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2화 (2/9)

Chapter.  02

장현재가 집에 다녀간 이후 한가해서 백지 노트나 마찬가지였던 한녹영의 스케줄 수첩이 빡빡해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들어온 광고만 3개월 단발 CF가 3건,  6개월 단발이 2건이었다.  거기다 지면 광고 촬영, 잡지 화보 촬영, 팬 사인회까지······.  한동안 일정이 숨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 같으니 계약종료 전까지 마구 굴려 빼먹을 대로 빼먹자는 심산인 것 같았다.

“이러다 드라마 촬영까지 들어가면 녹영이 너 잠깐 눈 붙일 시간도 없겠다.”

스케줄 수첩을 훑어보며 박상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단발은 잘 진행하지도 않았는데 6개월이야 그렇다 쳐도 3개월이 3건이라니.  회사의 속내가 엿보여 입맛이 썼다.  회사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빼먹어야 하니 당연한 처사겠지만 말이다.  더불어 이제 시작이라 앞으로 얼마나 더 과도한 스케줄이 빡빡하게 쌓일지 모를 일이라 벌써부터 걱정이 컸다.

“2월 초면 계약 끝나는데 뭐. 한 한 달 가량만 고생하면 되니까 괜찮아.”

한녹영으로서는 숨 돌릴 틈 없이 바빠지는 것보다 도망자 캐스팅이 난항에 부딪쳐 촬영이 자꾸만 미뤄지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정인호가 아직도 지지부진하게 답을 주지 않고 있는 모양인데, 찾아가서 직접 확답을 얻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차피 안 할 거면서 남 주긴 아까워 질질 끄는 건지 뭔지.  드라마가 무사히 종영된 걸 알지만, 제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조금씩 변한 것들이 보여서 불안했다.

내가 차도영을 맡아서 드라마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시작도 못한 채 엎어지는 건 아닐까?  매일 도망자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게 시작이니 문제지. 계약 끝날 때까지 널 얼마나 굴려먹겠냐? 어제 보니 계약 종료 전까지 널 여기저기 팔아먹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빼먹으려고 눈이 벌겋더라.”

하영택은 한녹영을 ‘바닥을 굴러먹던 비루한 새끼 데려다 스타로 만들어뒀더니 뒤통수치고 도망가는 배신자.’ 쯤으로 취급했다.  이제 떠날 사람이라 이건지 속내를 숨길 생각조차 않았다.  한녹영을 바라보는 눈에 시뻘건 분노가 가득했다.  뭐라고 했더라?  ‘화수분으로 생각하고 비위 맞춰가며 발밑을 살살 기어줬더니 감히 배신을 때려? 어디 또 한 번 내 앞에서 건방지게 굴어봐. 예쁜 그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어버릴 테니.’ 라고 했던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한녹영을 노려보는 눈빛이 하도 흉흉해서 박상호가 움찔해 그만하라며 앞을 가로막았을 정도였다.  하영택이 그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한녹영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으니 꼴리는 대로 하겠다는 건데, 하영택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었다.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리면 되니까.

“더럽고 치사해도 네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일만 아니면 그냥 하자. 괜히 나중에 전속 계약 위반이니 어쩌니 하면서 시비 걸면 골치 아파져.”

박상호가 살살 달래는 투로 말했다.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상호의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곱게 보내주는 기획사가 있는 한편 끝까지 지저분하게 굴어 연예인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언론을 이용해 계약 위반을 했니, 고소를 하니 마니 하는 기사가 오르내리다보면 아무래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기 마련이었다.  장현재의 곁을 떠나 그와의 인연을 끝내기로 마음먹었지만 마무리를 지저분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박상호가 먼저 일어났다.

“한수 왔다. 내려가자.”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한녹영도 몸을 일으킨 후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현관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커다란 박스를 보고 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젯밤 늦게 관리실에서 가져온 저건 일주일 전 샀던 매니저와 코디들의 패딩이었다.  2-3일이면 도작할 거라 생각했는데 배송이 늦어져 어제 도착한 것이다.  녹초가 되어 뻗어있는 한녹영을 향해 박상호가 택배 왔다고 말 해주었는데, 피곤해서 반쯤 졸고 있었던 터라 열어보라고 말하는 걸 깜빡했다.

“형, 저 박스도 챙겨.”

“어젯밤 관리실에서 가져온 택배? 저걸 왜?”

“아무튼 챙겨.”

한녹영의 재촉에 박상호가 의아해하며 박스를 들었다.  그리 무겁진 않았지만 부피가 커서 품에 안으니 시야가 가려질 정도였다.  그 상태로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장한수가 기다리고 있다가 박상호를 보고 얼른 달려와 박스를 받아들었다.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겠다. 녹영이가 챙기라고 해서 챙긴 거니까 차에 실어. 녹영이는 어서 타고.”

박상호가 밴의 문을 열어주었다.  미리 타고 있던 코디 둘이 한녹영을 향해 어색하게 눈인사를 건네 왔다.  한녹영은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밴에 탑승했다.  그러다 밴 안에 있는 코디가 둘뿐인 걸 발견하고 의아하게 물었다.

“왜 둘뿐이야?”

지금껏 한녹영이 공식 스케줄을 소화할 때 붙은 코디는 3명이었다.  헤어 담당, 메이크업 담당, 전체적인 스타일링 담당.  그런데 지금은 둘 뿐으로, 가장 왕고참이 보이지 않았다.

“정아 언니는 다른 데로 갔어.”

셋 중 나이로는 중간이고, 메이크업을 맡고 있는 정지해의 말이었다.  지금껏 제 스타일링을 봐주었던 신정아가 다른 데로 갔다는 말에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한테 갔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정아 언니 말로는 새로 영입한 배우라나봐. 기존 배우는 아니고 신인이라고 하던데 어떤 이미지를 잡고 데뷔하면 좋을지 회사 내 최고 능력자들만 붙여서 드림팀을 꾸릴 건가 보더라고. 지금 기획팀에서도 엄청 바쁘게 움직이는 모양이야. 현재 트렌드에 가장 먹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고, 최적의 시기에, 최적의 역할로 데뷔해야 하니까. 전에 녹영이 너 데뷔할 때도 그런 식으로 했잖아.”

‘신인?’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으로 주민성의 이름이 스쳤다.  2017년 봄에 회사와 계약한 걸로 기억하지만, 제가 과거로 돌아오며 바뀐 사실들이 있으니 어쩌면 장현재가 주민성을 데려온 시기가 빨라진 걸지도 몰랐다.  회사를 나가는 저 대신 주민성을 본격적으로 키울 심산으로 말이다.  한녹영은 그의 등장 이후 쫓기는 사람처럼 항상 초조했던 예전의 저를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만큼이나 강현재에게 집착했던 주민성 또한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었다.  이제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을 낼 일은 없을 거다.  장현재를 떠날 결심이 확고한 탓인지 주민성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려도 마음은 평온하기만 했다.

“나 참. 이제 녹영이는 나갈 사람이라 이건가. 치사하게 구네. 정아를 냉큼 빼가다니. 한수, 얼른 출발해라.”

마지막으로 밴에 탑승한 박상호가 투덜거렸다.  네, 하고 대답한 장한수가 밴을 출발시켰다.

“어제도 잠을 별로 못 잔 탓에 녹영이 얼굴이 푸석하다.”

박상호의 말에 정지해가 가방에서 챙겨온 팩을 꺼냈다.

“촬영 장소에 가는 동안 이거 붙이고 있자.”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 핀으로 고정한 정지해가 한녹영의 얼굴에 팩을 붙여주었다.  한녹영은 목베개를 한 후 얼굴에 팩을 붙인 채로 등받이를 뒤를 넘겨 잠시 눈을 붙였다.

“녹영아, 도착했다.”

박상호가 한녹영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한녹영이 부스스 눈을 떴다.  한 십 분 졸았나 싶었는데 어느새 1시간도 더 지나있었다.  붙이고 있던 팩도 사라진 상태였다.  한녹영은 목을 좌우로 돌리며 일어났다.

오늘의 첫 스케줄은 맨큐 2월호에 실릴 야외 화보 촬영이었다.  촬영 장소는 여주라고 들었다.  무슨 회사의 연수원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디 회사라고 했더라.  바쁜 와중에 건성으로 들었던 터라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느 회사건 상관없지만.

밴에서 내리자 이미 도착해 한창 촬영 준비 중인 맨큐 팀이 보였다.  투명하게 안이 비치는 건물 앞에 오늘 한녹영이 입을 의상들이 이동식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그 밑에는 의상에 맞춰 신을 신발들도 가득했다.  그 외 자잘한 소품들도 보였다.

“안녕하세요.”

한녹영은 주변을 구경할 틈도 없이 서둘러 맨큐 팀을 향해 다가가며 인사했다.  칼바람이 휑휑 몰아치는 잔디밭에서 오돌오돌 떨어가며 포토그래퍼와 머리를 맞댄 채 최종 컨셉을 점검하고 있던 메인 에디터 이은수가 움찔하며 시선을 들었다.

“녹영 씨. 왔어?”

웬일이냐는 눈빛이 한녹영을 훑었다.  반갑게 인사를 해도 거만하게 굴며 고개만 까닥하는 시늉을 하더니만.  한녹영의 화보가 실리면 잡지 판매부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탓에 2월 발렌타인 특수를 노리고 섭외하긴 했는데, 한녹영 기획사에서 오케이한 순간부터 걱정이 컸다.  가뜩이나 까다로워서 촬영 때마다 애를 먹었는데, 심지어 이번 촬영은 야외다.  그것도 칼바람이 몰아치는 12월에.  춥니 마니하며 오만 짜증을 부려댈 한녹영을 생각하며 위가 조여드는 기분으로 기다렸는데, 예상과는 달리 먼저 인사를 해오는 한녹영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심술이 없었다.  심술이 다 뭔가.  방송 혹은 사진에서나 보던 꿀 떨어지는 미소까지 달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달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달콤한 미소였다.

“제가 늦었나요?”

심지어 약속시간에 칼같이 도착했고, 겸손한 척 늦은 거냐고 묻기까지 한다.  이은수는 얼떨떨해 하며 대답했다.

“아니야. 오늘 컨셉은 대충 들었지? 누가, 어떤 고백을 해와도 다 받아줄 것 같은 다정하고 달콤한 남자가 되어야 해. 그러면서도 섹시함을 놓치지 않는.”

“네.”

“오늘 녹영씨가 입을 의상들이야. 신진 디자이너 정한희 작품인데, 슬림한 체형의 녹영씨가 입으면 핏이 아주 예술일 거야.”

이은수가 준비해온 수트들을 보여주었다.  내년 봄 신상으로 나온 연한 파스텔 톤의 수트들은 그냥 딱 보기에도 얇았다.  거기다 오늘은 올해 들어 최고로 추운 날씨라고 뉴스부터 귀가 아프도록 떠들어댔을 만큼 추운 날씨였다.  패딩으로 꽁꽁 동여매고 있는 데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인데, 얇은 봄 수트 하나만 입은 채 촬영을 해야 하니 꽤 고역일 거다.  벌써부터 손이 곱는 느낌이지만 한녹영은 애써 웃었다.

“보기만 해도 춥긴 하네요. 오늘 엄청 춥다고 하니 집중해서 찍고 야외촬영은 얼른 접어요.”

“난 인사 안 시켜줘?”

한 손에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있어 누가 봐도 직업을 짐작할 수 있는 장발의 남자가 웃는 낯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오늘은 자주 보던 포토그래퍼가 아니네?  한녹영이 그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당

“한녹영이라고 합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난 김춘영이고, 오늘의 포토그래퍼인데······ 사진발인가 했더니 실물도 죽이네. 과연 악마의 한녹영이라 불릴 만 해.”

“네? 그게 무슨······.”

김춘영이 빙글빙글 웃으며 한녹영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펴보더니 만족스레 씩 웃었다.

“우리끼리 부르는 본인 별명인데 몰랐나? 영감을 자극하는 좋은 모델이고, 카메라의 사랑을 받아 막 찍어도 사진은 예술로 나오는데······ 성질이 고약해 찍고 나면 진이 빠진다지. 피사체로는 좋지만 성격이 문제라 모델이 한녹영이라면 작업을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더라고. 그 고민하는 시간이 악마의 유혹을 받는 것처럼 힘들다나. 이번에 내가 한녹영씨 담당하게 되었다니 동료들이 고생하라며 안쓰럽게 보던데, 영문을 모르겠네. 각오 단단히 다지고 왔는데, 성격마저 이렇게 러블리해서 맥 빠질 것 같아. 이따 포즈나 표정도 이렇게 러블리 했으면 좋겠어.”

맨큐 쪽에서 나온 어시스턴트들이 일제히 헛기침을 시작했다.  김춘영이 왜 저래, 하는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한녹영은 홀로 웃었다.  프토그래퍼 김춘영이라고?  유쾌한 사람이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전 촬영 준비하고 올게요. 은수 누나, 저 처음에 뭐 입어요?”

“어? 어어? 이거. 첫 의상은 이걸로 하자. 신발은 이걸 신고.”

이은수가 내민 건 연핑크 색상의 수트였다.  신발은 흰색 로퍼.  그녀는 수트를 한녹영의 몸에 대보더니 고민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소품으로 모자를 써볼까. 신발 색상을 바꿀까? 정아 언니는 안 왔어?”

이은수가 정지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의상이 결정되면 그에 맞춰 메이크업과 헤어를 하려고 준비 중이던 정지해가 슬쩍 한녹영의 눈치를 보곤 “정아 언니는 다른 연예인한테 갔어요.” 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은수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한녹영 데뷔 때부터 함께 하더니.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암튼 정아 언니 없다니 우리끼리 해야겠네. 윤지야, 이리와 봐. 지해 너도 오고.”

이은수는 어시스턴트와 정지해, 그리고 김춘영까지 불러서 잠시 의논을 나눈 끝에 의상을 결정했다.  연핑크 수트 대신 연한 물빛 수트를 입고, 로퍼는 그대로 가기로 했다.  수트 상의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모자 대신 목에 타이만 매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메이크업이랑 의상 체인지는 저 안에서 하면 돼.”

이은수가 삼면이 유리라 안이 온통 훤히 내비치는 단층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 뒤쪽으로는 꽤 넓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다리 위를 걸으면 꼭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을 줄 듯했다.  이제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한녹영이 건물과 연못, 잘 가꿔진 나무들과 잔디밭을 차례로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시선을 멀리 던지니 꽤 떨어진 거리에 건물이 몇 개 더 보였다.

무슨 연수원이 이렇게 좋아?  연수원이 아니라 힐링원이라고 해도 되겠다.  잔디밭만 걸어도 절로 마음이 힐링 될 것처럼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녹영씨, 서두르면 안 될까?”

가만히 서서 연신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한녹영을 향해 이은수가 조심스레 재촉했다.  한녹영은 그제야 “죄송합니다.” 하고 말한 후 서둘러 실내로 들어섰다.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은 후 촬영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재했다.  바람이 진짜 매서웠다.  가뜩이나 상반신에는 재킷 한 장만 걸친 터라 ‘이러다 동사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을 만큼 추웠다.  한녹영은 금세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이은수와 김춘영은 만족했다.

“녹영씨, 요새 살쪘어? 이 수트가 스키니한 핏인데도 녹영 씨가 너무 말라서 좀 크지 않을 까 했는데, 딱 맞다. 살이 좀 붙으니 훨씬 보기 좋아.”

“요즘 많이 먹고 운동 중이에요. 생각보다 살이 잘 안 붙어서 걱정이었는데, 누나 보기에 좀 붙은 것 같아요?”

이은수가 한녹영의 가슴과 등을 만지작대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붙으면 퍼펙트할 것 같은데, 지금도 좋아. 체형이 점점 예뻐지네.”

“고마워요.”

한녹영이 싱긋 웃었고, 그제야 이은수가 “어라?” 하며 당황했다.  나 방금 되게 스스럼없이 한녹영과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한녹영과 작업한 이후 처음 겪은 일이라 어리둥절했다.

그때 촬영 준비를 끝낸 김춘영이 한녹영을 향해 손짓했다.

“녹영씨, 거기 나무 다리 위에 서봐. 어어, 그쯤에.”

김춘영이 큰소리로 위치를 선정해 주었다.  한녹영은 그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포즈를 잡았다.  트레이드마크인 이가 살짝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자 셔터를 누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좋았어! 그 포즈 그대로 고개만 약간 기울여서······ 오케이! 표정 좋고~ 이번엔 눈을 살짝만 내리깔아봐. 도도하면서 새침하게······ 좋았어. 녹영씨, 표정 좋은데. 완전 마음에 들어. 녹영씨, 딱 내 스타일이네.”

“작가님도 좋은데요. 셔터 누르는 모습이 예술이에요.”

입이 얼어서 말이 잘 안 나왔다.  한녹영이 얼어붙은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우스갯말을 하자 김춘영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녹영씨가 몰라서 그렇지 나야 늘 예술이야. 오늘 삘 최고인데 이 기세로 후딱 끝내버리자고!”

피사체가 좋아 카메라에 담는 맛이 최고인데다 바람이 좀 불어서 그렇지 햇볕도 좋고, 포즈도 좋고, 표정은 더더욱 끝내줘 신나게 셔터를 누르는 김춘영의 기분이 최고조를 찍었다.  김춘영은 신들린 듯 셔터를 눌렀다.

반면에 한녹영은 죽을 지경이었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눈이 시려 눈물이 나오려 하지 않나, 콧물이 흐르려 하질 않나, 손발은 얼어 감각이 없어진지 오래였다.  코끝과 양 뺨에도 추위로 인해 발갛게 홍조가 올랐다.  뿐이랴, 얼어붙은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억지 미소를 짓자니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잠시 쉬면서 뜨거운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지만, 쉬면 쉬는 만큼 촬영이 지체되기 때문에 꾹 참은 채 포즈를 취했다.

“의상 체인지 갑시다!”

김춘영이 외쳤다.  그가 컷을 확인해보며 “좋았어. 이것도 좋고, 이것도 괜찮네. A급 사진이 80퍼센트 이상인데?” 하고 만족하는 동안 한녹영은 두 번째 의상으로 갈아입었고, 의상에 맞춰 헤어도 수정했다.  이번엔 약간 개구진 느낌을 주기 위해 앞머리에 웨이브를 넣었다.  손에는 맨큐에서 준비해온 새파란 안개꽃도 한아름 안았다.  그리곤 두 번째 의상 촬영을 위해 김춘영이 말한 장소로 가려는 순간 오돌오돌 떨고 있는 정지해의 모습이 보였고, 옷 박스가 퍼뜩 떠올랐다.  또 잊을 뻔 했네.  한녹영이 박상호를 돌아보았다.

“참, 상호 형. 내가 아까 가져오라고 한 박스 있지. 그거 뜯어서 형이랑 한수 형, 그리고 지해 누나랑 순정이 한 개씩 나눠 갖고, 하나 남는 건 에디터 누나 줘. 각자 본인 건 사이즈 보면 알 거야.”

“사이즈? 뭔데 그래?”

패딩 한 벌씩 샀어, 라고 말하자니 왜 이렇게 쑥스러운지.  한녹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 하는 박상호에게 “그냥 뜯어보면 알아.” 하고 무뚝뚝하게 말한 후 촬영을 마저 하기 위해 달려갔다.  김춘영이 말한 장소에 서서 포즈를 잡으며 힐끔 보니 박스를 열어 패딩을 꺼내는 박상호의 모습이 보였다.  멀어서 표정은 잘 안 보이는데, 아마 놀라고 당황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안하던 짓을 해서 그런가.  왜 이렇게 쑥스럽냐.  괜히 등줄기가 막 근질거리는 것도 같고.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수줍게 웃었고, 김춘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방금 표정 죽였어. 이번엔 꽃다발을 등 뒤에 숨기듯이 하고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봐.”

“네!”

힘차게 외친 한녹영이 포도그래퍼의 지시대로 했다.

그렇게 의상 세 벌을 더 체인지 한 후에야 촬영이 끝났다.  진상 떨지 않고 진짜 열심히 촬영을 한 탓에 지체되는 시간 없이, 아니 오히려 예정보다 일찍 촬영을 끝냈는데도 어느새 오후 네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한녹영은 “오케이! 오늘 촬영 끝!” 이라는 소리와 동시에 밴으로 달려갔고, 담요를 쥔 채 대기하고 있던 박상호도 한녹영을 향해 달렸다.  그리곤 담요로 한녹영의 몸을 푹 감싼 후 제 몸으로 안다시피 한 채 밴으로 향했다.

“고생했다. 이거 쥐고 있어.”

박상호가 뜨끈뜨끈한 핫팩을 손에 쥐어주었다.  한녹영은 양손에 핫팩을 쥔 채 밴 안에서 잠시 몸을 녹였다.  이제야 살 것 같다.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자 노곤함이 느껴졌다.

“이제 살 것 같다.”

잠시 몸을 녹인 한녹영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패딩을 걸친 후 바깥으로 나왔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그리곤 철수 준비 중인 이은수와 김춘영, 그 밖의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다들 평소와는 다른 한녹영의 태도에 얼떨떨해 하며 인사를 받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갑자기 왜 저래?’ 하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번에 저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꾸준히 변한 모습을 보여주다 보면 업계에서 바닥을 치던 제 평판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겠지.  다만 이은수만은 예전보다 조금 따뜻해진 눈으로 한녹영을 보고 있었다.

“녹영씨, 이거 고마워.”

이은수가 약간 광택이 도는 실버 색상의 패딩을 걸친 채 한녹영에게 인사했다.  원래 신정아 몫으로 고른 거지만, 그녀가 없어 이은수의 몫이 된 패딩은 과하게 튀지 않으면서 세련된 맛이 있었다.  한녹영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는 보는 안목이 있다.  이은수가 입은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전부 다 어울렸다.  한녹영이 뿌듯하게 제 스태프들을 돌아보았다.  박상호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얼떨떨하고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긴 하지만 뭐 괜찮았다.

“원래 정아 누나 주려고 산 거지만, 누나한테도 어울리네요. 혹시 기분 안 나쁘죠?”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어. 입던 것도 아니고 새 건데. 녹영씨한테 옷 선물을 다 받고 오늘 횡재운이 있었나 봐. 고마워, 따뜻하다.”

“이제 회사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시간 괜찮으시면 우리랑 같이 식사하러 가요. 제가 살게요.”

9시부터 4시가 훌쩍 넘는 이 시간까지 식사도 거른 채 식사를 한 터라 허기져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식사를 권하는 한녹영의 다정한 웃음에 이은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아니야. 우린 회사로 들어가야 해.”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제가 협조 잘해서 촬영 예정보다 빨리 끝났잖아요. 다들 추운데서 고생했는데 근처 식당에 가서 뜨뜻하게 밥 먹고 가요.”

한녹영이 식사 제안을 거절한 이은수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스물일곱, 이제 곧 스물여덟이 되는 사내놈이 저보다 훨 작은 여성에게 애교를 부리자니 민망해 죽을 지경이지만,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다.  곤혹스러움이 더 크던 이은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녹아내리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한녹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못 말리겠다. 그나저나 녹영씨한테 이런 애교가 있는지 몰랐어.”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아껴뒀던 거죠. 상호 형, 근처에 이 인원 모두가 갈 만한 식당이 있나 알아봐줘.”

“근처에 여주 쌀밥 정식집 많아. 그 중 한 군데로 가면 될 것 같은·······.”

휴대전화로 근처 식당을 검색해본 박상호가 말하고 있을 때,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촬영은 끝났습니까?”

“네. 방금 끝냈습니다. 연수원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난이도 최상이라고 들어서 사실 협찬은 반쯤 포기한 채 촬영 협조 요청을 한 건데,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은수가 서둘러 남자에게로 다가가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식당에 식사를 준비해뒀습니다. 보니 점심도 거른 채 촬영을 하시는 것 같던데, 오셔서 다 같이 식사하고 가십시오.”

“네에?! 아, 아닙니다. 식사라니요. 장소 협찬해주신 것만도 황송할 지경인데, 진짜 괜찮습니다.”

이은수는 펄쩍 뛰며 사양했지만, 남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손님을 빈속으로 보낼 순 없지요.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오십시오. 이대로 가면 음식들 다 버려야 하는데, 음식 버리면 사후에 불지옥에 떨어집니다.”

이렇게까지 권하니 도저히 거절할 방법이 없다.  이은수는 매우 난처해하며 한녹영을 돌아보았다.

“녹영씨 돈 굳었네.”

“그러게요. 한 턱 쏘고 나중에 생색내려고 했는데. 달아두세요. 나중에라도 밥 한 번 꼭 살게요.”

“나 꼭 기억해둔다? 우린 뒷정리해야 하니까 녹영 씨가 먼저 가있어.”

한녹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고 말하는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 남자는 연수원 관계자겠지?

“형. 여기 어느 회사 연수원이랬지?”

“한녹영씨는 모르고 오셨습니까? 여긴 LK 엔터의 연수원입니다.”

박상호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남자가 했다.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한녹영에게 내밀었다.  LK 엔터라면 강준일의 회사잖아?  생각도 못한 터라 당황해서 얼떨떨하게 명함을 받았다.  명함에는 비서실장 한성준이라고 되어 있었다.

“몰랐······ 습니다. 연수원이 정말 좋네요.”

“네. 대표님이 취임하신 해에 본인 소유의 땅에 연수원을 지으셨죠. 아름다운 기획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장소에서 나온다며 가끔 회의를 이곳에서 진행하시기도 합니다.”

“아······ 네.”

“보시다시피 풍광이 예술이라 여기저기서 협찬 요청이 쇄도하지만 잘 해주지 않는데, 이번엔 대표님 특별지시로 협찬을 제공한 겁니다.”

강준일의 특별지시?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설마 모델이 나라서 촬영 협찬을 해주라고 한 건 아니겠······ 픽 웃음이 나왔다.  웬 과대망상인지.

“고맙다고 전해주십시오. 덕분에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거든요.”

감이 좋았다.  현장 반응도 좋았고, 무엇보다 모니터를 확인한 김춘영과 이은수의 표정이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버릴 컷이 하나도 없다나.  평소에도 사진은 잘 나오는데, 오늘은 역대급이라는 말에 기분이 으쓱해졌다.

“감사 인사는 한녹영씨가 직접 하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한성준의 말에 한녹영이 어리둥절해했다.

“네?”

감사 인사를 직접 하라니 무슨 의미지?  설마.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든다.  한녹영이 설마, 하며 물었다.

“강준일 대표님도 오셨습니까?”

“네. 오늘 아침 일찍 회의를 위해 기획팀 전체와 함께 내려오셨습니다. 아마 이제 슬슬 회의가 끝나갈 것 같군요. 우리도 점심도 거른 채 간단한 다과만 곁들여 마라톤 회의를 한 거라 우리의 식사를 준비하며 촬영팀도 같이 식사할 수 있게 하라고 하신 겁니다. 아, 회의가 끝났나 보군요.”

한성준이 식당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한 십여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며칠 굶은 걸귀들 마냥 전투적으로 밥을 먹는 중이었다.

“대표님 모시고 회의하다 보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모가 심해서 유난히 허기가 지거든요. 늘 저런 사람들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식판에 얼굴을 박다시피 한 채 밥을 먹는 직원들이 민망했나 보다.  한녹영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널찍한 식당 안을 훑어보았다.  강준일은 어디에······ 아, 저기 있네.  그는 직원들과는 좀 떨어진 자리에서 홀로 식사 중이었다.

“식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한성준이 친절하게 한녹영과 박상호, 정지해와 김순정에게 하나씩 손수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한 한녹영은 식판을 들고 입맛에 맞는 음식을 조금씩 담았다.

“와! 스테이크도 있다. 것도 직접 구워줘!”

박상호가 한녹영의 귀에 속삭였다.  슬쩍 돌아본 그는 군침이라도 흘릴 듯한 기세로 철판 위에서 자글자글 구워지는 큼직한 스테이크를 보고 있었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스테이크를 굽고 있는 요리사 앞으로 다가가자 그가 “팬입니다, 한녹영 씨.” 하고 말하며 잘 구운 스테이크를 한 입 사이즈로 잘라 식판 위에 올려주었다.  한녹영이 요리사를 향해 고맙다고 말한 후 살짝 웃어주었다.

