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휴대폰에서 들리는 건하의 웃음이 듣기 좋았다.
밖은 음악 소리와 사람들 소리에 뒤섞여 소음이 짙었다.
<됐어, 너 불편해하잖아.>
정문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하은이 멈췄다. 멀리 건하가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어디에서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남자, 그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은이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내려가자 건하가 하은을 발견하고 천천히 오라는 손짓을 했다.
“왜 이렇게 뛰어와?”
잘생긴 내 남편, 어디에 있어도 한 번에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하은이 건하의 옆으로 와서 팔짱을 꼈다. 싫지 않은 얼굴로 건하는 하은의 옆을 나란히 걸었다.
곁눈질로 하은이 두른 앞치마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이렇게 많이 묻었어?”
건하의 말에 하은은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가볍게 털었다.
“해물전 부치고, 안주 몇 개 만드느라 좀 바빴어.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내가 부친 해물전 맛 안 볼래?”
건하는 상기된 표정의 하은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다른 때와 달라보였다.
하은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며 과 주점 앞에 도착했다.
시선들이 한꺼번에 두 사람에게 쏠렸다. 하은은 빈 테이블을 발견하고 건하를 안내했다.
“좀 앉아있어. 먹을 것 좀 가져올게. 아 참! 현금 두둑이 챙겼지?”
전에 없이 하은은 들뜬 얼굴이었다. 목소리 톤도 평소보다 하이톤이고 조명 때문인지 볼에 홍조도 보였다. 머리를 질끈 묶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하은은 영락없는 또래 대학생이었다.
건하는 축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정장 차림을 한 자신이 어색하다고 느꼈다.
뒷모습을 보이고 서있는데도 하은은 발랄해 보였다.
나이 차이가 많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건하는 자신이 한참 나이 든 어른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올 줄 알았다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는 건데,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은이 쟁반을 들고 오자 뒤따라온 여자가 건하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인사해, 내 친구 서영빈.”
하은에게 친구를 소개받자 건하도 얼떨결에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쪽은…….”
건하를 뭐라고 소개할지 몰라 하은이 머뭇거렸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건하를 보더니 하은이 활짝 웃었다.
“이쪽은 내 남편.”
하은의 목소리가 컸던 모양인지 ‘남편’이라는 말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하도 놀랐지만 옆에 있던 영빈은 너무 놀라 입만 벙긋했다.
“진짜? 하은이 너 결혼했어?”
아직 어린 나이라 결혼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빈은 확인하듯 건하를 쳐다보았다.
“아, 네.”
영빈이 묻지도 않았는데 건하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헐, 대박.”
영빈이 작정한 듯 의자를 끌어다 건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쩐지, 수업만 마치면 바로 없어지더라니! 집에 가서 밥하고 빨래하고 그런 거였어?”
확인하듯 영빈은 손짓으로 건하와 하은을 번갈아 가리켰다. 지금처럼 당황해하는 건하의 모습은 처음이라 하은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백건하! 이거 먹어봐. 내가 한 거야.”
하은은 기대에 찬 시선으로 건하의 앞에 해물전 쟁반을 밀었다.
“오호, 남편분 성함이 백건하 씨? 근데 하은이 너 남편분 이름 막 함부로 부르고 그래? 우리 또래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
처음부터 백건하라고 불러, 지금까지 호칭은 따로 없이 하은이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영빈의 말을 듣고 보니 건하와 나이 차이도 있는데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막 부르는 게 어쩐지 어긋나 보였다.
“그게 아니라, 그냥 오……빠라고 부를 때가 많아. 그치 건하 오빠?”
처음 부르는 호칭이라 하은은 말을 하고도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아 어색했다.
건하 오빠.
건하는 속으로 몇 번 되뇌다가 차츰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백건하라고 부르는 하은의 목소리도 듣기 좋지만 ‘오빠’라는 호칭까지 더해지니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하은의 기대에 찬 눈빛에 건하가 해물전 한 귀퉁이를 뜯어 입 안에 넣었다.
“어때? 맛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건하가 다시 한 점을 크게 집어 입에 넣었다. 하은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음료수를 따라 건하에게 내밀었다.
“막걸리도 있는데 마실래?”
건하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하은이 얼른 일어나 막걸리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건하는 하은의 모습에서 줄곧 눈을 떼지 않았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누가 보아도 영락없이 여자에게 푹 빠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영빈이 지켜보고 있었다.
