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그때 생각을 하니 하은은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 순간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걷히며 환한 빛이 감쌌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나지 않고 서로 어긋난 채로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행복은 그녀 인생에 없었을 것이다.
늘 비참한 채로, 자신을 탓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생을 마감했을지도 몰랐다.
생각만으로도 무섭고 두려웠다. 백건하가 빠져나간 세상은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먹먹했다.
오래전 부모님을 잃고 처음 큰집에 들어가 살던 날을 떠올렸다.
살얼음이 일 것처럼 그녀를 보던 냉랭했던 사람들, 시선이 마주칠 때면 아낌없이 쏟아내던 무서운 말들이 그녀가 처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부모님은 살아 돌아오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그녀가 혼자일거라는 현실.
그럼에도 어둠이 내리고 밤이 찾아오면 방에 혼자 남아 간절히 기도를 했다.
내일아침 눈을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란다고, 지금 이곳이 악몽이고 내일 꿈에서 깨면 그곳이 현실이라고.
다시 부모님이 그녀의 앞에 웃으며 나타나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아침이 돌아오고 세상은 변함없이 그녀에게는 가혹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때부터 현실도 꿈도 그녀에게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긴 터널에 갇힌 기분이었다.
하은은 그때가 생각나 한기가 들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왜? 추워?”
하은이 몸을 떨자 건하가 고개를 돌려 텐트안의 난방 기구를 확인했다.
“아니, 그냥 뭐가 좀 생각나서.”
건하가 한숨을 내쉬며 하은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늘 있을 거야, 지금처럼. 절대로 떠나지 않고. 네 옆에 내가 있어.”
건하의 나른한 목소리에 하은이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몸이 노곤해지며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의 품에서 잠이 들고 내일 아침도 그의 품에서 깨어날 것이다.
이제 그런 기도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오늘이 내일과 같은 날이고,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도 믿었다.
잠이 들면 반복되던 악몽이 아닌 햇살 가득한 정원을 뛰어다니며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뒤돌아 흐뭇하게 웃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지켜줄게.’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속이라는 것을 알았고, 꿈에서 만난 엄마는 마지막 그녀가 마주했던 눈동자가 아닌 하은과 같은 맑고 깊은 눈이었다.
***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남학생의 절반이 군대를 갔고 제대한 복학생이 빈자리를 채웠다.
정해진 수업 외에 특별 활동은 한 적도 없고 과 모임에도 거의 참석한 적이 없던 하은은 사실 누가 빠진 건지, 또 누가 뉴 페이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옆에 앉아 수다를 떠는 영빈의 말로 짐작만 했다.
학교 캠퍼스 곳곳에 벚꽃이 필 시기에 맞춰 축제도 시작되었다.
과별로 주점이 열렸고 영빈이 신청하는 바람에 하은도 얼떨결에 일일 주점 스탭이 되었다.
백건하가 알게 되면 분명 인상 쓰면서 그만두라고 할 것이 뻔했기에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었던 학교 축제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이른 출근을 하던 건하가 하필 축제 당일 아침에 늑장을 부려 건하의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표정이 왜 그래?”
테블릿으로 아침 뉴스를 훑어보던 건하가 옆에 앉은 하은을 힐끗 쳐다보았다.
“뭐, 뭐가?”
당황한 것을 감추려고 하은은 창밖을 보는 척했다. 한동안 건하가 말없이 테블릿 화면을 넘겼다.
“오늘 몇 시에 끝나?”
“아, 오늘?”
뭐라고 대답할지 하은이 망설이자 건하의 눈썹 끝이 희미하게 꿈틀댔다.
“수업 늦게 끝나서 아마 친구랑 저녁 먹고 들어갈 것 같아. 전부터 같이 저녁 먹기로 하고는 내가 매번 빠져서.”
횡설수설 말하는 하은은 맥박이 무섭게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 빠른 백건하가 부디 모르고 넘어가 주기를 바라며 눈치를 살폈다.
“친구, 누구?”
낮고 음침하게 들리는 건하의 목소리에 하은은 심장이 조여들었다.
“아, 그 왜 전에 말했던 영빈이라고 알지?”
건하는 대답 없이 손에 든 테블릿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꼬치꼬치 캐묻다가 침묵하는 건하의 모습이 오늘따라 불길하게 느껴졌다.
“다 왔어.”
건하의 말에 밖을 보니 학교 정문 앞이었다.
“어, 그렇네. 그럼 나중에 봐.”
하은이 차 문을 열고 내리자 건하가 느릿하게 손에 들고 있던 테블릿 PC를 내려놓았다.
“좀 있다 출발하죠.”
묵직한 건하의 음성이 조용한 차 안을 울렸다.
