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읊조리는 한 회장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며, 하은이 손끝을 말아 쥐었다.
“겉은 대나무처럼 뻣뻣했지만 속정이 깊어 나를 많이 아껴주었더랬어. 아직도 생생해, 남편의 젊은 날 모습이 지금 건하 같았으니까. 그 뒤로 몇 해를 더 살고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을 홀연히 떠나갔지. 스물여덟이었어. 나는 그때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살았다. 내 나이 스물셋에 청상과부가 되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백씨 집안 남자들이 전부 서른을 넘기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나는 참 어리석었어. 미신이라고 믿었던 그 얄팍한 운명이 남은 내 아들마저 빼앗아 가고 난 뒤에야 그것이 이 집안 남자들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스운 소리였다. 하지만 결국 미신에 굴복해버린 저 꼿꼿한 여인의 속내를 들으면서도 냉정한 대꾸가 반사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건하를 키우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자본 적도 쉬어본 적도 없었다. 잠이 들어도 잠에서 깨도 늘 건하 옆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야 했어. 자라면서 건하 생김새가 어찌나 제 할아비를 닮았는지, 어느 날은 꼭 내 남편이 살아돌아온 것 같아서 가슴이 미어지더구나. 그래서 더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절대 그 아이는 그렇게 손 놓고 잃지 않겠다고,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점술가를 들였더랬어. 부적도 쓰고 별의별 일을 시키는 대로 다 했어.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건하를 지켜야 했으니까. 이제 건하 나이도 곧 서른 목전이다. 나는 할 만큼 다 했어. 더는 할 게 없어서……, 너를 볼 면목이 없다만. 그래도 믿고 매달릴 사람이 너뿐이라 나를 모질다고 욕해도 어찌할 수가 없구나. 하은아……! 부탁이다. 돌아오면 안 되겠느냐?”
한 회장의 말을 들으면서 하은은 그게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았다.
잠이 들어도 잠에서 깨어도 언제나 하은은 악몽에 시달렸다.
눈앞에서 백건하가 무참하게 죽어 나가는 환상이 도무지 떠나지 않아서 지금도 악몽 같은 시간을 살고 있었다. 이건,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이미.
“……회장님께선 잘 아시겠죠? 저를 집에 들이기 전에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전부 조사하셨을 테니까요. 제 할머니께서는 저보고 박복한 팔자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아마도 부모님 잡아먹고 목숨 유지하고 사는 제가 많이 미웠던 모양이에요. 혹시 아실지 모르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사고는 저 때문에 난 게 맞아요. 새벽잠을 깨운 뒤라 계속 칭얼거리는 저 때문에 아버지가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려다가 앞뒤로 오는 공사 차량을 피하지 못하신 거고. 어머니는 어쩌면 살 수도 있었을지도 몰라요. 저를 살리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으니까요. 부모님 두 분 다 보내고 겨우 저만 살아남았는데 그 후로 저는 계속 죽은 것만 못한 채로 살았어요. 죽음에 관련된 온갖 욕은 다 듣고 자랐어요. 그런 제가 백건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아마 회장님께서도 속으신 게 분명할 거예요.”
한 회장은 고개를 돌려 하은을 향해 한숨처럼 미소를 보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속았을 수도 있어. 내 약점을 이용해서 돈만 가져간 뒤로 연락을 끊어버린 점쟁이도 꽤 되었으니. 그런데 하은아, 무슨 이유인지 너를 내 집에 들이고 내 평생 그리 편한 잠을 잔 게 처음이었어. 너는 있는 듯 없는 듯 내 집에서 유령처럼 살았지만 미미했던 너의 존재가 어느 순간부터 집안 곳곳을 지배하고 있더구나.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는데 집이 환해졌어. 건하도 회사 일에 꽤 열심이었고 그저 그렇게 하루를 보내던 그 애가…….”
말끝을 흐리며 한 회장이 몇 번 숨을 몰아쉬었다.
“내 눈에는 건하 그 녀석이 무언가에 집착을 보인 것이 처음이라, 사람에 대한 집착이 생기면 삶에 대한 집착도 당연히 생기는 거라 안심이 되더구나. 그래도 저 녀석은 쉽게 내 옆을 안 떠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 도무지 건하 마음을 잡을 길이 없어. 다 포기하고 사는 녀석 같아. 언제 어떻게 그 애를 잃게 될지 나는 생각만 해도 너무 두렵구나.”