“전 두 덩이 주십시오.”

그리곤 남의 집에 얻어먹으러 와서 염치없게 스테이크 두 덩어리를 요구하는 박상호의 귀에 “난 강준일 대표님한테 가볼게.” 하고 속삭인 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뒤에서 박상호가 강준일에게로 걸어가는 한녹영의 등을 보며 ‘네가 왜 강 대표한테 가는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따세요? 왜 혼자 식사 하십니까?”

강준일이 시선을 들었다.

“나와 같은 테이블에선 직원들이 편하게 식사할 수 없을 테니까. 밥이라도 편하게 먹으라는 배려지.”

같은 공간에서 왕따마냥 상사를 홀로 두고 식사하는 것도 그리 편하진 않을······ 편한 것 같네.  전투적으로 식사하는 직원들을 힐끔 돌아본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상사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싶진 않겠지.  상사라는 이름만으로도 불편한데, 강준일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이 있는데다 본인 성격도 얼음장 같은 구석이 있으니 말이다.  강준일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절간 같은 분위기로 식사하는 것보다 강준일을 따로 두고 편한 사람들끼리 모여 클럽처럼 왁자지껄하게 하는 편이 소화도 잘 될 테고.

“촬영 허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듣자니 촬영 장소로 협찬을 잘 안 해주신다면서요.”

“촬영 허가를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왜 한녹영씨가 하는 거지? 내게 촬영 장소 협찬을 요청한 곳은 맨큐라는 잡지이고, 난 그 잡지에 허가를 해준 건데.”

너한테 촬영 허가 해준 것도 아닌데 왜 오지랖이냐, 라는 의미 같았다.  한녹영이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내가 왜 감사 인사를 한 거지?  이은수가 제게 인사를 대신 전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설마 내가 모델이 너라 촬영허가를 해준 거라고 생각하고 인사를 하러 온 건가?”

한녹영의 뺨이 보일 듯 말 듯 아주 살짝 붉어졌다.  약간 생각했다.  LK의 연수원이고 강준일 대표 지시로 촬영 허가를 내준 거라는 말을 듣고.  한녹영이 식사를 하는 척 고개를 숙이며 홀로 웃었다.  한녹영 너, 웃긴다.  무슨 망상을 한 거야.

“생각한 모양이군.”

붉어진 얼굴을 본 강준일이 한녹영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한녹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냥 좀 넘어가주면 안 되나.  사람 민망하게 꼭 쐐기를 박아야 직성이 풀리지?

“네. 생각 했습니다. 안 됩니까?”

이왕 속내를 들켜버린 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해버렸다.  그리곤 잔뜩 골난 표정으로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고 꼭꼭 씹었다.  꼭 지금 내가 씹는 건 고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라고 하듯 강준일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그런 한녹영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강준일이 돌연 웃음을 흘렸다.  그간 봐온 실소나 헛웃음, 비웃음이 아니라 본인도 모르게 나온 것 같은 진짜 미소였다.  뭐야, 저렇게도 웃을 줄 알잖아?  한녹영은 고기를 씹다 말고 넋을 놓은 채 강준일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을 정도로 근사한 웃음이었다.  가뜩이나 잘생긴 얼굴에 웃음이 흐르니 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근사했다.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어. 그리고 한녹영씨가 모델이라 촬영 협찬 요청에 응해준 것이 맞고.”

식사를 끝낸 강준일이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네?”

한녹영이 멍하니 되물었다.

“모델에 한녹영 이름이 있어서 특별히 허가해줬다고 했어.”

강준일이 쐐기를 박듯 다시 한 번 정확한 음성으로 말해주었다.

“왜요?”

나 때문에 허가해준 거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해놓고 막상 진짜로 저 때문에 허가해줬다고 하자 ‘대체 왜?’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리둥절해하는 한녹영을 내려다보며 강준일이 짧게 웃었다.

“상이야. 홀로서기를 시작한 인형이 기특해서.”

“······.”

기특해서?  뭔 소리래.  제가 장현재에게서 벗어나기로 한 일이 강준일에게 기특할 까닭이 뭐라고.  황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웬일인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격려를 받은 것 같아 으쓱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묘했다.  그래서 살짝 수줍은 표정으로 턱을 긁고 있을 때 강준일이 한녹영 쪽으로 몸을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장래에 침대에서 뒤엉킬지도 모르는 사이잖아. 그것도 아주 뜨겁게.”

한녹영을 놀리는 강준일의 입매에 또 웃음이 흘렀다.  한녹영은 얼굴을 붉혔다.  괜히 심장이 술렁였다.  민망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근데 어쩌다 말실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너무 우려먹는 거 아냐?  저런 사람인줄 몰랐다.  내가 흘린 말이 사골도 아닌데!  되게 쿨하고 냉정한 줄 알았는데. 은근 뒤끝도 있고, 짓궂잖아?

강준일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고, 식사 중이던 한성준이 재빨리 일어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녹영이 멀어지는 강준일의 등을 바라보았다.  비서도 힘든 직업이구나.  밥 먹다 말고 따라나서야 하니.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벌떡 몸을 일으켜 막 식당을 나선 강준일을 따라잡았다.

“강준일 대표님!”

강준일이 걸음을 멈추었다.

“할 말이 남았나?”

“연락처 좀 알려주시죠.”

한녹영이 당당하게 연락처를 요구하자 강준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작업인가?”

“빚 갚으려는 겁니다. 하여간 오해하는 데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빨리 빚 털어버리고 싶으니 연락처 알려주세요.”

“난 빚쟁이한테는 개인연락처 알려주지 않아. 비서한테 연락하면 나와 연결 시켜줄 거다. 한 실장, 빚쟁이한테 명함 줘.”

강준일이 한성준에게 말했고, 한성준이 약간 미끄러져 내려온 안경을 추어올리며 단정하게 대답했다.

“이미 드렸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준일이 이제 됐지, 하는 눈빛으로 한녹영을 보더니 이내 돌아서서 성큼성큼 제 갈 길을 가버렸다.  한녹영은 아까 받아두었던 한성준의 명함을 꺼냈다.  누가 비서 명함 달랬나.  비싼 척 굴긴.  진짜 빚 갚으려고 한 건데, 설마 또 엄한 목적으로 접근하려 한다고 오해라도 한 건지.

안 자.  안 잔다고!  당신이랑 절대 안 잔다니까!  스폰 같은 거 안 받아!  스폰 해줄 테니 제발 한 번만 자달라고 애원해봐라.  내가 자주나.  속으로 잔뜩 투덜댄 한녹영이 한성준의 명함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돌아섰다.  괜히 서운해서 쳇, 하고 혀를 차고 있을 때 벌써 식사를 끝낸 건지 바깥으로 나오는 정지해가 보였다.  그녀는 머뭇대며 한녹영을 향해 다가왔다.

“녹영아.”

“벌써 밥 다 먹었어?”

“아직. 먹다 네가 바깥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여서 잠깐 나왔어. 할 말이 있어서. 저기······ 고, 고마워.”

패딩에 대한 감사인사를 하는 정지해의 얼굴에 먹쓱함이 가득했다.  난생 처음 선물한 한녹영도 어색하고 멋쩍었는데, 처음으로 선물을 받는 정지해 또한 어색하고 머쓱하긴 마찬가지였다.

“고맙긴.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간 나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지? 못되게 굴어서 미, 미안했어. 계약기간 끝나면 다른 회사로 옮길 거라 나랑 일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아.”

정지해는 어색하게 사과하는 한녹영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한녹영이 변했다는 말을 박상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했고, 장한수도 ‘좀 많이 얌전해진 것 같긴 해.’ 하고 박상호의 말에 동의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동안 당한 게 얼만데.  그런데 지난 일주일 지켜본 바 확실히 예전과 달라지긴 했다.  피곤하면 짜증부터 내곤 했는데,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골질은커녕 피곤한 티 한 번 안 냈던 것이다.

거기다 제 돈으로 스태프들에게 커피 한 잔 산 적 없던 한녹영이 오늘은 무려 선물까지.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웬만한 브랜드는 다 알고 가격까지 대충 꿰고 있는데, 꽤 비싼 패딩이었다.  아니 비싼 선물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저 한녹영이 무려 제게 사과를 하다니 긴가민가했던 의심의 추가 긴가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사람도 변할 수 있구나.  그것도 한순간에.

“박 매니저님이랑 같이 나간다며?”

“응. 고맙게도 상호 형이 나와 함께 가주겠대.”

“어디로 갈 건데?”

“아직 결정 못했어.”

생각보다 러브콜을 보내온 회사가 적었다.  여러 기획사들에서 계산기를 다 튕긴 후 제 가치를 평가해 최상의 조건을 걸고 접촉해올 시기가 된 것 같은데, 뜻밖에도 잠잠했던 것이다.  서너 군데에서 연락이 오긴 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신생 회사인데다 계약 조건이 별로라 거절했다.  반드시 거대 회사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열악한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그럴 바에야 1인 기획사를 차리지.

“넌 잘 될 거야. 너 때문에 열 받아서 미친 듯이 욕하다가도 CF나 드라마에 나오는 모습 보면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곤 했거든. 솔직히 그럴 때 되게 자존심 상했어.”

겉만 번드르르하지 속은 시궁창인 거 알면서도 매번 겉에 속아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때면 ‘이 속도 없는 년!’ 하고 스스로를 욕하곤 했었다.  정지해가 솔직히 말하자 한녹영이 웃었다.

“내가 좀 많이 예쁘긴 하지. 물론 날 예쁘게 꾸며준 누나 덕분도 있지만.”

“내, 내가 뭘.”

반짝반짝 빛나는 제 외모에는 정지해의 덕도 있다며 슬쩍 공로를 인정하자, 그녀의 뺨에 홍조가 피었다.

“그만 들어가자. 밥 다 식었겠다.”

정지해의 어깨를 살짝 감싼 한녹영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할 때 이제야 뒷정리를 끝낸 맨큐 팀이 우르르 몰려왔다.

“녹영씨, 여기서 뭐 해?”

“누나 기다렸죠.”

한녹영이 너스레를 떨자 이은수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예쁜 얼굴로 예쁜 말 하면서 누나 홀리면 못 써. 오늘따라 녹영씨가 자꾸 내 맘을 설레게 만드네?”

“설레었어요? 에디터 경력 8년 차라 이제 웬만한 연예인은 봐도 시큰둥하다는 은수 누나를 설레게 하다니 성공했는데요?”

이은수가 한녹영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 치며 또 한 번 눈을 흘겼다.  못 말려, 라는 얼굴이었다.

“밥은 어때? 맛있어? 나 완전 배고파서 세 그릇은 너끈할 것 같은데.”

“맛있어요. 스테이크도 구워주던데요? 제 매니저 형은 지금쯤 세 덩이째 먹고 있을 거예요.”

“그래? 역시 알아주는 재벌 계열사 연수원은 식당 클라스도 다른가 보네. LK 엔터 복지가 끝내준다는 얘기는 들었거든. 빨리 들어가자.”

한녹영은 이은수와 수다를 떨며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걸귀마냥 밥만 먹었던 직원들이 여유를 되찾고 한녹영을 힐끔힐끔 보기 시작했다.  “한녹영이다, 한녹영!” “오오,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아.” “우리 대표님이 워낙 잘생겨서 매일 눈호강이야 실컷 하지만 연예인 실물 느낌은 또 다르네.” 하고 수군거렸다.  한녹영은 제 식판을 들고 박상호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는 예상대로 세 덩이째 스테이크를 먹으며 “스테이크 맛 진짜 끝내준다. 슬쩍 물어봤더니 한우 투뿔이라더라. 녹영아, 너도 많이 먹어.” 하고 말했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식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맨큐 화보 촬영을 한 날로부터 사흘이 흘렀다.  사흘 동안 한녹영은 광고 한 편을 더 찍었고, 팬 사인회를 했으며, 한울 소속 여배우가 출연 중인 영화에 카메오 출연을 했다.

“이후 스케줄은 어떻게 돼?”

막 잡지 인터뷰를 끝낸 한녹영이 밴에 돌아와 축 늘어지며 물었다.  영화 카메오 출연을 위해 어젯밤 마지막 비행기로 제주도에 갔다가 촬영을 끝내고 곧바로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뷰를 해야 했던 탓에 온몸이 바윗덩이가 된 냥 무거웠다.

박상호가 녹초가 된 한녹영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다행이 영화 촬영이 NG가 많이 나지 않고 끝난 데다 인터뷰도 생각보다 무난히 진행되어 빨리 끝나 오늘은 지금부터 쉴 수 있었다.

“오늘은 더 없어. 이제 쉬면 돼.”

“다행이다. 진짜 힘들어 죽을 뻔 했는데.”

요샌 운동도 못했다.  간신히 검도 도장에 한 번 간 것이 전부였다.  지난 사흘은 유난히도 힘들어 식사를 등한시했더니 간신히 찌워놓은 살도 약간 빠져 걱정이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5kg 찌워야 하는데 이래서야 큰일이다.  찌기는커녕 도로 빠지고 있으니.

“집으로 갈래? 아니면 마사지샵으로 갈까?”

어깨가 뻐근해서 마사지를 좀 받고 싶긴 한데······.

“집으로 가.”

지금은 그냥 침대에 시체처럼 뻗어 있고 싶은 유혹이 더 컸다.  박상호가 장한수를 향해 “집으로 가자.” 하고 말했다.

“아, 너 인터뷰 하는 동안 이은수 에이터한테서 전화 왔는데, 이번 화보 촬영에서 A컷이 너무 많아 뭘 셀렉해야 할지 모를 정도래. 버릴 컷이 없다더라. 그래서 회의 끝에 잡지 구매자에 한해 신청을 받아 화이트 데이에 당첨자들에게 네 화보집과 사탕을 선물로 보내는 이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더라. 네 사진 보고 다들 역대 최고 부수를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며 희망에 들떠있대. 아무튼 이벤트 화보집에 들어갈 네 인사말과 사인이 필요하다는데 어쩔래?”

“응. 알았어. 어려울 것도 없는데 뭐.”

그깟 인사말과 사인이 뭐 어렵다고.  그걸로 잡지 판매부수가 쭉쭉 올라간다면 기꺼이 할 수 있다.  박상호가 시원하게 대답하는 한녹영을 뿌듯하게 보았고, 한녹영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박상호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한녹영이 막 잠들랑말랑 할 때였다.

“네. 박상호입니다. 아, 김현영 작가님?”

김현영이라는 이름에 한녹영이 번쩍 눈을 떴다.  축 늘어져 있던 몸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네. 통화 괜찮습니다. 녹영이도 옆에 있고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박상호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너와 통화하고 싶다는데? 근데 안 좋은 일 있나. 목소리가 영 별로다.”

왠지 손끝이 빳빳해지며 긴장감이 들었다.  예감이 안 좋았다.  한녹영은 입술을 축이며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네. 한녹영입니다.”

ㅡ 안녕하세요. 김현영이에요.

“네, 작가님. 안녕하셨어요?”

ㅡ 한녹영씨가 전에 도망자 진행 사항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셔서 전화 드렸어요.

“진척이 좀 있습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현영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감이 안 좋다.

ㅡ 아니요. 오히려 일이 꼬였어요. 정인호씨가 결국 주인공 역을 고사하셔서 다른 배우를 찾아봐야 해요.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질 끌다 이제야 고사한 건 괘씸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놀랍진 않았다.

ㅡ 1시간 전에 전화 와서 고사한 터라 지금 급히 회의 들어갔고요. 차철호 역에 배우 김남규를 캐스팅했는데, 김남규씨 역시 매니저를 통해 방금 연락 와서 캐스팅을 고사한다고 하네요.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는데, 촬영이 애초 예정보다 자꾸 미뤄져서 다른 일과 겹쳐 일정이 안 맞는다면서요. 회사에서는 계약 위반이라고 고소하니 마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지금은 캐스팅이 자꾸 꼬여서 지금 그게 가장 문제에요. 어째 출발이 쉽지 않네요.

한녹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배우 김남규가 배역을 고사했다니 제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달라졌다.  도망자에서 차철호 역은 김남규가 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다 못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차도영을 맡으면서 현실이 변하기 시작한 건 확실한데, 그로 인해 달라질 결과를 예상할 수 없어 무서웠다.

진정하자.  진정해.  도망자가 언론의 극찬을 받는 웰메이드 대박 드라마가 될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거다.  아니 제가 변하지 않게 만들 거다.  오히려 박지한이 차도영을 맡았을 때보다 더 열연해 몇 배는 더 잘 빠진 드라마로 만들 거다.

조금씩 마음을 진정시키며 도망자에서 차철호가 어떤 역이었는지 생각했다.  차철호는 차도영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동료 형사로 드라마 중간쯤에 피치 못하게 배신하게 되는 역이었다.  배신은 하지만 죽어가는 애인의 수술비 마련을 위한 것이었고, 배신한 보람도 없이 결국 그 애인이 죽는 약간 짠내 나는 역이라 욕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정표를 샀었다.  비중이 아주 큰 역은 아니지만, 제법 괜찮은 역이었다.  이런 역을 까다니,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다.

차철호 역에 어울릴 만한 배우가 누가 있을까?  주인공 역은 송정빈이 맡아 열연했고 결과가 좋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자신 있게 추천했지만, 차철호는 아니라 언뜻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설마 드라마 배역에 저 말고 또 다른 변수가 생길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한녹영은 눈이 아플 정도로 보았던 도망자에서의 차철호를 떠올리며 어떤 배우가 그 역을 맡으면 잘 해낼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ㅡ 주인공 역은 제가 배우 송정빈씨를 밀어보려고 해요. 감독님이 내켜하지 않아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제 생각에는 어울릴 것 같거든요.

“송정빈 선배한테 대본을 주고 오디션을 보면 어떨까요? 워낙 기본기가 탄탄하신 분이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지도 모르는데요.”

ㅡ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그나저나 차철호 역은 어느 배우를 캐스팅하면 좋을지 감이 안 잡혀요. 김남규씨가 이제 와서 계약 파기를 할 줄은 몰라서 지금 머리가 멍해 아무 생각도 안 나네요.

김현영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한녹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박상호와 시선이 마주쳤고, 순간 장한경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일을 장한경에게 빚 갚을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자연스레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고심했는데, 방법이 생각났다.

“작가님, 제가 아는 사람을 추천해도 될까요?”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가 떨렸다.

ㅡ 네?

“무명 배우지만, 연극을 했던 친구라 기본기는 있습니다.”

김현영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난색을 표하고 있을 그녀의 표정이 그려졌다.  한녹영이 숨을 크게 삼켰다.

ㅡ 끼워 넣기를······ 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누굴 끼워 넣으려고?”

박상호와 김현영이 동시에 말했다.  한녹영은 박상호를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나중에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아니요. 끼워 넣기를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 이미 사인도 했고, 이제 와 캐스팅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끼워 넣기를 할 입장도 아니잖아요. 그저 차철호 역에 어울릴 만한 배우가 떠올라 추천을 하려는 겁니다. 워낙 무명이라 이름을 말해도 모르실 테니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 여부를 진행하면 어떨까요? 진짜 괜찮은 친구입니다. 도망자에 대한 제 애정 아시잖아요. 그런 제가 아무나 추천할 리가 없다는 거 믿으시죠?”

한녹영은 김현영이 오해하지 않도록 차분하게 설명했다.

ㅡ 한녹영씨가 그렇게까지 얘기하신다면······ 감독님과 얘기는 해볼게요. 연락 드릴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다른 소식 있으면 또 연락주세요.”

ㅡ 제 드라마에 대한 한녹영씨의 애정이 큰 것 같아 진짜 좋아요. 우리 꼭 대박 드라마로 만들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별 말도 아닌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속사포처럼 다다다 말한 김현영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짧게 웃은 한녹영이 휴대전화를 박상호에게 넘겼다.

“너 누굴 생각하고 있는 거야? 혹시 지리산 흑돼지 청년이야?”

지리산 흑돼지 청년이라니.  장한경을 표현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멀쩡한 이름 두고.”

“이름이 장······ 뭐였더라?”

박상호가 장 뭐였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휴대전화에 등록해둔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장한경.”

한녹영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 장한경! 나도 잊어버린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네. 대체 어떤 연극에서 무슨 역을 했기에 네가 이렇게 몸 달아 하는지 모르겠다.”

“정우 쪽에서 오디션 보게 해주겠다는 전화 오면 형이 장한경한테 연락해봐. 혹시 오디션 받아볼 생각 있느냐고 말이야. 아마 한다고 할 거야.”

“너 진심이야? 그저 무대에서 한 번 본 것뿐이라며. 그러다 지리산 흑돼지 청년인지 장한경인지 아무튼 그 청년이 제대로 못해내면 네가 욕먹어. 너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위해 리스크를 감당할 필요는 없잖아.”

“괜찮아. 그리고 막말로 끼워 넣기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디션을 볼 수 있게 기회만 주겠다는 거야.”

이후 역을 따내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장한경의 실력에 달렸다.  한녹영은 그저 예전 제가 저지른 짓의 잘못을 빌기 위해 장현경에게 기회를 줄 뿐이었다.  아마 충분히 실력으로 배역을 따낼 것 같지만.

“정우 쪽에선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

“김 작가랑 감독한테 잘 말할게. 나와 연관해서 생각하지 말고 실력만 보고 결정하라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대체 연기가 어떻기에 네가 이 유난인지 궁금하긴 하다. 얼굴은 제법 괜찮던데.”

“오디션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하면 형이 장한경한테 연락해서 미리 실력 테스트 해보면 되잖아.”

“그래야겠다. 네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영 불안해서 안 되겠어. 가뜩이나 조심스러운 시기인데 내가 먼저 테스트 해보고 실력이 안 되면 내 선에서 커트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좋도록 해.”

한녹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예전에 장한경한테 완전 반해서 난리법석을 떨었던 박상호의 모습을 알기에 그가 저렇게 으름장을 놓아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차철호 역은 장한경이 맡게 될 테고.

한녹영은 장한경이 반드시 캐스팅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인공 역은 송정빈이 맡을 테니······ 이제 더 이상의 문제는 없겠지?  제발 그랬으면.  어서 촬영에 들어가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인데, 자꾸 늦춰지고,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 속상했다.

“눈 좀 붙여. 집에 도착하면 깨워줄게. 쟤네들은 이미 뻗었다.”

박상호가 밴의 가장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입을 벌린 채 졸고 있는 정지해와 김순정을 가리키며 웃었다.  한녹영을 따라 여기저기 바쁘게 다닌 그녀들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거기다 원래는 셋이 나눠했던 일을 둘이서 다 해내자니 더더욱 피로가 쌓였을 거다.

“형도 피곤하지?”

“너 촬영하고 인터뷰 하는 동안 난 잠깐잠깐 졸아서 괜찮다.”

졸기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모습을 틈틈이 봤는데.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박상호의 얼굴도 피로감에 절어 새까맸다.

“내일은 열흘 만에 쉬는구나. 내일 닭 사다가 삼 넣고 푹 고아서 백숙해먹자. 너 열흘간 쉼없이 뺑뺑이 도느라 얼굴이 까칠하다.”

박상호가 진하게 진 한녹영의 다크서클을 보며 안쓰럽게 혀를 찼다.  한녹영이 제 얼굴을 만지작댔다.  팩은 매일 붙였는데도 까칠한 느낌이 있었다.  내일은 관리를 받으러 가야겠군.

“사다 먹어. 고생스럽게 뭘 만들어 먹어.”

“음식은 정성이야. 정성으로 고아줄 테니 잔소리 말고 먹어. 그래야 또 한동안 뺑뺑이 돌지.”

박상호 말이 맞았다.  보양식을 먹고 힘을 비축해둬야 버티지.  굳이 해준다니 고맙게 먹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라도 잠을 청하려고 도로 눈을 감았을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한녹영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한녹영은 눈을 감은 채로 전화기를 꺼내 받았다.

“여보세요. 한녹영입니다.”

ㅡ 나다.

전화기를 통해 들으면 실제보다 더 다정하고 나른하게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장현재였다.  한녹영이 눈을 떴다.

“응.”

ㅡ 오늘 스케줄 끝났다던데. 집에 돌아가는 중이야?

제 행적에 대해 박상호가 시시콜콜 보고했을 리는 없고.  한녹영이 운전 중인 장한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뒷꼭지가 근질근질한지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응. 집으로 가는 밴 안이야.”

ㅡ 오늘은 피곤할 테고, 내일 쉬지? 내일 점심 같이 하자.

한녹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이 끝인 줄 알았는데.  더 이상 개인적으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장현재의 전화가 놀랍고 뜻밖이었다.

괜찮다고 하더니 저도 모르게 졸았던 박상호가 어느새 눈을 뜨고 한녹영을 보고 있었다.  무슨 전화인데 표정이 심각한 건지 걱정된다는 표정이었다.

“한 열흘 쉼 없이 스케줄 소화했더니 피곤해. 모레부터는 또 스케줄이 빡빡해서 내일은 쉬고 싶어.”

ㅡ 기획사 대표와 소속 배우라는 관계를 끝낼 생각인진 몰라도 개인적인 인연까지 끊을 참이냐?

“그렇게 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난 그런 걸로 알았는데.”

ㅡ 내가 개인적인 연은 남겨두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되면 내가 회사를 떠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한녹영이 흐릿하게 웃었다.  회사만 옮기고 장현재와의 사적인 인연을 남겨둔다면 인형 신세를 폐업하겠다는 제 결심이 무색해진다.  지난 수 년 그에게 길들여진 인형 기질이 다시 발동할지도 모르는데.  한녹영은 장현재와의 모든 인연을 정리하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그에 관한 기억만 머릿속에서 삭제하고 싶었다.  욱신거리고 아픈 마음은 병신처럼 그에게 집착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 기꺼이 지고 가겠지만, 더 이상 휘둘릴 마음은 없었다.

“형 나 진짜 피곤해. 이만 끊을게.”

장현재가 뭐라 대꾸하기 전 한녹영이 먼저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장현재와의 통화 도중 이렇게 일방적으로 먼저 끊은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늘 저는 조금이라도 더 통화하고 싶어 안달을 냈고, 장현재는 그런 저를 약간 성가셔하며 먼저 툭 끊어버리곤 했었다.  숨소리라도 더 듣고 싶어 휴대전화에 귀를 바짝 대곤 했는데.  먼저 전화를 끊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막상 해보니 별 것도 아니다.  너무 쉬워 허탈할 지경이었다.

박상호가 “장 대표?” 하고 물어왔다.  응, 하고 대답한 한녹영이 눈을 감았다가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도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빚 갚아야 하는데.  돌연 강준일이 번뜩 떠오르며 그에게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상도 하지.  왜 장현재로 인해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더더욱 강준일이 생각이 강하게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깐 망설였던 한녹영이 지갑에서 한성준의 명함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 한성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녹영입니다. 강준일 대표님과 통화하고 싶은데 괜찮으시냐고 여쭈어주시겠어요?”

ㅡ 안녕하세요. 한녹영씨.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표님께 여쭙겠습니다.

한녹영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잠깐 기다렸다.  높은 분이라 그런지 통화 한 번 참 번거롭다.  속으로 투덜대고 있을 때였다.

ㅡ 빚쟁이신가.

한녹영이 잠깐 숨을 멈추었다.  휴대전화를 통해 듣는 강준일의 목소리가 낯설어 저도 모르게 순간 긴장하고 말았다.  실제 목소리는 묵직하고 나직해 위엄 있고 냉정하게 들렸는데,  휴대전화를 통해 들으니 묘한 울림이 느껴지는 것이 색달랐다.

“빚 갚고 싶은데 내일 시간 되십니까?”

참았던 숨을 내쉰 한녹영이 다짜고짜 물었다.

“요즘 제가 스케줄이 많아 내일 아니면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거든요.”

ㅡ 나 역시 한가한 사람은 아닌데.

그야 안다.  무려 대표님이 아니신가.

“내일 바쁘세요?”

