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왜? 뭐 부탁할 거 있어?”
“아니.”
“그럼, 잘못한 거라도 있어?”
하은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거 없어.”
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끄르자 하은이 건하의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침에는 미안, 그런 얼굴로 출근하니까 종일 신경 쓰이잖아.”
“오늘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뭘, 그런 일로 신경을.”
건조한 말투 끝에 건하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 허리를 감은 하은의 손을 잡았다.
“나야 뭐, 너 이런 스킨십 한 번에 금방 풀리잖아.”
그의 등에 하은이 얼굴을 비볐다.
“같이 목욕할래?”
“나야 좋지.”
기분 좋게 들려오는 건하의 목소리에 하은이 웃었다.
***
욕조에서의 정사는 다른 때보다 뜨거웠고 길었다.
녹초가 된 하은의 몸을 건하가 직접 닦아주고 침대까지 안고 와서 눕혔다.
침대로 올라가 하은의 옆에 누운 건하는 여전히 알몸이었다.
매일 밤 섹스 후에 두 사람은 지금처럼 알몸인 채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잠이 들었다.
그래서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데 살갗에 닿는 건하의 맨살이 오늘따라 신경 쓰였다.
아니 어쩌면 신경 쓰이는 것은 몸에 닿은 건하가 아니라 그녀 자신인지도 몰랐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계속 고민 중이었다.
이러다가 아무 말도 못 하게 될까 봐, 혹시라도 건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겁이 났다.
“자?”
어둠 속에서 하은이 등 뒤에 바싹 붙은 건하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니, 왜?”
“낮에 들은 친구 얘기가 생각이 나서.”
“무슨?”
건하의 손이 하은의 납작한 배를 쓰다듬듯이 어루만졌다. 하은은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아직 임신 5주라 겉으로 몸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를 쓰다듬는 건하의 손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친구가 임신을 했다는데 남자가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하나 봐.”
건하를 떠보듯, 하은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길래. 네 생각은 어때?”
목덜미에 닿은 그의 입술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글쎄. 남자가 아이를 안 좋아한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을 테고. 그럼에도 임신을 했다면 여자 쪽에 잘못이 있지 않을까? 아이는 두 사람이 충분히 상의한 후에 가져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건하의 대답에 심장이 벌컥댔다.
어쩌면 이미 그녀는 이런 반응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겁이 났던 거고.
하지만 생각하는 것과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은 크게 차이가 있었다.
뭔가가 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친구가 있었어? 주변에 결혼한 친구 있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은데.”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하은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어, 그런 친구.”
배를 어루만지던 건하의 손이 조금씩 위로 올라와 젖가슴을 거머쥐었다. 뻣뻣해진 하은은 아무런 반응 없이 어둠 속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건하의 손을 밀어내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어디가?”
“뭐 좀 잊은 게 있어서, 서재에 두고 왔나 봐.”
“내가 가져다줄까?”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하은이 저지했다.
“아니, 어디다 뒀는지 내가 알아.”
가운을 집어 들고 벗은 몸을 가리는 하은을 건하가 지켜보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나서는 하은을 보며 건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뭔가 이상했다.
워낙 미묘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느낌이 분명 전과 달랐다.
***
평소 아침잠이 많기는 했지만 건하의 출근 때는 꼭 일어났다.
지금까지 모닝 키스를 빼먹지도 않았는데 오늘 아침, 하은은 깊이 잠들었는지 일어나지 않았다.
출근 준비를 끝내고 다이닝룸으로 들어간 건하는 식탁 앞에 앉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따끈한 스프와 샐러드로 아침을 시작했다.
“윤 실장님?”
건하가 부르자 주방을 총괄하고 있던 윤 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건하에게 다가왔다.
“네, 상무님. 부르셨어요?”
“어제, 특별한 일 없었습니까?”
건하의 말에 윤 실장이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했다.
“무슨, 특별한 일 말씀하세요?”
윤 실장은 말끝에 뭔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짧게 내뱉었다.
