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62)

35.

남자 두 명이 들어와 음료 냉장고 쪽에서 맥주를 꺼내는 것이 거울을 통해 보였다. 하은은 어지러운 계산대 위를 정리하며 남자가 내려놓은 맥주를 바코드기에 가져다 댔다.

“아, 어디서 봤는데? 혹시 나 본 적 없어요?”

자신을 아는 척하는 남자를 하은은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내려 바코드에 다른 맥주를 가져다 댔다.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손님 몇몇에게 가끔 당했던 일이라 하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했다.

“어디서 봤지? 진짜 낯익는데.”

남자는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면서도 하은을 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비닐봉지에 담은 맥주를 남자에게 건네고 영수증도 내밀었다.

“아! 맞다! 백건하!”

멈칫하며 하은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맞죠? 백건하 집에서 봤는데! 이름이 뭐더라?”

백건하, 그 한마디에 빠르게 돌아가던 하은의 세상이 멈췄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는데,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누군데?”

동행한 남자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진득했다.

진욱은 친구의 팔을 툭 치며 눈짓으로 비켜서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근데 왜 이런 데서 일해요? 듣기로 백건하하고 결혼할 사이라고 하던데.”

진욱은 긴장한 표정으로 잔뜩 얼어붙어 있는 하은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하지만 지금 좀 바빠서요.”

진욱의 뒤에 계산하려고 기다리는 사람에게서 물건을 받은 하은은 무심한 얼굴로 바코드기에 가져갔다.

“같은 거 두 번이나 찍었는데 눈깔은 장식으로 달고 다녀?”

도끼눈을 한 남자가 하은을 노려보았다. 모니터를 확인한 하은은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취소하고 계산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남자에게 카드를 받아 카드를 취소하고 다시 전표를 끊었다. 취소 표를 확인한 남자가 카운터를 발로 걷어차며 욕설을 뱉어냈다.

“하! 씨발년이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하은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년이 어디서 눈깔을 똑바로 뜨고 봐?”

남자의 험악한 얼굴에도 하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이 다른 데 팔린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그만하고 가시죠? 계산 다시 해서 줬고 사과도 한 것 같은데.”

옆으로 비켜서 있던 진욱이 끼어들자 시비 붙기를 기다린 사람처럼 남자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감돌았다.

“씨발! 누군데 참견이야? 이 여자 알아?”

보기에도 고가의 옷을 입은 진욱을 남자가 아래위로 훑었다. 곱상하고 돈 좀 있을 것 같은 외모에 뭐라도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아 남자의 눈이 번득였다.

“알면, 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진욱이 한발 다가서며 남자에게 바싹 붙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어디서 들이대?”

싸움은 어디서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남자가 진욱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씨발, 더럽게 어딜.”

진욱은 자신에게 바싹 붙어 들이미는 남자를 밀어내고 더러운 벌레가 붙은 듯 손끝으로 옷을 툭툭 털어냈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참다 못한 남자의 주먹이 나가자 진욱이 재빨리 옆을 비키며 주먹을 피했다. 그러고는 이내 가게 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오기까지도 싸움이 붙은 가게 안은 물건들이 쏟아져 엉망이었다.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남자 둘 사이에서 참고인 진술이 필요하다는 경찰의 말에 하은도 경찰서에 동행했다.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서기 직전 동행했던 친구가 진욱을 슬며시 붙잡고 섰다.

“왜?”

얼굴을 몇 대 가격당한 진욱은 입가가 찢어져 말을 할 때마다 통증으로 인상을 썼다.

“얼른 변호사나 불러! 진욱이 너답지 않게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는! 이러는 거 우리 아버지 아시면 나 진짜 쫓겨나!”

“경찰서 오는 차 안에서 이미 변호사 불렀어, 인마! 쫄기는! 하여간 새끼가 의리가 없어.”

혀를 쯧쯧 차며 진욱은 손으로 입가를 어루만졌다.

“의리는 무슨! 그 여자 언제 봤다고 의리야?”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를 향해 진욱이 비웃었다.

“좀 기다려봐! 누가 오나.”

진욱은 기대에 찬 얼굴로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들어오는 편의점 주인이 하은을 보는 눈빛이 험악했다.

아수라장이 된 가게를 확인하고 온 뒤였고, 현장이 생생하게 담긴 cctv 영상까지 직접 눈으로 보고 와서 가게 주인은 처음부터 하은을 탓했다.

“그러게 애초에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어야지, 어떻게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가게 손해 난 거 어떻게 할 거야? 네가 물어줄 거야?”

가게 주인이 하은을 다그치자 하은은 이내 가게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필요하면 제가 변상해 드릴게요.”

변상, 이라는 말을 하은을 통해 듣자 가게 주인이 말을 하려다 멈췄다.

