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4
“기분이 어때?”
회사를 나와 밴에 올라타자마자 박상호가 물었다. 한녹영은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전속계약해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묘했다. 해방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정들었던 곳인데 좀 섭섭한 듯도 하고, 하여간 그렇다.
“이제 한 열흘 정도 후면 녹영이 너랑 같이 일하는 것도 끝이네.”
장한수가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한녹영은 섭섭한 마음을 감추려고 그러는 건지 괜히 부산을 떠는 그의 뒤통수를 보며 작게 웃었다.
“서운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잖아. 당연히 서운하지.”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더 크지?”
“원래 미운 정이 더 질기다더라.”
미운 정이 더 크다는 소리네. 슥 가늘어진 눈매를 백미러로 본 장한수가 흐흐 소리를 내며 웃었다.
“녹영이 너 약속했다. 다른 데 가면 나도 데려가기로.”
정지해가 벌써부터 눈시울을 붉히며 지난번 약속을 언급했다. 계약해지는 한 상태지만, 아직 한울에 있을 때 계약한 일들이 남은 상태라 그 일들을 끝낼 때 까지는 기존 스태프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지만 그래봤자 열흘 남짓. 25일부터는 오롯이 박상호와 둘만 남는다. 늘 스케줄을 위해 이동할 때면 5-6명이서 움직였는데, 달랑 둘만 남는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허전하다.
“지해 너도 녹영이 따라오려고?”
박상호가 물었다. 코를 훌쩍인 정지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까 해. 어디로 갈지는 여전히 미지수인 거지? 아직도 루머 때문에 기획사들이 망설이고 있어?”
“상호 형이 기획사 차릴 거야.”
한녹영의 선언에 박상호가 제일 먼저 펄쩍 뛰었다.
“녹영이 너 무슨 소리야! 아직 생각 중이라고 했잖아!”
“어? 상호 형 기획사 차리려고? 그, 그럼 나도 데려가.”
장한수가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순정도 “지해 언니가 가면 저도 따라갈래요.” 하고 말했다. 한녹영이 웃으며 “지해까지 따라오면 단번에 직원이 셋이나 되네.” 하고 말하자 박상호가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도끼눈을 떴다.
“아직 확정 아니야! 회사 차리는 일이 쉬운 줄 알아? 뚝딱 하고 차려지게? 난 아직도 베스트는 대형 기획사에 괜찮은 조건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김칫국들 마시지 말고 일단은 얌전히 한울에 남아 있어. 괜히 모나게 굴다 찍히지 말고. 특히 하 실장 조심해. 가뜩이나 녹영이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아서 녹영이 스태프였던 너희들한테 화풀이할 수도 있어. 아까 우리 나오는데 쳐다보는 눈길에 독이 시퍼렇게 서 있더라.”
“그러니까 우리도 데려가라니까. 오빠, 내가 1순위다.”
정지해가 말했고 장한수가 재빨리 “내가 2순위.” 하고 말했다. 박상호는 “이것들이.”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이내 웃고 말았다. 한녹영도 웃었다. 생각해 보니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고 서운했던 모양이다. 박상호와는 함께 갈 테고, 정지해도 데려간다고 약속했지만 솔직히 언제쯤일지 장담할 수 없는데다 장한수와 김순정과는 그냥 이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다들 따라와 준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시큰해지며 눈자위가 붉어지려고 한다.
아씨. 나 원래 이렇게 감상적인 놈 아니었는데. 스태프들쯤이야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놈이었는데. 헤어짐이 아쉽고, 따라와 준다는 말이 왜 이리 고마운지. 입매를 꾹 다문 채 시큰해진 콧날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한녹영을 힐끔힐끔 훔쳐본 박상호와 정지해가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어쨌든 한시름 덜었다. 장 대표와 하영택 그 인간이 계약을 빌미로 무슨 짓을 할지 늘 조마조마했었는데.”
“응. 나도 한결 마음이 놓여.”
“이제 마음 푹 놔도 되겠지?”
그럼, 이라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제게 황산을 뿌렸던 여자. 여전히 그녀에 대해선 얼굴 외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라 조마조마했다.
‘대체 누구였을까? 내가 그 여자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한녹영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LK 엔터 본사다.”
김순정이 말했다. 눈을 떠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LK엔터 본사가 보였다. LK라는 상호를 보자 자연히 강준일이 떠올랐다. 한녹영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다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왜 매번 채무자가 채권자한테 독촉을 해야 해요? 원래 채권자가 더 안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느긋하게 굴다 내가 오리발 내밀면 어쩌려고요? 시간 언제가 좋아요? 풀코스는 무리더라도 커피라도 한 잔 살 시간 좀 내줘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풀코스로 쏜다고 했는데 벌써 며칠째 강준일은 묵묵부답이었다. 물론 한녹영도 바빠서 느긋한 시간을 낼 수 없는 입장이지만 언제가 좋으냐는 식의 날짜를 조율하는 연락조차 없어 괜히 서운했다. 꼭 제가 먼저 연락해야 마지못해 답을 주는 것도 못마땅했고.
‘뭐야? 이젠 메시지도 씹는 거야?’
메시자를 보낸 지 십분 째. 손에 꽉 쥐고 있는 휴대전화는 울릴 기미가 안 보였다.
“녹영이 너 전화기랑 눈싸움 중이야?”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째려보자 박상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제야 고개를 들며 멋쩍게 아니라고 대답하려 할 때 드디어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한녹영은 후다닥 도로 고개를 숙여 액정에 뜬 강준일이란 이름을 확인하곤 슬쩍 웃었다.
「한녹영씨의 열렬한 마음은 알겠지만 바빠.」
한녹영이 입매를 삐죽었다. 누군 안 바쁘나! 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그것도 매우!
「커피 한 잔 할 시간이면 된다니까요. 꼭 할 말이 있다고요!!!!!!!」
강조의 표시로 느낌표를 마구 눌러 보내자 이번에는 곧바로 답문이 왔다.
「전화로 해. 메시지로 하든가.」
커피 한 잔 할 시간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된다고. 30분이면 떡을 칠 텐데! 강준일이 이렇게 나오니 꼭 만나 커피 한 잔 마시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한녹영이 전투적으로 메시지를 작성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안 돼요! 꼭!!!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거든요!! 낮에 만날 시간이 없다면 밤도 좋아요. 새벽도 좋고요. 바쁘신 대표님 시간에 역시 매우 바쁜 제가 맞춰 보죠. 언제가 좋아요? 전 빠를수록 좋아요.」
이번엔 5분쯤 있다가 답문이 왔다.
「나를 향한 한녹영씨 마음이 너무 열렬해서 부담스러운 걸. 내가 그렇게 보고 싶나.」
뭐? 누, 누, 누가 누굴 보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냥 할 말이 있으니 보자는 건데. 어이가 없어 또 전투적으로 답장을 보내려고 손가락을 풀고 있을 때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오늘 퇴근은 자정 전후가 될 것 같은데, 그때도 괜찮다면 내 집에서 커피 한 잔 내려주지.」
자정 전후라 좋다. 오늘 일은 늦어도 11시면 끝날 테니 가능했다.
「좋아요!」
이번에도 느낌표 한 개 쾅 찍어 메시지를 전송한 후 비로소 흡족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자 박상호가 희한한 얼굴로 저를 보는 중이었다.
“왜? 할 말 있어?”
“누구랑 메시지 주고받은 거야?”
“응? 있어. 형, 이제 내 사생활 관리 들어가는 거야?”
“관리는 무슨. 싸우자는 것처럼 전투적으로 메시지 작성하더니 이젠 웃고 있는 것이 이상해서 그러지. 누군데 그래? 되게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인데.”
“기분 좋아 보이긴. 자유인이 됐으니 후련해서 절로 웃음이 나는 모양이지.”
의심스럽게 저를 보는 박상호의 눈길을 피하며 한녹영이 짧게 웃었다.
강준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자정이 훌쩍 넘었을 때였다. 1시간 전에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워 이제나저제나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한녹영이 잽싸게 휴대전화를 잡았다. 전화벨이 채 한 번도 울리기 전이었다. 뭐야 나? 꼭 목 빼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잖아.
한녹영은 마치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느긋하게 전화를 받는 척 벨이 5번 정도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 6번이 넘어가면 자는 줄 알고 끊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네. 한녹영입니다.”
그리곤 무심한 척, 마치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 전화를 받았다.
ㅡ 자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군.
“대본 보고 있었어요.”
한녹영이 찬밥처럼 저만치 떨어져 있는 대본을 냉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마치 좀 전까지 열중해서 보고 있었던 듯 펼쳤다.
ㅡ 25일이 대본리딩, 30일이 첫 촬영일이라지.
어떻게 알고 있······ 아. 가장 큰 돈을 투자한 곳이 LK이니 당연히 보고가 간 모양이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요.”
ㅡ 촬영일이 잡혔다는 말은 아닐 테고. 무슨 말을 해주려고 그리도 열렬히 날 찾았는지 궁금해.
“아까 메시지 보낸 투를 보니 그리 궁금해 하는 기색이 아니던데요. 나 혼자만 애달아서 좀 만나달라고 애걸복걸했지.”
코웃음을 치며 부루퉁하게 대꾸하자 강준일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ㅡ 한녹영씨가 날 만나고 싶어 애달아했다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군.
웃음기가 맺힌 음성이 정말 기분 좋게 느껴져 뾰족했던 마음이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퇴근은 했어요?”
ㅡ 좀 전에.
“전 집에 온지 1시간쯤 됐어요. 내일은 11시 스케줄이라 시간의 여유가 좀 있는 편이고요.”
그러니 늦은 시간인 것에 구애받지 말라는 의미였다.
ㅡ 전엔 기절해서 업혀 왔다가 역시 업혀 나갔으니 내 집의 위치를 전혀 모를 테고.
“날 어, 업었어요?”
ㅡ한녹영씨가 기절한 채 스스로 걷지 않았다면 내가 업어서 옮겼을 테지.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안았어.
아, 안았······.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일명 공주님 안기, 뭐 그런 포즈였겠지. 차라리 업혔다면 좀 덜 부끄러웠을 텐데, 앞으로 안겨서 옮겨졌다니 민망해 미치겠다.
ㅡ 덧붙이자면 가벼웠어. 흔한 표현 있지 않나. 솜털 같았다는.
놀리는 거다. 웃음기가 맺힌 목소리를 보니 확실했다. 한녹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제가 아무리 가벼워도 설마 솜털 같을까.
“그거 칭찬 아니거든요. 멀쩡한 남자더러 솜털이라니요. 주, 주소나 불러줘요.”
ㅡ 문자로 찍어주지.
“한 30-40분이면 도착할 거예요.”
전화를 끊은 한녹영은 곧장 드레스룸으로 직행했다. 뭘 입어야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으면서 최대한 제 외모를 살릴 수 있을까. 정장은 당연히 패스. 청바지에 니트를 입을까? 오늘따라 드레스룸이 유난히도 휑해 보여 마음에 안 들었다. 장현재 스타일의 옷을 전부 기증해버린 이후 쇼핑을 하지 않아 드레스룸을 다시 가득 채우지 못한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다. 그렇다 해도 일반인에 비하면 몇 배나 옷이 많은데, 왜 이렇게 입을 옷이 없어 보이는지.
이 옷도 대보고, 저 옷도 대보고 하던 한녹영이 돌연 웃음을 흘렸다
“나 지금 뭐하니?”
어이가 없었다. 데이트 나가는 것도 아닌데, 옷차림이 뭐 대수라고 이리도 신경 쓰고 있었는지. 좀 전 제 행동이 어이없어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다 무난하게 청바지와 니트를 선택하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을 입었다. 그런 후 휴대전화와 차키를 챙겨 침실을 나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괜히 요란을 떨었다가 소음에 박상호가 깨서 이 야심한 시간에 어딜 가는 거냐고 물으면 곤란해지니까.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타자마자 내비를 찍으니 강준일의 집까지 15분이 나왔다. 진짜 가깝네. 이 정도면 뭐 아웃사촌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출발했다.
옷 고르는 시간 + 이동 시간을 포함해 총 25분이 걸렸는데, 도착하니 강준일은 샤워 중이었는지 물기가 흐르는 몸에 샤워가운을 걸친 채 문을 열어주었다. 한녹영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 바라보았다. 앞머리가 축 젖어 이마에 늘어붙은 모습이 또 새삼스러웠다.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면 오해할 것 같으니 들어와.”
“누, 누가 뜨거운 눈으로 봤다고 그래요? 그리고 무슨 오해를 한다는 건데요?”
강준일이 망설이지 말고 들어오라는 듯 비켜 섰고, 한녹영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전엔 정신을 잃은 상태로 온 거라 마치 첫 방문인 듯 어색했다.
“한녹영씨가 나한테 반해서 연애하자고 들면 어떡하지, 하는 이런 오해?”
하여간 내가 한 말 중 흘려듣는 건 하나도 없지. 눈이 가늘어지는 한녹영을 보고 강준일이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도 했을 텐데요.”
연애는 무슨 연애.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강준일을 상대로.
“한녹영씨. 사람 일에 장담은 금물이야. 정말 한녹영씨가 내게 반해서 연애하자고 들지 어떻게 알아?”
“내가 대표님께 연애하자고 들면 어쩔 건데요?”
자꾸 제가 한 말을 꼬투리 잡아 놀리려고 드는데, 당하고만 있을쏘냐. 그런 심정으로 턱을 들며 물었다. 정작 내가 정말로 연애하자고 덤벼들면 난색을 표할 거면서 왜 자꾸 사람을 놀리고 난리······.
“하지 뭐.”
“······네?”
이봐. 꽁무니 뺄 줄 알았어. 그런 심정으로 코웃음 칠 준비를 하고 있던 한녹영이 얼간이처럼 반문했다. 커다랗게 뜨인 한녹영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슬쩍 웃은 강준일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못 들었어? 연애하자고 들면 하지 뭐, 라고 했는데. 아, 덧붙이자면 약 안 먹었고, 와인 두 잔 마셨지만 취한 거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야.”
여전히 멍해 있는 한녹영의 뺨을 슬쩍 건드린 강준일이 부엌으로 향했다. 한녹영도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저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한녹영씨는 싫어하는 사람과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는 모양이지. 난 비위가 별로 좋지 않거든.”
밥과 차를 함께 할 정도로 싫어하진 않는다는 뜻인가. 과거로 돌아온 이후 저에 대한 강준일의 태도가 조금씩 변한 것 같긴 했다. 예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고, 다정해지기도 했고······. 다정이란 단어를 가만히 발음해보자 괜히 쑥스러워졌다. 목덜미를 슥 문지른 한녹영이 말했다.
“저도 비위가 좋은 편은 아니에요.”
즉 저도 밥과 차를 함께 할 정도로 강준일을 싫어하진 않는다는 뜻이었다. 말뜻을 알아챈 강준일이 짧게 웃으며 커피를 갈기 시작했다. 가루를 사다 커피를 내리는 줄 알았는데 직접 갈기까지 하네? 한녹영은 강준일의 옆에 서서 신기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콩을 직접 가시네요?”
“시간이 날 때면 생두를 사다 직접 볶기도 해.”
“커피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 편이지. 아, 그러고 보니 잊은 말이 있는데.”
“뭔데요?”
강준일이 드립 도구를 꺼내며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얼굴로 운을 뗐다. 우아, 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는구나? 색다른 면이 다 있네. 드립 커피는 카페에서만 내리는 줄 알았는데. 근데 손가락이 길어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꽤 그, 근사해 보이는 듯도 했다. 커피를 내리는 손길을 바라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한녹영씨 얼굴, 내 취향이야.”
“···········!”
방심하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는 한녹영을 웃으며 본 강준일이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커피를 내렸다. 그리곤 내린 커피에 물을 섞어 한녹영에게 내밀었다. 한녹영은 얼떨떨하게 커피를 받았다.
“덥나? 얼굴이 빨간데.”
“네? 네. 덥네요. 실내온도가 좀 높은 거 아니에요?”
덥다, 하며 손으로 부채질을 해댔는데 사실 강준일의 집 실내온도는 덥다고 할 만큼 높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서늘한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한녹영은 “뭐가 이렇게 더워? 재벌이라고 난방 펑펑 트는 거예요?” 하고 전부 더운 실내온도 탓인 냥 투덜댔다.
“내 말에 두근거린 건 아니고?”
빨갛게 열이 오른 한녹영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 강준일이 슬그머니 웃었다.
“두, 두근은 무슨. 이제 보니 대표님 근자감이 쩌네요. 고작 얼굴이 취향이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댈 정도로 보여요? 제가?”
하녹영은 어이없어 죽겠다는 듯 헛숨을 반복해서 내쉬며 컵을 들고 소파로 향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털썩 앉아 양손으로 컵을 쥐고 커피를 조금씩 마셨다. 두 번째 마시는 거지만······ 여전히 맛있네. 웃으며 뒤따라 거실로 나온 강준일도 소파에 앉았다.
“꼭 얼굴을 마주하고 해야 한다는 말이 뭐야?”
한녹영이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저 오늘 전속계약 해지했어요. 곧 기사 뜰 거예요”
언론에는 그냥 계약 종료 이후 자연스레 재계약을 하지 않은 걸로 보도 자료 뿌리는 것에 합의했다. 얼마 남지 않은 계약종료일을 앞두고 전속계약해지를 한 것이 밝혀지면 온갖 추측성 기사가 난무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계약종료가 얼마 안 남은 걸로 아는데?”
“네. 근데 하영택이라고, 회사에 실장이 있거든요. 사사롭게는 장현재 대표의 외사촌 형이 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나 몰래 사인 위조해서 웹 드라마 출연 계약을 맺었더라고요. 나 물 먹이려고요. 그걸 덮는 조건으로 미리 계약 해지하고 도망자에 대한 회사의 몫도 포기 받았어요. 제가 러닝개런티를 받기로 했는데, 그 수익을 회사와 나누자니 배가 아프더라고요. 고소할까 생각도 했는데 그래봤자 서로 피곤해지기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또 회사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빨리 자유인이 되어 자유롭게 촬영에 임하고 싶기도 했거든요. 도망자 촬영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터무니없는 수익을 약속하는 사기꾼 같은 멘트를 한 한녹영이 뭔가를 기대하는 눈매로 강준일을 보았다. 다리를 포갠 채 몸을 뒤로 기대고 있던 강준일이 등을 똑바로 세웠다.
“장현재와는 완전히 결별이군.”
“그런 셈이죠.”
“아쉽진 않나?”
한녹영은 내려두었던 컵을 다시 양손으로 감싸 쥐듯 들며 생각에 잠겼다. 계약해지 서류를 들고 대표실을 나올 때 장현재가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진 마라.” 라고 했었다. 그 말에 저는 “아니, 이걸로 끝이야.” 라고 못을 박았고, 장현재에게 했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분명한 진심이었고 결심이었다. 단단한 결심에 아쉬움이나 미련 같은 건 없다.
생각을 접은 한녹영이 돌연 웃었다. 강준일이 느닷없는 한녹영의 웃음을 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 진짜네요.”
“무슨 소리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재 형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팠거든요.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충실한 인형이라는 표현에 반박 못할 만큼 현재 형이 제게 절대적이잖아요. 그래서 홀로서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따끔거렸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괜찮아요.”
가만히 제 안을 들여다봤는데, 허세가 아니라 정말 괜찮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장이 따끔거렸고, 장현재로부터 벗어나는 걸음걸음에 미련이 남은 것이 느껴졌는데 신기할 정도로 지금은 괜찮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 장현재를 사랑했던 시간들을 깡그리 잊었을 정도로 말짱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그와 제가 완전히 분리된 현실을 떠올려 봐도 큰 통증이 없었다. 그저 약하게 앓고 지나가는 미열 정도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괜찮아진 거지? 사랑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집착이 길었던 만큼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오랫동안 홀로 마음 앓이를 할 거라 믿었는데 제 예상보다 훨씬 빨리 괜찮아진 지금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실망감과는 별개로, 신뢰가 바닥나는 것과는 별개로, 그에게 준 마음을 다 찾아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 여겼는데 어째서? 꼭 누군가가 제 마음속 장현재의 존재를 밀어낸 것 마냥······. 생각을 이어가던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강준일을 보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장현재로부터 받은 통증을 이토록 빨리 떨쳐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강준일이 떠올랐다.
