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62)

55.

신경이 예민해지니 몸도 저절로 피곤을 느꼈다.

게다가 지난 밤 그와의 섹스에 이미 녹초가 된 탓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백건하와 결혼식을 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그사이 하은은 대학을 졸업했고 지금은 대학원에 다니는 중이었다. 남들은 신혼이 6개월이니, 1년이니 하면서 상대에 대한 설렘은 이미 사라져 전우애만 남았다고 하는데 백건하는 역시 그런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집에 있을 때면 백건하는 늘 그의 사정거리 안에 그녀가 있기를 원했다.

마주치는 눈빛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고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에는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몇 번이고 그녀를 안았다.

하은도 그와 떨어져 있는 것은 싫지만 가끔 그의 출장이 있을 때면 그녀 혼자만의 온전한 휴식을 취하는 때라 간혹 출장을 반길 때도 있었다.

여전히 그를 사랑했고 그에 대한 사랑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가끔은 지칠 때도 있었다.

아마도 바로 지금이 그런 시기인 것 같았다. 뭐든 좋아하는 일을 해도 가끔은 그 일에서 손을 떼고 멀찍이 거리를 두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지금 그녀가 그런 시기였다.

사소한 다툼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요 며칠 하은은 하찮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곤 했다.

‘왜 나는 매번 혼자 짝사랑하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어.’

출근하면서도 건하는 마음이 풀리지 않아 보였다. 아침부터 그렇게 뻣뻣하고 경직된 마음이면 종일 밖에서도 그럴 것 같아 하은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며칠 계속 그녀도 몸이 좋지 않았다. 식욕도 없어 뭘 먹어도 제대로 맛도 느껴지지 않았고 체한 것처럼 소화도 되지 않아 속도 더부룩했다.

주방에서 윤 실장이 쟁반을 들고 나왔다.

절임 연어 샌드위치는 평소 그녀가 즐겨 먹던 메뉴였다. 지금처럼 입맛이 없을 때는 입맛을 돋워주는 음식으로 샐러드와 함께 내왔다.

방금 짠 상큼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삼키자 이상하게 속이 진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은은 기분 좋게 샌드위치를 들고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격한 비린내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우욱.”

옆에 서서 기분 좋은 하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윤 실장이 놀란 표정으로 하은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

테이블 위의 티슈를 집어 들어 입가를 닦아낸 하은이 울상을 했다.

“모르겠어요, 왜 이러는지. 평소에 잘 먹던 건데 오늘따라 비린내가 올라오는 게.”

비린내라는 하은의 말에 윤 실장은 샌드위치를 들어 코끝에 가져다 댔다.

절임 연어 특유의 향과 야채의 신선함이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다른 걸로 금방 만들어드릴게요.”

하은은 답답한지 가슴의 중앙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옆에 있던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하아, 이건 좀 마실만하네요.”

윤 실장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리더니 방금 하은이 마시고 내려놓은 주스 잔을 쳐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접 갈아내린 오렌지 주스는 새콤하다고 마실 때마다 인상을 쓰던 그녀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기색도 없이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혹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실 때 근래 들어 자주 어지럽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안 그래도 요즘 계속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윤 실장님도 알다시피 백건하, 아니 상무님한테 말하면 또 얼마나 호들갑을 떨지 뻔해서 지나가는 말이라도 안 꺼내고 있었거든요.”

하은의 말에 윤 실장이 싱긋 웃었다.

언제 봐도 사이 좋은 부부였다. 사이가 좋다 못해 여전히 뜨겁기만 한 두 사람이었다.

함께한 세월이 길다 보니 백건하 상무에 대한 것에 그녀만큼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식성이며 생활, 습관 등 전반적인 것은 물론이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라 남들이 파악하기 어려운 좋고 싫음까지도 이제는 눈에 보였다.

예전만 해도 변덕이 죽 끓듯이 해서 사실 윤 실장을 포함해 밑에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했다. 그런 백건하가 한 여자에 대한 충성이라니! 사람은 오래 겪어봐야 안다고 하더니 요즘 백건하를 보고 있으면 세상에 저렇게 변하지 않을 남자가 있나 싶었다.

“그러면 상무님께는 나중에 말씀드리는 걸로 하고 저하고 병원에 다녀오시는 건 어떠시겠어요? 어차피 건강 검진하는 시기도 맞물려 병원 갈 때도 되셨는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하은을 보며 윤 실장은 메이드를 불러 샌드위치를 치우게 했다.