ㅡ 바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미간을 모은 한녹영이 재차 물었다.

“잠깐의 여유도 없습니까? 2시간, 아니 1시간이라도 좋은데요.”

어떻게든 내일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자 잠깐 한숨을 내쉰 강준일이 물었다.

ㅡ 빚은 어떤 식으로 갚을 건가?

술값을 현금으로 주겠다고 할 순 없고, 또 술을 산다는 것도 이상하니.

“밥 살게요. 어떻게든 갚지 않으면 화장실 갔다가 뒤를 안 닦고 나온 것처럼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들 것 같아 그러니 가능한 내일 시간 좀 내주세요.”

ㅡ 표현 한 번 지저분하군. 한녹영 씨가 사주는 밥이 참 향기롭겠어.

한녹영이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표현이 좀 그래서 민망했다.

“시간······ 되세요?”

ㅡ 그렇게까지 내게 밥 사주길 원한다니 1시간 정도는 시간을 내도록 하지. 내일 점심 어때. 12시에 여의도 라미르에서.

“네. 내일 뵙······.”

말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강준일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하여간 인정머리 없긴!  한녹영이 투덜대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강 대표 만나려고?”

통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박상호가 물어왔다.

“어. 일전에 신세진 일이 있어서 갚으려고.”

“무슨 일인데?”

“형. 나 피곤하다. 눈 좀 붙일 테니 지해 누나랑 순정이부터 내려주고 빌라로 가.”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분명 비집고 들어와 꼬치꼬치 캐물을 걸 알기에 서둘러 말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그런 한녹영을 수상쩍게 보던 박상호가 이내 혀를 차며 담요를 덮어주었다.

질문 세례를 피하려고 눈을 감았는데 피곤하다보니 진짜 잠 든 모양이다.  박상호가 몸을 흔들어 눈을 떠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한녹영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다 왔어. 내리자. 한수 오늘도 수고 많았다. 내일 푹 쉬고 모레 보자.”

“어, 형. 잘 들어가. 녹영이도 잘 쉬고.”

운전석에서 장한수가 작별인사를 해왔다.

“한수 형. 내 행적 대표님한테 보고해?”

“어? 어어······ 그게······ 그렇게 됐다. 녹영아, 나 대표님한테 월급받는 월급쟁이야.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없어. 그래도 별 말은 안했다. 스케줄 잘 끝났냐기에 그렇다, 이동 중이다, 끝나서 집으로 가는 중이다, 별 일 없었다, 뭐 이 정도밖에 말 안했어.”

장한수가 한녹영의 눈치를 보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박상호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한녹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얼마 안 됐어. 열흘 전부터인가? 전에는 한 번도 나한테 네 행적에 대해 물은 적 없는데 갑자기 물어 와서 좀 이상하긴 했지만, 네가 회사 옮긴다니 접촉하는 회사 없나 정보 캐려나보다 생각했지. 특히 누구 특별한 사람 만난 적 없는지 유난히 묻더라고. 혹시 네가 기분 나쁘다면······ 근데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너랑 상호 형은 떠날 사람이지만, 난 남을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봐야 해.”

박상호가 계속 스파이 짓을 하겠다는 장한수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틀린 말도 아니고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딱히 뭐라고 야단치진 않았다.  한녹영 역시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던대로 해. 내리자.”

한녹영이 박상호의 어깨를 치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밴의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한녹영도 뒤따라 내렸다.

“네가 정말 다른 회사로 옮긴다니 똥줄이 타는 모양이지. 지금껏 안하던 짓을 하는 걸 보니. 언제 장 대표가 네 행적에 대해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냐? 없었잖아.”

“궁금해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쪼르르 전화해서 보고 했으니까.”

한녹영이 바른 말을 하자 박상호가 피식 웃는 걸로 동의를 표했다.  정말 예전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 다 말했고, 메시지도 수시로 보냈던 탓에 장현재가 제 행적에 대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손바닥 보듯 훤히 알았을 거다.  지금 생각하니 참 귀찮고 성가셨을 것 같았다.  시시때때로 전화며 문자질이며 해댔으니.

걸핏하면 사랑해달라고 졸랐고, 저만 봐달라고 투정을 부려댔으니 가끔 제가 진저리나게 귀찮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영택 표현에 의하면 화수분이 사라지니 아쉬운 한편 성가신 존재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선 후련해하고 있지 않을까?  쓰게 웃으며 집안으로 들어섰던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실 소파에 한녹영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리해야 할 사람들이 남아있었지.  바로 가족들 말이다.  장현재라는 더 급하고 더 높은 산을 먼저 넘느라 가족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한녹영의 눈매가 단단해졌다.  장현재의 인형 신세를 폐업신고 했으니 이제 가족들의 호구 노릇을 접을 차례였다.

“뭐야. 언제들 온 거야.”

박상호가 낮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의 낯에 짜증이 서렸다.  두 사람은 과자와 맥주를 먹어대며 TV를 향해 낄낄대고 있었다.  TV에 열중하느라 한녹영이 돌아온 것도 몰랐다.  전에 부모가 아들의 집 비밀번호도 몰라서야 되냐며 애원하기에 알려줬더니 이후로 돈이 필요해지면 이렇게 제멋대로 들어와 있곤 했다.  박상호가 성큼성큼 소파 테이블로 걸어가 리모컨을 집더니 TV 전원을 툭 꺼버렸다.  그제야 한녹영의 아버지 한만식이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들 왔구나.”

새어머니 김영숙 역시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 과장된 몸짓으로 일어나 한녹영을 향해 다가왔다.

“우리 녹영이 이제 오니? 요새 바쁜가 보구나. 한참 기다렸지 뭐니. 너랑 같이 밥 먹으려고 내가 곰국 고아왔는데. 저녁은 먹었니? 겉절이도 아주 맛있게 해왔으니 안 먹었으면 지금 후딱 차려줄게.”

소매를 걷어붙이며 부엌으로 향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들의 끼니 걱정에 여념 없는 어머니였다.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전에는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두들기는 아버지나 친아들을 대하듯 하는 새어머니의 행동의 목적이 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1억이나 된 빚을 제 앞으로 달아놓고 야반도주했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2년 반 정도 전쯤 느닷없이 나타나 ‘잘못했다. 너만 남겨두고 도망을 갔으니 우리가 죽일 죄인이다.’고 펑펑 울었을 때 악어의 눈물이라는 걸 알면서 용서해주었다.  제가 뜨자 돈을 목적으로 거짓된 애정을 주는 걸 알면서도 좋았던 모양이다.  가식이라도, 계산된 애정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식사는 됐습니다.”

“우리 아들 피곤해 보이는구나. 일이 많이 힘들지? 이리 와서 앉아.”

한만식이 한녹영의 손을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한녹영은 “이 아버지가 안마라도 해주련?” 하고 말하더니 제 손을 토닥이는 한만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는 딱 한 달 만에 새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한녹영보다 세 살 어린 새어머니는 두 자식과 함께였다.  외모는 그저 그렇지만 애교가 넘치는 새어머니에게 푹 빠진 아버지는 한녹영을 등한시했고, 외조모가 떠난 이후에는 쓸모없다며 구박하기 바빴다.  새어머니 역시 전실 자식인 한녹영을 눈엣가시 보듯 했고, 새어머니의 두 자식의 괴롭힘까지 더해져 한녹영의 어린 시절은 늘 불행했다.  외조모까지 저를 버리고 떠나버린 탓에 기댈 곳 하나 없어 언제나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날 사랑하지 않는 가족들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만 빼고 화목한 가족들을 부럽게 지켜봤다.  하하호호 웃으며 다정하게 둘러앉아있는 틈에 저도 끼고 싶었다.  대들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아버지가 매 대신 다정한 손길로 저를 쓰다듬어주길 원했다.  마음속에 그런 염원이 언제나 있었다.  그래서 저들이 원하는 돈을 내어주면 거짓 애정이 돌아오는 걸 알기에 그 거짓 애정이라도 구하고자 언제나 돈을 내어줬다.

저는 장현재에게는 말 잘 듣는 인형이었고, 가족에게는 손을 벌리고 다정한 가족인 척 연기만 해주면 돈을 척척 내어주는 호구였다.  그것도 상호구.

제가 몰락했을 때 가족들 역시 제게서 등을 돌렸다.  심지어 면회조차 오지 않았다.  새어머니와 그 자식들은 남이니 그렇다 쳐도 친혈육인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누워있을 때 가족들의 면회 대신 받은 건 사기꾼이라는 오명이었다.  사업병에 걸린 아버지가 제 이름을 팔아 여기저기서 돈을 꾸곤 제가 황산 테러를 당해 더 이상 연예인을 할 수 없을 것 같자 그대로 잠적해버린 탓에 사기 혐의로 피소되었던 것이다.  바보 같이 가족 간에도 서주면 안 된다는 보증까지 서줬지.

정작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겐 모질게 굴어 버림받았고, 진작 정리해버렸어야 하는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호구처럼 굴다가 결국 버림받았다.  잘못 살아도 한참 잘못 살았던 삶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살았는지.  갖지 못한 것에만 매달려 살았던 실패한 인생이었다.

한녹영은 어머니의 은혜로 과거로 돌아오며 더 이상 가족들에게 호구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 또한 했었다.  아무리 돈을 퍼줘 봤자 저들에게 저는 그저 돈줄일 뿐 가족도 뭣도 아님을 알게 되었으니까.

“아들, 아버지가 기막힌 사업 아이템을 발견했거든.”

“나도 네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이번엔 정말 기막히더라. 분명 대박 날 사업 아이템이었어.”

한만식이 슬슬 본론을 꺼냈고, 그 옆에서 김영숙이 맞장구를 쳤다.  박상호가 또 시작이군, 하는 얼굴로 혀를 찼다.  성질 같아선 당장 끌어내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작자들이지만, 어쨌든 한녹영의 아버지고 새어머니라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이번에도 또 힘들게 번 돈 가족이랍시고 척 내어주겠지.  다른 데선 제법 야무진데 이상하게 장현재와 가족들 앞에선 한없이 물러져서 스스로 상호구를 자처하는 한녹영이 때때로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이제 장현재에게서는 벗어날 모양이니 한녹영 등에 빨대 꽂고 쪽쪽 피 빨아먹는 이름만 가족인 저 거머리들만 떼어내면 될 텐데.

박상호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 한녹영이 한만식에게서 손을 빼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놈의 사업병 지겹지도 않으세요? 아버진 사업할 능력 없어요. 한평생 날건달로 살아와놓고 사업은 무슨. 아무나 하는 게 사업이면 대한민국에 사업자 아닌 사람이 없게요.”

“어? 내가 두어 번 사업에서 실패하긴 했지만 이번엔 진짜라니까. 이번 한 번만 더 이 아버지를 밀어다오.”

한만식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제나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툴툴대다가도 조금만 더 비위를 맞춰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돈을 내어주곤 했던 한녹영이었다.  한만식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밀어주긴 뭘 밀어줘요. 밀어주는 것도 진짜 될 법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죠. 되지도 않는 사업병 때려치고 일이나 해요.”

“사업자금······ 대줄 마음이 없다는 뜻이냐?”

한만식이 바로 정색하며 물었다.  이제야 한녹영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업자금뿐만 아니라 앞으론 생활비까지 일절 끊을 생각인데요. 새어머니 자식들은 아직도 놀고먹어요? 스물넷이나 먹었으면 제 용돈벌이는 스스로 해야지, 언제까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내 돈을 갖다 쓸 거래요?”

“아직 학생이잖아.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글쎄요.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던데. 지금 둘 다 휴학 상태잖아요. 공부는 무슨. 재은이는 그 얼굴로 되지도 않을 연예인을 하겠다고 깝치고 다니는 모양이고, 재준이는 능력도 없는게 스포츠카 끌고 클럽이나 다니며 여자들이나 꼬시는 모양이던데, 이참에 정신 차리게 군대나 보내지 그래요?”

적나라한 지적에 김영숙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무, 무슨 그런 말을. 어쨌거나 네 동생들인데······.”

“누가요? 재은이랑 재준이가요? 나와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무슨 동생이요? 자라며 형, 오빠 대접 받은 적도 없는데. 그러고 보니 새어머니한테서도 아들 대접 받은 기억이 없네요. 언제나 식충이, 쓸모없는 돼지 새끼, 나가 뒈지지 왜 버티고 있어, 하는 말만 들었지. 아, 실제로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 얼어 죽으라고 팬티 한 장 입혀서 내쫓기도 했던가?”

가족놀이를 하느라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동시에 자조도 들었다.  한녹영, 이 상등신아.  스스로를 향해 매몰찬 욕설을 던진 한녹영이 말을 이었다.

“2년 반인가요. 그동안 세 번이나 사업자금이랍시고 돈 대줬고, 달에 오백씩 생활비랍시고 대줬으면 할 도리는 다 한 것 같네요.”

“무슨······ 의미냐?”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한만식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두 분 모두 사지 멀쩡하니 충분히 일할 수 있잖아요. 재준이 재은이야 말 할 것도 없고. 네 사람 생활비는 이제 네 사람이 벌어서 해결하라는 뜻이에요. 더 이상 돈 못 대줘요.”

“이 아버지를 버리겠다는 뜻이냐?!! 너는 이 큰집에 살면서, CF 한 편만 찍어도 억대의 돈을 만지면서?!”

“내가 큰집에 살고 CF로 억을 벌건 말건 아버지와 무슨 상관인데요.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 못하죠. 날 사채업차한테 떠넘기고 도망칠 땐 언제고. 그걸 봐주고 2년 반이나 호구 노릇했으면 충분히 한 거 아닌가요?”

“그, 그때는 그만한 사정이······.”

“사정은 무슨.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자식들은 챙겼으면서 친아들인 난 사채업자들에게 눈깔이 파이건, 내장이 떨어져나가건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겠죠. 나도 참 상병신이었지. 한 번 버렸으면 두 번 세 번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호구 노릇을 해댔으니.”

원래 없던 애틋한 가족의 정이 원할 때마다 돈을 쑥쑥 빼준다고 생기는 것도 아닌데, 참 바보 같았다.

예전 일을 언급하자 한만식과 김영숙이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댔다.  하지만 반성은커녕 더 이상 호구 노릇 하지 않겠다고 하자 억울하고 분한 얼굴이었다.

“이 새끼가 감히 아버지한테 무슨 망발을······!!”

다시 예전 버릇이 나온 한만식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한녹영을 팰 듯 다가서자 박상호가 재빨리 막아섰다.  한만식은 박상호의 싸늘한 눈에 주춤했다.  한녹영이 실소했다.

“형, 두 분 바깥으로 정중히 모셔다드리고 비번 바꿔. 관리실에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전하고. 난 피곤해서 씻고 잘게.”

“어, 그래. 어서 들어가라.”

한녹영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  그 사이 박상호가 한만식과 김영숙을 바깥으로 내몰았다.  두 사람은 내쫓기며 빌라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후레자식이라는 둥, 부모를 버리고 잘 사는지 두고 보겠다는 둥, 모질고 독한 새끼라는 둥 막말을 서슴치 않았다.

두 사람을 강제로 택시 태워 보낸 박상호가 돌아왔을 때 옷만 갈아입은 한녹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중이었다.  잔다더니 뭐 하느냐고 말을 걸려던 박상호가 심란한 눈빛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한녹영이 우두커니 보고 있던 TV 프로그램은 가족 드라마 재방이었다.  그것도 드라마의 종방 부분인지, 가족들 간의 갈등이 해소되어 화목해진 모습이 막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보는 한녹영의 마른 얼굴에 기분이 싸해졌다.

한만식과 김영숙에겐 보는 사람마저 정떨어질 정도로 매몰차게 잘도 굴더니 내심 마음은 씁쓸했던 모양이다.  한녹영의 가족들을 한녹영에게 달라붙어 피 빨아먹는 거머리쯤으로 여기고 있던 박상호로서는 이제라도 정신 차린 그가 대견하기만 한데, 아무래도 핏줄인 한녹영으로선 마음이 복잡할 터였다.  더러운 게 정이라지 않나.  개인적으로 정이란 놈이 똥보다 더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어 심란하고 복잡할 한녹영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다.  박상호가 한숨을 푹 내쉬자 그 소리를 들은 한녹영이 돌아보았다.

“웬 한숨이야?”

“그냥······ 정이 뭔가 싶어서. 그 놈의 정이 똥보다 더 더럽잖냐.”

뜬금없이 뭔 소리래?  한녹영이 눈썹을 올렸다.

“두 분은 갔어?”

한녹영이 무심한 척 물었다.  과거로 돌아오며 기대를 버린 탓에 아버지와 새어머니 앞에서 더 이상 돈줄 노릇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긴 했는데, 시원한 한편 어딘지 모르게 싸한 기분도 좀 있었다.  이게 바로 박상호가 말한 똥보다 더 더럽다는 정이란 건지.

우스운 건 가족을 버리는 건 장현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보다는 수월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가족이란 울타리에 들어가고 싶어 호구 노릇을 자처했으면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내쫓고 난 후의 심정은 장현재에게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보다는 나았다.  가족에겐 두 번이나 버림받아 더 이상 상처받을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건지, 아니면 장현재에게 버림받은 순간의 고통이 워낙 커 가족들의 배신은 상대적으로 하찮게 느껴지는 건지.

“어. 억지로 택시 태워 보냈다. 두 노인네 입이 어찌나 건지.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막 해대더라. 후련하긴 한데, 좀 걱정도 된다. 쉬운 돈줄을 잃었으니 그냥 있진 않을 텐데.”

“기껏해야 자꾸 찾아와 협박하고, 가족이니 어쩌니 하며 정에 호소하고, 울고불고 하겠지. 관리실에 얘기했지?”

“어. 절대 빌라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얘기했어.”

“잘했어. 그리고 가족들 앞으로 보내던 생활비는 끊어줘. 그 돈은 차라리 기부를 하는 편이 낫겠어.”

어차피 매달 나가던 돈이니 그 돈으로 기부나 하는 편이 낫다.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 내 생각도 그렇다. 니네 가족은 정신 차릴 필요가 있어. 거머리도 아니고 달라붙어서 네 피나 빨아먹고 살았으니까.”

막말을 내뱉었던 박상호가 아차 하며 한녹영의 눈치를 슬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한녹영에겐 가족인데, 대놓고 거머리 취급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것이다.  한녹영은 박상호의 표현에 피식 웃어버렸다.

“정확하네. 거머리. 회사도 떠날 거고, 거머리들도 떼어낼 거니 이제 나 제대로 살 수 있겠지?”

“당연하지!”

한녹영의 물음에 박상호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지 목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만 자야겠다. 형도 잘 자.”

“어. 너도 잘 자라.”

한녹영은 박상호의 인사를 뒤로 한 채 침실로 들어와 침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

이미 일방적으로 끊어진 전화기를 내려다보는 장현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피어났다.  그는 통화종료라는 글자를 보고 또 보았다.  분명히 눈으로 글자를 읽고 있는데, 머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전화를 먼저 끊었어? 다른 사람도 아닌 한녹영이?’

통화를 하다보면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끊기도 하고 혹은 제가 먼저 통화를 끝내기도 했지만, 상대가 한녹영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녹영이라는 원석을 발견해 빛나는 보석으로 키워가는 동시에 저만 보고 제 말만 듣도록 만들었다.  한녹영은 이제껏 제가 발견해낸 최고의 보석이고, 뼛속까지 제 인형이었다.  언제나 저만 바라기하며 조금이라도 더 제 관심과 애정을 받길 원하던 아름다운 인형.

한녹영의 마음을 한 톨 남김없이 제 손아귀에 틀어쥐었다고 생각했고, 언제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한 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출장을 다녀온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 손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벗어나?  한녹영이 나를?  눈살을 찌푸렸던 것도 잠시.  아니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한녹영은 지금 저는 모르는 이유로 단단히 삐쳐 골질을 하는 것뿐이고, 곧 예전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녹영이 누구인데.  세상 끝까지라도 절 따라올 사람이다.  아니 제가 칼로 심장을 찔러도 기꺼이 웃으며 받아들일 그런 완벽하고 아름다운 제 인형이다.  암, 그렇고 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듯 고개를 끄덕인 장현재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대신 와인 잔을 들었다.

가장 시급한 건 한녹영이 그답지 않게 골질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내는 건데.  암만 생각해도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내가 출장 가 있는 사이 별일 없었던 거 확실해?”

장현재가 하영택을 돌아보며 물었다.  와인을 대체 무슨 맛으로 먹어.  역시 술은 소주지, 하며 소주로 병나발을 불고 있던 하영택이 황급히 병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정말 별일 없었어. 평소와 전혀 변함이 없다가 느닷없이 도망자의 차도영을 하겠다며 성질을 부렸다니까. 그 자식 약이라도 처먹은 건지. 네가 입에 떠넣어주던 떡만 받아먹던 놈이 가잖게 웬 도망자야. 거기다 은혜도 모르고 회사를 옮겨?”

하영택이 입매를 비틀며 잔뜩 이죽거렸다.  장현재는 오징어 다리를 잇 사이에 끼고 질겅거리는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남보다는 핏줄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가끔은 쓸모가 있어 데리고 있긴 한데 한 번씩 짜증날 때가 있다.  특히 지금처럼 천박하게 굴 때 말이다.  못마땅하게 혀를 찬 장현재가 물었다.

“녹영이 데려가겠다는 회사들에는 조치 취했지?”

잔뜩 골이 난 상태의 한녹영이 덥석 다른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 곤란하니 손을 쓰라는 지시를 내려두었다.

“당연하지. 한녹영한테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그게 터지면 배우 인생 끝장이라는 루머를 흘렸으니까 쉽게 데려가진 못할 거야. 엄청난 계약금을 주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데려갈 기획사가 어디에 있겠어? 걱정하지 마. 괜찮은 회사에서는 지금쯤 몸 사리고 있을 테고, 뭐 신생에서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데려가려고 할지 모르지만 어디서 데려간다는 소문 들려오면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나한테 너 만한 화술은 없어도 이게 있잖아. 이게.”

하영택이 제 주먹을 들어 보이며 킬킬댔다.  장현재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와인을 마셨다.

“녹영이는 건드리지 마.”

눈치는 있지만 근본은 건달이라 이제 볼일 없어졌다고 한녹영에게 폭력을 행사할까봐 미리 경고했다.  하영택이라면 충분히 예전 동료들을 동원해 린치를 행사할 가능성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무식해 보여도 아무 생각 없이 살진 않는다. 아직 얼마든지 더 써먹을 수 있는데 왜 건드려서 망가뜨리겠어. 괘씸하긴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돈줄이 될지 모르는데, 살살 달래서 데려와. 본래 네 말이라면 껌뻑 죽는 놈이었잖아. 이제부터 더 본격적으로 클 수 있는 놈인데 다른데 뺏겨서 남 좋은 일 시킬 순 없지.”

장현재와 똑같이 하영택 또한 장현재가 한녹영의 턱밑을 살살 긁어주면 다시 해실대며 돌아올 거라 믿었다.

“녹영이가 다른 회사로 갈 일은 없어.”

제가 만들어낸 최고의 인형을 남의 손에 쥐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얼마나 아끼던 인형인데.  언젠가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되면 제 손으로 버리면 버렸지, 다른 사람이 한녹영을 가지게 두고 볼 마음은 없었다.  누군가 제 인형을 가지게 두느니 차라리 망가뜨리고 말지.

“젠장.”

금세 비어버린 잔에 다시 와인을 가득 따른 장현재가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분명 다시 돌아올 거고, 예전처럼 절 신처럼 믿고 따를 것이 분명한데 기분이 왜 이렇지?  이상하게 몸 속 내장을 어딘가 빠뜨리고 온 것처럼 헛헛하고 이상한 기분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장현재는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끊임없이 느끼며 헛헛한 속으로 와인을 물처럼 퍼부어 넣었다.

☆☆★☆☆

한녹영이 라미르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55분이었다.  레스토랑 내부로 들어서자 한녹영을 알아본 매니저가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한녹영님. 예약 룸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약?  한녹영이 한순간 당황했다.  거의 억지를 부리다시피 약속을 얻어내놓고 막상 예약하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제가 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강준일이 예약해둔 모양이라 생각하며 매니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룸에 도착해 문을 열어주더니 한녹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코트 걸어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한녹영이 거절하자 재차 권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곤 룸을 나갔다.  한녹영은 문이 닫히자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자리에 앉으며 시계를 보니 11시 57분이었다.  왠지 강준일이 12시 정각에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 문과 시계를 번갈아보길 한참.

“늦었어요.”

예상과는 달리 강준일은 12시 7분이 되어서야 룸 안으로 들어섰다.  한녹영은 일전 강준일과 술 마시러 갔던 날 그가 했던 것처럼 시계를 툭툭 건드렸다.  강준일은 지각한 것에 대해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자리에 앉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한녹영을 향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역정내는 한녹영의 태도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원래 오늘 오전 일정이 빡빡했는데, 누군가가 빚 받으러 온 빚쟁이마냥 억지를 부려서 말이야. 시간을 내기 위해 일을 몰아서 해결하고 오느라 오전 내내 숨 돌릴 틈 한 번 없었지.”

그 누군가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한녹영이었다.  강준일의 지각에 기세등등했던 한녹영의 표정이 스륵 풀렸다.

“그건······ 좀 미안하게 되었네요. 한 여흘간 미치게 바빴고, 또 앞으로도 한동안 엄청나게 바쁠 예정이라 또 언제 쉴 수 있을지 몰랐거든요.”

“며칠 사이 좀 마른 것 같군.”

아침에 몸무게를 재봤더니 화보 촬영을 했던 날보다 1kg이 빠져 있었다.  그나저나 눈썰미도 좋다.  그걸 알아보다니.  한녹영이 제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네. 조금. 신작 촬영 시작 전에 찌워야 하는데, 힘들게 찌워놓은 살이 빠져서 큰일이에요. 아, 주문부터······.”

“주문은 내가 해뒀으니 곧 음식이 들어올 거다.”

“여기 단골이신가 봐요.”

한녹영은 라미르 방문이 오늘로 두 번째인데, 첫 번째 방문 또한 강준일을 만나기 위해서 왔었다.  그가 여기서 식사 중이라는 얘길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가 홀에서 2시간 동안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편이지. 재미난 기억이라도 떠오른 건가?”

느닷없이 홀로 웃자 강준일이 물어왔다.

“전에 대표님한테 얼굴 도장 한 번 찍어보겠답시고 홀에서 2시간이나 기다렸던 기억이 떠올라서요.”

코스 음식을 깨작깨작 먹으며 2시간이나 버티자니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모른다.  홀에 있던 레스토랑 손님들 눈치도 보였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대부분 제 얼굴을 알아본 탓에 무척 민망했다.

“근데 무슨 식사를 2시간도 넘게 해요?”

새삼 그때 기억이 떠올라 괜히 분한 마음이 들어 따지듯 묻자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그 날 식사에 동행했던 일행이 홀에 한녹영이 있다고 말해주더군. 마침 한가했던 날이라 와인을 마시며 느긋하게 놀았지.”

강준일도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촌 여동생과 점심을 먹으러 왔던 날인데, 화장실에 다녀오던 여동생이 호들갑을 떨며 ‘오빠! 홀에 한녹영이 있어!’ 하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그 즈음 한녹영이 제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쫓아다니던 걸 알고 있었던 터라 와인 한 병을 시켜 여동생과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한녹영이 갔다는 말을 들은 이후에야 느긋한 식사를 끝냈고.

강준일의 말을 듣고 무심코 ‘강 대표도 그 날을 기억하고 있네.’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한녹영이 뒤늦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그 날 홀에 내가 있었던 걸 알고 있었다고 얘기한 것 같은데요.”

“제대로 들었어. 이해력이 빠른데?”

놀리는 거다.  명백히 놀리는 투였다.  어이없어진 한녹영이 입을 벌렸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걸 알고 일부러 안 나왔다는 거죠?”

“덕분에 사람들 가득한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내게 막말을 듣는 수치를 당하진 않았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쨌든 막말을 하려던 거네요.”

