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O3
한녹영은 2017년 새해를 연짱 닷새간 바쁘게 보냈다. 그리고 여섯째 날. 간신히 하루가 비었다. 지면 광고 촬영이 지체되어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후 무조건 오후 1시까지 잘 거라고 못을 박아두고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잠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녹영아! 한녹영!! 일어나봐!!”
박상호가 다급한 음성으로 한녹영을 흔들어 깨웠다.
“뭐? 왜에?”
억지로 잠에서 깬 한녹영이 짜증스레 물었다. 충분히 못 잔 탓에 아직 졸려 눈도 잘 못 뜨겠다. 간신히 반만 뜬 눈으로 짜증을 부리는 한녹영의 몸을 박상호가 강제로 일으켜 앉혔다.
“정신 좀 차려봐!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이리도 호들갑이야? 한숨을 푹 내쉰 한녹영이 억지로 눈을 떴다. 눈알이 빽빽해 “나 인공눈물 좀.” 하고 손을 내밀자 박상호가 서둘러 협탁에서 일회용 인공눈물을 찾아 한녹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인공눈물을 여러 번 넣은 후 반복해서 눈을 깜박깜박하고 나니 잠이 좀 깨며 정신이 맑아졌다.
“무슨 일인데?”
“김현영 작가한테 전화 왔는데, 도망자 제작에 또 차질이 생겼단다. 뭔 드라마가 이렇게 다사다난해?”
눈이 번쩍 뜨였다. 그나마 남아있는 잠기운이 저만치 홀라당 달아났다.
“뭐? 왜?!”
“가장 큰 투자자가 이제 와서 투자를 못하겠다고 발을 뺐나봐.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투자하겠다고 한 곳이라 지금 정우에 비상이 걸린 모양이더라.”
“발 빼겠다고 한 투자자가 어디인데?!”
한녹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캐스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문제가 생기다니. 불안함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NB라고 주로 영화에 투자하는 투자배급사인데, 이번이 첫 드라마 투자인 모양이더라.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도 내내 말이 없다가 이제 촬영만
들어가면 되는 지금에 와서 투자 철화한다며 발을 뺐대.”
“언제 전화 왔어?”
“한 5분 전에.”
“왜 나한테 바로 안하고 형한테?”
“요새 너 휴대전화 자주 꺼두잖아. 너한테 한 번 걸어보고 연결 안 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하더라.”
아, 맞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로부터 번갈아가며 자주 전화가 걸려와 성가신 마음에 아예 꺼두는 일이 잦았다.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한녹영의 등을 향해 박상호가 물었다.
“어디 가려고? 정우에 가려고?”
“어! 상황이 어떤지 가봐야지!”
한녹영은 바쁘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후 욕실로 직행해 물만 대충 찍어 바르는 수준의 고양이 세수를 하곤 모자를 푹 눌러썼다. 마음이 급해 왜출 시 필수인 꽃단장이고 뭐고 할 겨를이 없었다. 박상호도 입고 있던 옷 위에 한녹영이 사준 패딩만 걸친 채 부랴부랴 나왔다.
“어? 한녹영씨?”
전에 오디션 때문에 왔을 때 커피를 가져다주었던 여직원이 빚 받으러 온 사람마냥 정우 안으로 들어선 한녹영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오디션 당일과는 달리 직원의 표정이 무거웠다.
“작가님과 감독님 있습니까?”
“회의실에 계세요. 자금 비상 걸려서요.”
“회의실이 어딥니까?”
“저 따라오세요.”
한녹영은 그녀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그녀가 회의실 문을 노크한 후 “한녹영씨 왔어요.” 하고 말해주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 한녹영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예의고 뭐고 차릴 겨를이 없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투자자가 변심했다고요?”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자 한녹영을 맞으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던 김현영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단 앉으세요.”
한녹영이 김현영이 권한 의자에 앉았다.
“매니저 형한테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네. 사실이에요. NB에서 갑자기 투자를 철회한다는 연락이 왔어요. 거기서 제작비 투자를 제일 많이 하기로 했던 터라 투자자를 찾지 못하면 도망자는 접어야 해요.”
회의실 안의 공기가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텁텁했다. 김석형은 말없이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다른 직원들의 얼굴도 시멘트를 이고 있는 것처럼 무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김현영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눈가가 시뻘겠다.
“시발 새끼들. 이제 와서 투자를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라는 거야. 발을 뺄 거면 진작 빼던가. 엿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부장 개새끼. 내가 사주는 한우는 돼지처럼 잘도 처먹더니, 뭐? 회사에서 다들 반대하는 거 날봐서 무리하게 투자하는 거라고? 내 능력을 믿어? 둘이서 손을 잡고 드라마 판을 뒤집어 봐? 시발 새끼. 아주 회를 쳐버릴라.”
김석형의 입에서 욕이 아주 찰지게 나왔다. 그는 필터만 남은 담배를 비벼 끄자마자 새로 물었다. 김석형뿐만 아니었다. “나도 한 개비 줘요!” 하고 외친 김현영도 담배를 물었다. 회의실 안에 있던 다른 직원들까지 전부 담배를 뻑뻑 피워대자 실내가 순식간에 뿌연 연기소굴이 되었다.
“한녹영씨도 피우실래요?”
김현영이 담배를 권했다.
“아니요. 전 담배 안 피웁니다.”
한녹영이 손을 내저었다. 기관지가 좋은 편이 아니라 담배는 애초부터 멀리 해왔다.
“정말이요? 영화에서 담배피우는 모습 끝내주게 섹시하던데요.”
“담배 씬 있을 때마다 곤욕이었죠. 섹시한 표정 그거 사실은 기침 나오는 거 간신히 참는 표정이었을 걸요.”
한녹영의 말에 그제야 김현영이 짧게나마 웃었다.
“대체 누가 한녹영 씨한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운 건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배려심 넘치는 분한테.”
진실을 얘기한 건데, 마음을 풀어주려고 농을 한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굳이 정정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저 웃고 말았다.
“NB가 투자하기로 한 금액이 얼마입니까?”
“30억이요. 빠듯하게 예산 짜서 딱 100억으로 제작하기로 했거든요. 그 중 삼십 퍼센트이니 크죠. 너무 한 곳에 몰빵인 것 같아 좀 불안하긴 했는데 상황이 여러모로 불리해서 우리한테 선뜻 투자하겠다고 한 곳이 없었어요. 방송국에서도 편성은 해주겠지만, 제작비 지원까진 무리라고 처음부터 선을 딱 그었고요. 제가 아직 무명에 가깝고 또 한녹영씨를 제외하곤 스타 배우가 거의 없어서 PPL도 그저 그렇거든요. 방송 시작하고 시청률 대박 터지면 PPL 들어올 거고, 빠듯했던 제작비에도 좀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계산했어요. 그런데 촬영 시작도 못하게 생겨서 걱정이에요. NB쪽도 감독님이 진짜 애걸복걸하다시피 해서 오케이 따낸 건데, 이제 와서······.”
30억이라니. 당장 그 많은 돈을 투자해줄 곳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한녹영도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것도 내 탓인가? 내가 과거로 돌아와 내 것이 아닌 역을 욕심내서? 죄책감마저 들었다.
“더 문제는 NB가 등을 돌림으로써 다른 투자자들의 마음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겁니다. 너도나도 투자금을 회수하거나 투자하기로 한 금액을 줄 수 없다고 한다면 정말 드라마 접어야하거든요.”
김석형의 말이었다.
“NB 쪽에서 다시 마음을 바꿀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겁니까?”
한녹영이 김석형을 향해 물었다.
“없습니다. 내가 이 부장 씹어먹을 새끼 찾아가서 빌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합디다. 상무 누구 지시라나. 오히려 우리 때문에 징계 먹을 뻔 했다며 놈이 도로 큰소리치더군요.”
대답하는 김석형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가득했다. 한녹영은 꺼멓게 죽은 그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께물었다. NB쪽의 마음을 돌려 재투자를 유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 자신만큼 저들의 마음 또한 절박할 텐데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본 후에야 투자에 문제가 생겼다며 연락했을 테지. 묵직한 한숨이 자꾸만 가슴에 쌓였다.
회의실 안의 누구도 먼저 말문을 열지 못했다. 모두 한숨만 내쉬며 테이블을 응시했다. 절망이 열에 녹은 설탕처럼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한녹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역을 욕심냈을 뿐인데, 왜 이다지도 힘든 건지.
“저도 한 번 알아볼게요.”
한녹영이 말했다.
“네? 한녹영씨가 왜요? 일이 생기면 연락 달라고 하셔서 전화한 것뿐이지 한녹영씨한테 부담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압니다. 제가 이 드라마 진짜 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그래요. 혹시 투자할 사람이 있나 수소문해볼게요.”
“고, 고맙습니다. 한녹영씨! 저희도 분발해서 꼭 투자자 다시 찾아낼게요. 제 전셋집이라도 빼서 제작비에 보탤게요. 진짜 산 넘어 산이지만 오기가 생겨서라도 우리 무시하고 안 될 거라고 손가락질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어요.”
김현영이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오기가 가득했다. 한녹영은 희미하게 웃어 보인 후 회의실을 나왔다. 말없이 따라오던 박상호가 차에 올라 타자마자 머뭇머뭇하더니 슬쩍 말문을 열었다.
“너 도망자 꼭 해야겠어?”
“무슨 소리야?”
“시작 전부터 너무 난항이잖아. 캐스팅이 겨우 끝났나 싶었더니 이번엔 돈 문제가 생기고. 다음에 또 어떤 문제가 생길지 어떻게 알아? 대본 보니까 너무 좋고, 네가 처음으로 자의로 선택한 드라마라 웬만하면 지지해주고 싶은데 돌아가는 판이 좀 불길해서 그래.”
“형.”
“3억도 아니고 제작비 30억을 어디 가서 어떻게 구하려고? 본분을 잊고 있는 모야인데 넌 캐스팅된 배우지 정우 직원 아니다. 투자 담당자는 더더욱 아니고. 네가 왜 나서? 편성은 이미 됐는데 이러다 1화부터 쪽촬영하게 생겼고, 쪽촬영한 드라마 질이 좋을 리 없잖아. 난 이래저래 불안해.”
대본 잘 골랐다며 응원해주던 박상호마저 이렇게 말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심장 위에 돌을 올려둔 기분이었다. 또 한 번 ‘내 욕심 때문에 일이 자꾸 어긋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은혜로 과거로 돌아온 이후 이번엔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중인데, 이게 잘못인가? 사실 제 운명은 이미 정해졌으니 정해진 대로 살아야만 했던 걸까. 예전 그대로 말이다. 장현재의 인형으로, 천하의 악질로, 파렴치한으로.
한 번 생각이 어두운 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한녹영은 머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아니야. 운명이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같은 삶을 또 한 번 살아 또 다시 불행한 끝을 맞이하라고 어머니가 제 모든 복을 희생해 절 지금으로 돌려보낸 건 아닐 것이다. 운명은 바꿀 수 있다. 바꾸고 말겠다. 같은 결말을 다시 맞이하긴 정말 싫었다.
“녹영아, 네가 워낙 적극적으로 뜻을 내비쳤던 탓에 이제와 못하겠다는 말 하기가 힘들겠지만 그냥 이쯤에서 발 빼면 어때?”
한녹영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회오리에 휘말린 것처럼 어지럽던 마음을 간신히 정리했다. 제 인생의 다른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 이미 걸음을 내딛었고, 돌아갈 순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직진하는 것뿐이었다.
“형, 나 이거 꼭하고 싶어. 아니 꼭 해야해.”
“······.”
“나 한 번만 믿어봐라. 내가 처음으로 내 의지로 선택한 드라마야. 차도영을 너무 하고 싶어. 지금 와서 포기하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절박함이 가득한 한녹영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박상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그래, 해라. 내가 잠깐 못된 생각을 했어. 미안하다. 내가 봐도 이건 잘될 드라마인데, 자꾸 누군가 초를 치는 느낌이 들어·······. 느낌이 들어서······ 느낌이 드는데······. 내가 직감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박상호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녹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여보였다.
“무슨 느낌이 든다는 거야?”
“언뜻 든 생각인데, 혹시 한울에서 방해하는 건가 싶기도 해서.”
한울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회사에서?”
어. 이제 문제가 해결됐나 싶으면 일이 생기고 이제는 괜찮겠지 하면 또 문제가 생기잖아. 꼭 누가 의도적으로 훼방 놓는 것 마냥.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겠지? 장 대표가 암만 발이 넓어도 NB쪽에도 선이 닿아있다는 말은 못 들어본 것 같으니까. 괜한 생각일 거야. 집에나 가자.
박상호는 제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후 후련해진 모양인데, 한녹영은 달랐다. 찜찜함이 가슴 언저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울에서 훼방을? 그 생각은 못했는데 가능성 있는 말이었다. 다른 기획사에서 못 데려가게 하려고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린 한울이 아닌가. 한울이, 장현재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한녹형이 씁쓸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의 실체를 알고 그에게 점점 더 실망해가는 것이 그리 기분 좋진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아까 형이 한 말 있잖아.”
“내가 한 말? 아, 한울에서 훼방 놓는 거 아니냐고 했던 말?”
“난 가능성이 있다고 봐. 나에 대한 루머 퍼뜨려서 다른 기획사의 러브콜 막았잖아. 드라마 못 찍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훼방 놓는 거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
“장 대표가 NB에도 선이 닿아있는지 한 번 알아볼까?”
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녹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도망자에 투자해줄 투자자가 있는지나 좀 알아봐줘.”
지금은 NB와 한울의 관계를 알아내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제작비 문제가 더 시급했다.
“알아보기는 할 건데, 너무 큰 기대는 마라.”
미리 못을 박아두는 박상호의 말투가 무척 비관적이었다. 한녹영이 응, 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김현영에게 한 번 알아보겠다고 큰소리 뻥뻥치긴 했지만 사실 회의적이다. 30억이나 되는 큰돈을 단번에 턱 내놓을 투자자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문제는 김석형 말대로 다른 투자자들마저 등을 돌릴 가능성이 크다는 데에 있었다.
“이미 NB가 도망자에 투자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문이 다 퍼졌을 거야.”
“벌써?”
“당연하지. 바닥 소문이 얼마나 빠른데. NB 못지않게 힘 있는 투자자를 찾지 못하는 이상 수삼일 내로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발을 빼기 시작할 거다. NB가 돈을 주지 않겠다고 한 것보다 그로 인해 생길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문제야.”
“나라도 투자할까. 나 돈이 얼마나 있지?”
무심코 해본 말인데, 박상호가 입을 벌린 채 얼간이 같은 표정으로 한녹영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너 미쳤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녹영의 생각대로 실제 박상호는 속으로 저 자식 약간 돈 것 같은데, 라는 생각중이었다. 그냥 맡은 역에 맞는 최선의 연기만 하는 되는 배우가 역 욕심에 투자까지 하겠다니. 어느 날 뿅하고 새 사람이 된 건 좋은데, 새 사람이 되며 머리를 좀 다쳤나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너 돈 없어. 벌긴 꽤 벌었는데, 그만큼 썼잖아.
스스로 사치하고, 거머리 같은 가족들한테 뺏기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뭉칫돈 빌라 구입하는데 쓸어 넣어 남은 돈은 많지 않았다.
이래저래 긁어보면 한 5억은 될 것 같은데.
회사에서 마구 굴린 덕분에 통장에 돈이 쏠쏠하게 쌓여 현재 그 정도는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당한 눈으로 한녹영을 보며 압술을 달싹였던 박상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차도영에 대한 한녹영의 집착이 대단해 보다 적극적으로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재차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본인의 의지가 저토록 확고하니 있는 돈 다 긁어모아 투자하는 거나 말리자.
한녹영 또한 박상호의 표정에서 대충 그의 생각을 읽어냈지만 침묵하며 창밖을 응시했다. 투자는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걸 스스로도 알았다. 제작사쪽에서 받아줄 리도 없고. 다만 제 돈이라도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간절하다는 뜻이다. 박상호는 이런 제 마음을 모를 테지만, 한녹영에게 차도영과 도망자는 의미가 남달랐다. 처음으로 간절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역이고, 배우로서의 눈을 뜬 계기가 된 드라마이며,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첫 역이었다.
저뿐만 아니다. 이젠 도망자에 장한경의 꿈까지 더해져버려 더더욱 꼭 찍어야만 하는 드라마가 된 것이다. 김현영 말대로 보란 듯이 시청률 사상 최대치를 찍어 보이고 말겠다는 오기도 들었고, 무엇보다 도망자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이번 삶도 실패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빌라에 도착하자 관리인이 뛰어나왔다. 그의 손에 김치통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아까 한녹영씨 부모가 와서 주고 간 거예요. 한우꼬리 진하게 달인 거라면서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한녹영이 무심한 눈길로 통을 내려다보았다. 아부 작전을 쓸 참인가.
“소란은 안 피웠습니까?”
“어데요. 현관 앞에서 기다릴 테니 들어가게 해달라고 얼마나 고집을 부리던지 아주 애먹었습니다. 부모가 자식 집에도 못 들어가냐면서요. 목소리가 꽤 크던데요.”
관리인은 좋게 포장하며 허허 웃었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했을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고집이 아니라 욕설과 난동을 부렸겠지. 한녹영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화끈해졌다.
“죄송합니다. 그거 아저씨 드세요.”
“네? 이걸요? 아주 좋은 걸로 사다 푹 고은 거라던데요.”
“그러니까 드세요. 전 요즘 바빠서 집에서 밥먹을 겨를도 없거든요. 먹기 찜찜하시면 버리셔도 되고요.”
“먹는 걸 왜 버려요? 그럼 제가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아마 몇 번 오실지 몰라요. 미리 사과드릴게요. 만만한 분들이 아니라서요.”
“네. 걱정하지 마시고 이만 올라가보세요.”
“다음에 와서 난동을 부리거든 망설이지 마시고 경찰을 부르세요.”
“네? 한녹영씨 부모님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경찰을······. 제가 적당히 할 테니 염려마시고 올라가세요.”
“고맙습니다.”
관리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집으로 올라갔다.
