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좀 많이 마시던 것 같던데, 힘들면 먼저 가. 간다고 말하면 애들이 붙잡을 거니까 그냥 나가도 괜찮아. 대충 취해서 간 줄 알 테니까.”
“어, 그래. 고마워.”
화장실을 찾아가던 하은이 휘청대자 남자가 재빨리 다가와 하은을 부축했다.
“조심해, 그러다 다쳐.”
겹쳐지는 목소리에 하은이 흠칫하며 시선을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분명 눈앞의 남자는 과 대표인데 목소리가 백건하와 겹쳐 들렸다.
“아, 미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하은의 물음에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김선우, 이제야 내 이름이 궁금해졌어? 전에도 몇 번이나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래, 기억나. 내가 좀 그렇지?”
“그땐 나도 좀 눈치가 없어서. 진짜 남친 있는 줄도 모르고 들이댔으니 그럴만도 했지.”
하은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리 오래된 기억이 아닌데도 기억이 흐릿했다.
학교 앞에서 백건하가 차를 세우고 하은을 기다렸던 몇 개의 장면이 눈앞을 스쳐 갔다.
어느 날은 운전기사도 수행 비서도 없이 혼자 그녀를 데리러 와서는 인적 드문 한강 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도저히 집까지 갈 수가 없어서 차 안에서 급하게 서로를 찾았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백건하와 보냈던 시간이 1년 남짓, 그중에서도 침대를 함께 썼던 시간이 6개월도 채 안 된 시간인데 그녀가 살아왔던 시간보다 더 오래된 것 같았다.
어느새 그 남자에게 익숙하고 길들여져 떨어져 있는 시간이 이렇게도 힘든 모양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지나야 백건하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하은을 가게 앞에 세워두고 선우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하은의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고마워.”
“택시 잡아줄게.”
“아니야,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혀가 꼬여 발음이 분명하지 않은 하은의 말투에 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지금은 좀 취한 것 같아서 위험해 보여서 그래.”
하은의 팔을 가볍게 잡고 선우는 도로 위에 서서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집이 어디라고?”
퇴근 시간과 맞물려 택시는 잘 잡히지 않았다. 선우는 난감한 표정을 하며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휘청거리며 서있는 하은을 쳐다보았다.
휴대폰 앱으로 택시를 호출했지만 근처에서 잡히는 신호도 없었다.
“하은아!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기다렸다가 가야겠는데 괜찮겠어?”
선우는 주변을 둘러보다 가까운 카페를 발견하고 하은을 잡아끌었다.
“됐어! 걸어가면 돼.”
선우의 손에 들려있는 하은의 가방을 빼앗으려 손을 뻗자 선우가 하은의 가방을 뒤로 뺐다.
“어딜 걸어가? 집 어딘지 알려주면 데려다줄게.”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고집을 부리는 하은을 선우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보았다.
“가방 줘.”
웬만하면 져줄 것도 같은데 이 여자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우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래도 오늘 같은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요즘 가만 보면 학교 앞까지 데리러 오던 남친도 보이지 않고 아무래도 잘 안 된 모양이었다.
하은과 나이 차가 있어 보이던 남자가 끌고 다니던 고급 외제차만 봐도 대충 두 사람의 관계가 파악되었다. 장하은도 돈 좀 있는 남자 제대로 꼬셔서 자기만족 채우는 여자 중에 한 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굴 좀 쓸만한 여자들 중에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런 남자들 대부분이 유부남이었지만 하은의 남친이라고 한 남자는 유부남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대충 놀다가 버렸겠지, 싶었다.
요즘의 하은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전에는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도도해 보이기도 하고 거만해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주변인에게 관심도 없이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가버려서 말 붙이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요즘은 꼭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수업 시간에도 멍하니 창밖만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 장하은은 좀 쉽게 보였다.
“가방 안 줄 거야?”
하은이 취기 어린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선우를 보다가 싸늘하게 웃었다.
“아, 그래 뭐 맘대로 해. 주기 싫으면 가지든가.”
정색을 하며 서있는 선우를 두고 하은이 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강한 손에 붙들려 돌려세워졌다.
“내가 우스워?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사람을 그렇게 봐?”
친절한 미소를 지우고 돌변한 선우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하은은 피곤한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다가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급하게 마신 술이 좀처럼 깨지 않았다. 더군다나 앞에 서있는 남자의 비아냥거림조차 두통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내가 널 어떤 눈으로 봤는지 모르지만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됐지?”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던 선우의 표정이 험악해지며 하은을 노려보았다.
