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제는 하다 하다 별 거지 같은 것을 다하네. 이러다 어느 날에는 무당 될 팔자라고 할지도, 하기는 이제 그런 말을 들어도 놀랍지도 않아. 워낙 인생이 스펙터클해서 멀미가 날 것 같으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진심이었어.”
건하의 말에 하은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건하를 올려다보았다.
“알아, 진심이었겠지. 너는 다 알고도 내가 이 집에 들어오는 걸 그대로 두고 봤어. 인간 부적이니 뭐니 하는 말을 안 믿는 척하면서도 너는 혹시 모르게 기대했을 수도 있어. 그래서 정말 진심을 다해서 나를 가지려고 했을 거야. 내가 너를 떠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면 그제야 너도 가면을 벗고 내게 진실을 털어놓을지도 몰라. 지금처럼 내 눈을 보고 그때도 모든 게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네가 말하는 그 진심이라는 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입가를 늘어뜨리고 한껏 비웃는 것 같은데 하은의 눈에서 차오른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내렸다.
“너무 완벽해서 하마터면 믿을 뻔했어. 어느 순간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으니까.”
“내가……, 뭐라고 해도 너는 안 믿겠지?”
맑았던 어느 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같았다고 느꼈던 하은의 눈동자에 슬픔이 차오르다 이내 가라앉았다.
“더 이상 궁금하지가 않아. 네 입으로 듣게 될 말이 어떤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아. 백건하 네가 이겼어. 하찮은 나에게조차 네가 가진 전부를 걸고 덤비는데 누가 널 이겨?”
“네 말대로, 내 전부를 너한테 걸었으니 내 옆을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도 알고 있겠지?”
지금 당장은 하은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시간을 가지고 버티다 보면 하은도 그의 진심을 알아챌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은이 비웃듯 옅게 미소지으며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도. 근데 넌 최악의 순간을 보게 될 거야. 내가 최선을 다해 죽을 거거든. 다시 이 집에 갇히게 되면 난 무슨 수를 쓰든 죽으려고 있는 힘을 다할 거야. 날 묶어놓든 가둬두든 그건 네 자유야.”
건하의 손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살을 벨 것처럼 아픈 말에도 불구하고 하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이제 그녀는 울지 않았다. 하늘에 떠있기만 하던 구름이 잔잔한 물에 그대로 비친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해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빽빽한 숲 위로 검은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더니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젖은 안개가 숲을 감쌌다.
마침내 나무 밑동에서 하은이 아래로 내려섰다. 보드라운 발아래 울퉁불퉁한 돌멩이가 박혔다. 건하는 돌아서 하은에게 등을 내밀었다.
도대체 지금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듯 하은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업혀.”
하은이 그를 밀어내고 옆으로 비켜서자 건하는 끈질기게 하은의 앞에 등을 내밀었다.
“말했잖아, 뭐든 다 해준다고. 약속 지킬 테니까 지금은 내 등에 업혀. 맨발로 집까지 가는 거 무리야. 네 몸에 내가 닿는 거 싫겠지만 지금까지 너하고 내가 한 짓이 있는데 겨우 이걸 못 참겠어?”
하은에게 내민 넓은 등이 긴장으로 꿈틀댔다.
그래, 이제 마지막인데. 그리고 그의 말대로 별짓 다 했는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망설이던 하은이 그의 등에 업혔다. 하은을 바싹 당겨 업고 건하는 묵묵히 숲길을 걸었다.
지금 여기서 집까지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20분 남짓이었다.
숲길을 가르는 젖은 바람이 건하의 머리칼을 쓸고 지나갔다. 주위는 이미 어둑했고 앞은 안개로 더욱 흐려졌다. 그러다 문득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안개가 아니라 앞을 뿌옇게 만든 그의 눈에 고인 눈물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겨우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여자의 발에 상처가 날까 봐, 그건 또 못 보겠어서 등을 내어주는 쫄보였다. 한 번도 누구에게 무슨 일이든 져본 적이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또 그러기에 자신은 가진 것이 많았다. 굳이 그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건하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이 여자, 장하은 앞에서 그는 언제나 루저였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녀를 그의 발밑에 두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의 웃음 한 자락에 그는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굴었다. 행복이 일상처럼 삶에 파고들어 지루하다 생각하게 해주고 싶었다.
세상 전부를 장하은 앞에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장하은을 위해서라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어이없이 잃고 싶지 않았다.
하은도 건하도 말이 없었다. 등에 닿은 호흡만으로 하은을 느낄 수 있었다. 호흡을 할 때마다 하은의 말캉한 젖가슴이 그의 등에 닿았다 떨어졌다.
숲을 걸어 나오자 눈앞에 사방이 환할 정도로 불을 밝힌 건물이 버티고 있었다.
하은은 저 집이 감옥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
하지만 이제 곧 저 집이 건하에게도 감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은이 빠져나간 집,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하은이 짐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한 회장이 서슬 퍼런 얼굴을 하고서는 앞을 가로막았다.
