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62)

33.

건하는 후식으로 나온 과일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과즙이 입 안 가득 들어왔지만 오늘은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방금 먹은 망고는 하은이 좋아하는 과일이다. 하은이 제철 과일보다 열대 과일에 손이 많이 갔던 것을 떠올렸다.

언제든 틈만 나면 곁을 비집고 들어오는 여자였다.

“욕심이라고 하겠지만 더 늦기 전에 증손주 품에 안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은이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그러시는 겁니까?”

“네 엄마도 그 나이에 널 낳았어. 옛날 같으면 자식 두엇은 낳고도 남을 나이지.”

심술궂은 한 회장의 말에 건하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방금 말했듯이 할머니 욕심이세요. 나는 자식 낳을 생각 없으니까.”

건하의 말에 한 회장이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았다.

“어디 말 같지도 않게! 그런 말은 입에도 담지 말아!”

“진짠데?”

한 회장을 보는 건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한 회장은 끓어오르는 화를 잠재우며 차분한 얼굴을 했다.

“잊으셨나 본데 이 집에 장하은 들인 목적이나 분명히 해요. 처음부터 씨받이로 들인 거 아니잖아요! 장하은 살아있는 부적 아니었어? 뭘 그렇게 많이 바라? 부적으로 들였으면 그걸로만 끝내요. 효능 떨어지면 어쩌려고?”

“조용히 해! 누가 들어!”

“누가 들으면 어때서요? 어차피 하은이도 언젠가는 다 알게 될 일인데.”

묵묵한 한 회장의 양쪽 눈썹이 뾰족해졌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다만, 제 사주팔자가 그리라도 되었으니 건하 네 옆에 두는 거지. 아니면 어디 가당키나 해? 제 부모 남은 명줄이 그 아이 사주를 뒤집었다고 하니 좋다고 할지. 어찌 되었든 액받이로 들어와 안주인 자리까지 차고앉았으니 저에게는 잘된 일이겠지.”

건하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가 말하는 사주 같은 것 따위 단 한 번도 믿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액받이라니!

지금까지 할머니는 늘 건하의 옆에 혹시라도 위험이 닥칠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대대로 명이 짧아 집안 사내들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다. 혹시나 건하도 집안 내력으로 비명횡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할머니 마음 편하게 해드리려는 마음에 하은을 집에 들이는 것에 침묵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 불순한 이유로 하은을 옆에 두려 한 자신이, 할머니를 위한다는 것은 하은을 붙잡아두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손자를 위한다는 할머니 욕심으로 아이까지 낳게 한다니.

“네 명줄이 그 애 손에 달렸다 하니 기분이나 잘 맞춰주거라. 도망 못 가게 감시 잘하고.”

한 회장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하의 눈빛이 험악했다. 뭐라고 말을 하려던 건하는 다이닝룸 밖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입을 다물었다.

평소 조용한 메이드의 말소리와 다르게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게 울렸다.

식사를 마친 건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일어날게요, 일이 좀 있어서요.”

건하의 말에도 한 회장은 묵묵히 식사를 했다. 다이닝룸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선 건하는 밖에 서있던 메이드와 마주쳤다.

물을 쏟았는지 복도에 물이 흥건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를 미처 보지 못하고 들어서는 바람에.”

마주친 건하의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메이드가 몸을 굽혀 바닥에 물을 닦아냈다.

돌아서던 건하가 멈칫하고는 돌아서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네?”

혹시 일을 잘못했다고 불똥이 튈까 봐 건하를 보는 메이드의 표정이 안절부절못했다.

“방금, 누가 있었다고 했죠?”

“네? 아, 네. 좀 전에 입구에 있던 아가씨가 저를 보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가시는 바람에 부딪혀서 그만.”

건하의 시선이 밖으로 향하는 문을 응시했다.

“밖을 나갔다고? 누가? 하은이 말입니까?”

“네, 아가씨께서 좀 전에 밖으로 뛰어나가셨어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셔서.”

건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방금 자신이 나온 다이닝룸과 복도 끝에 보이는 현관문을 보던 건하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조금 전 하은이 달려간 현관으로 뛰어갔다.

밖으로 나왔지만 하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건하는 주변을 둘러보다 정문을 향해 뛰었다. 그러다 정원 중간에 멈춰서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정문 보안실로 전화를 걸었다.

