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62)

36.

한껏 빈정대며 하은이 건하를 향해 비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간다. 하은은 이내 후회를 곱씹었다.

이제야 겨우 눈을 맞대고 선 채로 건하는 마주친 하은의 눈을 깊게 응시했다.

“나는, 네가 잘 지내길 바래. 그리고 내 옆을 떠난 부적은 더 이상 아무런 효험이 없어. 그러니까 그것도 전부 잊어.”

그 말이 너무 아프게 들려 하은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아니 애초에 흔들릴 마음 따위 남아있지도 않았는지 모른다. 지금 백건하를 보니 자신이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분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속을 들키지 않으려 하은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멀어질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백건하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는데 다시 원점이다.

경찰서 정문을 벗어난 하은은 손님을 기다리며 정차해 있던 택시에 올랐다. 차가 출발할 때쯤 멈추어 있던 그대로 백건하가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멀어지는 백건하의 모습이 백미러를 통해 흐릿하게 보였다. 자꾸 멀어지고 끝내는 작은 점이 되어서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은은 눈을 떼지 않았다.

***

“타시죠.”

건하의 앞에 차를 세운 강훈이 자동차 문을 열고 건하가 타기를 기다렸다.

건하는 여전히 우두커니 서서 조금 전 하은이 사라진 길 끝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어두웠고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하은이 집을 나간 뒤로 백건하는 몸에서 피가 전부 빠져나간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기계처럼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생명이 꺼진 것 같은 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매일 같은 일의 반복,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고 가끔은 위태위태한 삶이 버거운 듯 보였다.

그러고 보면 백건하 인생에서 잠깐 반짝이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건하에게서 삶의 활기가 느껴졌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안에 내재된 에너지가 워낙 강해 바로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백건하는 기가 넘쳐났다.

백건하는 원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표정만으로 좋고 싫음이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옆에 온전히 붙어 지내는 강훈조차도 백건하의 감정이 어떤지 파악이 어려웠다.

하지만 장하은이 옆에 있을 때의 백건하는 좋아 보였다.

시선이 늘 여자를 향해 있었고 잘 웃지도 않던 그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 백건하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소한 감정이 느껴졌다.

특별히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백건하의 표정이 그래 보였다. 어떤 만족감, 그리고 안을 채우고 있는 어떤 충족감이랄까, 아무튼 생생하게 살아있는 백건하가 그대로 보였다.

건하가 느린 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이내 문을 닫고 강훈도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회사 들어가시겠습니까?”

백미러로 건하의 눈치를 살피며 강훈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차가 움직인 뒤에도 건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회사로, 가자.”

말을 끝낸 건하가 답답한지 창문을 내렸다. 서늘한 바람이 이내 차 안으로 맹렬히 쏟아져 들어왔다. 건하의 짧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며 흐트러졌다.

숨이 막힌 듯 건하가 길게 호흡을 뱉어냈다.

사는 건 버티는 거라고, 호기롭게 하은에게 말했던 자신을 건하는 스스로 비웃었다.

하루를 살아내기가 참 버거운 시간들, 지금은 버티고 사는 것조차 힘들다.

그의 안에서 생명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

편의점 알바도 그만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만둔 건 아니고 일방적 해고 통보를 받았다.

파손된 물건의 배상에 대해 물으니 편의점 사장이 얼버무렸다. 그녀에게 따로 청구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저 짐작으로 그날 시비 건 남자가 물어주었거나 아니면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나타났던 백건하가 물어주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누가 되었든 하은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백건하에게 그런 돈쯤이야 없어져도 표도 안 날 테니.

집에 먹을 게 다 떨어져 슈퍼에서 장을 보기 위해 오후쯤 집을 나섰다.

무더운 여름도 다 지나고 추운 겨울의 시작인데 하은은 요즘 계속 갈증이 나서 아이스크림이나 찬 음료만 먹어댔다.

지금도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다른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한입 가득 베어 물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가움에 타는 듯한 갈증이 금세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내 목이 마른 듯이 다시 갈증이 시작된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는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 입은 면 티셔츠와 헐렁한 면바지에 게다가 슬리퍼 안은 맨발이다.

‘내 옆을 떠난 부적은 더 이상 아무런 효험이 없어.’