“아부 작전을 쓸 모양이지? 웬 꼬리래. 그나저나 네 새엄마 레퍼토리는 왜 이렇게 단순하냐. 맨날 곰탕이야.”
박상호가 이죽거렸다. 한녹영은 픽 웃었다.
“애원이 안 먹히면 다음에는 회유, 애원, 협박까지 하겠지.”
“마음 단단히 먹어. 가족의 정에 호소한다고 또 예전처럼 무르게 넘어가지 말고.”
“알아. 무르게 안 넘어가. 그리고 혹시 아버지나 새어머니 이름 대면서 나와의 관계 물어보거나 투자 어쩌고 하는 전화가 오면 나와는 상관없으니 행여 날보고 투자하거나 하지 말라고 단단히 못 박아.”
제 이름 팔아서 여기저기서 돈 끌어다 쓰고 잠적하면 곤란해진다. 전엔 아버지가 들고 온 서류에 사인을 해줘서 예전과 똑같이 빚을 고스란히 떠안고 사기 혐의로 피소까지 되었다. 이제 사인 같은 건 절대 해주지 않고, 가족과 절연할 마음이지만, 아버지와 새어머니라면 얼마든지 재 이름 팔아서 여기저기서 돈을 꿀 사람들이었다. 조심성 있는 사람들이라면 전화해서 부자 관계가 맞냐, 사업이 망하면 대신 돈을 갚아줄 마음이 있느냐, 그 정도 확인은 하겠지.
“알았다. 걱정하지 마. 너와 일절 관계없다고 내가 아주 똑부러지게 말해줄 테니까. 근데 모처럼 쉬는 날인데 잠도 푹 못자고 어쩌냐. 들어가서 좀 더 자.”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겨우 12시 반이었다. 오후 서너 시는 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잠이 부족하긴 한데, 머리가 복잡해 침대에 눕는다고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나 커피나 한 잔 줘.”
“그래. 잠깐 기다려.”
한녹영은 박상호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연하게 내렸다. 진한 커피 마셨다가 밤에 잠 못 자면 곤란하잖아.”
“어. 고마워.”
희미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한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박상호 말대로 연하게 내린 커피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박상호도 제법 커피를 잘 내려 이전에는 아무 불만 없이 맛있게 잘 마셨는데······.
“······커피 마시고 싶다.”
“응? 지금 마시고 있잖아.”
한녹영의 혼잣말을 들은 박상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 뜨고 조나? 커피 마시면서 왜 커피를 마시고 싶대?
“얼마 전에 아주 기막히게 맛있는 커피를 마셨거든. 그 커피가 생각나서.”
“어디서 마신 커피인데? 가까운 데면 내가 가서 사다줘?”
“돈으로 살 수 없는 커피야.”
“그런 커피를 어디서 마셨다는 거야. 가만, 너 지금 내가 내린 커피가 맛없다는 거냐?”
뒤늦게 박상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툴툴댔다. 한녹영이 짧게 웃었다.
“아니야. 형 커피도 맛있어. 나 잠자긴 글렀고, 검도 도장에나 다녀와야겠다. 자주 가야 실력이 늘 텐데, 요새 통 못 갔잖아. 이러다 드라마서 되게 어설프게 보일 것 같아.”
“검도는 무슨 검도야. 그냥 쉬어! 내일부터 또 스케줄 줄줄인 거 몰라?”
“운동을 해야 체력이 좋아지지. 체력이 좋아야 스케줄 소화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잖아.”
“그럼 밥이라도 먹고 가. 후딱 차릴 테니까.”
요새 가만 보면 박상호는 제게 밥을 못 먹여 죽은 귀신이 붙은 것만 같다. 틈만 나면 뭘 먹이려 드니 말이다. 밥 얘기를 듣고 나니 비로소 허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검도 도장으로 뛰어갈 듯 몸을 일으켰던 한녹영이 다시 슬그머니 앉았다.
사흘이 지나도록 정우 쪽에선 연락이 없었다. 한녹영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혹시 도망자에 투자할 곳이 없나 알아봤지만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건 박상호와 김석형의 우려대로 다른 투자자들까지 슬슬 발 뺄 기미를 보이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웬 한숨이야?”
한녹영이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자 메이크업을 해주던 정지해가 물었다.
“내가 또 한숨 쉬었어?”
“너 요새 뻑하면 한숨 쉬더라. 피곤해서 그래?”
강준일 회사의 연수원에서 있었던 일 이후 정지해는 예전과는 달리 한결 편안하게 한녹영을 대했다. 쭈뼛대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가끔 스스럼없이 장난까지 치는 모습에 한녹영의 마음도 편했다.
“요즘 고민이 있어서.”
“무슨 고민인데?”
“누나도 들었지 않아? 도망자 말이야.”
“아아, 그거. 나도 들었어. 투자금 해결이 안 되어서 어쩌면 어려울 수도 있다지? 나 한울 들어오기 전에 잠깐 같이 일했던 애가 지금 나희연 코디로 있는데, 나희연 쪽에서도 출연 계약 취소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고 있다더라. 그거 땜에 다른 거 못하고 있는데, 만약 드라마 엎어지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는 거 아니냐면서.”
배우들 생각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배우들도 불안해서 술렁이고 있겠구나. 한녹영의 한숨이 더더욱 깊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 요새 피곤해서 피부 상태 안 좋은데, 스트레스로 더 망가지겠어. 스트레스가 피부의 적인 거 알지? 비타민은 챙겨먹어?”
“자꾸 잊어버려서.”
“꼭 먹으라니까. 안 되겠다. 내가 상호 오빠 닦달해야지. 매니저의 본분이 뭐야.”
“그러지 마. 요새 상호 형도 해골 복잡해.”
제 부탁으로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해 투자자 알아보랴, 자를 데려갈 기획사알아보랴, 스케줄 조율하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자정이었다. 비타민은 제가 아니라 박상호가 먹어야한다. 얼굴이 팍삭 삭아 보이던데. 저야 자주 관리라도 받지. 다음 휴일에는 박상호 데리고 샵에나 갔다 올까.
“요새 상호 오빠랑 아주 깨가 쏟아져?”
한녹영이 박상호를 편들자 정지해가 눈을 흘겼다.
“나라도 형 챙겨야지. 나랑 같이 회사 나가주겠다고 한 사람인데.”
“옮길 회사는 정했어?”
한녹영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자 지해가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한녹영에 대한 루머 때문에 대형기획사들이 나서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루머는 사실 아니지?”
“당연하지. 나한테 터지면 큰일 나는 스캔들이 뭐 있겠어. 알잖아. 나 연애 한 번 안 한 거.”
장현재에게 목매느라 그 흔한 연애 스캔들 한 번 없었다.
“빨리 루머가 사라져서 괜찮은 기획사에서 러브콜 오면 좋겠다.”
“응.”
“잘 되면 나도 데려가고.”
“어? 진짜?”
정지해가 절 따라오고 싶다는 말을 할줄은 몰라서 진심으로 놀랐다. 한녹영의 동공이 최대한으로 확장되었다.
“응. 슬슬 다른 데로 옮길까 생각 중이었는데, 너하고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내 솜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싫다면 말고.”
다른 데를 쳐다보며 하는 말에 수줍음이 가득했다. 한녹영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음에 안 들긴. 누나 솜씨야 최고지. 내 스타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알았어. 괜찮은 데서 러브콜 오면 협상하면서 누나도 데려가게 해달라고 할게. 나야 누나가 따라와 주면 좋지.”
“그래. 고, 고마워. 촬영 잘해.”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3개월 단발 계약을 하고 광고 촬영을 했던 시계 브랜드 ‘콘스탄틴’의 화보 촬영을 해야 한다. 콘스탄틴은 신생 브랜드지만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사이의 인기 남자 연예인들을 주로 공략해 공격적인 협찬을 제공하며 이름을 알렸다. 컨셉은 ‘내 남자에게 사주고 싶은 시계’라나. 한녹영 이전에는 현재 싱글 가수로는 톱을 달리고 있는 강조영을 모델로 썼는데, 생각만큼 판매 효과가 크지 않았는지 재계약을 하지 않고 바로 한녹영으로 갈아탄 것이다. 3개월 단발 이후에 판매 실적을 보고 다른 연예인으로 갈아탈지, 계약연장을 할지 결정하는 것 같았다.
“피부가 하얗고 손목이 가늘어 시계가 잘 어울리는데요.”
포토그래퍼가 모니터로 촬영 사진을 확인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사진 잘 나오나요?”
“네. 아주 좋습니다.”
표정이 좋은 걸 보니 사진이 흡족한가 보다. 한녹영은 웃으며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그렇게 시계 이미지에 따라 수트를 입기도 하고 캐주얼하게 입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고, 또 메이크업을 수정하면서 화보 촬영을 마쳤다. 촬영이 종일 걸려 스튜디오를 나와보니 어느새 늦은 밤이었다. 오전에 날씨가 잔뜩 흐려 비가 오려나 했는데, 예상대로 주룩주룩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도 고생했다.”
박상호가 한녹영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 형도 고생했어. 한수 형도 지해 누나랑 순정이 너도. 다들 배고프지, 근처서 식사하고 집에 가자.”
한녹영은 제 스태프들을 아끌고 스튜디오 근처에 있는 해물탕 집으로 향했다. 해물찜과 탕을 푸짐하게 시켜 다들 배불리 먹인 후 각자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야 빌라에 도착하니 11시였다.
“으어, 피곤하다.”
박상호가 목을 크게 꺾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목을 돌릴 때마다 뚜둑뚜둑하는 소리가 났다.
“마사지 좀 하고 자.”
“그래야겠어. 네가 이 집 사면서 한 돈지랄 중에 제일 쓸모 있는 물건이 바로 안마 의자 같아. 뻐근할 때마다 앉으면 몸이 슥 녹는 기분이라니까.”
벌써부터 황홀한 표정을 지었던 박상호가 바로 표정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참 아까 지리산 흑돼지 총각한테 전화 왔었다.”
“장한경한테서?”
“어. 차철호 역으로 캐스팅 확정 되었대. 근데 캐스팅 확정 전화를 해준 직원이 어쩌면 드라마 접을 수도 있다는 말도 한 모양이야.”
김현영의 언질대로 차철호 역에 장한경이 캐스팅 된 건 다행인데······.
“뭐 하러 그런 말까지 했대.”
사람 심란해지게.
“진작 전화했어야 했는데, 투자 문제 때문에 거기도 정신 없어서 뒤늦게 부랴부랴 전화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장한경이 자긴 떨어진 줄 알았다고 하니까 왜 연락이 늦었는지 설명한 것 같아. 그리고 사실 드라마 자체가 엎어질지도 모르니 말해주는 게 맞지.”
“걱정하고 있겠네.”
“어. 처음으로 드라마 출연하게 되었나 싶어 희망에 들떴는데 곧바로 엎어질 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회사도 없는 완전 초짜 무명 배우를 그렇게 나름 큰 역으로 데려다 쓰는 기회가 별로 없는데. 이번 기회 놓치면 또 언제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니까. 걱정하는 목소리 들으니 내 마음도 안 좋긴 하더라.”
“형 어디서 돈벼락 좀 안 떨어질까?”
일확천금을 바라는 말투에 박상호가 피식 웃었다.
“돈벼락이라면 나도 맞고 싶다.”
나 참. 사채업자들에게 쫓길 때도 바라지 않던 돈벼락을 바라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로또라도 사볼까. 이럴 때 돈이 주체 못 할 정도로 많아 몇 십억 정도는 그냥 막 뿌릴 수 있는 지인이라도 한 명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좀 빌려달라고 해볼 텐데.
푹 한숨을 내쉰 한녹영이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
“뭐? NB가 정우에서 받을 뺐다고?”
“네. 그래서 지금 정우가 완전 초상집 분위기인 모양입니다.”
한성준의 말에 강준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1시간 전 출장에서 돌아왔다. 사실 1월1일, 헬스장에서 한녹영을 만났던 날 해외 출장이 잡혀 공항으로 가던 길이었다. 헬스장 앞 도로에 서 있던 한녹영의 차를 보고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안으로 들어갔던 터라 라스트콜에 맞춰 간신히 비행기를탈 수 있었다. 공항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한성준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의 잔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참 우스웠다.
여유 시간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왜 한녹영의 차를 확인하자마자 뭔가에 이끌리듯 헬스장 안으로 들어갔던 건지. 자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잠꼬대까지 하며 제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해 기껏 입력해줬더니 ‘혹시 강준일 대표님이 제 휴대전화에 연락처 넣어뒀습니까?’ 란 확인 메시지조차 오지 않아 휴대전화 속 연락처를 본 건지 못 본 건지 확인해 보려고 들어간 건가?
“장현재 입김인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보아 하니 장현재 대표가 한녹영을 내어놓지 않으려고 갖은 수를 쓰는 모양이던데요.”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장현재의 행보를 보면 제약종료 직전까지 한녹영을 굴릴 수 있을 만큼 굴리는 한편 어떻게든 다른 회사에 내어놓지 않
으려고 수를 쓰고 있었다. 루머 건도 그렇고, 기획사 대표들 회합 자리에서도 ‘한녹영을 데려갔다가는 반드시 후회할 것.’ 이라며 은근히 협박했다는 말도 들었다. 재수 없으면 티끌만 한 먼지에도 이미지가 추락하는 곳이 바로 연예에게다. 특히 한녹영처럼 지금껏 이미지가 좋았고, 안티가 별로 없는 연예인은 더더욱 타격이 클 터. 괜히 한녹영을 데려갔다가 장현재가 악착같이흠집을 내려고 덤벼들어 인기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회사로선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니 능구렁이 같은 대표들이 손가락만 빨며 아쉽게 한녹영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정말로 장현재에게서 벗어나는 중인가보군. 장현재가 이리도 안달을 내는 걸 보면.”
장현재가 직접 NB에 손을 쓰진 않았을 거다. 아마 NB에 압박을 가한 사람은 장현재의 내연녀겠지. 그녀가 손을 쓴 까닭은 장현재의 부탁 때문이었을 테니, 결국 장현재의 입김이 작용한 건 맞았다.
루머를 퍼뜨리고 한녹영이 욕심 낸 드라마를 망가뜨려 결국은 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 셈인가.
“NB가 투자하기로 한 금액이 얼마야?”
“30억입니다.”
“돈도 돈이지만 NB에서 발을 빼면서 다른 투자자들까지 흔들리고 있겠군.”
“네. 사실 그게 더 큰 문제입니다.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이제 출연 계약을 맺은 배우들까지 흔들리는 중이라고 하네요. 돈 빠지고, 사람까지 빠지면 뭘로 찍겠습니까? 커다란 반전이 없는 이상 도망자는 물 건너갔다고 봐야죠.”
갓내린 커피에 브랜다를 섞은 강준일이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커피 한 잔 할텐가?”
“아니요. 지금 커피 마시면 못 잡니다.”
“답지않게 예민한 몸뚱이를 갖고 있기는.”
한성준은 카페인에 예민해 물을 잔뜩 섞어 거의 커피라고 할 수 없는 커피를 마시고도 밤잠을 설치는 체질이었다. 강준일의 혀 차는 소리에 한성준이 안경을 올리며 딱딱하게 말했다.
“인신 공격적 발언은 삼가주시죠. 대표님.”
한성준의 말에서 한녹영이 떠오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준일이 물었다.
“도망자 어때? 한 실장이 보기엔 시청률 잘 나올 것 같나? 중국 시장에 팔아먹을 수 있겠어?”
“김석형의 자신감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대본을 받아본 사람들 말이 한결같이 ‘대본은 보기 드물게 잘 빠졌다’고 했으니까요. 거기에 한때 날고 기었던 김석형의 감각이 더해지면 웬만큼 성공은 보장되지 않을까 싶은데, 언제나 변수는 존재하니까요.”
“같은 시간대에 신은주 작가 드라마가 편성되어 있다면서?”
“제 예상으로 이번에 신은주 작가 드라마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왜?”
“아주 소문이 퍼지지 않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신 작가 남편이 도박에 빠져 빚을 크게 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집까지 경매에 넘어가게 된 상황이라 급하게 시놉 만들어 방송국과 제약한 모양인데, 딱 봐도 졸작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아직 제대로 된 대본도 안 나왔다고 하던데요. 그간의 저력이 있으니 이번에도 최소 중박은 할 거라고 판단하는 모양인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장마다 꼴뚜기일 순 없는 거죠.”
한성준의 표현에 강준일이 슬쩍 웃었다. 할머니 손에 자라서인지 가끔 표현이 예스럽다니까.
“즉 도망자가 제대로 방영만 될 수 있다면 신은주 신작을 아예 깔아뭉갤 수 있다는 말로 들라는데?”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지, 백퍼센트 확신은 아닙니다.”
“한 실장이 그 정도로 평가하면 성공 확률 90퍼센트 이상이라는 뜻이잖아.”
보는 눈이 뛰어나 한성준이 괜찮다고 평가한 드라마나 영화는 거의 뜨는 편이었다. 재작년 다 고개를 가로저었던 괴물 영화에 혼자 구백 만을 예상했는데, 실제 그 영화는 950만을 찍고 막을 내렸다.
“투자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보여?”
“네. 매우 그렇게 보입니다.”
지금껏 영화에만 주력해왔는데, 슬슬 드라마에 발 담가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한류가 뜨면서 잘 빠진 드라마들 외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몰이 중이잖아. 도망자에 대한 한 실장 평이 좋으니, 한 실장 안목 믿고 한 번 투자해볼까?”
“제 핑계 대지 마시죠.”
“응?”
“한녹영씨 때문인 거 압니다.”
“거기서 한녹영 아름이 왜 튀어나와? 한녹영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강준일이 정색했지만, 한성준은 먹히지 않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대학 1학년 때 선배한테 코 꿰어서 14년째입니다. 선배에 대해선 속속들이 다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는 의미였다. 강준일은 그저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오래 붙어 지내긴 했나 보다. 한성준 말대로 대학 1학년 때 될 성 부를 떡잎을 알아보고 옆에 두기 시작한 후 14년이 흘렀으니 말이다.
“아무리 얼굴이 취향이라도 남의 인형 따위에는 관심 없다고 하시더니요.”
“이제 남의 인형이 아니잖아.”