“아쉬움 같은 건 없어요. 전 지금 말짱해요.”
한녹영의 말에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다행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앞으로는 장현재가 절대적이었다는 둥 하는 말은 입에 담지 않는 편이 좋겠어. 아무리 내가 한녹영씨와 장현재 대표와의 사이를 잘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내 앞에서 너무 스스럼없이 과거의 남자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한녹영이 눈을 깜박였다. 눈살을 찌푸린 강준일의 심기가 상한듯 보이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뭐야 저 표정과 말투는? 꼭 질투 같······.
“대표님 앞에서 현재 형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하면 안 되나요?”
“안 돼.”
“왜요?”
“한녹영씨 입에서 장현재 이름이 나오는 것이 싫으니까.”
정말 질투 같······. 내가 자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강준일이 질투할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삼장이 쿵 뛰었을 때였다.
“난 장현재가 싫거든.”
그냥 장현재가 싫다는 거군. 어쩐지. 한녹영은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며 커피를 마셨다.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줘?
“근데 나한테 할 말이 그게 다예요?”
“무슨 말이 더 있어야 하는데?”
“현재 형과 완전히 끝났다고 했잖아요. 계약해지까지 해서 이젠 완전히 남이라니까요?”
한녹영이 요점만 딱 추려서 말한 후 기대감에 차 강준일을 보았다. 그는 다시 다리를 포갠 자세로 등을 뒤로 기대며 ‘그래서 뭐?’ 하는 눈으로 한녹영을
응시했다.
“내게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그런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직구로 말하라는 투 같은데······.
“저 갈게요.”
한녹영이 커피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생각해 보니 굳이 계약해지 했다는 말을 전하러 이 새벽에 강준일의 집까지 찾아온 제가 어이없었다. 전화나 문자로 해도 되는 내용이고, 사실 그에게 굳이 시시콜콜 고할 필요도 없는 얘기였다. 이제야 강준일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들고 찾아와 기세등등하게 털어놓은 제가 어이없겠다 싶었다.
“그래. 늦은 시간이니 이만 가는 편이 좋겠어. 나도 피곤하고.”
강준일이 무심히 대꾸했다. 아쉬움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다. 뭐? 피곤하고? 조금만 더 머물렀다간 아예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았겠네. 속으로 구시렁대며 현관으로 향하는데 피곤하다던 강준일이 몸을 일으키더니 뒤를 따라왔다.
“왜 따라 나와요? 배웅 필요 없거든요.”
새침한 말에 피식 웃은 강준일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카드 키가 있거나 지문 입력이 된 사람만 이용할 수 있어서.”
난 또.
”안녕히 계시고요, 다음에 또 볼 일 생기면 보든가요.”
부러 심드렁한 투로 말한 후 빠른 걸음으로 강준일의 집을 나와 제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대에 이마를 쿵 박았다. 억지로 참고 있던 열기가 비로소 확 올라왔다. 얼굴이 데인 듯 화끈화끈했다.
한녹영 너 왜 이래?! 대체 무슨 말을 바라고 이 시간에 여길 온 거냐. 네가 장현재와 완전 남남이 된 것이 그와 무슨 상관이라고?! 자학이라도 하듯 운전대에 머리를 쿵쿵 박다보니 진정되기는커녕 이번엔 아까 강준일이 한 말이 떠올라 오히려 얼굴이 더 화끈해졌다.
진정해라, 심장아. 이렇게 뛸 일 아니거든? 아씨. 사실 아까 얼굴이 취향이라는 말에 좀······ 많이 두근댔다. 그 말이 뭐라고, 없어 보이게 가슴이 뛰고 난리야. 데뷔 이후 예쁘다, 아름답다, 사랑한다, 반했다, 목숨도 내놓겠다, 등등. 온갖 사탕발림 같은 소리를 숱하게 들어왔는데 고작 얼굴만 취향이라는 말에······ 나 참.
“약 한 거야. 분명해. 약에 취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들이잖아. 예뻐서 보쌈 해 간다는 둥, 취향이라는 둥, 연애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둥······. 약이야. 약일 거야.”
제멋대로 강준일이 이상한 약에 취한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낸 한녹영이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쓰고 있을 때 메시지 도착 알람이 울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상호 형 깼나? 조수석에 던져둔 휴대전화를 집어 메시지를 확인한 한녹영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독립 축하해. 한녹영씨, 아주 기특해.」
기특해, 이 말이 듣고 싶었던가. 한녹영은 기특하다는 글자를 눈에 새겨 넣을 듯 뚫어져라 보며 연신 웃었다.
“내가 무슨 말 듣고 싶어 하는지 알았으면서 의뭉스럽긴. 하여간 성격 한번 이상한 남자야.”
듣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큰소리로 투덜댄 한녹영이 비로소 후련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향했다.
☆☆★☆☆
시간이 흐르고 흘러 25일이 되었다. 어제부로 한울과 관련된 일을 전부 끝내 남은 건 도망자 촬영뿐이었다. 이제 정말로 한울과는 깨끗하게 남남이 된 것이다.
한녹영은 한동안 도망자에 관련된 인터뷰를 제외한 그 어떤 스케줄도 잡지 않고 모든 시간과 노력을 차도영을 분석하고 연기하는데 전부 투자할 예정이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리딩 시간이 오후 3시로 잡혀 있어 오전은 한가했다. 소파에 누워 뒹굴대며 워킹데드를 보고 있던 박상호가 첫 리딩을 앞두고 긴장해 대본을 다시 한번 정독 중인 한녹영을 향해 말했다.
“뭐가?”
대본을 잠깐 내려둔 한녹영이 물었다. 평소 워킹데드를 시청할 때의 박상호는 쿠션을 움켜쥔 채 긴장 모드로 초집중하곤 했는데, 오늘은 아까부터 통 집중을 못한 채 부산했다.
“스케줄이 없는 것도 이상하고, 이따 리딩 가는데 한수랑 지해, 순정이 없이 너랑 나 단둘만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이상하고. 참 너 메이크업은 어떻게 할 거야?”
오늘은 샵에 들렀다 갈 예정인데, 앞으로가 문제긴 했다. 정우 소속 분장팀이 있어 조연들이나 개인 스태프가 없는 배우들 분장은 해준다지만 좀 까다로운 편이라 과연 그들의 솜씨가 제 마음에 들지 확신할 수도 없고, 촬영 중간중간 메이크업 수정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샵으로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바로 지해 누나 데려올까? 회사에 들어가든 회사를 차리든, 그 전에는 일단 내 사비로 누나 월급 주면 되잖아.”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너 계약 종료되어 자유인 되었다는 기사들 떴으니까 망설이던 기획사들로부터 연락이 올지도 몰라.”
“그러지 말고 그냥 형이 회사 차리라니까. 왜 그렇게 기존 기획사에 미련을 못 버리냐?”
“선뜻 용가 안 나서 그래. 또 말아먹으면 어쩌나 싶고.”
박상호가 우물쭈물 말했다. 말하는 투를 듣자 하니 기획사 대표를 하고 싶긴 한 모양이었다. 근데 왜 망설여? 무려 내가 소속배우 해주겠다는데? 전에 장한경 때는 별 고민도 않는 것 같더니만.
“내가 있는데 왜 말아먹어? 나 한녹영이야.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 스타가 될 몸이라고.”
거만하게 으스대며 말하자 박상호가 웃었다.
“왜 고작 아시아야? 이왕이면 세계 최고로 하지.”
“사람이 양심이 있지. 그냥 소박하게 아시아 최고 정도로 하자.”
“양심 없이 굴어도 돼. 넌 정말 아시아 최고 스타가 될 자질이 풍부하니까. 이 형이 보증한다.”
“아시아 최고 스타가 될 이 몸이 소속 배우 해준다는데 왜 빼? 진짜 말아먹을 것 같아서 그래?”
“그게······ 솔직히 말해서 말아먹을까 봐 두려운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너 때문이야.”
“나? 내가 왜?”
뜬금없이 제 핑계를 대자 황당했다. 한녹영이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대형 기획사 들어가면 푸시를 제대로 받아 보다 쉽게 톱이 될 수 있을 텐데. 나랑 같이 회사 차리면 아무래도 힘들 거 아냐. 제대로 된 푸시도 못해줄 테고. 회사에 힘이 없다고 무시당할까봐 걱정되고, 한울처럼 악의적인 기사 같은 거 제대로 커버도 못 쳐줄 텐데. 내 손으로 너 톱 오브 톱으로 만들 거라고 큰소리 빵빵 쳤는데 막상 네가 회사 차리라고 하니까 괜히 설치다가 오히려 너한테 피해줄까 봐 더럭 겁이 나더라. 내 능력으로는 대표가 아니라 그냥 매니저가 딱인데 싶기도 하고.”
간지러운 사랑 고백 같은 말을 늘어놓은 박상호가 뒤늦게 멋쩍어졌는지 코를 훌쩍이며 일어섰다. 그리곤 되게 바쁜 척 “11시 넘었다. 얼른 밥 먹고 샵에 들렀다가 리딩하러 가자.” 고 덧붙였다. 한녹영은 부랴부랴 부엌으로 향하는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난 형 믿어.”
박상호가 어깨를 움찔했다. 또 코를 훌쩍 들이켜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콧날이 찡해진 모양이었다. 한녹영 또한 괜히 코끝이 찡했다. 오히려 피해줄까 봐 망설였다니······. 저렇게 마음이 약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내가 끝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보살펴줘야지.
한녹영은 박상호가 해준 점심을 먹고 연예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청담동 샵에 들러 헤어와 메이크업을 한 후 한남동으로 향했다. 정우가 입주해있는 빌딩 주차장에 도착하니 2시 40분이었다.
좀 일찍 왔나, 하는 생각을 하며 올라가니 몇몇을 빼고 출연 배우들이 다 와있는 상태였다. 다들 여러 힘든 과정을 걸친 후 드디어 시작한 일정에 설렘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녹영은 선배 배우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라마를 함께 한 적이 있는 배우들은 정중하고 예의바른 한녹영의 태도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함께 한 적은 없고 소문만 들은 배우들은 ‘소문과는 다르네?’ 하며 얼떨떨해 했다. 하지만 대체로 한녹영이 싹싹하게 먼저 인사를 하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선배 배우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며 안으로 향했던 한녹영이 진지한 얼굴로 대본을 읽는 중인 선배 배우 한 명을 보고 멈칫했다. 김상원 선배다. 황산 테러를 당했던 날, 제 무례한 태도에 빡쳐 화를 냈던 바로 그 선배였다.
아, 그러고 보니 상원 선배님도 도망자에 출연했었지. 경찰서 서장 역이었다. 이때만 해도 김상원과의 사이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막 개기기엔 너무나 대선배였던 것이다. 스무 살에 데뷔해 올해로 데뷔 23년을 맞은 대선배시니까. 그때는 인기가 최고조를 찍고 있을 때라 건방 또한 하늘을 찔러 눈에 뵈는게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녹영은 숨을 크게 들이쉰 후 김상원을 향해 다가가 허리를 구십도 가까이 숙였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한녹영입니다. 또 같이 드라마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상원과는 신인 때 한 번 같이 드라마를 한 적이 있었다. 고개를 든 김상원이 한녹영을 향해 짧게 웃었다.
“뭘 그리 딱딱하게 굴어? 네가 요즘 대세라며? 대세답게 막 건방도 떨고 그래야 대선배인 내가 야단도 치고 하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차도영을 맡았습니다. 연기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지도해주세요.”
“알고 있다. 네가 차도영을 엄청 욕심냈다지? 드라마 불발될 뻔 한 것도 네가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김상원이 제 옆 의자를 툭툭 쳤다. 거기 앉으라는 의미였다. 한녹영은 두 말 않고 김상원 옆에 앉았다. 그러다 맞은편을 봤는데 장한경이 딱딱하게 얼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제 옆으로 앉은 다른 배우들한테 차마 눈길도 못 준 채 홀로 굳어 있었다. 한녹영은 그런 그를 향해 웃으며 제 옆으로 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선배 배우들 기에 눌려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기세였던 장한경이 구세주라도 발견한 냥 달려왔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을 향해 달려오는 대형견 같았다.
“선생님, 장철호 역을 맡은 장한경이라고 합니다. 방송에선 완전 신인 중의 신인이지만 연극 무대에 선 경험이 있고요.”
한녹영이 김상원에게 장한경을 소개했다. 장한정이 목각처럼 뻣뻣하게 인사를 했다.
“여, 여, 영광입니다. 선생님. 장한경입니다.”
“반갑다. 근데 이렇게 얼어서 연기 하겠어?”
“오디션을 통해 뽑힌 친구인데, 작가님 말이 카메라에 불 들어오니까 확 변했다고 하던데요.”
김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친구들이 있지. 숫기 없어서 말도 못하더니 막상 촬영 들어가면 눈빛이 확 달라지는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대체로 연기를 잘 하더라고. 아주 신들린 것 마냥. 자네도 기대할게.”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전히 긴장을 내려놓지 못하는 장한경의 어깨를 가볍게 친 한녹영이 옅게 웃었다.
“긴장 풀어요.”
“그러고 싶은데 점점 긴장되네요.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이 가득해서. 막 심장이 뛰면서 주체를 못하겠어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른 장한경이 후아후아, 하며 큰 숨을 연이어 내뱉었다.
“장한경씨도 이제 곧 TV에서나 보던 연예인이 될 텐데요.”
“제, 제가요?”
“그럼요. 이제 엄연한 배우인데. 출연 계약서 썼죠?"
“네. 박 매니저님한테 전화로 도움도 받았고, 정우에서 잘 해줬습니다. 제가 매니저도 소속사도 없어서 암 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제 입장에서 하나하나 설명해주더라고요. 사인한 후에 매니저님한테 여쭤보니 신인치고는 아주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출연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 꼭 체크해야 할 사항에 대해 설명하던 걸 본 적이 있다. 정우에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초짜라고 후려치기를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껌값 수준의 돈을 던져주는 데도 많은데, 정우는 그런 악질 제작사가 아닌 것 같아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럼 배우 맞잖아요. 엄연히 정식으로 출연계약을 맺은 배우.”
“배, 배우라니······ 꿈만 꿨는데.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드라마에 누 되지 않도록 진짜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노, 녹영 선배님. 말 노, 놓으세요.”
장한경이 잔뜩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수줍음과 어색함이 가득한 그의 말과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되나?”
“그럼요! 엄연한 선배님이신데요. 그리고 저 혀, 형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이번에도 수줍음과 어색함이 가득한 물음이었다.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쭈뼛대며 하는 말에 한녹영 또한 어색해질 지경이었다. 장한경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분명 저보다 2살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올해로 스물여섯 살인가?”
“네! 제가 2살 어립니다. 근데 제가 제 나이를 말한 적 있었나요?”
26살이면 주민성과 동갑이네. 그런 생각을 하던 한녹영이 장한경의 의아한 물음에 움찔했다.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말한 적 없나?”
시침을 뚝 떼며 말하자 장한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말했나? 한녹영 선배가 저렇게 나오는 걸 보니 말했었나 보네.
“아니요. 다시 생각해 보니 이름과 함께 나이도 말씀드린 것 같아요.”
한녹영이 장한경을 향해 웃었다.
“나이로 치면 내가 형이니 형이라고 부르던가.”
“고, 고맙습니다!”
장한경은 벌떡 몸까지 일으키며 한녹영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고, 그 바람에 이목이 집중되어 전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한녹영이 재빨리 장한경을 앉히며 얼굴을 붉혔다. 한녹영의 바로 옆에 있어 두 사람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은 김상원이 ‘어린 것들이 재밌게 노네.’ 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녕하십니까?”
송정빈이 도착했다. 그는 요란스레 등장해 큰소리로 인사를 외쳤다. 연극 무대에 오래 섰던 탓에 성량이 장난 아니라 리딩실 안이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다. 그는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도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더니 한녹영 쪽으로 왔다. 그리고 아까 한녹영이 그랬던 것처럼 김상원을 향해 크게 고개를 꾸벅했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등장 한 번 요란하다. 난 탱크가 들어온 줄 알았어.”
김상원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인데 이렇게 구박하시깁니까? 저 2년 반 만에 방송 복귀하는 겁니다. 엉덩이 좀 토닥거려 주세요.”
“내가 냄새나는 사내 놈 엉덩이 만져서 뭐하게?”
일없다, 하고 고개를 돌리는 김상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여러 번 함께 드라마를 한 적이 있어 두 사람은 이렇게 스스럼없이 농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는 되었다.
김상원의 구박에 겸연쩍게 웃은 송정빈이 한녹영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곤 시선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내가 될 거라고 했지, 라고 하듯. 으스대는 시선을 읽어낸 한녹영이 짧게 웃었다. 송정빈은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는 장한경에게 “네가 차철호 맡았나 보네.” 하더니 장한경 옆 빈 의자에 자연스레 않으며 말했다.
“중간에 드라마 엎어져서 나의 화려한 재기가 물 건너가나 했는데, 다행이야. NB 대신 투자해준 데가 LK인 것 같더라.”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배우들에게도 비밀로 하는 거 아니었나? 깜짝 놀라는 한녹영의 반응을 본 송정빈이 “진짜였어?” 하더니 말했다.
“복도에 김석형 감독이랑 강준일 대표 있더라. 사진이나 뉴스를 통해 얼굴을 알고 있었거든. 보자마자 감이 딱 왔지. LK에서 우리한테 투자했구나. NB를 대신해 나선 비밀 투자자가 바로 강준일 대표였구나, 하고 말이야. 동시에 또 우리 드라마 반드시 대박친다는 감도 확 왔고. NB 대신 LK라니 감독 능력도 좋아. NB보다야 LK가 몇 배는 낫지. 근데 넌 벌써 알고 있었어?”
강준일 대표가 왔다고? 한녹영이 벌떡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향했다. 마침 김석형과 김현영, 그리고 강준일과 한성준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강준일을 발견한 한녹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한녹영씨, 어디 가십니까?”
김석형이 물었다.
“아니요. 강 대표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와 본 겁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작발표회 전까지 비밀로 하는 거 아니었나요?”
김석형을 향해 질문을 던진 한녹영의 시선이 강준일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는 한녹영을 보고 표정 변화 없이 무심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LK로 투자 확인 전화가 갔다네요. 비밀이 완전히 지켜질 거라 백 퍼센트 믿진 않았는데, 예상대로 됐네요.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까진 없어서 LK에서 투자를 인정했고, 아마 지금쯤 슬슬 기사가 뜨고 있을 겁니다. 이왕 밝혀진 김에 배우들하고 인사나 할 겸 NB투자 철회로 불안했을 마음도 다독일 겸 직접 오신 거랍니다. 대충 다 모인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김석형이 말했다.
“감독님. 저 잠깐 대표님과 얘기 좀 하겠습니다.”
시계를 본 김석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김현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한녹영이 강준일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강준일과는 한울과 계약해지를 했던 날 그를 찾아갔던 이후로 처음이다. 그사이 한녹영 또한 무척 바빴기 때문에 통화 시도조차 못했다.
“저 이제 한가해요.”
뜬금없이 말에 강준일이 눈썹을 올렸다.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다짜고짜 말했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완전 한가해서 집에서 대본만 볼 예정이니 언제든 대표님께 풀코스 식사 사줄 시간이 있다는 뜻이에요.”
“난 계속 바쁠 예정인데.”
“대표님은 언제쯤 한가해지시는데요?”
한녹영의 물음에 강준일이 한성준을 돌아보았다. 그는 습관이 든 대로 안경을 추어 올리며 “당분간 일정이 타이트합니다.” 하고 말했다.
“들었지? 타이트하다는군. 하지만 일에는 언제든 변수가 존재하는 법이니 스케줄이 하나라도 취소되어 시간이 비면 연락하지.”
뭐? 스케줄이 취소되면 연락한다고? 스케줄 하나가 취소되는 날이 언제가 될지 알고? 무작정 대기하라는 거야. 뭐야.
“내가 뭐 대표님 3분 대기조라도 되는 줄 알아요?”
한녹영이 곧이어 새침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스케줄 빌 때 연락이나 한번 해보든가요.”