“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남편과 아들을 앞서 보내고도 버틴 것은 건하가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킬 게 있으면 결코 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기에 지독하게도 모질게 살아냈다. 때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했지만 그 또한 그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집안의 사내들을 다 보낸 뒤에도 회사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유일한 피붙이 건하에게 무사히 회사를 넘겨주고 남편과 아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는 아직 장하은이 필요했다. 장하은이 건하의 옆에 버티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건하가 남들처럼 아이도 낳고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살아남아 평범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한 회장은 독기를 뿜어내며 하은의 앞을 막았다.
“어리석은 것, 겨우 그딴 게 뭐가 대수라고 약해빠져서는! 너한테 박힌 사주가 아니었으면 네딴 게 감히 이 집안에 발이라도 들였겠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을 제 발밑에 가져다줘도 복을 차버려?”
“액받이가 복이라는 말은 또 처음 들어봐서요. 회장님한테나 해당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주눅 들지 않은 하은의 당당한 말투에 한 회장의 눈 끝이 뾰족하게 일어섰다.
“회장님 허락 따위 필요 없는 줄 아는데요, 그만 비켜주세요.”
하은이 옆을 비켜 나가려고 하자 한 회장이 빠르게 하은의 팔을 붙잡았다. 당황한 흔적이 표정에서 얼핏 보였고 하은을 잡은 손은 힘이 잔뜩 들어가 부들거리며 떨렸다.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감히 내 집에서! 네가 이 집을 나서는 순간 내가 널 가만둘 것 같으냐?”
“놔줘요, 할머니.”
2층 계단을 내려온 건하가 하은과 한 회장의 중간에 섰다. 하은의 팔을 잡고 있던 한 회장의 손을 풀며 건하가 한 회장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이미 늦었어요, 할머니. 그냥 가게 해줘.”
“안 돼, 건하야! 어떻게 그래? 절대 그렇게는 못 해!”
건하를 비켜나며 한 회장이 다시 하은을 잡아챘다.
“너 이대로 가면 우리 건하 죽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 붙들고 사는 게 어떤 건지 네가 알아?”
앞을 가로막는 한 회장을 하은이 냉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제가 알아야 해요?”
“뭐?”
하은의 말에 당황한 한 회장이 머뭇댔다.
“죽든 말든, 그걸 제가 왜 알아야 해요?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동요 없이 하은을 보던 건하의 눈동자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리고 틈을 두지 않고 하은이 송곳처럼 뾰족한 말을 서슴없이 뱉어냈다.
“차라리 죽어버리든가요.”
하은을 잡고 있던 한 회장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며 밖을 나가는 하은을 쳐다보았다.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저 애를 잡아야지, 왜 그러고 있어? 건하야! 얼른 저 애를 잡아와! 절대 못 나가게 어서!”
예전처럼 독기를 뿜어내며 악다구니가 쏟아지지 않았다. 이미 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한 회장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건하를 물고 늘어졌다.
“건하야! 네가 할미 앞세워 가는 꼴 더는 못 본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다시 또 어떻게 감당하라고! 얼른 잡아와! 얼른! 왜 그러고 섰어?”
하은의 뒷모습을 보고 서있던 건하가 힘없이 그의 가슴을 두드리는 한 회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만하세요, 이제 쫌! 제발, 그만해. 할머니.”
건하가 반복하며 날카롭게 한 회장을 노려보았다. 전에는 없던 한 회장을 보는 건하의 눈에 수많은 원망이 들어있었다.
어떤 기대도 없이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건하의 눈이 한 회장을 더 두렵게 만들었다.
***
호텔에서 며칠을 보내고 하은은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들어갔다.
며칠 동안은 빈집을 채우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일회용품으로 버티다가 인터넷으로 그릇과 생필품을 주문했다.
먹는 것은 대부분 인스턴트나 배달용 음식으로 대신했다. 남은 시간을 꽉 채워 보내기 위해 읽을 책도 산더미만큼 주문했더니 손바닥만 한 집은 금세 물건으로 채워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침대 위에도 짐을 쌓아 몸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에서 쪽잠을 잤다. 편하게 누우면 밤새 잠이 오지 않았고 그러다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렸다.
꿈은 오만 가지 상황을 만들었다. 길을 걷고 있던 백건하를 차량이 갑자기 덮치거나 어느 날은 백건하가 피투성이가 되어 그녀를 찾아왔다. 어디에서도 맘 편하게 지낼 수 없었다.
집 근처를 지나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을 보고 들어갔다.
간단한 면접을 보고 바로 채용되어 다음 날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고부터 불면증은 사라졌다. 여전히 악몽은 그녀를 괴롭혔지만 버틸 만했다. 하지만 꿈에서 반복되는 백건하의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는 것이 악몽 같았다. 한 달이 그렇게 지나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완벽한 혼자가 된 삶이 그리 즐겁지도 않았다.
‘사는 건 버티는 거야.’
백건하의 말이 맞았다.
사는 건 버티는 거라고, 하은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미우면서도 백건하가 그리웠다. 밤새 그의 품에서 잠들었던 날도 그리웠다.
가게 문이 열리면서 입구에 매달아 두었던 종소리도 함께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