눈가가 가늘어진 순간 한성준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예비 애인이 진짜 애인이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만. 내 예비 애인이 남의 진짜 애인이 되는 경우가 참 잦더군요.”

한녹영과의 통화로 좋아졌던 기분에 재를 뿌리는 한성준의 얼굴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강준일은 못마땅한 눈으로 한성준을 쳐다보며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기다리게 해놓고 존재를 까맣게 잊은 일로 심술이 난 모양이니 오늘만 참기로 할까.

“보고나 해.”

한성준이 태블릿을 켰다.

“한녹영씨가 김영숙의 불륜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부친인 한만식에게 보내 현재 부부 사이가 최악이라고 합니다. 한만식이 김영숙에게 손찌검을 한 모양입니다. 고소할 거라고 소리쳤다는데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고요, 아무래도 곧 한만식이 사기죄로 기소될 것 같습니다.”

“사기?

“네. 기획사를 새운다는 말로 여기저기서 돈을 꽤 쓸어온 모양인데, 일이 저렇게 되면서 최악인 부자 관계가 세상에 드러났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식인데 대신 갚아주겠지, 하고 생각하고들 있는 모양이지만 한녹영씨 쪽에서 거부한다면 고소가 들어가겠죠.”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녹영은 갚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아들에게 버림받는 아버지라······ 나쁘지 않군. 한만식 쪽은 제가 따로 손쓰지 않아도 될 테고. 기사만 막으면 되겠군.

“계모의 아들이 있다고 하던데.”

“네. 그 아들이 또 엉망이라 여자들 꽤 건드리고 다닌 모양입니다. 고소까지 갈 뻔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 모친이 돈으로 해결한 탓에 무마되었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모자 사이는 어때?”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한녹영씨에게 빌붙어 살면서도 정작 어머니가 재혼한 사실에 대해선 반기지 않는 것 같더군요.”

어머니가 성녀이길 바라는 아들인 모양이군. 강준일이 입매를 픽 올렸다. 그렇다면 한녹영이 뒷조사를 통해 찍어뒀다는 사진을 본다면 꽤 흥분하겠어.

“하녹영이 찍은 사진 입수해서 아들한테도 감상의 시간을 가지도록 해줘. 그리고 한녹영씨 아버지 일은 조용히 처리되도록 하고. 괜히 언론에 오르내려봤자 좋을 일 하나도 없잖아.”

지금은 한녹영을 향한 동정론이 대세일지 모르나 한녹영이 아버지가 입건되었는데도 아무런 손도 쓰지 않은 채 내버려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흐름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세상 인심이라는 것이 묘해서 때로는 피해자를 가해자처럼 몰고 가기도 하고, 언론이 어느 쪽을 두들기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도 했다.

“한울에서 알면 놓치기 싫어할 소스지만, 단속하겠습니다.”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녹영에겐 가족의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말만 그렇게 했을 뿐 내심은 달랐다.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가족의 일에는 물러질 가능성이 컸다. 한녹영의 가족은 강준일이 보기에 곁에 없는 편이 나은 사람들이었다. 이참에 정리해서 두 번 다시는 한녹영의 인생에 재를 뿌리지 못하도록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본래 강준일은 남의 인생에 깊숙이 관여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한녹영에겐 관여하고 싶어졌다. 스캔들이 터졌던 날 아침, 드레스룸 구석에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본 이후로 더더욱. 그래서 한녹영이 더더욱 제게 의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스캔들 이후 한녹영이 제게 기대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게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점점 더 기대고, 더 의지하게 만들고 싶다고 할까. 왠지 한녹영을 말 잘 듣는 인형으로 만들어 그만 보게 만든 장현재의 심리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한녹영의 자아를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이다.

인형은······ 남의 인형이건 제 인형이건 흥미 없다. 인형을 끌어안고 뒹굴어봤자 무슨 재미인가. 변태도 아니고.

“한울 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내일 하영택에 관한 뉴스 뜰 겁니다. 경찰 조사 들어갈 거고 증거 및 증언이 확실해 구속될 겁니다. 다만 장현재의 스폰서 쪽에서도 손을 쓰고 있어 변수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수라······. 스폰서의 힘도 무시할 순 없어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혹시 모르니 하영택이란 놈 뒤에 사람 한 명 붙여두고. 이런 상황에서 무모한 짓을 벌일 만큼 머리가 없진 않겠지만 만약의 경우란 것이 있으니까.”

“네. 대표님.”

“그만 가봐. 내일 이강택으로부터 계약서에 사인 받아 오는 거 잊지 말고.”

“네. 그럼 전 드디어 퇴근하겠습니다.”

강준일을 향해 고개를 숙인 한성준이 ‘드디어 퇴근이다!’ 라는 얼굴로 현관으로 향했다. 폴짝폴짝 뛸 것처럼 즐겁게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불러 뭐라도 시키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참았다. 저만 뒤끝이 긴 것이 아니라 한성준도 은근 길어서 괜히 성질 건드려봤자 피곤해질 뿐이다.

강준일이 취침을 위해 침실로 들어섰다.

☆☆★☆☆

촬영을 위해 일찍 일어난 한녹영이 잠에서 깨려고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보다 움찔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차안에서 먹을 토스트를 대충 만들던 중인 박상호가 “왜 그래?” 하며 나왔다. 한녹영은 말없이 TV를 가리켰다. 하영택이 옆에 변호사를 대동한 채 경찰서를 나서는 장면이 보였고, 경찰이 하영택을 사문서위조와 협박, 금품갈취, 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형사입건해 불구속 조사한 후 귀가조치 시켰다는 뉴스가 보도 중이었다. 곧 사건을 검찰로 송치해 기소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이어졌고, 검찰의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마 구속기소가 확실시된다는 기자의 의견이 덧붙었다. 한녹영을 음해하기 위해 네티즌들을 고용해 비난, 비방하는 글을 유포했다는 소식도 짤막하게 전해졌다.

강준일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았지만 이후로 어디에서도 소식이 없어 내심 궁금해 하던 중이었는데 기소될 거라는 뉴스를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면 안 되지만, 하영택이 한녹영을 싫어하는 것만큼 한녹영 또한 하영택이 싫어서 그의 불행이 기쁘기만 했다. 오랫동안 애먹이던 충치를 확 뽑아버린 기분이랄까.

“근데 왜 불구속 수사야?! 구속수사하고, 구속기소해서 한 십년쯤 형량 때려야지! 그나마 구속기소될 거라니 다행이긴 하지만.”

계란을 뒤집던 중이라 손에 뒤지개를 쥐고 있던 박상호가 눈을 부리부리 뜨며 말했다.

“형. 계란 탄다.”

부엌에서 타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박상호가 부랴부랴 부엌으로 들어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돌아왔다.

“당장 구속이 아닌 건 좀 아쉽지만, 저것만 해도 어디냐. 무엇보다 네가 음해당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을 테니 아직도 너한테 스폰으로 떴네 어쩌네 하던

사람들 숫자는 좀 줄어들겠지.”

“그러면 좋고.”

“한울 주가도 확확 떨어질 테고, 주주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장현재 대표 골치 좀 아프겠다.”

“응.”

한녹영이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울의 주가는 제가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기사가 나간 이후 시소 타듯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영택 일로 확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덮을만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고전할 거다. 주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 정도 예상은 할 수 있었다.

“토스트 다 됐다. 곧 싸서 나올 테니까 나갈 준비하고 있어.”

“패딩만 걸치면 돼.”

한녹영이 소파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롱패딩을 들고 일어섰다. 박상호도 서둘러 토스트를 싼 후 옷을 걸치며 나왔다. 오늘은 장한수가 개인적인 볼일로 나오지 않는 날이라 박상호가 운전해서 정지해를 픽업한 후 촬영장으로 가야 한다. 오늘의 촬영은 파주가 아니라 분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미니밴에 올라 막 출발했는데 정지혜로부터 언제 오냐는 연락이 왔다. 도착 예상시간을 말해준 후 정지해의 집 앞에 도착하니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오빠, 녹영아 뉴스 봤어?”

정지해는 미니밴에 올라타기 무섭게 하영택에 관한 말을 꺼냈다.

“지해야, 오빠 입꼬리 안 찢어졌냐?”

“찢어지기 직전인 걸 보니 봤구나. 나도 아까 보면서 얼마나 시원하고 후련했는지 몰라. 하 실장 진짜 꼴 뵈기 싫었는데. 이참에 그냥 무기징역 받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건 순전히 우리 바람이고, 한울에 타격을 줬다는 것만 해도 좋다. 거기 분위기 어떤지 순정이한테 한 번 슬쩍 찔러봐.”

“안 그래도 아까 통화했는데 초상집이래, 라는 게 눈으로 보이는 분위기고 다들 뒤로는 고소해하는 모양이더라. 다들 알게 모르게 하 실장 싫어했잖아.”

“그치. 그 인간 인성이 개떡이라 다들 뒤로 욕하고 다녔지.”

“응. 고소해. 그러게 녹영이는 왜 건드려?! 그냥 곱게 보내줄 것이지.”

정지해가 콧방귀를 흥흥 껴댔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해 준비 중인 나희연이 보였다. 오늘은 나희연과 한녹영 둘만의 촬영이었다.

“녹영씨는 이후로 촬영 없죠?”

나희연이 물었다.

“네. 오늘은 이 씬이 차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다른 스케줄은 없어요?”

“아시다시피 다른 스케줄 잡을 만한 상황도 아니고, 한동안은 도망자에 올인 하려고요.”

“내가 말한 다른 스케줄은 방송 스케줄이 아닌데. 데이트 약속이나······ 친구들 만날 약속이나 뭐 그런 거 없어요?”

우리끼리 있으니 솔직하게 말해보라는 듯 그녀가 눈을 찡긋 했다. 데이트란 말에 잠시 뜨끔했지만 한녹영은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모태솔로라고 제작발표회장에서 말했잖아요.”

“그거 진짜였어요?”

“네.”

“세상에. 말도 안 돼. 연애 스캔들이 거의 없는 분이라 진짜 은밀하게 만나나 보다 했는데, 정말 모태솔로라니······. 여자들이 한녹영씨를 그냥 둬요?”

“그냥 두던데요.”

“아······ 혹시 본인들보다 더 예뻐서 부담되어 그러나. 솔직히 여자보다 더 예쁘고 가느다란 남자를 애인으로 두기엔 부담스러운 면도 있을 것 같긴 해요. 좀 잘 드셔야겠어요. 너무 말랐어. 투샷 잡힐 때 내 얼굴이 더 커 보일까봐 되게 부담되는 거 알아요?”

나희연이 눈을 흘겼다.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먹는 중입니다. 주변에 제가 살찌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캐릭터 상으로도 조금 더 쪄야 하고요.”

박상호며, 강준일이며 절 못 찌워 야단들이었다. 그때 한녹영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액정을 보니 강준일이라 한녹영은 슬쩍 웃은 후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고 나희연에게 양해를 구하곤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저예요.”

ㅡ 한녹영씨,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 데이트는 취소야.

취소라는 말에 실망하는 마음보다 걱정이 먼저 들었다. 한녹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ㅡ 조부님께서 입원하셨어. 아, 심각한 질병은 아니고······ 생굴 좋아하는 양반이라 며칠 전 생굴 드셨다고 하시더니 장염에 걸리신 것 같아.

요즘 노로바이러스가 극성이라고 했던 뉴스가 떠올랐다. 건강한 사람도 한 번 걸리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니 조심하라는 뉴스였다. 하물며 강준일의 조부라면 연세도 지긋하실 텐데, 걱정이었다.

“심각해요?”

ㅡ 탈수가 오셨어. 거기다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며칠 입원하는 편이 좋겠다고 주치의가 말했는데, 할아버님을 케어할 수 있는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어제 일본에 가셨거든. 할머니께서 온천을 좋아하셔서. 조부님께서 다른 친척들보다 내가 곁에 있길 원하시는군. 평일이면 일하라며 내쫓았을 텐데, 주말이라.

“그런 사정이라면 할 수 없죠.”

ㅡ 한녹영씨가 나와의 데이트를 몹시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미안하게 됐어.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대표님이 저와의 데이트를 몹시 기대하고 계셨던 건 아니고요?”

강준일이 웃었다.

ㅡ 들켰군. 사실 매우 아쉬워.

“다음에 다시 약속 잡으면 되죠. 사실 요즘 분위기가 좀 그래서 대표님이랑 단둘이 만나는 일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잘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사진 찍혀봤자 좋을 건 없잖아요.”

씩씩하게 대답하곤 있지만 사실 속으론 매우 아쉬웠다. 은근히······ 사실은 아주 많이 오늘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ㅡ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서운해지는데.

“그,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거든요. 약속 깬 건 대표님이시니까요. 저 촬영하러 가야 해요. 다음에 봬요.”

ㅡ 아, 한녹영씨.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강준일이 잊은 말이 있다는 듯 다급하게 한녹영을 불렀다.

“네. 할 말 남으셨어요?”

ㅡ 보고 싶어.

“······.”

ㅡ 아, 이런 식으로 훅 치고 들어가는 말 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럼 취소하지 뭐. 한녹영씨의 심장 건강을 생각해서.

“그렇다고 굳이 취소할 것까진 없잖아요.”

새침한 대꾸에 강준일이 또 한 번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ㅡ 그럼 취소를 취소할까?

“됐어요. 이미 마음 상했어요. 조부님 병간호 잘 하시고요, 다음에 봐요. 그리고 나도 뭐 조금은······ 보고 싶었어요.”

한녹영이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왜 이렇게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네. 전에 장현재에겐 ‘보고 싶었다. 목소리 듣고 싶다. 사랑한다.’ 등등, 오만 소리를 잘도 했는데 말이다. 잘만 했다 뿐인가. 매달리고, 질척거리기도 잘했는데 강준일에겐 왜 툭하면 수줍어지고 툭하면 민망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얼굴이 붉어져서 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촬영장으로 돌아가니 촬영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안절부절 못한 채 한녹영을 기다렸던 박상호가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죄송합니다.”

휴대전화를 박상호에게 맡긴 한녹영이 서둘러 대기 중인 나희연 곁으로 다가갔다.

“너 진짜 괜찮겠어? 정말로?”

몇 번이나 괜찮겠느냐고 확인하는 박상호의 얼굴은 영락없이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엄마의 그것과 같았다. 반복된 질문에 슬슬 짜증이 난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괜찮다니까. 몇 번을 물어? 내가 애냐. 스튜디오 하나 제대로 못 찾아가게.”

데이트 약속이 엎어져 시무룩하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맨큐의 이은수로부터 박상호에게로 전화가 왔다. 시간이 괜찮으면 김춘영의 스튜디오로 좀 와줬으면 하는 연락이었다. 마침 오늘 오후가 통으로 빈 탓에 4시로 약속을 잡고 슬슬 나갈 차비를 하고 있는데 박상호에게 약속이 생겨버렸다. 괜찮은 사무실 자리가 나오면 연락 달라고 한 부동산에서 ‘급매물이 나왔는데 보러 오겠느냐?’는 전화가 온 것이다. 정말 급매물이고 워낙 조건이 괜찮게 나와 바로 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부랴부랴 약속을 잡긴 했는데 막상 한녹영을 혼자 보내려니 걱정이 컸다.

대낮이고 다른 데도 아닌 김춘영 작가의 스튜디오에 가는 것뿐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건지. 아무래도 요즘 한녹영 주변이 어수선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마음이 안 놓이냐. 김춘영 작가 스튜디오에만 갔다가 바로 돌아와.”

“알았어. 다른 갈 데도 없어.”