본격적으로 촬영 들어가기 전까진 진짜 한가할 예정이니까. 자존심 상하지만 3분 대기조 가능했다. 왜 이렇게 애걸복걸 안달복달 매달려서 밥을 사줘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말이다.
밥 사준다고 약속한 거니 지키려고 이러는 거야. 난 신의 있는 남자니까. 한녹영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튕기는 강준일이 얄밉기도 하고, 안달복달하는 스스로가 좀 한심하기도 해서 부루퉁해 있는데, 그런 한녹영을 내려다보며 짧게 웃은 강준일이 말했다.
“내일 저녁 8시.”
“뭐가요?”
한녹영이 고개를 들었다.
“한녹영씨와 처음으로 술 마시러 갔던 곳 기억하나?”
“네.”
당연히 기억한다. 강준일의 차를 타고 가긴 했지만 정신이 말땅한 상태였기 때문에 길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거기서 8시에 보자고.”
“계속 바쁠 예정이라고 하시더니요.”
“물론 앞으로도 바쁠 예정이지만 한녹영씨의 열렬한 데이트 신청을 계속 무시할 수야 있나.”
“데이트 신청 아니었는데요. 열렬한 데이트 신청은 더더욱 아니고요. 투자건에 대한 빚 갚는 거니 오해하지 마세요.”
데, 데이트는 무슨. 정색하는 한녹영을 향해 강준일이 방긋 웃었다.
“오해하고 싶은데. 오해가 내 취미인데 오해하지 말라고 하면 쓰나.”
“무슨 오해를 어떤 식으로 하고 싶은데요?”
“고작 30억 투자한 드라마에 대표인 내가 직접 온 까닭이 뭐라고 생각해?”
아까 김석형이 배우들과 인사도 할 겸 NB로 인해 불안한 마음도 다독일 겸이라고 하지 않았나? 강준일이 직접 온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대표님이 직접 오신 까닭이 뭔데요? 설마 저 때문이라고 할 참이세요?”
“어.”
“네?”
한녹영의 눈이 커졌다. 그냥 해본 소리라 곧바로 긍정하는 대답이 나오자 놀라고 말았다.
“설마 한녹영씨 때문이라고 할 참이었어. 홀로 선 한녹영씨의 첫 드라마라 응원해주려고. 그 이유가 아니면 내가 여길 왜 왔겠나? 내가 그리 한가한 사람도 아닌데.”
당황해서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어어, 하고 물개 소리만 내는 한녹영을 내려다보며 강준일이 웃었다. 가늘어진 눈매에 개구짐이 가득했다.
“느닷없이 훅 날라는 것이 취미세요?”
“무슨 소리야?”
“대표님이 이상한 소리 하실 때마다 방심하고 있다가 훅 얻어맞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래서 머리가 어지럽다고요.”
“흠. 머리가 어지러우면 안 되는데. 다른 곳이 어지러워야지.”
“다른 곳 어디요?”
리딩실 안에서 정우 직원이 나와 “한녹영씨, 강준일 대표님. 안으로 들어오세요.” 라고 말했다. 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곧 들어간다는 표시를 한 강준일이 한녹영에게 자그맣게 속삭이듯 “심장.” 하고 말하더니 혼자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녹영은 홀로 복도에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부랴부랴 안으로 향했다. 그리곤 제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투자 철회로 많이들 걱정하셨을 걸로 압니다. 그런 말 있죠. 똥차가 가니 벤츠가 온다는 말이요. 우리에게도 똥차가 가고 벤츠가 왔습니다. 바로 투자 계의 벤츠 LK에서 투자 및 광고를 시원스레 투척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려 강준일 대표님께서 우리 도망자의 대박을 기원하며 직접 찾아와주셨습니다.”
대놓고 NB를 똥차 취급한 김석형의 말에 배우들이 일제히 와아아,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강준일이 앞으로 가 김석형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내받았다.
“강준일입니다. 도망자는 우리 LK가 처음으로 투자한 드라마입니다.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철저한 분석 아래 투자한 것이니 어느 드라마에도 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명연기를 펼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한국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명품 드라마를 만들어봅시다.”
또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강준일은 짧은 말을 마치고 마이크를 김석형에게 도로 주더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리딩실을 바쁘게 빠져나갔다. 바쁜 일정 속 억지로 시간을 짜내어 들른 모양새였다.
“LK의 첫 드라마 진출이라, 그게 도망자라니 기분 좋은데? 근데 아무리 드라마 첫 투자라고 해도 그렇지, 무려 대표님께서 직접 오다니. 기분이 으쓱해지네. 영화에는 몇 백 억을 투자하면서도 한 번도 직접 찾아간 적은 없다고 하던데. 나 강 대표 실물은 처음 보는데 배우 기죽이게 잘생겼어. TV보다는 실물이 더 낫네.”
송정빈이 제작사 쪽에서 마련해둔 음료수 뚜껑을 따며 말했다. 한녹영도 생수를 한모금 마셨다.
‘응원해주려고.’
좀 전 강준일이 했던 말이 떠오르며 기분이 이상해졌다. 진짜 날 응원해주려고 바쁜 시간 쪼개서 온 건가? 웬일인지 심장이 뜨거워지는듯 했다. LK엔터 연수원에서 잡지 화보 촬영 했던 날 ‘기특해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뭐라고 할까. 감동받았다고 하면 될까? 이런 기분이 감동받은 기분 맞겠지? 강준일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출입문 쪽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한녹영이 코를 훌쩍였다.
괜히 사람 감동주고 난리야. 나한테 감동 줘서 어쩌려고. 왠지 내가 강준일 대표한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그럴 리 없는데. 진짜 그럴 리 없을 덴데.
‘심장.’
심장이 어지러워야 한다니 그건 또 뭔 소리래.
그나저나 진짜 방심한 사람한테 요상한 말로 훅을 먹여 당황하게 하는 데는 발군의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니까. 입매를 삐죽이는 한녹영의 얼굴이 밝았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솔직히 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참, 인생사 모를 일이다. 서로 싫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저와 강준일 사이가 이렇게 묘하게 변하다니 말이다.
“······영씨?”
멍하니 강준일의 생각에 빠져있던 한녹영의 어깨를 김상원이 툭 건드렸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장한경이 마이크를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저를 보는 중이었다. 송정빈 또한 입으로 ‘무슨 생각 중이야? 네 차례야.’ 하고 말했다.
“녹영이 혀······ 선배, 인사······.”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되냐고 해놓고 막상 형이라고 하려니 어색해서 선배라고 호칭을 바꾼 장한경이 마이크를 건넸다. 제 차례인데 넋을 놓고 있느라 또 다시 의아한 시선의 주인공이 된 한녹영이 멋쩍게 마이크를 받아 일어섰다.
“강도영을 맡은 한녹영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제 소문을 듣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거만 안 떨고 열심히 할 테니 걱정 마시고, 막 굴려주십시오. 알고 보면 저 쉬운 남자입니다.”
한녹영의 인사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그렇게 말하면 진짜 막 굴려요.” 하며 웃었다. 웃음이 터지자 분위기가 한결 유연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쉰 한녹영이 마이크를 김상원에게로 넘겼다.
배우들이 차레로 인사를 했고, 마지막 인사는 여주인공 역을 맡은 나희연이었다. 도망자의 주요 배역 중 가장 먼저 캐스팅이 완료되었던 그녀는 청순의 대명사답게 하늘하늘한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차림으로 “나희연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하며 애교스럽게 인사를 마쳤다.
배우들 인사가 끝나고 스태프들 소개까지 마친 후에야 본격적인 리딩이 시작되었다.
대본 리딩은 3시간 정도 이어졌다. 신인이나 연기 논란이 일있던 배우가 거의 없어 리딩 또한 막힘없이 진행되었고, 2회 대본까지 리딩한 후 만족스럽게 끝났다. 배우들 중 가장 신인인 장한경은 덜덜 떨다 막상 리딩이 시작되자 침착하게 해냈다. 한녹영은 대사 한 번 씹지 않고 막힘없이 리딩하는 그를 약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박상호의 안목과 장한경의 연기 실력을 믿고 추천했으면서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일말의 걱정이 있었는데, 이제 깨끗하게 날려버려도 되겠다.
한녹영 또한 대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보며 홀로 연습했던 대로 잘 해냈다. 긴장해서 혹시 대사를 씹거나 실수하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더 잘 해낸 것 같아 스스로 뿌듯했다. 물론 본 촬영에서 잘해야 하지만 저를 보는 시선들에 감탄이 섞였던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한녹영, 촬영이 기대된다.”
김상원이 만족한 얼굴로 한녹영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나름대로의 칭찬의 말인 것이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거기 차철호도 생각보다 괜찮았고.”
김상원은 장한경도 칭찬한 후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있다며 먼저 가버렸다.
“한녹영, 꽤 하던데?”
이번엔 송정빈이 한녹영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 송정빈과 합을 맞춰야 하는 씬이 많은데, 잘 될 것 같았다.
“정빈 선배도 꽤 하던데요?”
“내 연기야 자타공인 최고이고. 캐스팅 확정되고 난 이후에 너 나오는 드라마 봤는데, 발음할 때 좀 신경 쓰이던 부분이 완전 사라졌더라. 연습 많이 했나 봐?”
“네. 지적 받고 고쳤습니다.”
박상호 앞에서 대본을 읽다가 지적 받은 부분이 바로 발음할 때 한 번씩 된소리로 말해 소위 연기톤으로 말한다는 거였다. 그걸 고쳤더니 연기가 한결 자연스러워진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전에는 대사 연습을 하다 박상호에게 지적을 받아도 ‘형이 내 연기 지도 선생님이라도 돼!’ 하며 버럭 신경질이나 냈지,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고칠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짓이었다.
“촬영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이러다 얼굴뿐만 아니라 연기로도 후배한테 밀리겠어. 더더욱 분발해야지, 안 되겠다.”
“외모는 제가 낫다는 걸 인정하시는 겁니까?”
“인정은 아니지. 분야가 다르다고 해야지. 넌 프리티와 뷰리풀, 난 핸섬. 오케이?”
송정빈이 한녹영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눈을 찡긋했다. 앞에서 김석형이 다시 마이크를 잡더니 “근처 갈빗집 예약해뒀습니다. 다 같이 식사하고 가시죠? 한우 갈비로 쏩니다!” 하고 말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와아 하고 함성을 내질렀다.
“한우 갈비라니, 지작부터 통 크게 쏘는대? 오랜만에 배터지게 먹어야겠다. 너도 갈 거지? 다음 스케줄 있어?”
“아니요. 촬영 전까지 한가합니다.”
본래 뒤풀이나 회식 같은 덴 잘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젠 가능하면 참석해서 친목을 다져볼 작정이었다.
“잘 됐네. 가자. 초짜 넌?”
송정빈의 시선이 장한경에게로 향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가방에 넣고 있던 장한경이 시선을 들었다.
“저도 갈 겁니다.”
“알바 하느라 바쁜 것 같던데, 일은 관뒀어?”
한녹영이 물었다.
“촬영 날짜 잡혔다는 전화 받고 바로 전부 관뒀어요. 출연료 지급받기 전에는 저축해둔 돈으로 충분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런저런 알바 꽤 했던 모양이야. 초짜.”
“장한경입니다. 송정빈 선배. 그리고 연극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어서 마트 판촉 알바, 편의점, 주유소 등등 닥치는 대로 일 많이 했습니다. 녹영 선배와도 마트에서 돼지고기 팔다 만났고요.”
이제는 긴장이 좀 풀린 모양이다. 리딩 전에는 얼어서 송정빈과 눈도 못 마주치더니만. 송정빈도 한결 유연해진 장한경의 태도를 느끼곤 ‘제법인데?’ 하듯 눈썹을 올렸다.
“편의점, 주유소 일은 나도 예전에 했었어.”
한녹영이 말했다. 그밖에도 이런저런 일을 많이 했었고.
“녹영 선배도요?”
“데뷔 전에. 그때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서 뚱뚱하고 우울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
“녹영 선배가요? 말도 안 돼. 이렇게 마르셨는데?”
장한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고, 송정빈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릴 때부터 통통한 편이었고, 성인이 될수록 뚱뚱 쪽에 가까워졌다가 데뷔 전 독하게 뺀 거야.”
“긁지 않은 복권이었다는 건가. 살 빼니 보석이었던 경우 연예계에 많아. 얼굴에 칼은 안 댄 거지?”
송정빈이 한녹영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장난스레 물었다. 장한경이 움찔했다. 한녹영은 송정빈의 손길을 밀어내며 눈매를 찌푸렸다.
“백퍼센트 자연산입니다.”
짜증스레 대꾸하며 먼저 성큼 바깥으로 나오자 리딩이 끝난 것을 알고 기다리던 중인 박상호가 보였다. 한녹영의 뒤를 바짝 쫓아 나온 장한경이 박상호를 보자마자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하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박상호가 그런 장한경을 흡족하게 보았다.
“뒤풀이 있다며? 김석형 감독이 좀 전에 먼저 나가면서 나한테 너랑 같이 꼭 오라더라.”
“응. 가자.”
세 사람은 나란히 빌딩을 나와 근처 갈빗집으로 향했다.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송정빈이 슥 끼어들었다.
곧 나머지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속속 도착했고, 적당히 섞여 앉아 고기와 술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녹영은 맥주 한 잔을 받아놓고 한 모금씩 느리게 마셨다. 술은 좋아하지만 운전을 해야 하는 박상호는 사이다로 아쉬움을 달래며 고기만 전투적으로 먹었다. 그 혼자 족히 5인분 먹은 듯했다.
“초짜, 아니 장한경 군은 어느 고등학교 출신인가?”
옆 테이블에서 스태프 한 명과 조연을 맡은 배우 한 명이 학교 얘기를 하다 동창임을 알게 되어 신기해하는 대화를 들은 송정빈이 물었다. 먼저 한녹영에게 물어서 출신 고등학교를 얘기하자 이번엔 장한경에게 관심을 주었다. 송정빈뿐만 아니라 같이 연기하게 될 선배들이 이 자리에 찾아와 술을 권하자 차마 거절하지 못해 주는 족족 마셨던 장한경이 취기로 벌겋게 오른 얼굴을 한 채 목덜미를 긁적였다.
“저 중퇴입니다.”
별 생각 없이 물었던 송정빈이 당황했다.
“어? 중퇴?”
“네. 2학년 2학기 중반 정도에 자퇴했습니다.”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즈음 강간을 당했고, 그 사실이 퍼져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장한경은 자퇴 이유를 캐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말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부모도 없이 누나랑 단 둘이 사는 고아라고 애들이 절 좀 싫어했거든요.”
혀가 꼬여 어눌하게 나오는 말에 씁쓸함이 가득했다. 따돌림까지 당했었나. 그건 몰랐다. 한녹영도 학창 시절이 그리 아름답진 않았다. 따돌림까진 아니지만 어울려 놀 만한 친구가 없어 늘 혼자였다. 한녹영은 표정이 어두워진 장한경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제 나름의 위로 표시에 장한경이 한녹영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선배. 제 술 한 잔 받으시죠.”
한녹영이 난처하게 입술을 핥는 송정빈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별 생각없이 질문을 던진 건데 그게 지뢰였나, 하는 얼굴을 했던 송정빈이 반갑게 한녹영의 술을 받았다.
“영광이네. 한녹영한테 술을 다 받아보고. 근데 넌 술 앞에 두고 제사 지내냐? 어째 술잔이 빌 기미가 안 보여?”
“저 술 약해요. 주량을 넘겨가며 억지로 마실 생각도 없고요.”
“단호하기는.”
송정빈이 입매를 실룩였고, 한녹영이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다 이제 끝, 이런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은 박상호를 돌아보았다.
“상호 형, 장한경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어. 완전 갔네.”
박상호가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장한경을 보며 혀를 찼다. 적당히 끊어낼 줄도 알아야지, 미련하긴. 하긴 드라마는 처음인 완전 신인이 선배들의 술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지. 한녹영이야 “선배, 저 술 취하면 개 돼요.” 라는 말로 적당히 쳐낼 수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저렇게 말해도 억지로 권하는 선배들도 많지만 다행히 도망자 출연 배우들 중에는 강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촬영하는 동안 함께 술이며 밥이며 먹을 일들이 종종 있을 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성향이 맞지 않으면 촬영 내내 부딪쳐 힘든 경우가 왕왕 있었다.
“상호 형, 장한경 주소 알아?”
“모르는데?”
알 리가 없지. 완전히 뻗은 녀석을 어째야 하나, 제 빌라로 데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한녹영에게 술을 권하러 온 김현영이 상황을 파악하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제가 알아요.”
“작가님이요?”
“네. 계약서 썼잖아요. 주소 얼핏 보니까 같은 동네에 살더라고요. 집이 가깝진 않지만요. 어쨌든 동네 주민이라 반가워서 얘기하다보니 제가 자주 가는 단골 미용실 언니가 장한경씨 누나더라고요. 세상 참 좁죠? 그 언니가 진짜 친절하고 솜씨도 좋거든요.”
김현영도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녀는 취기로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자꾸 딴소리를 해댔다. 한녹영이 난처하게 압술을 깨물었다.
“작가님. 장한경 주소······.”
“아, 맞다! 제가 그 언니 전화번호 알아요. 전화해서 정확한 집 주소 물어볼게요.”
민망하게 웃은 김현영이 그제야 곧바로 전화를 걸어 사정 설명을 한 후 주소를 얻어냈다.
“고맙습니다, 작가님. 전 장한경 데리고 먼저 갈게요.”
“오늘은 제대로 얘기도 못했는데, 아쉽네요. 첫 촬영일에 저도 현장에 갈 거니까 그때 봬요.”
“조심해서 가고, 촬영 때 보자.”
송정빈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네, 선배. 그때 뵙겠습니다.”
한녹영은 송정빈뿐만 아니라 다른 선배들에게도 대충 인사를 한 후 박상호와 함께 장한경을 부축해 일어섰다. 그리고 바깥으로 향하는데, 술에 취해 축 늘어진 남자를 끙끙대며 부축해가자니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겨우 차 뒷좌석에 실은 한녹영이 조수석에 앉자마자 한숨을 내뱉었다. 1시간 강도 높은 운동을 한 것 마냥 지쳤다.
“무거워 죽는지 알았네. 형, 빨리 출발하자. 이 녀석 데려다주고 집에 가서 씻어야겠어.”
장한경이 뿜어내는 술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냄새가 몸에 온통 밴 듯한 느낌에 찜찜했다. 눈살을 찌푸린 한녹영이 진저리를 내자 픽 웃은 박상호가 내비를 찍고 출발했다. 장한경의 집까진 40분 정도 걸렸다.
“여긴 거 같은데?”
골목 안으로 들어와 허름한 빌라 앞에 차를 세우자 안에서 긴 머리를 질끈 동여 묶은 여자가 뛰어나왔다. 장한경의 누나인 모양이었다. 박상호가 창문을 내린 후 물었다.
“혹시 장한경 누나 되십니까?”
“네. 제가 한경이 누나에요.”
“장한경은 뒤에 있습니다. 잠시 만요. 완전히 뻗어서 누나 혼자 힘으로는 장한경 부축 못 합니다.”
박상호가 부랴부랴 내렸다. 그리곤 장한경의 누나를 도와 뒷좌석에 뻗어있는 장한경을 바깥으로 끌어냈다.
“어유, 술 냄새. 한경아! 장한경! 정신 좀 차려봐! 대체 술을 얼마나 퍼먹은 거야?!”
그녀가 눈을 감은 채 비틀대며 서 있는 장한경의 등을 찰싹찰싹 쳤다. 찰진 소리로 보아 꽤 매섭게 때린 거 같은데 장한경은 도통 깰 줄 몰랐다.
여기로 오는 동안 잠깐 졸았던 한녹영이 장한경 누나 목소리에 퍼뜩 잠에서 깬 후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곤 장한경을 깨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중인 여자를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한녹영입니다.”
