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나무 다시again
Chapter. 01
생의 마지막을 자살로 마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녹영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산을 뒤집어써 완전히 망가진 얼굴은 수술로도 복구가 힘들다고 했다. 여러 번의 수술을 거친다면 어느 정도 회복이야 되겠지만 예전과 같은 외모를 되찾긴 불가능할 거라고.
그저 봐줄만한 수준의 어느 정도 회복을 위해서 여러 번의 수술을 하려면 엄청난 비용과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수술 비용을 감당할 재력이 한녹영에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설사 재력이 있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예전의 외모를 되찾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데.
‘괴물 같아.’
한때는 천상의 미모라고 칭송받았던 얼굴이 지금은 괴물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아니 그냥 괴물이 되고 말았다. 제 얼굴인데도 불쑥불쑥 혐오감이 올라올 정도였다. 보고 있으면 혐오감에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다.
한녹영은 망가진 제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 그리곤 가만히 오른손에 쥔 커터 칼을 내려다보았다. 칼날은 한순간 저를 나락으로 빠뜨린 망할 운명만큼이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최고 톱스타로 승승장구하던 저였는데.
부와 명예, 그리고 마침내 그리도 염원하던 사랑까지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전부 제 발아래 둔 것만 같았다. 세상이 온통 저를 위해 빛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리석은 오만이었다. 바보같은 교만이었다.
아침부터 틀어둔 TV속에선 하루 종일 한녹영에 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톱스타 한녹영이 황산 테러를 당했다, 톱스타 한녹영 섹스 동영상 파문이 일고 있다, 톱스타 한녹영이 사기 혐의로 피소를 당했다, 등등
멍하니 듣고 있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를 찬양하기 바빴던 세상이, 저를 위해 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이젠 순식간에 제게서 등을 돌려 온통 비난하고 돌팔매질을 해대고 있었다. 한때는 빛났던 세상이 이젠 온통 암흑이었다. 한녹영은 벼랑 끝에 고작 손가락 한두 개로 매달려 있는 듯한 지독한 절망감을 느끼며 커터 칼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곤 욕조 바닥에 천천히 무너지듯 앉았다.
또 한 번 비릿한 웃음이 나왔다. 우습다. 그저 우스웠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제 손을 잡아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니. 가족도, 팬도, 친구도, 심지어 연인이라 믿었던 사람까지······ 생의 마지막에 선 이 순간 한녹영을 위해 달려와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위로를 건네준 사람조차 없었다.
데뷔 이후에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는데, 죽음은 쓸쓸하게 홀로 맞이하는구나. 한녹영 너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냐. 제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니 온통 후회뿐이다.
‘내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질 모래성일 뿐이었어.’
흡사 실성한 사람처럼 비죽비죽 웃으며 한녹영은 망설임 없이 손목을 그었다. 그리곤 물이 가득한 욕조 속으로 손목을 넣었다. 새빨간 피가 투명한 물로 스며들었다. 욕조의 물이 점점 시뻘겋게 물들어가는 걸 멍하니 지켜보던 한녹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생명이 제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죽음이 그를 덮쳐왔다.
꿈을 꾸었다. 열 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꿈이었다. 어머니는 기억 속 그대로 변함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한 채 한녹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머니.’
한녹영이 부르자 어머니가 자애롭게 웃었다. 하지만 왠지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한녹영의 나이 열 살 때 어머니는 고작 서른셋이었다. 젊디젊은 나이에 온몸이 망가진 채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어머니는 지금처럼 서글프게 웃었다. 두고 가야 하는 어린 아들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듯.
‘아가. 사랑하는 내 아가.’
한녹영을 부르는 음성 또한 한없이 서글펐다. 한녹영은 어머니의 품으로 파고들어 응석을 부리며 그녀의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저를 위로해 달라는 듯. 어머니는 그런 한녹영의 마음을 다 안다는 얼굴로 연신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아가. 불쌍한 내 아가. 이 어미의 복을 다 불살라 너에게 주마. 불쌍한 내 아기. 이 어미가 사랑하는 내 아기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마. 이 어미가 약속받은 후생의 복록을 모조리 끌어와 아기를······. 그러니 이제 돌아가거라!’
어머니가 품에 매달려있는 한녹영을 있는 힘껏 떠밀었다. 한녹영은 아득한 높이의 절벽에서 떠밀린 듯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
허억. 한녹영은 짧게 숨을 들이켜며 번쩍 눈을 떴다. 동시에 손목을 움켜쥐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전속력으로 트랙을 질주한 선수 마냥 숨이 가빴다. 심장이 아플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땀인지, 물에 젖은 건지 몸이 축축해 옷이 피부에 달라붙은 것이 느껴졌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손목을 그었는데? 생명이 빠져나가며 몸이 차갑게 굳어가는 걸 느꼈다. 그건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만큼 오싹하고도 섬뜩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눈을 뜬 거지? 여긴 저승······ 인가? 그러기엔 제가 눈을 뜬 곳이 지나치게 낯익었다.
‘여긴 내 침실인데?’
블라인드를 내려둔 탓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둑어둑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사물은 가늠되었다. 익숙한 벽과 천장, 가구들······ 분명 제 침실이었다. 한녹영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된 건가? 죽기 직전 누군가 저를 살려준 건가? 누가?
일이 터지기 시자하면서 가깝다고 생각한 친인들이 전부 제게서 등을 돌렸다. 친구라 믿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연인, 심지어 가족들마저 저를 버렸다. 버리다 뿐인가. 제 비극을 기뻐하고 고소해했다. 돈, 사람들, 명예를 전부 잃은 탓에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죽음뿐이라 자살했는데 그런 저를 누가 살린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뜻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언뜻 연인의 이름을 떠올렸던 한녹영은 이내 실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보다 앞서 저를 버린 사람이 바로 그 연인이었는데 그가 돌아와 저를 살렸을 리가 없지.
방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저를 살린 누군가가 바깥에 있는 모양이었다.
‘나가 보면 알겠지.’
자살을 시도한 이후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세상은 좀 잠잠해졌을까. 모든 걸 다 잃었는데 살아난들 무엇 할까. 가만히 한숨을 내쉰 한녹영이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심스럽게 걷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왜 아무런 통증이 없지? 허연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그은 탓에 아무리 봉합 수술을 했다 하더라도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져야 정상일 텐데? 그러고 보니 병원이 아닌 집인 것도 이상했다. 세상이 온통 저를 잡아먹지 못해 난리라 병원에 함부로 갈 수 없는 상황이긴 해도 손목을 그었다. 살리자면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을 텐데 집이라니?
알 수 없는 기이함을 느끼며 왼쪽 소매를 걷어 본 한녹영은 눈을 부릅떴다. 없다. 손목 어디에서도 상처 자국이 없었다. 수술 자국은커녕 긁힌 자국 하나 없었다. 마치 헛것이라도 본 냥 부릅뜬 눈으로 제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던 한녹영이 허둥지둥 반대편 소매를 걷었다
“······.”
역시 없다. 혹시 제가 착각한 건가 싶어 오른쪽 손목을 살펴보았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에도 그은 상처는 없었다. 양쪽 모두 말짱하기만 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손목을 그었는데? 그것도 아주 깊이, 살아날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아 있는 힘껏 손목을 그었던 감각이 선연한데, 어째서 긁힌 자국 하나 없는 건가.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숨이 멎기 직전의 환영을 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꿈이나 환영이라고 치부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바닥의 감촉도, 문고리의 감촉도, 그리고 통증마저도 생생했다.
꿈인가 싶어 제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어 본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프다. 환통이 아니라 분명한 실제의 통증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손목을 그었고, 생명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는데 어째서 살아있는 거며, 상처자국은 왜 없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눈살을 찌푸리며 벌컥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한녹영이 또 한 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깨, 깼냐? 난 또 너 깊이 잠든 줄 알고. 배고파서 라면 좀 끓였는데 혹시 냄새나서 나온 거야? 얼른 치, 치울게.”
문 열리는 소리에 라면을 먹다말고 벌떡 몸을 일으킨 사람은 분명 제 매니저인 박상호였다. 일이 터졌을 때 후련하다는 얼굴로 떠났었는데? 그가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분명 너 같은 쓰레기의 매니저 노릇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어 속이 후련하다, 고 했었다. 충격을 받아 멍해 있는 제 얼굴에 침을 뱉으며 돌아서던 박상호의 얼굴에 밴 혐오감이 마치 먹구름처럼 짙었다.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저에 대한 동정심이라곤 한 톨도 없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 갔았는데?
“형이 왜 여기에······ 어, 언제 온 거야?”
박상호가 눈을 끔벅거렸다.
“무슨 소리야? 언제 왔냐니, 아까 너랑 같이 왔잖아.”
“나랑······ 같이?”
“어. 기억 안 나냐? 세 시간 전에 화보 촬영 끝내고 같이 들어왔잖아. 넌 씻자마자 피곤하니 일어나기 전엔 깨우지 말라며 방으로 들어갔었고, 난 거실에서 TV 좀 보다가 배고파서 라면 끓여먹던 중이었어.”
“화보······ 촬영? 무슨 화보 촬영?”
“너 왜 그래?”
“무슨 화보 촬영을 했는데?”
화보 촬영이라니. 얼굴이 망가진 제가 화보 촬영을 했다니? 한녹영이 멍하니 물었고, 박상호는 ‘저 자식이 왜 저래?’ 하는 표정으로 한녹영을 보았다.
“무슨 화보냐니. 다음 달 맨큐에 나갈 화보 찍고 들어온 거잖아.”
맨큐라면 벌써 몇 년째 가장 높은 판매부수를 자랑하고 있는 남성 잡지다. 당연히 맨큐와 여러 번 작업을 했고, 황산을 뒤집어써 얼굴을 망치기 직전에도 맨큐 화보 촬영 스케줄이 잡혀있었지만 일이 터진 후 일정은 전부 취소되었다. 얼굴이 망가진 배우의 사진을 찍어줄 잡지는 없······ 맞다. 어, 얼굴!
한녹영은 흡사 실성한 사람처럼 욕실로 향했다. 거, 거울! 거울을 봐야 해. 마음이 조급해 서두르다 다리가 꼬여 주저앉을 뻔하면서 욕실로 가 거울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얼굴이······ 말짱하다. 살이 녹아내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아니라 본래의 말짱한 얼굴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한녹영은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보고 또 보아도, 만지고 또 만져도 분명 망가지기 전의 제 얼굴이었다. 몇 년에 걸쳐 수차례의 수술을 받아도 원래대로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던 얼굴이 어떻게 이처럼 말짱해진 거지? 심지어 몇 살 가량 어려보기까지 한다.
“녹영아, 너 왜 그래? 괜찮냐?”
뒤따라 온 박상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 눈에는 내 얼굴이 말짱해 보이는데 형이 보기에는 어때?”
눈으로 보면서도, 손으로 만지면서도 믿을 수 없어 박상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자식이 미쳤나, 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박상호가 얼른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네 얼굴이야 언제 봐도 끝내주게 잘생겼지. 근데 왜 그래?”
“상처 자국 같은 거······ 안 보여?”
“외모가 재산이라 얼굴에 물방울 하나만 튀어도 발작하잖아, 너. 당연히 상처 자국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혹시 자다 침대 모서리에 부딪쳤냐? 그래서 이래? 멍 자국 같은 거 없는데.”
역시 말짱하구나. 황산에 녹은 흉한 얼굴이 사라졌다. 한녹영은 어리둥절하게 거울 속 제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지금 이 현실이 꿈인 건지, 아니면 모든 걸 잃고 자살을 시도했던 일이 꿈이었던 건지.
뉴스, 뉴스를 보자!
한녹영은 욕실 입구에 서있는 박상호를 밀치고 다시 허둥지둥 거실로 나와 리모컨을 집었다. 그리곤 뉴스 채널을 틀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저에 대한 일을 보도하고 있던 뉴스에서······ 유명 감독과 여배우의 염문설을 보도하고 있었다. 한녹영은 리모컨을 쥔 채로 굳었다. 저 뉴스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감독과 여배우 둘 모두 각자 가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던 터라 두 사람의 불륜은 한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단아하고 차분한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여배우는 불륜녀로 낙인 찍혀 연예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감독 또한 충무로에서 추방당하다시피 했다. 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려는 배우가 없었고, 투자자들도 외면했던 것이다. 염문설이 터지기 전만 해도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감독이었던 터라 한녹영 자신도 저 감독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했었다. 몇 번 러브콜을 보내봤지만 감독이 내켜하지 않아 자존심이 상해 있던 차에 스캔들이 터져 고소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굳어있던 한녹영이 이내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박상호가 그런 한녹영을 의아하게 보았다. 갑자기 실성이라도 했나, 딱 이런 눈빛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짜 실성한 사람처럼 웃던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로 피식피식 웃었던 한녹영이 다음 순간 풀썩 주저앉았다.
“노, 녹영아!”
박상호가 화들짝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한녹영에게 달려왔다. 한녹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린 채 TV를 응시했다. 저 두 사람의 스캔들이 일어난 해는 2016년 12이다. 그리고 그가 자살한 해는 2019년 4월.
“형. 오늘이 몇 년도 며칠이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날짜를 물어보는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고, 손끝은 파르르 떨렸다.
“어?”
“오늘이 며칠이냐고?!”
“오늘은 12월 7일이지.”
한녹영이 재차 묻자 박상호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답해주었다. 12월 7일이라고? 4월이 아니라?
“2016년?”
“어.”
박상호가 고개를 끄덕였고, 한녹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2016년이라니, 2016년 12월 7일이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침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한녹영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2019년에 자살했는데, 눈을 떠보니 2016년이라니. 혹시 그간의 일은 다 꿈이었던 건가? 하지만 단순히 ‘내가 꿈을 꿨나 보네.’ 라고 확신하기에는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다. 마치 현실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처럼 과거로 되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찍고 있는 중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오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스스로를 비웃듯 피식피식 실소하면서도 머릿속 한쪽에서는 ‘어쩌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녹영은 실소를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같지는 않다. 그러기엔 장면 장면이 너무나 생생했고, 또 구체적이었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지만 진짜 시간을 거슬러 온 건가?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마구 꼬였다. 과부하가 걸린 것 마냥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협탁 안에서 두통약을 꺼내 물도 없이 그냥 삼켜버린 한녹영이 눈을 감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라니.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온 거라니. 대체 이걸 누가 믿을까. 나조차도 믿기 힘든데. 몽롱한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꿈을 꾸고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할 텐데 정신은 얼음을 깨물고 있는 것처럼 또렷하기만 했다.
‘혹시 신이 내게 준 두 번째 기회인 건가?’
제가 신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만큼 제대로 살진 않았지만 말이다. 누군가 제 말을 듣는다면 실성한 것이 분명하다며 혀를 차거나, 혹은 병원에 집어넣으라고 할 테지만 생각할수록 꿈같지 않았다. 손목을 내리긋던 고통이 이처럼 선명한데 절대로 꿈일 리 없지 않나. 황산을 뒤집어썼을 때의 끔찍한 통증이 이토록 선명한데 절대로 꿈일 리 없었다. 그러니 제가 겪은 모든 일은 현실이고, 무슨 까닭인지, 신의 선물인지 뭔지 과거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 분명 신의 선물일······. 한 번도 신이나 기적 같은 걸 믿어본 적도 없으면서 초현실적인 결론을 내리던 한녹영이 구르듯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침실과 이어져 있는 드레스 룸으로 달려가 장식장 서랍을 열었다. 가치도 모르면서 그저 수집하다시피 모아두었던 값비싼 시계들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옥가락지 한쌍이 보였다. 열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혹시 금이라도 갈까 조심스레 옥가락지를 들어 올려 내려다보는 한녹영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
꿈이······ 떠올랐다. 어리광을 부리며 품에 파고든 저를 어루만지며 한없이 쓸쓸하고 슬픈 어조로 중얼거렸던 어머니의 음성이 이제야 떠오른다.
‘아가. 불쌍한 내 아가. 이 어미의 복을 다 불살라 너에게 주마. 불쌍한 내 아기. 이 어미가 사랑하는 아기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마. 이 어미가 약속받은 후생의 복록을 모조리 끌어와 아기를 살려주마. 이 어미를 전부 바쳐 아기를 다시 살게 해주마. 그러니 이번엔 제발 행복해지렴.’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자위가 시큰해졌다. 한녹영은 울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욱신욱신한 통증이 느껴졌다.
단순한 꿈이 아니었나? 단순한 꿈이 아니었······ 어? 단순한 꿈이 아니었······ 구나. 신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었다. 어머니셨구나. 어머니셨어. 번개가 몸을 훑고 가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경련하듯 파들파들 떨려왔다.
한녹영의 어머니는······ 무당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액받이 무당이었다. 그냥 무당이어도 팔자가 사나울 판에 하물며 액받이 무당, 다른 사람의 모든 횡액을 대신 받아내는 액받이 무당말이다. 역시나 무당이었던 외조모는 그것이 어머니의 팔자라고 했다. 더럽고 싫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팔자.
현생에서의 어머니는 저를 전부 희생해 다른 이의 액을 짊어지고 살아야하는 팔자를 타고났으나 대신 후생에서는 세상의 모든 복록을 한 몸에 받아 고귀하게 태어나며 평생 세상 온갖 행복을 누리다 축복 속에 죽을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약속받은 후생의 복록을 전부 불살라 한녹영을 다시 살리는데 쓰신 것이다. 때문에 어머니는 먼 훗날 다시 태어난다 해도 어쩌면 또 다시 비참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어린 저를 남겨두고 먼저 떠나버린 어머니를 많이 원망했었다. 삶이 지옥 같을 때마다 어머니를 원망했다. 왜 낳았느냐고, 왜 홀로 두고 떠났느냐고 증오에 찬 말을 내뱉기도 했다. 어머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이의 횡액을 대신 받아내느라 일평생 힘들고 괴롭게 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홀로 남겨진 것이 괴롭고 힘들어 원망하기에 급급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한녹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외조모는 유일한 혈육인 한녹영을 미워했다. 딸이 낳은 자식인 한녹영이 애달프면서도 증오스럽다고 하셨다.
‘더러운 팔자를 타고나 괴롭게 살다간 네 어미가 너 때문에 후생도 고통뿐일 테니 내 어찌 너를 예뻐하겠느냐.’ 라고 종종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는데, 어쩌면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용한 무당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분이시니까. 어머니 또한 자식인 한녹영의 미래를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래도 고통, 저래도 고통이라면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고 했던 어머니가 팔자를 받아들여 액받이 무당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 한녹영의 탄생 직후라고 들었으니 말이다.
‘어머니.’
기어이 눈물이 쏟아졌다. 한녹영은 어머니의 유품을 손에 꼭 쥔 채 소리 없이 울었다. 참으려 하면 할수록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져 곧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물기로 흥건해졌다.
어머니가 제게 기회를 주신 겁니까? 그리도 홀로 남겨두고 간 자식이 걱정스러웠던 겁니까? 그래서 어머니를 희생해 제게 기회를 주신 겁니까?
간절하게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옥가락지가 따뜻해진 듯한 환각 같은 감각을 느끼며 한녹영이 결연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볼게요. 다르게 살아볼게요. 어머니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니 헛되게 쓰지 않을게요.
한순간에 몰락해 홀로 차갑게 죽어가며 후회했다. 인기에 취해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제가 부끄러웠다. 칼날 같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상처를 주었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사랑에 집착했고, 약자를 짓밟았다. 침을 뱉으며 돌아섰던 박상호의 말대로 저는 쓰레기였던 것이다. 그걸 이제야 알겠다. 제 삼자가 되어 저를 지켜봤다면 아마 ‘뭐 저런 망종이 다 있지.’ 하며 혀를 찼을 거다. 그 정도로 배우가 된 이후의 저는 바닥 그 자체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드레스룸을 나오며 들어와, 라고 하자 문이 빼꼼 열리더니 박상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녹영아, 괜찮냐?”
한녹영은 제 안부를 묻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키는 대로 성질을 부리고, 막말을 내뱉어도 언제나 허허 웃으며 받아주었던 그가 속으로 저를 쓰레기 취급하고 있는지 몰랐다.
“혹시 어디 아픈 거면 병원에 갈래?”
아마 이때만 해도 제멋대로에 신경질적인 저를 속으로 자주 욕하긴 했을 테지만 쓰레기로 생각하고 있진 않았을 거다. 박상호가 제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계기는 아마도······ 그 일 때문이겠지?
지금으로부터 한 반 년쯤 후일 거다. 저를 전담하던 박상호가 회사에서 독립해 새 배우를 키우기 시작했다. 제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배우였다. 그 배우의 이름은 장한경이었다. 장한경은 성격도 서글서글했고, 예의 발랐으며, 무엇보다 재능이 있었다. 이제 갓 데뷔해 작은 역 하나라도 얻기 위해선 여기저기 굽실대며 다녀야 하는 햇병아리였지만 왠지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성장해 제 자리를 넘볼 것 같았던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두려움이기도 했다. 박상호는 스타가 될 법한 재목을 보는 눈이 뛰어났고, 실제로 그가 눈여겨봤던 배우는 전부 톱스타가 되었다. 그런 박상호가 장한경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회사로 데려왔던 것이다. 회사가 그를 내켜하지 않자 독립까지 감행하며 키우려 했던 인재였다.
한녹영은 박상호가 장한경을 톱스타로 키우도록 두고 볼 마음이 없었다. 저를 버리고 간 박상호에 대한 배신감과 저보다 더 큰 스타가 될지도 모르는 장한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이 돌아 두 사람을 짓밟았다. 어느 프로에서도 장한경을 쓰지 못하도록 압박했고, 한편으로는 장한경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학창시절 동급생에게 간강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망설임 없이 터트렸다. 그는 피해자였지만 현실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더 가혹하다. 한녹영은 그걸 잘 알았다. 예상대로 언론과 사회는 피해자인 그를 가해자인 듯 몰아붙였고, 악착같이 달려들어 바닥까지 파헤쳤으며,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죄 없는 그를 죄인인 냥 취급했다. 서슴없이 모욕했고, 피가 철철 흐르도록 돌팔매질을 해댔다.
이름과 외모를 바꿔 어떻게든 살고자 했던 장한경은 끝내 자살했고, 박상호는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한녹영은 남은 재산을 다 털어 장한경의 유가족에게 전하며 어떻게든 죄책감을 덜어보려 애썼던 박상호를 비웃었다. 주제도 모르고 배우를 키운답시고 설치다 꼴좋게 되었다고 했었나? 주제도 모르고 배우가 되려다 죽은 놈 따위라고 했던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던 터라 뭐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박상호가 저를 살벌하게 노려보다 휙 돌아섰던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녹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남의 상처를 헤집는 일 또한 아무렇지 않게 했던 사람이 바로 저였다. 헤집는 것이 다 뭔가. 헤집어 소금까지 뿌려댔었다.
“미안해, 형.”
뜬금없는 사과에 박상호가 어리둥절해했다. 그는 ‘저 자식 진짜 아픈가?’ 하는 표정으로 살금살금 한녹영의 침실로 들어섰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훗날 내가 형이 키우려했던 배우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그로 인해 절망에 빠진 형을 비웃어서 미안해.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한녹영은 영문을 몰라 하는 박상호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간 내가 형한테 너무 막대했던 것 같아서. 형이 날 위해 해준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마워하기는커녕 툭하면 짜증내고, 걸핏하면 신경질 내고 그랬잖아. 미안해. 앞으로는······ 완전히 안 그러겠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주의할게.”
박상호가 미간을 가늘게 좁히며 미심쩍게 한녹영을 보았다.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눈초리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렇게 착한 척 밑밥을 까는 거지?’ 하는 속내가 실려 있었다. 그걸 읽은 한녹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박상호 입장에서는 정말로 느닷없는 사과일 테니 믿기지 않는 건 당연했다.
본래 저였다면 사람이 사과를 하면 황송하게 받을 것이지 왜 의심하느냐고 또 금세 마음이 변해 짜증을 부렸을 테지만, 이젠 정말 달라질 거니까.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 같은 결말을 맞이할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달라질 거다. 달라져서 이번엔 다른 결말을 찍을 거다.
발작 같은 신경질을 부릴 타이밍이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도 한녹영이 그저 웃기만 하자 박상호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머리에서 열나냐? 해열제 가져다줄까?”
“나 열 안 나. 그보다 아까 나 때문에 라면 먹다 말았지?”
“어? 어. 그렇긴 한데 라면 치웠어. 환기도 다 시켰고, 향초까지 피워둬서 이제 거실에 냄새 안 날 거야.”
박상호가 허둥지둥 변명하듯 말했다. 그가 왜 저러는지 안다. 한녹영은 데뷔 직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다이어트를 해왔다. 주변에서 그만하면 됐다고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병적이다 싶을 만큼 다이어트에 집착했다. 식욕은 있지만 억지로 그걸 억누르자니 당연히 음식 냄새에 예민해져 신경질을 부리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배우가 다이어트를 한다고 매니저까지 굶을 순 없어서 그간 박상호는 최대한 냄새가 적은 음식을 사다먹거나, 나가서 먹거나, 아니면 한녹영이 자는 틈을 타 후다닥 음식을 해먹고 환기와 양초로 냄새를 없애곤 했다.
“냄새 좀 나면 어때.”
“······뭐?”
“그보다 먹다 말아서 배고프겠네. 나도 허기진데 같이 저녁이나 먹자. 냉장고에 뭐가 있으려나.”
한녹영은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사람마냥 멍해 있는 박상호를 뒤로 한 채 침실을 나왔다. 그리곤 냉장고로 직행했다.
“아무 것도 없네.”
한녹영이 멋쩍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제 냉장고에 음식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집에서 손수 요리란 걸 한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배우가 된 이후 늘 극심한 다이어트를 하느라 잘 먹지도 않았으니까. 냉장고 안에 든 거라곤 생수와 말라비틀어진 과일, 시들시들한 샐러드 채소, 그리고 맥주 몇 캔이 다였다.
“형, 우리 초밥 시켜먹을까?”
뒤따라 나온 박상호가 여전히 반신반의 하는 눈으로 한녹영을 보고 있다가 이내 결심을 굳힌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머뭇머뭇 이마를 짚었다. 열을 체크한 것이다.
“열없는데.”
“없다고 했잖아. 나 배고프다니까. 초밥 별로야? 그럼 피자? 족발? 치킨?”
“초밥 주문할게.”
한녹영은 박상호가 초밥 가게에 전화를 걸어 “특으로 2개요! 튀김 추가해서.” 하고 주문하는 동안 생수를 꺼내 마시며 6인용 식탁에 앉았다. 매니저와 단 둘이 사는 집에 식탁은 왜 이리 큰 걸로 산건지. 그것도 이태리 수입 명품 식탁 어쩌고 하는 걸로 무려 삼백 가까이 주고 샀다. 잘 쓰지도 않을 걸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산건지. 한녹영이 스스로를 향해 끌끌 혀를 찼다. 식탁뿐만이 아니다. 집안의 가구 대다수가 수입 산으로 몇 백에서 몇 천을 들여 맞춘 것들이다. 가구 값만 합쳐도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은 나올 거다.
제품이 좋아서, 혹은 보는 눈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허영이었다. 값비싼 물건을 들이고, 명품을 몸에 두르고 다닌다고 해서 격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데 분수에 맞지 않게 과한 사치를 부렸다. 그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 사람의 격에 맞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랬지.
장현재. 현재 제가 속한 기획사 대표이자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저를 발탁해 배우로 키워준 은인이자 연인이라고 믿었던 사내. 그를 생각하자 습관처럼 가슴이 지끈거렸다. 한녹영은 열이 나는 것처럼 욱신대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스물셋의 끝자락에 장현재를 만난 이후 한녹영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수많은 일을 전전하며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기에 급급했던 제가 배우가 되었고 오래지 않아 이름 앞에 스타, 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금세 오만해졌지만. 어쨌든 장현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빠져있던 한녹영 앞에 나타난 동아줄 같은 존재였다. 한녹영에게 있어 장현재야말로 기적이었고, 신이었고, 유일한 존재였으며, 사랑하는 사내였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전전긍긍했고, 그가 원하는 건 뭐든 했으며, 모든 걸 그에게 맞추었다. 제 자신을 온통 내버리고 장현재의 취향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그만큼 그에게 집착했고, 저 아닌 다른 사람이 그의 곁에 있는 걸 못 견뎌했다. 집착하고, 매달리고, 그러면서도 인형처럼 순종하며 마침내 그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일이 터졌고,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제게서 등을 돌렸다.
‘넌 이제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
얼굴에 붕대를 감고 병원에 누워있는 절 찾아와 했던 말이 귓가에 생생하다. 내려다보던 눈동자가 얼음보다 더 차갑고 싸늘했다. 곁을 완전히 내주진 않았어도 절 바라보던 눈동자에 냉기가 돈 적은 없었는데, 난생 처음 본 연인의 싸늘함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얼굴이 망가진 것보다 그의 외면이 더 가슴 아팠다. 심장이 난도질당한 듯 고통스러웠다. 동시에 허탈해졌고, 절망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모든 걸 바쳤나. 허망하고 허망했다.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주먹을 쥐락펴락 하고 있을 때 주문을 마친 박상호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곧 올 거야.”
“완전 배고픈데, 빨리 왔으면 좋겠네.”
한녹영은 얼른 표정을 바꾸며 웃었다.
“너 진짜 왜 그래?”
“내가 뭘?”
“아까부터 너무 이상하잖아.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질 않나. 이 시간에 초밥을 먹겠다고 하질 않나. 너 혹시 지금 아침 열 시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지금 밥 열 시다. 살찐다고 야식을 무슨 역적처럼 취급하더니.”
“언제는 너무 말랐으니 적당히 먹으라면서.”
“그야 그랬지만. 화면발 때문에 어느 정도 마른 몸은 필수지만, 넌 너무 대꼬챙이처럼 말랐어. 지나치게 마른 것도 안 좋아. 먹을 건 먹어가면서 운동으로 체형을 만들어야지, 그렇게 빼빼 마르기만 해선 비루해보여.”
속에 담고 있던 말을 무심코 해놓고 아차 한 박상호가 슬그머니 한녹영의 눈치를 살폈다.
“어. 그래서 이제 먹을 건 먹어가면서 운동하려고.”
박상호가 그물에 걸린 거북이처럼 눈을 끔뻑끔뻑했다. 한 마디로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자 이번엔 입까지 벌린다. 그는 꿈꾸나, 하는 표정으로 볼까지 꼬집었다. 그렇게까지 안 믿기나? 한녹영은 물을 마저 마셨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마른 몸을 유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실 한녹영은 뚱뚱한 편이었다. 늘 밤늦게 라면에 밥을 잔뜩 말아 후루룩 마시다시피 먹고는 곧바로 자곤 했던 습관 때문에 일하느라 많이 움직였는데도 항상 몸이 부어있었다. 살쪘을 때는 가자미눈으로 저를 보며 욕하기 바빴던 사람들이 살을 빼자 잘생겼다, 예쁘다, 뒤에서 후광이 비친다며 찬양하기 시작했다. 한녹영은 우쭐해졌고, 두 번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강박처럼 살을 뺐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장현재 때문이었다. 그가 모델처럼 마른 체형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적당히 마른 체형이 된 이후에도 극단적으로 음식을 멀리 했다. 그러다 결국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간 이후 심한 다이어트를 그만뒀는데, 그것도 병원에 찾아온 장현재가 ‘이제 그만 다이어트를 그만두라.’ 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먹고 입는 걸 전부 장현재의 뜻에 따랐던 저는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했다. 그래봤자 끝내 그의 마음은 가지지도 못했는데. 너 바보처럼 왜 그랬냐, 한녹영. 그렇게 하면 그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지. 자문자답한 한녹영이 묵직한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저를 다 내버리고 그에게 맞추려 암만 노력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그러니 이제 그만 접자. 다시 얻은 삶에서조차 강현재에게 집착해 결코 손에 넣을 수도 없는 허상을 쫓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어떻게 다시 얻은 삶인가. 기회인가. 어머니가 약속받은 복록을 희생해 얻은 기회다. 죽어서도 남겨둔 자식을 잊지 못해 희생한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제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 접자. 접어야 해.
한녹영이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박상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어왔다.
“지, 진짜냐?”
“진짜라니까.”
