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62)

29.

집에서 출발하면서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둘러 집을 나서는 바람에 하은이 평소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애착 인형을 챙기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옆이 빈 것 같은 허전함에 하은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하은아! 조금 더 가면 휴게소 나오니까 우리 하은이 좋아하는 장난감 인형 사줄게. 토끼 인형 안 가지고 와서 엄마가 미안해. 아가 조금만 더 참자, 응?”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하은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고속도로를 반쯤 달렸을 때부터 하은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둑할 무렵이라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하지만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차들은 옆을 지날 때도 강한 바람 소리를 내며 속도를 높여 달렸다.

배가 아프다는 하은이 신경 쓰인 아버지는 비상등을 켜고 차선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몇 미터 앞에 도로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공사 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람에 뒤에서 달려오는 차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하은이 타고 있던 차가 한바퀴를 돌며 트럭이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찰나의 순간 하은의 엄마는 위험을 직감하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고는 뒷좌석을 향해 그대로 몸을 날려 하은을 끌어안았다.

쿵,

요란한 굉음과 함께 뒷좌석의 문이 장난감처럼 구겨졌다. 동시에 자동차 문이 구겨지며 날카로운 모서리가 하은 엄마의 몸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하윽.”

하얗게 비워지던 눈을 억지로 뜨며 엄마는 하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가…….”

조금씩 생명이 빠져나가던 엄마의 눈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눈동자가 점점 피로 물들어가던 순간 하은과 마주친 엄마가 흘렸던 눈물도 생생했다.

지금까지 그녀를 혼자 버려두고 간 부모님을 원망하며 살았다.

이렇게 혼자 힘들게 살게 내버려둘 거였으면 차라리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해마다 돌아오는 부모님 기일에는 밖을 떠돌았다.

하은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던 할머니, 살아남은 것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그녀를 보던 차가운 시선들.

이제야 자신을 향하던 그 모든 시선들이 이해가 되었다.

살이 뜯겨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이 동반했다. 곧이어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세게 움켜쥐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또 누구를 잡아먹으려고? 한 회장이 제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손자 놈이 남았지? 아마 얼마 가지 못해서 저 악귀 년한테 잡아먹히겠지? 내가 그 꼴을 꼭 보고 죽어야 하는데.”

큰어머니는 하은을 향해 쉬지 않고 저주의 말을 퍼부어댔다.

하지만 하은은 이제 무감각했다. 거대한 해일이 그녀의 몸을 덮쳐 꼼짝없이 갇힌 기분이었다. 아무리 해도 거친 풍랑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다.

하은이 공허한 시선으로 큰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떤 말도 지금보다 더 그녀를 아프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은에게 지옥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하은아! 큰어머니 말 새겨듣지 말고. 사실 우리가 너한테 해코지할 일이 뭐가 있겠냐? 어차피 그 집안에 들어가 살면 너한테 네 부모님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 우리는 네가 소송만 취하해주면 더는 바라는 것 없다, 너 찾아가는 일도 없을 테고. 오늘 이렇게 널 데려온 것도 도무지 널 만날 길이 없어서였어. 집에 찾아가도 아예 안에는 들이지도 않으니. 어찌 되었든 하은아! 부탁이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너한테 우리 가족 목숨이 달렸어.”

하은은 대답 없이 큰아버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은을 어르고 달래듯 말하는 큰아버지의 눈도 습관처럼 경멸이 들어차 있었다.

지겹도록 모두가 한목소리를 냈다.

부모 잡아먹은 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삐그덕거리는 거실을 빠져나오며 하은이 잠시 비틀거렸다.

한기가 든 것처럼 몸이 벌벌 떨렸다.

***

녹슨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캄캄한 골목의 끝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게 보였다.

몇 걸음 걷다가 힘겨운 몸을 벽에 기대었다.

골목 끝에서 들어오는 차량의 행렬이 가로등처럼 어두운 골목을 밝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아 하은은 잠시 주저앉았다.

타이어 마찰음이 비명처럼 울리며 멈춰 선 차에서 내린 남자의 발자국이 조용한 골목을 울렸다.

하은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희미한 실루엣을 보며 힘없이 눈을 깜박였다.

“하은아!”

뛰어온 남자의 거친 숨이 하은을 일으켜 세웠다.

“다쳤어? 어딜 다친 거야?”

건하가 빈틈없는 시선으로 하은을 이리저리 돌려세웠다.

“이런 씹!”

