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62)

32.

“그래서 뭐 어쩌려고? 이번엔 침대에 아예 묶어 두려고?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다 해보려고? 발정 난 개새끼처럼?”

잔뜩 비꼬는 하은의 말에도 건하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눈 끝이 비틀리듯 위로 솟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움직임이 미미해서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도 괜찮네. 묶어 놓고 네가 발악하는 모습 보면서 즐기는 것도.”

“미친 새끼.”

던지듯 말을 끝내고 하은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비밀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발정 난 개새끼는 장소를 안 가리지? 굳이 침대까지 갈 필요 뭐가 있어? 길바닥에 아무 때나 퍼질러서 싸지르면 되는데.”

하은은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어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고는 이내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던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생생하게 나타나는 건하의 반응을 즐기듯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하은은 블라우스를 풀어헤쳤다.

새하얀 젖가슴의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건하의 숨결이 흐트러지며 목울대가 급격하게 출렁댔다.

“장하은 너, 진짜.”

거칠게 한숨을 내쉰 건하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자신의 재킷을 집어 드러난 하은의 몸을 가렸다.

재킷을 벗으려 몸을 비트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일으켜 세우고 곧장 문을 열고 나갔다.

***

건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하은이 잠들어있었다. 차에 타고 오는 도중, 잠이 들기 직전까지 건하의 속을 뒤집으려 작정한 사람처럼 한껏 비꼬았다. 그럼에도 건하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몇 번 욕설을 하더니 지쳐 잠이 들었다.

도대체 왜……?

갑작스러운 의문에 건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하은을 쳐다보았다.

상처받을 거 다 받아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오랜 일을 새삼 들춰서 굳이 왜?

워낙 어릴 때 당한 사고였고 사고의 충격이 커서 가끔 생각이 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친척들에게 외면당하고 큰집에 들어가 학대당한 시간까지 합하면 이미 충분히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것도 이제는 지나간 일이었다. 울었는지 눈물 자국이 선명한 하은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도대체 왜, 무슨 일이야. 장하은?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몇 번쯤 복잡한 생각을 되짚어내던 건하가 정면을 응시했다. 백미러로 조수석에 앉아있는 강훈의 모습이 보였다.

“강훈아.”

생각 없이 앞을 보고 있던 강훈이 움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장범우 좀 잡아와야겠다. 어디 있는지 알아봐.”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건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잠든 하은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건하는 하은이 자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찡그린 미간을 손으로 가볍게 문질러 펴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며칠 사이 수척해진 하은의 모습에 건하는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희미한 통증을 느꼈다.

이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이 여자의 고통이 왜 자신에게까지 전해지는지, 왜 자신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지 모르겠다.

이유 모를 격한 감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 여자가 고통받는 게 안쓰럽다가도 화가 났다. 생소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솟아오르자 건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를.’

뭉근한 감정이 심장을 관통하며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창백한 하은을 보자 가슴이 저려왔다.

수도 없이 생각했고, 다시 생각해도 사랑이었다.

순간 머리가 띵하니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평소 누구에게든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는 그였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할머니에게조차도 속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의 집안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언제나 그의 곁에 도사리고 있었고 건하는 언제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두렵지도 않았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로 누구에게든 쉽게 곁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얼굴은 본 적도 없어 어떤 기대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자신에게도 부모님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하지만 철이 든 이후로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늘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만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그와 같은 운명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를 이어 지금까지 내려온 죽음의 저주를 건하는 그에게서 끝내고 싶었다. 자신의 아이를 그와 마찬가지로 평생 죽음의 늪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하은은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가 살아온 시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조차 온통 부정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죽음으로부터 도망쳐 장하은 옆에 있고 싶었다. 무슨 짓이든 해서라도 하은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고통이 그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히.

***

넓은 식탁 앞에 한 회장과 건하가 자리했다.

“하은이는 어쩌고?”

“몸살기가 있나 봐요. 일찍 잠들었어요.”

“쯧쯧, 젊은 애가 약해빠져서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한 회장이 수저를 들었다.

오늘 병원에서 퇴원한 한 회장은 다른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노환이 깊어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횟수가 더 늘어나고 있었다.

전 같으면 건하 혼자 두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 웬만하면 주치의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건하의 옆에 붙어있다고 어떤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눈에서 멀어지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건하가 어떻게 될까 봐 전전긍긍, 명줄을 바꿀 수 있다면 자신의 남은 생 모두를 건하에게 주고 싶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하지만 하은을 집에 들이고부터 어디를 가도 전보다 편안한 마음이었다.

미신 따위 믿지 않는다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다 보니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마음이 편하고 안정된 것을 보면 분명 하은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하은을 건하의 옆에 꼭 붙들어놓고 평생 옆을 지키게 해야 했다. 두 번 다시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 일을 겪는다면 그녀도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국물을 들이켜던 한 회장은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건하를 힐끗 쳐다보았다.

“음식이 입에 안 맞는 게냐?”

한 회장의 말에 건하는 대답 없이 수저를 내려놓고 물 컵을 집어 들었다.

“늦게 점심을 먹었더니 입맛이 없어서요.”

“세끼 챙겨 먹는 것보다 뭐 그리 중한 게 있다고.”

“내 걱정은 말고 본인 몸이나 챙기세요.”

무심한 듯 보이지만 전에 없이 걱정해주는 것 같은 건하의 말에 한 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건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이 있는지 건하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한 회장의 걱정과 달리 건하는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평소에 철저한 자기 관리가 몸에 배어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이 체력 관리로, 운동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지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회장이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건하의 아버지인 한 회장의 아들 또한 지금의 건하처럼 자기 관리도 철저했고 건강 체질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걱정하지 않고 잘 지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들은 하루아침에 비명횡사했다.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무리 시간이 오래되어도 가슴이 저렸다. 자식은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에도 언제든 생각이 났고 그럴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아들이 그리울 때면 제 아버지 모습을 그대로 빼어 닮은 건하를 보며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손자인 건하밖에 없었다.

한 회장은 차분한 눈으로 건하를 훑었다. 분명 다른 일이 있어 보였다.

“하은이는 요즘 별일 없고?”

한 회장이 무심한 얼굴을 하고 넌지시 물었다.

“특별한 건 없어요.”

뉴욕에서 돌아온 이후로 강훈이 더 이상 한 회장에게 건하의 동향을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회장은 무슨 수를 쓰든 건하의 일에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마 하은의 큰아버지에 관련된 일은 벌써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청업체 뇌물 수수에 연루되어 장범우 사장을 즉각 파면한 것을 두고 사실 한 회장은 심기가 불편했다.

알고도 모른 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 중에 누구도 청렴결백한 사람은 없었다.

하청업체가 건네는 뇌물을 받는 것을 일종의 관례처럼 여겼고 비단 장범우 사장 한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치면 각 계열사 사장 자리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회장이 알고도 넘어간 것은 크고 작은 비리를 손에 틀어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언제든 그것을 빌미로 압박해서 더 큰 것을 얻어내려는 계산이 작용했다.

그런데 건하가 사전에 한마디 의논도 없이 장범우 사장을 해임했다. 아직 그 자리가 공석이지만 조만간 누가 그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너무 풀어놓으면 만만하게 보고 기어오를 아이야. 아직 여물지 않아 그렇지 보통 여자는 아니지 싶구나.”

하은을 두고 하는 말에 건하가 비웃듯 입꼬리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평범한 보통의 여자였으면 집에 들이셨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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