장한경의 누나가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아, 안녕하세요. 한녹영씨. 어떡해, 저 진짜 팬인데. 함께 오실 줄은 몰랐어요. 한경이가 한녹영씨와 같이 드라마 하게 되었고, 한녹영씨 덕분에 드라마 찍게 되었다고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몰라요. 요즘 매일 한녹영씨 얘기를 한니까요. 우리 한경이한테 기회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따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면 부담스러워하실 거라고 말려서······ 진짜 고맙습니다. 정말로요. 그리고 제가 진짜 팬이에요. 지난 번 드라마 회당 다섯 번씩은 봤을 거예요. 거짓말 아니고 정말로요. 저 팬카페에도 가입했고요. 팬클럽 회원이기도 해요. 휴대전화 메인 화면도 한녹영씨 사진이에요. 한경이가 저 볼 때 마다 주책이라고 막 놀렸는데 이렇게 실물을 보게 될 줄이야. 동생 잘 둔 덕을 오늘에서야 보네요. 진짜 가문의 영광입니다. 어떡해. 너무 떨려.”
“······?!!!”
잔뜩 흥분해서 숨 한 번 쉬지 않고 수다스럽게 말을 쏟아내는 장한경의 누나 얼굴을 본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새하얗게 질린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저, 저 여자는······!!
“아······ 제가 너무 수다스러웠죠.”
장한경 누나가 그제야 민망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 안 나왔다. 목이 콱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곱게 화장을 한 탓인지, 평소 좋아하던 연예인을 봐서 흥분한 탓인지 발갛게 상기되어 생기가 넘치는 얼굴은······ 낯익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분명 제게 황산을 던진 그녀다. 그땐 파리하고 초췌해 지금보다 십 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분명 동일인이다. 원한과 분노에 휩싸여 저를 노려보며 ‘죽어, 한녹영!’ 하고 외침과 동시에 황산을 내던졌던 여자. 저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던 바로 그 여자.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멀쩡한 얼굴에서 욱신욱신한 통증이 느껴지며 오싹 소름이 돋았다. 황산 테러를 당했던 순간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며 심장이 조여들었다. 한녹영이 가빠진 숨을 힘겹게 삼키며 주먹을 꾹 쥐었다. 순식간에 전신이 땀으로 홈뻑 젖었다.
‘장한경의······ 누나였어?’
장한경의 누나였구나. 장한경 누나가 내게 황산을 던진 거였어.
이제야 납득이 갔다.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 제게 황산을 던져 제 인생을 망친 건가 했더니······ 동생의 복수였구나.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었기에 저를 보는 눈길에 원한이 가득했던 것이다.
전부 제가 장한경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결과였다. 인과응보였다. 장한경을 간접 살인한 것이 제가 저지른 가장 큰 악행이었는데, 왜 장한경과 여자를 연결 짓지 못했을까.
“녹영아?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듯 허연 얼굴로 서서 장한경의 누나를 두렵게 쳐다보고 있자 박상호가 의아하게 물어왔다. 한녹영은 그제야 머쓱해있는 그녀를 향해 억지로나마 웃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어지러워서.”
“괜찮으세요?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데. 집은 되게 누추하지만 잠깐 올라가서 차라도 한 잔 하시고 가실래요? 좀 쉬웠다 가시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장한경 누나가 걱정하며 권해왔다. 한녹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장한경 누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심장이 폭주하듯 뛰고 있었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상호 형, 누님과 같이 장한경 부축해서 집에 데려다주고 와.”
“그래. 넌 차에서 쉬고 있어.”
박상호가 그녀와 함께 장한경을 부축해 계단을 올랐고, 한녹영은 비틀대며 도로 차에 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긴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해 중얼댔다.
장한경 누나였구나. 장한경의 누나였어. 장한경 누나야.
한 열 번쯤 중얼댔을까. 바짝 수축해있던 몸의 근육이 비로소 느긋하게 풀리며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살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러운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한 번씩 황산을 뒤집어썼을 때의 일을 꿈에서 보곤 기겁하며ㅈ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거울 앞으로 달려가 멀쩡한 얼굴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안도가 되었다. 대체 제가 어디서 어떤 잘못을 저질러 황산 테러를 당했을까, 분명 처음보는 여자였던 터라 언제 그녀와 원한을 맺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는데······. 한울과 전속 계약 해지를 한 후에도 늘 마음속 한 구석에 가시 같은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장한경 누나였다니.
자살하지 않고 계속 살았더라면 범인을 알게 되었을 테지만 버틸 기운이 없었다. 절망감에 빠져 병원에 누워있을 때 찾아온 경찰들조차 만나지 않았다. 수사 진행 상황에 관심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워낙 크게 이슈가 된 사건이라 수사는 진행되었을 테지만, 그 즈음 범인의 체포 따위는 한녹영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저 비참했고, 끝없이 절망해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모든 걸 다 잃었는데 누가 범인이든 아무 상관없다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퇴원 이후엔 뉴스도 기사도 자세히 보지 않았다. 전부 저를 비난하는 얘기들뿐이었는데 봐서 뭐하나 싶었다. 얼핏 자살 직전 ‘한녹영에게 황산 테러한 범인 자살.’ 어쩌고 하는 뉴스를 들은 것도 같은데 확실한 건 아니었다.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는 정말 온통 몰릴 대로 몰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정말 들은 건지 아니면 환청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만약 제가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니었다면 남매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건가? 뒤늦게 오싹해졌고, 동시에 안도가 몰려왔다. 제가 과거로 돌아오며 남매 모두 다시 살아났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어머니께 끝없이 감사한다. 한녹영이 쿵쿵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제 불안함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래도 되는 거겠지? 예전과는 달리 저와 장한경의 사이가 우호적으로 변했으니까.
그저 과거로 돌아오고 나니 장한경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이 큰 죄책감으로 다가와 이전과는 달리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했을 뿐인데, 그 덕에 황산 테러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한녹영이 혼자 웃었다.
그럼 이제 절 괴롭히던 문제가 다 해결된 건가? 화사에서도 나왔고, 장현재와의 관계도 끝냈으며, 가족들과의 인연도 끊는 중이고, 황산에 대한 걱정까지 접었으니······. 남은 건 정말 열심히 연기하며 진짜 배우로서의 삶을 사는 것뿐이다. 언제 두려움에 휩싸였냐는 듯 기분이 가벼워진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콧노래마저 흥얼흥얼 나왔다.
잠시 후 박상호가 돌아왔다. 그는 아까와는 달리 싱글벙글 웃고 있는 한녹영을 보며 어리둥절해 했다.
“다 죽어가는 몰골이더니 어느새 살아났네?”
“응. 해결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방금 해결했거든. 형, 나 이제 공포에 시달리지 않아도 돼.”
“뭔 소리야? 네가 무슨 공포에 시달렸는데?”
“그런 게 있어.”
“뭔데 그래?”
“비밀이야.”
“한녹영 너, 한 배를 탄 형한테 막 비밀 만들고 그러는 거 아니다.”
박상호가 서운한 듯 툴툴거렸다.
“형, 빨리 가자. 나 피곤해.”
“대체 뭔 일인지 나 원. 참 나 내일 저녁에 약속 생겼다. 내일 저녁은 너 혼자 먹어야 해. 굶지 말고 챙겨먹어.”
“응. 알았어.”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핑계를 대고 강준일을 만나러 가면 좋을까 궁리 중이었는데. 한녹영은 창밖을 내다보며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미심쩍은 눈으로 그런 한녹영을 쳐다보던 박상호도 ‘뭐, 녹영이 기분이 좋으면 됐지.’ 하며 피식 웃었다.
“강준일 대표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장담한 대로 별로 헤매지 않고 약속장소에 도착한 한녹영은 전과 똑같이 각이 딱 잡혀 뻣뻣하게 서 있는 가드를 향해 말했다.
“한녹영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드가 한녹영을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일전의 그 웨이터가 “한녹영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하고 말하더니 일전의 그 룸으로 안내해주었다.
“강 대표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맥주 드릴까요?”
일전 맥주를 요구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웨이터 쪽에서 먼저 말했다. 한녹영이 머쓱하게 웃었다.
“지금 말고 이따 대표님 오면 그때 대표님 술과 같이 들여보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웨이터가 나가자 한녹영은 소파에 앉았다. 제가 일찍 도착한 탓에 약속시간인 8시가 되려면 20분 정도 남은 상태였다. 그 사이 포털에 뜬 기사나 보자 싶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제 오후부터 도망자에 대한 기사가 빵빵 터지는 중이었다. LK가 도망자에 투자하다, LK의 드라마 잔출, 한녹영 역에 반해 주연을 내려놓다, 송정빈의 귀환 등등······. 온갖 제목의 기사가 쏟아졌다. 예전에는 이렇다 할 주목거리가 없어 이 정도로 기사가 뜨진 않았는데, 한녹영과 LK의 합세로 언론의 관심이 뜨거워 지금 도망자에 대한 주목도가 아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실시간 트위터에도 도망자 기대된다는 글이 많았다. 한녹영은 도망자에 관련된 가사와 댓글 등을 차분하게 읽었다. 기대된다는 글을 볼 때마다 심장이 뜨거워지며 ‘진짜 잘해야지.’ 하는 결심이 단단해졌다.
도망자와 관련해 인터뷰 요청도 꽤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한녹영이 도망자에 관한 인터뷰라면 얼마든지 하겠다고 했지만 박상호가 개 중 괜찮은 언론사만 추리는 것 같았다.
“어?”
도망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기분 좋아 빙글빙글 웃으며 기사를 검색 중이던 한녹영이 눈을 크게 떴다.
‘로코의 여왕 신은주 작가의 새 드라마 달콤한 그대의 주연으로 신인 주민성 발탁.’
뭐야. 신 작가 신작 주연으로 주민성이 들어갔어? 주민성은 드라마보다 예능으로 먼저 떴는데? 진짜 예전과 달라진 사실이 많구나. 한녹이 기사를 클릭했다.
‘무서운 신예가 떴다. 바로 한울 에이전시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배우 주민성이다. LA의 유명한 극단에서 실력을 쌓은 그는 재경 자동차 CF를 꿰차며 얼굴과 이름을 알리더니 단박에 신은주 작가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훤칠한 키와 세련된 마스크, 완벽한 연기력을 갖춘 그에게 작가와 감독이 홀딱 반했다는 후문······.’
훤칠한 키는 인정. 세련된 마스크? 뭐 인정. 백퍼센트 자연산인 저와 비교해 좀 인공미가 느껴지긴 하지만 인정한다. 근데 뭐? 완벽한 연기력?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스포츠 만능에, 집안도 좋다고 하고, 노래도 잘하고, 재담이 있어 예능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솔직히 완벽한 연기력은 아니었다.
한녹영은 일제히 기사를 풀었는지 실시간으로 주민성과 달콤한 그대에 관한 기사가 주루룩 올라오는 걸 보며 입매를 삐죽였다. 여기 저기서 기사가 뜨니 도망자가 금세 묻하는 것 같아 속상하다. 기사를 몇 개 더 찾아 읽은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망할 드라마니까 속 빈 강정이 될 건데 뭐.”
“뭘 말하는 거지?”
아, 깜짝이야. 언제 들어온 건지 모르겠는데 강준일이 한녹영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왔어요?”
“방금.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휴대전화에 열중해 있던데. 그렇게 열렬히 나와의 데이트를 원하더니 내가 도착할 동안의 잠깐을 못 참고 딴짓을 하고 있어서 서운해질 뻔 했어.”
전혀 안 서운한 듯한 말투의 강준일이 맞은편으로 앉았다.
“기사 검색해보고 있었어요. 5분 전까지만 해도 도망자랑 나에 관한 기사가 대부분이라 신났는데, 좀 전부터 기사가 신은주 작가 신작과 주연을 맡은 주민성에 관한 기사로 바뀌고 있어서 좀 짜증나요. 벌써 묻히는 것 같아서요.”
시간대도 참 교묘하다. LK의 도망자 투자와 저의 출연으로 도망자에 대한 기대가 한참 뜨거운 순간 신은주 작가와 주민성에 관한 기사를 풀다니.
“주민성? 낯선 이름인데, 신인인가?”
“네. 한울 소속 신인 배우에요. 나 대신 한울 간판으로 키우려고 미국에서 데려왔고요. 이 친구예요.”
한녹영이 주민성의 프로필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까만 페도라를 쓰고 개구진 표정으로 웃고 있는 사진인데, 유쾌하고 거침없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몸을 숙여 한녹영의 휴대전화를 통해 주민성의 얼굴을 확인한 강준일이 흠,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가 제법 괜찮군. 확실히 장 대표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인정하긴 싫지만. 한녹영 대신 키울 배우로 데려왔다는 이 친구도 확실히 마스크가 제법 매력적이라 어느 정도 레벨까진 뜰 듯 했다. 거기다 장현재식 공격적인 마케팅이면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오를 테고. 벌써 한 건 한 모양이군. 재경 자동차 CF라······.
한참 휴대전화 속 주민성을 내려다본 강준일이 뒤늦게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곤 코트를 벗어 옆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주민성 마스크가 마음에 드나 봐요.”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는 손길에 신경질이 가득 묻어났다.
“나쁘지 않아. 남성적인 매력이 있으면서도 개구진 분위기가 있어 여성들에 잘 먹히겠어. 여기에 연기력만 받쳐준다면 남배우 기근인 연예계에서도 환영할 테고.”
강준일이 제 휴대전화를 통해 주민성을 검색한 후 포털에 올라온 프로필을 자세히 살펴봤다.
“몸도 좋군. 확실히 여성들에게 먹히겠어.”
프로필 사진 중 하나가 상반신 노출 사진이었는데, 오랜 운동을 통해 근육이 잘 잡힌 몸이었다. 표정은 어린아이 같은데 몸은 근육질이라······. 강준일이 장현재의 안목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한녹영은 그런 그를 보며 점점 더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엔 눈이 거의 실 같아졌다.
“대표님도 이런 몸을 좋아하시나 보죠?”
주민성 같은 근육질 상반신? 나도 한 석 달만 빡시게 운동하면 만들 수 있다고. 빡빡한 스케줄 소화하느라 운동을 등한시해서 그렇지 이제 다시 운동을 시작 했으니 곧 근사한 근육이 생길 거다.
한녹영이 콧방귀를 꼈고, 그제야 강준일이 시선을 들어 샐쭉해진 한녹영을 의아하게 보았다.
“무슨 소리야.”
“주민성 상반신 노출 사진을 보는 대표님 눈에서 아주 꿀이 떨어지겠던데요. 얼굴은 내가 취향이고, 몸은 주민성이 취향인가 봐요. 이런 몸 나도 한 석 달이면 만들 수 있거든요. 그깟 근육이 뭐 그리 대수라고.”
한녹영이 또 한 번 콧방귀를 꼈다. 강준일의 눈매에 슬쩍 웃음기가 감돌았다.
“이런 근육 만들기가 쉽지 않을 텐데. 더구나 한녹영씨 체질로는 더더욱.”
“제 체질이 뭐 어떤데요?”
“쉽게 근육이 안 잡힐 체질로 보여.”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알아요? 전문가도 아니면서. 내 트레이너가 곧 근육 생길 거라고 했거든요.”
“그 트레이너 당장 해고해. 입으로만 하는 아부용 멘트니까. 그리고 단기간에 이런 근육은 더더욱 무리지. 딱 봐도 오랜 시간 운동을 통해 만들어둔 근육 같은데.”
“남의 트레이너를 왜 대표님이 자르라 마라 해요? 그리고 아까부터 무슨 근육 전문가인 냥 말하는데, 어이없거든요. 오랜 시간 운동은 무슨. 프로필 사진 찍으려고 공갈 근육 만든 게 딱 봐도 보이는데. 아니면 포샵으로 만든 근육이거나.”
왜이렇게 열이 뻗치며 덥냐. 맥주는 왜 안 갖다 주는 거야? 한녹영이 출입문을 노려보며 씩씩댔다.
사실 주민성은 근육질의 남자가 맞았다. 운동선수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이 아니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섬세한 근육 말이다. 늘씬하게 뻗은 몸에 섬세하게 잡힌 근육이 꼭 조각상 같아 예능에서 주민성이 상반신 노출을 할 때마다 시청률이 팍팍 올라갔다는 우스개 같은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고.
근데 그게 뭐? 배우한테 근육이 뭐 중요한데?
“그리고 배우의 기본은 연기 아니에요? 주민성 이 자식 연기는 나보다 못해요. 내가 훨씬 연기 잘해요.”
발연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가 좀 부족해 늘 그 부분을 지적받곤 했었다. 주민성이 연기 지도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는 날이면 일부러 연습실에 내려가 지켜보다가 지적을 받는 순간 크게 비웃어주곤 했었다. 그럼 주민성은 차마 선배인 한녹영을 대놓고 욕하지 못해 혼자 울분을 삭이며 분해했었고. 물론 나중에 둘만 남는 상황이 되면 욕을 하거나 보란 듯이 장현재와 있었던 일을 자랑하며 한녹영의 약을 바짝바짝 올려놓곤 했지만 말이다.
장현재와의 관계를 끊어 이제 주민성과 경쟁의식을 불태울 일은 없겠거니 했는데 새삼 주민성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전투적으로 올라왔다. 한녹영이 마른 제 팔을 문질렀다. 내일부터 운동시간을 하루에 4시간으로 늘릴까? 단백질 쉐이크도 팍팍 먹고. 두고 봐라. 나도 근육 만들어서 주민성보다 더한 몸짱이 되어버릴 테니까.
“······?”
한참 혼자 씩씩대다 문득 강준일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어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는 한녹영의 얼굴을 응시하며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왜 웃어요?”
“질투야?”
“네에?! 질투라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에요?”
한녹영이 펄쩍 뛰었다.
“내가 주민성을 칭찬하니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지, 질투는 무슨. 절대 질투 아니거든요. 그냥 주민성이랑 달콤한 그대 때문에 도망자랑 내가 묻혀서 짜증나서······ 그래서 열 받은 거거든요.”
나 참 질투는 무슨. 그것도 강준일 때문에 주민성을 질투한 거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보기엔 분명히 질투였는데.”
“아니라니까요!”
“질투할 것 없어. 주민성 같은 근육질 몸은 내 취향이 아니니까.”
“그럼 어떤 몸이 취향인데요?”
강준일의 말이 떨어지게 무섭기 물어놓고 뒤늦게 혀를 깨물며 “별로 궁금한 건 아니고요.” 하고 덧붙였다. 다리를 포갠 후 몸을 앞으로 내민 강준일이 대단한 비밀 얘기라도 하듯 말했다.
“지금보다 최소 5kg이 더 찐 한녹영.”
“저 배역 때문에 곧 지금보다 5kg 늘어난 상태가 될 텐데, 그럼 얼굴도 몸도 대표님 취향이 되겠네요.”
“그 날이 기대되는데.”
“그 날이 오면 대표님 저한테 반하시겠네요.”
“그러게 한녹영씨한테 반해서 연애하자고 들지도 모르겠어.”
“안타깝네요. 대표님은 제 취향이 아니신데.”
한녹영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내가 너무 냉해서? 나 요즘 한녹영씨한테 무척 다정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부족했나?”
“네. 뭐 썩 만족스럽진 않았네요.”
“어떻게 해야 한녹영씨가 만족할까?”
“글쎄요. 좀 더 분발해보시던가요.”
여전히 새침하게 대꾸하는 한녹영의 입매가 연신 실룩거렸다. 살이 좀 더 쪄야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어쨌든 내 전부가 강 대표 취향이라는 소리네. 주민성을 칭찬하는 말에 꽁해졌던 마음이 스륵 풀렸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웨이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식사 준비도 해드릴까요? 아니면 술과 간단한 안주만 들일까요?”
여기서 식사도 되나?
“한녹영씨 식사는 했나?”
“아니요. 저녁은 아직·····.”
박상호와 함께 나와 그를 약속장소에 내려준 후 검도 도장에 들렀다 바로 온 길이었다. 운동까지 한 터라 배가 고팠지만 약속장소가 술집이라 안주로 배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럼 식사부터. 술은 식사에 어울리는 와인으로 하지.”
웨이터가 한녹영을 보았다.
“한녹영씨도 와인 괜찮으십니까?”
아까 맥주 얘기를 한 것 때문에 맥주 대신 와인도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네. 괜찮습니다.”
살짝 웃은 웨이터가 룸에서 나갔고, 곧 다른 웨이터들과 함께 음식을 갖고 돌아왔다. 메뉴는 중식이었다. 깐쇼 새우, 불도장, 새우완자, 동파육 등이 한상 차려졌다. 술집이 아니라 중식당에 온 기분이었다. 웨이터는 중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소개하더니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뚜껑을 열어 두 개의 잔에 따라주었다. 그리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하고 허리를 숙인 후 룸을 나갔다.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한녹영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여기 술집 맞죠?”
