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별장에도 예약한 호텔에도 가지 않겠다고 하은이 고집을 부렸다.
둘 중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결론은 백건하와 같은 침대를 써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혼자 떠나온 여행을 망쳐버린 백건하에 대한 원망도 얼마쯤 섞여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다 허기를 느낀 두 사람은 근처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찌 되었든 밥은 먹어야 싸우든 말든 할 거였으니.
정식으로 두 개를 시켰더니 순두부 찌개와 반찬 몇 가지가 나왔다. 배가 고픈데도 음식 맛은 별로였다. 하은은 뜨는 둥 마는 둥 하는데 건하는 한 그릇을 금방 비웠다.
그의 집에서 먹던 음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해 보였는데 백건하는 상관없는 듯 보였다.
백건하가 까다로운 식성일 거라는 생각은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음식에 까다로운 쪽은 하은이었다.
“하루 자고, 내일 같이 올라가지.”
“버스 타고 왔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처음 계획대로 난 여기 며칠 있을 거야. 그러니깐 그쪽은 지금 바로 출발해.”
건하가 히죽 웃으며 상체를 테이블 앞으로 바싹 가져다 댔다.
“말이 돼?”
“말이 안 되는 건 그쪽이지 않아? 누가 여기까지 오랬어?”
하은이 뾰족한 눈으로 흘겨보자 건하가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셔츠 앞이 팽팽하게 당겨져 단단한 가슴팍에 주름을 세웠다. 군살 없이 탄탄했던 건하의 상체가 떠올라 하은은 곧장 시선을 내렸다.
“기억 안 나는 척 하는 거야?”
무슨 말인가 싶어 하은이 쳐다보자 건하의 입가에 은밀한 미소가 스쳤다.
“어제도 같이 있었는데, 새삼스럽기는. 좋아 죽을 것처럼 매달렸던 것도 생각 안 나?”
놀리는 듯한 건하의 말투에 하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설마 취했다는 거 핑계 삼으려는 거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백건하는 실없이 이죽거렸다.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별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조롱 섞인 하은의 말에 건하가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왜 항상 몸은 따로 반응하는지 모르겠어. 네 눈은 발정 난 개새끼라고 욕하는데 아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젖어있어서.”
하은의 눈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하며 씩씩대고 그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재미있어하는 건하를 남겨두고 하은은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뒤따라온 백건하에게 팔을 잡혔다.
“힘빼는 거 그만하고 별장으로 가. 싸구려 침대 위에서 밤새 삐걱대다 호텔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건하가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차가 두 사람 앞에 섰다.
“놔! 소리 지를 거야!”
“얼마든지.”
건하가 차 문을 열고 하은에게 눈짓으로 타라는 신호를 했다.
“원하지 않으면 손 안 대. 그러니까 타!”
“호텔 예약했다는 내 말, 못 들었어?”
하은을 빤히 보던 건하가 차 문을 탁, 하고 닫았다.
“그래, 그럼 호텔로 가. 어디야? 그 호텔.”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그럼 뭐? 설마 여기 너 혼자 두고 내가 갈 것처럼 보여?”
실랑이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하은은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건하가 서있는 반대편으로 가서 자동차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건하가 차 문을 열고 하은의 옆에 앉았다.
차는 이내 해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0분 남짓한 거리를 이동한 차는 해변 도로의 끝에 멈춰 섰다.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열리자 차는 조용히 안으로 진입했다. 출발한 이후로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줄곧 말이 없었다.
건하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하은이 뒤따라 내렸다.
별장은 두 사람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주변은 조용했고 이따금 거센 파도 소리가 들렸다.
뒤따라온 차에서 내린 강훈이 하은이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았다. 가볍게 목례를 한 그가 짐을 들고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하은이 보고 있었다.
“들어가.”
건하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하은은 바다와 이어진 길을 쳐다보았다.
“걷고 싶어.”
바닷가 바로 앞이라 불어오는 바람이 만만치 않게 거셌다. 방금 차에서 내렸음에도 하은의 코끝이 빨갛게 얼어 보였다. 뭐라고 말을 하려던 건하가 차 문을 열고 트렁크에서 접이식 모포를 꺼냈다. 모포를 넓게 펼친 그는 하은의 어깨 위로 감싸듯 덮어주었다.
“오래 있으면 감기 들어.”
무심히 던지듯 말을 하며 건하가 먼저 앞장서 길을 내려갔다.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 같다고 하은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연말을 즐긴 적이 없었던 하은에게는 모든 것들이 생소했다.
반짝이는 불빛과 파도 소리, 그리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안가 별장.
연말을 맞아 큰집 가족들이 모두 나간 빈 집에서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읽었던, 바로 그 동화책 속에 나오던 그림 같았다.