진짜라니까 의심도 많다. 박상호는 여전히 믿기진 않지만 네가 그리 말하니 믿는 척이라도 해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뭐가 뭔지 얼떨떨 하긴 하지만.”
“얼떨떨할 일이 뭐 있어. 두고 보면 알게 될 텐데.”
“그래. 네 말대로 두고 보면 알겠지.”
한녹영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았네. 이제 땀은 식었지만, 찝찝했다. 먼지 같은 소금이 피부 위에서 굴러다니는 것만 같았다.
“난 샤워 좀 하고 나올게. 내가 나오기 전에 초밥이 오면 형 먼저 먹고 있어.”
“샤워를 뭐 얼마나 오래 하려고. 적당히 하고 나와. 초밥 와도 안 먹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 그렇게 매너 없는 놈 아니다.”
“그럼 그러든가.”
한녹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후 욕실로 향했다.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이미 주문한 초밥이 도착한 상태였다. 박상호는 식탁 위에 배달 온 초빕을 잘 펼쳐둔 후 젓가락을 입에 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먹어, 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대형견 같았다. 침이라도 흘릴 듯한 기세에 한녹영은 짧게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게 먼저 먹으라니까.
“이제 나왔구나. 얼른 앉아.”
박상호가 허기진 얼굴로 한녹영을 재촉했다. 서둘러 자리에 앉은 한녹영이 젓가락을 집자마자 박상호가 초밥 한 피스를 집어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한녹영 또한 연어 초밥 한 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맛이 나쁘지 않다. 늦은 밤 급하게 배달시킨 초밥치고는 맛도 질도 썩 훌륭한 편이었다. 사실 날 생선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괜찮게 먹을 만 했다. 그러고 보니 초밥도 장현재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억지로 먹다보니 그나마 이 정도로 먹게 된 거지, 날 생선을 좋아하지 않아 처음엔 고역이었다. 처음 초밥을 먹으러 간 날 장현재 앞에서 잘 먹는 척, 즐겨먹는 척 연기하느라 얼마나 용을 썼는지 모른다. 그렇게 억지로 참고 먹다 보니 이젠 큰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나저나 아주 좋아하는 음식도 아닌데 뭐 먹을까 하는 생각에 초밥이 가장 먼저 떠오르다니, 어지간히도 습관이 든 모양이다. 한녹영이 짧게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진다. 씹고 있는 밥알이 모래알 같았다. 한녹영은 간신히 단새우 초밥 한 개를 더 먹은 후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제 몫의 2/3를 해치운 박상호가 식욕이 떨어진 얼굴로 물병을 집는 한녹영을 의아하게 보았다.
“더 안 먹어?”
“어. 안 먹다 갑자기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체기가 느껴져서.”
“죽 같은 걸로 시킬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죽 시켜줄까? 야식집에서 죽도 할 텐데.”
“아냐. 괜찮아.”
한녹영은 금세 휴대전화를 꺼내는 박상호를 만류했다. 그리곤 “내가 잘못 생각했네. 초밥이 아니라 오늘도 하루 종일 굶은 너 생각해서 죽을 시켰어야 했는데.” 하고 안쓰럽게 중얼거리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왜?”
한참 아무 말 없이 응시하자 박상호가 물어왔다.
“형은 내가 밉지도 않나 싶어서. 사실 내가 그간 좀······ 막돼먹게 굴었잖아.”
“············ 그야 네가 좀 막돼먹게 굴긴 했지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은근슬쩍 속내를 드러냈던 박상호는 제 입으로 막돼먹게 굴었다고 해놓고 그걸 인정하자 심기가 상했는지 순간적으로 뚱해진 한녹영을 보곤 은근히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잔다고 들어갔다가 나온 이후부터 내내 이상하더니 드디어 제 성질머리가 나오는 건가. 한녹영이 발작하듯 성질부리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 담담하게 평소의 반응을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한녹영은 입매를 실룩실룩하더니 가볍게 숨 한 번 내쉬곤 이내 덤덤해져 물을 마셨다. 박상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을 잘못 잤나? 한녹영 저 자식 오늘 왜 저러지? 왜 평소답지 않게 얌전하고 난리지?
“막돼먹게 굴긴 했지만······ 뭐?”
한녹영이 뒷말을 재촉했다. 박상호가 젓가락 뒤쪽으로 볼을 슬슬 긁었다.
“막돼먹게 굴 땐 솔직히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밉지만 그것도 다 일이다 생각하면 그럭저럭 참을 만 해.”
“내가 쓰레기 같다거나······ 만약 내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후련한 얼굴로 침을 뱉고 갈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지?”
“뭐?! 너 속으로 날 그 정도 막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박상호가 양손으로 식탁을 퍽 치고 일어서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누명을 쓴 피해자마냥 억울한 표정이었다. 한녹영은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난 그만 자야겠다.”
“저 자식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뭐 쓰레기? 침을 뱉고 뭐? 오냐오냐 비위 맞춰가며 입안의 혀처럼 굴어줬더니 속으로 날 그런 막장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는 거지?!”
침실로 향하는 한녹영의 뒤에서 박상호가 분한 음성으로 구시렁댔다. 본인은 혼잣말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음성이 커서 한녹영의 귀에 아주 잘 들렸다.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다 들려.”
곧장 구시렁대던 걸 멈춘 박상호가 누가 들어도 어색한 헛기침을 연발하며 입안으로 초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한녹영은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역시 박상호가 제게서 완전히 등을 돌린 계기는 장한경의 일이 분명했다. 그가 장한경을 어디서 만났더라? 시기는 분명 2017년 여름경이었다. 6월이었던 것 같은데? 초여름에 연기 공부 삼아 박상호와 함께 연극을 보러 갔다가 단역으로 출연했던 장한경을 보았다. 단역이었으니 당연히 무대에 오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불과 몇 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장한경은 박상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박상호는 장한경에게 한눈에 반해 제가 키워주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쫓아다녔다.
그게 왜 그렇게 싫었을까. 엄청난 천재 배우를 발견한 것 마냥 유난을 떨었던 박상호의 태도에 빈정 상하기도 했고, 장한경에게 약간의 질투를 느끼기도 했지만 아직 채 빛도 보지 못한 햇병아리를 그렇게까지 짓밟을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생각보다 더 큰 시기심을 가졌나? 장한경은 한녹영이 보기에도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끼라고 하나. 그 끼가 있었고, 무엇보다 연기력이 탄탄했다. 연기보다 외모로 승부한다는 평을 더 많이 들었던 한녹영이었던 터라 연기에 대한 재능이 넘쳤던 장한경에게 저도 모르는 깊은 질투심이라도 느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심한 짓을 했어. 이번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새삼 다짐하며 한녹영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음 날, 한녹영은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어젯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탓인지 눈이 빨리 떠진 것이다. 새벽 5시 반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있자니 말문이 다 막혔다.
스케줄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 일찍 눈 뜬 적이 없었다. 데뷔 전이야 잠을 아껴가며 일해야 했으니 새벽 3-4시 기상은 당연했지만. 아, 회사와 계약한 초반에도 운동하랴, 이런저런 레슨을 받으랴,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귀가하곤 했었다. 일이 없는 날이면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오후 늦게야 겨우 일어나기 시작한 건 아마······ 조금씩 뜨며 나름대로 스타가 되기 시작했던 무렵이었던 건 같다.
그래봤자 아직 엄청난 초대형 급 스타가 된 것도 아닌데. 이즈음 저는 슬슬 주연을 맡기 시작하며 A급 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아직 누구나 인정하는 톱스타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말하자면 A급과 B급의경계에 서있었다고 할까. 한끝만 삐끗하면 하락세로 접어들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시기였던 것이다.
실제로 내년, 그러니까 2017년에 초반에 찍은 드라마와 중반에 찍은 영화가 시청율과 흥행에 참패를 겪으며 인기가 꽤 떨어졌었다. 얼굴로 뜬 벼락스타라 연기력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둥, 이미지의 소비가 빨라 대중들이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는 둥 언론들이 기다렸다는 듯 꽤 혹독하게 한녹영을 비꼬았다.
드라마의 시청률은 평균 3퍼센트 대였고, 최소 오백만을 예상했던 영화의 관객 수는 백만도 넘기지 못했으니 당연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과한 감이 있었다. 그때도 ‘왜 내 탓만 하는 거야?!’ 하고 주변에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여전히 저로 인해 드라마나 영화가 망했다는 언론의 보도에 대해선 억울하다. 전부 제 탓만은 아니었는데. 드라마의 경우 대본도 좀 그랬고, 경쟁사 드라마가 워낙 잘 빠진 탓에 한녹영의 드라마가 묻힌 탓도 있었다. 1회 시청률이 10퍼센트대로 나름 괜찮았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곤두박질치자 나중엔 한녹영도 흥이 떨어져 대충대충 연기하기도 했지만 뭐······ 초반엔 진짜 열심히 연기했다고.
영화는······ 연기할 때만 해도 모두 ‘이번 건 최소 중박이다.’ 고 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편집이 개판이었다. 거기다 함께 출연했던 여배우의 탈세 사건에, 조연 남배우의 병역 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영화를 보지 말자는 운동이 불길처럼 일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나만 못 잡아먹어서 난리들이었는지. 현 시점에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변명을 웅얼웅얼하던 한녹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드라마와 영화의 연이은 참패로 잠깐 어려웠을 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사람이 바로 강준일이었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3위인 거대 재벌 LK의 창업주 강정석 회장의 손자. 현재 LK 엔터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그는 차기 그룹을 물려받을 후계 1순위로 꼽히고 있는, 강정석 명예회장이 가장 아끼는 손자이다.
한녹영에게 강준일에 대해 알려주며 그와 줄을 대두면 앞날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준 사람은 장현재였다. 은밀한 비밀이지만 사실 강준일이 여자보다 남자와 자는 걸 더 좋아하는 취향이니 잘 사귀어보라고 했을 때 장현재의 순종적인 인형이었던 한녹영은 당연히 그의 말을 따라 강준일을 유혹하려 했다. 강준일을 침대로 끌어들이기는커녕 모욕만 당한 채 쫓겨나다시피 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벌게지는 수치스러운 기억이었다.
남창이면 남창답게 굴라고 했었지. 남창 주제에 순진한 척 연기하지 말고.
저를 돈 몇 푼에 몸을 팔러 나온 싸구려 남창 취급한 강준일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까닭은 영상 때문이었다. 이것도 생각하면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기억인데······ 술에 취한 그와 섹스를 하고 그걸 영상으로 남겨 원본을 넘기는 대신 LK가 제작하려던 영화에 꽂아달라고 한 것이다. 탄탄한 시나리오, 최고의 감독과 스태프들, 그리고 제작비 280억이 투자된 대작이라 크랭크인 전부터 무조건 대박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영화는 모두의 예상대로 엄청난 대박을 터트렸다. 관객수 1900만을 동원하며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한 것이다. 덕분에 한녹영 또한 명실상부한 톱스타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 섹스 동영상이 원인이 되어 완전히 몰락했지만.
황산을 뒤집어쓰고 얼굴이 망가져 병원에 실려 간 다음 날 섹스 동영상 파문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재벌 3세와 톱스타의 섹스 동양상, 그것도 남남끼리의 섹스 영상이었으니 그 파장이 어땠겠는가. 완전히 초대형 쓰나미 급이었다.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어도 연예계에서 방출되었을 거다.
한녹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돌아볼수록 제가 한 일들은 전부 욕먹어 싼 것들뿐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민망했다. 2016년 끝자락까지만 해도 일찍 뜬 탓에 연예인병에 걸려 오만하고 신경질적인 벼락 스타에 불과했는데, 이후 점점 더 안하무인에 재활용도 못할 쓰레기가 되어갔던 것 같다.
2017년 봄에 새로 회사와 계약한 신인 배우 주민성 때문이었을 테지. 훤칠하게 큰 키에 남자답게 잘생긴 주민성은 여러모로 한녹영과는 정반대였다. 한녹영과는 달리 집안이 부유했고, 해외 유학파 출신이었으며, 다재다능해 연기뿐만 아니라 노래에도 소질이 있어 OST에도 직접 참여하다 나중엔 음반도 냈다. 연기 외에 다른 데에는 재능이 없어 쇼프로에는 나갈 생각조차 못했던 한녹영과는 달리 그는 예능에도 두각을 드러내 인기 예능프로 섭외 1순위가 되기도 했다.
당연히 장현재는 주민성을 점점 예뻐하기 시작했고, 그게 초조해 점점 더 무리수를 뒀고, 더욱더 장현재의 말이라면 목숨을 걸고 따랐던 것 같다.
제가 한 짓들에 대해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자다 ㅤㅇㅣㅎ어나 오줌을 누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던 중인 박상호와 마주쳤다. 박상호는 아직 잠이 덜 깨 반만 뜬 눈으로 멍하니 한녹영을 응시하다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 설마 노, 녹영이니?”
“어. 내가 한녹영이지, 아니면 누구겠어?”
박상호가 시계를 보았다. 현재 시간은 정확히 새벽 5시 37분이었다.
“지금 오후 아니지?”
“바깥을 봐. 아직 캄캄하잖아.”
“그러네, 아직 새벽이라는 소리인데······ 왜 이렇게 일찍 인났어?!”
“어제 일찍 잠들었더니 일찍 눈이 떠졌어.”
“언제부터 네가 일찍 잤다고 일찍 일어났는데? 쉬는 날에는 무조건 오후 기상이었잖아.”
“오늘부터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기로 했어. 난 운동 갔다 올 테니까 더 자.”
“어딜 간다고?”
“운동.”
“누가?”
박상호가 자꾸만 반문해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형이 잠이 덜 깼나. 왜 자꾸 물어?
“내가!”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박상호가 어깨를 움츠렸다.
“소리 지르는 거 보니 한녹영 맞네. 난 또 귀신인가 했네. 새벽 5시 40분에 운동을 간다니 혹시 오늘 해 서쪽에서 뜬대?”
“이제 운동으로 몸 만들 거라고 했잖아. 헬스장 가서 가볍게 러닝머신이나 좀 하고 올 테니까 들어가서 더 자기나 해.”
어깨에 짊어진 운동 가방을 보고 진짜 운동가는 길임을 확인한 박상호가 여전히 어리둥절하게 대답했다.
“진짜인가 보네.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뛰다 와. 이따 전에 너 봐주던 트레이너한테 연락해볼게.”
한녹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집을 나왔다. 차로 한 십 분만 가면 24시간 헬스장이 있다. 잘 가진 않지만 그 헬스장에 워낙 유명 연예인이며, 정재계 유력 인물들이 자주 드니드는 탓에 해마다 회원권을 갱신해두는데, 그러길 잘했다.
운동복이 든 가방을 둘러매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한녹영이 제 스포츠카로 향하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제가 황산을 뒤집어쓴 장소이다. 한녹영은 주차장의 어느 한 지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날, 황산을 뒤집어썼던 날, 스케줄을 끝내고 늦은 밤 귀가를 했다가 일을 당했다. 그 날 저는 이른 새벽부터 이어진 촬영에 몸이 고단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스태프들에게 온갖 짜증을 다 부렸다. 감독과 촬영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동료 배우들, 심지어 까마득한 선배 배우들한테도 말이다. 선배 배우 한 명이 화가 나 한녹영을 때릴 듯이 덤벼드는 걸 박상호가 애걸하다시피 만류했고, 촬영장 분위기가 극도로 나빠져 결국 촬영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집에 돌아온 시각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인상을 잔뜩 쓴 채 차에서 내리는 순간 뒤에서 “한녹영.” 하고 저를 부르는 음성이 들려 왔다. 무심코 돌아본 순간 뭔가가 얼굴에 확 뿌려졌고, 곧 살이 타들어가는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누구였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제게 황산을 뿌린 여자의 얼굴을 봤다. 마치 각인된 것처럼 선명한데, 모르는 여자였다. 맹세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확실히 모르는 여자다. 하지만 여자 쪽에서는 한녹영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저를 보는 눈빛에 무시무시한 원한이 맺혀 있었다.
‘대체 누구였을까?’
분명 제가 한 행동의 결과였을 텐데. 그런 일을 당하게 된 원인을 알아야 할 텐데.
한녹영은 우두커니 선 채 제 얼굴을 더듬었다. 일을 당한 주차장에 서 있는 탓인지, 아니면 황산을 뒤집어썼던 날의 기억을 떠올린 탓인지 마치 지금 살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욱신욱신한 통증이 얼굴에서 느껴졌다. 정말 끔찍한 통증이었고, 섬뜩한 경험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괜찮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거니까. 또 황산을 뒤집어쓸 일은 절대 일어나게 하지 않을 거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자 두근대던 심장 박동이 점차 가라앉았다. 욱신욱신하던 얼굴의 통증 또한 점차 사라진다. 그제야 한녹영은 긴 숨을 내쉬며 차에 올라탔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도로가 한산해 헬스장에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한녹영은 장식품처럼 지니고 있던 출입카드를 찍고 헬스장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만에 오는 거지? 반 년만인가? 정말 어쩌다 마음이 내키면 인맥이나 한 번 쌓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설렁설렁 오곤 했는데. 그것도 사람이 많을 시간만 골라서 말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헬스장 안은 한산했다. 한녹영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곧장 러닝머신으로 향했다. 그리곤 이어폰을 귀에 꼽고 러닝머신의 속도를 조절한 후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한 삼십 분 정도 달렸을까. 그리 속도를 과하게 내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터질 듯이 뛰며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꼭 발끝에 추를 매달고 있는 기분이었다. 산소가 부족해 호흡 또한 심하게 가빠졌다. 이러다 러닝머신 위에서 선 채로 기절이라도 할 듯했다.
한녹영은 러닝머신을 끈 후 간신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체력이 너무 엉망이잖아? 겨우 스물일곱인데, 체력은 60대의 그것 같았다. 러닝머신 위에서 고작 삼십 분 달렸다고 이렇게 죽을 것 같다니. 그간 얼마나 체력 관리를 소홀히 했으면 몸이 이 모양이 된 거야?
한녹영, 너 진짜 막 살았구나.
한녹영은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찼다. 거기다 어제 종일 굶다시피 한 후 운동을 한 탓인지 이젠 눈앞까지 노래졌다. 단백질 쉐이크라도 마실 걸. 헬스장 안에 다 비치되어 있어 타 마시기만 하면 되는데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러닝머신에 올랐더니 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휴게실에 가서 잠깐 누워있어야겠다. 아니다. 지금이라도 단백질 쉐이크를 마실까.
어쨌든 여기서 벗어나야 해 두어 걸음 옮겼을 때였다. 노랗게 변했던 시야가 점점 까매지더니 정전이라도 된 듯 한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몸이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쓰러지려던 찰나 누군가 한녹영의 몸을 잡아주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한녹영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잠깐 저를 잡아준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다시피 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어지럼증이 가시며 차츰차츰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잠깐 어지러워서 그만······.”
한 걸음 내딛어 자연스레 품에서 빠져나오며 꾸벅 감사 인사를 하다 말고 움찔했다. 저를 잡아준 사람이 바로 강준일이었던 것이다. 강준일은 감사 인사를 전하는 한녹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가늘어진 눈매가 자못 싸늘했다. 언제 봐도 참 차가운 사람이라니까. 사람이 너무 냉해서 곁에 있으면 얼어붙을 것 같아 참 별로다.
배우를 해도 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라 외모적인 조건도 훌륭하고, 집안은 말할 것도 없으며, 본인 스스로의 능력도 뛰어나 모든 걸 갖춘 남자지만 차가워서 영 한녹영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가진 힘이 필요해 얼굴에 가면을 쓴 채 유혹했으니 잘 될 리가 없었다. 그게 올 늦가을의 일이었으니 불과 한 달 전이다. 그땐 수치스럽고 분했으며, 장현재가 부탁한 일을 해내지 못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 되었다. 만약 강준일이 저를 쳐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의 잠자리 상대를 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잠자리에서도 저렇게 냉할까.’
술에 취한 강준일과 몸을 섞었을 때는 꽤 정열적이었는데. 그땐 술 때문에 인사불성인 상태였으니 평소의 섹스 스타일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어쨌든 막연히 상상하고 있던 것과 다른 집요하고 열정적인 섹스에 꽤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유가 뭐건 몸을 파는 행위라 장현재의 요구에 강준일의 침대로 기어들어가면서 속으로 비참해했다. 그를 유혹하려고 접근했을 때와는 기분이 또 달랐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대와의 섹스라니 기분이 더러웠다. 거기다 그걸 촬영까지 해야 했으니 심정이 오죽했을까. 아무리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직업이라고 해도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장면까지 촬영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제 가치가 하락해 회사의 피해도 막심하니 강준일을 이용해서 재기하자던 장현재의 설득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한녹영 스스로도 더 높이 날아오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고, 장현재의 말을 거역해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장현재가 제 입에 물려준 사탕이 너무 달아서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욕망과 장현재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비참함과 거부감 등의 감정을 가진 채 임한 섹스는······ 뜻밖에도 괜찮았다. 사실 그동안 했던 그 어떤 섹스보다 열중했고 쾌감을 느, 느꼈다. 몰래 설치한 카메라가 저와 강준일을 낱낱이 찍고 있다는 사실까지 완전히 잊은 채 열중했던 것이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인데······ 모든 걸 다 던져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장현재와의 섹스보다 더 좋았다. 나중엔 제 쪽에서 더더, 하고 매달렸을 정도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를 귀찮게 매달리는 잡상인처럼 쳐다보는 싸늘한 얼굴을 앞에 두고 민망한 생각을 한 스스로가 부끄러워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을 때였다.
“아직 포기 못한 모양이군.”
강준일이 싸늘하게 말했다.
“······?”
말뜻을 몰라 다소 맹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장준일이 쯧 혀를 찼다.
“그렇게도 내 스폰이 필요한가? 겉은 예쁠지 몰라도 속에선 썩은 냄새가 나는 너 같은 사람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지금 무슨 말을······ 아, 혹시 강준일을 만나려는 목적으로 헬스장에 왔다고 오해하고 있는 건가.
“대표님이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전 운동을 하려고 온 겁니다.”
“이 시간에 운동을 하러 왔다니······ 믿을 소리를 해야지.”
“아니 진짜로 운동하러 온 겁니다. 대표님과 마주친 건 우연이고요.”
한녹영의 해명에 강준일은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침대에서 나체로 다리를 벌린 채 원하는 걸 말해. 네 구멍에 씹질하는 대가로 뭘 원하는지.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이 구멍 값으로 적당하다 싶으면 받아들일 테니까. 몸을 팔러 왔으면 몸 팔러 온 놈답게 굴어야지, 어디서 수작질이야.”
씹질이니 구멍이니······ 재벌 3세의 어휘 구사력이 참 저렴하다. 한녹영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오해를 받은 채 막말을 듣고 있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억울한 심정이 들지 않았다. 화도 안 나고, 분하지도 않다. 그저 담담했다.
“난 대표님 취향이 아니라더니 씹질은 가능한가 보네요.”
“남창의 가치는 외모가 아니라 구멍에 있으니까. 취향인 사람하고는 연애를 하겠지. 그냥 씹질만이 아니라.”
빈정거림이 가득한 말이었다. 한녹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전 대표님 취향이 아니라고 했으니 연애할 일도 없을 테고, 진짜 몸을 팔러 온 것이 아니니 그냥 씹질만 할 일도 없겠군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짜 오해입니다. 정말 운동을 하러 온 겁니다. 제가 요즘 심하게 살을 뺀 탓에 체력이 엉망이라서요. 그럼 전 이만 가볼 테니 대표님은 마저 운동 하십시오.”
고개를 까닥한 한녹영이 탈의실로 향하다 말고 돌아섰다. 그리곤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강준일에게로 향했다. 그는 한녹영이 다가오자 그럼 그렇지, 하는 듯 입끝을 올렸다.
“취향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사실 대표님도 제 취향 아닙니다. 그래서 대표님이 절 까줘서 너무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
강준일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한녹영은 할 말 다 했다는 태도로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젠장.’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또 한 번 돌아섰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술 적당히 드십시오.”
자꾸 제 갈길 가다 말고 돌아선 것이 민망해 이번엔 강준일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뭐?”
강준일이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한녹영은 이번엔 정말로 돌아보지 않고 곧장 탈의실로 향했다.
사실 제가 과거로 돌아온 탓에 할 필요가 없는 충고였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주의는 주고 싶었다. 저야 이제 장현재가 원하는 대로 카메라를 든 채 만취한 강준일의 침대로 들어가는 일은 하지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가진 것이 많은 만큼 표적이 되기 쉬워 저 아닌 다른 사람이 저와 같은 일을 할지도 몰랐다.
장현재는 몇몇만 아는 탑시크릿이라고 했지만 강준일의 성 취향에 대해선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의 스폰을 바라고 게이는 아니지만 얼마든지 다리를 벌릴 수 있다고 말하는 신인 남배우들의 소리를 두어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여배우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생각한 것만큼 냉한 사람은 아닐지도.’
강준일은······ 제가 촬영한 섹스 동영상으로 인해 곤란에 처해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을 텐데 뜻밖에도 한녹영의 면회를 와주었다. 당시에는 적반하장 격으로 모든 걸 잃은 저를 비웃어주려고 온 거냐며 비아냥댔지만 말이다. 늘 제게 찬바람이 쌩쌩 불었던 강준일이었지만 면회 온 날은 달랐다. 잔뜩 독이 올라 비아냥대는 저를 향해 ‘일이 진정되면 또 오지.’ 하는 말을 남긴 채 가버렸다.
그때는 마치 제가 망가진 원인이 강준일 때문인 냥 왜 또 온다는 거냐, 망가진 내 꼴이 그리도 재밌냐고 돌아서는 그의 등을 향해 쏘아붙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고맙다. 병실에 서서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강준일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저를 보는 눈빛이 다정했던 것 같기도 해 더더욱.
할 필요가 없는 충고였을 지도 모르지만 굳이 한 건 그 고마움에 대한 나름대로의 표현인 것이다. 뭐 강준일이야 영문을 모를 테니 지금쯤 저를 미친놈처럼 취급하고 있을 테지만, 왠지 홀로 지고 있던 빚을 갚은 기분이라 조금은 후련했다.
집에 돌아오자 완전히 잠에서 깨 커피를 마시는 중인 박상호가 보였다. 그는 삼십 분 운동에 녹초가 되어 돌아온 한녹영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운동하러 간다더니 노동이라도 하고 왔어? 안색이 왜 이래? 백짓장 같잖아.”
“형 나 먹을 것 좀.”
“어?”
“너무 허기져. 눈앞이 다 노래.”
씻을 기운도 없어 샤워도 못하고 왔다. 운전도 간신히 했다. 역시 헬스장에서 쉐이크라도 마시고 왔어야 했는데. 미적대다 강준일과 마주쳐 또 괜한 오해를 받을까 하는 마음에 옷만 갈아입고 나왔는데, 오는 내내 그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사고내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한 채 운전했더니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나마 남아있던 기력이 다 빠져 주차장에서 집까지 기어오다시피 했다.
“잠깐 있어.”
한녹영은 비틀비틀 소파로 향했고, 박상호는 부랴부랴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뭔가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곧 주스 한 잔을 내왔다.
“사과랑 케일이랑 꿀이랑 바나나 넣고 갈았어. 일단 이거 쭉 마시고 쉬고 있어. 금세 아침 만들어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한녹영이 주스 잔을 잡았다. 케일을 넣은 탓에 색깔이 푸르딩딩해서 입맛이 뚝 떨어질 법한 색깔이었는데, 마셔보니 맛있다. 상큼하고 적당히 달콤해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지금 한녹영의 몸 상태에 딱 적당했다. 꽤 큰 잔에 가득 들어있던 주스를 남김없이 마신 후 잠시 늘어져있자 조금이나마 기력이 돌아왔다.
이제야 좀 살겠네.
남은 기력 다 털어 씻고 나오자 박상호가 식탁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가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이 보였다.
“즉석 죽이야. 밤에 배고프면 야식으로 먹으려고 사다둔 건데 먹을 만해. 요샌 이런 즉석식품도 잘 나오더라. 마트 가보면 별 게 다 있어. 자장면이며, 짬뽕이며, 부대찌개며······ 진짜 살기 좋은 세상이야.”
한녹영은 제가 샤워하는 동안 살짝 식은 죽을 떠먹어 보았다. 박상호 말대로 꽤 먹을 만 했다. 가끔 밤샘 촬영할 때 위에 부담이 갈까봐 도시락 대신 식당에서 포장해 와서 먹는 죽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어떠냐?”
한녹영이 죽을 넘기는 것을 본 박상호가 득달같이 물어왔다.
“괜찮은데. 포장 죽보다 나은 것 같아.”
“그렇지? 많이 먹어.”
한녹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식어 딱 먹기 좋은 온도의 죽을 천천히 떠먹었다. 식사 속도가 빠른 편인 박상호는 죽을 국처럼 후루룩 떠먹는 중이었다.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던데, 뭘 좀 사다둬야 하지 않을까?”
한녹영이 물었다.
“냉동실에 닭가슴살은 많던데.”
“그놈의 닭가슴살 지긋지긋하다. 싹 꺼내다 버려.”
다이어트 하려고 늘 잔뜩 사다 쌓아두었지만, 사실 먹을 때마다 짜증나 죽을 뻔 했다. 맛있는 음식도 연달아 먹으면 질릴 텐데 하물며 퍽퍽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이다. 한녹영이 진저리를 치자 박상호가 피식 웃었다.
“멀쩡한 음식을 왜 버려? 음식 함부로 버리면 벌 받아. 이현희 담당하는 로드 박정훈 알지? 모르나? 암튼 박정훈 이라는 자식이 있는데 요 몇 달 사이 급격하게 살이 쪄서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징징대던데, 그 자식 주면 어떨까?”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한 말에 한녹영은 “그러든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상호가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진짜로 그래도 돼?”
“음식 버리는 거 아니라며. 난 당분간 닭가슴살이나 샐러드 같은 거 쳐다보기도 싫으니까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줘.”
“······.”
숟가락을 입에 문 박상호가 낯선 외계 생물체를 보듯 한녹영을 보았다.
“왜?”
“너 진짜 한녹영 맞지? 한녹영의 껍질을 뒤집어쓴 외계인이라던가 그런 거 아니지?”
“뭐래.”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아는 한녹영이라면 ‘그 자식은 거지야? 왜 남이 먹던 걸 가져가겠대. 거지 자식한테 적선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그냥 버려!’ 라고 했을 거거든.”
“너무 허기져서 못된 소리 할 기운도 없나보지.”
시큰둥한 대꾸에 박상호는 “어젯밤부터 진짜 이상하게 구네.”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 아까 말한 박정훈인지 뭔지 하는 로드에게 보내는 것이리라. 한녹영은 죽을 바닥까지 싹싹 비운 후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양이 많지 않아 아침으로 부담 없이 먹기에 딱 적당했다. 포만감은 없지만 욕심을 내 더 먹었다간 탈이 날 것이다.
“형, 나 좀 잘게.”
배가 부르니 졸리다. 눈꺼풀이 천근이었다. 버티느니 1시간 정도 자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곧장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깨보니 9시였다. 얼추 1시간 반 정도 잤던 셈이다. 제대로 숙면을 취한 탓인지 정신이 맑았다.
목을 좌우로 꺾으며 거실로 나오자 누군가와 통화 중인 박상호가 보였다. 그는 한녹영을 보곤 급히 전화를 끊으며 일어섰다.
“깼냐? 커피주랴?”
“어, 연하게 한 잔 줘.”
고개를 끄덕인 박상호가 부엌으로 향했다. 곧 커피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형. 나한테 들어오는 대본이나 시나리오 있지? 다 가져다줘.”
“뭐하려고?”
커피를 가지고 나오는 박상호를 향해 말하자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뭐하긴, 내가 살펴보려고 그러지.”
“······.”
박상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못 할 소리를 한 것도 아닌데, 무척 당황스럽다는 듯. 머그컵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 후룩 마신 한녹영이 시선을 들었다.
“왜 그러고 있어? 나한테 들어온 대본이나 시나리오 없어?”
“아, 아니, 없을 리가 있나. 과장 찔끔 보태서 산처럼 쌓여있지. 네가 요즘 가장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배우 중 한 명인데. 근데······.”
“······?”