“술, 차, 식사 전부 내키는 대로 즐길 수 있는 복합 클럽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지. 주마다 유명 레스토랑의 쉐프를 초빙해서 식사를 만들어주지. 이번 주는 중식 쉐프를 부른 모양이군.”
“신기하네요. 전 영락없이 술만 마시는 곳인지 알았어요. 그래서 약속장소를 여기로 잡아서 좀 의아했거든요.”
“어제 물어보지 그랬나?”
“어차피 술도 산다고 했으니까 술 먼저 산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죠. 사람들 이목을 피해서 술 마시기에는 이만한 장소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강준일이 작은 그릇에 불도장부터 덜어 한녹영에게로 밀어주었다. 살짝 웃은 한녹영이 불도장을 국물부터 마셔보았다. 맛있다. 동파육도 한 점 집어 먹어봤는데 혀에 삭 녹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동파육을 먹고 만족한 적이 거의 없는데, 이건 백 점 만점을 줘도 모자란 기분이 들 정도로 완벽한 맛이었다. 이거 만든 쉐프님 어느 식당 소속인지 좀 알아가고 싶다. 박상호도 동파육 참 좋아하니 한 번 데려가고 싶었다.
“맛있어요. 대표님도 어서 드세요.”
한녹영이 동파육을 집어 강준일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짧게 웃은 강준일이 와인부터 마셨다. 동파육을 한 점 더 먹은 한녹영도 와인을 마셨다. 와인 역시 한녹영이 무난히 마실 정도로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맛이었다.
“많이 먹도록 해. 그래야 살이 찌지.”
“전부터 느낀 건데 대표님 유난히도 제 살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살 쪄서 취향의 몸이 되면 잡아먹으려고요?”
기분이 좋아서 또 말이 막 나온다. 한녹영이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잡아먹어? 한녹영, 네가 닭이냐. 소냐. 잡아먹히게.
강준일은 말실수를 해놓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한녹영을 느긋하게 보았다.
“생각 중이야.”
잡아먹을지 어쩔지.
“뭐를요?”
“한녹영씨와 여기 처음 온 날 말이야.”
물음에 대답은 않고 뜬금없이 과거를 언급한다.
“그 날이요? 그 날이라면 잘 기억하고 있는데, 왜요?”
“침대에서 내가 뜨거웠다는 말에 흥미를 느껴서 술 마시자는 제안에 응한 거거든. 새삼 궁금해지는데. 대체 어떤 상황에서 한녹영씨와 내가 침대로 들어갔을까, 하고 말이야.”
그, 그 말은 또 왜 언급하고 난리야. 한녹영이 급하게 와인을 마셨다.
“그, 그게 왜 궁금한데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언제쯤 어떤 상황에서 한녹영씨와 침대에 들어갈지.”
“그럴 일은 없어요.”
“무슨 의미지?”
내내 빙글대는 웃음으로 가득했던 강준일의 눈매가 살짝 싸늘해졌다. 한녹영이 와인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러자 어느새 한 잔이 다 비었다. 주량이 별로니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건 아는데, 기분이 업 되어 한두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던 한녹영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제 잔에 와인을 다시 채웠다. 보통 와인은 두 잔까지는 말짱하게 마실 수 있으니까. 스스로를 설득한 한녹영이 와인을 홀짝 마신 후 말했다.
“그 날 제가 했던 말은 잊어버려요.”
괜히 말실수는 해가지고. 궁금해 하는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제 입으로 어떻게 ‘실은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대표님한테 벌거벗고 덤벼들었습니다. 그것도 카메라를 들고요.’ 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몇 번을 생각해도 정말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강준일은 그때 심실상실 상태였으니 굳이 따지자면 강간······. 그걸 영상까지 떠서······. 아무리 장현재에게 미쳤었다고 해도 그렇지, 톱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이 컸어도 그렇지. 생각하고 또 해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기억이었다. 그 일을 제 입으로 강준일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실망할 테니까.’
겨우 강준일과의 관계가 이만큼 나아졌는데, 예전처럼 냉한 눈으로 절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두렵고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 제가 장현재의 인형으로 살며 그에게 절대 충성했던 사람이라는 걸 강준일도 잘 알지만 설마 그런 짓까지 할 정도로 미쳐있었다는 사실까진 짐작하지 못할 테지.
한녹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겁에 질린 눈으로 강준일을 보았다. 저로 인해 곤란을 겪고도 병실에 찾아온 걸 보면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어쩌면 허허 웃으며 넘어갈 지도 모르지만, 제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강준일이 아는 것보다 더 최악의 인간이었을 때의 제 모습만은 결단코. 이제부터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것이 한녹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잊을 수 있는 말이 아닌데.”
강준일이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대표님과는 안자요.”
그런 식으로는. 조용하게 덧붙인 말을 듣지 못한 강준일의 눈매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그 말은 좀 서운하군. 나와는 안자겠다니······ 그 말은 즉 나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뜻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딱딱한 말투였다. 그제야 한녹영이 시선을 들어 차가워진 강준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 강 대표 얼굴이 왜 저렇게 냉하지? 설마 아까 내 말을 오해한 건가. 이제야 생각해보니 충분히 오해할 만한 말이었다. 대놓고 ‘너랑은 절대 안 자.’ 라고 말한 셈이니 말이다.
“대표님과 절대 안 잔다는 뜻이 아니고요, 아니 자고 싶다는 뜻도 아니지만요. 그러니까 제가 대표님한테 나쁜 짓을······ 좋은 의도로 잤던 것이 아니라서······.”
얼굴이 벌게진 한녹영이 손까지 마구 휘저어가며 변명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자니 곤혹스러움만 커졌다. 목이 타서 와인을 벌컥벌컥 마셔가며 혼자 허둥지둥 하다 보니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근데 아까 강 대표가 뭐라고 했더라?
“대표님은 저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의향이 있는 겁니까?”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면 내가 뭐 하러 한녹영씨와 마주앉아 술 먹고, 밥 먹고 하겠어? 내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도 아닌데. 한녹영씨는 모르겠지만, 내게 가장 부족한 건 시간이야. 그래서 아무한테나 내 시간 안 나눠줘.”
“저기······ 발전된 관계라면······?”
조심스러운 물음에 강준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다는 얼굴이었다.
“한녹영씨 바보야? 연애 안 해봤어? 당연히 지금보다 발전된 관계라면 연애지. 반해서 연애하자고 들겠다는 말까지 해놓고 왜 이리 어리숙하게 굴지?”
한녹영이 눈을 깜박였다.
“연애 안 해봤는데요.”
이번엔 강준일이 당황했다. 거만하게 다리를 포개고 있던 그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올리더니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안 해봤다고?”
“네.”
솔직히 말해서 장현재와의 관계를 연애로 볼 순 없으니까. 데뷔 전에도 연애의 근처에도 못 가봤다. 관심 가는 여자도 없었고.
장현재에게 그리도 집착한 걸 보면 날 때부터 남자를 더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남자에게 성적으로 관심이 간 적 역시 없었다. 한녹영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집착했던 건 장현재가 처음이었고, 그리고 지금은······.
“그건 참······ 뜻밖의 말이군. 따지고 보면 장 대표와 한녹영씨 관계는 연애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지. 흠,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봤단 말이지.”
“강 대표님은 많이 해보셨나 봐요?”
“경험이 없진 않지.”
“몇 번이나 해보셨는데요?”
“궁금해?”
“궁금하니까 묻죠.”
과거 연애했던 사람들의 수를 세는지 강준일이 흠, 소리를 내며 엄지로 턱을 문질렀다. 한녹이 와인을 잔에 더 따랐다. 그리곤 벌컥 마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강준일의 생각은 끝나지 않았다. 대체 몇 명이나 사귄 거야? 얼마나 많이 사귀었기에 아직도 생각 중인지 원. 이제 보니 순 바람둥이였잖아? 하긴 강준일 외모와 스펙이면 최상급이니 노리는 사람들이 한둘이었겠어.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줄을 섰을 테고, 그 중에 원하는 대로 골라잡아 얼마든지 사귈 수 있었을 건데.
투덜대며 와인 한 모금. 바람둥이라고 욕하며 또 와인 한 모금. 그러다 보니 잔에 가득 채운 와인을 세 잔이나 마셔버린 셈이 되었고, 당연히 취기가 올라 머리가 어질해지기 시작했다.
“바람둥이!”
“취했군.”
혀가 잔뜩 꼬여 누가 봐도 지금의 한녹영은 취객이었다. 포개었던 다리를 풀며 강준일이 웃었다. 분명 주량이 얼마 안 된다고 들었는데 홀짝홀짝 꽤 많이 마신다 싶었다.
“취하긴 누가 취해요. 어쩐지 테크닉이 보통이 아니더라. 남자와의 섹스가 처음이었던 날 막막······ 울려가지고 막막······ 더해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고 말이야. 왜 그렇게 황홀했나 했더니 다 수우~ 많은 사람들이랑 연애하면서 쌓아온 테크닉 때문이었어.”
왜인지 분하고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강준일과 한 것이 첫 섹스는 아니었다. 데뷔 이전 몇 명의 여자들과 관계를 가진 적이 있지만 전부 일회성 관계였을 뿐이고, 그저 배설의 쾌감뿐이었다. 하고나면 허무해 나중엔 일회성 관계조차 갖지 않았다. 경험이라곤 고작 서너 번일 뿐이라 섹스란 밋밋한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강준일과 몸을 나누었을 때 아주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울면서 더 해달라고 매달렸을 정도라 나중에 정신이 들었을 때 ‘남자들끼리의 섹스는 다 이런가보다. 남색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도 있지 않나.’ 라며 강준일과의 섹스가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남자들끼리의 섹스는 다 그런가보다, 라며 스스로를 설득했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이후 장현재와의 섹스에서 깨달았지만.
장현재를 만난 이후 매일매일 염원하고 간절히 바랐던 연인이 되었고 첫 관계를 가졌지만 기대했던 만큼 뜨겁거나 황홀하지 않았다. 바라던 것이 이루어져 감정적으로는 충만했지만 육체적으로는 사실······ 미지근했다. 솔직히 머릿속으로 강준일과의 강렬했던 관계가 떠올랐을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장현재도 그걸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 번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느냐는 식으로 물은 적이 있었으니.
“나와의 섹스가 그렇게 좋았나? 울면서 더 해달라고 애원했을 만큼?”
강준일이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흥미롭다는 어조로 물었다. 한녹영이 웃고 있는 강준일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흘겼다.
“좋았어요. 왜요? 난 뭐 느끼면 안 돼요?”
“그랬단 말이지. 보고 싶군. 어쩌지. 진짜 진심으로 보고 싶어졌는데.”
“뭐가요? 뭐가 보고 싶은데요?!”
“내 밑에 깔려서 내 좆을 품은 채 울면서 더 해달라고 애원하는 한녹영씨 모습.”
“·············그, 그런 게 왜 보고 싶은데요.”
술에 취한 와중에도 엄청난 말을 들어버렸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거 정말 곤란한데, 하고 혼잣말을 한 강준일이 이내 한녹영을 향해 통보하듯 말했다.
“한녹영씨 이제 큰일 났어. 긴장해야 할 것 같은데.”
“왜, 왜요?”
“본격적으로 날 감당해야 할 테니까.”
이것도 엄청난 의미가 내포된 말인 것 같은데. 한녹영은 맹수처럼 웃고 있는 강준일을 깜박깜박하는 정신으로 보다 이내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순식간에 한녹영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소파 위로 푹 쓰러지자 강준일이 벌떡 일어났다.
“이봐, 한녹영씨? 잠든 건가?”
사람 놀라게 하더니만. 강준일이 취해서 잠든 한녹영을 어이없이 내려다보았다. 취하면 잠드는 것이 바로 한녹영의 술버릇인가 보았다. 강준일은 제 코트를 집어와 한녹영의 몸 위로 덮어준 후 그의 머리맡에 앉아 혼자 느긋하게 와인을 마셨다. 그리곤 간간히 완전히 곯아떨어진 한녹영을 내려다보았다.
‘반곱슬인 모양이야.’
TV에서는 항상 반듯하고 윤기 넘치는 머리 상태를 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원래는 반곱슬이 분명해 보였다. 일전에도 처음에는 차분해 보였던 머리카락이 시간이 흐를수록 부스스하게 올라오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던지. 속으로 웃으면서 겉으로는 냉정을 유지하느라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왠지 허술하고 빈틈 있어 보여 꽤 귀엽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강준일이 가만히 한녹영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휘감아 보았다. 오늘도 분명 제대로 손질하고 나왔을 텐데 어느새 부스스 해진 머리카락은 거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부드럽게 손가락에 휘감겼다. 꼭 솜사탕을 실로 만들어 손가락에 감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전에도 한 번 느꼈지만 정말 이래서 한녹영을 일러 허니, 솜사탕, 캔디라고 하는 모양이다. 보는 것만으로 달콤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어서 말이다.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저 또한 한녹영의 달콤함에 취하게 된 모양이고.
“이렇게 될 거라곤 예상 못했는데.”
장현재에게서 벗어나려 애쓴 한녹영이 기특하기도 하고, 뜻밖에도 성격마저 취향이라는 생각도 했고, 한녹영과 마주앉아 장난 식으로 말을 섞는 일이 즐거워 ‘이거 곤란한데?’ 하고 느끼면서도 아직 진심으로 덤벼들 결심까진 하지 않았다. 두어 번 데리고 놀다 헤어질 생각이었다면 벌써 진작 침대로 데려갔겠지만 처음부터 한녹영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요즘 말로 썸을 즐기던 중이었는데······.
그런데 아까 술에 취한 한녹영이 ‘섹스가 처음이었던 날 막막······ 울려가지고 막막······ 더해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고 말이야.’ 라고 했을 때 KO패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어 백기를 흔들어야 할 것다고 할까.
오늘 한녹영을 만나러 올 때까지만 해도 아직 결승선에서 한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젠 선을 넘어버린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한녹영을 가지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냉정하고 칼 같은 사람이라 보지만 기실 강준일은 독점욕이 강한 성격이었다. 특히 사람에 한해서는. 쉽사리 욕심내지도 않지만, 한 번 욕심내면 겉과 속 전부를 손에 쥐어야 만족하는 성격이었다. 머리카락 한올한올에, 세포 하나하나에 제 이름이 새겨져야 만족하는 그런 성격인 것이다.
그러니 한녹영씨, 당신 큰일 났어. 날 백기 들게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야할 거야.
미간 사이를 톡 건드리자 한녹영이 으응, 하고 있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연신 웃은 강준일이 남은 와인을 홀로 느긋하게 전부 비워냈다. 그런 후 호출벨을 누르자 웨이터가 도착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만 가야겠으니 계산하고, 대리 기사 대기시켜.”
클럽 자체 내에 술 취한 손님들을 위한 대리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네. 강 대표님.”
계산을 끝낸 강준일이 한녹영을 안아 몸을 일으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클럽 소속 기사가 강준일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강준일은 조심스레 한녹영을 먼저 눕힌 후 안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의 물음에 강준일이 빌라 주소를 불러주었다. 한녹영을 집에 데려다주고 갈까 했는데, 보쌈 해버리자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한녹영은 이번에도 술에 취해 완전히 잠들어 빌라에 도착한 강준일이 그를 안고 내려도 몰랐다. 강준일은 한녹영을 안고 제 집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침실에 내려놓았다.
“세상모르고 자는군.”
예뻐서 누군가 보쌈해갈지도 모르니 아무데서나 잠들지 말라고 했던 말을 농담으로만 들은 건가. 제가 자존심 있는 신사였으니 망정이지, 고삐 풀린 망나니쯤 되었다면 상대가 곯아떨어졌건 말건 아랑곳 않고 확 덤벼들었을 거다. 사실 아까 제 것을 품고 애원하는 한녹영의 모습을 상상했더니 아랫도리가 커져 바지가 꽉 죄는 느낌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아플 만큼 부푼 제 아랫도리를 내려다본 강준일이 쯧 하를 차며 말했다.
“이봐, 한녹영씨. 당신 지금 굶주린 맹수 앞에 배 뒤집고 누워있는 토끼 같은 형국이라고.”
한마디로 나 잡아잡수,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묘한 말로 절 자극시킨 토끼는 정작 술에 취해 뻗어버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존심 있는 신사 따위 집어치우고 이걸 그냥 잡아먹어, 하듯 홀쭉한 볼을 톡톡 건드리자 한녹영이 신경질을 내며 몸을 돌려 누워버렸다. 강준일이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말라서 봐줬다. 통통하게 살을 찌운 후에 잡아먹어야 별미일 테니. 강준일은 뻐근한 아랫도리를 샤워로 가라앉힌 후 나왔다. 한녹영은 여전히 꿈나라여서 강준일이 옆에 눕는데도 깨지 않았다. 고개를 흔든 강준일이 본격적으로 수면을 취하려고 눈을 감았을 때 똑바로 누워 자던 한녹영이 가느다란 신음성 같은 소리를 내며 잠꼬대를 시작했다.
“무, 무서워······. 혼자는 시, 싫어. 얼, 얼굴이 아파. 뜨거워······. 싫어! 사진 찍지 마! 망가진 내 얼굴 찍지 마!!”
끙끙 앓는 소리도 내고, 손을 휘적이며 뭘 피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걸 보니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악몽이기에 저리도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거지? 그리고 망가진 내 얼굴은 무슨 소리지?
마음이 안 좋다. 쯧 혀를 찬 강준일이 한녹영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처음에는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는 기색을 보였던 한녹영은 강준일의 심장 쪽에 얼굴을 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곤 곧 다시 평화로운 표정으로 자기 시작했다.
강준일은 한녹영이 또다시 악몽을 꾸지 않도록 밤새 그를 안아주었다.
“아, 머리 아파.”
다음 날 아침 한녹영은 두통을 느끼며 부스스 눈을 떴다. 와인은 늘 뒤끝이 별로라니까. 와인을 마시고 취해 잠든 다음 날이면 꼭 두통 속에 눈을 뜨게 된다. 미간을 찌푸린 채 끙끙댄 한녹영이 두통약을 먹으려고 협탁에 손을 뻗었다가 주춤했다. 어라? 여긴 내 침실이 아닌데?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니 묘하게 낯이 익었다.
“강 대표 집?”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보니 강준일 대표의 집이 맞았다. 내가 왜 여기에? 아······ 어제 와인 벌컥벌컥 마신 탓에 푹 쓰러져 잠든 모양이었다. 왜 자꾸 추태를 부리는 거야. 그나마 술버릇이 얌전하니 다행이지, 취하면 개 되는 버릇이라도 있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 고개를 부르르 떤 한녹영이 조심스레 강준일을 불렀다.
“대표님? 강 대표님?”
조용하다. 넓어서 백 미터 질주를 해도 될 법한 실내는 적막 그 자체였다. 출근했나?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었다. 한녹영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출근하고 없는 사람 집에서 혼자 쿨쿨 자고 있었다니······ 어째 빚 갚으러 나갔다가 빚만 더 지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상호 형 난리 났겠네. 좀 전까지 자고 있었던 침실에 들어가니 의자 등받이에 걸려있는 외투가 보였다. 한녹영이 외투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예상대로 부재중 통화며 문자 메시지며 난리였다. 집에 돌아가면 잔소리 폭탄이 기다리고 있겠다. 한숨을 내쉰 한녹영이 외투를 걸치며 박상호의 메시지를 확인하다 어라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수십 개나 쌓인 메시지 중 하나는 강준일이 보낸 것이었다.
「사이드 테이블에 엘리베이터 카드를 두고 왔으니 사용하도록. 그리고 어제 우리가 나눈 대화를 잊은 건 아닐 테지.」
부랴부랴 사이드 테이블 위를 보니 말한 대로 카드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한녹영은 그걸 챙겨 주머니에 넣고 강준일에게 ‘지금 집으로 돌아가요. 신세졌어요.’ 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망설이다 ‘기억해요.’ 라고 쓴 메시지도 전송했다. 비록 술에 취하긴 했어도 잊을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혼자 어색해하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던 한녹영이 박상호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하자 당장 천둥 같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ㅡ 한녹영, 너!! 말도 없이 어디 갔다가 이제 전화야!!! 내가 밤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전화는 왜 안 받아?! 전화 뒀다 국 끓여먹을래?! 아주 내 애간장을 다 녹여 없앨 참이지?!!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소리였다.
