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62)

30.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건하가 미끄러지듯 하은의 옆에 누웠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건하의 벗은 몸에 하은이 바싹 몸을 붙여왔다.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그에게 익숙한 보드라운 몸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건하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강하게 출렁댔다. 평소였다면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그녀를 덮쳤을 것이다. 그의 몸 아래에 그녀를 가두고 신음이 끊이지 않게 물고 빨았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치고 들어오는 욕구를 애써 누르며 하은을 당겨 품에 안았다.

머리를 가슴에 기대게 하고 그녀의 머리끝에 입술을 붙였다.

“하은아.”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댄 채로 건하의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내가 있어.”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하은의 체취를 깊숙이 빨아 삼켰다.

“언제나, 내가 있을 거야.”

그러니 다시 내 옆에 돌아와, 오늘 아침 수줍게 웃으며 집을 나서던 그 모습으로.

출근길 내내 그를 설레게 했던,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떠올리면서 미소짓게 했던 눈부신 하은이 너를 다시 보게 해줘.

건하는 달래듯이 하은의 어깨를 가만히 쓸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전부를 잃은 것 같은 하은의 공허한 얼굴이 건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

일주일에 한 번, 출근 시간에 맞춰 팀장급 회의가 있었다.

이른 나이기는 하지만 건하는 곧 상무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입사 때부터 초고속 승진으로 주위에 말들이 있었지만 잡음을 단순에 제압할 정도로 건하는 짧은 시간 내에 능력을 입증해냈다. 어차피 후계는 백건하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그룹 내에 돌았지만 사실 형식처럼 치르고 들어온 입사 시험에서 수석 합격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갔을 때에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모로 보면 주변을 압도할 정도로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지만 한 회장의 그늘 밑에서 성장해서 나약한 존재로밖에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환으로 장기간 비행이 불가능한 한 회장을 대신해 대규모 수주를 따내 중동 지역의 거대 자본을 끌어온 이후로 백건하에 대한 시선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게다가 2년 이내 완공을 목표로 시작된 신도시 복합 델타시티의 혁신 기술 사업자로 참여한 것도 백건하의 탁월한 비즈니스 능력 덕분이었다.

때문에 한 회장 후임으로 거론되던 김정택 이사에 대한 대표 추대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기획 회의에 참석한 백건하는 넘쳐나는 기획안 중에서 제대로 된 옥석을 귀신처럼 가려냈다. 그런 이유로 회의에 참석한 팀장들은 백건하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오늘 백건하는 여느 때와 달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생각이 다른 데 가있는 느낌이 들었다. 종이를 넘기는 손도 건성으로 보였고 왠지 오늘 잘못 건드리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서늘함이 공존해 선뜻 말 꺼내기 힘들 정도였다.

덕분에 오늘 회의는 유난히 조용했다.

다들 언제 마치나 눈치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건하가 손가락으로 탁탁, 소리를 내며 서류 뭉치를 두드리자 회의실의 긴장감이 더해졌다.

“서류 검토해 보고 다음 회의 때 다시 의견 나누죠. 특별히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건하의 말에 저마다 고개를 내저으며 건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오늘 회의는 마치죠.”

건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팀장들이 급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사람이 빠져나가고 회의실 문이 닫히는 것을 본 건하가 피곤한 듯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밤새 하은이 악몽에 시달려 건하 역시 제대로 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은과 침대를 함께 쓴 이후로 섹스를 하지 않은 것도 지난밤이 처음이었다.

그에게 하은과의 섹스는 그저 욕구를 푸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물질적으로 채울 수 없는 정신적 빈곤을 채워주는 유일한 행위였고 관계가 끝나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른한 편안함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충만감을 느끼게 했다. 중독된 것처럼 하은을 품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런 변화가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에 없었다.

처음 그녀가 그의 영역으로 들어온 그날부터인지, 아니면 태연을 가장하며 상처를 숨기기 위해 기를 쓰는 게 보여서 호기심으로 눈여겨보게 됐을 때부터인지.

사는 게 흥미로울 것도 없었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아 옆에 가는 것도 한참 걸렸다. 그렇다고 마음을 온전히 내어준 것도 아니어서 옆에 두어도 언제 사라질지 두려웠다.

‘나 좀 숨겨줘.’