“아니! 이보세요? 그걸 왜 이 여자한테 청구해요? 애초에 시비 건 건 저 새끼인데.”

옆에서 듣고 있던 진욱이 나서며 가게 주인을 노려보았다.

“그럼 그쪽이 물어줄 겁니까? 아닐 거면 끼어들지나 마시고!”

“하, 진짜 그깟 돈 몇 푼이나 된다고.”

“뭐라고?!”

진욱의 혼잣말을 들은 가게 주인의 눈이 험악해지며 진욱을 향해 달려들었다.

경찰서에서 진욱과 가게 주인 사이에 다시 시비가 붙어 고성이 오갔다, 그러는 사이 경찰서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남자에게 하은의 시선이 무심결에 닿았다.

어디서든 시선을 끌 정도로 큰 키에 짙은 브라운 오버코트, 터틀넥 위로 유독 날카로운 턱선이 하은과 마주치자 긴장으로 꿈틀댔다.

주변의 소란이 멀어지며 공간을 울리던 소음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둘만 남겨진 것 같았다.

***

마치 홈그라운드라도 되는마냥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타난 백건하는 경찰서장이 내어준 의자에 거만하게 앉았다.

백건하를 사이에 두고 변호사와 경찰서장이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나 있는 건지 건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경찰서 안은 여전히 혼잡했다. 멀리 떨어져 앉아있던 진욱은 여기저기 멍든 얼굴을 백건하에게 보란 듯이 내비쳤다. 기세등등한 진욱은 마치 얼굴에 난 상처를 훈장쯤으로 여기는 듯 보였다. 경찰서 안을 느리게 훑어가던 건하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이제 막 경찰이 내민 전자패드에 진술인 서명을 하던 하은이 피곤한 듯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가 닿은 등은 앙상하게 말라 보였다. 가는 목선을 따라 이동한 시선이 이내 고집스러운 입가에 머물렀다.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곱고 단정한 얼굴, 하지만 이내 피로가 짙게 배인 눈매를 보니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건하의 목울대가 출렁댔다.

“그럼 장하은 씨는 저희 쪽에서 모시고 가겠습니다.”

건하의 옆에 서있던 변호사와 경찰서장이 악수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했다.

그사이 건하의 옆으로 다가온 진욱이 아픈 시늉을 하며 멍든 한쪽 얼굴을 감쌌다.

“나는 그냥 윤 실장한테 전화한 건데, 너까지 올 줄은 몰랐지. 나도 진짜 깜짝 놀랐어! 편의점에서 알바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나 아니었으면 진짜 저 여자 큰일 날 뻔했다니까? 양아치 새끼가 쌍욕을 하면서 들이받는데도 저 여자 꿈쩍도 안 하고 피할 생각도 안 해서 뭔 일 나겠구나 싶었지.”

진욱은 그때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건하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건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건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차분해 보이는 얼굴 뒤에 언제라도 상대를 물어뜯을 준비를 마친 독하고 사나운 맹수가 숨어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정말 의문이었다. 분명 건하와는 평범한 관계로 보이지 않았는데, 더군다나 하은에게 관심을 보이던 진욱에게 영역 표시를 분명히 하던 백건하였다. 그런 여자를 편의점 알바나 하게 두다니, 백건하답지 않았다.

“가시죠, 상무님.”

변호사의 말에 건하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먼저 나가 계시면 아가씨 모시고 뒤따르겠습니다.”

경찰서장에게 인사를 건넨 건하가 출구로 향하자 이내 진욱이 따라붙었다.

“왜? 두 사람 싸우기라도 한 거야? 설마 그래서 집 나간 거고?”

건하의 뒤에 바싹 붙어서 진욱은 아무 말이나 뱉어내며 건하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건하는 묵묵부답이었다. 건물 입구 계단 위에 멈춰 선 건하가 뒤따라 나오는 하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하은은 백건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하은의 얼굴에 쌩쌩하게 불었다.

“차 대기시켰습니다. 타시죠.”

하은의 옆에 나란히 걷던 변호사의 말에 하은이 멈춰 섰다. 백건하와는 불과 몇 걸음 사이에 둔 거리였다.

“아뇨, 앞에서 택시 타면 됩니다.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눈길도 주지 않고 모른 척 지나치는 하은의 팔을 건하가 잡아챘다.

“타고 가.”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로 하은이 잡고 있던 건하의 팔을 뿌리치며 계단을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하은의 뒤를 건하가 말없이 뒤따랐다.

“네가 그런 일을 왜 해?”

하은은 대답 없이 빠른 걸음으로 정면을 향했다.

“다 좋은데, 몸은 좀 챙겨가면서 살아.”

빠르게 걷던 하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왜? 부적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네 명이 짧아질까 걱정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