물기 가득한 눈이 하은의 굳은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싫다는 너를 억지로 끌고 건하 옆에 데려다 놓았을 게다. 나는 무슨 수를 쓰든 내가 원하던 바를 이루었을 거야. 그런데 어째 이번만큼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구나. 아마 건하의 마음이 깊어서겠지 싶어서,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마. 그러니 건하 옆에 있어다오.”
목 끝이 아릿해지며 뜨겁다. 하은은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담담한 듯 굴었다.
한 회장 앞에서 오열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 앞에서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한 회장 앞에서는 더 그랬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하지만 또 그렇게 알아준 것 같아서 묘하게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비뚤어진 듯 보이는 한 회장의 말이 왜 이렇게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한 적도 없는데 왜 모든 걸 풀어놓고 울고 싶은 건지.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어. 이미 살 만큼 다 살았고. 하은이 네가 우리 건하 옆에 있어준다면 내 편히 눈감을 수 있겠구나. 부탁이다, 하은아. 우리한테 돌아와다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꽤 오래 두 사람은 말없이 앞을 응시했다.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백건하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한 회장과 하은의 생각이 전혀 다른 길을 향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하은의 말에 한 회장이 언뜻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하은이 차에서 내리고 운전기사와 비서까지 모두 차에 타고는 곧장 앞을 벗어났다.
***
문자 알림음이 들려 하은은 엎어놓았던 휴대폰을 열었다.
내일이 재판일이라는 변호사에게서 온 문자였다. 불법으로 취해간 부모님의 재산 반환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가끔 애가 타는지 큰아버지는 종종 협박 문자를 보내거나 했다.
하지만 하은은 소송을 취하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가 큰집에서 받은 학대와 상관없이 그저 순수하게 부모님과 살았던 집을 돌려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해 먹은 적이 없어 냉장고가 텅 비어있었다. 장을 보기 위해 지갑을 챙겨 집을 나왔다.
집 근처 대형 마트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양손에 쥔 봉투가 묵직해서 몇 번 쉬었다 오느라 더 늦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달을 시킬 걸 그랬나 생각이 들다가도 저녁 늦게나 배달된다는 말에 고생이 되더라도 들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일의 한낮이라 집 앞 도로는 한산했다. 평소에도 교통량이 많은 지역이 아니라 큰 도로변을 지나 하은의 오피스텔까지 이어진 도로의 건널목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근처에 학교가 있어 속도 제한으로 운행하는 차들도 대부분 거북이 운행을 했다. 이런저런 상황이 맞물려 전혀 위험할 것 없는 곳이었다.
교통사고라고 할 것도 없는 가벼운 접촉 사고가 대부분이었다. 길을 건너 이면 도로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차가 정면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당연히 피해갈 줄 알았다. 천천히 달려오던 차가 어느 순간 속도를 내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차를 감지한 때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피할 새도 없이 강하고 둔탁한 것이 그녀를 덮쳤다. 아스팔트 위에 몸이 부딪치며 내려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봉지 안에서 튀어나온 물건이 자동차 바퀴에 깔려 무참하게 뭉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큰 통증은 없었다. 순간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 손바닥에 끈끈한 것이 만져졌다. 몇 번 눈을 깜박여 손바닥을 들었을 때 손에 묻은 것이 피라는 것을 알았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해, 하은아.’
어디선가 선명하게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쓰러져 돌아누운 익숙하고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목소리가 고막을 찢듯 거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백건하!”
꿈을 꾸면 악몽과도 같이 그녀를 찾아오던 피투성이 백건하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악몽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생생해서,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지근한 온도의 피가 전혀 꿈인 것 같지가 않았다.
하은은 몸을 일으켜 쓰러져 있는 백건하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던 백건하의 눈꺼풀이 무겁게 열렸다. 하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백건하의 붉어진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언젠가 그녀의 앞에서 생명이 꺼져가던 엄마의 눈과 지독히도 닮아있었다.
“안 돼……!”
자신의 목소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갈라졌다.
“내가……, 이렇게 될까 봐……. 보내줄 때 갔어야지……. 왜 또…….”
“멍청이. 말하지 마. 잠깐만, 백건하―!”
백건하가 몇 번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마주친 하은을 향해 웃었다.
“하은아……, 사랑해.”
그리고 이내 천천히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