“미안해, 형. 나 좀 데리러 와. 나 차를 술집에 두고 왔는데, 자금 택시를 타러 갈 수가 없어서 그래.”
통화를 하며 얼굴에 물이라도 좀 묻히자 싶어 욕실을 찾았다. 여긴 것 같은데? 문을 열고 들어가 거울을 본 한녹영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얼굴이 이게 뭐야?!! 술에 취해 뻗었던 탓에 얼굴이 엉망이었다. 퉁퉁 부은 데다 푸석푸석했다. 심지어 머리는 거의 봉두난발. 와아, 사극 속 망나니도 이보다는 단정했겠다.
잠깐, 이런 얼굴을 강준일이 봤다는 거잖아?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녹영이 거울에 이마를 쿵 박았다. 취해서 그의 침실에서 뻗어 잔 일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땐 얼굴과 머리를 풀 세팅해서 이런 민낯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초췌한 얼굴을 다 보여줬다니. 한녹영 연예인으로서의 기본자세를 잊은 거야!
한녹영이 한숨을 푹푹 내쉬자 그걸 들은 박상호가 ‘내가 나무 심했나?’ 하고 생각하며 목소리를 낮춰 조곤조곤 말했다.
“일단 만나서 애기하자. 어디야? 주소 불러.”
한녹영이 전에 강준일에게서 받아두었던 메시자를 찾아 주소를 불러주었다. 한 이십 분쯤 지나자 박상호에게서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한녹영은 ‘괜찮아. 난 부어도 예뻐.’ 하고 세뇌하던 걸 멈추고 강준일의 소파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밤새 여기 있었던 거야? 대체 누구 집이야?”
박상호는 한녹영을 보자마자 물었다. 울화를 참느라 한껏 억누른 목소리였다. 한녹영이 그런 박상호의 눈치를 슬금 살피며 말했다.
“가, 강준일 대표님.”
“뭐? 강 대표 집? 네가 왜 강 대표 집에서 나와? 그것도 이 시간에!!!”
예상대로 박상호의 언성이 높아졌다.
“어제 강 대표님 만났는데, 와인 석 잔 마시고 뻗었어. 일어나보니 강 대표님은 출근하고 없고, 나 혼자더라고.”
“강준일 대표도 참 이상한 사람이네. 나한테 전화를 했으면 데리러 왔을 텐데. 아니면 집도 아니 지난번처럼 데려다주던가. 왜 연락도 없이 널 본인 집에서 재우고 난리래. 그리고 넌 술도 약한 놈이 아무데서나 막 술 마시고 뻗을래?!”
“미안해, 형. 투자 건이 너무 고마워서 내가 술사겠다고 바쁜 대표님 막 졸랐어. 어제 중식 먹었는데 동파육이랑 와인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홀짝홀짝 먹다 보니 주량을 넘었었나봐. 동파육 엄청 맛있었는데, 출장 온 쉐프님이래. 원래 어디 소속인지 알아볼게. 조만간 가자. 형 동파육 좋아하잖아.”
한녹영이 뿔 난 박상호를 동파육으로 살살 달랬다.
“동파육? 그렇게 맛있었어?”
“응. 내가 먹어본 중 최고였어.”
“그래? 그럼 조만간 가자. 그리고 너 한 번만 더 말없이 잠수타면 내 손에 뼈도 못 추리게 맞을 줄 알아?”
한결 누그러진 기세에 한녹영이 배시시 웃었다.
“알았어. 명심할게. 앞으론 절대 실수 안 해.”
“또 한 번 그러기만 해.”
“근데 형. 나 지금 괜찮아? 막 되게 이상하지 않아? 평소보다 미모가 많이 떨어져 보인다거나?”
신호에 걸려 잠깐 차를 세운 박상호가 한녹영의 얼굴을 꼼꼼하게 쳐다보았다.
“괜찮은데? 너야 늘 예쁘지.”
“진짜야? 머리도 부스스하고, 얼굴도 부었는데?”
“그래도 예뻐. 근데 갑자기 예쁜지 어떤지 왜 물어?”
괜찮다는 거지. 그나마 다행이다.
“암것도 아니야. 참 어제 신 작가 신작에 대해서 기사 뜬 거 봤어?”
“봤어. 주연 맡은 애가 한울에 새로 들어온 애라며? 정아 빼가서 붙인 그 신입 맞지? 드림팀 꾸려서 화려하게 데뷔시키려 한다는?”
“응.”
“나 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곧바로 자동차 CF에 신 작가 드라마 주연이라니. 너 때는 그 정도로 밀어주진 않았는데. 주민성이 뜨는 건 떼놓은 당상이네. 근데 재주도 좋아 신 작가는 제 작품에 이름 없는 배우 안 쓰기로 유명한데. 대세만 쓰잖아.”
“로비 잘 하잖아.”
한영이 비난조로 말하자. 박상호가 웃으며 동의했다.
“그렇지. 로비하고, 약점 잡고 그렇게 해서 주연으로 밀어 넣어 빵 띄우려는 모양이지. 어제 저녁부터 기사가 엄청나게 쏟아지더라. 아예 연예란은 주민성으로 도배 수준이야. 대체 주민성이 누구냐는 글도 많고, 프로필 찾아보고 팬 될 것 하는 사람도 많고, CF에서 눈여겨봤다는 글도 제법 있더라. 화재는 충분히 끌어 모은 것 같은데, 실력이 어떨지가 문제겠네. 외모는 괜찮던데. 아, 물론 우리 녹영이만은 못하지.”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여기저기서 칭찬하는 걸 보니 주민성 마스크가 진짜 괜찮긴 한가 보네. 그래봤자 다 뜯어고친 얼굴인데. 정말 우연히 주민성의 학창시절 사진을 본 적 있는데 지금과는 얼굴이 전연 딴판이었다. 장한경도 과거를 털어내고 새 삶을 살기 위해 이름과 얼굴을 바꿨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 손 댄 수준이라 예전 얼굴이 남아있지만, 주민성은 아니었다. 부모가 봐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난 자연산이라고.”
“응? 그럼 주민성은 양식산이야?”
박상호가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 그래놓고 스스로 한 농담이 웃긴지 홀로 낄낄댔는데, 한녹영이 그런 박상호를 한심하게 보았다. 양식산?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뒤늦게 머쓱해진 박상호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멈추더니 화제를 전환했다.
“강대표한테 큰 실수한 건 없지? 혼자서 술 먹고 뻗은 것만도 실수긴 하지만, 지난번처럼 이상한 말한 건 아니지?”
일관성 있는 다정함 어쩌고 했던 말을 가리키는 거다. 그때 얼마나 황당하고 민망하던지. 박상호가 캐묻는 눈으로 한녹영을 응시했다.
“없어.”
단호하게 대답한 한녹영의 머릿속으로 강준일이 했던 말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녹영씨 이제 큰일 났어. 긴장해야 할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날 감당해야 할 테니까.’
양 뺨에 진한 빨강으로 볼터치를 넣은 것처럼 단번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본격적으로 감당해야 할 테니 긴장해야 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야. 진짜 나랑 여, 연애라도 할 참인가.
누구 마음대로. 난 연애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한 적 없다고. 그간 몇 명과 사귀었는지 다 세지도 못하는 사람과 무슨 연애! 한녹영이 창밖을 내다보며 새침하게 생각했다.
물론 데이트 신청을 하거나 연애하자고 본격적으로 프러포즈해온다면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생각은 해보겠지만. 나, 나쁘지 않을 것도 같지만.
한녹영은 단 한 번도 강준일과 제 사이가 이런 식으로 발전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와의 연애를 고민하는 관계가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근데 왜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분명 단 한 번도 강준일과 지금보다 더 발전된 관계에 대해 기대한 적 없었다. 그런데 마치 오래 전부터 기다렸던 일을 맞이한 냥 심장이 질주했다. 너무 빨리 뛰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더워? 얼굴이 빨간데?”
“응? 벼, 별로 안 더운데.”
“요새 너 몸이 별로 안 좋냐? 속이 허한가. 자주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은데. 병원에 한 번 가볼래? 이번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한 번 쫙 훑어 보자.”
“병원은 무슨. 새, 생각해 보니까 더운 것 같아.”
“넌 더위를 생각으로 아냐? 그냥 느끼면 되지.”
“형은 집에 안가냐? 내일부터 설 연휴잖아.”
내일부터 설 연휴인데다 스케줄이 없어 한가하니 박상호가 집에 다녀와도 무방했다.
“너 혼자 두고 어떻게 가?”
“내가 애냐. 혼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다녀와.”
“신정에 어머니랑 누나들 얼굴 봐서 괜찮아. 그리고 어머니는 내일 동네 분들이랑 같이 장가계 여행가신다고 했고.”
“용돈은 드렸어?”
“당연하지. 설 연휴에 중국 여행 다녀오신다는 전화 받자마자 바로 송금해드렸다. 나 해외여행 간다는 전화가 바로 ‘여행 가니 돈 보내라.’는 뜻이거든. 하여간 노인네 현금은 되게 좋아해요.”
투덜대긴 해도 음성에 어머니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가만히 보는 한녹영의 시선을 눈치 챈 박상호가 괜히 어색해하며 로봇처럼 웃었다. 제 앞에서 가족 얘기를 한 것이 미안한 모양이었다. 한녹영은 괜찮다는 듯 웃어준 후 시선을 돌렸다. 전화번호를 바꾼 것이 유효했는지 아버지나 새어머니로부터 더이상 연락은 없었다. 관리인 말을 들어보니 찾아온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잠잠하니 더 불안하다. 일단 장한수 친구에게 가족들 뒷조사를 의뢰해두긴 했는데.
“뭐 좀 안 먹어도 되겠어? 나 마트 좀 다녀올까 하는데.”
빌라 앞에 차를 세운 박상호가 말했다.
“괜찮아. 이따 점심이나 먹지 뭐.”
크게 허기진 느낌은 없었다.
“그럼 너 먼저 올라가있어. 나 장 보고 올게.”
한녹영이 내리자 박상호는 그대로 차를 돌려 마트로 향했다. 한녹영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샤워부터 했다. 그리곤 소파에 앉아 대본을 1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연휴가 끝나면 곧바로 촬영이다. 대사야 이미 오래 전에 다 외웠지만 대사 실수를 할까봐 불안한 마음에 대본을 손에 쥔 채 연기 연습에 열중했다.
“노, 노, 녹영아!!”
1시간쯤 지났나? 앉아서 하려니 감정이 잘 안 잡혀 일어나 거실을 걸어 다니며 앞에 상대 배우가 있다는 상상아래 연기 연습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박상호가 장 본 봉지를 현관에 팽개치듯 하더니 쫓기는 사람마냥 다급하게 한녹영에게로 다가왔다.
“왜? 무슨 일 생겼어?”
“이것 봐라. 이거!”
박상호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뭔데 그래, 하며 의아하게 휴대전화 액정을 들여다본 한녹영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신인여배우의 고백, 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 소속사 대표의 강요로 재벌가 파티에 불려가 음란 행위를 강요받고, 술을 마셔야 했고, 심지어 약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릴 적부터의 꿈인 배우를 위해 감수해야 할 단계라고 생각하면서도 본인이 창녀가 된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는 기사에 단번에 김동우 파티가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작은 눈을 힘차게 뜨고 있는 박상호와 잠깐 눈길을 마주한 한녹영이 기사를 마저 읽었다. 남은 기사에 자의로 오는 연예인들도 많다. 하룻밤 어울려주면 거액의 현금과 CF 혹은 배역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현금은 보통 몇 천에서 억대도 받는다, 톱스타도 종종 온다는 내용이 있었다. 제보자는 여배우 A라고만 되어 있어 누군지 짐작이 안 되었다. 한녹영은 댓글도 대충 봤다. 제보자 여배우A가 누구냐? 저런 파티에 참석해서 뜬 연예인이 누구냐, 하룻밤 놀아주고 억이라니 씨발, 연예인 몸뚱어리에는 금이라도 처발랐냐, 이런 댓글도 있었다.
“김동우 그 새끼 파티 말하는 거 맞지.”
박상호가 흥분해서 물었다.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맞는 것 같아. 여배우 A라니 누구지?”
“거기 출입한 신인 중 한명이겠지. 주로 작은 기획사들에서 많이 보내니까. 나 참, 언젠가는 터질 줄 알았다.”
박상호가 혀를 찼다. 한녹영은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 날 파티에서 받은 모욕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박상호의 눈이 대본을 쥔 한녹영의 왼손에 머물렀다.
“연기 연습중이었어?”
“응. 이제 정말 며칠 안 남았으니까 더 많이 연습해두려고. 살이 문제야. 좀 더 쪄야 하는데.”
그간 살 찔 겨를이 없었다. 연휴 동안 최대한 찌워둬야 하는데 원하는 만큼 찔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걱정하지 마. 형님이 너를 위해 고기를 왕창 사왔으니까. 점심은 삼겹살, 저녁은 삼계탕이다. 내일 점심에는 전 부칠 거고, 저녁에는 피자 시켜먹자. 야식으로는 족발. 그리고 모레는 전 찌개.”
듣기만 해도 살이 절로 찔 것 같은 메뉴들이었다. 근데 메뉴들 중에 낯선 이름이 하나 섞여 있어 한녹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근데 전 찌개라는 음식도 있어?”
“명절 때 남은 전을 가지고 찌개를 끓이는 거야. 김치랑 여러 양념 추가해서 칼칼하게 끓이면 얼마나 맛있는데. 너 먹어본 적 없어?”
한녹영이 고개를 저었다. 먹어본 적 없다. 사실 명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명절 음식을 먹은 적도 거의 없었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를 제외하면 명절이면 아버지와 새어머니 가족들은 한녹영만 남겨둔 채 새어머니 부모님 집으로 홀랑 가버리곤 했던 것이다.
“명절에 전 먹어본 적도 오래됐는데 뭐.”
박상호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 형이 있잖아. 낼 전 여러 가지 끝장나게 만들어줄게. 넌 연습이나 계속하고 있어."
한녹영은 현관에 팽개쳐둔 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향하는 박상호의 푸짐한 등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한녹영이 힘겹게 눈을 떴다. 바로 ㅤㅎㅕㅍ탁 위의 야광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반이었다. 이런 시간에 누구지? 한녹영은 왠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전화기를 집었다. 액정에 김현영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 시간에 김 작가가? 또 드라마 제작에 제동이 걸렸나? 불안한 예감이 확 들었다.
“여보세요? 작가님, 한녹영입니다.”
ㅡ 죄송해요 한녹영씨, 제가 잠을 깨웠죠?
“아닙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혹시 또 제작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현영이 머뭇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감이 맞나 보다. 어쩐지 불길하다 했더니만. 이번엔 무슨 일일지.
“무슨 문제······ 입니까?”
한녹영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ㅡ 저기······ 제가 자주 가는 커뮤니티가 있는데요. 거기서 어제부터 이상한 얘기가 자꾸 나와서······ 어제 저녁에 여배우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뜬 기사는 보셨어요?
“네. 봤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이상하네. 왜 그 기사를 언급하는 거지? 무척 조심스러워하는 감현영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분위기상 도망자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ㅡ 그, 그러니까요······ 그 파티에 다녔다는 톱스타가 한녹영씨라고······.
김현영은 한참을 머뭇대고 몇 번이나 “어떡하지?” 하며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한녹영은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망치가 제 머리를 쾅 때리고 간 것처럼 멍하기만 했다.
ㅡ 한녹영씨?
“그, 그게 무슨······ 그 파티에 제가 다녔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는 겁니까? 정말로요?”
ㅡ 사진도 올라왔어요. 좀 흐릿해서 얼굴 분간이 잘 안 가는데 다들 한녹영씨가 분명하다고······ 자정쯤에 그런 글이 올라왔는데 벌써 사람들이 여기저기 퍼다 나르며 말이 급속도로 퍼지는 중이에요. 문제는 그 파티 건뿐만 아니라 박지한이랑 한녹영씨 부모님 얘기도 올라오고 있어요. 한녹영씨가 로비로 박지한으로 확정되었던 역을 빼앗아간 거라고요. 그리고 한녹영씨가 부모님 저버린 패, 패륜······· 아무튼 세 가지 일이 한꺼번에 여기저기 마구 올라오는 것이 아무래도 사안이 심각해질 것 같아서요. 한녹영씨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 드린 거예요.
입술부터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녹영은 먼지를 한움큼 들이켠 것처럼 목이 따끔거라는 걸 느끼며 간신히 말했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두근 뛰었다.
“고, 고맙습니다. 그 커뮤니티 공개인가요? 주소 좀 보내주실래요?”
ㅡ 네. 바로 보낼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김현영이 카톡으로 주소를 보내주었다. 한녹영은 덜덜 떨리는 손길로 주소를 클릭해 들어갔다. 게시판에 온통 제 얘기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한녹영 몸 팔아 뜬 거야?’
‘한녹영이 찍은 수많은 CF들 전부 그렇고 그런 짓 해서 얻은 것?’
‘한녹영 실망.’
‘녹영아. 왜 그랬어. ㅜㅜ 누나가 격하게 사랑했는데!’
‘난 예전부터 한녹영 별로였어. 연기도 그저 그렇고. 팬들이 달콤가이란 표현 쓸 때마다 토 쏠리더라.’
‘그거 알아? 사실 한녹영 성격 개떡이래. 다정하고 달콤한 이미지는 다 방송용이란 거지.’
한녹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제법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글들이 전부 한녹영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뒤로 갈수록 비난조였다. 점점 격해지는 분위기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녹영은 심호흡으로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김현영이 말한 그 사진을 찾아보았다. ‘한녹영이 재벌들 빨아주고 떴다는 증거.’ 라는 제목이 보여 클릭했더니 어두운데다 아주 멀리서 찍었는지 흐릿한 형체 같은 모습이 찍힌 사진이 보였다. 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제 사진이니까.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툭 떨어뜨렸다. 머리가 멍했다. 시야가 새까매졌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녹영은 몸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끼며 간신히 박지한과 제 부모에 관해 올라온 글들을 클릭해 읽어보았다.
‘난 박지한의 오랜 팬이야.’ 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글은 한녹영이 로비를 통해 도장까지 찍고 완전히 확정되었던 박지한의 역을 강탈해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글에서 한녹영은 파렴치한 가해자이고, 박지한은 불쌍한 피해자였다. 글에 박지한 불쌍하다, 한녹영 실망이다, 이런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부모에 관한 글은 읽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예전 세상이 온통 적으로 돌아섰던 때가 떠오르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혀, 혀, 혀엉!!”
상반신을 앞으로 숙이며 이불을 쥐어뜯은 한녹영이 쥐어짜는 것처럼 박상호를 불렀다.
“혀엉!! 상호 형!!”
잠시 후 박상호가 잠옷 차림으로 “왜, 왜 그래?” 하며 허둥지둥 뛰어왔다. 그는 불을 밝히더니 침대 위에 엎어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한녹영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응급실 갈까?”
다급하게 묻는 음성에 걱정이 가득했다. 한녹영은 간신히 고개를 흔든 후에 떨어뜨린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저, 전화······.”
“전화기? 여기 있네. 네 전화기. 근데 너 얼굴이 왜 이래? 핏기가 하나도 없잖아. 무슨 일이야?”
심상치 않은 안색에 박상호가 점점 더 걱정했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한녹영에게 건네며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한녹영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휴대전화를 켠 후 아까의 커뮤니티를 보여주었다. 뭔데 그래, 하고 받아 읽어본 박상호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너 이 사진?”
“기, 김동우 파티에서······.”
목이 콱 막혀 말도 잘 안 나온다. 한녹영이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처럼 연약한 표정으로 박상호를 올려다보았다. 스크롤을 내려가며 눈으로 재빨리 게시판 분위기를 훑은 박상호의 얼굴이 어둑해졌다. 그는 곧 다른 곳의 분위기도 살펴보더니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방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벌써 트위터며 난리다. 그거 너 맞지?”