“근데 한 번도 따로 챙긴 적 없어서 좀 당황스럽다. 대체로 장 대표가 하라는 것만 했잖아.”
한녹영이 잠깐 침묵했다. 데뷔 초에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아 대본을 직접 고를 수가 없었고, 좀 뜨고 난 후 어느 정도 대본을 고를 수 있는 입장이 되었을 때는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했다.
‘넌 이 바닥을 잘 모르니 내가 고르는 걸로 하면 돼. 네 이미지에 최적인 역할로 골라 줄 테니까. 반드시 뜰만한 역할로 말이야.’
장현재의 말이 설탕 같았다. 바라보는 눈빛이며 태도며 녹을 듯 다정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형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라고 말한 것이다. 이후 한녹영에게 들어오는 대본이나 시나리오는 회사 직원이 먼저 검토해 몇 개 추려 장현재에게 보고하면, 장현재가 그 중 하나를 선택해 한녹영에게 통보하곤 했다. 그게 지금까지의 시스템이었다.
처음에 박상호는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직접 많이 읽어봐야 작품을 선택하는 눈이 길러진다고 몇 번이나 충고해왔지만 한녹영이 짜증을 내며 거절했다. 어차피 대표님이 알아서 제게 잘 맞는 작품을 선택해줄 텐데 뭐 하러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면서 말이다.
두어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박상호도 포기했는지 더 이상 권유해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뜬금없이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가져다 달라고 하자 ‘저자식 왜 저래?’ 하며 놀란 것이다.
“그랬지. 그랬는데······ 형이 많이 봐야 작품 보는 눈이 생긴다며.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내가 직접 검토해서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해보려고.”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든 걸 장현재에게 의지했던 삶이었다. 이제 그런 삶에서 조금씩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로 걸어볼 생각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다 보면 장현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장한 생각이긴 한데······.”
“장한 생각이긴 한데 뭐? 이젠 너무 늦었다고?”
“응?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네 배우 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늦다니. 잠깐만 기다려.”
한녹영의 마음이 변할 새라 허둥지둥 대답한 박상호가 휑하니 제 방으로 달려갔다. 차키라도 가지러 간 건가. 한녹영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TV를 켰다. 뉴스 채널에선 여전히 감독과 여배우의 불륜 스캔들에 대해 보도하는 중이었다.
불륜 스캔들 다음 뉴스는 모 번화가에서 일어났던 묻지 마 범죄의 범인을 체포했다는 보도였다. 한 달 전, 웬 미친놈이 멀쩡히 길 가던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러 무려 다섯 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인데, 한참 범인을 잡지 못해 경찰의 무능이니 어쩌니 하며 한동안 언론이 난리였다. 한 달 만에 체포한 범인은 40대 주부였다. 170cm정도 되는 키에 청바지와 펑퍼짐한 점퍼를 입고 있었고, 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 마스크까지 착용한 터라 모두 범인이 남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여성이어서 충격이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범인은 40대 주부.”
한녹영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앵커가 말했다.
『범인은 40대 주부 김모씨로 밝혀졌습니다. 김모씨는 남편의 잦은 폭력과 바람에 시달리다······.』
이미 제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다고 확신하고 있던 터라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뒤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박상호가 품에 종이 뭉텅이를 안은 채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게 다 뭐야?”
“너한테 들어온 대본이랑 시나리오. 넌 안 보지만, 나라도 봐두자 싶어 집에 가져다뒀던 거야. 이미 끝난 건 나중에 천천히 보도록 하고, 이건 현재 제안 들어온 것들 중 괜찮다 싶은 거로만 추렸으니까 봐봐.”
박상호가 테이블에 종이 뭉텅이를 내려놓았다. 대충 살펴보니 드라마 8개, 영화가 3개였다. 우선 제목만 살펴보던 한녹영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도망자. 이게 바로 한녹영이 찍은 드라마와 맞붙어 엄청난 시청률을 터뜨린 드라마였다. 드라마 공모전으로 데뷔한 신인 작가의 두 번째 드라마로 범죄수사물인데, 작가의 내공이 부족해 힘들 거라던 우려와는 달리 막상 뚜껑을 여니 끝내주게 잘빠져 대박을 치게 된 것이다.
이게 나한테도 들어왔었구나. 전혀 몰랐다. 도망자라는 제목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거······ 나한테 들어온 역할이 뭐야?”
“뭘 말하는 거야? 아, 도망자. 그건 여기 형사 차도영이야.”
차도영이라면······ 누명을 쓰고 도망 다니는 주인공을 몰래 돕는 날라리 형사이다. 예쁜 여자만 보면 쫓아가 작업 걸기 바쁜 바람둥이에 부자 부모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 경찰을 소꿉놀이쯤으로 생각하며, 불의를 보면 적당히 참아 넘겨 열혈 형사인 주인공과 반목하는 날라리. 하지만 알고 보면 여주인공을 홀로 짝사랑하는 순정파이고, 그걸 끝까지 숨기면서 그녀를 위해 주인공을 돕다 결국 총상까지 입게 되는 역할이었다. 겉으로는 까칠하면서 속으로는 순정파라 여성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역할을 맡게 되는 배우가 박지한인데, 데뷔한지는 오래 되었으나 크게 빛을 못 봐 조조연과 단역만 전전하다 차도영을 연기하면서 엄청나게 떴다. 단박에 주연급이 되어 2017년 말에 시작하는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을 맡았고, 도망자 이후 두어 달 동안 찍은 광고로 번 순이익이 백억 대라는 소문도 돌았다.
“이거 할래.”
다른 대본은 보지도 않고 도망자를 찍겠다고 하자 박상호가 놀랐다.
“그거 나도 훑어봤는데······ 캐릭터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주조연급이야.”
“알아.”
“근데도 하겠다고?”
“어. 캐릭터가 상당히 매력적이라며. 그리고 나도 이제 연기 변신을 할 때가 된 것 같아. 그간 얼굴로 뜬 벼락스타라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슬슬 이런 연기력이 필요한 역할을 할 때도 됐잖아.”
한녹영이 뜬 계기는 톱가수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뮤비에서 몽환적인 분위기의 악마를 연기하면서 여자보다 예쁜 남자로 뜨기 시작했고, 곧바로 찍은 여성 화장품 CF가 엄청난 반응을 일으켜, CF에서 한녹영이 바른 립스틱이 전국적인 품절 사태를 일으키며 이른바 스타가 되었다. 그 뒤로 드라마의 조연, 주조연, 주연을 맡았지만 연기의 폭이 크지 않은 역할들이었다. 시청률은 전부 웬만큼 나와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지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늘 비슷비슷한 역할이라 비슷한 연기밖에 못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다정다감하고 스윗한 역할들만 주로 해왔으니까.
덕분에 팬들은 한녹영을 솜사탕, 캔디, 허니 등으로 부르며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실제로 다정다감하고 스윗하며 매우 친절한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캔들이 터지고, 한녹영에 관한 일화들이 하나씩 밝혀지자 생각해왔던 이미지와 다른 실제에 학을 떼며 돌아섰던 걸 테다.
“액션도 해야 하고, 지금껏 해왔던 인물들과는 달리 까칠함도 있는 역할이라 평소보다 연기하기가 까다로울 텐데.”
“괜찮아. 그동안 집중 연습하면 돼. 아, 나 액션스쿨 알아봐줘.”
“장 대표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 장 대표는 이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한 번 읽어볼래? 시놉시스뿐이지만.”
박상호가 대본 사이를 뒤져 책자 하나를 꺼냈다. 제목이 달콤한 그대, 로 이걸 찍었다가 쪽박을 차게 됐다. 한녹영은 달콤한 그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음 작품은 이거다, 라는 장현재의 말에 두말 않고 도장부터 찍은 후 살펴본 대본은 그저 그랬다.
히트작을 몇 개나 낸 인기 작가의 작품이라 대본은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놉시스만 보고 결정한 것 같은데, 촬영 직전 나온 대본이 별로였던 것이다. 이미 도장도 찍었고, 인기 작가와 대세 배우의 만남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도 엄청 나간 데다, 장현재의 말을 거스를 용기가 없어 그냥 찍었는데 결과는 참 한심했다.
저걸 선택한 후의 결말이 어떨지 뻔히 아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다.
“이걸로 할래.”
“진짜냐?”
“그렇다니까. 차도영이 마음에 딱 들어.”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아놓고.”
“보는 순간 감이 딱 왔어. 무조건 이걸로 할 테니까 회사에 연락해. 다른 배우한테 이 역할 뺏기기만 해!”
한녹영이 으름장을 놓았다. 참 별일이다, 라는 눈매로 한녹영을 보던 박상호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내심 도망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회사에 말을 넣었다가 왕창 깨졌는데, 배우 본인이 차도영을 강력 주장하고 있으니 회사에서도 더 이상은 별 말 못하겠지.
“그래. 알았어. 회사에 연락해서 작가와 제작사 쪽의 의향 조율해볼게.”
“내가 한다고 하면 되는 거 아냐?”
“이미 회사에서 거절 의사 넣었을 거야. 다른 배우하고 접촉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서둘러!”
한녹영이 벌떡 일어서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재촉에 박상호는 꽁지에 불붙은 것 마냥 허둥지둥 휴대전화를 꺼냈다. 박상호가 회사와 통화하는 동안 한녹영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벌써 다른 배우, 그러니까 박지한과 계약했으면 어쩌지? 초조함이 뱃속까지 스며들었다.
쪽박 찬 드라마를 또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지만, 진심으로 차도영을 연기하고 싶었다. 종영 이후에 뭐라도 하나 흠을 잡아 비꼬고 싶은 마음 반, 얼마나 잘 빠졌는지 두고 보자는 시기심에 가득 찬 마음 반으로 도망자를 몰아봤는데······ 보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제가 차도영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이 든 것이다. 주인공 형사도, 주인공에게 누명을 씌운 악역도, 각자 나름의 매력이 넘쳤지만 한녹영의 역할은 아니었다. 한녹영이 보기에 차도영이 제게 적임이었고, 연기하고 싶었다. 내가 했으면 더 잘했을 텐데, 하는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박지한을 시기했고, 제 것을 강탈해간 도둑을 보는 듯 미웠다.
“뭐래?!”
박상호가 통화를 끝내는 것 같자 한녹영이 득달같이 달려가 물었다.
“제작사와 연락해보겠대. 기다려.”
“그냥 형이 바로 작가한테 연락해보면 안 돼?”
“너에 관한한 난 그런 권한이 없다. 캐스팅은 무조건 회사를 통해서. 최종 결정은 장 대표가. 그게 지금까지의 시스템이었잖아. 지금 장 대표가 출장 중이라 네가 막 쪼아댄다는 말이 먹혔지, 아니었으면 바로 장 대표한테 전화가 왔을 걸?”
아. 맞다. 이즈음 장현재가 출장을 갔었지. 훗날 알았는데, 이번 출장에서 장현재는 주민성을 만나게 된다. LA에서. 이후 몇 번 더 출장을 핑계로 LA를 왕복하며 설득한 끝에 주민성을 한국으로 데려와 데뷔시키게 되는 것이다. 여러 모로 한녹영과는 반대였던 주민성과 공통점이 딱 한 개 있었는데, 그건 바로 장현재에 대한 집착이었다. 주민성 또한 한녹영 못지않게 장현재를 따랐다. 제가 자살한 이후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결국 장현재를 차지한 사람은 주민성이 되었을까?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아 주먹을 꾹 쥔 채 반복해서 심호흡을 했을 때 박상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회사인 것 같았다.
“네. 박상호입니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녹영이한테 그렇게 전하죠.”
“뭐래?”
“내 예상대로 우리 쪽에서 거절해서 다른 배우와 접촉 중인가 봐.”
“박지한이래?”
박상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알았냐?”
“작가 연락처 알아낼 수 있지?”
“알아낼 수야 있지만······.”
“그럼 알아내서 전화해줘. 내가 직접 통화할 테니까.”
한녹영이 적극적으로 말했다. 작가와 직접 만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서라도 반드시 차도영을 연기하고 말 테다. 의지를 불살랐다.
“그렇게 하고 싶냐?”
“어, 무조건 하고 싶어. 차도영은 꼭 내가 해야 해.”
“알았다. 작가 연락처 알아볼게.”
박상호가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한녹영은 대본을 정독했다. 4회까지밖에 안 나온 상태지만 역시 재밌다. 이 드라마는 뒤로 갈수록 더 재밌어진다. 원래 12회로 예정되었는데,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이어가자 3회 연장해 15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어느 한 회 건너뛸 수 없는 흥미를 자아냈다. 흠잡을 곳이 없는 웰메이드 드라마였다. 언론의 극찬도 수없이 쏟아졌다. 명품 드라마 탄생, 괴물 신인 작가 등장 어쩌고 하면서.
“녹영아, 연락처 알아냈다.”
박상호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한녹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ㅡ 네, 김현영입니다.
잠에 취한 목소리였다. 밤샘 작업이라도 한 건가. 한녹영은 정오가 되어가는 시간을 힐끔 보았다.
“안녕하세요. 한녹영입니다.”
ㅡ 네, 누구라고요?
“한녹영입니다. 제가 잠을 깨웠다면 죄송합니다.”
최대한 달콤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박상호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만들어내는 음성으로 제 개인 스태프들이 뒤에서 ‘위선의 목소리.’ 라고 부르는 걸 알고 있다.
ㅡ 한녹영? 예에! 한녹영씨요?
“네. 한녹영입니다. 도망자 차도영 역할 때문에 연락드렸는데, 통화 괜찮으십니까?”
ㅡ 통화는 괜찮은데······ 어어, 차도영은 다른 배우와 접촉 중이라······.
“아직 도장을 찍은 건 아닌 것으로 아는데요.”
ㅡ 그렇긴 하지만요.
“차도영을 제가 꼭 하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뵙고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말을 나누고 싶은데요.”
ㅡ 네에? 식사대접이요, 식사대접은 제 쪽에서 해야 하는데······.
“밥이야 누가 사면 어떻습니까. 시간은 언제가 좋으세요? 전 오늘 저녁이라도 괜찮습니다만. 작가님 스케줄은 어떻습니까?”
ㅡ 제 스케줄이요? 오늘 저녁 내 스케줄이······ 어······ 엄······ 괘,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요.
“괜찮으시군요, 다행입니다. 그럼 저녁 7시 어떠세요? 제가 괜찮은 초밥······ 한정식 집을 알고 있습니다.”
또 습관처럼 무심코 초밥이라고 말했다가 퍼뜩 한정식으로 정정했다. 김현영 작가는 내키지 않는 건지, 아니면 당황한 건지 한참 뜸을 들이다 “7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장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ㅡ 네.
“그럼 이따 뵙죠.”
ㅡ 네네, 이따 봬요.
전화를 끊자마자 박상호를 보며 “정 예약해. 7시로.” 라고 말했다. 정은 삼청동에 있는 한정식 집으로 맛이 깔끔해 중요한 손님을 만나야 할 때 종종 가던 곳이다. 젊은 작가라 양식이 더 나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개별실이 있어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 ‘정’이 좋았다. 음식도 맛있으니까 김 작가도 좋아하겠지.
“예약했다.”
“어. 고마워, 형.”
“그래 고맙······ 뭐? 방금 뭐라고?”
한녹영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다니. 저 자식 진짜 한녹영의 껍질을 뒤집어쓴 외계인 아냐? 튀어나올 듯 커진 박상호의 눈을 보지 못한 한녹영이 바삐 대본을 챙겼다. 김현영 작가를 만나기 전 대본을 달달 외우는 성의를 보여야지.
“나 대본 보고 있을 테니까 점심 좀 부탁해. 위에 부담가지 않으면서 적당히 배부른 음식이 좋겠어.”
“그, 그래. 알았어.”
한녹영은 얼이 빠져 고개를 끄덕이는 박상호를 뒤로 한 채 대본을 챙겨 침실로 향했다. 그리곤 1회 대본부터 눈에 새겨 넣을 듯이 찬찬히, 그리고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한녹영이 약속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6시 58분이었다. 그럭저럭 뜬 이후 단번에 거만해져 약속시간 따위 알게 뭔가, 내가 도착하는 시간이 곧 약속시간이다, 라는 건방진 태도를 취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물론 앞으로도 달라질 예정이고. 예전과 같은 거만함과 오만은 무조건 버릴 생각이었다.
마음이 바쁜 한녹영에 비해 오히려 늑장을 부린 쪽은 박상호였다. 한녹영은 아직 여유가 있다며 늑장을 부리는 박상호를 닦달해 일찌감치 집을 나섰고, 그 덕에 교통체증에 걸리고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박상호로 예약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말하자 직원이 선글라스를 낀 한녹영을 힐끔 본 후 “국화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손님은 먼저 와 계십니다.” 라고 말했다. 김현영 작가가 먼저 도착한 모양이다.
국화실 앞에 도착해서 직원이 문을 열자 얼어붙은 듯 앉아있던 김현영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한녹영은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제가 늦은 건 아닌데, 일찍 오셨네요.”
“네, 혹시 늦을까봐 서둘렀더니······ 저, 한녹영 씨, 팬입니다!”
김현영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막 앉으려는 자세를 취했던 한녹영은 당황해서 다시 등을 똑바로 세운 후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작가 쪽에서 팬이라며 악수를 청할 줄은 몰랐다.
“고맙습니다. 앉으세요. 형은 늘 먹는 걸로 주문 좀 해줘.”
고개를 끄덕인 박상호가 바깥에 나가 주문을 하고 왔다. 그 사이 한녹영은 김현영에게 최대한 예쁜 미소를 보이며 저를 어필했다. 신인 작가라 그런지, 본래 수줍음이 많은 건지, 아니면 팬이어서인지 김현영은 한녹영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자꾸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발갛게 물든 양 뺨이 참 순진해보였다. 이십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아니면 삼십대 초반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동그랗고 통통한 얼굴이 제법 귀여운 상이었다.
“아까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차도영은 제가 하고 싶습니다.”
일상적인 대화로 분위기를 풀 새도 없이 대뜸 본론을 꺼냈다. 너무 성급했나 싶기도 했지만,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박지한이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쾅쾅 박아버렸으면 어쩌나. 그럼 돌이킬 수 없는데. 내내 얼마나 조바심을 쳤는지 모른다.
김현영이 난처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저, 저도 한녹영씨를 모델로 쓴 탓에 차도영은 한녹영씨가 꼭 해줬으면 해서 일차로 컨택했는데······ 차도영을 거절하셔서······ 더군다나 박지한 씨가 무척 긍정적이라 아무래도 좀······.”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의미는 파악 가능했다. 한녹영은 우선 심호흡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본을 살펴보기도 전에 회사 쪽에서 거절해버려서요. 뒤늦게 대본을 보고 꼭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작가님을 곤란하게 만들었네요. 그렇지만 꼭 하고 싶고, 저를 위한 역이라 생각합니다.”
대본을 몇 차례 정독하다보니 드라마로 봤을 때와 대본 상 차도영의 이미지가 조금 달랐다. 드라마에서 차도영은 약간 건들건들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대본상으로는 그게 느껴지지 않았다. 연기하는 사람에 따라 역의 이미지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 크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박지한이 차도영을 맡으면서 박지한에 맡게 대본을 약간 수정한 모양이었다.
한녹영은 물을 마셨다. 집을 나선 그 순간부터 목이 타고 입안이 자꾸만 말랐다. 이런 초조함과 긴장감을 느껴본 것이 얼마만인지.
하지만 희망이 있는 것 같다. 저를 모델로 대본을 썼다니, 제가 차도영을 맡을 확률이 커졌다. 신인 작가라곤 하지만 어쨌든 대본을 쓴 당사자다. 캐스팅에 어느 정도는 힘을 행사할 수 있을 거다. 실제 도망자가 끝난 이후 박지한이 한 인터뷰에서 ‘절 밀어준 작가님께 감사한다.’ 고 한 적이 있었다. 그건 즉 인지도가 크게 없어 제작사 쪽에서 난색을 표한 박지한을 작가 김현영이 밀어 캐스팅을 성사시켰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걸 생각하면 캐스팅에 예상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었다.
“저도 한녹영씨가 맡아주면 좋겠지만요,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라서요.”
김현영은 한녹영을 띄워주면서도 조심성 있게 한 발 물러섰다.
“당연히 제작사와 논의하셔야죠. 그렇지만 작가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가만히 테이블만 내려다보던 김현영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녹영이 빙긋 웃었고, 그녀의 얼굴에 또 홍조가 피었다.
“정말 차도영을 하고 싶으세요?”
“네. 대본을 읽자마자 반했습니다.”
“완전 주연도 아닌데.”
“물론 저도 사람이니 주연 욕심이 넘치지만, 도망자에서 제 역은 차도영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진심으로요. 그리고 대본 너무 재밌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엄청난 내공이 느껴지던데요.”
대본을 칭찬하자 내내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던 김현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곧 신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제가 추리물, 수사물, 이런 걸 엄청 좋아해서요. 작가 데뷔하기 훨씬 전부터 자료 조사를 시작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차도영 캐릭터 잡기가 제일 힘들었는데, 한녹영씨 보고 이미지가 잡혀서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간 되게 스윗한 이미지였지만, 반대로 까칠하고 약간 한량 같은 그런 이미지로 바꿔보면 재밌겠다 싶었거든요. 대본은 6회까지 나왔지만 현재 5-6회 수정 중이예요. 음, 여건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빠르면 다음 달부터 바로 촬영 예정인데 괜찮으시겠어요?”
한녹영이 박상호를 보았다. 박상호는 서둘러 품에서 수첩을 꺼내 한녹영의 스케줄을 확인하더니 얼마든지 조율 가능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날라리긴 해도 형사라 액션신도 많은데······ 지금은 너무 연약해 보이시네요. 그간 살이 많이 빠지셨나 봐요. TV에서보다 너무 마르셨어요.”
프로의 눈으로 한녹영을 살핀 김현영의 말이었다. 그녀는 대꼬챙이처럼 마른 한녹영의 몸을 보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현재 한녹영의 몸은 형사 역할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간 제가 좀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거든요. 오늘부터 운동 들어갔습니다. 곧 트레이너와 함께 몸을 만들 거고요, 액션 스쿨도 알아뒀습니다. 물론 검도 도장도요.”
살짝 덧붙인 말에 김현영이 웃었다. 대본 상 차도영의 주특기가 바로 검도이다.
검도 도장을 알아봤다는 말이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난처함이 더 많았던 얼굴이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5kg은 찌우셔야 할 것 같은데.”
“문제없습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제가 이른바 물만 먹어도 찌는 체질이거든요.”
한녹영의 너스레에 김현영이 환하게 웃었다.
“사실 제가 차도영에 한녹영씨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을 때 제작사 쪽에서 난색을 표했거든요. 이미지와는 달리 한녹영씨 성격이 좀 많이······ 그러니까 까칠하다고요.”
까칠하다 정도로 순화해서 말하곤 있지만 아마 실제 들은 말은 ‘한녹영 개차반이다. 예의도 없고, 성격 드럽다. 완전 인간 망종이다.’ 이런 류였을 테지. 앞에 나무토막처럼 앉아 대화를 듣기만 하던 박상호가 흠칫해 한녹영의 눈치를 살폈다. 한녹영은 그저 웃었다.
“제가 좀 예민하고 까칠한 구석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차도영에 맞지 않을까요?”
“회사와 얘기해볼게요. 잠깐 실례할게요.”
김현영은 한녹영에게 양해를 구한 후 휴대전화를 들고 룸을 나갔다. 한녹영은 컵에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컵이 비자 박상호가 다시 물을 가득 채워주며 물었다.
“잘 참는다?”
“뭐가?”
“네 입장에서 보면 김현영 작가는 네 발끝에도 못 미치는 신출내기잖아. 고작 단막 한 편 쓴 것뿐인 신출내기 주제에 캐스팅을 해주니 마니 하고 있으니 본래 성질 같으면 진작 상 다 엎고 뛰어나갔을 것 같아서.”
“상을 왜 엎어? 제발 날 써달라고 발밑에 엎드려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
박상호가 묘한 눈길로 한녹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부담스러울 만큼 빤히.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아무래도 너 한녹영 아닌 것 같아서. 너 솔직하게 말햅 너 한녹영 아니지? 한녹영의 껍질을 쓴 다른 무언가지?”
“뭐래는 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좀 떨어져. 입 냄새 나. 형 점심 먹고 양치질 안 했니? 마늘장아찌 잔뜩 먹어놓고 이도 안 닦다니 매너 아니다.”
박상호가 점심으로 선택한 메뉴는 무난한 백반이었다. 그의 단골 백반집에서 포장해왔는데 배추국과 고등어구이, 어묵볶음, 청포묵, 마늘장아찌와 낙지젓갈의 소박한 반찬들뿐이었지만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먹었다. 다만 마늘장아찌만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박상호가 맛있다며 그릇 가득 있었던 걸 다 먹은 것이다.
한녹영이 진저리를 치며 밀어내자 얼굴 껍질이라도 벗길 기세로 가까이 다가섰던 박상호가 금세 기죽어 멀어졌다. 그리곤 손을 입가에 대고 후후 입바람을 불더니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양치질 했는데.”
“제대로 안 한 거 아냐?”
“아니야. 제대로 했어. 내 나이가 몇인데 양치질 하나 제대로 못하겠냐?”
“제대로 못한 것 같은데. 그러니 지독한 마늘냄새가 나지.”
“지, 지독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야.”
“지독해. 입냄새도 제대로 지우지 못할 거면 먹지나 말든가. 사람 상대하는 일이 주된 업무인 사람이 그런 기본 매너 하나 제대로 못 지키냐. 형이 이렇게 기본 매너도 안 되어있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양치 세트 하나 사줄 테니까. 아니다. 양치질 하는 법에 대해 알려주는 유아용 교육 비디오 그런 거 없나? 알아봐. 사줄게.”
“닦았어, 닦았다니까. 빡빡. 위아래로 3분! 우아, 사람이 이런 별 거 아닌 일로 기막혀 죽을 수도 있구나. 그리고 너 한녹영 맞다. 사람을 이런 사소한 걸로 핑 돌게 만드는 걸 보니 한녹영이 확실해! 한녹영이 아닐 수가 없어!”
박상호가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을 때 통화를 끝낸 김현영이 돌아왔다.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한녹영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일단 박지한씨 쪽은 스탑해달라고 했어요. 거의 성사 직전이라 솔직히 매너가 아니지만 아직 계약서에 도장 찍은 건 아니니까요. 내일 한녹영씨 회사 쪽으로 다시 제의가 갈 거예요. 혹시 마음이 바뀌어 거절하면 진짜 곤란해요. 제작사에서 내켜하지 않는 걸 제가 한녹영씨 믿고 박박 우긴 거라······. 애초에 한녹영씨를 염두에 두고 쓴 역이 아니었으면 절대 이런 매너 없는 짓 안 했을 거예요. ”
막상 제작사에 우겨 차도영에 한녹영을 다시 밀어 넣고 나니 혹시 한녹영이 변덕을 부려 마음을 바꾸면 어쩌나 걱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한녹영 은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고맙습니다, 작가님. 제가 너무 차도영이 욕심나서 작가님께 매달린 겁니다. 마음 바뀔 일 없어요. 그리고 캐스팅 직전에 엎어지는 일이야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하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따지고 보면 박지한의 기회를 제가 뺏어오는 거라 미안하지만, 그만큼 차도영이 욕심났다.
“처음 제의했을 때 한녹영씨 회사에서 거절하면서······ 신은주 작가님 신작 주연으로 들어갈 거라고 했거든요. 누가 봐도 신은주 작가님은 까마득한 선배격인 대작가님이시고, 또 엄청난 인기 작가라 그쪽을 차고 제 걸 할 리 없다는 식으로 말해서 좀 걱정이 돼서 확인한 거니 오해하지 마세요.”
“제의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전 정말 차도영을 연기하고 싶습니다. 신은주 작가님 신작 시놉을 보긴 했지만, 도망자가 몇 배는 더 끌렸습니다. 이거 우리끼리 비밀로 해야 하는 발언인 거 아시죠?”
한녹영이 목소리를 낮춰 엄청난 비밀 얘기를 하는 양 굴었고, 김현영은 수줍게 웃었다.
“저 정말 재밌게 쓸게요. 제 작품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이번 건 진짜 재밌을 거거든요. 제 대표작이 될 거라 자신합니다. 제 데뷔작이 단막이어서 미니는 힘들 거라는 말이 돌고 있는 것도 아는데요, 저 진짜진짜 자신 있어요. 얼마나 오래 준비한 건데요.”
“저도 알아요.”
“네?”
“작가님을 믿는다고요.”
또 다시 김현영의 양 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홍조였다. 어지간히도 속내를 못 숨기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한녹영이 웃었을 때, 드디어 음식이 들어왔다. 줄줄이 들어오는 음식에 김현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많이 드세요, 작가님.”
“네. 고맙습니다. 한녹영씨도 많이 드세요.”
한녹영과 박상호, 김현영이 식사를 시작했다. 워낙 가짓수가 많아 한 젓가락씩 맛만 봤을 뿐인데도 배가 불러온다. 한녹영은 적당히 배가 차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물을 자주 마셨고, 김현영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자주 물을 마셨더니 요기가 느껴졌다. 양해를 구한 한녹영이 룸을 나왔다.
볼일을 보려고 막 화장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한녹영의 입에서 아,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면대 앞에서 강준일이 손을 씻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나지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강준일의 미간이 가늘어졌다.
“우연입니다!”
한녹영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
“맹세코 우연입니다!”
또 오해할까 싶어 얼른 우연이라고 말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다음에 들어갈 작품 때문에 작가님을 만나려고 온 겁니다. 저는 국화실에 있으니 믿기지 않으시면 와서 확인해 보셔도 무방합니다.”
왜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또 남창 취급을 받긴 싫어 앞서서 변명했다. 강준일은 한녹영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 별 거 아닌 동작인데 뭐라고 할까. 우아해 보인다고 할까 고상해 보인다고 할까. 하여간 그랬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잠깐 손끝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손의 물기를 전부 닦아낸 강준일이 한녹영 쪽으로 몸을 틀었다.
넋을 놓다시피 그의 손을 보고 있던 한녹영이 순간 움찔했다.
“누가 뭐라고 했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해하실 것 같아서요.”
“오해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그럼 다행이고요.”
“물론 오해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도 없고.”
한녹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오해했다는 거야. 안 했다는 거야. 저 찜찜한 대답은 대체 뭔지. 불만이 떠오른 얼굴을 본 강준일이 입끝을 올리며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리곤 휙 돌아서서 화장실을 나갔다. 한녹영은 강준일의 성격만큼이나 차갑게 닫히는 화장실 문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거렸다.
그나저나 왜 자꾸 만나지고 난리야. 전에 강준일을 만나라는 임무를 받았을 땐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더니. 어디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준비해 달려가면 이미 그는 다른 장소로 이동한 후였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는 소리에 달려가면 대체 안에서 무슨 얘기를 그리도 길게 하는지 몇 시간씩 나오지 않아 결국 지친 한녹영이 포기하고 돌아온 적도 많았다.
그렇게 어렵게 만나 우연인 척 다가가 반해서 개인적인 연을 맺고 싶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가 남창이면 남창답게 굴라는 말과 함께 냉대를 당했다. 솔직하게 나랑 자고 나와 회사를 밀어달라고 했으면 오케이 했으려나. 하지만 그러긴 싫었다. 강준일 말대로 몸을 팔러 간 것이면서 자존심은 있어 제 쪽에서 먼저 ‘나 너한테 몸 팔러 왔으니 살 생각 있습니까?’ 라고 하긴 싫었다고 할까. 문득 든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이젠 강준일 쪽에서 먼저 스폰해줄 테니 다리를 벌리라고 제의해 와도 거절할 거지만. 그렇게 해서 인기를 얻고 톱스타가 되어봤자 미약한 바람에도 허물어질 허약한 모래성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부터는 그냥······ 차근차근 올라가고 싶었다. 인기에 목매지 않고, 무조건 주연에 집착하지 않으며, 진짜 하고 싶은 역, 할 수 있는 역을 최선을 다해 연기하면서 참 배우가 되고 싶었다. 인기와 돈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겠지만.
‘뭐 더 이상은 만날 일 없겠지. 엄청 공사다망하고 무지하게 바쁜 사람 같던데.’
