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62)

57.

“사모님께서 연락이 안 되신다고, 윤 실장 전화가 좀 전에 왔습니다. 산책 나가신다고 하셨는데 혼자 정문을 나가신 게 확인돼서. 사람을 풀어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검진을 받고 병원을 나서는 건하에게 비서가 다급하게 다가와 말했다.

“무슨 말이야? 연락이 안 된다는 게?”

건하는 급히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고객님의 사정으로 전화기가 꺼져있습…….>

빠르게 건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갈만한 데는 다 확인했고?”

비서에게 확인하듯 말하던 건하는 다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불안감이 극도로 치밀어 올랐다.

“윤 실장님! 어떻게 됐다는 말입니까? 하은이는 찾았습니까?”

<상무님……, 죄송합니다. 계속 찾고 있기는 한데……. 전화도 꺼져있고 추적이 힘듭니다. 잠깐 산책 나갔다가 오신다고 하시기에 자주 가시던 숲에 가셨나 했는데 하도 안 들어오셔서 확인하니, 숲에는 안 가시고 곧장 정문으로 가셨다고 확인했습니다.>

윤 실장의 말에 건하가 불규칙하게 호흡을 뱉어냈다.

“지금 출발합니다. 무슨 수를 쓰든……. 일 있으면 곧장 연락하세요.”

통화를 끝낸 건하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기에. 네 생각은 어때?’

‘글쎄. 남자가 아이를 안 좋아한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을 테고. 그럼에도 임신을 했다면 여자 쪽에 잘못이 있지 않을까? 아이는 두 사람이 충분히 상의한 후에 가져야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미친놈.

그렇게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지껄여버린 자신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분명 하은이 그런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늘 허투루 말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생각 없이 하는 여자가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말을 쉽게 넘길 수 있었는지 그 순간의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상처받았을 하은을 생각하니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수술한 지도 기간이 오래되었고, 한참 혈기 왕성한 때이다 보니 수술한 부위가 풀린 것 같습니다. 필요하시면 재수술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가 확인해주었던 말을 곱씹으며, 건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아이였다. 맹세코 하은을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와 하은의 아기라니!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하은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살아오면서 결혼을 생각한 적도 없었고 일찌감치 가능성을 지웠기에 아기는 더더욱 그의 인생에 없을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와 하은의 아기라니,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은에게는 가능성조차 없다 믿었기에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에 와 상상하면 가슴 벅찬 일이기는 했다.

하은의 몸을 통해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몸에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니!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 가장 빨리 해야 하는 일은 하은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

하루가 길었다.

하은은 특별히 가야 할 곳도 떠오르지 않았고,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몰랐다.

무작정 걷다가 멈춘 곳이 오래된 주택 앞이었다.

처분할까 하다가 시기를 놓치고 지금은 가끔 청소하는 사람을 불러 관리만 하고 있었다.

이곳은 부모님과 그녀가 살던 집이었다.

그녀가 너무 어려 기억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집을 방문할 때면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편안하기도 하고, 힘들 때 위로받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얼마 전에 깎은 잔디가 모양 좋게 자라 있었다.

기억 저편, 잊고 있던 오래되고 낡은 기억들이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햇살아래, 마당을 뛰어다니던 자신의 웃음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은은 구석구석 시선을 멈추고 들여다보았다.

낡은 그네가 보이자 하은은 다가가 그네에 앉았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튼튼해 보였다.

다리를 굴려 그네를 스스로 밀며 하은은 희미하게 기억나는 엄마의 노랫소리를 낮게 흥얼거렸다.

‘글쎄. 남자가 아이를 안 좋아한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을 테고. 그럼에도 임신을 했다면 여자 쪽에 잘못이 있지 않을까?’

아마도 눈물이 흐르는 건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탓인지도 몰랐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소함이 그녀의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백건하와 그녀의 아기.

그녀의 몸속에 자라고 있는 생명이었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그녀의 분신이었다.

가족이 생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 보았다.

백건하와 결혼하면서 그와 가족이 되기는 했지만 하은의 머릿속에 가족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가 있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지만 이미 그녀에게 세상 전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그녀의 아기.

문득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죽음을 택했던 엄마를 떠올렸다.

아마 자신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녀도 엄마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목숨과 맞바꿀 소중한 아기였다. 하은은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아직 어떤 느낌도 없이 평범하기만 했다. 그녀의 엄마도 그녀를 가졌을 때 이런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을까? 끝까지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마음이 그녀와 같았을까?

어쩌면 아이를 품은 세상 모든 여자들이 지금 하은과 같은 심정일지도 몰랐다.

끝내 설움이 차오르며 참을수 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아 하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엄마였다.

삐그덕.

문을 열자 오래된 문이 부딪치며 소음을 냈다.

이미 어둑해져 곧 있으면 어둠으로 덮일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마당 한 켠, 그네에 앉아있는 하은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종일 그녀를 찾아 헤매다 마지막 생각해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하은과 그녀의 부모님이 살던 집.

그녀가 이곳에 있어 다행이라 건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기척을 알아챈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 자국이 번진 얼굴은 젖어있었다.

하은이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그네에서 일어섰다.

얼마간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다르게 하은이 건하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렸다. 선뜻 다가가기 힘들어 건하가 머뭇거렸다.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은 몸, 지그시 깨문 입술과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하은의 피곤한 몸이 건하의 눈에 들어왔다.

건하는 곧장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하은을 품에 안고 그녀의 머리끝에 입술을 댔다.

“한참 찾았어.”

잘못되면 어떡하나, 혹시라도 영영 못 찾고 숨어버리면 어떡하나.

건하는 생각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미안해, 내가 어리석었어. 나는 그냥……, 네가 나로 인해 어떤 것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내 아이도 나와 같은 길을 가게 하고 싶지도 않았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데 물려줄게 없어서 어떻게 그걸 물려줘?”

건하의 품에서 하은의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하은이 그를 밀어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았구나.”

임신한 사실을 안 백건하의 표정이 어떤지 궁금했지만 이내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하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낯설었다.

“설마, 아이를 지우는 거면. 미리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못 해. 절대로 안 할 거고! 만약 그럴 거면 우리 끝내는 게 좋겠어.”

건하가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하은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다 큰 어른이고 어떻게든 잘 살겠지만 아이는 아직 제대로 된 형태조차 갖추지 못했어.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나약한 존재야. 그래서 내가 끝까지 지킬 거야. 아기는 오로지 지금 나만 의지하고 있거든. 얘한테는 내가 하나님이고 부처님이고 예수님이야.”

하은이 건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주친 눈동자에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보았던 하은의 맑고 빛나는 눈동자에 강한 모성애가 자리했다. 건하는 순간 뭉클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 내가 아이한테 밀린 거야?”

침묵 끝에 하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백건하. 너하고 내 아기잖아. 우리 아기. 그러니까 나한테 너만큼 소중해.”

입가가 가늘게 떨리고 이내 하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해, 하은아! 진작에 너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나는 계속 혼자일 줄 알았어. 너도 아기도 내 인생에 들어올 줄도 몰랐으니까. 나는 너 하나 얻은 걸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아기를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네 몸에 내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꿈만 같아.”

“……지금 하는 말 진심이야?”

건하의 말을 하은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했다.

건하가 손을 내밀어 하은의 젖은 볼을 닦아냈다.

“내가……, 지킬 거야. 남들처럼 평범하게 키워서 내가 겪었던 일도 다시는 없게 할 거야. 내 말 못 믿어?”

검고 깊은 눈이 흔들림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시선이 마주친 뒤에 하은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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