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62)

51.

하은의 생일이라고 아침부터 식탁 위는 평소보다 화려한 음식들이 올라왔다.

하은은 생일상에 미역국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맞이하는 자신의 생일이 싫지 않았다.

한 회장은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한도가 없는 카드를 선물했다.

“너는? 뭐 없는 거냐?”

하은의 맞은편에서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던 건하를 향해 한 회장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선물은 무슨. 평소에 필요한 건 다 사주는데 뭘.”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건하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은은 그런 건하를 보며 웃었다.

기념일이니 뭐니 하면서 과하게 호들갑스러운 것은 하은도 원치 않았다. 오히려 다른 때와 다름없는 건하의 모습이 안정감 있었다.

한 회장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건하를 쳐다보았다.

“하은아!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거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평소에 무관심하다가 기념일에만 특별하게 챙겨주는 것보다 나아요, 할머니. 백건하가 워낙 일관성이 있잖아요.”

“칭찬인지, 욕인지.”

하은의 말에 건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자 한 회장이 싱긋 웃었다.

누구에게든 질 것 같지 않던 건하가 어쩐지 하은에게는 한참 밀리는 것 같았다.

늘 맹독을 머금은 채로 차디차게 굴더니 요즘 건하는 말 잘 듣는 애완견과 다를 바 없었다.

하은이 평범한 여자들처럼 애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우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건하를 저렇게 순한 양처럼 만들었는지 볼수록 신기했다.

하기는 건하 저놈이 뻔한 여우짓에 넘어갈 것도 아니고 애교라면 더더욱 치를 떠니 겉과 속을 아무리 뒤집어 봐도 숨길 게 없어 보이는 하은이가 눈에 들었을지도 몰랐다.

“근데 아침부터 밖이 왜 저렇게 어수선해?”

한 회장의 말에 하은의 시선이 창 밖으로 향했다.

여러 개의 박스를 실은 수레가 정원을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밖에서 좀 자 보려고.”

건하의 말에 하은과 한 회장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가 건하에게 모아졌다.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는데 누구 때문에 다 망했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신 건하가 일어섰다.

“그럼 나는 할 일이 좀 있어서 이만. 숙녀 두 분은 마저 식사하세요.”

어딘지 거만해 보이고 뻣뻣하기도 한 건하의 걸음이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건하가 다이닝룸을 나서는 것을 하은과 한 회장이 동시에 쳐다보았다.

“주말인데, 출근하려나 봐요.”

하은의 눈치 없는 말에 한 회장이 혀를 끌끌 찼다.

“밖에서 잔다는 말 못 들었냐? 저러다 입 돌아가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식사를 끝낸 백 회장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일 축하한다, 하은아. 좋은 하루 보내렴.”

하은도 따라 일어서 한 회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다이닝룸을 나서던 한 회장이 걸음을 멈추고 하은을 돌아보았다.

“내가 이런 말은 안 한 것 같아서 말이다.”

돌아보는 한 회장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감돌았다. 하은이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이 동그래진 채로 쳐다보았다.

“고맙구나, 하은아. 전부 네 덕분이다.”

한 회장의 말에 굳어있던 하은의 몸이 풀리며 미소를 되돌렸다.

“고마운 건 저예요, 할머님. 저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셨잖아요.”

하은의 말에 한 회장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래, 그렇구나. 우린 이제 가족이지.”

한 회장과 하은은 따뜻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던 건하가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하은은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에 놀란 얼굴을 했다.

뭘 하고 왔는지 상기된 얼굴을 하고 면바지와 티셔츠만 입은 건하의 편안한 차림새를 하은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바쁘다면서? 회사에 출근한 줄 알았더니.”

“주말인데 출근은 무슨. 일어나 봐! 보여줄 게 있어.”

하은의 뒤로 다가와 의자를 뒤로 빼어주고는 하은에게 일어날 것을 종용했다.

“뭘?”

“하여튼 일어나 봐.”

하은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건하는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밖으로 몰아세웠다.

얼떨결에 건하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온 하은은 스프링클러가 켜져 물기를 잔뜩 머금은 정원을 피해 섰다.

옆으로 다가온 건하가 하은의 손에 힘을 주며 잡았다.

“무슨 일이야?”

미심쩍어하는 하은을 향해 건하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곧 알게 되니까 조금만 좀 참아봐.”