저와 같은 헬스장을 이용하지만 시간대가 겹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새벽에 주로 운동하러 오는 모양이니 그 시간만 피하면 되겠지. 트레이너와 함께 운동하게 되면 새벽에 운동하러 갈 일도 없다.
한녹영은 강준일에 대한 생각을 접고 볼일을 본 후 국화실로 돌아갔다. 그 사이 식사가 거의 끝났는지 수저를 내려놓은 김현영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박상호의 밥그릇도 텅 빈 상태였다. 한녹영은 곧 사람을 불러 상을 내가도록 했다. 식후 디저트로는 과일과 수정과가 나왔다. 살얼음이 살짝 떠 있는 수정과는 과하게 달지 않아 한녹영의 입맛에 맞았다. 그래서 한 잔을 더 청해 마시며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0시였다. 시간을 확인한 한녹영이 놀랐다.
“제가 작가님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봅니다.”
“아니에요. 저 한녹영씨랑 얘기하면서 진짜 놀랐어요. 제가 생각한 차도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셔서요.”
한녹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야 당연하다. 도망자를 몇 번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보는 동안 ‘내가 차도영을 했어야 해.’ 하고 생각하며 캐릭터를 분석하고, 제 나름대로 연기해보기도 했다.
넌 자질이 있어, 분명 스타가 될 거다. 장현재의 말에 생각조차 않았던 배우의 길로 접어든 이후 처음으로 배역 욕심이 났다. 장현재 말대로 연기에 재능이 있었는지 연기 지도 선생님들로부터 칭찬도 자주 받았고, 맡은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했지만 이건 나밖에 할 수 없다, 이건 딱 내 역이다 하는 역은 없었다. 그저 장현재가 하라고 한 거라서, 이걸 하면 뜰 것 같아서 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 제가 맡은 역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차도영을 본 이후 욕심이 생겼다. 미치게 그 역을 하고 싶었다. 진짜 배우에 눈을 뜬 날이 도망자를 몰아보던 날이 아닌가 싶다. 15편이나 되는 드라마를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흡사 광기서린 사람처럼 봤으니까.
그때라도 정신을 차리고 진짜 연기를 하려고 했어야 했는데. 직접 대본과 시나리오를 살펴보고 하고 싶은 역,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역을 찾았어야 했는데. 연기에 대한 욕심을 접어둔 채 또 바보처럼 장현재의 말에 따라 영화를 찍었다가 폭삭 망하고 말았다.
그땐 어쩔 수 없었지. 장현재는 제 인생에 절대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차도영 역을 맡고 싶어서 대본 진짜 열심히 봤다니까요.”
“영광이에요.”
대본이 너무 좋다, 한녹영씨가 좋게 봐주니 영광이고 고맙다,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박상호가 계산을 끝내고 나오길 기다리며 한녹영이 말했다.
“댁이 어디세요? 모셔다 드릴게요.”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 보내기 좀 그랬다. 예전 같으면 밤 10시가 아니라 새벽 3시였더라도 아랑곳 않았겠지만.
“아니요. 괜찮아요. 택시 타면 돼요.”
김현영이 펄쩍 뛰다시피 손을 내저었다.
“늦은 밤에 여성분을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댁이 어디세요?”
“저희 집 구파발이에요. 한녹영씨는 청담 사시죠? 저 데려다주고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 그냥 가세요. 전 진짜 택시 타면 된다니까요.”
“모셔다 드릴게요.”
“제가 진짜 불편해서 그래요. 그러지 말고 그냥 가세요.”
실랑이를 하는 동안 박상호가 나왔다.
“형 김 작가님 모셔다 드려. 난 택시 타고 들어갈 테니까.”
“네에?! 말도 안 돼요. 한녹영씨가 왜 택시를 타요? 제가 택시 타면 된다니까요.”
“김 작가님 택시 태워 보내자니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기왕 어느 한 명이 택시를 타야 한다면 여성보다는 남자인 제가 나을 테니까요.”
“전 일반인이고, 한녹영씨는 얼굴이 알려진 스타잖아요. 당연히 제가 택시를 타야죠.”
한녹영은 끝까지 절대 택시 태워 보낼 순 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김현영 역시 불편해서 싫으니 혼자 택시 타고 가겠다며 버텼으며, 박상호는 친절을 베푸는 한녹영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짖고 있잇다.
“한녹영은 내가 데려다주도록 하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슥 마치 환영처럼 나타났다. 한녹영, 김현영, 박상호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둠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강준일이었다. 박상호가 어라, 하고 쇳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김현영은 강준일이 누군지 모르는지 어리둥절해했고, 한녹영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데, 데려다 준다고? 누굴? 날? 한녹영이 고장 난 장난감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내 차 앞을 가로막은 채 계속 같은 문제로 실랑이 중이던데, 내가 한녹영을 데려다주고 그쪽······ 매니저인 것 같은데. 아무튼 그쪽이 여성분을 데려다주면 문제 해결이군.”
깔끔하게 해결이지. 이런 뉘앙스로 말한 강준일이 당황해서 굳어있는 한녹영을 강제로 잡아끌다시피 하며 걷기 시작했다. 얼결에 끌려가 얼렁뚱땅 강준일의 차에 올라타고 난 이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 내려야 하는데. 어리버리하게 어어 하는 사이 차가 출발했다.
“벨트 매.”
얼간이처럼 입을 벌리고 있던 한녹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하니 박상호였다.
“어, 형. 나도 모르겠어. 나중에 집에서 얘기해. 김 작가님 잘 모셔다드리고. 알았어. 끊어.”
전화를 받자마자 박상호는 아까 그 사람 강준일 대표 맞지, 어떻게 된 거냐, 둘이 무슨 썸씽이라도 있었냐, 시시콜콜 캐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제가 왜 강준일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멀뚱하게 앉아있게 된 건지 가장 영문을 모르겠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한녹영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후 힐끔힐끔 강준일의 눈치를 살폈다.
“할 말 있으면 해. 기분 나쁘게 힐끔대지 말고.”
“암만 생각해도 왜 제가 강 대표님 차에 앉아있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어서요. 왜 절 데려다준다고 한 겁니까?”
“세 사람이 내 차 앞을 가로막은 채 실랑이를 하고 있어서.”
“비켜달라고 했으면 간단히 해결되었을 텐데요.”
“같은 동네 주민이라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두지.”
“청담 사십니까?”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제가 대표님 사시는 곳을 어떻게 압니까?”
“내 스폰을 바라고 다가오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그들 모두 내 신상에 대해 꿰고 있더군. 사는 곳, 취미, 하다못해 성적 취향까지.”
서, 성적 취향. 딱 한 번뿐이었던 강준일과의 섹스가 떠오른다. 약간 가학적인 성향이 있는지 사정하고 싶어 바르작대는 제 몸을 짓누르며 앞을 마, 막았었다. 그러면서 굵직한 물건으로 제 몸 속 깊은 곳을 찔러······. 미쳤군. 한녹영. 대체 왜 자꾸 엄한 장면을 떠올리고 난리야. 그리 좋은 의도로 한 섹스도 아니었으면서, 마치 일생의 최고 순간이라도 되는 양 자꾸 떠올리는 스스로가 참 어이없다.
“설마 넌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죠. 그 설마가 맞습니다. 전 그냥 대표님이 여자보다는 남자 취향이고, 대체로 나처럼 예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
“본인 입으로 예쁘다고 하다니 민망하지도 않나?”
“예쁜 건 사실이니까요. 여자보다 예쁜 남자. 중성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신예. 천상의 미모. 달콤한 초콜릿 같은 남자. 얼굴로 뜬 스타. 전부 제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잖아요.”
남 얘기처럼 덤덤하게 말하는 한녹영을 보며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앞으로 누군가의 스폰을 바라고 접근할 일이 있으면 그에 맞는 성의부터 갖추도록 해. 고작 그 정도 정보로 내게 접근했다니, 이제껏 내게 접근한 이들 중 가장 성의가 없었을 거다.”
어이없다는 투였다. 한녹영이 민망하게 볼을 긁적거렸다.
“덕분에 까였잖아요. 그리고 새벽에도 말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까여서 잘 됐다고 생각해요. 만약 대표님이 저 안 깠으면 지금쯤 잠자리를 하는 사이가 되었을 텐데, 그건 좀 그렇잖아요.”
“뭐가 그렇다는 거지?”
“음······ 최근 내게 심경의 변화가 생겼거든요. 몸로비를 한 적은 없지만 해야 하면 할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던 쪽에서 ‘몸로비는 사절, 늦더라도 내 힘으로 톱이 되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고 할까요. 나도 남자라 쾌락을 위해 섹스 할 수도 있겠지만, 즐기기 위한 잠자리 상대는 기왕이면 취향이면 좋겠거든요. 그런데 만약 그때 대표님이 날 까지 않아 지금 우리가 잠자리를 하고 있다면 상대적으로 약자인 내 입장에서 먼저 그만두자고 할 수도 없을 테고······.”
조잘조잘, 말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냥 말을 이어가던 한녹영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운 강준일이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예 몸까지 조수석 쪽으로 튼 채였다. 한녹영이 입을 다물자 강준일이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그만두자고 할 수도 없을 테고 그 뒤는 뭐지? 취향도 아닌 나와 잠자리를 이어가자니 고역일 거다, 그런 뜻인가?”
한녹영은 침묵했다. 심장까지 차가울 듯 냉한 사람은 취향이 아니지만, 비록 정신을 잃은 상태이긴 했어도 강준일과의 섹스를 기억하고 있는 탓에 선뜻 ‘네. 잠자리에서도 차가울 것 같아 별로에요.’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강준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면을 벗으니 본래 성격이 드러나는 모양이군. 달콤하고 부드러운 성격? 어디가?”
강준일이 외부에 알려진 한녹영의 이미지를 언급하며 비웃었고, 한녹영은 민망함에 침묵했다. 과거로 돌아온 걸 알고 달라지자고 결심했지만 사실 배우가 되기 이전에도 그리 보드라운 성격은 아니었다.
“······.”
“내 앞에서 그딴 식으로 막말을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대놓고 취향이 아니라니.”
이 정도를 막말이라고 생각하다니. 역시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다르네. 본인은 나한테 더한 막말을 해놓고. 남창이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하지 않았나. 저야말로 그런 막말은 처음이었다. 데뷔 전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힘들게 살 때도 남창이라는 표현은 못 들어봤다.
“그럼 이제 나한테 반하겠네요.”
내 뺨을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반했어. 뭐 이런 류의 오래 전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유머가 생각나 던져본 말에 강준일이 미친 사람 보듯 한녹영을 보았다. 유머로 한 말인데. 피식 웃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미친놈 보듯 하는 적나라한 시선에 머쓱해졌다.
“신호······ 바뀌었어요.”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한녹영에게서 시선을 거둔 강준일이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을 시작했다.
“근데······ 대표님은 제가 청담에 사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생각해 보니 의아했다.
“새벽 우리가 만난 곳이 어디지?”
“헬스장이요.”
“그 새벽에 헬스장에서 만났으니 같은 동네에 살겠구나 생각한 거다. 설마 운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네가 운동을 하려고 그 새벽에 먼 동네의 헬스장까지 왔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아서.”
“아······ 난 또.”
“왜? 내가 너한테 반해서 뒷조사라도 했을까봐?”
아 진짜. 유머 한 번 잘못 쳤다가 꼼짝없이 이상한 사람 되게 생겼다. 강준일한테 제 이미지야 이미 바닥일 테지만 거기에 더 보태 망상에 빠져 사는 정신이상자 취급까지 받긴 싫었다.
“아까 한 말은 유머였고요. 그 정도로 망상에 빠져 살진 않습니다. 그저 좀 이상했을 뿐이에요. 새벽에 헬스장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사람을 누군가 발밑에 쏟아놓은 토사물처럼 취급하더니 느닷없이 데려다준다고 하고, 사는 곳도 알고 있고 해서요.”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한 말, 무슨 뜻이었지.”
혹시 그 말의 뜻이 궁금해서 데려다준다고 한 건가. 한녹영이 입술을 사려 물었다. 해줄 말이 없는데. 제가 2019년까지 살다 2016년 12월로 돌아왔습니다. 근데 제가 미래에서 술에 취한 강 대표님과 섹스 하는 장면을 촬영해 그걸로 협박했습니다, 라고 할 순 없지 않나. 그 동영상이 유출되어 전 완전히 몰락했고 대표님도 곤경에 처했습니다, 라고는 더더욱.
“그냥 말한 그대로인데요. 과음해서 좋을 건 없으니 좀 자제하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맥없는 핑계였다. 당연히 강준일이 실소했다.
“우리가 그런 조언을 주고받을 정도로 다정한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
“조언은 조언으로만 받아들이면 안 됩니까? 정말 아무 뜻 없이 한 말이거든요.”
“뭘 본 건 아니고?”
한녹영이 미간을 모았다. 방금 뭐라고? 뭘 본 건 아니냐고 한 건가? 무슨······ 의미지? 왠지 심장이 쿵쾅대 멍하니 강준일을 보다 뒤늦게 허둥지둥 물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뭘 본 건 아니냐니요?”
“외조모가 유명한 무당이었다고 되어 있던데.”
아, 그런 의미였나. 그나저나.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뭐야. 진짜 뒷조사라도 했나? ‘외할머니, 어머니 두 분 모두 무당이었어요.’ 라고 떠들 필요는 없어서 굳이 밝히지 않았다. 한녹영의 눈매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얼마 전 계열사 신차 광고 모델 후보로 너 역시 올라왔었지.”
그건 몰랐던 사실이다. 한녹영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최종 네 명의 후보들 중 한 명을 최종 선택하기 전 기본적인 뒷조사를 했거든. LK자동차의 사활을 걸고 나온 신차인데, 모델에게 스캔들이 터진다면 제품의 이미지까지 동반 하락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혹시 나중에라도 스캔들이 터질만한 일을 숨겨뒀는지 기본적인 조사를 했지.”
“그래서 내 뒷조사를 했고, 외가 쪽이 무당 집안이라 최종 탈락한 건가요?”
“그게 탈락의 이유가 될 순 없지.”
“그럼 왜?”
“자동차 CF를 하기엔 아직 급이 안 된다,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라 1차 탈락이었고, CF를 노리고 내게 접근한 것이 눈에 빤히 보여서 최종 탈락시켰지. 난 능력도 없이 백으로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부류를 가장 혐오해. 뭐 넌 뭐가 목적이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장 대표가 시키는 대로 한 모양이지만. 인형 노릇을 하더라도 생각이란 걸 하면서 하는 게 어때? 그래야 나중에 버려지더라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어?”
강준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긁으며 지나간다.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힌 듯 가슴이 욱신욱신했다. 하여간 매몰차긴. 좀 순화해서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아무래도 강준일은 입에 칼을 물고 사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차가워서야, 곁에 있다간 일주일도 안 돼서 얼어 죽을 거다.
“버려질 때를 왜 생각해야 합니까?”
기분이 상한 한녹영이 싸늘하게 대꾸하자 강준일이 한쪽 입매를 비웃듯 끌어올렸다.
“장 대표가 널 끝까지 데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
“······.”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생각할 머리가 없으면 귀라도 열어놓고 살아. 그럼 장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테니까.”
한녹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간 장현재의 일이라면 귀를 틀어막고, 눈까지 가린 채 살아온 건 사실이지만······. 제가 황산 테러를 당해 병실에 누워있을 때 찾아온 장현재의 말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방금 강준일이 암시한 대로 제게 가치가 없어지자 장현재는 저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버렸다.
한녹영이 입을 다물자 차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준일은 운전에 집중했고, 한녹영은 창밖만 응시했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며 강준일을 보았다. 가뜩이나 우울해진 마음에 무거운 침묵까지 더해지니 못 견디겠는 기분이 든 것이다. 더더군다나 옆에 강준일을 두고 무거운 침묵이라니.
“운전을 직접 하시네요.”
한녹영이 침묵을 깼다.
“퇴근 이후 사적인 일에는 가능하면 기사를 대동하지 않지. 술자리에는 어쩔 수 없이 대동하지만.”
“아까 ‘정’에서는 누굴 만나셨던 건데요?”
“친구. 넌 작가를 만났다고 했던가.”
“네. 김현영이라고 신인작가예요. 두 번째 작품이고, 첫 미니인데 작품이 좋아서 함께 할 생각입니다.”
“넌 신은주 작가의 신작에 캐스팅 될 거란 소문이 돌던데. 도장만 안 찍었을 뿐 거의 확정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헛소문인가?”
“회사에서는 신 작가님 작품을 미는 모양인데, 전 김현영 작가의 작품에 출연할 생각입니다.”
“장현재 대표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렇긴 할 테지만······ 연기하는 사람은 저니까요. 배역을 선택할 권리도 제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뭐 인형은 스스로 배역 선택할 능력도 없을 것 같아서요?”
가시 돋친 말에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그 성깔 장현재 앞에선 어떻게 숨기고 살았던 거지? 만만치 않은 성격 같은데, 그런 성깔을 휘어잡은 채 널 꼭두각시마냥 조종한 장현재가 정말 대단하긴 한 모양이군.”
“그 꼭두각시 이제 폐업입니다.”
“······?”
“이제부터라도······ 줄을 한 개씩 끊어보려고요.”
장현재의 손끝에 매달린 줄을 한 개씩 끊어 홀로서기를 해볼 참이었다. 이런 얘길 왜 하필이면 강준일 앞에서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진심인가?”
“네. 쉽진 않겠지만 해볼 생각입니다.”
그건 강준일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에 더 가까웠다. 그걸 느낀 건지 강준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정확한 집주소가 어떻게 되지?”
“아, 여기서 좌회전 하면 됩니다. 로렌스빌이요.”
살고 있는 빌라의 이름을 대자 강준일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빌라의 위치를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차를 꺾어 골목 안으로 들어섰고, 곧 한녹영의 빌라 앞에 세웠다. 한녹영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냥 서둘러 벨트를 풀었다. 그리곤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데려다줘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고 차문을 닫았다. 강준일의 차는 미련 없이 빌라 앞을 떠났다. 한녹영도 가볍게 숨을 내쉰 후 몸을 틀었다.
박상호는 한녹영이 샤워를 하는 사이 들어왔다.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오자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가 득달같이 달려와 취조하듯 캐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야? 강준일 대표가 왜 널 데려다준 건데? 내가 모르는 둘 만의 사정이 있었던 거야? 전에 호되게 까였다고 하지 않았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며 한녹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러다 숨넘어가겠네.
“새벽에 운동 갔을 때 헬스장에서 만났어. 그래서 같은 동네란 거 알고 데려다준 거고.”
“단순히 같은 동네 주민이라고 데려다줬단 말이야?!”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어야해?”
“그런 건 아니지만.”
“뭘 기대하는 건데? 혹시 형도 내가 강준일 대표한테 몸로비하길 원해?”
“미쳤냐! 난 장 대표가 너한테 그런 일 시켰을 때 되게 마음에 안 들어 했던 사람이야.”
박상호가 펄쩍 뛰었다.
“그럼 왜 그래?”
“너무 이상해서. 너 강 대표한테 까이고 온 날 엄청난 모욕감을 느꼈다며 며칠 동안 히스테리 부렸잖아. 한손에 꼽힐 만큼 역대급 히스테리였어. 거기에서 유추해보자면······ 강 대표가 곱게 까진 않았을 것 같은데, 데려다준다니 이상하지 않냐?”
“아침에 만났을 때 또 유혹하려 온 건가 오해하길래 아니라고 했거든. 오해했던 것이 미안했나보지.”
“그런가? 그럼 다행이고.”
“다행일 건 또 뭔데?”
“······이런 말 넌 좋아하지 않겠지만, 사실 난 장 대표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 몸로비하고 스폰 받지 않아도 넌 충분히 톱스타 될 수 있어. 그건 내가 보증해. 물론 그 지랄맞은 성격만 좀 자제하면.”
“······.”
지랄맞은 성격이란 말에 한녹영이 눈을 가늘게 뜨자 박상호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왕 내친걸음, 이라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강준일 대표 물어서 스폰 받기 시작하면 장 대표는 분명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거란 말이야. 네가 장 대표 손에 쥐어진 장기 말도 아닌데, 장 대표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필요는 없는 거잖아. 너야 장 대표를 신처럼 생각하니 내 말이 고깝게 들릴 테지만. 어제부터 네가 한녹영인 듯 한녹영 아닌 한녹영 같아서 용기 내어 한 말이니 새겨들어. 역정 내지 말고.”
“역정 안 내.”
신경에 거슬리면 무조건 짜증부터 내고 보지만, 특히나 장현재에 관한 일이라면 발작하는 것처럼 히스테리를 부렸던 한녹영이었던 터라 돌아올 반응을 짐작하고 덤덤하게 기다리고 있던 박상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역정 안 낸다고? 다른 것도 아닌 장현재 대표를 씹었는데? 진짜 이상하네. 어제부터 한녹영은 딴 사람이 된 듯 이상한 점이 많았다.
단순한 변덕인 건가. 박상호가 한녹영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진짜 표정이 담담하다.
‘흠, 자다 벼락이라도 맞았나? 왜 저렇게 온순해진 거지?’
단순한 변덕인지 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변화가 나쁘진 않다. 박상호는 그저 지금의 저 모습이 꾸준히 유지되길 바랄 뿐이었다.
“내년 2월 초에 너 계약 끝나는 건 알지?”
여기까지 가면 진짜 나한테 대포알 떨어지는 거 아냐? 속으로 엄청 걱정되고 한녹영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처럼 느껴져 긴장되지만, 박상호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진짜로 한녹영에겐 재능도 있었다. 연기에 대한 재능도 그렇지만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아우라? 라고 해야 하나. 시선을 끄는 재능? 하여간 그런 게 있었다. 그래서 굳이 몸을 팔아 뒷배를 얻지 않아도 얼마든지 지금보다 훨씬 많이 클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그 때문에 오만하고 교만한 성격에 살살 비위를 맞춰가며 매니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녹영보다 훨씬 더 안하무인에 개차반인 연예인도 제법 되어서 아직 이 정도면 그럭저럭 참아가며 매니저 노릇을 할 만 했다. 여기까지는 참자, 하고 정해 놓은 마지노선에 아직은 닿을랑 말랑 했던 것이다.
“아······ 그런가.”
한녹영이 꼭 남일처럼 멍하니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예전 저는 다른 기획사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장현재 또한 당연하다는 듯이 재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때 저는 계약 조항은 살펴보지도 않은 채 사인했고, 때문에 어떤 이유로든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할 시에 회사에 피해 보상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지도 몰랐다. 불행한 사고인데, 의도했던 것도 아닌데, 제가 피해자였는데,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장현재는 그 조항을 언급하며 한녹영에게 엄청난 피해 보상을 청구했다. 그간 제가 회사에 벌어다준 돈이 얼마인데 씁쓸하고 서글펐다. 동시에 저는 장현재에게 연인도,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대로 특별한 사람도 아닌 그저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생각할수록 저는 참 바보였다.
한녹영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역시 기분이 상했나?’ 하며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박상호가 주의를 환기하듯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한녹영이 시선을 들었다.
“뭐라고 했어?”
“못 들었냐? 난 또······. 내 말 듣고 발작 준비 중인가 했네. 이참에 회사를 옮기면 어떠냐고.”
“회사를?”
그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난제를 만나 당황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정답이 적힌 컨닝 페이퍼를 주운 기분이었다. 회사를 옮긴다? 나쁘지 않은 말이다. 솔깃했다.
“어, 네가 프리해지면 러브콜 보내올 데 많을 걸? 너 정도 급의 배우가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으면 지금쯤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와야 정상인데, 너랑 장 대표의 소문이 워낙 거시기해서 잠잠한 모양이야. 그러니까 재계약 하지 말고 회사를 나가 봐. 그럼 반응이 즉각 올 테니까.”
“내가 회사 나오면······ 형도 같이 나올래?”
“어?”
“내 비위 형만큼 잘 맞춰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쩔래? 같이 나올래?”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나? 박상호는 한참 대답을 못하고 어버버대기만 했다.
“뭐야? 갑자기 실어증이라도 걸렸어? 왜 어버버대?”
“지, 진짜냐?”
“뭐가?”
“진짜 나하고 같이 가고 싶어?”
“어. 나한테 형만큼 편한 사람이 어딨어? 다른 데 가게 되면 형이랑 같이 가는 조건으로 갈 거고, 아니면 형이 회사를 차려도 좋고. 내가 소속 배우 해 줄게.”
장한경을 키우기 위해 회사를 차렸던 것처럼 말이다. 박상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혹은 귀신이라도 본 듯 한녹영을 보더니 이내 감격에 차 끌어안을 듯이 다가왔다.
“녹영아!”
“대답이나 해.”
“그래. 같이 가자. 네가 원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같이 갈게.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하여간 단순하다. 비위를 잘 맞춰준다. 편하다. 그 말을 까맣게 까먹고 같이 가자는 말에 감격해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좋아하다니 말이다. 한녹영은 진짜 울먹이고 있는 박상호를 보며 웃었다.
잘해줘야지. 저렇게 단순한 사람이 제게 학을 떼며 돌아섰을 정도로 독한 짓 따윈 하지 말아야지.
“난 그만 자야겠다. 내일 회사에 싸우러 가자면 푹 자서 기운 충전해야지.”
“어, 얼른 들어가서 자라. 잘 자.”
한녹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로 향했다. 그리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루가 유난히도 길었던 탓인지 잠은 곧장 쏟아졌다.
다음 날 한녹영은 회사를 찾아갔고, 도망자의 차도영을 맡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그건 곤란해.”
하영택 실장이 반대하고 나섰다.
“뭐가 곤란하다는 겁니까?”
“대표님께서 이미 녹영이 네 다음 작품은 신은주 작가 작품으로 결정해뒀어. 아직 대본은 나오지 않았지만 시놉 보니 괜찮아. 잘 빠질 것 같아.”
한녹영이 입매를 비틀었다. 잘 빠지긴. 쉬어빠진 시루떡처럼 아주 처잠하게 망가지는데.
“아니요. 전 차도영을 하겠습니다.”
“녹영아, 내 말 못 들었어? 대표님이 결정해뒀다니까.”
하영택이 장현재를 거론하며 재차 말했지만, 한녹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실장님이야말로 귀 멀었어요? 아님 이해력이 떨어집니까? 내가 싫다고 하잖아요. 난 차도영을 하겠다고요. 신 작가님 신작은 다른 배우한테 넘겨요. 똑똑히 알아둬요. 난 절대 신 작가님 신작에 사인하지 않을 겁니다.”
한녹영은 강경하게 제 의견을 말했다. 하영택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평소 같으면 ‘대표님 지시다.’ 라는 말 한 마디에 잘 훈련된 개처럼 굴던 한녹영이 반발하자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한녹영이 스스로 장현재의 개가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다 했을 뿐, 계약서 상에는 ‘배우가 원하지 않는 배역을 강요하지 않는다.’ 라는 조항이 있었다. 어느 정도 배역 선택에 자유를 준 것이다. 하지만 한녹영은 그 자유를 써먹은 적이 없었고, 회사의 직원들 또한 그걸 당연시했다.
“대체 왜 평소에 안 하던 고집을 부리고 그래? 더군다나 다른 것도 아니고 뭐 도망자? 그거 신은주 작가와 같은 시간대에 편성된 거 몰라? 미니가 처음인 신인 작가에 제작사도 그저 그렇고 심지어 주연도 아니잖아? 딱 봐도 견적 나오는데 왜 굳이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가려고 해? 신 작가 쪽과는 얘기 다 끝났어. 네가 도장만 찍으면 돼.”
하영택은 얼음처럼 굴고 있는 한녹영을 부드러운 어조로 살살 구슬렸다.
“내가 신 작가 직접 만나서 내 입으로 절대 안 한다고 얘기할까요?”
내 입으로 거절하면 절대 좋게 안 끝날 텐데, 그런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평소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대표님 지금 출장 중이야. 가시면서 나한테 개런티 협상 잘 하라고 했고, 지금 하는 중인데 이제껏 중 최고 금액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지 말고 마음 바꿔서 대표님 돌아오시면 기분 좋게 도장 찍자. 응?”
“도망자 출연 계약서라면 춤이라도 추면서 도장 쾅쾅 찍어줄게요.”
“왜 하필이면 도망자야? 신 작가 신작이 정 싫으면 다른 걸 찾아보자. 대표님한테 내가 얘기 잘 할게.”
어떻게든 구슬리려는 태도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이봐요, 하 실장님! 내가 차도영을 하고 싶다고 하잖아! 진짜 말귀 못 알아 먹네. 그렇게 신 작가 드라마가 아까우면 하 실장 당신이 직접 출연하던가! 내가 신 작가 앞에서 개지랄 떠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해.”
꼭 평소처럼 막말을 해야 알아듣는 건가. 한녹영이 짜증을 부리자 하영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쩐지 평소답지 않게 얌전히 굴더라. 이래야 한녹영이지.’
그렇게 생각한 하영택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리곤 잔뜩 짜증이 난 얼굴의 한녹영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그간 건방지게 굴었던 한녹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언젠가 한 번은 물 먹이고 말겠다고 새각하던 차였다. 저 지랄 같은 성격을 감당할 사람은 장현재 대표뿐이라 고집부리는 한녹영에 맞서 싸울 수도 없지만, 이번에는 싸울 마음도 없었다. 이번 참에 너 제대로 물먹어봐라. 도망자라니. 가당치도 않게. 속으로 잔뜩 비웃은 순간 한녹영이 말했다.
“내가 차도영을 맡아서 말아먹든 구렁텅이에 빠지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신 작가 쪽은 거절해요.”
“대표님이 아시면 실망하실 거다.”
“그래도 할 수 없죠. 배우로서 맡고 싶은 역을 욕심내느라 그런 거니까 대표님도 이해하실 거라 믿을 수밖에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계약에도 지장 있어.”
“대표님 귀국하면 하 실장님이 나와 재계약 안할 거라고 말했다고 전하죠.”
“좋아. 차도영 해. 대신 네가 말한 대로 책임 또한 네가 지는 거다.”
한녹영은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그리곤 일어섰다.
“나 돈 많이 필요 없으니까 괜히 출연료 협상한답시고 일 망치지 마세요. 난 무조건 차도영을 해야 해요.”
“알았다. 저쪽에서 얼마를 제시하든 제시하는 대로 받아들인다고 하지.”
스스로 불구덩이를 향해 걸어가는 미친놈을 보듯 보며 하영택이 입매를 비틀었다. 한심한 새끼. 지가 언제부터 직접 배역을 골랐다고. 보는 눈도 없는 새끼가. 하영택이 속으로 한녹영을 비웃었다.
“저쪽에서 연락 오면 무조건 한다고 하고, 도장 찍을 날짜 잡아요.”
싸늘해진 하영택의 눈동자에서 그의 마음이 읽혔지만 한녹영은 코웃음을 치는 그를 뒤로 한 채 조용히 바깥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한바탕 언쟁을 벌이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박상호가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듯 긴 숨을 내뱉었다.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받아들이네?”
“도망자가 반드시 망할 거라고 생각하고 이걸 약점으로 삼을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아까 나 보는 눈 못 봤어? 너 어디 두고 보자, 딱 그런 눈이었잖아.”
“그렇긴 하더라. 이제 여기 나가면 하 실장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박상호가 뒤를 돌아 하영택이 있는 회의실의 문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였다. 한녹영은 유치한 그의 행동에 자그맣게 웃었다. 박상호가 왜 이를 벅벅 가는지 안다.
하영택은 잘 나가는 소속 연예인들에겐 비굴하다 싶을 만큼 살살 기지만, 상대적으로 만만한 밑의 직원들에겐 오만 진상 짓을 다 한다. 여직원들 성희롱이나 성추행도 하고, 로드 매니저들 중에는 하영택에게 숱하게 두들겨 맞은 이도 있는 것 같았다. 가끔 한울 기획사 실장이라는 직함을 이용해 연예인 지망생들 등도 치고 다니는 모양이지만, 여지껏 회사에 붙어있는 이유는 그가 장현재의 외가 쪽 친척이기 때문이었다. 기획사를 차린 장현재가 회사로 데려오기 전에는 주먹으로 먹고살던 깡패였다고 들었다.
“형도 하 실장한테 당한 적 있어?”