“그야 모르죠. 섣부른 판단은 금물입니다. 겉으로는 한녹영씨가 장현재 대표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은데, 속내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습관은 바꾸기 어렵고, 세뇌에서 벗어나긴 더더욱 어렵습니다.”
“한녹영이 장현재로부터 세뇌라도 당했다는 뜻이야?”
“거의 그 수준이었죠.”
그간 한녹영의 행동을 돌이켜보시죠, 라고 덧붙이고 싶은 얼굴로 한성준 턱을 올렸다. 강준일은 말없이 TV를 켰다. 요새 한창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더니 켜자마자 한녹영의 CF가 나오고 있었다. 커피 CF였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커피 맛을 음미하는 모습이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예쁘긴 했다. 솜사탕 같은 얼굴에 고슴도치 같은 성격이라니. 순진한 척 하던 껍질 안에 가시가 가득 박힌 밤송이를 숨기고 있었다니······.
잠에 잔뜩 취해 다정하게 대해달라고 하던 모습이나 제가 다정하게 대하자 약했냐며 어리둥절하게 묻던 모습. 그밖에 한녹영과 있었던 일들과 대화들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요즘 한녹영은 떠올리면 미소가 나오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강준일이 홀로 피식피식 웃자 한성준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 쪽에 자료 보내보라고 요청할까요?”
LK에서 연락하면 정우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 테지. 흡사 똥차를 보내고 벤츠를 맞이한 기분일 거다. 한녹영의 광고가 끝나자 미련 없이 채널을 돌린 강준일이 시선을 틀어 한성준을 보았다.
“그전에 기획팀 불러서 정말 대박 날 드라마인지 분석해보라고 해.”
“반쯤은 건성으로 해본 소리인데, 대표님은 진짜 투자할 생각이 있으셨나 봅니다.”
“투자할 가치가 있다면 해야지.”
“겸사겸사 한녹영씨도 도와주고요?”
“내 투자가 도움이 된다면 좋고.”
강준일은 끝내 ‘한녹영을 위해서 투자할 마음이 있다.’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준일의 속내를 모를 한성준이 아니었다. 그는 뉴스 채널에서 리모컨을 멈춘 강준일을 물끄러미 보았다.
“투자보다는 한녹영씨 쪽이 더 주된 목적 아닙니까? 불과 한 달인가요? 아니 두 달인가?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셨네요.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다 하시고요.”
“기특하잖아. 네 말대로 세뇌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데.”
세뇌를 벗어던지는 일이 쉬우면 사이비에 미쳐 집이고 가족이고 다 내팽개치고 교주에 헌신하는 신자들이 생길 까닭이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한녹영에게 장현재는 교주나 마찬가지였다. 한녹영은 신자이고. 그런데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나려고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또······ 예쁜지 모르겠다.
“기특해서 도와준다는 겁니까?”
“그럼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본래 기특한 아이에겐 상을 줘야 하는 법이야.”
“한녹영씨가 아이는 아닙니다만. 아무튼 내일 아침 일찍 회의 소집하겠습니다.”
한성준이 말했고 강준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자에 투자해서 한녹영에게 점수 따고, 수익 얻고, 장현재를 물 먹일 수 있다면 일석삼조니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만 퇴근해. 수고했어.”
“그럼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한성준이 인사를 한 후 빌라를 나갔다. 잠시 더 경제전문 뉴스를 보던 강준일 또한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려다 말고 휴대전화를 들여다 본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대체 연락처는 왜 달라고 한 거야?’
한녹영으로부터 온 메시지나 전화가 단 한 건도 없는 걸 새삼 확인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혀를 찬 강준일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강준일의 기상 시간은 대체로 5시에서 5시 반 사이이다. 다음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5시에 일어나 헬스장에 가볍게 운동하러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네. 접니다.”
ㅡ 회장님, 방금 병원 들어가셨다. 출근 전 병원에 잠깐 들러.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ㅡ 새벽 운동 나간다고 하시더니 가슴에 통증을 느끼신 모양이더라. 심장이 안 좋으시잖니. 그래서 곧바로 오기사 불러 네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모시고 갔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준일이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 반이었다. 여든이 다 된 노인네가 한겨울에 새벽 운동은 왜 간다고 설치신 건지. 하여간 열정만큼은 스무 살 청년 못지않았다. 그러니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의 LK 그룹을 이룩하신 거겠지만.
곧 조부께서 병원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이 온 집안에 다 퍼지고 있을 테고, 친척이란 친척들은 다 벌떼처럼 병원으로 모여들겠지. 들개 같은 친척들과 함께 있고 싶진 않은데. 혀를 차며 드레스룸으로 향하는데, 조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접니다.”
강준일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ㅡ 네 어미 전화 받았지?
“네. 자금 병원으로 갈 참이었습니다.”
ㅡ 올 것 없다.
“네? 하지만······.”
ㅡ 오지 말래도 벌떼들처럼 모여들 텐데, 너까지 그들 중 한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지금 와봤자 얼굴 마주하며 얘기도 제대로 못 나눌 텐데, 이따 한가해지면 오너라.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ㅡ 괜찮다마다. 잠깐 통증이 느껴져 주춤했을 뿐인데, 네 어미가 수선을 부린 게야. 지금은 말짱하니 회사 일 보고 이따 한가해질 때쯤이나 오너라.
“그럼 그리 하겠습니다.”
조부의 말대로 강준일은 우선 헬스장에 갔다가 회사로 출근했다. 한성준의 연락을 받은 기획팀이 8시부터 대기 중이었다. 미리 입수한 대본과 시놉시스, 그간 김석형이 연출한 드라마, 김현영의 데뷔작과 출연배우들의 역량, 요즘 중국 드라마 시장의 분위기와 유행까지 면밀히 분석하고 회의한 결과 도망자는 제대로 푸시만 받으면 시청률 30퍼센트는 나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해외시장에도 충분히 먹힐 거라는 분석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 드라마에도 진출해보자고. LK가 드라마판도 먹는 거지. 그 첫 걸음이 도망자이고. 오늘 회의 정리해서 기획안 올려. 그럼 오늘 회의 끝.”
회의를 끝내고 회의실을 나온 강준일이 말했다.
“병원으로 가지. 조부께서 입원하셨다는군.”
“네. 새벽에 보고 받았습니다.”
회사 앞에 차가 대기 중이었다. 강준일과 한성준이 올라타자 차는 곧바로 LK재단 병원으로 향했다.
“정우에 연락해서 미팅 날짜 잡을까요?”
“없어보이게 뭐 하러 먼저 컨택을 해? 기다려 봐.”
“그쪽에선 우리를 생각조차 않고 있을 텐데요. 지금껏 드라마에는 한 번도 투자한 적 없고, 사실 정우 같이 작은 제작사가 맘먹고 덤비기엔 우리 LK의 허들이 높지 않습니까?”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단 기다려.”
한성준이 의아하게 강준일을 보았다. 기껏 회의를 통해 결론을 내놓고 기다리라고 하자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준일은 침묵하며 병원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병원이 어수선하군.”
오늘따라 병원이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딱 꼬집어말할 순 없지만 들뜬 분위기가 좀 있었다. 조부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한 후 VIP층에 도착하자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이 보였다.
“조부님은 안에 계신가?”
“네.”
고개를 끄덕인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앞에 앉아 과일을 깎고 있는 주애리가 보였다. 그녀는 강준일의 사촌 형수로 조부 강정석 회장의 장손인 강한일의 처였다. 강정석의 첫아들은 젊은 나이에 죽은 탓에 자연스레 그룹 승계권은 둘째 아들인 강준일의 아버지에게로 넘어왔고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강준일이 손자들 중 후계 1순위가 되었다. 강한일과 그의 처 주애리는 그 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준일은 그들 부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강한일 주애리 부부가 강준일을 일방적으로 경계하고 미워한다는 편이 옳다.
“어머. 이제 오시는 거예요? 도련님. 요즘 도련님께서 무척 바쁘신가 봐요. 할아버님이 입원하셨다는데 이제야 오시다니요.”
가시가 느껴지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입매를 비튼 강준일이 “불효손자 이제 왔습니다.”하고 말하며 조부에게 다가갔다.
“멀쩡해 보이시는데, 꾀병 부리신 거 아닙니까?”
“도련님! 조부님께 그 무슨 말버릇······.”
이때다 싶었는지 주애리가 트집을 잡으려 할 때 강정석이 걸걸한 음성으로 손자며느리의 말을 잘랐다.
“이렇게라도 해야 네놈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느냐! 고약한 놈. 일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일주일에 한 번은 문안인사를 와야 할 것 아니야.”
“언제는 사내는 가정에 소홀해도 바깥일에는 빈틈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내는 너한테 가정일이 아니라 바깥일이다. 본사에도 잘 안 들어오고!”
“LK 엔터 일만으로도 바빠서요.”
“그깟 오락 사업. 우리 LK의 근간이 전자이니 그걸 맡으래도 기어이 고집을 부려 딴따라 사업이나 하고, 내 네놈이 아주 마음에 안 들어.”
말로는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강정석의 눈빛에서 손자 강준일을 향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강정석은 LK가의 독불장군이라 누구에게나 무뚝뚝하고 매사에 냉정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강정석을 어려워하지만, 어려서부터 강준일만은 그런 조부를 마치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했다. 그 때문인지 고만고만한 능력의 손주들 사이에서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보인 탓인지 강정석은 유난히 강준일을 예뻐했다.
“한일이 처는 그만 가보거라.”
두 사람의 대화에 까어들 틈을 보고 있던 주애리가 강정석의 축객령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간신히 표정관리를 한 후 소파에 두었던 가방을 집었다. 딱 달라붙는 투피스를 입은 몸매는 20대라 해도 믿을 만큼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 또 올게요. 할아버님.”
그녀는 강정석을 향해 최대한 화사하게 웃어 보이며 병실을 나갔다. 하지만 문을 닫기 전 강준일을 쏘아보는 건 잊지 않았다. 한가한 시간을 잘 타 강정석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환심을 살 계획이었는데, 그걸 망친 강준일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강준일은 날카롭게 저를 노려본 주애리의 시선을 느기고 피식 웃으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검사는 해보셨습니까?”
새벽 통화했을 때 목소리가 나쁘지 않아 어느 정도 안심하긴 했는데, 그렇다 해도 연세가 있으신지라 회의 내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조부는
안색도 괜찮아 보였다.
“괜찮다. 80년을 써먹은 몸뚱이가 20대처럼 튼튼하다면 그게 더 문제지. 요새 약을 좀 등한시했더니 바로 신호가 왔을 뿐이야.”
“약은 잊지 말고 꼭 챙기시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놈아! 너도 내 나이 되어봐라. 먹어야 하는 약이 산더미인데, 매일 그걸 먹자면 얼마나 지겨운지 알아?!”
“백세까지 사시려면 지겨워도 드셔야지요. 평생을 바쳐 이륙한 LK를 두고 돌아가시게요?”
“내 젊었을 적이랑 똑같은 네놈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네 놈, 아주 어릴 때부터 날 안 무서워했어. 다른 놈들은 내 얼굴만 봐도 무서워서 울음부터 터뜨렸는데, 네놈은 조막만한 손으로 내 얼굴을 때리며 꺄르르 웃기에 바빴지. 내 그때부터 알아봤다. 장보살도 내 뒤를 이을 놈으로는 네놈이 가장 적임이라고 했었고.”
장 보살이 바로 한녹영의 외조모다.
“전 그분을 뵌 기억이 없는데, 그분이 절 보셨던 겁니까?”
“네가 아주 어렸을 때니까 그렇지. 장보살이 널 보고 옛날에 태어났으면 왕이 될 상이라고 했다.”
왕이 될 상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장보살을 언급하실 때의 할아버지 얼굴은 꼭 첫사랑을 생각하는 사내 같아집니다. 혹시 몰래 마음에 품으신 겁니까? 저한테만 살짝 말씀해보세요. 할머니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실없는 놈! 내 평생 여자는 네 할머니뿐이야. 조강지처는 네 할머니. 애인은 일! 애인 때문에 네 할머니가 많이 외로워했지. 장보살은 조언자였고. 곱긴 했지. 아주 드문 미인이라 어떻게 한 번 재미라도 보려다 불호령 맞고 나자빠진 놈들은 많았어. 갑자기 잠적해서 잘 살고 있나 모르겠네. 내가 그사람에게 빚이 많은데.”
드문 미인이었다니 한녹영이 외조모의 미모를 물려받은 건가. 신기도 있는 모양인데, 외조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 그 분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말씀은 자주 하셨습니다.”
“그거 말고도 빚이 있지.”
“어떤 빚입니까?”
그러고 보니 조부가 종종 장보살에 대한 얘기를 하며 빚이란 단어를 쓰곤 했었다.
“네놈은 알 거 없다. 얼굴 봤으니 이만 가보고.”
병실에 온지 고작 십 분 정도 되었을 뿐인데 강정석은 벌써 가보라며 강준일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까 주애리는 축객령이 섭섭해 파르르 떨었지만, 워낙 이런 성격인 걸 알고 있는 강준일은 여전하시군,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손자 얼굴이 반갑지도 않으십니까? 벌써 내쫓으시게요.”
“당연히 반갑지. 네 놈 얼굴이야 훤칠하니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거든. 하지만 네놈이 가야 내도 퇴원할 것이 아니야.”
“벌써 퇴원하시려고요?”
“이놈의 병원 지겹다. 김원장 잔소리도 지겹고. 같이 있으면서 퇴원 말리지도 않았다는 오해 듣기 싫거든 휑하니 가거라. 내는 딱 두 시간만 버티다 퇴원하려니.”
강준일을 견제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강정석 또한 잘 알기 때문에 배려 차 한 말이었다. 함께 있을 때 퇴원하면 강준일에게 득달같이 따질 종자들이 몇몇 있었다. 누가 뭐라 하건 귓등으로 흘리고 말 성격인 건 알지만, 바쁜 손자에게 성가신 일거리를 넘겨주긴 싫었다.
“정말 퇴원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왕 들어온 병원이니 며칠 푹 쉬시다 퇴원하시지요.”
“내는 여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오히려 더 병이 나. 사업 땜에 바쁜 놈 오래 붙잡고 있을 마음 없다.”
강정석의 결정이 단호했다. 말려봤자 입만 아플 뿐, 누가 뭐라 해도 본인 고집대로 할 분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강준일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출근하지 마시고 반드시 집에서 푹 쉬십시오. 할아버님 안색이 크게 나빠 보이진 않지만, 연세가 있지 않습니까? 하루만이라도 쉬세요.”
퇴원 즉시 회사로 달려갈 생각이었던 강정석이 끙 하고 신음성을 냈다.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후에도 강정석은 하루가 멀다 하고 회사로 달려가 임원들을 불러 모아 이런저런 참견하길 즐겼다. 하지만 오늘 하루 쉬라는 말까지 무시하자니 다 큰 손자 놈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놈들은 다 만만한데, 저놈의 눈치는 한번씩 보게 된단 말이지. 고얀놈. 할애비가 손자 눈치를 보게 만들다니. 속으로 투덜대는 강정석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난 놈은 난 놈이야. 암, 내 뒤를 이을 놈이면 저래야지.
“그리하마.”
“약속하신 겁니다.”
“약속한다니까.”
강정석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강준일은 기세등등한 조부의 기세에 웃음을 흘렸다. 목소리를 저리도 크게 내시는 걸 보니 정말로 정정하시군.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녁때 집으로 들를게요.”
“그래라.”
강준일이 조부를 향해 인사를 한 후 병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한성준이 곧장 다가왔다.
“아침 일찍 한녹영씨가 실려 온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야? 한녹영이 실려 오다니?”
강준일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 8시경 매니저 등에 업혀 병원에 왔고, 현재 11층 병실에서 수액을 맞으며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 합니다.”
“심각한가?”
“과로인 것 같습니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과로라니······. 하긴 뼈밖에 없는 그 몸으로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하자니 당연히 무리가 갔을 터. 지금껏 쓰러지지 않고 버틴 것만 해도 장한 일이었다.
“기자들은?”
“없습니다. 매니저가 말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해달라고 병원 측에 신신당부 한 모양입니다. 가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강준일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1층을 눌렀다.
11층에 도착해 막 내리려는데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퇴원한다니까! 오후에 스케줄 있잖아!”
한녹영의 목소리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나오더니 내 앞에 픽 쓰러져서 간담을 사늘하게 만들어놓고 퇴원한다는 말이 나오냐?!”
이번엔 한녹영의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자 하니 한녹영이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강준일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오후 스케줄은 소화해야 할 거 아냐?”
“이 와중에 무슨 스케줄. 네가 입에 거품을 물고 뜯어말려서 취소 못했는데, 그냥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오늘 하루는 병원에 있자. 응?”
“그렇게 되면 언론에 내가 입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거고, 기자들 몰려올 거고, 괜히 더 피곤해져. 한녹영 소속와의 불화로 입원, 뭐 이런 기사 터지는 거 보고 싶어? 지금까지는 내가 소속사 옮기는 일에 대해서 특별한 기사가 안 터졌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가능하면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 없이 조용히 계약종료일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한녹영의 심정이었다. 가뜩이나 도망자 투자 건으로 골치 아픈 마당에 또 다른 일로 골머리를 썩고 싶진 않았다.
“이러다 너 몸 상해.”
“이 정도로는 끄떡없어.”
끝내 고집을 부리는 한녹영을 보며 박상호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저 고집을 누가 말려. 한녹영은 제 걱정으로 반나절 새 새까맣게 변한 박상호의 얼굴을 미안하게 보며 정말 괜찮다는 듯 웃었다.
“난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
박상호가 항복 선언을 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삐친 마음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오늘은 오후 스케줄이라 오전에 피부관리나 받고 오려고 일찍 일어나 침실을 나왔다가 부엌에 서있는 박상호를 보고 “형.” 하고 부른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시야가 새까매지며 풀썩 쓰려졌는데, 일어나보니 병원이었다. 의사 말이 그저 과로니 푹 쉬면 된다고 했는데, 현재 한녹영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스케줄 취소했다가 회사로부터 트집 잡히기 싫었다. 가뜩이나 지난 번 김동우 파티 건으로 하영택이 얼마나 개지랄을 떨었는데. 한 번만 더 제멋대로 굴면 고소를 한다는 둥 난리도 아니었다. 거기다 마음이 번잡해 느긋하게 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우선 집에 들렀다가 스케줄······ 어?”
