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믿어.”
어떻게 안 믿어? 지금까지 그런 눈으로 쭉, 그녀를 사랑해줬는데.
한 번도 그의 사랑을 의심한 적도 없었고 늘 어떤 상황에서든 그를 믿었다.
충분히 그가 아이를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시간을 알았기에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은은 다가가 건하의 품에 안겼다.
“이제, 우리한테 아이가 생겼어.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우리는 완벽한 가족이 되는 거야.”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으며 건하는 하은의 등을 토닥거렸다.
하은이 마주 꼭 안아오자, 건하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삼켰다.
“너는 언제나 내가 짐작조차 못 할 일을 겪게 해. 너도 아이도,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던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야.”
단언컨대, 진심으로 그에게 최고의 삶을 살게 해준 그녀를 사랑했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
몇 달 후.
“여기 앉아.”
이제는 보기에도 표가 나는, 제법 부른 배를 안고 힘들게 식탁 의자에 앉는 하은을 건하가 옆에서 부축했다.
더운 여름, 아침을 먹기 전 가벼운 산책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하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괜찮아?”
“유난은. 괜찮아.”
건하가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는 손수건으로 하은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듯 닦았다. 마냥 뽀얗기만 하던 얼굴이 조금 질린 것을 보니 말은 그렇게 해도 꽤 힘든 것 같았다.
“할머니, 잘 주무셨어요?”
“건하 너는 할미 얼굴은 볼 생각도 않니?”
상석에 앉아 그런 건하를 지켜보는 한 회장의 눈빛이 따뜻했다. 하지만 이내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런 팔불출 같은 놈.
언제는 아이는 안 가지겠다고 큰소리 땅땅 치면서 사람 속을 있는 대로 긁어대더니, 지금은 세상 어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제대로 된 팔불출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서로 위하고 아껴주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기만 했다.
‘제 눈으로 확인한 바로는 더는 볼 것도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명을 달리한 아가씨의 부모님 명줄이 전부 아가씨에게로 옮겨 왔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건하 도련님 옆에 아가씨를 두셔야 합니다. 절대로 두 사람이 떨어지는 일도 없어야 하고요.’
점쟁이 말로 살아있는 부적 어쩌고 하더니 이제 보니 집안에 제대로 복덩이가 굴러들어왔다 싶다.
집안에 사람 하나 잘 들여서 세상에 없을 것 같은 행복이 집안 가득 들어찬 것이다.
점쟁이의 말이 전부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헛돈을 쓴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며 한 회장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하늘이 점지한 인연을 만난 건하가 저리 행복해 보여서 이제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이제는 떡하니 증손주까지 임신한 하은을 한 회장은 매일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기쁨과 안정감을 가져다준 하은이에게는 뭐든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다가 주고 싶었다.
늙고 병들어 언제라도 죽는 게 이상할 것 없지만 이제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전부 하은이 덕분이었다.
저렇게 귀한 아이를 얻어서 한 회장도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래, 태동이 심하다고?”
한 회장이 몸을 바싹 앞으로 대고 하은의 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하은이 웃으며 잔뜩 부른 배를 쓰다듬었다.
“네, 할머님. 시도 때도 없이 차서 자다가도 가끔 놀라서 깨곤 해요,”
“허허, 그놈 참. 성질이 꼭 지 애비를 닮은 모양이네.”
한 회장의 말에 건하가 인상을 썼다.
“내 성질이 뭐.”
“뭐, 내가 틀린 말 했더냐?”
한 회장과 하은이 눈을 맞추며 웃자 건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주 점점, 숙녀 두 분들끼리 호흡이 잘 맞아.”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다고 하더니 막상 병원에서 아들이라고 하니까 은근히 서운한 눈치예요, 할머님.”
하은이 건하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더니 다음번엔 꼭 딸이라고, 김칫국부터 마시는 거 있죠.”
“허허, 하나도 싫다더니 벌써 둘째 생각을 해?”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웃는 하은의 모습이 임산부임에도 곱고 예뻤다. 살이 제법 올라 오히려 임신 전보다 얼굴색도 좋아 보였다.
한 회장의 눈에는 그저 하은의 전부가 예뻐 보이겠지만 하은이를 처음 보았던 그날도 오늘처럼 곱고 예쁘기만 했다. 한 회장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당당함이, 속에 감춰둔 상처를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족이 되려고, 그렇게 눈에 들었나 보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는 말이, 꼭 요즘 한 회장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이제는 전보다 병원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전처럼 혼자 남을 건하를 걱정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건하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곧 태어날 아이까지 이제 건하에게도 다른 사람처럼 진정한 가족이 생긴 셈이다.