현재 한녹영은 강준일 외에 딱히 따로 만날 사람도 없었다. 그 외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고.

“파파라치가 붙었을 가능성이 크니까 행동 조심하고.”

“응.”

“혹시 장 대표한테서 연락와도 만나지 말고.”

“현재 형한테 연락 오겠어?”

이제 정말 서로의 끝을 봤는데.

“하영택 문제로 장 대표가 너한테 따질 수도 있잖아.”

“알았어. 전화도 안 받을게. 무시하면 되는 거지?”

“응. 혹시 내 볼일 일찍 끝나면 김춘영 작가 스튜디오 쪽으로 갈게.”

“그러지 말고 간 김에 다른 사무실도 다 둘러보고 와. 오늘 지나면 또 한동한 여유가 없잖아.”

실물을 봐야 계약을 할 텐데, 아침부터 밤까지 한녹영의 옆에 붙어있느라 발로 뛰며 사무실을 보러 다닐 시간이 딱히 없었다. 돈이 많다면 또 모를까, 가능한 적은 돈으로 조건 좋은 사무실을 구하자면 발품을 파는 방법밖에는 없으니 기왕 나간 김에 여러 부동산을 돌며 가능한 많은 사무실을 보고 오라고 권하자 박상호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 나 정말 작가님 스튜디오에만 들렀다가 바로 집으로 올 거야.”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고민에 잠겼던 박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네 말대로 오늘 말고는 또 언제 여유가 날지 모르니까 나간 김에 최대한 많이 둘러보고 가능하면 계약하고 올게. 일단 사무실이 있어야 뭘 시작하든가 하지.”

“응. 좋은 사무실 얻고 와.”

“그럴게. 나가자.”

한녹영과 박상호는 나란히 빌라를 나와 각자의 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한녹영의 목적지는 압구정이었다. 이은수가 불러준 김춘영의 스튜디오 주소를 내비에 찍은 후 도착하니 딱 4시였다. 스튜디오 바로 앞에 차를 댈 공간이 있어 주차를 한 후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인 이은수가 보였다. 그녀는 한녹영을 보고 반갑게 손을 들었다.

“어서 와, 녹영씨!”

“누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녹영씨, 요새 힘들지? 안부 전화 한 통 못 걸고 미안해. 마음 같아선 걸고 싶었는데, 괜히 나까지 보태서 피곤하게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참았어. 마음으로는 녹영씨 응원하고 있었던 거 알지?”

한녹영이 웃으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누나 마음이야 제가 다 알죠. 전혀 서운하게 생각 안 해요.”

“이렇게 예쁜 녹영씨 힘들게 하고, 한울 정말 나쁘다. 그래도 억울한 사정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어서 다행이야. 기사는 실시간으로 찾아보고 있어. 참, 기쁜 소식 하나. 우리 잡지 아주 잘 나가.”

전에 찍은 화보가 실리는 것이 바로 2월호였다. 1월 중순부터 2월호 잡지가 풀리기 시작했을 텐데, 시기를 같이해 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잡지 판매 부수에 지장이 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말이에요?”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혹시 절 위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닌가 했는데 이은수의 표정을 보니 진짜인 것 같았다.

“정말이라니까. 내가 그런 거짓말을 왜 해. 화보 끝내주게 나왔잖아. 덕분에 아주 잘 팔리고 있어. 기대 이상이야. 우리도 좀 걱정했는데 오히려 일 터지고 판매 부수가 더 확 늘었다니까? 그래서 지금 역대 최고 부수를 노리고 있어. 사진은 자기도 봤지?”

사인과 간단한 멘트를 부탁한다며 맨큐에서 보내온 화보는 당연히 봤다. 잡지도 미리 한 부 보내줘서 봤는데, 확실히 잘 나왔다. 에디터들과 김춘영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만큼 괜찮았다.

“잘 나왔던데요. 김춘영 작가님 실력에 감탄했어요.”

“김 작가님이야 헐리웃에서도 먹히던 실력파지만, 모델도 좋았어.”

이은수가 한녹영을 칭찬하고 있을 때 안에서 김춘영이 나왔다.

“내가 할 말을 왜 자기가 하고 있어?”

“오랜만입니다.”

한녹영이 몸을 일으켜 김춘영에게 인사했다. 김춘영이 그런 한녹영의 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요번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얼굴 망가졌으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이다. 여전히 영감을 주는 얼굴이야. 그래서 말인데, 나랑 작업 한 번 더 하자.”

“작업이요? 무슨······ 아, 혹시 맨큐랑?”

이 자리에 이은수가 있어서 혹시 또 맨큐에 실릴 직업을 한 번 더 하자는 뜻인가 싶어 물어보았다. 김춘영이 손을 내젓더니 커피를 내왔다.

“맨큐랑 하는 작업 아니야. 이은수 에디터는 다른 작업 스케줄 의논할 겸 한녹영씨 얼굴도 볼 겸해서 와있는 거고, 커피 마셔요. 인스턴트지만.”

한녹영이 웃으며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스튜디오 안이 좀 추워서 달달하면서 뜨거운 커피가 반가웠다.

“그럼 무슨 작업인데요?”

“내가 헐리웃에 3년 있다 온 건 알아요?”

“좀 전에 은수 누나한테 헐리웃에서도 먹히던 실력파라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3년이나 계셨던 거예요?”

“응. 한녹영씨가 아는 유명 배우들 화보는 거의 한 번씩 다 찍었을 걸? 이래봬도 제발 한국에 돌아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 붙들고 매달리는 걸 고국이 그리워 뿌리치고 돌아온 천재라고, 내가.”

김춘영이 가슴을 쫙 펴며 오만 잘난 척을 다 해댔다. 한녹영은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하고 싶어요?” 하고 이은수가 구박하자 “사실인데 뭘?” 하고 부루퉁하게 대꾸하는 김춘영을 보며 웃었다.

“참,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미국에 있을 때 같이 작업한 적 있는 포토그래퍼로부터 제안이 왔거든. 알리사 메이와 앤드류 샤퍼, 크리스찬 미하엘 등을 메인으로 한 화보집을 제작 중인데, 아시아인 모델을 한 명 넣고 싶다고 말이야. 컷이 많진 않을 거야. 많아봤자 3-4컷? 내가 한국에 있으니 한국 모델들 중 골라서 같은 컨셉으로 찍은 후 미국으로 보내면 본인이 셀렉해서 화보집에 싣겠다는데, 난 한녹영씨 찍고 싶어서. 한국에 돌아온 이후 찍은 모델들 중 한녹영씨가 가장 인상 깊었거든. 어때, 생각 있어?”

김춘영의 말투는 참으로 평이했다. 흥분한 기색도 ‘너 이거 대단한 기회다?’ 하고 뻐기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우리 잠시 산책이나 갈까?’ 라고 하듯 무심하고

덤덤한 말투였다. 한녹영은 말투만큼 표정도 담담한 김춘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누구를 메인으로 한 화보집에 내 사진을 같이 실을 거라고? 맙소사. 알리사 메이, 앤드류 샤퍼, 크리스찬 미하일 등은 현재 헐리웃에서 가장 핫한 배우들이었다. 현재 헐리웃 몸값 최고 순위를 매겨보면 셋 모두 10위 안에 들 정도로. 그런데 그들 틈에 내가? 한녹영이 눈을 깜박였다. 옆에서 이은수가 본인이 더 흥분한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는 중이었다.

“뭐 해? 녹영씨?! 빨리 대답 안 하고? 당장 한다고 해. 응?”

“어····· 저기 진짜로······ 그러니까······.”

당황한 탓인지 말이 바로 안 나왔다. 김춘영이 그런 한녹영을 보고 짧게 웃었다.

“진짜로 내가 한녹영씨 다시 찍고 싶어. 내가 딱 한 컷만 들어가도 아까 말한 세 배우들 확 눌러버릴 만큼 강렬하게 찍어줄게. 할 거지? 내 모델.”

“하, 할게요. 제가 꼭 할게요. 고맙습니다.”

벌떡 일어난 한녹영이 김춘영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은수가 그런 한녹영의 손목을 잡아 도로 앉히며 “잘했어. 잘 할 거야.” 하고 말해주었다. 한녹영이 이은수를 향해 “고마워요 누나.”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뭘.”

이은수가 멋쩍어하며 한녹영의 등을 가볍게 찰싹 쳤다. 그리고 “이건 한녹영씨 스스로 잡은 기회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하고 속삭였다. 한녹영이 그런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주었다.

“스케줄은 조율해서 맞춰야겠지만 3-4주쯤 후로 생각하고 있어. 그때까지 살 좀 찌우고!”

“요즘 저 살 조금 쪘어요.”

한녹영이 이것 보라며 팔뚝을 내밀자 이은수의 눈매가 가 샐쭉해졌다.

“그래봤자 내 손목보다 가는 것 같은데 뭘.”

겨울 내내 잘 먹었더니 살이 찐 이은수가 한녹영의 소매를 직접 내려주며 ‘다이어트나 해야겠다. 남자 스타를 보며 다이어트 결심을 하게 되다니.’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참, 요즘 한녹영씨 물 먹이는 회사가 한울이라고 했나?”

커피를 마시며 “적어도 3kg은 쪄야 해. 특명이야.” 라고 말했던 김춘영이 한울을 언급했다.

“한울이라고 말했잖아요. 한녹영씨 전 기획사. 몇 번이나 말해요.”

이은수가 타박하자 김춘영이 머쓱해하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모델 이름 외우기도 벅찬데, 회사 이름을 어떻게 기억해?”

“근데 한울은 왜요?”

한녹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얼마 전에 그쪽에서 프로필 사진 촬영 의뢰가 왔었거든. 일단 피사체를 직접 보고 싶어서 데려와 보라고 했더니 왔는데, 영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고. 이름이 주민성이었지 아마?”

주민성 프로필 사진을 여기서 찍으려고 했구나. 근데 강준일이 괜찮은 마스크와 몸이라고 칭찬했던 주민성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한녹영의 입매가 슬쩍 움직였다. 제 사진을 예술로 찍어줬을 때부터 느낀 건데, 참 보는 눈이 있는 작가였다.

“달콤한 그대 주연으로 발탁된 신인 배우 말하는 거죠? 괜찮던데.”

“마스크는 괜찮은데 뭐랄까······ 재미가 없었어.”

“그래요? 우리는 일단 드라마 방영되는 거 보고 우리 잡지에 한 번 실어볼까 논의하는 중이에요.”

“그러던지. 남의 잡지에 왈가왈부할 순 없으니까. 난 영 안 내켜서 거절했더니 함께 온 매니저인지 실장인지 하는 놈이 살벌하게 욕하고 가더라고. 한울이라고 했었지. 잘 기억해둬야지. 이 에디터도 한울 소속은 나한테 의뢰하지 마.”

김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태도만 봐도 실장인지 매니저인지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딱 알겠다. 이은수도 알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군지 알겠다. 하영택 실장일 거예요. 그 사람 예전에 건달이었거든요. 행실이 별로라 소문이 영 안 좋아요. 여러 혐의로 입건되어서 곧 기소될 거라던데요?”

이은수가 한녹영을 보았다.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돈으로 악플이나 사주하고, 예전부터 영 느낌이 별로였다니까. 녹영씨. 이후에 별 스케줄 없으면 우리랑 같이 저녁 먹을래? 작가님이랑 나랑 요 근처에 닭발 먹으러 가기로 했거든. 닭발 먹을 줄 알아?”

“당연히 먹을 줄 알죠. 그리고 스케줄 없어요.”

“그럼 가자.”

“네. 매니저 형한테 전화 좀 하고요.”

자리에서 일어선 한녹영이 박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어, 나야! 무슨 일로 널 보자고 한 거래?

“그건 이따 집에서 얘기해. 좋은 일이야. 그리고 형 나 작가님이랑 은수 누나랑 저녁 먹고 들어갈게.”

ㅡ 딱 저녁만 먹어야 된다. 술은 금물이야.

“술 안 먹어. 형은 어때? 괜찮은 사무실 좀 봤어?”

ㅡ 급매물로 나온 데가 괜찮긴 한데, 세가 좀 비싸서 고민 중이네. 시세보다 싸게 나온 건데도 워낙 위치가 좋은 탓인지 예산 초과야. 두어 군데 더 보고 들어가려고.

“너무 초라한 데로 얻진 말고.”

ㅡ 어, 대배우가 되실 한녹영님이 소속될 회사인데, 당연히 너무 초라한 데는 안 얻지.

박상호의 넉살에 웃음이 나왔다. 한녹영은 집에서 보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 얻으려고? 1인 기획사?”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이은수가 의자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치며 물었다.

“매니저 형이 차리는 기획사에 들어갈까 해서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요즘 1인 기획사도 많이 하고, 오래 같이 일한 매니저랑 합작해서 회사를 차리기도 하니까. 녹영씨 매니저 사람 좋아 보이던데, 잘 됐다.”

“네. 좋은 사람이에요.”

“나가자. 김 작가님은 뒷정리하고 오신대. 우리 먼저 가있자.”

김춘영이 “10분이면 되니까 내 몫도 시켜놔.” 하고 말했다. 한녹영은 이은수와 함께 스튜디오를 나와 걸어서 십 분 정도 이동했다.

“여기야. 매운 닭발이 아주 끝내줘. 소주랑 같이 먹으면 아주 죽음이라니까.”

안으로 들어서며 이은수가 닭발 찬양을 시작했다.

“저 술 금지령 받았어요.”

“어? 진짜?”

“네. 매니저 형이 술은 절대 금지라고. 내일도 아침 일찍 촬영이 있거든요. 그리고 차도 가지고 왔고요.”

금주해야 하는 이유가 세 가지나 되니 이은수도 딱 한 잔만 해, 하고 질척댈 수 없었다.

“닭발은 소주랑 같이 먹어야 하는데, 아쉽다. 그럼 녹영씨는 밥이랑 먹어. 반찬으로도 괜찮거든.”

꽤 유명한 집인 듯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한녹영과 이은수가 빈자리를 안내받아 앉는 동안 시선들이 쏟아졌다.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가 하면 함께 온 일행들과 수군대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나 지금 닭발 먹으러 왔는데 한녹영이 왔어! 대박!“ “나 지금 한녹영 보는데, 되게 멀쩡한데?” 하고 알려주기도 했다.

“녹영씨, 불편하겠다. 가끔 연예인들이랑 같이 왔는데, 이렇게 관심이 쏟아진 건 처음이야.”

함께 작업했던 연예인들이랑 여러 번 왔었지만 ‘어? 연예인이다.’ 이 정도 관심이었던 터라 별 생각 없이 한녹영과 함께 온 건데, 상상 이상의 관심에 이은수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녹영이 미안해 하는 그녀를 향해 웃었다.

“요즘 제가 진짜 핫하긴 한가 봐요.”

심지어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한녹영을 보며 “요새 뉴스에 자주 나오는 한녹영을 아닌가?” 하고 옆 테이블 젊은 사람들에게 물었을 정도였다. 한녹영을 찍고 있던 여자가 “네.” 하고 대답하자 “친부한테 버림받았다던 그 배우 맞구만. 쯧쯧, 아비가 아주 못쓰겠던데.” 하고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일행이 “무슨 소리야? 저 배우가 친부와 자식처럼 길러준 계모를 버렸다던데. 연예인이면 돈도 잘 벌 텐데 부모를 외면하면 쓰나. 인륜은 천륜인데!”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두 어르신이 서로의 말이 맞는다며 가벼운 언쟁을 벌이는 소릴 들으며 한녹영이 쓰게 웃었다. 함께 들은 이은수가 미안해 죽으려고 했다.