산타클로스도 트리 아래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들도 전부 동화책 속에서나 존재했다.
그래서 연말이 다가와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떠나온 여행이 우연찮게 크리스마스와 맞아떨어졌을 뿐이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건하를 뒤따라 내려갔다. 얼마 가지도 않아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별장의 불빛이 앞을 밝혀주고 있어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불빛과 어우러진 파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건하가 준 모포 덕분에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서있는 건하의 옆에 하은도 나란히 섰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수증기가 차가운 공기 틈으로 번져나갔다.
“나는 미신 따위 안 믿어. 나한테는 할머니의 믿음이 절박해 보이지만 너는 나이 든 노인네의 노망이려니 생각해. 그거라도 없으면 우리 할머니 정신 쇠약으로 이미 무지개 다리 건너셨을 테니까.”
낮은 건하의 목소리가 파도와 함께 부서졌다.
“나한테는 전부 변명으로밖에 안 들려. 괜히 걱정해주는 척하는 것도 위선으로밖에 안 보이고.”
후우, 건하의 깊은 한숨이 뜨거운 입김과 함께 내려앉았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래야 네가 편하다면.”
“이해가 안 돼서 그래.”
하은은 정면을 응시한 채로 말하고, 건하는 그런 하은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너 정도면, 여자들 줄을 세우고도 남았을 텐데. 굳이 나한테 이런 취급 안 당해도 되잖아.”
말끝에 하은이 고개를 돌려 건하를 마주 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건하의 까만 눈동자가 별장의 불빛을 등지고 서있어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 그렇지. 근데 하나같이 잿밥에 관심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내 성질이 지랄 같아서 내가 또 그 꼴은 못 봐주거든.”
건하의 날 것 같은 표현에 하은이 웃었다.
“성격 지랄 같은 건 인정.”
하은을 보며 건하도 따라 웃었다.
지금처럼 마주 보며 웃는 것도 처음이었다. 어색한 두 사람은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불빛이 늘어선 별장과 정면의 바다가 어우러진 모습은 어두운 밤이라도 아름답게 보였다. 떠밀리듯 왔지만 온 것은 잘한 일이다 싶었다.
모포를 덮고 있어도 차가운 바닷바람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차가웠다.
“들어가, 추워.”
하은이 먼저 등을 돌려 별장으로 향했다. 뒤를 건하가 묵묵히 따랐다.
***
별장 내부는 외관만큼 화려했다. 거실에 들어찬 가구들, 그리고 샹들리에 불빛만큼이나 벽난로 안의 불빛마저도 붉고 화려했다.
추위에 떨어서인지 따뜻한 별장 내부로 들어서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눈가가 뻑뻑했다.
거실 입구에 우두커니 서있는 하은과 달리 건하는 외투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뭐 좀 마실래?”
하은이 아무 대답이 없자 건하는 Bar로 다가가 샐러에서 와인을 골라 꺼냈다.
잔 두 개에 와인을 따른 후 하은에게 다가와 잔 하나를 내밀었다.
“마셔, 몸이 좀 풀릴 거야.”
하은을 빤히 보며 건하가 와인을 삼켰다.
조용한 실내에 와인이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장하은답지 않게 겁먹은 얼굴은.”
놀리는 것 같은 그의 말투에 하은은 건하에게서 잔을 받아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벽난로 안에 쌓인 장작들 위로 타들어가는 붉은 불꽃을 응시했다.
따뜻해 보이는데 어쩐지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쪼르륵, 와인을 따르는 소리가 뒤에 들려왔다. 하은은 쥐고 있던 와인 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삼켰다. 그의 말대로 추위에 잔뜩 굳어있던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빤히 느껴지는 시선에 하은은 어디든 들어가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그를 향해 철벽을 치면서도 손길이 닿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을 알고 있기에, 하은은 되도록 건하와 멀리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미 거실의 끝과 끝에 서있지만 백건하의 움직임이 전부 느껴졌다.
그의 호흡, 와인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전부 확성기를 귀에 가져다 댄 것처럼 크게 들렸다.
“피곤하면 올라가서 쉬어. 2층은 전부 침실이야.”
하은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쳐다보았다. 층고가 높은 탓에 2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2층 거실 한 가운데서 망설이던 하은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을 골라 들어갔다.
보기에도 편해 보이는 커다란 침대와 파티션 너머로 욕실이 보였다. 아래층에서 가지고 온 가방을 열고 속옷을 꺼낸 하은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 앞에 섰다. 적당한 온도의 물이 몸에 닿자 노곤하게 피로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펀지에 거품을 내고 몸에 문지르는 순간 달칵, 하고 소음이 울렸다.
돌아서는 하은의 눈에 욕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하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