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9/62)

48.

손끝이 바들거리며 떨리고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백건하를 흔들어 깨우고 싶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를 통해서 네가 산다고 그러지 않았어? 옆에 붙어 있으면 오래 살 거라고.

너무 늦은 거야? 그래서 살아있는 부적이 아무 효능이 없어져서?

그러면 이번에도 나 때문이네. 결국 그 말이 다 맞은 거였어.

내가 재수가 없어서, 나한테 악귀가 쓰여있어서,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 다 죽은 거야. 나와 눈을 맞추고, 나를 떠난 거야.

눈앞에서 백건하가 구급차에 태워지는 것이 보였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백건하의 손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가씨! 정신 들어요?”

하은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낯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의식이 멀어지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아직은 버텨야 한다고,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그녀의 안에 또 다른 자아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백건하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옆을 지켜야 한다고. 그래서 어디로든 못 가게 잡아줘야 한다고, 절대 그녀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매달려야 한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암흑으로 변해갔다.

악몽이 시작되고 있었다.

***

햇살 좋은 아침이었다.

주말이라 부부는 하은이 잠든 침대 옆에 나란히 머리를 붙이고 앉았다.

“우리 하은이 잘 자네. 천사가 따로 없지?”

창을 통해 들어온 따뜻한 볕이 하은과 부부를 감싸고 돌았다.

“다른 건 안 바라. 그저 우리 하은이 첫걸음도, 그리고 걷는 길 내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거 큰 욕심 아니지?”

아내의 말에 하은 아빠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가 옆에 있을 거잖아. 그게 무슨 큰 욕심이야?”

남편의 말에 하은 엄마가 고운 눈웃음으로 시선을 내렸다.

엄마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하은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시선을 끌었다.

“사랑만 받아, 울 애기. 엄마가 지켜줄게.”

가는 손가락으로 하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아기의 머리칼이 손가락에서 흩어졌다. 세상 어떤 향기와 비할 수 없는 하은에게서 나는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다시 장면이 바뀌고 고속도로를 향해 달려가는 차 안이었다.

하은을 보며 웃고 있던 하은 엄마는 갑자기 어떤 예감 같은 것이 들었다.

섬찟하고도 두려운 느낌에 고개를 들었을 때 옆을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트럭을 발견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자고 있는 하은을 끌어안았다.

쿵,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강한 충격으로 사지가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하윽.”

놀라 잠에서 깬 하은이 울기 시작했다.

“하은아……, 사랑해.”

하은이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머금었다. 엄마와 마지막 기억이 하은이에게 악몽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이내 영원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눈부신 빛이 얼굴로 훅 끼치며 파고들었지만 하은은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럴 수 있다면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어쩌면 백건하도 함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눈뜨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장하은 씨! 정신이 좀 듭니까?”

그녀를 깨우는 기계적인 음성에 하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뜨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짜증이 일었다.

하은은 천천히 눈을 떴다. 뿌옇던 앞이 조금씩 분명하게 보였다.

“타박상만 조금 있을 뿐 검사 결과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안정 취하는 대로 퇴원하셔도 됩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순간 들려온 목소리가 어딘지 낯익었다. 눈을 완전히 뜨고 하은이 몸을 일으켰다.

환자복을 입은 남자의 옆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깎아내린 듯이 매끈한 이마를 따라 곧게 이어진 콧날이 날카로웠다. 결코 웃지도 않을 것처럼 굳은 입매까지 그녀가 아는 남자와 완벽하게 닮았다.

꿈과 현실이 오락가락했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도 모호했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가 기억하는 백건하의 모습이 있었다.

어떻게……?

시선이 마주치자 느린 걸음으로 건하가 하은을 향해 다가왔다.

“하은아!”

차갑고 냉랭하게 굴면서도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왜 그렇게 다정하게 들렸는지.

지금도 백건하의 목소리를 통해 들리는 그녀의 이름은 달콤하게 들렸다. 꿈이 분명했다.