“미안해. 괜히 함께 밥 먹자고 했나봐. 어르신들은 연예 뉴스나 기사에 별 관심없으니까 잘 모를 거야. 그냥 그러려니 해.”

“전 괜찮아요, 누나. 그리고 두 분 중 한 분은 제 편이잖아요.

“이왕 왔으니까 후딱 먹고 일어나자.

“전 내일 촬영 때문에 술은 마실 수 없으니 식사만 하고 먼저 일어날게요. 은수 누나는 작가님과 느긋하게 드세요.

“그치만······.”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저랑 같이 일어나시면 오히려 제가 더 미안해져요.

한녹영의 고집에 이은수가 “그래, 그럼.” 하고 말했다. 곧 김춘영이 도착했고 두 사람은 닭발을 안주 삼아, 한녹영은 반찬 삼아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잠깐 더 앉아 담소를 나누었던 한녹영이 눈치를 보고 일어섰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녹영씨, 조심해서 가고. 다음에 느긋하게 봐.”

이은수가 손을 흔들었다.

“곧 일정 조율을 위해 연락할게.”

김춘영이 말했다. 한녹영은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친 후 식당을 나왔다. 두 걸음 정도 걸었을 때 이은수로부터 「계산은 왜 하고 갔어?!」 하는 문자가 왔다. 한녹영은 「얼마 안 되던데요. 맛있게 드세요.」 하고 답변을 보냈다. 차를 김춘영의 스튜디오 앞에 대두고 온 터라 머플러를 눈밑까지 둘둘 감아 얼굴을 가린 채 좀 걸어야 했다. 식사하러 들어갈 때만 해도 그럭저럭 밝더니 1시간 사이 해가 완전히 저버려 사위가 어둑했다.

춥다.

오늘부터 또 강추위가 며칠간 이어진다고 했었지. 야외촬영이 많은데 춥다니 좀 걱정이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라 한녹영은 어깨를 바짝 움츠린 채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걸었다. 번화가를 지나 김춘영의 스튜디오가 있는 어둑하고 조용한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한녹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움찔한 한녹영이 시선을 들었다. 그리곤 가로등에 비친 얼굴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영택이었다. 저를 향해 비열하게 웃는 얼굴을 본 순간 불길함이 오싹하게 일었다.

“오랜만이야. 그간 잘 먹고 잘 지냈나봐. 생각보다 얼굴이 좋은데?”

“무슨 일입니까?”

한녹영이 침착하게 물었다.

“난 누구 덕에 경찰 조사나 받고 다녔는데 말이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들이 바로 짭새들이거든. 근데 너 때문에 하루 종일 짭새들에게 시달렸더니 기분이 아주 더러워.”

하영택이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그게 왜 나 때문입니까? 본인이 저지른 짓 때문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조금도 안 하는 모양이네요.”

“이 새끼야. 그러니까 얌전히 재계약해서 그동안 했던 것처럼 말 잘들었으면 좋았잖아. 왜 갑자기 머리가 홱 돌아서 독립하겠다고 설쳐?! 너 그거 강준일 때문이지? 나 참, 강준일이라면 학을 떼기에 둘이 얽힐 일은 없겠거니 했는데. 와······ 완전 우릴 감쪽같이 속였대? 내가 태어나서 이런 뒤통수는 또 처음 맞아본다. 강준일이 현재보다 나을 것 같았어? 그래서 그 자식한테 다리 벌려주고 우리 물 먹였냐? 그런 대단한 스폰서를 뒤에 두고 있어서 당당히 현재를 버리고 간 거지?”

“······.”

한녹영이 힐끔 티 나지 않게 뒤를 돌아보았다. 일단 이 골목만 벗어나면 사람들이 많이 다는 번화가다. 고작 열 몇 걸음만 걸으면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대로였다. 여기도 그리 음침하고 인적이 없는 골목은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난 네놈이 마음에 안 들었어. 언젠가는 배신 때리고 갈 새끼라는 감이 딱 왔다니까. 진작 영상을 떠뒀어야 했는데. 그래야 네 놈 목에 확실한 목줄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뭐 늦은 건 아니지. 지금이라도 떠두면 되니까.”

히죽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뒷덜미가 빠죽 서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한녹영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현재가 하도 네 놈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지금껏 기다렸는데 봐봐. 현재 방법이 안 먹혔잖아. 완전 실패했잖아. 네 놈 뒤에 강준일이 있다는 걸 몰랐으니 그랬겠지만. 어쨌든 현재 놈 방법이 실패했으니 이제 내 식으로 해결하려고. 아아. 걱정하지 마. 영상은 아주 기막히게 떠줄 테니까.”

대체 무슨 영상을 뜨겠다는 건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지금 하영택이 저를 강간하는 영상을 떠두겠다고 말하는 거다. 스스로 하든 남을 시켜서하든 결론은 같았다. 강간. 누구와 하든 절대 합의하지 않을 테니 결론은 강간인 것이다.

소름이 오싹 돋았고,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공포심이 들었다. 뒤로 주춤 물러서는 순간 또 다른 남자들이 슥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뒤를 돌아보니 다섯 명의 남자들이 보였다. 그 중 가운데 서 있는 남자가 거의 190에 가까운 떡대였는데, 그가 한녹영을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대고 있었다.

“인사해. 저기 제일 큰 놈이 오늘 네 서방이 되어줄 놈이니까. 덩치만큼 좆도 굵직한 놈이니까 네 놈 구멍을 아주 잘 쑤셔줄 거야. 뭐, 하다 보면 옆에 있는 다른 놈들이랑 구멍 동서가 될 수도 있고.”

“하영택, 너 미쳤어? 경찰 수사 받는 도중에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당연히 무사하지. 영상만 떠두면 만사해결인데. 왜? 강간당했다고 사방팔방 광고라도 하게? 대한민국에서 얼굴 들고 살기 싫으면 그렇게 하든가. 안 말릴 테니까 마음대로 해.”

“미친 새끼. 그래. 얼굴 팔려서 대한민국 땅 떠야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 가만 안 있어. 죽더라도 네 놈은 물어뜯고 죽을 거야.”

손끝이 덜덜 떨렸다. 고층 빌딩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한녹영은 태연한 척 연기하며 하영택을 쏘아보았다. 네깟 놈 따위 겁 안나. 절대 겁먹은 티를 내서 네놈을 기쁘게 해주는 일 따윈 안 해.

“믿는 구석이 있으니 아주 당당하네?”

한녹영이 차갑게 하영택을 노려보았다. 믿는 구석이라······ 강준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우습게도 강준일을 떠올리자 덜덜 떨리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강준일이라면 제가 무슨 짓을 당해도 감싸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녹영이 주먹을 꾹 쥐며 날카롭게 말했다.

“너 같은 놈 앞에서 당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왜? 내가 겁먹을 줄 알았어? 마음대로 날뛰어봐. 난 절대 네 놈한테 겁 안 먹어. 네놈이 지금 당장 내 배에 칼을 쑤셔 넣는다고 해도 절대.”

“독한 새끼. 어디 저 놈 밑에 깔려서도 그렇게 눈깔 치뜨는지 두고 보자. 뭐해? 제압해서 차에 싣지 않고.”

하영택이 말한 순간 뒤에 서 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이 한녹영의 뒷덜미를 퍽 쳤다. 아찔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녹영은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하영택을 노려보았다.

☆☆★☆☆

강준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다시······ 다시 한 번 말해봐.”

흥분한 기색 없이 조용하게 내뱉은 말에서 얼음기가 버석버석 느껴졌다. 수화기 맞은편의 한성준이 잠깐 숨을 멈추었다.

ㅡ 하영택이 한녹영씨를 납치했다고 했습니다. 대표님 지시로 하영택 뒤에 사람을 붙였는데, 좀 전에 하영택이 압구정에서 한녹영씨를 납치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 우리 쪽에서 붙인 남자가 은밀하게 하영택의 뒤를 쫓으며 실시간으로 위치를 알려주는 중입니다. 즉시 경호팀 보냈습니다.

“어디로 움직이고 있어?”

ㅡ 가평 쪽입니다.

“주소 보내.”

ㅡ 네.

한성준이 전화를 끊었다. 강준일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그리곤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구속수사를 진행했어야 했는데 장현재의 스폰서 쪽에서 손을 써서 기소 전 잠깐 풀려난 놈이 정말 이런 무모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설마, 하는 의심에 하영택 뒤에 사람을 붙이면서도 최소한의 안전장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납치? 그것도 압구정에서? 그 새끼가 돌았나.

이제 한녹영의 뒤에 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현재가 이런 무모한 짓을 벌였을 것 같진 않고, 하영택이라는 그 쓰레기 깡패의 단독 행동인가. 단독이든, 공모든 아무 상관도 없지만 말이다.

설마 연예인을 대놓고 납치하려 할 줄이야. 상상을 뛰어넘는 미친 행동에 헛웃음만 나왔다. 어쨌든 참 고맙군. 자꾸 이런 식으로 한녹영의 존재를 제 가슴에 깊이 푹푹 박아주니 말이다. 한녹영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의 존재가 더더욱 절절해지고 있었다.

들끓는 마음을 힘겹게 가라앉힌 강준일이 깊이 잠든 조부를 돌아보았다. 병원이라면 질색하는 앙반이 순순히 입원을 결정했을 정도로 증상이 심했다. 설사가 심해 나중에는 기다시피 화장실을 다니셨던 탓에 병원 행을 받아들이신 거지만, 어쨌든 입원해서 처치를 받은 덕분에 안색이 나아진 상태였다.

“할아버님. 저한테 빚 하나 지셨습니다.”

다른 놈들은 싫으니 네 놈이 병간호해라, 하고 엄포를 놓은 바람에 꼼짝없이 병실에 붙들려 있느라 한녹영과의 데이트도 물 건너갔고, 더불어 그를 위험에 처하게 했으니 빚도 보통 빚이 아니었다. 예정대로 한녹영과 데이트를 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코트를 챙긴 강준일이 병실을 나서려는 순간 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주애리와 마주쳤다.

“어머, 도련님. 어디 가시려고요?”

“볼일이 생겼습니다.”

다른 놈들은 필요 없으니 전부 꺼지라는 조부의 불호령이 있은 후에도 주애리는 3-4시간마다 한 번씩 병실에 들렀다. 누가 보면 아주 헌신적인 손부라고 할 정도로 열정적인 방문이었다.

“할아버님은 어쩌고요?”

“형수님이 오셨으니 잠시 부탁하면 되겠군요.”

“가만 보면 도련님께 조부님은 중요한 사람이 아닌가 봐요. 편찮으신 분을 두고 어딜 가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더군다나 조부님이 직접 도련님께 병간호를 부탁하셨는데요.”

한숨까지 탁 쉬며 하는 말투가 꼭 이간질하는 간신 같았다.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1시간이면 어머님과 할머님이 도착하실 겁니다. 그 사이에 조부님이 깨지면 점수나 듬뿍 따고 계시던가요.”

“무슨 그런······.”

모욕 받은 듯 왈칵 눈살을 찌푸리는 주애리를 뒤로 한 채 급하게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휴대전화에 한성준으로부터 실시간 메시지가 도착하고 있었다. 강준일이 급하게 차를 몰았다.

「최종 목적지입니다.」

잠시 후 최종 주소가 도착했다. 그 주소를 내비에 입력한 후 최대한의 속도로 밟았다.

목적지는 가평 외곽에 있는 한 2층집이었다. 문이 활짝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니 한성준이 보낸 경호팀이 하영택과 그 패거리로 보이는 남자들을 제압한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강준일을 보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녹영은?”

강준일은 일단 한녹영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저쪽 방에 계십니다. 아직 깨지 않으셨습니다.”

강준일이 경호원이 말한 방에 들어섰다. 이 방안에서 뭘 하려고 했는지 바로 알겠다. 카메라 삼각대가 쓰러져 있었고, 렌즈가 깨진 카메라가 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한녹영은 몸에 이불을 덮은 채 기절한 상태였는데, 이불을 들춰보니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옷을 막 벗기려는 찰나 경호팀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시간이 잘 맞아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뻔 했다. 강준일은 일단 한녹영의 얼굴부터 꼼꼼히 살펴보았다. 기절시킨 것 같은데,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짧게 숨을 내쉰 강준일이 한녹영을 안아들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거의 얼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얻어맞은 남자가 보였다. 그가 입에서 피 거품을 뱉어내며 퉁퉁 부은 눈으로 강준일을 노려보았다.

“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버, 법치국가에서 사람을 이렇게 패고······ 내가 너희들 다 고소할거야!”

가장 기세등등한 걸 보니 저놈이 하영택인가 보았다. 이름만 들었지 얼굴은 본 적 없는데도 곧바로 짐작이 되었다. 하영택은 심하게 얻어맞아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애써 허세를 부리며 강준일을 협박했다. 강준일이 실소했다.

“법치국가라서 사람을 납치해 강간하는 영상을 뜨려고 했던 모양이지. 네 놈이 하영택인가 본데, 걱정하지 마. 법대로 평생 감방에서 썩게 만들어줄 테니까. 안타깝지만 돈만 있으면 뭐든 되는 사회인데, 다행히도 내겐 돈이 썩어날 만큼 많아서 말이지.”

한 번도 그 돈을 부정적으로 써본 적은 없는데, 이참에 한 번 써볼 생각이었다. 굳이 한녹영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저런 놈은 사회에서 영원히 분리시키는 편이 나았다.

“혀, 현재가······.”

“네 놈의 사촌인 장현재 말인가.”

하영택에게로 걸어간 강준일이 움찔움찔 떠는 그의 턱을 신발 끝으로 들어올린 후 조용하게 말했다.

“내가 태양이면 장현재는 반딧불이 정도도 안 되는데, 내 앞에서 장현재가 절대적인 구명줄이라도 되는 냥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 내 마음이 슬프지 않겠어?”

“······.”

그 사실을 하영택 또한 잘 알고 있어 차마 더 이상은 장현재를 방패삼아 위세를 부리지 못하겠는지 “저 자식이 잘못한 거야. 한녹영 저 새끼 잘못이야.” 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던 강준일이 시선을 들어 경호원들을 바라보았다.

“우선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가둬둬.”

일단 검경 윗선에 약을 풀어둔 후에 경찰서로 배달해야 하니까.

“네. 대표님.”

강준일은 그대로 하영택의 턱을 걷어찬 후 바깥을 향해 걸었다. 그리곤 조수석에 한녹영을 조심스레 앉힌 후 그 역시 운전석에 앉았다. 한녹영은 빌라에 도착한 후 다시 안아서 침대로 옮기는 순간까지도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한녹영을 이렇게 안아서 옮기는 일이 벌써 세 번째인가.

“실속 없이 힘만 쓰게 하고 말이야.”

한녹영의 콧날을 톡 건드린 강준일이 몸을 일으켰다. 기분이 엉망진창이라 브랜디 한 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막 걸음을 떼려 한 순간 눈을 뜬 한녹영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실속 만들면 되잖아요.”

약간 잠겨있긴 하지만 목소리가 또박또박했다. 눈빛 또한 또렷해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짧은 시간 안에 한녹영의 표정과 눈빛 등을 살펴본 강준일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깬 건가?”

“대표님이 저 침대에 눕히려고 할 때 깼어요.”

처음에는 제가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다는 걸 알고 놀랐지만 이내 절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감촉이며, 냄새며 익숙했던 것이다.

“그런데 감쪽같이 계속 정신을 잃은 척 한 거란 뜻이군. 이제 보니 한녹영씨 앙큼한 데가 있어.”