“하, 씨발. 자꾸 신경 거슬리게 하네.”
하은이 팔을 뿌리치려 해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꽉 잡힌 팔에 통증이 느껴지자 하은이 인상을 썼다.
“소리 지르기 전에 놔줘.”
곤란하고 시끄러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하은은 인내심을 바닥까지 끌어올렸다.
한동안 마주친 눈으로 기 싸움을 벌이다가 선우가 피식, 하고 웃으며 밀듯이 하은의 손을 놓았다. 반동으로 뒤로 밀리던 하은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하은과 선우에게 쏠렸다. 시선을 느낀 선우가 멋쩍은 얼굴로 하은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우려 하자 강한 힘이 선우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씨발, 뭐야?”
선우는 없는 사람 취급하며 돌아선 남자가 허리를 굽혀 몸을 숙여 하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하은이 시선을 들어 손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하고 똑같이 생겼네.”
무심하게 하은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짙어졌다. 말을 내뱉는 목소리도 그리고 눈도 전부 젖어있었다. 무겁게 바닥까지 가라앉은 남자의 눈을 하은이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술 마시니까 자구 헛것이 보이네. 이 짓도 못 해 먹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하은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일어나.”
현실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은이 몽롱해진 의식을 들어 남자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하, 진짜였어.”
남자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하은이 스스로 일어섰다.
“혼자 갈 수 있다고 해도 왜 이렇게 난리들인지. 술도 편하게 못 마시겠네.”
혼잣말을 하며 하은이 내민 손을 아래로 떨어뜨린 남자를 쳐다보았다.
“스토커니?”
백건하, 꼭 어디서 숨어있다가 일이 생기면 꾸역꾸역 나타나서는 당황하게 한다.
“대충, 비슷해.”
시니컬한 건하의 대답에 하은이 뾰족한 눈을 하고 그를 쏘아보았다.
“안 보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다시 말해줘?”
“지나가는데, 아는 얼굴 같아서 와봤어.”
그 말을 누구더러 믿으라는 건지, 태연한 얼굴을 하고 뻔뻔한 말을 내뱉는 건하를 향해 하은은 헛웃음을 지었다.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며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선우는 건하가 돌아서자 움찔하며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건하가 한 대 칠 것처럼 보였던 선우는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다.
고급 슈트에 가려져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몸이 평범해 보이지가 않았다. 한 대 맞으면 제법 충격이 클 것 같았다.
건하가 선우의 앞으로 손을 내밀자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한 얼굴을 하던 선우는 다급히 들고 있던 하은의 가방을 건하에게 건넸다.
날카로운 송곳처럼 찌를 듯한 건하의 시선을 피하며 선우는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은이 먼저 앞서가고 하은의 뒤를 따르던 건하가 선우의 옆을 지나쳤다.
“한 번 더 건드리면 그땐 진짜 죽어.”
나직하고 위협적인 건하의 말에 선우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경고로 들리지 않아서였다. 스치고 지나간 눈빛마저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냉기가 흘렀다.
앞서 가던 하은의 옆으로 다가온 건하가 하은을 가로막고 섰다.
“타, 태워다 줄게.”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 가.”
하은이 걸음을 옮기자 건하가 재빨리 하은의 앞을 막았다.
“지금 시간에 택시도 안 잡혀.”
“뭘 하든, 내가 알아서 가.”
하은의 말에 건하가 피곤한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고집 좀 그만 피워. 집까지 태워다 주고만 갈 거야.”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강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건하의 손에 있던 하은의 가방을 받았다. 그러고는 하은을 향해 손바닥을 펴 보이며 정중하게 차를 가리켰다.
“모시겠습니다.”
강훈을 보며 망설이는 하은의 어깨를 가볍게 잡은 건하가 자동차로 그녀를 이끌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여전히 하은과 건하를 향해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들과 마주친 하은은 나직하게 한숨을 뱉어내며 차가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차에 탄 하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였다. 잠들지 않으려는 그녀의 노력이 다분히 보였다.
바로 옆에 백건하가 앉아있다는 긴장감은 실내의 따뜻한 공기로 노곤해진 몸에 취기가 더해지며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몇 번 힘을 주고 부릅뜬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덮였다. 조금씩 고개가 앞으로 꺾이며 하은은 잠이 들었다.
건하가 조심스럽게 하은의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좁혀져 있던 하은의 미간이 곧게 펴지며 새근거리는 숨소리까지 더해졌다.
“좀 천천히 가자.”
낮게 울리는 건하의 말에 차의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희미하던 소음마저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