“맞, 맞아. 파티에서 고작 삼십 분 정도 있었을 뿐인데······.”
그 파티에서 제가 한 거라곤 고작 양주 한 잔 마신 것뿐이었다. 재벌들 빨아주고 CF나 역 따낸 적 없었다. 돈도 안 받았다. 그딴 돈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김동우가 난리쳐 받은 금액 고스란히 돌려줬다며 하영택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박지한 이 새끼는 또 왜 난리야? 지가 도장을 언제 찍었어?! 그리고 네 부모란 사람들은 진짜······ 어쩐지 요새 잠잠하다 했더니만.”
“······.”
“근데 세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터지다니 이상한데? 마치 너 물 먹이려고 벼르고 있다가 한 번 된통 당해봐라는 식으로 다 터뜨린 것 같잖아?”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던 박상호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무슨 소리야?”
한녹영이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물었다.
“이건 분명 누군가 널 노리고 의도적으로 음해하는 것이 분명해.”
누군가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얼굴에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짐작한다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회사······에서?”
“당연하지. 한울 아니면 누가 널 음해하려고 하겠어? 나쁜 새끼들. 어쩐지 순순히 계약해지 해준다 싶더라. 치졸한 새끼들! 아씨, 이거 아침 되면 기사로도 뜰 것 같은데.”
“······.”
한녹영이 절망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제야 박상호가 아차 하며 뒤늦게 한녹영을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녹영아. 기사 뜨면 내가 따져서 내리도록 할 거니까.”
“그럼 뭐 해? 이미 사실인 냥 인터넷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데.”
절망이 심장이 파고드는 좀벌레 같았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 형만 믿어. 루머일 뿐이잖아. 지금은 이렇게 뜨거워도 근거 없는 루머일 뿐이니까 곧 잠잠해질 거야. 넌 도망자 열심히 찍을 생각만 하면 돼.”
박상호가 저만 믿으라며 가슴을 쾅쾅 쳤다. 한녹영을 안심시키려는 몸짓이었지만, 얼굴에 다 숨기지 못한 걱정이 남아 있었다. 한녹영은 저를 위해 애쓰는 박상호를 보며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불안함으로 심장이 쿵쿵쿵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예전 자살을 선택하기 직전 비참했던 상황이 떠오르며 오싹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진······ 않을 거야. 이번엔 다를 거야. 다를······ 거야.
박상호의 장담과는 달리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초조하게 계속 포털을 주시했는데 예상대로 곧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여배우A의 고백 속 재벌가 파티에 한녹영이?’ ‘한녹영 부모를 버린 패륜아.’ ‘한녹영은 강탈자?’ 이런 식으로 한녹영을 비난하는 기사가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뜨기 시작했다. 박상호가 마구잡이로 기사를 써갈긴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쪽에서 사실을 기반으로 기사를 썼는데 무슨 상관하는 식으로 나왔던 것이다.
기사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박상호의 휴대전화는 불이 날 지경이었고, 각종 게시판이며, SNS며 한녹영에 관한 글로 온통 난리였다. 한녹영은 멍하니 포털이며 트위터며 찾아보았다.
성로비를 했다, 재벌가 파티에서 약도 한 것 같다, 화려한 연예인의 추악한 뒷모습, 다정함의 대명사였던 한녹영의 실체 등등. 온갖 음해성 기사가 우후죽순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박지한과 한녹영에 관한 기사도 빠르게 올라오는 중이었다. 기사에 한녹영, 재벌뿐만이 아니라 작가와 감독의 밑도 빨았나, 라는 식의 조롱하는 댓글들이 마구 달렸다. 박지한은 반대로 순식간에 동정론에 휩싸여 불쌍하다, 인기 없는 것이 죄냐, 추악하다 한녹영, 인기가 벼슬이냐, 정치인보다 더 더러운 한녹영, 박지한을 한녹영 자리로, 박지한 응원합니다, 박지한씨 드라마에서 봐요, 박지한 연기 짱, 이란 식의 옹호성 댓글이 판을 쳤다.
저에 관한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인터뷰 기사를 봤을 땐 헛웃음밖에는 안 나왔다.
‘죽은 녹영이 친모를 대신해 제가 녹영이를 친자식처럼 키웠죠. 정말 제 자식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키웠는데 계모라는 이유로 절 잘 따르지 않더라고요. 저야 남이니 그렇다 쳐도 아버지는 핏줄인데 병들어 아픈 아버지를 내팽개칠 줄은 몰랐어요.’
가식적인 새어머니 인터뷰에 헛웃음만 나왔다. 아버지 또한 ‘아비가 무능해 자식에게 손을 경제적으로 짐을 지웠으니 내가 죄인입니다.’ 라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댔다.
사람들은 한녹영을 패륜아라며 욕했다. 한녹영은 단번에 연예인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부모를 내팽개쳐 병들게 한 후레자식으로 낙인찍혔다. 재벌가 파티에 한녹영이 등장했다는 식의 글이 발화제가 되었고, 거기에 박지한과 부모 일이 더해져 온 언론이 벌떼처럼 일어나 한녹영을 욕하고 비난했다.
한녹영의 실체라는 글도 여러 커뮤니티 게시판과 트위터 등을 통해 퍼져나갔다. 아는 사람이 방송 쪽 일을 하는데 ‘사실은 한녹영 성격이 개자반이래.’
‘무례하고, 거만해서 다신 같이 일하기 싫었대.’ 라는 식이었다. 뚱뚱하고 우울했던 시절의 사진까지 돌아다니며 ‘한녹영, 살과 함께 개념도 빼버렸냐.’ 며 조롱하기 바빴다. 학창 시절 사진이야 한녹영이 데뷔한 이후 한 번씩 올라오긴 했지만 회사에서 막아줬는데 이제 모든 언론이 한녹영의 적이 되니 이때다 싶어 다시 마구 올리는 중인 것 같았다.
한녹영과 돼지를 합성해놓는가 하면, 한녹영이 재벌의 발을 빠는 짤을 만들기도 하고 한녹영 사진에 ‘한녹영입니다. 불러만 주시면 잘 빨아드립니다.’ 라는 식의 글을 넣어 조롱하기도 했다. 한녹영은 김현영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사태파악을 시작한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성로비로 떠서 인기 없는 배우들을 짓밟아 역을 빼앗는, 그러면서 부모를 버린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혀 국민 비호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팬카페에도 온통 한녹영을 욕하는 글들뿐이었다.
한녹영이 이럴 줄 몰랐다. 더럽다. 한녹영을 덕질한 시간이 아깝다. 파렴치한. 후레자식. 심지어는 남창이라는 표현까지 있었다. 우호 하는 글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올라왔는데, 그마저도 욕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 글쓴이를 거의 매도하는 식의 댓글을 달아 결국 글을 삭제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팬카페가 아니라 안티카페에 잘못 접속했나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남창 새끼는 연예계가 아닌 사창가에나 가라, 라는 제목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숨이 막혀왔다.
한녹영은 가장 최근에 올라온 제목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빛이라곤 한 점도 없는 암흑 속에 처박힌 듯 시야가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저를 향한 비난들이 마치 칼날처럼 따갑고 아팠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온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마구 난도질 된 것만 같았다.
예전과 똑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예전과 같아지고 있었다. 비참하고 죽음밖에는 선택할 길이 없었던 예전과 말이다. 세상이 저를 욕하고, 비난하고, 외면하고······.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콱 막혔다. 가슴이 조여들며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큰일이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는데. 제길! 미안하다. 형이 힘이 없어서 막아줄 능력이······.”
당황한 박상호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비틀대며 일어난 한녹영의 얼굴이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다. 다음 순간 한녹영은 한 걸음도 내딛기 전 비틀하며 풀썩 쓰러졌다. 그리곤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녹영아!!!!”
박상호가 쓰러진 한녹영을 향해 달려왔다.
“무슨 소리야?!”
연휴라 새벽에 운동을 다녀온 이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던 강준일은 연락도 없이 바로 집으로 찾아온 한성준의 말에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마터면 아무 죄 없이 그저 정보를 전달하러 왔을 뿐인 한성준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 했다. 연휴라 저도 한가하고 한녹영도 여유가 있을 테니 오늘 오후쯤 본격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해볼까 했는데 스캔들이라니. 마음의 결정도 내렸겠다 슬슬 관계를 발전시켜볼까 하던 차에 생긴 일에 마음이 안 좋았다. 핑크빛 기류가 형성되어야 할 시기에 먹구름이 끼다니. 쯧 혀를 찬 강준일이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포털이며 트위터며 각종 게시판이며 지금 한녹영씨에 관한 일로 난리라고 했습니다. 재벌가 파티에 한녹영씨가 다녔다는 음해성 기사부터 박지한의 역을 빼앗았다는 기사, 그리고 부모를 버렸다는 얘기까지······ 꼭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세 개 모두 하나씩 떴다면 큰 파급력 없이 수습가능한 일이었는데 한꺼번에 쏟아지니 스캔들이 점점 커지며 현재 걷잡을 수 없는 추세입니다.”
강준일은 한성준이 보여주는 기사와 SNS등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기분이 석연치 않았다. 게다가 증거라고 올라온 이 사진, 연말에 김동우 파티에서 찍힌 것 같잖아. 멀리서 일부러 찍은 느낌인데. 이 파티는 분명 장현재 측에서 일부러 보낸 거였다. 설마······. 의혹이 따끔하게 올라왔지만 우선은 수습이 먼저였다.
“우리 쪽 인력 총동원해서 일단 막아 막을 수 있는 만큼 막아. 그리고 어디서 시작된 건지, 누가 퍼뜨리고 있는 건지 알아내고, 판세 뒤엎을 수 있는 방법 찾아내.”
강준일이 한성준에게 지시를 내렸다. 회사를 나온 지금 한녹영에겐 방패막이가 없었다. 매니저가 있지만, 그의 힘만으로 막아내기에 역부족이리라.
“알겠습니다. 지금 한녹영씨 집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강준일을 보고 한성준이 물었다. 강준일이 고개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은 후 집을 나오며 한녹영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되지 않았다. 그의 매니저인 박상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태가 사태니만큼 연결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한녹영의 상태 확인을 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신경질적으로 혀를 찬 강준일이 서둘러 차로 향했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따라오려는 한성준을 막았다.
“나 혼자 갈 테니 한 실장은 사설 경호원들 수배해서 당장 한녹영 집으로 보내. 기자들 몰려올 지도 모르니 막아야지.”
우선 기자들이 위협적으로 한녹영에게 몰려가는 것부터 막아야한다.
“네, 대표님.”
강준일의 표정이 워낙 다급해 마찬가지로 다급하게 대답한 한성준이 바쁘게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강준일은 곧바로 한녹영의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직은 기자들이 몰려오지 않아 수월하게 한녹영의 빌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박상호가 강준일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며 문을 열어주었다. 강준일은 지체 없이 위로 올라갔다.
“강준일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현관 앞까지 마중 나온 박상호가 어리둥절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한녹영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강준일은 곧장 한녹영부터 찾았다. 박상호가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표정이 밤처럼 어두웠다. 그의 얼굴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강준일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기사······ 보셨죠? 말도 안 되는 음해성 기사들과 비난이 쏟아지자 녹영이가 많이 놀란 모양입니다. 좀 전에 애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방에 눕혀뒀습니다. 지금이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할지 어떨지.”
대답하는 박상호의 얼굴이 침통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말에 한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녹영씨 침실은 어디입니까?”
“이쪽입니다.”
박상호가 강준일을 한녹영의 침실 쪽으로 안내했다.
‘꿈이었나?’
정신을 차린 한녹영은 제가 과거로 돌아와 제대로 살아보려고 애썼던 순간들이 꿈이었나,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은 건 쓰라린 후회가 낳은 꿈일 뿐이고, 여전히 전 온 세상이 적으로 돌아선 비참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녹영은 혼이 없는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허공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비틀대며 침대에서 내려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엄마.’
어머니의 옥가락지를 손에 꼭 쥐고 드레스룸 구석에 최대한 작게 웅크리고 앉아 하염없이 어머니를 불러보았다. 한녹영은 예전 저를 향해 쏟아졌던 비난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온세상이 적이 되어 저를 버렸다. 단 한 명도 제 편은 없었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참했고, 숨쉬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세상이 두려웠고, 무서웠다. 집안에 틀어박혀 단 한 발자국조차 나갈 수 없을 만큼 공포심이 저를 짓눌렀다. 꼭 제가 끔찍한 공포 영화 속에 영원히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포털에 도배되던 비난 기사와 저를 조롱하는 댓글들, 트위터 등을 떠올리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떠오르며 더럭 무섬증이 들었다.
‘무, 무서워.’
한녹영의 피부 위로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무섭다. 무서워. 예전 일과 현재가 겹쳐지며 참을 수 없이 무섭고 두려웠다. 또 한 번 절벽으로 점점 더 내몰리는 듯 섬뜩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드레스룸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아 점점 더 작게 웅크리며 한녹영은 몇 번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던 것이다.
무섭다. 무서워서 여길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붕대를 감은 채 퇴원하는 저를 향해 플래시를 터뜨리며 마치 희귀한 짐승이라도 보듯 사진을 찍어대던 기자들, 끔찍한 욕설과 함께 제게 돌과 계란, 그리고 음식물쓰레기를 던졌던 사람들, 한없이 비참해진 저를 외면한 채 오히려 조롱하며 떠났던 지인들이 떠오르며 심장이 쪼개질 듯 아파왔다.
난 과거로 돌아온 것이 맞나? 다시 살 기회를 얻은 것이 정말 맞나? 그런데 왜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거지? 왜 다시 세상이 적이 되어 나를 향해 칼을 던지고 있는 걸까?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려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들은 처음부터 아무 쓸모도 없었던 건가. 누군지 알 수 없어 가장 두려운 상대였던 황산 테러의 주인공도 알아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오만이었던 듯 일이 터졌다. 제대로 살고 있다고 안도한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번 삶도 난 파렴치한 인간쓰레기, 인간 말종으로 낙인찍혀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나? 결국 난 어떻게 살든 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어머니는 왜 나를 과거로 돌려보냈나. 산채로 심장이 헤집어지는 듯한 고통과 세상이 온통 암흑으로 변하는 듯한 절망감은 단 한 번으로 족한데.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젠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딩동. 바깥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자 한녹영은 흠칫하며 몸을 뒤로 더 바짝 붙였다. 더 이상 갈곳도 없는데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더더욱 벽을 향해 제 몸을 밀착했다. 인터뷰 좀 하자며 초인종을 눌러대고, 심정이 어떠냐며 인터폰을 향해 질문을 던지던 기자들이 떠올랐다. 비참해진 한녹영을 조금이라도 더 비참게 만들려고 빌라 주변을 에워싼 채 기다리던 기자들과 사람들이 제 눈엔 꼭 언제든 총을 난사할 준비가 된 군인들처럼 보였다. 온 집안의 커튼을 다 내린 채 창밖을 내다볼 수도 없었고, 불조차 밝히기 무서웠다. 불을 밝히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기분이 들어서······.
나를 위한 세상은 이제 없어. 난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을 거야. 나를 위한 빛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세상이 전부 날 버렸고, 어느 누구도 날 위해 동정하지 않을 거야.
중얼중얼. 패닉에 휩싸인 한녹영이 흡사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대고 있을 때였다.
‘녹영아? 어? 얘가 어디에 있지?’
박상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녹이 움찔했다. 상호 형 목소리? 형 목소리가 왜 들리는 거지? 형은 날 안 버렸······ 나? 회귀 이전과 이후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 지독한 외로움과 공포, 자살에 대한 충동을 느끼며 오들오들 떨던 한녹영이 멍한 시선을 들었다.
“녹영아? 너 여기 있어? 강 대표님 오셨다.”
열려있는 드레스룸을 보고 안으로 들어온 박상호가 “여기도 없나?” 하고 불을 밝혔다. 그리곤 상처입은 짐승처럼 가장 구석에 웅크린 채 앉아있는 한녹영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처절하게 망가진 인형을 보는 듯 비참한 모습에 박상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녹영아?!!”
한녹영은 시선을 들어 박상호를 보았다. 정확하게는 박상호의 뒤에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강준일을. 강준일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지독한 암흑 속에 한줄기 빛이 스며든 기분이 들었다. 내게도 아직 남은 사람이 있구나. 파렴치한 짓을 한 절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바라봐준 사람이. 이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눈에 한가득 온기를 담고 날 찾아와준 사람이······.
다음 순간 한녹영이 벌떡 일어나 비틀대며 강준일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대, 대표님······.”
강준일을 부르는 목소리가 쥐어짜듯 나왔다.
“그래. 한녹영씨.”
“대표님이 이번에도 와, 와주셨······.”
“그래, 한녹영씨. 내가 왔고, 한녹영씨 옆에 있어.”
대답하는 목소리에 안도감이 들며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아이처럼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한녹영의 등을 감싸 품으로 끌어당긴 강준일이 “괜찮아. 한녹영씨는 혼자가 아니야. 내가 있어.” 하고 반복해서 속삭였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과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에 비로소 바짝 조여들었던 마음이 느슨해지며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하는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듯 바짝 수축했던 몸과 마음이 이완되는 것 같았다.
달라지려고 노력했지만 예전과 같아졌다는 생각에 비참하고 괴로웠는데 순식간에 괜찮아졌다. 마치 끝없는 악몽 속을 헤매던 절 강준일이 강한 힘으로 잡아끌어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것만 같다. 괜찮아. 예전과 달라. 내 곁엔 이 사람이 있어.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난 혼자가 아니었어.
어이없게도 한순간에 마음이 괜찮아졌고, 지독한 절망감과 괴로움이 가시며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놓여서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혼자가······ 아니야.”
한녹영이 울먹이며 중얼댔고 강준일이 다정하게 대꾸했다.
“한녹영씨는 혼자가 아니야.”
한녹영은 강준일의 코트 앞이 흥건하게 젖을 때까지 울었다. 강준일은 그만 울라며 재촉하지도 않고 한녹영이 실컷 울도록 내버려둔 채 간간히 등만 쓸어주었다.
“코트가 젖어서······ .”
한참 만에 강준일의 품에서 벗어난 한녹영이 물기로 젖어있는 그의 코트를 바라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우는 동안에는 수치심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뒤늦게 정신이 들자 민망함이 몰려왔다.
“이제 다 울었나?”
“고, 고맙습니다. 실컷 울고 나니 좀 후련해졌어요.”
강준일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예전과 현재가 겹쳐지며 패닉에 휩싸여 죽고 만큼 괴로운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한녹영이 새빨개진 눈가를 닦아내며 코를 훌쩍였다. 어린시절 이후로는 남 앞에서 운 것이 처음이라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다.
근데 강준일 대표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이제야 그가 제 앞에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근데 대표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
강준일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한녹영씨 집에 왜 왔겠어. 걱정돼서 왔지.”
걱정······ 돼서?
“기사······ 보셨어요?”
강준일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긍정에 또 다시 울음에 터질 것 같아 어금니를 꽉 문 채 참아낸 후 천천히 말했다.
“와, 와줘서······ 고맙······ 습니다.”
“고마우면 그만 울어.”
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데도 눈물이 제멋대로 주룩 흘러내렸다. 한녹영이 눈가를 손등으로 슥 문질러 닦아냈다.
“제가 갑자기 울어서······ 당황하셨죠? 죄송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강 대표님 얼굴 보니까 갑자기 안도감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어요.”
정말로 그랬다. 강준일을 보는 순간 미로 속에서 길을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놓이며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됐다, 라는 생각도 들었고. 뭐랄까. 그냥 안심이 되었다고 할까? 강준일이 한녹영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녹영씨, 다른 사람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면 안 되겠던데.”
“왜요?”
“못생겨서.”
짤막하게 대꾸하는 강준일의 음성에 비로소 웃음기가 맺혔다. 많이 안정된 한녹영의 마음이 느껴져 그도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못생······.”
강준일을 보자마자 끌어안고 울었다는 사실 때문에 민망하고 어색해서 괜히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던 한녹영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못생겼다니요? 저 우는 연기 자주 했는데 항상 우는 모습도 예쁘다는 칭찬만 들었거든요.”
못생겼다니, 나 참. 데뷔 이후 처음 듣는 말이다.