한녹영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김춘영의 스튜디오가 있는 골목에서 하영택 부하로 짐작되는 남자에게 목 뒤를 얻어맞은 후 기절했는데, 깨어보니 강준일의 품이라니. 안심이 되면서도 의아했다. 그가 절 구해줬다는 건 알겠는데, 그 경위가 궁금했던 것이다.

“혹시 몰라 내가 하영택 뒤에 사람을 붙여뒀어. 정말 최소한의 안전장치였고, 혹시 도피하게 되면 잡아둘 목적이 더 컸는데, 설마 납치라니.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무모하고 생각 없는 사람들인 줄은 몰랐어.”

강준일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을 끝낸 후에 혀를 차는 얼굴이 얼음 같았다.

“하영택은 근성이 깡패라 그래요.”

“한녹영씨한테 경호팀 붙여줄 거야.”

“대표님.”

“불편해도 참아. 진작 경호팀 보내서 한녹영씨 신변을 지켰어야 했는데, 늘 매니저와 같이 다니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 이런 판단 미스는 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야. 만약 한녹영씨가 일이라도 당했다면 평생 뼈아프게 자책했을 거야.”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격앙되며 속에서 불길이 아는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강준일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상호 형이 사무실을 보러 가느라 혼자 움직였더니······ 그래도 이렇게 무사하잖아요. 대표님이 발 빠르게 움직여주신 덕분에 저 말짱해요.”

한녹영이 강준일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강준일은 그런 한녹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그의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내가 대단한 사람을 애인으로 삼을 작정을 한 것 같아. 겨우 예비 애인이면서 날 이처럼 쥐락펴락하니 말이야. 예비 자가 떨어지기도 전에 이렇게 애태우는데, 진짜 애인이 되면 얼마나 더 내 애간장을 졸이게 할지 걱정이 커.”

얄밉다는 듯 강준일이 한녹영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다. 말라서 꼬집을 살이 별로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강준일이 쯧 혀를 찼다. 찌라는 살은 안 찌고 툭하면 걱정이나 끼치고 말이야. 어째 마음을 정하기 전보다 한녹영에게 백기를 들고 그와 연애를 하자고 결심한 이후의 감정이 더 치열했다.

“잠깐 기다려. 커피에 브랜디를 타서 가져올 테니까. 마음이 진정될 거야.”

강준일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표정이 안정되어 보이긴 하지만 그런 일을 겪었다. 속까지 멀쩡할 리 없었다. 커피에 브랜디를 독하게 섞여 먹이면 한녹영의 술버릇으로 보아 곧 잠들겠지. 우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지금보다 더 안정되어 있을 것이다.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한녹영이 저와 함께 있음을 알리고 내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봐야겠군.

“나랑 잘래요?”

강준일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한녹영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

“나랑 자자고요.”

“흠······ 혹시 그놈들이 약을 먹였나?”

강간을 수월하게 하려고 최음제 같은 걸 먹였나? 몸이 수월하게 열리지 않을 테니 약을 먹인 건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하지만 약 먹은 기색은 안 보이는데. 강준일의 물음에 한녹영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 안 먹었거든요. 아까 실속 없이 힘만 쓴다면서 투덜댔잖아요. 그래서 대표님 실속 있게 만들어주려고요. 그러니까 실속 있게 나랑 자자니까요?”

“이봐 한녹영씨, 방금 그 발언 위험했어. 허기진 맹수 입안에 토끼가 앞발을 집어넣은 거나 마찬가지인 발언이었다고.”

“배고프면 먹으면 되잖아요. 왜 참아요?”

참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듯 책망하는 말투에 기가 막혔다. 기껏 배려했더니 ‘왜 차려둔 밥상도 못 먹어?!’ 하고 원망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준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진짜 놈들이 약 먹인 건 아닌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한녹영이 버럭했다. 자자고 했으면 오케이를 외치며 터프하게 옷을 벗어던질 일이지, 사람 민망하게 왜 자꾸 약 했냐, 제정신이냐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제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시간이 제일 부족한 사람이 그냥 말뿐인 장난으로 데이트 하자, 넌 내 예비애인이다, 라고 하진 않았을 테고. 한녹영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왔다. 물건 성능 이상도 아닐 테고. 강준일 물건의 성능이라면 제가 이미 확인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저 물건은 아주 팔팔하게 움직였다. 지나칠 정도로 말이다.

“아까 하영택이 내 영상 뜰 거라고 협박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알아요?”

강준일이 다시 앉았다.

“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대표님이랑 빨리 자버릴 걸, 하는 후회였어요.”

솔직하게 말하고 나니 좀 민망해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근데 진짜다. 정말 그 순간에 ‘대표님이랑 확 자버릴 걸.’ 하고 후회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강준일과의 섹스는 황홀 그자체였지만 그와 섹스하게 된 상황 자체는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강준일과의 관계가 미묘하게 흐르면서 당연히 그와의 섹스도 예상했고, 만약 그와 몸을 나누게 된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오르는 침대 위에 서로를 향한 욕망과 감정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올라가지 말자고 말이다.

하지만 한녹영은 아직 강준일에 대한 감정의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분명 예전과는 관계가 달라졌고, 그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힘든 상황이 오면 제일 먼저 강준일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를 정도로 의지하게 되었고, 그와 나누는 대화가 즐겁다. 가슴이 뛰고 오랫동안 보지 못하면 보고 싶기도 했다. 좋아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제가 아는 사랑과 너무 달라서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차근차근 관계를 발전시키며 그 속에서 제 감정의 실체를 찾아 가자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런 후회를?”

“내가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그런 일을 당한 후까지 말짱할 순 없을 거잖아요. 내가 기억하는 대표님과의 섹스는 황홀함뿐이었는데, 그 기억을 망칠까봐 무서웠어요.”

섹스를 쾌감이 아닌 두려움으로 기억하게 될까봐 무서웠다고 할까. 강준일과의 섹스 도중 나쁜 일을 당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몸이 굳어질까봐 두려웠다고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던 한녹영이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것저것 다 빼고요. 그냥 처음은 대표님이랑 하고 싶었어요.”

말이 버럭 짜증을 내는 것처럼 나왔다.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굳이 변명처럼 이 생각 저 생각 갖다붙일 필요 없이 하영택 입에서 영상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럴 줄 알았으면 대표님이랑 그냥 확 해버리는 건데.’ 였다.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가 참 어이없다. 그 와중에, 그 긴박하고 위험한 와중에 그딴 생각이나 했으니. 순결을 중요시하는 조선시대 여염집 처녀도 아니면서 처음 어쩌고는 또 뭐야. 피식 웃음이 나와서 혼자 실실 웃자 강준일이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흡사 미친놈 보듯 봤다.

“왜 웃지?”

“그냥 웃겨서요. 그 와중에 대표님이랑 먼저 못해서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제가 어이없······.”

피식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가던 한녹영의 입을 강준일이 막았다. 그는 한녹영의 목에 팔을 감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입술을 겹쳤다. 그리곤 곧장 벌어져 있는 입술 안으로 혀를 넣었다. 당황한 듯 움찔움찔하는 혀를 얽어 제 입안으로 끌어당기며 주춤되는 한녹영의 허리를 안아 가슴으로 더 바싹 당겼다. 당당하게 자자고 해놓고 막상 입술이 겹쳐지자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며 어쩔 줄 몰라 하던 한녹영이 머뭇머뭇 강준일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민망해진 한녹영이 주먹으로 그의 등을 쿵 내려친 순간 키스가 깊어졌다. 혀가 빨리고 잘근잘근 씹혔다. 한녹영의 목구멍에서 가느다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흐, 흐으으······.”

숨이 모자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들썩거렸고, 시야가 멍해졌다. 한녹영의 혀를 힘차게 빨고, 잇새로 깨물고, 타액까지 듬뿍 빨아들이며 열정적인 키스를 하던 강준일이 한참 만에 떨어졌다. 한녹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녹영의 타액으로 흠뻑 젖은 아랫입술을 혀로 느릿하게 핥은 강준일이 눈매를 휘며 물었다.

“한녹영씨가 그랬지. 섹스도중 내게 애원했다고 말이야. 그 말이 내 자극점이었는데······ 내게 애원할 준비 됐어?”

그의 눈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누가 애원할 지는······ 두고 봐야 알죠.”

허세를 부리는 한녹영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한녹영이 숨을 헐떡이며 제게로 다가오는 강준일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중심을. 이전에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인 냥 두려움이 와락 들었다.

그러고 보니 무지하게 컸었지. 저게 제 안에서 얼마만큼의 쾌감을 줬는지 알면서도 더럭 무섬증이 들었다. 한창 절정이었을 때의 장면이 워낙 자극적이고 강렬해서 절정까지 가기 전까지의 일은 잊고 있었는데, 들어올 때 꽤 아팠다. 크기를 봐라, 안 아팠겠는가. 거기다 술 취한 사람에게 뒤를 풀어달라고 할 수가 없어 스스로 젤을 듬뿍 바른 손가락을 뒤에 넣어 어설프게 풀었던 탓에 더더욱 삽입의 순간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욕도 했다. 좀 많이······. 이딴 게 남자끼리의 섹스면 섹스 따위는 평생 하지 않겠다고 이를 북북 갈다가 굵직한 것이 안을 쑤셔대는 감각에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며 욕이 신음과 애원으로 바뀌었던 거고.

키스를 나누는 동안 달아올랐던 몸이 살짝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숨을 꿀꺽 삼키는 한녹영을 보며 강준일이 웃었다.

“왜 떨어?”

“크, 크네요.”

한녹영이 강준일의 중심을 가리켰다. 시선을 내려 본인의 중심을 확인한 강준일이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 욕먹을 만 한 사이즈는 아니지.”

“욕먹을 사이즈인데요. 크잖아요! 그것도 매우!”

가뜩이나 큰 사이즈가 발기까지 하니 거의 흉기였다. 전에도 잠든 강준일의 옷을 벗겨낸 후 한동안 멍했었지. 이게 대체 사람의 크기인가, 이걸 과연 제 몸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지. 대체 왜 앞은 싹 잘라먹고 한창 좋았던 순간만 기억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삽입할 때 진짜 아팠는데.

위협적인 제 사이즈를 손가락질하며 떠는 한녹영을 향해 강준일이 피식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놀라? 우리 둘이 뜨겁게 엉켰다면서? 엉키는 모습은 봤으면서 한녹영씨 구멍을 파고드는 내 좆의 사이즈는 못 본 건가?”

“봤는데······ 잠깐 잊고 있었어요. 대표님 사이즈가 어땠는지.”

“내 좆을 품은 채 더 해달라고 애원하던 한녹영씨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강준일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한녹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속내를 들킨 것도 민망하지만, 그보다······.

“대표님 말투가······ 저기 조금······.”

평소와는 좀 다른데? 절 놀릴 때의 말투조차 늘 품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뭐라고 할까······.

“난 천박한 섹스가 좋거든.”

그래. 어딘지 모르게 천박하고 저속하게 들렀던 것이다. 한녹영이 제 허벅지를 잡고 위로 슥 들어 올리는 강준일을 커다랗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전에 술 취한 강준일을 덮쳤을 땐 오로지 몸의 대화만 나누었던 터라 이런 상황은 꿈에도 몰랐다.

“그············.”

뭐라 말문을 열려 했을 때 젤을 듬뿍 적신 손가락이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강준일은 굵직한 손가락을 단번에 깊이 넣어 매끈한 한녹영의 내벽을 문지르며 다리를 더더욱 높이 들었다. 허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베개 두 개를 겹쳐 한녹영의 허리 아래 둔 후 능란하게 안을 헤집었다.

하나였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었다. 좁은 구멍을 열어 깊숙하게 밀어 넣은  손가락이 내벽을 파헤치듯 자극했다. 손가락에 흥건할 정도로 묻힌 젤 때문인지 손끝이 점막을 헤집을 때마다 질척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참을 수 없이 음란했다.

“아으으······.”

야릇한 신음이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입술을 꽉 깨물어 신음을 참는 한녹영을 내려다보는 강준일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보란 듯이 손가락을 더 깊이 넣어 안을 문질렀다. 손가락이 길어서인지 손톱 끝이 아주 깊은 곳까지 닿았다.

안을 쑤셔대는 감각에 한녹영의 성기가 발기했다.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 꿈틀대며 커지더니 어느새 완전히 발기한 상태가 되었다. 점막을 문지르고 파헤치며 자극해대는 손가락 때문에 쾌감을 기억해 낸 구멍이 제멋대로 벌름대기 시작했다. 뒤로 살짝 빠진 손가락이 점막을 따라 쭉 미끄러지듯 들어올 때마다 오므라들었고, 손가락이 빠지면 뻐끔 열리길 반복했다. 강준일은 명화라도 감상하듯 느긋한 눈으로 한녹영의 구멍이 수축하고 이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손가락을 삼켰다가 내뱉는 한녹영씨 구멍의 움직임이 참을 수 없이 자극적이야.”

한녹영이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씩 웃으며 그런 한녹영의 턱을 깨물어 잘근잘근 씹은 강준일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깊이 안을 파고들었다. 그는 푹 하고 깊이 찔러 넣은 손가락을 빼곤 하나를 더해 세 개를 단박에 마디 끝까지 넣었다. 구멍이 이전보다 더 크게 벌어졌다가 확 수축하며 강준일의 손가락을 꾹 조였다. 나지막하게 신음성을 흘린 강준일이 손가락  세 개를 한꺼번에 구부려 안을 긁어댔다.

허공에 떠 있는 발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구멍이 수축과 조완을 반복하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져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달아오른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뺨에 불이라도 지른 듯 화끈화끈했다.

손가락을 구부린 채로 한녹영의 구멍 안으로 더더 밀어 넣던 강준일이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참는 중인 한녹영을 향해 속삭였다.

“넣어달라고 애원해봐.”

“대, 대표니임······.”

“내 좆으로 여길 쑤셔달라고 울어봐.”

강준일이 한녹영의 내벽을 크게 휘저었다. 반복된 자극에 예민해진 점막이 바짝 오므라들며 강준일의 손가락을 힘껏 조이는 것이 느껴졌다. 울고 싶을 만큼 강렬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제 몸이었다. 강준일의 손가락을 꾹꾹 조이는 점막이 더 큰 걸 넣어달라고 말하듯 꿈틀대고 있었다.

한녹영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넣어······ 넣어줘요. 빠, 빨리요.”

구멍을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뒤로 느슨하게 빠졌다. 한녹영은 몸을 바짝 긴장한 채 곧이어 제 몸을 빠듯하게 채우며 들어올 강준일의 성기를 기다렸다. 잔뜩 성이 난 성기를 한녹영의 구멍 중심에 맞춘 강준일이 잠깐 멈칫거렸다. 바짝 올라붙은 한녹영의 둔부 근육에서 긴장감이 읽힌 것이다. 이래서야 기껏 풀어둔 보람도 없겠다. 피식 웃은 강준일이 한녹영의 다리를 잡고 뒤집었다. 한녹영의 얼굴이 시트에 파묻혔다.

“긴장하지 마.”

“기, 긴장 안 하는데요.”

강준일이 한녹영의 배 밑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살짝 부어 발간 구멍이 시야에 훤히 드러났다. 젤 때문에 축축하게 젖어있는 입구는 빠듯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강준일은 잠시 감상하듯 한녹영의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여기로 제 좆을 밀어 넣을 거라고 생각하자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며 중심이 한층 더 커졌다. 손가락을 끊어먹을 듯 조이던 감각 또한 생생해 당장이라도 구멍을 가득 벌리고 제 중심을 푹 박아 넣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강준일이 숨을 가다듬었다.

