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62)

46.

건하는 부모님의 사고, 그리고 자신과의 일까지 겹쳐 힘들었을 하은을 생각했다.

‘백건하 그놈한테 가서 지금이라도 네년이 네 부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까발려줄까? 안 그래도 쫓겨나온 주제에 재수 없는 년 얘기 들으면 그 집에서 퍽이나 널 받아들이겠다! 내가 아주 이 바닥에 얼굴 들고 못 다니게 만들어줄까? 응? 부모 잡아먹은 년이 무슨 자격으로 빳빳이 고개 들고 살아? 이 짐승만도 못한 년.’

장범우가 하은의 집 앞에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순간 건하는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그렇게 지금까지, 어린 하은을 앞에 두고 귀가 닳도록 폭언을 했을 것이다. 건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어린 하은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상처를 속으로 감추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구는 하은의 속은 얼마나 만신창이일지, 건하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혼자 상상하고 혼자 상처받고, 그리고 모든 것을 자신이 짊어지려고 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자였으니, 그런 그녀에게 건하도 가해자나 다름없었다.

“……멍청한 놈.”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짐작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몰아붙였으니.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지금까지 버티고 산 하은의 고통이 그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시시때때로 목을 조이며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던 그녀가 생각났다.

건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람도 아니다. 혼자 남겨진 어린아이에게 그런 고통을 주고도 모자라 가진 것도 전부 빼앗으려는 인간들이 악마 같다고 생각했다.

하은의 텅 빈 얼굴, 웃는 미소조차 고통이 느껴졌던,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속에 새겨 넣은 것이다.

그런 여자에게 자신을 지키는 부적이 되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건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공범이었다. 하은이 결코 어디에서 쉴 수 없게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장하은,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산 거야?

‘나 좀, 숨겨줘.’

‘사는 게 재미가 없어.’

하은의 말을 떠올리며 건하는 목 끝까지 넘어오는 뜨거운 기운을 삼켰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하은의 그 말이 그녀의 안에 들어있던 고통과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슬픔이 차오르다 가라앉곤 했던 그 눈은 이제 더는 버틸 수 없는 피로와 체념의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낸 하은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이렇게라도 자신에게 와줘서.

***

하은은 집으로 돌아온 이후, 며칠을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하! 저…… 저 죽일 년!’

자신을 끝없이 괴롭히던 악몽이 지나고 어느 순간 허기를 느끼고 나서야 겨우 일어나 앉은 하은의 몸에선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웠다.

하은이 잠시 방을 둘러보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풀지 않은 가방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실내도 엉망이었다.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킨 하은이 흐트러진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큰 아버지가 들이닥친 후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집은 여전히 엉망인 상태였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에서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커튼이 날리며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하은이 얼굴을 찡그렸다.

‘……장범우. 다시 안 오게 할 테니까 마음 편하게 있어.’

‘걱정 마. 나도 갈 테니까.’

불현 듯 자신의 등을 떠밀던 건하의 따스한 손과 씁쓸한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금 야윈 것 같아 보였는데.

……보고 싶어, 백건하.

겨우 며칠이나 지났다고,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잘된 일이라고 자신을 타일러도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그리움과 후회가 한데 섞여 하은의 마음을 흩트려놓았다. 휘청거리기만 했던 자신을 잡아준 유일한 사람을 놓아버린 상실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앞으로 지금처럼 혼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생각과 다르게 자꾸 무너지려고 했다.

흔히들 이제는 100살까지 사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데, 그렇다면 자신은 인생의 반은커녕 겨우 20대를 막 넘겼을 뿐인데 살아온 지난 시간이 100년을 꽉 채운 것처럼 지치고 힘이 든다.

하긴, 애초에 자신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주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이었다.

좀처럼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아 소란스럽다. 하은은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혹시 모를 백건하의 방문이 있지 않을까 싶어, 시선이 자꾸 밖을 향했다.

밀어내놓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마음이 간사했다.

“그만해. 장하은.”

소란스러운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며 하은이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곧 다시 정갈한 백건하의 이마에 있던 반창고를 떠올렸다.

“……어디서 다치고 돌아다니는 거야.”

속상한 마음이 절로 솟아난 하은이 한숨을 내뱉었다. 눈에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백건하는 여전히 자신의 하루를 지배하는 듯했다.

그렇게 하은은 하루의 반을 백건하 생각으로 넋을 놓고 보냈다.

***

며칠 동안 집에만 박혀있던 하은은 겨우 집을 나섰다. 먹을 것도, 심지어 당장 마실 물조차 떨어져버렸다. 그렇게 필요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슈퍼에 들렀다 집에 들어가는 길, 하은은 입구에 주차된 검은 세단을 보았다.

검게 선팅되어 있어 차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은은 그 세단이 누구의 것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나갈 때만해도 보이지 않았던 차였다.

세단의 주인은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하은이 나갔다 돌아오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고 지나치려 했지만, 차 안에서는 하은의 모습이 바로 보였을 터였다.

때마침 조수석에서 한 회장의 개인 비서가 내려 곧장 하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자신에게 깍듯한 태도에, 하은이 불편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안녕하세요.”

“회장님께서 잠깐 뵈었으면 하십니다.”

“…….”

하은은 대답대신 보이지 않는 차 안의 한 회장을 응시했다.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손자를 끔찍하게 여기는 한 회장 성미치고는 생각보다 늦은 방문이었다.

“타시죠.”

하은이 냉랭한 얼굴로 비서의 뒤를 따라갔다. 차량 뒷좌석 문이 열리고 한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꼿꼿하고 정정한 모습이었다. 하은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한 회장은 눈썹 끝만 뾰족이 세웠다.

하은이 차에 오르자 운전석에 앉아있던 운전기사도 차에서 내렸다.

적막이 내려앉은 좁은 공간, 한 회장과 하은이 남았다.

“오랜만이구나.”

한 회장은 정면을 응시한 채로 하은에게 건성으로 안부를 물었다.

“안녕하셨어요.”

형식적인 하은의 인사에 한 회장이 슬쩍 곁눈질로 하은을 보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안녕했겠니? 보아하니 너도 그다지 안녕하지 못한가 보구나.”

하은은 대답 대신 입술을 잠깐 움찔대며 옅은 미소만 보였다.

“쯧쯧, 한창나이에 얼굴이 어째 그 모양이야?”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하은의 얼굴을 보며 한 회장이 혀를 찼다. 여전히 고집하고는. 어째 제 손주보다 더 벌을 받고 있는 듯한 안색이라니.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들어오거라. 고집 피워봤자 너한테도 좋을 게 하나 없어.”

“제가 원한 일도 아니었어요. 큰아버지와 한 회장님 두 분이 한 일이니 마무리도 두 분이 알아서 해주세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하은의 말에 한 회장의 눈 끝이 매섭게 변했다.

“고얀 것! 할 말이 그 것뿐이야?”

한 회장의 매서운 질책에도 하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한 얼굴을 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은 하은의 표정을 보던 한 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무겁게 입을 뗐다.

“하은이 네 나이 때, 그러니까 나이 스물에 백씨 집안 남자와 혼인을 했지. 그때는 연애가 지금처럼 활발한 때가 아니라 집안에서 정해주는 남자와 선을 보고 약혼을 해서 결혼까지 가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어. 그래서 선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했어. 내 친정이 기울어 가던 시기라 내 아버지는 제법 두둑한 지참금을 받아 챙겼어. 결론으로 따지면 백씨 집안에 팔려간 꼴이지만 어찌 되었든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았어. 그때가 참 좋은 시절이었지.”

하은은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한 회장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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