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62)

45.

쾅쾅쾅!

큰아버지가 벨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은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큰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건물 전체를 울렸다.

하은은 인터폰에 비친 큰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오늘이 1차 재판 선고일이라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미리 변호사로부터 받았던 연락조차도 잊고 있을 정도로 요즘 그녀는 멍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큰아버지가 집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하은은 손끝부터 시작해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떻게 여기를 찾아 올 수 있지? 아직도?

“얼른 이 문 안 열어? 지 부모 잡아먹은 걸로 성이 안 차서 이제 우리까지 죽일 셈이야? 안에 있는 줄 다 알아! 얼른 이 문 열어!”

쿵쿵쿵!

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집안을 울리자 하은은 귀를 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쳐죽일 년! 백건하 그놈한테 가서 지금이라도 네년이 네 부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까발려줄까? 안 그래도 쫓겨나온 주제에 재수 없는 년 얘기 들으면 그 집에서 퍽이나 널 받아들이겠다! 내가 아주 이 바닥에 얼굴 들고 못 다니게 만들어줄까? 응? 부모 잡아먹은 년이 무슨 자격으로 빳빳이 고개 들고 살아? 이 짐승만도 못한 년!”

귀를 막고 있어도 큰아버지의 저급한 욕설이 생생하게 들렸다.

하은은 질끈 눈을 감았다. 마치 이건 늘 꾸던 악몽 같았다.

꿈에서도 지금처럼 큰아버지가 나타나 밤새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 괴로운 꿈 속의 공포는 처음에는 큰아버지의 얼굴이었다가 큰어머니의 얼굴로 나타나더니 점점 어둡고 사악한 괴물의 형태를 갖추어 그녀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온몸이 부들거리며 떨리고 도망치려고 해도 언제나 사지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귀를 막고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하은은 그때처럼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여전히 큰 아버지가 언제라도 저 문을 뚫고 들어와 자신을 덮칠 것만 같았다.

하은은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잃고 난 뒤 큰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처럼 큰집 사람들의 폭언이나 폭행이 시작되면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50까지 세면 그들도 지쳐 하은을 내버려두곤 했다. 그래서, 하은이 불안을 꾹 눌러 참으며 숫자를 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더 숫자가 50에 가까워지니 조금은 견딜만했다.

왜 여기서 아직도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큰집을 나온 순간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사십 이, 사십…….”

“장범우 씨! 지금 여기서 뭐 하는 짓입니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은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분명 백건하 목소리였는데…….

하은은 온몸이 떨려왔다. 정말 그가 맞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킨 하은이 인터폰 화면에 비친 건하의 얼굴을 확인했다.

화면 안에는 건하가 큰 아버지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하은이 비틀거리면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백건하!”

건하는 자신을 보고 당황한 장범우의 목을 움켜쥐었다.

“하!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장하은 건드리면 죽인다고 하지 않았어? 내 말이 우스워?!”

건하의 눈에 살기가 번득였다. 장범우의 목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장범우는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다. 힘의 차이는 물론, 백건하의 살벌한 분위기에 장범우는 완전히 압도 당한 것 같았다.

“상무님!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혹시라도 건하가 일이라도 칠까 봐 강훈이 걱정된 얼굴을 하고 건하의 앞을 막아섰다. 차가 멈추자마자 하은의 집으로 뛰쳐올라간 건하였기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그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건하!”

하은이 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로 마치 유령을 보듯 건하와 큰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하! 저…… 저 죽일 년!”

마지막 발악을 하듯 강훈에게 끌려 내려가면서도 하은을 보는 장범우의 눈에 독이 잔뜩 올라있었다.

맨발로 현관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하은을 본 건하가 말했다.

“들어가.”

낮게 말하는 건하의 목소리가 허스키했다. 하은이 건하를 올려다보니 그의 이마에 붙은 반창고가 보였다.

“왜 그래? 다쳤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하은의 표정에 건하가 피식, 하고 비웃었다.

“뭘 또 마음에도 없는 걱정을, 안 그래도 되니까 일부러 그런 얼굴 하지 마. 사람 착각하게.”