“기껏 풀어둔 구멍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잖아. 긴장 풀라고, 한녹영씨. 그래야 내 좆을 구멍 가득 넣어줄 거 아냐.”

손을 앞으로 뻗은 강준일이 한녹영의 성기를 잡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제 손보다 훨씬 큰데다 뜨거운 열감을 머금은 손이 성기 전체를 감싸 쥐어짜듯 주물대자 온몸의 감각 아랫도리로 몰리기 시작했다. 소름이 오들오들 올라왔다. 성기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사정감이 참을 수 없이 몰려왔다. 한녹영이 시트에 이마를 문지르며 신음을 흘렸다.

“하읏!!!”

한녹영의 정신이 딴데 팔린 사이 강준일이 중심을 넣었다. 긴장이 좀 풀리자 느슨해진 구멍을 활짝 열어젖히며 굵직한 좆을 끝까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점막이 눌리며 엄청난 압박감이 들었다. 한녹영이 눈을 부릅뜨며 숨을 헐떡였다. 미리 풀 둔 탓인지 전에 경험했던 것 같은 엄청난 통증은 없었다. 다만 굵고 긴 좆이 제 구멍 안을 가득 메우는 압박감에 숨이 잘 안 쉬어졌다. 한녹영이 입을 크게 벌린 채 받은 숨을 하아, 하아, 하고 연이어 쏟아냈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성기를 만져주며 성기를 끝까지 넣었다. 그의 좆은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내장을 압박하며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아래복부가 불룩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성기를 빈틈없이 밀착해 넣은 강준일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땀으로 젖어 축축해진 한녹영의 어깨를 핥았다.

“이제 움직일 거야.”

“자, 자, 잠깐······.”

급히 말해봤지만 이미 늦었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골반을 단단히 잡은 채 깊이 넣었던 성기를 쑥 잡아 뺐다. 귀두만 안에 남겨두고 뺐다가 다시 강하게 퍽 넣었다. 제 내벽을 향해 대포를 쏜 듯했다. 뜨겁고 딱딱한 성기가 점막을 태울 듯 뜨겁게 마찰하며 들어와 박혔다. 한녹영의 내벽이 꿈틀대며 움직였다.

“아, 아아아아, 아흐읏······.”

신음이 마구 나왔다. 눈앞에서 전기가 튀는 것만 같았다. 처음이 아닌데도 마치 처음 겪어보는 쾌감인 냥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강준일이 좆을 콱콱 박아 넣을 때마다 한녹영이 진저리를 냈다. 머리털이 비죽 서는 것 같은 쾌감이었다. 성기 끝에서 정액이 물처럼 줄줄 흘러나와 아랫도리를 온통 적셨다. 시트에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녹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한녹영은 울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굵은 성기가 안을 헤집어댈 때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전과 비교해서 어때? 더 뜨거운가?”

상반신을 숙여 한녹영의 등에 가슴을 밀착한 강준일이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

“네, 네······ 더 뜨겁고······ 더 조, 좋아요.”

한녹영이 정신없이 대답했다. 의식이 없이 욕망만 살아남아 제 안을 헤집어댔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뜨겁고 좋았다. 만족스럽게 웃은 강준일이 성기를 완전히 확 잡아 뺐다가 한녹영의 구멍이 닫히기 전 푹 넣었다. 불덩이를 품은 것처럼 아래가 뜨거웠다. 강준일의 좆이 제 안을 출입할 때마다 내장이 출렁이는 느낌에 어지럼증마저 느껴졌다.

강준일은 마치 오래 전부터 한녹영의 몸을 알아온 냥 능숙하게 안을 헤집었다. 귀두로 포인트를 콱콱 찔러댔다. 허벅지 근육이 단단하게 서며 안을 쿡쿡 찔러대는 강준일의 좆을 빠듯하게 조였다.

한 번 사정한 한녹영의 성기가 다시 빳빳하게 일어나 끄덕대고 있었다. 또 한 번 사정하고 싶어서 난리였다. 그때 강준일이 깊이 박아 넣은 성기를 쑥 뽑아냈다.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이 갑작스레 빠지자 내벽이 수축되며 허전함이 밀려왔다.

“대, 대표님?”

“곧 다시 넣어줄 테니 기다려. 내 것을 품고 있는 한녹영씨 얼굴이 보고 싶거든.”

강준일이 한녹영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곤 새하얀 다리를 잡아 허공에 높이 띄우더니 그가 쑤시는 동안 질척해진 구멍 안으로 성기를 다시 넣었다. 한녹영의 허벅지를 잡고 바짝 끌어당기자 제 좆이 안으로 더 미끄러져 들어가며 결합이 한층 더 깊어졌다. 고환이 한녹영의 입구에 바짝 올라붙었다. 주름에 닿은 음모 탓에 간지러운지 한녹영이 몸을 떨었다.

“대, 대표님······ 하으으윽······ 너무 깊어······ 조, 좋아······.”

결합이 오싹할 만큼 깊었다. 강준일의 좆이 내장 끝까지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한녹영은 몸을 조이며 바들바들 떨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결합에 두려움이 바싹 드는 한편 좋았다.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아찔한 쾌감이 등을 관통하듯 찾아왔다.

“내 좆을 물고 신음하는 한녹영씨 얼굴 최고야. 당장이라도 쌀 것처럼 근사해.”

강준일은 멍한 눈빛을 한 채 강하게 느끼고 있는 한녹영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남자와의 관계는 처음이라고 했던 한녹영은 제가 세게 박으면 박을수록 자지러졌다. 거칠게 푹 넣을 때마다 부드럽고 찰진 점막이 제 좆을 강하게 압박하며 안으로 끌어당길 듯 꿈틀대는데, 그 감각이 오싹하리만큼 황홀했다. 통증은 조금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처음부터 느끼는 몸이라니. 보통 뒤로 처음 남자를 받아들이게 되면 아무리 충분히 풀어둔 후 삽입해도 쾌감보다는 고통을 더 느낀다고 들었다. 그런데 드물게 처음부터 느끼는 남자가 있단다. 전에 두어 번 데리고 잔 적이 있는 남자가 ‘난 남자를 처음 받아들일 때부터 느꼈다. 나 같은 몸이 감도가 좋고 맛있어서 남자들이 환장한다.’고 했었다. 자신만만했던 말처럼 유난히 감도가 좋고 찰진 몸이긴 했었다. 다만 두 번째부터 절 바라보는 눈이 끈적해져서 칼같이 끊어냈고. 단순히 즐기기 위해 만나는 남자와 정으로 얽힐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한녹영은 제 마음을 먼저 가져가더니 몸까지 최고라니, 정말 완벽하다. 무엇보다 누구도 이 몸을 모른다는 사실이 독점욕에 불을 질렀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특별해서 묘한 만족감을 주지 않나.

씩 웃은 강준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녹영의 내장을 완전 짓이기듯 거칠게 푹푹 박아 넣었다.

“흐으읏······ 좋아, 더더······ 그, 그만······.”

강준일이 몸 안을 거칠게 쳐올릴 때마다 한녹영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한녹영은 더 해달라고 애원하다가 금세 말을 바꿔 그만 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쾌감과 두려움이 밤과 낮처럼 번갈아가며 찾아왔다.

강준일은 정신없이 한녹영의 안에 좆을 박아 넣으며 상반신을 숙여 한녹영의 입술을 빨았다. 깊이 넣은 중심을 크게 휘저을 때마다 한녹영이 경련하듯 몸을 크게 떨었다. 쾌감이 심장을 파고드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뜨거웠다.

“으, 으으······ 하아아아아······.”

한녹영의 중심에서 또 한 번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녹영은 두 번째 사정을 하며 젖은 눈으로 강준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직 사정 전이었다. 여전히 딱딱하게 발기한 좆으로 제 안을 퍽퍽 쳐올리는 중이었다. 점막이 아플 만큼 경련했다. 불기둥을 품고 있는 것처럼 화끈화끈했다. 그의 좆이 몸 속 깊은 곳을 찔러 줄 때마다 전신이 바르르 떨리며 숨막힐 듯한 쾌감이 찾아왔다.

“한녹영씨, 좋아?”

뒤로 쑥 잡아 뺀 성기를 강한 힘으로 크게 쿡 밀어 넣은 강준일이 은근한 속삭임으로 물어왔다. 한녹영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아요. 대표님은요?”

“나도 좋아. 황홀해. 내 것을 품은 채 울고 있는 한녹영씨 얼굴은 정말 최고야. 심장이 녹아버리겠어.”

하아, 한숨이라도 쉬듯 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눈매를 접으며 웃은 한녹영이 미끄러져 내려온 다리를 다시 들어 강준일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둔부에 힘을 주었다. 자연히 내장에도 힘이 들어가며 안에 깊이 박혀 있는 강준일의 중심을 빠듯하게 조였다. 그의 미간에 굵직한 주름이 잡혔다.

“재촉하지 마. 재촉하지 않아도 한녹영씨 안이 흥건해지도록 싸줄 거니까.”

그게 아닌데. 지루인가 싶을 만큼 사정을 안 하기에 이제 그만 사정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 힘주어 조인 건데······. 한녹영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강준일의 좆이 망치로 쾅 내려찍은 것처럼 내장 안에 푹 박히더니 정액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한녹영의 둔부를 단단히 잡고 중심을 완전히 내벽 안으로 밀착해 넣은 채 정액을 쏟아냈다. 안이 순식간에 흥건해졌다. 흡사 물이라도 쏟아 넣은 것 같았다. 제 내장 안이 정액으로 가득 차는 낯선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한녹영이 입을 벌린 채 온몸을 웅크렸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점막에 고이는 정액의 느낌이 말도 못하게 이상했다. 그때는 콘돔을 썼었는데, 안에 직접 싸는 느낌이 이런 건가. 점막이 지끈지끈한 것 같기도 하고, 안이 출렁이는 듯한 감각이······. 낯설고, 이상하고, 오싹거리고, 뜨겁고······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생경함에 자꾸만 몸이 떨렸다.

“이, 이상해요.”

한녹영이 겁먹은 사람처럼 잔뜩 움츠린 채 말했다.

“뭐가?”

“안이 젖어드는 느낌이······.”

한녹영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민망함과 수치심에 다시금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붉은 물감으로 반복해서 덧칠한 것처럼 한녹영의 하얀 얼굴이 붉어졌다. 강준일은 그런 한녹영을 다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제 것을 품은 채 수줍어하는 얼굴이 말도 못하게 귀여웠다. 사랑스러움이 가슴 안에 고였다. 솜사탕을 핥고 있는 것처럼 달콤한 기분이 전신을 내달렸다. 섹스야 수없이 해봤지만 이런 만족감은 처음이었다.

내거다. 내 사람. 강준일이 한녹영의 젖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면 곤란한데.”

한녹영은 뭐가 곤란하냐고 묻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사정 후 쪼그라들었던 강준일의 중심이 부풀며 제 점막을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한녹영의 눈썹이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러라고 한 말 아닌데요.”

“하지만 이렇게 됐으니 책임져줘야겠어.”

“자, 잠깐······.”

좀 쉬었다가······ 아니면 안에 잔뜩 싸놓은 거라도 좀 빼놓고 하든가······. 강준일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는 한녹영의 가슴을 압박하듯 안으며 순식간에 한껏 발기한 중심을 재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화벨 소리가 난리였다. 끊이지 않고 계속 울렸다. 강준일은 뱃속의 정액을 다 긁어낸 후 욕조 안에 들어앉아 나른하게 늘어져 있다가 그대로 잠든 한녹영을 안고 바깥으로 나왔다. 마지막 삽입을 할 때부터 시작된 벨 소리는 느긋하게 씻고 나온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분명 매니저일 테니 꼭 받아야 한다며 앓는 소리를 했던 한녹영은 완전히 지쳐 뻗은 탓에 저렇게 크게 소리가 나는데도 모른 채 곯아떨어졌다.

강준일은 한녹영을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후 마지못해 휴대전화를 집었다. 한녹영의 예상대로 매니저였다.

ㅡ 한녹영! 너 지금 어디야? 너 진짜 이럴래? 내가 잠수타지 말랬지!! 이은수 에디터랑 김춘영 작가와 저녁만 먹고 곧장 집으로 간다던 애가 왜 집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 진짜 화낸다.

여보세요, 라고 할 틈도 없이 전화를 받자마자 곧장 매니저의 화난 음성이 벼락처럼 쏟아졌다. 강준일이 세상모르고 잠든 한녹영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아이처럼 입을 벌린 채 잠든 얼굴이 꽤 피곤해 보였다.

처음인데 너무 몰아붙였나. 몇 번이나 사정했지? 대충 다섯 번은 한 것 같은데, 오랜만의 섹스인데다 한녹영의 몸속이 녹을 만큼 좋아 좀 무리를 시킨 감은 있었다. 한녹영이 울먹이며 “나 내일 촬영 가야해요!” 하고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아마 좀 더 했을 거다.

‘중간에 살짝 이성을 잃긴 했지.’

한녹영이 들었다면 기함하며 ‘살짝이 아닐 텐데요?’ 하고 반박했을 생각을 태연히 하며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참으려던 사람을 왜 자극시켜서 화를 자초해? 꼭 단계를 밟아서 손잡고 키스하고 포옹하고 섹스, 이렇게 발전시킬 마음은 없었지만 적어도 데이트 두세 번은 한 후에 한녹영이 느긋한 날을 잡아 하려고 했는데 겁 없는 토끼가 자극해댄 바람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처음은 대표님이랑 하고 싶었어요.’

‘그냥 웃겨서요. 그 와중에 대표님이랑 먼저 못해서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제가 어이없······.’

이런 말을 듣고도 참는다면 남자도 아니지. 강준일은 아랫도리 성능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남자라 당연히 참지 않았다. 그리곤 좀 후회했다. 아껴먹은 토기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왜 진작 먹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흠. 한녹영의 스케줄 표를 받아둬야겠군. 하다만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고 만족스레 하려면 아무래도 다음 날이 휴일인 편이 좋을 테니 미리 스케줄 표를 받아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강준일이 혼자만의 음흉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박상호는 대답 없는 한녹영에게 혼자 애타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ㅡ 한녹영! 너 대답 안 해?! 나 애타죽는 꼴 보려고 이러는 거야? 녹영아. 한녹영? 형이야! 대답 좀 해라!

이러다 숨넘어갈 지경이었다.

“강준일입니다.”

ㅡ 그래. 강준일······ 네?! 대, 대표님? 어어, 혹시 지금 녹영이와 같이 계시는 겁니까?

“네. 한녹영씨는 지금 제 빌라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ㅡ 녹영이가 왜 대표님 빌라에······ 그리고 어째 대표님 빌라에만 들어가면 애가 연락두절이 되네요.

말에 은근히 가시가 있었다.

“지금 자고 있습니다. 내일 촬영 가야하는 시간 전에 데려다주죠. 내일 촬영은 몇 시부터입니까?”

ㅡ 9시까지 파주에 가야하니 적어도 7시 반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7시까지 데려가죠.”

ㅡ 아니요.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아침에 대표님이 녹영이를 집에 데려다주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좀······. 예민하고 조심해야 할 시기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박상호의 말이 맞다.

“그럼 7시 반까지 데리러 오십시오.”

ㅡ 7시까지 가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녹영이랑 통화 좀······.

강준일은 박상호의 애타는 소리를 못들은 척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침대 쪽을 봤는데, 여전히 한녹영은 실신하듯 자는 중이었다. 강준일이 시계를 보았다. 11시. 함께 아침을 먹고 싶으니 6시에는 깨워야겠지. 그럼 7시간 정도의 수면이 되는 셈인가. 잠이 아주 부족하진 않겠군. 고개를 끄덕인 후 한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고해.”