정원을 가로질러 숲의 입구에 선 건하는 평소와 다르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하은에게 보여줄게 있다고 하더니 건하가 더 신나 보였다. 하은은 건하가 이끄는 대로 말없이 따라 걸었다.

“저게 뭐야?”

숲의 중간쯤 이르렀을 때 크림색 인디언 텐트가 야외 테이블과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못 들었어? 밖에서 잔다고 한 거.”

한 번도 야영을 해본 적이 없던 하은이 그 말을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바빴던 게 이거였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은이 텐트 가까이로 다가갔다. 건하는 자신이 상상했던 그대로 하은이 반응을 보이자 만족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원목으로 된 야외테이블 위에 호롱불 모양의 랜턴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텐트 지퍼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실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대형 토퍼가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뜻한 분위기의 내부를 살펴보던 하은은 침대위에 있는 선물 상자에 시선을 멈췄다.

“저건 뭐야?”

속삭이는 하은의 목소리에 건하가 눈치를 보았다.

“생일 선물.”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하은이 놀란 표정으로 건하를 보자 건하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별거 아냐. 뜯어봐.”

상자를 집어 들고 하은이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하은이 포장을 뜯자 건하는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뭐야?”

선물을 확인한 하은의 목소리가 낮게 울리며 떨렸다.

“이거……, 어디서 본 건데.”

손끝이 바들거리며 떨리더니 이내 눈물이 가득 들어찼다.

“이거……, 꿈에서도 보던 건데.”

혼잣말로 속삭이던 하은이 건하를 올려다보았다.

“어디서 찾았어?”

“네 부모님 유품에 들어있던 거야.”

“아…….”

하은은 손에 쥔 토끼 인형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그리고는 손으로 만지작대더니 천천히 얼굴에 가져다댔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거야.”

“오래된 거라 여기저기 뜯긴 부분은 복원했어. 그래도 모양은 흐트러지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하은의 가는 어깨가 조용하게 흔들렸다. 인형에 얼굴을 대고 한참 동안 울고 있었다.

건하는 조심스럽게 하은의 뒤에서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그녀의 머리끝에 입술을 맞대고 지금 그녀가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네 탓 아니야. 그건 그저 피해 갈 수 없는 사고였을 뿐이야. 네 부모님께서 아무리 조심했어도 어쩌지 못했을.”

건하의 말을 하은은 믿지 않는 듯 보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오랫동안 그녀의 머릿속에 틀어박힌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건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트럭 운전기사는 전날 밤 늦도록 마신 출 때문에 만취상태였어. 더군다나 새벽이라 졸음운전까지 겹쳤고. 갓길에 세우기 위해서 방향지시등을 켜고 차선을 바꾸려는 차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피하려던 순간에는 이미 늦어있었어. 속도를 줄일 수 없었으니까.”

건하의 말에 하은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건하는 하은의 턱을 잡아 그의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

“나는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너한테 진실만 말할 거야. 단순히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지도 않을 거고. 부모님 사고 경위서 확인하고 가해자 진술서까지도 전부 확인한 거야. 필요하면 가져다 줄 수도 있고. 하은아……, 그건 사고였어. 네 탓이 아니라.”

“백건하…….”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하은을 당겨 품에 안았다. 나긋하게 말하는 건하의 목소리에 하은은 끝내 마음의 담을 완전히 깨트렸다.

“나약한 사람들은 가끔 숨을 곳을 찾기도 해. 모든 책임을 너에게 돌리고 너를 탓하면서 비극을 잊으려고 했을 거야. 남겨진 너를 따뜻하게 안아줘야 했는데, 그럴 만큼 용기도 없었던 사람들이고. 그러니 오래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려. 그 시간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은이 네가 그 사람들을 이기는 거니까.”

그의 말이 조용히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세상에 그와 둘만 남겨진 것처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곳, 지금껏 한 번도 본적 없는 세상이 문을 열고 그녀 앞에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지만 하은은 늘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결코 지워버릴 수도 없었다. 평생 그녀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건하의 손이 위로하듯 하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하은이 한 번도 그녀의 부모님이 묻혀있는 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들었다.

부모님 기일에 정작 친딸인 하은을 참석조차 못하게 막았다는 말을 듣고 건하는 분을 참지 못했다. 당사자인 하은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었다.

“이젠 다 괜찮아. 하은아.”

하은은 건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