퉁명스러운 건하의 말에 하은이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건하가 그런 하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범우. 다시 안 오게 할 테니까 마음 편하게 있어.”

“…….”

건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내밀어 직접 겁먹은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건하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바닥으로 향해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걱정 마. 나도 갈 테니까.”

건하가 반쯤 열린 현관문 안으로 하은을 들여보냈다. 하은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답싹였지만 이내 포기했다. 조용히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하은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똑똑.

건하의 사무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온 사람은 강훈이었다.

건하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데스크톱 화면을 보고 있었다.

강훈이 다가와 손에 든 상자를 건하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장범우는 잘 처리했어?”

“네. 경찰서에 인계했습니다.”

“하은이 사고 때의 조사 진행은 어디까지 됐지?”

강훈이 기다렸다는 듯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하은 씨 사고 당시에 차에 있었던 소지품하고 사고 관련 몇 가지 증거품 어렵게 입수했습니다. 당시 경찰에서 보관하고 있던 건데 가족들이 요구해서 영상 카피본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건 없고 여기 들은 게 전부라고 확인했습니다.”

강훈의 말을 들으면서도 건하는 불편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장범우 사장 지금 벼랑 끝에 몰린 듯했습니다. 주식으로 빚더미에 앉은 상태고 장하은 씨 큰어머니라는 분도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였습니다.”

“지금 경매 넘어간 장범우 건물, 당사자한테 한 푼도 안 돌아가게 처리하고 장범우가 장하은 앞에 나타나는 일 생기면 다음엔 강훈이 너, 다시 볼 일 없을 거다.”

강훈이 나가고 건하는 데스크 위의 상자에 손을 뻗었다.

뚜껑을 여니 사고 당시 차 안에 있었던 화재로 인해 그을음이 생긴 하은의 부모님 개인 소지품이 들어있었다.

조심스럽게 물건을 꺼낸 건하는 투명한 상자에 담긴 usb를 발견하고 꺼냈다.

칩을 컴퓨터에 연결한 건하는 화면을 창에 띄웠다.

검은 화면이 나타나더니 이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은아!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아?”

영상 속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시큰둥하게 앉아있던 건하가 허리를 세웠다.

“선잠을 깨워서 그런가 봐. 어쩌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영상은 자동차 앞을 비추고 있어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상 속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하은아! 조금 더 가면 휴게소 나오니까 우리 하은이 좋아하는 토끼 인형 트렁크에서 찾아줄게. 아가 조금만 더 참자, 응?”

영상 속에서 아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의 소음과 함께 들려 어수선했다. 하은의 부모님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조차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잠깐 좀 세워서 하은이 달래고 가야겠어.”

비상등 깜빡이 켜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뒤의 상황이 예상이 된 건하는 영상을 멈추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겹쳤다.

“하은아……, 미안해……. 은아야……, 사랑해…….”

영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하은과 부모님의 교통사고의 상황이 담긴 영상이었다. 끔찍한 상황이 상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건하는 조금 전 보았던 영상 속에 담겨있던 대화를 다시 생각했다.

장범우가 대체 왜 메모리칩에 집착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건하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뉴욕에서 돌아왔던 날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은의 큰어머니를 집에 들였던 때를 생각했다.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퍼붓는데도 하은은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라면서 수차례 들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애미 애비 잡아먹은 년이 이제는 우리한테까지! 사악한 년!’

하은에게 악담을 퍼붓던 말이 다시 생각난 건하는 영상을 처음부터 되돌렸다.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대화 내용과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하은의 친가에서 영상을 봤다면? 분명 사고의 원인은 하은이 울음을 멈추지 않아 그녀의 부모님이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으니 하은에게 탓을 돌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상황들이 맞물리며 하은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자신 때문에 사고가 났고 그녀는 멀쩡하게 살아있지만 부모님 두 분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건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린아이를 두고,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은 아이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지 짐작조차 못 했다. 그럼에도 아이의 머릿속에 그 사실을 심어준 사람이 다름 아닌 친족들이었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났다. 보살펴주고 상처를 다독여줬어도 트라우마가 남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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