창백한 얼굴을 한 하은을 보는 건하가 목구멍까지 비어져 나오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였다.

“죽여버릴까?”

하은의 텅 빈 눈동자가 물끄러미 건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백건하는 무엇이든 할 태세였다. 주변 일에 별다른 동요가 없던 남자였다. 시니컬하고 무덤덤한 시선으로 늘 방관자처럼, 하은의 눈에 비친 백건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 이런 눈빛은 낯설다.

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집에 데려다줘.”

“정말 다친 데 없어?”

건하가 파리해진 하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시선을 맞추며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정말이야?”

건하는 믿지 않은 눈을 했다.

하지만 휘청거리는 하은을 잡아주며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건하가 차에 오르자 곧장 출발했다. 뒤를 따르던 차가 줄줄이 골목을 벗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빼지 않고 말해.”

하은이 고개를 돌려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건하의 짙어진 눈을 보았다.

아이를 어르듯, 밖에서 나가 맞고 들어온 아이를 보는 부모의 안타까운 눈빛에 하은이 피식 웃었다.

지금 이런 장면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고작 친구와 싸워 운 일로, 그런 사소한 일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에.

그런데 지금 백건하의 말 한마디, 그녀를 걱정하는 눈빛에 위로받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큰아버지, 회사에서 쫓겨났다고 들었어.”

하은의 말에 건하가 말도 없이 ‘그래서?’라는 표정을 했다.

“네가 그런 거야?”

“할만하니까 한 거야. 고작 그런 이유로 너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건하가 뚫어지듯 하은을 보았다.

속을 보이지 않는 하은이 답답한 건하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소송 취하해달라고.”

“그래서?”

“그게 다야. 다른 건……, 없어.”

하은의 마지막 말이 건하에게는 마치 다른 게 더 있다는 말로 들렸다.

건하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나직하게 욕설을 뱉어냈다.

“소송 취하한다는 말 입밖에도 내지 마. 더 보태서 내가 아주 갈아버릴 테니까.”

분노로 더욱 짙어진 건하의 눈매가 차갑게 돌아서며 정면을 응시했다.

하은과 연락조차 되지 않은 몇 시간, 건하에게 가장 최악의 순간이었고 공포의 시간이었다.

뉴욕에서 하은이 사라졌을 때와 달랐다.

그때는 그가 이미 예상한 일이었고 하은이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그가 예상한 범주 내에 있었다.

죽음의 공포는 건하가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처럼 뒤를 따랐다.

아버지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 이유로 할머니 한 회장은 건하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요소를 전부 걷어냈다. 뾰족한 물건, 그렇지 않은 것이라도 혹시 건하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넘어져 조금만 다쳐도 병원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건하는 죽음에 무덤덤해졌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죽음이 찾아와도 아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지금 그의 옆에 앉은 여자, 하은을 생각하면 심장이 삐걱댔다.

연락도 되지 않고 행방조차 알 수 없는 그 시간이 건하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다시 공포가 되살아나자 손이 부들거리며 눈에 띄게 떨렸다. 들키지 않기 위해 건하는 다른 쪽 손으로 힘껏 쥐고 눌렀다.

삶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던 그가 처음으로 삶에 강한 집착을 느꼈다.

장하은 옆에 있고 싶은 생각, 이 여자를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

옷을 벗기고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정성스럽게 씻겼다.

거품을 내어 하은을 둘러싸고 있는 정체 모를 무언가를 몰아내기 위해 건하는 평소보다 더 세심하게 그녀의 몸에 비누칠을 했다. 손에 젖가슴의 탄력이 잡혀 잠시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건하는 참을성 있게 하은의 젖은 몸을 문질렀다.

거품이 바닥으로 떨어져 말끔하게 씻겨나간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하은은 미동도 없이 건하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여전히 텅 빈 눈을 하고.

하은이 제 입으로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지금처럼 입을 다물어버리면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건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족쳐서 대답을 들을 상대, 하은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그녀의 큰아버지가 아직 남았기에 건하는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다만 평소보다 더 말이 없고 그녀의 눈에 들어찬 공허함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누구보다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었고 그가 주는 행복으로 장하은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꾸 건하의 의도와 다르게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그를 밀어내는 데 혈안이 된 것 같다. 마음을 열지 않아 애가 탔다. 도무지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 그의 인내가 어디까지인지 시험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은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샤워 가운을 집어 들어 벗은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가볍게 안아 들고 욕실을 나와 어둑한 침실의 가장자리에 있는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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