늦은 밤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 말도 없이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상사의 태도에 한성준이 대놓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ㅡ 검경 모두에 줄을 대 최대한 빨리, 가능한 높은 형량을 보장받았습니다. 뒤탈 없도록 두둑하게 뇌물 먹이느라 대표님 쌈짓돈이 꽤 줄었습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돈 쓴 기분을 느끼겠군. 장현재쪽 움직임은 어때?”

ㅡ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잠합니다.

역시 단독 행동인가.

ㅡ 내일은 일요일인 거 아시죠? 주말에는 대표님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러니 가능하면 전화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강준일이 입끝을 울렸다.

“그렇게 말하니 내일도 일을 만들어 시키고 싶군.”

ㅡ 질척대지 마십시오. 저한테 하는 것처럼 한녹영씨한테 하다간 차입니다. 남자는 질척대는 사람 싫어합니다.

“······.”

ㅡ 질척대셨나보군요. 한녹영씨한테 차여도 위로는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쿨하다는 외부의 평가와는 달리 사실 대표님은 질척대고, 집요하고, 집착도 심하며, 뒤끝도 긴 성격이라 오래지 않아 차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긴 했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한성준은 제 할 말만 또박또박한 말투로 따박따박하더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강준일이 끊어진 전화를 어이없이 내려다보았다. 토요일에 일시키고, 늦은 밤에 전화했다고 꽁해서 한 말 같은데······ 이 자식 남극에 지사 하나 만들어서 지사장으로 내보내버릴까? 한 오년 굴리면 기가 팍 죽어 돌아올 텐데.

뭐? 오래지 않아 차여? 나 참. 아예 시작을 안했다면 모를까, 이미 몸까지 맞춘 마당에 놓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저는 장현재처럼 품안의 보석을 흘려보낼 정도로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다.

☆☆★☆☆

몸이 흔들렸다. 깊이 잠든 의식을 깨우는 손끝이 서늘했다.

“일어나.”

한녹영은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누웠다. 아직 잠이 부족하다. 더 자고 싶었다.

“30분, 아니 20분만 더.”

조금만 더 자자. 제발. 애원하듯 말한 한녹영이 베개에 얼굴을 푹 묻었을 때였다. 누군가 제 몸을 똑바로 누이더니 이내 입술을 겹쳐왔다. 곧장 혀가 엉켰다. 강한 힘으로 혀가 빨리고 깨물렸다.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뭐, 뭐야? 박상호가 저를 깨우는 거라 생각하고 투정을 부렸던 한녹영이 눈을 번쩍 뜨며 제 혀를 아예 뽑아낼 듯 빨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뭐, 뭐에요?!”

가쁜 숨이 쏟아지듯 나왔다.

“키스로 눈뜨는 아침을 원하는가 해서.”

놀란 토끼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는 한녹영을 향해 웃는 강준일의 얼굴이 느긋했다.

“키스? 방금 전 그게 키스에요? 난 또 잡아먹히는 줄 알았네.”

순간 사자의 입속에 머리를 들이댄 토끼가 된 기분을 느꼈다. 툴툴대는 한녹영을 내려다보며 강준일이 짧게 웃었다.

“좀 더 자게 두고 싶지만 지금도 아슬아슬해. 한녹영씨 매니저가 7시까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지금 6시 반이거든. 같이 아침이라도 하고 싶어 30분 전에 깨웠는데 일어나질 못해서 그나마 30분 더 봐준 거야. 커피라도 같이 하게 씻고 나와.”

말을 마친 강준일이 먼저 침실을 나갔다. 잠이 깨긴 했지만 아직 멍한 기운이 좀 남아있어 잠깐 눈만 깜박깜박하고 있던 한녹영이 비척대며 일어섰다. 그리곤 침실에 딸린 욕실로 가니 세면대에 새 칫솔이 놓여있었다. 강준일이 저를 위해 꺼내둔 것인 것 같았다. 새 칫솔을 보자 함께 밤을 보낸 다음 날 기분이 확 와닿아 멋쩍어졌다. 새 칫솔 하나에 왜 야한 기분이 들고 난리인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수줍어하던 한녹영은 “한녹영씨. 서둘러야 할 거야.” 하는 강준일의 눈치 없는 채근에 입매를 삐죽대며 칫솔을 뜯었다.

세수를 하고 부스스 뜬 머리카락을 물로 진정시킨 후 거실로 나가니 은은한 커피 향이 나고 있었다. 한녹영은 잠깐 눈을 감고 커피향을 맘껏 들이켰다. 그리곤 부엌으로 들어가니 식탁에 커피와 과일이 보였다.

“과일로 요기라도 해.”

그렇지 않아도 허기가 심하게 느껴지던 차였다. 한녹영은 사양도 않고 곧장 포크를 집어 사과부터 먹기 시작했다.

“누구 덕분에 배고파 죽겠어요.”

어제 저녁 잔뜩 힘을 쓴 육체가 빨리 에너지를 충전하라고 난리였다. 본래 아침에는 식욕이 없는 편이라 박상호가 뭘 먹이려 할 때마다 아이처럼 칭얼대곤 했는데, 오늘은 눈앞에 기름진 장어가 있대도 허겁지겁 주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오늘 종일 촬영인데,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요. 허리도 아프고, 거기는 더······ 아파요.”

방울토마토를 우물우물 씹으며 한녹영이 눈을 흘겼다. 강준일은 배부르게 식사한 여유로운 포식자처럼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러게 누가 자극하랬나.”

“내 탓이라는 거예요?”

“난 참으려고 했어. 적어도 데이트를 두세 번 정도 하기 전까진. 참고 있는 나한테 먼저 자자며 유혹한 쪽은 한녹영씨라고.”

강준일이 모든 책임을 한녹영에게 전가했다. 그리고 기막혀 하는 한녹영을 향해 웃었다. 웃는 얼굴이 정말 지극히 만족스럽고 여유롭게 보여 더 이상 화 낼 마음이 안 들었다. 가볍게 눈을 흘긴 한녹영이 ‘봐줬다. 다 내 책임이라고 하지 뭐. 솔직히 내가 먼저 자자고 덤빈 건 맞으니까.’ 하고 생각하며 커피 잔을 들었다.

“근데 왜 꼭 데이트를 두세 번 하고 난 후에 자려고 생각한 건데요?”

“한녹영씨 몸이 목적이라고 생각할까봐. 사실은 훨씬 전부터 한녹영씨를 안고 뒹굴고 싶었는데 몸만 목적인 짐승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참았어.”

점잖은 신사인 척 하느라 힘들었다고, 하는 강준일을 멍하니 본 한녹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씩 이런 의외의 모습을 보일 때마다 웃음이 터진다. 뭐야.

또 반하겠네.

“그런 것치고는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 같은데요?”

분명 사이드테이블에서 젤을 꺼내 쓴 걸 기억하고 있다. 설마 다른 누군가에게 썼던 걸 남겨뒀다가 제게 쓴 건 아닐 테지?

“새 거였어.”

한녹영의 눈빛에 서린 의혹을 재빠르게 읽어낸 강준일이 말했다.

“데이트를 두세 번 정도 하고 난 이후에 뒹굴 생각이었다고 했지, 전혀 하지 않을 생각이라곤 안 했고. 난 준비성이 철저한 남자니까.”

“누가 뭐랬어요.”

“그리고 내 집에 누군가를 들여 뒹군 적도 처음이고.”

새치름한 표정을 지은 한녹영이 커피를 마셨다. 역시 맛있다. 과히 인생 커피라 할 만 했다. 강준일은 바리스타로 나섰어도 성공했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어젯밤의 나와 한녹영씨가 본 미래에서의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좋았어?”

하마터면 커피를 뿜을 뻔 했다. 간신히 내뱉지 않고 삼킨 한녹영이 시선을 들었다. 강준일이 빙글대며 저를 보는 중이었다.

“네?”

“어젯밤의 나와 한녹영씨가 미래에서 본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좋았는지 물었어. 전에 한녹영씨가 그랬지. 더 해달라고 매달렸을 정도로 내 테크닉이 좋았다고. 혹시 기대에 못 미칠까봐 최선을 다했는데 어땠어?”

“그······ 그야 당연히······.”

“당연히?”

“근데 그게 왜 궁금해요? 둘 다 대표님인데.”

“한녹영씨는 나라고 말하지만, 내 기억 속에 없는 나는 내가 아니니까. 사실 한 번씩 신경이 쓰였거든. 대체 미래의 나는 무슨 복으로 지금의 나는 모르는 한녹영씨의 몸을 알고 있나, 하고 말이야. 내가 날 질투했다고. 그래서 한녹영씨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을 어젯밤 섹스로 덮어버리려고 노력했는데, 내 노력이 통했나?”

어서 빨리 대답해보라는 듯 빙글대는 얼굴이 꼭 칭찬을 원하는 아이 같았다.

“토, 통한 것 같아요.”

말할 것도 없이 지난밤이 더 좋았다. 비록 쾌감이 강렬했다 해도 전엔 저 혼자 발광한 것에 불과했다면, 어젯밤에는 서로를 향한 욕망이 함께 타오른 거니까 말이다.

대답해놓고 민망해진 한녹영이 말없이 과일을 쿡쿡 찍어 먹었다. 어젯밤 제 반응을 봤으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을 텐데, 그걸 꼭 물어서 사람 민망하게 해야 하나. 짓궂긴. 속으로 투덜투덜하며 강준일을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참, 하영택은 어떻게 했어요?”

강준일이 눈살을 찌꾸렸다. 하영택 이름을 듣자 달달한 설탕 위에 재를 뿌린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곧 경찰에 넘길 생각이야. 동시에 한녹영씨 납치하려 한 것도 기사 터뜨릴 거고.”

한녹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제 이름으로 한바탕 시끄럽겠네. 하영택이 절 납치하려 했다는 기사가 터지면 음해설이 훨씬 더 힘을 얻겠지만, 좋지

않은 일로 자꾸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도 썩 좋진 않았다. 게다가 너무 자주 기사가 터지고 이름이 오르내리면 사람들이 피곤함과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심란해진 한녹영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강준일이 말했다.

“조용히 해결하길 원하다면 그렇게 하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강준일의 말에 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녹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기사 터뜨려도 돼요.”

묻어둘 일은 결코 아니었다. 누구 좋으라고 묻어둬? 한울에서 악의적으로 터뜨린 기사 때문에 어차피 흙탕물은 튀었다. 분위기가 반전되며 제가 피해자 입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음해라고 믿긴 하지만, 어제 닭발 식당에서 만난 어르신들처럼 좋을 대로 믿고,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그런 사람들이 완벽하게 사라지진 않을 텐데, 괜히 이미지 걱정하는 마음에 한울에게 좋은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경호팀 보낼 거라는 얘기는 기억하고 있지?”

“어제는 대답 못했는데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하영택이 체포되면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진 않을 거고요. 어젠 피치 못하게 혼자 나갔지만 보통은 상호 형이랑 같이 다니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그 미친놈이 연예인인 저를 압구정에서 납치하려고 들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조심스레 거절하자 강준일이 방긋 웃었다.

“파주 세트장에서 촬영이지? 오전 중으로 갈 거야.”

한녹영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표정이 아주 단호해 협상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은근 독불장군 기질 있는 거 알아요?”

“은근이라니. 난 대놓고 독불장군이야. 조부님의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거든.”

은근히 까는 말을 매번 이런 식으로 본인이 먼저 인정해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빙긋 웃은 강준일이 못마땅하게 커피를 마시는 한녹영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머리카락 끝이라 감각이 없을 텐데도 이상하게 간질거리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한녹영의 마음이 곧장 스륵 풀어졌다. 나 참. 난 밸도 없나봐. 한녹영이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차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서둘러 일어나 액정을 보니 박상호다. 한녹영이 전화를 받았다.

“어, 형.”

ㅡ 1분 후에 도착해.

“바로 내려갈게. 아, 나 갈아입을 옷 있어야 하는데.”

ㅡ 챙겨 왔어. 그리고 진짜 바로 나와. 김석형 감독이 오늘 촬영 1시간 일찍 시작했으면 한다고 연락 왔어.

1시간 일찍? 그렇다면 정말 서둘러야 한다.

“알았어. 바로 나가.”

전화를 끊은 한녹영이 침실로 들어가 겉옷을 챙겨 나왔다. 그리곤 강준일을 향해 “저 가요.” 하고 말하며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곤 부랴부랴 나왔다. 다정한

작별 같은 건 할 틈이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바깥으로 나가니 빌라 앞에 차를 세워둔 박상호가 보였다. 승용차였다. 한녹영이 서둘러 탔다.

“밴은?”

“한수랑 지해 끌고 널 데리러 올 순 없잖아. 그래서 어젯밤 한수한테 전화해서 지해만 픽업한 후 바로 세트장으로 오라고 했다. 녹영아, 내 말 오해하지 말

고 들어.”

차를 출발시킨 박상호가 갑자기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뒷좌석에 옷이 걸려있어서 우선 상의부터 벗으며 한녹영이 “뭔데?” 하고 물었다.

“너 혹시 강 대표랑 스폰 관계 맺었어?”

“뭐? 무슨 소리야?”

스폰이라니. 나 참. 황당하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에 박상호가 그제야 표정을 풀며 웃었다.

“그치? 아니지? 아닌 것 같았는데 좀 이상해서. 자꾸 강 대표 집에서 자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강 대표가 적극적으로 네 일 도와주는 것도 왠지 석연치 않았거든. 그래서 혹시나 했는데 아니구나.”

한녹영이 무심한 손길로 상의를 입었다. 그리곤 애벌레처럼 꿈틀대며 바지를 벗고, 박상호가 가져온 걸로 갈아입었다.

“스폰 아니야.”

“어. 오해해서 미안하다.”

“사귀는 거야.”

아, 아직은 아닌가. 자긴 했지만 연애하자는 둥, 사귀자는 둥의 낯간지러운 말은 못 들었으니까. 한 번 잤다고 바로 우리 사귀는 사이, 라고 하자니 촌스러운 생각도 들고······ 그렇다고 예비 애인 어쩌고 하는 말까지 들은 마당에 사귀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기에도 그렇고······.

“··········어?”

“아마도? 아직은 아닌 듯도 한데, 아마 앞으로 그렇게 될 것 같은······ 뭐 아무튼 그래.”

뒤를 휙 돌아보려다 운전 중인 걸 자각한 박상호가 운전대를 꽉 잡으며 미러를 통해 뒤를 보았다. 한녹영은 슬쩍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수줍어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좀 전에 녹영이가 뭐랬지? 아직 사귀는 단계는 아닌데, 앞으로 사귀게 될 것 같은 뭐 그런······.

“너 지금껏 강 대표랑 썸 탔냐?!”

“······아마도?”

썸 타야지, 하고 생각한 건 아닌데······ 지금 돌아보면 약간 줄다리기를 한 듯한 느낌도 있었다.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 언제부터?!”

“나도 몰라.”

“뭐? 어떻게 몰라?”

“진짜 몰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한녹영이 멋쩍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말 모르겠다. 언제부터 마음이 강준일에게로 이만큼이나 기울어졌는지.

“나 참. 스폰은 아니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너무 거물이라 막아야 할지 모르겠네.”

상대가 남자란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강준일이라 놀라웠다. 거물인데다, 얼마 전까지 학을 떼며 싫어하던 사람이라서.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징조는 꽤 있어서 이제야 눈치 챈 것이 허무하기도 했다. 나 이렇게 둔한 사람이었나? 박상호가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찼다.

“대표님이 경호팀 보내준대.”