“방금 밖으로 나간 사람 보입니까?”

건하의 말에 주변을 살피는 소리와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출입한 사람은 없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됐습니다. 혹시 출입하는 사람 있으면 연락 주세요.”

급히 전화를 끊고 건하는 몸을 돌려 숲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 하은이 갈 곳은 한 곳뿐이었다.

숲을 향해 뛰어가면서 건하는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 하은이 다이닝룸에서 할머니와 주고받은 대화를 들은 것이 아닌지, 그래서 만약에라도 하은이 진실을 알게 되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머리끝이 쭈뼛 일어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숨이 차도록 뛴 것은 처음이다. 숲에 이르렀을 때 목 안에서 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숲으로 들어서자 젖은 풀 냄새가 훅 끼쳐왔다. 사방을 살피는 건하는 자신의 안에 무언가가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소름 끼치도록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하……, 하은아.”

자신의 목소리가 힘없이 들렸다. 건하는 불안정한 눈으로 숲을 응시했다.

더 깊이 들어가 하은의 모습을 찾기 위해 기를 썼다. 태어나면서부터 호흡하는 것처럼 당연하고 익숙했던 숲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익숙한 이곳이 하은을 숨겨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서도 하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더 깊숙이 몸을 밀어 넣자 멀리 잘려나간 나무 밑동 위로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한걸음에 달려가려던 건하가 걸음을 멈췄다.

언제나처럼 뻔뻔한 얼굴을 하고 사람 질리게 만드는 그 냉혈한으로 돌아가 하은의 앞에서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싶었다. 어떤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그녀의 면전에 대고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로 가는 걸음이 너무 더딘 것을 알았다. 마침내 하은의 앞에 섰을 때 하은은 여전히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댄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같이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목덜미의 가는 핏줄이 이따금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려다보니 하은의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뾰족한 돌부리에 찔렸을 것이 뻔한, 아기 발등 같은 하얀 살점 위의 상처에 피가 맺혔다. 작고 어린 이 여자는 상처를 숨기는 데는 도가 텄다. 지금까지 내내 그녀의 상처를 헤집고 드러내는 데에 온갖 힘을 쏟았던 건하는 처음으로 그녀가 지금 받은 상처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숨기기를 바랐다. 다 잊어버리고 전부 묻고 자신의 옆에 있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왜, 이러고 있어?”

건하는 자신의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갈라졌다.

“하은아, 가자.”

미동도 없던 작은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참고 있었던 듯이 하은은 호흡을 한꺼번에 뱉어냈다.

“다른 사람은 그래도 괜찮아. 원래 기대하는 게 없으면 상처받는 것도 덜하니까. 그렇다고 너를 기대하지는 않았어. 나한테 못되게 굴었지만 그조차도 너는 진심으로 보였으니까.”

무릎에 얼굴을 댄 채로 하은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얼굴을 반쯤 든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사람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아무리 나를 떨어뜨려도 나는 끄덕도 안 했어. 내가 부모님을 삼켜버린 악마라고 내 귀에 대고 말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비웃었어. 왜냐면 나는…… 생명이 꺼져가던 엄마가 내 눈을 맞추고 하던 말을 분명히 기억하거든.”

사랑해, 하은아.

분명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지금은 그조차도 희미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가버려서 그때의 기억에 신뢰가 없었다. 가끔은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조차도 잊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십 년도 더 된 그날 일이 진실인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아, 그래.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없는 기억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날 엄마와의 마지막 기억이 자신이 생각해낸 환상 같은 거였다면, 그럼 너무 초라해지는 거였다.

“너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 이름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준 사람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 사람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사람도 전부 너인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태어난 게 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해준 사람이 너였는데. 높은 곳에서 날 떨어뜨려서 다치게 한 사람보다……, 백건하 네가 한 짓이 더 나빠. 차라리 너도 큰어머니처럼 날 때리지 그랬니? 그럼 미안하다는 네 한마디에 나는 쉽게 용서해주었을 텐데.”

하은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높낮이가 없었다. 직선을 긋는 것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숲의 소리마저 전부 들릴 듯이 너무 고요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공허함이 울렸다.

“그게 아니라 나는…….”

말을 꺼내다가 건하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처음 의도는 불순했고 그래서 지금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하은의 발등 위로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눈을 깜박이지 않아도 커다란 눈에 맺혀있던 물기가 한데 모이며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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