예상이 맞다면 임신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게 아니니 섣불리 입 밖으로 낼 말이 아니었다.

괜히 먼저 호들갑을 떨어 검진 후에 임신이 아닌 게 확인되면 윤 실장 본인이 곤란해질 게 뻔했다.

한 회장이 목이 빠지게 증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 상무가 워낙 그 일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눈치를 보고 있지만 속이 타들어가고 있을 게 뻔했다.

건하도 하은도 여전히 눈만 마주치면 강렬한 스파크가 옆에서 느껴질 정도라 그간 임신이 안 된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하은이 병원 갈 준비를 하고 온다며 2층으로 올라가는 사이 윤 실장도 서둘러 채비를 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5주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주치의의 말에 하은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오늘 방문한 병원은 한 회장이 오래전부터 매년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후원하는 병원이라 가족 모두 vvip 고객이었다. 매년 건하도 하은도 빼먹지 않고 건강 검진을 했고 결과 보고가 한 회장에게 먼저 올라갔다.

아마 오늘 임신 진단도 한 회장에게 먼저 보고가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윤 실장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태라 검진 결과는 하은 혼자 들었다.

그래서 즉시 주치의에게 부탁해서 자신이 직접 한 회장에게 말할 테니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검진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하은을 윤 실장이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검진 결과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고 정확한 결과는 며칠이 지나봐야 나올 것이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는데, 지금 하은의 표정을 보니 뭔가 일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어차피 문제가 있으면 병원에서 직접 한 회장에게 보고를 올릴 것이다.

워낙 백 상무 부부의 건강을 특별히 챙기는 사람이라 작은 일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러니 앞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미간을 모은 채로 혼자 깊은 생각에 빠진 하은을 보니 신경이 쓰였다.

***

‘아기는 몇 명 낳을 생각이야?’

결혼 후 1년쯤 지났을 때 하은이 지나가는 말로 건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며 얼버무리던 건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둘은 낳을 생각이야. 공평하게 아들 하나 딸 하나.’

다시 얼마 뒤 하은이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말했을 때 아무 반응이 없던 건하가 한참 뒤에 대답했다.

‘아이는 꼭 낳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너 하나로 충분해.’

건하의 말에 아무런 사심 없이 좋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 뒤에 한 번 더 하은이 아기에 대해 말을 꺼내자 건하가 전에 없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했다.

‘아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데, 지금처럼 우리 두 사람 행복한 걸로 나는 만족해.’

싸늘했던 건하의 말투에 그 후로 하은은 아기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솔직히 주변 친구들 중에 결혼한 사람도 없었고 아이를 갖기에는 충분히 시간도 있어서 급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너무 외롭게 자란 두 사람이고, 가끔 길을 지나갈 때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부부를 보면 부럽기도 했다.

백건하를 닮은 아이는 어떤 모습일지도 상상하면서 혼자 행복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덜컥, 임신이라고 하니 지금까지 백건하가 아이에 대해 보여주었던 반응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정말 그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닐까?

백건하의 평소 성격에 아이를 원했다면 진즉에 시도해서 지금쯤이면 하나 정도는 낳았을 게 분명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세상에 아이를 싫어하는 부모도 있을까, 생각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하은은 ‘결혼’이라는 단어 속에 아이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기, 그저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

퇴근한 건하가 집에 도착했다는 메이드의 말에 서재에 있던 하은은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복도로 나오자 2층 계단을 오르는 익숙한 발소리에 하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침나절 불퉁한 얼굴로 출근하던 건하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생각하던 사이 계단 위에 올라서는 건하의 모습이 보였다.

하은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건하의 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저녁은?”

건하가 시선을 내려 팔짱 낀 하은을 내려다보았다.

“대충, 해결했어.”

“그럼 과일이라도 좀 내오라고 할까?”

“아니, 생각 없어.”

드레스룸으로 가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건하가 하은을 힐끗 쳐다보았다.

“안색이 별론데, 어디 아파?”

“좀 얹혔던 모양이야. 지금은 괜찮아졌고.”

드레스룸 문까지 친절하게 열어주는 하은을 보는 건하의 짙은 눈썹이 가볍게 위로 솟았다.

무슨 일인가, 싶은 반응이었다.

게다가 건하가 벗은 슈트를 손수 받아 의류 관리기에 넣었다.

“욕조에 물 받을까?”

다른 날과 달리 유독 친절해 보이는 하은을 보며 건하가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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