“한울에 들어온 초기에. 어찌나 갑질을 해대던지. 아주 더러운 새끼야. 그나저나 장 대표 귀국하면 분명 안 좋아할 텐데, 너 진짜 괜찮겠냐? 장 대표는 제 말 거역하는 사람 안 좋아해. 그리고 넌 장 대표 눈 밖에 나는 걸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했잖아.”
그랬다. 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영택에겐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 장현재의 귀국 이후를 생각하니 손끝이 떨렸다. 이제 그에 대한 마음을 접자. 그를 벗어나야 제대로 살 수 있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지만 지난 수년 오로지 장현재만 보며 살아왔다. 그가 제겐 신이었다. 그런데 다짐 한 번에 단번에 돌아설 수 있을지 무섭고 걱정되었다. 장현재를 보면 또 다시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한녹영이 쓴 표정으로 주차장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며칠 전에 형이 심장병 어린이 돕기 바자회가 있는데 혹시 물품 기부할 생각 없느냐고 물었지?”
“물었지. 물었다가 너한테 욕만 먹었지.”
박상호가 원망조로 말했다. 그리곤 드레스룸에 가득한 옷들 중 몇 벌만 추려주면 될 일을 갖고 지랄지랄을 떨었지, 하고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아직 기부 가능해?”
그의 투덜거림을 다 들었지만 못 들은 척 한 한녹영이 물었다.
“어?”
“못 들었어? 기부 가능하냐고.”
“어? 어. 바자회 날짜가 남았으니 아직 가능할 거야. 옷 기부할 생각 있어?”
“있으니 물었지. 연락해봐. 아직 가능한지. 가능하다고 하면 내 물건 몇 개 추려 줄 테니까 보내.”
“알았어, 잠깐 기다려봐.”
박상호가 부랴부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녹영이 또 변덕을 부리기 전 일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두르는 것이다.
“그쪽에서는 지금이라도 보내주면 아주 감사히 받겠대. 다만 내일 팸플릿 인쇄 들어갈 예정이니 보낼 물건은 오늘 중으로 목록이라도 알려주면 좋겠대.”
“알았어. 집에 가자마자 물건 추려줄게.”
“어. 어서 타. 이거 꽤 큰 바자 행사라 네 이미지에도 도움될 거다.”
박상호가 잔뜩 신나서 떠들었다. 한녹영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박상호가 문을 열어준 차안으로 올라탔다. 그리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한녹영이 망설임 없이 골라낸 건 정장 한 벌, 구두, 그리고 선글라스와 시계였다. 스냅백과 티셔츠도 몇 개 골랐다. 잘 안 신는 스니커즈도 몇 개 뺐다. 팔찌와 반지 같은 액세서리도 몇 개 넣었다.
“이렇게 보내.”
“이걸 다?”
소소한 물품 몇 개 보내고 생색이나 내진 않을까 조바심을 쳤던 박상호가 품에 한아름 물건을 안고 나오는 한녹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전부 다. 전부 잘 착용하지 않는 거니까.”
“이것들 전부 비싼 거······ 야! 너 이, 이, 이건 장 대표가 선물한 거잖아!”
정장과 구두, 그리고 시계는 작년 봄 장현재로부터 선물 받은 거라 그간 한녹영이 목숨보다 더 애지중지 하던 것들이었다. 옷, 시계, 구두를 합친 가격이 무려 일억 가까이 되는 눈 튀어나오게 비싼 것들이라 받아드는 박상호의 손이 덜덜덜 떨렸다.
“어. 현재 형한테 선물 받은 것들이야.”
“지, 지, 진짜 이걸 바지회에 내놓겠다고? 장 대표 선물인 걸 떠나서 눈 튀어나오게 비싼 이것들을!”
“어.”
“너 미쳤냐!”
박상호가 기어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수전증 환자 마냥.
“어. 나 좀 미친 거 같아.”
제 목숨처럼 아끼던 것들을 내놓다니. 박상호 품에 안긴 물건들을 바라보는 눈길에 미련과 집착이 뚝뚝 떨어졌다. 한녹영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은 쉽게 버릴 수 없으니 우선 물건부터 버리자 싶어 한 행동인데,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드니 큰일이었다. 당장이라도 도로 뺏어오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지만 억지로 참았다. 이렇게 조금씩 장현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니 참자. 한녹영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 생각에도 너 좀 미친 것 같다. 병원가자. 내가 은밀하게 병원 수배해볼게.”
“내 병은 내가 알아서 다스릴 테니까 그거나 보내. 내 맘 바뀌어서 도로 뺏어오기 전에.”
“이거 다 명품이라 바자회에 내놓긴 아까워. 차라리 중고샵에 팔자. 팔아서 챙긴 돈으로 어디 단체 같은데 기부하는 편이 낫겠다.”
듣고 보니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냥 버리느니 팔아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 어차피 목적은 저것들을 제 손에서 떠나보내는 것이었으니.
“그럼 그렇게 하든가. 근데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팔아서 뒷주머니 챙기면 알지? 나한테 걸리는 순간 형은 죽은 목숨이야.”
한녹영이 으름장을 놓자 박상호가 기막혀했다.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린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너 날 뭘로 보는 거야! 영수증 챙겨서 확인시켜준다. 됐냐?!”
“응. 영수증 꼭 챙겨와.”
“의심도 많은 새끼! 오냐, 내가 꼭 영수증 챙겨온다.”
한녹영은 한껏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올라간 사람마냥 팔짝팔짝 뛰는 박상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난 대본 좀 볼 테니까 이따 트레이너와 약속한 시간에 불러.”
“알았다.”
어디선가 상자를 가져와 바자회에 보낼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으며 박상호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한녹영은 미련 없이 몸을 틀어 침실로 향했다. 그리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도망자 1회 대본부터 펼쳤다.
☆☆★☆☆
회사에 찾아가 무조건 차도영을 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날로부터 닷새가 흘렀다. 그 사이 한녹영은 브랜드 런칭 행사 참석, 지면광고 촬영, 딱 두 개의 공식 스케줄만 소화한 후 나머지 시간을 운동과 대본 읽는데 전부 투자했다. 검도도 시작했고,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감독이 차린 액션 스쿨도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가기로 했다. 촬영에 들어가면 액션 신에서 따로 지도를 받겠지만, 미리 배워둬서 나쁠 건 없었다.
이것저것 배우랴, 대본 보랴, 스케줄이 없어 한가한 시간인데도 몹시 바빴던 날들이었다.
“아까 하 실장한테 연락 왔는데 내일 도망자 쪽과 만나서 계약서 쓰기로 했다더라. 11시까지 회사로 오래.”
함께 저녁을 먹는 도중 박상호가 말했다. 한녹영은 노릇노릇 잘 구워진 삼치의 하얗고 두툼한 살점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로 데뷔한 이후 쭉 박상호가 한녹영의 매니저를 해왔고, 회사에서 마련해준 숙소에 살 때도, 한녹영이 그간 번 돈을 퍼부어 ㅡ 대출도 꽤 받아야했지만 ㅡ 이 빌라를 구입한 이후에도 함께 살았지만 이렇게 마주앉아 식사를 하게 된 건 며칠 안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녹영이 과거로 돌아온 이후부터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색해했던 박상호였지만 며칠 사이 적응이 되었는지 이젠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레 밥을 먹었다. 다이어트를 접고 박상호와 함께 마음껏 식사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그에겐 음식하는 재주도 있었다. 뭉툭하고 투박한 손으로 정갈한 음식을 잘도 만들어내는데, 먹을 때마다 신기하다.
“신기해.”
“뭐가?”
얼큰하게 끓인 소고기무국을 후루룩 떠마시며 박상호가 물었다.
“그 투박한 손끝에서 이런 음식들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신기해.”
“내가 말 안했나? 당연히 안했겠네. 너하고 사적인 얘기를 나눈 적이 없으니까. 암튼 지금은 나이가 드셔서 하던 일 모두 접고 고향으로 낙향하셨지만, 울 엄니가 오랫동안 백반집을 하셨거든. 나 초등학교 때부터 음식 장사를 하셔서 방학 때마다 도와드리며 어깨 너머로 배워뒀지. 이래봬도 내가 손끝이 야무져서 누나보다 손맛이 더 좋아.”
“형 어머니 살아계셨구나.”
“너 멀쩡한 남의 엄마를 마음속으로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었냐?”
박상호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다.
“그런 건 아니고······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네.”
“너랑 나랑 붙어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서운하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요새 네 정신이 살짝······ 좀 많이 풀어져서 가능해졌지만.”
“형이 내 매니저 된 이후 휴가 내는 걸 못 봤는데, 어머니 몇 년이나 못 뵌 거야?”
“형제들이 몽땅 서울 사니까 자식들 보고 싶으면 어머니가 올라오셔. 그럼 잠깐 가서 뵙고 왔지. 한수 있어서 몇 시간 정도는 자리 비울 수 있으니까.”
한수는 한녹영의 로드 매니저다. 지금은 스케줄이 별로 없어 회사 소속 다른 배우의 스태프로 지원나간 상태였다.
“도망자 촬영들어가기 전에는 한가하니까 어머니 계신다는 고향에 이삼일이라도 다녀오든지.”
정말 무신경했구나 싶다. 명절이건 휴일이건 밤이건 낮이건 어지간하면 제 곁을 비우지 않는 박상호를 당연하게 여겼으니 말이다. 박상호에게도 가족이 있고, 개인 생활이 있을 텐데 그걸 까먹은 채 그의 시간은 전부 제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이제야 정신이 좀 돌아와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자 또 한 번 마음이 안 좋아졌다. 정말 이기적으로 살았구나. 주변 사람들이 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오만하게 살았으니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달려와 도와준 이가 없었던 거겠지.
이제라도 주변을 돌아보며, 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도 살펴가며, 사람답게 살자.
“난 요새 너 볼 때마다 불안하다.”
휴가를 원한다면 주겠다는 말에 돌아온 반응이 좀 뜬금없었다.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왜? 뭐가? 나 요즘 되게 얌전한데.”
“그래서 불안해, 꼭 시한폭탄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거든. 저 자식 언제 터지나 싶어서 불안한지 귀에서 째깍째깍 하는 환청까지 종종 들린다니까?”
“내가 얌전하니 심심해? 형 심심하지 않게 주기적으로 발작해줘?”
수저를 내려놓은 한녹영이 눈을 부라리자 박상호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주기적인 발작을 바라는 건 아니고. 요즘 네 모습이 딱 마음에 들어서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불안하다는 거지. 혹시 변덕이 생겨 네 숨겨진 지랄맞음이 발작할 것 같거든 미리 경고나 해주라. 마음의 준비 좀 하게.”
“밥이나 마저 쳐드셔.”
“형님한테 쳐드셔가 뭐냐. 잡수셔요, 라고 해야지.”
이래서 사람은 확 풀어주면 안 된다니까. 금세 기가 살아서 저렇게 되니 말이다. 한녹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섰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저를 편하게 대하는 박상호의 태도가 싫진 않았다.
“그만 먹으려고?”
“응.”
트레이너가 지나친 과식이나 폭식은 하지 말되, 한식 위주로 골로루 잘 먹으라고 해 요즘 세 끼를 꼬박꼬박 한 공기씩 챙겨먹는 중이었다. 밥그릇이 일반 성인 남성의 그것이라고 보기엔 좀 작은 편이지만 반찬을 많이 먹다 보니 배불렀다.
“그래 그럼. 난 한 공기 더 먹어야겠다.”
“형 이미 두 공기 째 아니었어?”
밥솥으로 밥을 뜨러 가던 박상호가 움찔했다.
“그릇이 작잖아! 세 공기 먹어도 일반적인 성인 남성 밥그릇으로 치면 두 공기밖에 안 돼.”
함께 식사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 또 한가지 있다. 박상호는 생각보다 더 대식가였다. 끼니마다 기본 두 공기는 먹었다. 그것도 꽉꽉 눌러 담은 고봉밥으로.
“적당히 먹어, 가뜩이나 배가 올챙이인데. 바늘로 찌르면 터지겠어.”
불룩 튀어나온 박상호의 배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차자 그가 ‘저 싸가지 없는 놈.’ 라고 말하고 싶은듯 입매를 씰룩거렸다. 피식 웃은 한녹영이 거실로 나가려고 몸을 틀었을 때, 박상호가 “맞다.” 하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에 장 대표 귀국했다더라.”
한녹영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저도 모르게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래? 일정이 생각보다 많이 늦어졌네. 진작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그보다 내일 회사에 가면 마주칠 텐데······.”
박상호가 뒷말을 삼켰다.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한녹영도 알고 있다.
장 대표 만날 텐데 괜찮냐?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닌 다른 작품 하겠다고 고집 부려서 그 문제에 대해 책망할 텐데 정말 괜찮겠냐. 그렇게 묻고 싶겠지.
‘너 정말 괜찮냐? 한녹영?’
한녹영이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괜찮지 않다. 몇 년을 끌어온 감정이다. 몇 년간 오로지 그만을 바라기하며 살았다. 단 며칠 사이에 멀쩡해질 리 없었다.
“내일 운동은 아침 9시인 거 안 잊었지? 늦지 않게 깨워줘.”
“벌써 자려고?”
아직 8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설마 벌써 잠자리에 드나 싶어 박상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설마. 대본 보다 11시 넘어서 잘 거야.”
“벌써 몇 번째 보는 거냐? 아주 다 외웠겠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2회까지는 대본을 통째로 다 외웠어.”
“그런데도 또 본다고?”
“어. 볼수록 재밌고, 볼수록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우리 녹영이 이제 진짜 배우가 되어가는 모양이네.”
박상호가 대견하다는 듯 웃었고, 한녹영은 멋쩍은 얼굴을 한 채 대꾸도 않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에 둔 의자에 앉아 지난 며칠 사이 보고 또 봐 벌써 끝이 헤진 대본을 들려다말고 협탁 위를 노려보며 손끝을 깨물었다. 협탁 위에 휴대전화가 있다.
예전 같으면 귀국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쪼르르 전화를 걸었을 텐데.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집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한녹영은 힘겹게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뗐다.
대본이나 보자.
이미 수없이 봐 대사를 다 외우다시피 한 대본에 시선을 박고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는 정신이 다른데 팔려있어 건성으로 읽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차츰 집중력이 돌아왔다. 1시간쯤 지났을 때 한녹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대본에 푹 빠져 협탁 위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리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대사 연습을 했다.
11시쯤 침대에 누웠다가 잠이 오지 않아 TV나 볼까 싶어 틀었다가 이터널 선샤인이 있기에 결재해 보느라 늦게 잠들었더니 아침에 박상호가 깨울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봤자 1시에는 잠들었는데 깨우기 직전까지 죽은 듯이 잤다니, 믿기지 않는다. 며칠 아주 오랫동안 등한시했던 운동을 해내느라 몸이 꽤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서둘러! 자칫하다 늦겠다.”
9시에는 트레이너와 약속이 되어있고, 11시까지는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 오전 일정이 바빴다. 늦잠을 잔 탓에 아침 먹을 시간이 없어 두유 한 병을 손에 들고 부랴부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늦게 않게 깨우라고 했더니 형까지 늦잠 자면 어떡해?”
8시 30분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박상호가 허둥지둥 깨운 시간이 8시 15분이었다. 덕분에 한녹영은 간신히 세수만 한 채 집을 뛰쳐나와야 했다. 머리가 까치집이라 스냅백을꾹 눌러쓰며 원망조로 말하자 박상호가 민망하게 웃었다.
“미안. 미안. 어제 워킹데드 시즌 6을 몰아보느라 새벽 4시에 겨우 잠들었거든. 알람 맞춰뒀는데 못 들었나봐.”
워킹데드라면 유명한 좀비 미드다. 누구였더라. 누군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간 어디서 재밌다, 최고의 미드다, 인생작이다, 라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시즌 1의 절반 정도 본 적이 있었다. 징그러운 분장도 분장이지만 왠지 지구의 종말이 오면 인간의 좀비화가 현실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오싹해져 진저리를 치며 더 이상의 시청을 포기했다. 사람이 사람을 뜯어먹다니 너무 끔찍하잖아.
“좀비물 징그럽지도 않냐?”
한녹영은 ‘현실로 일어날 것 같아 무서워서 싫어.’ 라는 말 대신 저렇게 말했다.
“그 맛에 보는 거야. 벨트 매. 출발한다.”
박상호가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고, 한녹영은 두유를 뜯어 마셨다. 두유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빈속인 것보다는 나았다.
도중에 길이 막혀 한 5분 늦었지만 회사에 가야해 10시에 칼같이 운동을 끝냈다. 회사에 들어가는데 거지꼴로 갈 순 없어서 샤워 후 공들여 드라이를 하고, 선크림까지 꼼꼼하게 바른 후에야 헬스장을 나왔더니 바깥에서 박상호가 차를 대놓고 초조하게 한녹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거지꼴로 갈 순 없잖아. 단장 좀 하느라 늦었어.”
“단장 안 해도 예쁜데, 뭐 하러 단장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어. 어서 타. 아차 하면 늦겠다.”
박상호가 한녹영을 떠밀다시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그 자신도 허둥지둥 운전석에 올라탔다. 딱지 끊을 각오하고 마구 달리는 박상호의 옆얼굴을 힐끔 보다 잠깐 포털 검색이나 해볼까 싶어 휴대전화를 꺼냈던 한녹영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전화······ 왔었네?’
장현재로부터의 부재중 전화가 2건이었다. 시간을 보니 전부 어젯밤이다. 진동으로 해둔 채 대본에 열중하느라 전화 온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혹시 손이 제멋대로 장현재에게 전화를 걸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어 잠자리에 들면서 일부러 휴대전화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기상 직후부터는 허둥지둥 하느라 전화기를 살필 여유가 없었던 탓에 이제껏 몰랐다.
“왜 그래?”
한녹영이 멍하니 넋을 놓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자 운전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의아했는지 박상호가 물어왔다.
“현재 형한테서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어서, 어젯밤에 온 건데 몰랐네.”
“장 대표한테 전화······ 안 해보냐?”
“회사에 가면 볼 텐데 뭐.”
포털 검색이고 뭐고 김샜다. 한녹영은 흥미가 사라진 얼굴로 휴대전화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초조해 죽을 것 같은 속내와는 달리 애써 시큰둥함을 유지 중인 얼굴을 힐끔 본 박상호가 흐음, 하고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녹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만 내다보았다. 내내 바빠서 잊고 있었던 장현재가 떠오르자 금세 마음이 시무룩해진다. 제 가슴에만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우기를 맞은 정글 한가운데 서있는 것 마냥 축축하고 습했다.
“3층 회의실로 오란다. 저쪽은 도착했대.”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운 박상호가 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어서 가자며 좀 멍해 있는 한녹영을 재촉했다. 한녹영은 서둘러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편을 나누어 싸우기라도 할 참인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서로를 냉랭하게 보고 있는 김현영과 낯선 사내, 그리고 하영택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한녹영은 서둘러 사과부터 했다. 하영택이 뭐라고 긁었는지 표정이 안 좋던 김현영이 환하게 웃으며 한녹영을 맞았다.
“안 오시는 줄 알았잖아요.”
“죄송합니다. 운동하고 오느라 시간이 좀 빠듯했어요. 저쪽 분은······.”
한녹영이 낯선 사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제작사 ‘정우’의 대표이자 이번 도망자 연출을 맡은 김석형입니다.”
“반갑습니다. 한녹영입니다.”
한녹영은 웃으며 김석형과 악수를 나누었다. 차도영을 하기로 결정한 후 제작사 ‘정우’에 대해 알아봤다. 대표는 김석형이라는 남자로 한때 SBN에서 잘 나가던 드라마 감독이었는데, 몇 해 전 제작사를 차려 독립했다고 했다. 독립한 이후로는 크게 히트작이 없는데다 제대로 된 작가도 없고, 자본 역시 넉넉하지 않고, 안 좋게 방송사를 떠났는지 SBN의 방해도 있어 이래저래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양이지만, 감각은 있어 조만간 크게 터트릴 거라는 것이 박상호의 평가였다.
박상호는 ‘정우’가 그간 제작했던 드라마와 김석형이 SBN에 있던 시절 연출했던 드라마를 알려주며 “방송국에 있을 때 찍은 드라마들 꽤 잘 빠졌지? 감각은 있어. 언젠가 크게 빵 터질 것 같은데, 기왕이면 도망자로 크게 터뜨렸으면 좋겠다.” 라고 했는데 “형 말대로 될 거야.” 라고 말해주지 못해 입이 꽤나 근질근질했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읽어보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김석형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한녹영은 배우가 된 이후 처음으로 제 출연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시간을 들어 한참이나 정독하자 계약서에 문제가 있나, 뭐가 마음에 안 드나 싶어 안절부절못하던 김현영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왔다.
“문제가 있으면 말씀하세요. 한녹영 씨 회사와 합의해서 최대한 맞춰드리긴 한 건데······ 혹시 출연료가 걸리세요? 역시 한녹영 씨가 받기엔 출연료가 좀 적죠? 그래도 밑에 보시면 이후 도망자로 인한 추가 수익이 발생할 경우 러넝 개런티 식으로 지급한다고 되어있어요.”
정우는 도망자를 백퍼센트 자체 자금으로 제작한다. 물론 제작사 대표인 김석형의 개인 재산이 아니라 투자를 받은 자금으로 찍는 거지만. 어쨌든 판권, 저작권을 모두 정우가 가지고 있고, 방송국과는 배급 계약만 한 것으로 드라마의 흥행과 이후 수출로 인한 모든 수익을 정우와 투자자들이 나눠 갖는 구조였다. 즉 정해진 출연료 외에 정우가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한녹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며 웃었다. 확실히 현재 한녹영의 가치에 비해 적은 출연료지만, 돈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도 사람이라 돈을 배제할 순 없지만, 도망자 이후 벌어들일 광고 수익료가 어느 정도 될지 대충 짐작되기에 출연료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차도영을 맡았던 박지한이 벌어들인 광고 수익만 백억 대라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박지한의 통장에 꽂힌 순이익만 계산해서. 거기에 더해 러닝 개런티라니. 이건 박지한도 받지 못한 돈이었다. 아마 한녹영이 인지도가 제법 되는 배우라 박지한 때와는 달리 계약서에 러닝 개런티라는 옵션을 달아준 모양이었다.
“아니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한녹영이 기꺼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배우 본인이 아주 적극적으로 나오다가도 여러 사정으로 계약 직전에 캐스팅이 어그러지는 경우도 왕왕 있어서 걱정하고 있던 김현영과 김석형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지한을 거절하고 다시 한녹영으로 결정한 거라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정말 곤란해졌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한녹영 씨.”
표정이 다소 편해진 김석형의 말이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입니까?”
“그게······ 죄송한데, 아직 캐스팅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치 못하게 애초에 예상했던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습니다.”
김석형이 다소 민망한 어조로 말했고, 하영택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러자 김형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떤 역이 캐스팅 안 된 겁니까?”
“남주인공과 악역인 박민철 역이 아직입니다.”
가장 핵심인 두 역의 캐스팅이 아직이라니 좀 곤란하지 않나.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리자 김석형이 서둘러 말했다.
“지금 접촉 중인 배우들이 있으니 곧 끝날 겁니다.”
어쩐지 확신이 없는 말투였다.
“누굴 생각 중이신데요?”
“남주인공 역에는 현재 정인호 씨를 접촉 중이고, 박만철 역에는 박창중 씨 입니다.”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만철 역을 중견 배우 박창중이 연기했으니 문제 없지만, 남주인공 역에 정인호라니. 자존심 상하지만 현재 정인호는 확실히 한녹영보다 급이 높은 배우였다. 그런 그가 도망자를 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남주인공 역은 다른 배우가 맡았고.
“정인호라니 무리수를 둬도 어지간히 둬야지.”
혼잣말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전부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하영택의 의도 대로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그의 말을 들었다. 김현영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싫은 사람이야.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인호 선배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한녹영은 대놓고 말했다. 그리곤 재빨리 이어 물었다.
“물망에 오른 다른 배우는 없나요?”
“사실 저희가 생각한 배우들이 전부 고사해서······ 정인호 씨는 대본이 좋으니 생각해보겠다는 입장이라 기다리는 중입니다.”
“지금이라도 다른 배우를 알아보는 편이 좋을 텐데요. 신출내기 작가에 이렇다 할 히트작도 없는 제작사, 거기다 신은주 작가와 맞붙는 시간대라니. 망할 게 뻔한데 어느 미친 배우가 출연하려고 하겠어요? 우리 녹영이야 아직 순진해빠져서 얘가 허술하니 푼돈 받고 출연 계약서에 사인했다지만 제정신 박힌 배우들이라면 절대 출연 안 하지.”
김현영이 모욕감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입술까지 질끈 깨문 채로 분해하며 능글대고 있는 하영택을 노려보았다.
“하 실장님 다른 볼일 없으십니까?”
“없어. 계약 다 끝내면 너 데리고 올라오라는 대표님 지시가 있으셨다.”
그러니 너와 함께 여길 나가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하 실장님 영 눈치가 없으시지. 대놓게 말할게요. 방해되니 나가요. 얘기 끝나면 내가 알아서 대표실로 갈 테니까.”
한녹영은 친절하게 손수 문까지 열어주곤 하영택을 향해 빨리 나가라고 재촉해댔다. 미적대는 그를 향해 “뭐해요? 안 나가고? 진짜 거슬려서 대화를 못 하겠네.” 하고 말하자 그제야 그는 마지못해 일어나 두고 보자는 눈으로 한녹영을 노려보더니 회의실을 나갔다.
“김 감독님한테도 대놓고 말할게요. 정인호 선배는 무리입니다. 아마 도장 안 찍을 겁니다. 차라리 송정빈 선배가 어때요?”
송정빈은 한때 상당한 인기를 누리다가 성추행 스캔들이 터지며 인기가 급 하락한 배우이다. 소송 끝에 여자 쪽에서 돈을 노리고 허위 사실을 터트린 거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이미 인기가 하락할대로 하락한 상태라 벌써 2년째인가? 3년째인가 드라마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다. 요즘은 연극에 집중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송정빈은 생각도 못했는지 김석형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쳤다. 김현영은 눈동자를 위로 굴리더니 ‘어라? 나쁘지 않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석형은 썩 내키지 않은지 표정이 별로였다.
“캐스팅은 우리 권한입니다.”
“월권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제 생각엔 송정빈 선배가 어울릴 것 같아서요.”
한녹영은 그저 한 번 해본 소리라는 듯 순순히 물러섰다. 어차피 그 역은 송정빈이 하게 되니까. 송정빈은 도망자에서 주인공 역을 맡으며 재도약의 기회를 잡게 된다. 그렇다 해도 주연인 그보다 주조연인 차도영 역이 더 떴지만 말이다.
“고려는 해보지요. 그럼 캐스팅이 끝난 후 일정이 잡히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녹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김현영을 보았다.
“작가님 대본 더 나왔으면 보내주시겠습니까?”
“내일이면 5회 수정 대본 나와요, 바로 보내드릴게요.”
“네. 저 완전 기대하고 있습니다. 4회까지 대본 너무 많이 봐서 벌써 너덜거려요. 다른 배우 대사까지 다 외워버렸다니까요.”
한녹영은 ‘내가 이렇게 역에 푹 빠져있다.’를 어필했고, 예상한 대로 김현영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좋아했다.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한녹영씨가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주셔서 저 너무 좋아요. 진짜 영광스럽고요. 것봐요, 감독님. 내가 차도영은 무조건, 반드시, 결단코, 절대적으로 한녹영씨가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김현영이 김석형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으스댔다. 픽 웃은 한녹영이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형은 두 분 1층까지 모셔다드리고 와. 난 위에 올라가볼 테니까.”
박상호가 혼자 괜찮겠느냐는 듯 한녹영을 보다 ‘어차피 내가 옆에 있어도 아무 소용없을 테니까.’ 라고 하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김현영과 김석형을 인도해 1층으로 내려갔다.
한녹영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 대표실이 있는 5층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봤자 고작 3층에서 5층으로 가는 거라 금방 도착하고 말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장현재의 비서가 보였다. 그녀가 인터폰을 하려 하자 한녹영이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만요.”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한녹영은 장현재가 있는 문 앞에 서서 반복해서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십호흡을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렸고, 긴장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흘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음이 다스려질 것 같지 않아 에라 모르겠다 부딪치고 보자는 심정으로 직접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 왔어요.”
한녹영은 떨림을 숨기려고 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장현재의 책상이 문과 마주보고 있어 들어서자마자 얼굴이 보였다. 한녹영은 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닥하며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해 보이는 장현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지난 며칠 장현재와 직접 대면하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많은 생각을 했었다. 화가 날까. 괴로울까. 마음이 아플까, 원망스러울까. 어이없게도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들었다.
그리도 냉정하게 저를 버린 장현재에게 화가 나면서 원망스럽고, 그런 한편 가시로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렸다. 마치 바로 어제 그에게 버려진 듯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계약은 끝냈나?”
장현재가 물었다. 한녹영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있다.
“네. 방금이요.”
그리곤 얌전히 대답하며 소파에 앉았다.
“기어이 도망자를 고집했다지. 난 네가 달콤한 그대를 선택할 거라 믿었는데 말이야. 항상 널 위해 최고의 작품을 선택하려 애썼던 내 노력이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별로야.”
조용조용 타이르듯 말하는 장현재의 목소리에서는 언제나 특별한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하나. 다스리는 힘 같은 거라고 할까.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전부 진실처럼 들리고,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올 것 같은 압박감마저 느껴지곤 했다.
언제나 한녹영은 장현재의 말에 압도당했고, 정신없이 휘둘렸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랬다. ‘넌 재능이 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널 톱스타로 만들어주마.’ 라는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장현재에게 얽매였다.
장현재를 처음 만났을 때 한녹영은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던 상태였다. 아비란 인간이 빚을 져놓고 새엄마와 새엄마 자식들과 야반도주를 하면서, 그 모든 빚은 한녹영 앞으로 밀어두었다. 1억이란 큰돈이었고, 수중에는 한 푼도 없었으며, 어떻게 해도 갚을 길이 없어 보였다. 앞날이 깜깜했고, 막막했다. 사채업자들이 날마다 찾아와 협박했고, 그들 탓에 직장에서도 번번히 짤렸다.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올 기세인 그들에게서 벗어나려면 죽음밖에는 없어 보였다. 정말 죽어버릴까, 죽어버리면 아버지란 인간이 후회할까, 누구 한 사람 정도는 슬퍼해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장현재를 만난 것이다. 장현재가 계약금이라며 단번에 빚을 해결해줬고, 가족들에게 버림받아 다친 한녹영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넌 재능이 있다. 넌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넌 내게 특별하다.
다정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날마다 속삭여주는 말에 매료되어 하루가 흐를 때마다 조금씩 더 장현재에게 집착했고, 날마다 조금씩 더 말 잘 듣는 인형이 되어갔다. 그에게서 벗어나면 죽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었고, 전부를 갖고 싶었다. 장현재가 말한 대로 정말로 그의 유일하고도 특별한, 하나뿐인 존재가 되길 원하며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했다.
그의 말을 잘 들을 때마다 마치 상처럼 던져주는 다정한 눈길, 따뜻한 손길이 좋아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녹영이 마침내 시선을 들었다. 반성하는 태도처럼 보였던 걸까. 장현재가 이번만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형, 나는······.”
하지만 장현재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이쯤 됐으면 너도 배우로서 하고 싶은 역에 대한 욕심이 날 때가 되었지. 하지만 녹영아. 누구보다, 너보다 더 널 잘 아는 사람이 나야. 그리고 누구보다 너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 또한 나고. 난 네가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스타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 정도에서 안주하면 안 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스타가 되려면 내 말을 잘 따라야 하고. 약속했잖니, 내가 너를 정상에 올려주겠다고. 그러니 넌 내 말만 듣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착실하게 잘 따르면 돼. 이번은······ 그래. 한 번쯤은 너도 네 욕심대로 해봐도 되겠지. 실패도 해볼 필요가 있긴 하니까.”