입을 댓발은 내민 채 구시렁대는 박상호를 향해 살살 달래는 투로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려던 한녹영이 강준일을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강준일이 왜 여기에?
“강 대표님? 여긴 웬일이세요?”
한달음에 달려간 한녹영이 강준일의 코앞에서 주춤했다. 그의 표정이 예전처럼 싸늘했던 것이다. 18도로 맞춘 에어컨 송풍구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녹영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오랜만에 보는 듯한 냉한 얼굴에 낯설음마저 느껴졌다.
‘낯설다고? 저 표정이?’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저를 보는 강준일의 얼굴이 조금씩 풀렸던 것 같다. 표정 변화가 크게 없는 사람이라 단번에 확 느끼진 못했는데, 오늘 보니 알겠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절 보던 강준일은 눈빛이 많이 말랑해졌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전에 장현재의 요구로 접근했을 때 딱 저런 눈빛이었는데. 과거로 돌아온 직후 헬스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오래전 일도 아닌데 아주 먼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 좀 우스웠다.
괜히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하는 한녹영을 본 강준일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조부님이 입원하셨거든.”
“혹시 조부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요?”
그래서 표정이 안 좋나?
“아니. 정정하시지. 방금도 일이나 하러 가라며 내쫓긴 참이야.”
“다행이네요.”
“듣자 하니 퇴원할 모양이던데?”
“네. 수액도 다 맞았고, 오후에 또 스케줄이 있어서 이만 퇴원하려고요.”
“한녹영씨 직업이 언제부터 의사로 바뀌었지?”
“네?”
“퇴원 여부를 결정하는 건 의사의 일이지 않나?”
아직 허옇게 뜬 얼굴을 하고 퇴원이니 뭐니 스케줄이니 뭐니 하고 종알대는 한녹영의 태도가 짜증났다. 강준일은 당장 한녹영의 마른 손목을 잡아 병실 침대에 처박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꾹 눌렀다.
“퇴원 여부는 환자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죠.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알고요.”
“의사의 말을 듣는 편이 좋을 텐데. 한녹영씨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꼭 몸속에 병을 키우고 있던 경우가 많더군.”
“전 진짜 괜찮거든요. 그리고 지금 마음이 많이 불편해서 설사 쉰다고 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을······.”
말을 하다 말고 한녹영이 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제 주변에 있었다. 돈의 바다에서 헤엄칠 사람이. 아주 가까운 지인은 아니지만, 따지자면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강 대표님.”
“왜?”
“저 돈 좀 빌려주세요. 한 30억만요.”
박상호가 경악한 표정을 짓더니 잽싸게 한녹영의 팔을 잡아끌며 “너 미쳤어?”하고 속삭였다. 한녹영이 머쓱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다짜고짜였나. 하지만 요새 틈만 나면 투자금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이왕 내친걸음이다.
“다시 말할게요. 저한테 빌려달라는 것이 아니고 제가 찍기로 한 드라마에 투자해주세요.”
“정우에서 제작한다는 도망자 말인가? NB에서 발을 뺐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
“네. 그래서 지금 드라마 자체가 엎어질 판이에요. 저 이거 꼭 찍고 싶거든요. 대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진짜 잘 빠졌어요. 차에 비교하면 페라리 급이거든요. 분명 떠요. 투자하시면 절대 손해 보지 않을 겁니다. 회사 차원에서 한 번만 고려해주시면 안 될까요?”
“투자라······.”
“안 될까요?”
입술을 깨문 한녹영이 박상호와 한성준을 번갈아본 후 대뜸 강준일의 손을 잡아 좀 전까지 제가 있던 병실 안으로 잡아끌었다.
“형은 한 실장님이랑 거기 있어!”
그리곤 따라오려는 박상호를 향해 외친 후 문을 닫아버렸다.
“납치를 하려면 좀 더 으쓱한 곳에서 은밀하게 해야지.”
“납치 아니거든요! 투자 얘기를 좀 더 하려고요. 저한테 미래를 보는 신기······ 가 있다는 건 대표님만 알고 있거든요. 상호 형이랑 한 실장님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신기가 있다는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에 찔려서 온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지만, 할 수 없었다.
“한녹영씨와 나 단 둘만의 비밀이라 이거지.”
한녹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강준일이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니 나쁘지 않군.” 하며 잠시 웃었다.
“그래서 본론은?”
“제가 보장할게요. 도망자 확실히 떠요. 평균 시청률 35퍼센트 보장합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시장에 판권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어요. 총 수익이······ 어, 그러니까······.”
얼마였더라. 분명 도망자가 총 벌어들인 수익에 대해 한동안 언론 떠들어댔는데 진짜 상상도 못한 액수였다. 2200억이었다. 100억을 들여 제작한 드라마가 2200억의 수익을 냈으니 22배의 수익을 낸 것이다.
한녹영이 왼손 2개, 오른손 2개를 펴 보이며 강준일의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가슴이 살짝 닿았을 정도로 가까이, 그리곤 까치발을 하고 혹 누군가 엿들을 새라 그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수익률 22배 보장할게요. 절 믿고 투자하세요.”
도박판에서 물주의 올인을 유도하는 꽃뱀 같은 말투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지금 제 말투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
강준일은 말이 없었다. 헛소리 하지 말라는 둥, 그딴 허풍을 믿을 것 같냐는 둥 한녹영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저 굳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한녹영도 까치발을 한 채 굳었다.
‘심장······ 소리가······.’
아주 살짝 닿아있는 가슴을 통해 들려오는 강준일의 심장 소리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들었다. 그래서 한참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균형을 잃고 비틀하자 강준일이 허리를 감아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한녹영씨 몸에 균형 감각이 고장 난 거 아닌가? 왜 걸핏하면 비틀거리지?”
“고장 안 났거든요. 까치발을 오래 하고 있었더니······ 그러게 왜 대답을 안 해요? 내 말 안 믿겨요?”
한녹영이 강준일의 품에서 벗어나며 적반하장 격으로 큰소리를 쳤다. 아씨, 왜 긴장되고 난리야.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도 좀 이상하게 뛰는 것 같았다.
“우리 둘이 엉켰다는 말은 단번에 믿더니.”
긴장감을 숨기려고 더 크게 투덜대자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안 믿는다고는 안 했는데.”
“그럼 믿는 거죠?”
“믿는다고도 안 했고.”
한녹영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또 말장난! 나 한 번만 믿어보라니까요? 대표님과 나 사이에 30억이란 돈을 그냥 막 투자할 정도로 신뢰감이 쌓인 건 아니지만······ 날 못 믿겠으면 외할머니 이름이라도 걸까요?”
“굳이 할머니 이름 걸 필요 없어. 좋아. 직원들 불러서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지.”
이미 회의를 끝냈지만 강준일은 이제야 고려해보겠다는 둣 의뭉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한녹영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음 지었다. 한녹영의 미소에서 꿀이 떨어진다고 언론에서 떠들어대더니,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입안에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단 케이크를 머금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정말이세요?”
“우리 사이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 다정하게 대해야 할 사이긴 하지만.”
강준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투자하겠다고 확답한 건 아니니 미리 기대감은 갖지 말도록. 그저 직원들을 불러 의논해보겠다고 했을 뿐이니까.”
“그것만 해도 충분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안목 있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투자해도 좋을 거라는 결론을 낼 테니까요.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표님 권위로 콱 눌러버려요. 음, 투자 건이 성공하면······· 제가······ 음······.”
고마움의 표시로 뭔가 해주고 싶은데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한테는 뭘 해줘야 하나? 강준일이 제게 원하는 바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더 고민이 컸다.
“오늘 하루 입원해.”
“네?”
“도망자에 대한 투자 건을 회의에 올리는 조건이야.”
“그게 어떻게 조건이 돼요?”
“투자하기로 결정했는데, 촬영 전 한녹영씨 건강이 나빠져 드라마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해지지 않겠어?”
“저 건강합니다. 절대 촬영에 차질주지 않아요.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촬영을 기다리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더더욱 건강관리를 해야지. 내 조건이 싫다면 투자 얘기는 없던 일로······.”
한녹영이 미련 따윈 없다는 태도로 냉정하게 돌아서는 강준일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할게요! 하루 입원!”
투자 건이 해결되는 마당에 그깟 하루 입원이 대수랴. 그제야 강준일이 보일 듯 말 듯 슬쩍 웃었다.
“좋아. 그래야 착한 아이지.”
“저 아이 아니거든요. 스물일곱, 해 바뀌었으니 이제 스물여덟이네요. 대표님은 서른여섯인가요?”
“내 나이도 몰랐나?”
정말 몰랐다면 서운할 것 같다는 투였다. 한녹영이 퍼뜩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알고 있습니다. 확인해본 거예요.”
“맞아. 서른여섯.”
“여덟 살 차이네요.”
제가 한 살 때 강준일은 아홉 살. 제가 열 살 때면 강준일은 열여덟 살. 지금 만나서 다행이다. 훨씬 전에 만났더라면 강준일 눈에 전 완전 꼬꼬마였을 테니까.
“그렇군.”
두 사람이 무의미한 대화를 자속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한성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 끝나셨습니까? 회사로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만.”
사무적으로 말하는 한성준의 뒤로 얼굴에 궁금증을 가득 담은 박상호가 안을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준일이 병실을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녹영씨 휴대전화 고장났나?”
“아니요. 말짱한데요.”
자주 꺼두긴 하지만 성능은 말짱하다.
“난 또. 고장이라도 났나 했지.”
“말짱해요.”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잠꼬대까지 헤가며 조르기에 알려줬더니만.”
한녹영이 눈을 깜박였다. 기껏 연락처 알려줬더니 왜 연락 안하냐는 의미인가?
“전화번호부 확인은 한 건가?”
“했죠. 오해가 취미인 남자가 뭡니까? 그냥 이름으로 입력해두면 될 걸.”
“나더러 걸핏하면 오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요샌 제가 좀 바쁘고요. 한가해지면 연락할게요.”
괜히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 거만한 척 말해보았다.
“나 역시 한녹영씨 못지않게 바쁜 몸이라 연락을 다 받아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든가.”
무심하게 말한 강준일이 병실을 나갔다.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영 헷갈렸다. 연락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휴대전화를 꺼내 강준일 연락처의 이름을 ‘오해가 취미인 남자‘에서 ‘아리송’으로 바꾸고 있을 때 박상호가 호기심 가득한 수달 같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둘이서 무슨 얘기 한거야?!”
“도망자에 대한 투자 건 고려해보겠대.”
“진짜야?!”
“응. 진짜. 회의에 올려보겠대. 내가 이거 대박이라고, 꼭 성공한다고 약 발라서 될 것 같기도 해.”
환하게 웃는 한녹영을 멍하니 보던 박상호가 다리가 다 후들거린다는 듯 비틀비틀하더니 소파에 털썩 앉았다.
“LK엔터에서 투자라니. 이거 성꽁하면 진짜 대박이야. LK엔터 투자라는 제목만으로도 사람들 기대감이 장난 아니게 폭발할 걸? 잘하면 신 작가 신작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겠어.”
“잘하면, 이라는 전제가 왜 붙어? 반드시 뛰어넘어.”
“어. 그럴 것 같다. 갑자기 막 흥분된다. 서광이 막 비치는 것 같아.”
박상호는 흥분돼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주먹까지 쥐고 아이처럼 붕붕 휘두르다 잊은 것이 떠오른 얼굴로 한녹영을 보았다.
“근데 왜 강 대표만 은밀하게 끌고 가서 얘기한 거야? 나랑 한 실장님은 왜 못 들어오게 했고? 누가 보면 둘이 밀회라도 즐긴 줄 알았을 거야.”
“미, 밀회는 무슨! 그, 그게······ 아, 형 나 오늘 입원할 거야. 스케줄 변경해.”
“진짜냐?”
“응. 내일 아침에 퇴원할게.”
한녹영이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둔 후 침대에 도로 누웠다. 스케줄 조정을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며 박상호가 만족스레 웃었다.
“잘 생각했다. 안 그래도 너 얼굴이 벌건 게 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내심 걱정이었거든.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난 스케줄 조정하고 올게.”
“응. 그럴게.”
박상호가 병실을 나가자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한녹영이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벌겋다고? 설마 했는데 진짜 거울에 비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야?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벌겋지? 열이 다시 오른 건 분명 아닌데. 영문을 모르겠다. 가만히 제 얼굴을 바라보던 한녹영이 볼을 긁적이며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괜찮다고, 제 몸은 건강하다고 큰소리 뻥뻥 쳤지만 사실 피로가 한계까지 쌓인 상태였다. 오죽하면 쓰러지기까지 했을까. 데뷔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 박상호가 스케줄 조정을 하러 간 사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한녹영은 서늘한 손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오싹한 감각에 번쩍 눈을 뜨고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냥 누워있어.”
다정한 몸짓으로 제 가슴을 마는 사람은 장현재였다. 한녹영은 도리질 치며 고집스레 앉았다. 오후 스케줄을 취소했으니 당연히 회사에 제 상황을 전해야 했을 테고, 그럼 또 당연히 장현재에게도 말이 들어갔을 거다. 그래도 찾아올 줄은 몰랐다. 지난번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만나지게 되는 상황이 불편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어쩐 일이야?”
“무슨 말이 그래. 서운하게. 네가 과로로 쓰러졌다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아, 입조심은 시켰다. 기사 나가봤자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응.”
그건 한녹영도 바라는 바라 다행이었다.
“스케줄 조정 좀 하라고 해야겠다. 과로로 쓰러질 정도로 무리한 스캐줄이라니.”
장현재가 안쓰럽다는 듯 쯧 혀를 찼다. 한녹영은 저를 걱정하는 장현재를 물끄러미 보았다.
“스케줄 조정은 안 해도 돼. 오늘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남은 스케줄은 다 소화할 거니까. 일전 김동우 파티 같은 곳에만 안 보낸다면 계약 종료 전까지 가능한 일은 다 하고 떠날 거야.”
“김동우 파티 건은 미안하다. 내가 사과할게. 미국 출장 가 있는 동안 하 실장이 나 몰래 일을 벌인 거야. 네가 그런 난잡한 파티에 갈 급은 아닌데 말이야. 넌 날 떠날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널 값싸게 만들 마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한녹영이 영혼 없이 건성으로 말했다. 장현재의 말에 신뢰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장현재는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제가 김동우의 파티에 불려갔던 데에는 분명 장현재의 허락이 있었을 거다. 박상호도 그렇게 말했었고. 한녹영의 눈에 가득한 불신을 읽은 장현재가 속으로 혀를 찼다.
“네가 신은주 작가 신작 대신 선택한 드라마가 요즘 좀 힘들다는 말이 들려오던데.”
“투자 문제가 좀 있긴 해.”
“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신 작가 신작은 아무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다던데.”
“도망자 투자 건, 형이 손 쓴 거 아냐?”
한녹영의 물음에 장현재가 인상을 쓰며 부인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수로. 너 설마 내가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응. 생각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형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생각해.”
한녹영의 말투가 단정적이었다. NB와 장현재 사이에 선이 닿아있는지 알아 볼까, 라고 했던 박상호의 말을 거절한 건 내심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백퍼센트였다. 장현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날 대체 날 어디까지 밑바닥으로 보는 거야?”
“옛날에는 형이 나한테 신이었어. 형의 말은 내게 절대적이었고. 그런데 지금 형은 내게 점점 실망감만 주고 있어. 루머 건도 그렇고, 파티 그렇고, 투자 건도······ 형이 방해하면 할수록 난 더더욱 실망하게 될 거야. 솔직히 이미 형에 대한 신뢰는 거의 바닥이야. 이젠 더 이상 형을 사랑했던 내 마음을 쓰레기로 만들진 말아줘.”
“난 여전히······ 당혹스럽다. 갑자기 변해버린 널 감당하기 힘들어.”
“감당할 필요 없어. 말 잘 듣는 인형이 필요한 거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
이미 찾았겠지만 말이다. 주민성 말이다.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한녹영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장현재가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시간이 흐를수록 절 밀쳐내고, 저와의 사이에 싸늘한 벽을 쌓는 한녹영이 당혹스우면서 화나고, 배신감이 들어 분노가 일면서도 한편으로는 버림받은 개가 된 듯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누구도 널 대신할 순 없을 테니까.”
“이상하지. 그저 마음을 달리 먹었을 뿐인데 예전에는 설탕처럼 달았던 형의 모든 말들이 지금은 쓴 포도처럼 느껴지니······.”
그때 문이 쾅 열리며 잔뜩 골난 표정의 하영택이 들어왔다. 그는 위협적으로 침대로 다가서더니 한녹영을 향해 협박조로 말했다.
“은혜도 모르는 새끼가 어디서 그딴 소리를 해대? 수렁에 빠진 놈 건져줬더니 뭐? 입조심 해! 이 건방진 새끼야!”
한녹영이 겁먹으라는 듯 의도적으로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 위협적인 몸짓을 하고 있는 하영택을 한심하게 보았다.
“입이 아프도록 주장해대는 그 은혜라면 이미 충분히 갚고도 남았을 텐데. 수익의 절반을 가져갔으니 그간 내가 벌어준 돈 순수익으로만 따져도 수십억이 넘잖아.”
“터진 주둥이라고 막 지껄이네? 쓰레기로 굴러다니던 놈 주워서 자금의 스타로 만들어준 게 누군대! 고작 수십 억? 수백억이라도 모자라, 이 새끼야! 내가, 이 하영택이 젤로 못 봐주는 새끼들이 바로 은혜도 모르는 새끼야. 밤길 조심해라. 어느 날 갑자기 시퍼런 칼이 네 배때기를 쑤실 수도 있으니까.”
“하영택, 너나 조심해. 깡패 근성 못 버리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다 콩밥 먹지 말고.”
“뭐! 이 새끼······.”