“전에도 말했지만 날 겨냥해 하필이면 널 보낸 장현재에게 짜증이 있는 대로 나있던 상태였거든. 마음에 장현재를 둔 채 그의 명령에 따라 내게 다리를 벌리러 온 네게도 마찬가지였고. 난 남의 인형을 끌어안고 뒹구는 취미는 없어서. 뒤에 뭐가 따라올지 알 수가 있어야지.”

울컥.  알 수 없는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데 할 말이 없었다.  왜 저렇게 맞는 말만 하는 거야.  신경질 나게.  한녹영이 심한 갈증이 난 사람처럼 물을 마셨다.

“이런 데서 망신 안 줘서 고맙네요.”

물론 마음은 1그람도 넣지 않은 빈말이었고, 빈정거린 거였다.  강준일이 빙긋 웃었다.

“별 말씀을. 내가 본래 배려심이 넘치는 성격이라.”

“······.”

황당한 말에 한녹영이 입을 벌렸다.  그게 배려심 넘쳤던 거면 세상 배려심 다 죽었겠다!

“그건 그렇고 장 대표가 엄청나게 굴리는 모양이야.”

괜히 억울하고 분한 심정이 들지만 따질 수 없는 상황에 홀로 씩씩대며 성질을 부리고 있는 한녹영을 보며 짧게 웃었던 강준일이 화제를 전환했다.  한녹영이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계약 종료 전까지 최대한 굴릴 수 있을 만큼 굴리겠죠. 거기에 대해선 각오하고 있습니다.”

“옮길 회사는 정했나?”

“아직이요. 생각보다 연락 오는 회사가 적네요. 업계에서 제 가치가 별로인가, 생각이 들 만큼요.”

아직 계산기를 튕기는 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해도 러브콜이 너무 적었다.  박상호는 날마다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틈만 나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고, 여유만 생기면 왜 연락이 없느냐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누가 보면 그가 연예인인 줄 알 정도였다.

“네 가치가 별로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 방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한녹영이 눈을 깜박였다.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그리고 그 누군가란 장현재를 말하는 건가.

“장현재 대표를 말하는 겁니까?”

“한 번 터지면 연예계 생명이 끝장날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이 네게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던데.”

“정말입니까?”

“내가 거짓말할 이유 따윈 없지 않나.”

강준일의 말이 맞다.  그가 제게 거짓말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루머가 돌고 있다는 말은 사실일 터.  왜 러브콜이 없나 했더니만.  러브콜을 보내온 신생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건 이유 또한 알겠다.  한녹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준일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어놓고도 설마 뒤에서 저에 관한 안 좋은 루머를 퍼트렸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여전히 마음속 한 구석에 장현재를 향한 믿음이 남아있는 건가.

“루머 때문에 데려갈 회사가 없다면 1인 기획사 차리죠 뭐.”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다른 회사와 계약해도 좋고, 아니면 박상호와 둘이 회사를 차려도 좋고.  1인 기획사를 하자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사항이 많겠지만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씩씩하군.”

“씩씩해야 버티죠.”

실로 촘촘하게 바느질을 해둔 것처럼 얽매여있던 장현재로부터 벗어나는 걸음걸음이 살점을 떼어내는 것만큼 힘든데, 억지로라도 씩씩한 척 해야 버텨낼 수 있었다.  마음은 뭉개져 엉망진창이더라도 적어도 겉모습만은 비틀거리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을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최대한 담담하게 떠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남은 미련이라곤 없는 것처럼.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음식이 들어왔다.  강준일이 주문했다던 음식은 티본 스테이크와 시저 샐러드, 그리고 하우스와인 두 잔이었다.  테이블에 세팅되는 접시들을 보며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의 스테이크와 와인이라니.

‘뭐야. 데이트 같잖아?’

장현재가 아주 가끔 상처럼 해주던 데이트와 다를 바 없어 순간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녹영은 곧 엉뚱한 생각을 한 스스로를 어이없어 하며 와인 잔을 들었다.  데이트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강준일을 앞에 두고.  스테이크와 와인이 있다고 다 데이트는 아닐 텐데 왜 가끔 강준일을 두고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대낮부터 와인을 먹어도 됩니까?”

“한 잔만 할 거니 괜찮아. 그리고 여기 와인 맛이 아주 괜찮아서 올 때마다 한 잔씩 마셔주지 않으면 서운해지거든.”

잔을 든 강준일이 향을 음미하곤 한 입 마시더니 한녹영에게도 맛보라는 눈짓을 해보였다.  한녹영도 강준일이 한 것처럼 냄새를 맡아본 후 와인을 마셔보았다.  와인에 대해선 잘 몰라서 한녹영에게 좋은 와인이란 마시기 편한가 아닌가로 나뉘는데, 이건 목넘김이 좋으면서 혀에 남은 향이 은은했다.

“맛있어요.”

단맛도 적당히 있어 너무 드라이하고 무거운 와인을 싫어하는 한녹영에게 적당했다.  만족한 한녹영이 빙긋 웃었고, 강준일은 잘 됐다는 듯 짧게 웃었다.  곧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스테이크 맛도 훌륭했다.  전에 왔을 땐 강준일이 언제 나오나, 거기에 목매느라 음식 맛을 느낄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 먹어보니 지금껏 먹어본 스테이크 중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맛있다.  한녹영은 꽤 큼직했던 스테이크 한 덩이를 남김없이 먹었다.  소스까지 싹싹 긁어서.  식사를 끝내고 보니 설거지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접시가 깨끗했다.

“생각보다 잘 먹는군. 살이 안 찌는 체질인 건가?”

강준일의 시선이 딱 한 모금 정도 남은 와인 잔을 들어 올리는 한녹영의 얇은 손목에 머물렀다.

“아니요. 적당히 찌는 체질인데요. 데뷔 전에는 살집이 꽤 많았던 편이었고요.”

“그럼 지금 몸은 카메라의 사랑을 받기 위한 혹독한 다이어트의 결과이겠군.”

“카메라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현재 형의 사랑도 받고 싶어 했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죠.”

“장현재의 취향이 젓가락처럼 삐쩍 마른 사람이었던 모양이군.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만큼 인형으로서 충실했던 삶이었어.”

강준일이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이죽대는 투로 말했다.  사실이라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와인은 정말 딱 한 모금 남아있었던 터라 한입 홀짝 하고 나니 잔이 비어버렸다.  한녹영은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마찬가지로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는 중인 강준일을 힐끔 보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왠지 강준일의 기분 온도가 한 2도 정도 내려간 것 같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잠깐 화장실 좀.”

몰랐는데 스테이크를 먹으며 칠칠맞게 소스를 묻힌 모양이었다.  니트 끝에 소스가 묻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물로 좀 씻어내야겠다.  한녹영의 말에 강준일이 고개만 끄덕였다.

룸에서 나가려던 한녹영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보고 황급히 도로 문을 닫았다.  장현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온 것 같은데······.

‘왜 숨은 거야?’

저도 모르게 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비록 집에서 쉴 거라는 거짓말을 했지만 사정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건데 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장현재를 본 순간 마치 천적을 본 여린 짐승처럼 몸을 숨기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누가 봐도 다급하게 몸을 숨기는 행동에 강준일이 의아함을 품고 물었다.  한녹영이 멋쩍게 그를 돌아보았다.

“장현재 대표를 봐서요. 현재 형, 장 대표도 여기서 약속이 있나 봐요.”

“그런데?”

“네?”

“장 대표가 여기에 식사를 하러 온 것이 한녹영 네가 숨을 이유가 되나?”

숨은 이유를 묻는 강준일의 눈빛이 싸늘했다.  한녹영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나도 모르게 그만······ 사실 오늘 만나자고 했었는데, 집에서 쉬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거든요.”

“거짓말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건가, 날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건가.”

“그야······.”

선뜻 대답이 안 나왔다.  사실 한녹영 본인도 제가 왜 몸을 숨기는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으니까.  강준일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는 없으니까······ 전자인가?  거짓말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왠지 그것도 정답은 아닌 것 같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전자인 듯했다.  아마도.

“전자인 것 같네요.”

생각 끝에 한녹영이 대답했고, 강준일은 피식 실소했다.

“장 대표에게 거짓말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라······. 아직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는 모양이군.”

“······.”

한녹영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강준일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좋은 모습만 남긴 채 장 대표와 바이바이를 하고 싶어? 이봐, 한녹영.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좋은 끝이란 없어. 처절하게 버려지는 끝을 보고 장현재를 떠날 결심을 했다고 했던가. 지금 네 모습을 봐서는 처절하게 버려지는 모습을 봤다던 말이 거짓말이었거나, 그 말이 진짜라면 아직 정신을 덜 차린 거겠군. 넌 고작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도 장현재에게 끌려 다니는 인형 신세로 보여. 단번에 줄을 모조리 끊어내지 않는 한 무슨 의미가 있지? 단 한 줄이라도 남아있는 한 그에게 매여 있는 신세라는 건 마찬가지야. 단칼에 잘라내지 못할 거면 그냥 인형으로 살아. 우유부단하게 휘둘리다 초라하게 돌아가지 말고. 첫 걸음부터 두 번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리든가 아니면 예전처럼 인형으로 살든가.”

강준일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칼이었다.  제법 괜찮게 이어졌던 룸 안의 분위기 또한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한녹영이 싸늘하게 독설을 내뱉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내가 정말 아직 정신을 덜 차렸나?  그래서 그에게 원망의 말조차 못했나.  돌아갈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서 사실은 형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는 말을 가슴으로 삼켰던 건가?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었다.  돌아가서 또 다시 그의 인형으로 살다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 맹세코 추호도 없었다.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 딴에는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었는데 강준일의 눈엔 많이 부족해 보였던 모양이다.  며칠 전에 연수원에서 만났을 때는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이 기특하다고 해놓고.  오늘은 왜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처럼 독설을 퍼붓는 건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녹영이 눈매를 치뜨며 물었다.

“대표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게 못되게 말하세요?”

생각해 보니 제가 장현재에게 미련을 질질 흘리고 있다고 해서 강준일에게 독설을 들을 이유 따윈 없었다.

“뭐?”

“다 맞는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듣는 사람 심정은 생각 안 하나 해서요. 방금 제게 충고하던 말투가 어찌나 못되게 들리던지, 신데렐라를 구박하던 계모도 방금 전 대표님보다는 부드러웠겠네요.”

좀 전의 강준일 못지않게 표독스럽게 말하려고 애쓰는 한녹영을 보던 강준일의 눈매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사람이 왜 그렇게 일관성이 없어요? 기특하다고 할 땐 언제고. 기특하다고 토닥일 거면 쭉 그렇게 하든가, 못된 말로 속을 후벼 팔 거면 쭉 그렇게 하든가. 좀 일관성 있게 굴어요. 진짜 궁금하네. 부모님이나 형제 혹은 연인한테도 그렇게 못되게 말하는지.”

말을 하다 보니 분한 심정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한녹영은 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여과 없이 다 뱉어낸 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 나니 확 올랐던 열이 식으며 슬그머니 걱정이 들었다.  내가 너무 나갔나.  다시 볼 사이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과거로 돌아온 이후에 우연히 자주 마주치게 되니 또 볼 수도 있는 사이인데 너무 막말을 했나 싶었다.  슬쩍 눈치를 살피는 한녹영을 향해 짧게 웃은 강준일도 물을 마시더니 호출벨을 눌렀다.

“연인한테는 못되게 안 굴지. 보고만 있어도 아까울 만큼 소중한 존재가 될 텐데 못되게 굴 까닭이 없지 않나. 예쁘고 다정한 말만 할 예정이야.”

예정이란 말은 아직 연인이 없다는 뜻일 테고.  그런데 뭐?  예쁘고 다정한 말만 하겠다고?  입만 열면 못된 말만 쏟아내는 저 강준일이?  다정한 강준일은 상상조차 안 되는······ 문득 병실을 찾아왔던 모습이 떠올랐다.  얼굴이 망가진 채 누워있는 저를 내려다보던 눈길에는 분명 온기가 있었다.  그때는 악에 받쳐 이죽대기 바빴는데, 지금 생각하면 강준일의 방문이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그때 모습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분명 병실을 떠나며 또 오지, 라고 했었는데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진짜 찾아왔을까?  어떤 얼굴로 찾아왔을까.  눈에 더 많은 온기를 담은 채 왔을까?  그는 왜 다시 온다고 했던 걸까?  무슨 이유로?

이젠 알 길이 없는데 궁금해졌다.  동정심으로 인한 온기가 그 정도였는데, 연인을 향한 사랑이 담긴 온기는 어떨지.  얼마나 따뜻할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정말로 궁금해졌다.  얼음 알갱이를 잔뜩 박아 넣은 것 같은 저 눈동자에 다정함이 차오르면 어떤 느낌일지.

보고만 있어도 아까울 만큼 소중한 존재에게는 어떻게 대할지 몸살이 날 정도로 많이 궁금해졌다.

“내 앞에서는 할 말 못할 말 다하면서 장 대표 앞에선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조심스럽게 굴었을 테지.”

강준일이 비웃는 것처럼 코웃음을 쳤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한녹영이 정신을 차렸다.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굴었는지 아닌지 대표님이 어떻게 알아요.”

“좀 전의 행동만 봐도 각이 딱 나오지 않나. 고작 거짓말을 들키기 싫다는 이유로 숨다니, 그게 장 대표와 결별하겠다는 사람의 태도인지 의심스럽던데.”

“진짜 결별한다니까요. 소속사 옮길 거라고 얘기했다고 또 말해요? 아직 마음의 정리가 덜 되어 현재 형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형 신세 폐업한다는 선언은 절대 철회하지 않을 겁니다. 강 대표님 앞에서 분명히 다짐하죠. 전 현재 형한테 돌아가지 않아요. 절대로.”

왜 강준일에게 이런 선언을 하고 있는진 정말 모르겠지만 말이다.

“설사 그가 네게 제발 돌아와 달라고 빌어도?”

한녹영이 웃었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정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것이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네. 현재 형이 제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해도요.”

이젠 그게 진심이 아님을 아니까.  제가 진짜 장현재로부터 한 걸음 내딛긴 했구나.  장현재가 제게 애원하는 모습을 상상해 봐도 머리가 차가워지기만 하니 말이다.

“기특하군.”

강준일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까에 비해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였다.  눈가에 웃음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싸늘함이 사라지자 어이없게도 바짝 수축했던 한녹영의 마음까지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이거.  강준일의 기분이 풀렸건 말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한 가지만 하라니까요. 사람이 일관성이 없어.”

한녹영이 투덜거렸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테이블 정리하고 커피 좀 주지.”

“네. 대표님. 한녹영님은 무엇으로 드릴까요?”

“저도 커피로 하죠.”

“곧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곧 웨이터가 들어와 테이블을 정리했다.  잠시 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두 잔이 들어왔다.

“계산서는 여기 두겠습니다.”

빌지가 든 케이스를 테이블 끝에 둔 웨이터가 입구에서 고개를 숙이더니 룸을 나갔다.

“오늘은 카드 확실히 챙겨왔겠지?”

“네. 확실히 챙겼네요.”

집을 나서기 전 지갑 잘 챙겼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이렇게 휴대전화도 챙겼잖아요. 요샌 휴대전화만 있어도 결제가 다 되거든요.” 하고 잘난 척 덧붙이며 휴대전화 쪽으로 시선을 준 한녹영이 어, 하고 말했다.  몰랐는데 부재 중 통화 내역이 있었다.  메시지도 2통 들어와 있었고.  부재 중 전화를 건 사람은 김현영이고, 메시지는 박상호가 남긴 거였다.  한녹영이 서둘러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메시지를 확인한 한녹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그걸 본 강준일이 물었다.

“네. 다음 신작 캐스팅에 문제가 생겼는데, 비어버린 역에 제가 아는 사람을 추천했거든요. 끼워 넣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고요. 오디션이라도 볼 기회를 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겠다고 제작사 쪽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네요.”

아마 오디션 얘기를 하려고 전화했는데 한녹영이 받지 않자 박상호 쪽으로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추천했다던 사람이 너와 가까운 사이인가?”

“아니요. 전혀요. 굳이 따지자면 생판 남이죠.”

정말 세세하게 따지고 들자면 저 혼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해?”

“전 뭐 남일에 좋아하면 안 됩니까?”

“소문으로 들은 한녹영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성격이라던데. 남일을 기뻐하는 한녹영이라니 안 어울려.”

“제가 그렇게 막장은······ 아니라고 단언할 만큼 착하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방금 전엔 순수하게 기뻐한 거니까 오해하지 마시고요.”

“뭘 자꾸 오해하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군.”

“오해는 대표님 전문 분야잖아요. 또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할까봐 자꾸 강조하게 되네요.”

한녹영이 눈을 내리깔고 새침하게 말했다.  짧게 웃은 강준일이 몸을 일으키더니 옷걸이에서 코트를 꺼냈다.  그의 행동에 시계를 보니 정각 1시였다.  1시간 정도 시간을 내겠다더니 정말 딱 1시간이었다.  아직 커피의 김이 식지도 않았는데 진짜 칼이네.  칼.

나한테는 약속한 1시간 이상의 시간은 내줄 수 없다는 거야, 뭐야.  1시간을 약속하고 만나놓고 정말 딱 1시간 만에 일어서자 기분이 묘해졌다.

“잘 먹었어, 한녹영 씨. 다음번에는 장현재로부터 지금보다 더 많이 벗어난 한녹영을 기대하지.”

“그 점에 대해선 기대해도 괜찮고요, 이제 빚쟁이 아니니 연락처나 좀 알려주시죠.”

강준일의 연락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알려주겠다면 받아두겠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하자 강준일의 입매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연락처를 주고받을 정도로 우리가 가까워지진 않은 것 같은데. 그럼 또 보지.”

희미하게 웃은 강준일이 룸을 나갔다.  한녹영은 그런 강준일의 등을 향해 입매를 삐죽였다.  전화번호에 금칠이라도 해뒀나.  뭐 저리 비싸게 굴어?  그리고 연락처도 안 줬으면서 또 보자는 뭐야.  꼭 연락처가 알고 싶어서 물어본 건 아니라고!  그냥······ 궁금했을 뿐이지.

‘이제 따로 연락해 만날 일도 없는데 연락처는 왜 물어본 거야?’

한녹영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만 가겠다며 일어서는 그를 본 순간 알 수 없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들며 저도 모르게 연락처를 물어보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충동적인 물음 때문에 또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겠네.  강준일에게 저는 이미 충분히 이상하고 웃긴 사람일 테지만.

한녹영은 홀로 커피를 마저 마셨다.  피부 관리를 3시로 예약해둔 터라 시간의 여유가 있기도 했고, 1잔뿐이긴 해도 와인을 마셨던 터라 술기운이 가시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싼 레스토랑이라 그런가.  커피도 맛있네.  전문 카페 못지않았다.

맛있는 커피를 느긋하게 마시며 한녹영은 폭풍처럼 지나갔던 강준일과의 1시간을 돌아보았다.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기특하다고 칭찬하는가 싶으면 금세 또 냉랭해져 독설을 내뱉고.  저 독설쟁이하며 이를 으득으득 갈라치면 금세 또 부드러워지고.  뭐야.  조증이라도 있나.  뭐 이리 기복이 심해?  진짜 사람이 일관성이 없어.  일관성이!  장현재와는 다른 의미로 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녹영은 홀로 50분 정도 앉아 커피 한 잔을 더 리필해 다 마신 후에야 일어났다.  강준일의 생각에 빠져있던 탓인지 생각보다 50분이라는 시간 금세 훌쩍 지났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탄 후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 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란히 나오는 두 남녀가 보였다.  장현재와······ 그녀다.  장현재의 스폰서라고 했던.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명품 브랜드의 시즌 한정판으로 딱 50점밖에 만들지 않아 눈 튀어나오게 비싸다며 바로 어제 정지해가 말했던 가방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저런 가방을 들 정도면 정말 대단한 부자인 모양이네.  한녹영 다정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장현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라미르에서의 식사 상대는 저 여자였나보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두 사람 사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봤어도 바로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분위기가 다정하고 끈적했다.  여자를 대하는 장현재의 태도는 극진함 그 자체였다.  극진한 태도에 마음까지 담겨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녹영은 두 사람이 제 차 앞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숨을 내쉰 후 차를 출발시켰다.

피부 관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거실 소파에 장한경이 앉아있었다.  그는 잔뜩 흥분해서 벌건 낯으로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다 한녹영을 보곤 주인을 맞는 충견처럼 달려왔다.

“고맙습니다. 한녹영 씨. 진짜 고맙습니다.”

한녹영이 주춤했을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뭐가요?”

“도망자라는 드라마의 차철호 역에 저를 추천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오디션만 볼 수 있게 해준 겁니다. 그것도 호랑이 같은 내 매니저 형한테 먼저 합격을 받지 않으면 물 건너가는 거고요.”

“이미 합격 줬다.”

박상호가 부엌 쪽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 커피가 들려있었다.  그가 눈빛으로 ‘너도 마실래?’ 하고 물어 와서 한녹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커피는 하루에 한 잔이면 족하다.  더 이상 마셨다가 밤에 불면증이라도 찾아오면 곤란해지니까.

“합격 줬어?”

박상호에게 다가간 한녹영이 자그맣게 물었다.

“어. 정우에서 연락받자마자 저 친구한테 전화했더니 총알같이 달려오더라고. 그래서 네 대본 주고 연기 해보라고 했더니 제법 해내더라. 그 정도면 네 얼굴에 똥칠하진 않을 것 같아. 오디션장에 보내도 될 것 같더라.”

“감동······ 하진 않았어?”

한녹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심경이 복잡했다.  차철호 역에 장한경을 추천할 때만 해도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좋아했는데, 막상 박상호가 그의 연기를 봤다고 생각하자 또 그때처럼 완전 반해서 세기의 천재를 발굴해낸 듯 굴면 어쩌지, 하는 기분도 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때처럼 악독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서운한 마음은 들 것 같았다.

“뭘 감동씩이나. 생각보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서 다양한 역을 소화할 수 있긴 하겠더라. 솔직히 말해서 네가 없었다면 한번쯤 키워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긴 해.”

박상호의 반응은 생각보다 시큰둥했다.  예전처럼 팔짝팔짝 뛰며 좋아할 것 같았는데.

“그게 다야?”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

“날 젖혀두고 저 친구를 더 키워보고 싶다거나?”

한녹영이 슬그머니 그를 떠보았다.

“뭔 소리야. 널 두고 왜 저 친구를 키워? 나한테는 네가 있는데. 난 너한테 올인할 거야. 우리 녹영이, 요새 발작도 안 하고 이뻐죽겠어.”

“진짜 나 대신 저 친구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그렇다니까. 진짜 정말 완전히 솔직히 말해서 네가 예전처럼 개망나니에 장 대표 바라기였다면 흔들렸을 것 같아. 아마 내가 키워보겠다고 나섰을 것도 같고.”

한녹영이 히죽대고 있는 박상호를 멍하니 보았다.  예전 박상호가 장한경을 발견했을 때는 2017년 여름쯤이었다.  그때쯤 박상호는 제 못된 성질에 지쳐 슬슬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차에 장한경을 발견했고, 그의 재능에 반해 키우고자 한 것이고.

“그렇다고 뭘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냐? 듣는 개망나니 서운해져서 발작하고 싶어지게.”

괜히 툴툴대는 한녹영의 입가에 웃음이 맺혀 있었다.  솔직히 기분이 좋다.  예전처럼 장한경을 치켜세우고 난리법석을 떨었다면 아무리 반성 모드의 저라해도 서운해져서 버럭 성질 한 번쯤은 부렸을 것 같은데 말이다.  흐응.  내가 있으니 장한경이 예전처럼 빛나 보이진 않나 보네.  입가에 미소가 실실 맺혔다.  한녹영은 물 대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아까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장한경을 향해 다가갔다.

“대본 줄 테니까 가져가서 읽고 또 읽어본 후에 오디션 봐요. 상호 형까지 합격을 줬다니 떨어서 실수만 안 한다면 차철호 역을 맡을 것 같으니까.”

“진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한녹영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장한경이 반복해서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과한 인사에 오히려 이쪽이 민망해졌다.

“거창하게 생명의 은인씩이나 언급할 필요는 없고요. 난 캐스팅에 전혀 관여할 생각도 없고, 권리도 없으니까 그렇게 지나치게 고맙다며 인사하면 민망해져요.”

“아니요. 기회를 주셨잖아요. 떨어지고 붙고는 제 능력이고요, 그간 능력을 보일 기회조차 없어서 절망하던 참이었거든요. 연기는 진짜 제 마지막 희망이고, 살아갈 힘을 준 계기라 이렇게 기회가 주어진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겁니다.”

살아갈 힘을 준 계기라는 말에 그의 불행한 과거가 떠올랐다.  한녹영은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장한경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예전엔 저로 인해 더더욱 불행해지고 말았지만, 이번엔 같이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토록 바라던 연기자도 되고, 절망 속에 자살하는 일 없이.

“꼭 합격하길 바랄게요.”

“네. 고맙습니다!”

장한경이 또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형, 오디션 날짜가 언제라고 했지?”

“모레 정우로 오라더라. 그때 송정빈도 같이 오디션을 볼 건가봐.”

“주인공 역에 송정빈 선배를 쓰기로 한 거야?”

“거야 오디션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 근데 내 생각에도 송정빈이 괜찮을 것 같아. 느닷없이 네가 송정빈 이름을 꺼냈을 때는 좀 당황했는데 생각할수록 나쁘지 않겠더라고. 연기야 보증수표니 말할 것도 없고. 다만 추락한 이미지가 문제인데, 사실 그건 여자 쪽에서 수작을 부린 거라는 판결이 나왔으니까. 괜찮은 역 맡아서 방송에 자주 나오고 하면 망가진 이미지야 얼마든지 돌아와.”

“모레 나 스케줄 많나?”

“왜? 가보려고?”

박상호가 수첩을 꺼내며 물었다.

“어. 시간 뺄 수 있으면 가볼까 하는데.”

장한경뿐만 아니라 송정빈의 오디션도 궁금해서 가능하면 직접 가서 지켜보고 싶었다.  송정빈이 주인공을 맡을 것 같긴 한데, 제가 과거로 돌아오며 여러 변수가 생겨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박상호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한참 끙끙대며 뭔가를 계산하는 것 같더니 한참 만에 말했다.

“한 세 시간 정도는 어떻게든 뺄 수 있을 것 같다.”

“오디션에 참여하는 배우가 많대? 공개 오디션은 아니지?”

“어. 배우 서너 명만 딱 찍어서 부른 것 같던데. 참, 박지한도 온다더라.”

“뭐?! 무슨 역에?!”

한녹영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박상호가 움찔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깜짝이야. 고막 나가겠네. 주인공 역인 것 같던데. 차도영 역 캐스팅 성사 직전까지 갔으니 박지한 쪽에서 항의한 모양이야. 그래서 주인공 역에 오디션 볼 기회라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아마 박상호의 짐작이 맞지 싶다.  캐스팅이 무산되자 박지한이 항의했을 테고, 김현영이 감독에게 말해 송정빈과 같이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 옷처럼 몸에 맞는 역을 만나지 못해 오랜 무명 생활을 했을 뿐 연기력에는 문제가 없으니 혹 주인공 역이 박지한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벌써 제가 알던 것과 틀어진 사실들이 많아 박지한이 주인공 역을 맡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제가 박지한이 크게 뜰 수 있는 기회를 뺏어온 거라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한녹영은 그가 싫었다.

사실 한녹영과 박지한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녹영은 마치 박지한이 차도영을 도둑질해간 것 같은 기분에 그를 미워했고, 박지한은 2017년도 중반에 크랭크인 한 영화의 주연을 한녹영에게 뺏겼다고 생각해 한녹영을 싫어했다.  실제로 영화의 캐스팅이 확정된 이후 한녹영을 만나면 도둑년이라며 빈정대기 일쑤였다.  제 배역을 뺏어갔다고 해서 도둑이었고,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년을 붙여 도둑년이었다.  도망자로 확 뜬 이후 처음으로 제의받은 영화의 주연 자리를 뺏겼으니 기분이 상할 법도 했겠지만, 이 바닥에서 그런 일이야 비일비재한데 입안에 들어온 떡을 뺏긴 것처럼 구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거기다 그 영화의 배역은 로비로 따낸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역의 이미지에 한녹영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이유로 감독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었다.  편집 개판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쪽박을 찼지만.