“그야 연기니까 그렇지. 정말 추해서 못 봐주겠던데. 예쁜 사람도 온통 얼굴 일그러뜨린 채 눈물콧물 빼가며 우니까 못생겼더군.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한녹영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처음의 힘없고 주중충한 음성과는 달리 되살아나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된 걸 느낀 강준일이 짧게 웃었다.
“내 앞에서만 울라고.”
“못생겼다면서 왜 대표님 앞에서는 울래요?”
“못생기고 추한 얼굴은 나만 봐야하니까.”
한녹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뭐야. 왜 못생기고 추한 얼굴을 본인만 봐야한다는 말에 심장이 뻐근해지고 난리야. 절 바라보는 강준일의 눈빛에 담긴 온기 때문인가.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며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고백이 아닌데, 꼭 고백을 들은 기분이었다.
“못생기고 추한 얼굴 대표님한테 보여줄 생각 없는데요. ············늘 예쁜 얼굴이라면 또 모를까.”
망설이다 덧붙인 말에 머쓱해진 한녹영이 마치 심한 알러지라도 올라온 냥 제 목덜미를 마구 문질렀다. 가, 간질거려. 제 말에 피부가 마구 근질댔다. 제가 내뱉은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꼬는 한녹영을 향해 웃고 있던 강준일이 진동을 느끼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발신인은 한성준이었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오지.”
강준일이 거실로 나갔다. 그리곤 차를 준비 중인 박상호를 지나쳐 현관 쪽으로 향했다.
“나다.”
ㅡ 한녹영씨 일은 장현재 쪽에서 대대적으로 돈을 푼 것 같았습니다. 촌지를 받은 기자들이 열 명도 넘더군요. 전부 가십을 주로 다루는 삼류 언론사 기자들인데 지금 공격적으로 기사를 올리는 중입니다.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이며, 트위터, 심지어 팬카페에서 주도적으로 한녹영씨를 비난하여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도 한울 쪽에서 돈을 받은 걸로 확인됩니다. 저희 쪽에서 대략 파악한 사람들만 해도 수십 명입니다.
돈을 풀었다는 건가. 강준일이 압매를 비틀었다
“좋아. 우리도 돈 풀어. 기자들 매수하고 알바들 고용해. 그리고 박지한과 부모는?”
ㅡ 박지한씨 한울과 계약했더군요. 부모란 사람들도 한울의 도움을 받아 각종 매체와 열심히 인터뷰 중이고요. 잠깐 알아봤는데도 계모야 말할 것도 없고 친부란 사람도 참 쓰레기였습니다. 그간 한녹영씨 등에 빨대 꽂고 피 빨아 먹으며 살다 얼마 전 한녹영씨가 더 이상 호구 노릇 못 한다고 하자 앙심을 품은 것 같습니다. 부모라고 다 같은 마음인 건 아닌 모양입니다.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에 장현재가 있을 거라 예상한 터라 그리 놀랍지 않았다. 다만 가족들까지 한녹영의 적인 줄은 몰랐다. 연예계에 거머리 같은 가족들이 많긴 하지만, 한녹영이 그들 중 한 명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강준일이 한녹영의 침실 쪽을 돌아보았다. 그간 많이 외로웠겠어, 한녹영. 안쓰러운 마음이 차곡차곡 차올랐다.
“애초에 양심 고백인 냥 여배우의 눈물 어쩌고 하는 기사를 터뜨린 것도 한울일 거다. 밑밥을 깐 거겠지.”
한녹영을 김동우의 파티에 보냈을 때부터 스캔들로 이용하려고 계획을 세워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진이 찍혔을 리 없었다. 어쩐지 한녹영을 그런 파티에 보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계약 종료가 되어가니 돈에 미쳐서 그런 건가 했더니만. 음흉한 새끼. 강준일이 장현재를 욕했다.
ㅡ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한울에서 한녹영씨 잡으려고 아예 폭격기를 퍼부은 형국이네요.
“이미지를 초토화시켜 아예 매장하려는 모양이지.”
끼고 있던 소중한 인형이 품에서 벗어나려하니 그 모습을 못 봐주겠던 모양이지. 자립하는 걸 지켜보느니 아예 망가뜨리겠다는 건가. 제 것이 아니면 망가뜨리겠다는 마인드가 딱 장현재다웠다. 치졸한 새끼. 처음에는 드라마나 깔짝대며 건드리더니 한녹영이 계약해지를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짜 스캔들을 터뜨리는 꼴이라니. 가뜩이나 싫은 인간이지만 이번 일로 더 증오스러워졌다. 인간으로서 가져야하는 최소한의 도리나 양심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장현재는.
‘어지간히도 보는 눈이 없었어. 한녹영.’
그딴 인간에게 눈이 멀어 목을 맸으니, 늦었지만 정신을 차려 다행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장현재가 최악의 인간이어서 제게 다행인 면도 있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괜찮은 구석이 있었다면 한녹영이 여전히 그에게 목을 매고 있었을지 모르니까.
강준일은 제게 매달려 하염없이 울던 한녹영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감히 한녹영을 울려? 저도 아직 울려보지 못했는데. 한녹영의 눈물이 얼마나 아프던지. 그가 흘린 눈물로 젖은 부분이 돌처럼 심장을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눈물이 가시처럼 따갑게 느껴진 건 난생 처음이었다.
어떤 면으로는 고맙군. 이제 겨우 진심으로 덤벼들 각오를 했는데, 각오를 하자마자 이런 식으로 일을 터뜨려 한녹영의 존재를 심장 깊숙이 박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주면 좋을까?’
강준일이 입 끝을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ㅡ 혹시 몰라 홍보팀장 대기 시켰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은 당장 오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경호원들 대기시켜뒀지만 기자들이 몰려갈 텐데, 대표님이 한녹영씨 집에서 나오는 모습이 찍혀 좋을 일은 없습니다.
한성준 말이 맞았다. 괜히 사진이라도 찍혔다간 지금 상황에선 한녹영에게 독만 된다.
“지금 간다.”
그때 조심스레 거실로 나오는 한녹영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보였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 드레스룸 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봤을 때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 같더니 다행이었다. 평상시 한녹영의 70퍼센트 정도는 회복된 것 같았다. 보아하니 매니저도 한녹영이 예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으니까. 괜찮아진 얼굴을 본 탓에 강준일의 마음도 한결 편했다. 여기로 올 때만 해도 눈앞이 다 캄캄하더니만.
ㅡ 참 경호원들 말이 도착하자마자 쥐새끼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기자인가?”
ㅡ 아니요. 족쳐보니 장현재 프락치라고 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강제 잠수시킬까요?
“그냥 둬. 그가 진짜 상대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장현재도 알 필요가 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우리 쪽에서 손을 쓰면 한녹영의 뒤에 누가 있는지 알게 될 텐데.”
ㅡ 장현재가 알게 되면 명예회장님 귀에도 곧 들어간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알아.”
그만한 각오도 없이 한녹영에게 백기를 들었을까.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한녹영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키다보면 언젠가는 조부의 귀에 말이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특히 제게 촉각을 곤두세운 채 꼬투리를 잡아 후계자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애쓰는 양반들이 존재하니까.
ㅡ 알겠습니다. 쥐새끼는 풀어주라고 하죠. 바로 나오십시오. 괜히 사진 찍혀서 루머에 확인도장 찍어주는 꼴이 되지 마시고요.
쯧 혀를 차며 전화를 끊은 강준일이 한녹영에게로 다가갔다.
“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군.”
간다는 말에 잠깐 눈을 크게 떴던 한녹영이 고개를 숙이며 머뭇거렸다. 간다니 서운하다.
“커,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상호 형도 커피 그럭저럭 내리거든요.”
“이런 경우 보통 직접 내려준다고 하지 않나?”
“커피 내려 본 적이 없어서. 맛 보장 못하는데, 엄청 맛없어도 괜찮다면 제가 직접 내려드리고요.”
“맛을 보장할 수 없다니 사양하겠어. 내 입맛이 고급이라.”
“인스턴트라면 그럭저럭 타는데.”
그건 그냥 끓인 물만 부으면 되니까 말이다.
“차를 대접하고 싶은 거야? 나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은 거야?”
자꾸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한녹영의 뺨을 슬쩍 건드린 강준일이 웃으며 물었다.
“차를 대접하고 싶은 건데요?”
“이럴 땐 좀 더 함께 있고 싶어서요, 라고 해야지. 지나치게 튕겨도 매력 없어. 한녹영씨도 남자면서 남자는 애교에 약하다는 것도 모르나.”
그래서 애교라도 떨라는 건가. 한녹영은 콧방귀를 끼며 웃고 있는 강준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수줍어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바로 태도를 바꿔버린 한녹영을 향해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근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꽉 쥐고 있는 거지?”
그제야 한녹영이 손을 펼쳤다. 그러자 옥가락지가 드러났다. 아까 드레스룸에 들어가 이걸 집어 손에 꽉 쥐었는데, 강준일이 지적할 때까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한녹영이 따스한 눈으로 옥가락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는 습관처럼 이걸 찾게 된다.
“옥가락지? 상당히 오래된 걸로 보이는데. 대대로 내려온 유품인가?”
“그건 잘 모르겠에요. 외할머니가 주신 건지 아닌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주신 거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거에요.”
물끄러미 한녹영의 손에 있는 옥가락지를 한참 보던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가봐야겠군.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반드시 내가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면 그렇게 하고.”
솔직히 좀 더 있어주길 원하지만 바쁜 사람을 붙잡자니 미안하다. 바로 달려와 준 것만도 고맙고, 충분히 의지가 되었는데 더 이상 붙잡았다가는 민폐가 될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제가 앤가요. 소, 솔직히 아까는 너무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서 잠깐 죽고 싶었는데······ 대표님 본 순간 꼭 어둠 속에 스민 빛을 잡은 기분이 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굴이 빨개진 한녹영이 민망해하며 강준일의 등을 떠밀었다.
“바쁘다면서요. 어서 가세요.”
“한녹영씨한테 내가 빛이라는 소리인가? 내가 한녹영씨한테 그 정도 존재인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내가 나를 과소평가하고 있었군.”
강준일의 입매에 웃음기가 가득 매달려 있었다. 한녹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안 가세요?”
“가야하는데 한녹영씨를 두고 가자니 발이 안 떨어지는군. 햇살 같은 내가 사라져서 한녹영씨가 슬퍼할까봐.”
“빨리 가시라니까요!”
얼굴이 벌게진 한녹영이 강준일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그 손길에 떠밀려 현관으로 향하며 강준일이 말했다.
“그럼 햇살 같은 난 갈 테니 절망하지 말도록.”
진심으로 기쁜 듯 환하게 웃은 강준일이 울어서 퉁퉁 부은 한녹영의 눈 밑을 가볍게 쓸더니 이내 미련을 떨치듯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햇살 같은 뭐? 하여간 내가 한 말은 하나도 안 놓치고 꼬투리 잡아 놀리지? 빨간 얼굴을 긁고 있는 한녹영의 곁으로 박상호가 다가왔다.
“너 언제부터 강 대표와 이렇게 가까워진 거야.”
“가까워지긴.”
“완전 가까워 보이던데?”
“그렇게 보였어?”
“어. 난 너랑 강 대표랑 연애라도 하는 줄 알았다.”
한녹영의 낯이 더욱 붉어졌다. 한녹영은 “연, 연애는 무슨.” 하며 박상호의 어깨를 퍽 쳤다. 연애라는 단어에 무척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파! 나도 너랑 강 대표가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알거든? 그냥 아까 분위기가 그래 보였다고! 어쨌든 고맙네. 소식 듣자마자 걱정돼서 달려와 준 것 같은데.”
“응.”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안다는 말에 잠깐 샐쭉했던 한녹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은 좀 나아졌어? 아까 픽 쓰러졌을 때만 해도 나 너 어떻게 되는지 알고 진짜 놀랐다. 그리고 드레스룸에서 웅크리고 있는 걸 봤을 때는 진짜······.”
충격이었다. 멘탈이 완전히 깨져 갈가리 찢겨나간 사람처럼 넋이 나간 표정이라니······. 절망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나 싶어 박상호의 마음이 쓰라렸다.
“아까는 내가 좀 패닉 상태였거든.”
현재에 예전 상황이 겹쳐지며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혼란에 빠졌던 거다.
“표정 보니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한녹영이 웃었다.
“나아졌어. 버틸 힘이 생겼거든. 다 덤비라고 해. 나 한녹영이야. 이대로 안 쓰러져.”
박상호는 기세등등한 한녹영의 태도를 허세라고 생각해 기특하면서도 안쓰럽다는듯 웃었지만,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금 기분으로는 누구와 맞붙어도 이길 것 같았다. 아찔했던 절망 따윈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니까. 강준일의 얼굴을 본 순간 태양 아래 선 기분이 들며 기운이 확 살아난 것이 스스로도 좀 어이없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정말로 힘이 되었다. 전에도, 이번에도 누구보다 빨리 와준 강준일이 마치 저를 지키는 방패처럼 생각되었다. 든든했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딩동. 또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바짝 긴장해서 비디오폰을 통해 방문객을 확인한 박상호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문을 열어주었다.
“한수랑 지해다.”
두 사람은 곧 실내로 들어왔다.
“너희가 웬일이냐?”
박상호가 장한수와 정지해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정지해는 소파에 앉지 않고 곧장 한녹영을 향해 달려왔다.
“녹영이 어쩌고 있나 싶어서. 전화는 안 되지. 스캔들은 계속 커지지, 걱정돼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녹영아, 괜찮아?”
“괜찮아. 와줘서 고마워, 누나.”
“눈이 퉁퉁 부었는데, 울었구나. 세상에 피부가 이게 뭐야. 혹시 몰라서 팩 갖고 왔어. 이따 해줄게. 드라마 촬영 앞두고 있는데 최상의 피부 상태 유지해야지. 그리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응. 아까는 정말 속상하고 절망적이었는데 이제는 괜찮아. 기분이 많이 나아졌어.”
“다행이다.”
울어서 눈은 퉁퉁 부은 데다 피부는 푸석하게 일어나긴 했지만 정지혜가 보기에도 눈빛이며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거 한울에서 터뜨린 거야. 하 실장 그 새끼가 꼴좋다고 낄낄대는 소리 들었어.”
장한수가 울분을 터뜨리며 말했다. 박상호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꼭 노리는 것처럼 악의적으로 연달아 터졌잖아. 딱 봐도 녹영이 매장 시키려고 수 쓴 것이 보이더라. 녹영이한테 억하심정 가진 곳은 한울뿐이잖아.”
“우리 회사 그만뒀어.”
정지해가 말했다.
“어? 왜?”
“그딴 회사에 미련 없어. 아무리 계약이 끝났다고 해도 그렇지. 더럽고 치사해서 더는 못 다니겠더라. 하 실장이 우리한테 못되게 굴기도 했고. 그러니까 우리 둘 녹영 스태프로 고용해줘. 순정이는 나중에 오겠대. 걘 소녀가장이잖아. 돈 벌어야지. 우리야 한동안 고생해도 괜찮지만 걘 아니거든.”
“너도?”
“응. 녹영이 로드로 나 고용해라.”
“갑자기 이렇게 돼서······ 녹영이 한동안 힘들지도 몰라. 찍은 CF가 한두 개가 아닌데, 광고 회사들에서 소송이라도 들어오면 금전적으로 많이 시달릴 지도 모르고.”
일이 어찌어찌 잘 해결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정말 만약 불행히도 수습이 되지 않는다면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테고, 그럼 한녹영과 전속 모델 계약을 맺은 업체들에게 손해 배상 소송이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그럼 배상액이 수백 억대가 될 테고, 그리 되면 장한수와 정지해의 월급은커녕 집 대출금 또한 못 낼 형편이 될 거다. 한마디로 거리에 나앉는 거다. 박상호가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 조심스레 언질을 주었다.
“괜찮아. 각오하고 있어. 녹영이가 이대로 주저앉을 애는 아니잖아. 반드시 일어나서 전보다 더 톱스타 될 거라고 믿으니까 온 거야. 돈은 없지만, 내 시간과 재능 투자하려고. 그러니까 진짜 만약에 사태가 더 심각해져서 우리 월급 못 줄 상황이 된다 해도 부담 갖지 말고 고용해줘.”
정지해가 손가락 두 개로 브이자를 그리며 씩 웃었다. 장한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박상호가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씨, 왜 콧잔등이 시큰거리냐.
형이 그냥 사장하라고 했던 한녹영의 말이 떠올랐다. 욕심은 났지만 두렵기도 했고 여러모로 다른 기획사에 들어가는 편이 한녹영에게 훨씬 이득일 것 같아 망설였는데······. 사실 새벽에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는 걸 봤을 때도 든든한 회사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막아줬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냥 회사 확 차려버릴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러브콜은 더더욱 물 건너갔다. 단순한 루머에도 몸 사리던 기획사들이 확실하게 스캔들이 터져 순식간에 이미지가 바닥으로 추락한 한녹영을 데려갈 리 없었다. 설사 연락이 온다 해도 값을 확 후려치겠지. 정지해 말대로 얼마든지 재기해 전보다 훨씬 클 수 있는 역량이 있는데 평가절하해서 데려가려는 기획사에 굽실대며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건 싫었다. 스캔들 때문에 한동안 고생할 지도 모르지만 잠깐일 거다.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또 비슷한 일이 생겨선 안 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훗날 스캔들이 터진다면 이번처럼 무력한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회사를 크게 키워 제 손으로 한녹영을 보호해주고 싶었다.
녹영이는 내 배우니까.
모아둔 돈이랑 여기저기서 좀 꾸면 회사 차릴 돈은 될 것 같고. 처음부터 크게 시작할 필요는 없으니까. 박상호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진심이야?”
세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녹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누나 진짜야? 진짜 나 돈 못 줄 지도 모르는데 나랑 일할 거야?”
“그렇다니까. 나 데려가라고 했잖아.”
“그땐 지금과 상황이 달랐잖아.”
그땐 스타 한녹영이었지만, 지금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한녹영이니까. 정지해가 웃으며 얼굴이 어두운 한녹영의 손을 다독였다.
“괜찮아. 나 한동안 돈 안 받고 일해도 될 만큼 통장 빵빵해. 오면서 얘기했는데 한수도 나랑 생각이 같아.”
장한수가 한녹영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내가 옛날에 진짜 못되게 굴었는데······.”
“옛날 얘기를 왜 해. 너 못되게 굴 때는 밉고 욕도 많이 했지만, 요샌 아니야. 진짜 계속 같이 일하고 싶을 만큼 좋아졌어. 그러니까 힘내. 축 쳐져있는 건 너 답지 않으니까. 넌 까칠하게 성질부리는 모습이 매력적이야.”
박상호가 몸을 일으켜 한녹영에게 다가왔다.
“녹영아, 내가 회사 차릴 테니 네가 1호 배우 해라.”
하녹영은 박상호와 정지해, 그리고 장한수를 차례로 보았다. 스캔들이 터지고 온 세상이 적으로 돌아서서 저를 비난한다고 느껴졌을 때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 절망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또 다시 세상에 홀로 남겨져 절벽 아래로 떠밀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랐다. 그땐 제 곁에 남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달라졌다. 박상호가 있고 정지해와 장한수도 있다. 그리고 강준일도······ 있었다. 몰랐는데 제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또 울컥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한녹영의 눈자위가 발갛게 변하며 눈물이 차올랐다. 고마워, 하고 작게 말하며 울먹이고 있을 때 세 번째로 딩동 소리가 났다.
이번엔 진짜 기자인가, 움찔하며 비디오폰을 통해 바깥을 확인한 박상호가 웃었다.
“지리산 흑돼지 청년 왔다.”
장한경은 잠시 후 헐떡이며 실내로 들어왔다.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의 이마에 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노, 녹영 선배 괜찮습니까? 기사 보고 걱정돼서 달려왔어요.”
한녹영은 단걸음에 제 앞으로 다가와 걱정하는 장한경을 보며 짧게 웃었다.
“형, 2호 배우 장한경으로 하자.”
“그럴까?”
“네? 2호 배우요? 그게 무슨······?”
장한경은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한녹영의 얼굴에 안도했다가 2호 어쩌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한녹영이 그런 장한경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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