“그리고 한 번만 더 네 멋대로 돈 받아 처먹고 날 그딴 쓰레기 같은 파티에 보내기만 해. 계약 종료 앞두고 분란 일으키기 싫어서 어지간한 일은 다 해주고 있었더니 날 물로 봐? 양아치 새끼가 양아치 짓만 해대고 있어. 그리고 뭐? 쓰레기로 굴러다니던 놈? 누가 할 소릴. 쓰레기는 너 같은 놈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이, 이, 이, 창녀 같은 새끼가!!!”
한녹영의 독설에 하영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잔뜩 모욕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만해!”
장현재가 나직하게 말하자 당장이라도 한녹영을 구타할 듯 험악한 기세있던 하영택이 씹, 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한녹영은 저를 노려보는 하영택의 시뻘건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오히려 네깟 놈이 협박해봤자 무섭지 않다는 듯 코끝으로 비웃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김동우 파티 건으로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만 간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이 바닥 만만한 곳 아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아무리 넘어지고 굴러 온몸이 피범벅이 된다 해도 안 돌아가.”
“난 돌아올 거라 믿는다.”
한녹영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말한 장현재가 먼저 병실을 나갔고, 뒤이어 하영택이 시퍼렇게 날선 칼처럼 한녹영을 노려보며 “씹새끼, 두고 보자.” 하고 말하곤 휙 나가버렸다. 고작 5분가량 대화한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진 기분이 들어 다시 침대로 눕는데 박상호가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녹영아! 괜찮냐?!”
“괜찮아.”
“너 먹일 도시락 사러 갔다 오다가 병실에서 장 대표랑 하영택 그 자식 나오는 거 봤다. 진짜 별일 없었어?”
“아무 일 없었다니까. 나 봐. 말짱하잖아.”
“그럼 다행이고. 스케줄 조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연락하면서도 내심 찜찜하더라니. 왜 오고 난리야. 그것도 하영택까지 달고. 밥이나 먹자.”
트레이를 올린 박상호가 사들고 온 도시락을 풀었다. 구운지 얼마 안 되어 따뜻한 장어가 듬뿍 올라간 장어덮밥 도시락이었다. 생강, 단무지, 세가지 나물 무침, 명이 나물과 샐러드까지 반찬도 제법 골고루 있었다. 양념을 묻혀 구운 장어는 윤기가 돌아 비주얼이 제법 훌륭했다. 하지만 한녹영은 못마땅하게 투정을 부렸다.
“나 장어 별로인데.”
“그냥 먹어! 원기회복엔 이만한 것도 없어. 낼 새벽에 수산시장 가서 낙지 사와서 연포탕 해줄 테니 그것도 먹고.”
장어는 기름져서 별로지만 박상호의 정성을 생각해 더 이상 군말 않고 젓가락을 집었다.
“형도 먹어.”
“어. 먹자.”
“스케줄 조정은 무리 없이 된 거야?”
“처음엔 갑자기 이러면 어쩌냐고 하더니 너 병원에 입원했다니까 받아들이더라고. 대신 모레 오후에 억지로 껴넣었다.”
“응. 잘했어.”
싱긋 웃은 한녹영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밥 위에 올라간 장어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아 1/3 정도는 박상호의 밥 위로 넘겨주었다. 그는 “너 먹지 않고!” 하며 눈을 부릅뜨긴 했지만 배불러, 라고 우는 소리를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다 먹어주었다.
배부르니 또 졸려서 다시 한잠 자다 일어나니 밤이었다. 한녹영은 9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곤 휴대전화를 집어 전원을 켰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로부터 온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는 읽지도 않고 삭제해버린 후 강준일의 번호를 불러냈다.
지금쯤 토근했을 테니 연락이나 한 번 해볼까. 어쩌다 보니 오늘 되게 한가한 날이 되어버렸으니까. 연락처 받아가 놓고 왜 연락 안하느냐 말하기도 했었고, 마침 종일 자다 일어난 탓에 더 이상 잠도 안오고 심심하기도 하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변명을 중얼중얼한 한녹영이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꾹 누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냥 꾸욱······. 엄지만 펼치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안으로 말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소파 위에서 자고 있던 박상호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너 뭐 하냐?”
갑작스런 목소리에 당황한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깨, 깼어?”
“어디 전화하려고?”
박상호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일어나더니 박상호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숨도 쉬지 않고 500ml를 원샷했는데, 아마 목이 말라 깬 모양이었다. 장어가 짰나, 하고 중얼거리는 소릴 들으니 확실했다.
“아니야. 전화는 무슨. 내가 전화할 데가 어디 있다고. 마저 자.”
“어, 너도 더 자라. 내일부터는 또 한동안 강행군이다.”
“어. 잘 자.”
한녹영이 휴대전화 전원을 끄고 다시 누웠다. 그리곤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참. 그깟 전화가 뭐라고 통화 버튼을 못 눌러 끙끙댄 건지. 심지어 강준일과의 통화가 처음도 아니잖아?
그런데 그땐 빚을 갚는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목적이나 용건이 없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막막했다. 얼굴을 대면하면 말이 꼬박꼬박 잘도 나오는데, 짝사랑 상대의 전화번호를 힘겹게 알아낸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좋아하는 연예인의 번호를 알아낸 골수팬도 아니면서 왜 긴장감이 확 들며 좀처럼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잠깐 사이 다시 잠들었는지 박상호가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오후 내내 잔 덕분에 정신이 말똥거라는데 기관차 지나가는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니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한녹영은 침대에서 내려와 패딩을 걸치고 병원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야외 정원이 있다고 들어 잠깐 콧바람이나 쐬자 싶었던 것이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옥상 정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녹영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난간으로 향했다. 밤 날씨가 얼음 같아서 절로 몸이 덜덜 떨렸지만, 바로 내려가고 싶진 않았다.
“아이야.”
딱딱 턱 떨리는 소리까지 내가며 덜덜 떨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 한녹영을 불렀다. 화들짝 뒤를 돌아보니 환자복을 있은 노인이 한녹영을 향해 손짓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지 알았는데? 한녹영이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어르신 춥지 않으세요?”
노인은 달랑 환자복만 걸친 채였다. 젊은 제가 덜덜 떨릴 정도인데, 노인이 환자복만 입고 있으니 보기 안 좋아 패딩을 벗어주려고 하자 만류한다.
“되었다. 내 열이 뻗쳐서 찬바람 좀 쐬려고 올라온 거니까.”
“왜요? 무슨 일로 열이 뻗치셨는데요?”
심통이 가득한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서 슬쩍 웃으며 물었다.
“내 오늘 오후에 퇴원하려고 했더니 주치의란 놈이 극구 반대하지 뭐냐. 호랑이 같은 손자 놈도 허락한 일을 제깟 놈이 뭐라고! 호랑이 같은 손자보다 더 호랑이 같은 며느리까지 동원해서 말이야! 꼼짝없이 하루 더 갇혀있게 되어 얼마나 답답하고 열이 뻗치던지. 자다가 화가 나 뛰쳐나온 거다. 근데, 아이야.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느냐?”
노인이 한녹영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한녹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TV에서 보셨을 거예요. 제가 연예인이거든요.”
“TV? 난 TV는 뉴스만 보는······.”
문이 멀컹 요란하게 들리더니 곱게 생긴 중년 여인이 “아버님!”하고 외쳤다.
노인이 들켰다는 듯 혀를 차더니 돌아섰다. 그리곤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 겉 옷도 없이 나가신 거냐고 잔소리를 해대는 중년 여인을 따라 가버렸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다시 야경이나 볼 겸 난간으로 다가간 순간이었다.
“야, 한녹영!! 너 말도 없이 나가면 어떡해!!”
어느새 깬 건지 박상호가 호랑이 얼굴로 옥상에 나타났다. 움찔 어깨를 움츠린 한녹영이 “형 자고 있어서.”하고 변명하며 부랴부랴 그에게로 다가갔다.
“깨워서 말하고 나갔어야지. 네가 안 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내가 애냐? 뭘 놀라.”
병원에서 가봤자 어딜 간다고. 한녹영은 박상호의 잔소리를 건성으로 들어넘기며 병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찬바람을 쐰 탓에 더 잠이 안올 것 같았는데 이번엔 곧바로 잠들었다.
다음 날 오후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LK에서 투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역시나 한녹영의 휴대전화가 꺼져있어 박상호를 통해 연락을 해온 김현영은 거의 통곡하며 말했다.
ㅡ 아침에 LK에서 연락이 와서······ 흐윽······ 진짜 기대 안 하고 갔는데······ 투, 투자 해주겠다고······ 심지어 원한다면 최대 50억까지······ 흐으윽······ 한녹영씨 이제 우리 드라마 찍을 수 있······.
우는 건지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울음기가 가득한 음성이었다. 그래도 대충 알아들을 순 있었다. 한녹영이 눈을 크게 떴다. 최대 50억. 불안 반 희망 반의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이런 소식이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투자 결정을 해준 강준일뿐만 아니라 그의 직원들까지 한 번씩 꽉 안아주고 싶을 만큼 마음이 벅찼다. 더군다나 며칠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결정해주다니 고마웠다.
이제 됐어. 눈을 감았다 뜬 한녹영이 꺽꺽 소리까지 내며 우는 김현영을 다독였다.
“진짜 다행이에요. 작가님, 울지 마시고요.”
ㅡ 네, 네······ 고, 고마워요, 한녹영씨. 흐으으으. 으어어엉.
울지 말했더니 더 운다.
“제가 뭘요?”
ㅡ LK에서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이 투자 건 한녹영씨가 주선하신 거라고······ LK에서는 어제 오전에 이미 간급회의해서 결정했다고······ 언제 LK에 투자 요청한 거예요? LK와는 어떻게 서, 선이 닿아서······ 흐어어어엉. 얘기도 안 해주고. 한녹영씨 진짜 깍쟁이 같아······ 흐윽······ 요. 진짜 감독님이랑 나랑 둘이 장기라도 내다팔아야 하나 그러고 있었거든요. 정말 은인이세요. 한녹영씨는 정말 우리한테 복덩이······ 흐윽······ 에요.
“은인이라니. 과한 호칭이네요. 그냥 제가 차도영을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최대한 멋지게 뽑아주세요.”
ㅡ 걱정 마세요. 대본 다시 수정할 거예.요 차도영을 한국 드라마 역사상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드릴게요
“기대할게요. 그럼 촬영 일정 잡히면 연락주세요.”
ㅡ 네. 그, 흐윽, 그럴게요. 아······ LK에서 투자하기로 한 건 제작발표회 전에 터뜨리기로 했어요.
그러니 미리 말이 퍼지지 않도록 주의해달라는 뜻
같았다. 또 어딘가서 태클이 들어올지도 모르니 최대한 주의하고 싶은 심정 백분 이해한다.
“네. 입 꽉 다물고 있을게요.”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한 한녹영이 전화를 끊었다.
“김 작가 울던데?”
박상호가 웃으며 말했다. 한녹영도 짧게 웃었다.
“우는 게 다 뭐야. 거의 통곡하던데. 곧 제작사에서 연락 올 테지만, 늦어도 말경에는 촬영 들어갈 것 같은데 스케줄 조정 가능하지?”
“어. 당연하지. 혹시 몰라서 열흘 단위로 스케줄 잡으면서 1월 중순 이후로는 드라마 촬영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놨으니까 아무 걱정 말어. 흐으, 무려 LK의 투자라니. 막힌 속이 뻥 뚫린다. 십년 묵은 체중이 내려간 것 같어. 기사 나가면 관심도 폭발할 걸?”
“제작발표회 전에 화려하게 터뜨릴 모양이니까 형도 입 조심해.”
“알았어. 걱정하지 마. 강 대표 사람이 참 괜찮네. 유능한 사람인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인격도 아주 훌륭해.”
강준일에 대한 평가가 아주 후해졌다. 지금 박상호의 기세로 봐서 그의 신발을 닦으래도 닦을 기세였다. 사실 한녹영의 마음도 박상호와 크게 다르지 않있다. 진짜 눈앞에 있으면 강준일이 질색을 하건 말건 달려가 확 끌어안고 마구 부비부비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강 대표님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지.”
“어, 그래.”
사람이 도리는 해야지, 하며 박상호가 얼른 전화를 하고 오라는 듯 손짓했다. 한녹영은 휴대전화를 들고 구석으로 가 전원을 켰다. 그리곤 강준일의 번호를 불러내 어젯밤과는 달리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용건이 있으니 전화를 거는 일이 이렇게 쉽다.
ㅡ 손가락 부러졌나 했더니 멀쩡한 모양이야.
신호가 3번 정도 울렸을 때 전화를 받은 강준일이 대뜸 말했다.
“제 손가락이 왜 부러져요? 어제 병원에서 푹 쉰 덕분에 오늘 컨디션 좋고, 다친 곳 없고, 물론 손가락도 말짱합니다.”
ㅡ 어제가 바로 한녹영씨가 말한 한가한 날이 아니었나?
아, 한가해지면 전화한다고 했던 말을 두고 저러나 보았다. 한녹영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제 전화하려고 했는데 용건도 없이 전화하자니 왠지 통화 버튼이 안 눌러지더라고요. 대표님과 제가 막 용건도 없이 통화할 만큼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친구도 아니고. 가족은 더더욱 아니며. 연인은 더더더더욱 아니니.
ㅡ 다정하게 대해달라는 요구는 잘도 하더니. 통화는 꼭 허물없는 사이하고만 하는 모양이지?
잠에 취해서 한 말은 좀 잊어주시고요. 은근 뒤끝 있는 거 아시죠?
ㅡ 은근이라니. 난 대놓고 뒤끝 있어. 한녹영씨, 나에 대해 다 알려면 아직 한참 멀었군.
제 입으로 인정하니 할 말이 없었다.
ㅡ 나하고는 꼭 용건이 있어야 통화가능하다는 한녹영씨, 오늘은 용건이 있나?
“네. 방금 제작사로부터 연락 받았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제멋대로 마구 들떴다. 봄날 공중을 붕붕 떠다니는 민들레 꽃씨 같았다.
ㅡ 그렇게 좋나? 목소리가 들뜬 것 같은데.
“너무 좋아요. 도망자가 제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실 거예요. 새로 시작한 제 삶의 첫 걸음 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드라마 찍을 수 있도록 투자해준 대표님이 얼마나 고맙고 또 예뻐 보이는지 몰라요. 앞에 계시다면 확 끌어안고 뽀뽀 백만 번 날리고 싶을 만큼······.”
흥분해서 막 말을 이어가다 뒤늦게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말을 한 거야. 뽀뽀가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준일을 상대로 그런 막말을······. 정색하며 한녹영씨의 뽀뽀 같은 건 필요 없어, 하고 쌀쌀맞게 말하겠네.
ㅡ 좋아.
“네?”
ㅡ 포옹에 뽀뽀 백만 번 좋다고.
예상과는 달리 강준일이 웃음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한녹영이 눈을 깜박거렸다.
“진짜 요새 약 하는 거 아니시죠?”
암만 생각해도 지난번부터 저를 대하는 강준일의 태도는 약을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태도였다.
ㅡ 한녹영씨 요구대로 해주고 있는 거라니까 왜? 싫어? 그럼 예전처럼 차갑게 독설만 날려줘? 일관성 있게 한 가지 태도로만 한녹영씨 대할 거니 어느 쪽으로 할 건지 선택해.
“다, 다정이요!”
한녹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쌀쌀맞게 내뱉는 독설을 듣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제게 다정한 강준일이라니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친 것처럼 어색해 죽겠지만, 둘 중 하나라면 다정한 쪽이 좋긴 했다.
ㅡ 조만간 밥 사. 허물 있는 사이에 뽀뽀 백만 번은 무리일 것 같으니.
“네. 밥 살게요. 차도 살게요. 얼마든지 살게요. 시간만 내세요. 원하신다면 술도 살게요.”
원한다면 장기라도 꺼내 줄 기세로 말하자 강준일이 웃었다.
ㅡ 좋아. 시간 넉넉하게 비워서 한녹영씨한테 풀코스로 얻어먹어볼까.
“얼마든지요.”
수화기 너머에서 한성준이 “대표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ㅡ 가봐야겠군. 곧 시간을 맞춰보자고.
“네.”
한녹영의 대답과 동시에 전화가 끊겼다. 또 먼저 인정머리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긴 했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는 달리 기분이 좋다는 생각만 들었다.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폴짝폴짝 뛰다시피 걷던 한녹영이 “어라, 잠깐만.”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김현영 작가가 “어제 오전에 긴급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하지 않았나? 빠른 투자 결정에 마음이 벅찼던 데다 김현영의 통곡 소리에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상하네? 제가 강준일을 만나 돈 좀 달라고 한 시각은 점심 무렵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긴급회의를 통해 도망자에 투자 결정을 했다는······.
한녹영이 강준일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ㅡ 할 말이 남았나?
그는 이번엔 곧바로 전화를 받았는데, 걷고 있는 듯 목소리가 흔들렸다. 주변의 소음도 간간히 들려왔다. 이동 중인 것 같았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까 작가님이 이상한 소리를 했던 것이 이제야 떠올라서요.”
ㅡ 무슨 소리?
“LK에서 이미 어제 오전에 간급회의를 통해 투자를 결정해두었다고 하던데요.”
강준일이 나직하게 웃었다.
ㅡ 이런, 들켰군. 이거 참 난감한 기분이야.
하지만 말과는 달리 전혀 난감하지 않은 말투였다. 한녹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럼 어제 병원에서 제가 돈 빌려달라고 하기 전부터 이미 투자를 결정해두었다는 뜻이잖아요.”
ㅡ 그런 뜻이지.
“그럼 어젠 감쪽같이 절 속인 겁니까?”
ㅡ 그런 셈인가?
“왜 그러신 건데요?!”
한녹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뽀뽀 백만 번 해주고 싶다는 말? 취소다. 어제 돈 빌려달라고 했을 때 ‘사실은 이미 투자하기로 결정했다’라고 해줬으면 좀 좋아?
ㅡ 더 크게 생색내려고.
“네?”
ㅡ 한녹영 씨 청에 응하는 형태가 생색내기 더 좋잖아. 이래봬도 내가 생색내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웃음기 가득한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멍한 얼굴로 입만 달싹달짝 하던 한녹영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은근 짓궂은 성격이란 건 최근 알게 되었지만, 이런 어린애 같은 면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더 크게 생색내려고 일부러 시침 뚝 떼고 있었다니······. 한녹영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되게 냉한 사람이라고 했던 말 취소할게요. 강 대표님 은근 재밌는 사람 같아요.”
