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외전 Part 1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어쩌면 심하다는 말보다 폭풍우처럼 몰아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날씨였다.
휴대폰에서도 일정한 시간대로 재난 문자를 전송하고 있었다.
숲의 나무들도 다른 때와 다르게 심하게 요동쳤다. 나뭇가지가 부딪치며 울리는 소리가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건하는 2층 발코니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원을 둘러싼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꺾일 정도로 휘청거렸다. 제법 길고도 거친 밤이 예상되는 날이었다.
저택의 관문은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처럼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리는 여자를 보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 이미 2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던 그가 문을 닫고 돌아섰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집안을 총괄하는 김 집사도 보이지 않고 윤 실장은 입구에서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선 건하를 유리문을 통해 알아본 윤 실장이 돌아섰다.
“그럼 주변 상황 다시 파악해서 연락 주세요. 회장님께 보고 올라가기 전에 찾아야 하니까요.”
건하가 빤히 쳐다보고 있자 전화를 끊은 윤 실장이 다가왔다.
“하은 학생이 하교 차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찾고 있는 중입니다.”
당황한 윤 실장의 말을 건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듣고 있었다.
“지키고 있던 애들은 어쩌고? 나오는 건 봤을 거 아니에요?”
낮고 묵직한 저음이지만 말끝에 가시가 들어있었다. 시선을 들어 마주친 건하의 눈은 다른 때와 다르지 않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섬뜩할 만큼 광채가 번득였다. 자신도 모르게 윤 실장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 네. 들은 바로는 교문으로 나오는 모습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확인을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 둘 중에 뭐가 정확한 겁니까?”
말끝에 건하의 시선은 창밖 너머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몸, 손으로 쥐어도 남을 것처럼 부러질 듯 가늘었던 여자 몸이 떠올랐다. 곧장 바람에 휘청이듯 꺾이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평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더니, 그렇다고 특별히 관심 있는 얼굴도 아닌데 이상하게 지금 건하의 반응은 오버스러운 면이 있었다.
윤 실장이 예상한 대로라면, 건하는 하은의 귀가와 상관없이 지금쯤 식사 시간이라 다이닝룸에 있거나 2층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건조한 표정, 무심한 눈빛은 변함이 없지만 윤 실장과 나란히 서서 마치 하은의 귀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렇게 밖을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하를 보던 윤 실장은 시선을 돌려 창에 비친 건하를 보고 있었다.
장하은이 이 집에 들어오고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다르지 않은 일상들, 반복되는 시간들. 그리고 그에 속해 있는 백 씨 집안의 사람들조차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그런데 무얼까? 지금 찜찜한 이 기분은?
건하는 창밖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지, 윤 실장의 시선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조차도 평소와 달랐다.
왜, 걱정하는 얼굴 같지? 백건하답게 얼굴에는 아무것도 나타나 있지 않은데도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 든 후에야 건하가 움직였다.
보관함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든 건하를 보며 윤 실장이 뒤늦게 건하의 앞을 막아섰다.
“설마 지금 외출하려는 건 아니시죠?”
건하의 눈매가 뾰족해지며 윤 실장을 내려다보았다.
“왜? 윤 실장 허락 필요한 상황인가?”
“제가 아니라 회장님이시죠.”
“오버예요, 윤 실장.”
“그래도 이러시면…….”
앞을 막아서며 말리는 윤 실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건하는 이미 밖을 나간 뒤였다.
사색이 된 윤 실장은 다급히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건장한 성인 남자가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든 최악의 강풍이었다.
건하의 옷이 바람에 쏠려 뒤로 밀렸다. 차고까지 걸어가는 중에도 건하는 몇 번쯤 바람의 저항을 견디느라 멈춰 서곤 했다.
차체가 낮은 스포츠카 문을 열고 곧장 시동을 켠 그는 재빨리 차고를 벗어나 정문을 향했다.
하지만 건하의 차를 확인하고도 남았을 정문 경비 직원이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라이트를 켜서 앞을 비춘 건하는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리며 문을 열 것을 종용했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운전석으로 다가와 건하에게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윤 실장님께서…….”
건하가 남자의 옷에 달린 명찰을 확인했다.
“강현우 씨? 언제부터 그쪽 주인이 윤 실장이었습니까?”
“네?”
“당장 오픈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그쪽한테 갈지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죄, 죄송합니다.”
건하의 말에 직원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스쳐갔다. 이윽고 남자가 경비 직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오픈되었다.