첫인상은 선뜻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차가워 보이는데 하은을 보는 눈빛은 더없이 따뜻해 보였다.
어디 한군데 흠잡을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을 영빈은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시선이 하은의 남편에게로 쏠렸다.
남자는 어디에서든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은이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외모지만 남자는 잘생긴 얼굴에 퍼펙트한 몸매까지 갖춰 비록 많이 이른 결혼을 했지만 하은이 이해가 되었다.
서로만을 향한 시선, 눈빛만 마주쳐도 두 사람의 입가에 묻어난 행복은 숨겨지지가 않았다.
이런 남자를 남편으로 뒀으니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같은 과에서도 하은에게 호감을 가진 동급생들이 제법 있었는데 하은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니 섣불리 말을 못 꺼낸 것을 영빈도 알고 있었다. 저렇게 멋진 남편을 두고 한 눈 파는 게 이상했다.
영빈은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건하와 축제 구경을 하기 위해 하은은 과 주점을 나섰다.
주방은 1학년이 대부분 자리를 잡고 있어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보였다.
제법 늦은 시간이었지만 학교 안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초대한 유명 가수의 무대가 시작되어 학생들이 대부분 무대 주변으로 몰려들어 오히려 산책길은 한가했다.
“아침에 말할까 하다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서.”
하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건하에게 사실을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게다가 그와 걷고 있는 지금 순간이 오늘 있었던 일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왜 좀 더 빨리 건하를 축제에 초대할 생각을 못 했는지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건하는 팔짱을 끼고 있던 하은의 손을 풀며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볍게 움켜쥐는 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하은이 옅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너 오늘 좋아 보여.”
그를 보며 웃고 있는 하은의 얼굴이 다른 때보다 더 빛나 보였다.
“그럼 앞으로 호칭은 오빠라고 하는 거지?”
하은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피를 나눈 남매도 아니고, 오빠는 무슨.”
건하가 훗, 하고 웃더니 하은의 볼을 가볍게 집었다가 놓았다.
“그래, 너한테 하도 백건하라고 불렸더니 이제는 오빠라는 호칭도 어색해.”
“그래도 아까는 좋아죽더만.”
머리 위로 아치형을 그리는 덩굴나무를 지나 본관과 도서관 사이에 있는 연못에 이르자 건하가 멈춰 섰다.
그러고는 하은과 마주 보았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 옆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건하가 쓸어 넘겼다.
화장기 없는 얼굴, 민낯임에도 화사하고 예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은아, 우리 결혼할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은은 의아한 눈으로 건하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결혼한 거 아니었어?”
“그건 우리 의사하고 상관없이 끌려간 거고. 너하고 나 두 사람이 원하는 진짜 결혼. 나를 위해 웨딩드레스 입은 너를 보고 싶어.”
하은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지나갔다.
“많이 늦었지만 나하고 결혼해 줄래? 내 신부가 되어줘.”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화려한 폭죽이 터졌다. 분수처럼 수도 없이 내려오는 불빛들이 전부 두 사람만을 위한 축제 같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하은이 건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출근하기 위해 차에 오르는 건하를 하은은 2층 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조찬 모임이 있어 다른 날보다 이른 출근길이었다. 건하가 탄 차가 출발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드의 차량들이 뒤를 따랐다.
밤새 내린 비가 그친 뒤라 아침 하늘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건하의 차가 정문을 통과하는 것을 확인한 하은은 얇은 원피스 위에 가디건만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이닝룸으로 들어서자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메이드가 하은을 보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식사 준비할까요?”
메이드의 말에 하은이 선뜻 대답이 없자 주방에 있던 윤 실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간단한 샌드위치라도 좀 만들어드릴까요?”
며칠 입맛이 없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하은이 윤 실장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겠어요?”
“네, 사모님. 평소 드시던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어제 오렌지 들어온 게 싱싱하던데 주스 만들어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오렌지 주스라는 말만으로 하은의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며칠 계속 감정이 널을 뛰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안 그러던 것이 그냥 평범한 말인데도 예민하게 반응이 나간다.
하은은 식탁에 앉아 어젯밤 건하와 다퉜던 일을 떠올렸다.
한창 혈기 왕성한 백건하는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탄탄한 허벅지 사이, 건강한 남자의 성징이 먼저 일어서 발기한 채로 하은을 파고들었다.
아침잠이 많은 그녀의 몸을 본능적으로 더듬던 그의 손을 뿌리친 것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