장현재는 도망자의 실패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침묵하는 한녹영에게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리곤 두서없이 뒤엉킨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애쓰는 한녹영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우리 녹영이. 넌 정말 내게 특별한 배우야. 난 내 손으로 널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톱스타로 만들고 싶다.”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하는 말이 설탕이었다. 우리 녹영이. 그 말이 달디 달았다. 살짝 뻗친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길 또한 다정했다. 5월의 햇살 좋은 날, 따뜻한 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가 된 듯한 기분을 들게 하는 손길이었다. 이 손길과 눈빛, 그리고 꿀처럼 단 말이 좋아서 마약에 중독된 환자마냥 장현재를 갈구했다. 한녹영은······ 저를 향한 장현재의 다정함과 따스함이 정말로 진심이라 믿었다. 아직 저를 연인으로 봐주진 않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거라 믿었다. 말 잘 듣고, 비위를 거스르지 않은 채 복종하면 언젠가는 그의 유일한 사람, 연인이 될 거라 믿었다.
어리석게도.
저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길 위로 ‘넌 이제 내겐 아무런 가치가 없어.’ 라고 말하던 차가운 눈동자가 겹쳐진다. 정말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차가웠던 눈을 떠올리자 몸이 떨려왔다. 눈밭에 맨몸으로 내동댕이처진 것처럼 온몸이 시렸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녹영은 어금니를 악문 채 목구멍으로 최대한 작게 호흡했다. 원망이 서린 질문이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형, 사실은 나를 그저 도구로만 생각하는 거지? 나는 형에게 말 잘 듣는 인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지? 내게 가치가 없어지면 언제든지 쓰레기통에 내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거지? 내게 했던 달콤한 말들은 사실 전부 거짓이었던 거지?’
차마 할 수 없는 말이 가슴 안에서 들끓었다. 사실 전 장현재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깨달았다. 잔혹한 말로 심장에 비수를 꽂지 않았더라면 죽는 그 순간까지 장현재를 믿었을 것이다.
얌전한 한녹영의 태도가 마음에 든 건지 빙그레 웃은 장현재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책상 쪽으로 걸어가는 걸 본 이후에야 한녹영은 저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느슨하게 풀었다.
“이렇게 하자. 이제부터 나 혼자 독단으로 작품 선택을 하지 않을게. 너도 스스로 작품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너에게 들어오는 작품들 중 2-3개를 추려 보여줄 테니까 넌 그 중에서 선택해. 선별한 작품들 중에서도 무얼 선택하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은 계속 해줄 거니까 걱정할 건 없어.”
소파로 돌아온 장현재가 테이블 위에 서류봉투를 내려놓았다.
“뭐야?”
“계약서.”
봉투 안에서 종이를 꺼내보니 장현재 말대로 계약서다.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재계약은 해가 바뀐 이후에 한 걸로 기억하는데? 분명 중순쯤에 재계약을 했고, 장현재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사인한 한녹영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착하게 굴었으니 상을 주겠다면서.
‘키스요.’
마치 본능처럼 나온 말이었다. 그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올렸던 장현재는 간절한 열망을 담고 있는 한녹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짧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짧았던 만큼 아쉬웠고, 아쉬웠던 만큼 더 진한 키스를 열망하게 되었다. 장현재는 한 번만 더 하자고 조르는 한녹영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네가 최고가 되는 날 그때 하자. 그때 정식 연인이 되는 거야.’ 라고 했었다.
정식 연인이라는 단어가 참을 수 없이 유혹적이었다. 그 단어가 입에 문 사탕처럼 달게 다가왔다. 혀끝에서 사르르 녹았다. 빨리 정상이 되고 싶었다.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일이 잘 안 되어 미칠 것만 같았고, 새로이 나타난 주민성의 존재가 신경 쓰여 죽을 것만 같았다.
결국 한녹영은 더러운 수작으로 영화를 찍어 그토록 바라던 대로 정상에 섰고, 장현재의 연인이 되었으며, 세상을 다 가졌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녹영이 계약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계약서를 꼼꼼히 훑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읽어보고 사인해.”
“형.”
“응. 말해.”
무슨 말이든 거리낌 없이 해보라는 눈빛이었지만, 차마 말이 떨이지지 않는다. 입술이 붙어버린 것만 같았다. 한녹영은 꽉 다물린 입안에서 혀만 굴리다 한참 만에 겨우 말했다.
“재계약은 하지 않으려고 해.”
이 말이 왜 이다지도 힘겨운 건지. 몸 안의 모든 용기를 모조리 끌어 모아 겨우 말할 수 있었다. 장현재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입술을 물어뜯고 있는 한녹영을 한참 말없이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내가 너를 섭섭하게 했던 적이 있었나?”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럼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뭐야?”
“······.”
“침묵하지 말고 내게 바라는 바가 있으면 말해.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네가 어지간히 섭섭하지 않고서야 날 떠나겠다는 말을 할 리 없잖아.”
한녹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서운하거나 섭섭한 정도로는 장현재를 떠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다. 절망했기 때문에 떠나려는 거다. 조금의 희망도 없는 완벽한 끝을 보았기 때문에.
“그냥······ 내가 형한테 지나치게 의지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서 그래. 자꾸 집착하게 되어서.”
“의지해. 얼마든지 의지해도 돼. 녹영아, 내가 말했잖니. 난 너한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고, 너의 울타리가 될 거라고 말이야.”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말한 장현재가 한녹영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한녹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뒤로 뺐다. 장현재의 손이 허공을 문질렀다. 그의 눈매가 단단해졌다. 시선을 피하는 한녹영을 바라보는 눈동자 또한 평소보다 차가웠다.
“혹시 네게 연락 온 회사가 있어?”
“없어. 다들 내가 당연히 형이랑 재계약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던데 어느 기획사에서 접촉해오겠어?”
“진짜······ 없어?”
“없어.”
“그래. 우리 녹영이가 나한테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남은 이유는 하나뿐인데. 말로는 아니라지만, 역시 내게 서운했구나. 우리 녹영이가 뭐에 마음이 상해서 날 떠난다고 투정을 부리는 걸까?”
한녹영이 벌떡 일어섰다.
“그런 거 없다니까. 아무튼 재계약은 안 해. 그리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고.”
“네가 이러면 내가 서운해져, 녹영아. 기껏 널 찾아내 이만큼 키워줬더니 날 배신하고 떠날 거야? 난 우리 사이에 단순한 소속사 대표와 배우 이상의 뭔가가 있다고 믿고 그렇게 널 대해왔는데 넌 아니었어? 녹영아, 형 진짜 서운해지려 한다. 너한테 실망할 것 같아. 계약 만료까지 두 달 가량 시간이 있으니 더 생각해봐.”
“더 생각한다 해도 내 결정은 같을 거야. 재계약은 안 해. 절대로.”
통보하듯 강한 어조로 말한 후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곤 빠르게 걸어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후에야 제가 숨을 참고 있음을 깨달았다.
잔혹하게 버려질 걸 알면서도 충성하는 충견 따윈 되지 않겠다.
한녹영은 자꾸만 쿵쿵쿵 거칠게 뛰어대는 가슴을 꾹 누르며 맹세했다. 자그맣게 소리 내어 말하며 다짐을 머릿속에 꼭꼭 새겼다.
주차장에 내려가자 박상호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다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괜찮냐?”
창백하게 질린 한녹영을 살펴보는 박상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한녹영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인 후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잔뜩 지쳐서 남은 기력이라곤 없다는 듯 창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운전석에 앉은 박상호가 연신 그런 한녹영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말할 기력도 없었다. 장현재에게 고작 ‘재계약 하지 않겠다.’는 말 한 마디 한 것으로 체력이 모조리 소진된 기분이었다.
“무슨 얘기 나눈 거야? 차도영 역을 고집한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회사를 떠난 후 한 십 분 정도 지났을까. 더 이상 참기 힘든지 박상호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했어.”
“······뭐?! 진짜야? 회사를 옮기라고 조언하긴 했지만 진짜 실행에 옮길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장 대표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응. 제계약 서류 내밀기에 하지 않겠다고 했어. 형이 당장 회사 차릴 거 아니면, 나 데려갈 곳이 있는지 알아봐줘.”
“알았어. 당장 알아볼게. 네가 시장에 나왔다고 하면 여기저기 사가려고 난리일 거야.”
“······응.”
한녹영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장 대표······ 화내진 않던? 많이 서운해 하지?”
“나한테 실망할 것 같대.”
그리고 저는 그 말에 병신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전 정말 장현재의 말에 무조건 따르도록 잘 훈련된 인형이었던 모양이다. 한녹영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장현재와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안다. 온몸으로 뼈저리게 겪었다. 제게 했던 다정한 말과 행동, 꽃향기 가득한 미래를 보장하던 약속이 사실은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 또한 이젠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돌아갈 마음 따윈 없고, 설탕 같은 말과 행동에 속아 제 모든 걸 홀라당 내주는 병신은 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생각과 결심은 확고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아팠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었고, 맹목적으로 따랐던 사람에게 참혹하게 버려진 가슴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쥐어뜯긴 것 마냥 쓰라렸다.
장현재가 원망스러운 만큼 아팠고, 그가 미운 만큼 서글펐다. 끝내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를 얻기 위해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린 제가 씁쓸했다. 과거로 돌아오며 끊어낸 집착처럼 마음의 고통도 단칼로 잘라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마음은 마치 별개의 영역처럼 의지로 제어되지 않는 곳에 있어 단번에 정리되지 않았다.
“너 먼저 올라가 있어. 난 도시락 사올 테니까. 오늘 점심은 도시락으로 해결하자.”
빌라 앞에 한녹영을 내려준 박상호가 도시락을 사기 위해 차를 돌렸다. 한녹영은 홀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드레스룸으로 직행해 숨 한 번 크게 몰아쉰 후 의류회사 창고마냥 빡빡하게 걸려있는 옷들을 끄집어내 거실로 내던졌다. 전부 장현재에게 잘 보이려고 그의 취향에 맞춰 산 옷들이었다. 댄디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장현재 때문에 주로 정장 스타일의 옷이 많은데, 그것들을 다 꺼내고 보니 드레스룸이 휑해 보일 지경이었다. 드레스룸에 가득 차 있던 옷의 절반가량 꺼낸 것 같다.
도시락을 사온 박상호가 실내로 들어서다 말고 거실에 쌓인 옷 무덤을 보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게 다 뭐야?”
“형. 그 옷들 어디 기부할 곳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재활용함에 버리든가 그냥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든가 해.”
“이걸 다?”
“어, 전부 다.”
“멀쩡한 옷을 왜 버려!! 거기다 여기에 있는 옷들 거의 대부분 명품이잖아. 이 미친 자식. 넌 돈이 썩어나냐. 이게 다 돈인데, 멀쩡한 돈을 왜 길바닥에 내버리래? 좀 떴다고 재벌이라도 된 것 같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곳이 이 바닥이야. 앞날을 생각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너 금전감각에 대해 꼭 한 마디 하고 싶었어.너 이 빌라 구매할 때 은행에서 받은 대출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지? 돈 차곡차곡 모아서 빚부터 해결할 생각해야지, 통장에 돈이 꽂히기 무섭게 쇼핑이다 뭐다 다 써버리고. 좀 자중해. 빚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거기다 네 가족들은 왜 걸핏하면 사업을 한답······.”
금액으로 환산하면 고급 외제차 한 대 값은 나올 법한 옷들을 모조리 내다버린다고 하자 눈이 홱 돈 박상호가 제 통장에 있는 돈이 털리기라도 한 냥 한녹영을 쏘아붙였다. 제 돈은 아니지만 아까웠다. 이게 무슨 낭비인지. 돈의 바다에서 헤엄 칠 정도로 부자라면 또 모를까. 한녹영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스타랍시고 주변에서 띄워주니 화수분이라도 얻은 기분인 건지 원.
물론 뜨기 시작하면서 일반인은 평생을 모아야 하는 돈을 한 번에 척척 벌기도 한다지만 회사와 나누고, 가족들 부양하고, 본인 스스로 사치하고 나면 남는 것도 없었다.
잔뜩 흥분했던 박상호가 한녹영의 눈이 가늘어진 것을 보고 뒤늦게 ‘내가 너무 나갔나?’ 하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형 내가 요즘 참 편하지?”
“그러게. 요즘 네가 좀 많이 변해서인지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편하게 느껴지긴 한다. 내 잔소리 때문에 발작할 것 같아?”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던지는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능청스럽다니까.
“밥이나 먹자.”
“그래. 식었겠다.”
박상호가 도시락을 식탁에 서둘러 풀었다.
“저것들은 정리해주고.”
“진짜로 전부 다?”
“어.”
“아깝게. 내 것도 아닌데 내 속이 다 쓰리다. 이유나 좀 알자. 대체 왜 멀쩡한 옷들을 내다버리려고 해? 며칠 전에는 장 대표 선물이라 애지중지해온 것들도 기부하라며 척 내놓더니. 참 장 대표한테서 선물 받은 것들은 아직 내가 갖고 있다.”
“판다더니?”
“혹시 며칠 새 네 마음이 변해 도로 찾아오라고 할까봐
아직 간직하는 중이야.”
한녹영이 젓가락을 집었다. 박상호가 사온 건 너비아니 도시락이었다. 막 사왔을 당시에는 따뜻했을 너비아니가 식긴 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그럴 일 없어.”
버리는 연습 중이니까. 그에게 받았던 선물을 버렸고, 잘 보이려고 샀던 옷들도 버리고. 이렇게 연습하다 보면 다음에는 그에게 송두리째 갖다 바쳤던 마음도 통째로 내다버릴 수 있겠지. 낙인이 찍힌 것 마냥 지끈지끈 아픈 고통 또한 사라지겠지.
도시락을 절반 정도 먹은 한녹영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입맛이 없어서 절반도 겨우 먹었다.
“그만 먹게?”
“응. 형은 마저 먹어. 난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 좀 뛰고 올게.”
“그냥 쉬지 그래? 피곤할 텐데.”
“아니야. 좀 답답해서 그래. 가볍게 뛰고 올게.”
한녹영은 집에서 쉬라고 만류하는 박상호를 뒤로 한 채 운동복을 챙겨 나섰다.
헬스장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자마자 러닝머신으로 향했다. 속도를 최고로 올리고 처음부터 죽자 살자 달렸다. 꼭 백 미터 경주에 나간 선수처럼 달리니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멍해지며 다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식사 후 거의 바로 뛰어서인지 배도 아팠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뛰었다. 몸을 혹사하고 있으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머리가 멍해지다 못해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었다. 추를 매단 듯 무거운 다리도 한 번씩 풀썩풀썩 꺾였다. 이거 좀 곤란한데,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누군가 한녹영의 허리를 휘어잡아 번쩍 들다시피 하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숙인 채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는데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왠지 한 번 겪은 듯한 익숙함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우려대로 강준일이었다. 그는 무섭도록 냉정한 얼굴로 혼자 돌아가고 있는 러닝머신의 작동을 정지시키더니 입술을 깨문 채 서 있는 한녹영을 노려보았다.
“죽고 싶어 환장했나?! 감당하지도 못할 거면서 속도는 왜 이렇게 높이 올려둔 거지? 넘어져서 뇌진탕이라도 걸리고 싶었어?! 죽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죽어. 이런 데서 사람들 시선 끌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니 운동하러 온 사람들이 전부 일제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러닝머신 위에 오르자마자 한 맺힌 사람처럼 죽어라 달리기 시작한 한녹영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일반인이었어도 ‘저 사람 뭐지?’ 했을 텐데, 한녹영은 얼굴이 알려진 옌예인이다.
‘사진 찍혔겠네.’
한녹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녹영 헬스장에서의 발광, 이딴 제목으로 SNS를 통해 퍼지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강준일은 왜 이 시간에 헬스장에 있는 거지. 거기다 사람들은 또 왜 이리 많아?
“대표님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계십니까?”
“내가 토요일 오후에 운동하러 온 것이 이상한가.”
아······ 오늘이 토요일이었나. 그걸 이제야 깨달은 한녹영이 목덜미를 문지르자 강준일이 혀를 찼다.
“왜 운동하러 올 때마다 너와 마주치는지 모르겠군.”
“혹시 또 오해하는 건 아니겠죠? 전 앞으로도 여길 이용할 거니까 저와 마주치는 게 싫으면 대표님이 다른 헬스장을 이용하세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군. 피차 서로 취향이 아닌 사람들끼리 마주쳐봤자 아무 일도 안 생길 텐데. 안 그런가. 한녹영 씨.”
피차 서로 취향이 아닌 사람들, 이라는 표현에서 왜 앙심이 느껴질까. 대표님도 내 취향 아닙니다, 라는 말에 자존심이라도 상한 건가. 한녹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강준일을 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나?”
빤히 보자 강준일이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
“이후 스케줄이 어떻게 되세요? 별일 없으면 피차 서로 취향이 아닌 사람들끼리 술 한 잔 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불쑥 한 말에 강준일이 눈썹을 올리더니 다음 순간 어이없다는 듯 픽 실소했다.
“일전 내가 널 집까지 데려다준 일로 우리가 가까워졌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한녹영 씨와 나는 함께 술을 마실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닐 텐데.”
“꼭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술 마셔야 하는 법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내겐 너와 함께 술 마실 이유 따윈 없어.”
“그냥 좀 같이 마셔주면 안 됩니까? 우연이 세 번 겹치면 인연이라는 말도 있는데, 술 마실 인연인가 보다 하고 같이 좀 가시죠? 제가 산다니까요.”
“그런 인연 따위 거절이야.”
강준일이 더 이상 말 섞기도 싫다는 싸늘한 태도로 돌아섰다.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시베리아 칼바람도 강준일에 비교하면 훈풍이겠다.
“사람이 진짜 냉하다니까. 저런 사람이 침대에선 그렇게 뜨거웠다니 웃겨. 역시 그건 술 때문이었던 모양이야.”
술은 집에 가서 박상호하고나 마셔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서며 중얼거린 말을 들었나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강준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걸어와 탈의실로 향하던 한녹영의 어깨를 잡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네, 뭐가요?”
“침대 어쩌고 한 것 같은데.”
들었나. 혼잣말로 한 소리였는데. 설마 주변에 또 누가 들은 건 아닌가 부랴부랴 고개를 두리번거려봤는데, 다행히 근처에 사람이라곤 없었다.
“잘못 들으신 것 같은데요.”
한녹영이 발뺌했다. 사실대로 얘기할 순 없었다. 시침을 뚝 떼고 있는 한녹영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강준일이 말했다.
“좋아. 마시러 가자고, 술.”
“네?”
술 마시자며 먼저 제의해놓고 막상 강준일 쪽에서 제안에 응하자 당황하는 마음이 들었다.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30분 주지.”
일방적으로 통보한 강준일은 얼떨떨해 있는 한녹영을 뒤로 한 채 앞서서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한녹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마음이 변한 거지? 나 같은 거하곤 공기를 나눠 쓰는 것조차 싫다는 표정을 하고 있더니. 어쨌든 나쁠 건 없었다. 한녹영 또한 부랴부랴 샤워실로 향했다.
이 헬스장은 샤워실이 개별 부스로 되어 있어 좋다. 공중목욕탕처럼 여러 사람들이 죄다 홀딱 벗은 채 씻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어 마음에 들었다. 한녹영은 샤워를 끝낸 후 바깥으로 나와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난 얼굴이라도 머리 스타일이 후지면 전체적으로 후져 보이는 느낌이 있어 평소에도 머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더군다나 그는 반곱슬이라 조금만 손질에 소홀해도 머리카락이 붕 떠 부스스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아까 30분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 확인해본 한녹영이 화들짝 놀랐다.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아직 덜 말렸는데. 드라이어를 손에 든 채 ‘이왕 늦은 거 확 늦어버릴까?’ 하고 고민하다 젠장, 하고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비치되어 있는 헤어로션으로 최대한 머리를 차분하게 눌러놓고 라커에서 짐을 꺼내 부랴부랴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가버린 건 아니겠지?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한녹영이 파악한 강준일의 성격으로 보아 정해준 시간에서 1초라도 늦었다간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 한녹영에게 강준일의 이미지는 그만큼 칼 같은 사람이었다. 조바심을 치다 문이 열리자 바깥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으려던 한녹영이 움찔하고 말았다. 강준일이 엘리베이터 앞에 팔짱을 낀 자세로 마치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까, 깜짝이야!”
“늦었어.”
강준일이 손목시계를 툭툭 건드려보였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한녹영은 두 번째로 놀라는 중이었다. 막연히 오늘도 당연하게 정장 차림일 거라 생각했던 강준일의 차림새가 뜻밖에도 캐주얼했던 것이다. 그는 청바지에 올리브색 니트를 받쳐 입고 약간 헐렁한 스타일의 체크 코트를 걸친 채였다. 정장이외의 차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을 만큼 강준일하면 무조건 수트를 떠올렸는데 이런 차림도 어울린다. 그것도 상당히 잘. 키가 크고 비율이 좋아서인가. 저렇게 입으니 한 다섯 살은 어려보이네. 분위기도 아주 살짝, 진짜 살짝 부드러워 보이는 것도 같고.
한녹영이 심사하는 감독관이 된 것 마냥 강준일의 차림새를 살펴보았고, 강준일은 그런 한녹영의 눈빛이 불쾌한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무슨 눈빛이지?”
“별 건 아니고요······ 정장이 아니구나, 싶어서요.”
“난 휴일에 운동하러 올 때도 정장을 입고 올 거라 생각했나?”
“네. 솔직히 등산하러 갈 때도 정장을 입고 가진 않을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휴대전화에 시선을 집중한 채 뛰어나오며 한녹영의 등을 퍽 치더니 사과도 없이 휑하니 가버렸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비틀한 한녹영이 강준일의 가슴으로 쿵 얼굴을 박았다. 힘껏 부딪친 탓에 코가 찡하니 아파왔다. 머리까지 핑 돌았다. 강준일이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어지러워하는 한녹영의 허리를 감았다.
“죄송해요.”
잠시 후 한녹영이 살짝 발갛게 변한 코를 문지르며 서둘러 몸을 뗐다.
“평소에 뭘 먹긴 하는 건가?”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사람이 아니라 해골을 붙잡은 기분이야.”
표현을 해도 꼭. 평생 다정하고 예쁜 말을 써본 적이나 있을는지 모르겠네. 강준일은 꼬꼬마 때도 혀에 칼을 물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독설을 내뱉었을 것 같았다. 한녹영이 입매를 삐죽거렸다.
“당연히 먹죠. 특히 요즘엔 더 잘 먹는 중이고요. 다음 작품 들어가기 전에 최소 5kg은 찌우라는 작가님 특명을 받았거든요.”
“기어이 신은주 작가 작품이 아니라 다른 작품의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가?”
“네. 오늘 사인하고 왔습니다.”
“장 대표 기분이 많이 안 좋겠군. 말 잘 듣는 인형이라고 생각했던 네가 장 대표 말을 거역했으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겠어.”
“네. 더군다나 재계약 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했으니 더더욱 기분이 안 좋겠죠. 하지만 주인의 말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인형의 심정도 편치는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일행이 아니라 마치 생판 모르는 남처럼 혼자 앞서서 걷던 강준일이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재계약을 거부했다고?”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인형 폐업하겠다고 했는데 그저 해보는 소리로 들었던 건가. 정말로 한녹영이 장현재에게서 독립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한 대 얻어맞은 얼굴 같기도 했다. 그 표정에 왠지 빈정 상했다.
“네!”
한녹영이 강한 어조로 말하며 덤으로 고개까지 끄덕여보였다. 그런 한녹영을 한참 물끄러미 보던 강준일이 보일 듯 말 듯 입끝을 올렸다.
“홀로서기를 해보겠다더니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강 대표님한테 마음에 없는 말을 왜 합니까? 진짜 현재 형······ 아니 장현재 대표와 결별할 준비 중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별할 거다, 라는 다짐은 확고한데 마음이 힘들어서 문제였다. 마음이 만취한 것 마냥 비틀거려 골치였다. 장현재를 만난 이후 그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만 했던 터라 솔직히 미련을 떨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타.”
갑자기 울적해진 한녹영을 힐끔 보곤 또 일행이 아닌 것처럼 혼자 걸어가던 강준일이 한 차 앞에 멈춰서더니 말했다. 재규어 컨버터블이었다. 거기다 눈에 확 뜨이는 그런 색상이었다. 세단만 탈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실제로 얼마 전 ‘정’에서 만났을 때
몰았던 차는 클래식한 세단이었다.
“대표님 차로 움직이자고요? 그나저나 컨버터블이네요.”
“왜? 이번에도 내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네. 평소 제가 생각하던 대표님 이미지와 오늘 모습 사이에 갭이 좀 있네요.”
“피차일반이야. 너도 이미지와 실제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으니까. 내게 잘 보이려고 눈웃음치며 끝까지 가식 떨던 넌 허상이었나 싶을 만큼. 내 여비서가 네 겉모습만 보고 무척 다정하고 로맨틱할 것 같아서 좋다던데 네 실제에 대해 까발리고 싶군.”
“그 비서 분께는 당연히 다정하게 대하죠. 전 제 사람에게는 입안의 초콜릿 같은 남자거든요.”
즉 강준일은 제 범주 안에 든 사람이 아니고 잘 보일 까닭도 없으니 가식을 떨 필요도, 입 안의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굴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 말뜻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는 강준일이 한쪽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초콜릿 같은 남자가 아니라 속에 신맛을 숨긴 채 겉에만 초콜릿을 입힌 가식 사탕 같은 남자겠지. 설마 내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가식 사탕이라는 말에 기분 상한 한녹영이 볼을 부풀렸고, 강준일이 슬쩍 웃었다. 그리곤 혼자 먼저 차에 올라탔다. 한녹영 또한 뒤이어 조수석에 탔다.
내 차는 우선 두고 가야겠네. 나중에 내가 가지러 오던가, 아니면 상호 형한테 부탁하든가 해야지.
한녹영이 안전벨트를 매자 강준일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헬스장을 출발한 후에야 뒤늦게 물어보았다.
“종종 가는 술집이 있어. 회원제인데다 룸이 있어 조용히 술 마시기엔 최적이지. 너와 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남들 눈에 뜨여서 좋을 건 없잖아. 안 그런가?”
맞는 말인데, 왠지 기분이 좀 나빠진다. 뭐야,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면 부끄럽다는 건가.
“저는 상관 없는데요. 대표님은 곤란하신가 보죠.”
“맞아. 곤란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한녹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이없어 하는 한녹영을 힐끔 본 강준일의 눈매가 잠시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대로 돌아왔다.
차는 이십여 분 정도 달리고 난 후에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강준일이 말한 술집은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출입문 가드 두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딱 떨어지는 정장을 입고 술집이 아니라 버킹엄 궁전을 지키는 병사마냥 위엄 있게 서 있던 남자들이 강준일을 보곤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한녹영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어딜 갈 때마다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귀찮기도 했는데,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왠지 모르게 주눅도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친절한 얼굴의 웨이터가 강준일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모시겠습니다.” 하곤 안쪽 룸으로 안내했다. 룽 내부는 술집 같지 않았다. 가정집 응접실처럼 아늑한 분위기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술은 뭘로 올릴까요?”
“로얄살루트로 하지. 38년산 있나?”
“네.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웨이터가 또 한 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곤 룸을 나가려 했을 때였다.
“맥주······.”
한녹영이 민망하게 말문을 열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한녹영의 말을 정확하게 듣지 못한 웨이터가 웃으며 물어왔다. 한녹영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놓은 후 이번엔 정확하게 말했다.
“맥주 있습니까?”
“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전 맥주로 주십시오. 브랜드는 아무 거나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웨이터가 룸을 나갔다. 한녹영은 의아하게 저를 보는 강준일을 향해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제가 주량이 별로입니다.”
호기롭게 술 마시자고 권했지만 한녹영의 주량은 약한 편이었다.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맥주 서너 캔에 완전히 취해 뻗을 때도 있고, 좀 더 마셔도 괜찮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양주는 한녹영에게 쥐약이라 한 잔에도 뻗어버린다. 소주는 두 잔 정도라면 어찌어찌 마시고, 와인도 두 잔 까지는 가능하다.
“대단한 주당처럼 술 마시자고 하더니 뭐 맥주?”
강준일이 기막혀했다.
“맥주는 뭐 술도 아닙니까? 외국 어느 나라에서는 맥주를 물처럼 마시기도 한다던데, 여기는 한국이고, 저한테 맥주는 엄연한 술입니다. 각자 취향에 맞는 술을 마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꼭 같은 술을 마셔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궁색한 변명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하는 한녹영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던 강준일이 돌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테이블이 가로막고 있어 그가 몸을 내밀었다고 해서 닿을 리도 없는데, 한녹영은 순간 움찔해 몸을 뒤로 뺐다. 강준일이 주의를 환기하듯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톡 가볍게 두들겼다.
“무슨 마음으로 하필이면 내게 술을 마시자고 권한 거지? 전에 나한테 술 마시지 말라고 충고할 땐 언제고. 그리고 내가 네가 편한 상대일 리는 없을 텐데.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날 그리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지 말라는 뜻이었고요. 설마 제 앞에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시진 않을 거잖아요. 그리고 대표님은 절대 편하지 않죠. 어려운 상대 맞습니다.”
“······.”
계속 해보라는 듯 강준일이 고개를 까닥했다. 한녹영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에게 잘 보여 어떤 이득이라도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자 굳이 가식을 떨어가며 억지웃음을 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 만만하게 본다거나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강준일은 누구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강준일에게 억지를 쓰다시피 하며 술 마시자고 권한 까닭은.
“대표님은 제게 정수리에 부어진 얼음물 같은 사람이거든요.”
강준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지?”
“대표님과 같이 있으면 정수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고 할까요? 잡생각이 사라진다고 할까요. 사실 술은 핑계고요. 그냥 잠깐 함께 있으면서 정신을 차리고 싶었거든요.”
밥 한 끼 합시다 내지는 차 한 잔 하죠는 더더욱 이상하니까 술 핑계를 댄 거고, 속내는 말한 대로다.
냉한 분위기 때문인지 툭툭 내뱉는 차가운 말 때문인지 강준일과 있으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차가워지고, 잡생각이 많이 들지 않는다. 우울한 생각에 빠졌다가도 제가 입을 다물면 금세 냉랭해지는 분위기가 싫어 잡념을 떨치고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고 할까.
무엇보다 강준일은 제게 잘 보일 필요가 없어 사실만을 말하니 현실을 직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네 말인즉슨 너 정신 차리는데 날 이용하려고 한다는 거군?”
어이없어하던 강준일이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순간 입매를 싸늘하게 다문 채 한녹영을 보는 그의 눈동자에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날 어렵게 생각한다는 네 말은 거짓처럼 느껴지는군. 내가 만만하고 편하니 그딴 어이없는 생각을 다 한 거겠지.”
“편하지 않다니까요. 감히 누가 대표님을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겠어요? 다만 지금은 제가 좀······ 솔직히 말해서 지난 몇 년 장현재 대표만 보고 살았던 탓에 미련을 떨치는 방법을 잘 모르겠거든요. 마음이 아픈데 이걸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까요.”
강준일은 날더러 어쩌라고, 라고 하고 싶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한녹영은 저를 한심하게 보는 강준일을 향해 홀로 웃었다. 제 속을 다 헤집어놓는 듯한 저런 모습이 좋다고 할까. 지금 제게 필요하다고 할까. 분명 편한 사람이 아니고, 쉬운 사람은 더더욱 아니며, 뾰족하게 깎아낸 얼음 칼 같은 사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한 번씩 편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나한테 메조 기질이 있었나.
“장현재 대표와 한녹영은 단순한 주인과 말 잘 듣는 인형 사이를 넘어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이기도 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침대를 공유한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나? 몰랐다. 한녹영이 짧게 웃었다. 그리곤 솔직하게 말했다.
“전 침대를 공유하고 싶어 했는데, 장현재 대표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절 거절했죠.”
몸을 나누는 건 정식 연인이 된 이후에, 라고 했었지. 당시는 사귀지도 않고 그냥 잠만 자는 가벼운 관계는 싫어하나보다. 역시 현재 형은 진중해, 하고 생각하며 감동했는데 훗날 알게 된 바로는 이맘때 장현재에겐 상대가 있었다. 회사 최대 투자자의 부인이라고 했던가? 그냥 투자자라고 했던가. 아무튼 엄청난 재력과 힘을 가진 여자라는 건 확실했다. 얼핏 얼굴을 본 적 있는데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고, 굉장한 미인이었다. 누군가 장현재의 스폰서였던 여자, 라고 귀띔 해줬는데 그때는 믿지 않았다. 장현재를 음해하려는 의도로 생각해 오히려 성질만 잔뜩 부렸던 기억이 있다. 이제야 그 말은 사실이었겠구나, 하고 생각된다.