겨우 속을 내보인 하은의 그 말에 건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좋아 죽었다.

지금처럼 하은이 웃기까지 그가 들인 공이 얼마인데, 하은은 전보다 더 두껍고 견고한 혼자만의 틀 안에 다시 들어가 박혔다.

어떻게 다시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분노가 더 강하게 타올랐다.

그동안 하은이 받은 학대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은이 짐을 챙겨 그의 집으로 들어온 첫날, 뺨에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그간 힘들었을 하은의 시간들을 말해주었다.

강한 혐오감을 하은의 양부모에게 느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심하던 건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날을 떠올리자 사지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면 목을 쥐어 비틀었을지도 몰랐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건하는 처음 느껴졌다.

살인은 때로 충동적일 수 있지만 용의주도하게 계획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물론 그 용의주도하게 설계하는 기획자가 백건하 자신이면 아마도 완전범죄가 성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둬놓은 작고 소중한 새, 장하은의 친족이라면 섣불리 목을 따기도 불가능했다.

하은이 받았을 고통의 몇십 배, 몇백 배쯤 느끼면서 길고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가는 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순간 잔인한 미소가 건하의 입술 끝에 걸렸다.

하은에게 저지른 잘못을 오래 기억하면서 평생 뉘우치며 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죽는 건 오히려 너무 쉬운 벌칙이니까.

문자 알림음에 건하가 휴대폰 화면을 터치했다.

<오전 시험 끝내고 이동 중입니다. 자택으로 가시는 중인 듯합니다.>

짤막한 문자를 확인하고 건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부터 하은의 뒤에 다시 사람을 붙였다. 전처럼 가까이 붙어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뒤에 사람이 붙었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따돌릴 수 있는 영리한 여자였다.

***

차에서 내린 건하는 곧장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퇴근한 건하를 마중 나온 윤 실장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식사 바로 준비해 드릴까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로 향하던 건하가 윤 실장을 향해 돌아섰다.

“하은이는 저녁 어떻게 했습니까?”

윤 실장은 건하의 물음이 의외라는 표정을 했지만 이내 평소대로 돌아갔다.

“아 네, 뜨는 둥 마는 둥 하시더니 거의 다 남기셨어요. 몸이 안 좋다고 올라가 쉬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돌아서려던 건하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윤 실장을 보았다. 윤 실장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스프 좀 데워서 올려 보내주세요.”

“실장님이 드시려고요?”

“누가 먹든요.”

용건이 끝났다는 듯 건하가 곧장 몸을 돌려 거실을 가로질렀다. 본관과 연결된 별채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는 건하의 뒷모습을 윤 실장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타인에 대한 백건하의 관심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백씨 집안에 들어와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총괄 집사로 승진한 지 올해로 10년째였다.

그동안 몇 번 내부 인테리어를 다시 했고 가구 또한 주기적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거대한 저택의 주인인 한 회장과 유일한 핏줄인 백건하는 도무지 변화라고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한 회장은 꼿꼿함을 유지했고 특유의 서늘함도 여전했다.

백건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가 같은 핏줄이 아니랄까 봐 한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기개와 서늘함이 공존하는 차가운 시선, 여간해서는 속을 보여주지 않아 가늠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에 대한 것도 분명하지 않아 사실 윤 실장도 아직 백건하의 정확한 취향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을 단숨에 바꿔버린 사람이 장하은이었다.

몸집은 작고 가늘었으며 눈에 띄는 것은 손바닥만 한 얼굴을 거의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눈, 속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백건하와 버금갔다.

애초에 백씨 집안의 피라미드 구조는 가장 꼭대기에 백건하가 있었고 대등해 보이지만 한 계단 아래에 한 회장이 위치했다.

하지만 장하은의 등장으로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를 단숨에 차지해버렸다. 요즘 보면 백건하가 장하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눈이 의심될 정도였다.

어쨌든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던 어린 여자가 세상 어렵다는 이 집 남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만으로 이미 특별했다.

도무지 이 집안사람들은 누구도 쉬운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일이든 특별히 좋다 싫다로 분명하게 구분 짓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윤 실장을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좋고 싫음이 분명한 것이 일을 맞추기가 편하다는 것이 윤 실장의 생각이었다.

2층 계단을 오르는 건하의 발소리에 윤 실장은 생각을 멈추고 서둘러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