젊은 나이에 혼자 몸이 된 자신은 밀린 회사 일을 처리해야 했고 바쁜 와중에서도 언제나 건하의 안전을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그로 인해 다친 건하의 마음을 제대로 살핀 적도 없었다.
건하가 힘들어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지나쳤다. 그것이 건하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을 우선한 일이었다.
이제 서른을 넘긴 건하는 변함없이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이다.
언제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가? 건하가 원래 저렇게 잘 웃었나?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건하는 많이 달라졌다.
눈을 접어 웃는 눈매며, 기울이듯 벌어지는 입매가 영락없이 죽은 제 할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하은이 건하 옆에 든든하게 지키고 있어주니 언제든 남편의 곁으로 가도 될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었다.
미소 짓는 한 회장의 얼굴은 조금 지쳐보였지만, 그럼에도 희망으로 반짝이는 것 같았다.
식탁 위에 귀하고 좋은 음식이 많이 올라있었다.
한 회장은 하은의 젓가락이 많이 가는 음식만 골라 앞으로 밀었다.
그런 한 회장을 보며 건하가 웃었다.
꽃처럼 예쁘게 웃는 하은과 건하 두 사람이야말로 세상 귀한 그녀의 보물이었다.
***
건하의 다리를 베고 누운 하은은 졸린지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건하의 음성이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늑대는 닫힌 문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안으로 들어가 잡아먹을지 아니면 밖으로 꼬여 불러낼지…….”
그 대목에서 잠든 줄 알았던 하은이 웃었다.
“왜 웃어?”
“그냥, 상상이 가서. 모자 쓰고 있는 늑대가 꼭 누구 같아서.”
“설마 그게 나라고?”
건하가 발끈하자 하은이 더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순간 겉으로 선명하게 하은의 배가 툭, 하고 위로 솟았다.
“아!”
며칠 태동이 심해진 탓에 하은이 놀라 숨이 멎을 때가 있었다.
건하가 가만히 하은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고 쓰다듬었다.
“이 녀석. 대체 어떤 놈인지 궁금하네.”
“할머니 말씀 못 들었어? 아빠 닮았다는 말.”
건하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했다.
에어컨을 끄고 반쯤 열어놓은 거실 창을 통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말 드럽게 안 듣겠지?”
건하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아빠 닮아 잘생겨서 용서해줄 거야.”
하은의 말에 건하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짙어진 눈을 하고 하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벌어진 입술 안으로 들어온 혀가 엉켜들며 깊숙이 빨아당겼다.
보드라운 볼을 쓰다듬더니 원피스 단추를 하나둘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임신으로 인해 풍만해진 가슴을 거머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작은 돌기를 손가락 틈에 넣고 비틀자 하은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하아.”
손을 내밀어 건하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당겼다. 살갗이 부딪치며 열기가 피어올랐다.
숲의 청량한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하은은 점점 깊어지는 건하의 손길에 조금씩 몸을 들썩였다.
건하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며 하은의 젖가슴을 덥석 물었다.
만져지는 살의 감촉이 전과 달랐다. 풍만한 굴곡이 느껴지는 몸은 점점 더 그를 흥분시켰다.
건하가 열기를 머금은 습한 숨을 내쉬었다. 손을 미끄러트려 다리 사이 맞물린 틈새를 파고들었다. 예민한 하은의 몸이 반응하며 신음을 뱉어냈다.
“하아, 읏……백건하.”
젖은 숨을 토해내며 흐린 목소리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건하는 더할 수 없는 오르가슴을 느꼈다. 그는 매번 처음인 것처럼 여전히 그녀에게 설레곤 했다.
그녀를 탐하는 건하의 손이 더욱 깊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은에 대한 욕망은 흐려지기는커녕 점점 깊어졌다.
그가 그녀의 안을 파고들 때마다 척추를 관통하는 짜릿한 쾌감에 매번 이성을 잃고 무너졌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세상에 오로지 그녀만 아는 그의 다른 얼굴이었다.
하은을 보는 그의 눈이 검고 깊어졌다. 마주친 눈빛에 설명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느껴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충분히 그의 마음이 전해져왔다.
사랑해.
하은은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눈가가 붉어졌다.
나도 사랑해.
건하가 하은의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하은이 반기듯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려 건하를 끌어안았다.
건하가 천천히 그의 아이를 품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몸 위로 그를 묻었다.
끝이 없을 쾌락, 이제 시작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