“침대를 나눠 쓰는 사람을 다른 남자의 침대로 밀어 넣으려고 한 건가 했는데,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닌 모양이군.”
강준일이 서늘하게 내뱉은 말에 한녹영은 한 대 얻어맞은 듯 맹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상식적으로 마음이 있는 상대를 다른 사내의 침대 속으로 어떻게든 밀어 넣으려고 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장현재는 몇 번이나 한녹영을 강준일의 침대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그리고 한녹영은 ‘너와 날 위해서야.’ 라는 말에 넘어갔고.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저도 참 어지간하다. 한녹영이 피식거리며 시선을 들었다. 또 한 번 느끼지만 역시 강준일과 함께 온 보람이 있다. 술값이 아깝지 않겠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웨이터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안주는 싱싱해 보이는 과일이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국내산 수입산을 망라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과일은 전부 내온 모양이었다.
테이블 위에 세팅을 완료한 웨이터가 양주의 뚜껑을 따 강준일의 잔에 따라주었다. 한녹영이 그 사이 스스로 맥주의 뚜껑을 땄다. 웨이터가 내온 맥주는 산미구엘이었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치 물처럼 들이켠 후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올려놓자마자 손으로 배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쓴 맛이 남아있던 입안이 금세 시원하고 달달해졌다. 올해 겨울은 배가 유난히도 달다. 한녹영은 쓴 입맛을 배로 씻어낸 후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중인 강준일을 보았다.
“제게 귀라도 열어놓고 살라고 했었죠? 저 지금 귀 열어뒀거든요. 대표님이 보는 장현재 대표는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준일의 말은 신뢰할 수 있으니까. 주변을 수소문해 소문을 주워듣는 것보다 강준일에게서 듣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 같았다.
“계략과 술수에 능한 냉혈한.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지. 그가 한울 에이전시를 지금만큼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소속 연예인들을 권력가의 섹스파트너로 팔았기 때문이었어. 성로비로 이득을 얻고, 때론 그걸 무기로 삼기도 하지. 본인 또한 제 몸뚱이를 팔아 한울을 시작했으니. 장 대표가 데리고 있는 연예인들은 대부분 그에게 약점을 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강준일이 말한 약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한녹영은 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킨 섹스 동영상을 떠올렸다. 만약 얼굴이 망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가 장현재와의 결별을 원하게 되는 상황이 왔다면, 장현재는 그걸 절 옭아맬 약점으로 썼을까. 과거로 돌아오기 전이었다면 그를 맹신하고 있는 탓에 ‘절대 그럴 리 없어!’ 하고 확신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마 얼마든지 제게 치명타를 입힐 약점으로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 얼굴이 망가져 연예인으로서의 생명을 잃은 상태에서도 사용한 약점이 아닌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오로지 성공을 향한 욕망만 가득한 신인을 성로비에 이용하는데, 넌 그냥 둔 걸 보면 장현재 나름대로는 널 특별하게 생각했던 모양이군. 아니면 더더욱 특별하게 팔아넘기려고 지금껏 기회를 보고 있었거나. 내 생각에는 후자 같지만.”
생각에 잠겨있던 한녹영이 고개를 들었다.
“가뜩이나 스폰을 목적으로 내게 접근하는 것에 신물이 나 있던 차에 날 표적으로 삼으려고 널 내세운 것이 너무 눈에 보여서 짜증이 있는 대로 난 탓에 평소보다 심한 말을 퍼붓고 말았는데, 그 점에 대해선 사과하지. 내가 아무리 혀에 독을 묻히고 산다 해도 평소엔 그 정도로 막말을 하진 않아.”
사과를 하는 태도가 얼음장 같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최대한 담담한 마음으로 장현재를 신랄하게 평가하는 강준일의 말을 듣고 있던 한녹영이 입을 벌렸다. 지금 뭐라고? 무려 사과한다고 한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저 강준일 대표가?
“왜 그런 표정이지?”
“사과도 할 줄 아나 싶어서요.”
멍하니 대꾸한 말에 강준일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대체 네 머리속에 난 어떤 사람인지 그 머리를 한 번 갈라보고 싶군.”
“옆에 일주일만 있으면 얼어 죽을 것 같이 냉한 사람······.”
무려 강준일이 사과했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얼떨떨해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가 뒤늦게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차마 강준일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죄 없는 테이블만 내려다보았다. 강준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장 대표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이라면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다. 따로 잡힌 약점이 없다 해도 그냥 두고 볼 사람이 아니니까.”
제가 다른 회사로 옮겨가는 걸 그냥 두고 보진 않을 거라는 뜻인가.
“영상은 없으니 그 외에 따로 잡힌 약점이 있나?”
“그런 건 없지만······ 근데 왜 영상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겁니까? 대표님과는 실패했지만, 다른 권력가한테는 성공했을지 모르잖아요.”
제게 섹스 영상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말에 반박하자 강준일이 피식 웃었다.
“이 바닥 소문이 얼마나 좁은데. 이놈저놈에게 다리를 벌린 사람을 비싸게 사려고 하겠나. 나만 먹을 수 있다는 희소가치에 투자하는 거지. 성로비는 딱 한 명에게만 하는 것이 장현재 스타일이지.”
그런 의미였나. 일대일 맞춤이라는 건가. 한녹영이 씁쓸하게 웃었을 때 강준일에게 전화가 왔다. 그가 통화를 위해 룸을 나갔다. 한녹영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이번엔 방울토마토를 안주 삼아 집어먹었다. 신맛보다 단맛이 더 강한 방울토마토가 입맛에 맞아 한 알 더 집어먹었을 때 간단히 통화를 끝낸 강준일이 돌아왔다.
“술자리는 이만 접어야겠군.”
한녹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일이 생긴 듯 보이는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질 마음은 없었다.
“헬스장까지 데려다주지.”
“택시타고 가면 됩니다.”
“그러든가.”
두 번 권하지도 않는다. 룸을 나가며 계산을 하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던 한녹영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지갑! 생각해보니 지갑을 챙겨오지 않았다. 문제는 휴대전화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그제야 운동복만 챙긴 후 휴대전화와 지갑을 협탁 위에 고스란히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이런 바보. 이런 둔팅이. 그 사실을 이제야 떠올리다니.
“강준일 대표님.”
혀를 깨물깨물 하던 한녹영이 어쩔 수 없이 강준일을 불렀다. 한 발 앞서 있던 강준일이 뒤를 돌아보았다. 으, 어떡하지. 차마 입이 안 떨어질 것 같은데. 그래. 대사를 친다고 생각하자.
“카드와 휴대전화를 전부 집에 두고 왔네요. 죄, 죄송합니다. 오늘 술값 계산을 대표님이 해주세요. 다음에 꼭 신세 갚겠습니다.”
“······.”
“그리고 아까 하신 말씀 받아들일게요. 데려다······ 주세요.”
연기 중이라 생각해봐도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민망함과 수치심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한녹영이 강준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술 산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외쳐놓고, 데려다줄 필요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거절해놓고 이게 무슨 쪽이냐.
“부, 부탁합니다.”
강준일이 보일 듯 말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곤 민망해 죽으려고 하는 한녹영을 뒤로 한 채 카운터에서 계산을 끝냈다.
1층으로 내려오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강준일이 먼저 운전석에 타자 한녹영 또한 부랴부랴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가 버리고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얼굴 팔린 옌예인이 히치하이킹을 할 수도 없으니까. 택시를 타고 ‘돈은 도착해서 드릴게요.’ 라고 말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니 암만 생각해도 내키지 않는다.
상호 형 연락처 정도는 외우고 다녀야겠네.
박상호의 연락처라도 외우고 있었다면 가게 전화를 빌려 데리러 오라고 했을 텐데.
가능한 방법을 하나씩 지우다 보니 남은 건 강준일 차에 얻어 타는 것뿐이라 민망함을 무릅쓰고 타긴 했는데, 생각할수록 창피하다. 한녹영이 창에 비친 벌건 제 얼굴을 힐끔대며 몰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장 대표 그늘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뭐지? 한 달 전쯤 봤을 때만 해도 장 대표의 충실한 인형이더니. 한 달 사이에 마음이 바뀐 이유가 궁금하군.”
“장현재 대표에게서 처절하게 버림받는 모습을 봤다······ 라고 한다면 믿으실까요?”
정말 믿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딱히 이유로 댈만한 핑계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강준일도 이유가 대단히 궁금해서 던진 질문 같지는 않아 믿거나 혹은 말거나 하는 심정으로 한 말인데, 그는 뜻밖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이 믿기세요?”
“거짓말이었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일전에 만났을 때 ‘봤나?’라고 했었지. 뒷조사에서 외조모가 무당이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고 했었고.
“혹시 점이나 미신 같은 걸 믿는 편입니까?”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지. 무당이었던 네 외조모의 신기가 아주 대단했다지.”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어릴 적이라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데 가끔 외조모 집에 가면 대문 앞에 으리으리한 차가 서 있곤 했었죠.”
정재계 인사들이 대문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만큼 용한 무당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말은 훗날 부친에게 들었다. 외조모는 아무리 대단한 권세가도, 재벌가에서 돈을 싸들고 와도 본인이 내키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았단다. 그렇게 도도하게 굴어도 아쉬운 쪽은 저들이라 한낱 무당인 외조모에게 굽실댔다나.
“네 외조모 집 앞에 서 있었던 으리으리한 차들 중 내 조부의 차도 있었을 거야.”
“정말입니까?”
한녹영의 동공이 커졌다.
“한창 사업을 확장하던 중에 긴가민가한 사안이 있으면 대단한 무당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고, 꽤 도움이 되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거든. 네 뒷조사를 하다 보니 외조모 이름이 나왔고, 그 이름이 조부에게서 자주 듣던 이름이란 걸 알게 되었지. 그러니 난 조부 때문에라도 완전히 무시할 순 없는 입장이야. 뭐 개인적으로도 무속신앙에 도움 받은 적이 있기도 하고. 네 외조모는 잘 계신가? 어느 순간 갑자기 신당을 접고 종적을 감추어 아쉬운 적이 종종 있었다고 불과 얼마 전까지도 말씀하시더군.”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종적을 감추셨죠. 지금은 생사조차 모르고요.”
주 고객층이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었으니 복채로 받은 돈이 꽤 되었는데 그 많은 재산을 전부 기부해버렸다며 아버지가 울화통을 터트리곤 했었다. 그럴 때면 꼭 한녹영에게 ‘쓸모없는 놈!’ 하고 손찌검을 하셨는데, 바락바락 대들다 심하게 두들겨 맞곤 울다 잠드는 날이면 ‘난 정말 쓸모없는 놈인가?’ 하는 자조감이 들곤 했었다. 따지고 보면 외조모에게 전 하나밖에 안 남은 핏줄인데 한 푼도 남겨주지 않고 모조리 남을 위해 써버렸으니까. 어디 그뿐일까. 떠나기 직전 외조모는 한녹영을 찾아와 ‘너와의 인연은 이쯤에서 끊을 참이니 죽어서도 찾지 않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언제나 제게 냉랭했던 외조모가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는데, 외조모에게는 손자인 한녹영보다 당신의 딸인 한녹영의 어머니가 더 소중했기 때문에 손자에게는 차가우셨던 것 같다. 끝내는 한녹영의 어머니가 약속받은 복을 다 끌어와 이렇게 될 걸 알고 계셨기 때문에.
“너도 신기를 물려받아 앞날을 내다본 건가?”
신기 따윈 약에 쓸래도 없지만. 점이나 미신 같은 걸 믿는다고 해도 제가 2019년까지 살다가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다는 말은 믿지 않을 테니 그냥 신기가 있는 걸로 했다.
“뭐······ 그런 셈이죠.”
“그래서 네가 본 미래에 너와 내가 침대에 맨몸으로 엉켜있던 모습도 있던가?”
강준일이 예고도 없이 날린 폭탄에 놀라 혀를 깨물고 말았다. 표면이 약간 찢겼는지 피 맛이 느껴졌지만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한녹영이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무, 무슨?”
“저런 사람이 침대에선 그렇게 뜨거웠다니 웃겨, 라고 했었지.”
들었구나. 역시 아주 정확하게 들었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들었어. 간신히 본래대로 돌아온 얼굴이 다시 벌게졌다. 민망해서 눈 둘 곳을 모르겠다. 그냥 택시를 탈 걸 그랬다. 얼굴에 철판 깔고 ‘나 알죠? 연예인인데, 지갑을 두고 와서 그러니 요금은 도착해서 드릴게요.’ 라고 할 걸. 이런 곤혼스러운 지경에 처할 줄 알았더라면 생면부지의 기사에게 잠시 쪽팔리고 말 걸 그랬다.
“내가 침대에서 그렇게 뜨겁던가?”
난처해 죽을 지경인 한녹영을 힐끔 보며 계속 민망한 질문을 던지는 강준일의 입매에 미소가 맺혀있었다.
“그, 그게 왜 궁금합니까?”
“내가 뜨거웠다면 그건 네 몸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일 테니까. 네 혼잣말을 듣고 궁금해졌지. 너와 내가 정말 몸을 섞게 될까. 정말 몸을 섞게 된다면 네가 어땠기에 내가 무려 뜨거워졌을까, 하고.”
술 마시자는 말에 질색하며 싫어하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뭘까 했더니만. 그냥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뛰어내려버릴까. 진심으로 고민하며 문의 손잡이까지 잡았다.
“지금은 해골을 끌어안고 발광하는 기분이 들어 영 뜨거워지지 않을 것 같은데.”
강준일이 미미한 웃음기를 띤 눈으로 한녹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앞날을 봤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되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저와 대표님이 벌거벗고 침대에 드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장현재의 말에 따르기 위해 인사불성이 된 강준일의 침대에 도둑처럼 기어들어가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 확신하지?”
“저와 자고 싶으세요?”
강준일이 시선을 돌렸다. 약간의 장난기가 맺혀 있던 그의 입매가 어느 새 다시 본래대로 차갑게 돌아가 있었다.
“장현재의 그늘 아래에 있는 넌 흥미 없어.”
그 말은 즉 장현재의 그늘 밖으로 완전히 나오면 흥미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뜻인가? 그런 뜻으로 한 말 일리 없을 텐데, 우습게도 그렇게 들렸다. 홀로 웃은 한녹영이 뭐라 말문을 열려 한 순간 차가 섰다.
“내려.”
강준일이 짧게 말했다. 흡사 쫓아내는 말투였다. 그제야 창밖을 내다보니 헬스장 앞이다.
“데려다줘서 고맙습니다. 오늘 술값은 꼭 갚을게요.”
“잊어도 돼. 어차피 네가 마신 건 맥주 한 병 뿐이었으니까.”
“과일도 먹었······ 아무튼 제가 산다고 해놓고 못 사게 되었으니까요. 빚은 꼭 갚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갚지 않으면 꼭 뒷간에 갔다가 안 닦고 나온 기분이 들 것 같으니까. 한녹영이 통보하듯 말한 후 부랴부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태도로 곧장 문을 닫았다.
지난번처럼 휑하니 떠날 것 같던 강준일이 몸을 뻗어 조수적 쪽 창문을 내렸다.
“외출할 생각이라면 그 전에 거울을 꼭 보도록 해.”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강준일의 차가 곧 떠났다. 한녹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제 차에 올라타자마자 거울을 살펴봤는데 곧 “이게 뭐야?!”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분명 헤어로션으로 응급처치를 해두었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머리를 감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일어난 것 마냥 산발이었다. 덕분에 본래 미모가 30퍼센트는 감소되어 보인다. 어쩐히 제 얼굴을 볼 때마다 강준일의 입매가 묘하게 실룩이는 것 같더라니. 한녹영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빗어내려다 관두었다. 이런 엉성한 손짓으로 해결될 상태가 아니다.
집에 돌아오자 옷 무덤이 사라져 있었다. 말끔해진 거실에 앉아 품에 쿠션을 꼭 끌어안은 채 워킹데드를 보고 있던 박상호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이제 왔냐? 머리는 왜 그 모양이야? 제대로 안 말렸어?”
“어.”
“지금껏 운동한 거야? 하도 안 와서 전화했더니 벨소리가 네 방에서 울리더라.”
“두고 갔어. 지갑도. 내내 헬스장에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잠깐 어디에 들렀다 왔어.”
헬스장에서 강준일을 만나 술 마시러 갔다 왔다고 하자니 분명 꼬치꼬치 캐물을 것 같아 대충 에둘렀다. 자세한 얘길 꺼리는 한녹영을 눈치 챈 박상호가 대충 짐작한다는 듯 고개른 끄덕였다.
“옷은 어떻게 했어?”
“기부했지.”
“혼자 다 정리하기 힘들었을 텐데.”
“전화했더니 기부 받는 업체에서 사람 보내주더라. 양도 양이지만, 대부분 명품인 거 보고 헤벌쭉해서 신나게 실어가더라. 네가 입던 옷이라 사이즈 맞는 사람이 많진 않을 것 같지만. 아무튼 옷이 가득 든 박스가 나갈 때마다 내 가슴이 어찌나 쓰리던지. 그리고 인맥 총 동원해서 너 재계약 안 할 거라는 소문 은근히 흘렸다. 기다리면 접촉해오는 기획사 있을 거야.”
“고마워, 형.”
“고맙긴. 다른 기획사서 러브콜 오면 그냥 덥석 계약하지 말고 꼼꼼하게 따져.”
“걱정 마. 이번엔 무작정 사인부터 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형이 먼저 알아보고 허접한 데 말고 진짜 괜찮은 회사면 말해줘.”
“어, 그렇게 할게.”
정작 한녹영보다 박상호가 더 신나보였다. 한녹영은 “언제쯤 러브콜이 쏟아지려나?” 하고 벌써부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박상호를 보며 짧게 웃었다. 그리곤 “나 좀 쉴게.” 하고 말한 후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눕는데 강준일의 말이 떠올랐다. 강현재를 계략과 술수에 능한 냉혈한, 이라고 표현했지. 시간이 좀 흘러서인가. 신랄한 평가가 아주 크게 놀랍진 않았다. 사실 저 말을 들은 순간에도 놀라지 않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현재를 신처럼 완벽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한녹영이었다. 설사 그의 내면을 엿봤다고 해도 냉철한 강준일의 평가에 어느 정도는 충격을 받았어야 마땅한데 뒤에 이어진 그의 사과에 놀라 충격이고 뭐고 받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충격을 더 큰 충격으로 덮은 건가. 이전에는 독설로 절 깐 강준일에게 좋은 감정이라곤 거의 없었는데 과거로 돌아와 생각을 바꾸니 그가 달리 보이는 것이 좀 우스웠다.
‘달리 보이기 시작한 건 병원에 누워있던 날 찾아왔던 그때부터였을지도.’
쉽거나 만만한 사람은 결단코 아니라 그와 대화를 하려면 신경을 바짝 세워야 해 좀 피곤한 느낌도 있지만 그래서 더 좋다고 할까. 생각이 장현재에게로 흘러갈 틈을 많이 주지 않으니 말이다. 강준일은 장현재와는 다른 의미로 제 신경을 촘촘하게 얽어매는 면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신경을 느긋하게 풀어둘 새가 없었던 탓인지 피곤했다. 한녹영은 나태하게 하품을 한 후 눈을 감았다. 졸음이 곧장 몰려왔다.
☆☆★☆☆
“이상하네.”
한녹영이 시선을 들었다. 아까부터 박상호는 오줌을 참는 것 마냥 마려운 표정으로 거실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체구나 작으면 또 모를까. 산만한 덩치로 쉴 새 없이 움직이니 신경 쓰여 죽겠다.
“정신 사나워!”
“어, 어. 내가 좀 그랬지? 미안.”
멋쩍게 웃은 박상호가 한녹영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그제야 한녹영은 대본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어제 5회 대본을 받았고, 역시 감탄했다. 재밌다. 어느 한 부분 지루한 곳이 없었다.
빨리 촬영에 들어가면 좋겠다. 캐스팅은 완료되었을까. 대본을 보면 볼수록 마음이 조급해져 ‘김현영 작가에게 전화해볼까? 재촉하는 것처럼 보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잠시 차분해졌나 싶었던 박상호가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목이 타는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는 그가 “이상하네, 이상해.” 하고 중얼대며 또 거실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한녹영이 결국 대본을 내려놓았다.
“뭐가 이상해?”
“이 바닥 소문 빠른 거 알지? 이미 네가 한울이랑 결별한다는 소문이 구석구석까지 다 퍼졌을 거란 말이야. 그제 낮에 떡밥을 뿌렸으니 계산기를 두들겨본 기획사들로부터 러브콜이 쏟아져야 정상인데, 어째 연락이 한 통도 없잖아. 이상하지 않냐?”
왜 저렇게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구나 했네. 정작 당사자인 한녹영은 여유만만한데, 박상호가 더 초조해서 난리였다.
“아직 계산기를 덜 두들긴 모양이지. 뭘 그렇게 초조하게 굴어? 기획사야 회사에서 나온 후에 찾아봐도 되는 거고.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초조해하고 그래? 이제 겨우 이틀 지났다. 형이 이렇게 성격 급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어.”
“내가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어. 좀 느긋해져. 막말로 나 데려가겠다는 회사 없으면 형이 차리면 되잖아. 나 혼자 1인 기획사 하든가.”
울타리가 있으면 좋지만, 초조하고 성급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우리 녹영이 이제 다 컸네. 그런 느긋한 소리를 다 하고. 어른 같아.”
한녹영을 바라보는 박상호의 눈에 기특함이 가득했다. 머리라도 쓰다듬을 기세였다. 한녹영이 실소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 스물일곱이거든.”
거기다 무려 현역 예비역이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군에 현역으로 다녀온 덕분에 많은 남자 연예인들의 고민 중 하나인 군입대로부터 자유롭다. 공백기 걱정할 필요 없고, 괜히 현역 안 가려고 이리저리 꼼수 써서 혹시라도 병역비리 터지진 않을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가야하는 거면 빨리 갔다 오자. 뭘 하든 제대 이후에 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싶어 빨리 다녀온 건데, 참 잘한 선택이었다.
“우리 녹영이 피부가 뽀얗고 예뻐서 가끔 십대처럼 보일 때가 있거든.”
“아부하지 말고. 도망자 캐스팅 완료되었는지 그거나 좀 알아봐줘.”
“안 그래도 오전에 슬쩍 알아봤는데 정인호 쪽에서 확답을 안 주고 애먹이는 모양이야. 덥석 하자니 제작 환경도 열악하지, 시청률도 쪽박 찰 것 같지. 그런데 확 포기하기엔 대본이 좋으니 고민하는 거 아닐까? 할 듯 말 듯 애매한 태도를 취하니 도망자 쪽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만 태우는 것 같다더라고.”
“그게 뭐야. 어차피 거절할 거면서.”
한녹영이 혀를 찼다. 시간 끌기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러다 촬영 날짜가 점점 늦춰지면 고생하는 건 이쪽이다.
“어차피 거절할 거라니. 이러다 할 수도 있잖아.”
“아니야. 절대 안 해.”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내 말이 맞다니까. 두고 보면 알······ 정인호 선배가 신은주 작가 작품과 맞붙는 신인 작가 드라마 주연을 맡을 리 없잖아.”
둘러댄 말에 박상호가 동의했다.
“그렇긴 하다만. 저녁은 뭐 먹을래?”
벌써 저녁때인가. 시계를 보니 어느새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요샌 휴식기인데 뭐 이리 하루가 빨라? 오늘은 오전에 검도 도장에 갔다가 피부과에 들른 후 집에 돌아와 대본 잠깐 봤을 뿐인데 5시라니.
순식간에 흐른 시간에 당황한 것도 잠시, 한녹영이 배를 문질렀다. 슬슬 허기가 느껴지긴 했다.
“글쎄. 딱히 떠오르는 음식은 없는데. 형은 뭐 먹고 싶은데?”
“오랜만에 삼겹살이 딱 땡기는데. 소주랑.”
박상호가 입맛을 다셨다. 삼겹살에 소주라. 한녹영의 입안에도 침이 고였다. 살 뺀답시고 기름기 많은 삼겹살을 멀리한 지가 언제더라. 한 몇 년 된 것 같은데.
“냉장고에 있어?”
“없어. 장보러 가야해.”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장보러 가자.”
“너도 가려고?”
“어.”
“검도 뛰고 와서 온몸이 쑤신다더니.”
“파스 붙여서 견딜 만 해. 바람도 쐴 겸 같이 가.”
“그래. 그럼. 들어가서 무장하고 나와.”
참 별일도 다 있네, 하는 투였다. 마트에 따라가겠다니 의아해 하는 박상호를 뒤로 한 채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한겨울이라 선글라스는 튀어서 야구 모자를 꾹 눌러쓰고, 목도리를 눈 밑까지 둘둘 둘렀다. 얼굴을 거의 가린 상태라 수상쩍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긴 좀 그랬다.
바깥으로 나오자 벌써 나갈 준비를 마친 박상호가 보였다. 그는 꼼꼼하게 무장한 한녹영과는 달리 집에서 입던 옷 위에 검정 패딩만 걸친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박상호의 옷차림에 관심을 두지 않아 뭘 입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겨울마다 저것만 걸쳤던 것 같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적나?”
한녹영이 한 십 년은 입었을 법한 박상호의 낡은 패딩을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월급 얘기를 꺼내자 영문을 몰라 하던 박상호가 한녹영의 시선 닿은 곳을 깨닫곤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옷이 낡아서 그래? 한 십년 넘게 입었더니 보기에 좀 그렇지?”
“다른 옷 없어?”
“어. 옷이야 뭐 몸만 가릴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 나야 연예인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니까 대충 아무렇게나 입어도 돼.”
“형 혹시 빚 있어?”
장현재가 제가 제멋대로 상상했던 그런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어도 직원들 월급도 제때 주지 않은 악덕사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과거로 돌아온 이후 부쩍 박상호와 자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느낀 것이 있는데, 유난히도 돈에 신경 쓴다는 점이었다. 장현재 스타일의 옷을 전부 기부해버린 후 제 드레스 룸에 들어왔다가 휑하니 비다시피 한 - 꽉 차 있었던 예전에 비해 그렇다는 거다. - 것을 보고 ‘여길 가득 채운답시고 아무거나 막 사대지 마라. 그거 다 낭비고 사치고 허영이다.’ 라고도 했었다.
“빚은 무슨············ 다 갚았어. 마이너스에서 시작해서 이제 다시 돈도 좀 모았고.”
“진짜 빚이 있었어?”
혹시나 하고 던져본 말인데, 진짜였어? 예측이 맞자 한녹영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좀 쪽팔리긴 한데 한 7-8년 전에 자그맣게 기획사를 하나 차린 적이 있거든. 내가 스무 살부터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건 알지? 슬슬 보는 눈도 생기고 인맥도 좀 쌓아서 자신감이 붙은 차에 썩 괜찮아 보이는 인재를 한 명 발굴한 것이 아니겠냐. 웃긴 게 당시 눈이 돌았는지 주분야인 배우가 아니라 가수를 키우겠다고 깝쳤거든. 우연히 걔 노래를 듣는데 필이 팍 꽂혀서 눈이 돈 거지. 걔 키워서 톱가수 한 번 만들어보겠답시고 설쳤다가 쪽박 찼지 뭐. 스타 작곡가한테 곡 받고, 앨범 제작하고, 뮤비 찍고, 여기저기 홍보하느라 통장 마이너스 찍었지만 자신 있었거든. 노래가 유명세 타면서 확 터질 것 같은 찰나에 스캔들이 터진 거야. 알고 보니 학창시절에 일진이었다더라. 애들 패서 돈 뺐고, 성매매하고······ 와아. 진짜, 나도 감쪽같이 속았다니까. 정말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게 생겼었거든. 암튼 스캔들 이후 빚만 남긴 채 망했지. 덕분에 사람은 노는 물에서만 놀아야 한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교훈을 얻고 한울에 들어온 거고.”
본인에게는 쓰라린 실패의 경험이었을 일을 담담히 얘기하는 박상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스캔들로 한 번 실패한 사람을 제가 또 스캔들로 망치지 않았나. 거기다 다시 기획사를 차리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 쉽지 않았을 텐데, 힘겹게 맘먹고 다시 차린 회사를 저로 인해 말아먹었으니 당시 박상호의 심정이 얼마나 처참했을까.
“진짜 다 갚았어?”
“다 갚았고 벌써 다시 꽤 모았다니까. 이 빚이란 놈이 사람을 참 옥죄이더라고. 은행 빚을 제일 먼저 갚고, 그 다음에 주변에서 꾼 돈을 갚았거든. 다들 사람이 좋아서 당장 갚으라며 닦달하지도 않았는데, 어찌나 마음이 불편하던지. 그러니까 너도 빚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 특히 사채 쪽은 쳐다보지도 말고. 난 그나마 사채는 안 써서 다행었는데, 주변에서 사채 쓰고 인생 말아먹은 경우 여럿 봤다. 뭐 네가 사채 쓸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사채 무서운 거 나도 알아.”
“어떻게 알아?”
“아버지가 도박 땜에 진 사채빚 내 앞으로 달아놓고 야반도주 했었거든. 빌린 돈은 고작 이천이었는데 내가 갚은 돈은 무려 일억이야. 현재 형이 나 발탁해서 재능이 있다며 전속계약 맺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신장 한 개, 눈깔 한 개로 살고 있거나 어디론가 팔려갔을 지도 모르지.”
뜰지 안 뜰지 보장도 없었고, 그땐 살이 쪄 외모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는데 넌 분명히 될 거라며, 장래를 위해 투자한다며 일억이란 큰돈을 해결해준 장현재를 어떻게 안 믿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른 채 제 모든 걸 장현재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쓰게 웃는 한녹영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박상호가 이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왜 장 대표라면 사족을 못 쓰나 했더니만. 이유가 있었네. 장 대표가 대단한 사람이긴 해. 보는 눈은 확실하거든. 지금껏 장 대표가 찍어서 안 뜬 연예인이 없었어. 뭐 어떻게든 뜨게 만들기도 했지만, 본인에게 영 재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거든.”
“마트나 가자.”
장현재 얘기로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한녹영이 현관으로 향하며 신발을 신자 박상호도 부랴부랴 따라왔다.
“어. 그래. 후딱 갔다 오자. 배고프다.”
두 사람은 근처의 대형마트로 향했다. 평일 저녁 무렵인데도 마트 안은 장보러 온 사람들로 제법 북적이고 있었다. 주부들이 많은 걸 보니 저녁거리를 사러온 것 같았다.
난방이 잘 되어 훈훈한 실내에서 머플러를 바짝 올린 채 다니는 한녹영을 향해 사람들이 힐끔힐끔 시선을 던져왔다.
“뭐 살까?”
“삼겹살 먹고 싶다며. 그거 사.”
“진짜로? 너 괜찮겠어?”
“나 다이어트 관뒀잖아. 그리고 최소 5kg은 찌워야 한다는 김 작가님 말 잊었어? 나 이제 겨우 3kg 불었어.”
다이어트를 접은 후 예전보다 몇 배는 먹는데도 움직임이 많다보니 기대만큼 살이 잘 안 붙는다. 근육통이라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온몸이 뻐근해서 움직일 때마다 아프지만 이게 다 근육이 생기는 과정이다, 라고 생각하며 참는 중이었다.
“역시 살찌우는 데는 삼겹살이 최고지. 기름 자글자글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척 걸치면 캬아······. 내가 파절이 기막히게 해줄게.”
박상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트를 밀었다. 정육 코너에 도착하자 여러 브랜드에서 각자 자기네 고기 먹어보라며 소리를 높였다.
“시식 해보고 사자.”
박상호는 삼겹살을 구워주는 시식대 앞마다 카트를 멈추며 맛을 봤다.
“너도 먹어봐.”
“난 괜찮으니까 대충 아무데서나 사.”
“대충 아무데서나 살 순 없지. 얼마 만에 집에서 구워먹는 삼겹살인데. 진짜 맛있는 데서 살 거야.”