“상무님 걱정하실까 봐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사실 며칠 전부터 사모님께서 식사를 제대로 못 하셔서 마침 검진 날짜도 다가와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병원이요?”
“네.”
“그래서,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결과는 며칠 뒤에야 나오겠지만 특별한 소견은 없으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건하가 식사를 끝내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어제 안색이 안 좋아 보였던 하은이 떠올랐다.
다이닝룸을 나서던 건하가 멈추고 돌아보았다.
“아침은 평소 잘 먹던 걸로 준비해서 올려줘요,”
“네, 상무님.”
윤 실장의 대답을 들은 건하는 곧장 룸의 문을 열고 나갔다.
***
오후 일정을 비우고 건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뒤끝이 남는 일은 항상 그 자리에서 처리하고 마는 성미라 미루고 싶지 않았다.
마침 그도 정기적인 점진 날짜가 지나있었고 병원에 가는 들르는 김에 검진까지 받을 생각이었다.
VVIP 전용 대기실로 이동하던 중 복도를 지나던 의사가 건하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얼굴을 기억 못 한 건하는 가운에 붙은 명찰로 의사가 산부인과 전문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회장님께도 먼저 보고 드렸어야 했는데 사모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려는지 저한테 비밀로 해달라고 하셔서요.”
무심하던 건하의 눈에 이채가 드리워졌다.
“아, 네. 어제 아내가 몸을 좀 불편해해서.”
앞에 있는 의사를 떠보기 위해 건하가 생각난 듯 말을 건넸다.
“곧 입덧이 시작할 시기라, 혹시 심하다 싶으시면 처방전 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산모가 젊고 건강해서 특별히 걱정하실 건 없지만 그래도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순간 건하는 뭔가로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 네. 그렇군요.”
의사가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지나쳐갔다.
건하는 병원 복도에서 멍하니 선 채로 의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친구가 임신을 했다는데 남자가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하나 봐.’
무심하게 넘겼던 하은의 말이 떠올랐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말이라 그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게……,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목 뒤에서 일어난 한기가 온몸으로 퍼지며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건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신이라니! 말도 안 돼!
한 번도 아이를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쯤, 하은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말에 잠깐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내 곧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세웠다.
비극은,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집안에 내려오는 미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건하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고통을 겪었다.
학교를 마치면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 곧장 집에 와야 했다. 집안에 뾰족한 물건이나 만약에라도 위험이 될만한 물건들은 들이지도 않았다.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곧 쓰러질 것처럼 사색이 되었다. 주변에는 친구도 없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가드가 그를 둘러쌌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오기라도 하면 철벽을 치고 막아섰다. 누구도 건하에게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도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틈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을 그의 아이에게 되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건강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할머니는 지금의 행복이 하은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신다.
백씨 집안 남자의 운명이 어떻게 타고나든, 진실인지 그저 미신에 불과하든지 관심 없었다.
다만 아이는 낳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 고통이 자신뿐만 아니라 하은에게도 닥칠 것 같아서, 평생 마음 졸이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 정관 수술을 받았다.
그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다. 그런데 하은이가 임신이라니!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불안이 자꾸 커져갔다.
한 번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는 그가 처음이고 끝이었다.
다른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끝 하나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적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하은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 뭔가가 터질 듯이 들어차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상무님?”
건하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낀 비서가 건하를 불렀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잔뜩 독이 오른 건하의 강한 눈빛에 비서가 움찔했다.
복도에 선 건하가 벽에 걸린 안내표를 눈으로 훑었다. 가던 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 건하는 남성의학과가 위치한 층으로 향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담당 주치의인 황 박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건하에게 말했다.
“자세한 것은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수술한 지도 기간이 오래되었고, 한참 혈기 왕성한 때이다 보니 수술한 부위가 풀린 것 같습니다. 필요하시면 재수술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 박사의 말을 들은 건하의 미간이 구겨졌다.
“검사라는 게, 지금 바로 가능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