“무슨 경호팀을 또 보낸대? 이제 그만 빌라를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 보냈으면 싶은 마당에.”

“나 어제 저녁에 김춘영 작가님 스튜디오 앞에서······.”

“아 맞다. 김춘영 작가가 너 왜 부른 거야?”

“납치당할 뻔 했거든.”

“뭐?!!!!!”

박상호가 기어이 차를 급정거했다. 몸이 휘청거렸다. 재빨리 앞좌석 등받이를 꾹 쥔 한녹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뒤에 차가 없었다.

“형! 사고 날 뻔 했잖아!”

그제야 박상호도 백미러를 통해 뒤를 보더니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안. 깜짝 놀라서.”

일단 사과한 박상호가 차를 움직여 갓길에 세웠다. 그리곤 몸을 뒤로 휙 틀어 “십년감수했네.” 하고 중얼대고 있는 한녹영을 채근했다.

“무슨 소리야? 뭘 당할 뻔 했어?!”

“납치. 당할 뻔 한 것이 아니라 당했구나.”

“누, 누, 누구한테?!!!!”

박상호의 눈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하영택이지 누구겠어. 그 새끼 예상보다 더 한 미친놈이었더라고. 토요일 저녁 사람 많은 압구정에서 연예인을 납치하다니. 대표님이 하영택 그 자식 감시하려고 사람 붙여뒀었대. 그래서 살았어. 그 미친 자식이 내 탓 하면서 이제라도 영상 떠야한다고 지랄 떨더라. 하여간 골고루 미친 자식이야. 대표님이 감방에 넣어서 최고 형량 받도록 해준대. 평생 못 나왔으면 좋겠다. 사이코 새끼.”

한녹영의 손이 비로소 떨렸다. 어제 강준일의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 그에게 열중하느라 납치된 순간의 두려움에 대해 잊고 있었는데 비로소 공포가 되살아난 것이다. 하얗게 뜬 한녹영의 얼굴을 보는 박상호의 낯이 더 하얗게 질렸다.

“씨, 씨, 씹새끼!!!! 뭘 해? 뭘 떠?!! 와아, 그 자식 완전 돌았구나. 진짜 별일 없었어? 안 다쳤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하영택이 있으면 늘씬하게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지. 그딴 자식은 주먹도 아깝지. 발로 자근자근 밟아주고 싶다. 박상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 납치, 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의 놀람이 가시자 이젠 분노가 새파랗게 일어났다.

“안 다쳤어. 진짜야. 대표님이 히어로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나타나서 구해줬다니까?”

물론 그때 저는 정신을 잃고 있던 상태라 직접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강준일을 영웅화하며 그의 몸에 쫄바지와 쫄팬티를 입혀본 한녹영이 혼자 웃었다. 아무리 잘생기고, 몸이 좋은 강준일이라도 쫄바지와 쫄팬티의 공격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우스꽝스러웠다. 혼자 웃는 한녹영을 본 박상호가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지었다.

“웃음이 나오냐? 난 너무 놀라서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데.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어제 사무실이고 뭐고 그냥 널 따라 갈 걸 그랬어.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많이 놀라고 무서웠지만 괜찮기도 했어.”

왠지 강준일이 구해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할까? 그리고 그 믿음 그대로 강준일은 영웅처럼 절 구해주었다. 한녹영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공포가 되살아나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던 손이 강준일을 생각하는 순간 괜찮아진 것이 신기했다. 뭐야. 강준일이란 이름이 마법의 단어야? 스캔들이 터졌던 날부터 그의 존재가 제게 정말 마법처럼 절대약이 된 기분이었다.

“진짜 다행이다. 강준일 대표님한테 고맙기도 하고.”

조수석에 놓아둔 물을 마신 후 겨우 마음을 좀 가라앉힌 박상호가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여전히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지만 운전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무실 계약은 했어?”

“응. 그냥 처음에 본 데로 했어. 급매물로 나온 데. 거기가 위치도 좋고, 넓고, 여러모로 딱 적당해서. 가격이 좀 세긴 하지만 대스타님을 모실 사무실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싶어서.”

너스레를 떠는 걸 보니 마음이 더 안정된 모양이다.

“조만간 정식 계약서 쓰자.”

“어. 그러자 기분이 묘하다. 내가 너랑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게 되다니.”

“앞으로 잘 부탁해요. 대표님.”

한녹영의 애교 어린 말에 박상호가 머쓱하게 웃었다.

“어. 잘 부탁한다. 스타님.”

두 사람은 대표님, 스타님 해가며 서로를 둥실둥실 띄워주며 파주로 향했다. 힘껏 밟은 탓에 다행히 크게 지각하지 앉고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정지해가 한녹영에게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너 어제 안 쉬었니? 얼굴이 왜 푸석해? 혹시 컨디션 안 좋아? 어디 아파?”

“아닌데. 어제 푹 쉬, 쉬었어.”

거짓말을 하는 한녹영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근데 왜 피부가 이 모양이야. 암만 두들겨도 안 먹잖아. 어휴, 오늘따라 되게 힘들다.”

평소보다 2배의 시간을 들여 겨우 고화질 카메라에 비춰도 괜찮아 보이는 피부 상태로 만든 정지해가 “너 어제 쉬었다는 거 거짓말이지?” 하고 눈을 흘겼다. 민망하게 웃으며 밴에서 내린 한녹영이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들어섰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내려서 걸으니 확실히 평소보다 다리가 풀려 무거운 감이 있었다. 허리도 묵직하고 엉덩이 안쪽은 욱신거렸고 무엇보다 봄날 햇살에 늘어진 고양이처럼 나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 큰일이었다.

“한녹영씨,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어요?”

김석형이 물었다.

“아니요. 딱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요?”

“그래요? 묘하게 들떠 보이는데. 오늘 씬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필요하니까 카메라에 들뜬 표정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줘요.”

카메라를 통해 한녹영의 표정을 본 김석형이 말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큰소리쳤지만 연기하는 내내 표정관리 하느라 힘들었다. 평소에는 큐 사인이 떨어지면 거의 바로 감정이 잡혔는데, 오늘은 뜬금없이 자꾸만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오려고 했던 것이다. 무게를 잡아야 하는 장면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NG를 내고 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꽉꽉 다잡고 촬영에 임해 오케이를 받아냈다. 몸은 나른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왜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ㅡ 촬영은 잘 했나?

“아니요. 몸이 힘들어서 역대 최다 NG를 냈어요.”

한녹영이 거짓말을 했다. 사실 역대 최다 NG는 신인 시절에 냈었다. 분명 툭 치면 바로 대사가 나올 정도로 외우고 또 외웠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ㅡ 우리 회사에서 투자한 드라마에 출연 중인 배우를 혹사시킬 순 없으니. 그래서 말인데 스케줄 표를 보내줬으면 좋겠어. 한녹영씨 몰래 은밀히 구할 수도 있지만 굳이 비밀로 할 까닭은 없을 것 같아서.

“네? 스케줄 표는 왜요?”

ㅡ 한녹영씨 휴일 파악하려고.

남의 휴일은 왜······ 라고 생각한 순간 이유가 떠올랐다. 한녹영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제 스케줄을 꿰고 있으려는 강준일의 음흉한 속내가 읽힌 것이다.

“내 몸이 목적은 아니라면서요.”

ㅡ 그건 한녹영씨와 자기 전 생각이었고.

“자고 나니까 대놓고 몸이 목적이 된 거예요?”

새치름한 물음에 강준일이 웃었다.

ㅡ 그렇게 얘기하니 내가 색골이 된 기분인데.

“어제 보니까 아니라곤 못하겠던데요. 어찌나 집요하시던지.”

ㅡ 그 정도로 집요하다고 하면 곤란해. 참은 거니까.

“그게 참은 거라고요?!”

제 안에 한 다섯 번은 싼 것 같은데? 맙소사 안 참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싫었다. 팔뚝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ㅡ 참은 거야. 내 욕심껏 했으면 한녹영씨는 오늘 촬영에 기어서 가야 했을 테니까.

“음. 갑자기 대표님이랑 잠자리를 지속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ㅡ 후회하긴 늦었어. 한녹영씨는 이제 내 덫에 걸린 토끼 신세라고. 포동포동 살찌워서 계속 잡아먹을 거야.

웃음기가 가득한 농담에 한녹영의 입가에도 웃음이

도 웃음이 걸렸다.

“토끼는 그만 자야겠어요. 코디 누나한테 피부 상태 안 좋다고 구박받았거든요. 내일도 피부가 별로면 누나 폭발할 걸요.”

실제로 정지해는 아까 퇴근하면서 “너 내일도 피부 상태 별로이기만 해?” 하고 잔뜩 별렀다. 그러면서 팩 하나를 던져줬다. 지금 붙이고 있는 팩인데, 신기한 것이 붙이고 자도 된단다. 피부에 착 밀착되어서 뒤척거려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대부분 팩은 20분 전후로 떼어야하는 걸로 알고 있었던 터라 놀라웠다. 한녹영이 놀라워하니 정지해가 ‘뷰티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알아?’ 하고 잘난 척 했다.

“아, 그리고 경호원들 그냥 철수하면 안 돼요? 오늘 하루 종일 불편해 죽을 뻔 했어요.”

경호원들이 촬영장 안까지 들어오진 않았지만 꼭 화장실 갔다가 덜 닦고 나온 것 마냥 내내 신경 쓰였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었고, 배우들이나 스태프들도 자꾸만 웬 경호원이냐고 물어봐서 참 곤란했다.

ㅡ 안 돼. 진작 안 보내서 한녹영씨를 위험에 처하게 한 것만으로도 뼈아프게 후회 중인데 하루도 안 되어 철수라니. 내가 하루 종일 한녹영씨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도록 만들고 싶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지금이라도 한녹영씨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싶으니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불편해도 참아.

“독불장군. 독재자.”

못마땅하게 중얼거라는 말에도 강준일은 끄덕도 안했다.

ㅡ 나 독불장군에 독재자 맞는다고 했을 텐데.

“사람들이 자꾸 웬 경호원이냐고 물어본다고요. 신경 쓰여요.”

ㅡ 하영택에 관한 뉴스 뜨면 그런 질문들은 사라질 거야.

“······.”

그야 그렇겠지만. 불편하다는데 독재자처럼 안 된다고 하는 강준일의 태도가 못마땅해 입매를 빠죽이며 대답을 안 했다.

ㅡ 침묵은 내 말을 따르겠다는 긍정의 뜻인 거지. 기특해.

토라진 마음을 눈치 챈 강준일이 짧게 웃은 후 그윽한 음성으로 말했다.

“기, 기특하다고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아요? 내가 그 말 좋아한다고 막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면 곤란해요.”

톡 쏘는 것처럼 말했는데, 사실 또 밸도 없는 사람처럼 마음이 금세 풀린 상태였다.

ㅡ 무슨 말을 하면 한녹영씨 마음이 풀릴까?

“됐어요. 잘 거예요.”

ㅡ 내일 코디한테 구박받지 않으려면 자야지. 잘자라고, 애인님.

“방금 뭐라고?”

막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들려온 호칭에 심장이 움찔움찔했다. 황급히 휴대전화를 다시 귀에 가져다댄 한녹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강준일이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을 흘렸다.

ㅡ 인생은 녹화가 아니라서 재방송은 안 돼. 이만 끊지.

강준일이 먼저 전화를 툭 끊었다. 한녹영은 혼자 멍하니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애인님, 이라고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그게 뭐 어려운 말이라고 재방송은 안 된대? 치사하게. 잔뜩 투덜대는 한녹영의 눈매에 웃음이 차올랐다.

애인님이라······ 뭐, 나쁘지 않은 호칭이네. 이젠 입매까지 실룩실룩했다. 입꼬리를 귀에 건 채 누운 한녹영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설레고 기분이 마구 들떠서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눈살을 찌푸린 장현재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곤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뭐? 뭘 해? 미친······ 아니, 변호사 보낼 필요 없어. 무기징역을 받든, 사형을 받든 그냥 내버려두고 해명기사나 준비해. 이미 해고한 사람이고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고.”

전화를 끊는 동작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요염한 자세로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전환데 그래?”

“외사촌 형님이 한녹영을 납치하려다 경찰에 체포되었다는군요.”

“외사촌 형님이라면······ 하영택이라는 그자?”

“네.”

“진작 잘라내라고 했잖아. 자기 부탁으로 이번에 몰래 손쓰느라 얼마나 고생한지 알아? 그나마 구속 수사까진 안 가도록 했고, 가능하면 형량도 작게 받게 하려고 백방으로 손쓰던 중이었는데, 납치라니. 나 원. 자기 사촌 형은 뇌가 없어?”

혀를 차며 말하는 여자의 말투 혐오감이 실려 있었다. 장현재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도 핏줄이라 가능하면 도와주고 싶어 여자에게 부탁했는데, 마치 대단한 관용을 베풀어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 식의 말투에 짜증이 치솟았다. 잡년 같으니. 그 부탁을 대가로 몸이 부셔져라 봉사한 건 안중에도 없지? 어찌나 밝히는지 여자와 자고 나면 좆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성년이 된 이후로 수많은 여자를 상대해왔지만 그 중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섹스를 밝혔다.

장현재는 저 여자를 약 1년 반 전에 만났다. 회사 돈으로 다른 데 투자했다가 크게 실패를 봤는데, 손해를 조금이라도 메꾸려고 주식을 내다 팔았다가 대표 자리에서 강제로 내쫓길 뻔 했을 때 제가 판 주식까지 손에 넣어 대주주가 된 여자의 도움을 받고 스폰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기간은 2년. 여자와 만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다.

“딴에는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한 짓이겠죠. 방법이 최악이라 그렇지.”

하영택이 한 짓에 대해 애써 변명하는 장현재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언론과 세상의 관심이 초집중되어 있는 이때에 납치라니. 정말 여자의 말대로 뇌가 없는 건가. 강준일이 개입되어 있는 일이라 어떻게 손을 써도 무혐의 처리는 안 될 테니 한동안 교도소에서 얌전히 지내고 있으면 조용히 꺼내준다고 했는데. 기어이 또 혼자 멋대로 일을 저질러 이 사달을 만들었다. 젠장. 생각할수록 욕이 튀어나왔다. 제발 혼자 생각으로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말은 대체 어디로 들은 건지. 보나마나 영상을 떠서 그걸로 한녹영을 협박하려고 한 모양인데····· 미친 새끼. 사이코 새끼. 장현재가 하영택을 신랄하게 욕했다. 이번엔 나도 버린다. 더 이상은 봐줄 마음이 안 들었다.더 이상 봐줄 가치가 없는 새끼였다. 핏줄이라는 이유로 또 봐줬다가 같이 거름통에 빠지게 생겼다.

기사가 떠서 또 주가가 떨어질 테고, 그럼 주주들이 난리칠 텐데 생각만 해도 골치였다. 우선 하영택과 한울은 아무 상관없다는 해명 기사를 내고, 반전을 노려봐야 하는데 현재로선 사방이 꽉꽉 막힌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한녹영의 스캔들을 한울에서 의도적으로 터뜨린 거라는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와중이라 회사로 항의 전화며 욕이며 난리도 이니었다. 공식 홈피는 이미 성이 나서 몰려온 팬들의 테러 때문에 닫아야 했다. 회사 벽에 낙서는 기본이고, 제 차에 오물 테러도 여러 번 당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개인 전화로 협박 문자까지 오고 있었다. 전부 장현재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강준일 대표라니······.’