경찰서 앞에서 백건하를 만난 뒤부터 계속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말이 진실일지 거짓일지를 혼자 가늠하면서 속을 태웠다.

그런데 정말 그 점쟁이의 말이 사실이면 어떡하지?

그래서 백건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순간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울렸다.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떠오르지 않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서 하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백건하 때문이다. 그토록 기다렸던 자유를 얻었는데도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어딘가 멀리 가서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버리면 정말 백건하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서 숨이 막히고 애가 탄다.

게다가 더 이상 효험이 없을 거라는 그 말을 듣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백건하를 잃게 되면 어떡하지? 정말 죽어버리면?

생각만으로도 땅이 꺼지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계속 불면의 밤을 보내다가 쓰러지듯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려 깨곤 한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꿈에서 깨고도 그게 정말 현실 같아서 그 길로 곧장 백건하에게 달려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자신은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하나, 끝은 존재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

기말고사가 끝이 났다.

계속 정신이 딴 데 팔려있어 책을 펼쳐 들어도 글자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공부한 게 없으니 성적도 당연히 바닥을 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매일 아침 어딘가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그녀를 제대로 살게 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밖을 나가지 않고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을 것이다.

기말고사의 마지막인 외국어 인터뷰 시험을 끝내고 하은은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 출입구까지 오자 누군가 뒤에서 하은을 툭, 치며 불러세웠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하은이 대학에 들어와 처음 사귄 친구 영빈이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당황한 하은을 보는 영빈의 눈매가 반으로 접혔다.

“집에 가려고.”

“집에 꿀 발라놨어? 뭐가 그렇게 맨날 집이야? 그러지 말고 기말도 끝났는데 좀 놀다 가자.”

영빈이 하은의 팔짱을 끼며 잡아끌었다. 내키지 않아 몇 번 거절했지만 영빈은 작정한 듯 좀처럼 하은을 놓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봐야 할 일도 없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이불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있는 것밖에 더할까 싶어 하은은 영빈을 따라나섰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기말고사가 끝난 학교 앞 주점은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미리 약속을 했던 모양인지 영빈은 망설임 없이 하은을 앞세워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가게 중간에 테이블을 길게 붙이고 앉은 일행이 영빈과 하은을 보고 아는 척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중에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바로 얼마 전 조별 과제를 같이 했던 아이들도 보였고 과 대표도 있었다.

하은은 영빈과 함께 빈자리를 골라 앉았다. 술자리는 이제 막 시작한 모양인지 주문한 음식이 하나둘 테이블에 채워지고 있었다.

“뭐 해? 한잔 안 하고?”

하은의 앞에 있던 여자애가 술잔을 가져와 하은의 앞에 있는 잔에 부딪혔다.

하은이 허겁지겁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유쾌한 대화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간혹 하은의 의사를 물을 때도 있었지만 굳이 강요하지 않아서 쉽게 넘어갔다. 하은의 잔이 비면 옆에 있거나 앞에 있는 사람이 번갈아 잔을 채웠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실 낯선 얼굴이라 대화에 끼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저런 말을 듣고 있으니 시간은 잘도 갔다.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앞이 휙, 도는 것이 술을 제법 많이 마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 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마셨으니 그럴만도 했다.

게다가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라서 의자에서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은은 자신이 취해있다는 것도 몰랐다.

균형을 잡고 화장실 쪽으로 향하다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서버렸다.

뒷모습이 낯이 익어 하은은 저도 모르게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큰 키에 다부진 어깨, 다리까지 이어지는 단단하고 슬림한 몸의 선이 백건하와 꼭 닮아있었다. 도대체 왜 여기까지 따라왔냐고 다가가 따지려는 순간 남자가 돌아섰다. 흐릿해서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백건하가 아니다.

뒷모습이 너무 닮아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백건하와 닮은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백건하가 아닌 것을 확인한 순간 몸에서 기운이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백건하였다면 화가 났을 텐데, 백건하가 아니어도 화가 났다.

닮은 모습만 봐도 지금처럼 가슴이 무너져내린다. 이제는 백건하의 환영마저 그녀를 따라다니며 거슬리게 한다.

늪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쳐도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어디가 안 좋아?”

취한 눈을 들어 하은은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하은에게 관심이 있다고 들이댔던 과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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