어쨌든 박지한은 한녹영만 보면 빈정댔고, 한녹영 또한 맞대응해 연예계에 최악으로 치달은 둘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었다.  영화가 쪽박나자 박지한이 배를 잡고 웃으며 고소해하더라는 말을 전해 듣고 얼마나 분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엄청난 적자를 기록한 영화를 내리고 난 이후 우연히 방송국에서 만났을 때 ‘남의 걸 도둑질해가더니 꼴좋다.’ 라고 했었다.  한녹영도 사람인지라 과거로 돌아와 변했다고 해도 천사가 된 건 아니라서 박지한의 역을 뺏어오며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은 가졌지만, 죄책감은 안 느꼈다.  설사 예전 박지한과의 관계가 좋았어도 차도영이 너무 욕심나 결국은 차도영을 맡았겠지만 말이다.  대신 지금보다 훨씬 미안해하고, 아주 많이 죄책감을 가져 어떤 식으로든 보상의 방법을 찾아봤겠지만.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르바이트 가야 할 시간이거든요.”

시간을 확인한 장한경이 가방을 둘러맸다.

“그래요. 잘 가요. 연습 많이 하고. 오디션장에서 봅시다.”

박상호가 장한경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네! 정말 열심히 할 겁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며칠 후에 또 뵙겠습니다.”

장한경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신 인사를 한 후 현관으로 향했고, 박상호가 그런 그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형, 혹시 나에 대한 루머가 돈다는 얘기 들어봤어?”

“어······ 너도 들었냐?”

얼굴에 금세 먹구름이 끼는 걸 보니 그도 들었나 보다.

“언제 들었어?”

“지금쯤 러브콜이 쏟아지다 못해 파묻혀야 정상인데, 이상하다 싶어 아까 전화 쫙 돌려봤거든. 그랬더니 네가 폭탄이라 회사들마다 망설이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더라. 혹시 스캔들이 될 만한 일 잡힌 거 있어?”

“없어. 데뷔한 후 얘기하지 않은 일이 있다면······.”

“있다면 뭐? 뭔데? 빨리 얘기해. 나 숨넘어가. 나한테는 솔직해야 한다. 우리 이제 한배를 탄 사이잖아. 네가 미리 얘기해줘야 내가 대비책을 생각해보지. 뭔데? 응?”

얘기할 틈도 안 주면서 빨리 얘기하라며 난리를 부리는 박상호가 어이없었다.  한녹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놀리느라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 숨넘어갈 기세였다.

“외할머니가 무당이었다는 거?”

“그게 다야?”

“응.”

“난 또. 괜히 긴장했잖아. 그게 뭐 대수라고. 다른 건 없다는 거지? 그럼 회사 쪽에서 헛소문 퍼트린 거네.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아니다. 장 대표나 하영택 실장 성격으로 봐서 절대 곱게 보내줄 리 없다고 생각하지 못한 내가 병신이지.”

“현재 형이 소속 연예인들의 약점을······ 잡고 있다는 거 알아?”

박상호의 동공이 커졌다.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떻게 알았냐?”

“알고 있었구나. 나만 몰랐나?”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형은 어떻게 알았는데?”

“전에 하영택이 너한테 막말 듣고 신경질 내면서 ‘저 자식 영상도 빨리 떠놔야 저 지랄을 못하지.’ 하는 말을 엿들은 적이 있거든. 다른 데로 갈만한 애들이 전부 군말 없이 재계약할 때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 듣고 감 잡았지. 장 대표가 성로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찍어뒀구나, 하고.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생각해 보면 내가 순진했구나 싶어. 성을 제공한 쪽, 받은 쪽 모두의 약점을 손에 쥐는 셈인데 그걸 장 대표가 마다할 리 없잖아. 저기, 진짜 마지막으로 묻는 건데 넌 없는 거지?”

“없어.”

아직은.  아마 강준일이 제 접근을 받아들였다면 약점이 생겼겠지만.  다행히도 그는 저를 매몰차게 찼고, 역시 다행히도 술에 취한 그의 침대에 몰래 기어들어가는 짓을 하기 전으로 돌아왔으니까.

“보통 곧바로 로비해서 약점을 만들어두는 모양이던데, 장 대표가 널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생각한 것도 같네. 어쨌든 다행이다.”

“현재 형 스폰서해주는 여자는 누구야? 혹시 알아?”

박상호가 이번엔 아까보다 더 당황했다.  동공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장 대표에 대해 암 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아네?”

“암 것도 몰랐어. 몰랐는데······ 최근 들어 하나씩 알게 된 것뿐이야. 누군지 알아?”

“나도 잘 몰라. 그냥 대단한 재력가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야. 한 1년 반 전인가. 회사가 좀 어려웠던 적이 있거든. 장 대표가 다른 데 투자했다가 실패해서. 그때 도와주면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것밖에는 몰라.”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장현재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두면 마음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속만 쓰렸다.

“괜찮냐?”

걱정이 가득한 물음에 한녹영이 웃었다.

“요샌 형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바로 괜찮냐, 인 것 같네. 괜찮아. 내가 모르던 현재 형에 대해 알아간다고 해서 죽진 않아.”

그와의 끝을 보고 와놓고도 단번에 정리하지 못한 가슴이 아플 뿐.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것 같긴 하다.  아까 라미르 주차장에서 장현재와 그 여자의 모습을 봤을 때도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별로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제 마음속 장현재가 사라졌음을 발견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강준일은 돌아갈 수 없도록 아예 멀리 가버리라고 했지만 그에겐 그의 방식이 제겐 제 방식이 있는 거였다.

“사람이 일관성이 없어. 일관성이! 그리고 뭐 그리 비싸게 굴어! 알고 보면 나도 비싼 사람이라고!”

아까 들었던 독설을 떠올리자 새삼 또 분해졌다.  연락처를 거절당한 것도 울컥울컥했다.  한녹영이 소리 내어 투덜대자 부엌으로 걸어가던 박상호가 “어? 뭐라고?” 하며 물어왔다.

“아니야. 나 방에 들어간다.”

“어. 그래. 피곤하면 한숨 자고 있어. 지금부터 삼계탕할 건데, 다 되면 부를게.”

“진짜 닭 사온 거야?”

“그러겠다고 했잖아. 무려 오골계로 사왔다는 거 아니야. 약재 넣고 아주 끝내주게 해줄게. 죽 먹을 거지?”

“어. 찹쌀죽 좋아해.”

“그럴 것 같아서 불려뒀다. 역시 삼계탕에는 찹쌀죽이지. 두 마리 사왔으니 배터지게 먹자.”

삼계탕과 죽을 먹을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대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박상호의 등이 무척 신나보였다.  한녹영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침실로 향했다.  씻은 후 침대에 누워 잠깐 쉬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어서 박상호가 배달이라도 시켰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자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한녹영이 침실 문을 열자 곤혹스러움과 짜증이 뒤섞인 표정의 박상호가 바깥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가 왔어?”

“장 대표 왔다. 바깥에 마냥 세워둘 순 없어서 일단 문을 열어주긴 했는데······.”

한녹영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현관 출입문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박상호가 그 문도 열어주었다.

“전화기 꺼져있던데.”

소파로 걸어가며 장현재가 말했다.

“피부 관리 받으며 꺼놨어.”

“박 매니저 잠깐 자리 좀 피해주지.”

장현재가 멀뚱하게 서 있는 박상호를 향해 말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박상호는 입매를 실룩하더니 한녹영을 한 번 쳐다본 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 점심 무렵에 여의도 라미르에 갔었어?”

한녹영이 멈칫했다.  주차장을 떠나는 제 차를 본 모양이었다.

“응. 누굴 좀 만나서 함께 점심 먹었어.”

“누구 만났어?”

강준일을 만났다고 말해도 크게 상관없겠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한녹영은 햇살을 엮어 넣은 것처럼 따뜻해 보이는 장현재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도 장현재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 분명한가 보다.  다정한 겉과는 달리 속은 차다는 걸 몸소 겪어놓고도, 그간 몰랐던 장현재에 대해 알아가면서도 그의 눈빛에 끌려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실망감과는 별개로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습관 때문인 듯도 했다.

한녹영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제게 독설을 퍼붓던 강준일을 떠올리자 마음이 단단해진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장현재 앞에서 바보처럼 물러져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미안한데, 내 사생활이야. 그걸 형한테 시시콜골 보고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어.”

강현재의 볼이 실룩 떨렸다.

“이상한 사람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내 눈에는 네가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보여 걱정이다. 내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조급함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사기꾼 같은 기획사로 옮겨가는 건 아닐지 정말 걱정이야. 애초에 난 아직도 왜 네가 나를 떠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만. 네가 굳이 떠나겠다니 어쩔 수 없이 두고 보긴 하는데,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데.”

장현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설탕을 뿌린 듯 달았다.  생각해 보면 장현재는 투정을 부리는 한녹영을 달랠 때 주로 이런 목소리를 내었던 것 같다.  그럼 저는 또 달콤함에 끌린 개미처럼 홀랑 넘어가곤 했었고.

“혹시 내가 뭔가에 마음이 토라져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

“아니야. 투정이 아니고······ 그래, 내가 애매하게 얘기하긴 했지. 바보처럼 미련이 남은 건지 어쩐 건지 가능하면 서로에게 좋은 감정으로 헤어지고 싶었으니까. 알고 보면 말랑말랑한 성격도 아닌데 유독 형한테는 잘 익은 홍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손톱 끝으로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서 속을 드러내는 홍시와 같았다.  장현재 앞에서의 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형한테 나는 말 잘 듣는 인형이었지? 아직은 반짝거려서 손에 쥐고 있지만 쓸모없어지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인형 말이야. 난 그것도 모르고 나만은 정말 형에게 특별하다고 생각해왔거든.”

“넌 내게 특별해. 쓸모없어지면 언제든 버릴수 있는 인형이라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야?!”

“누군가 해준 말이 아니라 그냥 내가 알아버렸어. 어떤 사내가 특별한 상대를 다른 사내에게 다리를 벌리라고 하겠어?”

“그건 다 네 미래를······.”

“나한테는 재능이 있다며. 반짝반짝 빛난다며? 그럼 굳이 몸을 팔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지 않아? 내가 순진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난 남창처럼 몸을 팔지 않아도 얼마든지 배우로서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다고 믿어. 전에는 형을 가지고 싶어서 형의 말이 세상의 진리인 것처럼 생각했지만 정신이 들고 보니 내가 틀렸더라. 인형처럼 순종하고 집착한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몰랐어. 형에게서 한 발짝 벗어나보니 그간 참 잘못 살았구나 싶더라.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날 수렁에서 건져줘서 고마워. 그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충분히 갚았다고도 생각해. 돈으로든 뭐든.”

계약금조로 장현재가 갚아주었던 빚 1억뿐만 아니라 배우가 되기 위해 배웠던 교육에 대한 빚도 이미 전부 갚았다.  그것도 몇 배로.  제가 회사에 벌어다준 돈이 꽤 되니까.  지난 몇 년 얌전한 인형 노릇하며 온 마음을 송두리째 갖다 바쳤으니 고마움에 대한 빚도 다 갚았다고 생각한다.

한녹영은 제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장현재의 얼굴을 힘겹게 응시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며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제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이제 정말 홀로 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듯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젠 형과는 전혀 상관없는 남남이 되어 살고 싶어. 나에 대한 루머가 돌고 있다는 소리 들었어. 설사 다른 회사에 못 들어가더라도 괜찮아. 한울에는, 형 옆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반드시.”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의지한 것 같아 홀로 서고 싶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둘러댈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더 이상 인형으로 살다 초라하게 버려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야 했다.  뭐가 무섭고 두려워서 속내를 숨겼던 건지.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지.  하지만 봐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록 장현재가 호되게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비틀린 표정을 짓긴 해도 그로인해 천지가 개벽한다거나 제 심장이 찢겨서 죽는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할 말을 다 끝낸 한녹영이 비로소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약간 기진맥진한 기분이 들어서 잠시라도 좋으니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다.  순식간에 지친 기색이 든 한녹영을 보던 장현재의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 소중한 인형이 자아를 갖게 되었다는 건가.  자아를 갖게 된 인형이 홀로 또박또박 걸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듯한 무력감이 일순 들었다.  손만 뻗어도 잡을 수 있는데, 마비된 것처럼 손이 움직이는 않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장현재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슴에서 불길도 일었다.  누가 내 소중한 인형에게 자아를 심어준 건가.  절대 스스로의 의지로 절 벗어나려는 건 아니리라.  뺏길 수 없다는 독점욕도 생겨났다.

“아니. 넌 나에게 돌아오게 될 거다.”

망가뜨리는 것도, 버리는 것도 저만이 할 수 있었다.  선언하듯 말한 장현재가 날카롭게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한녹영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그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지금쯤 목을 빼고 바깥의 상황을 궁금해 하고 있을 박상호의 방 쪽으로 향했다.  문을 두들기자 박상호가 기다렸다는 듯 벌컥 나왔다.

“장 대표는? 갔냐?”

박상호가 거실을 구석구석 훑었다.

“방금 갔어.”

“장 대표는 왜 자꾸 온대냐? 전에는 가뭄에 콩 나듯 오더니만. 요샌 꿀단지 숨겨둔 반달곰처럼 찾아오고 난리야.”

투덜거리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삼계탕은 아직 덜 됐어? 냄새는 근사하다.”

부엌에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박상호도 코를 킁킁하더니 “다 됐나 보네.” 하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다 됐다. 녹영아, 얼른 와서 앉아.”

재촉에 들어가 보니 박상호가 압력솥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오골계 두 마리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우선 고기부터 뜯어먹고 있어.”

오골계 두 마리를 올리자 널찍한 접시가 꽉찼다.  두 마리 샀다기에 손바닥만 한 영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큼직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

보기만 해도 배부른 느낌이 드는데.

“왜 못 먹어? 다 먹어. 걱정하지 마. 거기 접시에 소금이랑 후추랑 섞어서 좀 내봐.”

박상호가 자그만 양념 접시를 가리켰다.  한녹영은 고기를 건져낸 국물에 불린 찹쌀을 넣고 다시 뚜껑을 닫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그가 시킨 대로 양념종지에 소금과 후추를 섞어 내놓았다.

“안 먹고 뭐해?”

김치를 꺼내 가져온 박상호가 멀뚱히 앉아있는 한녹영을 향해 말하더니 다리 하나를 쭉 찢어 내밀었다.  희미하게 웃으며 닭다리를 받아 한 입 뜯어먹어 보니 맛있다.

“맛있다.”

“그치? 많이 먹어. 보신되라고 몸에 좋은 약재 잔뜩 넣어 고았으니까.”

“어. 형도 많이 먹어.”

박상호도 이미 손에 닭다리 한 개를 쥔 채였다.  한녹영은 입이 터져라 고기를 넣고 우물대는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장현재에게 속에 있는 말을 숨김없이 꺼낸 최초의 날인데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은 것이 놀라웠다.  따끔따끔하는 가슴의 통증도 전보다 줄어든 것 같다.  괜찮아지는 중인 것 같아 좋았다.

한녹영의 집을 나온 장현재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짜증이 가득한 몸짓으로 운전대를 쾅쾅 쳤다.  그 바람에 경적 소리가 크게 연이에 나자 빌라 관리인이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댔다.  그제야 그는 짜증을 삼키며 한녹영의 빌라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자 편의점이 보였다.  장현재가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운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생수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말보로 레드 한 갑.”

주로 피우는 담배 이름을 말하며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남자를 향해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한녹영을 처음 만난 장소도 편의점이다.  새벽, 귀가 길에 담배를 사려고 들렀던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 중이던 한녹영을 처음으로 보았다.  지금과는 달리 살집이 꽤 있었고, 피로감이 잔뜩 내려앉은 지친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끌렸다.  한녹영의 얼굴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스물세 살에 당시 만나던 중견 여배우를 따라 이 바닥에 들어온 후 키워온 안목이 번쩍 섬광처럼 빛나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다듬으면 뜨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될 거란 예감에 심장이 다 떨렸다.  곧장 하영택에게 전화를 걸어 한녹영의 뒤를 파보라고 지시했고, 아비란 작자 때문에 사채 빚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모난 구석이 있어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사랑받길 원하는 애정결핍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장현재는 한녹영을 지켜보다 그가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되었을 무렵 손을 내밀었다.  빚을 갚아주었고,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며 빛나는 미래를 약속했다.  절망에 빠져있던 한녹영은 곧장 절 구세주처럼 여기며 따르기 시작했다.  독기가 있어 살을 빼고 힘든 트레이닝을 받아가는 동안 한녹영은 예상대로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제게 집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저를 목말라했다.  그게 눈에 보였다.  가끔 피곤할 정도로 집착하는 한녹영이 성가실 때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그가 원하는 애정을 원없이 줄 것처럼 조련했다.

애달아하고, 집착하고, 조금이라도 더 제 관심을 받길 갈구하며 저 없이는 못 살 인형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어이없이 제 곁을 떠나가려고 할 줄이야.  토라졌을 뿐 살살 달래주면 돌아올 거라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좀 전의 대화로 한녹영의 결심이 제 예상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한녹영은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남인 듯 낯설었다.  굳은 결심에서 쉽사리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누가 제 인형에게 자아를 심어준 건가.  제 손으로 찾아내, 제 손으로 키워온 인형인데.  소속 연예인들 중 가장 특별하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싸구려처럼 아무데나 팔아넘기지 않았다.  소속 연예인들 전부의 약점을 쥐고 있지만 저에 대한 한녹영의 믿음은 절대적이라 생각했기에 굳이 한녹영의 것은 만들어두지 않았다.

‘어떤 사내가 특별한 상대를 다른 사내에게 다리를 벌리라고 하겠어?’

혹시 강준일을 유혹하라고 한 말 때문에 마음이 틀어지기 시작한 건가.  누군가 사탕발림으로 한녹영을 녹여내지 않았다면, 남은 원인은 그것뿐이다.  제 말에 군말없이 따르는 것 같더니 속으론 싫었나?  하긴, 아직 저와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는데 다른 남자한테 몸을 팔고 오라고 했으니 내심 서운하고 속이 상했을 수도 있었겠다.

“쯧. 강준일의 약점을 잡아달라는 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나?”

무심코 중얼거리던 장현재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껏 제 뜻이 곧 한녹영의 뜻이 될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저와 한녹영의 뜻이 달라진 현실이 믿기지 않았고 어이없었다.  호되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그저 헛웃음만 났다.

어떻게 한녹영이?  다른 누구도 아닌 녹영이가?

“저기요, 손님?”

곤란한 듯한 음성에 정신을 차려보니 편의점 알바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제게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딴생각에 빠져 있어 카드를 받지 않자 당황한 모양이었다.  장현재는 카드를 받아 지갑에 넣은 후 편의점을 나왔다.  그리곤 하영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람 풀어서 녹영이 주변 좀 샅샅이 뒤져봐. 그리고 신 작가와 약속 잡아. 녹영이 대신 이번 신작에 주연으로 넣을 인재가 있다고 해. 그래, 주민성 밀어 넣을 거야. 드라마 시작 전에 괜찮은 CF 하나 엮어 내보내서 화제성 좀 만들어두면 되겠지. 신 작가는 걱정 마. 남편 도박 빚 때문에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니 돈 넉넉히 찔러주면 받아들일 거야. 감독도 내가 해결해. 녹영이 건은 서둘러. 그리고 LA행 티켓 끊어주고. 주민성 직접 데리러 갈 거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새끼가 애처럼 투정을 부리며 데리러 오라니 어쩌겠어. 데리러 가야지. 끊어.”

제 품에서 곱게만 커서 아직 이 바닥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은데, 한 번 호되게 넘어지고 나면 내 품이 안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  바깥세상의 험난함을 깨닫고 나면 제게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만들 거다.  돌아오도록.

장현재가 주먹을 꾹 쥐었다.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도 깨물었다.

일단 신 작가 드라마는 흥행 보증수표라 주연 자리를 다른 회사에 넘길 수 없었다.  한녹영이 딱인데, 제 복을 제 스스로 차버렸으니.  다른 배우도 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주민성을 신 작가 신작 주연으로 밀어 넣어 데뷔하자마자 톱으로 빵 띄어볼 생각이었다.  신 작가야 돈으로 발라버리면 되고, 김 감독도 문제없다.  아킬레스건을 이쪽이 쥐고 있으니까.  감독과 소속 여배우의 비디오가 있다.  그것도 그냥 비디오가 아니라 감독 새끼 취향이 변태라 채찍으로 맞고, 걷어차이면서 정액을 줄줄 흘리는 모습이 찍힌 비디오 말이다.  그래서 신 작가 신작 연출을 맡은 감독은 장현재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맨손으로 이 바닥에 들어와 지금까지 제가 목표로 한 것들 중 이루지 못한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두어 번 자빠진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일어났고, 실패를 거울삼아 성공을 향해 내달렸다.  특히 제 손에 쥔 것을 놓쳐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한녹영도 놓치지 않을 거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장현재가 차에 올라탔다.

☆☆★☆☆

제작자 정우는 한남동에 위치한 건물의 5층에 입주해 있었다.  2시부터 오디션 시작인데, 한녹영이 도착한 시간은 2시 20분이었다.  지각이지만 오디션 보러 온 것도 아니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먼저 들어가 있어. 주차하고 갈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한녹영이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리자 정우, 라는 간판이 바로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쁘게 움직이던 직원 중 한 명이 한녹영을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다가왔다.  스물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앳된 아가씨였다.

“한녹영씨 아니세요? 안녕하세요!”

한녹영이 그녀를 향해 웃었다.

“오늘 도망자 주인공과 차철호 역 오디션을 본다는 얘기를 듣고 궁금해서 잠깐 들렀습니다. 오디션 장은 어디입니까?”

“이쪽으로, 저 따라오세요.”

직원의 뒤를 따라 가자 스튜디오A 라고 적힌 룸 앞에 대기하고 있는 낯익은 배우들이 보였는데, 모두 조연급으로 알알이 알려진 배우들이었다.  그 중에 장한경도 있었다.  대본을 손에 꼭 쥐고 덜덜 떨면서 대기 중이던 장한경이 한녹영을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한녹영을 향해 다가오려 했지만, 다른 사람이 한 발 빨랐다.

“이게 누구야? 대단하신 한녹영씨가 아니신가?”

박지한이었다.  그는 빈정대며 다가와 한녹영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한녹영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예전 감정이 남아있는 탓에 벌써부터 불쾌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걸 억누르고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선배님? 네가 나를 선배라고 생각하긴 하나? 네 발바닥에 붙은 똥처럼 여기는 건 아니고? 나를 뭣 같이 생각하고 있으니 태연하게 내 역을 뺏어간 거겠지. 근데 뭐 선배님?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도둑년이. 어딜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나타나?”

오디션이 궁금해 찾아오면서 박지한을 만날 각오도 했다.  전에 영화의 주인공 역을 빼앗겼을 때보다 더 감정이 안 좋을 텐데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가능한 참자.  박지한 인생에서는 그의 전환기가 되었던 중요한 역을 뺏어온 거니 미안해서라도 참아보자.  박지한은 여전히 싫지만 그래도 참자. 이번에는 느닷없이 황산 테러를 당할 만큼 나쁜 짓은 하지 말자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러니 참아보자.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 “도둑년주제에 꼴아보면 어쩔 건데?” 하고 빈정대는 걸 듣고 있자니 꾹꾹 눌러둔 성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둑년이라니. 말씀이 심하십니다. 막말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고요. 알만큼 아실 텐데 아무 것도 모르는 초짜처럼 굴면 곤란한데요.”

참다못한 한녹영이 반박하자 박지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 도둑년이 말이면 단 줄 아나! 도장 찍기 직전이었어. 그런데 네 놈 새끼가 반반한 얼굴로 작가 홀려서 내 역을 홀라당 빼앗아갔다는 걸 모를 줄 알고? 얼굴이 아니면 몸뚱이로 홀리셨나? 아랫도리 팔아 내 역을 훔쳐가셨나? 한울 소속 년놈들이 아랫도리 팔아 괜찮은 역과 CF 챙긴다는 소문이 있던데. 니네 다 그렇게 큰 거잖아. 몸 팔아서. 배우가 남창도 아닌데. 누군 몸 팔 줄 몰라서 안 파는 줄 알아?!”

들으란 듯이 목소리가 커서 복도에 대기 중이던 배우들이 한녹영과 박지한을 흘끔대며 수군수군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상황은 좀 다른데 하는 말은 같아 속으로 웃음이 났다.  영화의 주인공을 한녹영에게 뺏겼다고 생각하고 반감을 가졌을 때도 박지한은 저렇게 말했다.  도둑년.  아랫도리 팔아 역 챙겼냐.  이렇게 말이다.

“마, 말씀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장한경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끼어들었다.  박지한이 이건 뭐야, 하는 눈으로 장한경을 돌아보았다.

“넌 뭐하는 새끼야?”

“오, 오디션 보러 온 배우입니다.”

박지한이 가소롭다는 눈으로 장한경을 아래위로 훑었다.

“배우? 요샌 개나 소나 다 배우라지. 너 어디 나왔던 놈이야? 대형 기획사에서 돈 찔러주고 오디션에 밀어 넣은 건가?”

“전 기획사 없습니다.”

“뭐? 회사가 없어? 근데 생판 처음 보는 놈이 어떻게 알고 비공개 오디션에 참가한······.”

“그만하시죠. 제가 차도영을 맡아서 억울하고 분한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로비로 얻어낸 거 아닙니다. 차도영에 선배보다 제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으니 제게 역을 준 것일 테니까요. 그리고 팔긴 뭘 팔았다고 억지를 쓰는지 모르겠는데요. 선배의 그 발언 저뿐만 아니라 작가님과 감독님 모욕하는 발언인 건 아시죠?”

냉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반박하자 박지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연기력도 없이 기획사 빽과 몸 팔아 여기까지 온 놈이······.”

“그만해. 박지한.”

잔뜩 이죽이는 박지한의 말을 자르며 또 다른 누군가 끼어들었다.  막 스튜디오 안에서 나와 한녹영과 박지한의 다툼을 막은 남자는 송정빈이었다.  한녹영이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정빈 선배.”

송정빈과는 한녹영이 정말 신인일 때 같은 드라마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한녹영은 그때 거의 단역 수준으로 출연했던 거라 고작 두어 번 얼굴 본 것이 다이고, 이후 송정빈의 스캔들이 터지며 그가 방송가에서 모습을 감춰 몇 년 만에 얼굴을 보는 거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송정빈은 한녹영을 향해 눈인사만 건네더니 곧바로 박지한을 잡아끌었다.

“오디션 보러 와서 무슨 짓이야?!”

“정빈 형도 얘기 들었을 거 아닙니까? 내 역 저 도둑년이 훔쳐갔습니다.”

“도장 찍고도 판 엎어지는 일이 허다한 곳이 이 바닥이야. 이 바닥에서 한두 해 구른 것도 아니면서 왜 이래?”

“얼마 만에 들어온 큰 역인지 형은 모를 겁니다. 근데 그걸 저 새끼가 홀랑 채갔는데 내가 열 안 받게 생겼습니까? 저거 분명 아랫도리 팔아서 내 역 훔쳐갔을 겁니다. 곱상하게 생겨서 계집년들이 환장하는 마스크지 않습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여기서 소란부리다 오디션도 못 보고 쫓겨나고 싶어?”

송정빈의 충고에 박지한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쫓겨나면 정빈 형 입장에선 좋은 일 아닙니까? 경쟁자 한 명이 줄어드는 거니까요.”

송정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몇 년 전에 큰 기회 잡을 뻔하다 네 성질 못 이겨 조감독 패고 매장당하다시피 하더니 아직도 그놈의 성질머리 못 고쳤냐?!”

