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62)

40.

‘내가 뭐라고 해도 넌 안 믿겠지?’

마주친 그의 검은 눈동자가 텅 비어 보였던 것이 생각났다.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최악이었다고,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백건하를 떠나던 그날부터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마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지금의 혼란을 끝내고 하나의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든 그녀가 행복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백건하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고 떠나온 여행인데 그조차도 온통 그에 대한 기억들만 떠올리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어떻게 해서라도 백건하 옆에 붙어있지 그랬어?

라며, 누군가에게 조롱당해도 아무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은은 씁쓸하게 웃으며 버스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앞에 익숙한 숲이 펼쳐지고 그 길을 걷고 있는 백건하의 모습이 그려졌다.

애써 도망치려고 하고 있지만 하은은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

급하게 처리해야 할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한 뒤 연말에 있을 행사 참석 여부를 고민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한 회장이 해왔던 일이었지만 올해부터는 건하가 할 일 중 하나였다.

비서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건하는 휴대폰의 검은 액정을 뚫어지게 보았다.

간혹 스팸 문자나 다음 일정 확인 사항으로 액정에 불이 들어왔지만 건하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문자 알림음에 건하가 허리를 세우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장하은 씨, 강릉행 버스 탑승. 터미널 도착 시각 오후 4시 예정.>

문자를 확인한 건하의 미간이 단번에 찡그려졌다.

혼자 위험하게 또 어딜.

건하는 초조한 듯 입 안의 살점을 잘게 깨물다가 하아,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까지 계속 혼란의 시간들을 보냈으니 그녀도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그러다가 그녀가 그를 완전히 놓겠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그런 불안감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옆에서 건하의 눈치를 보고 서있던 비서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 그가 자신의 말을 하나도 듣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상무님, 리셉션 참석 일정으로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

“잠시.”

비서가 다시 건하의 눈치를 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건하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장하은 지금 어디라고?”

가라앉아 있던 건하의 표정에 호기심이 묻어났다. 보고를 하던 비서가 건하의 눈치를 보자 건하는 비서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방금 출발했습니다.>

“혼자야?”

건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미간을 가볍게 긁어댔다.

<네.>

“그래, 알았어. 계속 보고해.”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건하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딘지 위태하고 불안해 보이던 그녀를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미련 없이 다 내려놓을 것 같았던 불길한 표정이 생각난 건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날카로운 신경이 긁어대며 그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겉은 어떤 자극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지만 건하의 눈에는 죽을 듯이 참고 견디는 것이 보였다.

나약하고 무방비한 어린 소녀, 그래서 정말 지켜주고 싶었는데.

눈을 감으면 맨발로 숲길을 혼자 걷는 하은의 모습이 겹쳐 그를 괴롭혔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던 건하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네, 상무님.>

“오후 일정 취소하고 차 대기시켜요. 지금 내려갑니다.”

건하는 시계를 확인하면서 재킷을 입었다.

***

터미널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은 하은은 경포대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바다와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강릉에 도착할 때부터 계속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답답하게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확 트인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닷바람이 영하의 추위를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지만 흐리기만 했던 머릿속의 잡념들을 날려주는 것 같았다.

모래 위를 걷다가 방파제가 보이는 둑 위에 섰다. 간혹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수심이 깊은 바다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아 하은은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불어와 하은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동시에 뒤에서 무언가 강한 힘에 당겨졌다.

“미쳤어?”

무섭도록 강렬한 눈빛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 왜? 어떻게?

생각지도 못한 백건하의 등장에 놀란 하은은 말문이 막혔다.

“죽으려고 작정했어?”

주변을 전부 얼어버릴 것처럼 냉랭한 눈빛이었지만 왜 그런지 그에게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이 사는 백건하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 여기 있어?”

하은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잡고 있던 건하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강하게 붙잡고 있는 힘에 밀려 하은이 비틀댔다.

매번, 언제나 절묘한 타이밍에 백건하가 등장했다. 그녀의 뒤에 사람을 붙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 여기까지 그가 따라올 줄은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대답해! 죽고 싶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하은을 보는 서늘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쩌면 일렁이는 파도가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친 것일지도 몰랐다.

하은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싸한 통증이 느껴지는 건하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건하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그런 생각한 적 없어.”

하은의 대답이 진심인지 건하의 눈동자가 그녀를 보며 확인하듯 한참 눈을 맞췄다.

흔들리던 건하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평소의 서늘함으로 돌아가 있었다. 동시에 안도하는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놔줘, 아프다고!”

날카로운 하은의 말에 건하는 그제야 하은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한참 그를 노려보던 하은이 돌아서 빠르게 걸었다. 건하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고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선 하은이 돌아서서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어떻게 하면 지쳐서 날 안 보게 할 수 있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놔줄 거야?”

하은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던 건하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스쳤다.

“언제까지? 글쎄……, 아마도.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하은이 질린 얼굴을 하자 건하가 손을 들어 바람에 날려 하은의 이마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결혼 서약할 때 보통 그런 말 하잖아? 자꾸 네가 까먹나 본데, 너하고 난 부부야.”

당연하다는 듯 건하가 하은의 턱을 손으로 스쳤다.

“좋네, 여기. 어릴 때 와보고는 처음이라.”

건하의 시선이 하은을 비켜나 해변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하은에게 고정했다.

“근처에 별장이 있는데 하도 오랜만이라 뭐가 많이 바뀌었으려나? 잘됐어! 한 번쯤 너하고 와보고 싶었는데.”

“별로 관심 없으니까 너나 가든지. 난 이미 예약한 호텔이 있어서.”

돌아서 걷는 하은의 옆에 건하가 나란히 걸었다.

“침대 좁은 건 영 별로라, 호텔이 어디야? 스위트룸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놓게.”

하은이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보자 건하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바다의 바람은 점점 냉기를 더해갔다. 옆에서 걷고 있는 건하를 얼핏 올려다보았을 때 날카로운 코끝이 서늘한 바람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조금 전, 그녀를 잡아채던 백건하가 생각났다. 정말 그의 눈에 비친 것이 두려움이었을까? 하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백건하에게 자신은 그저 살아있는 부적,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닐 테니.

여기까지 그녀를 따라온 이유도 짐작이 갔다. 이제는 그에게 어떤 기대도 없어서 받을 상처도 없을 줄 알았는데 왜 그런지 마음이 서늘했다.

평소에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보이는 그가 간혹 본능에 충실할 때가 있었다. 침대 위에서 그녀를 안을 때가 그랬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안을 때도 그는 그런 모습일지 상상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뱃속이 뜨끈해지며 목까지 불길이 치솟았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속이 터질 것처럼 타올랐다.

“기억나? 뉴욕에서 봤던 선셋.”

건하의 말에 하은이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노을빛이 바다 위에 부서지며 잔물결 위로 번지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걸음을 멈추고 선셋을 보는 하은을 건하가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건하가 두툼한 외투를 펼치고 하은을 가두자 멈칫하던 하은은 아무런 저항 없이 서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좋았고 그에게서 전해지는 심장의 울림이 싫지 않았다.

“너하고 함께 보는 선셋은 늘 최고야.”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말이 잔잔하게 그녀의 마음을 울렸다.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가 천천히 모래 위에 스며들었다.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을 닮아있다고 하은은 생각했다.

언제나 부서질 것처럼 보였던 위태하기만 했던 그녀가 어느새 백건하에게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미워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맞대고 있는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아, 그래. 이 남자가 남편이었지? 하고 변명을 하듯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정말 그와의 관계를 끝내려면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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