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그가 내려다보며 던지듯 말을 하는데, 왜인지 다른 날보다 하은은 자신이 더 작아지고 어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은 위축되고 쪼그라들었지만 그럴수록 하은은 더 당당한 얼굴을 했다.
“가.”
돌아서는 건하의 뒤로 내뱉는 하은의 단호하고 건방진 말투에 건하가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잠잠했던 바람이 다시 두 사람을 날려버릴 것처럼 강하게 불어왔다. 건하의 옷이 강풍에 크게 부풀었다. 동시에 앞으로 향하던 걸음이 바람에 저항하듯 멈췄다. 하은은 뒤에서 다가올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건하가 하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잡아.”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하은이 건하의 내민 손을 보고 있었다.
“계속 그러고 있든가.”
돌아서려는데 건하의 옷자락이 잡혔다.
잡힌 옷자락에서부터 시작해 등이 뻣뻣해지며 일순 긴장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건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로 향했다.
뒤에서 옷 끝을 바싹 움켜쥔 하은의 손이 느껴졌다.
조수석 문을 열자 하은이 어깨의 가방을 내리고 차에 올랐다.
차 문을 제대로 닫기도 힘든 바람이었다. 건하가 보닛을 돌아가는 것을 하은이 지켜보고 있었다.
차가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하은은 속으로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감정의 찌꺼기를 백건하 앞에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백건하도 자신도 두 사람 모두 부모님을 잃어버려 마음이 어떨지 대충 짐작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건하가 불편한데도 어쩐지 지금은 그가 자신을 데리러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잠깐이었고 이내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짐작하건대 어쩌면 백건하는 납골당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가 오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는 판단에 내키지 않은 걸음을 했을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짐작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 이유 말고 백건하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아마 여기까지 오면서도 싫은 얼굴이었을 것이다.
귀찮게 하고 거슬린다고 몇 번쯤 속으로 욕을 했을지도 몰랐다.
도로가 막히지 않아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저택의 정문을 지났다. 시야에 저택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윤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고마워, 데리러 와줘서.”
하은이 운전하고 있는 백건하를 힐끗 보았다. 정원 곳곳에 있는 환한 불빛이 정확히 백건하의 얼굴을 비추고 있어서 다른 때보다 더 또렷하게 그의 얼굴이 보였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길이었어.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
자신의 예상이 정확히 맞은 것에 하은은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하은의 말에 건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했다.
“뭐, 그러든지.”
마침내 저택의 입구에서 차가 멈췄다. 윤 실장이 다가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다친 곳은 없으시죠?”
하은의 가방을 받아든 윤 실장이 차에서 내리는 건하의 눈치를 살폈다. 하은에 이어 갑자기 건하까지 이 폭풍우에 차를 끌고 나가 내심 안절부절못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다니.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무사히 돌아오신 걸로 충분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윤 실장이 들고 있던 가방을 다시 받아들고 하은이 윤 실장을 향해 인사를 했다. 하은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를 따르던 건하가 윤 실장 옆을 지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은 회장님께는 없던 일로 하죠.”
지나쳐가는 건하의 뒤로 윤 실장의 짤막한 대답이 바람에 묻혀갔다.
***
매년 반복되는 부모님의 기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하은은 먼저 내리는 건하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하은이 안전하게 차에서 내리는 것을 건하의 시선이 놓치지 않고 뒤따랐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전례 없는 강풍이 휘몰아치던 그 어느 날, 아무런 예고 없이 백건하가 그녀를 데리러 왔던 날과는 상반되는 날씨였다.
하은의 옆에 나란히 선 건하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가볍게 안았다.
“마음에 드네.”
뜬금없는 건하의 말에 하은이 궁금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뭐가?”
건하가 납골당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날씨 말이야.”
아, 하고 하은이 짧게 대답하며 웃었다.
비도 오지 않고 그렇게 바람만 거세게 부는 날은 드물었고, 더군다나 그런 위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납골당까지 백건하가 온 것이 하은의 머릿속에도 떠올랐다.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날이었다.
“생각나서 묻는 건데, 그날 어떻게 왔어?”
나란히 계단을 오르던 건하가 하은의 높은 구두가 신경이 쓰였는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은이 안전하게 계단 끝에 올라섰을 때에야 건하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그날, 뭐?”
“바람 엄청 불었던 날 말이야. 날 데리러 온 저승사자인 줄 착각했잖아. 아래위로 검은 옷 입고 오는데 좀 무서웠어.”
하은이 흘기듯 보자 건하가 머쓱한 얼굴을 했다.
“저승사자였으면 좋다고 갔을 거 아니야? 나라서 다행이었지.”
짐짓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하은을 보는 눈빛은 아련했다.