그는 정말로 시식대마다 카트를 멈추고 맛을 봤고, 한녹영은 괜히 제가 다 민망해서 머플러를 더 바짝 올린 채 따라다녔다. 다섯 번째 시식대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맛있는 지리산 흙돼지입니다. 맛보고 가세요.”
유난히도 주부들이 많이 모여 있어 이상했는데, 시식대 앞을 지키고 있는 직원이 20대 중후반 정도의 남자였다. 박싱호는 “흑돼지 맛있지!” 하며 틈을 비집고 들어가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맛보더니 호오, 하고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맛있나 보았다.
“녹······ 아. 이리 와서 맛 좀 봐봐!”
그리곤 틈에 끼고 싶지 않아 뒤에 떨어져 있는 한녹영을 향해 이리 와서 맛 보라며 손짓을 해댔다. 한녹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더러 지금 저 틈을 비집어 들어가서 시식 고기를 맛보라고? 나 참, 어이가 없······. 고개를 가로젓던 한녹영이 얼핏얼핏 보이는 지리산 흑돼지 시식 담당 직원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장한······ 경? 시식대 앞에 가득한 사람들 머리 때문에 확실하게 보이진 않지만 장한경 같았다.
‘장한경이 왜 여기에······?’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빡빡한 사람들 틈을 비집어 들어가려다 누군가 한녹영의 머플러 끝을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머플러가 풀리며 얼굴이 드러니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꺅! 한녹영이다!” 누군가 외쳤고, 순식간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한녹영을 찍으며 “진짜 잘생겼다.” “실물 대박!” “피부 진짜 좋다.” “어떡해, 나보다 얼굴 더 작아.” 하며 수군수군댔다. 시식에 정신이 팔려 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상호가 멍해 있는 한녹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박상호는 “뭐해? 빨랑 뜨자.” 하고속삭였지만, 한녹영은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장한경이 맞았다. 투명한 위생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제가 망쳐버렸던 장한경이었다. 장한경은 제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녹영을 보고 놀라 눈을 부릅떴다.
“하, 하, 한녹영? 진짜 실물 한녹영이네요. 우와, 대박. 진짜 예쁘게 생겼······ 아니 잘생기셨네요.”
연극을 보고 난 후 장한경의 연기에 흠뻑 반한 박상호가 반드시 장한경을 만나고 가야겠다며 대기실로 무작정 쳐들어갔을 때, 한녹영도 따라갔다. 사실 한녹영의 얼굴이 대기실까지 가는 프리패스였던 셈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동료 배우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던 장한경은 느닷없이 문을 열고 나타난 한녹영을 보고 정확히 저렇게 말했었다. 무심코 튀어나온 예쁘다는 말에 당황해서 서둘러 잘생겼다고 말을 바꾼 후 머쓱하게 웃는 표정까지 이전과 똑같았다.
장한경과의 첫 만남은 초여름이었는데 왜 지금. 그것도 무대가 아닌 이런 곳에서?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보니 장현재가 재계약 서류를 내밀었던 시기도 이전보다 빨라졌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오며 변화가 생긴 건가? 하긴 변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생각해 보니 변한 것이 벌써 제법 되었다. 신 작가 드라마 대신 도망자 출연 계약서에 사인했고, 장현재 곁을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그러니 장한경과의 악연도 얼마든지 인연으로 바꿀 수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손끝이 초조해졌다.
“화장품 CF에서 너무 예뻐서 반했습니다.”
꼭 저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던 장한경의 미래를 망치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기분이었다. 한녹영이 아무 말 않고 가만히 보고 있자 장한경이 당황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옆에서 박상호가 “녹영아?! 왜 그래?! 어서 가자니까!” 하고 자꾸만 재촉해왔지만, 한녹영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제가 터트린 스캔들로 인해 쏟아지던 비난 기사가 떠올랐다. 피해자인데 보호받기는커녕 물고 뜯기고 짓밟혀 결국엔 자살해버렸던 장한경이 살아서 눈앞에 있다. 저는 그의 자살 기사를 접하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똑같이 비참해지고 나서야 죽음을 택한 장한경의 심정을 이해했다. 과거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제대로 살 기회를 얻고 나서야 그에게 죄책감을 가졌다. 제 행동을 후회했다.
과거로 돌아온 탓에 지금 이렇게 장한경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얼굴로 눈앞에 있지만, 이전 제가 한 행동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녹영은 미안했다. 한없이 부끄러웠다. 어머니의 은혜로 이렇게 과거로 돌아온 데에는 이전 제가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게 빚을 갚으라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배우죠?”
한녹영이 한 말에 장한경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박상호 또한 어서 가자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한녹영을 잡아끌다 말고 멈칫 하며 새삼스레 장한경을 보았다.
배우라고? 그러고 보니 마스크가 제법 괜찮네? 박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무대에서 본 것 같아서······.”
박상호가 장한경을 회사에 데려왔을 때 연극을 오래해 연기력이 탄탄하다고 했던 것 같아 핑계대자 장한경이 반가워하며 환하게 웃었다.
“제가 나온 연극을 보셨어요? 거의 단역만 했었는데 절 알아보신 겁니까? 어떤 연극을 보셨는데요?”
“그건 기억 안 나고, 내가 눈썰미는 좀 있는 편이라서요.”
일 년에 몇 편 정도는 늘 연극을 보러 다녔던 편이라 자연스럽게 변명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진짜 영광입니다. 한녹영씨가 제가 나오는 연극을 보셨다니요. 거기다 무려 알아봐주시기까지 하고, 감격했어요.”
그 사이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 이젠 아예 빽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에워싸듯 주변을 둘러싼 인파를 보고 박상호가 곤혹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가야해.”
한녹영도 주변에 시선을 주고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대뜸 박상호에게 장한경을 키우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키워줄 테니 연락하라는 것도 우습다. 제가 누굴 키울 만큼의 연기자도 아니니. 어쩐다. 박상호가 고민하는 한녹영의 팔을 강하게 잡아끌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녹영은 끌려가는 와중에 어떻게 하면 장한경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지, 하는 고민하랴. 사람들을 향해 웃어주랴. 때때로 악수해주랴 정신이 없었다.
“거기서 머플러를 벗으면 어떡해?!”
“내가 벗은 게 아니라 누가 잡아당겼어.”
“너 사진 엄청 찍혔을 텐데. 봐, 역시 벌써 SNS에 올라왔다. 뭐 별다른 말은 없네. 대충 훑어보니 이상하게 찍힌 사진도 없고. 삼겹살은 글렀으니 그냥 집에 가자.”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오느라 지친 박상호가 어깨를 축 내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삼겹살 먹을 생각에 부풀어있었는데 이렇게 되어 실망도 되었다.
“난 여기 있을 테니까 형이 가서 장보고 와.”
“그럴래?”
박상호가 단박에 반색했다.
“고기는 아까 그거 사고. 지리산 흑돼지.”
“그렇지 않아도 그거 살라고. 내가 먹어보니까 그게 제일 잡내 없고 쫄깃하니 맛나더라. 고기랑 야채랑 당분간 음식 해 먹을 재료랑 이것저것 해서 좀 사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 후딱 댕겨올게.”
“그리고 아까 그 시식 남자 연락처도 받아오고.”
“에? 연락처는 왜?”
뭐라고 해야 하지. 한녹영이 미간 사이를 모았다. 장한경을 만난 장소가 예전처럼 연극무대였으면 박상호가 먼저 난리를 쳤을 테니 이런 고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직 연기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내가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을 정도면 무대 위에서의 연기가 제법 인상적이었다는 뜻이잖아. 기획사 옮기는 일이 잘 안되어서 형이나 내가 회사 차려야 하는 일이 생기면 데려올까 싶어서. 잘 키워서 스타 만들면 좋잖아.”
뇌를 팽팽 돌려 힘들게 생각해낸 변명에 박상호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이내 안쓰럽게 표정을 바꾸더니 한녹영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아깐 느긋하게 굴라고 하더니 내심 너도 러브콜 없어서 걱정했구나. 괜찮아. 네 말대로 아직 며칠 안 되어서 그런 거니 시간이 지나면 연락이 쏟아지기 시작할 거야.”
“연락처나 따와.”
“무슨 연극에 나왔는지도 기억안난다면서.”
“그냥 좀 따와라!”
결국엔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박상호가 차에서 내렸다. 지도 아직 초짜면서 누굴 키우겠다는 거야. 저나 더 클 생각하지, 하고 구시렁대면서.
저 형이 진짜! 나중에 장한경 연기하는 모습 보면 나한테 엎드려 절할 거면서. 한녹영이 입매를 실룩였다.
박상호가 장을 다 보고 오길 기다리는 동안 한녹영은 인터넷 백화점에 접속했다. 카테고리에서 남성 아우터를 선택해 하나씩 쭉 살펴보았다. 사실 장을 다 보고 2층 의류 매장에 올라가 박상호에게 아우터 하나 선물할 생각이었는데. 머플러가 벗겨져 얼굴이 드러나는 마당에 2층은 문턱도 못 밟아 봤다.
인터넷으로 사주지 뭐. 어차피 형 안목보다 내 안목이 훨씬 나으니까. 내가 알아서 고르면 돼.
한녹영은 무난한 디자인으로 골라 결제했다. 본인은 뭘 입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아까 낡은 패딩이 눈에 들어오고 난 후부터 내내 마음이 쓰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제가 못되게 굴었는데도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고 과거로 돌아온 이후 변한 듯한 제 모습에 금세 마음이 풀려 헤헤대는 그가 고마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어찌 보면 속없고 헤픈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성격이라 다행이었고 고마웠다.
‘사는 김에 한수 형이라 코디 누나들 것도 살까?’
그 사람들도 그간 제 성질을 받아내느라 속이 꽤 문드러졌을 것 같은데. 고민은 짧았다. 한녹영은 아까 그 백화점쇼핑몰에 다시 접속해 로드와 코디들의 아우터도 샀다. 이왕 사주는 거 생색나게 좋은 걸로 사주자 싶어 가격대가 꽤 있는 걸로 골랐더니 순식간에 목돈이 훅 나가버렸지만 괜찮았다. 괜히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2-3일 내엔 배송되겠지.’
배송은 3-7일 정도 걸린다고 되어 있었지만, 어지간하면 이삼일내로 도착하니까. 근데 어떤 얼굴로 줘야 하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터라 벌써부터 어색하다.
후딱 다녀오겠다고 한 박상호는 40분이 지나서야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낑낑대며 돌아왔다. 그는 장 본 봉지를 뒷자석에 실어놓고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어깨부터 주물럭거렸다.
“어깨 빠질 뻔 했네.”
“뭘 저렇게 많이 샀어?”
“우리 일주일치 식량이다. 일주일 갈지 모르겠지만. 요새 계속 집밥 먹었더니 식재료 소진이 빨라.”
“연락처는 받아왔어?”
“내가 살다살다 사내놈 연락처를 따보긴 처음이다. 네가 하도 닦달해서 연락처 따러 간 김에 자세히 살펴보니····· 뭐 확실히 마스크가 괜찮긴 하더라. 몸의 비율도 좋아서 카메라가 잘 받을 것 같기도 했고. 연기를 못 봐 뜰지 안 뜰지 확언은 못하겠지만. 이름이 강한결이라더라. 전화번호 내 휴대전화에 있으니 이따 집에 가서 알려줄게.”
“형 휴대전화에 등록되어 있으면 됐어.”
박상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깐 연락처 알아내라고 그리 난리더니?”
한녹영은 그저 웃고 말았다. 당장은 어떻게 하면 예전 제가 한 파렴치한 짓에 대해 빚을 갚을 수 있을지 그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니, 방법을 ㅤㅊㅏㅊ을 때가지 연락처는 박상호가 지니고 있으면 되었다.
“그만 가자.”
한녹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박상호가 차를 출발시켰다.
“넌 옷 갈아입고 나와. 난 저녁준비 하고 있을 테니까.”
집에서 입고 있던 옷 위에 패딩만 걸치고 나갔던 박상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외투를 소파에 대충 벗어둔 후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한녹영은 그가 말한 대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곤 부엌을 기웃거렸다.
“뭐 도와줘?”
“스타님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 대본이나 보셔.”
성가신 파리 쫓듯 훠이훠이 한녹영을 거실로 내쫓은 박상호가 분주히 움직였다. 한녹영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물 찬 제비처럼 움직이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소파에 앉아 습관처럼 대본을 펼쳤다.
“우리 테라스 바닥에 앉아서 구워먹을까?”
잠깐 사이 준비를 마친 박상호의 말이었다. 한녹영의 시선이 자연스레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이 빌라를 사면서 겨울에도 테라스를 추위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난방 공사를 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었다.
“고기 구워먹고 거실쪽 문 꼭 닫은 후 테라스 문 활짝 열어두면 환기도 금방 될 테고, 야외에 앉아서 구워먹는 기분도 들 텐데. 어때?”
“그러자.”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한녹영이 그러자고 하자 박상호는 신이 나서 휴대용버너를 어디선가 가지고 나왔다. 그리곤 고기와 채소 등을 나르기 시작했다. 한녹영도 손을 거들어 접시를 옮겼다.
“집에 버너가 있었어?”
“사실 아까 마트에서 사왔어.”
박상호가 아이처럼 히죽 웃었다. 어쩐지. 휴대용버너가 왜 집에 있나 했네. 팬이 달궈지자 박상호가 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어갔다. 박상호는 버섯과 동그랗게 썬 양파도 팬 한쪽에 올렸다.
“고기는 여러 번 뒤집으면 맛없어.”
한녹영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집으려 하자 집게로 탁 쳐낸 박상호가 고기 박사처럼 근엄하게 말했다. 그는 잠시 더 두고 보다 딱 적당한 타이밍에 고기를 뒤집었다.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가 시각을 자극했다. 입안에 침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한녹영이 우선 허기라도 메우자 싶어 파절이를 먹으려고 젓가락을 집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나가볼게. 형은 고기나 마저 구워.”
박상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만류한 한녹영이 거실로 나왔다. 인터폰을 통해 내다보니 방문객은 장한수였다. 웬일이지? 문을 열어주자 잠시 후 실내로 들어선 장한수는 현관에 서 있는 한녹영을 보고 당황해 순간 뒤로 주춤했다. 한녹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뭘 저렇게 놀라. 내가 전염병 바이러스도 아닌데.
“웬일이야?”
“녹영이 이, 있었구나. 상호 형이 장훈이한테 닭가슴살 준다고 했다기에 가지러 왔어.”
“그걸 왜 형이 가지러 와?”
“나랑 장훈이랑 같이 살거든. 장훈이가 바빠서 틈이 안 난다고 해서. 난 오늘 한가해서 대신 가지러 왔는데······ 상호형은?”
장한수가 자꾸만 주춤했다. 자꾸만 눈치를 살피는 게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한녹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라스에서 삼겹살 구워.”
“그래? 테라스에서 삼겹······ 뭐?”
무심코 한녹영의 말을 따라하던 장한수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삼겹살 굽는다니까. 저녁 안 먹었으면 형도 와서 거들어.”
“안 먹었긴 한데······.”
장한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매로 테라스로 향하는 한녹영의 뒤를 따랐다. 열심히 고기를 굽던 박상호가 장한수를 향해 집게를 흔들었다.
“왔냐?”
“상호 형,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고기 굽는 일이지. 너도 앉아. 고기 먹고 가라. 이거 지리산 흑돼지다. 엄청 맛있어. 2근이나 샀으니 우리 셋이 먹어도 충분해. 녹영이야 개미 눈곱만큼 먹을 거고.”
박상호가 흐흐 웃었고, 한녹영이 도끼 눈을 떴다.
“내가 개미 눈곱만큼 먹을 거라고 누가 그래? 코끼리 눈물만큼은 먹을 거니 김칫국 마시지 마.”
“그래, 그래. 우리 녹영이 살쪄야 하니 많이 먹어.”
박상호가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한녹영은 “머리에 기름 묻어!” 하고 질색 했다. 스스럼없이 구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장한수의 얼굴은 얼떨떨함이 가득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 눈이 잘못됐나? 왜 저 두 사람 사이가 좋아 보이는 거지?
한녹영이 헛것을 보는 듯 안색이 허연 장한수를 향해 “앉지 않고 뭐해?” 하고 말하자, 그가 얼른 앉았다. 그 사이 박상호는 잘 익은 고기를 가위로 적당히 잘라 한쪽에 쌓아두곤 빈자리에 또 고기를 올렸다. 그리곤 “얼른 먹어.” 하고 말하더니 제가 먼저 가장 큼지막한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안으로 쏙 넣었다. 한녹영도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어보았다. 맛있다고 극찬하더니 과연 제법 훌륭한 맛이었다.
“소주는 안 샀어?”
“아, 안 갖고 왔다. 시원하라고 냉장고 안에 잠깐 넣어놓고 깜빡했네.”
“내가······.”
“내가 가져올게.”
한녹영과 장한수가 동시에 말했다. 장한수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가 자연스레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는 한녹영의 등을 보곤 엉거주춤 도로 앉았다.
“형,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곤 한녹영이 멀찍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후 부랴부랴 물었다.
“뭐가?”
“왜 둘이 다정하게 고기를 굽고 있는 거냐고? 아니 애초에 저 한녹영이 제 집에서 고기를 굽도록 했다는 게 말이 돼?! 다른 집에서 흘러온 음식 냄새에도 신경질을 바락바락 내며 오만 발광을 다 떨던 녀석인데?”
“녹영이 다음 작품 배역 때문에 살 찌워야 해.”
느긋한 박상호의 답변에 장한수가 가슴을 펑펑 쳤다. 제 질문의 요지는 그게 아닌데, 답답했던 것이다.
“내 말은! 왜 둘이 다정한 거냐고! 아까 막 농담 같은 것도 주고받던데. 저거 진짜 한녹영 맞아? 약이라도 먹었어? 막 기분 좋아지는 그런 약 말이야.”
“저건 진짜 한녹영 맞고, 약 안 먹었고, 요새 좀 얌전해서 대하기 편해.”
“얌전해졌다고? 잠깐 변덕이 아니라?”
“벌써 한 일주일 됐지? 잠깐 변덕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좀 얼떨떨하다. 자야겠다며 들어갔다가 한 두어 시간 만에 나오더니 뿅 하고 새 사람이 되어있더라니까?”
장한수는 뭔 개소리야,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은 표현할 말이 없었다. 고기를 뒤집은 박상호가 진짜라니까, 라고 하듯 눈을 위로 치켜떴다. 정말로 잔다고 들어갔다가 나온 한녹영은 뿅 하고 새 사람으로 변신했다. 처음에는 무슨 변덕인가, 또 무슨 지랄을 하려고 저러나,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그게 말이 되냐? 뿅 하고 새사람이라니.”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다.”
그때 양 손에 소주 한 병씩 들고 달랑달랑 흔들며 한녹영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한녹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병뚜껑을 따 박상호와 장한수에게 한잔씩 따라주었다. 제 잔에도 손수 소주를 채웠다. 그리곤 고기 한 점 먹고 소주 반 잔을 마셨다. 절로 캬 소리가 나왔다. 역시 삼겹살과 소주의 궁합은 환상적이다. 이 맛을 참 오래 잊고 살았다. 이 맛뿐일까. 장현재에 미쳐서 잊고 산 것들이 너무 많다.
잔에 남은 나머지 반을 마저 마신 후 다시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자 박상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겠냐? 너 주량은 그냥 그렇잖아.”
“소주 두 잔까지는 괜찮아.”
“천천히 마셔. 주량 두 잔이 다면서 급히 마시다 훅 간다.”
“잔소리는. 그리고 집인데 훅 가면 또 어때. 내가 술주정할까 봐 겁나?”
“네 술주정이야 자는 건데 겁날 일이 뭐 있겠냐. 사실 우리끼리 네가 성질 피울 때면 술 먹여서 재워버리자고 하기도 했어. 너 잘 때만 천사였거든. 평소에는 지랄견이고.”
눈을 흘기는 한녹영의 시선을 피하며 박상호가 키들대며 웃었다. 장한수는 엽에서 ‘저런 막말을 막 해도 되나?!’ 하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표현을 해도 꼭. 지랄견이 뭐냐?”
한녹영이 퉁명스레 내뱉었을 때 또 초인종이 울렸다. 오늘따라 방문객이 많다. 이번엔 장한수가 번개처럼 빠르게 일어나 “내가 나가볼게!” 하고 거실로 향했다.
“누구야?”
아는 얼굴인지 문을 열어주고 돌아온 그를 향해 묻자 난처하게 목덜미를 문지른다.
“대표님 오셨는데.”
대표님이라면 장현재다. 파절이에 고기를 싸서 막 입안으로 가져가려던 한녹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휴대용버너의 불을 끈 박상호와 장한수도 한녹영의 뒤를 따라 나왔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는 낯으로 실내로 들어서던 장현재가 삼겹살 냄새를 맡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녁 먹는 중이었어?”
“응. 매니저 형들이랑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던 중이었어.”
“너와 같이 저녁 먹으러 가려고 데리러온 건데. 너 좋아하는 스테이크 집 예약해뒀다. 옷 갈아입고 나와.”
당연히 한녹영이 먹던 식사를 팽개치고 그를 따라나설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한녹영은 주먹을 꾹 쥐고 담담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벌써 꽤 먹은 상태라 배부른데. 전화 먼저 하고 오지 그랬어.”
거절의 말에 장현재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구겨졌다. 배부르다는 말은 물론 거짓말이다.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던 거야. 이런 식으로 너 스케줄 없는 날 깜짝 등장하면 좋아했잖아.”
그랬다. 스케줄 빈 날 무료하게 늘어져 있다가 이런 식으로 장현재가 깜짝 등장하면 펄쩍 뛰어오를 듯이 좋아하며 하던 일 모두 팽개치고 감격해서 달려가곤 했었다. 모질게 버림받아 놓고도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에 혹시 예전처럼 장현재에게 달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녹영은 발끝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이제 그러지 마. 나한테도 스케줄이 있는데 갑자기 이러면 곤란해.”
장현재가 한녹영을 빤히 보았다. 한녹영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정함을 연출하던 눈동자에 살짝 냉기가 비친 순간 장현재가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배가 부르다니 더 이상의 식사는 무리라 치고. 우리 나눌 얘기가 있을 텐데.”
계약에 대한 생각을 마저 마무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며칠 전 회사에서 제 생각을 확실하게 밝힌 것 같은데, 장현재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한녹영이 침실 쪽을 가리켰다.
“그럼 내 침실에서 잠깐 얘기해. 난 현재 형이랑 대화 좀 나누고 올 테니까 형들은 마저 식사하고.”
다정하게 말한 후 침실로 향하는 한녹영의 등을 묘한 눈길로 보던 장현재도 걸음을 옮겼다.
“집안에서 웬 삼겹살이야? 삼겹살은 기름기가 많아 질색하더니.”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모든 걸 장현재에게 맞추느라 진짜 저를 보여주지 않기도 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저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실 난 스테이크보다 삼겹살을 더 좋아해.”
스테이크도 삼겹살도 좋아하지만, 뭘 더 자주 먹을래 하고 묻는다면 대답은 삼겹살이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스테이크, 스시가 아니었어?”
“그건 형이 좋아하는 거고. 이제야 하는 말인데 난 날생선 안 좋아해. 이제 익숙해져서 그럭저럭 먹긴 하지만. 형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나도 좋아하는 척 즐기는 척 한 것뿐이야.”
공들여 잘 만든 웃음 가면을 쓴 듯 심한 표정 변화가 없던 장현재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흔들렸다. 정말 철썩같이 한녹영의 모든 취향이 그와 동일하다고 믿기라도 한 듯. 쓰게 웃은 한녹영이 침실 의자를 권했다.
“거기 앉아.”
“요즘 네가 새로 옮길 회사를 찾아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어느새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장현재가 의자에 앉으며 운을 뗐다. 업계에 퍼지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온 모양이었다.
“소문은 사실이야. 내가 상호 형한테 한울을 떠날 거니 새로 계약할 만한 회사가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어.”
“정말 이런 식으로 기어이 내 곁을 떠나겠다고?”
“그럴 거라고 했잖아.”
살짝 시선을 피하는 한녹영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장현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투정이 평소와는 달리 너무 심해 약간 당혹스러웠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미국으로 출장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좋았잖아. 평소와 다름없이 넌 날 잘 따랐고.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도 아무 문제 없었어.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네가 내가 말한 작품이 아닌 전혀 엉뚱한 작품을 할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는 얘기를 들었고.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재계약을 거부하더니 정말 날 떠나려고 다른 회사를 알아봤어?”
“······.”
“내 회사에 여러 연예인들이 있지만 그들 중 가장 아끼는 사람이 바로 너야. 그런 네가 이런 식으로 날 떠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네가 이대로 떠나면 우리 사이는 끝이라는 건 알고 있지?”
네가 떠나는 순간 끝이다. 두 번의 기회는 없어.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그런 의미가 담긴 말 같았다.
‘끝.’이라는 단어를 혀끝으로 굴리자 마치 본능처럼 병실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지금의 장현재는 갑자기 변한 제가 당혹스럽겠지만, 전 이미 그와의 확실하고도 완벽한 끝을 보았다. 마음이야 모질지 못해 미련이 남았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장현재와 제 사이는 이미 종지부를 찍었다. 돌아갈 마음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그와의 또 다른 미래를 꿈 꿀 마음도 없다. 깨진 그릇을 이어붙여봤자 보기에 흉하기만 할 터다.
“응.”
고개를 든 한녹영이 말하자, 장현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잠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매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너에게 재계약에 대해 재고해보라고 한 후 나도 너에 대해 여러 모로 생각해봤다. 내 녹영이가 왜 갑자기 나를 떠나려고 하는 걸까. 뭐에 마음이 상한 걸까. 혹시 내가 네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서 그런 걸까.”
“······.”
“정말 그런 거라면 싫어서 거절했던 거라고 오해하지 마. 넌 아직 계속 성장해야 하는 배우이고, 그런 네가 연기나 성공 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싫었어.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성장해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탑, 더 나아가 세계에 먹히는 대배우가 되길 바랐기 때문에 네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야. 네가 정상에 서면 그때 내 쪽에서 먼저 프로포즈하려고 했는데. 녹영아, 나도 너를 남다르게 생각해. 정말 넌 내게 특별해.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연인이 되는 편이 네가 더 연기에 집중할 수 있다면······.”
“하지 마. 형.”
한녹영이 촘촘한 그물처럼 제 몸을 옭아맬 듯 이어지는 장현재의 다정한 말을 잘랐다.
“거기까지만 해. 어차피 형에게 해줄 대답은 NO밖에 없어.”
장현재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굳었다.
“그리고 진심이 아······.”
한녹영이 입을 다물었다. 진심이 아닌 걸 알고 있다고 말하려 했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진심이라고 거짓말을 하면 그만인데. 오히려 진심을 왜곡하지 말라며 이쪽을 죄인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말이다.
서글프고 씁쓸한 감정이 심장을 억누른다. 묵직한 한숨이 반복해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속은 차가운데 겉은 다정함으로 무장한 장현재의 거짓말이 씁쓸했고, 한편으로는 ‘저런 거짓말까지 해서라도 날 붙잡아두고 싶을 만큼 내가 말 잘 듣는 인형이었나.’ 싶어 서글펐다.
연인이라니. 한때는 천상의 과실처럼 달콤한 환상 같았던 단어가 지금은 쓸개처럼 쓸 뿐이었다. 먼지가 낀 것처럼 흐려진 한녹영의 얼굴을 바라보는 장현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친 자세로 앉아있던 한녹영이 몸을 일으켰다. 장현재와 마주보고 있는 방안의 공기가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져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가.”
그만 가라는 말에 장현재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한녹영의 입에서 축객령이 나오다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 한녹영을 속까지 훑을 것처럼 바라보던 장현재가 떠보듯이 물었다.
“기어이 내 곁을 떠나 다른 회사로 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말이지? 다른 데로 가면 나와 끝이라고 말했는데도?”
“응.”
마음은 지끈거렸지만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다정함을 벗어던진 장현재의 얼굴이 얼음처럼 변했다. 그는 좀 전과 같은 사람인가 싶을 만큼 싸늘하게 한녹영을 응시하더니 이내 성큼성큼 걸어 침실을 나가버렸다. 굳어버린 것처럼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던 한녹영도 거실로 나왔다. 마저 먹고 있으라고 했는데 신경 쓰였는지 괜히 이쪽을 기웃기웃하고 있던 박상호가 득달같이 달려와 한녹영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냐? 얼굴이 백짓장이다. 물 좀 줄까? 장 대표가 뭐래?”
대체 질문이 몇 개야. 한녹영이 피식 웃었다.
“괜찮고, 물은 됐고, 내가 다른 회사 알아보는 중이라는 소문 듣고 온 것 같더라고. 나 회사 옮길 거라는 사실을 이제 완벽히 받아들였을 거야. 마지막 승부수까지 내가 거절해버렸으니까.”
연인이 되자. 아마 그 말이 장현재의 마지막 승부수였으리라. 그리고 한녹영이 최후의 카드를 거절할 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을 테고. 언제나 바라던 말이었으니 환호하며 달려들 거라 생각했겠지.
이미 한 번 들어본 말이었던 탓인지, 아니면 진심이라곤 없는 차가운 프로포즈라는 걸 알고 있는 탓인지 생각보다는 마음이 괜찮았다. 가시에 찔린 것 같은 따끔따끔한 통증은 있지만, 예상보다는 괜찮은 편이었다. 버리는 연습을 한 탓인지 과거로 돌아온 이후 장현재를 처음 만났던 때보다 심장의 고동이 덜했다.
조금씩 나아지긴 하나 보네. 이렇게 조금씩 감정을 버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때가 오겠지.
“마지막 승부수가 뭐였는데?”
“그건 몰라도 돼. 고기나 마저 먹자. 먹다 말아서 더 허기져.”
한녹영은 호기심을 버리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박상호의 어깨를 툭 치며 테라스로 향했다.
“그래. 고기나 먹자.”
박상호가 말했다. 장한수는 늦되어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마냥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녹영이 너 회사 옮겨?!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하고 외쳤다.
“사실이야. 나도 따라갈 거고.”
대답은 박상호가 했다.
“진짜로? 진짜 형 녹영이 따라가려고?”
장한수가 왜 스스로 악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 가려냐는 듯 박상호를 불쌍하게 보았다. 여차하면 제가 몸을 던져 박상호를 막을 기세였다.
“어. 따라가서 내 손으로 녹영이 톱 만들 거야. 내가 왜 이제껏 녹영이 옆에서 버텼는데. 성질은 개떡이어도 재능이 있어서야. 근데 이제 성질까지 얌전해졌으니 안 따라갈 이유 없잖아. 녹영이가 쫓아내도 들러붙을 판에, 먼저 같이 가자고 해주더라. 그러니 끝까지 따라가서 나도 톱스타 매니저 돼볼 거다. 사실 내가 스타가 될 재목을 보는 눈이 뛰어나다는 평은 듣고 살았지만,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키워낸 스타는 없잖아. 그간 남 좋은 일들만 해왔지. 내 덕분에 스타 매니저 된 놈이 한둘인 줄 알아? 내가 찍어준 애들 데려가서 지들 안목인 냥 거들먹거리는 놈들 볼 때마다 얼마나 배알이 꼴렸게. 녹영이를 1호로 만들어서 나도 대박 매니저 되어볼 거다. 톱 오브 톱스타 매니저가 내 평생 꿈이다! 그리고 녹영이로 인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박상호가 “뭐해? 안 오고!” 하고 채근하는 한녹영을 향해 “간다. 가.” 하고 대꾸하며 씩 웃었다. 그리곤 테라스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야심을 불태우는 박상호를 불쌍하게 보던 장한수가 “녹영이 자식이 지금보다 훨 뜰 것 같긴 해.” 하고 혼잣말을 하며 슬금슬금 테라스로 향했다.
“딱딱해졌어.”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적이던 한녹영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노릇노릇 잘 구워서 한쪽에 쌓아뒀던 삼겹살이 식어서 딱딱해진 상태였다.
“그건 이따 잘게 잘라서 밥 볶아먹을 때 넣으면 돼.”
역시 삼겹살의 마무리는 볶음밥이지,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박상호가 다시 신나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한녹영은 그가 새로 구워 잘라준 고기를 입안에 넣고 꼭꼭 씹었다.
남은 미련을 털어내듯 꼭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