ㅡ 한녹영씨가 나의 매력을 알아가는 모양이군.
“그러게요. 이러다 반해서 연애하자고 들겠어요.”
웃으며 말하다 속으로 으억,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아까부터 왜 이러냐. 입이 방정이라 자꾸 헛소리를 제멋대로 내뱉는다. 비틀대며 벽으로 다가가 벽에 머리를 쿵 박은 한녹영이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말이 그렇다는 거고요. 진짜 연애하자고 덤빌 일은 없을 테니 긴장하지 마세요. 저 촬영 들어가야 해요. 다음에 한 턱 제대로 낼 수 있는 날 골라서 연락드릴게요. 안녕히 계세요.”
한녹영은 강준일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제 말만 바쁘게 내뱉은 후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거울이 없어 지금 제 얼굴이 어떤지 못 보는데, 안 봐도 삔했다. 발갛게 달아올라 있겠지. 양 뺨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화끈화끈했다. 불에 그을린 듯 뜨거웠다.
한녹영아, 제발 입조심 좀 하자!
여전히 벽에 머리를 쿵 박은 채 스스로를 타박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었다. 한녹영이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네. 한녹영······.”
ㅡ 녹영아, 애비다. 요새 왜 이렇게 통화하기 힘들······.
“바쁩니다.”
쯧 혀를 찬 한녹영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곧바로 전원을 꺼버렸다. 방심 하고 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더니 귀가 썩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녹영아, 안 오고 뭐 해?”
잠깐 통화만 하고 온다던 한녹영이 한참 돌아오지 않자 박상호가 직접 찾으러왔다.
“형, 나 번호 바꿔줘.”
“어? 전화번호?”
“응. 휴대전화 꺼두는 것보다 번호 바꾸는 편이 쉬운데, 왜 그 생각을 못 했나 몰라. 어차피 일 관련 전화는 대부분 회사나 형한테로 가는데.”
바뀐 번호를 알려줄 사람도 정해져 있어 그리 성가실 것도 없는데, 왜 진작 번호 바꿀 생각을 못했는지.
“또 네 아버지한테 전화 왔었냐?”
“응.”
한녹영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박상호도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거머리들, 이라고 소리 없이 입만 방긋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 번호 바꾸자.”
촬영하러 가자, 하고 박상호가 한녹영의 등을 떠밀었다. 휴식시간이 끝난 것이 벌써 꽤 전이다. 한녹영의 걸음이 빨라졌다. 표정을 굳힌 채 급하게 촬영장으로 돌아가던 한녹영이 또 별안간 홀로 웃음을 터뜨렸다.
‘생색내려고 그랬다니······.’
저 말이 뭐라고 이렇게 자꾸 웃음이 나는 건지. 박상호가 절 실성한 사람처럼 보는 것도 모르고 한녹영은 저 혼자 웃고 또 웃었다.
그날 저녁 한녹영은 이동 중 잠시 짬을 내어 휴대전화의 번호를 바꾸었다. 코디들과 장한수에겐 밴 안에서 바로 바뀐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김현영과 김석형에겐 메시지를 보냈다. 그밖에 꼭 알려줘야 할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또 누가 있지?’
강준일 대표가 남았다. 한녹영은 그의 번호를 불러내 ‘한녹영입니다. 연락처 바꾸었습니다.’ 라는 간결한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두근대는 마음으로 답문을 기다렸다. 별 내용도 없이, 그저 연락처가 바뀌었다는 알림 문자일 뿐인데 답문을 기다라는 제가 좀 양심 없어 보이긴 하지만 강준일은 어떤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는지 궁금했다.
한 5분쯤 지났을까. 주머니 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진동해 서둘러 꺼내니 강준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접수.」
메시지 내용은 너무나 간결했다. 한녹영은 달랑 두 글자뿐인 메시지 창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뭐야, 이 성의 없는 답문은. 하지만 너무나 강준일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
“뭐?! 무슨 소리야? 도망자 세트 제작이 다시 시작되었다니?!”
주민성을 데리고 재경자동차 CF 미팅에 갔다 온 장현재가 하영택의 말을 듣고 언성을 높였다. 분명 제가 손을 써서 도망자의 가장 큰 투자자였던 NB의 마음을 돌려뒀다. NB가 빠지면서 다른 투자자들까지 흔들렸고, 정우는 수습을 위해 급하게 세트장 제작을 멈추었고.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다시 제작에 돌입했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주연 여배우도 제약 해지를 하니 마니 하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조만간 제작 자체가 엎어질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세트 제작 다시 재개했다는 말 듣고 좀 알아보니 투자자가 나선 모양이더라.”
하영택이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그 역시 도망자가 엎어지게 생겨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던 마당이었는데,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전
개되자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는 마음이었다. 드라마가 엎어져야 한녹영 그 새끼가 절망해 우는 꼴을 볼 텐데. 요즘 하영택은 한녹영 그 새끼가 얄미워 미칠 지경이었다.
“누구야? 그 쓸개 빠진 투자자가?”
제가 손을 써 NB에서 발을 뺐다는 사실을 들켜 가뜩이나 잔뜩 골질 중인 한녹영의 마음이 더욱더 돌아선 이 마당에 기껏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고운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재경 자동차 홍보팀으로부터 표정이 좀 딱딱하다는 지적을 받은 터라 연습실에서 표정 연습을 시킬 요량으로 데려온 주민성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자라는 드라마 세트 제작이랑 우리 회사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주민성이 물었다. 장현재가 그를 돌아보았다. LA의 제법 유명한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 중이던 주민성을 발견한 건 우연에 가까웠다. 키도 훤칠하고, 외모도 잘생겼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기본기도 있어 보여 한녹영과 다불어 한울을 대표할 톱배우로 키우면 되겠다 싶어 한국행을 꺼려하는 그를 여러 번 설득 끝에 데려왔는데 첫 CF부터 퇴짜를 맞아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 와중에 도망자에 새로운 투자자가 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으니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넌 연습실에 가서 표정 연습이나 더 해.”
“나 이래봬도 극단에 5년이나 있었던 나름 베테랑이에요. 그런데 표정이 딱딱하다니 그 담당자라는 사람 보는 눈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콘티를 주며 연기를 시켰을 때부터 ‘감히 나를 시험해?’ 이런 분위기를 풍겼던 주민성은 ‘본 촬영일까지 표정을 좀 더 유연하게 하는 연습을 해오세요.’ 라는 말에 기어이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극단에 몇년을 있었건, 스스로 연기를 잘한다고 자부하건 말건 한국에서는 신인 중의 생신인인 주제에 톱스타처럼 구니 어이가 없었다. 대형 톱스타라도 광고주 앞에선 함부로 못 구는 법인데
뭘 믿고 배짱인 건지.
“그 사람 보는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네가 알량한 실력 믿고 거만하게 구는 거다. 녹영이는 연기의 연자도 모른 채 이 바닥에 들어왔지만 첫CF 미팅에 갔을 때부터 감각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
카메라 테스트를 했던 CF 감독의 눈이 단번에 하트로 변했을 정도였다. 이 바닥 관계자들의 눈이 하트로 변할 때마다 보석을 발굴해 낸 기분에 무척 뿌듯했었고.
“또 그 소리. 형 걸핏하면 한녹영이랑 나랑 비교는데, 그거 되게 기분 나빠요. 한녹영 따위가 뭐라고. 두고 봐요. 금방 한녹영 따위 젖하고 내가 한울의 간판이 될 테니까. 아, 한녹영은 한울 나간다고 했던가. 그럼 빠른 시일 내에 한국 연예계의 탑을 먹어줄 테니까 기대하라고요.”
한녹영 이름에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던 주민성이 곧 제가 탑이 되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으스대는 태도에 하영택이 웃었다. 저거 볼수록 물건이라니까. 현재 놈이 보는 눈이 있어.
“그러자면 CF에서 대박을 터뜨려야 한다고 했지? 대중들에게 자동차 CF로 임팩트를 확 심어주고, 그 다음에 달콤한 그대 주연을 맡으면 어느 정도는 뜰 거다.”
장현재 말에 주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완전 잘할 테니까. 형은 나만 콱 믿으면 돼. 형 배신하고 떠나는 한녹영 따위한테 미련 갖지 않도록 해줄 테니까. 그럼 난 연습실에 가 있을 테니까 이따 나랑 저녁 먹기로 한 거 잊지 마.”
“함께 저녁을 하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을 텐데? 저녁은 네 일방적인 요구였을 뿐이지.”
“섭섭하게 왜 이래. 상이 있어야 더 열심히 노력하는 거 몰라? 나랑 저녁 먹는 거지? 오케이?”
눈을 찡긋 한 주민성이 껄렁대며 대표실을 나갔다. 부잣집 도련님이라 거만하고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아는 놈이지만 확실히 미운 구석은 별로 없었다. 거기다 한녹영 못지않게 저를 따르기도 하고. 처음에 ‘한국에 가자. 내가 너를 톱 배우로 만들어주마.’ 라고 했을 땐 미친놈 보듯 하더니 이젠 형, 형, 하며 어미 새를 따르는 새끼처럼 저를 따르는 중이었다. 자주 한녹영과 비교했더니 한녹영을 경쟁자로 생각해 좀 미워하는 경향은 있는 듯 하지만 말이다.
근데 저 놈, 허영심도 제법 있어서 CF와 드라마 주연 예정이라니 좋아 죽으려 하는데, 왜 한국행을 꺼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주민성은 제가 한녹영과 김아름 같은 유명한 배우를 데리고 있는 기획사 대표라는 걸 안 이후에도 꽤 애를 태웠다.
“볼수록 웃기는 놈이라니까.”
하영택의 말에 장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CF 데뷔에 맞춰 각 언론사에 뿌릴 보도 자료는 준비됐지?”
“어. 프로필 사진만 찍으면 돼. 최고 카메라맨으로 섭외해서 끝장나게 찍은 후 보도자료랑 같이 뿌릴 거야. 미국에서 활동하던 전도유망한 연극배우 출신이라고 말야. 얼마 전 헐리웃 스타들의 화보 주로 찍던 카메라 작가가 한국 들어왔다더라. 이름이 김춘영이라던가? 실력이 끝내준대. 헐리웃에서도 먹히는 실력이니 오죽하겠어. 기막히게 프로필 뽑을게. 그럼 외모도 좋고, 집안도 좋아서 여자들에게 먹힐 거야. 요샌 좋은 집안의 도련님이 훨 먹히다라고. 잘 데려 왔어. 보니까 저 자식도 한녹영 못지않게 네 빠돌이 기질을 보이던데, 대체 비결이 뭐냐. 아, 한녹영은 이제 네 빠돌이 아니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어가던 하영택이 한녹영의 이름을 언급하며 정색했다.
“한녹영 그 새끼는 이제 안 돌아올 것 같던데. 입에 사탕 물려주면서 살살 꼬드기면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병원에서 너한테 하던 말본새보니 텄더라. 그 새끼는 그만 포기해.”
자다 벼락이라도 맞았나. 장현재만 보면 개새끼처럼 꼬리 흔들기 바빴던 한녹영의 변화가 하영택도 어이없었다. 그간 워낙 장현재에게 충성 모드였던 지라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병원에서의 태도를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장현재를 보던 눈빛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꿀이 뚝뚝 떨어지던 눈동자에서 냉기가 흘렀지 않나. 남은 정이 거의 없는 눈빛이었다. 한녹영이 전 뒤집듯 순식간에 마음을 뒤집을 수 있는 놈인줄은 미처 몰랐다.
연예인 될 재목 보는 눈은 장현재가 더 뛰어날지 몰라도 배신하고 완전히 돌아설 놈을 알아보는 눈은 제가 더 나았다. 한녹영은 안 돌아온다. 완전히 홱 돌아섰다. 그러니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돌아오라고 할 필요 없이 이쯤에서 깔끔하게 접는 편이 낫다는 것이 하영택의 생각이었다. 물론 곱게 보내줄 마음은 없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 녹영이가 이 바닥의 험한 꼴을 아직 못 봐서 그렇지, 넘어져서 절망하고 힘든 걸 알게 되면 돌아올 수밖에 없어.”
힘들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돌아갈 곳이라곤 제 곁밖에 없을 테니까. 우선 한녹영이 처음으로 제 의지로 선택한 드라마부터 엎어버리려고 NB에 손을 쓴 건데······. NB를 대신할 투자자가 생겼다? 30억이나 되는 돈을 단번에 움직일 만큼 큰 곳은 거의 다 체크했는데, 걸리는 곳은 없었다.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장현재가 몸을 일으켰다.
“맘 떠난 놈 돌아오면 받아주려고? 내 지론이 바로 한 번 배신한 놈은 또 배신한다야. 배신한 놈은 아예 철저히 망가뜨려서 본보기로 삼는 편이 낫지, 괜히 아량 베푼답시고 받아줘 봤자 또 뒤통수나 맞아.”
“여기가 건달판이야? 그 건달 근성 버리라고 했지? 녹영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 분명히 말하는데 녹영이 건드리기만 해.”
차갑게 하영택을 노려본 장현재가 휙 나가버렸다. 하영택이 그런 장현재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지켜보았다. 지가 언제부터 한녹영한테 일편단심이었다고 떠난 놈 돌아오게 만들겠다며 저리 구질구질하게 굴어? 평소라면 저 배신하고 떠난 놈 따위 철저하게 망가뜨려 주겠다며 이를 갈았을 놈이. 누가 보면 한녹영한테 순정을 다 바친 줄 알겠네. 뭐, 나름 한녹영은 특별했다는 건가. 하긴 특별하긴 하지. 사내자식이 곱상하니 꼴리게 생긴데다 장현재라면 심장도 꺼내 바칠 만큼 굴었으니. 주인에게 절대복종하는 충견처럼 굴 때마다 좀 부럽기도 했었다. 장현재 자식은 뭔 복으로 저런 놈의 무한 애정을 받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제 주변에 가득한 닳고 닳은 싸구려 년들에 비하면 다이아몬드처럼 보이기도 했고. 장현재도 그걸 아는지 종종 으쓱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나저나 한녹영 그 새끼 이제 막 나가자 이거지? 양아치가 뭐? 병실에서 들었던 말은 두고두고 곱씹을수록 분했다.
“새끼. 진작 한녹영 그 새끼 영상도 떠두라니까.”
그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일단 계약종료 전까진 최대한 빼먹을 수 있는 만큼 빼먹고 그 후엔 나한테 개긴 걸 후회하도록 손을 봐줘야지. 계약종료 되고 회사를 나간 이후에 몰래 건드리는 것까지 터치할 순 없을 테니까. 하영택이 비열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웹 드라마 출연 제안이 왔었지. 대한민국 최대 유통사가 광고주로 붙은 거라 출연료가 아주 빵빵했었다. 십 분짜리 드라마에 회당 출연료가 무려 오천이었으니까. 그걸 할 수 없어서 매우 아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출연료보다 그 웹 드라마 촬영 날짜가 한녹영이 그토록 애달아하는 도망자와 적어도 며칠은 겹칠 것 같다는 사실이 더 끌렸다. 가만 그때쯤이면 거의 계약 종료 막바지일 테니······ 어디 한 번 물을 먹여봐? 하영택이 비죽 웃었다.
☆☆★☆☆
NB 쪽에서 발을 빼면서 잠시 중단되었던 세트장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캐스팅도 전부 완료되어 도망자는 제작에 급물살을 탔다. 편성은 애초보다 1주 연기되어 3월 22일로 확정되었다. 달콤한 그대보다 1주 늦게 시작하는 거라 부담이 컸지만 할 수 없었다.
더불어 첫 대본 리딩 날짜는 1월 25일, 첫 촬영일은 1월 30일, 그리고 제작 제작발표회는 2월 3일로 잡혔다. 보통 제작발표회는 방영을 2-3주 앞두고 하는 편인데, 이례적으로 빨리 잡은 것이다. 여러 문제가 많았던 터라 빼도 박도 못하게 아예 확 질러버리자는 느낌에 가까웠다. 아까 제작사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참 먼 여정을 걸어온 기분이었다. 아직 촬영시작 일까진 시간이 좀 남았고, 촬영 시작은 끝이 아닌 또다른 시작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기대감으로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스케줄 상 무리는 없지?”
아까도 확인했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에 재차 묻자 박상호가 픽 웃었다. 그는 자꾸 같은 질문 하지 말라는 말 대신 스케줄 수첩을 펼쳐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설레는 한편 불안해하는 한녹영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다.
“어. 아무 문제없어. 첫 촬영일 전에 이미 계약된 네 스케줄 다 소화 가능하고, 30일부터는 쭉 도망자 촬영에만 매달리면 돼. 그러고 보니 이제 네
계약종료일 한 달도 안 남았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박상호가 말했다. 억압당하다 해방을 맞이한 사람마냥 그의 얼굴이 밝았다.
“응. 그러네.”
2월 8일이 계약종료일이니까, 한 달도 안 남은 셈이다. 장현재의 그늘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날이 다가오는 걸 확인하는 기분이 묘했다
“새로 연락 온 회사는 없지?”
“있긴 있는데 다 날로 먹으려 드는 곳뿐이라 내 선에서 커트해버렸다. 암만 루머 때문이라고 해도 그렇지, 너 정도 되는 배우를 날로 먹으려 들다니. 사람들이 양심이 없어!”
박상호가 툴툴댔다.
“루머가 잦아들면 탄탄한 화사에서 연락 오겠지.”
“그러길 기대하고 있다. 너 계약 종료 이후 별 스캔들 없이 촬영 잘 하고 있으면 그제야 속았구나 하며 돈 바리바리 싸들고 계약해달라고 찾아올 거야. 두고 봐.”
자신감을 드러내는 박상호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형, 난 마사지좀 하고 있을게.”
운동화 화보 촬영을 하느라 하루 종일 뛰고 걷고 점프하느라 온몸이 뻐근하고,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샵에 가서 사람 손으로 받는 것만큼은 못 하지만, 그래도 꽤 큰 효과가 있어 요새 자주 안마 의자를 애용 중이다. 박상호의 극찬대로 정말 잘 산 제품이었다.