송정빈의 따끔한 말에 박지한이 비로소 말문을 닫았다.  제법 괜찮은 마스크와 연기력을 가지고도 데뷔 십 년째 빌빌대는 까닭은 운이 없어 딱 맞는 역을 못 만난 탓도 있지만, 성질 탓도 있었다.  5년 전에도 상당히 큰 역을 맡을 뻔 했는데 조감독한테 주먹을 휘둘러 연예계에서 방출당할 뻔 했던 것이다.  당시 소속사에서 폭력 사건을 해결해주고 바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는데, 소속 회사가 없어지고 난 후 조조연으로도 출연 못해 힘든 와중에 찾아온 기회를 뺏겼으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얼마 만에 찾아온 기회인데 저 도둑년이.  박지한이 한녹영을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회사가 있었을 때 출연했던 드라마를 보고 차도영에 어울릴 것 같아 제작사에 강력 추천했다던 작가가 느닷없이 말을 바꿔 한녹영 캐스팅이 확정되었다며 미안하다고 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 작가를 협박하다시피 해서 주인공 오디션을 받게 되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거기다 경쟁자가 송정빈 형이라니.’

꽃뱀 사건 때문에 인기가 급추락해 연극판을 전전하고 있지만, 워낙 기본 저력이 있어 불안함이 컸다.

나한테는 차도영이 딱이었는데.  박지한이 한녹영을 노려보고 있을 때 “박지한 씨 들어오세요.” 하는 말이 들려왔다.  박지한이 한녹영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쯧 혀를 찬 송정빈이 한녹영에게로 향했다.  긴장해서 덜덜 떠는 장한경과 잠깐 담소를 나누던 중인 한녹영이 제게로 다가오는 송정빈을 보았다.

“아는 사이?”

송정빈이 손가락으로 장한경을 가리켜보였다.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니 아는 사이라고 해야겠네요.”

장한경이 송정빈을 향해 고개를 꾸벅하며 “장한경이라고 합니다.” 하고 제 소개를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네. 연극 무대에만 잠깐 섰습니다.”

송정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역을 보러 왔어요?”

“차철호 역입니다.”

그때 스튜디어 문이 열리며 “장한경 씨 안으로 들어와서 대기해주세요.”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한경이 숨을 꿀꺽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대본을 꾹 쥔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혹시 네가 추천한 거야?”

스튜디오 문이 닫히자 송정빈이 물었고, 한녹영이 눈썹을 올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웠다.

“네. 하지만 오디션만 볼 수 있도록 했을 뿐입니다. 역을 따낸다면 저 친구 실력일 거고요. 근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치로 때려 맞췄지. 주인공 역에는 날 추천했다던데?”

“정빈 선배가 어울릴 것 같아 이름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동안 연극 무대에 주로 서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미지 추락할 대로 추락해서 불러주는 데가 있어야지. 한때는 잘 나갔다는 자존심이 있어서 아무 역이나 맡긴 싫었고. 어쨌든 고맙다. 대본 보니 좋던데, 덕분에 기분 좋게 컴백할 수 있겠어.”

“저한테 왜 고마워해요? 내가 선배한테 역 준 것도 아닌데. 그리고 확정도 아니잖아요. 박지한 선배가 맡을 수도 있는 거고.”

생각만 해도 싫은 가정이지만.  박지한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오만상을 쓰는 한녹영을 보고 송정빈이 피식 웃었다.

“네 생각에도 지한이 보다는 내가 더 어울리지 않냐? 그리고 연기도 내가 더 잘해. 성격도 내가 더 좋고.”

“······.”

딱 한 번 드라마를 같이 했을 뿐이라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선배 잘난 척이 심했지.

“생각해보니 내가 역을 따내면 다 내 연기력 덕분인데 그걸 왜 너한테 감사했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고맙다고 했던 말 취소는 안 한다. 고마운 것도 사실이니까. 방송에서 멀어졌어도 귀는 열려있어서 그간 네 소문도 심심찮게 들었는데, 소문과는 좀 다른 것 같아 의아하다 싶어.”

거만하고, 못돼쳐먹었다던데?  송정빈이 의아하다는 듯 한녹영을 보았다.  소문으로 들은 한녹영이라면 아까 박지한 말에 그 정도로 꾹꾹 참지 않고 한판 드잡이질을 붙어도 붙었을 텐데?

“본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리고 헛소문도 은근히 껴있기 마련이고요.”

한녹영이 은근히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라는 듯 발뺌을 하자 송정빈이 한쪽 눈썹만 비스듬하게 올렸다.  꽤 믿을 만 한 데서 들려온 소문들이라 안 믿을 순 없는데, 눈앞에 선 한녹영은 소문 속 인물과는 좀 달라 보이는 것이 의아했다.  사실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은 없었다.  설사 실제 한녹영이 소문보다 더한 망나니라 해도 송정빈은 기꺼이 엎드려 인사할 수 있었다.  제게 기사회생의 기회를 줬으니까.  오디션이 끝난 후 꽤 흐뭇한 표정의 김석형이 손을 내밀며 ‘사실 한녹영이 이 역에 송정빈 씨가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디션에 부를 생각조차 안했을 겁니다. 여기 있는 작가 선생이 한녹영 말을 듣고 송정빈 씨도 괜찮을 것 같다고 설득해서 부른 건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그간 연기가 녹슬지 않았군요.’ 라고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이쪽에서 잊히다시피 한 제가 무려 주인공 역의 물망에 오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신인작가라지만 대본도 좋고, 감독 또한 저력 있는 김석형이 아닌가.  운이 좋지 않아 시청률이 바닥을 긴다 해도 적어도 드라마 폐인은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운이 좋다면 대박을 쳐 단번에 예전 인기를 회복할 테고.

근데 감이 좋단 말이지.  상당히.

“내가 빚 한 번 졌다. 촬영 시작하면 보자.”

송정빈은 한녹영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친 후 가버렸다.  한녹영이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엷게 웃었다.  저 자신감은 진짜 여전하네.  인기 떨어지고 몇 년이니 기가 죽었을 법도 한데 완전이 본인이 역을 맡을 거라는 확신에 찬 말투잖아?  이변이 없는 한 송정빈이 주인공을 맡을 테지만 말이다.

“어떻게 됐어? 지리산 흙돼지 청년 오디션 보러 들어갔어?”

뒤늦게 박상호가 부랴부랴 나타났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주차하다 가볍게 접촉사고가 나서 좀 소란이 있었어.”

“싸웠어?”

“그쪽 과실이라 경찰 부르자고 하니 그제야 잘못했다며 사과하기에 그냥 보냈어. 괜히 일 커져봤자 좋을 것도 없잖아.”

“잘했어. 장한경은 저 안에.”

“어때 보이든? 잘 할 것 같든?”

“엄청 떨던데.”

“떨어서 실수만 하지 않음 꽤 승산 있어 보이던데.”

“잘 하겠지.”

잘했으면 좋겠다.  잘해서 역에 캐스팅되면 혓바닥에 박힌 가시 같은 죄책감도 사라질 텐데.  아까까지만 해도 담담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긴장감이 들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커피 좀 드세요.”

제작사 정우 직원이 쟁반에 커피를 여러 잔 타와 대기 중인 배우들뿐만 아니라 한녹영과 박상호에게도 한 잔씩 건넸다.

“혹시 믹스 커피라 싫으시면 원두로······.”

정우 직원의 말에 한녹영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믹스 좋아합니다.”

직원의 얼굴에 홍조가 확 번졌다.  그리곤 후다닥 뛰어서 멀어졌다.  한녹영이 커피를 받아 반 정도 마셨을 때 박지한이 먼저 나왔다.  그는 한녹영을 보고 금세 싸늘해지더니 부러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도둑년. 어디 두고 보자.”는 앙금 가득 쌓인 말을 남겼다.

“박지한이 방금 뭐란 거야? 뭐? 도둑년?!”

박상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는 빈 일회용 커피잔을 손바닥으로 와락 구기곤 멀어지는 박지한의 등을 향해 홀로 씩씩댔다.

“저 자식 성질머리는 여전하네. 말투 험하고 수틀리면 주먹부터 쓰고 보는 성격 때문에 여러 번 물 먹어놓고. 나 참.”

“박지한 선배가 그런 성격이었어?”

“어. 넌 몰랐겠지만. 말투도 험하지만 특히 이 버릇이 안 좋아.”

박상호가 주먹을 쥐어보였다.  한녹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입만 험한 줄 알았더니만.  그러고 보니 한창 LK 제작 영화를 찍고 있을 때 박지한의 폭력 어쩌고 하는 말을 얼핏 들은 듯도 했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흘려들은 탓에 잘은 기억 안 나지만 말이다.

“좀처럼 못 뜨고 거의 무명이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다 모처럼 만난 기회를 뺏겼으니 성질이 날 만도 하다 싶기도 한데, 그래도 도둑년이라니! 생각할수록 분하네.”

한녹영이 또 울컥해서 씩씩대는 박상호를 향해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박지한 선배 입장에서는.”

“조만간 같이 목욕하자.”

뜬금없는 말에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징그럽게 뭔 소리야.”

“아무래도 우리 녹영이 등에 날개 돋아났지 싶어서.”

난 또.

“왜? 내가 천사라도 되었을까봐? 그럴 일은 없네요. 이따 작가님이랑 감독 보면 박지한은 안 된다고 말할 거야. 박지한 선배 얼굴 보면서 연기할 자신 없어.”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쳐서 도망자를 박지한이 차도영을 맡았을 때보다 훨씬 더 띄워야 하는데, 그의 얼굴을 마주보곤 인생 연기를 할 수 없을 테니까.  촬영장에서의 난투, 이딴 제목으로 기사나 나가지 않음 다행일 정도로 신경전이나 벌이다 연기를 망치겠지.  제가 겪은 박지한 성격으로 봐서 분명 계속 깐족대며 도발해올 테고, 저는 그걸 고스란히 참아 넘길 만큼 참을성 깊은 부처님이 못 되었다.

‘내가 언제부터 천사였다고. 박지한이랑은 절대 같이 드라마 못 찍어.’

도둑년이니 뭐니 하며 저를 깎아내리는 말을 들은 것으로 미안함마저 털어버릴 생각이었다.  나 참.  언어 센스도 구려.  도둑년이 뭐야.  도둑년이.  그리고 뭐?  아랫도리를 팔아?  누굴 남창으로 몰고 난리야.  아, 물론 팔려고 한 적은 있지만.

박상호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해놓고 찬찬히 박지한과의 일을 돌이키니 짜증이 나 속으로 구시렁대는 동안 장한경이 나왔다.

“오디션은? 잘 봤어요?”

박상호가 곧장 물었다.  혼이 빠져나간 듯 멍해 있던 장한경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리곤 다리가 후들거려 못 서있겠는지 비틀비틀하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의 입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잘······ 모르겠어요. 잘 한 것 같긴 한데, 떨어서 실수한 것도 같고.”

“잘 했다는 겁니까? 아니면 떨어서 망쳤다는 겁니까?”

“그게 잘 기억이 안 나서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죽을 것 같아요.”

한녹영이 입이 마르는지 자꾸만 침을 삼키는 장한경에게로 물을 내밀었다.

“고, 고맙습니다.”

시선을 든 장한경이 살짝 웃더니 물을 받았다.  곧 다른 배우가 호명되어 오디션을 보기 위해 스튜디어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며칠 대본 정말 열심히 봤는데, 이 역 꼭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차철호 역 꼭 따내서 한녹영 씨랑 같이 여, 연기 하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장한경의 표정은 선으로 그은 것처럼 딱 절반이었다.  자신감이 반, 두려움이 반.  절반으로 나뉜 얼굴 표정 위로 꼭 역에 캐스팅 되고 싶다는 열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결과 좋을 거예요. 내가 미리 오디션 봤잖아요. 이래봬도 내가 이 바닥에선 사람 좀 볼 줄 안다, 하는 사람이거든. 나였다면 바로 캐스팅했을 거니 자신감을 가지고 기다려요. 지리산 흑돼지 총각!”

박상호가 장한경의 어깨를 툭 쳤고, 장한경이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저 마트 판촉 알바 그만뒀어요. 그러니까 지리산 흑돼지라고 부르지 마세요. 한경이라고 불러주시고요, 말 놓으세요.”

말 놓으라는 제안을 박상호가 냉큼 받아들였다.

“그럼 그럴까? 고기 맛있던데 왜 관뒀어?”

“페이는 좋은데, 시간이 길어서요. 대본 연습할 시간이 필요해서 과감하게 관뒀습니다. 아, 전 가봐야겠어요.”

시계를 본 장한경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아마 또 알바를 가야 할 시간인가 보았다.  부랴부랴 몸을 일으킨 그가 한녹영의 얼굴을 보았다.

“전 작가님과 감독님을 잠깐 보고 갈 생각입니다.”

“아······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기 촬영장에서 꼭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조심스럽게 말한 장한경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도망치듯 황급히 복도를 떠났다.  한녹영은 복도에 앉아 오디션이 끝나길 기다렸다.  비공개 오디션이고 부른 배우가 많지 않아 오디션은 오래지 않아 끝났다.  그렇다 해도 두 시간은 족히 기다린 것 같지만.  마지막 배우까지 돌아가자 한녹영이 안으로 들어갔다.  누굴 캐스팅하면 좋을지 의논을 나누고 있던 작가와 감독, 그리고 정우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느닷없이 등장한 한녹영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하, 한녹영씨?”

김현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박상호가 세 시간 정도 시간을 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긴 했는데, 변수가 많은 일이라 어떻게 될지 몰라 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던 탓에 놀란 것 같았다.

“오디션이 궁금해서 직접 와봤어요. 캐스팅할 만한 배우가 보였습니까?”

“네. 주인공 역은 결정됐고요, 차철호 역을 두고 의견이 나뉜 상태에요.”

혹시 장한경도 후보에 올랐습니까, 라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 장한경 이름을 꺼내면 그를 캐스팅하라는 압박으로 보일 것 같아 관두었다.

“주인공 역은 혹시 정빈 선배입니까? 아까 잠깐 만났는데, 자신감이 대단해 보이던데요.”

한녹영의 말에 김석형이 웃음을 흘렸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성격은 여전한 모양이네요. 스스로의 연기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성격이라 좀 피곤한 면이 있긴 해도 주인공 역은 송정빈 씨로 결정했습니다. 쉬는 동안 오히려 연기가 깊어졌더라고요.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주인공 역에도 잘 어울리고요. 생각도 안 한 배우라 반신반의하면서 불렀는데, 솔직히 한녹영 씨 안목에 좀 놀랐습니다. 오히려 우리 쪽에서 심사숙고해 러브콜을 보냈다가 거절당했던 배우들보다 더 나을 것 같던데요.”

칭찬에 머쓱해졌다.  안목이라니.  미리 봤기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뿐인데.  어쨌든 박지한은 염두에 두지 않는 모양이니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차철호 역은 어떻게 됐지?  슬쩍 눈치를 보니 누구도 제게 장한경의 결과에 대해 말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어깃장을 놓을 순 없으니 얌전히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나.

“녹영아, 이제 가야 해.”

뒤따라 들어온 박상호가 한녹영의 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벌써 출발해야 할 시간인가 보았다.  한녹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캐스팅 확정되면 제게도 연락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김현영이 대답했다.  그녀를 향해 웃은 한녹영이 이번엔 김석형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캐스팅 확정되면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거겠죠?”

“네. 그럴 예정입니다.”

“더 이상 문제는 없겠죠?”

“네. 제발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 드라마는 유난히도 힘든 것 같네요.”

김석형이 우는 소리를 하자 정우 직원 중 한 명이 “대박나려나 보죠.” 라고 말했다.  한녹영도 그 말에 동조해 “분명 대박날 거예요.” 라고 한 후 스튜디오를 나왔다.  바쁘게 걷는데 부랴부랴 김현영이 뒤따라 나오며 한녹영을 불러 세웠다.  걸음을 멈춘 한녹영이 돌아보자 잽싸게 다가온 그녀가 자그맣게 말했다.

“차철호는 아마도 장한경씨가 맡게 될 것 같아요.”

한녹영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미리 언질을 주려고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연기······ 괜찮았습니까?”

“네. 생각보다 훨씬이요. 엄청 떠는 게 보여서 걱정했는데,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자 사람이 딱 돌변하던데요. 카메라발도 좋았고요. 너무 신인이고, 소속사도 없고, 검증된 것이 하나도 없고, 아무튼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아서 감독님이 좀 망설이는 것 같긴 한데, 아마 장한경씨가 될 거예요. 사실 제일 나았거든요. 무엇보다 열의가 보였고요.”

“고맙습니다. 작가님.”

“고맙기는요. 감사 인사는 저희 쪽에서 드려야 하는데요. 촬영 들어가면 그때 뵈어요. 6회 최종 대본 나왔으니 곧 보내드릴게요. 진작 수정 끝냈어야 했는데, 요새 캐스팅 문제로 좀 정신이 없어서 늦었어요.”

“드디어 6회 대본이 나왔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박상호가 “녹영아!” 하고 이름을 부르며 재촉했다.  그의 얼굴이 다급한 걸 보니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지각인가 보았다.  김현영 역시 다급한 얼굴로 얼른 가보시라고 말했고, 한녹영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한 후 박상호와 함께 서둘러 정우를 빠져나왔다.

“이번 스케줄은 뭐랬지?”

“사인회. 5시부터 시작인데 아슬아슬하겠다. 막히지만 않으면 되는데. 한수 놈이 언제 도착하느냐고, 출발은 한 거냐고 난리다. 혹시 너 지각할까봐 현장에서 되게 쪼는 모양이야.”

박상호가 툴툴댔다.  오늘은 스케줄 도중에 정우에 들를 예정이어서 차를 가지고 와 밴과 따로 움직였는데, 먼저 스케줄 장소에 도착한 로드 매니저와 코디 일행이 혹 한녹영이 지각이라도 할까봐 똥줄이 타는 모양이었다.  전에는 스타병에 걸려 지각을 밥 먹듯 한 터라 그들의 걱정이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박상호의 휴대전화가 연신 삐릿삐릿 울었다.  한녹영은 그의 휴대전화를 집어 ‘안 늦어! 5분 전 도착 예정!’ 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어깨를 축 내린 채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연기하고 싶다. 벌써 몇 번째 사인회야.”

두 번째였던가?  전에는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한 사인회였는데 이번 달에는 벌써 두 번째다.  팬들이 저를 보러 와주는 거야 고맙지만, 지치고 힘든데 방긋방긋 웃으며 어깨가 빠져라 사인을 해주는 일은 쉽지 않다.  싫은 건 아니지만 좀 지친다고 할까.  재밌고 센스있게 말하는 재주가 없는데 말을 해야 하는 스케줄이 많아져서 더 지쳤다.  잡지 인터뷰, 라디오 게스트, 예능 출연까지.

“조금만 참아.”

박상호가 시무룩해진 한녹영을 안쓰럽게 보며 말했다.  아직 계약으로 한울에 묶여있는 한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응.”

한녹영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내일 스케줄 한 개 바뀌었다.”

“어떤 거?”

“저녁에 있었던 잡지 인터뷰 하나 취소됐다더라.”

스케줄이 빡빡해 잡지 인터뷰를 8시로 잡아뒀는데, 그게 취소된 모양이다.

“왜 하필 내일 스케줄이야. 이왕 취소할 거면 모레 걸로 취소하지.”

“모레? 모레 스케줄 뭐?”

“시상식.”

“시상식 참석 스케줄을 왜 바꿔?!”

박상호가 버럭했다.  그 스케줄만은 절대 바꿀 수 없다는 투였다.

“시상식에 가서 뭐해?”

“뭐하긴! 상을 타는 거지. 너 올 상반기 드라마로 최우수상 후보에 올랐잖아. 사실 나 좀 기대 중이다.”

설렘이 가득한 박상호의 말에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속으로 ‘형, 김칫국 마시지 마.’ 라고 중얼거렸다.  상복은 별로 없어서 데뷔 이후 꾸준히 후보에만 오를 뿐 정작 상을 탄 적은 없다.  올해도 마찬가지여서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상은 못 받았다.  주변에서 이번 최우상은 너다, 라는 말을 자주 들어 전에는 저도 기대감을 잔뜩 안고 시상식에 참석했다가 물먹고 잔뜩 실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쨌든 후보에 올랐으니 참석해야 하는데,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터라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90퍼센트 이상이었다.  한 번 겪었던 상황을 다시 겪자니 지루한 마음도 들고.  하지만 어쨌든 후보에 올랐으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참석은 해야겠지.

그나저나 모레가 벌써 31일이라니.  과거로 돌아온 이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다니 믿기지 않는다.  감상에 젖어있던 한녹영이 상체를 바로 세우며 물었다.

“근데 스케줄 뭘로 바뀌었는데?”

박상호가 핸들을 꺾으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나도 몰라. 아까 주차 문제 해결하고 5층으로 올라가려는데 하영택한테 전화 와서 내일 잡지 인터뷰 취소하고 다른 걸로 잡아뒀으니까 그렇게 알라고 통보하더라. 뭘로 바뀌었는지 암만 물어봐도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하더니 툭 끊어버렸어. 요새 하영택이 널 대하는 태도가 영 별로야. 암만 생각해도 내일 새로 잡혔다는 스케줄이 영 미심쩍단 말이지. 말 안 해주는 거 보니 찜찜해. 괜히 빌미 잡힌까봐 펑크 낼 수도 없고.”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박상호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찜찜한 생각이 든다.

“형 말대로 괜히 빌미 잡혀서 좋을 거 없으니 뭐든 참고 하면 되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좀만 더 참자. 이제 한 달 조금 더 남았으니까. 도착했다. 한수 자식 얼굴 허옇게 뜬 거봐.”

주차장에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장한수의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박상호가 킬킬대며 차를 세우자 장한수가 득달같이 달려와 한녹영이 있는 뒷자석 문을 열었다.

“지각 안 했지?”

“어. 십오 분 전이야. 얼른 들어가서 메이크업 수정하고 사인회장으로 가자. 사람들 진짜 많이 왔어. 저번보다 더 많은 것 같아.”

도로 사정이 좋아 내비에서 알려준 시각보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한녹영을 본 장한수의 얼굴이 비로소 풀렸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재빨리 메이크업을 수정한 후 사인회장으로 향했다.

다음 날 저녁, 모든 스케줄을 소화한 한녹영이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7시였다.  입구에서 초조하게 한녹영을 기다리고 있던 하영택이 달려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놀다 왔어요? 직전까지 스케줄 소화하느라 피곤에 찌든 얼굴 안 보입니까?”

눈깔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짜증이 가득한 말투에 하영택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대 쥐어 패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다는 듯.  그걸 본 한녹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대체 무슨 스케줄이기에 이러는 거지?  회사를 옮긴다고 한 이후에는 제 모든 말과 행동을 꼬투리 잡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바쁘더니만.

“피곤에 찌들긴. 뽀얗고 예쁘기만 한데. 이걸로 갈아입고 지금 당장 H호텔 21층으로 가.”

“호텔? 호텔 스케줄입니까? 무슨 스케줄인데요?”

“일단 가. 가보면 알아!”

대체 무슨 스케줄인데 말도 안 해주고 무작정 가라는 거야?  찜찜한 마음이 커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란 마음으로 수트를 받으려고 할 때 박상호가 눈을 치뜨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H호텔 21층이라니, 거기 김동우가 주최하는 파티가 열리는 곳 아닙니까?!”

김동우?  김동우가 누구더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긴 한데.

“거기는!”

무슨 파티인지 아는 박상호가 따지려고 하자 하영택이 인상을 확 쓰며 말을 가로막았다.

“거기는 뭐?! 가면 안 되는 곳이라도 돼?! 참석한다고 했으니까 무조건 참석해. 매년 러브콜이 왔지만 회사 차원에서 정중하게 거절했으면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중간에 새서 회사 이미지에 먹칠했다간 알아서 해!”

협박조로 말한 하영택이 수트를 박상호의 가슴에 팽개치듯 안긴 후 휙 돌아서서 회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녹영이 씩씩대고 있는 박상호를 향해 물었다.

“파티라니? 형은 무슨 파티인지 아는 것 같던데, 뭐야?”

“김동우라고······ H그룹 손자가 있어. 그 자식이 매년 연말에 지네 회사 소유 호텔에서 파티를 여는데, 거기에 연예인들을 부르거든. 와서 분위기 띄우라고. 파티 참석자들이 전부 난다긴다하는 재벌가 사람들이라 돈은 세게 준다던데, 좀 더럽게 노는 모양이더라. 몸에 금 바르고 태어난 것들이 눈에 뵈는 게 있겠냐. 떡고물 생각하고 참석했던 연예인들이 다 학을 떼고 돌아온다던데, 그런 곳에 널 보내다니. 하영택 저 새끼가 돌았나! 공식 스케줄도 아니고 이건 거부하자.”

당장 회사 안으로 쳐들어가 하영택의 멱살을 잡을 듯 박상호가 펄펄 날뛰었다.  그러니까 재벌 2세 혹은 3세들이 모여 노는 자리에 기쁨조 역할로 투입되는 거네?  비위가 확 상했고, 하영택에 대한 분노가 일었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가자.”

“어디로?”

“어디긴. H호텔로 가라잖아.”

“너 내말 이해 못했어?!”

“내가 바보냐. 공부는 좀 못했어도 이해력이 딸리진 않거든? 형 말 다 이해했고, 알아들었으니까 가자고.”

“녹영아!”

“그냥 한 번 참지 뭐.”

“재벌가 파티라고 고상할 거라 생각하면 아주 큰 오산이다. 김동우. H그룹 회장의 손자이긴 해도 사생활 더럽고 온갖 문제 다 일으키고 다녀서 눈밖에 난지 오래야. 돈 펑펑 쓰고 다니면서 지 같은 놈들이랑 어울려 파티나 벌이고, 그 파티에 돈으로 연예인들 불러서 술 따르게 하고······ 룸살롱에서 업소 여자들 끼고 노는 것보다 더하다더라. 진짜 소문 안 좋아.”

“각오하고 있으니까 가자고. 안 갔다가 빌미 잡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형, 나 가능하면 깔끔하게 회사랑 결별하고 싶다.”

박상호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깔끔은 무슨. 이미 지저분한데. 하영택 새끼, 진짜 더러운 새끼야. 암만 그래도 그렇지. 그딴 델 보내다니. 장 대표도 마찬가지이고. 강준일 대표한테 스폰 받아오라고 보냈을 때보다 더 하잖아. 그땐 미리 돈이나 안 받았지, 이번엔 돈 받고 재벌가 망나니들 노는데 기쁨조로 보내는 거니까. 네가 그간 회사에 벌어다 준 돈이 얼마인데.”

박상호는 호텔로 가는 내내 구시렁댔다.  그의 투덜거림에 머리가 아파서 나중엔 한녹영이 그만 하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피로가 쌓여 힘들어죽겠고만.  내내 잠을 별로 못 잔 탓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컨디션이 바닥을 기었다.

피로가 켜켜이 쌓인 한녹영의 얼굴을 보곤 한숨을 푹 내쉰 박상호가 마지못해 입을 닫았다.  재벌가 망나니들 모여서 파티 하는데 기쁨조로 참석해야 하는 한녹영이 안타까워 지금이라도 당장 차를 돌려버리고 싶지만, 깔끔하게 끝내고 싶다는 말도 이해하기에 꾸역꾸역 말을 삼켰다.  불참했다가 하영택이 돌아서 막 나가면 그게 더 곤란하니까.

나 원.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나간다는 것도 아닌데, 왜 녹영이를 못 잡아먹어 난리야.

속으로 조용히 하영택과 장현재를 욕하는 사이 호텔에 도착했다.  밴에서 내려 21층으로 올라가자 경호원으로 보이는 떡대들이 박상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녹영 씨만 들어가십시오.”

“형은 먼저 집에 가 있어. 끝날 때쯤 전화할게.”

한녹영이 박상호를 향해 말했다.

“기다릴게.”

“언제 끝날지 알고. 한수 형이랑 코디들도 퇴근해야지. 각자 집에 데려다주고, 형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다. 분위기 보고 적당히 빠질 수 있을 것 같음 나와. 전화하면 바로 데리러 올게.”