스캔들을 한꺼번에 터뜨려 추락해가는 한녹영을 지켜보는 중에 느닷없이 등장한 강준일의 이름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충격 그 자체였다. 바보처럼 서로를

최악으로 생각하던 두 사람의 말과 행동을 너무 믿었다. 한녹영과 강준일이라니······. 제가 여자의 부탁으로 한녹영을 강준일에게 접근시켰을 땐 오물이라도 묻은 듯 펄쩍 뛰더니만. 강준일은 경영이 아니라 연기를 해야 할 사람이었다.

꿈에도 몰랐던 두 사람 사이 때문에 현재 장현재는 궁지에 몰린 쥐 꼴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언제부터 두 사람이 가까워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가 주민성 때문에 LA를 다녀오는 사이 썸씽이 생겼던 건가? 한녹영이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느닷없이 제게서 등을 돌린 까닭이 강준일이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또 주주들이 난리칠 텐데 어쩔 거야? 주주총회해서 대표 바꾸자고 할 텐데.”

“일단 해명 기사 내고, 주민성 내세워 분위기 반전 노려봐야죠. 대표직에서 물러날 순 없습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한울을 내가 어떻게 만들었는데요. 도와주실 거죠?”

최대 주주인 여자의 도움만 있으면 대표 자리를 지키는 건 가능했다. 물론 여자는 표면에 나설 입장이 아니라 늘 대리인을 내세웠지만 말이다.

장현재의 말에 슬립 차림의 여자가 침대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곤 장현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가늘게 웃었다.

“당연히 도와줘야지. 전에 내가 한 말은 생각해봤어? 강준일 대표와 한녹영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증거만 잡을 수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 전부 자기한테 양도한다니까. 이젠 정말로 두 사람이 그런 관계가 되었으니 오히려 기회가 많아졌잖아?”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이 은밀했다. 여자는 생각에 잠긴 장현재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장현재가 스타킹을 신는 중인 여자의 등을 물끄러미 보았다.

“직접 하시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가능하면 내가 손썼다는 사실이 강준일 쪽에 알려지지 않길 바라니까 자기한테 부탁한 거잖아.”

우리 사이를 아는 사람은 내 측근을 제외하면 없으니까, 라고 말하는 얼굴이 강준일을 향한 미움으로 일그러졌다. 장현재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강준일 대표는 눈치 채고 있는 모양이던데. 하지만 장현재는 여자에게 굳이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약점을 틀어쥐고 저를 좌지우지한 여자에 대한 자그마한 복수였다. 내가 또 당하고만 살진 않거든.

“녹영이가 스폰으로 떴다는 소문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으니 그 상대가 강준일이라는 찌라시를 흘리면요?”

“입소문만으로는 안 돼. 조부님께 먹힐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일전 한녹영을 강준일에게 접근시킨 이유는 한녹영을 강준일에게 보내서 두 사람의 섹스 장면을 남겨오면 주식을 주겠다고 한 여자의 제안 때문이었다. 여자의 주식까지 손에 넣으면 장현재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확고한 한울의 주인이 된다. 때문에 여자의 제안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고, 장현재는 그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녹영의 외모가 강준일의 취향이라 쉬울 거라는 여자의 말과는 달리 강준일은 한녹영에게 혐오감을 드러내며 거부했다. 직접 제게 전화를 걸어와 협박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위장이었던 것 같지만.

제가 한녹영을 강준일에게 보냈던 탓에 마음이 돌아선 건가 의심한 적도 있는데, 둘이 눈이 맞아서 뒤로 호박씨를 까고 있었고, 겉으로만 서로 혐오하는 척 굴었던 것이 분명했다.

배신감에 심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저를 향해 웃던

한녹영이 강준일의 품에 안겨 웃는 모습을 상상하자 머리가 뜨거워졌다.

정말 특별하게 생각했는데. 여자의 주식을 움켜쥐고, 여자에게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한울의 주인이 되면 정말 한녹영과 사귈 생각이었다. 제 연인이 될 자격은 한녹영이 유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좀 더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한녹영이 잠시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 정도는 감수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한녹영을 강준일의 품에 남겨둘 생각은 정말 조금도 없었다. 한녹영은 저를 위해 빛나던 존재였으니까.

물론 여자가 주식으로 절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한녹영에게 다른 남자를 유혹하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장현재도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입었다.

“자기는 언제나처럼 1시간쯤 후에 나와. 그리고 내 제안 생각해 봐. 한녹영을 설득하든, 자기 사촌 형처럼 무식한 방법을 쓰든 상관 안 해.”

여자가 장현재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요염하게 웃었다. 장현재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하영택처럼 무식한 방법을 쓰라니. 강준일을 상대로 납치라도 하라는 건가. 아예 내 관자놀이에 대고 총을 쏘지 그래. 이제 저와 한녹영 사이가 최악으로 치달아 한녹영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젠 설득하고 싶지도 않고.’

설득이 된다 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그랬다. 여자가 흔드는 주식이라는 열매는 여전히 달콤하지만, 이상하게 예전처럼 강렬하진 않았다. 한녹영이 저만 보는 제 인형이었던 시절에는 주식이 무엇보다 달콤해 보이는 과실이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그저 다시 한녹영이 오롯이 저만을 보던 그 시절로 돌이키고 싶을 뿐이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손에서 놓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존재가 스르륵 빠져나간 기분이 말도 못하게 더러웠다. 저만을 위해 존재하는 한녹영이 공기처럼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그가 완전히 제 곁을 떠난 지금 공기가 희박한 곳에 갇혀 있는 것처럼 한 번씩 숨이 막혔다.

무엇보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돌처럼 무거웠다. 망가뜨리면 울면서 돌아올 줄 알았는데. 한녹영에게 강준일이라는 버팀목이 생겼으니 마지막 희망마저 물거품이 된 셈인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두 가지야. 내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 것. 그리고 강준일의 아주 치명적인 스캔들. 연예인들 스캔들을 노리는 파파라치들이 많으니 연예계 쪽에서 접근해서 한녹영과 강준일의 치명적인 스캔들을 잡아내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어? 가능하면 내가 손쓰지 않게 해줘.”

“만약 영상을 확보하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러고 보니 영상을 화보한 이후의 활용 방법에 대해 물어본 적 없다. 여자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올해로 마흔둘이 된 여자는 웃을 때 눈가의 주름조차 없을 만큼 피부가 팽팽했다.

“활용도야 많지. 강준일을 협박해도 되고, 조부님과 협상을 해도 되고, 가장 간단한 건 그냥 세상에 터트리는 거지만.”

장현재의 눈매가 좁아들었다. 활용도는 많다고 했지만 여자의 말투에서 마지막 방법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읽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했다. 외부에서 터뜨린 것처럼 한 후 영상을 세상에 흘려보내면 큰 파장이 일 테고, 여자가 딱히 골치 썩이지 않아도 강준일에게 엄청난 흠집을 입힐 수 있었다. 섹스 스캔들, 그것도 동성끼리의 섹스 스캔들이 일어난 사람을 그룹 총대표로 앉힐 순 없을 테니까.

“영상이 확보된다면 그냥 터뜨릴 생각이시군요.”

이번에도 여자는 눈매를 휘며 요염하게 웃었다.

“시기를 봐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빵! 멋지지 않아?”

“그렇게 되면 녹영이는 더 이상 연예계 생활을 못할 텐데요.”

“그깟 배우 한 명쯤 매장 되어도 상관없잖아? 처음 내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자기도 어느 정도 감수한 거 아니었어? 그깟 배우 한 명보다는 내가 넘길 주식이 더 낫잖아. 마음이 바뀐 거야?”

여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장현재가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내 마음의 변덕을 떠나서 이젠 제 수가 빤히 드러나 힘들 것 같은데요. 스캔들 조작을 한 것을 알게 된 녹영이를 설득할 자신이 없군요. 나와 한울에 대한 감정이 최악일 테니까요. 강준일 대표를 납치해서 어떻게 해 볼 자신은 더더욱 없고요.”

“그러게 왜 한녹영과 척을 졌어? 자기 말발 최고잖아. 밑져야 본전이니 시도나 해봐.”

“······회의적인데요.”

“내가 직접 손을 쓸 순 없어. 둘이 알몸으로 엉켜있는 모습이 제일 효과적일 테니 자기 사촌 형처럼 한녹영을 납치라도 해. 대신 어설프게 하진 말고 납치해서 약이라도 쓴 후에 강준일을 부르면 올 거야.”

상류층에서 태어나 상류사회에서만 살아온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저질스러운 말이었다. 약이라니. 동물처럼 강제로 교접시키라는 뜻이었다. 여자는 일그러지는 장현재의 낯빛을 보고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애교스럽게 웃더니 말을 돌렸다.

“한녹영이 강준일의 약점이 된 것만으로도 내겐 기회가 생긴 셈이니까. 일전에 한녹영이 강준일을 유혹하려다 실패했을 때보다는 희망이 있어. 둘이 붙었다니 곧 기회가 생기겠지. 그럼 나중에 또 봐. 오늘도 즐거웠어. 자긴 정말 최고야.”

여자가 룸을 나갔다. 장현재는 침실을 니와 응접실에 홀로 멍하니 앉았다. 그리곤 연이어 담배를 태우며 1시간쯤 시간을 뭉개다 호텔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니 거실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설마, 하며 황급하게 안으로 들어선 장현재가 거실 소파에 주인마냥 앉아 태블릿을 빤히 들여다보는 중인 주민성을 보고 실망해 혀를 찼다. 순간 한녹영이 온 건가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한녹영은 제 허락없이 집에 멋대로 찾아온 적이 없었다. 제게 집착하고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으려고 안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대 피해를 주지 않으려 조심했었다.

한숨을 쉰 장현재가 소파를 향해 다가가며 짜증스레 물었다.

“너 뭐야?”

전에 하도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징징대서 알려줬더니만, 지금처럼 몰래 들어와 있곤 한다.

“어? 형? 언제 왔어?”

주민성이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뭐 하고 있었는데 그리 놀라?”

“응? 아, 아니. 도망자 제작발표회 기사 좀 찾아보고 있었어. 우리 드라마랑 같은 시간대에 붙는 라이벌 팀인데 누가 출연하는지 정도는 알아둬야지.”

“그걸 이제?”

업계 평가가 나쁘지 않은데다 LK의 투자로 관심도가 급상승했으니 신경 좀 쓰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어차피 우리가 시청률로 확 눌러버릴 거니까 관심 둘 필요 있나 싶었지. 지금까지는. 한녹영이 거기 들어갔다고 해봤자 혼자 무슨 힘으로 우릴 이기겠나 싶기도 했고. 신 작가님 드라마는 늘 빠순이들 양성하며 대박쳤다면서.”

“맞아. 그러니까 연기나 잘 해.”

“잘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근데 아까 보니 하영택 실장이 또 일친 것 같던데.”

장현재가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주민성이 그런 장현재 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안마 해줄까?” 하고 은근히 물어왔다.

“됐어. 그보다 너 예능 출연 좀 해야겠다.”

드라마는 방영까지 한 달도 넘게 남았고 역시 가장 즉각적인 반응을 보려면 예능이 최고였다.

“응?”

“가장 빨리 방송될 수 있는 예능으로 잡을 테니까 나가서 매력 어필 좀 해. 주가 떨어지면 주주들이 난리라 피곤해지거든. 일단 네가 시청자들로부터 점수 좀 따면 우선 입막음은 할 수 있을 거야.”

“형이 나가라면 나가야지. 어디든 출연할 건데······ 저기 형, 출연배우한테 심각한 스캔들이 터지면 드라마는 끝장나는 거겠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아니야. 스케줄이나 잡아줘. 어디든 나갈게.”

주민성이 미심쩍은 눈으로 절 보는 장현재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의 눈에 가득한 신뢰를 보니 예전의 한녹영이 떠올랐다. 절 떠나기 전의 한녹영의 눈빛도 저랬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생각해보면 불과 두어 달밖에 되지 않는다.

“왜? 할 말 있어?”

빤히 보는 시선에 주민성이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아니.”

짧게 혀를 찬 장현재가 몸을 일으켰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이전에도 몇 번 소속 연예인들 문제로 거래한 적이 있는 파파라치였다.

☆☆★☆☆

하영택이 한녹영을 납치하려 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관련 기사도 수십 건씩 떴고, 댓글이며 SNS며 난리였다. 대부분 한녹영에게 동정을 표하는 동시에 한울을 욕하는 글들이었다. 심지어는 아예 한울 소속 모든 연예인들을 불매한다는 댓글들도 제법 보였다.

한울에서는 납치 뉴스가 보도됨과 동시에 해명 기사를 냈다. 그는 이미 해고된 사람이라 한울과는 아무런 상관없고 한녹영 납치는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다, 라는 것이 요지였다. 한녹영은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너무나 예상했던 대로의 행보였다.

“상관이 없긴 왜 없어! 대표인 장현재가 하영택 외사촌인데!”

기사를 보고 발을 쾅 구른 박상호가 씩씩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녹영이 너 납치될 뻔 했다며?!!”

그때 정지해와 장한수가 들어오며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미리 얘기하지 않았던 터라 그들도 오는 도중 기사를 통해 뉴스를 접한 것이다.

“하영택 그 미친놈이 녹영이 납치하려고 했단다. 진짜 미친놈의 생각은 따라갈 수가 없어. 납치라니. 나 참. 그것도 주말 저녁 압구정에서.”

박상호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왜 어제 얘기 안 했어!”

정지해가 서운한 투로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 훌쩍훌쩍 말을 이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너 피부 상태 안 좋다며 구박했잖아. 쉴 수 있는 날 제대로 안 쉬고 뭐 했느냐면서.”

“그게 무슨 구박이야. 그냥 할 말 한 거지.”

괜찮다는데도 정지해는 사정도 모르고 구박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한녹영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진짜 괜찮다니까, 하며 정지해를 달랬다. 사실은 납치 때문이 아니라 강준일과 진한 밤을 보내느라 무리해서 피부 상태가 안 좋았던 건데 사실 대로 말할 순 없어서 곤란했다.

장한수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저 거친 숨만 씩씩대더니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하영택 그 인간이 정말 납치까지 하려고 시도할 줄은 몰랐네. 기소될 것 같으니까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 난 또 왜 유난하게 경호원을 고용했나 했는데, 이유가 있었구나.”

“응. 그런 위험한 일을 당했는데 맨몸으로 다닐 순 없잖아. 경호원부터 당장 고용했지.”

박상호가 어색하게 허허 웃었다. 당연히 박상호가 고용한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사실은 강준일 대표가 보내준 사람들이다.’ 라고 할 순 없으니 당분간, 아니 영원히 오해하도록 내버려둘 밖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이고, 한녹영 위해 한울을 나와준 사람들이라고 해도 퍼지면 치명적인 비밀은 가능한 아는 사람이 적은 편이 좋았다. 어지간한 스캔들이야 강준일이 알아서 다 막아주겠지만,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퍼진다면······ 그 뒤는 생각도 하기 싫다.

“녹영이 무사하잖아. 하영택 그 미친놈 체포됐으니 같은 짓 또 할 순 없을 테고. 기사 나서 한울에 또 한 번 타격 줬으니 좋게 생각하자.”

고개를 부르르 터는 박상호를 보고 납치 건으로 마음이 울적한가 보다, 하고 오해한 정지해가 위로를 건넸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설마 또 너한테 무슨 짓 하려고 들진 못하겠지?”

박상호가 시선을 들더니 한녹영을 보았다.

“설마.”

정지해가 말했다.

“응. 설마.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지.”

대답은 단호하게 했는데 왠지 마음이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 한녹영은 “그래. 설마. 또 뭐가 남았겠어?” 하고 말하는 박상호를 향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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