그녀의 부모님처럼 백건하도 죽어버린 게 분명했다.

“가라고 할 때 갔어야지, 왜 왔어……? 왜 다시 왔어? 그러니까 그런 꼴을 당하지……. 이 바보……, 멍청이!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왜 그랬어? 흐윽…….”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었다. 이제 살아있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피하지도 숨지도 않을 것이다. 끝은 분명히 있고 이제 여기가 그토록 고되기만 했던 삶의 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전부 보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숨 쉬는 자신이 악귀 같았다.

살아있는 악귀, 사람 잡아먹는 귀신. 결국 그 말이 다 맞았다.

“왜 그래? 정신 차려! 장하은! 나 똑바로 봐!”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백건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눈 뜨고 호흡 길게 내쉬어!”

그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에서 들려 하은은 다시 감은 눈을 떴다.

다시 봐도 백건하였다.

하은의 젖은 눈이 건하를 머리끝에서부터 천천히 훑어내렸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 하은은 남자의 전신을 다시 눈으로 훑었다.

다리에 깁스를 한 건하가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이내 하은의 침대 위에 힘들게 앉았다.

그리고 굳어있는 하은을 품에 당겨 안았다.

“다행이야.”

깊은 한숨과 맞닿은 심장의 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을 하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살아……있어?”

마주친 하은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볼을 타고 흘렀다.

“왜? 죽었을까 봐? 그래서 걱정했어?”

건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다친 건 난데, 네가 너무 오래 의식이 없어서.”

하은이 스르륵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떴다.

“꿈이 아니었어.”

하은은 손바닥을 들어 의식을 잃기 전까지 만져지던 피의 감촉을 기억했다.

“다리를 다쳤고 수술해서 지금은 괜찮아.”

하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 얼굴로 건하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어떻게……, 거기 있었던 거야?”

하은의 물음에 건하가 망설였다.

“그냥, 우연히.”

믿지 못하겠다는 하은의 표정에 건하가 씁쓸하게 웃었다.

“보고 싶어서 갔어. 그날도 그랬고.”

모든 것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마주 서있던 차가 그녀를 향해 돌진했고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건하가 그녀를 안고 바닥으로 뒹굴었다. 차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지만 그녀가 아니라 백건하였다. 하은이 절망적인 눈으로 건하를 노려보았다.

“죽으려고 작정했어? 제정신이야?”

건하의 손이 하은의 볼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알아,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도 너를 살려야 했으니까.”

“미쳤구나!”

서늘한 웃음이 건하의 입에 감돌았다.

“그래, 나도 알아. 제정신이 아니지. 너하고 있을 때는 언제나 그래.”

그의 눈앞에서 하은이 손끝 하나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차체와 몸이 부딪치고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에 깨달았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따랐고 그래서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별로 두렵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미친 듯이 살고 싶었다.

절대로 하은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남은 그녀가 또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지, 생각만으로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고통이 뒤를 이었다.

건하가 하은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믿었거든, 네가 내 옆에 있었으니까. 넌 살아 움직이는 부적이잖아.”

무심하게만 보였던 백건하의 눈빛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하은은 시선을 내려 건하의 다친 다리를 향했다. 사고가 나던 순간이 다시 떠올라 하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많이 다쳤어?”

목이 멘 하은의 목소리가 불분명하게 울렸다.

“좀 다치긴 했는데 남자 구실하는 데는 문제없대. 그러니까 안심해.”

하은을 안심시키듯, 건하가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이내 이마를 찌푸리며 몸을 앞으로 굽혔다.

“타박상이라는데 좀 아프네.”

건하가 하은의 눈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도 내가 워낙에 건강 체질이고 통뼈라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야.”

“속도 없네, 백건하. 그렇게 못되게 말했는데.”

죄책감으로 흔들리는 하은의 눈동자를 보며 건하가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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