“응.”

한녹영이 대답했고, 박상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도로 내려갔다.  한녹영은 혼자 홀 안으로 입장했다.  조용했던 복도와는 달리 안은 시끌벅적했다.  8시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분위기가 꽤 무르익었는지 곳곳에 술에 취해 비틀대는 사람들도 꽤 보였다.  한녹영은 입구에서 홀 안을 살펴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 제법 보였다.

“이게 누구야? 한녹영이잖아. 내가 화장품 CF보고 반해서 해마다 불렀는데, 매번 거절하더니 올해야 왕림해주셨네?”

말하는 투로 보아 이 남자가 파티 주최자인 김동우인가 보았다.  한녹영이 고개를 까닥했다.  3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거만함이 얼굴과 태도에 가득한 남자였다.  강준일에게선 위엄이랄까, 품위랄까, 그런 게 느껴졌는데 김동우에게서 품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재벌 3세라고 다 같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화장발, 화면발인가 했더니 실물도 죽이네. 사내자식이 뭐 이렇게 꼴리게 생겼데?”

김동우가 한녹영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는 억지미소를 짓고 있는 한녹영을 강제로 끌다시피 해서 홀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누가 왔는지 봐.”

커다란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술을 마시던 중인 남녀 무리들이 김동우의 말에 시선을 들었다.  그들 중에는 역시나 익숙한 얼굴들이 몇 있었다.  작년에 함께 화보 촬영을 했던 신인 여배우와 함께 일한 적은 없지만 얼굴과 이름은 아는 남자 배우,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본 적이 있는 연예인 둘이 더 있었다.  한 명은 가수인 듯도 하지만 확신은 없다.

“한녹영이잖아?”

“실물도 화면처럼 곱상하네. 너보다 얼굴이 더 낫다.”

누군가 제 옆에 앉은 여배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신인 여배우가 얼굴을 붉혔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올해도 안 올 줄 알았더니 왔네? 어떻게 불렀냐?”

“이걸 작년 두 배로 불렀지.”

김동우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였다.  그리곤 의자에 앉더니 한녹영의 손목을 잡아 제 옆에 앉혔다.

“술 한 잔 따라봐. 몸값 비싼 분한테 술 한 잔 얻어 마셔보자.”

한녹영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술잔을 내려다보며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성질 같아선 술을 술잔이 아닌 김동우의 머리 위로 부어버리고 싶지만, 억지로 참으며 술병을 집어 술을 따라주었다.  김동우가 술을 단번에 비워내더니 제가 입댄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이번엔 한녹영에게로 내밀었다.

“너도 마시고.”

한녹영이 그걸 받아 단번에 비웠다.  김동우와 그 옆의 재벌가 패거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키들대며 웃었다.  화끈한데, 기집애 같은 얼굴과는 달리 성격은 화끈한가봐, 술 먹고 얼굴 붉어지니 더 섹시한데, 어쩌고 하면서.

“한녹영, 오늘 너 내 전담이다.”

제멋대로 어깨로 팔을 감으며 하는 말이 꼭 룸에 들어온 업소 여자를 다루듯 했다.  이러다 곧 옷 안으로 손도 들어오겠네.  신인여배우를 업소 여자마냥 끼고 있던 남자가 잔뜩 술이 오른 얼굴로 밀착된 미니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옷을 들춰 가슴을 들여다보았다.  신인여배우가 확 붉어진 얼굴로 손을 밀어내자 ‘여배우 젖통은 뭐가 다를 줄 알았는데 특별한 것도 없네.’ 하며 천박하게 낄낄댔다.  신인여배우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녹영이 가늘게 뜬 눈으로 재벌가 망나니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옆에 낀 연예인들에게 술을 강제로 먹이는가 하면, 느닷없이 옷을 벗기기도 하고, 강제로 만지기도 하도, 춤을 춰보라는 둥, 노래를 불러보라는 둥, 노는 꼴들이 가관도 아니었다.  연예인들은 마지못해 시키는 대로 하며 억지로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강준일에게 남창 취급을 당했을 때보다 더한 모욕감과 수치심이 들며 제가 꼭 업소 룸에 들어온 호스트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러니 여길 다녀간 연예인들이 학을 뗐다고 하는 모양이다.

“우리 한녹영이 노래도 한 번 들어보자.”

“그래, 그래. 어이, 동일아. 한녹영 노래 좀 시켜봐. 그 왜 작년에 드라마에서 굉장히 섹시한 춤추면서 노래하던 모습이 제법 꼴리던데 여기서 해보라고 해.”

“어. 한녹영이 섹시 춤 한 번 구경하자. 드라마에서처럼 얄팍한 허리 낭창낭창 흔들어봐.”

누군가가 한 말에 다들 동의하며 한녹영한테 섹시 춤을 춰보라고 요구했다.

“난 그거 보고 싶었는데. 트레이드마크인 꿀 미소. 동일이 오빠, 난 한녹영이 꿀 미소 지으면서 나 안아줬으면 좋겠어. 해주라고 해.”

“야야. 저 얇은 가슴을 봐라. 네가 안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한녹영을 끌어안아야 할 것 같은데? 한녹영 같은 부류는 여자용이 아니라 남자용이야. 그러니까 기집애는 빠지시고, 뭐 해? 춤 안 추고? 돈을 받고 왔으면 돈값을 해야지.”

“이 새끼가. 돈은 내 주머니에서 나갔는데, 재미는 왜 니들이 보려고 해?”

눈을 부라린 김동우가 한녹영을 돌아보았다.

“저 새끼들 앞에서 재롱떨 것 없이 이대로 내 침대에 직행 어때? 너 같이 꼴리게 생긴 사내새끼는 처음인데. 아까부터 아랫도리가 뻐근해. 장 대표 그 자식이 널 어찌나 싸매고 도는지 파티에 불러도 퇴짜, 따로 만나고 싶다는 말에도 퇴짜 놓더니 돈을 두 배로 확 질러버리니까 보내네? 스위트룸 비워뒀는데 어때?”

“회사에 지급한 돈에 내 화대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김동우가 픽 웃었다.

“화대는 따로 지급해야지. 걱정하지 마. 구멍이 뻐근하도록 찔러줄 테니까. 구멍에 찔러보고 마음에 들면 스폰도 해줄게. 내가 밀어주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뜨는 건 문제도 아니라니까?”

회장인 할아버지 눈 밖에 났다면서 무슨 재주로.

“너 같은 새끼님이 스폰 안 해줘도 난 내 힘으로 톱스타 될 수 있거든요.”

한녹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 말을 웃으며 듣고 있던 김동우의 얼굴이 뒤늦게 구겨졌다.

“뭐? 너 방금 뭐라고?”

“이해력도 딸리는 모양이네. 네놈 같은 새끼 분이 스폰해주지 않아도 난 내 능력으로 알아서 뜬다고 했는데요.”

강준일에게도 안 받은 스폰을 이딴 후진 놈한테 받을 이유는 없었다.  강준일한테는 일방적으로 까였다는 말이 진실이지만.

“돈에 팔려온 남창 같은 새끼가!”

“돈에 팔려온 나도 한심하지만, 돈 뿌려서 연예인 불러 천박하게 노는 너님도 그리 고상해 보이진 않는데요. 업소 가서 노는 대신 호텔 홀 빌려서 연예인 끼고 놀면 본인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냥 느껴지나 본데, 그래봤자 부모 잘 만나 돈이나 펑펑 써대는 비싼 쓰레기밖에 더 돼요?”

한녹영은 끝까지 생글생글 웃으며 김동우만 들을 수 있도록 귓가에 말을 속삭였다.  그리곤 일어섰다.  회사에서 계약 위반이니, 그간 불성실 했니 어쩌니 하면서 고소하거나 말거나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하영택 개새끼.  죽여버릴까.  이가 갈린다.  장현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오로지 상품으로서의 가치로로만 판단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강준일에게 스폰을 받아오라고 보냈을 때는 그래도 가치를 아는 수집가에게 아끼던 고급인형을 내보이는 기분이라도 들었는데, 지금은 싸구려 덤핑 처리되는 기분이었다.

과거로 돌아오며 장현재에 대한 기대감을 다 내려놓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점점 실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제가 사랑한 사람의 실체가 고작 이 정도라니······ 그런 사람에게 집착한 제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한녹영, 이 새끼가 감히 누구에게 그딴 소리를······.”

벌떡 일어난 김동우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한녹영의 어깨를 잡아 강제로 잡아 세우려 했을 때였다.  누군가 두 사람 사이로 슥 끼어들었다.

“또 보는군.”

이젠 완전히 귀에 익은 목소리의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강준일이었다.  한녹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데서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헬스장에서도, 연수원에서의 만남도 예상하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지만 오늘이 최고로 뜻밖이라서인지 시베리아 칼바람 같은 냉한 얼굴이 무척 반갑게 다가왔다.  그래서 환하게 웃었던 것도 잠시.

“대표님도 이 파티에 참석하셨던 겁니까?”

그렇다면 좀 실망인데.

“참석이라기보다는 누굴 좀 잡으러 왔지.”

강준일이 뒤를 눈짓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술에 떡이 된 20대 중후반의 남자가 경호원으로 짐작되는 남자 둘의 손에 질질 이끌려 나오는 중이었다.

“누군데 대표님이 몸소 잡으러 오신 겁니까?”

그럼 그렇지.  강준일은 이런 파티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고모 아들이지. 고모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집안에서 오냐오냐 기른 탓에 보시다시피 개망나니가 되어가고 있거든. 이딴 파티에나 다닐 정도로 말이야. 그 새끼 본가에다 실어다 놓고 퇴근하십시오.”

경호원이 두 명이 “네, 대표님.” 하고 한 몸처럼 대답하더니 자꾸만 미끄러지는 강준일의 조카를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성큼성큼 파티장을 나가버렸다.

“오, 오랜만입니다. 준일이 형.”

김동우가 조심스레 인사했다.  강준일은 김동우 쪽으로 힐끔 눈길을 주곤 건성으로 고개만 까닥하더니 시계를 보았다.

“난 지금부터 시간이 비는데, 같이 차 한 잔 어때? 일전엔 일이 바빠 커피를 다 못 마신 채 나와야 해서 아쉬웠는데.”

“전 리필까지 해서 마셨습니다. 혼자 마시긴 했지만, 커피 맛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네가 버려두고 가서 나 혼자 마셨다는 뉘앙스에 강준일이 한쪽 입매를 끌어올리며 잠깐 웃었다.

“거기만큼 맛있는 카페를 알아. 오늘은 내가 사지.”

강준일과 대화를 하며 자연스레 걷다 뒤돌아보니 김동우가 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씩씩대며 서 있었다.  상대가 강준일이라 차마 ‘한녹영은 내가 돈 주고 불렀으니 내 거다.’ 라고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아까는 돈 준 건 저니 혼자만 즐기겠다고 잘도 주장하더니만.

호텔에서 나오자 강준일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운전석에, 한녹영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한녹영은 곧바로 등받이에 몸을 축 기대었다.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아니면 이제야 아까 단번에 마신 양주가 올라오는 건지 갑자기 몸이 늘어지며 정신이 흐릿해졌다.  큰일났다.  그 생각이 들었다.  주먹을 꽉 쥐며 정신을 차리려 애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표님, 고맙······.”

결국 한녹영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정신을 놓았다.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한녹영이 미간을 꿈틀 움직였다.

“············ 강준일입니다. 깨어나면 내가 데려다주죠.”

졸려서 더 자고 싶은데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시끄러, 작게 중얼거린 한녹영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눈을 깜빡했다.  여기가 어디지?

“깼나?”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반쯤 멍해있던 머리가 확 맑아졌다.  한녹영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강 대표님? 여, 여긴?”

“내 빌라.”

강준일의 빌라라고?  눈을 크게 뜬 한녹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가 누워 있는 곳은 침실 같았다.  강준일의 침실인가?  손님방 중 하나겠지?

“갑자기 정신을 잃듯이 잠들어서 네 집으로 먼저 데려갔는데, 관리인을 통해 호출벨을 눌러도 응답이 없더군. 그렇다고 관리인에게 무단으로 문을 열어달라고 할 순 없어서 내 집으로 데려온 거야.”

아마 그땐 아직 박상호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때였나 보았다.  강준일이 말을 이었다.

“30분 전부터 십 분 간격으로 전화벨이 계속 울려 대신 받았더니 매니저였고. 나와 함께 있다고 얘기했으니 걱정하진 않을 거야.”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랐다.

“지금 몇 시쯤 되었어요?”

“11시 반.”

파티장에서 나왔을 때가 8시 반쯤이었나?  9시였나?  암튼 2-3시간 정도 잔 모양이다.  그 정도 수면으로는 그간 쌓인 피로를 다 풀긴 무리라 아직 눈이 뻑뻑하고 피곤한 기운이 남아있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몸속 충전 게이지가 한 십 퍼센트 정도는 찬 기분이었다.

“그거 커피인가요?”

강준일의 손에 들린 컵에서 모락모락 향긋한 커피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지금 마시면 더 이상 잠을 못 잘 수도 있지만, 향을 맡으니 먹고 싶어진다.

“한 잔 줄까?”

“네. 애초에 커피로 절 꼬셨잖아요.”

꼬셨다는 표현에 강준일이 피식 웃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한녹영도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그는 곧 갓 내린 커피를 컵에 가득 따라 한녹영에게 건넸다.

“한녹영씨에겐 꼬신 걸로 보였나. 나와 기억이 다르군. 내 기억엔 위기에 처한 한녹영 씨를 구해준 것 같은데.”

이번엔 한녹영이 웃었다.

“아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큰 소란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때마침 강준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컸다.  모욕을 받은 김동우가 얌전히 저를 보내주지 않았을 테니까.  성질 같아선 파티장을 다 뒤엎고 싶었지만 제 성격이 아무리 대단해도 앞뒤 가리지 않고 사고를 칠 정도는 아니다.

“스스로 그런 지저분한 파티에 간 건 아닐 테고?”

강준일의 단정 같은 물음에 한녹영이 힘없이 웃었다.

“그런 파티에 불려 다닐 급도 아니고, 돈이 궁한 것도 아닐 테고, 회사 작품인가?”

역시 강준일은 단번에 한녹영의 상황을 파악했다.

“회사에서 진짜 갈 데까지 갈 모양이에요. 아까 김동우인가 하는 비싼 쓰레기 새끼 말이 작년 두 배를 불렀다던데, 그런 파티에서 제 시세가 얼마인지 모르겠······ 맛있다. 설마 아까 말한 카페가 여긴 아니겠죠?”

라미르에서 마셨던 커피 못지않았다.  향은 진한데, 맛은 부드러워서 늦은 밤 마시기에 부담 없는 커피였다.

“내가 커피는 좀 내리지. 일류 바리스타 못지않다고 자부해.”

으스대는 말투에 약간 빈정 상하긴 했지만, 진짜 훌륭한 맛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혼자 사세요?”

한녹영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빌라를 둘러보았다.  제 빌라의 두 배는 됨직한 실내에 기가 눌렸다.  장현재에게 잘 보이려고 비싼 가구들 꽤나 보고다니는 동안 눈도장만 꾹꾹 찍어두고 차마 엄두도 못 냈던 가격의 가구들이 곳곳에 보였다.  역시 재벌은 다르구나.

“앉아.”

한녹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강준일이 소파를 가리켰다.  저 소파도 봤던 거다.  정말 눈 튀어나오게 비쌌는데.  가격을 알고 있는 탓에 커피를 들고 털썩 앉기가 꺼려졌다.  한녹영이 솜사탕 위에 앉는 냥 조심스레 앉았다.  누가 봐도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에 강준일이 웃었다.

“뭘 그렇게 조신하게 굴어?”

“제가 언제요. 그냥 커피 쏟을까봐 조심하는 건데요.”

“물어달라고 안할 테니 평소대로 해. 조신하고 얌전한 한녹영이라니, 재미없잖아.”

언제는 안 조신했나.  요새 되게 얌전하다고 박상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구만.  입매를 삐죽인 한녹영이 엉덩이를 뒤로 바짝 붙여 최대한 편안한 척 앉았다.  비싼 소파라 그런가.  엉덩이를 푹 파묻자 금세 몸이 나른해지며 잠깐 괜찮았던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커피 마셔서 불면의 밤이 되지 않을까 했더니 쓸데없는 우려였다.  카페인을 잔뜩 머금은 몸이 이젠 잠을 달라고 요구 중이었다.  아까 강준일의 차에 올라탔을 때처럼 자꾸만 졸음이 슬금슬금 달라붙었다.

상호 형한테 데리러 오라고 전화해야 하는데······.  연신 하품하는 한녹영을 향해 강준일이 물었다.

“피곤한 모양이야.”

“네. 좀 많이······. 내일도 오전에 지면 광고 하나 찍고, 저녁엔 시상식 가야 해요.”

“눈 밑이 까매서 판다가 친구인줄 알겠어.”

“이 몸의 어디를 보고 판다가 친구라고 착각하겠어요?”

순간 꾸벅 졸았던 한녹영이 얼굴을 부르르 털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마른 제 팔을 쓱 내밀어보였다.

“며칠 새 또 말랐군.”

졸리긴 되게 졸린가보다.  쯧 혀를 차는 강준일의 얼굴에 다정함이 깃든 것처럼 보이다니.

“대표님, 죄송한데 제 핸드폰 좀····· 매니저 형한테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아요.”

커피에 카페인 대신 수면제라도 넣었다.  왜 이렇게 미치게 졸리지.  일어설 수도 없어서 욕먹을 각오하고 강준일에게 핸드폰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강준일은 예상과는 달리 선선히 몸을 일으키더니 아까 한녹영이 깨어났던 방 쪽으로 향했다.  한녹영은 강준일의 등을 보며 어떻게든 깨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상호 형한테 전화해서······ 전화해서······ 전화를······.

침실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한녹영의 외투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온 강준일이 짤막하게 웃었다.  한 1-2분나 됐을까?  잠깐 사이 한녹영은 잠들어버렸다.  똑바로 앉아있던 몸이 옆으로 한 80도 가량 기울어있더니 이내 소파 위로 완전히 툭 떨어져버렸다.  강준일은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던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꾸물꾸물 움직여 웅크린 자세로 자는 한녹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자는 모습이 예쁜 건 아이들과 동물 한정인 줄 알았는데 다 큰 성인 남자도 예쁠 수가 있군.  피로에 쩔어 안색이 평소보다 안 좋긴 하지만.  살만 좀 더 찌면 더 좋을 텐데.  살이 좀 붙었을 때 보니 지금보다 훨씬 예쁘던데.  며칠 사이 살이 또 내려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장현재의 철저한 인형으로 살아오다 홀로서기를 하자니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준일은 다른 소파에 앉아 아예 대놓고 한녹영을 보았다.  시선이 간질거리는 건지, 아니면 꿈이라도 꾸는 건지 한녹영이 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눈썹을 꿈틀꿈틀 움직였다.

“얼굴은 정말 내 취향이거든.”

그걸 장현재도 잘 알아서 보란 듯이 그의 철저한 인형이었던 한녹영을 제게 보냈고, 마음은 딴 데 둔 채 주인의 명령에 따라 제게 접근해 환심을 사려고 가식을 떨었던 한녹영이 괘씸했다.  혹자는 하룻밤 끌어안고 뒹굴 남자의 조건으로 취향인 얼굴이면 족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얼굴만 보고 생각 없이 뒹굴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았다.  장현재가 단순히 스폰만 바라고 제게 한녹영을 보낸 거라면 또 모를까.  그의 다른 의도가 질리도록 느껴져 짜증이 솟구쳤던 것이다.

고작 얼굴이 취향이라는 이유로 한녹영을 끌어안고 뒹굴거라고 생각한 건가.  성욕이 뻗쳐 주체 못할 십대도 아닌데.  더군다나 얼굴만 빼고 나머지는 다 제가 혐오하는 부분으로 이루어진 남의 인형 따위를?  대체 날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던 거야.  고작 두어 달 정도 전 일인데, 벌써 꽤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 일을 회상하며 홀로 신경질을 내고 있을 때였다.

‘취향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사실 대표님도 제 취향 아닙니다.’

새벽에 헬스장에서 만났을 때 한녹영이 했던 말이 떠오르며 돌연 웃음이 흘러나왔다.  스스로의 의지나 생각 같은 것이 없어 정말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사람 같은 인형 느낌이었는데, 뜻밖에도 인형의 껍질을 벗어던진 한녹영은 재밌었다.  말랑말랑한 성격이 아니라 건드리면 톡톡 찌르는 밤송이 같은 면이 있었다.  자극적이기도 했고.

무슨 이유로 스스로 인형이길 거부하고 장현재로부터 독립하려고 안간힘을 쓰는진 모르겠지만······ 기특하다.  아, 버림받는 미래를 봤다고 했었지.  왠지 한녹영의 신기에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진짜 인형 안 한다니까요. 난 장현재의인형이 아니라 그냥 한녹영······. 두고 봐요! 내가 독립하나 못하나. 보란 듯이 독립해서 냉랭한 그 얼굴에 콱 얼음물을

부어줄 거니까. 사람이 말이야! 일관성이 없어! 일관성이! 냉~ 하고, 독해갖고······ 그럴 거면 병실에서 다정하게······.”

한녹영이 잠꼬대를 했다.  가만히 듣자니 제 얘기인 것 같았다.  강준일이 입매를 비틀었다.  뭐?  냉랭한 얼굴?  얼음물을 뭐 어째? 그리고 일관성이 없어?

미간을 찌푸렸던 것도 잠시.  제가 생각해도 한녹영을 대할 때 제 태도가 오락가락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서려는 한녹영이 기특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직 한녹영에게 짙게 남아있는 장현재의 존재가 느껴질 때면 순간적으로 짜증이 확 솟구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컨트롤 못하는 의지 박약아가 된 것 마냥 버럭 성질을 낸 건 그래, 인정한다.

근데 병실에서 어쩌고는 무슨 말이야? 전에 말한 뜨겁게 뒹굴었던 장면 말고 또 다른 장면이 보이기라도 한 건가.  병실이라······ 둘 중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는 건가.  과음하지 말라던 말도 떠오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부마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그 능력을 인정한 대단했던 무당의 신기를 이어받았다면 가까운 미래를 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테지만······ 궁금했다.  한녹영이 본 미래 속 저와 그의 모습은 어땠을지. 과연 무슨 까닭으로 뜨겁게 엉켰던 건지.  하녹영은 미래에서 본 저와의 관계대로 되길 원하는 건지.  아니면 미래를 바꿀 생각인 건지.

한녹영이 본 미래에서 저와 그가 연인이 되었고 그걸 바꾸고자 하는 거라면 기분이 몹시 나빠질 것도 같고.  제가 잠깐 돌아 한녹영을 품었는데 그게 싫어서 바꾸고자 한다면······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어쨌든 한녹영이 본 미래에서 저와 그가 뒹굴었다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걸 보면 한녹영에 대한 감정이 많이 바뀌긴 했나 보았다.

잠시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던 강준일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중얼대며 몸을 일으켜 침실에서 한녹영의 외투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곤 그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볼수록 취향인 외모기도 하지만,

볼수록 낯익기도 했다. 연예인이라 TV에서 자주 봤기 때문에 익숙한 것이 아니라 좀 다른 익숙함이었다.  왠지 좀 더 전에, 한녹영의 데뷔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황당한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연락처도 안 알려주고. 대표면 다야! 비싼 척 굴기는. 그쪽이 대표면 난 연예인이거든요!”

잠버릇이 안 좋군.  웬 잠꼬대가 이리도 심한지.  이번에도 잠꼬대 상대는 저였다.  강준일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비싼 척 굴기는, 냉혈한, 변덕쟁이, 어쩌고 하며 저를 욕하는 한녹영의 잠든 얼굴을 어이없이 내려다보았다.  꿈에서 내내 저만 보는 건가.  근데 왜 전부 욕이야? 그것도 진짜 욕이 아니라 투정 같은 욕을.  사람 오해하게.  오해가 취미냐며 사람을 몰아붙이더니만.

“얼굴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취향이면 곤란한데.”

진짜 곤란해지는데.  피식 웃은 강준일이 한녹영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전원을 켜니 곧바로 메인 화면으로 넘어간다. 비밀번호를 걸어두지 않은 것이다.  연예인, 그것도 꽤 인기 있는 연예인이면서 뭐 이리 허술해? 누군가 나쁜 맘을 먹고 휴대전화를 훔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쯧 혀를 차며 가장 최근 통화의 재발신을 눌렀다.

ㅡ 녹영이니?! 이제 깼어?!

긴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강준일입니다.”

ㅡ 아······ 강준일 대표님. 녹영이는 아직 안 깼습니까?

“잠깐 깼다가 다시 잠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쉽게 깨지 않을 것 같군요.”

ㅡ 죄, 죄송합니다. 걔가 예민한 구석이 있어서 본래 익숙한 장소가 아니면 잘 안자거든요. 그래서 지방이나 해외 촬영 있을 때 잠을 잘 못 자서 매번 짜증을 부려 곤란했던 적이 많았······ 내가 자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녹영의 매니저인 박상호라는 이 자, 상당히 수다스러운 성격인가 보았다.  강준일은 혼잣말이라고 하는 건지 “미쳤냐, 박상호! 강준일 대표한테 뭔 소리를 해댄 거야?” 하고 자책하는 박상호의 목소리를 조용히 들어 넘겼다.

ㅡ 주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지금 데리러 가겠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박상호가 말했다.

“아니요. 제가 한녹영씨 주소를 아니 데려다주죠.”

ㅡ 네? 아,아니요. 그런 폐를 끼칠 순 없습니다. 제가 갈게요.

“폐는 이미 끼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남의 집에서 잠들질 않나.  남의 집에서 잠들질 않나. 그러면서 잠꼬대로 집 주인의 욕을 하질 않나.

ㅡ 더이상의 폐는······.

“지금 출발하죠.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걸릴 것 같군요.”

도착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을 말해준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곤 휴대전화를 외투에 도로 넣은 후 한녹영의 등과 다리 밑으로 손을 넣어 그대로 번쩍 들어올렸다. 가볍다. 다 큰 사내자식의 무게가 이 정도면 깃털 같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에 한 번 슬쩍 들어본 적이 있어 어느 정도 무게 가늠은 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들어 올리니 예상보다 더하다.  본인이 말한 대로 여기서 최소 5kg는 더 쪄야 할 것 같은데 이래서야 부서질 것 같아 품에 안고 뒹굴 마음도 안 들겠다.

반복해서 혀를 차며 주차장으로 내려가 한녹영을 조수석에 앉혔다.  몸을 들어 올리고 또 내리고 하데도 한녹영은 여전히 숙면에 빠진 채였다.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제가 아는 장현재라면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을 테고, 그럼 계약 종료 전까지 쭉 이런 상태일 텐데 걱정이군.  이러다 쓰러지진 않을지.

근데 내가 왜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이렇게 진지하게.  언뜻 든 감정이 어이없어 피식 웃었던 것도 잠시.  창가 쪽으로 툭 고개를 넘기는 한녹영의 쇄골이 움푹 파여 있는 것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또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강준일이 미끄러져 내려온 외투를 한녹영의 목까지 끌어올렸다.

강준일은 한녹영의 몸에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그의 빌라를 향해 출발했다.  매니저에겐 15분에서 20분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탓인지 마중 나와 있을 거라 생각한 매니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매니저가 나오길 잠시 기다리는 동안 한녹영의 휴대전화를 다시 꺼냈다.

잠시 후 빌라 쪽에서 매니저가 부랴부랴 나와 주변을 살펴보더니 강준일의 차를 발견하고 후다닥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강준일이 조수석쪽 잠금을 풀자 매니저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그리곤 세상모르고 잠든 한녹영의 몸을 거칠게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녹영아! 녹영아, 일어나! 어이. 한녹영!!”

거의 기절한 듯 잠들어있던 한녹영이 간신히 눈을 뜨고 매니저를 보더니 “어, 형?” 하고 말했다.

“내려. 빌라 앞이야.”