건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정문을 지나가는 하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턱을 문지르듯 쓸었다.
“오후 미팅 몇 시에 끝난다고 했지?”
건하의 말에 조수석에 앉아있던 수행 비서가 몸을 뒤로 틀었다.
“네, 상무님. 여유 있게 5시쯤 끝날 것 같습니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건하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출발해.”
차가 움직이며 학교 정문을 지나자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는 하은의 모습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든 건하는 입술을 틀며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저녁쯤에나 사람들이 몰릴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오후 4시가 넘어서니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공연이 시작된 캠퍼스는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와 원을 그리듯 일렬로 늘어선 과 주점들로 정신이 없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힘이 들면서도 하은은 신이 났다. 상기된 표정이 하은의 얼굴에서 그대로 보였다.
“안 하겠다고 하더니 하은이 네가 더 열심이야.”
옆에 있던 영빈이 하은을 보며 웃었다.
팬 위에 야채를 볶고 있던 하은도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 다른 거 없이 안주만 계속 만드는 건데도 재밌어.”
다른 때와 달리 들떠 보이는 하은의 모습이 낯설었다.
주변 일에 관심 없어 보였고 수업이 끝나면 늘 학교를 빠져나가기 바빴던 하은의 지금 모습이 생소했다. 하은은 학교 수업 외에 동아리 활동이나 과 모임에도 일절 참석하지 않았다.
“1학년 애들한테 좀 시키자. 다리 아파 죽을 것 같아.”
하은에게서 팬을 빼앗은 영빈이 근처에 있던 1학년 후배를 불러 맡겼다.
주점 뒤로 돌아간 영빈은 빈 의자를 끌어다 앉고 하은에게도 내밀자 하은도 영빈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어둠이 내린 캠퍼스는 사방의 야광 불빛과 현란한 조명으로 대낮 같았다.
귀룰 쿵쿵 울려대는 음악 소리가 싫지 않았다. 하은은 허리를 세우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런 거 좋아하는 줄 몰랐어.”
영빈의 말에 하은이 멋쩍어하며 웃었다.
“남친이 이런 거 못 하게 해? 예쁜 여친 누가 채 갈까 봐 심하게 통제하는 거 아냐?”
“아니, 그냥 내가 안 하는 거야.”
하은의 말에도 영빈은 못 믿겠다는 눈치를 했다.
“정말이야!”
하은이 정색을 하자 영빈이 싱긋 웃었다.
“그래, 알았어. 근데 하은이 너 전하고 비교해서 좀 변한 것 같아서 한 말이야. 전에는 좋고 싫은 표현을 잘 안 했는데 요즘은 하은이 너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고 할까?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지만 전에는 좀 나이 든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내 또래 같아.”
영빈의 솔직한 말에 하은이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편안하고 휴식 같은 일상이 요즘 그녀의 하루 대부분이었다.
퇴근하고 온 건하와 저녁을 먹고 숲을 산책했다. 추운 겨울을 견딘 봄의 숲은 청량하고 아름다웠다. 때로 걷다가 풀이 무성한 곳을 찾아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숲은 두 사람에게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다. 언젠가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상상했다.
건하는 아직 아이 생각이 없는 듯 보였지만 언젠가는 두 사람에게도 천사가 찾아올 것이 분명하니까.
“하은아! 너 휴대폰에서 나는 벨 소리 아니야?”
영빈의 말에 하은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뜬 사람은 백건하였다.
주변이 시끄러워 하은은 휴대폰을 들고 조용한 곳을 찾아 뛰었다.
가까운 건물을 찾아 들어간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건하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하은은 손바닥으로 폰을 덮으며 건하에게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게 했다.
“아직 학교야.”
<저녁은 먹었고?>
“어, 방금.”
하은은 건하와 통화를 하면서 손목에 묻어있던 케첩 소스를 앞치마에 닦았다.
<그럼 나와, 기다릴게.>
“어딘데?”
<어디긴, 학교 앞이지.>
당황한 하은이 발끝을 세우고 건물 창밖을 보았다.
그녀가 서있는 곳에서는 학교 정문이 보이지 않았지만 건하가 가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못 나가.”
휴대폰 너머 건하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 알았어.>
“왜냐고 안 물어?”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하은은 뛰어오느라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쓸어 닦았다.
“학교 축제 기간이라, 과에서 행사가 있어.”
열린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 밖 너머 빨랫줄처럼 늘어놓은 작은 전구에서 나오는 불빛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여기 구경 올래?”
하은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건하가 대답이 없자 하은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건물을 나와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 해물전도 있고 먹을 거 많은데.”
대답 대신 건하가 낮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