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노크를 하려다 건하는 망설이며 문을 열었다.
창은 커튼으로 가려 밖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 하은은 창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숲이 보이는 정원을 보는 것을 즐겼다.
중간고사가 끝나지 않아 시험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침대에 누운 하은은 등을 보이고 문 여는 소리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건하는 맑은 수면 위 텅 비어있던 하은의 눈동자를 다시금 떠올렸다.
따뜻하게 맞아주던 침실의 공기도 바뀌어 있었다.
건하는 침대로 다가가 등 돌린 하은의 어깨를 쓸었다. 몸이 가늘게 떨리며 즉각 건하의 손길에 반응했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돌아누운 하은의 이마를 짚었다.
손에 미열이 느껴졌다.
“하은아.”
건하의 부름에도 하은은 대답이 없었다.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목을 조이던 타이 매듭을 풀어 벗어둔 재킷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건하의 시선은 하은을 떠나지 않았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고 건하가 부탁했던 스프가 들어왔다.
메이드를 안으로 들이지 않고 건하가 직접 쟁반을 받아 챙겼다. 그러고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다음 건하는 다시 침대로 다가가 하은의 등에 손을 댔다.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부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뭐라도 좀 먹게 일어나.”
하은이 대답이 없자 건하가 슬쩍 인상을 썼다.
“장하은.”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 끝에 하은이 대답했다.
“귀찮게 좀 하지 마. 먹고 싶으면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까.”
아마 백건하에게 귀찮다고 말한 사람은 장하은이 최초일 것이 분명했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하고 건하는 낯선 단어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이러는 이유, 돌아가신 네 부모님 사고 때문이면 굳이 지금 와서 이럴 필요까지 없잖아.”
뻣뻣하게 경직되는 하은의 몸이 건하의 눈에 또렷하게 보였다. 조용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보다 오히려 화를 내고 물어뜯는 게 나았다. 하은을 자극하기 위해 건하는 머릿속으로 더 센 것을 고르는 중이었다.
예상대로 하은이 일어나 건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뭘 알아?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네 그 좁아터진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다만 나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하면서 너한테 상처 준 사람들 죽일지 살릴지, 어떻게 잔인하게 밟아줄지 그 생각 하겠어. 이렇게 누워있으면 뭐가 해결돼?”
마주친 눈동자 어디에도 비웃음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은 싫었다. 하은은 시린 눈가를 아래로 내리며 건하의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싸우자고 달려들 줄 알았던 하은이 의외로 조용하자 건하는 느리게 숨을 뱉으며 하은에게로 다가갔다. 어깨를 잡기 위해 손을 뻗자 이번에는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건하의 손이 멋쩍은 듯 허공에서 멈췄다. 눈이 사납게 번득였다가 그대로 가라앉았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내일 중요한 시험이라 공부도 해야 하고, 어쩌면 밤새울지도 모르고.”
허술한 변명이라는 걸 알았지만 오늘은 건하가 그냥 넘어가 주기를 바랐다.
건하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뭐라고 할 줄 알았던 건하가 의외로 조용했다. 침대 옆에 서서 가만히 하은을 보고 있던 건하가 돌아섰다.
그리고 의자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다른 말 없이 하은의 방을 나갔다.
***
다음 날 건하는 하은이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처음부터 시험 준비로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는 하은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정말 그녀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게 해주었을 뿐이다.
겨우 그깟 일로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한 그녀가 사실 건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은의 가족에게 사고가 난 경위는 건하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타고 있던 차에서 하은 혼자 살아남은 것이 뭐가 어때서,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고 그녀 잘못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일에 불과했다.
그날 하은과 큰아버지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지은 죄가 있어 하은의 큰아버지가 제 발로 건하를 찾아왔었다.
꽤 오랫동안 하청업체에서 뇌물을 받아 챙긴 것을 알고 적절한 때에 건하가 직접 하은의 큰아버지를 잘라냈다. 형사 고발하려는 것을 하은의 큰아버지라 그래도 그쯤에서 무마하고 넘겼다. 이럴 줄 알았다면 사정 볼 것 없이 곧장 경찰에 넘겼을 것이다. 평소 그답지 않은 깔끔하지 못한 일 처리에 건하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어차피 하은의 큰아버지를 통해 들은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건하도 알아챘다.
원래 뒤가 켕기는 인간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보여주기 때문에 말의 요점만 파악해 대충 상황을 파악한 것뿐이었다.
오늘은 오후에 새로 들어설 복합 쇼핑몰 부지 문제로 천안을 경유해 부산까지 일정이 빡빡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노환으로 입원을 밥 먹듯이 하는 한 회장이 퇴원해 집으로 오는 날이기도 했다. 하은에게 붙여 놓은 직원에게서 이제 막 새로운 보고가 올라왔다. 하은이 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을 거쳐 학교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는 보고였다.