매니저 말에 한녹영이 바몽사몽 내렸다.  그리곤 비틀대며 두어 걸음 걷더니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좀 다정하게 부탁드립니다. 일관성 있는 다정함으로요.”

잠에 취해 술 취한 사람처럼 혀가 꼬인 발음이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비틀대며 걸어가는 한녹영을 부축하며 매니저가 민망한 얼굴로 강준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정하게 부탁한다고?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나 할는지.

다정을 부탁한다니 뭐 못할 것도 없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출발한 강준일이 짧게 웃었다.

“뭐? 내가 뭐라고 했다고?”

한녹영이 바삭바삭하게 잘 구운 토스트를 툭 떨어뜨렸다.

“못 들었냐? 일관성 있게 다정하게 대해달라고 강준일 대표한테 말했다고. 네가 왜 강준일 대표한테 다정함을 요구해? 둘이 무슨 사이냐?”

“내가 정말 그랬다고?”

“그랬다니까. 전혀 기억 안 나?”

전혀 안 난다.  한녹영의 마지막 기억은 강준일의 집에서 그에게 제 휴대전화를 가져다달라고 한 부분에서 끊겨 있었다.  오랜만에 푹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보니 제 집 제 침실이라 ‘응? 내가 상호 형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한 모양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 저녁 트로피 하나 받지 못해 말 그대로 참석에 의의를 둬야하는 시상식에 참석해야 하는데도 기분이 상쾌해 콧노래를 흥얼대며 식탁에 앉았는데, 이런 폭탄을 맞을 줄은 몰랐다.  한녹영이 제발 아니라고 해달라는 눈빛으로 박상호를 보았고, 박상호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안됐지만 네가 그렇게 말했어, 라고 하듯.

“잠에 취해서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었나봐. 전혀 기억이 안 나.”

“술 냄새는 안 났었는데. 술 마셨던 거 아니지?”

“술이야 파티장에서 양주 한 잔 원샷하긴 했는데······ 그거 땜에 취에서 한 실수는 아니야. 참, 하영택이 지랄 안 했어?”

“그렇지 않아도 전화 와서 아주 난리난리 개난리를 떨었어.”

그럴 거라 예상했다.  모욕감을 느꼈을 김동우인가 뭔가 하는 새끼가 가만히 있을 것같 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한 번 그딴 스케줄 잡아보라지 아주 목줄기를 물어뜯고 말 테니까.  한녹영이 아를 갈았다.  그런 한녹영을 가만히 보던 박상호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파티장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 안 했어. 그 새끼가 회사에 돈 줬다고 날 아주 남창 취급하며 가지고 놀려하기에 한 마디 해주고 나왔을 뿐이야.”

박상호의 입매가 실룩 움직였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박상호가 타박했고, 한녹영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말을 인정했다.

“응. 형 말을 들을 걸 그랬어. 현재 형이 허락했으니 날 그딴 싸구려 파티에 보냈겠지?”

“당연하지. 장 대표 한국에 없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분명 전화로 지시했거나 아니면 하영택 보고에 수긍했을 거야! 정말 지저분하게 군다니까.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할 텐데. 그나저나 김동우가 널 순순히 보내주디?”

“파티장에서 마침 강준일 대표를 만나서 도움을 받았어.”

“강 대표를 파티장 안에서 만났어? 뜻밖이네. 그런 파티에 갈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보고는 모르나봐. 좀 실망인데.”

박상호가 토스트에 잼과 버터를 듬뿍 바르며 중얼

댔다. 한녹영이 이맛살을 짜푸렸다.

“파티에 참석하러 왔던 것이 아니라 사촌동생을 잡으러 왔었대. 강준일 대표 얼굴을 봐라. 그렇게 냉하고 단단한 얼굴로 그딴 저속한 파티에 갈 사람으로 보이냐. 형 입으로 그런 파티에 갈 사람으로는 안 보인다고 했으면서 웬 실망이래.”

“사촌동생을 잡으러 갔었다고? 그러고 보니 LK가에 망나니 한 명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긴 하다. 근데 녹영이 너, 말투가 왜 그래?”

“내 말투가 뭐?”

한녹영이 저도 모르게 툭 떨어뜨렸던 토스트를 집어 잼을 듬뿍 바르며 물었다.

“꼭 강 대표 편드는 듯한 말투였어.”

“펴, 펴, 편은 무슨. 형이 오해하기에 그냥 사실을 말해준 것뿐이야. 사람 함부로 오해하면 안 되잖아. 오해받는 일이 얼마나 분통한데.”

“전엔 그렇게 욕하고 싫어하더니 강 대표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거야?”

“생각이 바뀌긴. 그냥······ 신세도 여러 번 졌고, 생각했던 것만큼 독하고 냉정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다정한 면도······ 있는 것 같고······ 그보다 안 늦었어?”

뭐가 이리 쑥스러워.  사랑고백을 한 것도 아닌데.  박상호는 납득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토스트를 먹고 있는데, 한녹영은 괜히 혼자 어색하고 쑥스러워 볼을 긁적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박상호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스케줄 핑계를 댔다.  마치 스케줄에 늦어 바쁘게 몸을 일으켰다는 듯이.

“아직 괜찮아. 한수 도착하려면 한 십 분 더 있어야해.”

“난 방에 있을게.”

“더 안 먹어?”

“응. 충분히 먹었어.”

그래봤자 토스트 반쪽을 먹었을 뿐이지간 박상호가 “그거 먹고 요기가 되냐? 더 먹어.” 라고 외쳤지만 손을 들어 됐다는 표시를 한 후 침실로 향했다.  곧장 화장대 앞으로 가 거울을 봤는데, 예상대로 얼굴이 약간 붉어진 상태였다.

나 참, 얼굴이 왜 붉어지고 난리야?  별 말도 안 했는데.  그냥 강준일이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 라는 얘기를 했을 뿐이잖아?  변덕쟁이 기질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저 말의 어디에 얼굴이 붉어질 만한 단어가 있었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녹영아, 한수 왔다.”

생각보다오래 거울 속 제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나 보다.  박상호가 문을 두들겼다.

“어, 나가.”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준비 됐지? 나가자.”

“난 준비 됐지만, 형은 아직인 것 같은데.”

“나? 나도 준비 다 됐는데.”

“되기는. 입가에 빵가루 잔뜩 묻히고선.”

박상호의 입가에 토스트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현관으로 걸어서 힐끔 부엌 쪽을 쳐다보니 접시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토스트가 몽땅 사라져 있었다. 그걸 다 먹은 모양이었다.  기막힌다는 눈길로 쳐다보자 박상호는 멋쩍어하며 입가를 털어냈다.

“요샌 먹어도 먹어도 그렇게 배가 고프다. 일이 많아 피곤해서 몸이 열량을 많이 필요로 하나봐.”

“뱃속에 기생충이 있는 건 아니고?”

“그딴 거 안 키워! 일 년에 두 번 약 꼬박꼬박 먹거든?!”

투닥대며 바깥에 나와 대기 중인 밴에 타고 첫 번째 스케줄 장소로 향했다. 오늘의 스케줄은 두 개뿐으로 하나는 잡지 인터뷰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시상식이다.  인터뷰 장소는 명동 쪽에 있는 호텔 카페로 잡혔다. 주차를 한 후 함께 카페로 들어섰던 한녹영이 창가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멈칫했다.

“왜 그래? 응? 강 대표잖아. 여자는 누구지? 대단한 미인인데.”

박상호가 강준일과 함께 앉아있는 여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창가 테이블의 강준일을 발견하고 그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한녹영이 박상호의 말에 뒤늦게 여자를 보았다.  단발머리를 한 여자는 확실히 꽤 예뻤다.  한 번씩 웃을 때마다 손으로 입가를 아주 살짝 가리는 모습이 제법 조신하고 단아해보이기도 했고.

선보나? 대낮 호텔 카페에 여자와 단둘이 앉아있으니 제일 먼저 선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결혼적령기이기도 했고.  서른다섯이라고 했던가?  장현재가 넘겨준 정보 중에서 딱 세 개만 외웠었는데 그게 바로 이름, 나이, 결혼 여부였다.

“선 보나?”

박상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 눈에 선 같아?”

“결혼적령기의 남녀가 호텔 카페에 마주앉아 있으니 선 같아서. 사실 강 대표 결혼적령기잖아. 집안 좋아. 외모 번듯해. 본인 능력까지 출중해서 어떻게든 사위 삼으려고 노리는 집안이 한둘이 아니라더라. 저런 사람들 다 비슷비슷한 집안들끼리 결혼하니까 강 대표도 그렇겠지? 그나저나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 되게 딱딱하게만 봤는데, 웃으니까 내 가슴이 다 설렐 정도다. 원래 미남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상대방이 누군데 저렇게 웃지?”

박상호가 흰소리를 해댔다.

“나한테도 저렇게 웃어준 적 있어.”

“어? 뭐라고 했어?”

한녹영의 혼잣말을 못 들은 박상호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며 반문했다.  한녹영이 “아무 말도 안했어.”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저 아가씨는 어느 집 딸이지? 강준일 대표 선 상대면 빵빵한 집안일 텐데. 예쁘다.”

“예쁘긴 뭐가 예뻐? 성형발 아니면 화장발일 텐데. 외모로 따지면 성별을 떠나 내가 더 예쁘지.”

박상호가 툴툴대는 한녹영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이 자식 왜이래, 하는 표정이었다.

“어머, 한녹영씨 벌써 오신 거예요? 우리가 늦었나 봐요. 죄송해요.”

카페 안으로 들어온 잡지사 기자 두 명이 한녹영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한녹영은 두 사람을 향해 웃었다.

“죄송하긴요. 두 분 안 늦으셨어요. 제가 일찍 도착한 거죠.”

“저쪽으로 가실까요?”

기자가 비어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한녹영이 두어 걸음 걷다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대화가 끝났는지 강준일과 여자가 일어서는 중이었다.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강준일의 태도가 참으로 정중하고 다정해보였다.

‘연인한테는 못되게 안 굴지. 보고만 있어도 아까울 만큼 소중한 존재가 될 텐데 못되게 굴 까닭이 없지 않나. 예쁘고 다정한 말만 할 예정이야.’

머릿속으로 라미르에서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한녹영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며 저도 모르게 쳇, 하고 혀를 찼다.

“어라, 왜 벌써 일어났어?”

새해가 밝았다. 시상식 생방 때문에 새벽 3시가 돠어서야 간신히 집에 돌아온 박상호는 7시 알람을 맞춰놓고 잠들었다가 간신히 일어났다.  고작 4시간 수면에 머리가 몽롱하고, 눈에 졸음기가 가득 남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새해 첫날이니 떡국은 끓여야 않겠나 싶어 일찍 일어난 것이다.  오늘은 오후 스케줄이라 사실 좀 더 자도 상관없지만, 한녹영 먹을 떡국을 끓여두고 누나 집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어제 저녁 어머니가 서울 누나 댁에 올라왔다는 얘기를 들어 인사나 하고 올 참이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방을 나와 부엌으로 향하던 박상호가 냉장고에서 막 물을 꺼내던 중인 한녹영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저뿐만 아니라 한녹영 또한 3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들었을 텐데?

“몰라 일찍 깨졌어.”

“오늘 오후 스케줄이야. 들어가서 더 자.”

“1시간 전에 일어나서 더 자보려고 애썼는데, 잠이 안오네. 형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오늘이 신정이잖냐. 그래도 새해 첫날인데 너 떡국은 해먹여야 할 것 같아서.”

“그것 때문에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떡국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음식이었나?”

“아니야. 꾸미만 만들면 되니까 30분도 안 걸려. 어제 시골서 어머니가 올라오셨대서 잠깐 누나 집에 다녀오려고. 12시 전에는 올게.”

시상식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가족으로부터 전화가 오는 것 같더니, 어머니가 올라오셨다는 연락이었던 모양이다.

“나 떡국 안 먹어도 되니까 그냥 갔다 와.”

“금방 돼. 그리고 너무 실망하지 마.”

박상호가 왠지 울적해 보이는 한녹영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응?”

“어제 사상식. 유난히 상복 없는 배우가 있어. 그래도 이제 시작이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최우수상이 뭐 대수냐. 넌 조만간 대상받을 배우야.”

사실 기분이 내내 가라앉은 상태였는데, 그 이유가 어제 시상식에서 미끄러진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던 터라 실망도 없는데 말이다.  괜히 마음이 무겁고 기분이 울적한 이유를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서 그냥 사상식 탓이라고 생각하게 두었다.

“어. 실망 안 해.”

“그래. 얼른 떡국 해줄 테니까 먹고 기운 내!”

뚝딱뚝딱 떡국을 해놓은 박상호가 집에 다녀온다며 휑하니 나가버렸다.  한녹영은 그가 차린 식탁 앞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 떡국 국물부터 한 입 떠먹었다.  레토르트 사골국물을 녹인 거긴 하지만 제법 먹을 만 했다.  소고기와 두부를 다져 만든 꾸미도 짭짤하니 맛나고, 계란지단도 노라니 식욕을 자극하는데······ 이상하게 압맛이 없었다.  박상호의 정성을 생각해 억지로 절반가량 꾸역꾸역 먹은 한녹영이 결국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아침까지 먹었는데도 고작 8시였다.  잠이 더 올 것 같진 않고 TV를 보기도 싫고, 대본이나 볼까? 대본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도로 일어섰다.  운동이나 갈까? 요새 통 운동을 못했는데.  홀로 할 수 있는 운동이 많지 않으니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이나 뛰고 와야겠다.

한녹영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와 헬스장으로 향했다.  새해 첫날이라 모두 가족과 떡국이라도 먹는 건지 헬스장 안은 매우 한산했다.  새벽 5시 무렵에 왔을 때보다도 더 한산한 것 같았다.  고작 서너 명이나 있을까?  한녹영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표범 마냥 넓은 헬스장 안을 어슬렁어슬렁 다니다 결국 러닝머신 앞에서 멈춰 섰다.

‘없네.’

혹시나 했는데.  이상하게 헬스장에 올 때마다 꼭 만날 약속이라도 한 듯 강준일과 마주쳤던 탓에 오늘도 혹시 했는데, 그는 없었다.

뭐 꼭 만날 거라 기대한 건 아니니까.  그냥 혹시나 해서 살펴본 거지.  누군가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린 한녹영이 머신 위로 올라갔다.  집에 혼자 오도카니 있어봤자 뭐하나 싶어 운동을 오긴 왔는데, 막상 하려니 흥이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점만 찍고 그냥 돌아갈 순 없어서 속도를 2에 맞춰놓고 설렁설렁 걸었다. 러닝머신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가요 프로그램을 보며 한 십 분쯤 정말 건성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 머신에 누군가 오르는 가색이 느껴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소리로 보아 속도 7이상이었다.  누가 이렇게 맹렬하게 뛰나 싶어 할끔 옆을 돌아본 한녹영이 어, 소리를 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 대표잖아?!!’

설마하는 기대감으로 오자마자 헬스장 안을 둘러보긴 했지만, 사실 스스로도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헬스장에 올 때마다 만나는 건 진짜 말도 안 되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도 마주치다니 뭐야. 진짜 강준일과 저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나 하는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강준일을 바라보다 비틀했다.  넘어지기 직전에 손잡이를 잡은 후 머신을 끄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곤 강준일이 달리고 있는 러닝머신 옆으로 다가갔다.  한녹영의 기척을 느낀 강준일이 옆을 돌아보더니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할 말 있으면 그렇게 열렬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말고 말해.”

“혹시 나한테 사람 붙였어요?”

“무슨 소리야?”

“나 여기 진짜 가끔 오는데, 올 때마다 만나는 것이 신기해서 그래요.”

피식 웃음을 흘린 강준일 또한 러닝머신에서 내려왔다.  잠깐 달렸는데도 속도를 꽤 높였던 터라 그의 얼굴에 땀이 맺혀 있었다.  강준일이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너와 나 사이에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이렇게 자꾸 우연히 만나지는 걸 보면.”

강준일과 저 사이에 진짜 뭐가 있나?

“특별한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는 사이에 커피 한 잔 어때요? 휴게실에 캡슐 머신 있던데.”

손목에 찬 시계를 본 강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커피 마실 시간은 있나 보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휴게실로 향했다.

“아메리카노면 되죠?”

자연스레 캡슐커피 머신 앞으로 간 한녹영이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그리곤 머신 옆에 있는 캡슐 중 아메리카노 두 개를 찾았다.  찾긴 찾았는데······ 이거 어떻게쓰는 거야?  생각해 보니 저는 한 번도 캡슐커피 머신을 써본 적이 없었다. 좀 당황해서 뚫어져라 머신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내가 할 테니 앉아있어.”

어느새 다가온 강준일이 한녹영에게서 캡슐을 받아 자연스레 머신을 작동시키더니 이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그제 내 집에서 뽑아준 것만은 못할 테지만 그럭저럭 마실 만 할 거야.”

한녹영이 커피를 홀짝 마셨다.  강준일 말대로 그냥 그럭저럭 참고 마실 만한 맛이었다.  아주 맛없진 않지만 맛있지도 않은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이틀 전 먹은 강준일의 집 커피가 생각난다.  생각하니 또 먹고 싶어졌고, 맛이 떠오르니 헬스장 휴게실 캡슐 커피가 입에서 겉도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그저께는 고, 고마웠어요. 잠에 취해서 데려다주신 것도 몰랐는데, 어제 일어나니 집이더라고요. 매니저 형 말이 강 대표님께서 데려다주셨다고.”

“원래 그렇게 아무데서나 잘 자나?”

“아니요. 잠자리에 예민한 편이라 낯선 곳에선 못 자는데 그 날은 되게 피곤했었나 봐요. 딱 한 잔뿐이긴 하지만 양주도 원샷했었고요.”

“아무데서나 못 잔다니 다행이군. 한녹영씨는 워낙 예뻐서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면 곤란해. 누가 보쌈해갈지도 모르거든.”

마실수록 맛이 없어지는 기분이라 마지막 한 모금만 더 마시고 말아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강준일이 말했다.  한녹영은 하마터면 압에 머금었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네? 방금 뭐라고?”

“못 들었어?”

“드, 듣긴 들었는데······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어서······.”

왠지 환청을 들은 것도 같고······.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떠오른 한녹영의 얼굴을 보는 강준일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말렸다.  그러나 그는 무심한 척 말했다.

“제대로 들었어.”

“내가 워낙 예쁘다고······.”

“예쁘잖아. 본인 입으로도 예쁜 건 사실이라고 해놓고 새삼스레 겸손한 척 하는 건가? 겸손은 한녹영씨와 안 어울리니 하던 대로 해.

강준일이 짧게 웃었다.  한녹영은 멍하니 그런 그를 보았다.  이상하다.  오늘의 강준일은 왠지 제가 알던 강준일이 아닌 것 같다.  그의 말투와 표정, 그리고 행동에 왠지 등줄기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한녹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을 때였다.

“아까 보니 기는 건가 싶은 속도로 걷던데, 그것도 운동이라고 땀을 흘렸던 건가?”

쯧 혀를 찬 강준일이 그의 수건으로 한녹영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좀 전 그의 얼굴을 닦았던 거라 땀 냄새가 날 거라 생각했던 수건에서는 향긋한 향수 같은 냄새가 났다.  수건에 향수 뿌렸나?  세제 냄새인가?  아니 그보다 지금 저 강준일이 내 이마를 닦아준 거야?

“강 대표님 오늘 뭐 잘못 드셨어요? 혹시 모닝 술을 하셨다거나? 약을 드셨다거나?”

조심스러운 물음에 강준일이 미간을 짜푸렸다. 술 냄새는 안 나니 약인가?  강준일의 표정이 어이없이 일그러졌을 때, 한녹영이 아주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약하십니까?”

재벌들 중에 약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던데.  강준일은 약 같은 걸 할 사람으로는 절대 안 보이지만 오늘 저를 대하는 말과 행동은 확실히 이상했다.

“한녹영씨 요구대로 해주고 있는 거잖아.”

“네? 제가 무슨 요구를······.”

했는지 이제야 생각났다.  다정하게 부탁한다고 했었다고 박상호가 말해주지 않았나.  분명 그 말 때문에 저러는 거다.  순식간에 민망해졌다.  한녹영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말은 잊으셔도 무방한데요. 그날은 진짜 제가 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 겁니다.”

“내가 보기엔 꽤나 진심 같던데?”

“아니라니까요! 원래 술이든 약이든 잠이든 아무튼 뭔가에 취하면 본심에도 없던 막말이 막 튀어나오기도 하고 그런 겁니다.”

“반대 아닌가? 원래 뭔가에 취하면 본인도 모르게 진심이 나오기 마련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 그런가.  하긴 취중진담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그, 그야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일전 네가 말했었잖아. 일관성 있게 한 가지 태도만 취하라고, 그래서 앞으로는 쭉 일관성 있게 다정하게 대해주려고 해.”

아니 물론 내가 전에 사람이 일관성이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 말을 꼭 이 시점에 끄집어내야 하나!  그것도 그제의 말실수에 덧붙여서!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한녹영을 보는 강준일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실수를 빌미 삼아 놀리는 거다.  확실하다.  한녹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 성격에 짓궂음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까.  회귀한 이후 어쩌다 보니 자주 마주치게 되어 알게 된 거지.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면이었다.  또 어떤 놀림이 튀어 나올지 몰라 화제를 전환하려고 생각하다 보니 어제 일이 떠올랐다.

“근데 어제 선 보셨어요?”

“선?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어제 인터뷰 때문에 명동 쪽 호텔 카페에 갔다가 봤습니다.”

“명동 쪽 호텔? 아아······.”

누구 얘기를 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순간 강준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그가 발신인을 보더니 싱긋 웃곤 전화를 받았다.

“지금 좀 곤란한데. 그래, 이따 전화하지.”

고작 몇 마디뿐인데 말투가 꽤나 부드러웠다.  누군데 저렇게 말하지?  가족?  친구?

“통화상대가 궁금한 모양이군.”

빤히 보는 한녹영의 시선을 읽어낸 강준일이 입끝을 올리며 물었다.

“별로 안 궁금한데요. 제가 왜 대표님 통화상대를 궁금해 합니까?”

“궁금해 하는 얼굴인데?”

“전혀 안 궁금하다니까요.  하지만 대표님께서 굳이 얘기해주고 싶다면 기꺼이 들어줄 마음은 있습니다.”

“어제의 그녀야.”

어제의 그녀······ 라면 호텔 카페에서 함께 있던?

“그거 대표님 개인 전화죠?”

“맞아. 업무상 전화는 따로 있고, 이건 사적인 전화지.”

“그런 전화번호를 선 상대한테는 막 알려주네요. 마음에 드셨나 봐요. 조만간 뉴스를 통해 결혼 소식이 들려오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는 비서를 통해 연락하라는 둥 되게 비싸게 굴더니.  사람 차별이야 뭐야. 괜히 기분 나빠져서 그만 먹으려고 저만치 밀어둔 커피 잔을 끌어와 다 식어빠진 걸 후루룩 들이켰다가 인상을 쓰며 내려놓았다.  식으니 더 맛없다.

“한녹영씨 친구 없지?”

“그게 무슨 인격 모독적인 발언입니까? 친구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저도 친구 있거든요.”

한녹영이 발끈했다.  나한테 친구가 없다고? 나 참.   보는 눈은 정확하고 난리야.  사실 한녹영에겐 넌 나의 진정한 친구, 라고 부를 만 한 사람이 없었다.  제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사람들을 친구라고 믿은 적도 있지만 이젠 아니다.  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이후 등을 돌린 사람들을 친구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  그래서 현재 한녹영에겐 친구······ 가 없었다.  가족도 없어졌고, 마음을 송두리 째 바쳤던 사람도 없지만 괜찮다. 박상호가 있고, 일이 있으니까.

“그래? 그럼 친구는 있다고 치고. 친구든 가족이든 통 화는 자주 안하나봐.”

“통화를 뭐하러 자주 해요. 전 전화로 수다 떠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정확히는 얼마 전부터 안 좋아졌어요.”

딱 잘라 전화로 수다 떠는 건 별로다라고 하기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더 장현재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틈만 나면 전화하고, 전화가 연결되면 어떻게든 더 통화를 길게 이어가려고 갖은 애를 썼으니까.

“그래도 가끔 누군가와 통화하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없어요. 대화하고 싶어지면 매니저 형이랑 하면 되니까요.”

가볍게 한숨을 내쉰 강준일이 일어섰다.

“그만 가봐야겠어.”

“오늘도 일하세요?”

“누구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거든. 내가. 일하러 가기 전에 잠깐 짬을 내어 개운하게 뛰고 가려고 했는데 아쉽지만 그냥 출근해야겠군.”

“제가 운동시간을 뺏었다고 말하고 싶으신 모양인데요, 저 나름 비싼 몸이거든요. 한녹영과의 커피권, 을 경매에 붙이면 적어도 천은 우스울 걸요.”

그러니 영광으로 아세요, 라는 의미였다.  허세를 잔뜩 부리는 한녹영을 보며 강준일이 낮게 웃었다.

“바쁘시다니 이만 안녕히 가시고요, 또 다음에 우.연.히 뵙게 되면 봬요.”

한녹영이 유난히도 우연히를 힘주어 발음했다.

“그래. 우연히 만나게 되면 보자고. 아, 어제의 그녀는 내 사촌 여동생이고, 오늘은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인 것이 맞고. 한녹영씨 차 도로가에 세워뒀던데 멀쩡한 주차장을 두고 그러면 쓰나. 그것도 공인이 말이야. 한 가지 더. 한녹영씨는 전화번호부를 좀 훑어볼 필요가 있겠어.”

젤로 고정해두지 않아 부스스한 한녹영의 정수리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며 뜻 모를 소리를 한 강준일이 휴게실을 나갔다.  느긋했던 태도 와는 달리 걸어가는 걸음이 바빴다.

그의 손이 닿았던 정수리를 왼손으로 꾹 누르고 있던 한녹영이 한참 그의 등을 보고 있다 눈을 깜박이며 일어섰다.  뭐랜 거야? 우연이 아니었다고?  지하로 들어가기 귀찮은 마음에 불법주차를 해두긴 했다.  오늘은 공휴일이라 단속이 없을 것 같았고, 도로도 텅텅 비어있었으니까.  뭐야?  내 차 알아보고 헬스장에 들어온 거야?  한녹영이 당혹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또 뭐랬지? 전화번호부를 훑어보라니.  그나저나 어제의 그녀가 사촌이라고.  뭔 사촌이 그리도 많아.  투덜댔던 것도 잠시.  집안이 미남미녀 잡안인가 보네.  강준일의 외모야 말할 것도 없고, 어제의 그녀도 예뻤으니까.  어쩐지 수줍게 웃는 모습에서 귀티가 잘잘 흐르더라.  화장도 짙게 안 한 것 같았는데 얼굴에서 막 광이 났었고.  어제는 화장발이니 성형발이니 막말을 해놓고 그걸 싹 까먹은 한녹영이 강준일의 사촌여동생 외모를 칭찬했다.

그러고 보니 그제 김동우의 파티에서 떡이 되어 늘어져 있던 남자도 얼굴은 제법 훤칠했었지.

더 이상 운동할 마음이 싹 사라져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 싶어 탈의실로 향한 후 라커에서 가장 먼저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화번호부.  전화번호부가 뭐 어쨌······.

“어?”

전화번호부에 신규 연락처가 등록되어 있었다.  등록된 이놈이 오해가 취미인 남자였다.  난 이런 거 등록한 적 없는데? 그리고 오해가 취미인 남자가 누구······ 강준일 대표?

한녹영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걸 언제 등록해둔······ 그제 그의 집에서 잠들었을 땐가? 그가 제 전화를 만질 기회가 있었던 건 그때뿐이었으니 짐작이 맞을 거다.

“뭐야, 그냥 가르쳐주면 될 걸. 이렇게 하면 있어 보일 줄 아나.”

입매를 삐죽삐죽하는 한녹영의 눈동자로 웃음이 흘렀다.  얹힌 것 같던 마음도 가벼워져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떡국 남았지?  배고파졌는데, 집에 가서 상호 형표 떡국이나 마저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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