지나온 시간 속에 하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혼자 여기까지 온 하은의 마음이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정말 근처에 있었던 거 맞아?”
건하는 대답 대신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하은이 그의 옆구리를 치자 마지못해 건하가 시선을 내렸다.
“아니.”
하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들어가 얼른. 부모님 기다리시겠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건하가 하은의 어깨를 당겼다.
입구로 들어서자 하은은 갑자기 먹먹한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처음이다,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은.
한 번도 지금 같은 상황을 짐작조차 하지 못해서 옆에 백건하가 있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건하를 올려다보는 하은의 눈이 어느새 젖어있었다.
“고마워, 백건하. 그때도 지금도…… 와줘서.”
건하는 대답 대신 하은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날,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지 않던 하은을 기다리며 발코니에 서 있던 자신을 떠올렸다.
감정이 깊었던가? 아마도 그때부터였는지 그 이전부터였는지 정확하지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 만났던 날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장하은에 대한 것은 무엇이든 또렷했다.
그의 정원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그날부터 계속, 그의 시선은 한 번도 하은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제 와 말하지만 첫눈에 반한 게 그런 거겠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마음도 몸도 이성에 반하며 한 여자를 향해 움직이는 것, 심장이 삐걱대는 소리를 귀가 울리도록 들어야 했던 것.
하은을 만나고 건하는 비로소 멈춰있던 그의 시간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의 옆에 장하은이라는 여자가 함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외전 Part 2
하은은 피곤한 얼굴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다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거울에도 자신의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하은이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올림머리로 고정했던 핀을 하나씩 뽑아내고 클렌징 티슈로 립스틱을 닦아냈다.
입고 있는 크림색 원피스와 대조를 이루며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던 붉은색이었다.
간혹 마주쳤던 건하의 시선이 위험해 보였던 것은 그의 눈이 내내 붉은 입술을 떠나지 않아서였다.
오늘은 백건하의 베이비, 문혁의 첫 돌잔치가 있었다.
문혁을 임신하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문혁은 누가 보아도 넘칠 정도로 충분한 사랑을 받는 아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혁의 옆에 언제든 옆을 든든하게 지켜줄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코 헤어지지 않고 평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가족이 있어서 하은은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목을 감고 있던 목걸이가 거추장스러웠던 하은은 손을 뒤로 뻗어 목걸이의 잠금장치를 찾았다.
“왜? 예쁘기만 하던데.”
언제 왔는지 건하가 하은의 뒤에 서있었다.
“문혁이는?”
“재우고 왔지. 오늘따라 안 자려고 어찌나 버티던지, 혼났어.”
목걸이를 풀고 드러난 목덜미에 건하의 손이 닿았다. 손가락 사이에 끼고 살살 돌리며 주무르자 하은은 뭉친 근육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나른한 눈을 들어 거울을 보니 오늘따라 더 신경 써서 차려입은 건하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침나절에도 그의 모습에 잠시 설레었는데 종일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느라 잊고 있었다.
목을 조이고 있던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버린 모습이 오히려 아침보다 더 색스럽게 느껴졌다.
아마도 나른함과 공존하는 건하 특유의 냉한 기운이 맞물려 묘한 기류가 느껴지는 탓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하은만이 느끼는 것은 아닌 듯했다. 어디서고 건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타입이라 여자들이 그를 보는 은밀한 시선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묘한 질투심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나는 피곤한데 백건하 넌 전혀 안 그래 보여.”
드러난 하은의 하얀 살점에 들러붙어 있던 시선이 거울 속 하은을 향했다.
“그런가?”
거울 속의 하은과 시선을 맞추면서도 건하의 손은 자연스럽게 하은이 입고 있던 원피스 지퍼 끝에 닿았다.
“종일 참느라 피곤했는데, 못 느꼈어?”
문혁을 출산한 뒤로 하은은 앳된 소녀의 모습에서 점차 달달한 과즙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르익은 여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가슴도 풍만해지고 몸의 굴곡도 더 뚜렷해졌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안 그래도 끓어 넘치던 건하의 성욕이 더 왕성해졌다.
물론 그것은 전부 건하의 변명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그러는데 어떻게 못 느껴?”
하은은 낮 동안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그녀의 허리에 달라붙었던 끈적한 건하의 손길이 떠올랐다.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듯 건하의 눈은 선명한 가슴골에 아슬아슬하게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몇 번이고 그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드러내놓고 그녀의 몸을 조물거리며 훑었을 것이다.
건하의 손이 미끄러지듯 원피스 안을 파고들었다. 탄력 있는 젖가슴이 그의 손에 가득 들어차 원피스 안에서 움찔거렸다.
동시에 건하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그녀의 등에 딱 붙은 그의 바지 앞섶이 팽팽하게 당겨져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목덜미를 빨아들이던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돌리며 입술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