여러 가지 일이 겹칠 때는 일의 우선을 먼저 정해야 했다. 지금 그에게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 건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시킨 안주는 그대로인데 아미 하은은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있었다.
소주를 들어 마지막 잔에 붓자 콸콸 따르는 소리가 청량감 있게 들렸다. 잔이 넘칠 정도로 채워지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하은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쪼로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듯 소주 한 잔이 그대로 하은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몸은 바닥을 길 정도로 피곤한데 정신은 멀쩡했다. 술을 마셔도 어째 취하는 것 같지 않고 그대로다.
밤이 되고 침대에 누우면 잊고 있었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은을 정면으로 보던 눈, 붉은 핏물이 하얀 눈동자를 채우며 생명이 꺼져가던 그 눈.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 잠들면 그날의 일이 몸서리치게 생생하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여기, 한 병 더 주세요.”
얼마 뒤 종업원이 하은의 앞에 소주 한 병을 내려놓았다.
하은을 힐끗 보던 종업원이 고개를 가로젓고 비웃으며 카운터로 갔다.
뻘건 대낮에 혼자 술 마시고 있는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혼자 와서 낮술을 마시는 손님들은 끝이 좋지 않았다. 행패를 부리거나 다른 손님이 오면 괜한 시비를 걸어 시끄럽게 했다.
여자는 잔을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순식간에 한 병을 더 비웠다.
벌써 두 병째인데도 앉아있는 몸은 흔들림 없이 꼿꼿했다.
“여기, 한 병 더요.”
가게 오픈하자마자 재수가 더럽게도 없다 싶었다. 그래도 오늘 첫 손님인데 내쫓아버리면 오늘 남은 장사에 지장을 줄 것 같았다. 종업원은 소주 한 병을 꺼내와 하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섰다.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남자는 학교 앞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여자를 발견한 남자가 곧장 테이블로 향했다.
말없이 의자를 끌어다 앉은 남자는 줄곧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정했다.
여자는 남자가 온 것도 모른 채 조금 전 종업원이 놓고 간 소주로 손을 뻗었다.
앞에 앉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소주병을 가로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의 취기 어린 눈이 남자를 훑었다.
몇 번 느리게 눈을 깜박이더니 상대를 확인한 여자가 배시시 웃었다.
“나한테 위치 추적기라도 달았어? 여긴 어떻게 알고?”
애초에 도망은 팔자에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를 가야 제대로 숨을지 알 수도 없었고 어디에 숨든 지금처럼 백건하가 찾아낼 것 같았다.
“아저씨! 여기 잔 하나 더 주세요. 그리고 소주는 왜 안 갖다 주세요? 시킨 지가 언젠데.”
종업원이 건하의 눈치를 보자 건하는 고갯짓으로 하은의 주문을 묵살시켰다.
종업원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하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 말이 말같이 안 들려요? 아씨, 진짜 여기저기 싹 다 사람 무시하네. 아저씨! 소주 한 병 가져다달라구요.”
“그만해.”
묵직한 음성에 인상을 찌푸린 하은이 건하를 탐색하듯 쳐다봤다.
“여기 술집인 거 몰라? 안 마실 거면 꺼지시든가.”
술기운에 하은의 말투가 대담해졌다. 건하를 보는 눈빛도 평소보다 건방졌다.
“더 마시고 싶으면 장소 옮겨.”
“어디로?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부모님하고 살던 집은 큰아버지가 팔려고 내놨고 너네 집은 그냥 내가 얹혀사는 집이고.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나 살 집 좀 구해줄래?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돈 많아. 어디 빌붙어 살 정도 아니라고.”
서늘한 눈으로 하은을 보던 건하는 테이블 아래로 내려 놓았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병뚜껑을 따서 하은의 앞에 있는 잔을 끌어다 채웠다. 그러고는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선명하게 솟은 목울대가 흔들리며 소주가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건하는 다시 잔에 소주를 따라 입에 털어 넣었다.
하은이 테이블 위의 소주병에 손을 뻗자 건하가 손등으로 쳐냈다.
“넌 그만 마셔.”
그러고는 보란 듯이 잔을 채우고 그대로 마셨다.
술기운에 건하의 머리 위에 조명등이 흔들렸다. 하은은 몽롱해진 정신을 차리려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우스워?”
시비 걸기로 작정한 듯이 하은의 목소리가 삐뚜름했다.
“취해서 흐트러지는 거, 내 앞에서만 해. 그러니까 술 더 마시고 싶으면 자리 옮겨. 네가 원하는 건 다 줄 테니까.”
건하의 말에 하은이 비웃듯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