“어. 오늘도 고생했······ 어라? 이 시간에 김 대리가 웬일이지? 안마하고 있어.”
한녹영이 안마의자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안마를 받는 동안 박상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마시며 늦은 밤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박상호가 잠시 후 생수통을 떨어뜨렸다. 그리곤 “그게 무슨 소리야?!”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안마의자에 몸을 푹 묻고 있으니 노골노골해지며 저도 모르게 잠이 쏟아져 깜빡 잠이 들 찰나였던 한녹영이 움찔 눈을 떴다. 그리곤 의아한 마음에 안마의자의 전원을 끄고 박상호에게로 향했다.
“왜 그래?”
“김 대리 놈이 네 스케줄 표 정리하다 발견했는데 회사 쪽에는 28일부터 10부작짜리 웹 드라마 촬영 일정이 잡혀 있는 걸로 되어 있대! 이상해서 계약서 찾아보니 네 사인이 되어있더란다. 이게 말이 되냐?!”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박상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녹영 또한 황당한 마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웹 드라마 출연계약서에 사인이라니?”
“도망자와 같이 촬영할 거면 스케줄 조절해야 할 것 같아 부랴부랴 연락한 거라는데 이게 뭔 일이야?!”
“사인까지 되어있다니?! 누가 사인을 했다는 거야?!”
한녹영의 음성도 커졌다.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사인한 적도 없는 출연계약서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상황이라니. 제가 아무리 스스로의 의지 따윈 없이 회사의 뜻대로 살아왔다곤 해도 어디에 사인을 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맹세코 웹 드라마의 출연계약서에 사인한 적은 없었다. 요새 바빠서 어디에 사인했는지도 까먹었다 치자. 전 못 믿어도 박상호는 믿을 수 있는데, 그마저 저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웹 드라마는 금시초문인 것이 맞았다.
“내 말이!”
“난 절대로 아니야. 내 기억력이 암만 부실해도 출연계약을 맺은 드라마를 잊을 정도는 아니거든.”
“나도 알아. 그리고 네가 도망자를 얼마나 기대했는데. 스케줄 갱신할 때마다 도망자 촬영 날짜 언제 잡힐지 모르니 1월 중후반부터 스케줄은 유동성 있게 짜라고 몇 번이나 말한 걸 내가 기억하는데 이 무슨 황당한 일이야. 대체 어디서 착오가······ 혹시 하영택 짓인가?”
흥분해서 마구 말을 이어가던 박상호가 돌연 하영택을 언급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한녹영에 관한 루머에 이어 NB의 투자 철화까지, 연타를 얻어맞다보니 ‘혹시 또?’하는 의심이 들며 곧장 하영택과 장현재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영 근거 없는 의심은 아니었다. 장현재는 몰라도 하영택을 의심하는 데는 근거가 있었다.
“하 실장 아름이 왜 나와?”
“정아영 알지?”
안다. 아주 톱급은 아니지만 아침 드라마에서 주연을, 영화에서는 조연을 주로 맡으며 그럭저럭 잘 나가는 여배우였다.
“응.”
“4년 전인가? 정아영한테 얘기도 안하고 뒷돈 받아 지멋대로 출연계약서에 사인했는데, 사실 정아영은 동시간대 다른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던 거지. 이중계약이 되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 장 대표가 나서서 언론에 말 나가지 않게 수습했고. 난 그때 장 대표가 하영택 자를 줄 알았더니, 안 자르고 계속 데리고 있더라. 그 후로는 그런 짓 안 했지만 또 모르지. 제 버릇 남 주겠냐.”
“당장 회사로······.”
가봤자 하영택이 없겠구나. 야간 경비원 분들이나 계시겠지. 밤 11시 40분이었다. 시계를 노려보며 압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한녹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하영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아침에 회사로 찾아가 따질까 했는데 안 되겠다. 도저히 내일 아침까지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ㅡ 누구야?
술집인지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잡음이 섞여 들려왔다. 오빠, 하고 간드러지게 하영택을 부르는 여자들의 음성도 함께였다.
“납니다. 한녹영.”
ㅡ 호오, 잘나신 스타님께서 어인 일이신가?
하영택의 음성에 이죽거림이 가득했다.
“내가 웹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다던데요.”
ㅡ 그래서? 그게 뭐?
“난 출연 제약서에 사인한 적이 없는데요.”
ㅡ 없을 리가 있나. 최근 제약서에 하도 사안을 많이 해대서 깜박한 거겠지.
“내가 뭐에 사인했는지도 모르는 등신입니까? 하영택 당신 내 사인 위조했어?”
ㅡ 뭐 당신? 이 자식이 제약 끝나간다고 진짜 막나가자는 모양인데, 나도 막 나가봐? 병원에서 막말한 것도 참아 넘겨줬더니 내가 아주 물로 보이는 모양이지? 이 새끼야, 네가 사인해놓고 잊어버린 걸 왜 나한테 따져? 정신없이 사인해놓고 이제 와서 생각하니 못하겠던 모양이지?
꽈배기처럼 비비 꼬인 말을 듣고 있쪄 감이 왔다. 이 자식 짓이다. 하영택이 벌인 짓이 분명했다.
“당신 사인 위조가 불법인 건 알고 있지? 아, 모르나. 하긴 건달판에서 구르던 깡패새끼가 법이나 제대로 알겠어? 분명히 말하는데 난 사안한 적 없으니 촬영 못 해.”
ㅡ 못 해, 그럼 하지 마. 기사 아주 제대로 나가겠네? 한녹영 계약 위반, 촬영 일방적 펑크. 벌써부터 기사 제목이 눈에 아주 훤해. 그렇게 되면 넌 이바닥에서 아웃이니 위약금이나 빵빵하게 준비해둬.
“나와는 다른 기사를 보는 모양이네. 내 눈에는 한울의 하영택 사인 위조로 체포, 라는 제목이 보이는데. 신고할 거니까 경찰 조사 받을 준비나 하고 있어. 계약 종료 앞둔 연예인 사인 위조해서 허위 출연계약을 맺었으니 가사 뜨면 참 재밌을 거야. 그치? 가뜩이나 내가 재계약 하지 않은 일로 주주들이 동요하고 있을 텐데, 하 실장이 체포까지 되면 주가가 어떻게 될까?”
ㅡ 한녹영 너, 이 새끼!!
나발 불던 술병이라도 던진 건가. 파사삭 하고 뭔가가 부딪쳐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 하는 여자들의 새된 비명소리도 함께였다.
“나 내일 변호사 만날 거야. 아는 기자들한테도 하영택 당신이 내 사인 위조했다고 연락 다 돌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한녹영이 전화를 뚝 끊었다. 곧바로 하영택이 전화를 걸어왔지만, 아예 전원을 꺼버리자 이번엔 박상호의 전화기가 불이 나기 사작했다. 박상호 역시 “개새끼.”하고 욕하더니 전화를 무시했다.
“하영택 짓이 맞아?”
“내가 사인해놓고 잊은 거라며 우기는데, 예감이 확살해. 계약 위반이니, 촬영 일방적 펑크니 하는 기사 나가면 재밌을 것 같다며 이죽댄 걸 보면 그런 식으로 나 물 먹이려고 한 것 같기도 해.”
“어. 내 생각도 그래. 사흘 전에 다시 확인했을 때만 해도 분명 26일 이후의 스케줄은 비어있었거든. 오늘 다시 확인 안 했으면 꼼짝없이 너만 덤터기 썼을 거 아냐. 와아, 갈수록 치사하게 나오네. 김대리가 너 살렸다.”
박상호 말이 맞았다. 만약 모르고 있다가 촬영일을 맞았으면 하영택이 말한 기사가 우르르 떴을 거고, 그럼 저만 덤터기 써 이미지가 추락해 비호감 배우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분하다. 울화가 꼭꼭 쌓였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며 끝까지 회사에 돈을 벌어다주고 있는데, 여기서 더 뭘 어쩌란 거지. 제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마치 천하의 쌍놈 취급하며 이렇게 비열한 대응을 하는지 실망스러웠다. 인형으로 살지 않고, 의자를 가진 사람으로 살겠다는데 그게 잘못인가?
“형, 내일 변호사 알아봐줘. 연예인들 소송 주로 맡아하는 변호사들 있지?”
“있지. 특히 기획사랑 연예인 분쟁 관련 소송만 주로 맡는 변호사 내가 알아. 아주 유능해.”
이 바닥에 오래 있었던 탓에 은근 발이 넓다니까. 박상호가 곁에 있어서 그나마 마음이 든든했다. 박상호가 없었다면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을 텐데. 새삼 그의 존재가 고마웠다.
“내일 당장 가자.”
“그래. 일단 자금은 마음 가라앉히고 들어가서 자.”
“나 얼음물 좀.”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건 박상호도 마찬가지인지 그가 얼음을 잔뜩 넣은 물 두 잔을 가지고 나왔다. 두 사람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을 약속이라도 한 듯 원샷한 후 동시에 하아, 하고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아 밤새 뒤척뒤척했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정지해가 얼굴이 이게 뭐냐며 잔소리를 퍼붓겠네. 한녹영은 허옇게 뜬 제 얼굴을 보며 끙, 하고 한숨을 삼켰다. 팩으로 임시 조치를 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휴식인데, 그걸 못하니 큰일이었다.
정지해가 얼굴이 피곤하고 들떠 보일 때 바르라고 준 크림을 듬뿍 바른 후 변호사와의 면담을 위해 8시에 집을 나섰다. 막 주차장을 빠져나왔을 때 느닷없이 튀어나온 사람 때문에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 했다. 박상호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몸이 앞으로 크게 튕겼다가 뒤로 휘청 넘어간 한녹영이 목에 통증을 느끼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미안. 괜찮냐?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박상호가 다급하게 한녹영의 몸을 살폈다.
“녹영아! 얘기 좀 하자!!”
누가 무식하게 차 앞에 뛰어들었나 했더니 한만식이었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한만식의 얼굴을 보니 짜증이 급속도로 올라왔다. 혀를 찬 한녹영이 창문을 내렸다.
“미쳤어요? 차 앞에 뛰어들면 어떡해요?!”
“네가 통 전화도 안 받고 빌라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니 어쩌냐! 전화번호도 아예 바꿔버리다니 부모자식 간의 연을 아예 끊을 참이냐? 네 어머니는 속상해서 아예 앓아누웠다.”
“속상해서 앓아누운 것이 아니라 돈줄이 끊겨 아쉬운 마음에 앓아누운 거겠죠. 독해서 그 흔한 감기 한 번 안 걸린 사람이 이 정도 일에 앓아누울 리가 있어요?”
“너 새어머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키워준 은혜는 무슨. 학대 받은 것도 은혜라면, 그 은혜는 이미 넘치게 갚았을 텐데요.”
“딱 삼십 억만 내놔라. 그럼 네가 바라는 대로 연 끊고 남남으로 살아주마.”
뻔뻔하게 삼십 억을 요구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한녹영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반성이라곤 모르는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뻔뻔한 줄은 몰랐다.
“벼룩한테도 낯짝은 있다던데. 지금 아버지 행동을 보면 벼룩만도 못해요. 버린 자식 등쳐먹고 살았으면 미안한 줄 알아야지요. 그간 사업자금 명목으로 가져간 돈만 해도 삼십억은 되겠네. 삼십억? 삼만 원이라면 줄게요. 늙은 아버지 택시 값 정도는 드려야죠.”
“너 진짜 후레자식이 될 참이냐?!”
“내 이름 대고 다른데서 돈 끌어다 쓸 생각은 하지도 마요. 확인전화 오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거니까. 형 뭐해? 출발 안 하고.”
한녹영이 창문을 도로 올렸다. 한만식이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한녹영을 노려보며 “이 후레자식 같은 놈! 이 패륜아 같은 놈! 어디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다. 악을 쓰는 모습에서 친아들인 한녹영에 대한 애정은 티눈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후련한 얼굴로 듣고 있던 박상호가 운전을 하며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 맘이 약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대견해지네?”
“가족 대하는 모습이 갈수록 독해진다는 뜻이지?”
“그런 뜻도 있고.”
“독해지지 않으면 잡아먹힐 것 같아서.”
어제 하영택과 통화하며 확실히 느꼈다. 제 가족들이나 하영택이나 전부 제가 조금의 틈만 내보여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사람들이라는 걸 말이다. 얌전히 호구 노릇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든가 아니면 독하게 대하는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오히려 제 쪽에서 잡아먹힐 테니까.
“곧 다 좋아질 거야.”
박상호가 한녹영을 위로했다. 한녹영은 그러길 바라, 하고 말하며 웃었다.
“형은 발이 넓으니까 유능한 심부름센터도 알 것 같은데.”
가만히 창밖을 보던 한녹영이 말했다.
“심부름센터는 잘 모르는데······ 아, 예전에 얼핏 들으니 한수 절친 중 한 놈이 심부름센터를 한다더라. 불륜 전문이라던데. 근데 심부름센터는 왜?”
“가족들 뒷조사 좀 해보려고. 아무래도 내 이름 팔아서 나쁜 짓 하고 다닐 것 같아 증거 모아둘까 싶어.”
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어낸다고 될 것 같지 않아 대비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박재준 그 자식이 제 놈이 저랑 형제라는 둥, 제가 동생인 제 놈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둥 해가며 여자를 희롱해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황산 테러를 당하기 얼마 전 일인데, 여자 쪽에서 고소하고 난리가 났던 걸 회사에서 해결해줬었다. 분명 그때 한 번만이 아니었을 테고, 지금도 비슷한 짓을 하고 다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 증거도 좀 잡아두고, 아버지와 새어머니란 여자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지. 내가 한수랑 얘기해볼게.”
박상호가 아차, 하는 얼굴로 동의했다. 그냥 순순히 떨어질 사람들이 아닌데 뒷조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왜 미처 못 했을까? 한녹영이 지금이라도 생각해서 다행이었다.
“그 일은 회사에 안 알려졌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 사실 네 행적 장 대표한테 얘기했다고 해서 화나긴 했는데, 한수 놈 그렇게 바닥은 아니야.”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한녹영이 보기에도 장한수가 약삭빠르고 입이 솜털처럼 가벼워 비밀을 막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조심을 하려는 것뿐이다.
“그래도 조심하고 싶으니까 다짐 받아줘.”
“걱정하지 말라니까. 다 왔다. 저기야. 어젯밤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해서 8시 반으로 약속 잡아뒀으니까 변호사님 지금 사무실에 있을 거다.”
“고마워, 형.”
“고맙긴. 네 일이 내 일인데. 올라가자.”
박상호가 빌딩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한녹영은 선글라스를 낀 후 차에서 내렸다.
그날 밤 모든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뜬 번호는 장현재의 것이었다.
“응.”
피곤한 탓에 목소리가 잠겼다.
ㅡ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지? 잠깐 보자.
“나 피곤한데.”
ㅡ 내가 지금 네 빌라로 가는 중이야. 20분이면 도착해.
“무슨 일인데?”
ㅡ 하 실장 일로 할 얘기가 있어.
아침에 변호사를 만나 상담하면서 곧바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달라고 했는데 벌써 어떤 액션을 취한 모양이었다.
“알았어. 난 곧 도착해.”
전화를 끊자마자 박상호가 “장 대표야? 온대?” 하고 물어왔다.
“응. 하 실장 일로 할 얘기가 있대.”
“벌써 변호사 사무실에서 연락이 간 모양이지. 꽁지에 불붙은 것 마냥 달려오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아. 한수 형, 상호 형한테 얘기 들었지?”
마침 빌라 앞에 도착해서 차를 세운 장한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아까 얘기 들었어. 네 가족 인적사항 주면 내가 친구 놈한테 전달해서 영혼까지 탈탈 털어달라고 할게. 그 자식 그런 거 전문이야.”
“불륜 전문이라며.”
박상호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약점잡기 전문라고요! 어릴 적 꿈이 경찰이었던 놈이라 범죄에 대해 유별나게 굴어서 경범죄 하나라도 안 놓치고 잡아낼 거니 걱정하지 마. 회사엔 입도 벙긋 안할게. 대표님이 물어 와서 네 행적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말하긴 했는데, 묻지도 않은 일에 대해 먼저 나서서 나불댈 정도로 입 가볍지 않아.”
“알았어. 형 믿을게. 고마워.”
웃으며 고맙다고 하자 쑥스러운지 장한수가 멋쩍은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긁더니 물었다.
“근데 가족들 뒷조사는 왜 하려는 건데?”
“넌 알 것 없어.”
박상호가 야멸차게 대답하자 장한수가 입매를 삐죽였다. 한녹영이 밴에서 내리며 그를 향해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빌라로 들어섰다.
옷을 갈아입고 박상호의 성화에 못 이겨 영양제를 꾸역꾸역 먹고 있을 때 장현재가 도착했다.
“하영택 실장이 네 사인 위조해서 웹 드라마 출연 계약서에 사인했다는 얘기 들었다.”
“이번에도 형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고, 하 실장 혼자서 벌인 일이라고 변명할 참아야?”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야.”
“근데 난 왜 그 말이 안 믿기지?”
장현재가 지시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묵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신이 가득한 한녹영의 눈빛에 장현재가 배신당한 사람처럼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간 너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어떻게 이렇게 단박에 변했어? 이젠 내 말은 전부 거짓말로 여겨지는 모양이지?”
“솔직히 그래.”
전에는 풀로 꽉 차 넘칠 지경이었던 장현재에 대한 신뢰감은 회귀한 이후 빠르게 줄어들어 이젠 바닥에서 찰랑이는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에 대한 신뢰를 온전히 지니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과 귀가 있어 그가 한 일들을 고스란히 듣고 봤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한녹영의 얼굴을 보며 장현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하영택 개새끼, 하며 속으로 사촌형에 대한 욕설을 내뱉었다.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어설프게 일을 벌이다 오히려 약점만 잡힌 꼴이 되고 말았으니 울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하영택을 죽도록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다 하영택 때문에 한녹영에게 같은 급으로 취급당하고 있으니 열이 안 뻗칠 수가 없었다.