끝없이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건하가 탄 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
갑자기 시작된 강풍으로 납골당을 오가던 인원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오늘이 부모님 기일이라 하은이 납골당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녀의 친가 쪽 사람들도 자리를 파한 뒤였다. 하은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꽃을 부모님 앞에 내려놓았다.
부부가 함께 웃고 있는 모습, 사진에서조차 하은의 모습은 빠져있었다.
이미 수도 없이 본 사진인데도 처음 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 하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부모님은 돌아가시지도 않고 사진과 같은 얼굴로 여전히 행복하게 사셨을까?
다른 건 기억이 흐릿한데 하은의 머리를 빗어주고 묶어줄 때 거울에 비치던 엄마의 모습은 또렷했다.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어 생각을 하면 하은도 저절로 웃게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하은은 사진 속 부모님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었다.
사진 속에서조차 자신의 자리는 없어 보였다.
어디도 설 곳 없는 그녀의 자리.
이제 더는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고 살 것 같았는데 오늘처럼 부모님 기일에는 세상 가장 나약한 인간이 되는 것 같았다.
납골당 마감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울렸다.
하은은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장소를 벗어났다. 밖은 여전히 무서울 정도의 강풍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도로에 걸음을 내디뎠을 때 바람이 거칠게 몸을 밀어내 하은은 저절로 뒤로 밀려났다. 가방의 무게에 갑자기 몸이 뒤로 쏠리는 것을 느낀 하은은 가까스로 납골당 입구로 되돌아왔다.
어쩐지 쉽게 이곳을 벗어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하은은 교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앱을 켜고 택시 호출 버튼을 눌렀지만 이내 호출 거절 알림이 떴다. 외진 곳이고 날씨 때문에 주변에 택시가 와주긴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하은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순서를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누구에게 전화를 할지 선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큰집 사람들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런 개인적인 상황에서까지 한 회장 집안사람들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주저하던 사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어둠은 너무도 빨리 다가왔다.
결국 몇 번이고 망설이던 하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통화음이 가지도 않아 곧장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하은 학생? 지금 어디예요?!>
윤 실장의 목소리에 하은은 갑자기 목 끝이 따끔거리며 한꺼번에 감정이 복받쳤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런 게 아닌 줄 알면서도 윤 실장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진심으로 들리는 건지.
“……죄송해요, 윤 실장님. 오늘 부모님 기일이라 납골당에 왔는데 택시가 안 잡혀서요.”
<그랬군요. 다행이에요. 우선…….>
곧이어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도 함께 되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하은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납골당 내부는 이미 문이 잠긴 뒤라 오픈된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강풍을 전부 막아주지는 못했지만 밖을 나서는 것보다는 안전했다.
하은은 가방을 어깨에 멘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람 소리 외에는 너무 조용했다. 간혹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릴 뿐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공부하다 지칠 때면 가끔 한 회장 집의 숲을 산책하고는 했다. 한 회장의 집에서 가장 하은이 안도감을 느끼는 장소.
잘 가꿔진 인공적인 숲이겠지만, 그래서인지 지금 그곳과 이곳은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랐다. 갑자기 서늘한 한기가 들어 하은은 팔을 교차해 가슴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도로 끝에서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정면을 비추며 달려오더니 이내 대기실 앞에 멈췄다.
하은은 그 차가 한 회장이 보낸 차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타고 다니던 세단이 아닌 스포츠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탁.
문을 닫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도 유난히 크게 울렸다.
“…….”
궁금증은 이내 차 주인이 문을 열고 내리자 해소되었다.
뜻밖의 인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눈앞의 남자는 백건하였다.
희미한 조명 아래, 검게 번득이는 눈빛이 정확하게 한 곳만 응시하며 다가왔다.
아래위로 검은색 옷을 입고 있으니 장소에 따른 영향인지 몰라도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한없이 밀어내기만 할 것 같은 강한 바람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백건하가 하은의 앞에 섰다.
전화를 한 건 분명 윤 실장이었는데 백건하가 온 것이 하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렇게나 빠르게 도착을 했다니. 밖에 있었던 건하에게 윤 실장이 전화를 한 걸까? 윤 실장이 부탁한다고 고분고분 부탁을 들어줄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입을 다물고 쳐다보는 하은의 시선을 비켜가며 건하가 납골당 건물을 훑었다.
그녀에게 뭐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두 사람이 서있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입을 다문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건하가 온 것도 불편한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것도 불편했다.
“안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