이번 건은 정말 오롯이 하영택이 혼자 제멋대로 벌인 일이었고, 수습은 전부 장현재의 몫이 되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요즘 난 널 볼 때마다 배신한 애인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는 여자가 된 심정이 들어. 배신한 애인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된 여자 말이다.”
“배신했다고 하지 마. 난 배신한 적 없어. 오히려 내 믿음을 배신한 쪽은 형 아냐?”
정말로 처절하게 제게 배신을 칼날을 박았던 쪽은 장현재였다.
“녹영아.”
“하 실장 얘기나 해.”
서늘하게 말을 돌리자 장현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안 믿을지 몰라도 이번 일은 하 실장 혼자 벌인 일이다. 내가 관여했으면 이 정도로 허술하게 안 끝났어.”
맞는 말이지만 한녹영은 ‘그래서 뭐?’라는 표정을 자어보있다. 장현재가 관여했건 안했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기분이었다.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
변명 따윈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냉정하고 무심한 한녹영의 표정에 장현재가 주먹을 꾹 쥐었다가 놓았다. 지금의 한녹영은 꼭 감정이 없는 정교한 밀랍인형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은 장현재가 말했다.
“네가 선임했다는 변호사한테 연락 왔더라. 하 실장과 회사를 상대로 고소 진행한다고? 기자한테도 소스 흘렸어? 확인 전화 왔던데.”
기자? 기자한테는 연락 안 했는데. 박상호를 쳐다보자 그가 눈을 찡긋했다. 박상호가 한 일인 모양이었다.
“응.”
박상호를 향해 짧게 웃은 한녹영이 냉정하게 말했다.
“고소니 뭐니 하며 너와 내가 기자들 입에 오르내려봤자 서로에게 좋을 일은 없다고 보는데. 지금은 네가 재채기만 해도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음해하는 기사를 써 갈길 시기니까.”
“회사에서 기자들에게 청탁만 안 한다면 날 음해하는 기사 쓸 일 없을 것 같은데.”
“청탁 같은 거 안해도 넌 기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야. 그간 이미지가 좋았던 만큼 조그마한 꼬투리도 큰 흠으로 작용할 테고.”
“······.”
“그간 너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만 쏟아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회사에서 실드를 쳐줬기 때문이라는 뜻 같았다. 저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울은 소속 연예인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나 기사를 다른 기획사보다 더 철저히 다루는 편이었다.
침묵하는 한녹영을 보며 장현재는 ‘회사가 막아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하고 생각했지만 사실 한녹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예전 드라마와 영화의 흥행 참패로 저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들이 일제히 쏟아졌을 때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 기사들······ 회사에서 청탁했던 건가?’
드라마와 영화 참패는 사실이지만 너무 심하게 전부 제 탓인 냥 몰고 가는 기사들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기사들은 회사에서 청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사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절 그렇게 몰아붙인 이유는 아마도······ 강준일 대표 때문인가? 그때는 기사들 때문에 제 인기가 하락세를 타고 있어서 구명줄로 강준일을 언급한 거라고 믿었는데, 혹시 ‘처음부터 강준일을 엮으려고 날 몰아붙인 건가?’하는 근거 없는 의혹마저 들었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장현재의 부탁이라 해도 술에 취해 떡이 된 사람의 침대에 무려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진 않았을 테니까.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녹영이 픽 웃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너무 나간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생각을 접은 한녹영이 말했다.
“조용히 끝내자. 일 커져봤자 서로에게 득 될 일은 없으니까.”
“그냥 묻고 넘어가자고?”
“원하는 걸 말해.”
즉 조용히 합의하자는 뜻인가 본데······. 한녹영은 저를 복잡한 눈길로 보는 장현재와 한참 시선을 마주하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박상호를 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형 생각은 어때?”
잠시 고민 끝에 박상호가 말했다.
“장 대표 말도 일리가 있어. 일이 커져봤자 소속사와 배우 간의 불화설로 비칠 수 있거든. 회사에서 악의적으로 가사 내보내면 네 이미지에 타격 올 테니까······.”
“합의하고 묻자고?”
“내 생각엔 그게 베스트일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본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박상호의 말이 맞았다. 이제 곧 기획사라는 방패도 없어질 텐데 장현재를 적으로 돌려 나체로 거리에 내몰려 돌팔매질을 당하는 우를 범할 필요는 없었다. 저가 아는 장현재라면 얼마든지 그럴 사람이니까.
고민을 끝내 한녹영이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내 사인 위조해서 출연하기로 한 웹 드라마 잡음 없이 해결해줘.”
“그거야 당연한 거고.”
“도망자에 더 이상 위해 가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줘. 괜히 또 투자자들 흔들지 말고, 어떤 방해도 하지 마.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서류로 남겨줘.”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아무리 나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대도 그렇지. 네가 이럴수록 난 상처받아.”
“해줘. 그리고 도망자에 대한 회사의 권리 포기해.”
도망자가 한창 방영될 때는 회사와 제 관계가 끝난 이후지만 출연 계약서를 한울에 소속되어 있을 때 맺은 거라 전속 계약서에 적힌 대로 수익을 한울에 줘야 한다. 출연료 자체야 펑균 제 몸값보다 많이 낮춰서 계약한 터라 상관 없는데, 박지한 때와는 다른 조항 즉 ‘러닝개런티’가 걸렸다. 2200억 수익을 봤는데, 그럼 제게 떨어지는 몫이 얼마야. 계산도 안 되는 금액을 이제 끝난 사이인 회사와 나누긴 싫었다.
그 돈은 차라리 새 회사의 발전을 위해 쓰는 편이 낫지. 한녹영이 잘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중인 박상호를 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다른 데로 들어가는 것보다 회사를 차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대표는 박상호로 하고, 정지해 데려오고, 장한수도 얘기하면 따라올 분위기고. 소속배우는 저와······ 장한경이 좋겠다.
“좋아, 그게 다야?”
“얼마 안 남았지만 그냥 지금 전속계약 해지해줘. 물론 지금껏 계약된 일들은 다 할 거야.”
다시 한 번 박상호를 본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장현재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요구는 다 한 것 같다. 혹시 빠뜨린 것이 있나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제가 한 요구들을 점검 중인 한녹영을 바라보는 장현재의 눈매가 서늘했다.
“좋아. 서류 다 준비해둘 테니까 모레 회사로 와.”
“알았어.”
“너와 내가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다. 너와는 끝까지 함께일 거라 믿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나도 그렇게 믿었어. 형이 내 심장에 칼을 박아 넣지만 않았어도 여전히 열렬한 신자처럼 맹신하고 있었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네 심장이 칼을 박아 넣다니.”
“나에 대한 형의 진심을 알아버렸단 뜻이야. 그만 가. 그리고 더 이상 형에게 실망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에도 말했지만 형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내 마음을 쓰레기로 만들지 마. 이미 벌써 형을 사랑했던 시간들을 후회 중이니까.”
장현재는 한녹영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싸늘한 태도로 나가버렸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덩달아 일어났던 한녹영이 현관 닫히는 소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한 거겠지?”
“잘했어. 고소해봤자 서로 번거롭고, 득 될 건 하나도 없어. 이제 너 자유의 몸이니 후련한 마음으로 도망자 촬영 기다리고 또 옮길 회사 알아보면 되겠다.”
“회사 말인데······ 형, 우리 그냥 회사 차리자.”
“어?”
“전에 한 번 말했잖아. 형이 회사 차리는 건 어떠냐고. 1인 기획사도 생각해 봤는데, 내가 그럴 능력은 안 되는 것 같고, 형이 해라. 대표. 내가 투자할게. 소속 배우 겸 대주주 어때?”
반 장난 식으로 한녹영의 말을 들었던 박상호가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진심이었어? 회사라니······.
“아무래도 일이나 그런 면에 있어서 좀 기다렸다가 큰 기획사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텐데.”
“형 기획사의 소속 배우 하고 싶어. 내가 대한민국 톱을 넘어 아시아의 황제쯤 되어서 형이 만들 기획사 거대 공룡으로 키워줄게.”
거대 공룡이라니. 생각만 해도 좋지만. 황홀한 상상을 펼쳤던 박상호가 퍼뜩 현실로 돌아와 신중하게 말했다.
“생각좀 해보자. 전에 했던 말은 사실 반 장난 식으로 들어 넘겨서. 난 너랑 같이 다른 회사 들어갈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
“내 말 무시했던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지금도 베스트는 대형 기획사에 괜찮은 조건으로 들어가는 건데······ 날더러 회사를 차려서 대표하라니. 물론 그런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 갑작스럽고······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시간 주라.”
“응. 천천히 심사숙고해.”
하지만 회사 차린다고 했으면 좋겠다. 예전에 장한경을 위해서 망설임 없이 회사를 차렸던 것처럼 말이다. 한녹영은 “회사라니, 진짜 회사를 차리라고?” 하고 중얼대며 제 방으로 들어가는 박상호의 등을 바라보다 저도 침실로 향했다. 고작 이십 여일 빨리 계약 종료를 맞이하는 것뿐인데 기분이 이상하다. 인생의 한 장에 마침표를 찍은 기분이었다.
이제 내일부터 펼쳐질 새로운 장에선 좋은 일만 생기면 좋겠다.
☆☆★☆☆
한녹영의 집에서 나온 장현재는 주차장에 세워둔 제 차에 기대있는 하영택을 보자마자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가 나며 하영택이 비틀거렸다. 하영택은 퉤, 하고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아래턱을 좌우로 움직였다.
“한 번만 더 계약서 갖고 장난질 치면 가만 안 둔다고 했을 텐데! 내 말이 우스웠어?!”
“미안하다. 한녹영 그 새끼 물 좀 먹이려다 그만.”
하영택이 우물우물 변명을 중얼댔다. 웹 드라마 출연 계약서에 위조 사인 한 후 한녹영과 박상호에게 전달하지 않고 촬영일을 맞이하면 분명 큰 사고가 될 테니, 그걸로 제대로 엿 한 번 먹여보자 싶었는데 제기랄. 쓸데없이 꼼꼼한 김대리 새끼 때문에 망쳤다.
그리고 한녹영 그 새끼가 정말 변호사를 선임할 줄도 몰랐고. 그가 아는 한녹영은 장현재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성질 나쁜 멍청이였는데, 너무 만만하게 봤던 모양이다.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하긴 그런 멍청한 머리를 갖고 있으니 깡패질이나 했겠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삥이나 뜯으며 변두리 건달로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해. 녹영이한테 쓰레기 같은 놈 주워 스타로 만들어줬더니 배신 때렸다고 자주 말하던데, 진짜 쓰레기는 형이었어. 건달 쓰레기 주워 기획사 실장으로 만들어 호의호식하게 해줬으면 적어도 날 실망시키진 말아야지!”
“미안하다. 현재야. 진짜 잘할게. 이제 네가 시키는 것만 할게. 한녹영 그 새끼는 뭐래?”
“전속 제약 해지해주기로 했어. 도망자는 건드리지 않기로 했고.”
회사를 나가겠다는 한녹영의 마음이 굳건해 결국 한녹영이 시장에 나가도록 놓아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각오 정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회사가 한녹영을 사가도록 두고 볼 마음은 여전히 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녹영을 다시 제 품으로 데려오고 말겠다는 의지가 점점 더 거세게 타올랐다.
장현재는 저를 보던 한녹영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한녹영이 저를 보며 온기라곤 없는 얼음 같은 눈을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한 적 없었다. 심장이 다 저린 느낌이 들 정도의 차가움이라니. 다시 한 번 그 눈에 저를 향한 뜨거움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녹영이 예전처럼 뜨겁게 저를 보길 원했다. 제게 집착하고, 애정을 갈구하길 손끝이 다 저릴 정도로 바란다.
제 애정을 바라며 늘 주린 눈을 하던 한녹영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는데.
‘이제 내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 같다고?’
헛웃음만 자꾸 나왔다. 가능하면 온전히 데려오려 했는데, 이젠 마음이 바뀌었다. 철저하게 망가뜨려서라도 데려오겠다.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쓸 수 없을 지경이라면 제 손으로 버리더라도 우선 데려오고 말겠다.
“한녹영 새끼 이대로 내버려둘 건 아니지? 이제라도 그 새끼 영상 뜨는 건 어때?”
하영택이 조심스레 영상을 언급했다. 장현제가 오케이이 한다면 당장이라도 한녹영을 납치해 영상 뜰 자신이 있었다. 한녹영이야 약 먹이면 그만이고, 상대가 한녹영이라면 좋다고 덤벼들어 좆을 세울 새끼들이 세고 셌다.
“영상? 영상을 어떻게 뜰 건데? 녹영이가 순순히 따라와서 ‘그래, 영상 뜨세요.’하며 옷 벗을 것 같아?”
“방법이야 찾아보면 있지.”
“강제로 납치라도 하게? 그래서 강간이라도 하려고?”
하영택이 침묵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납치해 강간당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뜨려고 생각 중이었나 보았다. 미친 새끼. 깡패 근성은 끝까지 못 버리겠는 모양이지.
“이미 큰 스캔들이 될 약점을 하나 확보해 뒀어.”
가능하면 쓰지 않는 쪽으로 생각 중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한녹영을 제 품으로 되찾아오려면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 외에는 남은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드라마를 엎어지게 만들어 약간의 데미지를 주는 정도는 안 되겠다.
“그게 뭔데?”
“형은 알 거 없고. 녹영이 주변 파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별 거 없던데. 그자식 요새 스케줄이 많아서 완전 일에만 치여 사는 중이잖아. 그러고 보니 김동우 파티 때 강준일이 한녹영 데려갔다고 하던데.”
“뭐?! 강준일이?! 그 얘기를 왜 이제야 해?!!”
“별로 상관없는 얘기일 것 같아서. 강준일이 한녹영 싫어하잖아. 한녹영도 강준일이라면 이를 갈았고. 대차게 까이고 돌아와서 다시는 강준일한테 접근안 할 거라며 오만 지랄 다 피웠었잖아. 알아보니 강준일은 그날 망나니 사촌동생 잡으러 왔다던데, 우연히 만난 것 같아 잊어버리고 있었지.”
“그 날 둘이 함께 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확인해봤어?”
하영택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날은 파티에 보낼 스케줄이라 사람 붙일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둘이 파타장에서만 같이 나갔을 거야.”
장현재가 혀를 찼다. 하영택 말이 맞을 가능성이 크지만 왠지 찝찝했다. 사실 한녹영의 외모가 강준일의 취향이기도 했고. 한녹영이 강준일에게 까이고 온 이후 강준일이 직접 제게 전화를 걸어와 ‘다시 한 번 네 인형을 내게 보내면 회사의 부도를 선물로 주지.’라고 했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LK 강준일의 기침 한 번이면 한울 정도는 그냥 무너지기 때문에 순순히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한녹영을 그에게 보낸 저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고.
‘내가 장 대표의 냄새로 진동하는 인형 따위를 끌어안고 뒹굴 것 같은가?’라고 말하며 한녹영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으니, 저 모르는 사이 둘 사이에 썸씽 같은 것이 생기진 않았을 테지? 절 협박하던 강준일의 음성에서 진심으로 분노한 기색이 느껴졌으니까. 두 사람 사이엔 큰 접점도 없고, 썸씽이 생기기엔 둘 사이의 감정이 최악이라 강준일은 가능성이 희박했다.
“다시 한 번 녹영이 주변 샅샅이 파봐. 분명 변화가 있을 거니까.”
제가 모르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분명 한녹영에게 변화의 계기를 심어준 인물이 있을 거다. 그 자를 찾아내야 한다.
“알았어.”
“출발해.”
장현재가 뒷좌석에 올라탔다. 다시 한 번 퉤, 하고 피 섞인 침을 내뱉은 하영택이 운전대를 잡았다.
“참, 박지한이가 여기저기에 제 억울함을 성토하고 다니는 모양이던데?”
한녹영의 빌라 주차장을 빠져나온 하영택이 말했다.
“박지한?”
“어. 박지한이 도망자에서 차도영 역 한녹영한테 밀렸잖아. 제 딴에는 분해 죽겠는지 여기저기 찔러대는 모양인데,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기도 하고, 박지한 이름이 기사화해도 될 만큼 가치가 있진 않아서 무시당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래?”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았던 장현재가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동시에 눈도 떴다. 박지한이라. 제법 흥미로운 얘기였다.
“박지한이 내일 회사로 데려와.”
공격 방법이야 많을수록 좋으니.
“뭐 하려고?”
“전속 계약 맺어주려고.”
“뭐? 그런 쭉정이 자식을 뭐 하러? 우리 회사가 어중이떠중이 다 받아주는 난민 구제소도 아닌데.”
“데려오라면 데려와.”
짜증 섞인 말에 하영택에 입매를 실룩였다. 새끼, 아무리 그래도 내가 형인데. 하지만 그는 이내 언제 투덜댔냐는 듯 장현재를 향해 비굴한 웃음을 내보이며 “어. 박지한이 낼 당장 대령할게.” 하고 말했다.
“아, 한 가지 더 있다.”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감고 있을 때 하영택이 한 가지 더 말 못한 일이 있다는 식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엔 뭐야?”
“한녹영이 그 새끼, 지 부모랑 틀어진 모양이더라. 아비란 놈이 한녹영 빌라 찾아가서 소동 부렸대.”
장현재가 눈을 떴다. 한녹영의 아버지 한만식이라면, 사채 빚에 아들을 버리고 갔다가 한녹영이 뜨자 철판 깔고 찾아와 빌붙어있는 거머리 같은 남자였다. 장현재는 한녹영이 핏줄이랍시고 한만식에게 돈을 줄 때마다 못마땅했다. 그래도 핏줄을 어쩌지 못해 받아줄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하기에 큰 간섭은 안 했는데 드디어 한만식을 버릴 마음이 든 모양이지? 근데 그 시기가 하필이면 지금이라 짜증났다. 저와 한만식을 동급으로 취급해 동시에 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혀를 차며 발로 앞좌석을 쾅쾅 걷어찬 장현재가 힘겹게 마음을다스렸다.
한만식도 써먹어야겠군. 제가 아는 한만식이라면 돈을 위해 아들 따윈 몇 번이고 팔아먹을 수 있는 말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